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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조선의 성립과 발전/조선초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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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의 대외관계〔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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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초부터 대명외교에 있어서 사대적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왕조의 권위를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서는 명에 대하여 1년에 세 번 사절을 파견하는 등, 정치적 목적과 함께 문화 수입과 교역을 행하였는데, 명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였다.조선왕조의 영토확장정책은 남방으로도 미쳤다. 고려말 공민왕 이후로 식량과 문화재를 약탈하기 위해 들어오는 일본 하급무사들, 즉 왜구(倭寇) 때문에 해안지방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고, 백성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그만큼 식량부족이 심각하고 선진문명에 대한 욕구가 컸다.

중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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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과의 關契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親命策)을 표방하였으며, 개국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하고 국호도 화령(和寧)·조선의 둘을 지어 보내서,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朝鮮國王)’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王)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로 국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죽었을 때에는 이를 알려서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從屬)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祖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의 간섭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간의 접촉에서였다. 파견하던 사행(使行)에는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바쳐야 되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금은(金銀)·마필(馬匹)·인삼·저포(苧布)·마포(麻布)·석자류(席子類)·호피(虎皮)·나전(螺銓) 등이었으며 때에 따라 처녀와 환관(宦官)의 요구도 있었다. 이 중에서 국내 생산이 부족한 금은의 세공은 커다란 부담이 되어 국내에서는 함경도 단천(端川)의 금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채광(採鑛)을 장려하며 민간의 사용을 제안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였다. 때문에 금은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대신 다른 토산물을 바칠 것을 청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마필(馬匹)·포자(布子)로써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공에 대한 명나라에 회사품(回賜品)으로는 각종의 견직물(絹織物)·약재·서적·문방구 등이 있었다. 조공과 회사는 일종의 관무역(官貿易)으로서 그 경제적인 의의도 컸다.이와 같은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기 위하여 국내의 물산을 거둬들이며, 아울러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위축되고, 금은·인삼 등을 비롯한 각종 무역의 통제는 일반적으로 상업활동을 침체케 하는 결점도 있었으나, 선진국인 명나라와의 교섭은 귀족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많았다. 명나라와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오랜 숙제였던 종계변무문제(宗系辨誣問題)도 선조 때에는 해결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는 더욱더 두터워졌다.그리하여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하여 명나라의 국력이 크게 소모된 사이에 만주 지방에서는 누루하치가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군대를 보냈으나 명나라의 주력부대와 함께 싸움에 지고 말았다. 이때도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이 부득이 원병을 보내게 된 사실을 말하여 두 나라 사이에 별 일은 없었다.그 뒤 후금은 더욱더 세력을 떨치게 되었는데도 국내에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들이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쓰자, 후금은 명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하여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한다. 이에 조선에서는 마지못해 형제의 의를 맺었다. 그 뒤 후금의 태종(太宗)은 더욱 국력을 확장시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강화(江華)를 함락시키니, 인조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여 군신의 관계를 맺고 명(明)과의 관계를 끊으며 청에 대해서 해마다 막대한 세공을 보내기로 하니, 이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일컫는다.`

이와 같이하여 항복한 뒤에도 청을 종주국(宗主國)으로 삼는 문제에 대해서 국론(國論)이 일치하지 않다가 청이 명을 멸하고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표면상으로는 사대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명을 추모(追慕)한 반면, 청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군신들간에 여러 차례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이 논의되었을 정도로 깊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사신의 내왕은 빈번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고도로 발달한 청나라의 문화와 청나라에 들어온 서양 문물이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실학사상을 일으키게 하였고, 두 나라 학자들 사이에는 활발한 문화적 교류도 있게 되었다. 한편 청이 청일 전쟁에 져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기에 이르자 정치적인 종속관계는 없어지게 되었다.

일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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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關契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걸쳐 우리나라의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에 대한 퇴치(退治) 문제는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큰 숙제의 하나였다. 태조는 즉위하자 곧 아시카가 막부와 교섭하여 왜구를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으며 몇 년 뒤에는 정식으로 교린(交隣)관계가 성립되었다. 중국의 왕조에 대한 사대정책과 함께 조선시대 외교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 교린정책은 일본 이외에 여진에 대해서도 행하여졌다. 그 뒤에 일본에 대하여 여러 가지 회유책(懷柔策)을 써서 통상의 편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왜구는 역시 근절되지 않았으므로 1419년(세종 1)에는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를 정벌한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왕래가 끊어졌는데,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된 쓰시마주(對馬島主) 소오(宗貞盛)는 사신을 보내어 다시 통교(通交)할 것을 누차 청하여 1426년(세종 8) 삼포(三浦)를 열어 교역을 허가하였다.이렇게 하여 내왕 교역하는 데 편리하게 되자 왜선은 더욱 자주 오고 내왕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아지므로, 1443년(세종 25)에는 쓰시마 도주와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어 이에 대한 제한을 가하였다. 이 밖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데도 규정이 있어서, 일본의 국왕·거추(巨酋)·규슈단다(九州探題)·쓰시마도주·제추(諸酋) 등이 보내는 사신에 대해서는 각각 차등을 두어 영송(迎送)·체재비지급(滯在費支給)·상경인원수(上京人員數)·연회(宴會)·사물(賜物) 및 유포(留浦)의 일한(日限) 등을 정하였다. 왜사선(倭使船)이 삼포에 도착하면 도서(圖書)나 문인(文引)을 검사하고 서울에 보내어 진상물(進上物)을 바치게 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이에 대해서 회사품(回賜品)을 주었다. 일본 사신이 서울에 오면 동평관(東平館)을 유숙소로 쓰게 하였다. 이때 일본의 진상물은

은(銀)·동·연·유황·소목(蘇木)·단목(丹木)·백반(白礬)·감초·호초·수우각(水牛角)·상아 등이었으며, 회사품은 면포(綿布)와 쌀을 비롯하여 서적·저포(苧布)·마포(麻布)·인삼·표피(表皮) 등으로서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경우처럼 일종의 관무역이었다.이 밖에 역시 왜관을 중심으로 사무역이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과 일본 사이의 통교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자 왜구도 훨씬 줄어들었으나, 1510년(중종 5)에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삼포를 폐쇄하고 쓰시마와 통교를 단절하였다. 그 뒤에 쓰시마주는 아시카가 막부를 통하여 다시 교역해 줄 것을 애원하므로 임신약조(壬申約條)·정미약조(丁未約條) 등을 맺어 전에 비해 훨씬 엄격한 제한 아래 통교할 것을 허락하였다.그러던 중 1555년(명종 10)에는 왜선 60여 척이 전라도 연안을 노략질하여 전라 병사 원적(元績)·장흥부사(長興附使)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이를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일컫는다. 정부에서 비변사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한 것은 이 왜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내왕을 금하였고, 두 나라 사이의 정식 교섭도 정지되었다. 한편 선조 초기 일본에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나타나 전국(戰國)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였으며 이에 따라 왜구의 활동은 억제되었다. 1592년(선조 25)에는 도요토미가 대륙경략(大陸經略)의 계획을 세우고 대군(大軍)을 보내어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전후 7년에 걸친 대란(大亂)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우리나라 전토를 유린하여 국민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국가의 재정은 극도로 피폐하여졌다.이와 반대로 일본은 우리나라의 도자기·활자·주자학 등을 가져감으로써 그들의 문화는 크게 향상되었다. 이 난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가 망하고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새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도쿠가와는 조선과의 평화적인 국교를 바라고 수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여기에 좀처럼 응하지 않다가 1607년(선조 40)에야 처음으로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함으로써 국교가 다시 열렸다. 그 뒤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모두 12회 다녀왔다.일본은 통신사와 그 일행을 통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우리나라 통신사들은 대체로 그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막말(幕末)의 소란기를 당하여서는 내외의 정세가 복잡하였으므로 국교는 서로 정지 상태에 빠졌다. 그 뒤 막부를 넘어뜨리고 메이지유신정부(明治維新政府)를 새로 수립한 일본은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통고하고 국교를 다시 열 것을 여러 번 요구하였으나, 조선에서는 끝내 이를 거절하여 한때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시끄럽게 일어나기도 하였다.조선과의 평화적인 교섭에 실패한 일본은 1875년(고종 12)에 이른바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조작하여 이듬해에 강압적으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丙子胡亂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그 동안 쇄국정책을 써오던 조선의 문호를 개방케 하였다.이 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협박과 간계(奸計)를 일삼다가 1910년에는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여진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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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眞-關係

조선시대의 외교정책에 있어 가장 부심(腐心)했던 것의 하나가 바로 여진과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의 경우와 같이 여진에 대해서도 대체로 교린정책(交隣政策)을 쓰는 한편, 때에 따라서는 무력행사를 취하기도 하였다.여진은 본래 원(元)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명(明)이 일어나자 형식상 명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분산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북방 개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태조 때에 이미 함경도 지방의 경영에 착수하여 국토가 상당히 확장된 적도 있었다.그 뒤 태종 때에는 여진의 침략으로 한때 후퇴를 하였으나 세종대왕은 처음부터 적극적인 북진책을 써서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공략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고 남방의 각 도(道) 백성들을 이주시켰다.한편 압록강 상류 지방에 대한 개척은 이미 고려 말기부터 시작되어 처음에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둔 이래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세종 때 여진족이 이 지방을 노략질하자, 최윤덕·이천 등을 차례로 보내어 정벌하고 사군(四郡)을 두어 방비케 되었다. 이로써 압록강 상류지방의 경영도 대개 세종 때 끝마치게 되었다.이와 같이 육진·사군을 개척함으로써 압록강·두만강 이남이 우리나라 영토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여진족이 우리나라를 자주 노략질하는 동기는 일상생활품의 결핍에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교린정책으로서 태종 때에는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두어서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다. 여진인이 가지고 오던 물건은 마필을 비롯하여 해동청(海東靑)·산삼(山蔘) 및 각종 모피 등이었으며, 조선에서는 그들에게 면포·마포·저포·미두(米豆)·염장(鹽藏)·농구(農具)·종이 등을 주었다. 조선에서는 여진인들의 조공·귀화(歸化)를 장려하는 한편 여진 추장들에게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하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서울에는 북평관(北平館)을 두어 내조(來朝)하는 여진인들을 유숙케 하였으며, 이들이 토산물을 진상(進上)하면 그에 대한 회사물(回賜物)을 주어 보냈다. 한편 명(明)은 여진에 대해서는 분리정책을 써서 여진족의 통일을 막았을 뿐 아니라, 조선에서 건주위(建州衛)의 도독(都督)에게 관직을 주어 회유하는 것도 반대하였다.그것은 조선과 여진이 결탁하여 명(明)에 반항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이 뒤로 조선은 건주위와의 정식 교통을 끊고 때때로 만포진(滿浦鎭)에서 여진인의 요구에 따라 약간의 식료품만을 주게 되었다.이 결과 생활이 어렵게 된 그들은 변경을 자주 침범하여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므로 세조와 성종 때 모두 4번에 걸쳐서 군사를 내어 여진을 정벌하였으나, 그들의 침입은 여전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뒤로는 여진의 노략질에 별로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1583년(선조 16)에는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당하게 되었다. 이 난으로 한때 육진(六鎭) 지방이 자못 위태로웠으나 당시의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粒)의 전공(戰功)으로 난은 평정되고, 따라서 육진이 보전될 수 있었다.그러나 이 무렵 누루하치가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새로운 강력한 여진세력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에는 누루하치가 사신을 보내어 내원(來援)의 뜻을 알리므로 조선에서는 그 뜻을 알기 어렵다 하여 거절한 일도 있었다.명(明)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을 보내어 만주지방의 방비가 소홀하게 된 틈을 타서 더욱 세력을 확장시켜 1616년에는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청(淸)으로 고쳤다. 조선에 대해서는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의 두 차례에 걸친 침략을 단행한 결과 형식상으로는 그 종주국이 되었다.

구미 열강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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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美 列强과의 關係

선조 이전까지는 우리나라 사람의 서양에 대한 지식과 의식은 매우 희박하였다. 비록 중국을 통하여 서양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디에 위치한 어떤 나라인지는 알지 못하였다.그러나 선조 말기부터 일부 학자간에 서양에 관한 지리적 지식을 다소 알게 되고 특히 1628년(인조 6) 우리나라에 표착한 박연(朴淵) 등 화란인(和蘭人)을 통하여 서양식 무기의 제조를 시도하였다. 한편 정두원(鄭斗源)·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은 청나라를 통하여 서양문물의 소개에 힘써 국내에서도 서양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호기심이 자라나게 되었다.이리하여 김육(金堉) 등의 소청으로 개량력(改良曆)의 연구를 위하여 청나라에 연구생을 파견, 1653년(효종 4)에는 이를 실시하게 된 것은 특기할 일이었다.이와 때를 같이해 제주도에 표착한 화란인 하멜(H. Hamel) 일행은 훈련도감(訓練都監)에 소속되어 무기제조와 역법(曆法) 사용을 가르쳤다. 하멜은 13년 만에 탈출, 표류기(漂流記)를 지어 조선의 생활을 소개하니 이는 조선의 사정을 서양인에게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 되었다.그러나 이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적 큰 물결에 뜬 한낱 잎사귀에 지나지 못한 일로서 효종 때 나선정벌(羅禪征伐)과 같은 거병(擧兵)사실이 있었으나 조선이 서양과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역시 고종 때부터의 일이었다.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케 한 구미열강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문호개방을 요구하여 왔으나 대원군(大院君)의 철저한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은 채 교섭은 중단되었다.그러나 대원군의 하야를 계기로 문호가 개방되자 각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통상을 요구하여 1882년(고종 19)의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비롯하여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벨기에·덴마크 등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이 같은 조약의 체결은 당시 일본의 세력진출을 두려워하던 청나라의 강력한 배후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되고 정치적 부패와 재정적 타격을 받던 이 나라를 둘러싼 열강(列强)의 세력다툼은 치열하여 조선의 약체화(弱體化)를 조장하였다.특히 그 중에서도 러시아 세력의 진출과 영국의 세력확장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영국은 한때 동양함대(東洋艦隊)를 보내어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하고 러시아와의 무력적 충돌을 기도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그러나 우리나라에 대하여 가장 끈덕지게 세력진출을 꾀한 것은 러시아로서 외교수완이 능숙한 베베르(Woeber)를 내세워 조정에서 큰 세력을 잡고 친러파(親露波)를 형성케 하여 정계를 좌우하고 한때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에 이치(移置)시켜 친러파내각(親露波內閣)을 조직, 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진출은 필경 일본·청의 세력과 대립되어 마침내는 러·청·일의 대립을 보게 하여 조선은 완전히 이들 3국의 각축장(角逐場)으로 변해 버렸고 청일·러일의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승리로 그들의 세력진출은 막히게 되고 마침내 한일합방으로 조선의 멸망과 아울러 구미제국(歐美諸國)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말았다. 한편 문호개방 이후 입국한 각국의 외국인들은 한국인과 개별적인 접촉도 빈번하여 우호와 문화교류에 공을 세워 이를 계기로 은둔국(隱遁國)인 조선이 외국에 소개되었으며, 국내에서는 특히 종교·교육·의료사업에 공이 컸다.

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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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島

일본 쿠슈(九州)와 우리나라 남단 사이에 위치한 섬. 일본말로는 쓰시마(對馬島)라 한다. 현재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속해 있으며, 가미지마(上島)와 시모지마(下島)의 두 섬으로 되어 있다. 면적 68km2에 농경지는 전면적의 3.4%, 기타는 산림·모래밭이다. 지리적 조건으로 옛날부터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의 중개역할을 맡아왔으며, 그 토지가 협소하고 비옥하지 못하여 고려말부터 조공(朝貢)을 바치고 쌀·콩 등 곡물을 답례(答禮)받아 가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倭寇)의 소굴이 되자, 조선에 들어와서는 그들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통사의 편의(便宜)도 봐주고 또 귀화(歸化)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의 행패가 여전하자 세종 때에는 대마도정벌이라는 강경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씨(宗氏)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우리나라의 해방정책(海防政策)에 따라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대마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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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島 遠征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일. 대마도 원정은 협의로는 1419년(세종 1) 6월 이종무(李從茂)의 정벌을 말하나, 이에 앞서 고려 폐왕(廢王) 창(昌) 때와 조선 태조 때도 있었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에 있어 중개를 맡는 특수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그 토지가 협소척박(狹小瘠薄)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해야 생활을 유지하므로 고려 말부터 조공과 동시에 미곡(米穀)을 받아갔다. 또 조선에서도 대마도를 우대하였으며 대마도는 통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饑饉)이 들 때에는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게 되었다. ① 1389년(공양왕 1) 박위(朴威)가 병선 백 척으로 대마도를 공격, 왜선 삼백 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 피로민(被虜民) 남녀 백여 명을 찾아왔다. ② 1396년(조선 태조 5)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오도병마처치사(吾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③ 1418년(태종 18)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이 뒤를 계승하면서 그곳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자 해적들은 대거하여 명나라 해안을 향하는 도중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을 약탈했다. 조선에서는 왜구의 창궐이 대마도의 신도주(新島主)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하여, 1419년(세종 1) 6월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유정현(柳廷顯)을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로 삼아 삼남(三南)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천 명으로 마산포(馬山浦)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진격하였다. 당시 일본은 쿠슈(九州) 제후(諸侯)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케 하였으므로 원정군은 전도(全島)의 토벌을 기할 수는 없었으나 심대한 타격을 주고 그해 6월 회군하였다. 세종 원년이 기해년(己亥年)이므로, 일명 기해동정(己亥東征) 혹은 기해정왜역(己亥征倭役)이라고도 한다.

3포의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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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浦-開港

세종 8년(1426) 대마도주 종씨의 청에 의하여 3포구를 개항하고 왜인들에게 교역을 허락한 일. 세종 초년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의 종씨는 단절된 조선과의 정상적 교역을 누차 청하여 왔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그들에 대한 유화책의 하나로 3포를 개항했다. 그래서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 동래의 부산포(富山浦), 울산의 염포(鹽浦) 등 3포를 열어 무역할 것을 허락하였다. 3포에는 각각 왜관을 두어 왜인 60명에 대하여 거주를 허락하였다.

계해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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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條約

세종 25년(1443) 변효문(卞孝文) 등이 대마도주 종씨와 맺은 조약. 3포의 개항 이후 3포에는 수많은 왜인이 거주하게 되고, 그들을 통한 미곡·면포(綿布) 등의 수출이 거액에 달하여 끼치는 해가 컸다. 이에 계해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 의해 대마도주는 연(年) 50척의 세견선(歲遣船)을 파견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도 도주(島主)의 도서(圖書)가 찍힌 증명서가 있어야만 입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1년에 주는 세사미두(歲賜米豆)는 2백 석으로 정하였다.

임시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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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約條

1512년(중종 7) 우리나라와 쓰시마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약조. 3포의 왜란(倭亂)이 있은 후 조정은 3포를 폐쇄하고, 왜인과의 교통을 끊으니, 물자의 곤란을 받게 된 쓰시마즈주는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를 통해서 중 붕중(?中)을 보내서 교역을 간청해 왔다. 본래 조정에서는 쓰시마와의 교역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그곳은 물자가 궁핍하여 일방적(一方的)으로 조선에 의존하여 왔고, 또 조선에 이접한 왜구의 근거지인 까닭에 그것을 무마하는 해방정책(海防政策)의 일환으로서의 의미가 있으므로 전일(前一)의 반민(叛民)을 처벌하고 그 적도(賊徒)의 수급(首級)을 사형에 처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이를 확인한 후에 이 약조를 체결하였다. 즉 전번의 계해조약(癸亥條約)을 폐기하고 그보다 왜인에 대한 제한을 엄히 하여, 왜인의 3포 거주를 금하고, 3포 중 제포(薺浦)만을 개항하며, 종전의 세견선(歲遣船)의 수 50척을 반감하여 매해 25척으로 하고, 종전의 세사미두(歲賜米豆) 200석을 반감하여 매해 100석으로 한 것이다. 그 후 제포(薺浦)도 형세가 불온하여지자 1544년(중종 39)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김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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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瑞 (1390

1453)

조선의 정치가.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순천(順天),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2)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이 되고,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인(野人)들의 변경 침입을 격퇴했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했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 절제사를 겸직, 양인의 정세를 탐지·보고하여 그 비변책(備邊策)을 건의했고 1440년 형조와 예조판서를 지낸 후 1446년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449년 권제(權?) 등이 수정하여 쓴 『고려사(高麗史)』가 공정하지 못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그 총 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했다. 평안도 도절제사를 거쳐 1450년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총재관을 거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했다. 이해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으로 황보인(皇甫仁)·정본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했다. 문종의 유명(遺命)으로 단종을 협찬하던 재상 가운데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붙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으로서 왕위를 노리던 수양 대군(首楊大君:세조)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격살(擊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제1차 희생자가 되었다.

6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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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鎭 세종 때 동북면의 여진족 내습(來襲)에 대비하여 두만강의 하류 남안(南岸)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지(要地) 여섯 곳. 본래 이 방면의 경략은 태조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때부터 있어서 태조 때에는 두만강까지의 지역이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뒤 야인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세종 때 김종서로 하여금 이 방면의 경략에 적극적으로 종사케 하였다. 그 결과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6진이 설치되었고, 이에 따라 몇 차례 이민이 실시되었다. 이리하여 두만강의 국경선은 확고해졌다.

4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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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郡

조선 세종 때 서북 방면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지 서북 방면에 대한 경략은 고려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세종대에 이르러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군이 설치되었다. 이리하여 압록강의 상류지역까지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후일 한때 4군이 철폐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압록강선은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북방 개척은 농토의 확장과 아울러 천연의 요새를 국경선으로 삼으려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던 것이며, 이에 조선의 국토가 완성되었다.

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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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怡 (1441

1468)

조선시대의 무신. 본관은 의령(宜寧), 태종의 외손. 세조 3년(1457)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올랐다. 이어서 서북변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예종이 세자로 전위(傳位)한 지 얼마 안된 세조 14년(1468)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을 받고 강순(康純) 등과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