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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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때 문제를 일으킨 영애의 죽음도 이젠 벌써 입에 담는 사람도 없게 되었다. 목 메고 죽은 영애의 시체가 갓 발견되었을 때는 우리들 가운데 꽤 말이 많았었다.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사내든 여편네든) 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바치는 것을 거반 불명예라고까지 생각하던 우리들에게는 영애의 죽음은 참으로 의외였었고 기적이라 하여도 과한 말이 아니었다.

「영애가 죽었다.」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저승에서 해로한다.」

우리들 가운데는 여러 가지의 비웃음을 띤 말썽이 일어났다. 그러나 과연 영애는 남편 그리움에 참지 못하여 자살을 하였나?

무론 그의 죽은 곳이 경주(慶州) 어느 촌, 남편이 자라난 집, 다 거칠은 터 가운데였었고 그의 목을 맨 것이 그 당시에 한때도 그의 허리에서 떠나 보지 않은 죽은 남편의 허리띠이매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당연할 테지. 더욱더 영애가 죽은 남편을 그렇게도 사모하던 모양을 본 우리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영애의 죽은 날이 남편이 죽은 꼭 사년째 되는 날이었으니까, 우리가 다르게 해석을 하였다 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게다.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즈음 발견한 영애의 유서(遺書)라 하여도 좋을 만한 종이에 의지하면, 그의 죽음에는 한 막의 비극이 있었다. 무론 그 비극도 남편을 사모하는 너무 극진함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지만, 그것은 참으로 잔혹한 비극이었다.

그늘에 피었던 꽃─ 가련한 영애의 주검을 덮은 그 가엾은 휘장은 무엇이었던고? 나는 이에 영애의 마지막 글을 모두 발표하여 한때 우리를 놀라게 한 영애의 죽음의 모든 비밀을 들춰내려 한다.

〈영애의 글〉

내가 그와 결혼한 것은 사년 전, 내가 열여섯 살 나는 해 일이었다. 부모 형제 친척이라는 하나도 없는 나는 그래도 어떤 고마운 이의 덕에, 고등 여학교를 무사히 졸업은 하였다. 그리고 어떤 회사 여사무원이라도 지원하여 살아갈 길을 도모하려고 주저할 때에, K씨의 주선으로 그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특별히 그리운 친척이라는 것을 가지지 못한 나는 마음 남길 것 없이, 게다가 자활(自活)이라는 커다란 어려운 문제를 앞에 놓았던 때라, 두 말 없이 그에게 시집을 갔다.

「선생」이라 하는 사내는 많이 보았다. 「친구의 오빠」라 하는 사내도 여럿 보았다. 지나간 어린 해의 흐릿 한 기억을 돌아보면, 「아버지」다 하는 사내도 아직 머리 한편 구석에 남아 있다. 그러나 「남편」이라 하는 사내는? 갓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난 세상 경험 없는 어린 머리에 이와 같은 호기심을 채워 가지고 시집을 갔다. 그러나 별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라 하면 오빠라 하면, 혹은 제일 가까운 친구라 하면 그뿐이었었다.

그는 그때에 스물네 살, 나는 한창 나이었다. 경주 어느 곳 이전 양반의 아들이라 하며, 부모 친척은 다 없고 배다른 아우가 부산 회사의 사무원으로 (그것도 편지 거래도 서로 없는) 있을 뿐, 역시 나와 같은 외로운 몸이었다. 다만 나와 다른 점은 그에게는 풍부한 재산이 있는 것뿐이었다.

내가 그를 알기는 여러 해 전부터였다. 학교에 다닐 때에 혹은 음악회 혹은 강연회를 우리가 열 때마다 프로그램이나 입장권을 인쇄하러 K 인쇄회사에 가면, 거기 제판실에 팔을 걸어뜨리고 앉아서 칼로 만날 무엇을 긁고 있는 기사(技師) S가 그이였다. 그러므로 K씨가 S는 상당히 재산이 있달 때에 나는 놀랐다.

「그가 내 남편이 된다!」

나는 그에게 가기 전에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여 보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었다. 제판실에서 구리를 구부리고 아연 부스러기를 긁고 있던 기사와 「영애의 남편」이라 하는 이름과는 너무 간격이 있었다. 게다가 부자(富者)라는 대명사가 하나 더 붙을 때는 믿을 수 없는 듯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집을 가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혼식장에서 여러 벗들에게 둘리워서 그의 집으로 오매, 집에는 벌써 벗 몇 사람이 먼저 와서 (주인 없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한 번씩 웃으면서 둘러본 그는 내 귀에 입을 대고 이렇게 소근거렸다.

『난 저 방에 가 있을 테-ㄴ데, 누가 물어보면 모른다고만 그래 주.』

나는 나를 십 년 전부터 그 지어미와 같이 대하는 그의 태도에 놀라서 눈이 둥그래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는 두거덕두거덕 저편으로 가 버렸다.

나는 한 쾌감과 불쾌를 깨달았다. 벌써부터 주부(主婦)로서의 한 권리를 맡겨 주는 그에게 대한 한 가벼운 쾌감과 신혼이라 하는 (꿈과 같이 즐거운) 것을 온전히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한 그의 태도에 한 미움에 가까운 불쾌를 깨달았다.

날은 지났다.

처음에는 꽤 많았던 부끄러움도 차차 없어지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그와 차차 가까워졌다. 나는 그를 아버지로 공경하고 오라비로 사랑하였다. 그의 일거일동은 모두 나에게는 추상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는 모두 훌륭한 말이었다. 이렇게 망신하는 나에게도, 그에게도 좋다고 생각못할 두 가지의 버릇이 있었다.

첫째는 끝없는 술이었다.

그의 벗들은 어떤 계급의 사람인지 처음은 나에게는 해석할 수가 없었다. 결혼한 뒤에 얼마 안 하여 어떤 날 저녁이었다. 할멈과 함께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있을 때에, 그의 거처실에서 「삿쉬」를 덕걱덕걱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써 그가 돌아왔나 하고 빨리 그 방으로 가서,

『덥지요?』

하면서 들어섰다.

『네, 덥습니다. S군 아직 안 들어왔어요?』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덤비는 그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잠깐 본 S의 벗이었다. 그 사람은 털썩 주인도 없는 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까 왔다가 또 나가셨어요』

대답은 하였으나 부끄럽고 무안하여 그만 그 방에서 뛰쳐나왔다. 밤에 S에게 이 이야기를 하매, 그는 다만 웃고 있었다.

그의 벗들이 대개 이런 사람이매, 아무런 일도 꺼리는 것이 없었다. 밤중에라도 찾아와서는 술을 먹기 시작하고, 처음에 식당에서 먹기 시작하던 것이 차차 거처실까지 옮아서 지껄이며, 새벽 두 시 세 시까지는 보통이고, 밤을 온전히 새우는 일도 적지 않았다.

또 한 가지는, 그의 생활은 너무 규칙이 없다 하는 것이었다. 그는 혼인한 이튿날부터도 여전히 회사에 출근하였다. 그러나 낮 열두 시 한 시, 심한 때는 네 시까지 잘 때도 있는 그에게는 출근하는 날과 안 하는 날이 거반 같았다. 어떤 날은 온전히 침대에서 내려 보지 못한 날까지 있었다. 그의 무규칙은 참으로 철저적이었었다.

어떤 일요일이었다. 열두 시쯤 그의 벗 몇 사람이 찾아왔지만, 그 전날 밤을 세운 그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이층 침실에 가서 그를 흔들어 깨워 벗의 온 것을 알게 하였다. 그는 눈을 번쩍 떴으나 돌아누우면서 또다시 잠이 들었다. 하릴없이 잠깐 서서 기다리다가 나는 또다시 그를 깨웠다.

『손님들 오셨어요.』

『응? 누구누구?』

『늘 오시는 그이들이오.』

『앉아 기다리라구, 저─ 술 좀 내 놓구. 에, 졸음 와』

할 뿐 그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아래로 내려와서 손님들에게는 술을 내놓은 뒤에, 나는 아까 하던 바느질을 계속하여 하였다. 이리하여 바느질에 정신이 팔려서 한 시간쯤 앉아 있다가 다시 식당으로 가서 들여다 보매, 그는 아직 내려오지 않고 손님들끼리만 술을 먹고 있었다. 나는 가만가만 침실로 올라가서 문을 열고 보매, 그는 언제 일어났는지 침실에는 없었다. 변소에 가 있나 하고, 거기 가서「노크」하여 보았지만 거기도 없었다. 이상하다 하고 이방 저방 찾아 보았지만, 아무 방에도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의 실험실로 가서 여기나 있나 하고 두드리니까 좀 있더니 덜걱 하고 쇠를 여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머리만 문밖으로 쑥 나왔다.

『왜 그러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손님들이 오셨어요.』

라고 내가 대답하니까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글쎄, 나두 알아!』

하고는 다시 문을 닫고 채워버렸다.

나는 큰 죄라도 지은 것같이 후덕덕 놀랐다. 그는 자기가 실험실에 있을 동안은 남이 가까이 오는 것을 절대로 금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껏 그에게 온 이래 이것을 지켜왔다. 그러나 이날은 웬걸, 이 방에야 있으려는 안심이 있었기에 이런 서투른 일을 하여 그를 성나게 하였다. 내게는 그가 성난 것같이 무서운 일이 다시 없었다. 웬만한 일에는 그는 성을 안 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힘없이 발을 옮겨서 구름다리를 내려 왔다. 그때에 그의 벗의 한 사람이 나를 찾았다.

『S군 어디 있어요?』

『아직 주무시는 모양이에요.』

『침실엔 없는데요.』

『글쎄요.』

할 뿐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한 반 시나 더 있다가 그는 겨우 내려와서 친구들 틈에 끼어 앉았다. 그들은 벌써 꽤 취하여서 처음에는 그가 내려온 것까지 모른 모양이다. 좀 뒤에야 T씨라 하는 손님의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자네─ S, 언제 왔나?』

『와? 내가 내 집에 있는데 오기는 어디서 와?』

『아직껏 어디 있었냐 말이야?』

『집에 있었지.』

『어느 방에?』

『실험실에.』

『손님들 와 계신데 내려오지두 않구 제 일만 보는 그런 무례한 일이 어디 있어?』

『주인 없는 방에서 술 먹고 주정하는 무례보다는 나을 테지.』

『무례? 하하하하! 한 잔 받게』

이와 같이 규칙 없는 생활을 하고 거의 「불량 청년」이라 하여도 옳을 삶을 살아가며, 어떤 때는 친구들까지 무시하는 그가, 친구들에게 존경을 받고, 사장까지 눈 아래 굽어보는 그가 회사의 귀여움을 받고, 그가 없는 뒤에는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이 그의 죽음을 슬퍼함은 어떤 까닭이었던고─

그가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은 특별히 시간이 없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들어가는 일이 없지 않았다. 출근하려고 옷을 입다가도 생각나면 후덕덕 뛰어 들어 간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동안은 저녁 때가 되었든 친한 벗이 왔든, 알지도 못하고 있다. 알게 하지도 못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없기까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의 장례를 지낼 때에 그의 벗 Y씨가 읽는 조문으로써 겨우 짐작은 하였지만...

그에게로 간 뒤에 얼만 되지 아니하여 어떤 날, 저녁을 먹을 때에 나는 그에게 그것이 무엇인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에 그는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난 당신의 바느질이나 동자에 간섭 안 합니다. 당신이 음식을 짓거나 바느질을 할 때에 내가 지켜서서 간섭하면 당신은 시끄럽지 않겠소? 당신은 그저 당신의 길을 걸어 나가오. 언제든 알 때가 있을테니까……』

어떤 날 좋은 밤, 퍼─취에서 그는 담배를 붙여 물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재미있는 그의 경험을 꺼내었다. 그는 자기의 경험 같은 것은 잘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떤 기회로 그것이 나오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이야기하여 나아가는 중에 질문을 하면, 그것은 극히 간단한 (외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도 대단히 시끄러워하는 사람이었다. 이 버릇을 잘 알았건만 그의 이야기가 자기의 연구에 미친 때에 나는 무심중 또 그 연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물어보았다. 그는 이때도 담배를 휙 내어 던지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해도 다 간 섣달 그믐께, 우리가 저녁을 먹고 거처실에서 그는 신문을 보고, 나는 그의 어버─쉣트를 뜨고 있을 때에, 어떤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그의 시골 있는 벗으로서 우리가 결혼한 뒤에는 처음으로 온 손님이었다. 특별히 인사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그들은 첫 번부터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무얼 하러 올라왔나?』

『무얼 하러? 자네 결혼했다기에 축하하러 왔네.』

『결혼한 뒤 반년이나 넘어서 축하가 어디 있어?』

『좌우간 축하하네.』

손님은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푸레젠트나 가지고 왔나?』

『푸레젠트 대신으로 자네 집에 사나흘 묵겠네.』

『우리 집에?』

『시끄러운가?』

『괴롭살스러우네.』

『좌우간 묵어 주지. 그런데 자네 하던 일은 어찌 되었나?』

농담으로 시작된 그들의 이야기는 그의 연구에까지 미쳤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하던 일? 음, 한 번은 성공했는데,─ 내버리구 말았네.』

『역시 마음대로 안 돼서…… 지금 것에 비해서는 시간으로는 이십분의 일─ 자네 말로 하자면 한 더즌 시간 분의 1루 감할 수가 있지만, 비용이 지금 것과 그리 틀리지 않게 먹어야겠거든……』

『됐구만! 또 한 번 축하하세. 비용 같은 거야 암만 먹든 시간만 경제되었으면 필경 비용두 한 더즌 분의 1 감하는 셈이 아닌가?』

『농담 말게. 외려 시간이 둘째 문제고, 첫째로 비용을 감해야겠네.』

『그까짓 거야……』

『그까짓 거? 지금 세상은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세상이야!』

『자네가 농담이네.』

『농담? 사실 나도 한 달에 이백마흔 시간을 K인쇄회사에 백 원이라는 돈에 팔구 있네. 한 시간을 사십여 전(錢)식에……』

『그거야─ 다시 말하자면 빌리는 게 아닌가?』

『빌리단? 누구한테? 내가 인쇄소에 백원을 주면 내게 이백사십여 시간의 수명을 도로 주겠나?』

『에 시끄러워! 전당이네, 전당이야!』

『전당? 자넨 그 상습자(常習者)니까 전당밖에 모르나?』

이 말을 들은 손님은 힐끗 나를 보았다.

『전에 동경(東京) 있을 땐 그랬지만……』

『지금은 안 그러나? 작년 올라왔을 때도 명치정(明治町)……』

『시끄러워!』

손님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벌떡 일어섰다.

『앉게 앉아! 좌우간 난 배금종(拜金宗)이니까, 나같은 사람에게 만족을 주려면 비용과 시간, 두 가지를 절약하게 되지 않으면 안 돼!』

『역행(逆行)인가?』

『무엇에?』

손님은 대답 없이 담배를 붙여 물었다.

『자네 말은 시대에 거스른단 말이지? 그런 피상적 관찰(皮相的觀察)은 그만두게. 누가 시대사조(時代思潮)에 거슬러 가나. 유산자(有産者)가 자본주의자(資本主義者)인 것은 당연하지.』

손님은 담배를 피우면서 씩씩 웃고 있었다.

『자네 이런 말 아나? 옛적에 두 원수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가만 재판을…… 가만 있게, 다 잊었네. 좌우간 간단히 말하자면 무슨 일로─ㄴ가 해서 재판을 했는데, 판결에…… A의 청구는 응할 테구, B에게는 A의 청구에 배(倍)해서 응하겠다구, 그랬다구. 그때에 만약 A가 자기께 몇천만 원 혹은 몇억 원을 청구했으면 오죽 좋겠나! 그러나 생각해 보니까 제 원수인 B에게는 제 곱, 자기가 천만 원을 청구하면 B에게는 이천 만 원이 가겠거든. 그래서 마침내 A는 제 눈깔을 하나 뽑아 달라구 그랬다고. 그래서 A는 외눈깔이 되고, B는 봉사가 됐다나. 저는 그 경우에 혹은 그 경우보다 나쁜 경우에 있어도 좋으나, 저보다 좋은 경우에 있는 사람은 기어코 저와 같은 레벨 상의 경우까지 끌어 내리는 것, 시기네, 시기야!』

『시기야 누구게든 있지, 없나?』

『그렇지! 자네 시골 마누라 같은 사람은 그 최대 권위지?』

『또 시작했다. 좌우간 자네는 지금 평안한 지경에 있기에 그런 소릴 하지, 무산자(無産者)가 되어 보게.』

『되면 난 한 초(秒)를 유예치 않고 공산주의로 뛰어가겠네.』

『에고이스트인가?』

『또?』

『그럼 에고이스트지. 외려 일어(日語)로 말하자면 ごつがふ(我執)주의자일 테지. 노동 문제니 무어니 해두 다 ごつがふ 주의가 아닌가? 세계 제일의 노동국 아메리카가 왜 노동 문제가 안 일어나나 하면, 그 나라는 노동자를 우대한다는 한 마디로 끝날 테지. 자네루 봐도, 자넨 왜 여관에 들지 않고 나한테 왔나?』

『하하하하! ごつがふ주의에. 자네 집에 묵으면 여관 비용이 안 삭거든……』

『또.』

『또?』

『그럼 또 좋은 술이 있구……』

『그렇지, 자네겐 어느 레스트란보다도 좋은 술이 있으니깐.』

『그것 보게. 그것두 돈의 덕이 아닌가? 제 재산으로 저 쓰고 싶은 때에, 저 쓰고 싶은데 쓰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지 자네 아나?』

손님은 시끄러웠던지 문제를 내어 던지고 말았다.

『졌네, 졌어. 졌다 할게……』

『졌다 할께? 그럼 채지지 않았단 말인가?』

『졌어, 졌어. 술소리가 난 뒤엔 아무 소리도 귀에 안 들어온다. 내어놓게.』

『없네. 온전히 항복해야 내놓겠네.』

『좋은 술이 없는 꼴이로구.』

『바보!』

『그럼 내 보게.』

『仕樣の無い男た(딱한 친구로군)! 좌우간 금전이라 하는 것은……』

『시끄러워! 졌대두 그런다.』

그들은 마침내 식당으로 갔다.

나도 목욕을 한 뒤에 다시 거처로 가서 바늘과 실을 쥐고 일을 시작하려 할 때에 문득 식당에서 내 이름 소리가 들렸다.

『영애? 영애? 좋은 이름이다.』

손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좋은 이름 아니구. イヤシクモ(적어도) S의 마누라 아닌가?』

『그 영애씨는 자네 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은…… 무얼 하구 있는지도 모른다네.』

『말이 되나, 지금……』

『내가 안 가르쳐 주는 걸……』

『그건 또 왜?』

『왜? 가르쳐주어도 쓸데없으니까……』

『자넨 너무 잔혹해.』

『잔혹해? 외려, 가르쳐주는 편이 잔혹하겠네』

『왜?』

『자네 여편네의 마음이란 걸 잘 아나?』

『알잖쿠.』

『알아? 귀 부시고 듣게. 여편네란 동물은 말이네,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일호도 양심의 가책이라는 게 없이 할 수 있지만……』

『있지만?』

『있지만, 나쓰메(夏目)도 이런 말을 했거니와 자기의 무학, 내지 무식한 점을 남에게 발견 당한 때같이 분하게 생각할 때가 다시 없다네.』

『그래서?』

『그래서!』

그는 이 말을 한뿐 말을 뚝 그치고 술잔을 집은 모양이다. 그러나 좀 기다려도 다시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내가 여기 와 있는 것을 알았다 하고, 다시 가만히 내려서 나가려 할 때에 손님이 말의 뒤를 재촉하였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말이네. 가만 내가 무슨 이야길 했댔는지?』

『응? 자네는 아니, 자네가 왜 영애씨에게 자네의 하는 일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하는 말이네.』

『음, 그래서 가만, 그래서가 아니라 그런데 자네는 여편네라는 것을 잘 아나?』

『알잖구. 가만, 이 이야기 아까 했네.』

『했나? 그럼 여편네라는 것은 남을 미워하거나…… 이 이야기도 한 것 같다.』

『했네.』

『응, 생각난다. 그런데 이제 겨우 고등여학을 졸업한 지식에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아무리 똑똑히 설명한다 해도 절반 이상을 깨닫지 못할 게 아닌가?』

『음!』

『난 그를 부끄럽게 하는 것보다는 외려 원망 받는 걸 감수하겠네.』

아아, 나는 그때 그에게 달려가서 그의 가슴에 안기지 않았는지? 그리고 또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지─

『당신이 설혹 안 가르쳐 주신다 해도 난 결코 당신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주부로서의 내 권한에 넘칠 일임을 깨달았으니까요. 그리고 또 당신이 가르쳐 주셔서 내가 깨닫지 못하였다 해도, 나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당신은 나보다 썩 뛰어난 이인 줄을 난 잘 압니다.』

그와 아홉 달 동안의 부부생활, 그동안에 그의 일거일동은 모두 내 눈에 어른거리고, 그의 가장 조그만 동작이라도 모두 내게는 귀엽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눈물의 덩어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기록하면 무엇하랴? 그것은 모두 한낱 원한과 가책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따뜻한 정에 다시 살아나려는 봄이 이르렀다. 동시에 온 세상은 무서운 돌림 고뿔에 위협을 받았다.

『이즈음 며칠, 좀 편안히 쉬고 싶다. 그러나 탈도 안 나고 누워 있을 수도 없고…… 다 걸리는 고뿔이라도 좀 걸려 주지.』

그는 이런 말을 두어 번 하였다.

어떤 날 그는 회사에 가려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코에서, 아니 외려, 온 머리에서 담뱃내가 드러나서 못 견디겠어.』

그는 역한 듯이 머리를 저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날은 회사를 쉬었다.

이튿날 새벽 여섯 시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리 옷 채로 나갔다. 변소에 가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머리를 저으므로, 또 갑자기 생각나서 실험실에 갔나 보다 하고 나도 일어나서 아래로 내려와서 (좀 이르지만) 할멈을 깨워 가지고 조반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한 삼십 분 지난 때에 갑자기 종소리가 찌르를 나기에 보니까 실험실에서 부르는 것이었다. 실험실에 남이 오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절대로 거기서 종을 눌러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마 옷에 스쳐서 소리가 났나 보다, 하고 있을 때에 다시 종의 소리가 났다.

『찌륵, 찌륵, 찌륵─』

그것은 두세 살 난 어린애가 누르는 듯한 이상한 소리였다. 나는 별한 무서운 예감으로 한걸음에 실험실에 뛰어 올라가서 문을 열려 하매, 문은 안에서 채운 대로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는 그의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세요? 문 좀 열어 주세요』

『병원, 의사! 빨리─ 의사!』

그의 소리는 모깃소리와 같이 가늘었다.

『글쎄, 왜 그러세요?』

『의사, 청해요!』

그는 마침내 성을 내었다. 나는 뛰어 내려와서 할멈에게, H씨를 청하라고 명한 뒤에 다시 실험실로 가니까 그는 문을 깨뜨리고 들어오라고 한다. 그래서 곁에 놓인 의자를 들어서 패널을 한 대여섯 번 치니까 패널은 떨어져 나갔다. 그 틈으로 손을 넣어서 문을 열고 들어서서 보매, 그는 벨 아래 꼬꾸라져 있고, 「삿쉬」는 이 추운데 모두 좍 열려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침─실─로』

나는 그를 어깨에 메어다가 침실로 갖다 뉘였다. 그는 침실까지 와서는 혼혼히 잠이 든다.

좀 지나서 H씨가 왔다. 잠이 든 그를 한참 동안 이리 두드려 보고 저리 두드려 본 H씨는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를 들었다.

『S씨의 실험실에 비화물(砒化物)이나 청화물(靑化物)이 없습니까?』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전에 학교시대에 화학 시간에 들은 이름 같다 생각하면서 대답하였다.

『중독(中毒) 같습니다. 』

『중독요? 저─무엇에……』

『글쎄, 독깨쓰 중독 같애요.』

『독와사요?』

나는 놀라서 H씨를 볼 때에 잠들었던 그가 좀 움질움질하였다. 그의 눈은 깨려고 정신을 차리려고 대단히 힘쓰는 듯이 떨렸다.

『어때요?』

H씨는 그에게 물었다.

『칼플─』

그는 겨우 이렇게 중얼거렸다. H씨가 주사기를 준비하여 주사를 놓으니까, 그는 팔과 다리를 우들우들 떨다가 눈을 힘없이 뜨면서,

『또─ 한 대.』

라고 중얼거리고 도로 감아 버렸다.

주사를 또 한 대 맞은 뒤에 그는 눈을 힘없이 다시 뜨고 H씨를 보고 씩 웃은 뒤에 내게 머리를 돌렸다.

『실험실에 좀 가봐 주. 저 선반 아래서 둘째 선반 남쪽 끝에.』

여기까지 겨우 말한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모깃소리같이 역시 연속하였다.

『유─ 유청산(硫靑酸) 포테슘이란 약병 좀……』

여기까지 와서는 그는 맥이 없는지 말을 그쳐 버렸다. 나는 실험실로 뛰어가서 그 병을 가지고 와서, 그를 흔들었다. 그는 눈을 번쩍 뜨더니 내 얼굴과 약을 번갈아 보다가 이렇게 묻는다.

『그 마개 꽂혀 있습디까?』

『아니오, 내려져 있는 걸 꽂았어요』

이렇게 대답하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 하였다.

『H씨, 청화수소 중독(靑化水素 中毒)이외다.』

『청화수소? 꼭 그겁니까?』

『에─텔 주사가 어떨지요?』

『청산중독(靑酸中毒)이면,─ 가만, 약제 사게 전화하구 오리다.』

H씨는 뛰어 내려가서 전화를 하고 돌아왔다.

그가 청화수소를 마시게 된 경위는 이러하였다. 일찍 깨인 그는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실험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코, 아니 온 머리에서 담배 냄새가 너무 나므로 건조한 방을 좀 축여 보려고 물을 끓이면서 실험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한참 실험에 정신이 팔렸던 그는 좀 어지러움을 깨달았다. 동시에 무서운 한 가지의 생각이 머리에 들어가서, (담뱃내와 같은 이상한 냄새에 마비된) 코에 온 신경을 모으고 맡아 보았다. 그의 코는 약간의 청화수소(靑化水素)의 냄새를 깨달았다. 바삐 뛰어가서 「사쉬」를 열어 버렸지만 벌써 늦었었다. 그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그러나 어찌하여 겨우 벨에까지 기어가서 팔이 자라지 않는 것을 손가락 끝으로 겨우 벨을 눌렀다.

『유청산(硫靑酸) 포테슘이 습기에 분해된 모양이지요?』

H씨가 이렇게 말할 때에 그는 몸을 무섭게 떨기 시작하였다.

『주사! 얼른 에─텔!』

H씨는 다시 에─텔를 재촉하러 내려갔다. 나도 참지 못하여 H씨의 뒤를 따라 내려가서 그를 붙들고 용태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잠깐 먹먹히 서 있다가야 대답을 하였다.

『바로 말하자면 대단히 위독해요. 십중팔구는……』

나는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 몰랐다. 머리와 가슴에 땀을 우쩍 내어 가지고 정신을 차린 때는 나는 거처실 침의(寢椅) 위에 누워 있었고, 할멈이 내 머리를 만지면서 떨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할멈의 붙드는 것을 뿌리치고 다시 그의 병실로 뛰어가 보았다. 그는 벌써 주사를 맞고 고요히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무론 그의 용태가 위독한 줄은 알았었다. 그러나 나의 그 지아비이고 또는 여러 벗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던 그의 앞에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이렇게 가까이 이르렀을 줄은 뜻도 안 하였다.

그의 벗들도 전화로 청하여 왔다. 그 모든 예의 도덕이라는 것을 온전히 모르고 술을 먹고는 남은 생각지 않고 덤빌 줄만 아는 그들이 한 벗의 병상 앞에, 그것은 마치 성단(聖壇) 앞에 꿇어앉은 장로와 같이 경건한 얼굴로 둘러앉은 것은 참으로 기관이었겄다.

열한 시쯤 그는 깨었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모든 것을 단념하였는지 그의 낮은 비교적 온화하였다.

『K나 Y나 오지 않았소?』

그가 깨면서 첫 번 물은 말은 이것이었다.

『여기 와 있네.』

K씨가 앞으로 나오면서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K씨를 곁눈으로 보고 씩 웃었다.

『너만 왔니?』

『다─들 왔다.』

『다들 좀 가까이! 마지막 얼굴을 좀.』

『이 자식!』

이 말이 끝나기 전에 K씨가 벼락같이 고함쳤다.

『그런 되지 않은 소린 왜? 이 자식! 네가 죽으면, 우린─ 갑갑하겠구나!』

K씨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하였다. 나는 참지 못하여 곁방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아니하여 나는 다시 그 방에 불려 갔다.

『야 S, 남겨둘 말은 없니?』

『없네.』

『묘비(墓碑) 같은 건……』

『없네. 그저 내 이름만 새기고 그 아래……』

그는 이 말만 할뿐 그쳐 버렸다. 그의 눈은 곧추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천장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었다.

오륙 분의 시간은 흘렀다. 그의 지도로써 모든 휘장을 내린 침침한 방에는 전등빛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후루─후루.』

마침내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그이였다. K씨가 곧 물었다.

『무얼?』

『후루─후루─』

그의 (이불 위에 내어놓은) 왼손은 마치 누구를 부르듯이 무섭게 떨렸다. 나는 달려가서 K씨를 떼밀고 그의 손에 내 손을 잡혀 놓았다. 그는 내 오른편 손을 힘없이 쥔 뒤에 자기의 오른편 손을 이불 속에서 꺼내려고 애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손을 꺼내어 주매, 그는 더듬더듬 겨우 자기의 왼편 손에 잡혀 있는 내 손을 찾아서 그 손바닥에 무슨 글자를 썼다. 물─

『물요?』

나는 겨우 소리를 내었다. 그는 성가신 듯이 내 손을 휘잡아 당기더니 다시 글자를 썼다. 불.

『불요?』

그의 얼굴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불을 끄라는지 어쩌라는지 몰라서 주저하고 있을 때 의사 H씨가 가까이 나dk오며,

『불이 안 보인단 말씀이지요?』

하면서 그의 머리를 짚어 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H씨는 입을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소근거렸다.

『임종이올시다. 캄플 한 대 해볼까요?』

아아, 그러나 나는 과연 거기 대답할 용기가 있었을까?

이틀 뒤에 그의 주검은 집 뜰에서 예식을 거행하고 공동묘지로 가져갔다. 그 예식 때 Y씨의 조문으로 나는 처음으로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Y씨의 조문은 이러하였다.

S─

자네가 죽었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이네. 우리의 눈앞에 엄연히 자네의 주검이 누워 있을지라도, 우리는 역시 자네의 죽음을 믿기 힘드네─ 자네가 죽어?

그러나 사실은 어찌할 수 없을 테지. 우리 몇몇 친구 가운데 자네는 홀연히 없어지고 말았네. 자네를 불량 청년으로 보던 어떤 사회는 자네의 죽음을 오히려 기뻐할지도 모를 테지. 또는 자네의 생활의 무규칙한 일면만 보던 사회는 자네의 죽음을 타락자의 자멸이라고까지 할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자네를 알던 모든 사회는 자네의 죽음을 조선의 불행으로서 슬퍼하는 점을 자네는 잊어서는 안 되네.

자네가 ××중학에 입학한 것은 열두 살 나는 해였었지. 내가 자네와 처음 만난 것은 그때였었네. 나는 그때를 돌아볼 때는 언제든 토필을 들고 흑판에 나가서 수학을 푸는 소년 천재를 보네.

그 뒤에 동경 건너가서 나는 ○○교 문과(文科)에 들 때에 자네는 이과(理科)에 들면서 우리는 서로 좀 떨어졌지. 자네의 규칙 없는 생활은 벌써 그때부터 시작되었네. 학과는 돌아보지 않고 활동사진에 가서는 서양 사람의 풍속을 엿보고 밤에는 술을 먹으러 돌아다니고─ 그렇던 자네가 무사히 졸업한 것을 우리는 오히려 놀라운 눈으로 보았네.

그리고 또 자네가 귀국하여 K인쇄소에 월급장이로 들어앉을 때에, 우리는 또 한 번 놀랐네 자네 같은 사람이 일정한 규칙에 복종해야 하는 회사원이 되리라고는 뜻도 안 한 바이므로,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자네가 K인쇄소 기사(技師)가 된 것은 자네가 미리부터 계획한 일인 줄을 안 때의 우리의 놀람은 얼마나 하였을 줄 생각하나? 자네 같은 사람에게 계획이며 목적이라는 것이 있을 줄은 뜻도 안 하였네.

자네는 지금의 인쇄술의 불완전을 보았다. 타이프롸이터─가 몇 초 동안에 (오식(誤植) 없이) 한 페─쥐를 찍어낼 동안에 현금의 인쇄술은 (교정까지 하여) 며칠 동안 걸려서야 겨우 식자라는 것이 끝나는 것을 보았다. 여기, 자네의 계획은 생겨났지? 아연철판(亞鉛凸板)과 타이프롸이터의 원리를 이용하여 가공한 타이프롸이터─로써 중크롬산교(酸膠)를 먹인 아연판에 특종(特種) 잉크로써 타자를 하여 감광(感光)시킨 뒤에 초산(硝酸)으로 부식시켜서, 지금 인쇄술의 지형(紙型)과 같은 것을 만들어 보려 하여 성공하였지. 그러나 그것은 시간으로는 인쇄술보다 빠르지만 매(每) 페─쥐의 비용은 결코 지금 것에 비하여 덜 먹지 않았다. 이것은 금전(金錢) 향락자인 자네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럼? 자네는 다시 마분지를 응용하여 보려 하였다. 과학자가 아닌 나는 똑똑한 사정은 모르지만 모든 것은 마음대로 되었다.

『한 번만 실험실에 더 들어가면 끝이 나겠는데, 나 같은 중한 사람에겐 한 번 들어가는 것이 큰일과 같으니깐─ 머리 속에서는 다 해결됐는데……』

닷새 전에 자네가 한 말이 이것이었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들어갔던」 자네는 그 속에서 벌써 죽음을 만났다.

S─

얼마나 분하나? 그러나 숙명(宿命)이라는 커다란 힘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네. 사오일 전까지 우리와 같이 웃고 날뛰던 자네는 벌써 어디론가 없어지지 않았나─

「우리들 가운데서 누가 죽는다.」

이것은 거의 상상도 못할 일이었었네. 우리는 영원히 우리인지라, 교만은 하지만 허식이 없고, 무규칙한 삶은 살아가지만 진순(眞純)한 길을 걸어가던 우리들 가운데서, 누가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 아니었었나?

그러나 S!

자네는 그만 죽었네. 자네는 우리들 가운데서 없어졌네. 우리는 오늘 저녁에도 모여서 술을 먹고 덤빌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함께 즐기고 함께 웃던 자네는 그때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는지. S! 오게, 한 번 더 와서, 우리와 함께 먹고 웃고 즐겨 보세. 자네의 그 소와 같이 커다랗던 얼굴을 한 번 더 보여주게.

아아,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 무엇하랴! 모두 한낱 헛소리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사람에게 만약 「죽지 않는 넋」이라는 것이 있어서 내세(來世)에서 우리가 자네와 만날 날이 있다 하면, 그때, 그때는 마음껏 실컷 덤벼 보세. 다른 사람의 존재를 안중에 두지 않는 듯이 큰 낯으로 먹고는 취하여서 덤비고 다시 먹세.

一九××년 四월 一七일

S의 주검 앞에서

장례를 끝낸 뒤의 나에게는 모든 세상이 눈앞에서 꺼져 없어진 것 같았다. 어제 한 일을 오늘 또 거푸 하고 내일도 또한 그런 일을 하여야 하는 인생이란 어떻다 형용할 수 없는 가련한 것이었다. 단조하고 아무 변화가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오십 년이나 백 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나는 일이었다.

장례 지낸 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어떤 날 아무리 잠을 자려 하여도 졸음이 안 오므로, 침대에서 내려서 화장대 앞에 걸터앉아서 거울에 비친 내 여윈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 저 생각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때에, 문득 내 뒤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치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돌아보면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거울을 볼 때에 그 속에는 여전히 내 어깨를 넘어 나를 들여다보는 그가 있었다.

며침내 그것은 담벽에 걸린 그의 초상(肖像)인 것을 알았다. 이튿날 그 그림은 지하실로 내려다 두었다. 동시에 그의 모든 일용품은 (그의 벗들이 기념으로 가져가고 남은 것) 전부 지하실로 갖다 두었다.

그러나 갑갑하고 외로운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고요한 밤중에 마음을 습격하는 외로움은 오히려 참을 수가 있었으나, 음식 먹을 때, 신문 볼 때마다 생각나는 그의 생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간간 아직 그의 없음을 모르고 오는 편지는 모두 불로 태워 버리고 하였다.

마침내 나는 이전 학교 시대에 같이 공부하던 벗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 둘을 집에 청하여 두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유진이와 O 두 사람이 우리 집에 와 있게 되었다.

날이 지나자 외로움과 슬픔도 차차 마음속에서 없어졌다. 나는 두 벗을 친언니와 같이 생각하였다. 아버지와 같이 생각하고 오빠와 같이 생각하던 그를 잃어버린 내게는 그 대신 언니가 생겼다.

이리하여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서 다시 봄이 이른 때는 내 머리에서는 S라는 기억이 거반 없어졌다. 집안에서는 늘 웃음소리가 났다. 처녀와 새악씨의 세 여편네 살림에는 아무 구속이나 마음 둘 일이 없었다. 돈만 내면 불이 저절로 오고 물이 저절로 오 고, 앉아서 여행을 하는 세상인지라, 그가 남긴 풍부한 재산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게 하였다. S라 하는 사람은 죽은 뒤 일 년에는 세상에게 잊어 버리우고 벗들에게 잊어 버리우고, 그의 아내이던 내 머리에서도 지워져 버렸다. 그의 무덤에 가서는 그의 박명하고 애처로운 일생을 생각하고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집에서 벗들과 즐거이 먹을 과자를 사오고 하였다.

봄은 가고 다시 왔다. 거반 방종(放縱)이라 하여도 옳은 살림의 일 년은 또 지났다. 그 봄 식물원(植物園)에 사구라 피었다 질 때, 하나는 시집을 가게 되었다. 나는 집에 같이 있던 언니와 같이 생각하던 O인지라, 남한테 부끄럽지 않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여 주었다.

그의 혼례식은 청년회관에서 들었다. 혼례식도 무사히 끝나고, 명월관 지점(明月館 支店)에서 피로연을 하고, 저녁때 유진이와 둘이서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갑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끝없는 외로움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자리에 누운 나는 왜인지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시계는 두시 반을 치고 시를 쳤다. 그러나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곁방에서 자는 유진이도 잠을 못 자는 모양인지, 기침 소리만 간간 울렸다. 한집에 같이 있던 세 여편네 가운데 혼자 남은 처녀 유진이의 마음을 나는 짐작하였다.

마침내 옷을 입고 그 방을 찾아가매, 그는 아직 옷도 벗지 않고 있었다. 둘이서는 만나기는 만났지만, 서로 할 말이 없어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좀 뒤에 유진이가 침묵을 깨뜨렸다.

『O는 한창 잠들었을 테지오?』

『세상을 모르겠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은 했으나 흥분으로 말미암아 한잠도 못 이룬 첫 내가 생각나서 그만 그 자리에 쓰러졌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얼마 울다가 일어나서 보니, 유진이도 제 쓸쓸한 처지를 생각하고 울었는지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이튿날 지하실에 갖다 두었던 그의 사진이며 초상은 모두 다시 내 침실에 장식되었다. 그날 밤 거울로써 그 초상을 보매, 그는 곧 내 뒤에 서서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초상은 살아 있었다. 그의 숨은, 나는 내 등에서 깨달았다. 거울 속에 비 친 그는 눈까지 깜빡거렸다.

나는 처음으로 사내로서의 그에게 대한 애정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시간의 대개를 거울 앞에서 보내게 되었다. O는 내가 갑자기 몸치장을 시작한 줄 알고 이상한 웃음을 웃은 때도 있었다.

없는 그에게 대한 그리움은 내 마음속에 날이 가자 더 뜨겁게 되어갔다. 아버지로서, 내지는 오빠로서 잊어 버리웠던 그는, 그 지아버니로 사내로 내 마음속에 부활하였다. 그와 함께 살아 있을 때에 아내로서의 따뜻한 정을 바쳐 보지 못한 내가 분하고 또 절통하였다.

사내─이런 아름답고 그리운 말이 다시 없었다. 그러나 나도 사내로서의 그를 알기 전에 그만 그를 잃어버렸다. 「어린애 같다.」 이 말은 사기(邪氣) 없단 말과 공통하여 좋다 하되, 나는 그 때문에 그 지아버니로 그에게 사랑을 바쳐 보기 전에 그를 잃어버렸다.

한 번 잊어버려 가던 그의 이전의 일거일동은 모두 내 머리 속에 부활하였다.

그는 이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자(漢字)로 어떤 나라의 국명을 쓰면 그 글자의 모양이 그 나라의 국성(國性)(이라는 말이 있다 하면)을 나타낸다. 영(英)이라는 자는 아름답고 점잖은 모양을 한 글자이고, 독일(獨逸)이란 글자는 모양으로 보아서 뚝하고 근면하게 생겼고, 노(露) 혹은 아(俄)란 글자는 넓적하고 크고, 일본(日本)이란 자는 좁고 깜찍하고, 미(米)란 글자는 성글고 크고─ 그와 같은 뜻으로 신라(新羅)란 글자는 위대하고 「작은 것은 눈 떠보지 않는」 거인적(巨人的)이며 동시에 크고 넓음을 나타낸다고. 그러나 만약 「신라(新羅)」란 자를 인격화할 수가 있으면 그것은 S, 그의 인격에 다름 없었다. 그가 가장 별을 부리고 또는 가장 광포하게 구는 그 순간에도 그의 인격은 그 속에 나타나 있었다.

나는 차차 우울하여졌다. 그리고 낮보다는 밤을 기뻐하였다. 거울에 비친 그의 초상은 밤에는 꼭 산 사람과 같이 내 어깨를 넘어서 나를 마주 보고 하였다. 한참 정신 없이 들여다볼 때는 그는 웃는 때까지 있었다.

경주(慶州) 태생인 그는 열두 살부터 서울 살림을 하였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강렬한 경상도 사투리가 있었다. 없는 그를 생각하고 그리는 내게는, 그전에는 천스럽게 보이던 사투리까지도 아름답고 정답게 머리 속에 부활하여, 간혹 거리에서 강렬한 그 사투리의 말소리가 들릴 때는 뜻하지 않고 돌아보고 하였다.

유진이도 마침내 내 속을 알았다. 그는 만날 나를 즐겁게 하려고 온갖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내게는 귀찮고 시끄럽게만 보였다.

「성(性)에 눈뜬다」는 것이 과연 이런 것인지? 고요한 밤중, 거울과 마주앉아 그 속에 비친 그의 얼굴에서 웃음을 기다리고 있는 때 같은 때, 마음속에 뛰노는 커다란 물결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왜 없었나? 나를 아내로서 극진히 사랑하던 그는 내게서는 아내로서의 사랑을 받아 보기 전에 없어졌다. 그는 따뜻한 가정의 사랑이란 것은 영구히 모를 테지. 연구? 그런 것은 성공하였든 못하였든, 관치 않다. 나는 다시 한번 참마음으로 그의 넓은 가슴에 내 머리를 묻어 보고 싶다.

어떤 날 골방을 뒤질 때에, 그 속에 낡은 신문지 치를 묶은 그의 낡은 옷의 허리띠를 보았다. 나는 빼앗듯 그것을 풀어서 내 허리에 매어 보았다. 동시에 그에게서 들은바, 머리를 뒤로 땋은 어린애의 S를 생각하였다.

경주(慶州) 태생인 그는 고향으로서 경주를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경주를 찬미하는 사람이었다. 넓고 말 못하고, 봄날 낮잠과 같이 한가스럽고 유쾌한, 태고적 기분을 그대로 남겨 가지고 있는 경주를 나는 그에게 몇 번 들었는지 모르겠다.

『형용할 순 없지요. 그래두 억지로 말하자면, 봄날 오후 높은 하늘에 솔개 떠다니는 것 같은─그런 기분이 있는 곳이라고나 할까? 기지개할 때와 같은 유쾌하고 ノンビリ(한가)한 기분이 넘치고 쏟아지고 흐르고─ 이렇게나 형용할까?』

그는 경주에 대하여 늘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고 경주가 만약 자기의 고향만 아니었더면, 벌써 경주서 산 지 오래겠다고, 그만큼 경주를 즐겨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마침내 그의 고향이고 아직 그의 낡은 집이 남아 있다는 경주를 가 보기로 하였다. 그때는 여름과 가을도 다 가고 겨울이 가까운 때였다. 그 강렬한 경상도 사투리─대구서 기차를 내릴 때부터 여관 사환 애에게서 또는 인력거군에게서 나는 그것을 들었다.

자동차를 탔다. 오후 두 시쯤 자동차는 경주를 향하여 떠났다. 이리하여 경주가 거의 가까와 왔을 때는 과연 그에게서 들은 바, 경주 기분은 풍부히 넘쳐 있었다. 멀리 보이는 맞은편과 좌우의 뫼 사이에는 넓은 논과 밭이 널려 있고, 곳곳에 마을이 가뭇가뭇 있는 극히 평범한 경치이지만, 그 배치된 모양, 또는 커다란 뫼와 같은 봉황대(鳳凰臺)들을 합한 그 경치는 과연 봄날 낮잠과 같은 한가함과 기지개와 같은 유쾌함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사이의 길을 닫는 자동차는 지금 것이지만, 그것을 탄 사람의 마음은 옛적의 한가한 길을 지팡이를 짚고 걷는 마음이 되게 한다. 신라는 망하였다 할지라도 그 기분과 위대함은 아직 그냥 경주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내 마음을 뛰놀게 한 것은, 그 경치는 바꾸어 말하자면 그의 인격 의 씸블에 다름없었다. 그를 만약 경치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경주 근방의 경치가 될 것이며, 경주 근방의 경치를 인격화할 수가 있다 하면, 그것은 S, 그의 인격에 다름없었다. 나의 마음은 마치 그를 여기서 만난 것같이 뛰놀았다.

그날 밤 여관에서 묵고, 이튿날 조반 먹을 때 주인 노파를 찾아서 S참판(參判)의 집을 물어보았다. 집은 알기가 쉬웠다. 그 여관에서 꼭 네모난 커다란 논 하나를 건너서 있는 큰 기와집이었다. 담장은 여기저기 무너지고, 지붕도 군데군데 기와가 벗겨져 있으며, 이끼와 잡초가 그 위에 무성하여 있었다.

나는 곧 옷을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 행랑에는 십여 년을 주인 없는 집을 지켜 온 선대의 늙은 종의 부처가 있었다. 내가 이 집 며느리인 줄을 안 때의 그 할멈의 놀람은 오히려 우습게 보이도록 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안 때의 슬퍼하는 모양은 나로서는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좀 뒤에 할멈과 같이 집을 둘러보았다. 사랑채는 모두 담벽이 떨어지고 집이 기울어져서, 그 크고 사치하던 집의 구태(舊態)는 얻어 볼 수가 없었다. 중대문 안과 안대문 안도 그와 같았다. 우리는 뒤뜰로 돌아가 보았다. 못 위에 쓰러진 정자, 잡초가 무성한 화단, 모든 것은 거칠어져 있었다.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까지 가지고 있는 사내종 계집종의 수십 명을 마음대로 부리고, 낮에는 낮잠이요 밤에는 가무(歌舞)로, 짧은 일생을 그 대신 굵게나 살아 보려고 하던 그 모든 노력은 지금은 다만 헛되이 무성한 풀 아래 감추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 눈에 뜨인 것은, 이 거칠고 무너져 가는 집 가운데, 작년에도 흙을 다시 바른 듯한 조그만 방이 하나 남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할멈에게 그 방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S 일가(一家)가 서울로 올라갈 때에 그 중 충실타던 종에게 집을 맡기고 몇 가지의 쓸데없는 것은 그대로 두고 올라갔다. 그것은 작아서 못 입게 된 S 그의 옷 같은 것들이었다. 충실하고 착한 종의 부처는 그것을 모두 한방에 모아 두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의 돌아옴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할멈에게 그 방 열쇠를 얻어서 십여 년 동안을 녹슬어 붙은 쇠를 겨우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은 모두 새파랗게 곰팡이가 슬고, 그 모퉁이에는 역시 곰팡이 슬은 의장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속에는 그의 어렸을 때의 옷이 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남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꺼내기가 싫어서 다만 그 방을 말끔히 쓸어 달라고 할멈에게 부탁한 뒤에 점심 먹으러 여관으로 돌아왔다.

머릿기름때 묻은 저고리와 주의, 조그만 버선, 밤에 혼자서 고요히 그의 장을 열 때의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터질 듯하였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도 이러한 어리고 이뻤을 때가 있었을까? 나는 밤이 새는 줄을 모르고 어두운 등불 아래서 그것들을 뒤적거렸다.

나는 마침내 경주서 겨울을 나기로 작정하였다. 짐을 모두 꾸리고 한 주일 뒤에 여관을 떠나서 그의 자라난 거칠은 집으로 왔다.

눈물 머금도록 기쁜 긴 겨울은 갔다. 나는 만날, 그의 어렸을 때의 옷을 벗하여 지냈다. 겉을 볼 때에 거기 새로운 맛이 있고, 안 볼 때에 또한 거기 새로운 맛이 있고, 다시 겉을 볼 때에 또한 다시 새로운 맛이 거기 있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그 옷들은 내 손때로 꺼멓게까지 되었다.

이리하여 겨울을 나고, 두껍게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할 때는, 나는 경주를 떠나지 못할 만큼 그 땅에 정이 들었다. 혼자서 외로이 집을 지킨 유진이도 마침내 데려왔다. 그리고 집을 좀 꾸미기로 하였다. 그 봄, 다 거칠은 집 가운데 몇 방은 그대로 사람 살아가게 꾸며졌다. 뒤뜰에 가면 거기는 마치 산골과 같고, 길 넘는 잡풀이 무성하여 있지만, 안뜰에는 작으나마 화단도 쌓고 썩어진 기둥에 페인트도 바르고, 서울서 내려온 그의 사진들도 방안에 장식하여, 여편네 두 사람의 살림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여 놓았다.

말이 방귀를 뀌면서 길을 다니는 봄이 지나며, 어디서 생겨났는지 헤일 수 없는 머구리들이 넓은 벌을 울렸다.

여름도 갔다. 여승과 같이 경건하고 처녀와 같이 동경으로 참 마음으로 가을도 보냈다. 이리하여 작년에 이 경주를 온 때에서 만 일 년이 거의 되었을 때에, 나는 어떤 기회로 없는 그에게는 서제(庶弟)가 되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것이 생각나서 할멈에게 물어보았다.

할멈도 잘 알았다. H(서제의 이름)는 없는 그보다 두 달 늦게 난 사람으로, 여섯 살까지 이 경주에 있다가 어떤 조그만 감정으로 S가(家)를 쫓겨나서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한다. 그 뒤에 아직 경주에 남아 있는 H의 외가(外家)에 오는 소식에 의지하건대 H는 이젠 장성하여 (무론 장성하였을 것이다) 아내도 맞고 지금은 △△회사에 다니면서 밥을 벌어 간다 한다. 그러나 할멈의 말 가운데 하나 그대로 넘기기 힘든 것은 H는 없는 그와 한사람으로 볼 수가 있도록 같이 생겼다 하는 점이었다.

「없는 그와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사람」

나는 곧 부산으로 가 보기로 하였다. 유진이도 말리지 않았다. 할멈도 다만 얼른 다녀오라고만 할 뿐이었다.

부산 △△회사에서 물어서 겨우 그의 집을 찾아간 때는 가을 짧은 해가 거반 져 갈 때였다.

비슷하다, 같다 하여도 이와 같이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할멈의 말을 듣고 비슷하리라고는 하였지만, 이와 같이 같을 줄은 생각 못하였다. 나는 없는 그를 보지나 않았나까지 생각하였다.

그 부처는 내게 대단히 동정하여 주었다. 없는 그에게 시집간 이래로 「친절」이란 것은 아무래도 내게 바치는 선물이거나 하는 개념적 생각에 마비되어, 어떤 친절이라도 고맙게 생각할 줄을 모르던 나도 이 부처의 친절은 참 마음으로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하였다. 사나흘 묵으러 왔던 나는 그들의 친절히 말리는 데 이기지 못하여, (또 한 가지는 없는 그와 동작이든 모든 태도가 조금도 다른 점이 없는 H를 본 것도 한 이유이겠지만) 내일 내일 하면서 그냥 묵어 있었다.

그들 부처의 사이는 참으로 좋았다. 부부끼리라는 것보다 오히려 친한 벗끼리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생각되도록 그들 부처의 사이에는 거리낌이나 마음 두는 것이 없었다. 이것을 볼 때마다 내 젊은 마음은 괴상하게 떨렸다. 여승과 같이 삼 년 동안을 지낸 내 마음에 통절하게 사내라는 것이 인상 박혔다. 내 눈 속에는 언제든 엷은 눈물이 돌았다.

남국에도 습기 많이 섞인 함박 같은 눈이 내렸다. 그러나 나는 부산에 묵어 있었다. 그들도 이젠 나를 자기 가족의 한 사람으로 대접하였다.

부럽고도 눈물과 동경으로 찬 겨울은 또 갔다. 이리 하여 고양이 따뜻한 별을 찾아다니는 삼월 어떤 날 나는 문득 이제 오륙 일 있으면 그가 없는 사년째 되는 날이 이를 것이 생각났다.

일 년째 또는 이 년째 되는 날은 그의 무덤에 가 봤지만, 한낱 산보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삼 년째 되는 날은 공열(恐悅)이라 하여도 옳은 경주 살림에 정신이 팔려서 못 가 보았다. 만약 사람에게 넋이라는 것이 있다 하면 그는 얼마나 갑갑하였을까. 단연코 가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매, 마음은 한 초도 유예하지 못할 것 같이 생각되었다. 밤에 자리에 누웠으나 없는 그의 일, 일년 반을 내버려 둔 서울집 일, 또는 그의 무덤에 들러 심었던 석죽들이 생각나서 마침내 유진이에게 편지를 쓰려고 다시 일어났다.

편지 종이를 얻으러 H의 사랑에 가 보매. 그는 벌써 자는지 혹은 아직 안 돌아 왔는지, 사랑은 비어 있었다. 나는 들어가서 그의 책상에서 종이를 얻어내어 유진이에게 편지를 썼다. 그 사이 편지가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로, 이제 이삼일 뒤에는 서울로 갈 터인데, 그때 전보를 놓을께, 대구까지 나와서 함께 가잔 말로, 이렇게 편지를 다 쓴 뒤에 봉투를 얻으려고 그의 책상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그때 봉투보다 먼저 내 눈에 뜨인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것은 H의 반신상(半身像)이었다. 아니 오히려 없는 그의 사진이라 하여도 옳을 사진이었다. 이 세상에 나밖에 사람이 있나 하는 듯한 그의 입살, 대같이 곧은 콧마루, 정기 있는 눈, 없는 그와 다른 점이 어디 있나? 아무리 H가 그와 같이 생겼다 할지라도, 이것은 오히려 없는 그의 사진이었다.

내 마음은 괴상히도 뛰놀았다. 그 사진을 쥔 손은 떨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여보세요!』

나는 마침내 그만 그 사진을 힘껏 가슴에 쓸어안으며 책상 위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나는 벌떡 놀랐다. 누가 내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려 놓았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돌아볼 때에 거기는 술에 취하여서 얼굴이 벌겋게 된 H가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렇게까지...』

이튿날 나는 그만 힘없이 경주로 돌아왔다. 아직껏 이태 동안을 그리고 사모하던 그는 내게서 멀리 달아난 것 같았다.

마귀의 꾀임, 그것이 과연 마귀의 꾀임이었던가? 그것이 만약 마귀의 꾀임이라 할지라도 그런 잔혹한 마귀가 어디 다시 있을까?

나는 사흘 동안은 정신없이 지냈다. 아직 높은 뫼에는 눈이 남아 있을 때인데, 귀에서는 왕왕하는 머구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때때로는 H의 충동하는 듯한 불붙는 눈도 보였다가는, 다시 H(혹은 없는 그)의 어린애 같은 웃음으로 변하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한 가지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은 틀려 버렸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결심하였다. 죽음보다 더 큰 벌은 다시 없을 테지. 나는 죽음으로써 그에게 사죄를 하려고 결심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유진이는 곁방에서 철을 모르고 잔다. 내가 목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잘 테지. 그리고 그가 아침에 깨어서 나를 찾을 때는 나는 잡풀이 길이 넘는 뒤뜰 커다란 도토리나무 아래 차게 되어서 늘어져 있을 테지.

나는 죽음 앞에 있어도 조금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으로 없는 그에게 대한 얼마의 사죄가 된다 하면 기꺼이 그 길을 취할 테다. 또한 만약 그것이 그의 넋을 위로치 못한다 할지라도, 취할 다른 길이 없는 나는 그리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빨리 어서 바삐 날이 새기 전에 내 목적을 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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