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세계의 현대연극/프랑스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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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극 개관[편집]

프랑스 현대극의 신경향[편집]

France現代劇-新傾向

프랑스 연극이 19세기적인 부르주아극에서 탈각(脫殼)하는 단서를 만든 것은 1887년 '자유극장'을 창설하고 졸라가 말하는 이른바 '연극에 있어서의 자연주의'를 실천한 앙드레 앙투안이었다. 이와 대립하여 1890년에 '예술좌(藝術座)'를 일으켜 '연극에 있어서의 상징주의'를 주장, 메테를링크를 소개한 폴 포르도 빠뜨릴 수가 없다. 그 이후 자연주의와 상징주의의 대립 속에서 프랑스 연극은 근대화되어 갔는데, 그것이 참으로 현대적인 20세기의 연극으로 이행하는 것은 제1차대전 전후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파리에는 50개소가 넘는 소극장이 장기흥행을 계속하고 있고, 지방의 연극도 연간 백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상연되는 작품이나 그 연출도 다종다양하다. 그 중에는 소위 불바르극(劇)처럼 아직도 19세기 연극의 껍질을 쓴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마르셀 아샬은 아직 건재하며, 극히 최근까지도 매년 교묘한 풍자희극을 발표하여 왔고, 제2차대전 후 불바르극의 왕이라는 앙드레 룻상은 자작품(自作品)이 파리의 세 극장에서 동시에 상연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최근에는 프랑수아즈 사강이 씁쓸한 현대의 우수(憂愁)를 옛 그릇에 담아 불바르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같은 파리의 무대에서 19세기적인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위극(前衛劇)이나 외국극이 상연되어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그리고 불바르극 자체도 그 영향을 받아 점차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페리시안 마르소의 작품 등을 보아도 분명하다. 즉 1910년대를 경계로 해서 19세기 혹은 그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몇 개의 경향이 프랑스 연극에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연극의 20세기를 특징짓는 이 새로운 경향으로서 연출의 융성, 연극의 사회적 역할의 자각, 외국 연극과의 교류의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프랑스 연극의 연출의 융성[편집]

France演劇-演出-隆盛연출의 융성이란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연출가의 권위·재능이 무대창조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장 비라르가 말한 것처럼 "극의 창조자는 작가가 아니라 연출가"들이 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프랑스에 한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연극의 세계적인 경향이지만, 연극이 전통적으로 문학에 의존하고 있고, 따라서 작가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프랑스에선 특필(特筆)할 만한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연출가의 지배는 고전의 재연(再演)에 있어서도 신작(新作)의 상연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연극의 형식을 낳았고, 여러 가지 실험을 가능케 했다. 1913년 콜롱뷔에좌를 창설한 자크 코프는 연극을 상업주의의 해독으로부터 구하고, 명실공히 그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는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금욕적(禁慾的)인 소극장 운동을 일으켰다. 코포의 후계자인 샤를 뒤랑과 루이 주베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르주 피토에프와 가스통 바티를 참가시켜서 두 대전 사이의 황금 시대를 만들어 냈다.

또한 이들의 이른바 정통파에 대하여 장 콕토나 안토난아르트, 더 나아가서는 오오탕 라라, 이토킨에 의한 전위적인 실험이 쌓여져, 그 결과 두 대전 사이에 프랑스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연출의 거의 대부분이 이미 시도되었던 것이다. 제2차대전 후의 극계에 군림한 쟝 빌라르 또는 장 루이 바로 등의 업적도 연출에 관한 한 그것들을 완성하고 세련시킨 데 불과하다.

프랑스 연극의 사회적 역할의 자각[편집]

France演劇-社會的-役割-自覺

연출의 개혁이라는 신무기를 손에 든 프랑스 연극은 연극의 사회적인 의미나 역할에 관한 19세기적 관념을 재검토했다. 연극이 어떤 관객에 대해 호소할 수 있고 무엇을 가져오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미 근대연극의 과제이기도 했으나, 17세기 이래 중앙집권제가 확립되어 모든 것이 파리로 집중되고, 파리의 부르주아를 위한 연극의 상업적 융성이 뿌리깊이 박혀 있는 프랑스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예컨대 피르맹제미에에 의한 국립순회극단의 구상처럼, 연극의 지방분산이나 지방연극의 구상이 진지하게 고려되었고, 그것이 2차대전 후에는 열매를 맺어, 한편으로는 국립시민극장이나 국립지방연극센터의 활동이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즌 오픈에서의 연극제(演劇祭)가 되어, 지금까지 무대와 접할 기회가 적었던 층의 관객을 동원했다. 작품의 내용도 이에 따라 변화되어, 20세기 초엽에 있어서의 개인주의적인 심리극은 서서히 연극의 주류에서 후퇴하고, 실존주의 연극이나 전위극이 이를 대신하여 들어앉았으며, 전후에는 가톨릭시즘의 찬가(讚歌)인 클로델극이 일반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20세기의 프랑스연극은 새로운 관객을 획득하고, 거기에다 어떤 의미의 세계관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 연극의 국제교류[편집]

France 演劇-國際交流

연출예술의 확립, 연극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각이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연극의 방향이라고 한다면, 1950년대 이후는 더욱 새로운 특징이 가해진 듯 보인다. 그것은 외국 연극과의 교류의 발전이다. 단순한 외국극의 소개라면 제2차대전 전에도 뤼네 포나 피토에프에 의한 북구작가나 피란델로, 체호프의 상연 등이 있었을 정도로 수적으로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셰익스피어를 야만인이라 부르던 파리의 관객들에게는 외국극이란 일종의 이국정취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연극의 주류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50년대에 나타난 이른바 반연극파(反演劇派)의 작가들이 그 대부분은 외국 출신이면서 얼마 후에는 국립극장에까지 진출한 일, 1953년부터 파리에서 시작된 만국연극제가 원어극(原語劇)이면서도 성공한 일, 60년대에 브레히트극이 유행하여 그것이 프랑스 극계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일, 더욱이 웨스커나 바이즈가 재빨리 상연된 일들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연극에 있어서의 프랑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크게 변질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연극은 회화나 음악보다 50년이나 늦게 겨우 배타주의를 버리고, 오히려 세계의 연극, 적어도 유럽 연극의 중심이 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 전체의 금후의 연극에 새로운 모습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극작가와 작품[편집]

자리, 알프레드[편집]

Alfred Jarry(1873-1907)

프랑스의 시인·극작가. 라발에서 태어난 후, 렌느의 관립중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소극(笑劇) <폴란드인>을 써서 물리교사를 희롱했다. 1891년 파리로 상경하여 마르셀 슈워브나 레미 드 구르몽과 교제하며 시작(詩作)에 전념하는 한편, 뤼네 포와도 알게 돼 <폴란드인>을 개작, <유뷔왕>이란 이름으로 1896년 제작극장(制作劇場)에서 상연하였다. 야비한 언사와 대담한 연출, 강렬한 풍자 때문에 이 상연은 스캔들이 되었으나, 반역정신의 덩어리같은 자리는 <쇠사슬에 묶인 유뷔>를 비롯한 일련의 유뷔물로 보수파와 맞섰다.

클로델, 폴[편집]

Paul Claudel(1868-1955)

프랑스의 시인·극작가·외교관. 북프랑스의 농촌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고, 랭보를 비롯한 상징주의적인 근대시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890년 처녀희곡 <황금의 머리>를 발표, 이후에도 <도시> <교환> <대낮에 나눈다> <마리아에의 계시(啓示)> <인질> <비단구두> <크리스토프 콜롱의 서(書)> 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30편이 넘는 극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그러나 그 희곡은 1886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계시를 받은 후 열렬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던 클로델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신을 찬미하는 노래였고, 시작과 마찬가지로 양식이나 제재에 있어서도 일상적인 척도를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에 제1차대전 후에도 좀처럼 상연되지 못했다.

이들의 희곡이 지니는 연극적인 진가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아주 근년의 일이며, 연극의 사명이나 전체연극의 발상이나 제전(祭典)을 위해 상연된다는 점 등과 연결되어, 오늘날에는 20세기 연극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외교관으로 세계 각지를 순회한 클로델은 동양의 연극에도 이해가 깊었다.

로스탕, 에드몬드[편집]

Edmond Rostand(1868-1918)

프랑스의 극작가.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파리로 나왔다. 1894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그의 시극(詩劇) <로마네스크>가 상연되어 당시의 자연주의 연극 중에서 서정성이 인정되었다. 1897년의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는 의고전적(擬古典的)인 낭만주의와 서민적인 국수주의로 대성공을 거두어 당시 극계의 왕이 되었다. 10년 후에 같은 사상의 <수탉>을 냈으나 이미 시대는 달라져 전과 같은 성공은 얻지 못했다.

페도, 조르주[편집]

Georges Feydeau(1862-1921)

프랑스의 극작가. 파리에서 소설가의 아들로 태어나 <맥심의 여인들> <아메리의 시중을 들라> <아기에게 하제(下劑)를> 등 보드빌의 걸작을 차례로 발표하여 성공을 거뒀다. 경묘(輕妙)하고 유창하며 리드미컬한 대사(臺詞), 교묘하게 짜여진 줄거리 등으로 오늘날까지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코메디 프랑세즈의 중요한 상연물의 하나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부조리한 세계가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빌드락, 샤를[편집]

Charles Vildrac (1882-1971)

프랑스의 작가. 젊어서부터 시작(詩作)에 뜻을 두었으나, 자크 코포의 인정을 받고 상연된 <상선 테나시티>가 성공하여 극작가로서 등장했다. 그 밖에 <미셀 오크렐> <베리얄 부인> 등 주로 서민계급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위기를 취급한 걸작이 있다. 이른바 심리극 작가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다.

르노르망, 앙리 르네[편집]

Henri-Rene Lenormand(1882-1950)

프랑스의 극작가. 작곡가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제1차대전 전부터 시·소설을 쓰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각색과 그 밖에 몇 개의 희곡을 발표했으나, 성공을 얻은 것은 1919년 피토에프에 의해 상연된 <세월은 꿈> 이후의 일이었다. 이어 <낙오자의 무리> <꿈을 먹는 것> 등 심층 심리를 파헤치고 사람의 마음 구석에 있는 격렬한 마음의 투쟁을 그려냈다.

콕토, 장[편집]

Jean Cocteau(1889-1963)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시나리오 작가. 파리의 근교에서 태어나 제1차대전 후 전위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사티니·피카소·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라드> <지붕 위의 송아지> <에펠탑의 신랑신부> 등으로 시·음악·회화·무용 등의 총화를 꿈꾸었다. 시작전념 시기를 거쳐, 1926년부터 또다시 극작으로 되돌아와 <로미오와 줄리엣> <오르페> <안티고네> <지옥의 기계> 등 고전적 명작의 현대화를 시도했다. 1930년 코메디 프랑세즈의 상연종목이 된 <소리>를 비롯하여, 그 후 모든 장르와 모든 테마를 이용하여 재기(才氣)에 넘치는 작품을 차례로 발표해 나갔다. <르노와 알미드> <쌍두의 독수리> <무서운 어버이들> 등이 그 대표작이다.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혹은 감독으로서의 작품으로는 <미녀와 야수> <류이 브라스> <오르페> 등이 있다.

로맹, 쥘[편집]

Jules Romains(1885-1972)

프랑스의 소설가·시인·극작가.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파리에서 자라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수학하고, 위나니미스트에 가입하여 시작(詩作)의 길로 들어섰다. 1911년에 처녀희곡이 오데온 극장에서 앙투안에 의해 상연되었고, 제2작 <크로메델 르 뷰이유 마을>이 코포에 의해 뷰 콜롱비에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다. 그러나 로망을 극작가로서 성공시킨 것은 주베에 의한 <크노크>의 상연과 이를 전후하여 호평을 얻은 <토로아데크씨의 방탕> <토로아데크씨의 결혼> <도노고 톤카> 등의 연작(連作)이다. 그 후 대하소설 <선의의 사람들>의 완성을 위해 극계(劇界)에서 멀어졌으나, 전후에도 <기원 1천년> 등의 작품이 있다. 그의 희곡은 명랑한 풍자와 지적인 유머에 뛰어나고, 경묘한 문명비판의 구실도 하고 있다.

지로두, 장[편집]

Jean Giroudoux(1882-1944)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리모지 지방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나 우수한 성적으로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나, 우연한 기회로 1910년에 외교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1922년에 발표된 소설 <지크프리트와 리므잔의 사람들>이 루이 주베의 눈에 띄어 각색을 의뢰받고, 1928년 초연(初演)에 성공한 이래 극작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처녀희곡 <지크프리트>를 비롯하여 <앙피트리옹 38>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엘렉트르>처럼 그리스적인 소재에 있어서나 <간주곡(間奏曲)> <테사> <파리 즉흥(卽興)> <샤요의 광녀(狂女)>와 같은 현대극에 있어서나, <옹딘> <쿠크선장 항해이문(航海異聞)>이나 <베라크의 아폴로>와 같은 옛 이야기 세계에 있어서, 항상 산문에 의한 격조높은 시극(詩劇)을 지향하고 문체야말로 문화(文化)라고 주장했다. 또한 외무성 정보국에 근무한 일이 있는 지로두는 정치평론 뿐만 아니라, 연극에 있어서도 항상 유럽의 운명을 좌우하는 독·불 문제를 취급하였고, 두 문화의 특질을 분명히 하여 그 협조를 주장했다. 더욱이 그것은 판타지와 경묘한 익살과 미소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며, 거기에서 라신과 마리보를 이어받는 문학적으로 향기높은 프랑스적 지성에 의한 희곡이 탄생하였다. 지로두가 '프랑스의 장'이라는 별명을 받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파뇰, 마르셀[편집]

Marcel Pagnol(1895-1974)

프랑스의 극작가. 마르세유 근처에서 태어나 중학교의 영어교사로서 남프랑스를 전전한 후 파리로 부임(赴任)하여 극작가에 뜻을 두었다. 1928년 <토파즈>가 상연횟수 1,000회를 넘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마리우스> <파니> <세잘>의 마르세유 3부작이 그의 세계적 명성을 보증했다. 이 작품은 교묘한 극작술을 구사하여 풍속적인 서정성과 경쾌한 사회 풍자와를 조화시키는데, 때로는 통속적인 오락극에 빠질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의 시나리오 라이터로서도 <빵가게 마누라>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이 밖에도 평론 <웃음에 대하여>와 근작의 소설 등이 있다.

아샤르, 마르셀[편집]

Marcel Achard(1900-1974)

프랑스 극작가. 남프랑스 리옹 근교에서 태어났다. 소년시대부터 연극을 동경하여 15세 때 학교극으로 소극(笑劇)을 써서 상연한 일도 있었다. 그 후에 파리로 올라와 뷰 콜롱비에 극장의 프롬프터와 신문기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 후에, 뤼네포의 인정을 받아단막물의 처녀작 <미사는 말하였다>가 1923년에 상연되어 극작의 길로 들어섰다. 같은 해 뒤랭에 의해 채택된 <나하고 놀지 않으렵니까>가 성공하였고, 주베가 연출한 <마르블은 전쟁으로>를 비롯하여 <달님 장> <해적> 등이 차례로 히트하였고, 후기의 대표작으로는 <감자>(1957), <어리석은 여인>(1960) 등이 있다. 그 작풍(作風)은 황당무계한 소극(笑劇)으로부터 섬세한 풍속심리학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격조높은 불바르극으로서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프랑스적인 작품을 남기고 있다.

아누이, 장[편집]

Jean Anouilh(1910-1987)

프랑스의 극작가. 보르도에서 태어났으나 젊은 시절에 가족과 함께 파리로 옮겨 법률을 공부했다. 한때는 주베의 비서로 일했으나 다투고 헤어졌다. 그러나 지로두의 <지크프리트>의 초연(初演)에 감동을 받아 극작가를 지망하고, 1932년부터 <담비가죽> <수인(囚人)이 있었다> 등이 상연되어 찬부(贊否) 양론을 불러일으켰다. 1937년 피에토프에 의해서 상연된 <짐이 없는 여행자>는 <지크프리트>와 비슷한 것으로서, 전쟁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나이가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됨에 따라 그 추악함에 절망을 느끼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으로 결정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해마다 한 작품을 내는 페이스를 흩뜨리지 않고, <야성녀> <도둑들의 무도회> <산리스에서의 회합> <레오카디아> 등을 썼으며, 제2차대전 중에는 초기 작품 중의 대표작으로 지목되는 <안티고네>를 발표했다. 전후에도 그 창작력은 더욱 왕성하여 <성(城)에의 초대> <무대연습> <종달새> <오르니플> <불쌍한 비토스> 등 대작을 내놓았고, 후기의 걸작 <베게트>와 <신의 명예>를 낳게 된다. 아누이 자신은 이들 희곡을 검은 희곡집, 장미빛 희곡집, 빛나는 희곡집이라는 명칭을 붙여 정리했다. 사실 아누이는 빈곤 때문에 정신마저 타락해버린 하층계급과, 금력(金力)을 쥐고 고상한 체하는 부르주아 계급 쌍방의 절망적인 부패를 폭로하는 검은 드라마를 찾아내는 동시에, 몰리에르나 마리보를 계승하는 경쾌한 희극에도 뛰어났다.

살라크루, 아르망[편집]

Armand Salacrou(1899-1968)

프랑스의 극작가. 르왕에서 태어나 의학·철학·법학을 공부한 후 극작에 뜻을 두고 단막물을 발표했으나 상연되지 못하였다. 1925년 뒤네 포에 의한 <세계일주>, 1931년 뒤랭에 의한 <아틀라스 호텔> 등 초현실주의적인 수법의 희곡 상연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그 후 1935년에 <아라스의 미지의 여인>, 1938년의 <지구는 둥글다>로 성공했다. 제2차대전 중에는 침묵을 지켰고 전후에는 현실적인 작풍(作風)으로 기울어졌으며, <노여움의 밤> <르 놔르 군도> <신은 알고 있었다> 등 사회적·정치적 제재를 취급하였다.

사르트르, 장 폴[편집]

Jean Paul Sartre(1905-1980)

프랑스의 철학가·소설가·극작가. 고등 사범학교에서 철학을 배우고 제1차대전 전에는 철학논문 <상상력>, 소설 <구토>로 주목을 끌었는데, 1943년에는 <존재와 무>, 희곡 <파리떼>를 발표, 후자는 독일군 점령하에 파리에서 뒤랭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 후 <출구는 없다>가 성공을 거둔 이후 <무덤 없는 사자(死者)> <공손한 창녀> <더러운 손>과 <악마와 신> <네크라소프> <알토나의 감금자>등의 문제작을 발표하고 뒤마의 <키인>,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의 번안(飜案) 등을 합하여 실존주의 연극시대를 가져오게 했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고전적인 극작법의 기술과, 철학자로는 보기드문 무대적인 감각과, 시사적인 소재 등을 고루 갖추어 세계적인 성공을 얻었다. 양식이나 내용상 희곡으로서의 신선미는 약간 부족하나 연극에 커뮤니즘과 크리스차니즘 이외의 사상을 가져오게 한 것은 큰 공적이다.

카뮈, 알베르[편집]

Albert Camus(1913-1960)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알제리 대학을 졸업하고 그 동안에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신문기자가 되어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는 한편, <이방인(異邦人)> <시지프의 신화>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오해>(1944)와 <칼리귈라>(1945)로 성공을 얻었다. <계엄령(戒嚴令)>의 각색이 바로에 의해 상연되고, 그 다음에는 <정의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유령>, 칼데론의 <십자가에의 헌신>,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등이 있는데, 자동차 사고로 일찍 죽었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몽테를랑, 앙리 드[편집]

Henri Millon de Montherlant(1896-1972)

프랑스의 소설가. 파리의 귀족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투우나 축구를 좋아하였고, 1914년 처녀희곡 <주방>을 쓴 후 소설로 전환했으나, 1938년 이토킨에 의해 상연된 <파지파에>에 이어, 1942년 코메디 프랑세즈의 무대에 오른 <죽은 여왕>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산티아고의 수도원장> <마라테스타> <포르 루아얄> <브로세리양드> <돈 환> <스페인 추기경>, 아직 상연되지 않은 <내란> 등에 의해 코메디 프랑세즈의 중심적 현대작가가 되었다. 작풍(作風)은 라신과 비슷하며, 투명하고 시적인 문체로 고전적인 법칙을 지키고, 단순하고 명쾌한 줄거리로 내면적 드라마를 묘사해내고 있다. 종교적인 소재를 많이 취하면서 드라마는 오히려 인간의 고독과 세계의 무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루생, 앙드레[편집]

Andre Roussin(1911-1987)

프랑스의 극작가·배우. 마르세유 출생. 소극단을 조직하여 1943년 <암 스트람 그람>이 파리의 아테네 극장에서 상연되면서부터 극작가로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47년 <작은 퓌테>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불바르극을 가장 화려하게, 가장 많이 쓰는 작가가 되어, 스스로 연출도 하였으며, <니나> <어린이 칭송(稱頌)> <끝없는 사랑> 등 불바르의 옛 수법에 바탕을 두면서, 현대의 입김을 느끼게 하는 뛰어난 풍속 희극을 계속 쓰고 있다.

베케트, 새뮤얼[편집]

Smauel Beckett(1906-1989)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극작가(劇作家). 더블린에서 태어나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한 후 교직(敎職)에 있었으나, 얼마 후 소설가로서 조이스나 프루스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정주하였고, 1953년 <고도를 기다리며>로 단번에 그 명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후 <승부의 끝> <마지막 테이프> <행복한 나날> 등, 종래의 연극 개념을 완전히 뒤엎는 독창적인 희곡을 발표하여 전후의 새로운 연극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주제는 <고도> 이후 변치 않는 인간의 일의 무의미함과, 서구적인 합리주의에 의한 세계의 붕괴인데, 그 신선한 문체와 뛰어난 연극적인 감각은 따를 자가 없다. 후기작으로, 어두운 무대에 입술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독백하는 <내가 아니다(Not Ⅰ)>(1973)가 있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오네스코, 외젠[편집]

Eugene Ionesco(1912-1994)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의 극작가. 유년시대는 프랑스에서, 청년시대는 루마니아에서 보냈고 1938년부터는 프랑스에 정주하여, 50년에는 니콜라 바타이유가 상연한 처녀희곡 <대머리 여가수>로 이른바 반연극파(反演劇派)의 선단에 섰다. 이후 <수업> <의자> 등의 뛰어난 단막물로 종래의 것과는 좀 다른 초현실주의적인 희곡을 차차 인식시키고, 그 후에는 <무소> <빈사(瀕死)의 왕> <갈증과 기아> 등의 장막물(長幕物)로 국립극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작품은 초기의 작품일수록 대담하며, 일상적인 회화(會話)를 해체하여 그 무의미성을 폭로하기도 하고, 의자를 무대 일면에 늘어놓음으로써 신이나 진실 또는 사상의 공허함을 표현하거나, 사람을 무소로 변신시킴으로써 현대 획일화(劃一化)의 공포를 우화화(寓話化)하기도 했는데, 항상 라틴적인 경쾌한 리듬을 잊지 않았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었으며, 1977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주네, 장[편집]

Jean Genet(1910-1986)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10세때는 절도죄로 감화원(感化院)에 들어갔으나, 그 후로는 유럽을 방랑, 점령 중에 투옥되었을 때에는 소설 <꽃의 노트르담> 및 자전(自傳)의 <도둑일기>를 썼다. 1947년에 주베가 <하녀들>을 상연한 것으로 극작가의 길을 열었는데, 이후 그 전작(前作)인 <엄중경계>를 비롯하여 <발 콘> <흑인들> <간막이>가 상연되어, 찬부(贊否) 양론을 낳았다. 그것들은 어느것이나 남색(男色)과 반역과 증오와 범죄가 지배하는 암흑의 세계를 가장 외설스럽고 난잡한 비어음어(卑語陰語)와 빛나고 투명한 시어(詩語)로써, 독창적이고도 난해한 문체로 그려내서 관객을 현대의 흑막세계로 안내한다. 그것은 반역과 악의 찬가(讚歌)이며, 순수성에의 역설적인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다모프, 아르튀르[편집]

Arthur Adamov(1908-?)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의 극작가. 소년시대는 스위스와 마인츠에서 보냈고, 파리로 나와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1950년에는 장 빌라르에 의해 <침입>이 상연되어 주목을 끌었다. <파로디> <핑퐁> <파오로 파오리>로 호평을 얻었다. 초기의 작품이 표현주의적인 데 반해서 최근의 역사극·정치극인 <71년 봄>이라든가 <남겨진 자의 정치>에서는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서사시적인 경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밖에 고르키, 뷔흐너, 고골리 등의 번안(飜案) 등이 있다.

아라발, 페르난도[편집]

Fernando Arrabal(1932- )

에스파냐령 모로코에서 태어난 에스파냐 국적의 프랑스 극작가. 마드리드에서 법률을 배운 후, 소설과 극작에 뜻을 두었다. 1958년 우선 두 권의 희곡집이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59년 <전쟁터의 피크닉>이 상연되었고, 그 후 <3륜차> <환도와 리스> 등을 계속 발표했다. 칼데론이나 로르카뿐 아니라 사드와도 통하는 그들 작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혼(魂)의 희생이 잔혹하게 그려져 있다. 최근에는 팝아트 등을 받아들인 새로운 연극을 모색하고 있다.

비에두, 프랑수아[편집]

Fran

ois Billetdoux(1927- )

미국인을 아버지로 하여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극작가·배우. 연극학교와 영화연구소를 거쳐 국립방송의 작가 겸 연출가가 되었다. 1951년에 처녀희곡 <13의 대실(貸室)>을 쓰고, 59년 <건배(乾杯)>로 주목을 끌었으며, 그 후 <텔페의 곳으로 가라>로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 후 <지구의 사정은 어떤가…> <흐린 뒤 맑음>이 있고, 지성(知性)과 서정성을 교묘하게 엮어내서, 현대의 부조리를 경쾌한 웃음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티, 아르망[편집]

Armand Gatti(1924- )

프랑스의 극작가. 모나코에서 태어났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신문기자로서 상을 받았고, 중국여행에서 취재한 희곡 <검은 물고기>로도 수상했다. 이후 <도로 청소부 오귀스트 G의 가공적(架空的) 생활>을 대표작으로 하는 브레히트의 서사시극(敍事詩劇)과 비슷한 작품이 있다.

프랑스의 연출가[편집]

뤼네 포, 오렐리앙[편집]

Aurelien Lugne­Poe(1869-1940)예술극단을 창립한 폴 포르의 후계자로서 앙투안의 자연주의적 연극에 대립한 상징주의적 연극을 주장하였고, 메테를링크를 비롯하여 입센 및 하우프트만을 프랑스에 소개하기도 하고, 크롬륀크에서부터 사라크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진 극작가를 배출시켰다. 그 유연한 절충주의로 한편으로는 자리의 <유뷔 왕>에 의한 스캔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상연이 불가능하다고 한 클로델의 희곡도 무대에 올렸다. 그가 창립한 제작극장은 처음에는 극단이었으며, 상설극장이 없었으나, 1920년에는 정원 4,000명 가량의 극장을 크리시 가(街)에 마련하여,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했다. 설비가 나쁜 점도 참작해서 무엇보다도 연기를 중심으로 한 간결한 연출에 중점을 두었다. 뤼네〓포가 죽은 후에도 극장은 그 이름을 그대로 남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미에, 피르맹[편집]

Firmin Gemier(1869-1933)

자유극장과 제작극장에 계속해서 출연하여 뛰어난 연기를 인정받은 배우였는데, 항상 큰 꿈을 지니고, 그것을 실현할 힘도 갖고 있었으므로 현대 연극의 선각자가 되었다. 국립 순회극단, 국립 민중극장, 서커스 무대에서의 <오이디푸스왕>의 제전적(祭典的) 상연, 축제일의 페전트의 연출 등, 그 어느 것을 보아도 오늘날의 방향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국립민중극장은 후일 장 빌라르에게 인계되어서 빛나는 발전을 이룩했다.

코포, 자크[편집]

Jacques Copeau(1876-1949)

현대 연출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 구상은 제미에보다도 훨씬 착실하고 순수했다. 본래 문학적 교양이 높았던 그는 연출 연기란 극작품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화려한 전위성(前衛性)보다는 참다운 뜻의 연극의 예술화와 상업적 해독의 배제를 목표삼았다. 또한 고든 크레이그나 아돌프 아피아 등의 주장을 소화하여 무대에서의 모든 쓸데없는 장식을 제거함으로써 간결한 시정(詩情)을 심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 주베와 협력하여 센강 왼쪽 기슭의 소극장을 개조하여 '뷰 콜롱비에 극장'이라고 이름 붙인 뒤, 콘크리트로 지은 상설 무대를 설치하였고, 거기에서 단순한 장치로 <상선 테나시티> 같은 사실적인 심리극에도, 그리고 클로델의 <교환>과 같은 시극이나 셰익스피어라든가 몰리에르와 같은 고전의 상연에서도 뛰어난 효과를 내었다. 코포는 이 소극장에서 무대와 관객과의 완전한 교류를 이상으로 하고 또한 연극의 개혁은 새로운 배우의 교육에 있다고 하여 뷰 콜롱비에 학교를 열고 후진 지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코포가 죽은 후에도 뷰 콜롱비에 극장은 항상 신선한 연기 종목을 채택하고 신진 연출가를 초대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뒤랭, 샤를[편집]

Charles Dullin(1885-1949)

코포의 인정을 받아, 그가 각색한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스멜디아코프 역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뷰 콜롱비에 극장에 가담했는데, 제1차대전 후에는 몽마르트르의 소극장에 아틀리에 극단을 설립했다. 코포의 이상을 이어받아 뒤랭은 이 극장을 일터인 동시에 연극학교로 정하고, 연극에만 정열을 쏟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젊은 남녀를 널리 모아, 뛰어난 팡테지와 강렬한 개성으로 칼데론의 <인생은 꿈>, 벤 존슨의 <볼포네>, 몰리에르의 <수전노>,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아샤르에서 사르트르까지의 신작을 소개하는 데도 힘썼다. 그가 주재한 이 뒤랭학교에서는 아르토, 바로, 비랄을 비롯하여 현대의 프랑스 극계를 짊어진 수많은 제자를 낳았다. 또한 아트리에 극장은 그 후, 정치가 출신의 연출가인 앙드레 발사크에게 인계되어 아누이의 작품을 중심으로 뛰어난 상연을 계속하였다.

주베, 루이[편집]

Louis Jouvet(1887-1951)

일찍이 배우를 지망하여 국립연극학교에 몇 번 응시했으나 그때마다 떨어져, 삼류극장에서 멜로드라마의 조연을 하고 있을 때 코포의 권유로 무대감독으로서 뷰 콜롱비에 극장의 창립에 참가하고 얼마 후에는 연출·장치에 있어서 코포의 한 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개성적이고 특이한 연출력도 발휘했다. 그러나 후일 끝내 소극장에 들어앉아 순수성을 지키려는 코포와 충돌하고 발란틴 테시에나 류센 보갈과 함께 그 당시 가장 화려하였던 '샹젤리제 극장' 안의 중극장(中劇場) '코메디 데 샹젤리제'로 옮겨, 무대의 허구(虛構)를 역용, 엄밀히 계산된 명쾌한 연출과 연기로 라틴적 지적 시정(知的詩情)을 낳았다. 로맹의 <크노크>나 아샤르의 <달님, 장>에서 명연기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극작가 지로두를 낳았고, 한평생 그와 떨어질 수 없는 협력자가 됐다. 고전의 상연에도 뛰어나, 특히 몰리에르의 <신부학교> <돈주앙> <타르튀프> 등에 독창적인 해석을 부여했다. 1934년부터는 '아르테네 극장'으로 옮겨가, 코메디 프랑세즈의 기술고문 또는 국립 연극학교 교수로 일했다. 2차대전 후에는 주네의 <하녀들>과 같은 난해한 작품을 연출하였다.

피토에프, 조르주[편집]

Georges Pitoeff(1884-1939)

조르지아의 티프리스에서 태어난 러시아계의 연출가로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가르침을 받았다. 제1차대전 중에는 스위스에서 소극단(小劇團)을 만들고 있었으나, 파리에서 상연한 르노르망의 <세월은 꿈> <낙오자의 무리>로 호평을 받아 에베르트에게 초빙되고, 샹젤리제 극장에서 주베와 경연했다. 라틴 정신의 주베와는 달리 피토에프는 북극적 상상력과 국제적인 레퍼토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가로서의 내적인 감동에 의해 극단적인 경제적 곤란을 보충하고도 남을 무대를 창조했다. 특히 체호프, 피란델로, 스트린드베리의 연출에는 따를 자가 없었으며, 부인과 함께 프랑스 극계(劇界)의 눈을 외국극으로 돌리게 하는 데 공헌했다. 극단은 루이 살르, 미셸 시몽 등 뛰어난 배우들을 포용하고 있었으나 재정난 때문에 상설극장을 가질 수가 없었으며, 다만 1934년부터 수년 동안 개설했던 객석 5백의 소극장 '마튜랑 극장'이 예외일 뿐이었다.

바티, 가스통[편집]

Gaston Baty(1882-1952)

바티는 유럽의 연출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배우를 겸하지 않았다. 청년 시대에는 극작가에 뜻을 두고 독일에서 공부하였고, 라인하르트의 영향을 받아 제미에와 알게 되어, 조수로 일하고, 1923년 소극단 '환상(幻想)의 친구'를 만들었다. 샹젤리제 극장 안의 소극장 스튜디오 데 샹젤리제에 초빙되어 걍총의 <창부(娼婦) 마야>와 르노르망의 <열풍(熱風)>으로 성공,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1930년부터는 몽파르나스 괴테가(街)의 소극장 '괴테 몽파르나스 극장'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주로 <보바리 부인> <죄와 벌> <마농 레스코> 등 소설의 각색과 뮈세의 희곡 등을 수많은 장면으로 나누어서 연출하는 데 놀라운 솜씨를 보였다. 그는 단순히 희곡에 충실한다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언어의 표현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무대적 요소로 연장시키는 것에 연출의 역할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연출가의 전횡(專橫)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의 풍부함과 무대 요소, 특히 조명의 사용에 의한 시각적인 예술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만년에는 고향인 리옹에서 인형극에 열중하였다.

아르토, 안토낭[편집]

Antonin Artaud(1896-1948)

그는 일찍부터 시작(詩作)에 손을 대어, 평생시인으로 있었으나, 파리로 가 뒤랭의 아트리에로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계속 피토에프의 극단에 속했고, 1927년에는 극작가 로제비트라크와 '알프레드 쟈리 극장'을 창립하여, 양 대전 사이의 전위극, 특히 초현실주의 연극의 대표적 연출가가 되었다. 그러나 상연의 평이 좋지 않아, 1932년에는 다시 '잔혹의 연극(Theater of Cruelty)'을 설립, <쌍시>를 상연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 후 발광하여 병원에 수용되었고, 전후에 퇴원을 하자 곧 사망하였다. 이처럼 연극인으로서의 아르토는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 인격과 혁명적인 연극관에 의하여 바로나 빌라르 등 젊은 연극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은 현대 전위극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바로, 장 루이[편집]

Jean­Louis Barrault(1910-1994)

뒤랭의 아트리에 극단에 들어가 팬터마임의 도쿠루라든가 안토낭 아르토와 알게 되어 1935년 이후 전위적인 팬터마임, 또는 소설의 각색에 의한 실험극을 해 보였다.

1936년, 코메디 프랑세즈의 호프였던 마들렌 르노와 결혼하고, 자신도 40년에는 코메디 프랑세즈로 들어가서 <죽은 여왕> <페도르>, 그리고 특히 <비단구두>를 연출했다. 1946년에는 독립적으로 르노 바로 극단을 만들고, 일찍이 오펜바흐가 세운 '마리니 극장'에 자리를 잡았다. 샹젤리제 가까이 가로수로 둘러싸인, 파리에서도 가장 호화스러운 이 대극장에서, 지드의 번역에 의한 <햄릿>을 스타트로, 라신에서부터 카프카, 몰리에르에서부터 아샤르, 지로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상연 종목으로 인기를 모았는데, 특히 클로델의 <크리스토프 콜롱의 서>의 연출에서 전체적 연극을 주장했다.

마침내 앙드레 말로 문화상의 알선으로 그때까지 코메디 프랑세즈의 제2극장이었던 '오데온 극장'에 초빙되어, 이를 테아트르 드 프랑스라고 개칭하고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독립하였다. 바로는 그때까지의 성공작을 재연출하는 한편, 이오네스코나 베케트 등의 전위적인 작품을 대담하게 택하기도 하고, 사상이라든가 연극관을 달리하는 신진 연출가들에게 장소를 제공하는 등 현재의 프랑스 극계(劇界)의 중심적 존재로 되어 있다.

빌라르, 장[편집]

Jean Vilar (1913-1972)

남프랑스 세이토에서 태어나 뒤랭의 <리처드 2세>를 보고, 아틀리에 극단의 학교에 들어가 1941년부터 소극단을 결성, 스트린드베리의 <죽음의 무도> <폭풍>, 엘리엇의 <성당의 암살>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는 주로 배우로서 아틀리에 극단에 출연하거나 영화에서 활약했으나 47년 아비뇽의 연극제를 교황궁(敎皇宮)의 뜰에서 거행했을때 제랄 필립의 협력을 얻어, 코포의 순수연극과 제미에의 제전(祭典)으로서의 연극을 한데 합친 새로운 연출양식에 성공했다. 그 방식을 1951년 이후 지휘를 맡게 된 국립 민중극장에도 적용시켜 몰리에르, 마리보, 셰익스피어 등의 고전에서나 브레히트, 엘리엇, 체호프, 오케이시 등의 외국극에서도 흑막을 배경으로 약간의 소도구를 이용한 개성적인 연출을 하였다. 12년간 국립 민중극장에 재임하여 학생이나 젊은 노동자의 인기를 모았으나 1963년 이곳을 떠나 '스칼라 극장'에서 오페라 개혁 등을 뜻하였고, '5월혁명'으로 비판을 받은 뒤로는 침묵을 지켰다.

프랑스의 극장[편집]

국립민중극장[편집]

國立民衆劇場

1912년 폴 본쿠르에 의해 발안(發案)되고 국회의 승인을 얻어 구(舊) 토로카데로궁에 설치된 프랑스 제3의 연극을 위한 국립극장. 제미에가 초대 극장장이 되었고 33년에는 플티에가 뒤를 이었으나 토로카데로궁이 파괴되고, 샤이요궁이 재건된 후로는 아브람, 알드베일 등으로 극장장이 바뀌었으나 그 광대한 무대와 2,800석의 객석을 가진 대극장의 운영은 쉽지 않았다. 1951년에는 장 빌라드가 책임을 맡아 제랄 필립, 마리아 카자레스, 조르주 윌슨, 다니엘 소라노 등 뛰어난 배우진을 갖추고, 독특한 연출과 관객동원 방식으로 성공하여 파리극계 중심이 되었다. 근로계급과 학생을 위해 입장료·개연시간(開演時間)을 잘 맞추고 내외의 정평있는 고전이나 현대극을 상연하였다. 63년 이후에는 윌슨이 뒤를 이었다.

코메디 프랑세즈[편집]

Comedie­Francaise

1680년 설립된 가장 오래되고 정통적인 국립극장인데, 제1차대전 후에는 일반극장의 번영에 비해서 점차 그 정채(精彩)를 잃어갔었다. 1936년, 극작가 에드와르 불데가 주사(主事)로 임명되고 코포나 주베의 협력도 얻어 여러 가지 개혁을 행하고, 46년 오데온 극단을 합병한 뒤 새로운 작품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게 되어, 욘넬이나 앙리 롤랑이 활약하고 지로두, 루노 등을 육성시켰다. 1959년 다시 오데온 극단을 잃었으나 자크 샬롱, 로베르 일슈, 아니 듀코 등을 중심으로 하여 몰리에르, 라신 등의 고전은 물론 페이도, 몽테를랑, 더 나아가서는 이오네스코 등의 현대극에도 뛰어난 무대를 낳고 있다.

국립지방연극센터[편집]

國立地方演劇Center

연극의 지방분산은 이미 제미에, 뒤랭 등에 의해 2차대전 전부터 외쳐졌으나, 코포에게서 배운 장 다스테 그르노블에서, 모리스 사라장이 툴루스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문부성의 장 롤랑 여사의 깊은 이해와 원조가 열매를 맺어서 1947년 최초의 동부연극(東部演劇)센터가 코르말에 설립된 데 이어 11개의 센터가 생겼다. 이들 중에는 국가의 보조금에 의한 것과 지방자치단체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는 것 등이 있는데, 전자는 순업(巡業)을 주로 하며 후자는 상실 소극장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연극활동에 있어서의 차별은 없으며, 연간 300명의 배우가 70종 이상의 연극을 상연하여 각 지방에서 140만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이 중에서는 앞서 말한 다스테, 사라쟝과 같은 베테랑 연출가 외에 자크 파아브리, 앙드레 레이바즈, 로제 프랑숑과 같은 신진 연출가·배우가 태어나, 아르망 가티와 같은 작가나 르네 아리오와 같은 장치가를 세상에 내놓고 있다.

불바르 극장[편집]

Boulevard劇場

19세기 후반부터 파리의 확장에 따라 쓸모가 없어진 성벽 자리에 산책을 위한 큰 한길(불바르)이 생기고 그 한길에 따라 상업 연극이 성하였다. 연애 삼각관계를 돈벌이로 들고 나온 부르주아 풍속희극의 중심지로서, 현대작가로서도 사샤 기트리, 마르셀 아샤르, 앙드레 루생, 사강, 카모레티 등이 가담해 뛰어난 오락극을 낳고 있다. 대표적인 극장으로는 짐나즈, 누보테, 바리에테 등이 있다.

그랑 기뇰 극장[편집]

Grand­Guignol劇場

파리의 샤프타르가(街)에 자리잡고 있으며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주로 상연하는 오락극장이다. 제1차대전 전부터 에드거 앨런 포의 각색등으로 최성기를 맞이한 일도 있었으나 그 후부터 빛을 잃게 되었다. 최근에는 겔드로드, 루생 등 약간의 문학적인 작품도 취급하여 파리의 명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유세트 극장[편집]

Yuset劇場

포켓극장과 함께 파리의 대학구에 있는 대표적인 소극장. 정원은 약 60명인데, 니콜라 바타이유 연출, 이오네스코 작의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의 흥행을 10년 이상이나 계속한 것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의 배우[편집]

프레네, 피에르[편집]

Pierre Fresney(1897-1975)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뮈세의 희곡으로 명연기를 보여, 여배우 이본 프랭탕과 결혼하고 상업극장에서 아누이, 루생을 상연했으며 영화에서도 활약한 두 대전 사이의 명배우이다.

벨, 마리[편집]

Mari Bell(1905-?)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코메디 프랑세즈의 명 여자배우의 한 사람으로서, 클로델의 <비단구두>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였으며, 즈네의 <발콘>에서도 활약하였다.

브라쇠르, 피에르[편집]

Pierre Brasseur(1905-1972)

압도적인 풍모와 정열적인 연기로 근래 큰 연극을 담당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의 배우였다. 사르트르의 신뢰를 얻어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 출연하였고, 아누이나 몽테를랑에서도 성공하였다.

푸이에르, 에드위지[편집]

Eduyge Feuillere(1911-?)극계의 귀부인이란 별명이 있다. 불바르에서도 품위 있는 연기를 보였고, 바로의 극단에 객연(客演)하여 지로두나 클로델의 작품에서 깊은 문학적 이해를 보이고 있다.

필립, 제라르[편집]

Gerard Philippe(1922-1959)

제2차대전 후,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요절(夭折)한 불세출의 명배우. 영화의 스타가 되어, 카뮈의 <칼리귈라>에 출연하였고, 빌라르와 함께 국립 민중 극장에서 여러 배역을 맡았다.

카자레스, 마리아[편집]

Maria Casares

에스파냐 출신이며, 강렬한 개성으로 카뮈의 여러 작품에 나오는 이상한 여주인공을 멋지게 연출했을 뿐만 아니라, 국립 민중극장으로 옮겨 <맥베스 부인>이나 마리보의 우아한 역으로도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