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제4편/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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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 군대가 고구려에 패퇴한 사실(고구려의 9년 전쟁)[편집]

조선의 남북 여러 나라가 분립하는 판에 지나 한나라 무제(武帝)[1]의 침략이 있었다. 이것은 다만 한때 정치상의 큰 사건일 뿐 아니라, 곧 조선 민족 문화의 소장(消長)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큰 사건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 이외에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하였으며, 지나도 제(齊) ·연 ( 熊 ) ·진 ( 奏 ) 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하고 혹은 침략해왔음은 제 2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잦았거니와, 진 ( 奏 ) 이 망하고 한 ( 漢 ) 이 일어나서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아서 한나라 고조 ( 高祖 ) 가 흉노 모돈 ( 冒頓 ) 을 공격하다가 백등 ( 白登 : 산서성 大同府부근 ) 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 ( 歲幣 ) 를 바치고 황녀 ( 皇女 ) 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등 굴욕적 조약을 맺고, 그 뒤에 그대로 시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 ( 武帝 ) 에 이르렀다. 무제는 야심이 만만한 제왕이라, 백 년 태평한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벌였다.

그런데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이니,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 史記平準書도 같음)에, “무제가 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濊貊朝鮮)을 쳐서 창해(滄海)라는 군(郡)을 설치하였으니, 곧 연(燕)과 제(齊) 지방이 크게 소란해졌다 (武帝卽位數年 彭吳 穿濊貊 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騷然騷動).”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요, 사기 조선열전 (朝鮮列傳)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 좌장군 (左將軍) 순체(筍彘)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四那)을 만들었다(樓船將軍楊僕 左將軍 筍彘遂定朝鮮爲四郡).”라고 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2]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衛氏)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이렇게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는 다시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종래의 사학가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한무제가 위우거 ( 衛右渠 ) 를 토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저희 군현 ( 郡縣 ) 이라 하여 고구려와 9 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 한다.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후한서 ( 後漢書 ), 예전 ( 濊傳 ) 에, “한나라 무제 원삭 ( 元湖 ) 원년에 예의 남려왕 ( 南閭王 ) 등이 모반하여, 우거가 28 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 ( 滄海郡 ) 으로 만들었다 ( 漢武帝元朔元年 滅君南閭等叛 右案率 二十八萬口詣遼東降漢 以其地爲滄海郡 ). ”고 하였고, 한서 본기 ( 本紀 ) 에, “원삭 3 년 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 ( 元朔三年春罷滄海郡 ). ” 고 하였으며, 사기 공손홍전 ( 公孫弘傳 ) 에는, “공손홍이 여러번 간하여 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 ( 朔方 ) 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 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 --- 上乃許之 ). ”고 하였으니, 종래의 학자들이 위 세 가지 책과 앞에 말한 `식화지 ( 食貨志 ) 의 본문을 합쳐, `예맥조선은 예임금 남려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많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 단정이 잘못임이 다음과 같다.

1) 지나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 ( 濊 ) 로 그릇 기록하였음과, 남 ·북 두 동부여가 하나는 지금의 훈춘이요, 또 하나는 지금의 함흥임은 이미 본편 제 2 장에서 서술하였거니와,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 1천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 ( 內地 ) 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음으로 하여 생긴 위설 ( 僞說 ) 이니, 예의 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강릉의 임금이 아니며,

2) 식화지 ( 食貨志 ) 의 본문에 명백히, “무제가 즉위한 지 수년에 팽오 ( 彭吳 ) 가 예맥조선을 쳤다.”고 하였으니, 후한서에 기록된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 년인데, 13 년을 수년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한서 주부언열전 ( 主父偃列傳 ) 의 원광 ( 元光 ) 원년 엄안 ( 嚴安 ) 의 상소에, “지금 예주 ( 濊州 ) 를 공략하여 성읍 ( 城邑 ) 을 설치하고자 한다 ( 今欲--- 略濊州 建治城邑 ). ”고 하였는데, 예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곧 예맥조선 침략을 가리킨 것이요, 성읍을 설치하는 것은 창해의 설치 경영을 가리킨 것이며, 원광 원년, 곧 원삭 원년의 6 년 전에 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으니, 남려의 항복과 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그 6 년 후인 원삭 원년의 일이 아니고,

3)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 년이요, 원삭 3 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 년이니,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 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왕 만전 ( 滿傳 ) 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진번진국 ( 眞番辰國 ) 의 옹알 ( 壅閼 ), 요동 동부도위 ( 東部都慰 ) 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9 년 전쟁의 사실을 빼었으랴?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남려는 위씨 ( 衛氏 ) 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

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는가? 남려는 대개 남동부여,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 ( 濊傳 ) 에 기록된 불내예왕 ( 不耐濊王 ) 에게 시집 보낸 갈사왕이니, 그러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 ( 妻祖 ) 요, 대주류왕은 남려왕의 손자 사위요, 호동은 남려왕의 진외증손 ( 眞外曾孫 ) 이니,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이다.

그러나 호동의 장인인 낙랑의 최이 ( 崔理 ) 도 토멸하는 판에 어찌 처 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남려가 지난날 아버지와 형의 원수로든지, 당장의 압박의 고통으로든지,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 이 없었으랴. 이에 같은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가진 낙랑의 여러 소국 들과 연합해서 몰래 우거에게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으나,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에 항거하지 못하므로, 남려는 우거를 버리고 한 ( 漢 ) 에 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에 통하려면 부득이 위씨 (衛氏)의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 나라의 비밀을 한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허락하지 아니했으므로, 사기 조선 왕만전 (朝鮮 王滿傳)에는, “진번 옆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또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眞番旁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 ”고 하였다.[3]

진번 옆의 여러 나라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남려는 마침내 바닷길로 한에 통하여 사정을 고하니, 야욕으로 가득 찬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 ( 燕齊 )-- 지금의 직예 ( 直匠 ) ·산동 ( 山東 ) 의 군사와 양식을 총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남동부여와 남낙랑 여러 나라를 구원하다가 고구려의 대항이 뜻밖에 강하여 9 년 동안 혈전을 계속하였는데, 한이 여러 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이같이 9 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이 어찌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다 ( 爲中國諱恥 ). ' 하는 것이, 공구 ( 孔丘 ) 의 춘추 ( 春秋 ) 이래,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 ( 宗旨 ) 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삼국지 왕숙전 ( 王蕭傳 ) 에 의하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 ( 景帝 ) 와 무제 ( 武帝 ) 의 잘잘못을 바로 썼더니,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했으므로 효경본기 ( 孝景本記 ) 와 무제본기 ( 武帝本記 ) 를 삭제하였다 .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 뒤에 사마천은 부형 ( 腐刑 : 남자를 去勢하는 형벌 . 宮刑 ) 에 처해졌다.”고 하였으니, 만일 한의 패전을 바로 썼더라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이 빠졌음이 고의일 것이며,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추었으니,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여 마치 조선을 토멸한 듯이 쓴 것도 또한 꺼려함을 피한 것일 것이요,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식화지 ( 食貨志 ) 에는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함을 싫어 하여, 멸 ( 滅 ) 자를 천 ( 穿 ) 자로 고쳤으나,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였음은 사마천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이는 대주류왕,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大武神王 ) 일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는 연대를 줄였기 때문에 한무제와 같은 시대인 대주류왕이 한의 광무 ( 光武 ) 와 같은 시대가 되고, 지나사의 낙랑 기사와 맞추기 위해 대주류왕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 겼다는 거짓 기록을 쓴 것이었다.

한 무제(漢武帝)가 위씨(衛氏)를 쳐서 멸망시킴(위씨조선의 멸망)[편집]

한무제가 9 년이라는 오랫동안의 혈전에 패해 물러가서 그 이후 17 년 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에야 어찌 동방 침략을 잊고 있었으랴. 이에 위씨 ( 衛氏 ) 는 비록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이나 그 왕조 ( 王朝 ) 가 원래 지나족 종자요, 그 장수와 재상들도 대개 한의 망명자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꾀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잠식하는 앞잡이를 만들려고 하는 중에,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어 동부여를 구원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고 하여, 기원전 109 년에 한무제는 사신 섭하 ( 涉河 ) 를 보내서 먼저 한과 동부여를 왕래하는 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여 달라고 우거를 한의 국위 ( 國威 ) 로 워협하고, 금백 ( 金帛 ) 의 이익으로 꾀었으나 우거가 완강하게 쫓지 않았다.

섭하가 한무제의 비밀 명령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우거가 보낸 전송하는 사자 우거의 부왕 ( 副王 ) 을 쩔러 중이고 달아나, 한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다고 큰소리를 하니, 한무제는 실상 딴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통 동부도위 ( 東部都慰 ) 에 임명하였다.

섭하가 임지 ( 任地 ) 에 이른지 오래지 아니하여, 우거가 전의 일 ( 副王의 피살 ) 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서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무제는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좌장군 ( 左將軍 ) 순체 ( 筍체 ) 는 보병 5 만으로 요수 ( 遙水 ) 를 건너 패수로 향하고, 누선장군 ( 樓船將軍 ) 양복 ( 楊僕 ) 은 병선 군사 7 천으로 발해를 건너 열수 ( 列水 ) 로 들어가서 우거의 서울 왕검성 ( 王儉城 : 조선 고대 세 왕검성의 하나 ) 을 좌우에서 협격 (挾擊 ) 하게 하였는데, 양복은 열구 ( 列口 ) 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크게 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남은 군사를 거두어 자신을 보호하고, 순체는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위씨의 군사가 항거해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한무제는 두 장수가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 위산 ( 衛山 ) 을 보내, 금백 ( 金帛 ) 을 뿌려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시켰다. 위씨의 나라는 원래가 조선과 지나의 도둑들의 집단이었으므로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매우 치열하였고, 그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화평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려 서로 다투었는데, 한의 금백이 비밀히 뿌려지자 화평을 주장하는 파가 갑자기 강해져서 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의 군중 ( 軍中 ) 에 보내서 한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을 바치기로 하는 조약을 맺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거는, “태자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여라.”고 하였고, 한의 장수는, “태자가 1 만의 군 사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티어 교섭이 깨어졌다.

그러나 그 돈과 비단이 효력을 나타내서 우거의 재상 노인 ( 路人 ) · 한음 ( 韓陰 ) · 삼 ( 參 ) 과 대장 왕겹 ( 王겹 ) 이 몰래 한에 내정을 알리고 전쟁에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의 장수 순체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치고, 양복은 산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쪽을 쳤다. 한 무제는 교섭이 결렬되자 위산 ( 衛山 ) 을 죄주어 참형에 처하고, 제남태수 ( 濟南太守 ) 공손수 ( 公孫遂 ) 로 사신을 삼아서 전권 ( 全權 ) 을 주어 두 장수를 감독하는 동시에, 더욱 많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게 하였다.

이때에 순체와 양복이 항복하기를 다투어 서로 불화해지니,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중에 가두고, 순체로 하여 금 양복의 군사를 합쳐 싸우게 하고, 한무제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무제는, “돈과 비단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 ( 君臣 ) 의 항복을 받지 못 했다.” 하고 크게 노하여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오래지 않아 한음 · 왕 겹 · 노인 등의 뇌물받은 일이 탄로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한음 · 왕겹 두 사람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삼 ( 參 ) 이 우거를 암살하고,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우거의 대신 성기 ( 成己 ) 가 삼을 치니, 우거의 왕자 장 ( 長 ) 이 삼에게 붙어 노인의 아들 최 ( 最 ) 와 힘을 합하여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항복해서 위씨가 이에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 · 임둔 · 현도 · 낙랑의 네 군을 만들었다.

이때의 사실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할 뿐인데, 거기에는 한 이 돈과 비단을 위씨의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사마천이 무제 본기 ( 無帝本紀 ) 의 화 ( 福 : 앞절에 보 임 ) 로 부형 ( 腐刑 ) 을 당하고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기록하지 못한 일이 있어, 바로 쓰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이 전쟁에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글 가운데 뚜렷이 보이니, 이를테면, “위만은 병위 ( 兵威 ) 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 ( 滿 得以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 ”고 하여 위만이 병위와 재물 두 가지로 건국을 성취하였음을 기록한 것은 은근하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하였음을 비웃고 꼬집은 것이다.

`위산을 보내 병위로써 우거를 타일렀다 ( 遺衛山 因兵威 往諭右渠 ). '고 하여 `병위' 두 자만 쓰고 `재물' 두 자는 빼었으나,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후원병도 가지 아니하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의 군사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이는 곧 윗글의 `병위 ·재물' 넉 자를 이어받아, 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한무제가 재물만 쓰고 성공치 못함에 노음을 표시한 것이고, 위씨가 멸망한 뒤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침형당하고 하나는 파면되었는데, 봉후 ( 封候 ) 의 상을 받은 자는 도리어 위씨의 반역신인 노인 ( 路人 ) 의 아들 최와 왕겹 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대(對) 한(漢) 관계[편집]

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 ·임둔 ·현도 ·낙랑 네 군 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 사군의 위치 문제는 삼한 ( 三韓 ) 연혁의 쟁론 에 못잖은 조선사상 큰 쟁론이 되어왔다.

만반한 ·패수 ·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만주 해성 개평 동지 ( 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자세히 설명했음 ) 일 뿐 아니라, 당시에 지금 의 개원 ( 開原 ) 이북은 북부여국 (北扶餘國 ) 이고, 지금의 흥경 ( 興京 ) 이 동은 고구려이고,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고,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이상 네 나라 이외에서 한의 사군 을 찾아야 할 것이므로, 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 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이설 ( 異說 ) 이 백출 ( 百出 ) 함은 대개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원인에 의한 것이다.

첫째는 지명의 같고 다른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패수 ·낙랑 등은 다 `펴라'로읽을 것으로서,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라는 강이고, 지금의 평양은 당시의 `펴라'라는 서울이니, 강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한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 ( 淸州 ) `까치내'라는 물 옆에 `까치내'라는 마을이 있는 것처럼 `펴라'라는 강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라고 한 것이요, 패수 ( 浿水 ) 의 ' 패 ( 浿 ) 는 `펴라'의 `펴'의 음을 취하고, 수 ( 水 ) 는 `펴라'의 `라'의 음 을 취하여 `펴라'로 읽은 것이다. 그 밖에 낙랑·평양 ·평나 ( 平那 ) · 백아강 ( 百牙岡 ) 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다. 그 해석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토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가끔 신 · 말 두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 을 대신하였으니, 지금의 해성 ( 海城 ) 헌우란의 본래 이름이 `알티' ( 혹 安地 혹 安市라 한 것 ) 인데, 이것을 고쳐 패수라 하였고,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 ( 四郡 ) 이전의 옛 일을 설하였으므로, “한이 일어나 물러나서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退以浿水爲界 ). ”느니 , “위만--- 동으로 달아나 새외 ( 塞外 ) 로 나가서 패수를 건넜다 ( 滿---東走出塞 漢浿水 ). ”느니 하였으며, 진번 ( 員畵 ) 이 비록 신 · 불 두 조선을 합쳐 일컫는 것이지마는, 한은 이를 차지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 ( 假定 : 아래에 자세히 말함 ) 하였다. 사기의, “처음에 전연 ( 全燕 ) 때 일찍이 진번조선을 약취 ( 略取 ) 하여 예속시 켰다 ( 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 ”고 하고, “위만이 잠시 진번조선을 복속시켰다 ( 滿---稍役屬眞番朝鮮 ). ”고 한 진번조선은 신 · 불 두 조선을 가리킨 것이지마는, “진번 · 임둔이 다 와서 복속하였다 ( 眞番臨屯 皆來服屬 ). ”고 하고,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다 ( 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 ”고 한 진번은 다 사군의 하나인 진번을 가려킨 것으로써, 또한 나중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 ( 故事 ) 를 설한 것이다. 마치 을지문덕 이후에 살수 ( 薩水 ) 의 명칭이 청천강 ( 淸川江 ) 이 되었으니, 을지문덕 당시에는 청천강이라는 이름이 없었지마는 우리가,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 (隨 ) 나라 군사를 깨뜨렸다.”고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이름으로 아는 동시에, 헌우란 패수, 대동강 패수의 두 패수와 두 나라의 이름인 진번과 한 군 ( 郡 ) 의 이름인 진번의 두 진번을 혼동하여 설하였다.

둘째는 기록의 진위를 잘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서 본기 ( 本紀 ) 무제 ( 武帝 ) 원봉 ( 元封 ) 3 년 진번 · 임둔의 주 ( 註 ) 에 `무릉서 ( 茂陵書 ) 에 진번의 군치 ( 郡治 ) 삽현 ( 삽縣 ) 은 장안 ( 長安 ) 에서 7,640 리 임둔의 군치 동이현 ( 東이縣 ) 은 장안에서 6,138 리 ( 茂陵書 眞番郡治 삽縣 去長安 七千六百四十里 - - -臨屯郡治 東이縣、 去長安 六千 一百 三十 八 里 ). '라 했는데, 무릉서는 무릉사람 사마상여 ( 司馬相如) 의 저작이라 하나, 사기 사마상여전에, “상여가 죽고 5 년에야 천자가 비로 소 후토 (后土 ) 를 제사지냈다 ( 相如旣卒五歲 天子始祭后土 ) · ” 하고, 사기집해 ( 史記集解 ) 에는, “원정 ( 元鼎 ) 4 년 비로소 후토를 세웠다 ( 元鼎四年---始立后土 ) ·”고 하였는데, 원정 4 년은 기원전 113 년이요,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 그 5 년 전인 원수 ( 元狩 ) 6 년 ( 기원전 117 년 ) 이니, 상여는 원봉 ( 元封 ) 3 년 ( 기원전 l08 년 ) 진번 · 임둔군을 설치한 해보다 10 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 10 년 전에 이미 죽은 상여가 어찌 l0 년 후의 두 군의 위치를 말할 수 있었으랴. 그러니 무릉서가 위서 ( 僞書 ) 인 동시에 그 글 가운데 진번 · 임둔 운운한 것은 위증 ( 鴻證 ) 임이 의심없으며, 또한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 ( 郡縣志 ) 이외에 따로 현도와 낙랑 두 군지 ( 郡志 ) 가 있으므로, 이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도 · 낙랑 두 군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지마는, 위략의 만 반한이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문 · 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 군 번한현 ( 番汗縣 ) 의 패수 (浿水 ) 임이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지리지의 현도 · 낙랑 운운한 것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의심없는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매양 한서 본기의 진번, 임둔의 주나 지리지의 낙랑· 현도 두 군지를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글로 그릇 믿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 ( 考據 ) 가 비록 많으나, 하나도 그 정곡 ( 正鵠 ) 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군은 원래 땅 위에 구획을 그은 것이 아니고 종이 위에 그린 일종의 가정 ( 假定 ) 이니, 말하자면 고구려를 토멸하면 진번군을 만들리라, 북동부여 --- 북옥저 를 토멸하면 현도군을 만들리라, 남동부여 ---남옥저를 토멸하면 임둔군을 만들리라, 낙랑국을 토멸하면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인 것이고, 실현된 것이 아니다. 한무제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위의 여러 곳에 대하여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낙랑과 두 동부여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있으므로 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했을 것이고, 고구려는 또 전번에 대주류왕이 승전한 기세로 한과 결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전쟁이 대개 기원전 108 년쯤, 곧 위씨가 멸망한 해에 비롯하여 기원전 82 년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한이 패하여 사군 실현의 희망이 아주 끊어졌으므로 진번 · 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현 도 · 낙랑 두 군은 요동군 안에다 붙여서 설치함에 이르렀다.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폐지했다고 하였을 뿐이고,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말은 없으나, 후한서 예전 ( 滅傳 ) 에, “소제 ( 昭帝 ) 가 진번 · 임둔을 폐지하여 낙랑 · 현도에 합쳤다 ( 昭帝罷眞番臨屯 以井樂浪玄토 ). ”고 하였음을 보면, 임둔군도 진번군과 한때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

후한서 예전에는 현도를 구려 ( 句麗 : 한의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 ) 로 옮겼다고 하였고, 삼국지 옥저전 (沃沮傳 ) 에는 처음에 옥저로 현도성 을 삼았다가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 ( 不耐歲王 ) 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랑왕을 가리킨 것이니, 두 동부여와 낙랑국은 다 당시에 독립된 왕국이다. 그렇다면 현도성이 옥저,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다만 북동부여로 현도를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비로소 요동---지금의 봉천성성 ( 奉天省城 ) 에 현도군을 붙이기로 설치한 것이고,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붙이기로 설치하였을 것인데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으나, 대개 지금의 해성 ( 海城 ) 등지일 것이다.

어찌하여 진번 · 엄둔을 폐지하는 동시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였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곧 앞서 말한 낙랑국과 남동 부여국이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여 한이 패해 물러간 뒤에도 두 나라가, 오히려 한에 사자를 보내 몰래 통하고 상민 ( 商民 ) 이 왕래하여 물자를 서로 사고 팔았으므로 한이 요동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여 두 나라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혹은 고구려와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이것은 한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고, 고구려는 매양 두 나라의 한과 통하는 증적 ( 證跡 ) 을 알아내면 반드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는 고구려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니, 수백 년 동안 두 나라로 인하여, 고구려의 한에 대한 진취 ( 進取 ) 를 방해하였다. 이 책에서는 두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랑 ( 南樂浪 ) 이라 하고 한의 요동 낙랑군은 북낙랑 ( 北樂浪 ) 이라 하거니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 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태수의 세력이 동방을 웅시 ( 雄視 ) 하여 그 형세가 한 나라 왕과 같으므로 나라 또는 왕이라 일컬었다고 단언 ( 斷言 ) 하였으나, 고구려 와 경계가 닿은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현도태수를 현도국왕이라 일컽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 낙랑국 왕이라 일컬었으랴? 그것이 억설임이 의심없다.

이즘 일본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 ( 漢代 ) 연호를 새긴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쪽 기슭을 위씨의 옛 서울 곧 뒤의 낙랑의 군치 ( 郡治 ) 라고 주장하지마는 이러한 그릇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과의 싸움에 이겼을 때 노획한 것일 것이요, 이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 군치임을 단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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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기원전 156년 6월 30일 ~ 기원전 87년 3월 29일)은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이다.
  2.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遣樓船將軍楊仆 [...] 左將軍荀彘出遼東 [...] 以故遂定朝鮮,為四郡。”
  3.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真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