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불교/한국의 불교〔서설〕
韓國-佛敎〔序說〕 한국의 불교는 1,600년 전인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사상으로서 한국민족과 자라온 중요한 종교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불교는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 특성을 지닌 종교사상이 되어 왔으니,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볼 수 있다. 첫째, 한국불교는 인도나 중국에서 분화되었던 사상을 융합하려는 노력이 컸으며, 둘째는 사상체계를 요약하여 자심(自心)을 밝히는 것을 중시했으며, 셋째는, 위태로운 때를 당하면 불교에 의지하려는 생각이 깊어져, 마침내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사상적 명맥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전래
[편집]佛敎-傳來
고구려(高句麗)는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사신(使臣)과 함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며 2년 후(374) 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또 우리나라 절(寺刹)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百濟)에는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인도승(印度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들어왔다. 왕은 이 외국 승을 환영했고, 궁중에 있게 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그 이전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新羅)에는 제13대 미추왕(味鄒王) 2년(263)에 고구려 승(高句麗僧)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訥祗王:재위 417∼458) 때 고구려 승 묵호자(墨胡子)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또 21대 소지왕(炤知王: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아도는 먼저 가고 시자들은 포교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민승(民僧)이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한 것이며 이런 점에서 쉽게 토착화(土着化)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 그러나 조정의 이차돈(異次頓, 503∼527)의 순교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다.
삼국시대의 불교
[편집]三國時代-佛敎
고구려의 불교는 한마디로 학술 외교불교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학승 등은 중국에 가서 경전을 배우고 연구함을 구법(求法)의 최상목표로 하였으며, 중국의 승려를 지도할 수 있는 고승도 있었다. 그 대표로 장수왕(재위 413∼491) 때 태어난 승랑(僧朗)을 들 수 있다. 승랑은 중국에 들어가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신삼론종(新三論宗)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했다. 승랑은 중국 사상계를 지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양무제(梁武帝) 11년(512)에 우수한 학승(學僧) 10명을 지도하였으며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고구려 학승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건너가 불교학술과 예술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즉, 최초의 전교자인 혜편(惠便)을 위시해서 혜자(惠慈), 불교 예술가인 담징(曇徵), 일본 삼론학의 시조인 혜관(惠灌)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삼국통일 후 신라불교를 일으킨 고구려 승 혜량(惠亮)도 들 수 있다.
백제의 불교는 예술·외교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성왕 30년(552)에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래시켰으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특히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는 고승들과 불공(佛工)들을 보냈고, 30년에는 일본왕이 고승 파견을 요청하여 일라(日羅)를 파견하였다. 그후 무왕 3년(602)에 관륵(灌勒)이 각종 역서(譯書)를 가지고 가서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백제는 일본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으며 아울러 탁월한 불교예술을 진작시켰다.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경향이 강하여 진흥왕(眞興王) 이후 신라는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국민을 단합시켰던바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팔관재회(八關齋會), 백고강좌(百高講座), 9층탑 건립(九層塔建立), 사천왕사 건립(四天王寺建立) 등이 있으며, 특히 세속오계(世俗五戒) 등은 모두 불교정신에 의해 민족을 단합하고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다.
팔관재회는 불교를 배우기 위한 범국민적 집회였으며, 백고강좌는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의 호국적인 사상을 익히는 법회였으며, 황룡사 9층탑 건립은 자장(慈藏)이 중국에 가서 본국의 진성여왕의 여성으로서의 연약한 면을 보좌하고 국가 권위를 세울 것을 암시받고 돌아와 인접 9개국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9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또한 불교를 보호하는 동서남북의 사천왕(四天王)이 호위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원광(圓光)의 세속오계는 호국의 표준이념이 되었다. 또한 원승(圓勝), 혜숙(惠宿), 혜공(惠空) 등 많은 고승들이 나와 능히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길러 왔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편집]統一新羅時代-佛敎
통일신라시대 불교를 크게 3분하면, (1) 전성기
――
문무왕(재위 661∼681)에서 혜공왕(재위 765∼780) 때까지로서 불교문화의 극치를 이룬 시기 (2) 침체기 ――
선덕왕(재위 780∼785) 때부터 헌덕왕때까지로서, 불교(佛敎)가 국가사회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 시기 (3) 선법전래기(禪法傳來期) ― 흥덕왕 원년(826)에서 신라멸망기(935)까지로 나눌 수 있다.
전성기 시대에는 많은 고승들이 속출하였으니 그 대표적 인물로는 원효(元曉)·의상(義湘)·원측(圓側) 등이 있다. 원효(元曉, 617∼686)는 45세때(文武王 원년:661) 의상(義湘)과 함께 당에 가던 도중 진법을 체험하고 도중에 돌아와 저술과 교화에 힘쓰다가 신문왕 6년(686)에 입적하였다. 그의 저술은 240여 권이라는 방대한 규모이며 오늘날 20부 22권의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중심사상은 원융회통(圓融會通)으로 모든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서로 상통하는 원리를 구현시킴이 중심과제이다.
의상(義湘, 625∼702)은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당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의 문하에서 학명을 떨치고, 문무왕 11년(671)에 돌아와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여 화엄교학의 중심도량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3000여 제자가 운집했으며 그 중에 뛰어난 제자 10인을 상문10덕(湘門十德)이라고 했다. 원효는 교화·연구·저술에 힘쓴 반면 의상은 후진교육·교단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원측(圓測, 613∼696)은 왕손으로서 15세때 당에 유학하여 고승들에게 유식론(唯識論)을 배우고 범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당 태종에게서 도첩(圖牒)을 받고 유가론(瑜伽論)·유식론(唯識論)을 강의했다. 그는 규기(窺基)의 전통적 유식사상보다 앞선 대가였다. 이 밖에도 성덕왕(재위 702∼764) 때 혜초(惠超), 경덕왕(재위 742∼764)때 대현(大賢)·진표(眞表), 고구려 출신 승려 보덕(普德)·혜량(惠亮) 등 고승들이 있었다.
고려의 불교
[편집]高麗-佛敎
고려시대 불교는 5교9산(五敎九山)과 5교양종(五敎兩宗)으로 나눌 수 있다. 신라 원효 이후의 불교 교파는 11종이 전하였으나, 서로 융통화회하다가 고려조에 와서 11종이 6종으로 정리(整理)되었다. 고려 숙종(肅宗) 6년(1101)에 세운 대각국사(大覺國師, 1055∼1101) 묘지(墓誌)에 보면 6종에는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 등이 있는데 이 중 선적종을 선종(禪宗)이라 하여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선종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면 신라 후기에 20여 개 선파(禪派)가 개창되었던 것을 나말 여초(羅末麗初)에 정리하여 9산(九山)이라고 불렀다.
9산(九山)은 가지산(迦智山)의 도의(道義, 804∼880)선사, 실상산(實相山)의 홍척(洪陟, 828∼888) 선사, 사굴산의외 범일(梵日, 810∼889)선사, 사자산(獅子山)의 철갑선사, 희양산(曦陽山)의 진감(眞鑑, 774∼850)선사, 봉림산(鳳林山)의 현욱(玄昱, 787∼868)선사, 수미산(須彌山)의 이엄(利嚴, 866∼932)선사 등을 말한다. 이리하여 6종(六宗) 혹은 5교9산(五敎九山)으로 통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각국사(大覺國師) 이후에는 5교 9산이 5교양종(五敎兩宗)으로 바뀌었다.
5교양종이란 고려 원종 때(1206)부터 이조 태종(1418) 때까지의 각 종파를 총칭한 것으로 사실상 7종이 성립된 시대이다. 대각국사가 송(宋)나라에 다녀온 후 중국에는 교종(敎宗)의 한 종파였던 천태종(天台宗)이 우리나라에서는 선종(禪宗)에 가까운 불교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5교(五敎)도 개명되었으니 다음과 같다. 계율종(戒律宗)→ 남산종(南山宗), 법상종(法相宗) → 자은종(慈恩宗), 원융종(圓融宗) → 화엄종(華嚴宗), 법성종(法性宗) → 중도종(中道宗), 시흥종(始興宗) 등이다.
대각국사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융통하되 교종의 입장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는 선(禪)의 입장에서 선·교(禪·敎)의 일치(一致)를 제창함으로써 이 두 사상이 양종(兩宗)의 대조적 선풍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 불교의 특기할 만한 사상가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인바 한국의 독자적 선(禪) 사상을 개발하여 조계종을 중흥하고 새로운 면목을 세웠으며, 그후 혜심(慧諶)·진각(眞覺) 등 16국사(國師)가 사자(師資) 상승(相承)하였다. 고려 말(高麗末)에는 태고(太古) 보우(普愚)가 9산선종(九山禪宗)을 통합(統合)하였으니 이 점에서 선계의 모든 스님들은 태고(太古)에 맥(脈)을 댔었다. 이후의 사계(嗣系) 문제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의 불교
[편집]朝鮮-佛敎
고려 말기의 불폐(佛弊)로 인해 조선 시대에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이 강조되어 많은 법난을 겪었다. 이에 따라 한창 번성하고 있던 불교의 모든 종단이 위축 일로를 걷게 되어, 마침내 5교양종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세종(世宗) 6년(1424)에 7종을 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바꾸니 이것은 왕명에 의한 것으로 조계종·천태종·총남종(摠南宗)을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폐합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다.
조선에도 많은 고승이 속출하였으니 무학(無學) 자초(自超, 1327∼1405)를 비롯하여 호불론(護佛論)의 하나인 현정론(顯正論)을 제시한 함허(涵虛)·기화(己和, 1376∼1433) 등이 있으며, 명종(明宗)때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도움으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는 불교 부흥의 꿈을 실현시키려 했으니, 그는 판선종사(判禪宗師)가 되어 도승법(度僧法)과 승과(僧科)를 시행한 결과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등용되어 각각 선·교 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어 인재를 발굴, 억불정책 속에서도 계속 법맥(法脈)을 유지시키며 발전시켜 왔다.
한국의 조계종
[편집]韓國-曹溪宗
조계종이란 명칭은 6조(六祖) 혜능(慧能)이 거처했던 지명에서 연원한바, 지눌(知訥)이 육조단경(六祖壇經)에 힘입어 비록 6조(六祖)하에 5가7종(五家七宗)이 분리된 이후이나, 범종파적인 이름으로 조계종이라 한 것이다. 그 속에는 멀리 6조에 연원하는(遠師曹溪) 한국 독자적 선사상(禪思想)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보조국사 지눌(知訥) 자신이 선과 교를 아울러 공부하였듯이 반드시 선종에 매여 교종의 경전을 무시하지 않은 점이 특색이다.
특히 일제시대(日帝時代) 초기에 한국불교를 원종(圓宗:曹洞宗)의 일종으로 바꾸어 한국적 특색을 달리하려 할 때 한용운(韓龍雲)·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이능화(李能和) 등은 한국불교가 원종이 될 수 없다고 하며 태고(太古) 이후 임제종맥(臨濟宗脈)을 받은 종파라고 밝혔다. 이때부터 더욱 한국불교는 반드시 조계종이어야만 하고 또한 조계종은 반드시 임제종(臨濟宗)이어야만 하는가의 문제점이 대두되어 한국불교 종지선양에 중대한 과업을 안겨주고 있다.
<韓 基 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