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삼국사기/권18/광개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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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전기(서기 375~392년)
[편집]원문
- 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儻之志.
- 故國壤王 三年 立爲太子, 八年 王薨 太子卽位.
번역문
- 광개토왕의 휘는 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나면서 웅위로웠고 높고 뛰어난 뜻이 있었다.
- 고국양왕 3년에 태자가 되었고, 8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재위 원년(서기 392년)
[편집]원문
-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
-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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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2년(서기 393년)
[편집]원문
- 二年
-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 創九寺於平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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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았다.
- 평양에 아홉 절을 세웠다.
재위 3년(서기 394년)
[편집]원문
- 三年
-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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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 가을 7월에 백제가 침공해 오자 왕이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깨트리니, 남은 적이 밤에 달아났다.
- 8월에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으니,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재위 4년(서기 395년)
[편집]원문
- 四年
- 秋八月 王與百濟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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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 가을 8월에 왕이 백제와 더불어 패수 위에서 싸워 크게 깨트리니, 8천여 급을 노획하였다.
재위 9년(서기 4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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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年
- 春正月 王遣使入燕朝貢.
- 二月 燕王盛 以我王禮慢 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慕容熙爲前鋒 拔新城南蘇二城 拓地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번역문
- 9년
-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보내 연나라에 들어가 조공하였다.
- 2월에 연왕 성이 우리 왕의 예절이 거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병사 3만을 거느리고 습격하니, 표기대장군 모용희를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 두 성을 함락시키며 7백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기고 돌아갔다.
재위 11년(서기 402년)
[편집]원문
- 十一年
-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번역문
- 11년
- 왕이 병사를 보내 숙군을 공격하니, 연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재위 13년(서기 404년)
[편집]원문
- 十三年
- 冬十一月 出師侵燕
번역문
- 13년
- 겨울 11월에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재위 14년(서기 405년)
[편집]원문
- 十四年
- 春正月 燕王熙來攻遼東城, 且陷 熙命將士, "毋得先登, 俟剗平其城 朕與皇后乘轝而入." 由是 城中得嚴備 卒不克而還.
번역문
- 봄 정월에 연왕 희가 요동성을 공격해 오니, 함락되려 하자 희가 장군과 사졸에 명하길, "먼저 성에 오르지 말라, 그 성을 깎아 평평해지길 기다려 짐이 황후와 더불어 수레를 타고 들어가리라." 이로 말미암아 성 안이 엄히 방비하여 병졸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재위 15년(서기 406년)
[편집]원문
- 十五年
- 秋七月 蝗旱.
- 冬十二月 燕王熙襲契丹 至陘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棄輜重 輕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번역문
- 15년
- 가을 7월에 메뚜기 떼가 날아들고 가뭄이 들었다.
- 겨울 12월에 연왕 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를 두려워하여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치중을 버리고 가벼운 차림의 병졸로 우리를 습격하니, 연군은 3천여 리를 행군하여 병사와 군마가 피로하고 얼어서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으며, 우리 목저성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재위 16년(서기 407년)
[편집]원문
- 十六年
- 春二月 增修宮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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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년
- 봄 2월에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재위 17년(서기 408년)
[편집]원문
- 十七年
- 春三月 遣使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번역문
- 17년
- 봄 3월에 사신을 북연에 보내 종족[5]을 베풀자, 북연왕 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하였다. (운의 조부는 고화로 고구려의 지파이니, 스스로 고양씨의 후예라 일컬어 고로 성을 삼았다. 모용보가 태자가 되자 운을 무예시동궁으로 하였으니, 보가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재위 18년(서기 409년)
[편집]원문
- 十八年
- 夏四月 立王子巨連爲太子.
-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 八月 王南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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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년
- 여름 4월에 왕자 거련을 세워 태자로 하였다.
-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겼다.
- 8월 왕이 남쪽을 순행하였다.
재위 22년(서기 413년)
[편집]원문
- 二十二年
- 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번역문
- 22년
- 겨울 10월 왕이 죽으니, 부르길 광개토왕[6]이라 하였다.
주석
[편집]- ↑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즉위년은 신묘년(서기 391)이지만 삼국사기 연표에는 다음해인 임진년(서기 392)으로 되어있다. 여기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존중하여 따른다.
- ↑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 7월과 대응. '고구려왕 담덕이 병사 4만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공격해 와서 석현 등 10여 성을 함락시키니,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는 나아가 막지 못하여 한수 북쪽의 뭇 부락이 많이 무너졌다.'
- ↑ 광개토왕릉비 1면 7~8행과 대응. '영락 5년은 을미년이다. 왕은 비려가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토벌에 나서서, 부산과 부산을 넘어 염수 위에 이르니, 그 세 부락 6~7백 영을 깨트리고 소와 말과 양 무리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 ↑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 10월과 대응. '고구려가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 ↑ 흔히 '종족의 정'으로 풀이하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 ↑ 광개토왕릉비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왕호우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모두루묘지명에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