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신라의 미술/고신라의 건축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고신라의 건축

[편집]

古新羅-建築

고신라의 건축물은 돌을 제외하고는 남은 것이 없다. 기록에 의하면 고신라 초기부터 사원(寺院), 궁전(宮殿), 성곽(城廓), 탑파(塔婆), 사묘(祠廟) 등 많은 건조물(建造物)들이 있었으나, 내구성이 있는 석조 이외의 건조물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그 나마도 유지(遺址)가 보존되어 있는 예도 많지 않다. <삼국유사> 3권 원종 흥법조(原宗興法條)에는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 수법동(竪法憧) 현범경(懸梵鏡) 용상석도(龍象釋徒) 위환중지복전'이라 되어 있어 사탑의 건립이 많았음을 여실히 말하고 있음을 보아 불교건축물은 물론 여타의 건축물도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잠시 기록을 통하여 주목되는 건축물을 지적한 다음 유지(遺址)를 통하여 그 개요를 살피고자 한다.

첫째, 궁전으로는 금성(金城)과 월성(月城)을 들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금성은 혁거세왕 21년(전 37) 토축(土築)의 성을 쌓고 동왕 26년(전 32)에는 궁실을 지었으며 왕성으로 파사왕(婆娑王) 22년에 둘레 1023보의 월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금성내 궁실에 관하여는 그 이상 기록이 없으나 사방에 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일성왕(逸聖王) 5년의(138)에는 정사당(政事堂)을 두었다고 하였다. 월성의 당초의 궁전 규모는 알 수 없고 고신라기의 건축으로는 점해왕(沾解王) 3년(249)에 남당(혹은 都堂)을 지었고 무열왕(武烈王) 2년(655)에 고루(鼓樓)를 세웠다는 기록뿐이나, 남문(南門), 북문(北門), 귀정문(歸正門), 인화문(仁化門) 등의 문을 비롯하여 제법 규모가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 월성 내에는 수개 주초(柱礎)가 노출되어 있을 뿐 상당한 유구(遺構)가 지하에 매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둘째로 성곽은 십여 처의 축성기록을 볼 수 있으나 현재 확실한 예는 명활성(明活城), 서형산성(西兄山城), 남산성(南山城), 부산성(富山城) 그리고 월성뿐이다. 통일기에 들어서 개축, 증축 등이 있었을 것으로 어느 정도의 변경도 상상되나 석축(石築)으로 아직도 아치형의 성문을 남긴 공이 있다.

셋째, 사묘는 남해왕(南解王) 3년(6)의 시조묘 건립과 소지왕(炤知王) 9년(487)의 신궁(神宮) 건립을 들 수 있으나 모두 규모나 양식에 관하여는 알 수 없다.

다음 불교건축으로 사원과 탑파를 들어야 하겠다. 법흥왕(法興王) 15년(528) 불교 홍통(弘通) 이후 고신라기에만 도 홍륜사(진흥왕 5년, 544), 황룡사 (진평왕 6년, 584), 기원사(祇園寺), 실제사(實際寺-진흥왕 27년,566), 대승사(大乘寺-진평왕 9년,587), 삼랑사(三郞寺-진평왕 19년,597), 분황사(선덕왕 3년, 634) 등 대찰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고 따라서 많은 탑파(塔婆)가 건립되었으리라는 점은 삼국유사의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塔塔雁行)'의 기록을 미루어도 가히 정황을 짐작할 만하다.

탑파도 저 유명한 황룡사의 9층 목탑지를 비롯, 분황사 석탑이 현존하고 또 <삼국유사> 4권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는 양지라는 신승(神僧)이 있어 '우상조전조일소탑'이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고신라기에 이미 목조, 전조(塼造), 석조의 석탑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고신라기의 건축은 기록으로 보나 현존 유적으로 보나 매우 빈약한 감이 있다. 그러나 현존 유물을 통하여 또는 기록에 나타난 바로 보면 상당히 의욕적인 건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술의 후진은 백제의 장인을 청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였지만 그러는 사이에 연마도 이루어졌음을 보게 된다.

황룡사지

[편집]

皇龍寺址

황룡사는 신라 제일급의 대찰이다. 창건설화(創建說話)에 의하면 신궁을 지으려 하였으나 황룡(黃龍)이나타나므로 신궁건축의 계획을 바꾸어 황룡사를 지었다는 호국·호법의 신인 용과의 특이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 우선 기록에 나타난 바 각종 건축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진흥왕 14년(553) 창건. ② 진흥왕 27년(566) 일차 공사완성 ③ 진흥왕 30년(569) 주위장우(周圍墻宇) 완성 ④ 진흥왕 35년(574) 장륙상(丈六像) 조성 ⑤ 진평왕 6년(584) 금당 조성 ⑥ 선덕왕 14년(645) 9층탑 조성 ⑦ 경덕왕 13년(754) 종 조성(造成)

이상으로 보아 진흥왕 창건 이래 선덕왕대 탑의 완성까지는 90년의 장시일이 경과되고 있다. 다음에 현존 유지를 따라 규모를 보겠지만 황룡사는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탑과 장육상(丈六像)은 신라의 3보로 숭앙을 받아왔다. 국가적인 행사나 우환이 있을 때는 이곳에서 고승을 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였고 왕의 친행예불의 기록이 이곳 이외에는 없다. 왕조가 바뀌어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현종 3년(1012)에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보호에 힘썼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난으로 말미암아 회진되고 말았다.

유지(遺址)에 의하여 황룡사의 규모를 보면 경내는 약 2만평으로 추정되며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講堂)이 남북선상에 서고, 구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동서로 회랑을 돌려 내정에 금당과 구당을 두는 일탑식(一塔式)가람제도(伽藍制度)로서 황룡사지는 그 유지가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사지라고 하겠다. 회랑으로 형성되는 내정(內庭)에는 금당 좌우와 중문 좌우에 각각 건물자리가 있고 탑의 기단 4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1976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발굴 조사의 결과 전면 10간, 측면 4간의 큰 강당자리가 비로소 밝혀졌다. 주위에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발굴에 따라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국가적 대찰에 부끄럽지 않는 대황룡사의 모습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

'철반이상(鐵盤已上)'이라는 표현을 보면 상륜(相輪)은 금속제이었을 것이다. 탑지 북쪽에는 금당지가 있어 정면 9간, 측면 4간의 대건물이었음을 알겠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불대좌(佛臺座) 3기가 있어 장륙존상(丈六尊像)이 양 보살과 함께 이곳에 안치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 솔거(率居)의 그림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 북방에는 정면 10간, 측면 4간의 대구당이 있었으니 지금도 2·3개를 제외하고는 초석이 원형대로 남아 있고, 바닥에는 부전(敷塼)이 중앙에서 동으로 치우쳐서 석조가 남아 있다. 또한 동서 양측에는 회랑지(廻廊址)가 있어 고신라기의 대찰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흥륜사

[편집]

興輪寺

진흥왕 5년(544)에 지은 절로 기록에 의하면 탑·금당과 남문, 그리고 좌우회랑과 경루(經樓)가 있었다. 금당에는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있었고, 동서 벽에는 십성(十聖)의 상을 그렸으며, 금당 안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은 정면 7간, 측면 4간의 금당 자리에 동서 약 50m, 남북 약 30m, 높이 약 2.4m의 토단(土壇)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사지에서는 신라시대 최대의 방형(方形) 문양전(紋樣塼)이 발견된 일이 있어 가람(伽藍)의 웅대하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분황사

[편집]

芬皇寺

현존한 불교건축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분황사(芬皇寺) 석탑이다. 분황사는 선덕왕 3년(634)에 완성한 절이다. 이 절에는 나대(羅代)의 명승 원효(元曉), 자장(慈藏) 등이 주석(住錫)했고 솔거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벽화도 있었다. 또 경덕왕 14년(755) 장인(匠人) 강고내미(强古乃未)가 주성한 무게 30만 6천 7백근의 약사동상(藥師銅像)이 있었던 절도 이 절이었다. 사역은 축소되고 황폐되어서 원모(原貌)를 찾기 어렵고 오직 석탑과 당간지주(幢竿支柱)만이 남아 있다. 석탑은 넓은 토석기단(土石基壇) 위에 안산암(安山岩) 석재를 전(塼)과 같은 모양으로 가공하여 건조하였다. 기단 위 4우(四隅)에는 석사자를 배치하고 초층 탑신 사면으로 두 개의 석비(石扉)가 달린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감실 좌우에는 일구식(一軀式)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 감입(嵌入)하였다. 이 탑의 외형은 전탑과 같으나 사용된 탑재(塔材)는 석재를 사용하였고 다만 전탑 건조와 같은 수법을 썼기 때문에 옥개석(屋蓋石) 받침과 낙수면은 모두 층단(層段)을 이루어 전탑 특유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석재를 써서 전탑과 같은 수법으로 건조한 탑을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탑은 현재 3층만을 남기고 있다. 원래는 7층 내지 9층은 되었으리라고 생각되나 일찍이 퇴락되었던 것을 이조시대에 사승(寺僧)의 잘못으로 다시 허물어졌고 1915년 일인(日人)들이 다시 해체수리할 때 변모시켜 남은 탑재는 탑 뒤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일인들의 수리 당시 제2층과 제3층 사이에는 석함(石函)이 발견되었고(석함은 경주박물관에 진열), 함(函) 속에서 은제합(銀製盒), 옥, 동제가위, 은제 침통(針筒), 금제 바늘, 금령(金鈴), 향목(香木), 고전(古錢) 등이 발견되었다. 이 석탑은 <삼국유사> '양지(良志)'의 전탑 축조의 기록으로 보아 이 석탑에 앞서 전탑이 존재하였음을 알리고 그 전탑을 모방하여 전탑과 같은 수법의 석탑을 건조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여하튼 삼국시대 고신라의 유일한 탑파라는 점에서도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고신라의 성곽

[편집]

古新羅-城廓

성곽으로 고신라기의 유모를 보여주는 것은 월성(月城)과 남산성이라 하겠다. 그중 남산성은 경주 남방의 영산인 남산(일명 金鰲山)에 축조된 산성이다. 이곳에 성을 쌓은 최초의 기록은 진평왕 13년(591)의 일이고 그 후 문무왕 3년(663)에는 장창(長倉)을 지었으니 <삼국유사>에는 "왕이 즉위하자 남산에 장창을 만드니 길이가 50보요 너비가 15보이다. 우창에는 쌀과 병기를 저장하고 천은사 서북산 위의 것이 좌창이다(王初卽位置南山長倉長五十步廣十五步貯米穀兵器是爲右倉天恩寺西北山上是位左倉)"라고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삼국사기>에는 "남산 신성에 장창을 만들다(作長倉於南山新城)"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남산신성(新城)'이라고 한 점이 주목된다. 일찍이 1935년 이래 남산 기슭에서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6기(六基)가 발견되어 주목받아 왔거니와 이 비의 비문은 '신해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남산신성'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신해년'은 곧 진평왕 13년 신해년으로 추정되어 '남산신성'의 명칭은 이때부터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 문무왕 19년(679)에 남산성을 증축했다 하나 이 성은 퇴락이 심하여 약 2m 높이의 석성만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높이 약 23cm 길이 약 50cm의 가공석(加工石)으로 쌓아 올렸고 장창은 3개소에 그 유지가 남아 있다. 이 이외에도 실성왕(實聖王) 이전부터 이미 있었고 진흥왕 15년(593)에 개축한 주위 3천 보나 되는 명활산성(明活山城)이 있었으나 이도 퇴락되어 일부에서만 자연석으로 축조한 석성을 볼 수 있다. 또 고신라기에 축조 내지 개축한 산성으로 진평왕 15년(593)에 개축한 서형산성(둘레 2천 보), 문무왕 3년(663) 축조한 부산성(둘레 4천 6백척)이 있으나 모두 퇴락되었고 일부에서 남산성이나 명활산성과 같은 수법임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첨성대

[편집]

瞻星臺

<삼국유사>에는 선덕왕 때의 일로, "이왕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是王代鍊石築瞻星臺)"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축조연대를 알 수 없다. <문헌비고>(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나 동사년표(東史年表)에는 선덕왕 16년으로 기록되었으나 그 근거를 알 수 없다. 아마도 <삼국유사>의 '시왕대(是王代)'를 근거로 그 졸년으로 기록한 듯하다. 첨성대의 형태는 밑에 방형 이중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작은 가공석재로 평면원형으로 쌓되 밑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상부에서는 직선으로 올라간다. 정상에는 장대석으로 이중의 井자형 석재를 얹었다. 27단으로 구성된 전체의 높이 30척이다. 이 첨성대에 사용된 석재는 366개이며 남면 중앙에서 약간 위로 방형 창구가 있어 이곳으로 내부에 들어가 다시 정상까지 오르내리게 되었던 모양이고 정상에는 따로 시설이 있어 그곳에서 성숙의 운행을 관측하여 길흉을 판단하였던 듯하다. 첨성대를 축조한 석재는 처음부터 첨성대의 외형이 설계되어 그 설계에 맞추어서 가공된 듯하며 외형은 매우 부드러운 곡선을 나타내고 있다. 이 첨성대가 현존한 동양최고의 천문대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당초 설계에 있어서도 상당한 배려와 연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