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I·세계문학·논술/북서-중부 유럽 문학/영 국 문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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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문학〔개설〕[편집]

英國文學〔槪說〕

영국문학이 14세기 시인 초서로부터 시작된다는 설이 있지만 그 연원은 역시 그로부터 6-7백년 전의 고대 영어시대의 시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066년의 노르만 정복 때까지를 고대 영어시대라고 한다면 그때까지에 대개 현대독일어를 연상케 하는 굴절어(屈折語)로 된 상당한 시와 산문이 쓰여졌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베어울프(Beowulf)라는 영웅담을 주제로 하는 전형적인 두운(頭韻) 시를 들 수 있다. 영국에 이주해온 민족들의 이름을 따서 앵글로 색슨 시(詩)라고도 불리는 이와 같은 운문은 중세에 한번 살아났다가 그 후 자취를 감추어 버려서 후세의 영문학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영시는 예나 지금이나 음절보다는 강세를 주로 하는 것이고 고대 영시의 영향을 홉킨스나 오든과 같은 현대·근대의 시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노르만 정복부터 초서까지의 영문학을 살펴보면 노르만 정복 후 약 2백년 동안 영어는 천민의 일상어로 떨어지고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이 영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13세기 초엽부터는 영어가 다시 머리를 들고 영어로 쓰인 시와 산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영어는 고대의 굴절을 대부분 잃고 프랑스어에 큰 영향을 받아서 현대영어와 가까운 것으로 크게 변화를 하였다. 산문의 대표적인 것은 아더왕 전설의 갖가지로서 후세에 로맨스(romance)와 아더왕을 주제로 한 많은 시문의 시초가 된 것이다. 한편 시로서는 <브루트(Brut)>라는 서사시를 위시해서 역시 아더왕 주변의 영웅을 주제로 한 많은 두운시가 나왔고, 초서와 거의 동시대의 작품 <농부 피어스(Piers the Plowman)>란 풍자시도 나왔으며 또 아름다운 세속 서정시가 풍성하게 쓰여졌다. 이 시기의 문학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의 압도적인 배경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또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초서는 14세기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시인이고 ‘영시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영시는 초서의 손으로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크게 세련되고 그의 <캔터베리 이야기>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더>는 영문학 최초, 최고의 고전으로 불멸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초서에서 후기 중세영국을 거의 완전하게 조감할 수 있으며,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문화와 문학의 영향을 역력하게 볼 수 있다. 또한 르네상스의 신선한 기풍을 맛볼 수도 있다.

초서 이후 백년 동안은 일종의 문학불모(不毛)시대라고 할 수 있다. 초서 모방자들이 몇몇 있었고 민요(ballads)가 더러 쓰여졌으며 교회의 풍습에서 비롯한 소위 신비극(miracle plays)이 성행했다는 이외에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 시기에 캑스턴(Caxton)에 의해서 인쇄술이 영국에 도입되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하다. 근대 영문학의 황금시대는 엘리자베스 시대였다.

이 시대의 영문학은 시·산문·희곡의 모든 면에서 유럽 문학의 압권이었다. <요정(妖精)의 여왕(The Faerie Queene)>의 스펜서에서부터 소위 철학파 시인들의 으뜸인 존던에 이르기까지의 무수한 시인이 나왔으며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거센 바람을 타고 논쟁적인 시문이 즐비하게 나온 중에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쓰여진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는 셰익스피어 이외에도 많았다. 극작가로는 말로와 벤 존슨을 들지 않을 수 없으나, 셰익스피어를 빼버리면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문학은 보잘것 없는 것이 되고 고금의 영문학이 크게 퇴색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영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서 <실락원(失樂園=Paradise Lost)>의 밀턴과 왕정 복고시대의 많은 교훈시와 풍자시, 탁월한 문학평론, 영웅극을 낸 존 드라이든을 들 수밖에 없다. 이 시기는 르네상스의 절정기였고 왕당파와 청교도주의가 뒤얽혀 있는 정치적 혼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대의 특색 있는 산물로 왕정 복고시대의 희곡이 주목할 만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서 윌리엄 콩그리브를 들고 넘어 가자.

18세기는 엘리자베스 시대 다음가는 찬란한 시대이다. 고전주의의 표본과도 같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대이고 다니엘 디포, 헨리, 필딩, 리처드슨, 스위프트 등과 같은 소설·산문작가의 시대였으며 현대적인 산문이 시작된 시대였고 애디슨과 스틸의 수필문학이 성한 시대였다. 또한 낭만주의의 전주와 같은 시를 쓴 쿠퍼, 블레이크, 그레이의 시대였고 로버트 번스가 난 시대였다. 18세기 문학을 논할 때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존슨 박사(Doctor Johnson)이다. 존슨은 18세기 문학의 한 대표자요, 당대의 석학이요, 비평가로서 군림한 압도적인 문인이었다.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서정시집(Lyrical Ballads)이 나오던 1798년부터 19세기 전반까지의 영문학은 낭만주의 그것이었고, 바이런과 셸리와 키츠가 그 주역이었다. 낭만주의는 시에서뿐만 아니라 스콧의 역사소설에서, 드 퀸시의 수필에서 나타났다. 한편 제인 오스틴과 같은 독특한 작품의 소설가가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빅토리아 시대 이후의 영문학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과 그것이 일으킨 사상적인 혼란, 제국주의적 팽창, 낭만주의로부터 고전주의에로의 전향 등 착잡한 양상이 뒤얽힌 시대에 빅토리아 여왕이 군림하였다.

이 시대의 총아는 찰스 디킨스와 조지 메레디스, 그 후를 이어서 하이드와 콘래드, 골즈워디와 같은 위대한 소설가들이 속출했다. 여기에 로렌스를 더하면 벌써 20세기에 접어 들게 된다.

테니슨과 브라우닝이 가장 대표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이었고 거기에 예이츠와 엘리엇을 더해주면 20세기의 영시를 개관할 수 있다.

희곡면에서는 19세기말 이후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들이 압도했으며 그 중에도 조지 버나드 쇼의 이름을 특필할 필요가 있다.

1880년을 전기로 사실상 빅토리아 시대는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영문학의 경우에도 1880년이 한 전기가 되어 20세기 문학이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880년 이후의 영문학을 개관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혁명적인 세태의 변화로 해서 오늘날 영문학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극히 불안정한

고비에 처했으며 근년에 와서는 침체의 기색마저 엿보인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金 鎭 萬>

앵글로 색슨 시대[편집]

앵글로 색슨 시대의 문학[편집]

-時代-文學

영문학사상(英文學史上) 앵글로 색슨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5세기 중엽 브리튼에 게르만계의 앵글족·색슨족 등이 유럽 대륙에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1066년 노르만인이 원정을 오기까지의 기간으로 서게르만어계의 어형변화가 많고 남구(南歐) 라틴계 언어의 영향이 극히 적었던 시대이다. 종교는 원래 북구적인 다신교(多神敎)로서 특히 운명신 윌드가 중시되었다. 6세기경 그리스도교의 전래(傳來)에 의하여 윌드의 그림자에 부들부들 떨던 어두운 숙명관은 새로운 자유의지의 인간관과 부활의 복음으로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이 이원적 모순은 그대로 문학작품 <베어울프> <데올> 등에 나타나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운문학(韻文學)과 함께 차차 밝기 시작한다. 스콥(創作歌人)과 그리먼(吟誦歌人)들에 의한 구비전승(口碑傳承)의 비(非)그리스도교적 음송시(吟誦詩)로서 발생되어 나중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다음에 그 학승(學僧)에 의해 쓰여졌는데 후에 여러 가지 장르의 문학이 발생하였다. 가장 오래 된 시는 <위드시스(방랑자)>라고는 하지만 이 서사시적 여가(旅歌)는 고고학적 흥미를 별도로 하면 시적 가치는 작다. 실질적으로 가장 오래된 문학적 시로는 서사시적 영웅애가(英雄哀歌)인 <베어울프>이다. <유량인> <뱃사공> <데올> 등의 서정시, <격언시> <수수께끼시> 등의 교훈시와 같이 작자는 불명하다. 그리스도교적 종교시가 출현되면 작자 또는 그 파(派)의 이름들이 나온다. 캐드몬파(派)의 <창세> <출애급>, 키니울프의 <그리스도> <엘레네> <십자가의 꿈>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이들 시는 보통 무각운(無脚韻)의 두운시(頭韻詩)로 자유로운 리듬으로 진행된다.

이 시대의 산문학의 중요한 것은 비드의 라틴문 <영국민교회사>, 알프레드왕의 라틴부터의 여러 번역, 엘프릭의 <카톨릭 설교집>, 울프스탄의 <영국민에게 고함>, 학승들의 기록으로 된 <앵글로 색슨 연대기>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그 언어에 있어 현대영어와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현대 영미(英美)문학에의 영향은 직접으로는 작으나 시문학으로는 우수하다.

베어울프[편집]

Beowulf

영문학사상(史上) 실질적으로 가장 오래된 서사시적 대작으로 그 중심은 구비(口碑)의 전승으로 발생되었는데 이설(異說)은 있지만 스콥(創作歌人)에 의해 구두전승에 편리하도록 운문화(韻文化)되어 음송가인(吟誦歌人)들에 의해서 하프의 반주로 노래되어 온 것이 7세기말 그리스도교 학승들의 손으로 고영어(古英語)의 한 방언인 앵글리어어(語)로 기술된 듯하다. 유일한 현존 사본은 10세기말에 만들어진 서(西)색슨 방언의 것이며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3천182행 고영시(古英詩)의 상례로 되어 있는 무각운 두운시이다. 대개 2부로 나누어 있는데 제1부는 남스웨덴의 부족(部族) 이에아트족의 왕족인 청년 베어울프가 덴마크왕의 주연관(酒宴館)을 소란하게 하는 괴물 그렌델과 어미를 퇴치하는 이야기 제2부는 이에아트의 왕이 된 그가 백성을 위해 화룡(火龍)을 퇴치하면서 운명을 거역할 수 없어 최후를 고하는 이야기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윤색(潤色)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교적 숙명관으로 일관된 영웅애가(英雄哀歌)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영어시대[편집]

중세 영어시대의 문학[편집]

中世英語時代-文學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1066)으로부터 종교개혁(1533)까지의 약 500년이 중세 영어시대이다. 노르만인의 승리에 따라 그 이후 150년 동안 영어는 하층계급의 언어로서 업신여김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 후 영어는 점점, 그리고 확실히 실지(失地)를 회복하여 피정복자인 영국인의 반대로 노르만 문화를 흡수하여 독특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노르만인은 자기들이 좋아했던 ‘로망스’를 영국에 가져왔던 것이다. 이에 사랑이 있고 충성심이 있고 모험이 있고, 의협심(義俠心)이 있어 그때까지의 침울한 앵글로색슨의 종교문학과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화려한 기사 이야기였다. 북프랑스가 기원(起源)인 ‘로망스’는 나중에 아서왕 이야기의 화려한 장(章)을 영국문학에 펼쳐 놓는다. 14세기 중엽에 초서 랭글런드 등이 나와 영어는 그 실지를 완전히 회복했다고 할 수 있다. 대륙문학을 영국의 풍토에 융합시킨 초서는 ‘영시(英詩)의 아버지’이며 앵글로 색슨의 의발(衣鉢)을 이은 랭글런드는 새로운 영국인의 불굴의 마음이었다. 한편 교회에 그 발생원(發生源)을 두고 있는 영국의 연극은 점차 교회를 떠나 민중의 손에 넘어가 성서이야기극(劇), 도덕극으로 발전되어 영국 고유전통의 대목(臺木)에 고전극을 접목(接木)하여 화려한 연극활동의 중심이 된 셰익스피어의 시대도 멀지않아 가까워졌다.

아서왕 이야기[편집]

Arthurian Legends

앵글로 색슨이 영국을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초엽인데 먼저 살고 있던 켈트족(族)의 명장(名將) 아서는 이를 격파하여 웨섹스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이 역사적인 진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그 이후 아서왕은 유럽 대륙과 영국 시인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다. 밀턴은 서사시의 소재(素材)로서 아서왕 이야기를 우선 생각했을 정도였고 테니슨은 <국왕 목가>를 썼다.

1147년 브르타뉴인이라 생각되는 제프리 오브 몬마스는 라틴어로 <브리튼 국왕사>를 썼으나 이는 역사가 아니고 최초의 아서왕 이야기였다. 영국에서도 라야몬이 영어로 된 영국사(英國史) <블르트>(1200년 ?)를 썼는데 그 3분의 1을 아서왕의 이야기로 메웠다. 초서와 같은 시대의 무명의 두운 시인(頭韻詩人)은 <서 거웬과 녹색의 기사>에서 아서왕 이야기에 영국적인 새로운 의미와 형식을 부여했다.

랭글런드[편집]

William Langland (1330?-1400?)

영국 시인.

14세기 종교시의 대작 <농부 피어스의 꿈>을 썼는데 그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사회부패, 특히 종교계의 타락을 파고든 그의 독특한 필치는 종교개혁자 위클리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는 위클리프처럼 교회제도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창작태도는 고대 영어시대의 <베어울프> 등과 흡사했는데, 나중에 스펜서 밀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초서와 나란히 영국문학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초서[편집]

Geoffrey chaucer (1340?-1400)

영국 시인. ‘순수한 영어의 샘’이라고 지칭되고 ‘영시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던 초서는 1340년경 런던의 유복한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업(家業)을 계승하지 않고 일찍부터 궁정에 들어가 가끔 프랑스 원정(遠征)에도 가담했고 외교관으로서 이탈리아에 부임, 플로렌스라든가 제노바를 방문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페트라르카라든가 보카치오가 아직 생존하고 있었을 때이며 유럽 문학의 일대 중심지였는데 이와 같은 그의 방문은 나중에 초서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초서는 관리보다는 오히려 시인으로서의 활동이 활발했다. 그의 문학수업(文學修業)의 제일보는 프랑스적인 ‘꿈 이야기’를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작부인의 서(書)>는 그의 후원자인 존 오브 곤트의 처(妻)에 대한 엘레지로서 중세 프랑스의 알레고리 문학 <장미의 이야기> 등에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젊은 초서의 눈은 살아 있는 인간보다도 우선 독서(讀書)의 세계를 향했으나 그의 리얼리즘의 눈은 이미 트여 있었다. 이어서 발표된 작품 <명성의 집> <새들의 의회>도 초서의 독서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전자는 단테에 많은 힘을 입고 있는데 이 무렵이 그의 재능(才能)에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에 놓여 있었다. 그 하나는 ‘꿈 이야기’ 형식에서의 그의 독자적인 완성, 다른 하나는 그의 독특한 리얼리즘의 창조였다. 전자는 <선녀열전(善女列傳)>에서 그 완성을 보여주었고 후자의 정점(頂點)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더>,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더>는 영국문학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적인 유머에 넘치는 깊이 있고 섬세한 인간에의 이해(理解)는 이 작품의 본질이다.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더의 사랑은 ‘궁정애(宮廷愛)’-12세기 남프랑스 프로방스로부터 시작된 유럽 전토를 풍미했던 연애관-를 기조(基調)로 하면서도 대단히 복잡한 심리묘사, 극적 정경묘사를 품고 있어 거기에 나타나는 현대성은 우리들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특히 두 사람의 연인(戀人)을 중재하는 판다로스의 성격묘사는 참으로 뛰어나 있다. 같은 초서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 속의 바스의 아내,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의 폴스탭과 함께 가장 주목되는 인물묘사라고 할 수 있다. ‘영시의 아버지’ 초서의 재능은 전통과 습관 속에서 항상 그의 독자적인 리얼리즘을 착실히 성장시켜 갔다.

캔터베리 이야기[편집]

The Canterbury Tales (1393-1400)

이야기문학. 초서의 걸작.

총(總) 30명 내외의 사람들이 런던의 어느 여관에 모여, 순교자 토머스 아베케트를 모시는 캔터베리의 유명한 사원(寺院)으로 순례(巡禮)를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여관집 주인이 자진하여 안내자가 되어 왕복길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순례길이 되기 위해 한 사람이 두 가지씩 이야기를 할 것을 제안한다. 이리하여 순례자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중세에 한창 성행되었던 말하자면 이야기집(集)이다. 이 같은 종류로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있다. 그리고 초서의 것과 비슷한 것은 세르칸비의 <이야기집(集)>(1374?)이다. 그러나 연극성(演劇性)으로 볼 때 이 작품들은 <캔터베리 이야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와 그것을 이야기하는 순례의 재미와 그리고 이야기와 그것을 이야기하는 인물과의 관계, 또한 다른 인물과의 관계, 등장인물로서의 초서와 작자 자신으로서의 초서 등등, 거기에 묘사되는 복잡무비(複雜無比)한 인간극(人間劇)은 ‘영시의 아버지’ 초서의 진가를 다시금 우리들에게 납득케 한다.

말로리[편집]

Sir Thomas Malory (?-1471)

영국 작가·기사(騎士).

월릭시어에서 출생. 15세기의 문학적 불모(不毛) 속에서 두 가지의 작업을 완성시켰다. 그 하나는 복잡다양했던 중세의 아서왕 이야기를 오늘날과 같이 통일된 것으로 한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간명(簡明)하고 절도 있는 새로운 산문문체를 구축한 점이었다. 캑스턴의 인쇄술 발명과 더불어 영국 산문사(散文史)에 끼친 역할이 컸다. 또 스펜서의 <요정의 여왕>을 비롯하여 19세기 시인의 아서왕 이야기에 준 영향은 크다.

문예부흥기[편집]

문예부흥기 문학[편집]

文藝復興期文學

문예부흥(르네상스)은 범(汎)유럽적인 현상인데 영국에는 100년 이상이나 늦게 파급되었기 때문에 ‘영국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독자적인 발달을 보이고 있다. 즉 회화조각(繪畵彫刻)에는 볼만한 것이 없는 대신에 문학·음악 등에 눈부신 개화(開花)를 보였다. 엘리자베스 왕조가 영국 르네상스의 최성기에 해당되며, 그 시대가 정치적으로도 영국의 발전 팽창기로 명여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문예부흥기 문학의 2대 지주(支柱)는 셰익스피어와 흠정영역성서(欽定英譯聖書;1611년 영역된 평범한 문체의 성서)로 이 두 가지가 이 시대를 후세 영문학의 최대 영향의 원천이 되게 하고 있다.

문학은 전반적으로 활발하지만 특히 연극이 가장 눈부셨고 질과 양(質量) 모두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 즉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그 이전에는 크리스토퍼 말로, 로버트 그린(1558-92), 조지 채프먼(1559?-1634), 토머스 키드(1558-94) 등 여러 대가들이 있고, 동배(同輩) 이후에는 벤 존슨, 좁 웹스터(?-1634), 시릴 터너(?-1626), 토머스 미들튼(1580-1627) 또 보먼트 플레처, 필립 매신저 등이 배출되어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연극시대를 출현시켰다. 그러나 그 반면 청교도들의 영향으로 극장폐쇄라는 사태가 야기되었던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시가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시형(詩形)이 중요하다. 하나는 와이어트에 의한 영어로 된 최초의 소네트(14행시)이며 또 하나는 그 제자 서리 백작이 처음으로 시도한 무운시(無韻詩)이다. 전자에 의해 소네트 시인이 속출되었고 후자는 말로를 거쳐서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시극에 가장 적합한 시형이었음을 실증하였다.

시인으로서는 에드먼드 스펜서가 가장 위대하고 매력적 성격 탓으로 필립 시드니경(卿)이 국민에게 인기를 모았다. 존 던은 난해한 시풍으로 인해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지만 금세기에 와서는 아주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비평문학은 영국에서는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분야로 시드니의 <시의 변호>가 가장 중요하고 벤 존슨의 고전주의도 주목해야 한다.

흠정영역성서는 간결하고 웅장한 문체로 근대 영어산문을 결정짓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한편 이에 반하여 극도로 수사적(修辭的)·장식적인 문체로 된 유페미즘도 호감을 받았다. <호린세드 연대기> 등 역사 서적도 많고 역사에 대한 관심도도 높았다. 한편 고금(古今)의 외국서적들이 한창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노드의 번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플로리오 역 <몽테뉴 에세이즈> 등이 유명하다. 또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 등의 인문주의자들의 문학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영국의 유토피아 문학 가운데 최초의 것이다.

시드니[편집]

Sir Philip Sidney (1554-1586)

영국 시인·정치가.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후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대륙 각 나라를 외유(外遊)하고 귀국 후에는 정치가 ·시인으로서 활약, 문무(文武)를 겸비한 귀족으로서 국민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586년 주트펜 전쟁에서 에스파냐군(軍)으로부터 중상을 입었을 때 바로 옆에 있던 빈사(瀕死)지경에 이른 한 병사에게 한모금의 물을 양보한 미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스펜서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누이동생 펨브로크 백작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목가적 산문이야기 <아르카디아>(1590)를 썼으며 작자 자신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나 당시의 궁정인(宮廷人)들의 환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은 모방자가 나타날 정도였다.

영국 비평문학의 선구로 보는 <시(詩)의 변호>(1595)는 이 시대의 고슨(1554-1624)이 예술의 배덕성(背德性)을 비난한 데 대한 그의 반박시론으로 오늘날도 전문가들에게는 중요시되고 있다. 이 밖에 구수한 소네트집 <아스트로펠과 스텔라> 등 애송(愛誦)되는 시 작품들이 많다.

스펜서[편집]

Edmund Spenser (1552?-1599)

영국 시인.

연극의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대시인으로 일반 독자로부터는 물론 시인들간에도 높이 평가되기 때문에 보통 ‘시인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런던에서 출생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으며 당시의 많은 시인들처럼 정치에 흥미를 갖고 아일랜드 총독 비서로 아일랜드에 건너가 관리로 일생을 보냈다.

처녀시집 <양치기의 열두 달>(1579)로 일약 시인의 지위를 확립, 친구 시드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스트로펠>(1595)에 이어 전후 20년이 소요된 대작 <요정의 여왕>을 냈다.

1594년 엘리자베스 보일과 결혼했는데 그녀에의 구애(求愛)가 <연애 소곡집>(1595)으로 나왔고 <축혼가>도 아마 그 자신의 결혼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아일랜드 반란 후 관명(官命)에 따라 상경 중 1599년 런던에서 객사, 웨스트민스터 사원(寺院)에 안장되었다.

요정의 여왕[편집]

The Faerie Queen (1590-96)

서사시. 스펜서 작.

영국문학 최대의 알레고리이다. 월터 롤리경(卿)에게 보낸 작자의 편지 속에 작품의 구상을 썼는데, 이에 의하면 요정의 여왕 글로리아는 그당시의 엘리자베스 1세를 모델로 한 것이며, 그 여왕의 축제에 12가지의 덕목(德目)을 대표하는 12명의 기사(騎士)가 하루 한 사람씩 모험을 행한다. 한편 아서왕은 글로리아 여왕의 환영(幻影)을 보고 이를 찾기 위한 그의 편력(遍歷) 도중에 기사를 도와 모험을 성공시킨다는 것이 그 줄거리이다.

12권으로 완결지으려 했지만 실제로는 6권밖에 완성시키지 못하고 사후 1609년에 제7권이 출판되었다.

말로[편집]

Christopher Marlowe (1564-1593)

16세기 영국 극작가.

캔터베리의 구둣방집 아들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온 후 극단의 전속작가로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당시의 지식문인(知識文人)으로 대학재인(大學才人)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로 활동한 대극작가였다. 회식(會食) 중에 돈계산 때문에 일어난 싸움으로 30도 채 못 된 젊은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무신론자로서 체포령이 내렸다고도 하고 또 첩보활동을 하고 있었다고도 하여 그 사인에 대해서는 의혹을 남기고 있다.

파우스트 전설을 취급한 <포스터스 박스>(1592?)를 비롯하여 <몰타섬의 유대인>(1589), <에드워드 2세>(1592) 등의 걸작을 썼다. 무운시(無韻詩)의 연극적 가능성을 높여 엘리자베스 왕조의 연극 황금시대의 선두에 서서 셰익스피어에 가장 영향을 준 작가일 뿐만 아니라 그 두세 가지 작품의 부분적 집필자였다고도 추측되고 있다.

셰익스피어[편집]

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영국 시인·극작가.

중부 잉글랜드의 조그마한 시장거리 스트렛퍼드 온 에빈에서 출생하였다(4월 26일 세례를 받은 기록이 있고, 그의 생일은 보통 그가 사망한 날 4월 23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의 부친 존 셰익스피어는 그가 4살 때 마을의 읍장(邑長)으로 있었던 유력자로 피혁가공(皮革加工)을 본업으로 하는 한편 농산물 중간도매업을 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인의 소년시절 기록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지만 당시의 스트렛퍼드에는 우수한 문법학교가 있어 그도 6-7살 때에 그곳에 입학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13세 때 그 학교를 마쳤을까말까 할 무렵에 갑자기 가운(家運)이 기울어져 아마 그로 인하여 그 이상의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18세이던 1582년 그 마을 근처에 살던 8세 연상의 안 하서웨이와 결혼, 6개월 후에 장녀를 그 다음다음해에 남녀 쌍둥이를 낳았다.

그 후 셰익스피어는 언제 어떤 사정으로 상경하여 극단(劇壇)에 들어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근처에 있는 부잣집 사냥터에서 사슴을 훔치다가 발각되어 고향에서 살지 못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상경 당시 극장의 입구에서 말을 지키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아마 그가 상경한 것은 1586년 전후라고 생각되지만 1592년에는 이미 런던 극단의 신성(新星)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뭇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594년 런던에 1년 전부터 크게 만연되었던 악성유행병이 퇴치되자 그때까지의 여러 극단이 재편성되어 해군대신 산하의 한 단체와 궁내대신(宮內大臣) 단체의 2대 극단이 조직되었을 때 그는 간부 배우 겸 전속작가로서 후자(제임스 1세 즉위 국왕 단체로 된다)에 속했다.

오늘날 셰익스피어 정전(正典)이라고 인정되는 것은 37편의 희곡과 대소 6편의 시이다. 창작활동을 시작한 것은 1590년 전후라고 생각되지만 처음의 약 5년 동안은 말하자면 습작시대(習作時代)로 사극(<헨리 6세> <리처드 3세> 이외), 희극(<말괄량이 길들이기> <한여름밤의 꿈>이외), 비극(<로미오와 줄리엣>이외) 등 갖가지 형식의 극을 시도하고 있다. 두 개의 설화시(說話詩) <비너스와 아도니스> <류크리스의 능욕>도 이 시기의 작품이고 영국 서정시의 걸작 <소네트집>도 보통 그 대부분이 1593년에서 1596년경까지 쓴 것으로 생각된다. 전기적(傳記的) 자료가 별로 없는 셰익스피어에 있어서 이 소네트 연작(聯作)은 그의 개인생활을 말하는 것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거기에 나오는 청년 귀공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여성, 경쟁상대의 시인 등에 관해서 옛날부터 논쟁이 되풀이 되어 영문학의 수수께끼로 되어 온 작품이다.

다음의 5년 동안은 희극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로 <베니스의 상인>을 비롯하여 한층 더 깊은 인간의 관찰과 원숙한 필치로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十二夜)> 등 셰익스피어 희극의 걸작들이 쓰여졌다. 사극에도 뛰어난 것이 많아 <헨리 4세>에 등장하는 기지(機智)가 풍부하며 몸집이 큰 희극적 인물 폴스타프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불후의 성격 중의 하나이다.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로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도 이 시기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이미 다음의 비극시대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

세기가 바뀔 무렵부터 셰익스피어의 심중에 무엇인가 인생에 대한 의문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진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 붕어(崩御)를 전후한 8-9년 동안에 이른바 4대 비극인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를 중심으로 인생의 어둡고 깊숙한 내면을 엿보게 하는 작품을 계속 썼다. 희극도 있지만 그것들은 조금도 희극같지 않고 ‘어두운 희극’ 또는 ‘문제의 희극’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비극의 구름은 1609년경이 되어서야 겨우 걷혀지기 시작하였다. <겨울밤 이야기> <폭풍우> 등의 이른바 ‘로맨스극(劇)’시대이다. <폭풍우>의 주인공 프로스페로의 “우리들은 꿈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은 잠으로부터 시작되어 잠으로 끝난다”라는 말에 만년의 셰익스피어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즐거움도 슬픔도 다 겪은 후의 폭풍우 자국과도 같은 정막 속에서의 체념으로 조화와 관용의 정신을 갖고 인생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1601년경부터 셰익스피어는 1년 동안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내면서 1616년 4월 23일 일생을 마쳤다.

1623년에 친구들의 손으로 최초의 셰익스피어 전집 <제1·2절본>이 편찬되어 벤 존슨은 이에 붙이는 송시(頌詩)에서 셰익스피어는 “한 세대의 것이 아니고 만대의 것이다”라고 높이 썼으며 정말 셰익스피어의 인기는 생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어 쇠퇴하지 않았고 콜리지의 “천만인(千萬人)의 마음속에서 찬양을 받는 셰익스피어”라는 찬사는 그중에도 특히 유명하다. 그리하여 오늘날 영어(英語)국민의 가정에서 성서와 더불어 셰익스피어 전집이 없다면 어딘가 부족한 감이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편집]

Romeo and Juliet (추정 1594-95)

셰익스피어 비극.

베로나의 명가(名家)인 몬타규·캐퓰렛 양가(兩家)는 서로 개와 원숭이의 사이처럼 사이가 좋지 않은 집안인데 전자의 아들 로미오와 후자의 딸 줄리엣은 첫눈에 그만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이 숙명의 연인들은 승려 로렌스의 도움으로 남모르게 결혼을 하게 되지만 로미오는 친구 머큐소와 캐퓰렛가의 친척 티벌트와의 싸움에 휘말리어 티벌트를 찔러 베로나에서 추방되고 만다. 한편 줄리엣은 아무 사정도 모르는 부모로부터 다른 곳으로 출가할 것을 강요당하자 재차 로렌스의 계략으로 마취약을 먹고 죽음을 가장하여 매장 후 마취로부터 깨어나 로미오와 함께 도망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계획의 조그마한 차질로 줄리엣의 가사(假死)를 정말로 착각한 로미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 자리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는다. 그 순간 눈을 뜬 줄리엣도 로미오의 단검(短劍)으로 자결하여 그의 뒤를 따른다.

이 비극에는 비극의 침울함은 조금도 없다. 여기에는 불타는 청춘의 정열과 아름다운 서정이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의 비극은 일련의 불행한 인연으로 인하여 발생되지만 그 불행은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을 순화(純化)하기 위해서였다. 성격으로서는 줄리엣의 유모가 잘 묘사되어 있다.

한여름밤의 꿈[편집]

A Midsummer Night’s Dream (추정 1595-96)

셰익스피어 희극.

아테네에서는 영주(領主) 티시어스와 아마존의 여왕 히플리터의 혼례식이 다가왔다. 보텀과 그 일파의 직인(職人)들은 그 여흥을 위하여 가까운 숲속에 모여 연극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귀족의 딸 허미어는 부친에게서 디미트리어스와 결혼하도록 명령을 받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연인 라이샌더가 있어 그 두 사람은 도망치기 위해 숲속에서 서로 기다리도록 되어 있었다. 디미트리어스도 두 사람의 뒤를 쫓아 숲으로 가고 그를 사모하는 헬리너도 숲속을 찾아간다. 숲속에서는 왕비 티테니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요정(妖精)의 왕 오비론이 왕비를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서 요정 파크로 하여금 가져오게 한 사랑의 묘약을 써서 헬리너의 사랑을 달성시키려고 하지만 파크의 조그마한 실수로 그만 이 두 쌍의 남녀의 사랑은 점점 혼란에 빠진다. 다시 그 사랑의 묘약 때문에 티테니어가 파크에 의하여 당나귀의 머리를 쒸운 보텀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일막도 있지만 결국 만사는 즐겁게 끝나고 직인들의 연극도 재미있게 그 막을 내린다.

귀족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전하는 이 희극은아테네 근교의 어느 여름밤을 무대로 귀족들의 화려한 낭만의 세계, 요정의 환상적인 세계, 직인들의 사실적인 세계가 혼연 융합된 아름다운 몽환적인 작품이다.

베니스의 상인[편집]

The Merchant of Venice (추정 1596-97)

셰익스피어 희극.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가 벨몬트에 사는 아름다운 표셔에게로 구혼여행을 떠나기 위한 비용을 자기의 돈이 전부 무역관계로 들어가 있어 현재 가진 돈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빌어 쓴다. 바사니오의 구혼은 성취되지만 안토니오는 자기 소유의 배가 난파되어 기한까지 그 돈을 갚지 못했으므로 계약대로 자기 몸의 살 1파운드를 떼어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이와 같이 위험하고 아슬아슬할 때 법학자로 남장(男裝)한 포셔가 등장하여 그 유명한 법정장면이 펼쳐져서 샤일록은 그리스도교도에의 복수 계획이 좌절되며 재산마저 몰수당하고 퇴장하게 된다. 안토니오의 배도 난파되었다는 소식이 허위임이 밝혀져 무사히 입항(入港)하고 만사는 즐겁게 낙착된다. 샤일록의 가련한 딸 제시카와 젊은 로렌소의 사랑의 장면도 있다.

이 연극은 우리나라에서도 상연된 바 있고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친근한 셰익스피어의 극으로 외국에서는 법정장면을 독립시켜서 곧잘 상연하고 있기도 하다. 19세기 이후 샤일록을 비극적인 인물로 해석하게 되었다.

햄릿[편집]

Hamlet (추정 1600-01)

셰익스피어 비극.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아버지가 죽은 지 한달도 못 되어 왕위에 오른 숙부 클로디스와 결혼을 해 버린 어머니 거트루드의 배신행위에 깊은 상처를 받고 인생에 대한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때마침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망령이 나타나 자기는 클로디스에게 독살당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복수할 것을 명령한다. 미친 척 가장한 햄릿을 사랑하는 오필리아도 외면하고 망부(亡父) 살해의 정황을 꾸민 극을 숙부에게 보여주고 망령의 말이 진실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 직후 어머니의 침실에 불려들어간 그는 휘장 뒤에 숨어서 엿듣고 있었던 시종장(侍從長) 폴로니어스(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찌른 숙부는 그를 영국으로 보내 죽이려고 하였지만 도중에 해적선에 잡혀 다시 덴마크로 되돌아온다. 덴마크에 되돌아온 햄릿은 그만 미쳐서 익사한 그의 애인 오필리아의 장례식을 맞게 된다. 클로디스는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이티즈와 햄릿 사이의 검술시합을 유도하여 결국 레이티즈는 독검(毒劍)으로 햄릿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역시 자기도 상대방의 손에 빼앗긴 독검에 상처를 입고, 음모의 전말을 폭로하는 햄릿은 이어서 클로디스를 넘어뜨린다.

이 너무나도 유명한 비극의 주인공은 19세기 이후 명상적 성격의 전형(典型)으로 되어 있으나 최근에는 보다 활동적인 인물로 보여지게 되었다. 아무튼 일면적인 해석을 초월한 작품으로 그 근원에는 존재에의 깊은 문제점이 있다.

오셀로[편집]

Othello (추정 1604-05)

셰익스피어 비극.

베니스의 장군(將軍)인 무어인(人) 오셀로는 원로원(元老院) 의원의 딸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받아 그를 아내로 맞는다. 그러나 부관(副官)의 지위를 캐시오에게 준 오셀로에게 유감이 있었던 기수(旗手) 이아고는 우선 캐시오를 실각시키고 그 복직 탄원을 구실로 캐시오를 데스데모나에게 접근시키는 한편, 아주 무서운 흉계를 꾸며서 오셀로에게 사실 무근한 데스데모나의 부정(不貞)을 말하여 믿도록 만든다. 의혹과 질투에 사로잡힌 오셀로는 드디어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침실에서 교살(絞殺)한다. 그 직후 이아고의 간계는 폭로되지만 이미 때가 늦어 오셀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작품의 흥미는 악(惡)의 천재 이아고의 활약에 있으며 그의 행동의 동기에 대하여는 여러 차례 비평가의 의론의 대상이 되었다. 오셀로는 지나치게 단순한 주인공이라고 보이기 쉬우나 그가 자기의 가슴에 검(劍)을 박는 최후의 장면에서 참회하는 그의 심정과 다시금 데스데모나의 진실을 확신하게 된 그의 기쁨을 읽어볼 때에 대개는 이 작품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다.

리어 왕[편집]

King Lear (추정 1605-1606)

셰익스피어 비극.

브리튼의 노왕 리어는 국토를 세 딸에게 나누어 주고 정무를 떠나서 여생을 보내고자 딸들에게 효심을 시험해 본다. 두 언니인 고너릴과 리건은 교묘한 말솜씨로 노왕을 기쁘게 하지만 그는 막내딸 코딜리어의 진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솔직한 말에 격분하여 그녀와의 연분마저 끊어버리고 그 일을 간(諫)하는 충신 켄트 백작까지 추방한다.

그러나 고너릴과 리건은 드디어 노왕을 배반한다. 이리하여 리어왕은 변장을 하고 그를 섬기는 켄트와 광대 두 사람만을 거느리고 태풍이 휘몰아치는 황야(荒野)를 방황하다가 드디어 그 자신도 미쳐버린다. 프랑스 왕에게 출가한 코딜리어는 노부의 참상을 알고 군대를 인솔하여 구원하러 왔으나 싸움에 패하게 되어 리어왕과 같이 사로잡혀 옥중에서 교살당한다. 리어왕도 비탄한 나머지 죽어버린다. 이런 줄거리에 서자(庶子) 에드먼드의 감언을 가볍게 믿고 성실한 적자인 에드거를 멀리하여 몸을 망친 글로스터 백작의 비극을 병행시켜 간다.

일찍이 램이 너무나 위대하여 상연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이 작품은 인생의 부조리와 고뇌를 극화하여 이제까지 비극이 도달할 수 있었던 극점을 보여주고 있다. 근년에 와서는 <햄릿> 이상으로 평판이 높다. 태풍의 장면은 너무나도 유명하여 광대의 극적 표현력은 아주 뛰어난 것이다.

맥베스[편집]

Macbath (추정 1605-1606)

셰익스피어 비극.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는 막료 뱅코와 더불어서 개선도중에 황야에서 세 마녀(魔女)를 만나 그는 앞으로 왕이 되고 뱅코는 그의 자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듣는다. 이 예언을 듣고 남모를 야심에 불붙은 맥베스는 망설이면서도 그 이상 야심가인 부인의 사주(使嗾)를 받아 때마침 마중나온 덩컨왕을 살해하고 그 후에 뱅코와 파이프의 영주 맥더프의 처자마저 죽인다. 그러나 그는 뱅코의 망령에게 시달리며 부인도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몽유병자가 되었다가 끝내 자살해 버린다. 마녀의 두 번째의 예언은 버넘의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또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에게는 맥베스가 결코 패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덩컨의 유아(遺兒) 말캄이 버넘 숲의 나뭇가지를 들고 쳐들어오고 또한 맥더프도 제왕절개(帝王切開)에 의해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맥베스의 마음도 꺾여 맥더프의 칼에 넘어진다.

이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짧고 급속한 극의 전개로 긴장감이 넘친다. 덩컨 살해장면부터 문지기가 희극적인 한숨을 돌리는 장면에 이르는 전개가 특히 우수하다. 초자연적 요소가 현저한 점도 특징적이다.

존슨 (벤)[편집]

Ben 또는 Benjamin Jonson (1572-1637)

영국의 극작가·시인·비평가.

런던 교외에서 출생. 집안이 가난하여 충분한 교육도 못 받고 가업을 돕기도 하고 군대에 들어가 대륙 전쟁에 참가도 했다. 귀국한 뒤에 연기자 겸 극작가가 되었다. 비극의 연기자로 당시의 손꼽히는 명우(名優)라고 하나 희극 <십인십색(十人十色)>(1598)으로 일약 문명이 올라가 그때부터 극작에 전념하였다. 이 <십인십색>의 초연에는 셰익스피어도 연기자로 출연하였다고 한다. <연금술사(鍊金術師)>(1610), <볼포니(여우)>(1606), <에피신>(1609) 등이 대표적 희극작품이며, 풍자희극인 <서투른 시인>(1601)은 데카가 이에 대한 반론의 희극을 썼으며 또한 그는 비극과 시에도 뛰어났다.

비평가로서는 해박한 학식을 가지고 고전적 전통에 입각하여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낭만적 작풍(作風)에 대립한 일파를 이루었으며 영국 초기 비평문학의 중요한 존재이다. 셰익스피어는 한 줄도 지우지 않은 채 썼다고 칭찬을 받았으나 한 천 줄쯤 지워버렸으면 좋았겠다는 비평은 특히 유명하다. 제임스 1세의 연금을 받아 사실상 계관시인(桂冠詩人)의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계관시인,영국 왕실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시인에게 주는 관직화(官職化)된 칭호. 지금은 명예직으로 종신 연봉과 같이 하사하는 명예로운 칭호이다.)

베이컨 (프란시스)[편집]

Francis Bacon (1561-1626)

영국 철학자·문인·정치가.

런던 태생. 법률을 배워 변호사·법관·국회의원으로 활약하였고 재판관으로서는 웨섹스 백작 모반(謀叛)사건, 월터 롤리경(卿) 처형 등에 수완을 발휘하여 제임즈 1세의 총애를 받아 대법관이 되고 귀족에 서열(敍列)되었다.

한편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점도 있었으며 만년에는 수회(收賄)사건으로 파직되어 불우한 생활을 사색과 문필로 보냈다.

문학적 저술로는 후에 에세이 문학의 시조라 불리게 된 <수필집>(1597)이 가장 유명하며 가장 뛰어난 문체와 통찰력으로 오늘날에도 아직껏 애독자를 갖고 있다. 그 밖에 유토피아 문학의 계보에 속하는 <뉴 어틀랜티스> 등의 작품이 있다.

사상면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연역적(演繹的) 방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경험적 귀납법을 제창하여 근세철학의 시조로 우러러 보고 있다. <학문의 진보> <신기관(新機關)> 등의 저서가 있다.

베이컨은 대부분 라틴어로 저술하였으나 영어의 문체에도 정평을 얻고 있다. 또 셰익스피어란 실은 베이컨의 세상을 속이기 위한 이름이었다는 셰익스피어=베이컨 설도 있다.

17세기[편집]

17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1603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붕어(崩御)로 ‘영국사의 최성기’라고까지 일컬어졌던 시대에 선이 그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영국 르네상스 문학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세기의 대표적인 시인인 존 밀턴을 르네상스 문학 최후의 꽃으로 보는 견해가 상식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국에 있어 근대화의 걸음이 이 시대에서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이 시대, 특히 그 전반은 르네상스적 사조와 계몽사조가 혼류한 과도기적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의 걸음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은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지만 자연과학적 세계관, 분석·비판의 정신, 자의식의 각성과 같은 풍조는 그 어김없는 징조로 보여진다. 이 개혁적인 정신이 홉스나 로크의 정치학설을 탄생하게 한 기반을 만들었고 또 청교도 혁명과 왕정복고 후의 명예혁명을 성공시킨 배경이 된다. 영국은 이렇게 하여 국정의 주권을 인민의 손에 위임하게 되었고 민주사상은 이 시대의 산물이었다.

시의 세계에서는 왕당파 시인이라 불리는 일단의 활약을 볼 수 있고, 또 철학시라고 후에 이름지어진 작풍이 생겨났다. 1642년에 청교도가 극장을 폐쇄하게 되어 극은 왕정복고 이후에 오히려 개방적인 내용의 작품이 속출하였다. 위철리(1641-1716)와 콘그리브(1670-1729)의 풍속희극이라는 것이 성행했다. 또 산문의 진출이 현저하다. 1611년 완성된 흠정영역 성서가 보여준 간경(簡勁)하고 웅장한 문체는 영국산문의 모범이 되었다. 기타 베이컨, 로버트 버튼(1577-1640), 토머스 브라운경(卿)(1605-1682) 등의 산문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산문의 진출은 사람들의 근대화의 자각과 관계가 있다고 보겠다.

왕당파 시인[편집]

王黨派詩人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이른바 스튜어트 왕조에 속한 서정시인들로 커루(1594?-1639?), 셔클링(1609-1642), 클리블란드(1613-1658), 러블레이스(1618-1658), 헤리크(1591-1674) 등, 주로 벤 존슨 유파를 따르고 있다. 인생의 덧없음과 연애를 노래하였으나 거기에는 몰락해 가는 달콤한 감상과 체념을 찾을 수 있다. “장미의 봉오리는 꺾을 수 있을 때에 꺾어라”란 헤리크의 시구는 이 파에 속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기질을 대표하고 있다.

철학파 시인[편집]

哲學派詩人 Metaphysical Poets

존 던과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마벌(1621-1678), 카울리(1618-1667) 및 G.허버트(1595-1633), H.본(1622-1695), 크래쇼(1613?-1649) 등을 이 명칭으로 총괄한다. 이 명칭은 본래 던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일견 현학적(衒學的) 일 만큼 난해해 보이는 것을 비꼬아 드라이든과 18세기의 존슨 박사 등이 붙인 것이었다. 당시의 목가풍(牧歌風) 및 페트라르카류(類) 시풍에 대항하여 던은 열렬한 감정과 기지에 넘친 구어체를 가지고 현실세계를 노래하였으나 존슨 박사에게는 ‘불통일의 통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작품이었다. 던은 금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어슨 교수와 시인 T.S. 엘리엇 등에 의하여 재발견되어 그 작품은 일세를 풍미(風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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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onne (1572?-1631)

영국 시인·성직자.

런던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궁정악인으로 이름 높은 헤이우드의 딸로 로던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예술적인 감화를 받았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양 대학 졸업 후 그 재능을 인정받아 에자튼경(卿)을 모시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에자튼경 부인의 조카와 벌인 사랑의 도피행각 때문에 영달의 길이 막혔다. 그는 분방·방탕, 그리고 영리하였으며 종교에서도 카톨릭을 떠났다. 그러나 30세를 넘길 무렵부터 그의 신앙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1615년에는 영국교회의 성직자가 된다. 2년 뒤 아내의 죽음을 맞았다. 전기가(傳記家) 윌튼의 말에 따르면 슬픔 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진 체험을 한다. 1621년에 성 바울 대성당의 사제장(司祭長)으로 임명받아 열성에 넘치는 설교를 많이 남겨 놓고 일생을 마쳤다.

던은 이렇게 파란 많은 평생을 보냈으나, 그것 자체가 이러한 고민에 가득 찬 과도기적 시대의 상징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새로운 철학이 모두를 의혹의 심연으로 쫓아버린다”라고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던은 르네상스적 안정이 새로운 자연과학적 풍조에 의하여 사라져 가는 것을 쓰디쓰게 바라보았다. 또 영육(靈肉)의 갈등을 한몸에 느꼈다. 이와 같은 이원론적 번뇌가 던의 치열한 감성에 있었기 때문에 종래의 페트라르카와는 다른 시풍으로 나타난, 그의 기상(奇想)에 넘친 이지적(理智的)인 시풍을 만들어 내는 소지가 되었다. 후기의 설교는 그의 이원론적 번뇌를 극복한 진지한 영혼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밀턴[편집]

John Milton (1608-1674)

영국 시인·종교 사상가.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로서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각적으로 청교도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고 동시에 예술을 애호하는 폭 넓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질과 신조는 시인 밀턴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그는 성 파울 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 1632년 학사학위를 받았다. 학부 재학 중에 주로 오비드풍의 연애가를 남겼다. 그러나 졸업 후(1629)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등 그리스도교적 색채를 띤 시를 짓기 시작했다. 대학원 졸업 후에 아버지의 후원으로 호튼이란 한적한 시골에서 수년을 지내면서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였다. 가면극(假面劇)인 <코머스>(1634)와 <리시더스>(1637)는 이 시대의 산물이다. 후자는 특히 후기의 청교도 시인으로서 그의 편린(片鱗)을 보여주고 있는 점으로 중요하다. 이때까지를 밀턴의 제1기라 한다.

밀턴은 그 후 1638년부터 이듬해까지 대륙여행을 했다. 여행 중 고국의 불안한 정정(政情)을 알고 귀국했으나 이때부터 약 20년간 그는 청교도혁명에 휩쓸리는 몸이 되었다. 종교론·정치론·이혼론 등 방대하고 호한(浩瀚)한 저작을 남기고 드디어 실명했다. 이 시기를 제2기라 할 수 있다.

1660년에 왕정복고가 되어 밀턴 등이 지지했던 공화제는 사라져갔다. 실의 가운데 있는 눈먼 시인은 <실락원(失樂園)>을 구술(口述)하여 1667년에 출판하였으며, 이어서 1671년에는 <복락원(復樂園)>과 <투사 삼손>을 상재(上梓)하였다. 이 시기를 제3기라 한다.

젊은 밀턴은 오비드적인 감미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으나 서서히 청교도적인 준엄한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에 있어서 그것은 동시에 서사시인이 되려는 결의와 통하는 것이다. <리시더스>는 밀턴의 그러한 결단을 표시하고 있다. 제2기 산문시대의 20년은 ‘서사시적일 것’의 의미를 탐색한 세월이라 하겠다. 그래서 종래의 서사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용(武勇)에 뛰어난 주인공 대신 신에 의지하면서 고난의 길을 걷는 평범한 사람 가운데에 참다운 주인공을 발견해 냈다. 이것이 <실락원>의 주인공 아담이 성립된 의미이며 <복락원> <투사 삼손>의 주인공으로 이어가는 한 직선이기도 하다. 밀턴은 그 일생을 서정시적으로 살아가려는 욕구를 위하여 연소(燃燒)시켰다고 할 수 있다. <투사 삼손>의 맺는 한마디―― “마음의 고요함, 모든 걱정은 가라앉고”――는 그의 일생과 예술의 완성의 경지를 말해 주고 있다.

실락원[편집]

Paradise Lost

서사시. 밀턴 작.

<구약성서> <창세기(創世記)> 1장부터 3장까지의 줄거리를 기초로 하여 인류의 타락과 그 구제의 약속을 노래하는 장대(壯大)한 작품이다. 집필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658년경부터 수년간에 걸쳐 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초판은 전10권으로 1667년에 간행되었다.

밀턴은 일찍이 서사시의 창작을 뜻하여 인류의 타락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1640년대 초기에 구상한 듯하다. 그래서 그 후 약 20년간, 신을 의지하면서 시련의 길을 걷는 평범한 인간 아담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시의 구상을 정리하였다. <실락원>은 비극이 아니고 밀턴의 ‘성스러운 희곡’이다. (1) 무용이 뛰어난 용맹한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 (2) 한 민족의 영광 대신 전인류의 구제를 약속한다고 하는 이 웅대한 주제는 서사시의 전통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청교도 문학의 최고봉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 중 굴지의 걸작으로 꼽을 수 있다.

버니언[편집]

John Bunyan (1628-1688)

영국 설교가.

땜장이의 아들로 베드퍼드의 시골에서 출생하였다. 정규교육은 마을의 학교를 다닌 정도이다. 16세 때 의회군(議會軍)에 입대한다. 군대를 나와서 결혼한 아내(1656년 사망)와, 그리고 베드퍼드의 설교가 기포드의 영향을 받아 깊은 종교적 체험을 갖게 되었다. 기포드의 사후 베드퍼드의 설교단을 지키면서 허심 탄회(坦懷)하게 자기의 소신을 피력해 간다. 간결한 표현과 친밀감이 감도는 말씨와 희귀한 상상력을 구사한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러나 그는 국교회파(國敎會派) 성직자의 뜻에 영합하지 못하여 무자격자의 설교를 금지한 법률에 의하여 1660년 투옥된다. 이렇게 하여 전후 12년의 긴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건필은 쇠하지 않고 <죄인의 목에 은총이 넘치다>(1666)를 비롯하여 9권의 저서를 이 시기에 썼다. 찰스 2세의 신앙자유선언(信仰自由宣言)(1672)으로 석방되어 <천로역정(天路歷程)>과 <악인의 일생과 죽음> (1680) 및 <성전(聖戰)>(1682) 등을 세상에 냈다.

천로역정[편집]

The Pilgrim’s Progress(1678-1684)

우의(寓意) 이야기. 버니언 작.

원명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순례여행>이라고 한다. 제1부는 1678년에, 제2부는 1684년에 출판하였다. 주인공인 크리스찬이 신앙에 발심(發心)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드디어 성도(聖都)에 들어서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제2부에서는 주인공의 부인 크리스티나가 네 자식을 거느리고 남편이 걸어간 길을 뒤따르는 이야기이다.

꿈이야기 형식을 취한 우의(寓意) 이야기이다. 그러면서도 인물묘사가 선명하고 유형의 타성에 빠지지 않는다. 문체는 간결하여 흠정영역성서(欽定英譯聖書)에 가깝다. 그것은 스스로 “성서에서 떨어진 일이 없었다”라고 고백한 한 청교도의 문체에 잘 어울린다. 이 간결한 문체와 저자의 체험을 가득히 불어넣은 이 글은 저자 생전에 10판의 재판(再版)을 거듭하고 그 부수가 10만 부나 되었다고 한다. 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저서는 저자의 사고를 초월하여 뛰어난 문학작품이 되어 근대 산문문학의 선구적 지위를 구축하였다.

드라이든[편집]

John Dryden(1631-1700)

영국 시인·극작가·비평가.

노샘프턴셔 주 올드윈에서 출생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워 왕정복고기의 대표적 문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크롬웰의 공화정치를 지지하였으나 왕정복고와 더불어 왕당파가 된다. 네덜란드와의 해전과 런던 대화재의 국가적 사건을 주제로 한 서사시풍인 <경이(驚異)의 해>(1667)와 왕위 계승분쟁을 다룬 정치적 풍자시 <압살롬과 에키토펠>(1681), 그리고 음악의 위력을 칭송한 <알렉산더의 향연>(1697)등이 유명하다. 극작품은 찰스 2세의 궁정취미를 반영한 ‘사교희극(社交喜劇)’과 ‘영웅비극’이란 두 유형(類型)을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다하였으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비련을 엮은 <지상의 사랑>(1677)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비평가로서는 당시 프랑스 고전주의 이론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작가의 명예를 지키는’것을 자기의 사명이라 하였다. 그의 정확한 셰익스피어 비평은 그 후 100년간에 걸쳐 셰익스피어 비평의 기초가 되었고 존슨 박사에 의하여 ‘영국 비평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다.

18세기[편집]

18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1750년대에는 낭만주의적 경향이 나타나서 1780년대에 이르면 그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전반적으로 18세기는 17세기 후반에 발달한 고전주의 문학을 계승, 발전시킨 시대라 할 수 있다.

문학의 목적은 ‘환희와 동시에 교훈을 부여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포프, 애디슨(1672-1719), 스위프트 등에서 볼 수 있는 인생비판과 사회풍자의 문학이 대세를 차지한다. 이성, 양식(良識), 진리, 현실성, 합리주의가 무엇보다 존중되어 서민의 계몽과 각 방면에 걸친 사회비평이 문인의 사명이 되고 있었다. 인간성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불변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개별성보다 일반성을 구현하는 문학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 또 국가는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자유권을 보장해야만 한다고 설파하여 사법, 행정, 입법의 3권분립을 주장한 로크(1632-1704)의 정치사상은 왕권당(王權黨)과 민권당(民權黨)에 의한 정당정치의 확립, 중산계급의 발흥, 저널리즘의 발달 등과 관련하여 정치와 문학을 밀착시켰다.

일간신문은 1703년 처음으로 탄생하였으나 그 후 각종의 정기간행물이 이어서 나오게 되고, 특히 1711년에 애디슨과 스틸(1672-1729)에 의하여 창간된 <스펙테이터>는 건전한 유머와 우아한 필치로 전 시대부터의 방종한 풍습을 바로잡아 종교와 정치에는 관용을 역설하고 여성의 교양을 높이는 일을 염원하여 편견과 미신을 배척할 것을 논하여 오랫동안 이러한 종류 신문의 모범이 되었다.

중산계급의 발흥은 필연적으로 독자를 확대하는 것이 되어 디포, 리처드슨, 필딩, 스턴 등의 산문소설가를 배출하고, 내용도 가공적 낭만적인 것이 아닌 일상의 현실생활에서 취재한 성격묘사를 존중하는 사실적 근대소설이 나와서 그중 어떤 것은 대륙에서도 열광적으로 읽히었다.

이 세기 후반의 문단에 있어서 본산적(本山的) 존재인 존슨 박사는 그리스도교적 모랄리스트로서, 그의 문학관은 어디까지나 고전주의적이었고 새롭게 일어나고 있던 낭만주의 문학에 대하여는 동정과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나, 풍부한 학식과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건전한 지혜를 나타냈다.

극단(劇壇)에서도 새로운 관객층을 획득하였는데, 세기의 전반에는 게이(1685-1732)의 풍자적 희극을 제외하고는 눈물 자아내는 권선징악적인 것이 많고, 후반에는 골드스미스(1728-1774), 셰리든(1751-1816)의 본격적인 희극과 릴로(1693-1739)의 가족비극(家族悲劇)이 특기할 만하고, 명우(名優)가 배출된 것에 비하여 극작가의 활동은 부진하였다.

포프[편집]

Alexander Pope (1688-1744)

영국 시인.

런던에서 출생. 병약하고 기형적(畸形的)이었다. 아버지가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정규학교에서 배우지 못하여 독학으로 고금의 시인을 탐독하고 특히 드라이든의 시풍을 경모하였으며 더 나아가 대성하여 영국 고전주의의 대표적 시인이 되었다.

고전 취미의 <전원시(田園詩)>(1709)와 운문으로 쓴 <비평론>(1711)으로 시단에서 인정을 받았다. 후자는 20세경의 작품이지만 원숙기에 발표한 <인간론>(1732-1734)과 더불어 명언가구(佳句)가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밀턴에 이어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격언적 시구를 포함하고 있다.

당시 대륙에서 유행하고 있던 모의(模擬) 영웅시라 하는 희시<머리털 도둑>(1712) 및 <우졸우인전(愚卒愚人傳)>이 그의 걸작이다. 특히 전자는 경묘한 기지와 세련된 공상으로 사람을 매혹케 한다.

명번역으로 이름이 높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1715-20)와 <오디세이아>(1725-26)는 원작이 지닌 야취(野趣)스럽고 소박함을 줄이고 외려 궁정시인의 작품인 것과 같은 느낌을 일으키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만년에는 호라티우스적인 풍자시와 서간시(書簡詩)를 주로 써서 예리하게 인생을 비평하고 시작(詩作)기교의 오묘함이 최고에 이르렀다.

우졸우인전[편집]

The Dunciad (1728, 개정증보 1742)

포프 장편 풍자시.

처음에 익명으로 발표하였다. 제목의 ‘우인’이란 건전한 이성과 고상한 취미에 반대되는 것을 가리킨다. ‘우둔’의 여신이 지배하는 왕국을 빌어 당시의 영국문단을 개펄의 늪으로 비유하여 작가가 항상 언짢게 여겼던 출판업자, 작가, 학자, 비평가들을 철저하게 우롱 야유한 희롱의 시이다.

발표의 직접 동기는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데오볼드에 대한 격분이며, 최초에는 그가 야유를 받는 중심인물이었으나 뒤의 판에서는 계관시인 시바가 그와 바뀌게 된다. 소설가 디포, 고전학자 벤트리, 비평가 데니스와 기타 많은 유명무명의 인사가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단에 악폐(惡弊)를 끼치고 인간성을 상실한 학자와 교육 등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인신공격적인 요소가 짙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을 읽기 위하여 상세한 주석(註釋)이 필요하지만 흔한 풍자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것으로서 20세기의 지성파 시인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디포[편집]

Daniel Defoe (1660?-1731)

영국 저널리스트·작가.

런던의 푸줏간 아들로 태어나 정식 학교교육은 받지 못하였으나 상인으로서 또한 정치적 팜플렛 작자로서 활약하여 일생에 세 번 파산하고 두 번 투옥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되듯이 파란 많은 평생을 보냈다.

디포의 문필활동은 다방면에 걸쳤고 써낸 작품도 방대하여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이나, 문학사상 특기할 만한 것은 내외의 정치 경제의 사정에서 비롯하여 풍속 습관에 이르기까지 넓은 화제(話題)에 관하여 거의 자기 단독으로 집필하여 발행을 계속한 신문 <레뷰>(1704-13)와, 만년의 10년 동안에 쓴 <로빈슨 크루소>와 <몰 플랜더즈>(1722) 등을 위시한 8권의 이야기 작품이다.

이들 작품 가운데서는 그당시의 신흥계급인 시민계층의 종교·도덕·경제관념을 대변하였고, 특히 그의 소설작품은 소재(素材)가 시민생활에 밀착하고 문체의 간결과 묘사의 여실(如實) 등으로 영국소설의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로빈슨 크루소[편집]

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1719)

디포 작품.

작가가 만년에 쓴 일련의 이야기 형식의 작품 중 최초로 쓴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의 뜻에 반(反)하여 선원이 된 로빈슨이 여러 가지 위험을 겪어 남아메리카 연해(沿海)의 무인도에 표류되어 거기에서 38년을 보내는데 그간 신의 섭리를 믿고 창의로운 궁리와 노력으로 생활조건을 개선해 나간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특히 아이들에게 애독되는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전형적인 중산계급적인 종교·도덕·경제사상과 간결한 문체, 그리고 사실적인 묘사에 그의 특색이 있으며 디포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영국 소설형성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되었다. 출판과 동시에 비상한 인기를 얻어 그 해에 속편을, 나아가서 다음해에는 그 속편을 출판하여 3부를 이루고 있으나 보통 <로빈슨 크루소>라 하면 제1부만을 가리킨다.

스위프트[편집]

Jonahan Swift (1667-1745)

영국 소설가.

아일랜드에서 출생하여 거기에서 교육을 받고 당시의 영국 정치가 윌리엄 템플의 비서가 된 뒤부터 정치적·문화적인 문제에 친근하게 되어 후년 풍자작가로서의 수완을 쌓았다. 정치적으로는 처음에 진보적인 휘그당(黨)의 정책을 따랐으나 후에 보수적인 토리당(黨)으로 옮겨 그 기관지의 편집도 했으며 많은 정치적 팜플렛도 집필하는 등으로 활약하여 그 신랄한 필력은 정적(政敵)이 두려워한 것이었다.

1714년 앤 여왕의 서거와 더불어 정치적인 입장을 잃고 성 패트릭 교회의 사제장(司祭長)으로서 아일랜드로 돌아가 일생을 거기에서 끝마쳤다. 만년엔 정신이상으로 불우했다.

스위프트는 일생에 막대한 수의 정치적·종교적 책을 썼으나 문학사상으로는 젊었을 적에 주로 종교 각 파의 분쟁을 풍자하여 쓴 <톰 이야기>(1704)와 1726년에 출판된 <걸리버 여행기>가 특히 중요한 것이다.

더욱이 <걸리버 여행기>는 영국문학 최대·최고의 풍자작품으로 알려져 옛 이야기다운 설정으로 간명(簡明)한 문체와 사실적인 기술을 통하여 작가의 천재적인 풍자가 선명하게 전개되고 있다. 스위프트는 전형적인 염세가로 생각돼 왔으나 이 <걸리버 여행기>의 재(再)해석에 의하여 그의 인간상에 수정을 시도하려는 연구가 매우 성하다.

걸리버 여행기[편집]

Gulliver’s Travels (1726)

스위프트 풍자작품.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인국 이야기’로 아이들에게도 친숙한 이 이야기는 본래 신랄한 풍자의 의도로써 쓰여진 것이다. 소인국의 이야기는 전4부 중 최초의 부분인데 거기에는 당시 영국의 정치·사회의 여러 양상이 소인국의 사정에 투영되었고 동시에 자기 분수조차 모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을 풍자하고 있다. 제2부의 대인국에는 인간의 육체적 추악상이 이상할 만큼 확대되었고 다음에 걸리버가 방문하는 기인국(奇人國)에는 인간의 정신활동이 무의미함을 폭로하게 된다.

최후에 말<馬>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인간과 말의 위치가 역전되어 인간은 완전하게 동물의 상태에 놓이어 인간성의 가치를 묻고 있다. 가장 예리한 풍자를 포함한 이 부분은 종래 작가 스위프트의 염세, 염인관(厭人觀)의 절정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되어 왔으나 그것이 아니고 이 나라의 영장(靈長)인 말의 편도

풍자의 대상이 된다는 설도 많아, 작자의 근본사상에 직접 관계되는 문제인 만큼 활발한 논쟁의 대상으로도 되고 있다.

18세기 소설[편집]

-世紀小說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시민사회의 성립은 문학의 면에서는 산문 특히 소설의 발흥이란 현상을 낳게 되었다. 특권계급으로서 교양을 가진 귀족을 위해 있었던 운문을 중심으로 한 재래의 문학에 대하여 신흥 시민계급은 자기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결합된 직접 느낄 수 있는 문학을 구하였다. 이 경향은 세기초에 애디슨, 스틸에 의한 <스펙테이터>를 위시한 여러 정기간행물에 의해 배양되어 시민적인 소재(素材)와 시민적인 생활감정을 다루는 근대적 의미의 소설은 이 세기에 확립되었다.

먼저 발표되었던 것은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몰 플랜더즈>의 이야기 작품과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였으며 모두가 구체적인 묘사법과 평이한 문체로서 소설에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 특히 초기의 소설 일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특징은 이야기되는 줄거리가 허구(虛構)가 아니고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설정과 주장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그대로 소설이라는 문학형식의, 현실생활에 대한 밀착과 사실적인 방법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최초의 본격적 근대소설이라고 하는 리처드슨의 <파멜라>가 나온 것은 1740년이었으며 이 해부터 약 30년간은 18세기의 주요한 소설작품의 거의 전부가 집중적으로 쓰여졌던 시기로 영국소설사에서도 특기할 전성기였다. <파멜라>와 <클라리사 할로>에서 서간체로 세세하게 심리묘사를 한 리처드슨에 대하여 필딩은 <조셉 앤드루수의 모험>과 <톰 존스> 등의 작품에서 복잡한 줄거리의 전개와 생기발랄한 행동묘사에 의하여 “산문에 의한 희극적 서사시”라고 하는 주장을 구현하였다.

한편 스몰리트는 <로더리크 랜덤> <험프리 클링커> 등을 통하여 프랑스의 악한소설(惡漢小說)의 전통을 도입하였고, 또 스턴의 기서(奇書) <트리스트램 샌디>는 일찍이 외면적 구조로서의 이야기 줄거리를 무시하여 더욱더 소설의 가능성을 넓힌 것이었다. 골드스미스의 <웨이크필드의 목사>도 이 시대의 명작으로 꼽을 수 있다.

또 한편에는 19세기에 이어지는 낭만주의의 요소도 이 세기의 후반에는 소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고, 월폴의 <오트란토의 성> 등을 시초로 하는 이국적, 중세적 취미를 받아들인 이른바 공포파 소설 가운데도 볼 만한 것이 많이 있다.

리처드슨[편집]

Samuel Richardson (1689-1761)

영국 소설가. 청년시절에 런던으로 나와서 인쇄 출판업자의 조수가 되어 그 길로 성공, 출판업자 조합장의 직도 맡게 되었다. 권유에 의한 <모범 서간집>의 집필 중 우연한 계기에 쓴 최초의 소설 <파멜라>는 그의 나이 50이 된 때의 작품이었다. 식모 아이가 주인의 유혹을 물리치고 드디어 대가의 마나님이 된다는 이 이야기는 출판과 동시에 큰 호평을 받아 이듬해에 속편 <클라리사 할로>(1747-48)를 썼다. <클라리사 할로>는 단어의 수가 100만이나 되어 영국소설 중에 가장 장대한 작품이며 부모가 강요하는 결혼을 반대하여 집을 뛰쳐나온 후에 방탕한 청년의 손에 떨어져 끝내 오욕(汚辱)에 죽은 박명(薄命)한 미녀의 생태를 주고받는 서간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이어서 <그랜디슨>(1753-54)에서는 작자가 상상한 이상적인 남성상을 묘사하였다. 이들 소설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리처드슨은 존슨 박사를 비롯하여 문단의 명사들에게 지우를 받게 되었다.

그의 소설은 도덕적·종교적인 의도를 각별히 강조하면서도 그 주제·구성·서술, 특히 심리묘사의 면에서 현저하게 근대소설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으며 소설이라는 문학형식을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쳐 영국소설은 리처드슨에서 시작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파멜라[편집]

Pamela (1740)

리처드슨 소설. 작자는 도덕적이고 실용적인 의도로 <모범 서간문집>의 집필 중 우연한 계기로 최초의 영국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썼다. 식모 아이인 소녀 파멜라가 방종한 젊은 주인에게 유혹을 당하지만 끝까지 순결을 지켜나가 그를 개심(改心)시켜 결혼까지 하게 되는 이야기를, 파멜라가 그녀의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 또는 수기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출판과 동시에 큰 호평을 받아 타국어로 번역, 애독되었고 그 도덕관의 문제를 두고 찬부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이듬해에 속편을 간행하였다.

이야기 작품으로서는, 당시 시민의 생활감정을 잘 반영하였고 사실적인 심리묘사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근대소설의 전개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필딩[편집]

Henry Fielding (1707-1754)

영국 소설가.

명문 집안에서 출생하여 학식도 풍부하였고 고전에도 정통했다는 점에서, 작품에서와 같이 전기면에서도 리처드슨과 대조적인 소설가였다. 처음에 법률을 배웠으나 한때 희곡에 뜻을 두어 20편 이상의 풍자적인 희곡을 썼다. 그러나 때마침 정부의 극장 탄압 때문에 변호사로 전업하는 한편 신문 편집에도 종사했다.

그가 소설로 전환한 계기가 된 것은 리처드슨의 <파멜라>의 성공이었다. 이당시 평판이 높은 이 소설의 도덕적·종교적인 주장에서 위선적인 것을 감지(感知)한 때문에 그는 곧 그 패러디를 써서 내놓았고 다음해에 최초의 중요한 소설 <조셉 앤드루스의 모험> (1742)을 쓰고 그 서문에서 소설을 “산문에 의한 희극적 서사시”라 정의하여 처음으로 종래의 문학형식 속에 소설의 위치를 정하려는 중요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리처드슨의 작품과 대조적으로 복잡한 줄거리의 전개와 다양한 인생의 생생한 묘사, 그리고 명랑한 웃음을 특징으로 한다. 이 경향이 가장 잘 결실된 것이 다음 작품 <톰 존스>이며 영국소설 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의 풍자적인 일면은 당시의 대도적(大盜賊)에서 소재를 빌어온 <조나단 와일드전(傳)>(1743)에 더욱 잘 표현되어 있다.

만년에 런던 치안판사로 임명되어 공적으로 바쁜 생활을 보냈으나, 소설의 제3작인 <아밀리아>(1751)를 그간에 집필하여 사회악에 대한 그의 우려를 작품 속에 담아 종교와 도덕을 강조하였다.

필딩은 리처드슨과 더불어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소설가이며 영국 소설의 전통에 하나의 흐름을 창시한 위대한 작가였다.

톰 존스[편집]

The History of Tom Jones (1749)

필딩 소설.

작자의 모든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18세기 영국소설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꼽힌다. 지극히 복잡한 줄거리의 전개와 밝은 웃음, 거기에 주인공의 명랑한 남성적 성격에 의하여 특히 이 시대의 리처드슨 작풍과 대조함에 있어서 필딩 소설의 특질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다.

기아(棄兒)로서 대지주의 저택에서 양육되는 톰은 명랑하고 분방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갖가지 경솔한 행동과 주위의 모략으로 드디어 온후한 대지주의 보호마저 잃게 되어 나그네길에 오른다. 더욱이 평소에 서로 사랑하던 소파이어에게도 버림을 받았으나 이러한 고난을 타고난 착한 성품으로 극복하여 끝내 그가 대지주의 조카가 되는 사실이 밝혀지고 또 소파이어와 경사스러운 결합을 이룬다.

당시의 농촌과 거리의 풍경 등 도회생활이 생생하게 묘사되었고 주인공 톰을 위시한 수많은 등장인물도 각각 여실하게 묘사되어 소설에 대한 작가의 주장인 “산문에 의한 희극적 서사시”의 정신을 유감없이 구현하고 있다.

스턴[편집]

Laurence sterne (1713-1768)

영국 소설가.

아일랜드에서 출생하여 요크에서 성직에 있었으며, 50세 가까운 나이가 되어 기서(奇書) <트리스트램 샌디>를 출판할 무렵까지는 지방적으로 문명(文名)을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한 사람의 목사에 불과하였다. 그가 이 소설을 쓸 계기가 된 것은 요크 교회 내의 분쟁에 있어서 반대파를 야유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우의(寓意) 이야기로서 1760년에 <샌디>제1·2권을 출판하여 일약 문단과 사교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따라서 <샌디>는 발생부터 풍자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었으나 줄거리의 진전에 따라 오히려 인간의 기미(機微)를 즐기는 방향으로 옮겨 가서 이 경향은 그가 죽은 해인 1768년에 나온 프랑스·이탈리아 여행기 <풍류기행(風流紀行)>에 가장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소설가로서의 스턴은 그의 성적(性的)인 관심과 구성이 무질서했기 때문에 19세기를 통하여 엄한 비판을 받았으나 금세기에 와서는 이야기 형식의 파괴로서 소설의 가능성과 영역을 크게 확대한 것이라 하여 수법의 면에서도 중요시되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트리스트램 샌디의 일생과 의견[편집]

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 Gentleman (1760-1767)

스턴 소설.

전9권을 8년에 걸쳐 분권 간행(分權刊行). 영국소설 중의 기서(奇書)라고 불리는 이 작품에는 외적 구조로서의 이야기의 줄거리는 전무에 가깝고 주인공은 제3권의 마지막에 겨우 나오지만 등장인물로서는 거의 활동하지 않으며,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고래(古來)의 기묘한 학설에 열중하는 부친 월터와, 눈물 많은 인정가이나 공성술(攻城術)에 몰두하고 있는 숙부 토비 대위와,그들의 친구로 소탈한 목사 요리크 등의 색다른 인물들의 ‘생활과 의견’이다. 최초 분권 출판과 동시에 크게 호평을 받아 작가 스턴은 초로(初老)의 한 목사에서 일약 문단과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한편 도덕면에서도 형식면에서도 비판의 표적이 되고, 특히 파격적인 구성과 형식은 19세기를 통하여 불순하고 무질서한 것이라고 공격을 당했으나 최근에는 이것이 의식적인 기법으로 재인식되어 소설방법론 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풍류기행[편집]

A Sentimental Journey through France and Italy, by Mr. Yorick (1768)

스턴의 여행기.

작자가 요양을 위하여 1765년부터 그 익년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한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트리스트램 샌디>가 파격적인 것처럼 이 여행기도 파격적이어서 행선지에서 접촉한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이 작자의 마음에 파급한 미묘한 영향을 삽화(揷話)풍으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가까운 표현이다.

<샌디>에서 보였던 풍자성과 희곡성의 색채가 남아 있기도 하지만 작자는 자신을 <샌디>에도 등장했던 목사 요리크로 삼아서, 지방이 달라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 인정의 맛을 마음의 융합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덧붙여서 ‘센티멘탈’이란 말의 의미는 이 시대에서는 오히려 ‘풍아(風雅)한, 고상한’의 뜻이었다.

존슨 박사와 그 주위[편집]

-博士-周圍

사무엘 존슨은 더블린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닥터 존슨 혹은 존슨 박사로 통한다. 1750년경부터 1784년 서거 때까지 문단의 지도적 존재로 영문학사에서는 이를 ‘존슨 시대’라 부른다.

문학뿐만 아니고 인생 전반에 걸쳐 위대하고 또한 건전한 비평가이며 인정이 후한 좌담의 대가였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각계 인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영국 미술원 원장인 초상화가 레놀즈, 웅변가 버크, <로마 제국 흥망사>의 기번,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희극작가인 골드스미스와, 그와 동렬의 희극작가 셰리든, 풍속화가 호거스, 명우 개릭 등 수없이 많다. 여류작가 파니 바니(1752-1840)도 그의 귀여움을 받았고 또 높이 평가되었다. 당시 주위에서는 경멸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보즈웰(1740-1795)로서 그의 <존슨전(傳)>(1791)은 오늘날에도 세계의 전기문학 중에서 더없는 걸작이다.

존슨[편집]

Samuel Johnson (1709-1784)

영국 비평가. 영국 중부의 소읍 리치폴드의 고본(古本)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영특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못 대어 중퇴하였다. 20세나 연상의 미망인과 결혼 후에 런던에 나와 궁핍한 문사생활을 시작하였다. 풍자시 <런던>(1736)과 <덧없는 소망>(1749)에 의하여 시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1750년부터 수필지(隨筆誌) <램블러>를 주2회 발행하고 장중한 문체와 건전한 인생비판으로 유명하였으나, 1752년 상처(喪妻)의 슬픔으로 그만두었다.

1755년에 8년간에 걸친 노고 끝에 <영어사전>을 완성하였다. 양절판(兩折版) 2권으로 영국 최초의 본격적 대사전이다. 이때에 후원자가 되려고 했던 체스터필드 경(卿)에게 보낸 통쾌한 절연장은 특히 유명하다. <래실러스>(1759)는 행복 추구의 덧없음을 역설한 소설이며 이 고료(稿料)는 모친의 장례비에 충당하였다. 1759년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하사받아 빈곤을 벗어났으며 ‘클럽’을 설립하여 좌담을 즐겼고 문단에 군림하였다. 그 후의 작품으로서 <셰익스피어 교정(校訂)>(1764) 서문과 주석은 매우 뛰어난 것이다. 더욱이 만년의 <영국시인전 (傳)> 10권(1779-81)은 영국 시인 52명의 평전(評傳)으로 그의 원숙한 인생관·문학관·임상(臨床)비평을 표시한 최고의 걸작이다. 그의 좌담은 보즈웰의 <존슨전(傳)>에 그려져 지금도 영국 국민 속에 살아 있다.

18세기 시[편집]

-世紀詩

드라이에서 포프로 이어간 고전주의 영시(英詩)는 주로 도회생활을 소재로 한 풍자와 교훈을 그리스나 로마 고전의 선례를 따서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한 시풍에는 영국인의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성격과 프랑스의 고전주의 시법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존슨 박사와 골드스미스는 이 계열에 속하지만 한편 이 세기의 중엽부터 상상과 감정의 억제에 반항하여 토속적 감정과 고대·중세 취미가 일어났다. 톰슨의 <사계(四季)>(1730)에서 볼 수 있는 자연관찰, 맥퍼슨이 번역했다고 하는 <오시언의 시>(1742-45)의 고대취미, 영의 <생사 및 불멸에 관한 야상(夜想)>(1742-45)과 그레이의 <만가(挽歌)>(1751)의 우울한 시정, 콜린스의 <석양의 노래>(1746)의 상상과 미감(美感), 스마트의 <다비드 찬가(讚歌)>(1763)의 아름다운 환상 등 이들 중기(中期)의 시(詩)가 후반에 쿠퍼의 <과제(課題)>(1785)와 같은 동양적 자연관조와 번스의 정열적인 서정시를 낳았고 더욱이 블레이크의 심원한 신비적 체험을 표현한 시가 나와 낭만주의는 개화하게 되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편집]

낭만주의 시대 문학[편집]

浪漫主義時代文學

낭만주의는 서로 관련된 여러 요소로써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가령 무한을 추구하는 마음, 초자연적인 것과 시간과 공간을 격(隔)해 있는 것에 대한 동경, 자연의 애호, 미를 추구하는 정열과 혁명의 정신 등이 낭만주의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라 하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 속박을 느끼는 데서 생기기 쉬운 것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인간의 힘엔 한도가 있으며 인간생활의 규율, 사회도덕 또는 문학상의 제법칙 등 모든 제약의 작용으로부터 탈피하고 이러한 모든 제약을 파괴해 나오려는 것이 낭만주의라 할 수 있다. 기후(氣候)를 하나의 예로 들어 보아도 기나긴 겨울의 모진 추위 속에 사는 북극인일수록 봄이 찾아오는 것이 가장 큰 동경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낭만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방문학(北方文學), 특히 영국문학이 세계문학 가운데에서 가장 화려한 낭만주의를 개화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낭만주의적 심정은 항상 사람의 마음에 숨어 있지만 영국에서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두에 걸쳐 있고 이 시대를 낭만주의 부활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로망스라는 것이 이미 중세에 발생했고 영국의 낭만주의가 셰익스피어 등에 의하여 고도로 발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근엄(謹嚴)한 청교도시대가 되고 왕정 복고시대를 거쳐 고전주의시대인 18세기가 계속 되었다. 영국의 민주주의를 계기로 하여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에 자극을 받아 낭만주의 정신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 발아기(發芽期)에 그레이와 콜린스 등의 시인이 나왔고 또한 번서, 블레이크 등이 이 정신을 신장(伸張)시켰다.

낭만주의 운동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초기의 유혈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영국 낭만주의의 최성기는 일대의 풍운아 나폴레옹 시대와 거의 중복된 점을 찾아볼 수 있어서 그것 자체가 로맨틱한 느낌을 준다. 영국에 있어서는 1798년의 워즈워스와 콜리지에 의한 <서정가요집(敍情歌謠集)>의 간행이 낭만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되며 나폴레옹의 몰락 후 수년간이 바이런과 키츠와 셸리의 명작이 계속 나오게 되는 낭만주의 절정의 시대였다. 1832년까지 낭만주의를 수립한 시인과 문인이 죽게 되어 1832년을 보편적으로 낭만주의의 종말이라 말하고 있다. 이 시대를 되돌아보면 어떤 특수한 클럽이 일당(一黨)을 이루어 낭만주의 운동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개의 시인과 작가들이 각자의 특색을 남김없이 발휘하면서 무한한 것에의 동경을 채울 수 있도록 창작에 이바지하여 그것이 모여 낭만주의의 풍요(豊饒)한 꽃을 피워 나갔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낭만주의시대 시[편집]

浪漫主義時代詩

영국 낭만주의 시는 세계문학에 있어서 최고봉의 하나이며 동시에 그 다양하고 화려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매혹케 하였다. 초기의 블레이크는 그 신비주의적인 함축이 풍성한 표현으로 두드러지며 범신론적으로 자연을 아름답게 노래한 워즈워스, 초자연의 세계를 표묘한 분위기 가운데 표현하는 콜리지는 공동으로 <서정가요집>을 내어 영국 시 역사에 금자탑을 세웠다.

로맨틱한 색채가 넘치는 시를 쓴 스콧이 있는가 하면 그 옆에 시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가 로맨틱하고 극적인 혁명아 바이런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순수한 시혼(詩魂)을 하늘 높이 비상(飛翔)시킨 셸리와 방울방울 떨어지는 감미로운 시구(詩句)와 고매한 시 정신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도취시켜 정화하는 키츠가 있다.

낭만주의 문학은 인간 존재에 본질적인 동경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서 이 시대의 영국시인들은 널리, 그리고 깊이 세계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블레이크[편집]

William Blake (1757-1827)

영국 시인·화가.

런던의 약품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신비주의자로서 창가에서 천사와 속삭였다든가, 런던의 북쪽 교외에 있는 함스테드 언덕 정상에서 창공을 잡아보았다든가 하는 것을 그는 스스로의 체험으로써 노래하였다. 그에게 있어서의 자연이란 다만 인간생활의 외부를 싸고 있는 객관적 존재가 아니고 거기에 작자 주관의 투영(投影)을 찾아볼 수 있으며 한송이 꽃에서도 천국의 자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시의 이미지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많다. ‘양(羊)’이 신(神)이며 청정(淸淨)의 상징인 것은 <무구(無垢)의 노래>(1789)에 잘 표현되고 있다. 이어서 나온 <경험의 노래>(1794)는 인생의 경험으로 더럽혀진 형상과 그 바닥에 있는 청정한 영혼을 말한 것인데 먼저의 ‘양’에 대하여 ‘호랑이’가 나오게 된다. “호랑이여! 호랑이여 밤의 숲속에 불타는 듯 반짝임이여 어떠한 신의 손이, 또 눈이 너희 무서운 균제(均齊)를 만들었느뇨?”로 시작하는 유명한 단시(短詩)<호랑이>는 그 존재에 있어서 역시 신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발표한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0), <밀턴>(1804) 및 <이스라엘>(1804) 등으로 형성한 이른바 예언서(豫言書)에 이르르면 상징적인 표현이 더욱더 신비로워 난해하게 된다.

블레이크는 이성과 법, 그리고 전통적 종교를 배척하여 인류는 감각과 상상력을 통해서만이 완성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18세기의 현실세계를 역전(逆轉)시킨 것으로서 이성과 억압의 대표자인 신이 자유와 활력의 대표자인 사탄으로 대체되어 있다. 블레이크는 모든 사람이 이성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상상력에 의하여 궁극(窮極)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시와 회화(繪畵)의 두 예술로서 독자적이고 거대한 신화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그는 자기의 시를 스스로의 판화로 인쇄하고 녹색 장식의 그림을 붙인 아름다운 시집을 많이 남겼다.

번스[편집]

Robert Burns (1759-1796)

영국 시인.

스코틀랜드의 농가에서 태어나 밭일 틈틈이 문학과 가요를 익혀 초기의 시를 모은 <시집>(1786)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한때 에든버러에 나와 인기를 끌기도 했으나 그 후 에리슬랜드의 소농장에 정주하여 1791년 세리(稅吏)가 되기도 했다.

제임스 존슨이 편찬한 <스코틀랜드 음악 박물관>(1787-1803)에는 약 200편의 시를 기고하였으며 특히 유명한 것은 <올드랭 사인>과 <붉고 붉은 장미>등이다. 서정시 외에 풍자시와 해학시(諧謔詩)에도 뛰어났다. 술 때문에 건강을 상하여 죽음을 재촉하게 되었으나 스코틀랜드의 국민시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워즈워스[편집]

William Words-worth (1770-1850)

영국 시인.

컴벌랜드의 변호사 아들로 태어나 캐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였다. 1790년 프랑스·이탈리아를 여행,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고조기(高潮期)로 그도 혁명의 자유정신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시작되자 이에 환멸을 느껴 귀국하고 1799년 이후는 영국 북부의 호수(湖水)지방에 누이동생 도로시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보다 수년전 콜리지와 서로 친교를 맺어서 1798년에 공저(共著)한 <서정가요집>을 냈다. 그는 자연 속에서 신을 찾고, 나뭇잎도 풀의 꽃도 삼라만상(森羅萬象) 어느 것이나 신의 현현(顯現)이라 하였다. 이러한 범신론적 관점을 갖게 된 경험과 그 후의 심경을 말한 것이 장시인 <서곡(序曲)>이며, 그 축소판이 <영혼의 불멸을 생각하여>(1803-06)이다.

워즈워스의 자연묘사는 직접적이며 청신하다. 꽃의 색깔이나 향내를, 봄의 향기와 높은 산의 공포를, 만물에 머무는 신을 평명(平明)한 언어로 포착한 그의 시는 낭만시대의 특색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만년에 애국적인 시를 쓰고 또 종교적으로 되어 옛날의 풍모를 잃었다고 비난을 듣기도 했으나 언문일치(言文一致)운동의 지도자로서만 보아도 그가 낭만주의 개화기에 수행한 역할은 중대하다.

1843년 로버트 사우디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으로 임명되었다. 영국이 낳은 자연시인으로서 그의 존재는 위대한 것이다.

서정가요집[편집]

Lyrical Ballads (1798, 재판 1800)

워즈워스와 콜리지 공저.

초판은 워즈워스가 서명없이 19편, 콜리지가 4편의 작품을 실었다. 전자에 <틴턴 수도원의 시> 그리고 후자에는 <노수부(老水夫)>라는 대표작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재판에는 워즈워스가 그의 시관(詩觀)을 표명하는 <서문>을 덧붙이니 이것을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서라 말하기도 한다. 1802년의 제3판에는 <시적 용어>에 관한 논문을 첨부하였다. 당시 시단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혁신의 기운이 넘치는 것이었다.

워즈워스에게 있어서 자연 속의 인간의 언어는 단순 소박하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용어가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 시집의 작품에서 워즈워스는 통상적인 생활을 묘사하였고 콜리지는 초자연적인 것을 소재(素材)로 하고 있다.

서시[편집]

The Prelude (1850)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14권으로 되어 있다. 1799년 독일여행 중에 쓰기 시작하여 1805년에 완성. <소요(逍遙)>를 그 일부로 한 미완의 대철학시에 붙일 서시(序詩)로서 만들어서 콜리지에게 주었던 것이다. 유아시절, 학창시절, 케임브리지 재학, 런던의 인상, 프랑스 및 알프스 여행, 혁명기의 프랑스 등에 대한 자기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호수지방(湖水地方)에서의 어린시절 자연애(自然愛)가 드디어 인류애로 정화하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초기 원고에는 자유주의, 범신론적 경향이 강하였으나 보수주의, 그리스도교적 신앙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원고가 되었다고 한다.

콜리지[편집]

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

영국 시인·비평가.

목사의 아들로서 데본셔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웠다. 뒤에 그의 의누이(義妹)와 결혼한 로버트 사우디와 알게 되어 공산주의적 식민지를 북아메리카에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한 적도 있었다. 워즈워스를 포함한 세 사람이 다같이 호반에 살았기 때문에 ‘호반(湖畔)시인’이라 불리었다.

콜리지는 1795년에 워즈워스와 알게 되어서 영국시사상 획기적인 <서정가요집>을 내게 되었고 그 속에 기교의 완벽을 보인 <노수부>등이 실려 있다. 이 외에 그 후의 작품으로 유명한 것은 중세적인 이야기 <크리스터벨>(1816)과 몽고의 칸의 궁거(宮居)를 묘사한 <쿠블러칸>(1816) 등이 있다.

1798-1799년에 워즈워스 오누이와 함께 독일에 가서 독일 관념철학을 연구하여 실러를 영역(英譯)하기도 했다. 가정의 불화와 아편중독에 의한 죄의식에 번민하면서도 뛰어난 셰익스피어 강연을 하여 그것을 책으로 묶기도 하였고 지금도 더욱 높이 평가되는 체계적 문학비평 <문학평전(文學評傳)>(1817)을 내어 단순한 공상력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유기적인 상상력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와 비평에는 갖가지 시사(示唆)가 풍성하여 오늘날에도 아직 문학의 근본문제를 고찰하는 하나의 기반이 되어 있다.

노수부[편집]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1798)

콜리지 시.

처음 <서정가요집>에 실렸다. 한 사람의 노수부가 결혼 연회에 초청을 받아 가는 젊은이를 붙잡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배가 태풍을 만아 남극으로 표류하여 얼음 속에 갇혔을 때에 날아온 새, 신천옹(信天翁)을 그가 사살했기 때문에 배는 저주를 받아 북쪽으로 흘러가 적도 근처에서 그들의 배는 “그림의 바다에 그림 같은 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물 물이 온통 넘쳐 있으나 갑판은 메말라 비틀어질 뿐이다” 선원들은 갈증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노수부는 달빛의 바다에 희롱하는 바닷뱀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부지불식간에 마음으로 기원(祈願)한 바 있어 저주는 풀리고 배는 또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노수부는 참회를 위해 각지를 순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두운(頭韻)을 효과적으로 써서 음악적으로도 우수하여 신비적인 분위기에 싸인 발라드조(調)의 시이며 낭만주의의 정수라 생각되는 작품이다.

바이런[편집]

George Gordon byron (1788-1824)

영국 시인.

런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웠다. 1809년부터 수년간 유럽을 여행하고 귀국후 <차일드 헤럴드의 편력>을 냈을 때에 “어느 아침 눈을 뜨니 내 이름이 천하에 높더라”고 그 자신은 말하고 있다.

1815년 앤 이사벨라 밀방크와 결혼했으나 이듬해 이혼하고 사교계의 위선을 증오하여 끝내 영국을 떠나 두번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돈 후안>은 주인공이 유럽을 방랑하는 줄거리를 골자로 하여 영국의 사회를 풍자한 장시이다. 시극<맨프레드>(1817)에는 괴상한 죄를 범하여 방랑하는 고독한 주인공 안에 작자의 반역정신을 투영하고 <카인>(1821)에서는 그의 악마주의(惡魔主義)가 제시되고 있다.

그의 시는 조잡한 점도 있지만 정치·종교·도덕상의 위선에 대한 끊임없는 반항과 그 엑조틱한 신선함, 이른바 ‘바이런 풍(風)’의 호협(豪俠)한 주인공의 등장 등으로 널리 사람들에게 애독되었다.

1823년 그리스 독립군에 가담하여 미소롱기에서 말라리아로 죽었다.

차일드 헤럴드의 편력[편집]

Childe Harold’s Pilgrimage (1·2부 1812, 3부 1816, 4부 1818)

바이런은 1809년부터 1811년에 걸쳐 포르투갈, 에스파냐, 그리스 등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이 장시의 1부와 2부를 내어 일약 유명해졌다.

그것은 환락의 생활을 혐오하여 이국땅에서 위안을 찾아 헤매는 한 순례자의 견문 수상(隨想)을 엮은 것인데 부정과 압박에 대한 분노를 열렬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후 고국을 다시 떠나 셰리와 더불어 스위스를 거쳐 베니스에 온다. 그 무렵에 쓴 것이 3부와 4부이다. 종장에 가서는 차일드 헤럴드는 사라지고 바이런 자신의 소리로 되어 있다.

돈 후안[편집]

Don Juan (1819-1824)

바이런 작의 1만 5천 행, 16권으로 이룬 장시. 제1, 2권이 1819년에 나온 뒤 1824년까지 6회에 나누어 간행되었다.

에스파냐 청년 돈 후안이 연애사건으로 고국을 떠나 그리스·러시아·영국을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로 주인공은 바이런 자신을 생각하게 하는 쾌남아(快男兒)이다. 탈선, 장광설, 악담 등도 있으나 부패한 궁정과 위선적인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했고, 널리 유럽 각국에서 문학의 소재(素材)가 되어 있는 돈 후안 이야기의 하나로서도 기념할 만한 작품이다.

셸리[편집]

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영국 시인.

서섹스 출생으로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서 배웠다. 1811년 무신론을 제창하는 소책자를 배부했기 때문에 퇴학을 당하고 동년 하리에트 웨스트부룩과 결혼하였으나 3년의 유랑생활 후에 별거하였다. 이 방랑 중 고드윈의 사회주의사상을 불어 넣은 <꿈의 요정>(1813)을 썼다.

여기서 자기를 무신론자, 채식주의자, 현행 결혼법의 반대자, 공화론자, 보편애의 주창자라 공언하고 있다. 1816년 아내는 자살하고, 그는 고드윈의 딸 메리와 재혼하여 스위스로 가서 바이런과 사귀고 1818년에는 이탈리아에 이주하였으나 피사 근처인 스페티아만에서 요트를 타다 폭풍우를 만나 익사하였다.

셸리의 장편시로서는 초기의 <꿈의 요정>외에 미를 탐구하는 시인의 생활을 노래한 <알라스터>(1816), 피사의 미소녀를 통해서 자기의 이상미 추구사(追求史)를 노래한 <영혼의 분신>(1821), 키츠의 죽음을 애도한 <아도네스>(1821)등 많이 있다. 극시로서는 <첸치 일가(一家)>(1819)와 <프로메테우스 해박(解縛)>(1820) 등의 걸작이 있다.

이들 작품이 계속적으로 쓰였던 1819-1820년은 셸리에게 ‘경이의 해’이며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하게 호소한 서정시의 일품인 <서풍의 노래> <구름> <종달새의 노래>들이 만드어진 것도 이 기간 이탈리아에 있었던 때였다.

이 서정시들은 웅변과 음악성 면에서 동시대의 우수한 시인 사이에도 유별나게 뛰어난 것이며, 열렬한 힘을 가지고 이상을 노래하는 하늘을 나는 듯한 혼을 느끼게 하였다.

키츠[편집]

John Keats (1795-1821)

영국 시인.

런던의 전세마차(專貰馬車)집 아들로 태어나 약방의 조수가 되고 또 외과의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문학에 전심할 것을 결심하여 이윽고 문인 윌리엄 해즐리트, 리 헌트와 친해지고 헌트의 집에서 셸리와도 알게 된다.

1816년 헌트가 내고 있던 잡지 <시험자>에 <처음으로 채프먼 역(譯) 호메로스를 읽고>란 소네트를 실었다. 또 셸리의 조력으로 <존 키츠 시집>(1817)을 냈으나 많은 독자는 얻지 못하였다. 이 시집에는 시인의 포부를 노래한 <잠과 시>가 들어 있다. 이어서 1818년에 <엔디미언>을 출판하지만 이것은 유력한 문예지로부터 혹독한 악평을 받았다.

이즈음에 폐병(肺病)증세가 나타나 요양할 목적으로 호수(湖水)지방과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했으나 시원찮은 건강상태로 런던에 돌아온다. 얼마 뒤 그가 노상 간호해 온 병약한 아우 톰이 숨졌고 그 자신도 파니 브론과의 사랑을 못 이루어 실의에 찬 상태에 있었다.

이 시대, 즉 1819년은 키츠에게 있어서는 문학적으로 결실이 풍성한 해로 그의 불후의 명작이 속속 나오게 되었다. <성 아그네스제(祭) 전야(前夜)> <외로운 여인>이라든가, 미의 순교자, 키츠의 절창(絶唱)이라 할 만한 갖가지의 오드(Ode), <그리스 고병(古甁)> <나이팅게일에게> <가을에> 등을 쓰기에 이르러 그의 시재(詩才)는 극치에 달했다. 또 동년에 극시 <아서대왕> <스티븐슨왕(王)>을 시도하였고 1820년에는 <성 아그네스제 전야> <이사벨라> <하이피어리언>과 몇몇의 오드를 포함한 <레미어 및 이사벨라 기타의 시>를 내어 호평을 받았다.

그 무렵 그의 폐병이 악화되어 그해 9월에 화가 조셉세번과 함께 이탈리아를 향하여 출범(出帆), 11월에 로마에 도착하고 다음해 2월 그곳에서 객사하여 교외의 신교도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그 자신의 희망으로 “물에 그의 이름을 새긴 자, 이곳에 눕다”라 새겨져 있다.

키츠의 시는 섬세한 미적 감각과 풍요한 언어로 사람을 매혹하였고 더욱이 그의 서간은 성숙된 지성의 발로라고도 할 우수한 것으로 읽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낭만주의시대 산문[편집]

浪漫主義時代散文

18세기에 있어서는 산문의 융성이 시를 압도한 것과 같이 보였으나,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가면 반대로 시단(詩壇)의 화려함이 산문을 볼품없이 만들고 있다.

그러나 소설가로서는 먼저 스콧이라고 하는 위대한 이름이 나온다. 그는 처음 산문시(散文詩)의 작가로 세상에 나오지만 43세에 이르러 자기의 시적 재능이 다했다고 자인하여 소설로 전향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소설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또 한 사람 뛰어난 소설가 오스틴을 낳았다. 낭만주의시대에서는 이색적인 여류작가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심리의 세부를 담담하고 정확하게 묘사해내는 심리사실주의 소설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비판분야에서는 이 시대의 시인들은 모두가 다소간 비평의 붓을 잡았으나 특히 콜리지가 현저한 업적을 남기었다. 그의 <문학평전>과 <성찰록>등은 철학적 고찰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그의 독창적 비평정신은 셰익스피어론과 워즈워스론으로 후세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워즈워스는 <서정가요집>에 붙인 시론으로 새로운 시관을 전개하였으며 더욱 <시의 변호>(1821)에서 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리 헌트[편집]

(1784-1859)는 시 이외에 평론·수필을 썼고 잡지 <시험자>와 <반성자>를 내며 경쾌한 붓으로 다방면의 문제를 논하여 문단 저널리스트 겸 발행 실무자로서 활약하였다. 저작으로는 <상상과 공상>(1844)과 <자서전>(1850)이 있다.

윌리엄 해즐리트(1778-1830)의 업적으로 문예비평사에 남을 만한 것은 <셰익스피어극 인물론>(1817), <영국 시인강의>(1818), <영국 희곡작가(戱曲作家) 강의>(1819)일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견식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청년시절에 있어서 불사(不死)의 감정> <여행> <시인과의 지우(知遇)> 등 우수한 에세이와 그 밖에도 미술론과 연극론이 있다.

월터 사베지 랜더는 시인으로서의 재간도 풍부하였으나 고전에 정통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낭만주의적인 데도 있었으나 주된 취미는 고전적이라 할 것이다. 그 조탁(彫琢)한 표현은 그의 대표작인 산문 <가상대담집(假想對談集)>(1824-29) 5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산문의 대가로 드 퀸시 및 찰스 램이 있다. 특히 후자는 에세이스트로서 영국 문학사상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이 두 사람에 대하여는 별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스콧[편집]

Sir Walter Scott (1771-1832)

영국 시인·소설가.

에든버러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1792년 자신도 변호사가 되었다. 아보트퍼드에 대저택을 만들었으나 공동경영을 하던 출판사가 넘어져 부채상환을 위하여 창작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스코틀랜드 국경의 민요와 전설에 흥미를 느껴 <최후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의 노래>(1805)를 썼고 더욱이 헨리 8세의 총신(寵臣) 마미온이 사랑에 실패하고 전쟁터에서 죽는 이야기 <마미온>(1808)과 스코틀랜드 고지지방(高地地方)의 카트린 호수의 미녀를 사이에 두고 사랑과 무용을 겨루는 세 사람의 기사 이야기 <호상(湖上)의 미인>(1810) 등이 있다.

드디어 그는 소설로 전환해 역사소설가로서 유럽 대륙에까지 큰 영향을 파급하게 된다. 스콧의 소설작품으로는 27편을 헤아릴 수 있으나 그 중에 유명한 것을 든다면, <웨이벌리>(1814)는 1745년의 내란 ― 스코틀랜드 사람의 후원으로 군병(軍兵)을 일으켜 “왕위를 노렸던 젊은 사람”이라고 불리웠던 찰스의 난 ― 에 휩쓸리는 동명의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것인데 여기에 연유하여 스콧의 소설은 모두 ‘웨이벌리 소설’이라고 칭하게 되는 것이다. <람머무어>(1819), <아이반호(湖)>(1819) 등도 일찍이 다른 나라에 소개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이반호>는 그 이전에 나왔던 스콧의 소설 아홉 편이 스코틀랜드의 이야기인데 대하여 잉글랜드를 무대로 하였다. 그것은 사자왕(獅子王) 리처드 시대의 이야기로 로빈후드도 등장하며 색슨 왕위의 부활에서 발단하여 아이반호의 무용과 정열을 말하는 역사소설이다.

이듬해에 나온 <케닐워드>도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신 레스터 백작과 미희(美姬) 에이미 론사트의 사랑의 비극이며 케닐워드는 그 성(城)의 이름이다.

훌륭하게 사실(寫實)과 허구를 조화하여 중세 및 17·18세기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국민생활을 마치 요지경의 그림처럼 보여주는 스콧은 영국 낭만주의의 한 정점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오스틴(제인)[편집]

Jane Austen (1775-1817)

영국 여류소설가.

남부 영국에서 목사의 딸로 출생, 그 지방 여러 곳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그러한 기복없는 생활 가운데서 18세기 말엽의 지방 중산계급의 생활을 소상하게 묘사하여 정확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처녀작은 <분별과 다감>(1811)이며 이어서 명작 <오만과 편견>이 간행되었으나 이것은 쓴 뒤에 10년 이상 작자의 손에 잠자던 것이었다. 또한 <맨스필드 파크>(1815), <엠마>(1815)를 썼고 사후에 <노댕거 사원(寺院)>(1818)과 <설복>(1818)의 두 편이 나왔다.

그녀의 작풍(作風)은 스콧 등의 작풍과는 대조적(對照的)으로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아니고 젊은 여인의 눈에 비친 시골의 평범한 생활을 소재로 하여 담담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등장인물의 개성을 묘사해 내어 18세기 소설가 리처드슨과 같은 사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언제나 낡은 것이 아닌 싱싱한 맛을 지니고 있다.

오만과 편견[편집]

Pride and Prejudice (1813)

오스틴 소설. 1796년에 기고(寄稿)하여 처음에는 <첫인상>이란 제목을 붙였으나 1797년 출판이 거부되자 다시 써서 1813년 <오만과 편견>으로 간행되었다.

런던에서 20마일쯤 떨어진 롱번이란 마을에 있는 베넷가(家)에는 말없고 변덕스러운 베넷 씨와 딸들의 좋은 연분을 찾는 것을 사는 보람으로 여기는 베넷 부인이 있다. 다섯의 딸 가운데 맏딸 제인은 마음씨 좋고 아름다우며, 두 번째의 엘리자베스는 멋대로이나 영리하다. 이 두 사람의 연애와 결혼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의 심리와 행동이 추구되어 간다. 청년 다시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의 ‘오만’을 그녀는 언짢게 여기고 또 방해도 끼어들어 두 사람은 한때 떨어지지만 드디어 그의 진의를 알고는 그녀의 ‘편견’도 사라져 서로 결합된다. 그리고 언니인 제인도 다시의 친구 빙글리를 얻게 된다.

정리된 구성과 성격묘사의 정확성, 그리고 교묘한 유머와 기지 등을 구비한 수작(秀作)이다.

램(찰스)[편집]

Charles Lamb(1775-1834)

영국 수필가·비평가.

런던 태생으로 클라이스트 학원에서 배웠고 2년 위인 콜리지와 사귀었다. 학교를 나와서 수개월간 남해회사(南海會社)에 근무한 후에 동인도회사로 옮겨 거기에서 33년간 회계를 맡아 보았다. 1797년 누이 메리가 정신발작으로 모친을 죽인 뒤에 그는 누이의 보호자로서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누이도 깊은 애정으로 램을 따랐다.

램의 문학은 이러한 고난이 가득 찬 일생의 소산이다. 콜리지와 워즈워스 등과 문단에서 친하게 지내면서 <런던 잡지>에 정기적으로 엘리아라 서명하여 기고한 수필이 후에 한데 묶여 <엘리아 수필집>(1823)과 <엘리아 수필 후집>(1833)이 되고 또한 이것이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 수필은 주로 개인적인 회상과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의 우직함을 사랑하고 일상 속에 영국인다운 유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일상성은 워즈워스적 정신과도 상통하는 것이지만 램은 단지 낭만주의 시대의 에세이스트인 데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의미에서 영국에 에세이 장르를 확립한 사람으로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램은 비평가로서도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에 대한 흥미를 북돋우는 일을 많이 했고 과거 군소작가에 대한 견해도 예리했다. 그의 <엘리자베스 시대 희곡초(抄)의 주해>(1803)는 그의 정밀을 극한 감상의 주석으로 심리적 해부(心理的解剖) 비평의 길을 연 것이다.

또 생활을 위하여 누이 메리와 더불어 쓴 <셰익스피어 이야기>(1807)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애독되는 명성이 높은 작품이다.

드 퀸시[편집]

Thomas De Quincey (1785-1859)

영국 소설가. 수필가.

옥스퍼드 재학 때부터 아편을 먹기 시작하여 <아편 상용자의 고백>(1822)으로 알려졌다. 저작은 문예비평·역사·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에세이로서는 <살인의 예술적 고찰>(1827), <심연에서의 탄식>(1845), <영국의 우편마차>(1849) 등이고 문예비평은 <맥베스에 있어서 문의 노크에 관하여>(1823)가 우수하다. <호반시인(湖畔詩人)들의 회상>(1834)은 워즈워스, 콜리지와 같은 낭만파 시인들의 성격에 대하여 날카로운 눈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 그는 화려하고 여운(餘韻)이 풍부한 명문을 구사한 에세이스트였다.

빅토리아 시대[편집]

빅토리아 시대 문학[편집]

-時代文學

문학사에 있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보통 여왕 즉위 5년 전인 선거법 개정안(제1차) 성립의 1832년부터 서거 전년인 1900년까지라 한다.

이 시대에는 영국의 국세(國勢)가 세계에 떨쳐, 안으로 산업의 발달과 밖으로 식민지 시장의 획득을 증진하여 신흥 중산계급이정치에 참여하는 기회가 확대되어 보수·자유 2대 정당으로 의회의 민주적인 운영이 실현되었다. 온건한 보수성을 상징하며 중산계급의 대변자와 같은 여왕 아래 빅토리아니즘(빅토리아 풍조)이라고 일컬어진 공리주의, 민주주의, 물질주의 감상주의(感傷主義)를 기조로 한 체면유지, 타협, 신사도(紳士道), 고상한 도덕적 편견이 융합된 기풍이 국민 사이에 보편화되었다.

이 시기를 특히 전·중·후의 3기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1850년대까지는 선거법 개정으로 중류계급의 진출과 노동계급의 불만이 일단 진정됨과 동시에 밀과 마콜리 사상의 보급, 뉴먼, 칼라일, 디킨스의 활동 등 생활 및 시대정신의 향상과 정착기이다.

계속하는 1850-1870년대는 이 시대의 절정기로 산업의 발달, 국력의 충실이 현저하고 경험철학의 총괄자 스펜서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로 다윈 진화론의 지지자 헉슬리 등의 이성주의(理性主義)가 고조되었고, 아널드, 조지 엘리엇, 대커리와 시인들의 활동을 볼 수 있고 전통과 상식에 만족하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이리하여 1880년대 이후가 되면 산업부진의 징후가 나타나 노동쟁의의 발생, 사회주의의 발흥, 페비안 협회의 결성, 식민지제국주의에 대한 반발, 실증주의에 대한 반동 등이 나타나서 시대의 변화를 예고한다. 문학의 세계에도 복잡한 양상을 띠며 세기말로 나아가게 된다.

이 시대의 시는 테니슨이 대표한다. 영국적 주제 및 풍경의 서정적인 사실적 묘사, 온건한 회의탐구의 정신은 널리 국민 사이에 공감을 얻었다.

기타 브라우닝 부처(夫妻), 아놀드, 로제티 오누이, 심미파 시인, 종교시인 등 다수의 시인을 낳았으나 전대의 낭만파 시인들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겠다.

소설에서는 하층사회의 생활을 그린 디킨스, 속물근성을 공격한 대커리, 기타 킹슬리 브론테 자매, 엘리엇, 트롤러프 버틀러, 메레디스, 개스컬, 헨리 제임스, 하디, 기싱, 스티븐슨 등 갖가지의 주제와 표현기교를 가진 작가가 배출되어 가정으로 파고드는 소설의 진출은 눈부셨다. 이에 반하여 극(劇)은 부진하여 테니슨 기타 시인의 작품은 물론 극작가의 작품도 세기의 후반에 들어서 로버트슨, 존슨, 와일드, 피네로, 쇼 등의 것이 명맥을 이었고, 셰익스피어나 입센의 번역이 상연되었다.

비평 그 밖의 산문문학은 문학, 미술 기타 사회 전반에 걸쳐 비평가의 진지하고 열렬한 논의를 볼 수 있고 칼라일 러스킨, 아놀드, 페이터 외에 모리스, 헉슬리, 뉴먼 등의 업적의 의의는 크다. 전기(傳記)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나타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은 그의 반동기에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으나 근자에 와서는 시인, 작가, 비평가의 재평가가 시작되고 있다. 낭만주의 부흥기와 빅토리아 시대와의 분리도 급기야는 사라져 새로운 퍼스펙티브에 의한 19세기 영국문학의 전개와 소장(消長)을 더듬어 보게 된다.

빅토리아 시대의 비평문학[편집]

-批評文學

빅토리아 시대의 평론은 문예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경제·종교·사회문제 등 광범하게 관심을 넓혀 산업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신흥 중산계급의 공리주의 체면유지, 기타 갖가지의 빅토리아 시대적인 특성에 대하여 각 부문의 비평가가 성실히 또한 열심히 독작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예비평가로서의 칼라일, 러스킨, 아놀드, 페이터 외에 <자유론>이나 <자서전>의 저자인 철학자 J.S. 밀, 정치가이면서 문학자인 마콜리, 옥스퍼드 운동의 중심인물로 종교가인 뉴먼 등의 활약도 현저하였다.

유물론적 기계론으로부터 인간성의 회복, 근로의 장려, 심미적 생활과 교양의 중시, 예술 및 인생의 조용한 정열적 관조 등 문예론은 인생과 사회의 비판에 연결되어 종교와 과학의 조화가 시의 사명이라 하였다. 이들 견해의 일부는 금세기에도 살아 있다. 물론 ‘문예학’적 견지에서 문학가치론과 표현기법에 중점을 두어, 아놀드와 페이터의 업적을 20세기의 비평과 관련을 지워서 평가할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칼라일[편집]

Thomas Carlyle (1795-1881)

영국 평론가·역사가.

스코틀랜드 석공(石工)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에든버러 대학에서 수학을 배우고 졸업 후 수학교사를 하면서 스탈 부인의 <독일론>(1810)을 읽고 독일문학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를 영역(英譯), <실러전(傳)>(1823-24)을 써 관념론적 철학과 독일 낭만파에 심취하는 한편 헤브라이 정신의 존중할 점도 깨달았다.<의상철학>(1836)은 가공의 독일인 대학교수 토이펠스드뢰크를 주인공으로 하여 작자 자신의 사상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기술했다. 공리주의와 값싼 로맨티시즘을 배척하고 근로를 존중하며 영성(靈性)의 자유를 지속하여 굳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고귀한 정신과 개인의 힘의 존중은 마침내 그의 관심을 역사로 돌려 <프랑스 혁명사>(1837)와 <영웅숭배론>(1841)을 내게 하였다. 전자는 사실의 정확함과 관찰의 광범위함보다도 시적 상상과 회화적(繪畵的) 묘사에 의한 독자의 강렬한 인상을 노린 것이며 후자는 예언자·시인·종교가·문학자·왕자(王者)중에서 영웅(英雄) 지성(至誠)인 사람을 선택 열거하고 있다. 칼라일은 야인다운 강한 성격에서 오는 편견은 있었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실을 잃지 않고 <과거와 현재>(1834) 가운데에는 당시의 속된 유물주의(唯物主義)와 안이한 박애주의 등을 통렬히 비판하고 그 후 14년이 걸려 <프레데릭 대왕전>(1865)을 썼다.

러스킨[편집]

John Ruskin (1819-1900)

영국 평론가.

포도주 상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옥스퍼드 대학 졸업. 24세에 <근대화가론> 제1권을 냈다. 종교적·윤리적 가치판단을 예술비평에 도입하여, 산업주의에 의한 인심의 속악화를 탄식하고 국민의 타락을 예술의 힘으로 구제하고자 한 태도는 칼라일, 아놀드와 같이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서의 러스킨의 성격과 견해의 한계를 시사해 주고 있다. 고딕 건축의 특성을 논한 <베니스의 돌>(1853), 사회평론<이 최후의 자(者)에게>(1862), 독서, 교육, 인생에 관하여 논한 <참깨와 백합>(1865)등 외에 경제학, 노동문제에도 붓을 댔으나 그의 본령은 미술평론이라 하겠다.

아놀드[편집]

Matthew Arnold (1822-1888)

영국 시인·평론가.

럭비 학교 교장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장학관이 되었고 옥스퍼드 대학의 시학교수(詩學敎授)이기도 했던 이 성실한 비평가는 처음에 시인으로 출발해 <에트나 산 위의 엠페도클레스> <학자(學者) 집시>와 <도버 연안(沿岸)>등 내성적이며 고독과 애수의 색이 짙은 작품을 썼으며, 40대(代) 이후에는 비평에 전념하여 <비평시론집(批評詩論集)>(1865·88), <교양과 무질서> <문학과 도그마>(1873), <교회·종교론집>(1877) 등을 출판하였다. 그는 “시는 근본에 있어서 인생의 비평”이라 생각하여 시를 최고의 문학이라 하였으나 문학 이외에 교육, 정치, 종교도 대상으로 당시의 물질주의와 영국인의 지방적 속물근성을 비판하고 고전적 정신에 의한 문화주의를 추진, 그리스와 헤브라이 정신의 조화를 역설하였다.

아놀드의 “대상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라는 태도와 영국문학을 유럽 문화의 본류(本流)에 돌려 문학의 바른 전통을 명백히 하려던 입장과 편협한 역사적 비판에 대한 반론 등은 회의적인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의 냉정하고 난삽(難澁)한 탐색을 생각케 하여 그를 20세기의 비평가로까지 접근하게 한다. 그러나 과거의 영국시인에 대한 평가는 영민한 아놀드도 로맨틱한 편견을 벗을 수가 없었다.

교양과 무질서[편집]

Culture and Anarchy (1869)

중기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 및 사회를 논한 아놀드의 저작.

서언(序言)과 결언 외에 6장을 포함하였다. 집필의 직접동기는 1866년부터 1869년에 걸친 ‘선거법 개정안’(제2차)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 국내의 동요이다. 아놀드는 원칙적으로 민주주의의 전진을 지지했지만 무질서한 민중의 무절제한 권리주장을 보고 ‘제멋대로 흔들어대는’일의 무익함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의 그것보다 넓은 이해를 찾아 일반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강한 힘’을 가진 모든 시민의 ‘최선의 자아’와 ‘본질적인 인간성’에 기초를 둔 ‘조직체’의 이념을 영국국민이 가질 것을 아놀드는 역설하였다.

페이터[편집]

Walter Horatio Pater (1839- 1894)

영국 평론가·작가.

칼라일, 아놀드 등과 같이 특히 빅토리아 시대에 현저하게 나타난 중류계급 흥성의 물결로 인하여 태동한 예술은 인생에 종속한다고 보는 문예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짊어진 역할이나 의미에 서로 공통된 점이 있다. 단지 그 선구자와 달라서 그리스 정신의 영향을 깊이 받은 페이터는 일생의 대부분을 모교 옥스퍼드 대학 강사로 조용한 문학적·철학적 사색과 미를 관조하면서 보냈다. 이 현실사회와의 사이에 둔 거리가 전기한 두 사람과 러스킨 혹은 모리스와도 다른 인간심리의 심층까지 뚫고 보는 여유를 그에게 부여하였다.

남부 유럽에 있었던 르네상스의 여러 양상을 고찰한 <르네상스>(1873)중의 <다 빈치론(論)>에서 지적하는 조콘더의 미소 깊이 숨은 “과거의 천만 인간의 경험을 합한 영원한 생명”의 존재는 그 유미주의(唯美主義)의 직접적인 계승자 와일드보다도 프로이트나 조이스로 통하는 무의식의 세계와도 관계를 갖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한 신하의 일생을 묘사한 <향락주의자 메리어>(1885)에도, <감상안>(1889)의 <문체론>에도, 기타의 평론과 <상상적 초상>(1887)으로써 쓰여진 소설에도 심미비평가·인상비평가란 호칭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간성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이 있다.

빅토리아 시대 시[편집]

-時代詩

빅토리아 여왕 즉위(1837) 이전에 이미 서정적인 테니슨과 이후에 그 시대의 대표적 시인이 되는, 극적 구성의 특징을 가진 브라우닝이 시집을 내어 낭만주의 부흥기 시인의 위업을 이었고, 워즈워스는 그 여광(餘光)을 가지고 계관시인이 되었으며(1843), 캄벨, 무어, 헌트, 달리, 후드, 베드스 등의 시인이 낭만파의 감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취향을 지닌 가락으로 시를 읊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양심 대변자라고도 할 아놀드와 클러프의 시와 브라우닝 부인 엘리자베스의 시집은 1850-1860년경에 나왔고 <집안의 천사>의 파트모어, 홉킨스(작품의 출판은 20세기) C. 로제티, <공포의 밤의 도시>의 제임스 톰슨, <시집>의 프랑시스 톰슨 등 종교 및 신앙시인이 각자 개성적인 시를 썼다.

한편, 심미파라 일컫는 피츠제럴드, D.G. 로제티, 모리스 등은 1850년대 말경에 활약을 시작하여 전기 시인들의 윤리적인 체취(體臭)와는 다른, 짙은 관능의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 스윈번도 드디어 이 파에 가담한다. 더욱이 와일드, 시먼즈, 다우슨 등이 이어 가지만 이들 시인의 중세 또는 고대에의 경도(傾倒)와 미의 집요한 찬미는 낭만주의의 난숙과 조락(凋落)의 형태로 끝난다. 이 외에 <근대의 사랑>의 매러디스, <웨섹스 시집>의 하디, <단시집(短詩集)>의 브리지스, 프란시스 톰슨, 세기말의 퇴폐를 한탄하는 애국시인 키플링 등이 나오게 된다. 예이츠나 하우스먼은 이제 20세기 시인 속에 넣어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테니슨[편집]

Alfred Tennyson (1809-1892)

영국 시인.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웠다. 형 찰스와 함께 <형제시집>(1827)을 출판하였다. 대학에서 고전·역사·철학을 배우는 한편 <서정시집>(1830)을 출판하여 워즈워스에게 그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듬해 부친의 별세로 대학을 떠나 얼마 되지 않는 유산으로 집안의 생계를 이어가면서 제2의 시집 <시집>(1832)을 상재(上梓)하였으며 이 안에는 <예술의 궁전>과 <샬럿 공주> 등의 명작이 있었는데 상극하는 의식 등의, 현대로 연결되는 테마를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이후 10년간 사색과 습작에 전념, 친구인 해럼의 죽음에 타격을 받으면서 <아서왕(王)의 죽음>을 포함하는 2권의 <시집>(1842)을 내기에 이르러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높였고 8년 후의 <인 메모리엄>은 해럼의 죽음에서 받은 슬픔을 광명으로 승화시킨 기록이며 영국의 만가(挽歌) 중에서 걸작으로 꼽고 있다. 동년 워즈워드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되었다.

그 후 <모드>(1855) <국왕 목가(牧歌)>(1858), <이녹 아든> 등을 출판하여서 교묘한 음(音)과 운율의 구사 및 회화적인 묘사로서 가장 영국적인 정경과 정서를 노래하였다. 만년에 작위(爵位)를 받아 상원에 의석을 갖기도 하였다.

이녹 아든[편집]

Enoch Arden (1864)

테니슨 작 서사시.

영국의 어촌에서 일어난 선량한 사람 사이의 비극이다. 처자의 행복을 위하여 고기잡이를 집어치우고 선원이 된 주인공은 배가 난파하여 무인도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그의 아내는 그가 익사했다고 생각하여 어릴 적부터 사귀었던 친구의 구혼을 받아들여 아이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지낸다. 기적적으로 섬에서 구출되어 이녹은 귀향하였으나 처자와 벗의 행복을 위하여 몸을 숨겨 고독한 생활을 하다가 그가 죽은 후에 사정을 알게 된 마을사람들이 동정어린 눈물을 흘린다. 출판하자 곧 최고의 인기를 얻어 테니슨을 국민시인으로 만든 작품이다.

브라우닝[편집]

Robert Browning (1812-1889)

영국 시인.

아버지는 잉글랜드 은행원이었다. 일찍이 시인을 뜻하여 런던 대학에서 배웠고 20세경에 <폴린>을 쓰고 이어 <페러셀서스>(1835)를 썼다. 모두가 자서전적 요소를 포함한 시이다. 자기중심적인 종교상의 회의(懷疑)에 고민하여 오직 지식을 구하는 젊은 영혼의 사랑과 신의 광명에 의한 구제를 테마로 하고 있다.

명우(名優) 맥클리디와의 교제가 인연이 되어 <종(鍾)과 석류(石榴)>(1집-8집, 1841-46) 중에 몇 편의 희곡을 썼으나 희곡으로는 성공작이 없고 여기에 극적인 서정시와 로맨스 형식인

<전(前)공작 부인> <대사교 스스로 묘(墓)의 지시를 내리시다>

<피파의 노래> 따위의 명작이 있다.

1846년 시인으로서 이미 명성을 얻고 있던 엘리자베스 배릿과 결혼하여 그녀와 함께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약 15년을 보내는 가운데 <남(男)과 여(女)>(1855)를 출판하였으며 이전부터 손을 댄 <극적 독백(獨白)>(한 사람의 대사(臺詞)만으로 기타 많은 인물의 언어·동작·표정·배경까지 묘사한다)을 마음대로 구사하여 <리포 리피 수도사> <안드레아 델 사르토> 등의 걸작을 더 썼다.

대작 <반지와 책>(1868-69)은 17세기 로마의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여 12권의 각 권마다 각각 한 사람의 독백으로 한, 한 사건을 둘러싼 갖가지의 인간심리의 기묘한 동향을 추적한 것이다.

피츠제럴드[편집]

Edward Fitzgerald (1809-1883)

영국 시인.

시퍽주(州)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에스파냐의 극작가 칼데론의 작품과 그리스의 고전비극 <아가멤논>과 <이디퍼스왕(王)> 등을 영역하였다. 특히 12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 카이얌의 4행시의 영역은 인생의 화려함과 미의 무상한 변화를 노래한 내용과, 창작이라 할 만큼 유려하고 적절한 표현과 형식으로 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다.

루바이야트[편집]

Rubaiyat of Omar Khayyam (1859)

피츠제럴드 번역시. 12세기 페르시아의 천문학자이며 시인인 오마 카이얌의 4행시(<루바이야트>는 ‘4행시집’의 의미)를 영역한 것이다. 처음엔 무명으로 출판했으며 연수(聯數)도 75연이었으나 개정 증보를 거듭하여 1879년판에는 백여 연이나 됐다. 그는 인간 존재의 신비와 생명과 미(美)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술과 환락을 권유하는 감미로운 염세사상이 빅토리아 시대의 편협한 도덕률에 반발하여 신앙과 회의 사이를 방황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호소하여 많은 독자를 얻었고, 영국문학의 소고전(小古典)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로제티[편집]

(D.G)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영국 화가·시인.

아버지는 런던에 망명한 이탈리아의 지사(志士). 로제티는 일찍부터 시도 썼으나 처음에는 화가로 알려졌으며 헌트, 밀레 등과 더불어 ‘라파엘로 전파(前派)’의 회화와 문예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어 기관지 <맹아(萌芽)>로 르네상스 초기의 청신한 화풍과 중세취미를 고취하였다. <모나 바나> <단테의 꿈> 등의 회화의 제작 이외에 <시집>(1870)과 101편의 소네트로 된 <생명의 집>과, 명작 <축복받은 처녀> 등을 포함한 <발라드와 소네트>(1881)를 출판하였다. 풍염(豊艶)한 색채와 강렬한 방향(芳香)을 추구하여 형태의 미에 취한 신비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을 썼으나 시대의 풍조로 인하여 때로은 ‘육감적’이란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로제티(크리스티나)[편집]

Christina Georgina Rossetti (1830-1894)

영국 여류시인.D.G. 로제티의 누이동생. ‘라파엘로 전파’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 기관지<맹아(萌芽)>에 익명으로 우수한 서정시 <꿈의 나라> 등을 실었다. <요마(妖魔)의 시장과 기타>(1862)와 <왕자의 여행>(1866) 등의 동요풍(童謠風)이고 공상적인 시를 써 예민한 감수성과 영적 고민을 보여주었다. 후에 진지하고 경건한 종교시를 써서 17세기의 허버트나 본(H. Vaughan)을 연상케 하는 경지를 개척, 온아한 정서와 확실한 시법으로 영국 여류시인 가운데 제일인자라 할 수 있는 작품을 남겼다.

모리스[편집]

William Morris (1834-1896)

영국 시인·공예미술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처음에는 신학을 배웠으나 미술에 흥미를 갖고 로제티의 영향으로 ‘라파엘로 전파’운동에 가담, 중세 수도원 같은 공동생활에 의한 공예품의 제작을 뜻하여 회화, 장식 외에 인쇄술에도 손을 대어 인생의 미화에 힘썼다. 그 후 러스킨의 감화로 사회주의에 공명하게 되어 유토피아 이야기인 <눈부신 평원의 이야기>(1891)를 썼다.

시인으로서는 아서왕 전설과 그리스 신화, 북구의 사가 등에서 소재를 구하였다. <지상낙원(地上樂園)>(1868-1870)에서는 14세기를 무대로 ‘지상낙원’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스 문명의 자취가 있는 소읍에 도착하여 그땅의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중세문명의 구가와 초서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스윈번[편집]

Algernon Charles Swinburne (1837-1909)

영국 시인·평론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修學), ‘라파엘로 전파’운동에 가담하여 시를 쓰기 시작하여 28세에 극시 <칼리돈의 아틀란타>로 명성을 얻었다. <시와 발라드>(1866), <해뜨기 전의 노래>(1871)에 분방한 이교도적이고 관능적인 시세계를 펼쳐 요설(饒舌)과 운율법의 자유로운 구사로 빅토리아 시대의 기성관념에 도전했다. 산문 저술에는 <평론집>(1875)과 기타 몇 편이 있다.

홉킨스[편집]

Gerard Manley Hopkins (1844-1889)

영국 종교가·시인.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을 배웠고 키츠풍(風)의 시를 섰으며 페이터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뉴먼의 감화로 카톨릭으로 개종, 제수이트회에 들어가 성직을 갖는다. 그러나 생래적인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은 다시금 그를 시창작에 몰두하게 하여 ‘스피링 리듬’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운율로 대담한 어휘와 어법(語法)으로써 미의 추구와 신앙, 이러한 내심의 갈등을 노래하였다. 그의 시는 1916년에 브리지스의 진력(盡力)으로 출판되어 젊은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빅토리아 시대 소설[편집]

-時代小說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소설 융성의 기운으로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의 소설이 가장 번창한 시대이다. 중상계급의 교육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또 여성에게 여가가 많아진 때문에 독서인구가 증가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소설집필을 본분이라 생각하는 우수한소설가가 많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여류작가도 많이 있었다. 산업혁명의 진전으로 낡은 영국에서 새로운 영국으로 탈피하는 이 시대에 많은 사회문제가 나타난 것은 당연하며 특히 노사(勞使)와 빈부의 관계라든가 사회정의에 관한 의식이 높아갔다. 디즈레일리(1804-1881), 리튼(1803-1873), 개스컬 부인(1810-1865) 등의 소설은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취급하고 있다.

인간의 심리나 사회의 양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사실주의가 득세(得勢)한 것도 이 시대로서, 트롤러프(1815-1882)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사실주의와 신비성을 합친 추리소설을 쓴 사람은 윌키 콜린스(1824-1889)였다. 또 아동문학의 방면에서도 재래의 교훈적 냄새를 벗어나 순수한 공상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캐럴(1832-1898)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기타의 작품이 있다.

디킨스[편집]

Charles Dickens (1812-1870)

영국 소설가.

영국의 군항 포츠머스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해군 경리부의 하급관리로 일정수입은 있으나 낭비벽 때문에 가계는 항상 쪼들렸다. 디킨스는 어릴 적부터 허약하여 집에만 있으면서 소설을 탐독했고 이것이 장래의 그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 아홉 살이 되자 런던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나 집은 늘 가난했고 12세에는 구두약공장에 나가 일을 했다. 그 얼마 뒤에 부친은 부채로 감옥에 들어갔다. 이때의 쓰라린 기억은 디킨스의 일생을 지배하여 가난한 사람에게의 동정과 권력자의 부정에 대한 분노는 그의 작품에 중심적 테마가 되었다.

수개월 후에 유산을 받은 그의 아버지가 빚을 갚고 출옥한다. 그 후 디킨스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리하여 변호사의 사무원이 되고 16세에 속기사가 된다. 그로부터 신문사의 통신원이 되었고 그 후 런던 견문기를 신문에 실었는데 이것이 그의 문필생활의 출발이었다(때는 21세). 이것을 묶어 <보즈 사생첩>으로 출판하여 그 후에 <픽위크 페이퍼즈>(1837)를 위시하여 계속 대작을 발표, 당대의 뛰어난 소설가가 되었다. 특히 유명한 작품으로 <올리버 트위스트> <마틴 처즐위트>(1844), <데이비드 코퍼필드> <쓸쓸한 집>(1853), <두 도시의 이야기> <위대한 유산>(1861) 등이 있다.

또 단편인 <크리스마스 캐롤>(1843)은 인색한 실업가 스쿠루지의 개심을 묘사하여 작자의 그리스도교적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캐서린 호가드와 결혼한 해는 1836년 이었으나 1858년에는 별거하게 되었고 그것은 젊은 배우 엘렌 터넌을 사랑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즈음부터 자작한 작품 가운데 감동적인 장면에는 몸짓을 섞어 가면서 군중 앞에 낭독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여러 곳뿐만 아니고 미국까지 건너갔으나 건강이 현저히 나빠져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기 전에 죽었다.

디킨스는 종래에 크리스마스적 복음을 펴는 밝은 유머가 넘치는 작가라 생각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그에 대한 관점이 크게 변하였다. 그의 성격에는 동정적이고 따뜻한 면과 아울러 자기폐쇄적인 어두운 면이 있고 또 그의 성장의 영향도 있어 사회의 모순에는 특히 민감하였다.

의회, 정부, 법원, 기타 공적 시설에 대한 불신의 신념이 그의 작품에 가끔 나타났고 인간심리의 깊이에 대한 흥미와 이해도 당시의 작가로서는 비상하게 깊었다. 소설기법에 있어서도 상징과 암시, 기타 복잡한 연구를 시도하였다. <쓸쓸한 집>이후의 후기작품에는 그 경향이 현저하다.

올리버 트위스트[편집]

The Adventures of Oliver Twist (1838)

디킨스 장편소설.

고아 올리버가 구빈원(救貧院)에서 양육되어 장의사(葬儀社)의 조수가 되었다가 런던의 도둑떼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고생을 겪지만 드디어 행복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진전의 변화가 무쌍하고 단순한 스토리로서도 재미있는 읽을거리지만 그 바닥에는 강요당하는 자에 대한 작가의 깊은 동정이 흐르고 있다. 이 동정은 작가 자신이 자기의 어린시절을 연민(憐憫)하는 마음이 숨어 있어 특히 구빈원의 비참한 생활과 그것을 운영하는 자들의 냉혹함의 묘사는 구빈법(救貧法)의 불비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또 도둑의 생활을 묘사하면서도 당시에 많은 소설과 같이 흥미본위에 빠지지 않고 냉정한 비판을 하였던 것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편집]

David Copperfield (1850)

디킨스의 반(半)자서전적인 장편소설.

데이비드는 부친 별세 후에 출생한 사내아이의 이름인데, 순한 모친과 식모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나지만 모친의 재혼 후에는 의부에게 학대를 받아 양조장 직공으로 나오게 된다. 이 부분은 작가가 구두약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기초로 하고 있다. 데이비드가 하숙한 집의 주인인 가난하지만 쾌활한 미코버는 작가의 부친을 모델로 하였고 또 데이비드가 사랑하는 여성 도라는 작가의 첫사랑인 마라이어 비드넬을 모델로 하였다. 성인이 된 데이비드가 문필가로 일어서는 것도 작가의 경력과 유사하다. 전편은 유머와 우수(憂愁)에 넘치며 디킨스가 자기 작품 중에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두 도시 이야기[편집]

A Tale of Two Cities (1859)

디킨스 역사소설.

두 도시란 파리와 런던을 가리킨 것으로 이야기는 이 두 도시를 무대로 전개된다. 시대는 18세기 말의 15년간, 프랑스 혁명의 준비기부터 최성기로 걸쳐 있다. 디킨스는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사>와 기타의 역사서적으로 당시의 정세를 연구하여 그것을 이 작품에 구체화하였다.

런던의 변호사 시드니 커튼이 사랑하는 여성 루시 마네트를 위하여 자진하여 단두대에 서는 순애(純愛)의 이야기가 프랑스 혁명의 광란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디킨스는 이 작품의 집필 당시 사랑했던 여성 엘렌 터넌에 대한 정열을 커튼의 사랑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캐럴[편집]

Christmas Carol

찰스 디킨스 작.

구두쇠인 스크루지는 인정도 없거니와 괴팍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한다. 크리스마스 전날, 사무원 보브에게 난로에 땔 석탄도 주지 않고, 조카의 크리스마스만찬 초대도 거절한 스크루지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기부금도 매정하게 물리친 채 돈 계산에만 열중한다.

그 날밤, 그의 옛날 동업자였던 말리 유령이 나타나 죽은 후에 편해지려면 생전의 행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충고한 뒤 사라진다. 말리 유령이 사라진 뒤 과거·현재·미래의 세 유령이 차례로 나타난다.

과거의 유령은 즐거운 크리스마스 풍경과 함께 늘 외톨이였던 스크루지의 어린시절을, 현재의 유령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보브의 가정을, 미래의 유령은 스크루지 자신의 죽음과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장례식 장면을 보여 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그 이튿날부터 새사람이 되어 사랑을 베푼다.

대커리[편집]

William Makepeace Thackeray (1811-1863)

영국 소설가.

인도의 캘커타 출생으로 부친은 동인도회사에 근무하였으나 그가 네 살 때 죽었다. 1817년 교육을 받기 위하여 영국에 와서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중퇴, 유럽으로 건너가 법률을 배우다 그만 두었고 파리에서 그림도 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친의 유산을 잡지 경영과 도박으로 탕진하고 1837년 영국으로 돌아온 후 생활상의 필요에서 문필업을 시작하여 평론과 소설을 수없이 발표하였으나 세상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847년부터 1848년에 걸쳐 분권(分卷) 월간(月刊)의 형식으로 발표한 <허영의 도시>는 그의 이름을 갑자기 높여 주었다. 당시에 디킨스의 <돔비부자(父子)>가 역시 분권 월간(分卷月刊)으로 발표됐으나 대커리의 작품 쪽이 호평을 받았다. 다음의 <펜더니스>(1850)를 거쳐 <헨리 에스몬드>(1852)에 이르러 그의 창작력은 더욱 원숙하였다. 이 작품은 주인공 헨리의 애정생활을 이야기한 자서전체(自敍傳體)소설이며 18세기 초엽의 영국사회를 18세기적 문체를 사용하여 교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커리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금전숭배, 물질존중, 위선성(僞善性)을 혐오하여 이러한 ‘속물근성’을 많은 작품에서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상적이며 소심한 그는 사회비판에 있어서도 철저하지 못하여 애매한 점을 면하지 못하였다.

허영의 도시[편집]

Vanity Fair (1848)

대커리 장편소설.

대표적인 두 여인 레베카 샤프와 어밀리어 새들리의 인생행로를 그린 작품이다. 레베카는 신분이 낮지만 영리하여 갖은 수단을 다 써서 사회의 상층으로 올라간다. 한편 어밀리어는 유순할 뿐 재능이 없는 여성이며 남편 사후에는 갖가지 고생에 부닥친다. 그러나 최후에는 레베카보다 어밀리어 편이 조용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 두 여인을 둘러싸고 속물근성이 밴 여러 인물이 수놓은 사회의 풍경화는 참으로 ‘허영의 도시’라 부를 만한 것이다.

브론테(샬롯)[편집]

Charlotte Bront

(1816-1855)

영국 여류소설가.

영국의 북부 요크셔의 손튼에서 출생, 부친은 목사였다. 그녀는 6명의 자녀 가운데 셋째였으며 모친은 그녀가 5세 때 사별하였다. 큰 네 아이는 부근의 기숙학교(寄宿學校)에 들어갔으나 엄격한 훈육과 볼품없는 식사로 그중 둘은 폐병이 들어 죽었다. 이곳의 생활이 후의 <제인 에어>에서 로드 학교의 생활로서 재현된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샬롯은 동생들과 어울려서 공상 이야기를 지어서 즐거워하기도 했으나 1831년부터 또 학교로 보내어졌으며 가정교사를 하면서 자활하게 된다. 1842년에는 여동생 에밀리와 함께 벨기에의 브뤼셀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의 교사 에제를 사랑했지만 아내가 있는 기혼자였기에 비련(悲戀)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녀의 소설로 되살아난다. 다시 영국에 돌아와 1846년에 동생 에밀리 및 앤과 함께 시집을 출판하였으나 2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1847년에 소설 <제인 에어>를 발표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후에 출판된 그녀의 <빌레트>(1853)등과 함께 연애에 있어서 정열의 묘사에 새로운 시기를 긋게 되었다.

제인 제어[편집]

Jane Eyre (1847)

장편소설. 샬롯 브론테 작.

고아인 제인은 숙모가 양육하지만 그의 냉혹에 반항하여 로드 기숙학교로 보내어져서 불행하게 지내다가, 가정교사로 들어간 집의 주인 로체스터와의 사랑으로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종래의 소설이 연애와 결혼을 사회적·외부적인 사건으로 취급하여 인물의 심리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경향이 있는 데 반(反)하여 이 소설은 제인이 로체스터를 사랑하면서 그에게 광인이 된 처가 있기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번민하는 심리를 깊이 추구한 점이 특징이다. 또 여성은 남성에 대하여 예속적(隷屬的)인 입장이라 생각하고 있던 당시에 제인의 아무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독립심을 묘사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제인과 로체스터를 전통적인 소설의 미남미녀로 그리지 않고 개성미를 강조한 것도 이 작가의 참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브론테(에밀리)[편집]

Emily Bront

(1818-1848)

영국 여류소설가.

샬롯 브론테의 여동생으로 영국 요크셔의 시골 손튼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아버지와 박정한 숙모 밑에서 자랐다. 극히 내성적인 성격으로 외부사람과 접촉도 못 했다고 한다. 1842년 샬롯과 더불어서 브뤼셀에 유학했지만 역시 주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독서에만 열중하며 지냈다. 1846년에 샬롯과 동생 앤과 함께 출판한 시집 가운데 에밀리의 작품이 가장 훌륭하다.

1847년에 출판된 <폭풍의 언덕>은 이상한 정열의 이야기로, 내성적인 에밀리의 마음속에 이처럼 열렬한 것이 숨겨져 있었다는 데에 놀라게 된다. 출판 당시에는 세평(世評)이 좋지 못하였으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서서히 진가를 인정받게 되어 지금에 와서는 영국최고 걸작의 하나로 꼽고 있다. 에밀리는 미혼인 채 30세로 요절하였다.

폭풍의 언덕[편집]

Wuthering Heights (1847)

에밀리 브론테 장편소설. 폭풍의 언덕에 있는 저택의 주인은 빈민가의 부랑아인 히스클리프를 주워다 키웠다. 주인이 죽은 뒤에 그 뒤를 이은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몹시 학대한다. 또 히스클리프의 연인인 캐서린이 다른 사나이인 린튼에게 시집을 가버리자 복수의 마귀가 된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와 린튼 두 집안을 탈취하여 제 소유로 만들어 버리고 배반한 그녀를 원망하나 가슴에 맺힌 사랑은 어쩔 수 없어 캐서린이 죽은 후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칠 만큼 집착한다. 그러나 드디어 그도 모든 망집(妄執)을 벗고 조용히 죽어간다.

이 소설은 바이런의 산문시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악마적 인물 히스클리프가 보여주는 열렬한 애증(愛憎)을 추구한 것에 큰 특색이 있으며 이야기 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인 로크우드가, 폭풍의 언덕에 있는 저택의 식모 넬리 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시 말하게 된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시간의 관계도 자주 뒤바뀌며 이로 인하여 사건의 굴절도 심해져서 독자는 앞의 사건을 뒤의 사건과 대조해 보고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후에 조세프 콘래드가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썼다.

엘리엇(조지)[편집]

Gorge Eliot (1819-1880)

영국 여류소설가. 본명은 메리 앤 에번스.

영국 중부의 워릭주에서 출생. 부친은 건축가였다가 지주를 위한 토지관리인이 되었다. 부친은 견실한 성격을 가졌고, 엘리엇의 소설인 <아덤 비드>(1859)의 아덤을 위시하여 자주 다른 곳에도 그녀의 부친을 모델로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소녀시절의 그녀는 복음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으나 차차로 당시의 새 사상에 접촉하여 과학주의·실증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품게 되어 재래의 그리스도교와 절연한다. 그러나 그녀의 도덕관을 이루는 기저(基底)에는 종교적인 심정이 일생을 일관하고 있다. 1854년 이후에 처자가 있는 조지 루이스와 동거생활을 하게 되어 세상의 비난을 받았으나 조지 엘리엇이란 이름으로 <플로스강(江)의 물레방아>(1860), <미들마치>(1872) 등의 걸작을 내면서 작가로서 그녀의 위치는 부동한 것이 된다. 그녀의 소설은 사실주의의 기법을 따르고 있지만 내용은 사람이 사는 방식에 관하여 그녀만의 독특한 철학을 구체화한 것이다.

사일러스 매너[편집]

SilasMarner (1861)

엘리엇 작 중편소설.

친구와 연인에게 배신을 당한 직공(職工) 사일러스는 신(神)도 인간도 못 믿게 되어, 마을에서 떨어진 구석진 집에서 다만 돈을 모으는 것만이 사는 보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돈마저 빼앗겨 허탈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의 집에 길을 잃고 들어온 소녀인 에피를 길러가는 가운데 인간적인 심정을 되찾아 행복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작가 엘리엇은 인간이 자기의 과거나 주위와 단절된다면 반드시 당황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일러스의 절망과 갱생의 과정은 이 신조의 체현(體現)인 것이다. 옛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스토리를 생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소박한 사일러스와 마을 사람들의 사실적 심정묘사 때문이다.

빅토리아 왕조 말기의 소설[편집]

-王朝末期小說

빅토리아 왕조 말기는 극도에 달한 영국의 국가적인 번영이 드디어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그와 더불어 정신적으로도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는 시대였다. 진화론을 비롯하여 많은 과학적 사상이 재래의 종교관이나 도덕관을 동요케 하고 또 프랑스와 기타 대륙의 문예사상이 유입됨에 따라서 영국에서도 자연주의가 뿌리를 박기 시작하였다. 조지 무어(1852-1933)와 조지 기싱(1857-1903)의 문학은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또 러드야드 키플링(1865-1936)은 이러한 분위기에 반항하는 것처럼 제국주의 찬미 작품과 인도(印度)를 소재로 한 이국의 이야기를 썼다. 코난 도일(1859-1930)의 추리소설은 명탐정 셜록 홈즈를 등장시켜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것도 일종의 현실도피라 하겠다.

메레디스[편집]

George Meredith (1828-1909)

영국 소설가·시인.

조부와 부친은 포츠머스의 재단사였으며 이 일이 자존심이 강한 메레디스에게 열등감을 주었다. 14세로 독일에 유학하여 자연주의적 사상을 배웠다. 2년 후 귀국하여 변호사 사무소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 저널리스트로 전향한다. 1859년, 소설 <리처드 페버럴의 시련>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부자(父子)의 대립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발표 당시는 평이 좋지 못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의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대표작 <에고이스트> 외에 많은 작품을 써 만년에는 영국문단의 지도적 존재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용어가 난해(難解)한 것으로 정평 있고, <희극론(喜劇論)>(1877)은 그의 창작태도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에고이스트[편집]

The Egoist (1879)

장편소설. 메레디스 작. 월로비 패턴경(卿)은 미남에 부자이나 자기 중심적인 성격으로 여성관계에는 상대의 이해를 얻지 못하여 계속 실패한다. 결국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과 결혼하게 된다. 경구(警句)와 잘 가다듬은 표현이 풍부하여 작자의 이른바 ‘희극정신’을 구체화한 소설이다. 지적인 여성 클라라 미들튼의 묘사는 당시 새로운 것이었다.

버틀러[편집]

Samuel Butler (1835-1902)

영국 소설가.

영국 중부의 노팅엄셔주(州) 랭거 출생으로 목사인 부친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 목사가 되도록 권유한 부친의 희망을 뿌리치고 뉴질랜드에 건너가 목양(牧羊)에 종사하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자 곧 그것을 읽고 비판하였다. 1864년 이후 런던에 정주했고 <에러원>(1872)은 현실의 풍속과 제도가 모두 거꾸로 되어 있는 가상국(假想國) 에러원을 묘사하여 빅토리아 왕조의 영국을 풍자한 것이며, <만인의 길>(1903)은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교육에 대한 어니스트 폰티펙스의 반항을 묘사한 소설이다.

허른[편집]

Lafcadio Hearn (1850-1904)

영국 문학가.

아일랜드인(人)인 아버지와 그리스인을 어머니로 하여 다도해의 라프가다섬(島)에서 출생하였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1869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기자가 되어 1890년 잡지사의 통신원으로서 일본에 갔고, 그 직을 그만두고 마쓰에(松江) 중학의 영어교사가 되었으며, 일본 여자와 결혼, 1896년 일본에 귀화하고 와세다와 도쿄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였다. 일본을 소개한 <일본의 첫인상>(1894) 그리고 <그늘>(1900) 등이 있다.

스티븐슨[편집]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영국 소설가·시인.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출생. 부친과 조부 모두가 등대기사(燈臺技士)였다. 1867년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가 공학을 배웠으나 법률로 바꾸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한때 법률가로 출세하려 했으나 결국 길게 가지는 않았다.

선천적으로 허약한 그는 폐를 앓아 전지요양을 위하여 가끔 유럽과 다른 곳에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여행기를 출판하였던 것이다. 1879년 미국으로 가서 다음해에 기혼부인인 파니 오즈번과 결혼하였고 부인은 평생 동안 그의 좋은 반려자가 되었다. 1880년에 부인과 함께 영국에 돌아왔고 건강도 좋아져서 많은 평론·수필·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단편을 모은 것을 <신(新) 아라비아 야화(夜話)>라 하여 1882년 출판했다. 1883년에 <보물섬>출판으로 명성을 크게 올렸고, 1886년에 괴기한 이야기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1889년에 <수령 밸런트리>가 출판되자 그의 명성은 한층 부동한 것이 되었다. 1888년부터 3년간 태평양의 섬을 휘돌아 1890년에 사모아섬에 안주하여 건강도 회복한 듯했으나 1894년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메레디스와 하디 같은 심각한 작가가 활약하고 있던 이 시기에 스티븐슨은 소설의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부활시킨 것이다. 또 대륙의 자연주의 영향이 영국에도 파급하기 시작한 풍조에 반항하여 그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노력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심원한 사상이나 사회비판을 구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지만 로맨스의 향기로 인하여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는 하다. 그의 문체는 비상한 고심의 성과이기는 하나 현대의 안목으로 보면 조금 부자연한 감을 면할 수가 없다.

신 아라비아 야화[편집]

New Arabian Nights (1882)

단편집. 스티븐슨 작.

아라비아 야화풍(風)의 공상적 전기(傳記)이야기를 19세기 런던을 무대로 전개한 작품집이다. <자살 그룹>과 <영주의 다이아몬드><하룻밤의 숙박> 등이 실려 있다. 음산한 정경묘사와 호기심을 돋구는 말씨에 재능이 보인다.

보물섬[편집]

Treusure Island (1883)

모험소설. 스티븐슨 작. 소년 짐 호킨스는 무인도에 숨겨진 보물의 소재를 밝힌 지도를 입수하고 친구들과 보물찾기 항해에 나서나, 고용한 선원들이 해적으로 보물을 가로채려 한다. 이 선과 악 사이의 싸움을 매력적인 필치로 선명히 묘사했다. 이런 종류의 모험소설 중 걸작이라 하겠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편집]

Dr. Jekyll and Mr. Hyde (1886)

괴기소설. 스티븐슨 작.

지킬 박사는 약품의 힘으로 자유롭게 선과 악 양편의 인격이 될 수 있으나, 결국 선인으로 돌아갈 약이 떨어져 악인 하이드로서 비참한 종말을 고한다. 작가는 열병을 앓고 있을 때의 꿈을 기초로 하여 소설을 썼다고 한다. 발표 당시부터 커다란 인기를 얻어 이 제목은 이중인격자의 통칭이 되었다. 스릴이 넘치는 이야기이나, 인간이 가진 이중성의 탐구로서의 깊은 고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디[편집]

Thomas Hardy (1840-1928)

영국 소설가·시인.

영국 남부도시의 도싯에서 출생. 이 땅은 그의 많은 작품의 배경에 웨섹스로 쓰여지게 된다. 어릴 적부터 허약하여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8세에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16세 때 건축가의 조수가 되었다. 1862년에는 건축을 배우기 위하여 런던으로 나왔다. 그러나 점차로 시작(詩作)에 힘써 시집의 출판도 계획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1867년 건강이 나빠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건축업을 하는 한편 시도 계속 썼다. 그러나 시보다는 소설이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빈자(貧者)와 귀부인>이란 소설을 써서 출판을 의뢰하기 위하여 메레디스에게 보냈으나 줄거리가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되돌아왔다. 하디는 충실하게 이 말을 따라 <최후의 수단>(1871)을 써, 이번에는 출판에 성공하나 호평은 못받았다. 그 후 시골을 무대로 한 목가적인 소설을 계속 발표하여 점차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시끄러운 무리를 떠나서>(1874)는 이 시기의 걸작이다.

1874년에 결혼하여 건축업을 완전히 집어치우고 창작에만 전렴하였다. 1878년에 출판한 <고향사람의 귀향(歸鄕)>은 웨섹스의 황야를 무대로 한 비극으로 그의 걸작이다.

이 무렵부터 인간의 조그마한 계획이나 행동을 냉혹하게 뭉개버리는 운명의 힘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소설의 중심 테마가 되었다. <캐스터브리지의 시장(市長)>(1886)에는 재능 있는 사나이가 성격의 결함 때문에 비극적 종말로 쫓기는 양상을 그리고 있다. <테스>는 순진한 처녀 테스가 운명의 장난으로 살인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또 <주드>(1896)는 큰뜻을 품은 주드가 음주벽(飮酒癖)과 여성의 유혹에 대한 우유부단 때문에 아무런 일도 남기지 못하고마는 비극적인 일생을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신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어두운 인생관을 기조(基調)로 하고 있으며, 성(性)적인 묘사도 당시로서는 노골적이어서 악평을 받아 하디는 이후 소설 쓰는 일을 단념하고 시를 쓰게 되었다.

시에 전렴하는 일은 그가 품어온 희망이기도 했다. <원수(元首)>(1903, 1906, 1908)는 그의 시 창작의 절정을 나타낸 시극이다.

하디의 후기 소설은 그의 운명관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쓰여진 감이 있으나 그럼에도 개개의 인물과 풍경의 묘사력(描寫力)은 뛰어난 것이었다.

고향사람의 귀향[편집]

The Return of the Native (1878)

하디 작 장편소설.

영국남부의 황야 에그든 히스에서 자란 여성 유스티셔 바이가 사랑과 도시생활을 동경하여 갖가지 노력을 해 보지만 실패로 그쳐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 유스티셔가 결혼하는 상대는 파리에서 돌아온 크림 요브라이트로, 그는 비정한 도시가 싫어 고향에 돌아온 사람. 유스티셔는 그와 결혼함으로써 도시생활의 꿈을 실현코자 하였다. 그러나 꿈의 실현이 여의치 않자 유스티셔는 큰비가 오는 날 밤 옛날의 애인과 더불어 도망하려다가 잘못하여 익사한다. 그녀의 어둡고 열렬한 정열이 히스의 정경묘사와 융합하여 이상한 박력을 느끼게 한다.

테스[편집]

Tess of the D’Urbervilles (1891)

장편소설. 하디 작.

테스의 부친은 가난한 농부였는데 명문 더버빌과 친척관계가 있다고 하고 그녀를 그곳에 식모로 들여보낸다. 테스는 그집 주인인 알렉에게 농락당하여 임신하게 된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앓다가 죽게 되는데, 죄의 씨앗이라 하여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한다. 아이가 죽은 뒤 슬픔에 빠진 테스는 낙농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농사일을 배우러 온 클레어란 청년과 알게 된다. 클레어는 테스에게 구혼하지만, 어두운 과거를 지니고 있는 테스는 거절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클레어의 간절한 청혼으로 클레어와 약혼을 한다. 결혼 첫날밤 테스가 과거를 고백하자 클레어는 분격하여 브라질로 떠나버린다. 가난에 쫓겨 알렉의 정부가 되어 있는 테스에게 병으로 쇠약해진 클레어가 돌아온다. 테스는 생각 끝에 알렉을 죽이고 사형대에 오른다. 결국 자기본위적(自己本位的)인 남성과 운명의 장난으로 순결했던 테스는 죽어간다.

세기말 문학[편집]

世紀末文學

19세기말(1890년대) 유럽은 정신적 퇴폐(頹廢) 경향이 나타나서 문학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제창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와 어니스트 다우슨 등이 나와서 관능적이며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문학이 성하였다. 삽화(揷畵)화가 오브리 비어츨리는 당시의 대표적인 계간잡지(季刊雜誌) <옐로 북>의 표지와 삽화를 악마주의적 작품으로 장식했으며 이 잡지 표지의 황색은 퇴폐취미(頹廢趣味)의 세기말 문학을 잘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의 잡지 <사보이>를 편집 간행한 아더 시몬즈의, 세기말 문학에 이론적 근거를 부여하여 프랑스 상징주의를 처음으로 영국에 소개한 <문학에 있어서 상징파 운동>(1899)은 특히 널리 읽혀져서 T. S. 엘리엇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세기말의 탐미적(耽美的)작가는 그 후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최근에 부활되는 기운이 보인다.

와일드[편집]

Oscar Wilde (1854-1900)

영국 극작가·소설가·시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출생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극을 쓰기 시작하여, 경구(警句)·역설·풍자에 넘친 <원더미어 부인의 부채<扇>>(1892) 등이 유명해졌으나, 이것은 모두가 전통적인 풍습희극을 부활한 것이다. 1895년 남색사건(男色事件)으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상대의 남성인 더글러스에게 부치는 편지형식으로 내성록(內省錄)을 썼다. 이것은 와일드 사망 후 <옥중기>(1905)로 발췌되어 간행되니, 참회와 비애에 넘친 회상기록으로 애독되었으며 1962년에 완본으로 출판되었다.

1897년 출옥 후 곧 프랑스로 가서 옥중의 회상을 <리딩 감옥의 시>(1898)로 간행했고, 그의 비통하고 비애에 찬 시풍(詩風)은 이 작품을 뛰어나게 하였다.

그는 세기말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일찍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제창했지만, 원래는 월터 페이터의 지적인 유미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극단적으로 관능적·역설적으로 한 것이다. 그의 예술론은 <의향론(意向論)>(1891)에 정리되어 있고, 그 안에 있는 “자연은 예술을 모방하다”란 유명한 말에 압축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감미로운 동화집 <행복한 왕자>(1888)가 있는가 하면 기괴한 환상적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肖像)> 등도 있다. 최근에는 비평가로서 와일드의 평가가 다시금 거론되고 있다.

행복한 왕자[편집]

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

와일드 작 동화.

한 도시의 광장에 행복한 왕자라고 불리는 동상이 서 있다. 제비 한 마리가 그 동상의 발 밑에 앉아 쉬려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위를 올려다보니 그것은 왕자의 눈물이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이 왕자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제비는 왕자의 부탁으로 왕자의 몸에 붙어 있는 보석들을 빼내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다.

제비는 왕자의 심부름 때문에 남쪽 나라에 가지 못하고 얼어 죽고, 왕자의 동상도 볼품 없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하느님은 천사에게 왕자의 심장과 제비의 시체를 하늘 나라로 가져오라고 이른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편집]

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1)

장편소설. 와일드 작.

영국 세기말의 퇴폐주의(頹廢主義)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간행될 때에는 사회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다.

미모의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헨리 위튼 경(卿)의 쾌락주의적 인생관의 영향을 받아 마음껏 즐긴다. 그러나 그 자신의 풍모는 쇠하지 않고 그의 초상화는 추악해진다. 그는 그의 초상화가 보기 싫어 끝내 어느날 밤에 단도로 찌른다. 이때에 비명을 듣고 달려 온 집안사람이 발견한 것은 노쇠(老衰)하고 추악하게 변한 도리언이 제 가슴에 칼을 꽂고 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작가는 예술지상주의 입장에서 이 작품을 썼고 더욱이 서두(序頭)에 몇 가지 잠언풍(箴言風)의 말을 싣고 있다. 가령 “예술을 표현하고 예술가를 숨기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등이다.

살로메[편집]

Salome (1893)

1막 비극. 와일드 작.

신약성서에서 소재를 취한 프랑스어 작품. 뒤에 그의 친구 더글러스가 영역하고 비어츨리의 삽화로 출판했다.

헤롯 왕은 생일을 맞은 연회(宴會)에서 아내 로디어스가 데리고 들어온 살로메에게 춤출 것을 소망하고 그 상(賞)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서 줄 것을 약속한다. 환상과 기괴(奇怪)에 찬 세기말의 대표작으로 여우(女優)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 썼다는 작품이다.

다우슨[편집]

Ernest Christopher Dowson (1867-1900)

영국 시인.

런던 근교에서 출생했고, 병약하고 또 방종하였기 때문에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하였다. 프랑스 문학이나 페이터의 유미주의 영향을 받아 <서정시집>(1896)과 희곡을 내었다. 시종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로 삶의 권태를 노래하고 자연보다 인공(人工)을, 전원보다 도회를 사랑한 퇴폐취미(頹廢趣味)가 가득 차 있다. 세기말의 탐미주의(眈美主義)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가공(架空)의 여성을 노래한 시 <시나라>는 유명하다. 실연의 쓰라린 타격과 결핵으로 요절한 작가이다.

20세기[편집]

20세기문학[편집]

-世紀文學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은 하나의 커다란 문학적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 이때까지의 64년간 빅토리아 시대는 T. S. 엘리엇이 말하는 “쾌활, 낙관주의, 그리하여 희망에 넘친 상태”의 시기였지만 이러한 전반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끝나게 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에도 자기비판적 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가령 토머스 칼라일, 존 러스킨, 매튜 아놀드, 윌리엄 모리스 등은 옵티미즘(낙관주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한 사회비판의 선구(先驅)가 된 사람은 H. G. 웰즈와 버나드 쇼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작가는 인간의 완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점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문학가들에게 낡은 것에 대하여 절망적이고 어두운 비판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냉소적, 비관적 태도는 올더스 헉슬리의 <대위법(對位法)>에서나 리처드 올딩턴(1892-1962)의 <어떤 영웅의 죽음>(1929)등에서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남긴 경제적 혼란이 그 극에 달한 것은 1930년대의 공황(恐慌)이며 동시에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파시즘의 위협은 영국작가들에게 심각한 불안과 위기의식을 가져왔다. 그러나 1930년대의 젊은 작가들은 그들이 꿈꾼 사회정의라고 하는 대의명분의 승리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점차로 자기의 내면적 세계의 탐구로 기울어져 갔다.

소설[편집]

小說

절망적이고 암담하던 시기의 깊은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한 작가의 한 사람에 조세프 콘래드가 있다. 그는 유럽풍(風)의 소설형식으로 쓴 <로드 짐>(1900) 등에서 내면의 도덕적 문제를 취급하였다. 아놀드 베니트와 존 골즈워디는 대작가이기는 했으나 새로운 세대의 문제의식은 그렇게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E. M. 포스터는 <인도에의 길>에서 D. H. 로렌스는 <사랑하는 여인들>(1920)에서 여러 사회적, 본능적, 인간적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에서 세계의 전체상을 난해한 언어의 구사와 의식의 유동적 수법으로 묘사하여 현대소설가의 정상에 이르렀다. 또 이블린 워나, 그레이엄 그린,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존 웨인, 앨런 실리토, 아이리스 머독, 윌리엄 골딩 등 작가의 활약도 주목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도 그린이나 레싱과 같은 기존의 작가들이 계속해서 훌륭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새로운 작가들도 등장했다. 토머스(D.M. Thomsa)는 허구적인 이야기에 실제사건과 유명인사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룬 <하얀 호텔>(1981)을 썼고, 핌(Barbara Pym)은 1950년대에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1970년대에 <사랑스런 비둘기 죽다>(1978)를 발표하여 뒤늦게 명성을 얻었다. 제임스(P.D.James)는 오랜 전통을 지닌 영국 추리소설의 맥을 <피부 속의 해골>(1982)과 <계획과 욕망(1990)> 등을 통해 유지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영국 시인으로 휴스(Ted Hughes)와 라킨(Philip Larkin), 그리고 데이비(Donald Davide)를 손꼽을 수 있다. 휴스의 주요 작품은 시집 <까마귀>(1970-1971)에 실려 있고 라킨의 시는 <높은 창문>(1974)에 수록되었으며 데이비의 시들은 주로 <멈춘 기차 안에서>(1977)에 들어 있다.

연극[편집]

演劇

20세기 영국 연극계의 활동은 소설과 시의 융성에 비하여 저조하다. 골즈워디, 제임스 배리(1860-1937), 쇼, 노엘 코워드(1899- ? ) 등이 활동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등장한 ‘노한 젊은이들’의 극작가 존 오스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다 보라(1956), <기석 예인(奇席 藝人)>(1957) 등과, ‘부조리의 연극’ 작가 해럴드 핀터의 <보호인>(1960)과 N. F. 심프슨의 <한편으로만 흔들리는 추>등은 사회적 항의와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각각 대표하여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핀터가 <무소유의 땅(No man’s Land)>(1975), <배반(Be-trayal)>(1978) 등과 같은 위협적이나 다소 개인적인 작품들을 썼으며 스토퍼드(Tom Stoppard)는 뛰어난 언어 사용과 정교한 구조, 그리고 철학적인 주제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 <뛰는 사람들>(1972)과 <변장>(1874) 등은 현대 희곡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셰퍼는 모차르트를 소재로 <아마데우스>(1979)라는 희곡을 썼는데 1980년대초 영화화되었다.

아일랜드 문학[편집]

-文學

20세기 아일랜드 문학은 전세기 말부터 성행해 온 소위 켈트 문학 부흥운동에서 시작된다. 19세기말 아일랜드의 토어(土語)인 게일어(語)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그를 전후하여 아일랜드의 민족정신이 뿌리 박힌 문학의 부흥을 추구하는 소리가 높아 갔다.

먼저 예이츠와 그레고리 부인 등에 의하여 켈트 민족의 구비전설(口碑傳說)이 소개되고 이 운동의 주력은 연극의 방향으로 향하여져 1899년 ‘아일랜드 문학단(文學團)’이 발족하였다. 그 후 이것을 모체로 하여 아일랜드 국민극협회가 설립되고 더블린의 애비(Abbey) 극장을 본거로 하여 예이츠, 그레고리 부인, 싱, 오케이시 등의 민족성이 강한 작품이 상연되었다. 이 운동은 한편에 있어서 아일랜드 독립운동과 보조를 같이하여 거듭된 내란은 예이츠와 오케이시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브렌던 벤헌(1923-1964)은 <인질(人質)>(1958)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금세기 세계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제임스 조이스와, 영어와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고 있는 사무엘 베케트도 아일랜드 태생의 작가이다. 일반적으로 아일랜드 문학은 켈트적인 신비성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 켈트적 요소가 채색되어 있는가에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남아 있다.

20세기 소설[편집]

-世紀小說

금세기 초에 주로 활약한 아놀드 베니트, 존 골즈워디, H. G. 웰스 등은 아직도 전세기 소설의 전통에 서 있는 작가들로 인간을 외부에서 포착하려 하며 소설의 이야기적 성격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1910년대에 들어서면 소설의 주제와 기법에 새로운 동향이 일어난다. 그 하나는 인간을 내면에서 포착코자 하는 경향이다. 도러디 리처드슨(1882-1957)이 그 선구자이며 그녀의 연작(連作) <순례(巡禮)>(1915-38)에는 주인공의 17년에 걸친 심리가 묘사되어 있다. 이 ‘내적 독백(內的獨白)’ 또는 ‘의식(意識)의 흐름’이라 불리는 수법은 다른 작가가 계승하여 1920년대에 꽃을 피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이러한 소설의 대표작이다. 이들 작품에는 전통적인 소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줄거리도 없고 이야기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등장인물의 의식이다. 조이스의 <피니건스 웨이크>는 이 수법의 소설이 도달하는 극점(極點)이며 작품 전체가 몽롱한 의식의 묘사로 줄거리뿐 아니라 인물의 윤곽까지도 확실치 않다. 이 외에 1920년대에는 소설기법에 있어서 실험적인 작품이 쓰여져 올더스 헉슬리의 <대위법(對位法)>은 음악의 방법을 기초로 하여 쓴 소설이다. D. H. 로렌스는 이때까지의 전통을 깨뜨리고 성(性)을 소설의 주제로 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은 태양과 같은 생활의 근원이며 그것을 오히려 감추려는 데에서 악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그와 같은 그의 성애관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나 로렌스에 대하여 도덕을 존중하는 사회의 압력은 강하여,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의 무삭제판(無削除版)이 영국에서는 출판될 수 있었다. 로렌스의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소설에도 의연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이외에 우의적(寓意的)인 소설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가니트(1892-1981)의 <여우가 된 귀부인>(1922), 위너의 <비행장>,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動物農場)>과 <1984년>,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등은 사실적인 작품이 아니고 어떤 이야기에 의탁해 자기의 사상을 말하는 우의소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0년대에 존 오스번, 존 웨인, 킹슬리 에이미스, 존 브레인 등 ‘노한 젊은이들’이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나타나서 기성의 사회윤리에 반항하였으나 그 ‘노여움’도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현대 영국소설의 기대는 애런 실리토(1928- ), 스턴 버스터(1928- ) 다비드 스토리(1933- )등 노동계급 출신의 작가들이다. 이 외에 조세프 콘래드, 서머셋 몸과 카톨릭 작가인 그레이엄 그린과 이블린 워, <녹색의 집>(1904)의 W.H. 허드슨(1841-1922), <칩스 선생 안녕>(1934)의 제임스 힐튼(1900-1954), <레베카>(1938)의 드브니 뒤모리에(1907-1989) 등이 있다.

콘래드[편집]

Joseph Conrad (1857-1924)

영국 소설가.

폴란드에서 태어나 1886년에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17세부터 36세까지 선원으로 생활하였으며, 처음엔 프랑스, 다음엔 영국 배를 타게 되면서 영어를 익혀 37세로 선원생활을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주로 해상생활에서 소재를 얻고 있다. <나시서스호(號)의 검둥이>는 흑인선원이 있기 때문에 선원들의 마음이 혼란함을 다루었고, <로드 짐>(1900)에서는 승객을 구원하지 않은 채 난파선(難破船)에서 도망친 죄책감을 보상하려고 토민(土民)들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선원을 묘사하고 있다.

<노스트로모>(1904)는 남미(南美)를 무대로 반란 진압에 헌신적으로 활약한 노스트로모라 하는 초인적인 이탈리아 사람이 최후에는 애정을 위해 신뢰를 배반하여 이전의 그답지 않는 경솔한 행동으로 사살되는 이야기이다.

콘래드는 청년시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고 여길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영어로 소설을 썼고 이야기의 구성도 교묘하여 이야기 작가로서도 일류이지만 그는 그것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도 관심을 가져서 윤리적인 문제도 작품 가운데에 취급하고 있다.

나시서스호의 검둥이[편집]

The Nigger of the Narcissus (1897)

콘래드 소설. 봄베이를 출항하여 영국으로 향하는 나시서스호에 흑인선원이 타고는 병에 걸려 제멋대로 언동(言動)을 함으로써 다른 선원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선장이 검둥이를 꾸짖는 일로 선원들 사이에 불온(不穩)한 공기가 감돌아 모반을 꾀하는 자도 있다. 그런데다가 바람이 없어 움직이지 않게 되지만 검둥이가 죽으니 바람도 다시 불어 배는 무사히 목적지로 간다.

키플링[편집]

Rudyard Kipling (1865-1936)

영국 소설가·시인.

봄베이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인도의 저널리즘에 관여하였고, 일본·중국·오스트레일리아·미국 등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재인(在印) 영국인들의 생활·감정·경험담 등을 토대로 쓴 <고원설화(高原說話)>(1888)는 출세작이 되었고, 그 후 <인생의 악조건(惡條件)>(1891), <정글 북>(1894)과 라마승(僧)을 따라 여행하는 고아의 이야기인 <킴>(1901) 등은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준 것들이다. 시집 <병영(兵營)의 노래>(1892)는 인도주둔군의 군대생활을 주제로 한 것이며, <일곱 개의 바다>(1896), <퇴장(退場)의 노래>(1897) 등에서는 제국주의의 세력 확장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인도에 대한 소재는 수에즈 운하보다 역할이 컸다는 키플링이다. 그의 참신한 문체와 이국적(異國的) 정취는 그에게 대문호의 명성을 안겨다 주고, 1907년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평속(平俗)한 그의 사상과 거칠은 수법은 곧 시대적 조류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버렸다.

골즈워디[편집]

John Galswor-thy (1867-1933)

영국 소설가·극작가.

부유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퍼블릭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나 1855년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재산가(財産家)>(1906), <궁지(窮地)>(1920), <셋집(貰家)>(1921)을 묶은 3부작을 <포사이트가(家)의 이야기>라 하였으며 이것은 1886년부터 1920년까지의 중상류계급에 속하는 포사이트가의 생활을 묘사하고 그 안에서도 대표라 할 소유욕의 덩어리인 솜즈와 아름다운 아내 아이린 사이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다음에 <백원(白遠)>(1924), <은수저>(1926), <백조의 노래>(1928)의 3부로 된 <현대희극>(1928)이 계속해 나온다. 여기에는 솜즈의 딸 프라와 재혼한 아이린의 아들 존과의 연애를 다루고 있다.

이상 두 개의 3부작에 이어 제3의 3부작 <말장(末章)>(1934)을 합하여 <포사이트가(家)의 기록>이라 부른다. 희곡으로는 <투쟁>(1909), <정의>(1910)가 있다.

그는 소설에 있어서 인물의 성격묘사와 뚜렷한 줄거리가 있는 점에서 19세기적이지만 인간생활에 있어서 애정을 중시하고 물질주의를 비판하였다. 1932년에 노벨문학상 수상.

포사이트가 이야기[편집]

The Forsyte Saga (1922)

골즈워디 소설.

<재산가>(1906), <궁지>(1920), <셋집>(1921)의 3부작. 포사이트가(家) 일족(一族)의 소유욕을 묘사하였다. 1부에서는 노(老) 조리온의 손녀 준이 건축가 보시니와 약혼한다. 그러나 돈이 없는 그 청년을 경멸한다. 한편 조리온의 조카 솜즈는 새 저택(邸宅)의 건축을 보시니에게 맡긴다. 그런데 훌륭한 집을 지으려고 열중한 나머지 보시니는 예산을 초과해 버리고 또 약혼녀인 준마저 잊고 한때 솜즈의 아리따운 아내 아이린을 사랑하게 된다. 이에 분격한 솜즈는 예산 초과를 트집잡아 보시니를 고소한다. 건축가는 재판에 지고 자살한다. 2부와 3부에는 이혼한 솜즈와 아이린과 그리고 재혼하여 낳은 그 아이들의 연애를 묘사한다. 솜즈로 대표되는―심지어 자기의 아내까지를 소유물의 하나로 보는―포사이트 일가의 물욕에 남녀의 애정을 대립시켜 그들간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베니트(아놀드)[편집]

Arnold Bennet (1867-1931)

영국 소설가.

스태퍼드셔 출생으로 런던에 나와 법률사무소의 서기로 일하고 잡지 편집도 하였다. 8년간 프랑스에 체재, 프랑스 자연주의를 연구하여 그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배경은 ‘다섯 개의 마을’이라 부르는 고향의 도업지대(陶業地帶)이며 <노처(老妻) 이야기>(1906)에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 도전하여 검소한 콘스탠스와 정열적인 소파이어란 두 자매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클래이행거>(1910)에는 몰이해한 부친에게 대한 클래이행거의 반항과, 연애를 그렸다. 베니트는 전통적 작가인 울프에게 그의 소설의 작법을 비판 받았다.

웰스[편집]

Herbert George Wells (1866-1946)

영국 소설가.

소매상인의 아들로서 케트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정부를 했다고 한다. 웰즈는 양복지 소매상의 점원으로 고생을 겪었으나 뒤에 런던 대학에서 이학사의 학위를 받아 1893년까지 교편을 잡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소설가뿐만 아니고 역사가·과학 평론가로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타임 머신>에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기계로 80만 2천701년의 미래사회에 가서 거기에서 인류의 운명을 본다. <토노 벙기>에서는 사람의 무지를 이용하여서 가짜 강정제(强精劑)를 팔아 큰 재산을 만드는 사나이를 묘사한다. <세계 문화사 대계(世界文化史大系)>(1919-1920)는 좁은 각국의 역사에 대신하여 인간의 기록을 넓은 시야에서 보려는 것으로 그가 제창하는 세계 국가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웰스는 종교와 미신에 대신하여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사회의 건설을 꿈꾸었다.

타임 머신[편집]

The Time Machine (1895)

H. C.웰스 소설이며 공상 과학소설의 고전이다.

어떤 과학자가 과거와 미래로 날아갈 수 있는 타임 머신이라는 기계를 발명하여 80만 2천701년의 미래 세계에 간다. 거기서는 인간이 퇴화하여 에로이와 모로크라는 두 계급으로 나뉘어 에로이는 지상에 살며 아름답지만 소인이고 상류계급의 자손이다. 그러나 모로크는 하류계급의 자손으로 지하에 살면서 노동을 하고 눈은 퇴화하여 밤에만 지상에 나올 수 있다. 웰스는 이와 같은 공상소설을 쓰는 것으로서 계급제도와 같은 당시의 사회모순과 편견을 비판하고 있다.

토노 벙기[편집]

Tono-Bungay (1909)

H. G. 웰스 소설.

19세기 말의 이야기인데 조지 폰텔포는 대저택의 가정부 아들이며 그 집의 딸을 사랑하지만 계급이 다르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 후에 그는 에드워드란 숙부에게 몸을 의탁한다. 숙부는 제약공장(製藥工場)을 경영하고 있으며 돈을 벌어서 한꺼번에 출세하려는 야심가로 무익유해한 물약을 만들어 판다. 교묘한 광고로 약은 많이 팔린다. 원료는 싼데 물건은 비싸게 팔아 숙부는 얼마 안 가 거부가 되고 조지도 배당을 받는다. 19세기 후반 사람들의 무지와 당시 출현한 벼락부자의 천박함을 비판하고 있다.

[편집]

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

영국 소설가·극작가.

변호사의 아들로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양친과 사별하여 목사인 숙부에게서 자랐으며 독일에 유학한 후에 회계사 견습 등을 하여 런던의 의학교(醫學校)에 입학한다. 재학 중 처녀작 <람베스의 라이자>(1897)를 출판하였다. 이것은 슬럼가(街)를 무대로 소녀와 처자가 있는 중년남자의 정사가 비참하게 결말을 짓는 것을 다루었다. <인간의 굴레>는 자서전적인 작품이며 조실부모하고, 또 말더듬이였던 작가의 번민과 애욕을 묘사하고 있다.

<달과 6펜스>는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예술을 위하여 처자의 생활을 희생하며 돌보지 않는 남자의 일생을 다루었다. <과자와 맥주>(1930)는 저명한 소설가의 전(前)부인이 많은 남자들과 태연하게 관계를 갖는 것을 묘사하였다. 대표적인 희곡에는 <훌륭한 사람들>(1917)이 있으며 특히 단편의 하나인 <비(雨)>에서는 매춘부를 설득하려다가 오히려 그녀의 매력에 끌려가는 선교사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독자를 즐겁게 해주는 것을 소설의 이상이라 하여 반세기에 걸쳐 훌륭한 이야기를 제공해 왔다. 통속작가라 일컬어지며 작품의 깊이는 모자라지만 인간통찰에는 예민한 작가였다.

인간의 굴레[편집]

Of Human Bondage (1915)

몸의 자서전적 소설.

주인공 필립 케리는 양친과 사별하여 목사인 숙부에게 의탁하게 되고, 절름발이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고민한다. 성직을 갖고자 했던 희망을 버리고 독일에 유학한다. 귀국하여 런던에서 회계사(會計士) 수업을 해보지만 불만스러워 그림을 공부하기 위하여 파리로 간다.

그러나 그림에도 재간이 없음을 깨달아 귀국하여 이번에는 의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재학 중 다방 종업원인 밀드리드와 친하게 지낸다. 그녀에게는 그 외의 남자가 있었고,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다른 남자에게 배반을 당하여 그에게로 온다. 그는 그녀의 빚을 갚아주고 그녀를 돌본다. 그는 오랫동안 애욕(愛慾)에 빠져 이성을 잃고 있었으나 최후에 의학교를 졸업하여 직장도 갖고 행복한 결혼도 한다.

처음에 몸은 극작가로서도 성공을 하여 인기작가가 되었으나 동시에 말더듬이로 고통받던 초등학교 시절과 모친과의 사별 등등의 불행한 과거의 추억에 북받쳐 그것을 뿜어내고 싶은 충동에서 이 작품을 썼다.

달과 6펜스[편집]

The Moon and Six Pence (1919)

몸 소설.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하였다. 찰스 스트리클란드는 평범한 주식 중매인(株式仲買人)으로 처자도 있었지만 어느 날 돌연히 화가가 되겠다는 욕망에 불타, 가족의 생활도 돌보지 않고 그림공부를 시작한다. 그 후 자기의 재능을 인정하여 후원하는 한 네덜란드인 화가의 아내와 동거하게 되지만 그녀는 스트리클란드가 자기를 감싸주지 않는다고 자살해 버린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그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 방랑하여 타히티섬으로 가서 그곳 원주민 처녀와 동거생활을 한다. 얼마 안가 그는 나병(癩病)에 걸려 사람들에게 소외당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자기 방의 벽에 그림을 그렸다.

예술을 위하여 가정과 타인의 생활을 희생한 화가의 일생을 묘사한 작품이며, 이것으로 몸은 작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였다.

포스터[편집]

(E. M.) Edward Morgan Forster (1879-1970)

영국 소설가.

건축가의 외아들로 런던에서 출생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였다. 불룸즈버리 그룹이라 부르는 지적인 문학·미술 그룹의 한 사람으로 버지니아 울프 등과 친교를 맺었다. 최초의 소설 <천사가 두려워하는 곳>(1905)에서는 이탈리아인과 영국인 일가(一家)의 사고방식의 차이점을 다루어 체면만을 중시하는 영국인을 비판하고 있다.

<하워즈 엔드>(1910)는 어떤 저택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을 다루면서 자기의 이성이 애욕에 배반당하는 한 여성을 묘사하고 있다.

<인도에의 길>은 인도인과 영국인 사이에 표면적으로는 교제를 하지만 진실하게 서로 믿지는 않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포스터는 조이스와 같이 실험적인 작가는 아니지만 소설에 있어서 이야기적 성격을 중시하여 인물이나 사건의 묘사가 작품의 생명이라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도에의 길[편집]

Passage to India (1924)

포스터 소설.

아지즈라는 인도인 청년의사는 지배자인 영국인과 친밀하게 접촉하고 있으나 어떤 때에 영국여성을 폭행하려 했다는 사실 무근한 죄를 쓰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양국민 사이에 불온한 공기가 감돈다. 표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민족간의 의사(意思) 소통은 어렵고 마음으로 서로 믿기 어려움을 묘사한 것이다.

울프(버지니아)[편집]

Virginia Woolf (1882-1941)

영국 여류소설가.

문예비평가 레즐리 스티븐의 딸이며, 아버지의 집이 있었던 그 근처의 구역을 불룸즈버리라 불러 그의 서재에 모인 사람들을 ‘불룸즈버리 그룹’이라 하였다. 그 가운데 리튼 스트레치 등이 있었고 울프는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출항(出航)>(1915)에 의하여 작가로 출발하였다. 이것은 한 젊은 여성의 첫사랑과 죽음을 다룬 전통적인 소설이었으나 <제이컵의 방>(1922)부터 새로운 소설의 실험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역설한 ‘의식의 흐름’이란 학설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는 인간의 의식내용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의식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종래와 같은 줄거리와 성격묘사로서는 불충분하며 비극·희극이라는 분류도 부적당하다. 이러한 생각은 그녀의 ‘현대소설’<일반 독자> (1925)에서 명백히 하고 있다. 그래서 전세대에 속하는 베니트나 골즈워디를 종래의 형식에 사로 잡혀 삶을 묘사하기에 맞지 않는 작가라고 울프는 비판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고독한 한 여성이 런던에서 가지는 하루 동안의 심리동정(動靜)을 묘사하였다. <등대(燈臺)로>는 부모를 모델로 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별장생활을 다루고 있지만 사건다운 것은 없고 외부의 세계가 등장인물에게 투영한 그림자 양상에 역점을 두고 있다. <파도>(1931)도 실험적 작품이다.

세 소년과 세 소녀의 갖가지 일생이 각자의 독백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친구였던 한 소년의 죽음이 그들의 정신에 큰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일생이 하루에 비유되고 일생의 각 시기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서 표현되고 있다. 울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런던 공습이 격렬할 무렵 신경쇠약으로 자살하였다.

댈러웨이 부인[편집]

Mrs. Dallowy (1925)

버지니아 울프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하루 동안의 행동과 심리를 다루었다. 국회의원인 남편과 런던에 살고 있는 그녀가 그날 밤의 파티를 위해 꽃을 사러 중심가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보고 듣는 것에서 일어난 걷잡을 수 없는 사고(思考)와 옛 생각을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줄거리란 것이 없고 부인과 다른 인물의 내부의식이 작품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부주인공(副主人公)으로서는 종군하여 정신장애를 일으킨 청년이 등장한다. 하루 동안의 인간심리를 묘사하는 방법에는 <율리시즈>의 영향이 보이나 심리의 잔주름까지 소상하게 묘사한 것은 그녀 특유의 것이다.

등대로[편집]

To the Lighthouse (1927)

버지니아 울프 소설.

중심인물은 램디 부인이며 작가의 어머니를 모델로 하였다.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별장을 무대로 하여 부부와 여덟 아이들의 생활을 그렸다. 램디 씨는 저명한 철학자이지만 세상물정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이에 대하여 부인은 남에게도 친절하고 돌보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한 아이인 제임스는 등대에 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왔으나 태풍으로 못 가게 되고 또 대전(大戰)으로 10년 후에야 겨우 그 소망을 이룬다. 그동안에 램디 부인과 장남, 장녀가 죽었다.

실험적 방법을 완전하게 자기것으로 한 독자적인 시적 산문이며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시간’에 의하여 허물어져 가는 인생을 묘사했다.

제임스 조이스[편집]

James Joyce (1882-1941)

아일랜드 소설가.

세리(稅吏)의 아들로 더블린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열렬한 카톨릭 교도였다. 제수이트파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부친의 희망으로 승직을 가지려 했으나 차츰 카톨릭 신앙에 회의를 품게 된다. 더블린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졸업할 무렵에는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졸업 후 파리로 유학하여 어머니의 별세로 한때 귀국하였으나 1904년 재차 유럽에 간다. 그 후 잠깐 동안 아일랜드에 돌아온 적도 있었지만 그는 평생 조국을 떠나 살았다.

트리에스테에서 영어교사를 하는 한편 창작에 몰두하였고, 로마에서는 은행에 근무한 일도 있었다.

<실내악(室內樂)>(1907)은 성악에 자신을 가진 조이스가 곡조를 붙일 것을 의도하여 쓴 서정시집이며 <더블린 사람들>(1914)은 15편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 단편집이다. 원고는 1905년에 출판사로 넘겨준 것인데, 작품에 나오는 언어에 품위가 없고 당시 영국 국왕에 대한 언급이 온당치 않다는 이유로 출판이 거부되어 10년 가까이나 늦게 나왔다. 이 단편집은 더블린에 사는 여러 사람들을 사실적(寫實的)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최후의 작품 <사자(死者)들>은 어떤 작가가 그의 아내로부터 결혼 전에 사랑한 사이였던 소년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병중에 비를 무릅쓰고 찾아와 그로 인하여 폐렴으로 죽었다는 고백을 듣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조이스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카톨릭 학교에서 종교적 교육을 받지만 성욕에 번민하고 신앙을 잃으며, 성직을 맡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기까지의 작가 자신의 정신형성사(形成史)이다. <율리시즈>는 하루 동안의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일상생활과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외적인 사건뿐만 아니고 인간의 내면에 눈을 돌려 그것을 표현하려던 작품이며 심리주의 소설의 대표작이다. <피니건즈 웨이크>(1939)는 1922년에 착수하였고 <트랜지션>지에 게재하였다. <율리시즈>가 현실을 묘사한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꿈의 세계, 몽롱한 의식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팀 피니건스는 미장이로 사다리에서 떨어진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하여 밤샘을 하지만 숨을 다시 쉬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갱생을 상징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등장인물의 윤곽도 확실하지 않고 작자 자신의 조어(造語)도 많아 난해하다.

조이스는 처음 전통적인 사실소설로서 출발하였으나 차차로 인간의 내면의식을 그리는 방법으로 변하였다. 최후에는 인간의 반수상태(半睡狀態) 또는 꿈을 꾸고 있을 때의 의식상태를 묘사코자 이야기 중심의 종래 소설개념을 깨뜨리고 ‘의식의 흐름’파(派)의 소설을 완성하였다. 금세기의 소설사상 가장 중요한 작가로서 문학에 있어서 미지의 분야를 개척한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편집]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1916)

조이스의 소설.

자서전적인 작품으로 작가의 정신형성사이기도 하다. 작가가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제수이트회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뒤에 가정 사정으로 더블린에 있는 같은 교파가 경영하는 학교로 전학한다. 성실하고 성적도 양호하여 성직의 길로 권유를 받지만 한편 성적(性的)인 억압감도 느껴 그 사이에 끼어 번민한다. 그는 점차로 신앙에 회의를 품게 되어 계율(戒律)을 속박으로 느낀다. 그리하여 사제(司祭)라는 안정된 생활보다도 불안하나 작가로서의 생활을 택하려고 결심하며, 문화적으로도 침체되고 있는 조국 아일랜드에서 탈출코자 한다. 소설가로서 출발하기까지를 묘사한 자서전적인 작품이나 외적인 사건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주인공의 내면의식의 움직임과 심리적 갈등묘사에 중점을 두어 심리주의 작가로서 조이스의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율리시즈[편집]

Ulysses (1922)

조이스 소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리틀 레뷰>지(誌)에 연재되었다. 1904년 6월 16일라는 하루 동안에 신문 광고부원인 평범한 중년의 유태인 레오폴드 블룸과 문학청년 스티븐 디덜러스가 더블린시(市)에서 벌이는 행동과 심리를 그리고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여러 삽화에 대응하도록 작품이 구성되어 있어서 주인공 오디세이아와 정절을 지킨 그의 아내 페넬로프와, 아들 텔레마쿠스에 대하여 블룸과, 남성관계가 많은 그의 처 마리온과 디덜러스가 대응하고 있다. 호메로스의 인물처럼 영웅적 행동은 하지 않으나 그들보다 복잡한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는 현대인을 성(性)에 초점을 맞추어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나 사건보다도 인간심리의 세세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심리소설의 고전이 되고 있다.

로렌스[편집]

David Herbert Lawrence(1885-1930)

영국 소설가·시인. 노팅엄의 갱부 아들. 어머니는 중류계급의 출신으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집이 가난하여 장학금으로 고등학교를 진학, 졸업 후에 외과의료기(外科醫療器) 제작소에 근무했으나 교원자격 검정시험에 1위로 합격, 교사가 되었고, 또 노팅엄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런던의 초등학교에서 봉직하는 한편 재학 중에 계속하여 시를 쓴다. 그의 연인이 그도 모르게 <잉글리시 레뷰>에 보낸 시가 게재되어 문단에 나올 실마리를 잡았고, 고향을 무대로 목가적인 세계를 그린 <흰 공작>(1911)에 의하여 소설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은사인 노팅엄 대학 교수며 언어학자인 어니스트 위클리의 아내 프리다와 사랑에 빠져 함께 대륙으로 도망쳐 주위의 차가운 눈길 가운데에 결혼한다. 이 사건이 그의 일생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때부터 문필만 가지고 입신(立身)코자 한다.

자기와 어머니와의, 마치 연인과 같은 관계를 그린 자서전적 소설 <아들과 연인>으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무지개>에서는 한 여성의 청춘시대를,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청춘시대와 비교하면서 다루고 있다. 가정과 학창생활, 그리고 교사라는 직업도 마음에 차지 않고, 또 남성과의 평범한 연애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여성이 마지막에는 자기의 외부세계가 아닌 내부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집 <보아라, 우리는 이겨냈다>에서는 프리다와 결혼할 때까지의 불안과 또한 환희를 노래했다. <사랑하는 여인>(1920)은 <무지개>의 속편으로 그 여주인공이 다시 나타나서 결혼 상대자를 찾아낸다. 이 작품에서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남녀의 심리적 관계이다. 남녀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지속하면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1922년부터 실론, 오스트레일리아를 돌아 뉴멕시코와 멕시코 및 미국을 여행하고 재차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날개있는 뱀>(1926)에서 로렌스는 그리스도교에 만족치 못하고 멕시코의 원시종교에 관심을 보인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는 솔직하게 성애를 묘사하여 성을 태양과 같은 생명의 근원으로 보며 신성한 것 이라는 사상을 역설하였다. 로렌스는 현대인이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지성과 이성의 면에는 비상하게 발달하여 머리는 커져 있으나 그에 반하여 인간의 감정과 본능은 나쁜 것이라고 억누르고 있다. 그는 이 본능의 면을 해방하는 것으로 균형이 잡힌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본능 가운데도 성은 더욱 억제되고 있다. 이 성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 것에서 건전한 인간이 태어나고 바른 인간관계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그는 프로이트와 같이 과학적으로 성을 취급하지 않고 태양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신앙(信仰)하였다.

아들과 연인[편집]

Sons and Lovers (1913)

D. H. 로렌스 소설. 자서전적인 작품이다.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의 부모관계부터 청년시절에 어머니와 사별할 때까지의 일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폴 모렐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광부인 아버지와 중류계급 출신의 어머니는 교양면에 차이가 있어서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체념하고 자식들을 아버지 대신 귀여워하게 된다. 그런데 형이 급사(急死)해 버려 어머니의 사랑은 폴에게 집중된다. 게다가 그는 폐렴으로 죽을 지경이 되어 그 경향은 한층 강해진다. 폴이 연인을 갖게 되었으나 어머니와의 관계가 방해가 되어 진정하게 사랑을 할 수가 없다. 그 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속박은 벗어났으나 자기 생활을 지탱 못하여 정신적으로 동요한다. 그러나 드디어 자기만을 의지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머니와 아들간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묘사한 작품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편집]

Lady Chatterley’s Lover (1928)

D. H. 로렌스의 소설.

클리포드 채털리 남작(男爵)은 전쟁으로 부상해 하반신 불수가 된다. 그의 아내 콘스턴스는 처음에는 체념하였으나 점차로 성적(性的) 관계가 없는 결혼생활은 위선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 무렵에 산지기인 메라즈와 사귀어 육체적인 교섭을 갖는다. 그는 하층계급이었으나 두 사람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서로 사랑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임신하게 되고 클리포드는 태어나는 애가 자기 애가 아님을 알면서 대를 물려주려한다. 그녀는 그 형식적 행동이 싫어 메라즈와 정식으로 결혼하려 한다. 두 사람의 성행위를 숨김 없이 묘사한 것이 문제가 되었으나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성(性)은 인간생활이고 감출 수도, 더럽힐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는 1960년 재판 결과 무삭제판의 출판이 허가되었다.

맨스필드[편집]

Katherine Mansfield (1888-1923)

영국 소설가. 본명은 캐서린 비챔.

뉴질랜드에서 실업가의 딸로 태어났다. 런던의 퀸스 칼리지에서 배웠고 일단 고향에 돌아갔으나 재차 영국 본토로 가서 시·평론·단편을 발표하게 된다. 최초의 결혼에 실패하고 문예평론가 존 미들튼 머리와 동거, 1918년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그가 편집하는 문예잡지에 평론을 썼다. <독일의 하숙(下宿)에서>(1911)는 최초의 단편집이며, 독일에서 견문한 것을 스케치하듯 모은 작품이다. <전주곡(前奏曲)>(1918)은 뉴질랜드에서의 소녀시절을 다룬 것이다. <원유회(園遊會)>(1922)는 저자 자신이 가려뽑은 최후의 단편집으로 그 안에 실린 <원유회>에서는 파티를 열려고 들떠 있는 부유한 사람들과 다섯 아이를 거느린 빈곤한 노동자의 교통사고 후의 비참함을 비교하면서 인생의 한 단면을 묘사하고 있다.

워너[편집]

Rex Warner (1905-1986)

영국 소설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카프카의 영향을 받아 우의소설(寓意小說)을 썼다. <교수(敎授)>(1938)는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싸움에 있어서 정의를 지키는 교수가 힘에 의하여 패배하는 것을 묘사하였다. <비행장>(1941)에서는 행동적인 조종사들과 감정적이고 비능률적인 마을사람과의 분쟁을 다루면서 전제주의와 민주주의의 성격을 묘사했다.

헉슬리(올더스)[편집]

Aldous Huxley (1894-1963)

영국 소설가.

조부는 진화론을 지지한 생물학자 T. H. 헉슬리이며 백부는 문예평론가 매튜 아놀드로 그는 이와 같은 명문의 태생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고, 소설가로 저명하나 단지 문예예술뿐만이 아니고 과학에도 흥미를 보인 백과사전적 지식의 소유자였다. 어릴 적에 실명(失明)할 뻔한 일이 있어 그로 인하여 평생을 시력으로 고통 받았다.<크롬 옐로>(1921)에 의하여 소설가로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인생의 방관자이고 회의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며, 이 소설에는 후에 나오는 작품의 주제가 거의 망라되고 있다. <대위법(對位法)>은 소설의 방법상 실험적인 작품이며, 이성과 감정의 조화를 잃어버린 인간을 음악 기법을 응용하여 그렸다.

<멋진 신세계>는 과학과 이성만능(萬能)인 26세기 사회를 비평적으로 묘사한 미래소설이다.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는 선(善)을 행하는 것을 동경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악(惡)만 행하는 모순된 인간의 존재를, 사슬에 매인 용사 삼손의 역경에 비하여 묘사하였다.

헉슬리는 항상 소설의 방법을 의식하여 새로운 소설의 방향을 모색하며 실험한 소설가이다. 현대의 문학은 비극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일면을 묘사한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여 생리적인 면도 포함한 인간의 전체를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위법[편집]

Point Counter Point (1928)

헉슬리 소설.

중심인물은 작가 자신의 분신(分身)인 필립 쿠알즈와 소설가 D. H. 로렌스를 모델로 한 마크 램피언이다.

쿠알즈는 지력(知力)만이 이상하게 발달해 버려 실제로 사는 것보다 그것을 방관하고 분석하는 편이 흥미롭다. 그에 대하여 램피언은 현대인은 머리만 컸기 때문에 감정면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대위법’이란 작곡상의 기법으로 둘 이상의 멜로디를 융합하는 방법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두 사람의 사상이 음악의 경우와 같이 대립하고 또 융합한 형태로써 표현되고 있다.

멋진 신세계[편집]

Brave New world (1932)

헉슬리 소설.

26세기의 사회를 묘사한 미래소설이다. 과학이 발달한 결과 아이는 여성의 태내(胎內)가 아닌 시험관 속에서 만들어진다. 마음대로 성격을 만들 수 있어서 처음부터 인간의 계급을 꿀벌처럼 분류해 버린다. 한 이성을 독점하는 것과 같은 결혼제도도 없고 친자관계(親子關係)도 없다. 성적 교섭은 자유이며 결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시험관 속의 약품 조합(調合)이 잘못되어 20세기적 사고방식을 가진 버나드란 사나이가 나온다. 그는 어느 여성을 사랑하여 독점하려고 하여 미움을 받는다. 미래사회를 기준으로 현대의 도덕을 비판하고 또 만능사회도 아울러 비판한다.

프리스틀리[편집]

John Boynton Priestley (1894-1984)

영국 소설가·극작가.

요크셔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뒤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웠고, <친우단(親友團)>(1929)으로 일약 소설가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처자의 등쌀에 못 견뎌 집을 나온 제스 오크로이드와 부자(富者)인 트런트 양(孃),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니거 조리판트가 극단 ‘친우단’을 조직, 순회하는 도중의 고난과 실패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했다.

<밤의 내방자(來訪者)>(1946)는 희곡으로서, 어떤 실업가 딸의 약혼을 축하하는 만찬회에 경관이 와서, 자살한 어느 여성과 그 집안과의 관계를 폭로하여 그들의 위선을 지적한다.

오웰[편집]

George Orwell (1903-1950)

영국 소설가·비평가. 본명은 에릭 블레어.

세관관리의 아들로 인도에서 출생하였다. 장학금으로 이튼 학교에 들어갔으나 부유층에 대한 반발로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미얀마에서 경찰관이 됐다. 영국 경찰의 미얀마인에 대한 태도에 불만, 사직하고서 파리와 런던에서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창작을 계속했으며, 에스파냐 내란에는 인민전선에 가담하여 부상을 입었다.

<동물농장(動物農場)>(1945)은 공산주의 혁명을 풍자하고 있다. 돼지를 선두로 가축들이 인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스노볼과 나폴레옹이란 두 마리의 돼지가 지도자가 된다. ‘동물농장’이란 공동농장을 만들어 생산고를 올리지만 드디어 지도자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나, 평등이란 이상과 상반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생긴다. 독재정치가 성립되고 시초에 부정했던 인간의 악덕에 젖어 간다. <1984>(1949)도 전제주의 체제를 비판한 것이다. 1980년대의 세계는 세 개의 전체주의 국가로 분립되어 전쟁을 한다. 영국이 속한 오세아니아에서는 일당독재(一黨獨裁)로, 당의 정책에 합치되도록 역사를 고쳐 쓰는 작업을 하는 윈스턴 스미스가 당의 전복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동지를 배반한다.

동물농장[편집]

Animal Farm

오웰 소설.

존슨 씨 소유의 농장에서 어느 날 밤, 은밀하게 동물들이 화합하여 늙은 수퇘지마저 불가사의한 꿈 이야기를 듣고, 인간을 추방할 필요를 부르짖게 된다.

메져가 죽은 후에는 젊은 수퇘지인 나폴레옹이 중심이 되고 돼지 스퀼러가 선전책을 맡는다. 죽은 메져의 생각은 동물 활동의 방침으로 굳어져 있다. 6월이 되어 반란이 일어나고, 농장은 ‘동물농장’으로 급격히 바뀌어진다.

충실한 수말 보크셔를 시작으로 차례로 일을 나누어 함으로써 농장은 크게 번영한다. 특히, 돼지들의 세력이 크게 된다. 존스 씨는 이웃의 응원을 얻어 농장을 도로 탈환하려 하지만 쫓겨나고 만다.

돼지들의 지배 아래에서 대립이 일어나지만, 곧 나폴레옹이 지배권을 손아귀에 쥔다. 이윽고, 겨울이 다가오고 식량이 부족하여 동물들은 하나하나 희망을 잃어간다. 나폴레옹을 배반하면 사형에 처해지고 <영국의 야수> 노래도 부르는 것을 금지당한다.

나폴레옹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풍차를 완성시키지만 인간의 침공이 있어서 망가져 버리고 만다. 수말 보크셔는 전쟁으로 인한 부상과 피로로 중태에 빠지고, 그 때 불러들인 병원 마차가 도살장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지만 얼마 안 되어 보크셔의 죽음이 공표된다.

수년이 지난 동물 농장은 번영을 계속한다. 그러나 돼지와 개 이외에는 배고픔을 호소하는 일이 많아 나폴레옹은 인간을 상대하여 연회를 베출고, 농장을 이전의 ‘장원 농장’으로 변경하고, 돼지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한다. 1945년 작품이다.

그린(그레이엄)[편집]

Graham Green (1904-1991)

(1904-1991)

영국 소설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 타임스의 기자로 있었으며, 1926년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스탬블 특급(特急)>(1932)은 ‘오락물’이라 일컫는 작품들의 최초인 것이다. 종교적인 문제를 취급하는 한편 오락을 중심으로 하는 가벼운 독서물(讀書物)을 쓰려고 했다. 카톨릭적인 주제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브라이튼 로크>(1938)이며 주인공은 불량소년이지만 자기의 나쁜 점을 알고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가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은 <힘과 영광>(1940)이다. 여기에서는 술도 마시고 여성과도 교섭을 가지는 카톨릭의 파계신부(破戒神父)가 자기의 악덕에도 불구하고, 참회를 들어준다는 성직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지켜 그 때문에 죽는다.

<사물의 핵심>에는 카톨릭 신자인 경관이 너무나 사람을 의심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고, 또 의외의 일로 딴 여성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정사(情事)의 종말>(1951)은 간통이란 죄를 범하면서도 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난 여성을 다루었다. 그린은 어떤 의미로 죄를 범한 인간을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서 신을 향하는 길을 찾으려 했다.

사물의 핵심[편집]

The Heart of the Matter (1948)

그레이엄 그린 소설.

주인공 스코비는 아프리카의 영국식민지 경찰관이다. 카톨릭의 신자인 여성과 결혼할 때에 자기도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정직한 사나이지만 어떤 사건을 취조할 때에 범법자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그의 죄를 봐주고 만다. 그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다음에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상업상의 분쟁에 휩쓸려 수회(收賄)의 의심도 받게 된다. 아내는 그에게 애교를 떨어 그가 마련한 돈으로 여행을 떠나고,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난파(難破)로 상륙한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이를 탐지한 아내는 그를 성당에 데리고 가서 고백을 시키려 하나 그는 처도 여인도 다치지 않게 할 생각으로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 후 신을 배반한 것을 깨닫고 자살한다. 그때에도 아내에게 걱정을 남기지 않으려고 협심증(狹心症)으로 죽은 것처럼 꾸민다. 평범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신을 찾는 길을 더듬는 작품이다.

제3의 사나이(1950)[편집]

그레이엄 그린 스릴러 소설.

아틴스라고 하는 사나이가 빈에 있는 옛 친구를 방문해 보니 교통사고로 죽어 있었다. 그는 친구가 피살된 것이 아닌가 하여 현장에 있었다고 하는 제3의 사나이를 찾는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죽었다고 하는 친구 자신으로, 사기죄로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동료(同僚)를 죽여서 그 시체를 자기 대신에 현장에 두었다는 것이다.

워(이블린)[편집]

Evelyn Waugh (1903-1956)

영국 소설가.

문예 평론가의 아들로서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근대사를 전공하였다.

<퇴락(頹落)>(1928)은 최초의 소설이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사회의 허영과 공허한 생활을 풍자하고 있다. 1930년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전기(傳記) <에드먼드 캔피언>(1935)을 썼다. 이것은 엘리자베스 시대에 카톨릭의 주교가 국교회(國敎會)에서 박해를 당하면서도 신앙을 위하여 싸우다 최후에는 체포되어 순교할 때까지를 다루었다.<브라이즈헤드 재방문(再訪問)>(1945)은 카톨릭적인 주제가 처음으로 나타난 소설이며 카톨릭 신자의 한 집안을 묘사하였다. 주인은 집을 버리고 정부(情婦)와 함께 국외에서 살았지만 임종할 때에 신에게 향한 신앙을 고백한다. 아들도 술로 몸을 망치고 있었으나 신앙을 잃지 않고 마지막에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현실적으로는 죄많은 생활을 보내고 있으면서 더욱 신앙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셔우드[편집]

Christopher Isherwood (1904-1986)

영국 소설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 1930년대 초엽에 W. H. 오든 등과 같이 좌익문학 그룹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였으며, 1930년부터 수년간 베를린에서 체재하였다. <사기꾼 모리스 씨>(1935)는 나치스 대두(擡頭)시대에 정정(政情)이 불안한 베를린을 배경으로 하여 한 영국인의 행동을 그렸다. 오든과 함께 시극(詩劇) <F 6 등산(登山)>을 공저하였으며, 또 그와 함께 중일전쟁을 중국의 입장에서 관찰하여 <전쟁에의 여행>을 역시 공저하였다. 그 외 아이슬란드 기행(紀行)과 중남미기행 등이 있다.

<베를린이여 안녕>(1939)도 베를린에 머무를 때의 체험을 기초로 로포르타주풍의 여편의 단편으로 엮어 만든 작품이다. 그 가운데 <서리 볼즈>는 배우수업(修業)을 하고 있는 영국여성을 묘사하였는데, 남자관계도 많으며, 관계하는 모든 남자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좋은 그녀에게 작가는 호의를 가지고 있다. 그는 1946년 미국으로 귀화하였다.

전후 소설[편집]

戰後小說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얼마간 문단은 침체되나 1950년대가 되면서 새로운 문학적 기운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현저한 것이 ‘앵그리 영맨’이라 불리는 한무리의 젊은 작가들이다. 킹슬리 에이미스(1922-1995), 존 웨인(1925- ), 아이리스 머독(1919-1999), 존 브레인(1922-1986), 극작가인 존 오즈번(1929-1994) 등이 그들로, 영국의 과거 문화와 기성제도와 여기에 계류된 중산계급의 자기만족에 분노를 터뜨린다. 웨인의 <급히 내려라>(1953)는 일류대학을 나온 주인공이 반항하여, 당연히 가져야 할 직업을 뿌리치고 하층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일을 한다.

에이미스의 대표작 <럭키 짐>(1954)은 대학강사의 생활내막을 폭로하고 있다. 기타 앵거스 윌슨(1913-1991)은 <앵글로 색슨의 자세>(1956)에서 현대사회의 왜곡을 풍자했고, 윌리엄 골딩(1911-1993)의 <파리<蠅>대왕>(1964)은 우의적(愚意的) 방법으로 인간의 원죄를 묘사하였으며 로렌스 더럴(1912-1990)은 <알렉산드리아 사중주(四重奏)>(1957-60)에서 애정과 성(性)은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콜린 윌슨(1931- )은 평론 <아웃사이더>(1956)에서 새로운 가치 창조를 지향하고 있다. 또 현재에 스턴 버스터, 다비드 스토리 등의 노동자계급 출신 작가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더럴[편집]

Lawrence Durrell (1912-1990)

영국 시인·소설가.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 캔터버리에 있는 세인트 에드몬스 스쿨을 졸업하고 통신원으로 세계 각지에서 일했다. <검은 책>(1938)은 제임스 조이스의 수법에 따라 쓴 작품이며, <저스틴>(1957), <발테이저>(1958), <마운트 올리브>(1958), <클레아>(1960)로 된 4부작 <알렉산드리아의 4중주>는 그의 야심작이다. 시집으로는 <혼자만의 나라>(1943), <도시·평원·주민>(1946)과 <주제넘게 보이는 것에 대하여>(1948)가 있으며 시극으로 <사포>(1950)가 있다. 최근작 <몬쉬에>(1974)는 4부작에 이은 또 하나의 야심작이다.

윌슨[편집]

Angus Wilson (1913-1991) 영국 소설가. 어린시절을 남아프리카에서 보내고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대영 박물관에서 근무하다가, 신경쇠약의 자기치료를 위해 주말마다 소설을 쓰기 시작, <나쁜 친구들>(1949)이란 단편집으로 문단에 데뷔, 이듬해 <아주 어여쁜 도러스>(1950)를 내었다. 모두 풍자성이 강하고 변형적인 등장인물을 묘사하여 현대의 풍속을 풍자한 것이 특징이다. 장편 <독약(毒藥)과 그 후>(1952)는 노작가(老作家)를 주인공으로 하여 현대 문명의 증상을 지적한 것이고, <앵글로 색슨의 자세>(1956), <엘리엇 부인의 중년기>(1956), <늦은 방문>(1964), 그리고 원폭(原爆) 전쟁을 다룬 미래소설 <동물원의 노인>(1961) 등이 있다. 평론으로 <디킨스의 세계>(1970)를 내놓고 최근작으로 <마법인 것처럼>(1973)이 있다.

킹슬리 에이미스[편집]

Kingsley Amis (1922-1995)

런던 출생. 옥스퍼드 대학 재학시에 종군(從軍). 영국사회의 낡은 질서와 풍습에 대한 전후세대의 반항을 그린 앵그리 영맨(Angry Young Man)의 대표적 작가. <러키 짐(Lucky Jim)>(1954), <애매한 기분>(1955), <역시 고향이 좋아>(1958), <당신 같은 여자를 좋아해>(1960) 등의 소설과 <마음의 뼈대>(1953), <표본 상자>(1956) 등의 시집이 있다. 밴더빌트대 객원교수로 있었다.

최근 <소년 20>(1971)과 <종언(終焉)>(1974)을 내놓아 전후 영국작가의 대표적 존재를 확인하였다.

브레인[편집]

John Braine (1922-1986)

영국 소설가. 요크셔 지방에서 태어나 세계대전 중에 해군에 입대하고, 전후에는 여러 직장을 편력하였다. <지붕의 방>(1957) 이후 ‘앵그리 영맨’의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그의 처녀작은 빈곤한 젊은이가 기성사회에 반항하면서 출세의 줄을 넘는 것을 그린 것이다. 이외에 <보디(The Vodi)>(1959), <지붕 위의 삶>(1962)과 <거울 속의 사막>이란 시극 및 최근작 <아침까지 나와 함께 있어 주>(1970)로 후기 자연주의적 경향도 나타내서 천부적 문인의 재질을 발휘하고 있다.

웨인[편집]

John Wain (1925- ) 스테퍼드셔 지방의 스톡언트렌트에서 출생하였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리딩(Reading) 대학 강사로 있다가 교단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문필생할을 시작했다.

풍자적이며 희극적인 악한소설(惡漢小說)인 <급히 내려라>(1953)로 ‘앵그리 영맨’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이 외에 <현재에 살다>(1955), <싸우는 자들>(1958), <여행하는 여자>(1959) 등의 소설과 <여러가지 감정>(1951), <문지방에 새긴 글>(1958), <신 앞에 흐느끼다>(1961) 등의 시집과 <서(序) 에세이> 등의 평론집이 있다. 웨일즈 악센트가 심하게 나오는 최근작 <언덕의 겨울>(1970)은 창고극장의 레퍼토리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윌슨[편집]

Colin H. Wilson (1931- ) 영국 비평가. 레스터 출생. 공업학교 졸업 후 런던과 파리에서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아웃사이더>(1950)를 발표하여 문필생활을 시작, 현대문명과 인간단계를 논한 이 책은 50년대의 ‘앵그리 영맨’을 대변하여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종교와 반항>(1957)과 <패배의 시대>(1959) 등의 평론을 발표하고 새로운 기법을 보여 준 추리소설풍의 장편<어둠 속의 제시>(1960)를 썼다.

20세기의 시[편집]

-世紀-詩

20세기의 시는 다양성과 풍요함 및 굳센 점에서 소설계와 어깨를 겨룰 수 있게 되었다. 소설과 같이 시도 빅토리아 왕조의 시류(詩流)를 세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반역한 면도 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브리지스(1944-1930)와 같은 전통적 시인까지도 테니슨적 쇠약한 로맨티시즘을 타파하는 실험을 하고 G. M. 홉킨스를 그의 사후 세상에 소개하여 홉킨스의 혁명적 기교가 훗날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토머스 하디는 다산(多産)의 시를 통하여서 세기 교체기의 페시미즘을 표현하였다.

A. E. 하우스먼(1859-1936), 월터 드라 메어(1873-1956), 존 메이스필드(1878-1967)도 각자의 측면에서 가치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아일랜드 출신인 W. B. 예이츠는 낡은 세대 중에서 ‘현대적’인 대시인으로 꼽지 않으면 안 된다. 제1차 세계대전 후는 갖가지 유파의 시인이 배출되었다. 루퍼드 브루크(1887-1918)는 전쟁체험을 중심으로 우수한 작품을 썼다. 또 대전 중은 로렌스, 올딩턴을 중심으로 하는 감각적 경험에 중점을 둔 ‘이미지즘 운동’이 신풍을 불어넣었다.

또 에드워드 토머스(1878-1917)는 섬세한 목가(牧歌)를 썼다.

1930년대에는 마르크시즘과 시작(詩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취급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개스코인의 쉬르레알리즘적 실험을 제외(除外)하고는 개인적 체험을 노래하였다.

예이츠[편집]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아일랜드 시인·극작가.

더블린 교회에서 출생하였고 부친은 화가이다. 20세경에 문학에 뜻을 두고, 그 후 아일랜드 전설을 바탕으로 한 시집(詩集) <오이진의 방랑>을 발표했다. 이 무렵부터는 켈트 문학 부흥운동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그레거리 부인 등과 더불어 아일랜드 국민극단(1902)을 설립하였다.

1922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시인으로서는 처음 신화와 연애를 주제로 한 서정적인 시를 썼으나, 차차로 현실세계에 눈을 돌리게 되어 <탑(塔)>(1928)과 <최후의 시집>(1939) 등 후기의 작품에서는 독백(獨白)의 시풍(詩風)을 만들어냈다. 극작가로서도 <심원(心願)의 나라>(1894), <모래시계(砂時計)>(1903)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오이진의 방랑[편집]

The wanderings of Oisin (1898)

대화형식인 장편 소설시. 예이츠의 출세작. 제1시집 <어신의 방랑과 기타의 시>로 권두(卷頭)를 장식하였다. 아일랜드 전설의 영웅 어신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섬들을, 사랑의 신 엔가스의 딸 니카브를 따라 방랑하게 되지만 여행을 마치고 고국의 땅을 밟는 순간 눈먼 노인으로 변한 이 작품에는 작자의 이교적(異敎的)인 면이 상징주의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이츠 시집[편집]

(1933, 개정증보 1950)

예이츠 전시집(全詩集).

개정판은 초판 이후에 쓰여진 <최후의 시집>을 수록하였다. 초기의 시는 프랑스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서 유미적(唯美的) 경향을 띠고 있었으나 1914년의 시집 <책임>을 즈음하여 그때까지의 시풍에 대한 비판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 후 예이츠는 현실의 아일랜드에 대한 환멸, 그리고 생에 대한 집착과 영적 세계에 대한 동경의 상극(相克)을 묘사하여, 현대시인으로서도 T. S. 엘리엇과 함께 20세기 최대의 시인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메이스필드[편집]

John Masefield (1878-1967)

영국 계관(桂冠) 시인. 헤이퍼드셔 지방의 변호사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선원생활을 하며 각지를 편력하고, 미국에서는 노동자로서 그의 시의 소재가 된 하층계급의 생활을 체험했다.

<짠물의 노래>(1902)를 써서 인정을 받고 <영원의 자비>(1911), <수선화의 뜰>(1913), <가난한 화가>(1913) 등의 설화체적인 시를 써서 주목을 끌었다. <시집(詩集)>(1923)은 20만 부 이상 팔려 1930년에는 계관시인이 되었다. 때로는 조잡하고 졸렬한 기교 때문에 비난도 받으나, 강렬성·남성·서민성 등이 융합되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평론·희곡·소설 등이 있다.

엘리엇[편집]

(T.S.) 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영국 시인.

미국 미조리주 세인트루이스 출생이다. 영국인 무희(舞姬)와 결혼하여 1927년에는 영국의 시민이 되었다. 1909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 후, 소르본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비롯하여 고전을 연구하였다. 교편도 잡았고, 로이드 은행에 근무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2년에는 현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크라이테리언>지(誌)를 창간하여 17년간 편집일을 보았다.

엘리엇은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학자이면서 동시에 자작의 발언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평론을 썼다. 최초의 시집 <프루프록(Prufrock) 및 기타의 관찰>은 1917년에 출판하였으며, 이 시집은 프랑스의 시인 폴그의 영향이 농후하여 그때까지 영국시단에서 볼 수 있었던 시의 경향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무가치한 현대사회의 도회적 풍경을 바라보는 건조하고 냉소적이며 고도로 의식적인 시인의 눈이 빛나고 있다.

이듬해 1918년에는 평론집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 출판되었고, 이것은 혁명적 시인이 평론의 면에서 행한 원호사격이라 할 만한 것이며, 그 초기의 시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이 아울러 ‘비시적(非詩的)’이고 구어적(口語的) 스타일이 강렬하게 표면으로 나온 지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또한 그 후 일어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불모(不毛)와 욕구불만을 예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대세계의 파괴와 불모의 상태를 읊은 명작 <황무지>를 경계로 신과 인간이 융합하는 의식이 작품에 표착(漂著)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면이 절정에 달했다고 생각되는 작품은 후기의 <네 개의 사중주(四重奏)>(1943)이다. 많은 평론 이외에 극작도 있고 194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가 시적 감수성에 끼친 혁신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황무지[편집]

The Waste Land (1922)

T. S. 엘리엇 시.

병든 서구문명과 ‘황무지’로 변한 인간사회를 묘사하여 이 불모의 메마른 땅 뒤에 신의 자비로운 비가 내릴 것을 ‘간접적으로 희구하는’마음으로 노래를 읊었다.

시의 내용은 제1장은 욕망(慾望)을 현대의 삶에 있어서 병(病)의 근원이라 보았으며, 제2장에서는 신분이 서로 다른 두 여성을 중심으로 정신적 불모(不毛)를 묘사하며, 제3장에서는 기도를 드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중점을 두고, 제4장은 구원받기 전의 죽음을 익사자(溺死者)의 백골(白骨)의 노래로 읊고, 제5장은 공포의 예언, 멀리서 울리는 우레가 의미하는 축복의 예감 등으로 되어 있다. 문화인류학적인 기초(J. G. 프레이저 작<금(金)의 가지(枝)>)를

가지고 셰익스피어를 위시하여 과거의 고전작품에서 종횡으로 인용하여 현대적 이미지를 나열한 이 독특한 대작은 절세의 명작이라 하겠다.

칵테일 파티[편집]

The Cocktail Party (1949)

T. S. 엘리엇 시극.

3막으로 되어 있고 ‘희극’이라는 작가 자신의 단서가 첨부되었다. 런던의 어느 아파트에서 각테일파티가 열린다. 그날 아침, 아내인 라비니아가 가출해 버린 변호사 찬바레는 아내 이외에 연인이 있는 듯하다. 또 줄리아와 피터라고 하는 남녀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정신과 의사인 라이리가 줄거리의 발전에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는 이들 ‘병든’ 등장인물의 정신적인 불모상태를 지적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즉 등장인물들은 신앙을 잃고 사랑이 없는 고독한 존재인 것을 깨쳐간다. 유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를 밑받침으로 하였다는 것을 작가 자신도 비치고 있으나, 그리스 극의 형식을 피하여 투명한 문체, 일상용어에 가까운 영어를 사용하여 다른 것에 비하면 비교적 ‘극(劇)다운’점이 있다.

시트월 3남매[편집]

이디스 Edith Sitwell (1887-1964), 오스버트 Osbert Sitwell(1892-1969), 사셰버럴 Sacheverell Sitwell (1897- ? )의 3남매로 영국 작가.

이디스는 현대시의 특이한 일면을 대표한 여류시인이며 귀족적 반역(反逆)으로 이름 높다. 초기에는 장식적인 시를 썼으나

후에 원폭(原爆)을 읊은 세 편을 포함한 <장미의 찬가>(1949) 등 우수한 작품을 썼다. 오스버트는 풍자시에 뛰어나고 전쟁의 잔학성과 영국의 속물근성(俗物根性)을 공격하였으며 다섯 권의 자서전(1945-50)이 있다. 막내동생 사셰버럴은 미술평론가이나 고전적 수법으로 전아(典雅)한 시도 쓰고 있다.

오든[편집]

Wystan Hugh Auden (1907-1973)

영국 시인.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 후 시민권을 얻는다. T. S. 엘리엇이 대표하는 1920년대의 정신에 반기를 들어 마르크시즘의 문제를 시 가운데 넣어서 C. 데이 루이스와 스티번 스펜더 등과 함께 신풍을 영국시단에 일으킨다. 이른바 ‘오든 그룹’의 지도적 존재이며 임상의(臨床醫)와 같이 병든 사회를 정신분석과 사회의식을 합친 수법으로 파헤쳤다.

최근에는 앵그리칸 종교에 기울어 인간존재를 ‘사랑’의 면에서 고찰하는 것과 같은 시를 쓰며, <전시집(全詩集)> 기타 많은 작품이 있다.

데이 루이스[편집]

Cecil Day-Lewis (1904-1972)

영국 시인.

옥스퍼드 대학 졸업. 오든과 먹니스, 그리고 스펜더들과 반(反)파시즘 운동에 시로서 참가하였다. 이른바 ‘오든 그룹’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시풍을 가지며, 혁명의 정열이 식은 후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을 주제로 하여 창작하게 되었다. 장편시 <이탈리아 방문>(1953)은 전통으로 기운 것을 표시하면서도 지성과 정열의 융합을 시도한 수작(秀作)이라 생각되고 있다. <전시집(全詩集)>(1954)이 있고 비평가로서도 <시의 이미지>(1947)가 있다. 또한 니콜라스 브레이크란 필명으로 탐정소설도 썼다.

스펜더[편집]

Stephen Spender (1909-1995)

영국 시인.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재학 중에 오든, C. 데이 루이스 등과 더불어 사회적 의식이 강렬한 시를 써서 일약 유명해졌다.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서정적인 시풍을 지녔고, 이따금 허술하게 보이는 시의 연(聯)이 오히려 성실한 시인으로 느끼게 한다. <시집>(1933)은 1930년대 문학사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극 <재판관의 심문>(1938)과 비평<파괴적 요소>(1935) 등은 첨단적(尖端的)인 정치적 주제를 추구한 것이다. 그 후에는 코뮤니즘에 환멸을 느껴 자기의 내면을 묘사하게 되었으며 자서전 <세계 중의 세계>(1951)는 명작이다.

전후의 시[편집]

戰後-詩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시인은 대체로 개인적 체험을 기초로 한 내성적 시풍(詩風)을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토퍼 프라이(1907- )는 엘리엇의 시극 계통을 이어가는 존재이고 딜런 토머스(1914-1953)와 조지 바커(1913- )가 빛을 내고 있다. 루이스 먹니스(1907-1963)의 기교적 탁월성도 인정해야 되지만 이른바 ‘신묵시파(新默示派)’의 천재시인 D. 토머스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웰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초현실주의적 상징 작품에는 영원히 신선한 영혼의 문제가 고도한 기교를 통하여 서정(抒情)으로 표현되어 있다.

토머스[편집]

Dylan M. Thomas (1914-1953)

영국 시인. 스원시에서 출생하여 그곳의 그래머 스쿨을 졸업, <사우스 웰스 이브닝 포스트>지(誌)의 기자로 있으면서 시를 썼다. <시 18편>(1936)은 초현실주의적인 시미(詩美)가 담겨져 있어 주목 받는 작가가 되었다.

대표적 시집으로 <사랑의 지도>(1939)와 <죽음과 도취>(1946)가 있는데, 여기에서 내면보다는 외면의 자연을 생명 그대로 접촉하여 자연과 조응함으로써 엄숙한 시적 체험을 표현했다. <강아지 같은 예술가의 초상>(1940)을 비롯한 자전적(自傳的) 소설과, 시극(詩劇) <밀크의 숲에서>(1954)가 있다. 또한 산문집으로 <어느 이른 아침에>(1954)와 <어느 가죽 장사꾼의 모험>(1955)이 사후에 출판되었다.

20세기의 극문학[편집]

-世紀-劇文學

약 1세기에 걸쳐 극장과 희곡은 완전히 분리되어 침체를 계속해 왔으나 19세기 말이 되어 입센의 문제극의 영향과 대륙에서의 자유극장 운동의 자극에 의하여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각 도시에는 레퍼토리식(式) 소극장이 서로 이어서 생기고,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쇼, 골즈워디, 싱 등의 극작가들이 출현하여 연극계도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골즈워디는 사회극 작가로서 <은(銀)상자>(1906) 등을 썼고, 제임스 배리는 <피터 팬>(1904)과 같은 불후의 인간상 외에도 <장한 크라이튼>(1902)처럼 세련되고 경묘(輕妙)한 작품으로 근대극이 사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한편 아일랜드의 극운동은 방언과 이질(異質)적인 풍부한 상상력으로 영국 근대극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오케이시 작의 <가래와 별>(1926), 그레거리 부인의 <달 뜰 무렵>(1907) 등은 정묘하게 아일랜드의 심정을 전하고 있다. 싱은 명실공히 아일랜드 국민극장 애비단(團)을 지탱하는 작가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연극활동은 불충분한 대로 계속되어 동화와 수필작가로 알려진 미룬(1882-1956) 등의 가벼운 희극(喜劇)은 전후극에로의 교량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전 후에 1920년경부터 부흥하기 시작한 연극은, 전전(戰前)의 극이 어떠한 신념을 인생에 제시한 것에 대하여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 점으로 현저하게 다르다. 프리스틀리는 <에덴의 마지막>(1934) 등에서 넓은 사회적 시야를 보여 주었으나 시대 풍조를 대표하는 것은 몸과 코워드(1899- ? )의 풍속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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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Millington Synge (1871-1909)

아일랜드 극작가. 대학 졸업 후 널리 대륙을 여행하고 파리에서 예이츠를 만나 귀국한 그는 애런섬에서 살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그레거리 부인과 만나 병(病) 중임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문예극장을 위하여 극작을 시작한다. 당시 스케치풍의 소품은 <애런섬>(1907)에 수록되었다.

1904년에 신설된 더블린의 애비 극장 연출인이 되어 두 개의 단막극 <그늘진 골짜기>(1903)와 <바다로 뛰어가는 사람들>(1904)을 상연하였다. 계속하여 아일랜드 방언과 특이한 상상력으로 <성자의 샘>(1905)과 또한 <서쪽 나라의 건달>을 발표하자 인습적인 관객들간에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에 <땜장이의 결혼>(1909)과 비극 <슬픔의 데드라>(1910)를 발표하였다. 리얼리즘 수법으로 정확하게 현실을 포착하고 훌륭한 성격을 창조한 싱은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서쪽 나라의 건달[편집]

The Playboy of the Western World (1907)

희극 3막. 싱 작.

언쟁 끝에 부친을 때려 죽였다고 생각한 주인공 크리스토퍼 마혼은 벽촌에 숨어들어 마을사람들에게 무용담을 거짓도 섞어가며 말하여 여주인공 패긴을 비롯, 촌사람의 칭찬을 받았다. 거기에 상처투성이인 부친이 아들을 뒤쫓아오자 이번에는 정말로 죽여버리게 되어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다. 주인공은 아일랜드적 성격을 교묘하게 대표하며, 인간심리의 표리(表裏)를 표현하고 있다.

[편집]

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영국 극작가·소설가·비평가.

더블린의 명문 출신이었으나 빈궁한 가운데에 성장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뿐으로 사회에 나와 독학을 했다. 오로지 그림과 음악에 열중하며 기성의 계급관(階級觀)과 종교관에 저항을 하였다.

‘페비안 협회’의 창립과 동시에 참가하여 그때부터 사회주의와 진화론은 그의 사상의 근저가 되고 있다. <홀아비의 집>(1892)을 발표한 이래 약 40편의 희곡을 써서 19세기적 낭만주의를 날카로운 필치로써 공격하였다.

<워렌 부인의 직업>(1893)과 <무기와 사람>(1894), <악마의 제자>(1897) 등은 초기의 작품이다. 이어서 <사람과 초인>으로 종교적·철학적 태도를 확립하여 근대극운동의 제일인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비전론(非戰論)을 제창하였고, 전후도 <메슈젤라에 돌아오라>(1921) 등에서 정치·사회·풍속 등등의 문제를 제시하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보였다.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생명력을 말해 주는 철학과 사회주의를 제외한다고 할지라도 날카로운 풍자와 교묘한 줄거리의 전개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람과 초인[편집]

Man and Superman (1903)

희극 4막. 쇼 작으로 <철학적 희극>이란 부제로서 쇼의 생명력인 철학을 주제로 한다. 그는 모성본능이야말로 인류진화의 원천인 생명력의 표현이며 따라서 연애에 있어서는 여성이 사냥꾼이고 남성은 노획물이라 한다. 주인공 존 다나는 앤 위트필드에 쫓기어 강제로 결혼한다는 ‘돈 환 테노리오’의 현대판이다. 제3막 꿈의 장면은 <지옥의 돈 주앙>으로서 단독적으로 상연되고 있다.

전후의 극[편집]

戰後-劇

대전 중에도 정부의 원조를 받아서 연극계는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역시 저조하여 고전극 상연에 주력을 두고 있었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저조했던 연극계에도 1956년 오스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다 보라>의 상연을 계기로 급격히 활발하여졌다.

오스번은 기성의 사회제도에 대하여 젊은 세대의 노여움을 폭발시켜 모욕·저항·무력감을 격렬하게 내어던졌다. 계속하여 브렌든 배한의 <사형수>(1954), 웨스커의 <보리가 든 치킨 수프>(1958) 이하의 3부작, 핀터의 <방(房)>(1960), 데러니의 <꿀맛> 등이 잇달아 발표되어 그들을 ‘앵그리 영맨’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혁신적 연극운동은 사상적인 것을 창조하는 노력과 형식면에서 개혁이 병행하게 되어 영국뿐만 아니고 세계로 퍼져나가 광범한 문화운동에까지 발전하였다. 이 개혁은 작자들이 노동자계급을 포함하여 다양한 계층에서 나오고 있다는 영국 연극사상 획기적인 사실과, 연극을 지탱하는 중산계급인 관객의 취미가 변하여 ‘앵그리 영맨’의 극을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오즈번[편집]

John Osborne (1929-1994)

영국 극작가, 런던 출생. 벨모스트 대학 중퇴. 저널리스트와 배우생활도 하였다. 26세 때는 <성난 얼굴로 뒤돌아 보라>(1953)로 정체된 극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그 자신은 ‘앵그리 영맨’의 선구적 대변자가 되었고 쇼 이래로 최대의 충격파가 되었다.

이 극의 중요성은 형식보다는 내용, 인물 및 언어의 혁신성에 있다. <연예인>(1957)과 <폴슬리키의 세계>(1959)의 공연에 실패한 뒤, 매우 사실(史實)에 입각하여 자료를 효과적으로 다룬 기교와 서사극(敍事劇) 형식의 숙달로 성공을 거둔 <루터>(1961)를 발표했다.

그 후 최대의 걸작 <인정받을 수 없는 증언>(1964)과 <나를 위한 애국자>(1965), <현재의 시간>(1968), <암스테르담의 호텔>(1968) 등이 있고 시나리오로 <톰 존스>(1964)와 <경장 여단(輕裝旅團)의 임무>(1968)가 있다.

20세기의 비평문학[편집]

-世紀-批評文學

흔히 ‘비평의 시대’라 불리는 20세기에 알맞게 이 시대 영국 비평은 매우 활발하여 비평의 전체로서의 지위도 높아졌다.

비평의 대상은 종래보다 넓게 되는 한편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특히 1920년 전후부터 비평의 방법에 대한 의식이 높아져 19세기적인 인상비평에서의 탈각(脫却)이 현저하였다.

시인이며 극작가인 T. S. 엘리엇은 전통을 존중하는 새로운 고전주의의 입장을 내세워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비평가로서도 금세기 최대의 인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I. A. 리처즈(1893-1979)는 그 배후인 W. 엠프슨(1906-1984)과 더불어 뒤에 특히 미국에서 성행한 ‘신비평(新批評)’이라 불려지는 유파(流派)의 직접적인 선구자가 되었다.

1930년대에는 S. 스펜더와 C. 데이 루이스 등의 활약이 현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는 특히 문예주간지 등을 중심으로 비평은 변함없이 활발하였고, 전기한 작가 외에 들 수 있는 비평가에는 J. M. 마리(1889-1958), H. 리드(1896-1986), F. R. 리비스(1895-197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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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Ernest Hulme (1883-1917)

영국 시인·사상가. 스테퍼드주에서 출생. 1904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퇴학 당한 후 해외를 역방(歷訪)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철학과 예술이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그는 런던에서는 한 무리의 젊은 시인과 예술가의 중심이 되었고, 시에 있어서 이미지즘 운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하여 34세의 젊음으로 전사.

생전에 발표된 것은 철학의 번역과 몇 편의 단편(斷片)에 불과하였으나 유고가 종합되어서 <명상록(暝想錄)>(1924)이라 하여 간행되었다.카톨릭 사상을 근저로 하였던 그는 인간계와 종교적인 가치의 세계는 불연속이라고 설파하였다. 르네상스 이후의 인간중심사상이 그러한 종교적 가치의 절대성을 망각하고 있는 점을 비난하고, 중세적 추상예술에 공명하여 문학에 있어서는 낭만주의 대신에 새로운 고전주의를 대망(待望)하였고, 특히 T. S. 엘리엇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