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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신라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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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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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삼국의 하나로 7세기 중엽 우리 한반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왕조이다. 국호 신라·신로(新盧)·시라(斯羅)·서나(徐那:徐羅我)·서야(徐耶:徐耶我)·서라(徐羅:徐羅我)·서벌(徐我) 등은 모두 사로(斯盧) 즉, 마을[邑里]의 뜻으로 된다.

처음에는 경주 중심의 조그만 부족국가였으나, 북으로부터 유이민(流移民)을 받아들이면서 부족연맹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왕도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이 교대하여 나왔던 것이다. 그 뒤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왕(奈勿王) 때부터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고대 국가로서의 기초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신라사를 시대 구분하면, 내물왕 이전의 시기를 제1기, 내물왕부터 제22대 지증왕까지(356~514) 제2기, 제23대 법흥왕(法興王)부터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까지(514~654)를 제3기,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부터 제36대 혜공왕(惠恭王)까지(654~780)를 제4기, 제37대 선덕왕(宣德王)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까지(780~935)를 제5기로 잡을 수 있다. 제2기 초인 내물왕 때는 왜(倭)의 침입을 자주 당하여 399년(내물왕 44)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고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제2기 동안에 성장을 한 신라는 제3기에 들어서면서는 520(법흥왕 7)에 율령(律令)과 관제(官制)가 반포되고, 528년에는 불교를 공인하면서 국가 체제을 크게 정비하였다. 다시 532년에는 낙동강 하류 지역에 진출하여 금관가야(金官伽倻:본가야는 김해 지방)를 정복하였고,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하였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진보하여,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하였다. 551년(진흥왕)에는 백제와 더불어 북진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553년에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창녕비(昌寧碑:昌寧)·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황초령비(黃草嶺碑:함남 함흥)·마운령비(摩雲嶺碑:함남 이원)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라의 팽창은 여·제(麗濟)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隨)와 그 뒤의 당(唐)과 연맹을 맺은 신라는 드디어 661년(태종무열왕 8)에 백제를 멸하였다. 또 수차에 걸쳐 남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668년(문무왕 8)에 이를 쳐서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에 당은 여·제 양국 지역을 점유(占有)하고자 하여 다시 신라와 충돌하였으나, 문무왕은 676년 이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구와 원산만 이남의 지역을 확보하였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제4기 중의 신라는 안으로 9주(九州) 5소경제(五小京制)를 실시하여, 백제 전부와 고구려 일부를 포함한 전국의 행정 구역의 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당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져서 성당문화(盛唐文化)가 물밀듯이 들어와, 신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내부에는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제5기 150년 간에는 20명의 왕이 교체되었으며, 왕위의 쟁탈을 위한 중앙 귀족간의 다툼이 심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에는 도둑이 일어나고, 특히 해적(海賊)이 성하여 이를 토벌하고자 일어난 장보고(張保庫)는 오히려 해상권을 쥐고 흔들었다. 이와 같이 안과 밖으로 파란이 심하였으며, 892년(진성여왕 6)에는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웠고, 901년(효공왕 5)에는 궁예(弓裔)가 후고구려를 세워, 후삼국시대가 출현하였다. 그 후 개성과 예성강 지역에서 성장한 왕건(王建)이 궁예를 내몰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니 이가 곧 고려의 태조(太祖)이다. 신라는 이에 항복하여(935) 완전히 망하고, 고려는 후백제까지 아울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정치·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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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이전의 관제(官制)는 골품제도(骨品制度)를 바탕으로 한 귀족 연합의 전통 위에 형성되었다. 법흥왕 때에 설치된 상대등(上大等)은 귀족을 대표하는 지위에서 국사를 총리했다. 그러나 신라의 중앙관제가 완성되기는 통일기에 들어와서였다. 통일기의 관제도 물론 삼국시대부터의 전통대로 골품제도에 토대를 두었으며, 따라서 상대등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긴 하였으나, 삼국의 통일에 따라 확대된 영토와 국민, 개인적인 세력이 더욱 성장한 귀족 등을 하나의 통일된 조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가정치 기구의 확대 정비가 필요하였다. 또한 귀족 연합적인 형태에서 점차 왕권이 전제적인 방향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에 당나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보다 많이 섭취할 수도 있었다. 이미 삼국시대 말기인 651년(진덕여왕 5)에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집사부(執事部)가 설치된 것은 신라의 관제가 크게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집사부는 귀족 연합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는 상대등과 서로 맞서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당제(唐制)의 채용은 통일 이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景德王) 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신라는 그 영토의 확장에 따라서 변천되어 갔는데, 지증왕 이 후에는 주요한 곳에 주(州)를 두고, 그 장관으로 군주(軍主)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 군주 밑에 여러 성주(城主)가 있었다. 삼국시대 신라의 영토는 낙동강 유역과 동해안 지방, 그리고 북으로는 한강 유역으로 뻗쳤다.

신라의 군제는 정세의 변천에 따라 여러 번 변했으나 통일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은 철통 같은 국방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왕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권의 기반이 흔들릴 때, 이 군제는 치명적인 흉기가 되어 왕권을 위협했다.

통일 이전에 있던 중요한 군단(軍團)인 육정(六停)을 중심으로 중앙에는 9서당(九誓幢), 지방에는 10정(停) 등의 군사 조직이 새로 마련되었는데, 9서당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말갈 등의 다른 부족까지도 포함하였다. 이는 반란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다른 부족에 대한 근심을 덜고, 나아가서는 중앙의 직속 부대의 병력을 강화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10정은 9주 중 가장 지역이 넓고 또 국방의 요지인 한산주(漢山州)에만 2정을 두고, 다른 주에는 각각 1정씩을 배치하였다. 이렇게 전국에 고루 배치된 10정은 국방과 경찰의 임무를 함께 담당하였다. 지방에는 이 밖에도 오주서(五州誓)·삼변수당(三變守幢)의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신라의 토지제도는 토지 국유제를 전제로 마련된 것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와 항복해 오는 부족의 수장(首長)에게는 땅을 주었는데, 이 사전(賜田)을 바탕으로 식읍제(食邑制)가 발전하게 되었으니, 예컨대 금관국(金官國:駕洛國)의 임금이 항복하여 왔을 때 그의 본국을 식읍으로 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국왕에게 전속되는 직할지가 있었다. 이것은 신라의 궁정에 어용미곡(御用米穀)의 생산을 관리하는 조전(組典), 관용(官用)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능묘(陵廟)에 딸린 넓은 토지가 있었다. 사원(寺院)에는 사전(寺田)이 지급되었으며, 관리들에게는 녹읍(祿邑)을 주다가 689년(신문왕 9)에는 이를 페지하고, 그 대신 조곡(組穀)을 주기로 하였으나 뒤에 다시 녹읍이 부활되었다.

삼국시대에 벌써 사전(賜田)·식읍·녹읍 등을 준 것은 개인에 의한 대토지 소유의 계기를 만들었다. 물론 토지 국유제가 무너질 단서는 신라 말기부터 구체화되기는 했지만 토지 국유제 그 자체는 이와 같이 처음부터 토지 사유화 경향을 조장할 요소를 스스로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통일 이 후 토지 및 농업 인구의 증가, 생산력 수준의 향상, 잉여생산물의 상품화 등 사회 사정은 한층 더 대토지 소유의 가능성을 촉진시켰다. 일반 국민에게는 토지를 나눠 주는 대가로 조용조(租庸調)의 의무를 부담하도록 했다.

신라의 조세제도는 고구려·백제와 같은 조용조(租庸調)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가운데서 중요한 조세는 전조(田租)로서 경작지의 생산물인 곡식이나 직물(織物)의 원료 등 현물세(現物稅)를 바쳤다. 그리고 산성(山城)을 쌓는다든가, 궁실이나 절을 짓는 일 등에 많은 사람들이 부역의 의무를 지고 동원되었다. 이 밖에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호조(戶調)가 있었다.

통일 후의 조세제도도 그 바탕은 같았으나 토지의 소유 형태가 차츰 사유화 과정을 밟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였다. 진성여왕 때는 국내의 각 지방에서 조세를 바치지 않아 국가 재정이 매우 궁색해졌다. 이에 임금이 관원을 파견해서 납세를 독촉한 결과, 농민들의 불만은 정부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나 재정의 곤란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신라의 기본적인 산업은 농업이었다. 부족국가가 성립되면서부터 우선적으로 제방을 쌓고 못을 파는 등 관개(灌漑)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 농구(農具)로는 호미·가래·낫 등 인력용(人力用) 기구가 있었고, 6세기부터는 소로 경작하기 시작하였다. 중요 농산물로는 보리·조·콩·삼(麻)·차(茶) 등으로 쌀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공품으로는 술·기름·꿀·간장·베 등이 있었고, 농촌에서는 어느 정도 농기구를 만들었다. 고분(古墳)의 부장품에 쓰였으며 6세기 초기부터는 자체 내에서 금·은·철·동의 공예품이 제작되었다.

철의 산출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3세기 전부터 낙랑·대방·일본 등지에 수출까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업 역시 509년(지증왕 10)에는 경주에 동시(東市)가 열렸고, 7세기 말에는 서시(西市)·남시(南市)가 열릴 정도로 번창하였다.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서는 행상도 나타났으며, 무역은 대외 관계가 시작되면서 행하여졌는데 제46대 문성왕 때에는 장보고(張保庫)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여 한때 해상권을 독점하였다.

원시 신라의 사회 조직은 몇 개의 부족이 연합한 촌락국가로서 부족장(部族長)의 회의에서 제정(祭政)을 다루는 지연적(地緣的) 집단이었다. 거의 동일한 언어·풍속·습관을 가진 변진 20여 국 중 사로국(斯盧國)을 모태로 하여 반도 동남쪽에 자리 잡았었다. 이때에 제반 대외 관계는 부락 자체와 또 부락 간에 계급적 분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부족이 성립될 단계에 이르러서 가혹한 국제 정세하에서 단결이 요구되어 가일층 계급 분화가 발전하였다.

이에 임금을 비롯하여 온 주민을 계급적으로 편성하는 골품제(骨品制)와 귀족 계급을 등분하는 6부제(部制), 귀족 각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17관등의 기초가 마련됐다. 이들 사회제도의 확립은 제24대 진흥왕 전후로서 골품제는 강력한 힘으로 신분을 얽매었는데 귀족 계급 내부에서도 차츰 계급이 고정화되어 갔다. 이 같은 경향은 경관(京官)·외관(外官)의 관위(官位) 구성에도 나타나는데, 삼국 통일기에 제일 두드러지게 눈에 뜨인다. 즉 외관직을 10등급으로 나누어 왕조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지방 호족(豪族)의 계급을 설정하고 있다. 왕조의 행정권은 주·군까지에만 미쳤으므로 촌락은 구태의연한 공동체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중앙으로부터 파견되는 귀족은 스스로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토호층(土豪層)을 장악하고 이들을 통하여 공납(貢納)·노역(勞役)·군역(軍役) 등을 부과시켰다.

귀족들은 자기가 지배하던 고장을 식읍(食邑)으로 삼았으며, 신라의 영토 확장에 반항한 토호의 토지·백성은 일부가 왕실의 직할령(直轄領)이 되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그 지역의 토벌에 전공이 큰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같은 정복과 피정복에서 형성된 노비는 귀족에게 예속되어 농경민(農耕民)인 동시에 사병(私兵)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는데 삼국 통일 후에는 3천명의 노비와 이에 필적할 만한 가축과 사병을 가진 귀족도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에 항복한 다른 나라의 왕이나 유력한 귀족은 경주에 옮겨 경주 귀족이 되었으나 그들이 지배하던 땅의 대부분은 계속하여 그들의 식읍(食邑)이 되었다. 이들 경주 귀족은 사병과 식읍을 배경으로 삼국 통일의 중추가 되었으며, 또 지방의 직할지 행정을 도맡아 왔다. 신라의 임금도 본질적으로 이들 귀족과 같았지만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이들과 구별되었다.

제29대 태종무열왕 때부터는 왕권의 최성기가 시작되는데 삼국 통일 후에는 당나라의 중앙 집권적 경향에 영향을 받아 질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통일기의 촌락문서(村落文書)에 의하면 촌락 내부는 이때까지 10호(戶) 가량의 혈연 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수개 촌락을 관할하는 촌주(村主)를 통하여 집단적으로 국가의 지배를 받았는데 촌주의 지위도 전대와 큰 차이가 없었고, 용(庸:부역) 등도 촌락 단위를 부과하였다.

당나라를 모방한 중앙집권 체제도 형식적으로는 시행되고 있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실정에 따라 다소 달랐다. 즉 이 제도는 경주 귀족이나 지방 호족에게는 환영받지 못하여 757년에는 녹읍제(祿邑制)가 부활되었고, 정전제(丁田制)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소멸되고 말았다. 제37대 선덕왕(先德王) 이 후의 쇠퇴기에는 중앙의 행정권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였고, 대신 지방 호족이 지방 행정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 경주 귀족은 지방이 중앙으로부터 이탈하는 것도 아랑곳 없이 정권 쟁탈에만 혈안이 되었다. 834년(흥덕왕 9)의 복색(服色) 제도의 신계(申戒)에는 진골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남녀의 의복·거마(車馬)·기구·가옥에 관한 규정이 설정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당시의 생활 양식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위정자들은 혼란한 사회 질서를 계급적 차별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회의 혼란을 안정시킬 수는 없었다.

청소년들을 모아서 교육시킨 제도는 고구려·백제에도 있었으나, 신라에서는 이를 화랑도라 하여 크게 발달하였다. 그들은 화랑도로서 지켜햐 할 5계(五戒) 즉 ① 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사친이효(事親以孝) ③ 교우이신(交友以信) ④ 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순국 지상의 국민 정신을 길렀으며, 생활상에서는 예의와 도덕을 닦고 지조를 굳게 지켜, 무예와 가악을 항상 즐겨, 사기와 정서를 길렀고, 명산·대천(大川)을 두루 순례하여 심신을 단련하고 체험을 얻어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국가에서는 국선(國仙:花主)을 두어 여러 화랑들을 감독하였고, 각 화랑들은 저마다 낭도들을 거느려 화랑도를 조직하였다. 이 화랑 중에서도 사다함(斯多含)·관창(官昌)·김유신(金庾信)·죽지(竹旨) 등은 특히 유명하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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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토착 사회문화가 발달함에 있어서 3단계의 중요한 변천을 거쳤다. 제1단계는 내물왕 당시부터 앞선 고구려 문화를 받아들이고,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 문화를 수입하는 시기로서 이 시기 말엽 불교를 공인(公認)하였다. 제2단계는 백제 문화와 백제를 통하여 세련된 남조(南朝) 문화를 받아들이고, 동양 문화의 근거지인 수·당과 교통하여 직접 중국 문화를 받아들게 되었다. 한학에 있어서도 545년(진흥왕 6)에는 국사를 편찬하고 진흥왕 비문(碑文)이 나타나는 등 한자의 사용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그리고 통일된 뒤에는 크게 발달하여 먼저 강수(强首)·제문(帝文)·수진(守眞) 등 6문장(六文章)과 이두(吏讀)로써 경서(經書)를 훈독(訓讀)하는 법을 고안하였다는 설총(薛聰) 등이 나왔다.

682년(신문왕 2)에는 고구려보다 310년이 뒤늦었으나,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국학(國學)이 성립되었으며, 788년(원성왕 4)에는 관리 채용의 새로운 기준으로서 한학의 성적에 따라 자격을 정하는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제정하였다. 이와 같이 일반 한학이 발달함에 따라 말기에는 노장(老莊) 사상까지 들어오고, 귀족들은 여전히 향가(鄕歌)와 시회(詩會)를 열어 한시를 읊었고 바둑도 즐겼다.

향가는 진성여왕 때 위흥(魏興)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전부 수집하여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이름하였다. 한편 불교는 교종과 선종이 대립되었는데 여기에 재래의 토착 신앙과 풍수도참(風水圖讖)까지 혼합되어 정치의 문란과 더불어 사상계도 동요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도 최치원(崔致遠)은 일찍부터 당나라에 가서 문명을 떨쳤고,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과 약간의 비문을 작성하였다.

신라의 종교를 보면,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불교는 신라 종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즉 6세기 초부터 말기까지 약 400년 간 꾸준히 이어 왔는데, 크고 작은 절들이 무수히 서고 이름난 고승들이 연달아 나왔으며 정치와 사회에 끼친 영향도 매우 컸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샤머니즘·조상숭배·자연숭배 등 원시 신앙이 성행하였다. 이는 삼한(三韓)에 널리 퍼졌던 전통을 이어받은 것과 사로국 고유의 풍습이 전한 것으로 대별된다. 특히 조상 숭배에 있어서는 상고 시대에서는 3성(姓)의 시조를 각기 조상신으로 받들었고, 중고 시대에 이르러서는 자기 부족의 설화를 불교 설화로 강화하였다가 뒤에 다시 김씨 시조왕인 미추(味鄒)를 대묘(大廟)로 받들었다.『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 그 밖의 제사 등에 관해서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들은 예로부터 숭배되어 오던 산천(山川)을 중국의 영향을 받아들여 정비해서 상·하 단계를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나,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법흥왕 14)이었다. 이때 불교 공인 여부에 대해서는 논쟁이 분분하다가 이차돈(異次頓)의 극적인 사형으로 결말이 났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북방 계통과 공인 뒤에 곧 양(梁)·진(陣) 등을 통하여 교류된 남방 계통의 것이 비교적 빨리 합류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후 약 100년 간은 백제·일본 등지의 불교와 같이 왕법적(王法的) 색채가 농후한 것이 특색이었다. 구법사상(求法史上) 한 시기를 그은 원광(圓光)을 비롯하여 자장(慈臟)은 636년(선덕왕 5)에 당나라에 가서 율종(律宗)을 들여왔다. 원효(元曉)는 경론(經論)을 해석한 책을 81부나 지었고, 마침내 해동종(海東宗:律士敎)을 열어 민중 불교를 일으켰다. 그 밖에 유식론(唯識論)에 원측(圓側)·경흥(憬興)·도증(道證)·대현(大賢), 화엄종에 승전(勝詮), 율종에 진표(眞表) 등이 나타나는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신라 말기에는 선종(禪宗)이 성행하였는데, 신라의 선종은 7세기 전반에 법랑(法郞)이 처음 전한 것으로, 이를 이어 8세기 후반에는 신행(神行)·도의(道義) 등이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을 차례로 들여왔다. 이로 말미암아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선(禪)의 신앙이 차차 일어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9산(山)이 차례로 성립되면서 5교(敎)와 대립해서 발전하게 되었다.

끝으로 도교에 관해서는 문헌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도가(道家) 내지 신선 사상의 영향은 화랑도와 밀접한 관계에서 추측할 수 있는데 신라 통일 후 태평시대에 있어서는 도교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신라의 예술을 살펴보면, 삼국통일 시기를 경계로 해서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에는 솔거(率去)의 노송도(老松圖)가 유명했다고 전하며, 후기에는 선덕왕(宣德王)·원성왕(元聖王) 때의 김충의(金忠義), 말기에는 불화(佛畵)로 이름난 정화(靖和)·단계 등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또 사원·궁전과 같은 것도 초석(礎石)·와당(瓦當)·전(塼) 등으로 그 전모를 추측할 뿐이며, 목재를 사용한 것도 거의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라 미술의 연구 대상은 고분과 불사(佛寺)가 주를 이룬다.

신라의 수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주였으므로 경주는 많은 유적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수도 경주는 산상(山上)을 명활산성(明活山城)·남산성(南山城)·부산성(富山城) 등의 산성으로 에워쌓고, 시내외는 가로(街路)를 설치하였는데 최전성기에는 1,360방(坊)이었다. 또 수도 한 복판에는 월성(月城)이 있어 궁성을 이루고, 인접하여 임해전(臨海殿)·안압지(雁鴨池)가 있었다. 월성 부근의 첨성대는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이며, 포석정(鮑石亭)은 곡수지연(曲水之宴)의 유지(遺址)로서 유명하다.

불교 건축의 대표적인 것은 흥륜사(興輪寺:544)·황룡사(黃龍寺:553)·삼랑사(三郞寺:597)·사천왕사(四天王寺:685)·분황사(芬皇寺:782)·원원사(遠願寺:782)·감은사(感恩寺:841)·봉덕사(奉德寺)·봉성사(奉聖寺)·불국사(佛國寺:751) 등 경주에 세운 것을 비롯하여, 부석사(浮石寺)·해인사(海印寺)·화엄사(華嚴寺)·장안사(長安寺:東萊) 등이 유명하다.① 사찰의 배치와 목조 건축:사찰의 배치는 전기에는 탑 하나를 금당(金堂) 앞에, 후기에는 쌍탑(雙塔)을 금당 앞에 동서로 대립시켜 세우고, 모두 중문회랑(中門廻郞)으로 에워싸는 것이 원칙이었다. 목조 건축물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석탑·전탑·석굴·석부도(石浮屠)·석비·석계(石階)·석단 등만이 남아 있다. ② 탑파(塔婆):현존한 것은 돌·전(塼), 돌과 전의 혼용, 석심회피(石心灰皮)의 탑 등으로서 층수는 3

13층, 높이는 7

50척이다. 그 형체는 목탑형(木塔形)이 대부분을 차지하나 그 밖의 변형도 있다. ③ 석굴:북위(北魏)·수(隨)·당(唐)에서 유행한 석굴도 시도되었으나, 적당한 석재가 없어 산 위에 화강석으로 굴을 쌓고, 흙을 덮어 만든 석굴암은 특히 유명하다. ④ 부도(浮屠):석탑형과 스투파(Stupa)형의 2종이 있다. ⑤ 비(碑):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였는데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首)를 얹은 태종무열왕 비는 대표적인 것이다. ⑥ 기타:당간지주(幢竿支柱)·석정(石井)·석조(石槽) 등이 있다.

능묘에는 ① 적석총(積石塚):최고(最古)의 형식으로 목곽(木槨)을 덮고 외면을 돌로 쌓은 위에 흙으로 덮었는데 목곽과 그 밖의 명기(名器)가 출토되고 있다. 특히 금관총·금령총(金鈴塚)·서봉총(瑞鳳塚) 등의 출토품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② 석곽묘(石槨墓):적석총에 뒤이어 나온 것으로 종광식(縱壙式)과 횡광식(橫壙式)이 있으며 이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다. ③ 후기의 능묘:당제(唐制)를 모방하여 웅장하였다. 한편 불교에서 화장이 유행하는 바람에 재래의 분구식(墳丘式)은 차츰 줄어들었다.

초기의 태종무열왕릉은 전면에 석상(石床)을 두고, 당제를 따라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괘릉(掛陵)은 무덤 수위를 호석·석란으로 둘러싸고, 앞에는 석상, 또 그 앞 좌우에 석사(石獅) 2개, 문석(文石) 1개, 석주 1개를 세웠다. 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양각하였다. 이것을 갖춘 것으로는 김유신묘·신문왕릉·성덕왕릉·경덕왕릉·진성왕릉 등이다.

조각에는 석상(石像)·동상(銅像)·환조(丸彫)·부조(浮彫) 등이 있다. 신라 전기의 조각은 남북조식, 후기에는 당나라식의 영향을 받았다. 경주 박물관의 석조 석가좌상·미륵좌상·석선금강역사상(石扇金剛力士像) 그 밖의 동불상(銅佛像) 등은 전기의 대표적 작품이며, 분황사탑의 4면 입구 좌우의 인왕상(仁王像)은 초당식(初唐式)이 가미된 남북조식이다. 후기의 작품은 능묘의 12지신상·석인(石人)·석사(石獅)를 비롯하여 돌·구리·벽돌 제품이 현존하고 있다.

공예품으로는 ① 전기:금관총·금령총 등에서 출토된 것으로

한식(漢式)에 우리 고유의 개성을 살린 정교한 기술이 세계적인 자랑이다. 종류로는 금속제 복식품(服飾品)으로 보관(寶冠)·귀걸이·가락지·허리띠쇠·신발·팔찌,

주옥파리류(珠玉??類)에는 구옥(勾玉)·관옥(冠玉)·환옥(丸玉)·파리배(??杯), 이기류(利器類)로, 칼·창·도끼, 마구류로 안장·재갈·방울, 금속기에 거울·남비·솥, 도기류에 사발·보시기·접시·술잔·항아리 등이 있는데, 금관총에서 발견된 금관과 귀걸이는 특히 유명하다. ② 후기:돌·금·도기 공예가 특히 발달하였다. 석공(石工)의 석등은 당시 중국·일본 등지에서 볼 수 없는 우리 나란만이 가진 작품이다. 일반형으로 부석사(浮石寺) 석등·법주사 사천왕 석등·불국사 석등 등이 있고, 특히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앞의 석등은 화려하기가 우리나라 제일이고 법주사의 쌍사(雙獅)석등 또한 유명하다. 또 이절의 석련지(石蓮池)는 우리나라 유일의 것으로 석련화(石蓮花) 위를 난간으로 높이 에워싼 기교는 감탄할 만하다.

구리로 만든 범종(梵鐘)에는 거작(巨作)도 있는데, 특히 상원사종(上院寺鐘:725)·봉덕사종(奉德寺鐘:715) 등은 중국·일본에서 볼 수 없는 정교한 작품이다. 도공(陶工)은 전기의 수법이 더욱 세련되어 황(黃)·벽(碧)·녹(綠)의 유와(釉瓦)를 만든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73년에 발굴된 경주 155호 고분은 고신라(古新羅)의 미술·건축·민속사 등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나온 유물은 총 1만 1,297점으로 금관(金冠)을 비롯한 금제품(金製品) 780점, 금동 및 청동 제품 227점, 은제품 70점, 철기류 668점, 칠기류 51점, 백화수피제품(白樺樹皮製品) 5점, 섬유류 30점, 토기류 147점, 유리제품 7,735점, 기타 1,584점이다.

이 중 금관과 「천마도(天馬圖)」는 가장 값진 유물이다. 초콜렛회색 바탕에 백마(白馬)의 힘찬 모습이 그려진 이 『천마도』는 한 폭의 회화로 고 신라의 회화사를 수정할 뿐 아니라 그 수준까지도 정점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또한 종이보다 더 엷은 비단에서부터 올이 굵은 마(麻), 꼬부라진 모(毛) 등으로 짜여진 섬유류의 발굴은, 앞으로의 과학적 조사 결과에 따라 많은 기대를 갖게 하였다. 155호 고분은 지름 47m, 높이 12.7m로서 금관총과 비슷하며, 전형적인 적석 목곽분(積石木槨墳) 형식이지만, 목곽(木槨)이 지표(地表) 위에 있어 주목을 끈다. 고분의 주인공은 자세하지 않으나 대략 소지(炤知)·지증(智證)의 두 왕 중 한 사람으로 추측되고 있다.

내물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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奈物麻立干

신라 제17대 왕(재위 356

402). 신라의 모체인 사로(斯盧)가 국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부족 연맹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이다. 내물왕 9년(364) 왜의 침입을 부현(斧峴) 동쪽에서 격파하고, 계속 백제와 왜의 세력에 대항하면서 고구려와 수교를 맺고 국제 무대로의 진출을 꾀했다.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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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立干

신라 때 임금의 칭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제19대 눌지왕(訥祗王)부터 22대 지증왕(智證王)까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17대 내물왕부터 지증왕까지 이 칭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조그마한 부족국가에서 커다란 부족연맹국가로 변혁하는 과정에서, 부족장을 뜻하는 이사금(尼師今) 대신 왕의 명칭(名稱)으로 마립간이 사용되었다. 마립간은 여러 부족장들보다 특출한 최고 존재로 생각된 듯하다. ‘마립간’의 어의(語意)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여 정확한 원의(原意)는 알 수 없다. 부족장을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부족연맹장은 전기에는

‘이사금’이라 하고, 김씨 왕위 세습권을 확립한 후에는 ‘마립간’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이사금은 둘 이상의 부족 중에서 그 대표자로 뽑은 것이고, ‘마립간’은 원시 회의제의 의장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혹은 사회 관계가 가부장(家父長)·가족장(家族長)을 주체 세력으로 하는 사회로 전환하면서 가부장 중의 우세한 자가 자기 부족의 족장이 되는 동시에 그 부족 연맹의 영도 세력이 된 것을 마립간이라고 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눌지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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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祗麻立干

신라 제19대 왕(재위 417

458).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 15년(431) 왜의 침략을 막고, 동왕 17년(433) 백제와 화친하였다. 동왕 22년(438) 우거법(牛車法)을 제정하고, 동왕 39년(455) 고구려가 백제를 공략하자 백제에 원병을 보내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었다. 이때 중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에 들어와 불교를 전하였다.

나제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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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濟同盟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대항하기 위해 맺은 동맹. 고구려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정복 전쟁을 추진하여 백제를 공략, 개로왕을 죽이고 위례성(慰禮城)을 점령하는 등 백제를 위협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정복사업은 아직 미약한 신라에게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정세는 삼국간에 견제와 조정의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동맹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소지왕 15년(493) 신라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과 백제 동성왕(東城王) 사이에 혼인 동맹을 맺으면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양국은 상호 협력하여 공수(攻守)를 같이하며 실지(失地) 회복에 힘썼다. 그 후 백제의 영주(英主) 성왕과 신라의 경략가 진흥왕이 공동으로 북진책을 폄으로써 오랫동안의 동맹 목적은 이루어졌으나, 한강 유역의 쟁탈전이 일어나자 이 동맹은 깨어졌다. 이로 인하여 삼국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지증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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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證王

신라 제22대 왕(재위 500

514).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의 아들. 지증왕 3년(502) 순장법(殉葬法)을 금하였고, 우경(牛耕)을 널리 권장하여 산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정치적인 개혁으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에 중국식으로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동왕 5년(504)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고, 동왕 6년(505) 주군현(州郡縣)을 정하였으며, 실직주(悉直州)에 군주(軍主)를 두었다. 또한 선박의 편리를 도모케 하였으며, 우산국(于山國)을 항복시켰다. 그는 죽은 후 신라 최초로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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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興王

신라 제23대 왕(재위 514

540). 즉위하자 양(梁)과 국교를 맺고 법흥왕 4년(517)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두었으며, 동왕 7년(520)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함으로써 고대왕국으로서의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동왕 14년(527) 불교를 공인하고, 동왕 23년(536)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영토의 개척과 지방행정의 정비를 꾀했다. 이러한 왕권 강화와 사상 통일의 노력으로 신라는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낙동강 하류에서 우세했던 본가야(本加耶)를 병합하여 가야연맹 세력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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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興王

신라의 제24대 왕. 재위 540

576. 휘는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로 7세에 즉위하여 한때 왕태후(王太候:金氏)의 섭정을 받았다. 진흥왕대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어나 일로 팽창하여가는 과도기에 들어가는 시대였다.541년(진흥왕 2)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를 맡기고 백제와 화친하였으며, 545년(진흥왕 6)에는 이사부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수찬하게 하고, 551년(진흥왕 12)에는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고치고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제작 연주하게 하였다. 또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의 법을 설치하였으며 백제와 더불어 남·북한성(南北漢城)의 고구려 땅을 공취하고, 553년(진흥왕 14)에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지역을 공취하고 신주(新州:廣州)를 설치하여 한강 유역 전부를 독점하였다.이 지역의 획득은 인적·물적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지리적인 위치가 주는 이점이 더욱 컸으니 서해를 거쳐 중국과 통할 수 있는 점으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어져 554년(진흥왕 15)에는 백제 성왕(聖王)의 내침이 있었으나 선전하여 성왕을 전사케 하였고 562년(진흥왕 23)에는 가야(伽倻) 지방을 화랑 사다함(斯多含)으로 하여금 평정케 하여 낙동강 유역마저 아우르니 신라는 이로써 완전한 기반에 서게 되었다. 더욱 주위의 침입에 대비하여 한강 유역에 주군(州郡)과 강력한 군단(軍團)을 설치하여 이들이 새로 개척한 땅을 순수하여 비를 세웠으니 현존하는 창녕(昌寧)·북한산(北漢山)·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 비이다. 이 비로 당시의 신라가 함경북도를 가르는 이원(利原)의 마운령까지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또한 주목할 것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던 화랑(花郞)의 활약이다. 576년(진흥왕 37) 기록에 비로소 화랑이 생긴 듯이 보이나 이보다 앞서 갸야의 공략 때 이미 화랑 사다함의 전공이 있는 것을 보면 화랑의 기원은 좀더 소급될 것이다. 이후 북제(北濟)와 진(陳)에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하였으며 574년(진흥왕 35)에는 유명한 황룡사(黃龍寺)의 장륙상(丈六像)을 주성하는 등 불교의 번창에도 힘이 컸었고, 개국을 위시하여 대창(大昌:568)·홍제(鴻濟:572)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적인 기상을 나타낸 점

등 실로 신라 중흥의 시기라고 하겠다.

거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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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柒夫

신라의 대신. 성은 김씨. 내물왕의 5대손. 진흥왕 6년(545) 대아찬(大阿飡)으로 왕명을 받아 『국사(國史)』를 수찬, 동왕 12년(551)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鐵嶺) 이남의 10여 군을 빼앗았다. 진지왕 1년(576)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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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斯夫

신라 때의 장군. 내물왕의 4대손. 지증왕 6년(505)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했다. 진흥왕 11년(550)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국력이 소모되자, 이 틈을 타서 양국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과 백제 금현성(金峴城)을 함락하여 신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는 또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 거칠부(居柒夫)로 하여금 국사를 수찬케 했다.

진흥왕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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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興王巡狩碑

진라 진흥왕이 국토를 확장하고 국위를 선양하기 위하여 여러 신하를 이끌고 변경을 순수 하면서 기념물(記念物)로 세운 비이다.석비(石碑)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 ① 창녕비(昌寧妃:慶南昌寧邑所在) ② 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中央博物館所在) ③ 황초령비(黃草嶺碑:成南黃草嶺所在) ④ 마운령비(磨雲嶺碑:成南利原郡磨雲嶺所在) 등 4비의 비석들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滿洲輯安縣) 다음 가는 귀중한 금석문(金石文)으로서 유명하며, 우리의 고기록에 밝혀지지 않고 있는 당대 신라의 강역을 말해 주는 실제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더욱 크다.창녕비와 북한산비는 별문제가 되지 않으나 지경을 벗어나 함경남도와 북도를 경계로 하는 이원(利原)과, 황초령에 있는 비 등이 문제다. 종래의 몇몇 학자들은 이것이 후에 옮겨졌다는 이전설(移轉說)을 주장하고 있으나 모호한 설이다. 보다 자세한 고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 비석이 처음부터 현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반도의 일우에서 일찍이 역수(曆數)의 관념을 비롯하여 건원(建元)·칭짐(稱朕:碑文에 보임)·순수(巡狩)·입석(立石) 등 중국에 있어서의 제왕적(帝王的)인 자부의 실을 실현하려고 한 일대 사실로서 미루어 보아 진흥왕의 패기를 가지고는 충분히 고구려의 허극(虛隙)을 타서 동해안의 좋은 지대를 육지로 또는 해상으로 깊숙이 북상하여 지금의 마운령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에 예속하였던 옛 동예(東濊)지방도 경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것이 얼마 후에 약간 남퇴(南退)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본다면 하등의 모순과 의혹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한다. 비석은 대부분 자연석에서 해서(楷書)로 음각한 것이며 밝혀진 비문으로서 당대의 제반사정을 연구하는 데 절대 절호의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쌍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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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雙墳

신라 고분의 하나. 일명 신라 경주 98호 고분. 경주시(慶州市) 황남동(皇南洞) 소재. 1974년에 발굴. 이 고분은 두 개의 봉분(封墳)을 가지고 있는 소위 표형분(表型墳)으로서 신라 고분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 쌍분은 조사 결과 남쪽 것이 먼저 이루어진 얼마 뒤에 남분의 북쪽 봉분 벽에 걸쳐 기대어 북분의 봉분을 쌓아올렸다는 사실과 남·북분에는 각기 한 사람씩 매장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 남·북분 주인끼리의 사이가 부부였으리라는 설을 내세우게도 되었다. 특히 먼저 발굴된 북분에서는 태환식(太環式)으로 된 수많은 금귀걸이와 귀고리 모양의 수식류(垂飾類) 들이 두부(頭部)는 물론 허리 부위, 발 부위에까지 몇 벌씩 겹쳐 있고 또 ‘부인대(夫人帶)’라는 각명(刻銘)이 있어서 이것이 아마도 여성의 묘였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또 남분의 경우는 칠기(漆器)에 ‘마랑(馬朗)’이라는 명문(銘文)과 무기(武器) 무구류(武具類) 등이 부장(副葬)되어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남성의 묘였으리라는 인상을 짙게 해 주었다.이 남·북분이 부부묘였을 경우 시대차는 멀어도 불과 수십 년일 것임이 분명하며, 남북분의 공통적으로 이채로운 출토품은 유리제품이었다. 이들 유리 제품은 이제까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어느 경우보다도 다양하고 풍부했으며, 이러한 유리 제품은 신라의 요예기술(窯藝技術)의 다양한 전개를 뜻한다. 또 북분 출토의 중국육조흑유소병(中國六朝黑釉小甁)은 5세기 초를 더 내려오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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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樂

신라시대의 음악. 백제악·고구려악과 함께 일본에서는 삼한악(三韓樂) 중의 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가야금(伽倻琴)은 신라금(新羅琴)으로 일컬어진다. 삼한 중 다른 나라에 비해 외래 문화가 늦게 수입되었기 때문에 뒤늦게까지 남아 있었으며, 외래 악기는 수입하지 않았다.악사(樂師)는 금사(琴師)·무사(舞師) 2인뿐이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상하신열무(上下辛熱舞)·사내무(思內舞)·한기무(韓岐舞)·소경무(小京舞)·미지무(美知舞) 등은 신라악에 속한다고 하였다. 악기로는 우륵(于勒)이 만든 가야금을 위시하여 향비파(鄕琵琶)·향피리(鄕??)·세피리(細??)·대금(大?) 등이 쓰였다. 또 제(齊)나라의 가면무(假面舞)·사자무(獅子舞) 같은 사량기(西凉伎)도 성행하였다. 또 불교의 흥륭과 더불어 신라악도 발전하였다. 즉 당나라와의 교통에 의하여 주로 당나라 속악이 전래되어, 한편으로 신라 고유의 원시적 민중 음악이 정리 발달된 점이 그로 말미암았다 하겠다. 특히 『삼국유사』 균여전에 전하는 향가를 검토함으로써 그 유래를 더듬을 수 있다.

신라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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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五伎

신라의 다섯 가지 놀이 ① 금환(金丸):금칠한 공을 놀리는 곡예의 일종, ② 월전(月顚):서역의 우전국에서 전래된 배우놀이, ③ 대면(大面):가면무이며 특히 구나무(驅儺舞)의 일종, ④ 속독(束毒):서역의 속특국(粟特國)에서 전래된 건무(建舞)의 일종. ⑤ 산예(?猊):서역 전래의 사자무이다. 이것은 최치원(崔致遠)의 시 「향악잡영(鄕藥雜詠)」이 삼국시대에 인용됨으로써 알려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