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제4편/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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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東扶餘)의 분립(分立)[편집]

1) 解夫婁(해부루)의 東遷(동천)과 解幕漱(해모수)의 일어남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 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신조선이 흉노 모돈 ( 冒頓) 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요, 동 ·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 년경 이니,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전사 ( 前史 ) 에 동 ·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 ( 鯤淵 : 鏡泊湖 경박호 ) 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 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 ( 金蛙 ) 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뒤 얼마만에 상 ( 相 ) 아란불 ( 阿蘭弗 ) 이 왕에게,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 ( 迦葉原 ) 으로 가거라,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고 하더이다.” 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의 말을 쫓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 ( 故都 ) 에는 천제 ( 天帝 ) 의 아들 해모수 ( 解募漱 ) 가 오룡거 ( 五龍車 ) 를 타고,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 ( 熊心山 , 일명 阿斯山 ,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 ) 에 내려와서, 채운 ( 彩雲 ) 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 여일 만에,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 ( 龍光 ) 의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 ( 政事 ) 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제의 아들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마는,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속에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가 남의 집 사생 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 ( 故都 ) 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통털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갓 고구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 ( 鄒牟王 ) 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겨우 해부루 ·해모수 두 대왕이 동 ·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 하였음이 그 하나요,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이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 ( 改撰 ) 한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 ( 相加 ) '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 ( 相 ) 이라 썼으며,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 ( 曷思那 ) '라 쓰지 않고 불경 ( 佛經 ) 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 ( 加葉原 ) 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당시의 제왕 ( 帝王 ) 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 ( 祭司長 ) 이며, 당시의 장상 ( 將相 ) 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 ( 巫師 ) 요, 복사 ( 卜師 ) 였으니, 해부루는 제사장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 ( 降神術 ) 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 ( 相加 ) 였다.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신조선의 습관엔 내우외환 같은건 물론이요,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 ( 삼국지에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하고,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水早不調 五穀不登 輒歸輒於 或 言當易 或言當殺 ) 고 하였다.

천시 ( 天時 ) 나 인사 (人事 ) 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지 오래지 않았으니, 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짧어져서 대단군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해모수는 해부루 와 동족이며 고주몽 ( 高朱蒙 ) 의 아버지다. 삼국유사 왕력편 ( 王歷篇 ) 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 ( 東遷 ) 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걷고 왕위를 도모한 것이고, 부여는 불 곧 도성 ( 都城 ) 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해부루가 동부여라 일컬으매, 해모수는 북부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 하기 위하여 비로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2) 南北曷思·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남북갈사·남북옥저의 두 동부여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갈사나란 무엇인가?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가시라'란 삼림국 ( 森林國 ) 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 ( 曷思國 ) ·가슬라 ( 加瑟羅 ) ·가서라 ( 迦西羅 ) ·아서량 ( 阿西良 ) 등 으로 적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또 혹`가섭원기 ( 迦葉原記 ) '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대각국사 ( 大覺國師 ) 의 삼국사 ( 三國史 ) 에 보인 것이다.

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 ( 沃沮 ) '라고 적었는데,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예 ( 濊 ) 곧 읍루 ( 輯婁 ) 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 ( 濊族 ) 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 ( 北曷思 ) 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 ( 南曷思 ) 라 일컬었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 ( 北沃沮 ) 요, 남갈사는 곧 남옥저 ( 南沃沮 ) 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고사에 남·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 ( 豪民 ) 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 ( 婢妾 ) 을 삼았다고 한다.

해부루가 북 ` 가시라'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 ( 帶素 ) 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에게 패하여 죽고, 아우 모갑 ( 某甲 ) 과 종제 ( 從弟 ) 모을 ( 某 乙 ) 이 나라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 ( 舊都 ) 에 웅거하여 북갈사 ( 北曷思 ) 혹은 남동부여 ( 南東扶餘 ) 라 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a)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 ·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b) 옥저가 곧 갈사 ( 曷思 ) 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c)북동 ·남 동의 두 갈사가 곧 남 ·북의 두 갈사 ( 兩加瑟羅 ) 요,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으로 나누고, d) 강릉 ( 江陵 ) 을 `가시라' --기슬나 ( 加瑟那 ) 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기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흔란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이제 갈사 ( 曷思 ) ·가슬 ( 加瑟) ·가섭 ( 迦葉 ) 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 을 알고,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북 옥저임을 알고,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 ( 南奔 ). '는 말과 , 주류왕 ( 朱留王 ) 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쪽을 쳤다 ( 北伐 ). '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3)北扶餘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 ( 黃龍國 ) 이 고구려 유류왕 ( 備留王 ) 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만일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부사량 ( 扶斯樑 ) 이니,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 ( 三京 )-- 세 왕검성의 하나요, 지금의 소련령 ( 領 ) 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종횡으로 굴곡 ( 屈曲 ) 한 송 ( 松 : 古名 아리라 ) 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대주 ( 大珠 ) ·적옥 ( 未玉 ) 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 ·삵·원숭이·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하며, 성곽 ·궁설의 건축과,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라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신지 ( 神志 ) 라 일컫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풍월 ( 風月 ) 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 ( 詩歌集 ) 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 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 ( 叛 ) 하여 고구려로 돌아가자, 국세가 마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렸다.

고구려의 발흥(勃興)[편집]

1) 鄒牟王(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 ( 鄒牟 : 혹 朱蒙 ) 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과부 소서노 ( 召西奴 ) 의 재산으로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하늘의 알에서 강생 ( 降 生 ) 하였다 자칭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은, `남해에 공을 세우고, 북산에 덕을 쌓았다 ( 立功南海 積德北山 ). ' 하는 찬사를 올렸고, 지나 2 천 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 ( 東漢 ) 의 학자 왕충 ( 王充 ) 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기원전 58 년이 출생한 해요, 기원전 37 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고, 추모 ( 鄒牟 ) 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 경 동 · 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고, 위만과 같은 때 일 것이다.

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 ( 長者 ) 가, 유화 ( 柳花 ) · 훤화 ( 萱花 ) ·위화 ( 葦花 ) 의 세 딸을 두었는데, 다 절세의 미인이요,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 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으므로 유화의 실행이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 ( 優渤水 ) 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 ( 解金輕 ) 에게 바쳤다.

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 ( 天神 ) 의 아들이고, 자기가 아무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고 했다.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어도 보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나,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 로 이에 유화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 ( 鄒牟 ) 라고 하였다.

위서 ( 魏書 ) 에는 추모를 주몽 ( 朱蒙) 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고 풀이하였으며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奔阿〕'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문무왕 ( 文武王 ) 의 조서 ( 詔書 ) 에는 `중모 ( 中牟 ) '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 · 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이는 예어 ( 濊語 )-- 만주족 시대의 말로,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 ( 鄒牟 ) 라고 한다.

금와왕이 아들 7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대소이다.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추모가 19 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그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 월 대제 ( 大祭 ) 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왕은 추모에게 겨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집승이 대소 7 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이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였다.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 ( 禮氏 ) 에게 장기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는 은밀히 오이 ( 烏伊 ) ·마리 ( 摩離 ) ·협부 ( 父 )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부여 ( 卒本扶餘 ) 로 갔는데, 이때 추모의 나이 22 살이었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 ( 召西奴 ) 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 ( 延陀渤 ) 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 ( 庶孫 ) 우태 ( 優台 ) 의 아내가 되어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나이 37 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 ( 扶芬奴 )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 ( 升骨 ) 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가우리'는 이두자 ( 吏讀字 ) 로 고구려 ( 高句麗 ) 라 쓰니, 중경 ( 中京 ) 또는 중국 ( 中 國 ) 이라는 뜻이었다.

졸본부여의 왕 송양 ( 松讓 ) 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빼앗아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부근의 예족 ( 濊族 ) 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오이 ( 烏 伊 ) ·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 ( 太白山 ) 동남쪽의 행인국 ( 荇人國 : 지점 미상 ) 을 토멸하여 성읍 ( 城邑 ) 을 삼고, 부위염 ( 扶慰) 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 <광개토왕비문에, “동 부여의 옛 것이 추모왕의 속민이 되었다 ( 東扶餘 舊是 鄒牟王 屬民 ) ”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킴인 듯 >, 이에 고구려가 섰다. 전사 ( 前史 ) 에 왕왕 송양 ( 松讓 ) 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이상 국집 ( 李相國集 ) 동명왕편 ( 東明王篇 ) 에 인용한 구삼국사 ( 舊三國史 ) 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 ( 沸流王松讓 ) 이라고 하였으니,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기들었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에게 장가 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 ( 備留 ) 요,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 추모왕을 본기 ( 本紀 ) 에 `동명성왕 ( 東明聖王 ) '이라 하였으나, 동명 ( 東明 ) 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한몽'이란신수두 대제 ( 大祭 ) 의 이름 이다.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 ( 尊祀 ) 하므로 한몽 --동명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성왕의 성 ( 聖 ) 은 `주무'의 의역 ( 義譯 ) 이다.

2) 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 ( 儒留王 ) 이 왕위를 잇고, 유류왕 다음 에 그 아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이 왕위를 이었다.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 ( 琉璃明王 ) 유리 ( 類利 ) 이니, 유류 ( 儒留 ) ·유리 ( 琉璃 ) ·유리 ( 類 利 ) 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 ( 世 ) 라는 뜻이고 명 ( 明 ) 이라는 뜻이요,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 大武神王無恤 ) 이니, 무 ( 武 ) · 주류 ( 朱留 ) ·무홀 ( 無恤 ) 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 ( 神 ) 의 뜻인데, 이제 유리 ( 琉璃 ) 와 명 ( 明 ) 은 시호로 쓰고, 유리 ( 類利 ) 는 왕의 이름을 쓰며, 무 ( 武 ) 와 신 ( 神 ) 은 시호로 쓰고, 무홀 ( 無恤 ) 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 ( 琉璃 ) 를 유류 ( 儒留 ) 로, 대무신 ( 大武神 ) 을 대주류 ( 大朱留 ) 로 쓴다.

유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 ( 帶素王 ) 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를 요구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태자는 도절 ( 都切 ) 인데,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둘째 태자는 해명 ( 解明 ) 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 ( 國內 城 )-- 지금의 집안현 ( 輯安縣 ) 으로 서울을 옮기니, 해명이 이를 겁약 ( 怯弱 ) 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북부여왕 (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 ) 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 없음을 조롱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두 태자의 죽음은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 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고구려는 몹시 피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걸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니까 왕자 주류 ( 朱留 : 본기의 無恤 ) 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하고,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이제 노경 ( 老境 ) 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 ( 兵馬 ) 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 ( 馬兵 ) 이고 고구려는 보병 ( 步兵 ) 이니,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 ( 鶴盤嶺 ) 의 골짜기에 복병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3)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 년에 5 만의 군사로 북벌 ( 北伐 ) 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 ( 麻盧 ) 와 칼을 잘 쓰는 괴유 ( 怪由 ) 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번 포위를 뚫고나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 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 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다. 이물림 ( 利勿林 ) 에 이르러서는 전군 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하였다.

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 졌다. 계제 ( 季弟 ) 모갑 ( 某甲 ) 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 ( 南沃沮 ) 로 나와 사냥하고 있는 해두왕 ( 海頭王 ) 을 습격해서 죽이고, 군사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이는 남동부여 ( 南東扶餘 ) 이고, 종제 모을 ( 某乙) 은 고도 ( 故都 ) 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 ( 北東扶餘 ) 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 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역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후한서, 삼국지 등의 옥저전 ( 沃沮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도 북동부여이고, 예전 ( 濊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는 남동부여이다.

4) 大朱留王의 樂良

최씨 ( 崔氏 ) 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일컬었음은 제 3 편 제 4 장에 말하였거니와, 그 끝의 임금 최이 ( 崔理 ) 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때 갈사국 ( 曷思國 : 남동부여 ) 의 왕이 그 손녀를 대주류왕의 후궁으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 ( 好童 ) 이라고 하였다. 호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 최이가 출행 ( 出行 ) 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북국 ( 北國 ) 신왕 ( 神王 ) 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 하고,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호동이 그 아내 최녀 ( 崔女 ) 를 꾀어,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 하고 귀국하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왕후가 적자 ( 嫡子 ) 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렸다.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로 되고 말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대주류왕 즉위 4 년 여름 4 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 ( 曷思王 : 남동부여왕 ) 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즉 위 15 년 여름 4 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그 해 11 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 설혹 대주류왕 4 년 , 남갈사 건국 원년 4 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15 년에는 겨우 11 살의 어린아이니, 11 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 ( 滅國 ) 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11 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 ( 嫡母 ) 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 왕 ( 帶素王 ) 때가 되니,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이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니와, 대주류왕 20 년이 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 伐樂浪滅之 ). '고 하였으니,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 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상에 말한 북부여 ·북동부여 ·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편집]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 ( 百濟本紀 ) 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린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 ( 召西奴女大王 ) 이니 하북 ( 河北 ) 위례성 ( 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 ( 彌鄒忽 : 지금의 仁川 ) 에, 또 한사람은 하남 ( 河南 ) 위례홀 ( 慰禮忽 ) 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 ( 篇 ) 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 년에 하남 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그러면 온조가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아니랴?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남편인 부여사람 우태 ( 優台 ) 이므로, 비류 ·온조의 성도 부여요, 근개루왕 ( 近蓋婁王 ) 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본기에는 비류·온조를 추모 ( 鄒牟 ) 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이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 ( 正宮 ) 으로 대우하고 , 비류·온조 두 아들을 친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 유류 ( 橋留 ) 가 그 어머니 예씨 ( 禮氏 ) 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 예씨가 원후 ( 元后 ) 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 ( 小后 ) 가 되었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 ·은 ·주보 ( 珠寶 ) 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 ( 烏干 ) ·마려 ( 馬黎 ) 등 18 사람을 데라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 ( 箕準 ) 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지 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 ( 濊族 ) 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백제 본기에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낙랑태수 ( 樂浪太守 ) 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 ( 漢郡 ) 이라 하여 낙랑태 수라고 쓴 것이며, 예 ( 濊 ) 라 쓰지 않고 말갈 ( 靺鞨 ) 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 ( 唐 ) 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 ( 古記 ) 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2)召西奴가 죽은 뒤 두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l3 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 · 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 ( 聖德 ) 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 ·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 ( 負兒岳 ) --지금 한양의 북악 ( 北岳 ) 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 · 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 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 위레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 · 서 두 백제가 되었다.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 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그 이듬해 14 년 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l3 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14 년 곧 온조 원년의,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 ( 分漢城民 ). ”고 한 것은 비류 · 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 위례홀은 `오리골' ( 본래는 아리골 ) 이다.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뜻은 알 수 없으나, 그 유래가 또한 오래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 ·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 졌다.

3) 溫祚의 馬韓 襲滅 ( 온조의 마한 습멸 )

백제가 마한의 봉토 ( 封土 ) 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신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 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소서노가 죽은 뒤 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북의 패하 (浿河 ) ---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 州 ) 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 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인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어찌 의리있는 짓이냐? ” 하고 꾸짖었다.

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게,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그 50 여국을 다 토멸하고,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 ( 周勒 ) 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기준 ( 箕準 ) 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 ( 韓氏 ) 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에,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 準後滅絶 馬韓人 復自立爲王 ). ”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 (儒留 ) ·대주류 ( 大朱留 ) 두 대왕과 같은 시대이니,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 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