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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중국의 사상/중국사상의 맹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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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상의 맹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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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思想-萌芽期

종교가 없는 것이 특징이라는 중국문화도 그 선민(先民)들이 아직 이지적으로 자연의 변화현상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역시 현상(現象) 저쪽에 의장(意匠)이나 신격세계(神格世界)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통해 변화현상이 주는 경악·공포·불안·긴장을 해소하는 원시 미신 종교의 단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문화의 발상지인 황하유역이 4계절의 순환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같은 현상에 대한 반복관찰과 누적경험을 거쳐 지식이 터득되었으므로 이에 의해 현상법칙(現象法則)의 파악과 미래 예측이 가능해져 의장세계(意匠世界)와 미신종교가 일찍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서양종교가 갖는 추상세계나 철학의 개념 분석이 발달하지 못했고 다만 현실생활과 직결되는 자연현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지식만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들에 있어서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며 가장 완전무결한 존재로서 모든 철학의 출발 근거가 되었다. 따라서 중국은 사변과 논리추구를 거쳐서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본받고 그것을 인사에 적용실천함으로써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었다.

이것이 최초로 구현된 것이 하대(夏代, 기원전 약 2300∼전1700)의 자연사상이다. 당시는 농경사회였으므로 자연의 시서(時序)나 기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나라를 세우는 데 중요한 길은 하늘을 관측하는 데 있다(立國要道在於測天)"가 그 말이다. 또 정착생활,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인간관계와 물질조건이었다. 그러므로 특히 인륜사상과 정치제도가 발달하게 된다. 도의생활(道義生活)을 위한 5전(五典), 물질생활을 위한 6부3사(六府三事), 정치질서를 위한 선양제도(禪讓制度), 사회공익을 위한 대동정신(大同精神), 이런 것들이 상당히 발달했다. 그리고 정치행위에 있어서도 계급의식보다는 책임감이 먼저 존재하여 여론을 신장하고 상형을 도의적으로 시행하여 환·과·독·로·폐자(鰥寡獨老廢者)를 위한 무휼제도(撫恤制度)까지 발달했다. 이리하여 이 때의 정치 사회상은 중국에서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었으며 공자(孔子)가 "요·순을 조술한다(祖述堯舜)"라고 하여 유가철학의 연원이 되기도 했다.

다음 은대(殷代, 기원전 약1700∼전1100)에 접어들면서 이상의 인간 대 자연관계는 인간 대 신귀(神鬼) 관계로 전환되어 관념적 영역이 설정되고 신도 계급신이 생겨 지고신(至高神)으로서 씨족신(氏族神)·조상신(祖上神)이 생겼다. 이에 따라 인간세(人間世)에는 계급의식이 생기고 왕권의 절대성이 강조되었다. 이에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주종관계가 나타나고 씨족간에 이질 대립이 생겨 제사행위는 자기 씨족의 패권만을 비는 것이었으며 사람을 희생으로 공하거나 순장(殉葬)하는 제도까지 생겼다. 이렇게 종교의식이 중시되었으므로 그를 사장(司掌)하는 승려는 신하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대규모의 제사 행위에 많은 기물(器物)이 필요했으므로 고기명(古器皿)의 예술 경지가 개척되었고, 복서(卜筮) 행위가 성했으므로 문자기록이 발달했다. 그러나 하대의 생민 위주는 신귀(神鬼) 위주로 변하여 정치상 악과(惡果)를 많이 저질렀고, 지나친 선민사상으로 타족의 반목을 사서 절멸하고 말았다.

은(殷)을 치고 처음으로 중국의 대통일을 이룬 나라가 주(周, 기원전 약1100∼전600)다. 주(周)는 우선 은의 멸망과 자기의 흥기(興起) 원인을 반성하여 모든 씨족을 포괄 통치할 수 있는 신으로 천제(天帝)를 섬겼다. 그리고 천명사상(天命思想)을 세워 천명은 자연적인 영달과 원천이 되는 외에 생기적(生機的)으로 생성과 조화의 바탕이며 의리적으로 영감, 소명, 위엄한 존재라고 보았다. 이런 천명에 의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생(生)한 것이며 이 생(生)해 놓은 만민을 다스리게 할 천자를 가장 유덕한 자 중에서 뽑아 소임을 다하게 한 것이라고 치자의 무원(巫源)과 임무를 확증했다. 특히 천(天)은 온 천하만민을 사랑하므로 이 천의에 따라 천자는 경천애민(敬天愛民)해야 한다고 하였다. '승천운명(承天運命)'이란 이 뜻이다.

또한 천자의 비행(非行)을 막고 생민(生民)의 천자에 대한 경제력을 갖게 하기 위하여 '천명미상(天命靡常)'을 내세워 실덕(失德)한 천자는 이미 천자가 아니므로 단호히 내치고 유덕자(有德者)를 언제든지 천자 위에 나가게 한다는 역성혁명사상(易姓革命思想)이 생겼다. 그러나 천명의 의도를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천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통하여 선악을 판단한다고 하여 인심(人心)이 곧 천심(天心)이라는 도덕사상을 낳게 되었다. 결국은 인간 자신의 내재덕성(內在德性)을 인정하고 그의 자각과 개발을 촉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초의 타율적인 도덕관념은 이내 자율적인 도덕인격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자연사상, 종교관념, 도덕정신은 춘추전국시대에 일어난 중국 철학이론의 연원이 되었으며 중국문화의 원형이 된 것이다.

<金 忠 烈>

서경(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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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經(尙書)

주왕조(周王朝)의 정치철학을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말한 제일의 자료는 <서경(書經)>이다. <서경>은 고대의 존중하고 숭상해야 할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유가에서는 <상서(尙書)>라고 일컫는다.

<서경>은 <논어(論語)>에서 주왕조(周王朝)의 정치 형태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교과서로서 <시경(詩經)>과 함께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공자(孔子)시대에는 확실히 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대의 이른바 분서(焚書)정책으로 말미암아 <서경(書經)>도 일시 없어졌으나, 그후 전한(前漢)의 학자 복생(伏生)이 벽 속에 감춘 28편의 <서경>을 발굴해 냈고 그후 또 1편이 발견되어 이 29편의 <서경>이 당시의 서체로 개서(改書)되어 세상에 유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금문상서(今文尙書)>라는 것이다. 그후 전한의 경제(景帝) 때 노(魯)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집을 고치다가 금문(今文) 29편을 포함한 58편의 <서경(書經)>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진(秦) 이전의 옛 글자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한다. 전한의 무제(武帝) 때 박사(博士) 공안국(孔安國)이 그것을 한대(漢代)의 문자로 바꾸어 세상에 유포했다. 이 <고문상서> 58편 중 <금문상서>와 합치하는 29편은 공자시대에 이미 존재하던 <서경>의 일부라고 오늘날 믿고 있지만, 다른 <고문상서>는 공자 이후에 제작된 부분이 적지 않다.

<금문상서> 29편 중에서도 주공단(周公旦)에 관련되는 기록인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소고(召誥)', '낙고(洛誥)'(이상을 五誥라 한다)가 가장 일찍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경(書經)>의 각 편은 고대 정치사회에 있어서의 포고문(布告文)과 기타 문서가 사관(史官)에 의해 정리되어 오늘날 전해지는 것이라 하지만, 사실은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儒家)가 정치 이념을 고대의 기록을 빙자하여 만든 부분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주(周)의 봉건정치의 기초를 이룬 정치철학자인 주공단(周公旦)의 일을 기록한 부분이 최초가 되었고, 다시 주의 정치를 미화(美化)하는 여러 기록이 첨가되고, 은(殷)의 기록, 하(夏)의 기록, 요·순(堯·舜)의 기록이라는 것이 차례로 부가된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경>은 유가의 원시 봉건사회의 이념과 꿈을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 중에는 '천(天)의 사상'이 반복되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고 또 '5행사상(五行思想)'의 싹도 보인다.

그렇지만 주대(周代)의 기록으로 제일 믿을 수 있는 직접적 자료인 금문(金文)은 그 금문을 기재한 기명(器皿)의 성립 유래를 설명하는 데 시급하여 정치철학에 대하여 말한 것은 적다. 그러므로 주왕조(周王朝)의 정치 이념을 알기 위해서는 역시 <서경>을 제일의 자료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경(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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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經(毛詩)

공자가 문하의 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 주왕조의 정치적 형태와 민중의 수용 태도를 가르치는 것과 함께 문학·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편집한 것이 <시경(詩經)>이다. 이 <시경>은 전한시대에 제시(齊詩)·노시(魯詩)·한시(韓詩)·모시(毛詩) 라는 네 가지 종류의 책이 나왔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그중의 모시뿐이어서 별도로 '모시'라 하기도 한다. 311편의 고대 민요를 '풍(風)', '아(雅)', '송(頌)'의 3부로 나누어서 편집하였다. 그중 6편은 제명(題名)만 있을 뿐 어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사가 있는 것은 305편이다.

'풍(風)'이라는 것은 각국의 민요를 모은 것이요, '아(雅)'라는 것은 연석(宴席)의 노래요, '송(頌)'이라는 것은 왕조·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의 노래라고 여겨진다. 어느 것이든 고대의 이름없는 민중이나 지식인의 노래이다.

주(周)는 제13대 평왕 때에 도읍을 호경(鎬京)으로부터 하남성(河南省)의 낙양으로 옮겼는데(전770), 그때 일을 노래한 것이 확실히 있다.

주실 동천(周室東遷) 이전, 즉 서주(西周)의 것으로는 제11대 선왕(宣王, 재위 전 827∼전 782) 시대의 노래로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이 <시경> 중의 옛 부분이다. 주왕조(周王朝) 창업의 모습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그것들도 선왕기(宣王期)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조 초기인 문왕·무왕시절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가요를 모은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공자는 고대의 가요를 통해서 당시 정치·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풍(風)'에는 애정의 노래라든가 일하는 노래, 유랑의 노래 등이 많으나, '아(雅)' 또는 '송(頌)'에는 천(天)의 사상에 근거하여 주왕조를 찬양한 것이 있다. 또 천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 믿고 천을 원망하여 천의 권위의 붕괴를 노래한 것도 많다. 천의 권위의 붕괴를 말하는 것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시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주왕조를 뒷받침하고 있던 천(天)의 사상에 대한 무명의 민중이나 지식인의 비판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천(天)은 지정공평(至正公平)하지 못하다는 원성(怨聲)은 바로 주왕조의 권위에 대한 피지배층의 비판이다.

음양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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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陽思想

우주나 인간 사회의 현상은 천(天)에 대해서는 지(地)가 있고, 해(日)에 대해서는 달(月), 남(男)에 대해서는 여(女), 기수(奇數)에 대해서는 우수(偶數), 강에 대해서는 유(柔)가 있는 것과 같이 서로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것을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환원시켜 플러스와 마이너스 교체 또는 소장(消長)의 변화에 의하여 우주 현상 및 인간 사회의 현상을 해석하려는 것이 음양사상이다.

이 음양사상은 상대적으로 사물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과학사상으로서도 우수하고 또 철학으로서도 훌륭한 중국적 지혜이지만, 그 시초가 어느 때였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예컨대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말에 "학(學)하고 사(思)하지 않으면 곧 망(罔)하고 사(思)하고 학(學)하지 않으면 곧 태(殆)한다"(남에게서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사색하지 않는다면 정당한 인식을 얻을 수는 없다. 혼자 사색만 하고 남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나, 또 도가의 시조라고 하는 노자(老子)의 도는 "독립하여 개(改)치 않고 주행하여 태(殆)치 않는다" "도는 독립적 존재이며 동시에 보편적 존재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대구적(對句的)인 설명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설명법은 고대부터 이미 보인다.

대구적 설명 방법으로 사물(事物)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은 사물을 상대적으로 파악하려는 방법이 습성화된 것이다. 그러한 습성이 음양사상으로 귀결되었듯이 상대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은 중국 고대인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음양사상을 근간으로 인간 사회의 현상을 예측하고 판단하려고 한 것이 바로 '역(易)'의 생각하는 방법이다.

역경(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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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經(周易)

고대에는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에 의한 점(占)은 그것들을 불에 구웠을 때 생긴 금(線)을 판단의 재료로 하여 길흉을 점쳤다. 한편 서죽을 써서 길흉을 점치는 방법이 주대에는 행해졌다. 이러한 점(占)의 말이나 점법의 정신을 해설한 것이 <역경(易經)>이다. 주대의 점서(占書)라고 하는 데서 <주역(周易)>이라고도 호칭한다.

서죽(筮竹)을 조작하여 남은 수가 기수(奇數)일 때는 양(陽) 즉(-), 우수(偶數)일 때는 음(陰) 즉 (--)이라 하여 그것을 세 번 반복하여 괘(卦)의 상(象)을 얻는다.- 이냐 -- 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3회 반복하여 얻어지는 조합(組合)은 여덟 가지가 있다. 이것을 8괘라고 한다. 건(乾, 곤(坤), 진(震), 손(巽) 등이 그것이다. 8괘를 알맞게 둘씩 조합하여 조합의 가능 한계인 64괘를 얻는다. 이 64괘 각자의 설명을 괘사(卦辭)라 하고, - 이나 --을 각각 효(爻)라고 하거니와 이 효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효사(爻辭))라고 한다. 이 괘사와 효사를 <역경(易經)>의 경(經)이라고 한다. 경의 해석이나 역(易)의 정신을 표기한 것을 10익(十翼)이라고 한다. 그러한 말들을 신비화시키고 권위를 부여하려고 괘사(卦辭)는 주(周)의 문왕(文王)이 지었고, 효사(爻辭)는 주공단(周公旦)이 지었고 10익(十翼)은 공자(孔子)가 지었으며, 전해지지만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는 아닌 듯하다.

괘사나 효사는 점(占)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생겨 고정된 것이다. 괘사나 효사에 특정한 작자를 생각할 수는 없다. 오늘날 그것들운 동주(東周)의 후기에서, 전국시대(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춰진 것으로 보고 있다.

5행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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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行-思想

5행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의 다섯 개 원소(元素)로 생각된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운행변전(運行變轉)을 말한다. 행(行)이라는 것은 운행의 뜻이다. 목·화·토·금·수의 다섯 요소는 인간 생활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여 본래는 즉물적(卽物的)·유물적(唯物的)으로 다루어진 것이지만 그 5요소가 변전(變轉)하여 만물의 제현상을 생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극히 유심적(唯心的)인 점이 있다.

5행(五行)에 대한 생각은 이미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서 보인다. '홍범'은 은(殷)의 유민(遺民)인 기자(箕子)가 주(周)의 무왕에게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한다. 그 전설이 그대로 믿어질 수는 없어도 '홍범'은 <금문상서(今文尙書)> 29편의 하나이기도 하여, 5행에 대한 생각이 아득한 옛것임을 짐작케 한다. 다만 '홍범(洪範)'에서 말하는 5행은 다섯 개의 요소를 열거하는 데 그쳤을 뿐, 그 운행 변전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전국시대에 5행은 상생설(相生設)과 상극설(相克設)이 생겨 우주나 인간계의 현상을 5행의 상생·상극으로 이해하고 예측하는 사고법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세상에서 이르는 5행사상(五行思想)이다.

5행의 상생(相生)이라는 것은 목(木)은 화(火)를 생하고, 화(火)는 토(土)를, 토(土)는 금(金)을, 금(金)은 수(水)를, 수(水)는 목(木)을 생한다고 생각하는 순환 변전의 이치이다. 상극(相克)이라는 것은 수는 화를 이기고, 화는 금을, 금은 목을, 목은 토를, 토는 수를 이긴다는 것이다. 이 관념적 논리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신비화시키기 위하여 음양2원(陰陽二元)의 생각과 융합을 도모하여 여기에 '음양5행설(陰陽五行說)'이라고 하는 중국 특유의 사고(思考) 논리가 생겼다. 5행설을 신비화하고 관념화하여 음양5행설을 제창한 사람은 맹자보다 조금 후의 사람인 제(齊)의 추연(鄒衍)이라고 알려져 있다.

음양사상과 5행사상은 원래 각각 다른 것이었으나, 추연 이후 더욱이 한대(漢代)에 있어서 5행사상에 음양2원의 사상을 합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이 신비적인 유심론은 바로 현상의 예측이나 역사의 해석에까지 이용되었다. 그 때문에 중국인의 사고는 합리적·과학적인 방향에서 차츰 멀어져 부질없이 관념적인 논리를 공전(空轉)시켜 미신적·주술적(呪術的) 방향으로 더욱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음양과 5행의 사상은 원래는 정치사회와는 관계가 없는 중국민족의 지혜로서 자연발생했다는 점에 하나의 특색이 있다.

예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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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思想

주왕조(周王朝)는 무왕(武王) 사후에 은 민족(殷民族)의 대규모 반란으로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였다. 성왕(成王)은 주공단(周公旦)과 소공석(召公奭)의 등 두 재상에 의하여 겨우 난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그 후 주공단은 성왕으로부터 중원(中原) 통치를 위임받아 낙양(洛陽)에 정착하여 주왕조의 기초를 굳히는 작업에 전적으로 종사하였다. 그 결과 연구된 것이 '예에 의한 통치'였다.

예에 의한 통치라 함은 예의 이름으로 국가의 법제를 서서히 확립시켜 제후나 군신이 각각 분수를 지켜 봉건질서를 보존함으로써 주왕조의 체제를 장기간 지속할 수 있도록 의도(意圖)한 것이다. <주례(周禮)>나 <의례(儀禮)>를 주공단이 지은 것이라고 일컫는 것은 원래 신앙적 전설이긴 하지만, 그러한 전설이 믿어질 정도로 주공단은 예를 정비하는 데 노력한 사람이다.

주공단의 발안(發案)에 의한 예의통치는 드디어 주공단을 신봉하는 유가(儒家)의 사람들에 의해 위로는 국가의 법제로부터 아래로 개인도덕에 이르기까지 세칙이 장기간에 걸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훌륭한 예문화(禮文化) 체계가 형성되었다.

예의 내용에는 갖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국가의 법제나 국가적 제사의 여러 의식(儀式), 봉건 제국간의 여러 예의절차는 예(禮)의 가장 핵심 부분이었다. <좌전(左傳, 春秋左氏傳)>에 "예는 천(天)의 경(經)이다" "예는 나라의 줄기(幹)이다"라고 설명한 것은 주로 그러한 예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또한 민속 습관에 뿌리박혀 사회적인 풍습으로서 부락사회에서 지켜진 것들도 예의 이름으로써 제도화되었다.

<좌전(左傳)>에 있는 "그 예란 백성을 정연(整然)하게 하는 소이(所以)이다" 혹은 <예기(禮記)>에 있는 "예는 사람의 정(情)에 따라서 절문(節文)을 한 것이다" 등의 말은 그러한 예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더욱 구체적인 면으로는 봉건적 사인(封建的士人=君子)으로서의 도덕률이나 가족사회에 있어서의 복상(服喪)의 규정을 시초로 하는 제규율이라든가 개인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역시 예의 이름으로 세세하게 규제되었다.

<좌전(左傳)>에 "예는 사람의 줄기(幹)이다"라 이르고, <논어(論語)>에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다"(예의 정신을 체득하지 않으면 지배자 계층의 우수한 인간으로서 행세를 할 수 없다)라고 한 것들은 그 면을 설명한 말이다.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도 예의 필요를 권장하여 예에 의한 덕치(德治)야말로 정치의 이상임을 말하였다. <논어(論語)>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공자 말씀하시되 정(政)으로 이끌고 형(刑)으로 다지면 백성이 빠져 나가고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그러나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다지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또한 바르게 된다고 하시었다" 정(政)은 이런 경우 법령으로 생각해도 좋은데 법령이나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은 그 속을 숨기려고 한다. 그에 반하여 덕치(德治)와 예교(禮敎)로써 백성은 부끄러움을 알아 정도(正道)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禮)의 본질이 봉건적 정치사회에서 인간교육과 인간개조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공자는 정치에 대처하는 주공단(周公旦)의 사고방식을 높이 평가하여 주공단을 신봉하였다. 그것은 공자의 만년의 말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공자의 "심(甚)하도다. 나의 쇠(衰)함이여. 오래도다, 내 다시 꿈에 주공(周公)을 보지 못한 것이…"라는 탄식은 공자 자신의 정치 이상에 대한 의욕 감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공단에 의하여 시작된 덕치(德治)와 예에 의한 정치의 의미는 공자에 의해서 정치철학과 윤리의 문제가 되었다.

공자는 윤리학자의 입장에서 예에 대해 형식보다도 그 정신을 존중하였다. 다음의 <논어(論語)>의 말은 그것을 뜻한다. "예라 이르고 예라 이름이여, 옥백(玉帛)을 이름일까." 또 공자는 제자인 임방(林放)이 예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물은 데 대하여 "크도다 물음이여, 예는 그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한다"라 답하고 있다. 이것은 "예라고 하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지만 그것은 제의식(諸儀式)에 쓰는 제도구(諸道具)의 일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예는 그 사치를 다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간소한 편이 낫다"고 하는 의미이다.

"예를 알지 못하면 서지 못한다"고 하였거니와 다시 아들인 백어(伯魚)에게 가르칠 때에는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라고도 하였다. 봉건사회의 군자(君子)로서의 인격 완성을 위해서는 자기의 내면으로부터의 요구로서 예라고 하는 도덕률(道德律)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예가 사회의 체제측(體制側)에 입각한 인간육성을 위한 틀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비판의식을 공자로서는 전연 가질 수 없었다. 예를 대사회(對社會)·대인간(對人間)의 도덕률일 뿐이라고만 이해할 때에는 공자의 생각도 수긍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측면에서만 예를 인식하는 것은 본질을 바꿔 만들어서 이상주의적으로 미화(美化)하는 것이다.

국가 체제가 확립되는 데 수반하여 바로 예는 봉건질서를 보장하여 계급적 구별의 분란을 막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예기(禮記)>에 "예는 서인(庶人)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刑)은 대부(大夫)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봉건사회 지배자 계층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민사회의 형벌에 대신하여 준수되어야 할 것, 그것을 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는 도덕률로부터 다시 나아가 계급질서를 보장하기 위한 법의 위치에까지 높여졌음을 알 수 있다.

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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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 예에 관한 경서(經書)로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의례(儀禮)> 혹은 <사례(士禮)>라 일컬어지는 것이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말하는 '예고경(禮古經)'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속에는 17편이 포함되어 있어서 주공단이 지은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주대의 관제(官制)를 기록한 것으로서 오늘날 남겨져 있는 것으로 <주례(周禮)> (<周官>이라고도 일컫는다)가 있다. 이것도 주공단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제작된 것은 전국시대이거나 한대(漢代)인 것 같다. 전한(前漢)의 제7대 무제(武帝) 때 이씨(李氏)가 발견하여 고문학(古文學)을 좋아한 하간헌왕에게 봉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에 관한 이론이나 자세한 세칙을 기록한 것이 <예기(禮記)>이다. 전한의 제9대 선제(宣帝) 때의 예학자(禮學者) 후창(后蒼)의 문하에 대덕(戴德)과 그의 종형(從兄)인 대성(戴聖)이라고 이르는 두 학자가 있어 각기 제례의 '기(記, 제학설)를 집대성하였다. 대덕이 집대성한 것은 85편인데 이것을 <대대례기(大戴禮記)>라 하고, 대성이 집대성한 것은 49편인데 이것을 <소대례기(小戴禮記)>라 한다.

<대대례기> 85편은 오늘날 그중의 일부분만 전해질 뿐이지만 <소대례기> 49편은 그대로 남아 5경(五經)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소대례기> 중에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이라는 두 편이 있고, 송대(宋代)에 그 두 편은 특히 높이 평가되어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4서(四書)가 되었다. <대대례기> <소대례기>는 한대(漢代) 예학자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한왕조(漢王朝)에서는 국가 체제의 확립에 따라 예의 학문이 극히 왕성하였다.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小戴禮記) 셋을 특히 '3례(三禮)'라 한다. '3례'의 이름은 후한(後漢) 때의 대유(大儒) 정현(鄭玄)이 이 세 권의 책에 주석을 붙임으로써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