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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무인시대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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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시대의 문화〔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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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일부 문인들은 출세를 단념하고 초야(草野)에 은거하며 음주와 시가(詩歌)를 즐기는 경향을 나타내었다.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기어 스스로를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 자처하였다. 다른 한편 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와 같이 최씨의 문객으로서 무인정권하에서 새로운 출세의 길을 모색하는 문인학자들도 있었다.그러나 이들에게도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두 부류의 문인들은 서로 얽혀서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이룩하였고, 그 속에서 자라난 것이 신화(神話)·전설(傳說)·일화(逸話)·시화(詩話) 등을 소재로 한 설화문학(說話文學)이었다.문종 때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을 선구로 하여, 무인시대에 이르러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이 나옴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무인정권 때 몽골의 항쟁을 통하여 민족적 의식이 고조되었고, 이것은 이 시대의 문학에도 반영되었다. 이규보의 장편 서사시(敍事詩)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이러한 민족적인 경험이 문학 작품화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고려가 몽골와는 비교도 안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민족임을 강조한 작품이기도 하다. 대각국사 의천을 정점으로 하는 고려 불교에는 무신난 이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그것은 선종(禪宗)에 있어서의 조계종(曹溪宗)의 확립이었다. 천태종의 성립에 자극받아 선종의 9산은 종명(宗名)을 새로 조계종(曹溪宗)이라 하고 진흥을 꾀하였던 것이다.조계종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에 이르러 크게 종풍(宗風)을 떨쳤으며, 내면적으로 통일되었다. 지눌은 의천과는 달리 선(禪)을 주로 하는 선교조화(禪敎調和)·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한 것이다. 이 지눌의 종지(宗旨)를 받드는 해동조계종(海東曹溪宗)은 고려 불교의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무인정권 시대 이후 선종의 융성은 고려 불교의 내적 발전을 의미한다. 이는 왕실 및 문신귀족과 결탁한 세속적인 불교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속세의 현실을 불경(佛經)에 의해서 연역적으로 설명하는 교종(敎宗)의 기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리하여 불교는 현실세계와 점차 유리되어 갔고, 또 한편으로는 민간에 침투하여 점차 미신화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자아냈다. 불교는 이제 정신계에 있어서의 지도적인 능력을 스스로 상실하여 갔던 것이다.문인들은 무신정권 아래서 문필과 행정사무의 기능인으로서 벼슬을 구하거나 그 문객(門客)이 되어 무인집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나 문장을 짓곤 하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창작에서도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견해를 지극히 조심스럽게 표명하였다. 사상 면에서 보면 고려전기 유학 발전의 여파로 임춘(林椿)과 같은 인물에서는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소양이 발견된다.그러나 그가 벼슬길에도 나아가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다 끝내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듯이, 새로운 사상이 뻗어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이규보(李奎報)는 최씨정권 아래서 재상의 직위에까지 오른 바 있지만, 재정 지원이 없어 국학이 유명무실해진 현실을 탄식하며 국학의 부흥에 기약 없는 희망을 갖는 데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문학에서는 시화(詩話)·고사(故事)·전설 등을 소재로 하여 이를 소일거리 이야기 형태로 표현한 글들이 유행하였다.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었는데, 이러한 작품들의 작자는 당대의 손꼽히는 문필가로서 최씨정권에 발탁되어 활동한 인물들이었다.이 작품들은 비록 한담 식의 글들이지만, 그 속에는 무신정권을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나마 종종 작자 나름의 생각이 담기곤 하였다.특히 고가를 다룬 글들 중에는 『삼국사기』에서 소홀히 다룬 전통문화에 대한 사실들에 주목하여, 새로운 역사인식을 모색하는 면도 엿보인다. 그러한 역사인식은 다른 형태로도 저술되었으니, 이규보는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에서 고대 신화에 대해 부정적인 김부식의 역사이해에서 벗어나, 고대 문화에 내재된 기상과 활력을 새로이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무신정권의 기반이 확고해진 이후 문인들은 무신들이 주도하는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억눌린 현실로부터 무언가 변화를 꿈꾸었다. 이러한 가운데 경기체가(景幾體歌)라는 새로운 유형의 문인 시가(詩歌)가 등장하여, 이후 고려후기와 조선전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최씨집권기에 지어진 「한림별곡(翰林別曲)」은 당시 문인들의 문필 재능과 지식을 과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당시 문인들의 주변에서 높게 평가되거나 애호되는 것들을 호쾌한 기분으로 노래한 것이다.기술문화에서는 우선 인쇄술의 발달을 들 수 있으니, 특히 우수한 종이 제조기술, 금속주조·세공기술 등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가 발명되어, 고종 21년(1234)에는 인종대에 편찬된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현존하는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는 1297년의 『청량답순종심요법문(淸凉答順宗心要文法)』과 1377년의 『직지심경(直指心經)』이 알려져 있다. 당시의 금속활자인쇄는 활자를 고정시키는 기술의 제약으로 다량의 인쇄를 할 때는 목판인쇄보다 효율이 떨어졌지만, 적은 수량의 책을 간행할 때는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당시의 인쇄물들은 발행부수가 적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활자인쇄의 효용은 컸다.종래의 목판인쇄술도 정교하게 발달하여, 현재 해인사에 소장된 대장경판과 같은 걸작이 만들어졌다. 인쇄 후 활자판을 해체하여 활자를 다시 사용하는 금속활자인쇄와 달리 목판인쇄의 경우는 판목을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인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금속활자의 작업으로 1251년에 완성된 재조대장경의 8만 1천여 매에 달하는 판목은 변형이나 부식 등을 방지하는 가공기술과 미려한 판각기술에 의해 제작됨으로써 7백년이 더 지난 현재에도 훌륭히 인쇄를 해낼 수 있다.의학은 국초부터도 중요시되어 학교에 의학박사가 있었으며 과거에는 의과가 설치되었다. 10세기 말 성종대에 지방에 파견된 교육관 중에도 의학박사가 경학박사와 함께 들어가 있었다. 또한 개경과 서경에는 일찍부터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 설치되어 의료사업과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들의 구제를 맡았고, 예종 7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이 설치되어 백성들에게 의약을 보급하는 등 국가적인 의료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신라 이래 그간의 의술은 대개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이어서 약재도 대부분 수입품이었다. 그런데 점차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12세기 후반 이후에는 중국의 의술로부터 나름의 체계를 세우려는 노력이 이루어져 의서들이 편찬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고종 23년에 편찬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의서 중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향약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약재인 당약(唐藥)에 대해 토산약재를 일컫는 말이다. 이 책은 50여 종에 달하는 질병에 대해 값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수입약재 대신 180종의 토산 약재들을 사용한 처방과 치료법이 세 권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는 의료혜택의 범위를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한국 전통의술의 발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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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老 (1152

1220)

고려 명종 때의 문인·학자. 호는 쌍명재(雙明齋). 정중부의 난 때 난을 피해 절에 들어갔다가 뒤에 환속(還俗)하여 명종 10년(1180) 문과에 급제하였다. 직사관(直史館)이 된 후 14년 간 사국(史局)과 한림원(翰林院)에 재직했다. 관계(官界)에 있는 동안에도 현실에 싫증을 느끼고, 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이담(李湛) 등과 망년우(忘年友)를 맺어 시와 술을 즐기며,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받아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 자처했다. 그는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한유(韓愈)의 고문(古文)을 따랐고, 소식(蘇軾)의 시를 좋아했다. 저서로는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 등이 있다.

임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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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椿 고려 인종 때의 문인. 임씨(林氏)의 시조. 의종 24년(1170) 정중부의 난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이른바 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났던 그의 유고(遺稿)는 이인로에 의해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으로 편찬되었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그의 시문이 기록되어 있고, 두 편의 가전체(假傳體) 소설이 전한다. 저서로는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이 있다.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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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奎報 (1168

1241)

고려의 문장가. 초명은 인저(仁?),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산인(白雲山人)·백운거사, 시호는 문순(文順). 본관은 황려(黃驪縣:驪興). 호부낭중(戶部郎中) 이윤수(李允綏)의 아들. 9세 때부터 경사(經師):백가(百家):노불(老佛)의 문헌들을 모두 섭렵하여 한 번만 읽으면 기억하는 기발한 재사였다.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불리었으며 한때는 권신의 압객(狎客)이란 말도 들었으나 기개가 있고 성격이 강직해서 조정에서는 인중룡(人中龍)이란 평이 있었다. 1191년(명종 20) 진사에 합격, 1199년(신종 2) 동경(東京:경주)에 반란이 일어나자 자원 종군하여 병마녹사(兵馬綠事) 겸 수제(修製)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의 명으로 『모정기(茅亭記)』를 쓰고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 1213년(강종 2) 40여 운(韻)의 시 『공작(孔雀)』을 쓰고 사재승(司宰丞), 1218년(고종 5) 좌사간(左司諫)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1230년(고종 17) 잠시 위도(?島)에 귀양갔다가 다시 기용되어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태자소부(太子少傅)·참지정사(參知政使)를 거쳐 1237년(고종 24)에는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使)로 관계에서 사퇴했다.이렇듯 그의 생애 전반기에는 관운이 그리 신통치 않았으나 관계에 들어선 후부터는 벼슬이 누진, 비교적 순탄한 생애를 보냈다. 1·2차의 좌천과 귀양도 있었지만 짧은 기간이었고 글 한 수에 벼슬 하나를 얻는 문재로써 관운이 있었던 사람이다.

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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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滋 (1188

1260)

고려 강종·고종 때의 문신. 호는 동산수(東山?), 충(?)의 후손. 강종(康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학 학유(國學學諭)로 있을 때 문재(文才)를 이규보에게 인정받아 문한(文翰)을 맡았다. 그 후 최우(崔瑀)에게 신임을 받고 상주목사(尙州牧師)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충청·전라도의 안찰사(安察使)를 역임한 뒤 문하시랑(門下侍郞) 등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시문(詩文)이 뛰어나 당대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저서로는 『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 『보한집(補閑集)』 『삼도부(三都賦)』가 있다.

『동국이상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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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李相國集

고려 고종 때 문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文集). 이규보의 아들 이함(李涵)이 간행했다. 전집 권 1

18은 연보(年譜)·시(詩), 권 19

20은 잡저(雜著)·상량문(上樑文)·구호(口號)·송(頌)·서(序), 권 22는 잡문(雜文), 권 23

32는 기(記)·방문(?文)·서(書)·서장(書狀)·표(表)·인국교통소제표전장(隣國交通所製表?狀), 권 33 34는 교서(敎書)·비답(批答)·조서(詔書)·마제(麻制)·관고(官誥), 권 35

36은 비명(碑銘)·묘지뇌언(墓誌?言), 권 37은 애사(哀辭)·제문(祭文), 권 38은 도량(道場)·초소(醮疏)·제문, 권 39는 불도소(佛道疏), 권 40

41은 석도소(釋道疏)·제축(祭祝)으로 되어 있다. 후집 12권의 내용도 전집의 내용과 같은 것을 취급하고 있다.

『파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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破閑集

고려 명종 때의 문인 이인로(李仁老)의 설화문학집(說話文學集). 아들 이세황(李世黃)이 유고(遺稿)를 수습하여 간행한 것이다. 고려 시대의 각판잔존본(刻板殘存本)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내용은 시화(詩話)·문담(文談)·기사(記事) 등과 계림(鷄林)의 옛 풍속, 평양의 산하(山河)와 인물, 개경의 궁정·사관(寺觀) 등 풍물을 기록하고 있어 고려 문화의 일반(一斑)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명유(名儒)의 시문이 인멸된 것을 개탄하여 수록했다고 한다.

조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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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溪宗

불교의 한 종파. 신라 때부터 내려온 9산선문(九山禪門)을 고려 때 합친 것이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의하여 수립된 천태종이 종세(宗勢)를 확장해가자 이에 선종(禪宗)이 자극을 받아 성립된 것이 조계종이다.본래 조계는 중국 선종 6조(禪宗六租)인 혜능(慧能)의 별호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후 지눌(知訥)·백운(白雲)·태고(太古)에 의해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선종의 여러 교파 중 이 교파만이 그 법맥(法脈)을 오래 유지하여 오다가 조선 태종 7년(1407), 천태종과 총남종(摠南宗)을 아울러서 선종으로 고치고, 1941년 또다시 교종(敎宗)을 합하여 단일종(單一宗)으로 만들었다. 이때 혜능선사의 조계산 이름을 빌려다 조계종이라 붙이고, 태고국사(太古國師)를 종조(宗祖)로 삼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5교 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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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敎兩宗 고려에서 조선 초기에 걸친 불교 교파의 총칭. 신라의 불교는 5교 9산(五敎九山)이라 하여 계율종(戒律宗)·법상종(法相宗)·열반종(涅槃宗)·법성종(法性宗)·원융종(圓融宗)의 5교 및 선적(禪寂)의 가지(迦智)·실상(實相)·도굴(??)·동리(桐里)·사자(師子)·성주(聖住)·희양(曦陽)·봉림(鳳林)·수미(須彌)의 9산문(九山門)이 있었다. 그 내용은 해석이 구구하여 일치하지 않는다. 통설에 의하면 5교는 각기 다섯 가지 종파를 의미하나 9산은 종파가 아니라 아홉 개의 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 같이 선적종(禪寂宗)에 속한다.고려 숙종 때 의천이 교·선 일치를 주장하고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니, 종래의 선적종을 조계종(曹溪宗)이라 개칭하여 천태종과 조계종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종전의 5교와 조계·천태 두 종을 합하여 5교 양종이라는 이름이 생겼다.5교의 계율·법상·열반·법성·원융은 뒤에 각각 남산종(南山宗)·자은종(慈恩宗)·시흥종(始興宗)·중도종(中道宗)·화엄종(華嚴宗)으로 불리게 되고,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는 억불책(抑佛策)에 의해 세종 때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정리되었다.

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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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訥 (1158

1210)

고려의 고승.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동주(洞州:端興) 출생. 정광우(鄭光遇)의 아들. 어머니는 조(趙)씨. 8세에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어 구계(具戒)를 받고 일정한 스승 없이 도를 구하였다. 1182년(명종 12) 선과(禪科)에 합격하였고, 창평(昌平)의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육조단경(六組壇經)』을 열독하다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속세를 피하고 도를 구하기 위하여 하가산(下枷山) 보문사(普門寺)에 들어가 대장경을 열독하다가 이장자(李長者)의 화엄론을 얻고 더욱 믿음이 굳게 되었다.득재(得才)의 청으로 팔공산 거조사(居組寺)에서 여러 고승을 맞아 몇 해 동안 정혜(定慧)를 익히다가 신종 때 지리산에 들어가 상무주암(上無住菴)에 숨어 있으면서 외부 세상과 인연을 끊고 내관(內觀)에 힘써 현묘한 데까지 이르렀다.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서 11년 동안 승도들을 데리고 법을 행하니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왔고 그들에게 『금강경(金剛經)』 『육조단경』 『화엄론(華嚴論)』 『대혜록(大慧錄)』 등으로 가르치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經截門)의 3종으로 수행하니 믿음에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억보산(億寶山)의 백운정사(白雲政社)·적취암(積翠암庵)과 서석산(瑞石山)의 주봉란야(主峰蘭若)·조월암(組月菴) 등은 다 지눌이 창건하고 왕래하며 수선(修禪)하였다. 희종이 즉위하여 송악산을 조계산(曹溪山),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치고 제방(題榜)을 친히 써서 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보내왔다.승도를 소집하여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설법하며 주장을 잡자 사망하니 탑을 세우고 감로(甘露)라 이름하였다. 왕이 문신 김군수(金君綬)에게 비문을 찬수케 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병화에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은 것을 1678년(숙종 4)에 백암(栢菴)·성총(惺聰) 등이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