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고려시대 문학/고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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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가요[편집]

高麗後記-歌謠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무신(武臣)들이 집권함에 따라 문신은 산간에 숨어 술을 벗삼아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고려 중기부터 여진·요(遼)·금(金)·원(元)나라 등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은 옛것에 대한 망각과 새로운 퇴폐적 사조를 불러일으켰다. 향가 같은 고도의 서정시보다 민요적인 속요(俗謠)가 궁중 유연(遊宴)에 쓰이게 되었으며, 고종 시대의 <한림별곡(翰林別曲)>도 어떤 서정적인 정서보다도 리듬의 도취가 앞선 느낌이다. 고려 가사(歌詞)의 대부분이 간직하고 있는 여음(餘音)의 존재는 이런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음사(淫詞)의 존재는 향락적인 생활에 도취하던 왕과 더불어 고려사회가 지배층인 귀족계급과 피지배 계층인 일반 민중간에 양극(兩極)으로 분열된 증거라 할 수 있다. 유·불·선 삼교가 공존하던 고려사회는 정신적인 깊이와 육체적인 방일(放逸)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전례화(典禮化)한 조선과 같이 까다로운 예법도 없고 사람이 죽으면 다비(茶昆)에 붙인다는 허무감은 고려인의 심리 속에 어떤 분열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렇게 고려문화는 복잡 다양한 문화 유형을 형성하면서 현실 속에서 겪은 인간의 왜소(矮小)한 좌표를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고려가요는 다양한 폭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민요적인 다양한 성격에서 연유된다. 그 중 풍류와 애정에 관한 것이 많은데 풍류는 문인의 노래에서, 애정에 관한 것은 민요가 대부분이다. 별도로 풍요(風謠)가 있고, 불찬(佛讚)·참요(讖謠)·송가(頌歌)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제각기 시가의 유형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 제23대 고종(재위 1214-1259) 때에 거란·몽고 등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 몽고의 침입을 받고 강화(江華)에 천도(遷都)하여 28년간이나 항쟁했다. 전후(前後)를 통해 몽고의 화(禍)를 입은 40년간은 고려문화의 난숙기로 당시 상류계급의 사치와 함께 새로운 가요 형식으로 등장한 경기체가(景幾體歌) <한림별곡>은 한림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에는 <쌍화점(雙花店)>

<사룡(蛇龍)> <쌍연곡> <태평곡(太平曲)> <만수산(萬壽山)> <양화사(揚花詞)> 등의 노래 이름이 전하고 있으나 <쌍화점>의 가사만이 현존한다. 제27대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때에는 안축(安軸)의 작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의 경기체가와 채홍철(蔡洪哲)의 <자하동(紫霞洞)> <동백목(冬栢木)>이 전한다. 다음 충혜왕(忠惠王, 재위 1330-1332, 1339-1344)도 주색(酒色)과 방탕(放蕩)을 일삼아 기강(紀綱)이 문란했으며, <후전진작(後殿眞勺)> 같은 음사도 이런 생활의 직접적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충목(忠穆), 충정(忠定),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 왜구를 물리친 수자리 병사가 노래한 <장생포(長生浦)>를 비롯해 '장단(長端)' '송산(松山)'의 민요와 <목자득국(木子得國)> 외에 몇 개의 참요가 있으나, 이는 문학의 권외에 속하는 것들이다. 민요 이외의 고려가요의 서정시적 형태 발전에서 <정과정곡>까지는 향가의 흐름에 속하며, 고종 때부터는 <한림별곡>과 장가(長歌=歌辭) 등에 있었으며 말기에 이르러 몽고의 침입 이후부터 신곡(新曲)·신조(新調) 등의 형태가 나타나매, 시조(時調) 즉 그 당시의 단가(短歌)가 발생하여 새롭고도 고유한 가요를 형성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형성된 시조의 몇몇 작가 중에 조선 태종(太宗)인 방원(芳遠)과 정몽주(鄭夢周)가 서로 응수했다는 단가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는 고려가요의 말기를 장식하는 노래이다.

고려 가사의 문학적 의의[편집]

高麗歌詞-文學的意義

고려 시가의 명칭은 고려 가사·고려가요 또는 고려 장가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한림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 한문계의 시가는 경기체가 또는 별곡체라 부르고, <청산별곡> <서경별곡> <만전춘(滿殿春)> <정석가(鄭石歌)> <이상곡(履霜曲)> <쌍화점(雙花店)> <가시리> 등의 시가는 흔히 속요라고 분류해서 부른다.

아무튼 고려문학은 한문학이 그 주류적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우리 문학은 민속 문학적 위치에서 겨우 그 명맥을 보존 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연향곡(宴享曲)으로 전래하여 조선 중엽에 편찬된 <악학궤범> <악장가사>에 실려 있는 <쌍화점> <동동(動動)> <서경별곡> <청산별곡> <만전춘> <이상곡> <정석가> <사모곡(思母曲)> <가시리> <처용가(處容歌)> 등은 조선에 와서 덧붙인 가사도 있겠으나 대개 고려의 유음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이 노래들은 대개 순간적인 향락 추구에서 퇴영적인 생활감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표현 기교에서도 순진하고 솔직하며 또한 관능적이고 음일(淫佚)한 수사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어(詩語)가 소박하면서도 세련되어 있고, 리드미컬한 운율, 기발한 착상(着想) 등은 마땅히 고려 문학의 절창(絶唱)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또 가사가 전하지 않는 가요 속에서도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시가 작품이 많았으리라 추측되나 가사를 볼 수 없어 유감이다.

<청산별곡>의 "살어리 살어리 랏다 청산에 살어리 랏다. 머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랏다 … "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표현, <서경별곡>에서 "구스리 바회예 디신달 깃힛단 그츠리잇가. 나난 즈믄해랄 외오곰 녀신달 신(信)잇단 그츠리잇가" 하는 표현에서 함축미와 함께 면면한 정서와 고려 여인의 애절한 사랑을 보게 된다. 또 <가시리>의 "잡사와 두어리 마나난 섣사면 아니 올셰라. 셜은 님 보내압 노니 나난 가시난 닷 도셔오쇼셔"의 표현에서 가사의 유창함과 절절한 애원, 그리고 기발한 착상은 가히 절창이라 할 만하며,

<만전춘>의 "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어러주글 만뎡 情둔 오날밤 더듸 새오시라"와 같이 안타까운 사랑의 해후(邂逅)와 함께 농도(濃度) 짙은 관능의 불꽃을 보게 된다. 또한 고려가요 속에는 초속(超俗)한 인생관이 담긴 선(禪)적인 관조가 그대로 나타나 무르익은 불교문화가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는 정신적으로, 하나는 육체적인 것으로 변형(變形)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사회를 뒤흔든 외적의 침입과 아울러 불교가 계시해 주는 피안사상(彼岸思想) 속에서 현실의 괴리(乖離)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체관과 퇴폐의 양상(樣相)을 우리는 문학 속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또 <청산별곡>을 통해 고려 청자의 빛깔 속에 깃들여 있는 유현(幽玄)함을 맛보게 되는 것도 고려가요가 그만큼 세련되고 유창했음을 말해 준다.

현존의 가요[편집]

現存-歌謠

고려 이전의 국문으로 정착된 가요는 <악학궤범> <악장가사> 및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수록되어 전하는데 그 숫자만도 21편에 이른다. 비록 이 가요들은 조선에 들어와 당시의 언어로 약간은 윤색(潤色)되었다 하더라도 고려 이전의 가요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학 유산이다. 먼저 <악학궤범>에는 <동동> <정읍사> <처용가> <정과정곡> 등 4편, <악장가사>에 <정석가> <청산별곡> <서경별곡> <사모곡>

<쌍화점> <이상곡> <가시리> <한림별곡> <만전춘> 등 9편, <시용향약보>에 <유구곡(維鳩曲)> <나례가(儺禮歌)> <상저가(相杵歌)>

<성황반(城皇飯)> <내당(內堂)> <대왕반(大王飯)> <삼성대왕(三城大王)> <대국(大國)> 등 9편, 계 21편으로 몇 편의 가요는 서로 중복되어 수록되어 있다.

경기체가[편집]

景幾體歌

고려 중엽 정중부의 난에서부터 최충헌(崔忠獻) 등의 무신이 장기 집권함에 따라 문신은 산간에 도피,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지러운 세태에 실의(失意)하여 문신들은 주회(酒會)를 통한 유흥과 도피적이고도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가체(歌體)를 형성하게 되니 이것이 곧 경기체가이다.

경기체가는 별곡체라고도 하며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라고도 하여 시대적으로 고려 고종 때부터 조선 중엽까지 계속된 일종의 긴 연시(聯詩)이다. 이 경기체가는 순 한자로 표기하면서 중국 사(詞)의 영향과 한시(漢詩)의 리듬을 교묘하게 절충시킨 것이다. 향가의 유음을 잊고, 민요나 속요에 만족하지 못한 당시 귀족 문인들이 창작해 낸 독특한 형태의 문학이며, 주로 양반들의 유흥 향락적인 생활감정을 시로 나타낸 고답적인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형식은 분장 가사(分章歌詞)로 한 연(聯)이 2절로 나누어지고 '경긔(景幾) 엇더하니잇고' 또는 '景幾何如'라는 후렴구가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기본 자수율(字數律)은 3·3·4조이다. 이 노래의 명칭을 경기체가 또는 경기하여가라 하는 것은 후렴에 '景幾 엇더하니잇고' 또는 '景幾何如'가 있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작품으로는 <한림별곡>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이 있으며, <한림별곡>은 13세기 중엽 고종 때 여러 한림들의 합작이고, <죽계별곡>과 <관동별곡>은 여말의 문인 안축(安軸)의 작품이다. 이 경기체는 13세기 중엽부터 조선시대인 10세기 중엽까지 30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조선에 와서는 <상대별곡(霜壹別曲)> <화산별곡(華山別曲)> <화전별곡(花田別曲)> <독락팔곡(獨樂八曲)> 등의 작품이 있다. 이 경기체가는 조선 때 들어와서부터 점차 그 형식과 내용이 파괴되어 가더니, 임진왜란으로 인해 양반 계급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몰락하고 새로운 가사로 변천하였다.

별곡·별곡체[편집]

別曲·別曲體

'별곡'이라 하면 본래 있는 어떤 곡과는 별다른 곡이라는 뜻이며, 또한 중국의 가곡을 정곡(正曲)이라 한 데 대하여 우리나라 시가를 부르는 말이다. 시가의 형태적인 면에서 '별곡'과 '별곡체'는 별도의 것으로 곧 <서경별곡>은 고려 속악인 <서경곡(西京曲)>과는 전혀 다른, 같은 이름의 <서경곡>을 나타내는 듯하며, 그러나 이 '별곡'이란 명칭은 뒤에 우리말의 노래란 뜻으로 쓰였다.

다음 '별곡체'는 이른바 '경기체가'의 이름이니, 고려 고종 때부터 한문화에 완전히 압도, 침식되어 우리의 고유 문학이 사라진 뒤 귀족, 양반, 문인들이 한시 아닌 새로운 우리 시가를 지어 보려고 애쓴 나머지 발생한 시가이다. 즉 무관(武官)들에게 권세를 빼앗긴 문신들이 산간에 도피하여 '기로회(耆老會)' 또는 '죽림칠현(竹林七賢)' 등의 교계(交契)를 맺고, 자연에 파묻혀 한가히 잔치놀이를 베풀고 읊었던 경기체가가 바로 이 노래이다. <한림별곡>의 '별곡'이란 이름은 중국 시가와 같은 운(韻)이나 가락이 없이 된 한국의 독특한 시가란 뜻이며, 따라서 별곡체는 중국 시체(詩體)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시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별곡'은 순 우리말로 된 노래의 명칭을 말하며, '별곡체'는 한문체의 노래임이 크게 다른 것이다.

한림별곡(翰林別曲)[편집]

현존하는 최초의 경기체가.고려 고종 때 한림(翰林)의 여러 선비들의 합작으로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짐. 고종 때는 정중부가 집권, 무신의 전횡(專橫)시대라 문신들은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 무신들의 문객(門客)으로서 무신들의 호화로운 연락(宴樂)에 참여, 현실에 영합하는 등 퇴폐적인 향락에 취하거나 산수간에 시주(詩酒)를 벗삼아 현실 도피적인 풍류를 일삼았다. <한림별곡>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귀족 양반 계급의 현실 도피에서 오는 은둔적이고 향락적인 풍류생활을 별곡체의 음률에 맞추어 노래한 기악(妓樂)의 가사이며, 귀족·한림 사이를 풍미한 한문체의 문학이다. 각 장은 시부(詩賦)·음악·누각(樓閣)·서적(書籍)·명필(名筆)·명주 (名酒)·화훼(花卉)·추천 등의 순으로 노래했다. 각기 명문(名文)·명집(名集)·명필·명주·명화(名花)·명악 (名樂) 등 당대의 명류(名流)를 늘어놓아 노래함으로써 귀족들의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감정과 풍류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끝연에 이르러 치정(痴情)의 절정으로 대단원을 맺는다.

가사의 형식은 구투(舊套)를 벗어나 종래의 악부(樂府)나 사곡(詞曲) 등 중국 시가의 형식인 별곡체의 독특한 운율과 구법(句法)을 사용했다. 곧 전편 8연의 각 연은 '엽(葉)'을 경계로 전후 2강(腔)으로 나뉘며, 4구 후강 2구, 모두 6구체로 되어 있다.

<한림별곡>은 1연이 '334·334·444·334·4444·334'로 그 기본형을 이루고 있다. <한림별곡>이 귀족의 신체가요(新體歌謠)로, 공사(公私)의 연석이 성행함에 따라 이 별곡체는 고려·조선를 통해 많은 모방을 보게 되었다. 즉 고려 충숙왕대 안축이 지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은 <한림별곡>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한림별곡>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새로운 가사 형식을 취하여 이를 계승·모방했다.

<한림별곡>의 가사는 고려사 악지와 <악학궤범> <악장가사>에 전하는데, <고려사>에 수록된 가사는 한문과 이두로 되어 있다. 가사 중 하나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백과사전 22권 참고)

안축[편집]

安軸 (1287-1348)

고려 충렬-충목왕 때의 학자.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했으나 벼슬에는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학정(成均學正)·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었고,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한때 내시(內侍)의 미움을 받아 전법판서(典法判書)란 벼슬에서 물러난 일도 있고, 뒤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개찬(改撰)했고, 또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편찬에 참여했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진 후 죽었는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집으로는 <근재집>이 전하는데, 그 속에 <관동별곡> <죽계별곡>이 수록되어 있다.

관동별곡(關東別曲)[편집]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이 노래는 안축이 충숙왕 17년 강릉도 존무사(存撫使)로 갔을 때 관동(關東)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지은 것임. 형식은 모두 8장. 첫장은 서사(序詞)로 순찰경(巡察景), 제2장 이하는 학성(鶴城, 安邊)·총석정(叢石亭, 通州)·삼일포(三日浦,高城)·선유담(仙遊譚)·낙산사(洛山寺, 襄陽)·강릉(江陵)·정선(旌善) 등의 풍경을 노래했다. 첫 수를 소개하면 ― (백과사전 22권 참고)- 이 노래는 안축의 문집인 <근재집(謹齋集)>에 실려 전함.

죽계별곡(竹溪別曲)[편집]

경기체가. 고려 충숙왕 때 근재 안축이 지음. 모두 5장. 문장은 이두로 되어 <근재집>에 수록되어 전함. 강릉도 순무사로 있던 안축이 그의 고향인 풍기(豊基) 땅 죽계(竹溪, 順興에 있음)의 경치를 읊은 것이다. 5장 중 첫째 장 ―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 他代無隱 翠華峰 天子藏胎 爲釀作中興景幾何如 淸風杜閣 兩國頭▩ 爲 山水高景幾何如(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 년대 업는 翠華峰 天子藏胎 위 釀作中興ㅅ景 긔 엇더하니잇고 淸風杜閣 兩國頭▩ 위 山水高ㅅ景긔 엇더하니잇고)."

청산별곡(靑山別曲)[편집]

고려가요. 지은이와 지은 연대 미상.<악장가사>에 그 전문이, <시용향악보>에 그 일부가 전한다. 형식이 <서경별곡>과 비슷하여 고려 때 작품으로 추정되며 일반 민간에 널리 불려졌으리라 상상됨. 형식은 전편 8연으로 매연(每聯)마다 4구절이며 매구(每句)는 '3·3·2'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그 특징은 'ㄹ'음이 연속되어 가락이 아름다운 점이며, 주제는 생의 애달픔으로 인한 현실세계의 도피와 현실의 부정임. 그러나 애수(哀愁)와 실의(失意)에 차 있으면서도, 그 밑에 흐르고 있는 낙천적인 생활과 유원(悠遠)한 정조(情調)를 볼 수 있는데, 그 때 사람들의 생활정서가 반영된 고려가요 중 걸작의 하나다. 그 중 2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살어리 살어리 랏다. 청산애 살어리 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랏다.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니러 우니노라.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쌍화점(雙花店)[편집]

고려의 속요. 일명 <상화점(霜花店)>이라고

한다.

충렬왕 때 이루어진 것이라 전하는데 정확하지 않다. 지은이도 미상. 문헌에 의하면 충렬왕 때 궁중 잔치 때 부르게 했다 한다. <악장가사>에 실려 전함. 남녀 사이의 노골적인 정사(情事)를 내용으로 한 것으로 조선 성종 때 남녀상열지사 또는 음사(淫辭)라 하여 가사를 약간 고쳤다. 이 노래는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속요를 성색(聲色)과 기악(妓樂)을 즐기는 군신(君臣)의 연회에서 쓰인 것으로, 그들의 향락적인 기풍을 그대로 말해 준다. 노래의 형식은 전편 4연이며, 그 중 아래 2구는 후렴이다. 전 3구는 '4·4·4', 제4구는 '4·4·4·3', 후렴 2구는 '4·4·3', '5·4·2'로 전 연이 모두 동일한 음수율(音數律)의 정형을 취하고 있다. 그 중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雙花店에 雙花사라 가고 신댄 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삼미 이店밧 긔 나명 들명 다로러 거디러. 죠고맛간 삿기광대 네마리라 호리라. 더라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다로러 긔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니 잔 대가티 덤거츠니 업다 … "

정석가(鄭石歌)[편집]

고려가요. 지은이와 연대는 미상.<악장가사>에 실려 전함. 형식은 전편 6연, 첫연은 서사(序詞)로 3구체, 2연 이하는 6구체, 각은 전후 3구로 되어 전후 각 제2구는 첫구의 첩구(疊拘)로 되었으며 제6연인 끝연을 제외하면 매연 끝 구는 후렴이다. 결국 첫구를 제외하면 첫연 2구·2연 이하는 4구의 정형이며, 매구의 음수율은 3·3·4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그 내용은 임과 함께 사는 즐거움을 읊은 것으로 <서경별곡>이 남녀간의 이별과 사랑을 노래한 데 대하여, <정석가>는 영원히 함께 사랑하면서 늙기를 기약하는 노래이다. 그 중 1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 삭삭기 셰몰애 별헤 나난, 삭삭기 셰몰애 별헤 나난, 구은 밤 닷 되를 심고 이다. 그 바미 우미 도다 삭 나거시아 그 바미 우미 도다 삭 나거시아, 有德하신 님믈 여해아와지이다 …"

만전춘(滿殿春)[편집]

고려의 속요. 지은이와 연대는 미상.<악장가사>에 실려 전해 옴. 남녀 사이의 애욕의 정을 매우 노골적으로 읊은 노래. 유녀(遊女)의 희학적(戱謔的) 애정이 대담하고 솔직하게 나타나 있다. 이 노래의 형식은 전 5연으로 그 첫연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 주글 만뎡, 情둔 오날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이상곡(履霜曲)[편집]

고려 속요. 지은이와 연대 미상.창녀의 노래이므로 조선 성종 때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평을 들었다. <악장가사>에 실려 전해 옴. 가요의 일부를 소개하면,-(백과사전 22권 참고)

사모곡(思母曲)[편집]

고려 때 가요.학자에 따라 신라가요 <목주가(木州歌)>가 이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음. 지은이와 지은 때는 미상. 가사는 <악장가사> 및 <시용향악보>에 전해 옴. 전편은 불과 5행으로 단형(短型)에 속하며, 내용은 부모의 애정을 호미와 낫에 비유하여 어머니의 자애롭고 깊은 사랑을 노래한 것임. 추측하건대 신라 때부터 불려 온 것으로 생각되는 속요의 절조(絶調)임. <악장가사>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호매도 날히언마라난 낟가티 들리도 업스니이다. 아바님도 어이어신 마라난 위 뎡더둥셩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세라. 아소 님하 어마님 가티 괴시리 업세라 (호미도 날(刀)은 날이지마는 낫날(鎌刀)과 같이 잘 들 리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버님도 어버이이시건마는 위뎡더둥셩 어머님과 같이 그렇게 사랑하실 분이 없어라. 알으시오 임이시여 참으로 어머님과 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어라)."

가시리[편집]

고려의 속요. <귀호곡(歸乎曲)>이라고도 함. 지은이와 연대는 미상. 이 노래의 형식은 전편 4연, 매연 2구, 매구마다 3·3·2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내용은 이별(離別)의 정한(情恨)을 노래한 것인데 애절, 간결, 소박한 가락 속에 꾸밈없는 표현의 묘미가 역대 이별가 중의 으뜸이라 할 만하다. <악장가사>에 실리어 전하는데 전연은 기(起)·승(承)·전(轉)·결(結)의 원리를 이루면서 꾸밈없고 소박한 표현 속에 함축미가 넘치고 있다. 가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난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위 증즐가

大平盛大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위 증즐가 大

平盛大

잡사와 두어리 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셰라 나난 위 증즐가

大平盛大

셜온 님 보내압노니 나난 가시난닷 도셔오쇼셔 나난 위증즐

가 大平盛大"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버리고 가시렵니까. 나는 어찌 살라 하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둘 일이지마는 시틋한 생각에서 마음이 거칠어지면 돌아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괴로운 임을 보내드리오니 가시는 듯 곧 돌아오소서).

동동(動動)[편집]

고려의 속요.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월령체(月令體)의 노래. 민간에 송도체(頌禱體)의 가요로 구전되어 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악학궤범>에 채집되어 실렸는데 고려대로부터 조선을 통해 묘정(廟庭)에서 <아박(牙拍)>과 함께 불렸음. 지은이와 지은 때는 미상. 내용은 일년 열두달의 자연 정경에 비기어 남녀간의 애정을 읊은 것인데, 조선 중종 때 <정읍사>와 함께 음사라 하여 폐지되고 신제악장(新制樂章)과 대치됨. 형식은 모두 13연으로 매연 4구로 이루어졌는데 첫연은 서사(序詞)로 시작되고 남은 12연은 정월부터 12월까지 월령체로 배열되었음. 이 노래는 조선시대 <농가월령가(農歌月令歌)>와 같은 월령체의 기원이라는 데 의의가 있으며, 한국적 내면의 함축미를 담은 애정의 일대 파노라마를 이룬다. 서사와 5월의 노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덕으란 곰배예 받잡고 福으란 림배예 받잡고 德이여 福이라 호날 나아라 오소이다. 아으 動動다리"

"5월 5일애 아으 수릿날 아참 藥은 즈므핼 長存 하샬 藥이라 받잡노이다 아으 動動다리."

처용가(處容歌)[편집]

고려의 가요. 신라 향가인 <처용가>가 발전되어 처용을 찬양한 노래로, 고려 때 궁중가악(宮中歌樂)으로 불렸음. 지은이와 지은 때는 미상. <악장가사>와 <악학궤범>에 전문이 실리어 전함. 귀신을 쫓는 의식(儀式)인 구라의식(驅儺儀式) 때 처용의 형용을 그린 탈을 쓰고 이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풍습이 그 뒤에 많이 행하니, 이것이 곧 <처용가>가 가극으로 발전한 처용무(處容舞) 또는 처용희(處容戱)다. 이 노래는 향가 <처용가>를 더 넓혀서 부연(敷衍)한 것으로 그 구성은 대체로 4단으로 나뉜다. 제1단은 전편의 서사이며, 제2단은 처용의 얼굴을 그린 대목이며, 제3단은 처용의 제작(製作)에 대한 말, 제4단은 처용이 역신(疫神)을 쫓는 위력으로 노래의 끝을 맺는다. (백과사전 22권 참고)

상저가(相杵歌)[편집]

속가. <시용향악보>에 실려 있는 가사.지은이와 지은 연대는 미상. 이 노래는 이른바 방아 찧기 노래로 일종의 노동요에 속한다. 일찍부터 민간 부녀자 사이에 성행하던 노래로 그 형식이나 내용·언어·율조(律調)로 보아 고려 이전부터 전해 오던 구전민요로 추측된다. 이 노래 속에는 촌부(村婦)의 소박한 생활감정과 아름다운 농촌 풍속이 잘 나타나 있어 <유구곡(維鳩曲)>과 더불어 민간 속요의 절조라 할 만하다.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듥긔동 방해나 디히히얘, 게우즌 바비나 지어 히얘, 아바님 어머님께 받잡고 히야해, 남거시든 내머고리 히야해 히야해(들그렁 방아나 찧세 히얘 누렇고 까실까실한 쌀로 밥이나 지어서 히야해 이 밥을 아버님 어머님께 바치옵고 남거든 내 먹으리라 히야해 히야해)."

유구곡(維鳩曲)[편집]

고려가요. 속칭 '비두로기'라 하며, 지은이와 연대는 미상.

<시용향악보>에 실리어 전함. 첩구 형식(疊句形式)으로 된 이 노래는 비록 가사가 짧지만, 아무 기교가 없으면서도 함축미가 번득이는 노래다.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비두로기 새난 비두로기 새난 우루믈 우루믈 버곡댱이 자 난 됴해 버곡댱이마 난됴해(비둘기는 비둘기는 울음을 울되 뻐꾸기야말로 나는 좋아하네 뻐꾸기야말로 나는 좋아하네)."

나례가(儺禮歌)[편집]

고려 때 속요.고려 때 음력 섣달 그믐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악귀(惡鬼)와 역신(疫神)을 쫓는 의식을 할 때 부른 노래. 이 노래는 일찍부터 민간에 구전된 것으로 <시용향악보>에 실려 전함. 음계(音階)는 평조(平調) 10각으로 되어 있다.

나례[편집]

儺禮

고려시대 음력 섣달 그믐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행하던 의식.

본디 중국 주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악귀(惡鬼)와 역신(疫神)을 쫓는 의식인데, 고려 초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옴. 섣달 그믐 밤에 나쁜 귀신을 몰아내고 깨끗한 새해를 맞기 위해서 극적 형식(劇的形式)으로 행했는데 조선 때까지 이 의식은 계속되었다. 종교적 의식과 함께 <처용가>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었는데, 후에 의식이 없어지고 오직 연희만 성행됨. 조선 초기의 무용·음악·가요의 종합적 표상으로 나타남.

성황반(城皇飯)[편집]

고려 때의 무가(巫歌).이는 민간신앙인 서낭신앙으로 서낭단(壇)에 상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낼 때 부른 노래인 듯함. 조선에 들어와서 무악(巫樂)으로 정착됨. 이 노래는 서낭신앙의 표현으로, 수호신인 사천왕(四天王)과 나쁜 귀신을 쫓는 방상씨(方相氏)를 불러 고발함으로써 나라 또는 고장의 안전을 기원한 것이라 볼 수 있음. 가사는 <시용향악보>에 실려 전함.

(백과사전 22권 참고)

내당(內堂)[편집]

고려 때 이루어진 듯한 무가(巫歌).지은이와 지은 연대는 미상. 이 노래는 내당(內堂) 또는 내불당(內佛堂)에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부른 것임. 비록 대미륵(大彌勒)에 부치는 염불(念佛)이기는 하나 그 내용이 정욕의 대상을 갈구하는 음사(淫詞)로 당시 깊숙한 규방(閨房)에 갇혀 사는 귀부인들의 생태를 엿볼 수 있다. 그 가사는 <시용향악보>에 실려 전함.(백과사전 22권 참고)

대왕반(大王飯)[편집]

고려 때 이루어진 듯한 무가(巫歌).지은이와 지은 연대는 미상. 무당들이 부른 노래로 내용은 여덟 성황신(城隍神)이 성 안에서 그들을 따르는 여인들과 노는 모양을 노래한 것임. 곡조는 평조. <시용향악보>에 실려 전함. (백과사전 22권 참고)

삼성대왕(三城大王)[편집]

무가의 하나. 지은이와 연대는 미상.내용은 <대왕반>과 같이 성황신의 하나인 삼성대왕을 불러 장난을 없애 줄 것을 기원하는 노래이다.

(백과사전 22권 참고)

대국(大國)[편집]

고려 때 이루어진 듯한 무가.<시용향악보>에 전하는 <대국> 1·2·3의 내용은 나라의 평안함과 재난(災難)이 없는 삶을 영위할 것을 축원한 것임. 사설은 태학적이기는 하나 진지한 축원으로 일관되어 있다.

한역가[편집]

漢譯歌

<악학궤범>과 <악장가사> 등에 채집된 고려가요는 그 주류적 흐름을 형성하면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자로 정착된 것이지만, 한편 고려시대에 이미 한자로 번역하여 전래하는 것이 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의 문집인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수록이 된 <소악부(小樂府)>는 고려가요 11수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전하고 있다. 이 한역가(漢譯歌)는 가치의식이 뒤바꿔진 감도 없지 않지만 이 문헌을 통해 없어진 고려가요의 편모가 전해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익재난고(益齋亂藁)[편집]

고려 때의 학자 이제현의 유고 시문집. 고려 공민왕 12년에 이제현의 아들 이창로(李彰路)와 손자가 공동으로 엮은 것인데, 유고를 다 모아 수록하지 못했다 하여 '난고'라 했음. 이 책에 전해 오는 한시는 가장 수준 높은 작품으로 우리나라 한문시가에 있어 고전적인 정통(正統)으로 평가된다. 이 책 <소악부>에 그 때의 고려가요 11수를 한시로 번역해 놓은 것이 수록되어 있어 국문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익재소악부(益齋小樂府)[편집]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의 문집 <익재난고> 속의 한 부분. 당시 유행한 고려가요를 칠언절구(七言句)로 번역하여 수록했는데 한역된 작품은 <장암노인(長岩老人)> <거사연(居士戀)> <처용가> <서경별곡> <정과정곡(鄭瓜亭曲)> 등 11수이다. 그 중 <정과정곡> 한 수을 보면 다음과 같다. 憶君無日不霑衣 政似春山蜀子規 爲是爲非人莫問只應殘月曉星知(원문, 정과정)

고려 후기의 한문학[편집]

高麗後期-漢文學

고려 문인의 수난기(受難期)는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에서부터 비롯된다. 무신(武臣)들은 2차에 걸쳐 대대적인 문신(文臣)들의 학살을 감행하여 문인들은 현실의 도피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인들은 산간에 숨어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중심으로 은둔생활을 하니 당시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할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浦沆),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중국의 문풍(文風)인 사부(辭賦)를 즐겨 창작했고, 중국 진나라 때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송나라의 시인 소식(蘇軾)과 두보(杜甫) 등의 시를 즐겨 추앙했다. 한편 죽림칠현계의 시인들과 함께 이규보(李奎報), 진화, 김양경(金良境), 유승단(兪升旦), 최자(崔滋) 같은 문인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고려 말에는 이제현, 최해(崔瀣), 안향(安珦),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 중국의 주자학(朱子學)을 숭상하는 성리학자들에 의해 유교를 철학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려 후기 한문학의 큰 흐름을 담당하면서 최충의 구재(九齋)와 함께 당대의 시가는 물론 조선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죽림칠현계의 시가[편집]

竹林七賢系-詩歌

무신의 난을 피한 문인들은 자연 속에 깊이 파묻혀, 중국 진나라 때 청담파(淸談派)인 죽림칠현과 같은 죽림고회를 조직하고 시작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그 대표적 시인들이 바로 이인로를 중심으로 오세재, 임춘,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 일곱 사람이다.

이인로[편집]

李仁老 (1152-1200)

고려 의종-고종 때의 학자·문인. 호는 쌍명재(雙明齋). 정중부의 난 때 스님이 되어 절간에 피했다가 환속. 1180년 문과에 급제한 뒤 14년간 직사관(直史館)으로 사국(史局)과 한림원(翰林院)에 재직했으며 벼슬이 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에 이르렀다. 혼잡한 현실에 싫증을 느끼고 오세재, 임춘 등 6사람과 사귀어 중국 강좌칠현(江左七賢)을 본받아 해좌칠현(海左七賢)을 자처하는 한편 죽림고회를 조직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한유(韓愈)의 고문(古文)을 숭상했고, 시에서는 소식(蘇軾)을 사숙했다. 글씨에도 능해 초서(草書)·예서(隸書)가 특출했다. 대표적인 한시에 <쌍운·회문(雙韻·廻文)>이 있으며 저서에 <파한집(破閑集)> <쌍명재집(雙明齋集)> 등이 있었으나 지금 전하는 것은 <파한집>뿐이다.

오세재[편집]

吳世才 (생몰연대 미상)

고려 명종 때의 학자·문인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이인로에 의해 3차례나 추천을 받았으나 성품이 단정치 못해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경주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다 죽었다. 문장이 뛰어나 이름을 날렸는데, 시문은 한유, 두보의 체를 터득했으며 특히 이규보(李奎報)와 시문을 즐기며 사귀었다. 그의 한시 중 널리 알려진 작품은 <극암(戟巖)>시이다.

임춘[편집]

林椿 (생몰연대 미상)

고려 인종 전후대의 문인.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여러 번 과거에 실패했으며 정중부의 난 때 간신히 피신, 이인로·오세재 등과 함께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나 이인로와 함께 그 당시 문단의 쌍벽을 이루었다. 죽은 뒤 그의 유고가 이인로에 의해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시문은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기록되어 있고,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 등의 가전체 소설이 전한다. 그의 한시 중 특히 <소사(蕭寺)>시가 유명하다.

조통[편집]

趙通 (생몰연대 미상)

고려 때의 학자·문인. 자는 역락(亦樂).

문과에 급제한 뒤 왕명으로 금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억류, 1198년(신종 원년)에 돌아와 태자 문학(太子文學)을 거쳐, 이듬해 동경(東京)에서 도적의 무리가 창궐하자 장작 소감(將作少監)으로서 동경 초무사(東京招撫使)가 되었다. 뒤에 벼슬이 좌간의대부·국자감 대사성·한림학사(左諫議大夫·國子監大可成·翰林學士)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최당, 백광신(白光臣)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 시작 생활을 즐겼으며, 이인로·오세재 등과 벗하여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황보항[편집]

皇浦沆 (생몰연대 미상)

고려 때의 시인.명종 때 이인로, 오세재 등과 함께 시와 술로써 서로 즐기며 칠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함순[편집]

咸淳 (생몰연대 미상)

고려 때의 문장가.일찍이 문과에 급제, 문장이 뛰어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이인로, 오세재 등과 명종 때 이름있는 선비들과 사귀면서 해좌칠현을 조직하여 시와 술로써 소일했다.

이담지[편집]

李湛之 (생몰연대 미상)

고려 때의 문장가.이인로, 오세재 등과 함께 칠현 중의 한 사람으로 고려 중엽 이후 유행하던 주필(走筆)의 창안자라 함.

사부와 성리학[편집]

辭賦-性理學

이 시대의 시인들은 흔히 운어(韻語)를 쓰는 한시의 한 체인 사부를 즐겨 지었다. 이인로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 이색의 <유수사(流水辭)>, 정몽주의

<사미인사(思美人辭)>, 이숭인의 <애추석사(哀秋夕辭)> 등은 모두 한시의 '사(辭)'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또한 중국 한나라 때부터 사대부의 계층에서 유행하던 유운적(有韻的)인 산문 부(賦)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이규보의 <외부(畏賦)> <몽비부(夢悲賦)> <방선부(放蟬賦)> <조강부(祖江賦)> <춘망부(春望賦)> 등을 비롯하여 이인로의 <옥당백부(玉堂栢賦)>, 최자의 <삼도부(三都賦)>, 이색의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충렬왕 이후에 송나라 정이(1033-1107)와 주희(朱憙, 1130-1200)의 <집주(集注)>가 수입됨에 따라 문학 전면에 걸쳐 성리학(性理學) 사조가 대두하였다. 이제현의 <산중설야(山中雪野)>, 이색의 <부벽루(浮碧樓)>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이숭인의 <오호시(嗚呼詩)>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규보[편집]

李奎報 (1168-1241)

고려 의종-고종 때의 문신. 대문학자.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207년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職翰林)으로 발탁되었으며 한때는 귀양살이를 했으나, 1237년 평장사태학사(平章事太學士)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고려 500년을 통해 가장 뛰어난 문학자로 그의 걸출하고 활달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고,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 그 감상을 즉흥시로 읊어서 유명하다. 처음에는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영향을 받았으나, 개성을 잘 살려 독자적인 시풍을 이룩했다. 그는 특히 몽고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할 만큼 명문장가였으며, 시주(詩酒)와 거문고를 즐겨 스스로를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라 자칭했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저서에는 그의 작품 대부분을 수록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고, 설화문학으로서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등이 있다. 또 대표적인 한시 중에는 <천마산시(天磨山詩)> <막중서회(幕中書懷)> <고시십팔운(古詩十八韻)> <동명왕편(東明王篇)> 등이 있다.

진화[편집]

(생몰연대 미상)

고려 고종 때의 한학자. 호는 매호(梅湖).

1200년(신종 3)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등용,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로서 지공주사(知公州事)를 지냈다. 특히 시에 뛰어나 사어(詞語)가 청려 웅장하고 변화가 많았으며, 이규보와 아울러 각각 이정언, 진한림으로 일컬어짐. 저서에는 <매호유고(梅湖遺稿)>가 있으며, 그의 한시 작품인 <춘흥(春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小梅零落柳#垂 閒踏淸風步步 遲漁店閉門人語少 一江春雨碧絲絲(매화는 떨어지고 수양은 푸른데 청풍에 흥겨워 한가히 거닐었소, 어점은 문 닫힌 채 잠잠도 한데, 강 위엔 보슬비만 내리는구려.)"

유승단[편집]

兪升旦 (1168-1232)

고려 의종-고종 때의 문인.명종 때 문과에 급제, 1223년(고종 10)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고, 1227년 수찬관(修撰官)으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232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최우의 강화 천도를 반대했다. 특히 경사(經史)에 조예가 깊었고, <한림별곡>에 원순문(元淳文)이라 일컬어질 만큼 문장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최자[편집]

崔滋 (1188-1260)

고려 명종-원종 때의 문신·문인.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 본관은 해주.

강종 때 문과에 급제, 상주 사록(尙州司錄)을 거쳐 국학 학유(國學學諭)로 있을 때 이규보에게 문재가 인정되어 그의 추천으로 문한(文翰)을 맡았다. 고종 때 상주 목사(尙州牧師)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뒤에 충청도와 전라도의 안찰사(安察寺)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당대에 크게 문명을 떨쳤으며, 저서에 <보한집(補閑集)>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

이제현[편집]

李齊賢 (1287-1367)

고려 충렬왕-공민왕 때의 문신·학자·시인.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실재(實齋)·역옹.

백이정의 문인으로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이어 문과에 급제했다. 1308년 예문춘추관에 등용,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사헌 규정(司憲糾正) 등을 지냈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 이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 있던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9년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했고, 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랐고, 이 해 충선왕이 바이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함으로 귀양가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석방케 했다. 1343년 원나라 사신이 충혜왕을 포박해 가자 글을 올려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이 되었고,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벼슬에서 물러나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념했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만년에 은거생활을 하던 중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 일대를 통해 명문장가·대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그는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를 들여와 고려에 널리 보급시켰다. 저서에 <익재난고>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 등이 있다.

최해[편집]

崔瀣 (1287-1340)

고려 충렬왕-충혜왕 때의 학자·문신·한시인. 자는 언명부(彦明父)·수옹(壽翁), 호는 졸옹(拙翁)·예산농은(猊山農隱).

일찍이 문과에 급제, 성균학관(成均學館)·예문춘추 검열(藝文春秋檢閱)·주부(主簿)에 올랐다. 1320년(충숙왕 7) 장흥고사(長興庫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이듬해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판관(判官)이 되었으나 병을 핑계하여 귀국,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만년에는 절간의 밭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고, 고현 명현의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수했다. 천성이 강직하여 세속에 타협하지 않아, 관계로 진출하는 데 파란이 많았으나 당대의 문호(文豪)로 이제현과 함께 외국에까지 그 문명을 떨쳤다. 저서에 <농은집(農隱集)> <졸고천백(拙藁千百)> <귀감(龜鑑)> 등이 있다.

그의 한시 중 <현재설야(懸齋雪夜)> 한 수를 보자.

"三年竄逐病相仍, 一室生涯轉以僧,

雪滿四人不到, 海濤聲裏坐挑燈."

(귀양살이 삼 년에 병만 잦은데, 승방인 양 외로운 하루 또 하루 온 사방 눈에 쌓여 오는 이 없고, 파도 소리 요란한데 등만 바라보며 앉아 있네.)

안향[편집]

安珦 (1243-1306)

고려 고종-충렬왕 때의 명신·학자. 어릴 때 이름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매헌(晦軒).

일찍이 문과에 급제, 국자사업(國子事業)·우사의(右司議)·좌승지(左承旨)·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와 성리학을 연구했다. 특히 고려 유학을 진흥시키는 데 힘썼고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로 지칭됨. 시호는 문성(文成).

이색[편집]

李穡 (1328-1396)

고려 충숙왕-조선 태조 때의 대학자이며 충신.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이제현의 문인(門人). 일찍이 국자감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고,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 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시정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1년 뒤 회시(會試)에 1등으로 합격, 국사원 편수관을 지냈고, 뒤에 원나라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三年喪) 제도를 실시케 했다. 뒤에 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대사성이 되어서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 성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위(鐵嶺衛) 문제가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曹敏修)와 함께 창(昌)을 옹립 즉위케 했다. 이성계가 세력을 잡자 귀양생활과 투옥생활로 일관하였다. 그의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했다. 시호는 문정(文情). 문집으로 <목은집(牧隱集)>이 있으며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시조 한 수가 전한다. (백과사전 22권 참고)

이숭인[편집]

李崇仁 (1349-1392)

고려 충정왕-조선 태조 때의 학자·문인.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萄隱).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장흥고사(長興庫使)로 진덕박사(進德博士)를 겸했고,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25세에 미치지 못해 나가지 못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칭한 뒤 정몽주, 김구용(金九容) 등과 함께 학관(學官)을 겸했다. 우왕 때 여러 차례 귀양살이를 했고, 창왕 때 서연관이 되었으나 여러 차례 사헌부의 탄핵으로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 권근(權近)과 함께 투옥되었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유배지에서 정도전(鄭道傳)이 보낸 황거정(黃居正)에게 살해되었다. 특히 그의 시문은 널리 알려졌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문장은 명나라 태조를 탄복시킬 만큼 원나라와 명나라의 복잡한 국제 관계의 외교문서를 맡아 썼다. 유고 문집으로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이 있다.

정몽주[편집]

鄭夢周 (1337-1392)

고려 충숙왕-공양왕 때의 문신·학자·문인.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성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사람. 공민왕 9년 문과에 장원, 예문 검열(藝文檢閱)·수찬(修撰) 등을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성 등을 지냈다. 벼슬이 예의판서·예문관대제학(禮儀判書·藝文館大提學)·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공양왕 4년 위세가 날로 커가고 있던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려 했으나 오히려 방원(芳遠=太宗)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되었다. 일찍이 그는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 불교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성리학의 대가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된다. 그는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률(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했다. 또한 외교와 군사정책에서는 친명책(親明策)을 도모했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의해 꺾였다. 시호는 문충(文忠). 특히 시문에 능하여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고, 시조 <단심가(丹心歌)>가 전하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 후기의 서사시[편집]

高麗後期-敍事詩

12, 13세기는 서사시 시대이다. 오세문(吳世文)의 <역대가(歷代歌)>,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이 시대에 창작된 것이다. 이들 시인들은 영웅 및 역사적 사적(事蹟)을 서사시로 노래했는데, 이 시대는 바로 서사문학의 발흥기(勃興期)인 동시에 고려조 한문학의 총결산과도 같은 감을 준다.

역대가(歷代歌)[편집]

고려 중엽의 문인 오세문이 지은 가사이며 형식은 운문. <제왕운기> <동명왕편>과 더불어 고려 서사시를 대표하며 가사체 문학의 원형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승휴[편집]

李承休 (1224-1300)

고려 고종-충렬왕 때의 학자·문인. 가리 이씨(加利李氏)의 시조.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고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두타산 구동(龜洞)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 후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뛰어나고 화려한 문장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귀국 후 벼슬이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었으나 한동안 벼슬을 떠나 고향에 칩거하며 <제왕운기>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했다. 뒤에 벼슬이 사림승지(詞林承旨)에 올랐고, 문집으로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이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편집]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지은 서사시.상하 2권으로 엮어졌고, 내용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역대순으로 읊었다. 상권은 중국 역대에 대한 것을 하권은 우리나라의 것을 서술했다. 중국에 대한 것은 7언시. 우리나라의 것은 일부 발해(勃海)까지는 7언시, 그 후 고려조는 5언시로 이루어졌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신화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 데 대하여 이는 사실적인 작품이다. 처음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遼東別有 一乾坤 斗與中朝區以分 洪濤萬頃圍三面 於北有陸連如線 中方千里是朝鮮 江山形勝名敷天 耕田鑿井禮儀家 華人題作小中華 … "

동명왕편(東明王篇)[편집]

고려 고종 때의 대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권3에 전해오는 장편 서사시.

그 때까지 구전해 오던 것을 이규보가 채집한 것으로 내용은 고구려의 건국을 기린 것이다. 해모수·주몽·유리의 3대를 3편으로 노래했는데 이는 문학사상 고대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형성되는 영웅 서사의 하나로 추측됨.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편집]

이규보의 문집.고려 고종 38년에 완성된 것으로 내용은 이규보의 글을 모은 것임. 유명한 서사시 <동명왕편>이 여기에 실려 전함.

고려 후기의 설화 문학[편집]

高麗後期-說話文學

상대 이래 신화·전설로 구전해 오던 우리의 설화문학은 민족의 서사문학(敍事文學)으로 발전해 왔다. 일찍이 국사의 편찬과 함께 정착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와서 그 편린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문자로 정착되니 비로소 설화문학의 일대 집성을 본 것이다. 특히 <삼국유사>는 민족의 유구한 서사시라고 할 수 있으며 고려의 설화문학이 꽃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춘의 <국순전> <공방전>, 이규보의 <국선생전> <청강사자현부전>, 이곡(李穀)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이첨(李擔)의 <저생전(楮生傳)> 등이 속출하는데 이들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위해 구전되던 설화에 작자의 창의(創意)를 가미, 후세 소설적 전통의 연원이 되어 주었다. 특히 설화문학의 백미(白眉)로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이 이루어졌는데 이 책은 일서(佚書)가 되어 그 본모양을 알 수 없으나 그 일문(逸文)이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태평통재(太平通載)>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등에 전하여 그 편모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고려 때는 당시의 표기수단인 한자를 빌어 의식적인 작품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한자로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킬 만큼 표현능력이 진보된 탓도 있지만 중국의 진(晋)·당(唐)에서 유행한 전기문학(傳奇文學)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이것이 이른바 패관문학(稗官文學)의 선구가 되게 하였다. <수이전>의 현존 작품으로는 <수삽석남> <심화요탑>

<죽통미녀> <노옹화구> <아도전> <연오랑 세오녀>등 그 내용이 다채로운데 원본이 전한다면 더욱 풍부한 설화문학의 유산이 담겨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수삽석남(首揷石枏)[편집]

고려 때 박인량이 지은 설화집. <수이전(殊異傳)>에 수록된 설화. <수이전>은 지금 전하지 않고, 이 설화는 <대동운부군옥> 제8권에 실려 전함.

"신라 최항은 자를 석남이라 했다. 그에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녀와의 결합을 부모가 반대, 만나지 못하더니 몇 달 후 죽고 말았다. 여드레 후 항의 혼이 애인의 집에 갔는데 여인은 항이 죽은 줄 모르고 반가이 맞았다. 항이 머리에 꽂은 석남 가지를 나누어 애인에게 주며 말하기를 '부모가 그대와 같이 살도록 허락해 주기에 왔다'고 하니, 여인은 항을 따라 그의 집에까지 왔다. 그런데 항은 담을 넘어 들어간 뒤 새벽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 집 사람이 온 까닭을 물으매 여인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항이 죽은 지 여드레 만이며 오늘이 장삿날'이라고 말하니, 여인은 말하기를 '석남나무 가지를 나누어 머리에 꽂았으니 가서 조사해 보라'했다. 이에 항의 관을 열고보니 과연 머리에 석남 가지가 꽂혀 있고,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으며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여인이 그의 죽음을 알고 슬피 우니 항이 다시 살아나서 함께 늙도록 잘 살았다."

심화요탑(心火曉塔)[편집]

고려 때 설화집 <수이전>에 수록되었다는 설화. <대동운부군옥>에 실려 전함. "신라 선덕여왕 때 지귀(志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여왕을 깊이 사모한 끝에 병이 나서 드디어 미치고 말았다. 그는 서울로 찾아가 한번은 여왕이 절에 행차하는 길을 막아섰다. 여왕은 지귀를 인도하여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렸는데, 지귀는 너무 오랫동안 절 밖의 돌탑 아래서 여왕을 기다리다 잠이 들고 말았다. 이윽고 여왕이 분향을 끝내고 돌아가다가 탑 아래서 잠든 지귀를 보고 자기의 금팔찌를 빼어 가슴 위에 놓아 주었다. 얼마 후 잠을 깬 지귀는 여왕이 이미 돌아간 줄 알고 금팔찌를 가슴에 껴안았다. 그 때 문득 뜨거운 심화(心火)가 일어나 그의 가슴에 불이 퍼져 마침내 온몸이 타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귀의 원혼은 불귀신이 되었다."

호원(虎願)[편집]

본디 고려 때 설화집인 <수이전>에 실려 있었다는 설화.

<수이전>은 지금 전하지 않고, <대동운부군옥> 권15와 <삼국유사> 권5에 실려 전함. <김현감호(金現感虎)>라고도 한다.

"신라 풍속에 음력 2월 초파일로부터 보름까지 청춘 남녀가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복을 비는 습관이 있었다. 원성왕 때 김현(金現)이라는 청년이 밤늦게 탑을 돌다가 거기서 한 처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김현이 그 처녀의 뒤를 따라가 보니, 처녀는 뜻밖에 범의 화신이었다. 이 처녀에게는 성질이 난폭한 세 오라비가 있었으므로 마침 하늘이 징계하기 위해서 한 마리를 죽이려던 차였다. 이에 처녀는 한 오라비를 대신해 죽을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현에게 '내일 제가 저자에 나타나서 많은 사람을 해칠 터이니, 낭군은 나를 잡아 그 공으로 높은 벼슬을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김현이 사랑하는 애인을 죽일 수 없다 거절하니, '천명이니 차라리 낭군 곁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했다. 이튿날 과연 범이 나타나서 사람을 해쳤으므로 나라에서 큰 상을 걸고 범을 잡게 했다. 김현이 이에 지난 밤 애인으로부터 들은 대로 숲에 이르니, 과연 처녀가 나와 기꺼이 맞아주며 스스로 칼을 빼어 목을 찔러 죽는데, 몸뚱이가 곧 범으로 변했다. 그 공으로 김현은 높은 벼슬에 오르자 호원사란 절을 지어 범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죽통미녀(竹筒美女)[편집]

본래 설화집 <수이전>에 실려 있었다는 설화.

<수이전>은 전하지 않고 그 이야기가 <대동운부군옥>에 실리어 전함.

"김유신이 서주로부터 서울로 돌아올 때 길에 이상한 나그네가 앞장을 서서 가는데 머리 위에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마침 나무 밑에서 쉬게 되어 유신이 자는 체하고 보니, 그 길손은 행인이 없음을 보자 품속에서 대나무 통을 하나 내어 흔들면서 예쁜 여자 두 사람을 불러 내어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통속에 들여보낸 후 길을 떠났다. 이에 유신이 그를 뒤따라 서울로 가서 남산 밑에서 잔치를 베풀고 함께 놀자 두 미녀가 또다시 나와서 참석했다. 이 때 길손은 '나는 서해에 있는 사람으로 동해의 여자와 결혼하여 함께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자 곧 풍운이 일고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행인은 사라지고 말았다."

노옹화구(老翁化狗)[편집]

< <수이전> 가운데 실려 있었다는 설화. <대동운부군옥> 12권에 실려 전함.

"신라 때 어떤 늙은이가 김유신 집 문밖에 갔더니, 유신이 노인을 끌어들여 자리를 베풀고, '옛날과 같이 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곧 범으로 변하고, 닭과 매로 변했다가 드디어는 집의 강아지로 되더니 유신의 집을 떠났다."

아도전(阿道傳)[편집]

설화집 <수이전>에 실려 있었다는 설화.설화의 앞 뒤는 없어지고 중간 부분만 <해동고승전>에 실려 전함. 내용은 대개 신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올 때의 이야기로 아도(阿道) 또는 아두(阿頭)라는 중이 나타나 왕녀의 병을 고치고 불법을 일으킨다는 내용.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편집]

설화집 <수이전>에 실려 있었다는 설화.

이야기는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전함. 내용은 대개 신라 황룡사의 중이던 원광이 중국에 가서 불도를 닦고 돌아온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편집]

고려 전기 고종 2년에 영통사(靈通寺)의 주지로 있던 중 각훈(覺訓)이 엮은 책.

모두 2권 1책으로 내용은 고구려와 신라에 불교를 포교한 중 순도(順道)·현대범(玄大梵) 등 수십명의 고승에 대한 전기이다. <수이전>에 실렸던 설화 <아도전> <원광법사전>이 여기에 실려 전함.

패관문학[편집]

稗官文學

고려 후기에 이르러 민가의 전설·설화를 문학으로서 정착시키고자 한 것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유래한 패관문학의 한국적 모방이며 이식(移植)으로, 이는 후대에 있어 전기 소설로 발전될 소인(素因)이 되어 주었다. 본래 '패관'이란 옛날 중국에서 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 적어 조정에 보고, 정치의 참고로 삼게 하던 관직명으로 여기에 패관들의 창의성과 윤색(潤色)이 곁들여져 비로소 '패관문학'이란 명칭이 생기게 된 것으로 뒷날 소설의 싹은 여기서 비롯된다. 여기에 문인들은 간단한 설화적 흥미와 전기적 진실, 그리고 민간의 항설(巷說)과 문인들의 생활권 내에서 시화 따위를 즐겨 기록하게 되었다. 이 한문학적 장르는 조선 중기까지 수필문학의 한 줄기를 형성했고, 여기서 조선의 소설문학이 발전하는 데 큰 보탬이 되어 주었다.

중국의 패관문학은 송·원의 수필과 설화집인 <태평광기(太平廣記)> 등에, 또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의 세가(世家)·열전(列傳)과 불경(佛經) 속에 들어 있는 설화의 영향 아래 정치적 권력을 잃은 문신과 승려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고려 후기에 있어 단형 수필문학으로서의 패관문학은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시화·소화(笑話)·전설·설화 등에 이르러 그 작품이 이루어졌다.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는 이규보의 <백운소설>을 비롯해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이 있다.

백운소설(白雲小說)[편집]

패관문학의 일종인 시화 문학서. 고려 고종 때 이규보가 지음.

삼국시대 이후 고려 때까지의 시화(詩話)와 문담(文談)에 대해 해설한 책으로 오늘의 소설과는 그 뜻이 다르고, 그보다는 수필에 가깝고, 홍만종(洪萬宗)이 지은 <시화총림(詩話叢林)> 속에 28편이 전함.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동방은 은(殷)의 태사(太師)가 동으로 봉해진 데서부터 처음 문헌이 일어나니, 그 이전의 작자는 아득해서 들을 수 없다. <요산당외기(堯山堂外記)>에는 을지문덕의 얼이 고루 기록되어 있고, 또 그가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준 오언절구가 실려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言止(신통한 꾀는 천문을 뚫고, 오묘한 셈은 지리를 다했소.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아 그치기를 바라오)' 귀법이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아름답고 꾸밈의 습관이 없다. 어찌 후세의 찌들어진 시들의 가히 미칠 바이겠느냐 …."

파한집(破閑集)[편집]

고려 후기의 문인 이인로(李仁老)의 시화집이다.

3권 1책으로 아들 이세황(李世黃)에 의해 1260년(원종 1)에 간행됨. 학자와 문인들의 시문이 인멸되어 전하지 않음을 슬퍼해서 이를 수록한 것으로 그 대부분은 시화·문담(文談)·기사(記事)·자작시 등이며, 서경(西京)과 개경(開京)의 풍물기는 고려문화의 일반(一斑)을 보여주는 귀중한 설화문학집이다.

보한집(補閑集)[편집]

고려 고종 41년(1254) 최자(崔滋)가 이인로의 <파한집>을 보충해서 간행한 수필집. 당시의 권신 최이(崔怡)의 권유로 간행한 것으로 내용은 거리에 떠도는 이야기, 야사(野史), 흥미있는 사실, 기녀들의 이야기를 모아 수록했다. 이 책은 이인로의 <파한집>의 자매편으로 정치적으로 실의(失意)한 문인들의 소한(消閑)과 설분(雪憤)의 자료로서 애독되었다.

역옹패설[편집]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시화문학집. 학자에 따라 책명이 '늑옹패설' 또는 '낙옹비설'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이문(異聞)·기사(奇事)·인물·경륜(經綸)·시문(詩文)·시화 그리고 항간에 돌아다니는 이야기 등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이 책에 이제현 자신의 시문 약간과 책 끝에 이색(李穡)의 묘지명(墓地銘)을 실었는데 이 속에 <소악부>가 전함. 이 책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是年百濟王甄萱 逃奔歸我 請討逆子神劒 太祖親征擒滅之 而新羅王金傅亦納土入朝三韓旣一 乃 兵息民 聿修文敎(이 해 백제 왕 견훤이 도망하여 달려 우리에 귀화하여 반역한 자식 신검을 치기를 청하다. 태조는 친히 정벌하여 그를 사로잡고 백제를 망치다. 그런데 신라 왕 김부가 또는 국토를 바치고 우리나라로 들어오다. 삼한이 이미 하나가 되어 병기를 놓고 백성을 쉬게 하고 이에 문교를 닦다)."

가전체의 등장[편집]

假傳體-登場

앞에 든 <백운소설> <파한집> <보한집> <역옹패설> 등은 대부분 시화문학 또는 수필집에 가까운 것들이지만 패관문학 본연의 형태로서 전기류(傳奇類) 곧 소설 형태에 한층 가까운 가전체의 단편이 있으니, 이 역시 당·송 문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 가전체는 뒤에 우리나라 고대소설의 징검다리를 놓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현재 <동문선> 기타에 전하는 임춘의 <국순전> <공방전>, 이규보의 <국선생전> <청강사자현부전>, 이곡의 <죽부인전> 이첨의 <저생전>, 석식영암(釋息影庵)의 <정시자전(丁侍者傳)> 등은 가전체의 대표 작품이다. 이들 작품들은 모두 문인들의 생활·습관과 친근한 사물, 즉 술(<국순전> <국선생전>), 종이(<저생전>), 대(<죽부인전>) 등을 소재로 이것들을 의인화하여 세상사람들을 징계(徵戒)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품들은 <수이전>이 내포하는 세계와는 달리 순전히 작자의 창작적 의욕을 표현한 것으로 소설문학에 일보 접근한 것이라 하겠다.

가전[편집]

假傳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 가전은 보통의 설화에서 탈피하여 우화(寓話)·의인적(擬人的) 수법을 써서 지은 짧은 전기체의 설화로서 그 내용은 대개 사람들을 경계하고 징계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것인데, 재래의 설화와 달리 작자의 창의가 가미됨으로써 소설의 발생에 선행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한국 문학사상 특기할 형태이다.

국순전(麴醇傳)[편집]

고려 고종 때 서하(西河) 임춘이 지은 가전(假傳).

내용은 술을 의인화하여 풍자적으로 서술한 것임. 국순(麴醇) 가문의 성쇠(盛衰)를 그린 것으로 죽림칠현의 현실 도피적 향락을 중국 사실에 기탁하여 정치적 비평도 내포하고 있다. 진후주(陳後主)의 술로 인한 음탕으로 패망한 것을 그려 계세징인(戒世懲人)을 목적으로 한 것임.

"국순의 90대 할아버지에 청덕(淸德)이 있어 중산후(中山侯)로 봉하게 되매 그들은 비로소 국(麴)이란 성을 얻게 되었다. 순의 아버지는 죽림의 무리 칠현과 교유할 정도의 인물이었으며, 순에 이르러서 그 훌륭한 덕행이 세상에 알려져 임금도 항상 그를 사랑했다. 그러던 중 그는 강직함과 참회에서 늙고 병들어 죽으니, 순이 죽은 후엔 그에게 자식이 없어 족제 청이 있어 뒤를 잇더니 후에 자손이 다시 번성했다."

공방전(孔方傳)[편집]

일명 '공유전(孔有傳)'이라고도 하나 이것은 <공방전>의 잘못이다.

고려 인종 때 임춘이 한문으로 지은 가전. 사람을 돈에 빗대어 의인적 수법으로 쓴 우화로서 권선징악을 목적으로 한 것임. 내용은 공씨 집안의 약전으로, 본래 '孔方'에서의 '孔'은 구멍이요, '方'은 모이니 곧 엽전을 이른 것임. '공방의 조상은 수양산에 숨어 살았으므로 세상에 쓰인 일이 없었고, 아비인 천(泉:貨泉)은 주나라 재상으로서 부세를 맡았다. 방(方)은 한나라 때 벼슬하여 역대를 지냈는데, 그는 명예를 돌보지 않고 재물만 중히 여기던 끝에 원제(元帝) 때 쫓겨났다. 그는 당나라가 일어나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방의 술을 써서 나라의 씀씀이를 편히 했다. 방의 아들에는 윤(輪)이 있었는데 그는 경박하여 세상에 욕을 먹더니 뒤에 수형령(守衡令)이 되었으나 장물죄(臟物罪)로 사형(死刑)되었다."

국선생전(麴先生傳)[편집]

고려 고종 때의 학자 이규보가 지은 가전.

내용은 술을 의인화한 풍자적인 것으로 등장인물이나 지명을 술에 관한 글자나 그 재료인 누룩(麴)을 의인화해 다루었다.

"국성(麴聖)의 할아버지 모(牟)는 주천(酒泉)에서 살았는데 그 아들 차는 곡(穀)씨의 딸을 취하여 국성을 낳았다. 성은 어릴 때부터 너그럽고 총명하여 도잠(陶潛), 유영(劉伶)과 사귀면서 벼슬이 높아져 임금의 총애를 받았고 세상사람들은 그를 국선생이라 불렀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권세를 빙자, 비난의 대상이 된 끝에 드디어 자살하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성은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 뒤 다시 벼슬에 기용되어 공을 세운 바 있으나, 얼마 안 있어 그만두고 고향에서 병으로 죽었다."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편집]

고려 고종 때의 학자 이규보가 지은 가전.

거북을 의인화하여 세상사람들을 징계하고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쓴 우화. 문장은 한문으로 <동문선> 권100에 실려 전함.

이곡[편집]

李穀 (1298-1351)

고려 충렬왕-충정왕 때의 학자. 자는 중부(仲父), 호는 가정(稼亭).

이제현의 문인(門人).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원나라에 유학했고, 1333년(충숙왕 복위 2)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정동행중서성좌우사 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이 되어 원나라 임금에게 건의하여 고려의 처녀 징발을 중지케 했다. 귀국해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원나라 사람들도 외국인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 3대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작품에 가전체 <죽부인전>이 <동문선>에 실려 전하며, 백이정, 우탁(禹倬), 정몽주 등과 함께 경학의 대가로 손꼽힌다. 시호는 문효(文孝), 문집으로는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편집]

고려 말의 학자 이곡(李穀)이 지은 가전. 세상 사람들을 징계하고 가르칠 목적으로 대(竹)를 의인화해서 쓴 것임. 본래 '죽부인'은 여름에 서늘하게 지내기 위해 안고 자는, 대로 만든 등신대(等身大)의 대바구니를 말함.

이첨[편집]

李詹 (1345-1405)

고려 충무왕-조선 태종 때의 문신·문장가.

일찍이 문과에 급제, 우왕 1년에 우헌납(右獻納)이란 벼슬에 올라 권신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 등을 탄핵하다가 10년간 귀양살이를 함. 뒤에 조선 태종 때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하륜(河崙)과 함께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옴. 시호는 문안(文安). 문장과 글씨 등에 뛰어나 하륜과 함께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했고 가전체 설화 <저생전>을 지었다. 문집으로 <쌍매당집(雙梅堂集)>이 있음.

저생전(楮生傳)[편집]

고려 때 문장가 이첨이 지은 가전. 세상 사람들을 경계하고 가르칠 목적으로 종이를 의인화해서 쓴 가전체의 설화.

정시자전(丁侍者傳)[편집]

고려 때 석식영암(釋息影庵)이 지은 가전이다.

내용은 지팡이를 의인화해서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경계한 것임. <동문선> 10권에 전함.

시조의 발생과 형성[편집]

時調-發生-形成

시조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신라 향가의 전통에서 나와 <청산별곡> 등의 고려 장가나 <어부사(漁父詞)> 같은 것이 분장(分章)되면서,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의 등장을 시대 배경으로 하여 발생된 것으로 보아진다.

우리나라 시가의 변천과정 속에서 시조의 발생이 고려 말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시조는 향가·경기체가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시가의 한 형태인데 발생된 이후 7, 8백년 동안 우리 문학의 중요하고도 고유한 문학형태로 내려왔다. 그 음률은 우리 겨레의 가락과 성정(性情)에 맞는 3·4조를 기반으로 하여 초장 3·4·3·4, 중장 3·4·3·4, 종장 3·5·4·3의 3장 45자 내외로 형태를 이루는데 이것은 향가의 다음가는 우리의 단형 서정시 문학으로 독특한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한시 절구(漢詩絶句)와 비슷한 압축된 서정성과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정형적 형태에 있는 것이다. 시조가 형성되기까지의 그 선행된 원류는 신라 때부터 확고한 전통을 유지해 온 향가의 10구체가가 아닌가 한다. 향가의 10구체가는 전 8구(前八句), 후 2구(後 二句)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후 2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阿邪 阿邪 阿邪也 (후구) 아으 彌殺애 맛보을 내 길(道) 닷가 기르리고다(<제망매가>)

아으으 나에 기리샬단 노하디 쁠 慈悲의 큰고(<기천수관음가>)"

등과 같이 시조의 종장(終章) 형식에 통하며, 전 8구는 시조의 초·중장 8구와 대응(對應)한다. 결국 평시조(平時調)의 음수율은 초장 3·4·4·4(3), 중장 3·4·4·4(3), 종장 3·5·4·3 등과 같이 1음보(音步) 3자 내지 4자를 기준으로 한 4음보 3장의 정형적 서정시이다.

시조의 의의[편집]

時調-意義

시조란 우리나라 고유의 시 형태의 하나로, 그 발생에 대하여는 많은 학설이 있다. 한시 절구의 번역에서, 무가(巫歌)에서, 별곡에서, 향가에서, 가사에서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설(定說)이 나오지 않고 있다. 아무튼 시조란 술어는 고려 말부터 불리어 오던 것을 뒤에 조선 영조-숙종 때 이세춘(李世春)이 단가에 새 곡조를 붙여 이를 시조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처음에는 곡조의 이름으로서 불리어지던 것이 후에 그러한 형식인 단가를 시조라 부르게 되었다. 시조는 고려 말에 일어나서 조선 선조 때에는 정철(鄭澈), 윤선도(尹善道)와 같은 대가를 배출시켰으나, 영정시대(英正時代)에는 일반 평민계급에로 옮아가 시조집의 편찬과 함께 평민 시인들의 창작열을 높였다. 그러나 시조 창작은 점차 쇠퇴하여 박효관(朴孝寬), 안민영(安玟英)을 최후로 수그러졌고, 한편 순조 이후 서민계급으로 흘러간 시조는 사설시조(辭說時調)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조를 낳아서 평민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작가와 작품[편집]

作家-作品

시조가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대개 고려 말기이지만

그 원류를 향가에서 찾는다면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대체로 충렬왕대를 중심으로 한 1세기 동안을 시조의 생성기라고 할 수 있으며, 현존하는 이 시대의 작품은 10여 수가 되나 그것을 전적으로 신빙하기에는 의문이 간다. 먼저 그 작가를 살펴보면 이조년(李兆年), 길재(吉再), 이색, 정몽주 등을 비롯하여 원천석(元天錫), 우탁(禹倬), 이존오(李存吾) 등은 고려의 유신으로 몇 편의 시조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고려 일대를 압도한 한문 시문집의 많은 한시부(漢詩賦)보다 오히려 널리 애창되었으니, 그 수효는 적으나 한국 문학사상 주옥편에 속한다.

이조년[편집]

李兆年 (1269-1343)

고려 원종-충혜왕 때의 문신·문인.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化軒)이며, 시호는 문렬(文烈). 일찍이 진사로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음. 원나라 서울 연경(燕京)에 여러 번 내왕했으며 국위를 떨쳤다. 천성이 결백 강직했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다음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 등에 실려 전한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난

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야 잠못 들어 하노라."

단심가(丹心歌)[편집]

고려 말의 학자이며 충신인 정몽주가 지은 시조.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의 마음을 떠 보려고 그를 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하여가(何如歌)>란 시조를 부르자, 이에 끝까지 고려에 충절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답한 시조로서 <청구영언>에 실리어 전함.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 번 고텨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넉시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이것이 한역되어 다음과 같이 전한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하여가(何如歌)[편집]

고려 말 이방원이 지은 시조. <청구영언>에 가사가 전함. 이 시조는 그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려고 잔치를 베풀어 초청해 부른 것이라는데, 정몽주는 <단심가>를 불러 이를 거절했으므로 그는 마침내 자객을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게 했다 함.

"이런달 엇더하리 뎌러한달 어떠하료,

만수산 드렁츩이 얼거진달 엇더하리.

우리도 이갖치 얼거뎌 백년까지 누리리다."

또 조선의 한역가가 <해동악부>에 실려 전함.

"如此亦何如 城隍堂後垣 頹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길재[편집]

吉再 (1353-1419)

고려 조선 때의 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

자는 재부(再父)이며 호는 야은(冶隱). 일찍이 이색, 정몽주, 권근 등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고 성균관박사가 되어 교육에 힘썼다.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감. 조선 건국 후 친교가 있던 세자 방원에 의해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 고향 선산(善山)에서 후진 교육에만 힘썼다. 성리학의 대가로 김숙자,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그 학통을 잇게 했다. 저서에 <야은집> <야은언행십유(冶隱言行拾遺)> <야은속집(冶隱續集)>이 있으며 고려의 옛 서울을 찾아 고려 왕조를 회고한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함.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依舊)로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없내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목은시조(牧隱時調)[편집]

고려 말 삼은의 한 사람인 이색의 시조이다.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여 망국의 슬픔과 자기의 신세를 한 수의 시조로 읊었다. <청구영언>에 다음과 같이 가사가 전함.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내 고대픠엿넌고.

석양(夕陽)에 홀노 셔구셔 갈 곳 몰나하노라."

원천석[편집]

元天錫 (생몰연대 미상)

고려 말의 학자이며 은사(隱士).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고려 말 정계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雉嶽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숨어 사는 한편 이색 등과 교유하면서 시국을 한탄했다. 조선 태종(太宗=芳遠)의 어릴 때의 스승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찾아보고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 작품으로 한시집 2권이 전하며 망국 고려를 회고한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 등에 실려 전함. 또 야사(野史) 6권을 저술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랐다고 한다. 그의 시조

<회고가(懷古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츄초(秋草)ㅣ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뎍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난 객(客)이 눈물계워 하노라."

이존오[편집]

李存吾 (1341-1371)

고려 충혜왕-공민왕 때의 문신이며 지사(志士).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정언(右正言)에 올랐으나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공민왕의 노여움을 샀다. 이색 등의 변호로 극형은 면하고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 뒤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음. 시조 3수가 전하는데, 그 중 신돈의 횡포함을 풍자한 시조 1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룸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톈(中天)에 떠이셔 임의 단니며셔,

구태야 광명한 날빗츨 따라가며 덥나니."

우탁[편집]

禹倬 (1263-1342)

고려 충숙왕 때의 학자.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역동(易東).

일찍이 문과에 급제, 1308년(충선왕 즉위) 감찰규정으로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정을 통하자 이를 극간, 뒤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알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글을 벗하다가 뒤에 성균 제주(成均祭酒)가 되었으며, 벼슬에서 물러났다. 특히 그는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밝았으며, 복서(卜筮)에도 통달했다. 그의 시조 2수가 <청구영언>에 전하는데 그 중 1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새쥐고,

늙난 길 가새로 막고 오난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로 오더라."

최영[편집]

崔瑩 (1316-1388)

고려 말의 명장·충신.일찍이 홍건적과 왜구, 원나라의 침입을 물리쳤고, 벼슬이 팔도 도통사(八道道統師)에 이름. 1388년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왕과 함께 평양에서 군사를 독려하던 중 이성계 등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함으로써 요동 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 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를 맞아 싸우다 패전, 귀양을 갔다가 이어 죽음을 당하니 끝내 그는 고려왕조와 운명을 같이했다. 천성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평생을 가난 속에서 나라만을 위해 충성했다.

그의 시조 1수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함.

"록이샹뎨(綠耳霜蹄) 타지게 먹여 시냇물의 싯겨 타고,

룡천셜악(龍泉雪鍔)을 들게 가라 두러메고,

쟝부의 위국튱절(爲國忠節)을 셰워 볼까 하노라."

포은 모당의 시조(圃隱母堂-時調)[편집]

정몽주의 어머니는 가마귀와 백로(白鷺)에 비겨 아들을 훈계한 시조 1수를 남겼는데, 고려 말의 유일한 여류의 시조로서 일품(逸品)이 아닐 수 없다.

"가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