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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국가와 문화〔槪說〕[편집]

기원전 3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는 역사시대에 들어간다. 남부의 충적지(沖積地)에 정주한 수메르인은 문자를 발명, 엔시(Ensi)라고 불리는 지도자에 의하여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루가르(Lugar:王)라고 불리는 실권자가 나타나 수메르 지방을 일시적으로 지배했다.기원전 3000년경부터 바빌로니아의 북부에 정착한 셈계(系)의 아카드인은 사르곤 1세 지배하에 기원전 23세기에 바빌로니아를 통일하였고, 각지에 원정하여 아카드 제국을 세웠다. 아카드의 영역은 나람신 시대에 가장 커졌다. 후에 아카드 왕조는 동북방의 만족(蠻族) 구티움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구티움을 무찌른 우루크의 우투헤갈 다음, 기원전 23세기, 메소포타미아에는 다시 수메르인의 문화가 번영했다. 우르 제3왕조의 중앙집권적 지배하에서, 여러 도시의 신전이나 지구라트가 재건되고, 새로운 운하도 건설되었다. 그러나 셈계(系) 아무르루인의 침입으로 우르 제3왕조의 지배가 흔들리고, 끝내 기원전 20세기에는 이신(Isin)·라르사(Larsa) 시대에 들어간다. 약 250년의 혼란을 수습하고 바빌로니아를 재통일한 것은 바빌론 제1왕조의 함무라비이다. 그의 지배 아래 바빌로니아는 고전시대를 맞이해서 메소포타미아는 셈화되었다. 해국(海國)의 침입과 히타이트의 공격으로 이 왕조는 멸망하고 기원전 16세기에는 카시트의 지배하에 바빌로니아는 암흑 시대에 들어가는데, 이때에 북방의 아시리아가 점점 발흥(勃興)하였다.

메소포타미아[편집]

Mesopotamia

그리스어로 두 개의 강 사이라는 뜻인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유역을 가리킨다. 현재는 이라크·북부의 아시리아와 남부의 바빌로니아로 나뉜다. 바빌로니아는 다시 페르시아만(灣)에 가까운 남쪽의 수메르 지방과 북쪽의 아카드 지방으로 나뉜다.

수메르인[편집]

-人 Sumerians

기원전 4000년경에 수메르 지방에 정착, 기원전 3000년 초에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설형문자(楔形文字)를 발명했다. 수메르어는 교착어(膠着語)의 일종인데 그들이 언제쯤, 어디에서 이주(移住)하여 왔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구구하다.

초기 왕조 시대[편집]

初期王朝時代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전 23세기까지의 수메르인의 도시국가(에리두, 니푸르, 우루쿠, 우르, 라가시, 움마, 시르파크)가 서로 동맹하고 항쟁한 시대. 도시국가는 엔시(제사와 군사·행정을 장악한 군주)의 지배 아래 통괄되고, 농민의 대부분은 신전을 중심으로 한 경제 조직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르 제1왕조의 여러 왕은 루갈(王)이라 불렀다. 이 시대의 말엽에, 라가시에서 우루카기나의 개혁이 일어났다. 움마의 엔시, 루갈작게시는 라가시를 파괴하여 수메르의 여러 도시를 공략, 여러 신전을 재건했다. 그러나 아카드의 사르곤에게 패하여 잡히게 되었다.

설형문자[편집]

楔形文字

자획(字劃)이 쐐기 형상을 하고 있는 문자. 점토판 위에 골필이나 철필로 새기듯이 써서 글자획의 한쪽 끝이 삼각형을 이루어 쐐기 모양이 되어 있다하여 18세기 초부터 설형문자라 일컬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중국의 한자와 더불어 수메르어·바빌로니아어·아카드어 등을 표기하는 데 쓰인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문자 중의 하나이다. 수메르인이 만들어낸 문자로서 처음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기 방법을 창안했다. 문자기호로서 처음에는 세로쓰기였던 것이 모양 그대로 가로쓰기가 되었고, 그림 모양은 선으로 나타내 더욱 추상적이 되었다. 후에 점토판에 철필처럼 생긴 것으로 새겨 쐐기 모양이 일반화되었다.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인(人)은 이러한 문자체계를 그대로 계승하여 그들의 사용언어인 아카드어로 표기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 설형문자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뒤 이 문자체계에 의해 기록된 수메르어·아카드어 등에 관한 연구 또한 급속히 발전하여 고대 서아시아에 관한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

점토판[편집]

粘土板 Clay tablet

습한 점토에 갈대 펜으로 설형문자를 기록한 것. 보통 장방형이다. 점토판은 계약서·회계 문서·연대기(年代記)·왕명표(王名表)·법전·외교문서·종교문서·문학작품·사전류·천체 관측표·수표(數表) 등의 종류가 있다.

양건벽돌[편집]

陽乾煉瓦

목재가 귀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토가 건축 자재로 쓰였다. 피제(Pise:진흙)와 갈대로 집을 지었는데 점토를 물로 반죽하여 일정한 틀에 넣고 말린 벽돌(陽乾煉瓦)이 기원전 5000년경부터 만들어졌다. 후에 불에 굽는 벽돌이 만들어졌는데 신전·왕궁·주택 창고의 건축에 이것이 쓰였다.

우르의 왕릉[편집]

-王陵

1917년부터 영국의 울리(L. Wolley)경에 의하여 발굴된 우르(엘 무카이 야르)의 유적에 있는 왕릉군(王陵群). 우르 제1왕조의 메산니파다(Mesannepadda), 아안니파다나 그 왕비의 무덤으로 이루어졌는데, 지하에 세로로 굴을 파서 만들었다. 어떤 왕릉의 입구에는 종인(從人)·사륜거(四輪車)·가축이 순장(殉葬)되어 있다. 슈브아드 왕비의 묘에는 정교한 금·은 세공과 보석을 박은 머리장식품·빗·귀걸이 등의 장신구를 여왕의 시체에 장식하여 수많은 시녀와 같이 매장하였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하프, 황금단검과 투구, 7현금(七弦琴) 등 다수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지구라트[편집]

Ziggurat

햇볕에 말려 만든 벽돌이나 구워 만든 벽돌로 만들어진 메소포타미아나 엘람 도시의 주신에 바쳐진 성탑(聖塔). 원형은 우바이드기(Ubaid 期)의 기단(基壇)을 가진 신전으로서, 우르 제3왕조 우르의 성탑은 난나르(Nannar)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기단은 3단인데 꼭대기에는 신전을 떠받들고 있다. ‘바벨탑’이라 하여 유명한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바빌론 성탑은 7층의 기단을 가진 마르두크신의 성탑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신들[편집]

-神-

수메르인의 도시는, 주신과 그에 부속한 신들을 숭배했다. 폭풍신 엔릴은 니푸르에, 하늘의 신 아누는 우루크에, 수신(水神) 엔키는 에리두에, 월신(月神) 난나르는 우르에 진좌했다. 전쟁과 풍요의 여신 이난나(이쉬타르)도 숭배되었다. 셈 사람들도 이 신들의 신앙을 답습했으나,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Marduk)는 엔릴과 합하여, 메소포타미아 판테온의 주신이 되었다.

바빌로니아 문학[편집]

-文學

수메르인의 문학 작품은 구약성서·창세기·그리스 신화의 원형이 되었다. 우르크왕 길가메시의 서사시(敍事詩)는 왕과 친구 엔키두의 모험과 불사(不死)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홍수 전설을 포함하고 있다. 아무르루인(人)은 마르두크 찬가(讚歌)를 남기고, 천지창조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과학[편집]

-科學

농경경제를 기초로 한 수메르인에 의해 건설된 도시국가에서 그림문자로부터 추상적 개념을 표기할 수 있는 표의(表意)·표음(表音) 문자인 설형문자가 발명되었고, 그 문자에 따라 12진법과 60진법에 의한 기수법(記數法)을 정착시켰다. 또한 왕의 신관(神官)이나 서기(書記)들은 물납(物納)으로 모인 국가의 재산을 관리해야 했는데, 그 양이 방대하여 계산서·계약서·기호표 등을 만들었고, 60진법에 의한 곱셈표, 나눗셈을 위한 역수표(逆數表)·제곱표 등을 만들기도 했다. 연(年)은 춘분경의 신월(新月)을 기점으로 하는 1월에 시작되어, 1개월을 30일, 12개월을 1년(360일)으로 정하여 3, 4년에 한번 윤달을 두었다. 원둘레를 360도로 나누었고, 1일은 12시간, 1시간은 60분, 1분은 60초로 세분했다. 1개월은 4주(週)로 나누고 주는 천체의 이름을 가진 7 혹은 8개의 요일로 나누었다. 셈 민족은 이 수체계(數體系)를 수메르인으로부터 인계받았다.

아카드인[편집]

-人 Akkadians

셈계의 반유목민으로, 기원전 3000년경부터 바빌로니아 북부에 정착, 수메르 문화를 흡수하고 아카드어로 설형문자를 썼다. 아카드인의 왕 사르곤 1세(Sargon Ⅰ)는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다. 수도는 아카드(미발굴).

아카드 왕조 시대[편집]

-王朝時代

기원전 2242년부터 기원전 2098년까지. 사르곤 1세는 루갈작게시를 붙잡아 바빌로니아를 평정하고, 다시 이웃 나라를 원정하여 세계의 왕이라 불렀다. 그의 손자 나람신(Naramsin, 전 2159

전 2123?) 시대에 아카드 왕조의 판도는 가장 커졌다. 나람신은 자기를 신격화(神格化)하고, 시리아에 원정했으며, 이집트의 국경에 달했다. 아카드 왕조는 정치적으로 오랜 독립역사를 지닌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국가를 통합, 최초의 집권적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또한 서아시아 사상 최초로 군사적·상업적 제국을 구현했는데, 사르곤의 서방원정을 기록한 비문과 나람신 비문은 여러 지점에서 발견되어, 영토확대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문화사적으로

는 수메르·아카드 문화의 복합체로 수메르인에게서 배운 설형문자로 아카드어를 점토판에 써서 남겼다. 나람신 전승비와 니네베의 출토품으로서 사르곤왕을 나타낸 청동제 두상은 아카드어를 기록한 설형문자 서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문화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수메르인의 반란과 동북 산악 지대의 만(蠻)족 구티움의 침입으로 아카드 왕조는 멸망했다. 구티움의 지배 시대에 라가시는 구데아(Gudea) 아래에서 번영했다.

우르 제3왕조 시대[편집]

-第三王朝時代

기원전 2044년부터 기원전 1936년까지. 우루크의 우투헤갈은 구티움을 무찔렀으나, 우르의 우르남무(Ur. Nammu)에게 패했다. 우르남무는 수도 우르의 여러 신전이나 지구라트를 재건하고 바빌로니아를 통일했다. 그의 아들 슐기(Shulgi)는 엘람을 정복, 자기를 신격화했다. 이에 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함무라비 법전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다수의 점토서판(粘土書板)이 발견되어 당시의 경제활동과 교역활동을 말해주고 있다. 바빌로니아는 다시금 수메르인 왕조의 지배하에 번영했다. 이 시대 중앙 집권적 왕실 경제가 다른 여러 도시의 경제를 눌렀다. 그러나 아무르루인의 침입과 엘람의 침략에 의하여 우르 제3왕조는 멸망되고, 이신 라르사 시대에 들어갔다. 수메르 지방의 라르사와 아카드 지방의 이신(Isin)을 수도로 하는 두 개의 왕조가 바빌로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분쟁하였으나, 바빌론도 차차 세력을 갖추어 유지했다. 에시눈나·마리 등도 이 때 발흥했다.

아무르루인[편집]

-人 Ammorites

기원전 30세기 말경부터 셈계(系)의 반유목민(半遊牧民)인 아무르루인이 바빌로니아에 침입하여 정착했다. 아무르루인은 아카드어(語)의 설형문자를 썼으며, 이신·라르사·바빌론·에시눈나 등의 나라를 세워 바빌로니아를 셈화(化)했다.

바빌론 제1왕조 시대[편집]

-第一王朝時代

(전 1826

전 1526) 바빌론 제1왕조 여섯 번째의 왕 함무라비(Hammurabi 전 1724

전 1682)는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무렵에 아시리아 왕 샤므시 아다드에게 승복되어 있었으나 샤므시 아다드가 죽은 후, 마리(Mari)의 짐리림왕(王)과 동맹하고 이웃 나라들을 정복했다. 그는 에시눈나를 멸하고 바빌로니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라르사(Larsa) 왕조의 림신(Rimsin)을 굴복시키고 엘람까지도 지배했다. 함무라비의 지배 아래 바빌로니아는 다시금 통일되었다. 수도 바빌론에 신전·왕궁을 재건하고, 각지에 운하를 개설하였으며, 법전(法典)을 편찬했다. 함무라비의 아들 삼수일루나(Samsuiluna) 시대에도 바빌론은 번영했다. 그러나 남쪽으로부터의 해국의 침입과 히타이트의 침략으로 바빌론 제1왕조는 멸망했다. 이 시대에 사적(私的) 경제의 발달이 뚜렷하여 대실업가(부동산이나 노예의 매매, 고리대금을 했다)나 상인이 나타났다. 신관(神官)이나 여신관(女神官)도 업무에 종사했다. 수공업도 발달하여 벽돌굽기·직공·대장간·목수(木手) 등의 직업인이 활약했다. 그리고 병사는 농토를 나누어 받았다. 이 시대의 사회 계급으로는 완전한 법적 권리를 가진 귀족과, 법적 권리가 제한되어 있는 반자유민과, 주인 뜻대로 처분되는 노예가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편집]

-法典

1901년 프랑스의 탐험대에 의하여 발견된 섬록암(閃綠岩)의 비문. 위에는 부조(浮彫)한 것이 있으며, 아래에는 아카드어(語)의 전문(前文)과 후문(입법 정신과 신에게의 기도문) 및 282조의 조문이 새겨져 있다. 함무라비의 치세(治世) 말년에 편찬되었다. 이 법전은 우르남무 법전(전 21세기?), 리피트이시타르(Lipit-Ishtar) 법전(전 19세기), 에시눈나 법전(전 18세기?)의 내용을 본뜨고는 있으나, 독특한 조문이 많이 들어가 있다. 법전은 형법(刑法)·소송법·민법(가족법·대차·매매·기탁·상인 조합에 관한 조문) 등으로 되어 있으며, 형법은 복수법(復讐法)의 원칙은 서 있으나, 계급에 따라 다르다. 함무라비 법전은 뒤에 아시리아 법전·히타이트 법전에 영향을 주어, 설형문자를 쓰던 여러 민족과 국가의 법률에 영향을 끼쳤다.

알라카의 왕릉[편집]

-王陵

알라카(Alaca)에 있는 왕릉군(王陵群)인데, 기원전 3000년 중간 이후의 것. 능은 수혈(竪穴)로 되어 있는데, 석곽(石槨)이 있고, 네 귀퉁이에는 나무기둥을 세워, 천장은 땅 위에 만들어졌다. 부장품으로는 청동제의 태양 심벌, 운철제(隕鐵製) 칼, 그 밖에 금은제 장신구, 용기류 등이 있다. 히타이트인 침입 이전의 유적이다.

카나시[편집]

Kanash

기원전 2천년 초에 아시리아인은 아나톨리아 고원에 몇 개의 식민시(植民市, 카름)를 두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아수르 상관(商館)을 여기에 세워 소아시아와의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카드어로 쓰인 점토판이 많이 발견되었다.

히타이트인[편집]

-人 Hittites

기원전 3000년 초 소아시아에 침입하여, 하티인·루비아인·팔라인 등 원주민을 차차 정복, 아나톨리아 고원의 지배자가 된 인도·유럽계 민족. 처음 쿠샤라를 도읍으로 삼았으나, 뒤에 하투사스를 수도로 정했다. 하투사스는 20세기 초에 독일인 빙클러(H. Winckler)에 의해서 발굴되어, 대신전이나 성채(城砦)가 발견되었다. 왕실 기록문서고에서 히타이트어나 아카드어로 쓰인 점토판 문서 약 2만 매 이상이 출토되었다.

히타이트 왕국[편집]

-王國

기원전 18세기경, 쿠샤라 왕(王) 아나타스가 카파도키아 고원을 정복하였다. 히타이트 고왕국(古王國)의 조상은 라발나스인데, 그 아들 하투실리스는 하투사스를 수도로 정했다. 무르실리스 1세(Mur-silis Ⅰ, 전 1624

전 1594?)는 북시리아를 정복, 바빌론을 공략했다. 신왕국의 시조는 투드하리야스 2세로서 수필룰리우마스 1세(Suppiluliumas Ⅰ, 전 1380

전 1340?) 시대에 히타이트의 판도(版圖)는 가장 커졌다. 히타이트인은 소아시아의 지배를 강화하여 미탄니를 속국으로 하고, 북시리아를 세력 아래에 흡수, 이집트 다음가는 대국이 되었다. 무와탈리스는 이집트의 왕 람세스 2세의 군대와 카데시에서 싸워서 격퇴했다(전 1286). 하투실리스 2세는 이집트와 화약(和約)을 맺어(전 1269) 오리엔트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동편에서는 아시리아에게 압박되고, 소아시아 서부에서는 후리기아가 대두하여, 그리스계 해상 민족의 침입으로 기원전 1190년경 히타이트는 멸망했다.

말과 전차[편집]

馬-戰車

후르리인(Hurrians)에게 말 기르는 법을 습득한 히타이트인은, 말에 끌리게 한 6개의 바퀴살을 가진 전차를 이용하여, 미탄니군이나 이집트군과 싸웠다. 전차에는 마부와 활쏘는 병사가 탔다. 전쟁의 주된 목적은 포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철의 주조[편집]

鐵-鑄造

신왕국 시대의 수도 하투사스에서 철의 공장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철이 금, 은보다 비싸서 무기의 재료로는 일반적으로 쓰지 않았다. 히타이트는 철의 제조법을 타국에 전하지 않았으나 이 나라가 멸망한, 그 후에 오리엔트는 철기시대에 들어갔다.

카시트 왕국[편집]

-王國

인도·유럽계의 카시트인(Kassites)이 일으킨 나라인데, 바빌론 제1왕조가 멸망한 후에 해국을 정복(전 16세기 초), 약 300년간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다. 크리갈즈 1세는 두르 크리갈즈에 왕궁과 지구라트를 세웠다. 이 시대는 바빌로니아의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경계석(境界石)을 남겼으며 봉건적 지배를 했다.

미탄니 왕국[편집]

-王國

기원전 16세기경부터 기원전 13세기에 이르기까지 북시리아·북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 후르리·미탄니(Mitanni)인의 나라. 수도는 워시칸니. 기원전 15세기 사우샤타르(Saushatter)왕 때에 가장 전성기를 맞아, 아시리아를 속국으로 했다. 아마르나 시대에는 이집트, 히타이트, 카시트와 나란히 강국이었다. 기원전 14세기에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고 결국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했다.

엘람[편집]

Elam

바빌로니아 동방의 산악지대를 가리킨다. 아카드 왕조 시대부터 침략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기원전 13

전 12세기에는 독립했고, 쉬트루크 나훈테가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여 함무라비 법전의 석비(돌비석)를 약탈, 수사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