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三國遺事 卷第一 1512年 奎章閣本.pdf/72: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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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8일 (수) 04:39 기준 최신판
百官迎於屈歇驛。王與親弟寶海迎於南郊。入闕設宴。大赦國內。冊其妻為國大夫人。以其女子為美海公夫人。議者曰。昔漢臣周苛在榮陽。為楚兵所虜。項羽謂周苛曰。汝為我臣。封為萬祿侯。周苛罵而不屈。為楚王所殺。堤上之忠烈。無怪於周苛矣。初堤上之發去也。夫人聞之追不及。及至望德寺門南。沙上放臥長號。因名其沙曰長沙。親戚二人。扶腋將還。夫人舒腳。坐不起。名其地曰伐知旨。久後夫人不勝其慕。率三娘子上鴟述嶺。望倭國痛哭而終。仍為鴟述神母。今祠堂存焉 |
백관들에게 명하여 미해를 굴헐역(屈歇驛)에 나가서 맞게 했다. 왕은 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南郊)에 나가서 친히 미해를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죄수를 풀어 주었다. 또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하고, 그의 딸은 미해공의 부인을 삼았다. 이때 의론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옛날에 한나라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 땅에 있다가 초(楚)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다. 이때 항우(項羽)는 주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 신하 노릇을 한다면 만호후(萬戶侯)를 주겠다’했다. 그러나 주가는 항우를 꾸짖고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번 제상의 죽음은 주가만 못하지 않다.”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사장(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래 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祠堂)이 있다. |
第十八實聖王 |
제18대 실성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