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세계각국의 정치사정/러시아(구 소련)와 CIS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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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연방의 성립[편집]

Soviet聯邦-成立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1917년 11월 7일(러시아 舊曆으로는 10월 25일) 레닌(V.I. Lenin)이 영도하는 볼셰비키 혁명에 의하여 수립된 세계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물론 이때의 사회주의란 서구적 의미의 민주적인 사회주의는 아니며,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행하는 공산당의 일당독재(一黨獨裁)이다. 또한 볼셰비키혁명에 의하여 타도된 정권은 부르주아정권이 아니라 러시아적 전제주의 정권(차리즘)이었다. 신생 볼셰비키정권은 1918년에서 1922년 사이에 외국의 간섭군과 국내의 저항세력에 의하여 내란을 치르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18년 9월에는 소위 '전시공산주의(戰時共産主義)' 체제를 펴고 모든 기업의 국유화, 곡물의 강제징수, 노동의무제, 식량배급제를 강행하는 한편, 소위 백색(白色)테러에 대해서 적색(赤色)테러로 응수하면서 정권을 공고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혁명 이후 분립되어 있던 러시아·백러시아·우크라이나·카프카스 공화국을 병합하여 소비에트 러시아 연방공화국이란 이름을 소비에트연방공화국으로 바꾸었다. 그 후 소련의 영토는 더 확장되어 15개 공화국으로 늘었다. 또한 볼셰비키정권도 혁명 직후에는 멘셰비키 국제파 및 사회혁명당 좌파 등 사회주의정당들과 연립정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내전기(內戰期)를 통해서 공산당 이외의 모든 사회주의정당들은 모두 비합법화하면서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확립했다. 그 후 소련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노동계급) 독재는 사실상 공산당 일당독재로 전락했고, 공산당 이외의 모든 사회주의정당을 반(反)사회주의로 낙인찍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내전기에 택했던 '전시공산주의'는 국내산업을 도리어 황폐케 하고 국민대중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이 도처에서 폭발했다. 레닌은 정책을 전환할 필요성을 통감하고 당내와 노동조합 내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신경제정책(네프)'이란 완화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네프는 1921년의 제10차 당대회에서 채택되었지만 당내의 반대파들은 이것을 굴복이라고 비난하면서 새로운 논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레닌은 이것을 자본주의로의 일시적 후퇴라고 말하고, 곡물강제징수제를 철폐하여 현물세제(現物稅制)를 실시했으며, 개인기업과 상업 등을 허용하면서 농민과 도시의 소시민층에 일시적인 양보를 했다. 그러나 레닌은 네프를 광산·은행·철도·대기업·무역 등 소위 국민경제의 근간은 국가소유로 남겨두면서 국민경제를 부흥시키는 한편,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준비기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네프는 레닌에 있어서는 일시적·전략적 후퇴였다. 이 기간에도 공산당의 일당독재는 그대로 유지·강화되고 있었다.

일국사회주의에의 길[편집]

一國社會主義-

네프 기간 중 레닌이 병사(1924년 1월)하기 전후부터 당내에서는 그의 지위를 계승하기 위한 권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제8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정치문제의 최고결의기관)원은 레닌·트로츠키·스탈린·카메네프·부하린의 5명이었고, 뒤에 지노비에프와 톰스키의 2명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은 당서기국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극히 무력했던 당서기국의 지위는 스탈린이 당서기장에 취임한(1920년) 것을 계기로 급속히 강화되었다. 처음(1923∼25년) 스탈린은 지노비에프·카메네프 등을 규합하여 강적 트로츠키 일파를 타도하고, 다음(1925∼27년)은 부하린·루이코프·톰스키 등 우파를 규합하여 트로츠키와 야합한 지노비에프·카메네프 등의 소위 좌익반대파를 타도했다. 그리고 세 번째(1928∼29년)로 스탈린은 자기와 합세했던 부하린·톰스키·루이코프 등을 우익반대파라고 해서 모두 숙청해 버렸다.

일국사회주의 건설[편집]

一國社會主義建設

당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은 1928년 이래로 '1국사회주의(一國社會主義)' 건설안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5개년 계획과 사회주의 공업화 정책을 단행하고 농업의 집단화도 강행했다. 192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소련에서는 3차의 5개년계획이 실시되었는데, 이 기간중에 중공업의 기초가 건설되고, 기술혁신이 이루어졌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방대한 군사력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스탈린의 연차적 계획에 의한 중공업 위주의 정책, 농업집단화 등 일련의 강행정책은 정치권력에 의하여 위로부터 단행한 러시아적 산업혁명이었으며, 이에 의하여 소련은 농업국에서부터 공업국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혁은 사회주의 혁명(社會主義革命)이라는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강행된 것이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빈약한데다 급속도로 단행되는 공업화와 집단화정책은 당내와 대중들 사이에 커다란 불평을 자아냈다. 더욱이 장기간에 걸친 극도의 내핍생활과 노동계급의 무권리상태, 관료주의(官僚主義)의 대두는 소비에트 국가의 이상과는 부합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국내의 동요를 막기 위해 이데올로기교육과 숙청이라는 방법을 병행하며 사회주의건설을 강행했다. 1934∼38년은 스탈린의 독재와 숙청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는데 이 기간중 당원·비당원을 막론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 희생되었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은 말살되고 스탈린의 광신적인 개인숭배가 소련 천지를 휩쓸었던 것이다.

한편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戰雲)이 감돌 무렵 그 무력을 배경으로 발트 3국을 병합하고, 핀란드의 일부 영토를 탈취하고, 히틀러와 야합하여 폴란드를 분할하는 등 노골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자행했다. 그러나 전쟁에 휩쓸려들지 않기 위해서 나치스 독일과 '불가침조약(不可侵條約)(1939)'을 체결해 놓고 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취했으나, 1941년 히틀러의 기습에 의하여 대전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의 존망을 결정할 큰 시련이었다. 스탈린은 재빨리 영·미 등 민주주의 연합국에 가담하여 대독전(對獨戰)을 치르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반(反)파시스트전쟁으로 규정했다. 제2차대전은 소련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으나 종전 후에는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했고, 동유럽과 아시아의 각지에 진주하여 위성국(衛星國)을 형성함으로써 방대한 공산권을 형성하고 그곳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대전 직후부터 소련과 서방진영간의 우호는 깨어지고 냉전(冷戰)이 시작되었으나, 그 속에서 소련은 전후의 부흥을 목표로 하는 제4차 5개년 계획(1946∼50년)을 추진하여 전쟁피해 복구에 주력했다. 이후 계속적으로 생산력 증대와 경제력 집적을 목표로 1980년까지 10차에 걸쳐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계획경제체제의 본질적인 모순과 자본·기술의 빈곤과 낙후, 비효율적인 경제정책의 운용 등으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평화공존정책으로의 변화[편집]

平和共存政策-變化

흐루시초프 시대[편집]

Khrushchev 時代

1953년 3월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후계자 문제로 당내에서는 새로운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집단지도(集團指導)의 원칙 밑에 당의 최고위간부들이 결속한 듯이 보였으나, 곧 내무상(內務相) 베리야가 체포·처형되고, 수상 말렌코프가 이어 사임하고, 그 후임자 불가닌도 밀려났다. 그리고 1958년 2월 당(黨) 제1서기 흐루시초프가 수상직을 겸임하면서 소련은 1964년 2월까지 흐루시초프체제 하에 들어갔다. 이에 앞선 1956년 2월의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폭탄적인 연설을 했다. 스탈린 격하운동(格下運動) 속에서 당중앙위원회는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내걸고 사회주의적 적법성(適法性), 집단지도제, 소비에트민주주의, 평화공존, '사회주의로 가는 다양한 길' 등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정책노선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소련내에서는 비밀경찰의 역할이 대폭 줄어들었고 경제의 중앙집중제의 지방분권현상이 나타났다. 스탈린에 의하여 무고하게 처형된 많은 사람들의 명예가 복권되는 한편, 문학·예술활동의 통제도 크게 완화되어 소련에는 해빙(解氷)의 기운이 감돌고 국민들도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비판 여파는 위성국들에까지 파급되어 폴란드에서는 반소폭동이 일어났고 헝가리에서도 소련을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나(1956년 10월∼11월) 공산권은 크게 흔들렸다. 결국 소련의 탱크부대가 헝가리혁명을 진압하게 되자 소련을 규탄하는 비난의 소리가 각국 공산당 내에서까지 일어나게 되어 세계평화와 각국의 주권을 존중한다고 주장해 온 소련의 위신은 크게 훼손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소련과 중국간에는 역사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이 일어났고, 이 논쟁은 양자간의 국경분쟁에까지 확대되어 두 나라의 당과 당의 대립은 국가 대 국가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동시에 소련공산당 내에서도 말렌코프·몰로토프·카가노비치·세필로프·불가닌 등 반당분자(反黨分子) 등의 집단이 발생했다. 권력투쟁 결과 이들은 모두 1958년 3월까지 흐루시초프에 의해 당과 정부의 요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시대와는 달리 이들이 국가반역죄로 몰려 처형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소련의 정치풍토 변화를 가리키는 사실로 볼 수 있다.

흐루시초프시대는 국제공산주의 운동도 다원화(多元化)되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결속된 국제공산주의운동(國際共産主義運動)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고, 공산권은 크게는 소련파·중국파·중립파 등으로 분열되었고, 동구제국은 소련의 외교정책을 지지하는 조건으로서 대내적인 자주성을 보장받았다.

트로이카 체제하의 소련[편집]

-體制下-蘇聯

흐루시초프는 1964년 10월 그의 내정, 특히 농업정책의 실패를 이유로 당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나 역사의 무대에서 탈락되었다. 흐루시초프의 뒤를 이어 소련에서는 브레즈네프(당서기장)·코시긴(연방각료회의 의장) 및 포드고르니(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의 3두(三頭)정치체제가 들어섰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그 후에도 소위 '흐루시초프 없는 흐루시초프체제'가 계속됨으로써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흐루시초프의 실각 후에도 중·소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으며, 동구제국이 소련의 지도권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은 그치지 않았다.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추구하자 소련과 동구 5개국의 군대가 침입하여 이것을 진압했다. 그러나 한편 소련은 서방진영과 계속 평화공존정책(平和共存政策)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미 1962년 10월 흐루시초프는 케네디 대통령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카리브 해협의 위기를 극복했고, 1963년 7월에는 미·영 등과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여 제3차 대전을 방지하고 평화의 국제적 조건을 확보하는 방향을 따르고 있었다. 브레즈네프·코시긴 정권도 흐루시초프의 노선대로 동·서 양체제간의 평화공존, 평화경쟁, 문화교류의 정책을 추종하는 동시에 기득권을 끝까지 수호하고 대국적 이기주의를 고수하는 데도 철저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해 오던 트로이카 체제는 1977년 브레즈네프 당서기장이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직을 겸임함으로써 권력의 단일화로 뒤바꿔졌다. 포드고르니 간부회의 의장의 실각은 상대적으로 브레즈네프 일인 체제의 강화를 가져왔고, 이것은 또한 대내외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밖으로는 서구 공산주의 운동의 독자노선화 및 카터의 인권외교 등의 대결이 불가피했으며, 안으로는 끈질긴 민권운동의 불길과 맞서게 되었다. 사실상 1970년대 초기부터 국가원수로 행동해 온 브레주테프는 당 지도층과의 이해일치로 브레즈네프 헌법 제정 및 의장을 겸임하여 후계자 문제와도 연관이 없지 않았다. <梁 好 民>

1905년의 혁명[편집]

-年-革命

러·일전쟁에 있어서 러시아군의 연속적인 패배로 차르정권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게 되자 억압과 궁핍 속에서 고통받던 노동자·농민층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1904년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다음해 1월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 부르는 노동자와 군대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고 잇달아 노동자와 농민의 데모와 파업이 각지에 번졌다. 이때 최초로 소비에트라 칭하는 노동자의 평의회(評議會)가 전국의 모든 산업도시에서 조직되었다. 차르정부는 10월에 흠정헌법(欽定憲法)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국민에게는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하며 듀마라고 칭하는 의회를 개설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이듬해인 1906년에 접어들면서 사태는 일단 가라앉게 되었다.

3월혁명[편집]

三月革命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됨에 따라 러시아 국내에서는 생활조건의 악화 때문에 노동자·농민들 사이에 불만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더구나 잇단 패전으로 군대의 사기도 극도로 떨어졌다. 이에 1917년 3월(러시아曆 2월)에는 페트로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의 1914∼1924년의 명칭)에서 노동자의 대 스트라이크가 발생하였다. 진압에 충돌한 군대들이 오히려 민중편에 합류하고 노병(勞兵) 소비에트가 조직되었다. 황제인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년)는 전선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혁명을 일으킨 군대에 체포되어 퇴위당함으로써 제정(帝政)은 붕괴되었다.

이것이 3월혁명이다. 당시의 소비에트에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사회민주당의 분파로서 소수파)가 다수를 이루어서 자유주의자와 협력해서 입헌민주당을 주축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성립시켰지만, 임시정부는 보통선거에 의한 국민의회를 소집해서 정체(政體)를 결정한다고 선언하였다.

11월혁명[편집]

十一月革命

3월혁명 후에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닌은 1917년 4월에 망명지 스위스로부터 귀국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라는 2중권력이 발생한 것은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市民革命)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사회주의혁명의 단계로 이행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임시정부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대표로 맞아들여 보강을 꾀했으나 코르니로프(1870∼1918, 군인)의 반혁명이 실패한 이래 노동자·농민·병사들 속에서 볼셰비키(사회민주노동당의 주류파로서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파)의 세력은 한층 증대하여 갔다.

11월에 들어서서 레닌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전체 러시아의 노병(勞兵) 소비에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해야만 된다고 호소하자, 이에 11월 6일 볼셰비키가 군대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전개하기에 이르렀고, 한편 임시정부는 전혀 저항도 못하고 붕괴되어 버렸다. 이것이 11월혁명이다. 혁명 직후 의회의 선거에서는 사회혁명당이 제1당이 되었고, 볼셰비키는 제2당이 되었다. 1918년 1월 사회혁명당은 의회에 기초를 둔 정부를 조직하려고 하였지만 레닌은 볼셰비키의 병력을 동원해서 의회를 폐쇄하고 볼셰비키의 1당독재정치를 수립하였다.

영구혁명론[편집]

永久革命論

영속혁명론이라고도 한다. 트로츠키(1877∼1940년, 혁명가)는 1905년 이래 러시아혁명에 있어서의 영구혁명 이론을 제기하였다. 즉 ①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혁명 속에서 지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부르주아혁명의 완성에 이어서 사회주의혁명이 개시될 것이다. ②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적·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사회주의체제가 러시아에서만 존속하기는 어렵지만, 러시아혁명은 모든 유럽의 선진국들의 사회주의혁명(社會主義革命)에의 신호가 되어 선진국들로 부터의 원조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개함으로써,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정권 존속을 서구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혁명의 승리에 의존하려고 한 이론이다.

전시 공산주의[편집]

戰時共産主義

1918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기까지 행하여진 경제정책. 당시의 소비에트 정권은 외국의 간섭전쟁과 백계(白系)러시아 군과의 내전(內戰)을 치르는 중에 있었으므로 국방상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대공업뿐만 아니라 중소공업까지도 국유화하고 공업의 관리를 엄격하게 집중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적계(赤系) 러시아군(赤軍이라 함)에게 식량을 보급하고 노동자계급을 아사 상태로부터 구출하기 위하여 1918년에는 곡물전매제 실시와 사적 상업(私的商業)의 금지, 잉여곡물 수용 등의 제반조치를 취하였다. 그 외에 1919년 1월의 포고를 통하여 국가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곡물과 사료의 전체 수량을 각 생산지역에서 할당하여 공정가격으로 농민에게서 매입하도록 하였다.

신경제정책(NEP정책)[편집]

新經濟政策

전시 공산주의의 비상대책에 이어서 국내 생산력의 회복을 골자로 하는 정책으로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모두 일시적으로 다시 부활시킨 일련의 정책, 레닌의 지도에 의해서 채용된 새로운 경제정책. 1921년 3월 소련공산당 제10차 대회에서 식량을 할당하는 징발제(徵發制)에서 식량세(食糧稅)로 이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식량세를 국가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전부 농민의 재량에 맡겨서 농민들에게 잉여곡물 매매의 자유를 부여하여 이때부터 신경제정책(NEP)이 개시되었다.

소비에트정권은 국민경제의 주축이 되는 대공업·운수·은행·토지 등을 장악하고 국영상업·협동조합상업·외국무역을 직접 관리하여 개인기업가·상인을 국가의 통제 밑에 두었다. NEP 정책은 이에 의한 상업 등의 어느 정도의 자유화는 농민의 물질적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게 하였고, 또한 경공업·중공업을 부흥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 정책은 경제의 주도권을 국가의 손에 두고서 자본주의를 허용하고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를 경쟁시키되 자본주의적 요소를 서서히 압도시킨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소련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사회주의적 요소의 역할을 점차 증대시킴으로써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만든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일국사회주의론[편집]

一國社會主義論

11월혁명의 승리 후 소비에트정권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서둘렀다. 당시 레닌의 생각으로는 서구혁명(西歐革命)은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성숙하리라 보고, 그때까지는 사회주의혁명의 성과를 일국내에서만이라도 정착시키는 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의무라고 보았다(레닌의 일국사회주의론). 이에 대해서 트로츠키와 부하린은 전세계의 모든 제국주의와 전쟁함으로써 세계사회주의혁명의 승리가 촉진되는 경우만이 11월혁명의 성과를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하여 강화조약을 반대하였다. 그 후에 스탈린은 1926년에 소련의 국제적 고립을 전제로 삼고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계급)의 국가적 원조가 없더라도 소련이 자력으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하였다(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 이때에도 트로츠키파는 서구(유럽지역)에서 승리를 얻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적 지지가 없다면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피의 숙청[편집]

-肅淸

이른바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기 위하여 조직내부의 극좌파, 우익 편향자, 분파주의자 등을 추방·형벌하는 것을 숙청이라고 부른다. 소련의 경우 스탈린(1879∼1953)에 의하여 자행된 1934∼38년 사이의 대규모 추방·살해·출당 조치를 특히 '피의 숙청'이라 부른다. 스탈린은 종래의 국가보안부를 내무인민위원회(NKVD)로 개편시켜 대숙청을 감행했는데 1930년대의 희생자만 해도 100만 이상의 소련 시민이 처형·투옥·유형당했다고 전한다. 볼셰비키 혁명가이면서도 숙청된 중요 간부로는 지노비에프, 카메네프를 비롯한 8명의 장군이 처형되었다.

경찰국가의 종결[편집]

警察國家-終結

1921년에 실시된 신경제정책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에서의 소련 시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한 것인 데 비하여 1930년대 이후의 농업집단화 정책은 사회주의체제의 확립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이 확인의 시대를 담당한 스탈린은 시민 전체의 계급투쟁 격화로만 사회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주장 아래 시민의 권리는 존중되지 않은 채 각종 탄압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스탈린 시대를 흔히들 경찰국가기로 풀이한다. 그러나 베리야의 숙청과 스탈린이 죽은 후 공산당은 스탈린 시대의 각종 악법을 폐지하여 경찰국가의 종언을 선언하고 형식적이나마 시민권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편집]

蘇聯共産黨第二十次大會

1956년 2월 24일 자정,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국제 공산주의운동 사상 대전환점을 이룩한 다음 내용의 명제를 발표하였다.

(1) 전쟁 불가피론의 부정과 평화공존의 추구 ― 제국주의가 있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며, 자본주의 국가와는 공존할 수 없다는 재래식 투쟁이념을 평화공존 정책의 강조로 변모시켰다.

(2) 평화 혁명의 주장 ― 폭력과 전쟁만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혁명론을 의회와 평화를 통한 혁명 가능론으로 전환시켰다.

스탈린 비판[편집]

Stalin 批判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제기된 스탈린의 정치 이념 비판의 기운은 당시 제1부 수상 미코얀뿐만 아니라 흐루시초프까지도 비밀회의 보고에서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공산권 전체로 퍼져나갔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이론과 조직자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정책을 관용성이 없는 권력 남용의 결과가 빚은 비극이라면서 개인숭배·피의 숙청·관료화 경향 등을 주로 비판했다. 이후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거리와 상점이 사라지고, 동상까지도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 반응이 뜻밖에도 동구 공산권으로 파급되어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 반스탈린 주의에 입각한 민족적 공산주의운동이 극렬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동구의 자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에서는 흐루시초프가 주장한 공산주의의 다양화 정책을 불신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오히려 중앙위 전체회의에서는 사태가 역전하여 그의 지위를 굳혀 주었다.

소련 경제관리기구의 개혁[편집]

蘇聯經濟管理機構-改革

소련의 국영공업 관리제도는 혁명후 몇 차례의 개혁을 거쳤다. 1930년대에서 1957년까지는 전연방적인 공업성과 각 공화국의 공업성으로 나누어져 관리되었는데 공업성은 때에 따라 20∼50여 개 정도가 있었다. 그런데 1957년 5월에 열린 최고회의에서 '공업 및 건설관리 기구의 일층 완전화' 방침이 승인, 중앙의 공업성 관리권을 지방 분권화에로 전환시켰다. 그 주요 내용은 전국토를 92개 경제지역으로 나눠 각각 국민경제회의를 설치하며, 각 연방 공화국성도 대폭 줄여 이 회의의 감독 아래 두게 했다. 또 별도의 국가 계획위원회는 국민경제의 단기 및 장기적인 종합 기획을 연구 검토하도록 했다. 그러나 1965년 9월 이후에는 다시 1957년 이전의 기구로 환원시켰는데 소련의 경제 제도는 근본적으로 이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 채택하고 있다.

반당 그룹[편집]

反黨 group

흐루시초프 공산당 제1서기가 행한 제20차 대회에서의 스탈린 비판 연설 및 혁명론과 외교상의 대변화 정책에 대하여 당내 일부에서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수상인 말렌코프, 부수상인 카가노비치, 외상인 몰로토프, 그리고 세비로프와 불가닌까지 합세하여 1957년 6월 당 중앙위 간부회의를 열어 흐루시초프를 제1서기에서 해임토록 결의했다. 흐루시초프는 이에 불복, 중앙위 전체회의를 열어 도리어 그들을 반당일파로 몰아 숙청했다.

전인민의 국가[편집]

全人民-國家

1961년에 열린 공산당 제22차 대회에서 채택된 새 강령으로 지금 소련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보다 공산주의의 건설을 위한 전인민의 국가로 성장·전환해야 된다는 이념이다. 따라서 인민의 투쟁보다 문화·경제적 수준의 향상에 주력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이념으로 삼고 있는 중국과 이데올로기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편집]

Brezhnev Doctrine

타국의 내정에 무력으로 간섭하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이론. 원래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 때 바르샤바 동맹군이 진입하여 탄압했던 사실을 "사회주의 성과를 지키는 것은 사회주의 제국의 국제의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한 데서 비롯되었다. 1970년 7월 소련과 체코의 신우호조약(新友好條約)에 명기된 이 말은 이후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그 국내에서 반체제적인 요소가 생기면 이웃 사회주의 나라들이 이를 제거시켜 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전개되어 동구에 대한 소련의 간섭을 합리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유고를 비롯한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대두와 친중국적 국가의 속출로 많은 비판을 받아 오다가 1971년 티토와의 베오그라드 선언에서는 이와 같은 제한주권론이 철회되고, 특히 유럽의 새 코뮤니즘 운동으로 내정불간섭 이론이 팽배하게 되었다.

유럽안보회의[편집]

Europe 安保會議

1954년 그로미코 소련 외상이 전유럽 안보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 개최를 제안한 이래 계속되어 온 서구 보안협력 회의. 1971년 소련 공산당 제24차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6개조의 평화안을 제안하면서 거듭 전유럽 안보회의 개최를 촉구해 왔는데 75년 7월 30일 헬싱키에서 35개국 정상회담을 열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유럽의 현재 국경선 및 분단 상태의 고정화를 바탕삼아 평화 정착·상호 교류를 확대하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외교정책[편집]

外交政策

브레즈네프의 기본 외교정책은 1971년 제24차 당대회에서 밝힌 6개 평화강령에 의거하고 있다. 즉 사회주의 나라와의 유대강화, 민족해방운동 지원, 평화 정착 등의 이념 위에서 대 서구·미국·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외교 전략을 펴고 있다. 중국에 대하여 관개개선의 제스처를 보였으나 반응은 냉담하였다.

브레즈네프 헌법[편집]

Brezhnev 憲法

소련의 헌법은 1924년 최초로 제정된 후 스탈린에 의해 1936년 수정된 소위 스탈린 헌법이 1970년대 중반까지 존치되어 왔다. 그러나 1956년 흐루시초프에 의해 스탈린 비판이 시작된 후 새로운 강령의 채택으로 수정이 논의되어 오던 중 1977년 소위 브레즈네프 헌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이 헌법의 특징은 ① 소련을 다시 사회주의적인 전인민국가로 규정하고, ② 당의 지도적 역할을 다시 강조했으며, ③ 대외정책의 장(章)을 제정하여 평화공존의 실행을 명시했고, ④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다 자세히 규정함과 동시에 사회와 국가의 이익·의무 수행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못박았다.

동헌법에 따르면 주택·교육·노동·의료·노인연금의 권리 등에 대한 경제적 보장을 비롯하여 시민적인 자유인권신서(信書), 통신 등의 비밀도 보장하고, 시민이 국가 기관의 제반사에 대하여 비판을 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이로 인하여 문책당하지는 못한다는 점까지를 규정하고 있다. 단, 집회·시위 등에 대해서는 근로자의 이익과 사회주의 체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만 국한시키고 있으며, 개인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무이행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 의무이행 조항에는 국토방위·국가의 위력과 권위를 강화하는 일까지 포함시키고 있어 서구제국의 헌법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또 인권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인간 고유의 권리라는 것과는 달리 국가보장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동구 및 서구 공산당과의 관계[편집]

東歐-西歐共産黨-關係

제2차대전 직후 소련 공산의 주도 아래 세계혁명을 이룩하려던 사회주의 국가간의 밀월 시대가 끝나자 중·소분쟁, 유고의 독자노선 등으로 인한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반크렘린화 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분열되어 가는 동구 공산권이나마 크렘린 노선의 일원화로 묶으려는 시도는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악화되어 1976년에 와서는 서구 공산당과도 타협을 해야만 될 정도로 복잡한 양상이 나타났다. 즉 동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공산당회의(1976)의 최종 발표문에서 소련의 지도권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말을 포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오히려 각 당의 평등과 사회주의에로의 독자의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주장이 채택되었다. 즉 프랑스·이탈리아·에스파냐 3개국의 공산당이 무력투쟁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포기하고 서구의 대의(代議)민주주의 틀 안에서 점진적이고 합법적인 정권획득을 선언함으로써 탈소독자노선을 추구하는 유로코뮤니즘(Eurocommunism)이 등장하였으며, 1940년대 이후 탈소독자노선을 추구해 오고 있는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 등에 대한 소련의 지도권 회복기도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그 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친소·중도 경향의 동구권 공산당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를 포기할 수도 없는 사정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1970년대의 동구권 친소국가군에 대한 소련의 지도력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을 통한 정치·군사·경제적 밀착관계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을 뿐, 과거와 같은 지도국가의 지위는 상실되어 갔다. 여기에 동구권의 자유화운동은 퇴조해 가는 소련의 지도력에 대한 또 하나의 난관이 되었다.

소련연방의 해체와 CIS의 탄생[편집]

제정(帝政) 러시아가 붕괴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수립되면서 레닌,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가 최고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어서 소비에트 러시아가 붕괴한 후에는 보리스 N. 옐친이 러시아 최고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옐친은 과거 절대적 권력을 장악했던 제정러시아 시대의 차르나 구 소련의 통치자들과는 전혀 다른 위상 속에서 절대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제정러시아의 붕괴는 주지하다시피 볼셰비키 혁명이라는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반면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붕괴는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다기보다는 기존의 정권 자체 내에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민족주의가 분출하면서 자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자멸의 모습으로 나타난 구(舊) 소련연방 붕괴의 핵심요인은 오랜 러시아 역사 속에서 형성된 러시아 고유의 정치문화 전통인 중앙집권주의(또는 중앙집중제:sentralizm)의 상실에 기인한 것이다.

제정러시아는 대혁명에 의해 붕괴되었지만 중앙집중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되었고, 새로 수립된 소비에트 정권 역시 중앙집권주의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러한 전통적 중앙집권주의가 전제화할 것을 우려하여 레닌은 민주적 중앙집중제(demokraticheskii sentralizm)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 사후 스탈린은 레닌의 우려대로 민주적 요소를 무시한 채 중앙집중제만을 추구함으로써 제정러시아의 전제군주 차르를 닮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스탈린의 통치관행은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로 이어지면서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구 소련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동맥경화증적 중증환자로 만들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사회를 치유하고자 등장한 것이 이른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르바초프가 스탈린과는 정반대로 레닌이 제시한 민주적 중앙집중제에서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전통인 중앙집중제를 무시하고 민주적 요소에만 집착함으로써(그것도 러시아의 전통적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서구의 대의제 민주제도에 의한) 소비에트 러시아를 붕괴의 길로 밀어넣고 말았다.

결국 각 구성공화국들을 연방으로 묶어놓았던 공산당의 권력이 1991년 8월 쿠데타로 무너지면서 연방정부와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전통인 중앙집권주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 소연방은 붕괴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옐친은 개혁의 방법과 속도를 놓고 그것들이 미온적이며, 특히 정치권력구조의 개편은 개인독재를 지향하고 있다고 고르바초프를 맹공격함으로써 당시 중앙집권제의 붕괴를 크게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사태발전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옐친을 중심으로 한 슬라브 3국의 반란과도 같은 민스크 협정과 뒤이은 알마아타 선언에 의한 CIS의 창설은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볼 때 그 운명이 신생 러시아연방의 중앙집중제 복원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옐친은 지난날 자신의 권력장악을 위해 중앙집권제의 붕괴를 스스로 촉진시켰지만 이제는 이를 복원시켜야만 하는 모순의 난관에 부닥치고 있다. 사실 옐친은 러시아의 중요한 정치전통인 중앙집권주의가 복원되지 않는 한, 신생 러시아연방은 물론 CIS 내에 각각 민주적 중앙집중제와 민족자결주의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잘 복원되느냐 못하느냐에 크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중앙집중제 복원 여부의 문제와는 달리 CIS의 장래는 향후 그 결속이 객관적으로 볼 때 러시아연방의 정치력에 따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측면이 강하다. 왜냐하면 러시아연방의 간섭과 독주에 불만을 품고 CIS로부터 탈퇴했던 아제르바이잔이나, 처음부터 CIS에의 가입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그루지아가 결국 다른 CIS 구성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치·경제·군사적 안정을 찾기 위해 CIS에 가입함으로써 오늘날 발트 3국을 제외한 구 소련연방 구성 12개 공화국이 가담하고 있는 CIS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러시아연방을 중심으로 결집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 소련의 연방제 국가구조[편집]

舊蘇聯-聯邦制國家構造

'노동자, 농민, 인텔리겐치아 그리고 나라의 모든 대소민족 노동자의 의사와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주의적 전인민의 국가'로 정의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S.S.S.R:Soiuz Sovetskikh Sotsialisticheskikh Respublik), 즉 소련 또는 소연방이라고도 줄여서 불리는 이 나라는 동유럽과 북유럽 및 중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였다. 여기에서 고찰하려는 연방제 국가구조라 함은 바로 다민족 국가로서 소련의 '민족적 국가구조'를 의미한다.

육지의 거의 1/6을 차지하고 있는 구 소련의 영토는 약 2천 240만 ㎢ 로서 그 면적의 75%는 아시아에, 25%는 유럽에 속해 있었다. 이처럼 유라시아(Eurasia) 두 대륙에 걸쳐 전개되고 있는 거대한 다민족 대륙국가인 소련은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몽골,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 등 12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인구는 1989년 통계로 2억 8,600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즉 1989년 인구조사 결과 구 소련의 총인구는 285,742,511명으로, 이 중에 러시아인이 145,155,489명, 우크라이나인이 44,186,006명, 우즈베크인이 16,697,825명, 백러시아인이 10,036,251명, 카자흐인이 8,135,818명 등의 순이다. 그리고 민족분리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리투아니아인은 3,067,390명(12위), 라트비아인은 1,458,986명(17위), 에스토니아인은 1,026,649명이었으며, 아르메니아인은 4,623,232명(8위), 그루지아인은 3,981,045명(10위), 아제르바이잔인은 6,770,403명 (6위), 몰다비아인은 3,352,352명(11위)이었다.

한편 행정구획상 소련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 키르기즈, 타지크, 투르크멘, 우즈베크, 몰다비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구성공화국(Sojuznaia respublika)과 20개의 자치공화국(Avtonomnaia respublika), 8개의 자치주(Avtonomnaia oblast), 10개의 자치구(Avtonomnyi okrug) 및 6개의 지방(Krai), 그리고 지방과 동격인 123개의 주(Oblast)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연방 붕괴 직전의 소련 헌법 제70조는 소련이 "사회주의적 연방주의의 원칙에 따라 제 민족의 자유로운 민족자결 및 평등한 권리를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자발적인 결합의 결과로 형성된 단일의 연방제 다민족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다.

사실 소련이 다민족 국가인 연원은 이미 소련의 모체이자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제국(1721-1917)은 물론, 그 이전의 모스크바왕국(1547-1721)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16세기 중엽 러시아의 통치자 이반 4세(雷帝, 재위 1533-1548)가 몽고제국(蒙古帝國)의 잔류인 볼가강 유역의 카잔한국(汗國)과 아스트라한한국(汗國)을 러시아에 병합하고 나면서부터 러시아는 이미 거대한 다민족 국가로 그들의 역사에 공식 기록되고 있다. 이로부터 1917년 2월 차르(tsar, 러시아 황제의 칭호)의 제정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러시아는 3세기 반여 동안 무제한의 전제권이 행사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절대왕조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역대 차르들과 러시아인 집권층의 소수민족에 대한 전횡적인 억압정책으로 '러시아제국은 제(諸) 민족의 감옥'이라고까지 불리었다. 그러나 차르제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으로 일단 청산이 선언되고 구러시아제국의 영토 내에는 각 지역 공산당들의 주도 아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1917년, 이하 러시아 연방공화국으로 표기), 우크라이나(1917년), 백러시아(1919년), 그루지아(1921년), 아제르바이잔(1922년), 아르메니아(1922년) 등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각각 하나의 독립적인 민족국가의 성격을 지닌 공화국으로 형성되었다. 이어서 이들 공화국의 공산당 및 소비에트 근로자들의 회의에서는 나라의 경제·국방 그리고 문화발전의 문제들을 각 공화국이 독자적으로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공동으로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각 공화국은 노동의 분업과 상호 밀접한 경제력 협력의 바탕 위에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기에 용이하도록 공화국들을 결합시키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처음 이 결합의 형태로서 모든 공화국들이 자치 권한을 가지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 구성원으로 들어간다는 방안이 많은 공산당 지도자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레닌은 이 방안이 각 공화국의 주권을 위축시킬 염려가 있다고 비판하면서, 평등한 권리를 가진 모든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합에 의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단일의 연방제 다민족 국가'를 창설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각 공화국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결합의 형태가 논의되었고, 최종적으로 레닌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1922년 12월 30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개최된 제1차 전(全) 연방 소비에트 대회가 러시아연방공화국, 카프카즈(트랜스 코카서스)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같은 날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 3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었으나 이 연방공화국은 1936년 다시 3개의 독자적인 공화국으로 분리·환원되었다), 우크라이나 및 백러시아 공화국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한다는 선언과 조약을 채택함으로써 소련은 탄생하였다. 그 뒤 소련 내에는 경제 성장과 민족문화의 발달에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더 형성되어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는데, 그들은 각각 1924년의 우즈베크와 투르크멘, 1929년의 타지크, 1936년의 카자흐와 키르기즈, 1940년의 몰다비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공화국 등이었으며, 이로써 소련은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제 다민족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연방의 동요[편집]

Gorbachov-改革聯邦-動搖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결성된 소연방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레닌의 정신에 따라 연방정부의 권한이 안정되고, 구성공화국들의 자치가 가능한 한 존중되는 국가연합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1924년 1월 레닌 사망 직후, 같은 달 개최된 제2차 전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1918년의

러시아 연방 공화국 헌법 대신 채택된 최초의 소련 헌법을 통해 소련 정부의 중앙집권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헌법적 신화와 정치적 현실' 속에서 아직은 공산당이 헌법에 일체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연방정부의 집권화는 바로 헌법상에 나타난 정부조직의 최고 권력기관들을 공산당원이 독점함으로써 가속화되었다. 즉 1925년 12월 제14차 당대회에서 당의 명칭이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으로 개칭되면서 당은 1인지배의 권력으로 전연방을 장악한 스탈린의 전횡(專橫)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1920년대 말에 시작된 나라의 공업화 계획이 연방정부의 중앙집권화 경향을 강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즉 전연방의 공업화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산업인민위원부가 전연방 통일인민위원부의 성격으로 재조직되면서 소규모의 지방산업만이 각 구성공화국의 관할권에 속했을 따름이며, 나라의 거의 모든 경제활동이 연방정부의 장악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정치·경제적 배경에 따른 연방정부의 중앙집권화는 구성공화국들의 자치권을 급속히 위축 내지는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주의가 레닌의 혁명이상과는 달리 허구화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스탈린 통치하의 중앙집권화로 인한 연방제 국가구조의 허구화현상은 1936년 12월 신헌법의 채택으로 '헌법적 신화와 정치적 실제' 속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즉 신헌법의 제126조와 제141조는 당의 존재를 소련 헌법 사상 최초로 공식 언급하면서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이 모든 공공 및 국가·노동인민단체의 지도적 핵심체임을 밝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소련이 가지는 연방제 국가구조의 성격은 1940년 몰도바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의 병합과 함께 각 구성공화국의 민족자립운동이나 자결권이 완전 봉쇄됨으로써 그 허구성이 극에 달하였고 공산당의 계서적(階序的) 권력구조를 통한 스탈린의 독재는 제정러시아의 차리즘(tzarizm)과도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로 변모하였다. 바로 이것은 '제 민족의 새로운 감옥'이었다.

휴머니즘과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중앙집권제만을 내세운 스탈린의 전횡적 연방정부 강화정책은 그 뒤 흐루시초프의 자의적인 주관주의와 브레즈네프의 타성에 젖은 관할·관료주의적 통치권 행사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1936년의 스탈린 헌법에 뒤이어 다시 신헌법으로 채택된 1977년 10월의 브레즈네프 헌법은 그 전문에서 '전 인민의 전위인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이 증대되었음'을 명기하고 나아가 그 조문을 통해서는 다음과 같이 당의 전횡적 위치를 스탈린 헌법보다 훨씬 더 명쾌하고 강하게 규정함으로써 구성공화국들의 자결권을 통제하는 연방정부의 권한이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85년 3월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더불어 그의 경제적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개된 글라스노스트(glasnost, 공개)와 민주화 정책은 예기치 못한 중앙정부 권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구성공화국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민족들 간에 분리·독립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야기됨으로써 이는 고르바초프 정권에 경제적 어려움과 더불어 최대의 정치적 시련을 안겨 주었다. 즉 1986년 12월 카자흐 공화국의 격렬한 민족폭동에서 시작해 1989년 발트 3국의 대대적인 분리독립 요구로까지 확대된 민족문제는 급기야 1990년 말까지 15개 구성공화국 모두가 독립 내지 주권을 선언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표 참조). 또한 이와 같은 여러 민족들의 분리·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1991년 2월 6일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공화국 최고회의 결의를 통해 공화국 명칭에서 '소비에트'와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삭제하였다. 이로써 1991년 초까지는 소련의 15개 구성공화국들 가운데 겨우 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등 3개 공화국만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원명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나머지 12개 공화국은 비록 연방정부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공화국 명칭을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만이 독립선언을 따로 하지 않았을 뿐 1991년 12월까지 모든 공화국들이 독립선언을 마쳤다.

사실 이상과 같은 각 구성공화국들의 분리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이미 고르바초프 자신도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시대를 거치면서 누적되어 온 민족정책의 과오를 198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7차 대회의 정치보고를 통해 "우리가 거두어들인 성과에 의해서 민족문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모순은 어떤 발전에도 있는 것으로서 이 분야에서도 그것은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어 그는 1987년 당중앙위원회 1월 전체회의 (총회) 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당의 간부 정책에 관하여'라는 보고연설 속에서 "우리가 투쟁을 벌이고 있는 부정적 현상과 왜곡이 민족관계의 영역에서도 보인다"고 언급하고, 1988년 7월 제19차 당회의가 채택한 '민족관계에 대한 결의'를 통해서는 민족관계 발전을 위한 지침을 제시했다.

'당의 민족정책강령' 채택 후 1990년 3월 고르바초프 자신이 소련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부터 1922년 소연방 구성 이래 지속되어 온 연방조약 개정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대통령회의를 중심으로 각 구성공화국들의 주권을 최대한 보장함과 동시에 연방 대통령의 중앙통제권을 보다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새로운 연방조약 초안을 마련하였다.

사실상 국명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S.S.S.R:Soiuz Sovetskikh Sotsialisticheskikh Respublik)에서 '주권 소비에트 공화국연방'(S.S.S.R:Soiuz Suverennykh Sovetskikh Respublik)으로 바뀌는 내용의 이 연방조약 조안은 12월 4일 소련의 최고 권력기구인 소연방 최고회의에 의해 압도적인 다수결로 확정되었으며, 12월 11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뒤이어 곧 열린 소련의 최고 권력기관이자 의결기구인 소연방 제4차 인민대의원회의에서 국명 변경은 반대 1,657명, 찬성 30명의 절대 다수로 부결되었다. 그리고 제4차 인민대의원회의는 전문(前文) 포함 3장 23조에 달하는 이 새로운 연방조약 초안을 좀더 수정·보완하여 보다 합당한 새로운 연방조약을 다시 작성하도록 결의하였다. 그 결과 대통령 산하 연방회의(聯邦會議)는 이 연방조약 초안보다 구성공화국들의 자원·외교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조정된 전문 포함 4장 25조 분량의 새로운 연방조약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 조약 초안의 보다 세부적인 주요내용은 '소련을 주권연방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있으며, 각 구성공화국에 자원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독자적인 국가기구를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는 권한, 과세의 권한, 국제사회의 완전한 일원으로서 연방의 국제적 약속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권한 등을 부여하고 있고, 또한 연방국경의 변경에는 구성공화국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규정을 담고 있다.

결국 새로 마련된 연방조약안에 의한 소련의 연방제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1922년 소연방 구성 이후 처음으로 1991년 3월 17일 실시되었다. 그 결과 전 유권자의 82%가 투표에 참가하여 투표자의 76%가 연방제 유지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민투표 결과는 사실상 모스크바를 비롯한 대도시의 낮은 투표율 및 지지율, 그리고 2억에 달하는 전체 유권자의 10% 정도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발트 3국과 몰다비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 6개 구성공화국의 투표 불참이라는 문제점 등을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국민투표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각 구성공화국의 주권을 강화시켜 주는 반면,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연방대통령의 권한으로 투표를 거부한 공화국들에게 연방제 유지를 강요하면서 난국타개의 길에 나섰다. 하지만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소연방의 붕괴과정[편집]

蘇聯邦-崩壞過程    고르바초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는 1990년 3월 11일 독립을 선언했으며, 30일에는 에스토니아가, 그리고 5월 4일에는 라트비아가 각각 뒤를 따라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리투아니아 공화국 최고회의는 나라의 독립회복에 관한 문서를 채택하였는데, 이 문서는 "민주 리투아니아 국가의 부활에 관한, 1918년 2월 16일에 채택되었던 리투아니아 평의회 문서 및 의회 결정은 이제까지 한 번도 삭제되지 않고 있다. 1940년 리투아니아의 소련 편입은 외부세력에 의한 리투아니아 국가의 주권침해였다"고 강조하였고, 동시에 "리투아니아의 최고회의는 리투아니아의 옛 이름 리투아니아 공화국 및 그 국가를 부활시켰다. 최고회의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과 리투아니아 공화국 영내에서 소련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법률, 그리고 1938년의 리투아니아 헌법을 기초로 한 잠정헌법을 채택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다른 두 공화국도 리투아니아와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이러한 발트 3국의 움직임에 대해 소연방 중앙당국은 1991년 1월 13일과 20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 각각 급기야는 무력에 의한 유혈탄압까지 강행하였다. 그러나 이들 세 공화국의 분리·독립운동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결국 동년 9월 6일에는 당시 각 공화국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소련의 잠정적 정책결정기관인 국가평의회(Gossoviet)의 제1차 회의에서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 3월 15일 인민대의원대회를 통해 소연방의 첫 대통령(결국은 마지막 대통령도 됨)으로 선출된 고르바초프 당서기장과 개혁의 속도 및 방법을 놓고 갈등과 대결을 벌이던 옐친이 같은 해 5월 29일 러시아 공화국 인민대의원대회에서 러시아 공화국의 최고권력기관인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옐친은 소연방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 공화국을 장악하게 되었고, 고르바초프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어서 6월 11일 속개된 인민대의원대회에서 러시아 공화국은 주권을 선언하고, 러시아 공화국 내에서 소연방 헌법에 대한 러시아 공화국 헌법의 우위와 공산당의 지도적 지위 및 사회조직에 관해 규정하고 있는 공화국 헌법 제6조 및 제7조의 수정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러시아 공화국은 사실상 소연방으로부터 이탈하여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고, 공화국 내에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과 당의 독재도 종식되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사태진행 속에서 결국 옐친은 1990년 7월 12일 개최된 제28차 소련공산당대회 벽두에 탈당을 선언하고 크렘린의 대회장을 떠남으로써 고르바초프와 정면대결에 돌입하였다. 또한 모스크바의 포포프 시장과 레닌그라드의 소브차크 시장도 이제 당대회가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에 현실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능력을 완전히 결여했다고 비판하면서 탈당을 표명했다. 그리고 당내 각 계파들도 사분오열하여 각각 입장을 달리함으로써 당은 이미 붕괴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 후 꼭 11개월 만인 1991년 6월 12일 옐친은 공화국의 인민대의원대회가 아닌 공화국 전체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러시아 공화국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옐친은 새로 제정된 러시아 공화국의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 선포권(宣布權)에 의해 고르바초프 연방대통령의 각종 포고령, 비상계엄령 등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곧 연방정부로부터 공화국정부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며, 옐친은 권한이 강화되는 한편, 고르바초프의 권한은 약화·쇠퇴됨으로써 소연방 체제의 붕괴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구 소연방 구성공화국의

독립·주권선언


구성공화국명


 선언일자(1990년)


 비고(1991년)


리 투 아 니 아

에 스 토 니 아

라  트   비 아

러    시    아

우  즈  베  크

몰    도    바

우 크 라 이 나

백  러  시  아

투  르  크  멘

아 르 메 니 아

타    지    크

아 제 르 바 이 잔

카    자    흐

그  루  지  아

키 르 기 기 스 탄


독립선언(3월 11일)

독립선언(3월 30일)

독립선언(5월 4일)

주권선언(6월 11일)

주권선언(6월 20일)

주권선언(6월 24일)

주권선언(7월 31일)

주권선언(7월 27일)

주권선언(8월 22일)

주권선언(8월 23일)

주권선언(8월 24일)

주권선언(9월 13일)

주권선언(9월 25일)

주권선언(11월 16일)

주권선언(12월 12일)


 

 

 

독립선언을 따로 하지 않음

독립선언(8월 31일)

독립선언(8월 27일)

독립선언(8월 24일)

독립선언(8월 26일)

독립선언(10월 27일)

 

독립선언(9월 9일)

독립선언(8월 31일)

독립선언(12월 16일)

독립선언(4월 9일)

독립선언(8월 31일)



자료ː「소련연구」, 통권 제12호(1991. 1)

8월 쿠데타[편집]

八月-coup d'

tat

주지하다시피 소연방의 형성·유지는 소련공산당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소련공산당의 붕괴는 곧 소연방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소련공산당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옐친의 공산당 탈당에 뒤이어 1년여 만에 발생한 1991년 8월 19일부터 20일 사이에 있었던 군부 및 보수파의 3일천하(三日天下) 쿠데타였다.

부통령, 총리, 국무장관, 내무장관, 국가보안위원회(KGB) 의장 등 군부와 정계의 보수파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흔들리는 자신들 그룹의 기득권을 보장받고, 보다 더 강력한 중앙당을 구축하여 고르바초프에 의해 와해 내지는 흔들리고 있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중앙집권제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8월 쿠데타였다. 이들 보수주의자들의 형태는 다분히 스탈린주의적 독재·전제정치의 복원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에 민주적 역사발전을 갈망하는 개혁세력의 저지에 의해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쿠데타 실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르바초프 역시 러시아적 정치문화 전통에 어긋나는 서구 식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자신이 제도적으로 구축해 놓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가동시키지 못한 채 실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선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8월 24일 밤 중앙 TV를 통해 발표한 성명서에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서기국이 쿠데타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자신이 당서기장직을 사임할 것을 밝힘과 동시에 당중앙위원회에 대해서도 해산을 권고하고 더 나아가 민주적 신당의 결성을 호소하였다. 동시에 소련공산당의 자산을 인민대의원대회의 관리 아래 둘 것과 군, 내무부, KGB 등 국가기관 내에서의 정당활동의 정지를 명하는 대통령령을 포고했다. 이는 사실상 국가 최고권자가 소련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로써 1917년 이래 74년간 소련을 지배해 온 소련공산당은 중앙집권의 독재적 지위를 상실하고 소련의 사회주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소연방의 붕괴를 초래하고 말았다.

고르바초프의 소련공산당 서기장직 사임이 공표되던 1991년 8월 24일 과거 소연방 15개 공화국들 가운데 제2의 지주였던 우크라이나가 공화국 최고회의의 결정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고, 당시 우크라이나의 최고권력자였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도 소련 및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중앙위원회로부터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어서 3일 후인 8월 27일에는 몰다비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해 9월 6일에는 당시 각 구성공화국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소련의 잠정적 정책결정기관이었던 국가평의회가 역사적인 흐름의 대세에 밀려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같은 날 오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를 대통령령으로 포고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사태진행 속에서 연방유지를 노력해 온 고르바초프의 입장은 점점 약화되고, 반면 고르바초프의 제반 개혁이 너무 미온적이며 그가 나라를 독재국가로 회귀시킬 수 있는 권력의 장치를 수립해 놓았다고 비난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각 구성공화국들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해 온 옐친의 입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991년 12월 2일에는 재정난이 가중되고 있는 소연방의 재무성을 러시아 공화국이 인수하는 사태가 벌어짐으로써 연방정부는 실질적으로 러시아 공화국, 즉 옐친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2월 8일에는 무력해진 고르바초프를 제쳐 놓고 옐친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크라프추크, 그리고 백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슈스케비치 등 슬라브 3국의 최고권력자들은 민스크의 근교 브레스트에서 회동을 갖고 독립국가연합의 창설을 전격 선언하였다. 이로써 소연방은 붕괴하고 말았다. 예견되기는 했지만, 이와 같은 갑작스런 사태발전에 당혹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다각적으로 연방유지를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CIS 창설이 선언된 지 17일 만인 12월 25일 스스로 대통령직 사임성명서를 크렘린의 집무실에서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1년 12월 25일 저녁 모스크바 중앙방송은 사임성명서를 낭독하는 고르바초프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소련은 죽었다'라고 보도하였다.

독립국가연합(CIS)의 결성[편집]

獨立國家聯合-結成

전술한 바와 같이 러시아의 옐친,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백러시아의 슈스케비치 등 슬라브 3국 최고지도자들이 1991년 12월 7-8일 양일간 백러시아의 수도 민스크 근교에 있는 브레스트에서 회동하고, 전격적으로 합의·공표한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관한 선언을 했다.

당시 이상과 같은 슬라브 3국의 결정에 대해 곧바로 12월 9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반발하고 나섰다. 즉 이번 협정은 그 정신이 추구하는 바는 긍정적인 면이 있기는 하나 국민들의 최고대표기관인 인민대의원대회에서 논의되지 않은 채 헌법적 절차를 무시한 불법적 행위이며 현실적으로는 '소련인의 안보이익'에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소련이 '국가로서 존속 및 민주적 개혁을 촉진하는 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이와 같은 항의성 비난성명에도 불구하고 12월 10일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두 공화국 최고회의는 CIS 창설에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2일에는 카자흐, 우즈베크, 투르크멘, 타지크, 키르기즈 등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계 5개 공화국이 CIS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나섬으로써 CIS가 곧 소연방을 대체하는 국가간의 조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12월 17일에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회담을 통해 1922년 12월에 출범한 소연방은 해체되고, 1992년 1월 1일부로 CIS가 출범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결국 12월 21일에는 카자흐 공화국의 수도 알마아타에 구소연방 구성 공화국들 가운데 발트 3국과 내란으로 여념이 없는 그루지아 등 4개국을 제외한 11개 공화국 정상들이 모여 독립국가연합 창설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소연방은 소멸하고 CIS가 탄생하였다.

옐친과 러시아 연방[편집]

El

tsin-Russia聯邦

1918년 창설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이나 1922년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SSSR)은 진정한 의미의 연방제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소련연방의 해체 이후 새로 등장하게 된 독자적인 연방 형태의 국가인 러시아 연방이 그 이전의 소연방제와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은 앞으로 러시아의 연방주의 구조와 특성, 그리고 발전방향을 가름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첫째, 행정단위의 구성 면에서 소연방은 단순히 민족단위 중심의 구조를 갖는 반면에 러시아 연방은 민족적·지역적 구조와 더불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단순한 지역적 구조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러시아연방의 구성공화국은 체첸을 포함하여 21개이다. 둘째, 이 공화국들은 주로 구소련에서 자치공화국의 지위를 누리던 자치 행정구역으로 구소련의 연방공화국보다 훨씬 적은 권한을 갖고 있으며, 대부분 공화국(15개)에서 공화국 이름의 민족은 소수에 그치고 있다. 셋째, 상당수의 공화국들이 러시아 내륙에 처해 있어서 타국과 경계를 같이 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러시아와 구소련 연방 구성에서 차이점들은 러시아연방의 해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옐친 대통령의 지도부는 구소련에서부터 유래된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첫째, 소련 붕괴의 원인이 되었던 민족단위의 자치구역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점에서 소련 붕괴와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을 도외시할 수 없다. 물론 신헌법에 의하면 러시아연방 내의 공화국은 소련연방의 공화국과 달리 연방 이탈 권한을 헌법상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타타르, 체첸에서의 분리독립 운동의 열기를 생각하면 법적인 허용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둘째, 연방구조 면에서 보이는 불균형의 문제다. 러시아연방의 구조를 보면 영토의 70%와 인구의 80%가 지역적인 행정단위(지방과 주)로 구성되어 있으나, 전통적으로 이들이 누리는 경제적·정치적 권한은 민족단위의 공화국보다 적다. 이 지방(Krai)과 주(Oblast)의 지도자들은 고르바초프 시기부터 이러한 지위를 정치적 및 경제적 차별로 인식하고 이를 철폐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이 문제의 중점은 연방구조가 여러 계층의 행정단위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구성단위 간에 지위에서의 차별이 크다는 데에 있다.

셋째, 러시아에는 연방제를 원활하게 실현할 수 있는 정치문화적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방주의의 실현을 위한 조건으로는 비교적 유동적이나 동질의 사회일 것, 갈등을 폭력에 의존하여 해결하기보다는 타협에 의하여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을 것, 사회적·경제적 다원주의(pluralism), 정치적 관용, 그리고 민족적·지리적 조건에 의하여 의사소통의 장애가 없을 것 등이 열거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문화전통이 러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부정형적인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가 지배하여 왔고, 복수정당제의 정치환경은 아직 미숙하며 정치지도층의 정치경험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진정한 연방제의 실현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옐친 지도부는 어느 정도의 지방분권화는 허용하되, 러시아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민족 단위의 공화국이 통합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단기간 내에 파악한 것 같다. 이러한 입장에서 지방(공화국, 지방, 주, 시, 자치주, 자치구) 정책은 한편에서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소홀히 하면서 민족 간에 그어진 경계선을 아예 없애버리려는 시도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옐친 지도부를 포함한 많은 정치가들은 러시아 연방이 시장경제 체제로 나아가는 데서는 공화국과 지방(Krai 이하 단위)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협조는 그들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부여받을 때 가능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위와 같은 위치에서 나온 첫 조치가 1992년 3월에 맺어진 중앙과 연방구성원 간의 3단계에 걸친 연방조약이다. 이 조약은 중앙과 공화국 사이, 중앙과 지방 및 시 사이에 맺어졌다. 타타르와 체첸을 제외한 모든 연방구성원이 이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일정한 한계의 대외정책과 대외무역을 포함한 새로운 권한들을 허용하고 있다. 조약의 일개조는 공화국의 토지와 천연자원이 그 곳 주민들에게 속하며, 소유권 문제와 토지, 천연광물, 수자원의 처분권은 연방과 공화국 쌍방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다른 연방구성원들은 공화국처럼 천연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허용받지 못하고 있으며, 토지와 천연자원의 소유권도 그곳 주민에게 속한다는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이 조약은 명백하게 연방구성원 간의 지위를 구별하고 있으며, 이는 지방 지도자들의 불만을 증대시키고 있다.

이 연방조약이 조인된 직후 공화국과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 조약의 토지 사용과 천연자원의 이용에 관한 조항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세부 입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연방화의 강력한 기운에서 문제되었던 것은 탈세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치는 없었고, 세제(稅制)는 구공산주의

체제와 다를 바 없었다. 말하자면 연방구성원의 모든 세수(稅收)는 연방예산에 포함되고 중앙 연방구성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이는 종종 정치적 압력의 수단이 되어 왔다.

연방공화국에서 분권화를 실제로 실행하기 위한 조치들이 연방조약체결 이후 줄곧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1992년 4월 이후 1993년 가을까지 계속되어 온 옐친 대통령과 의회 간의 권력투쟁이 국내상황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새로운 헌법제정에서 권력분배 면에서 서로 자기편에 유리한 권력구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와중에서 각 정치세력은 공화국과 지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경쟁하였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옐친 대통령은 각 공화국에 비현실적인 권한배분을 약속하지만 그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다. 그는 1993년 4월의 국민투표에서도 전체 공화국 수의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으며, 각 공화국의 요구를 반영한 옐친의 신헌법안도 그들에 의하여 유보되었다.

옐친 대통령은 지방과 공화국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1993년 여름에 구성된 신헌법을 위한 헌법의회에서도 그 최종 헌법 초안에 중앙과 연방구성단위 간의 권력배분과 지방의 권한을 공화국과 같게 하는 문제를 다루도록 했다. 이 헌법 초안에 따르면, 공화국을 주권국가로 표현했고, 공화국의 사용 언어도 각 공화국의 민족언어를 러시아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화국과 동등한 지위를 주장하는 지방(특히 Krai와 Oblast)의 요구에 대하여는 헌법초안에서 모든 연방 구성단위는 연방중앙에 대하여 동등한 권한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1992년 3월의 연방조약을 헌법에 포함시키되, 연방구조 자체를 중앙과 연방구성원 간의 조약에 기초한 것으로 하자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연방이탈권도 역시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옐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3년 9월 21일 의회를 강제로 해산할 때까지 신헌법을 위한 옐친과 지방 및 공화국 지도자들과의 타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993년 9월 이후 10월 4일 의회건물을 무력으로 장악할 때까지도 지방과 공화국은 옐친의 의회해산을 비난하고, 오히려 중앙정치에 발언권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모스크바의 혼란 속에 지방과 공화국 지도자들은 페테르부르그에 모여(39명의 공화국 의회 및 소비에트지도자와 9명의 지방행정부의 수뇌) 연방중앙의 입법권을 연방구성 단위의 집합체로 이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이 러시아연방의 구성원을 이룬 지방 및 공화국 지도자들이 중앙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는 아직도 권력의 향배가 제도적인 장치보다 우선하며, 이러한 비정형적인 연방구조는 매우 취약하다고 하겠다.

1993년 12월 12일 국민투표에 부쳐진 신헌법은 러시아연방 구조 면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확실히 하고 있다. 첫째, 공화국을 주권국가로 규정한 항목은 제외되었고, 둘째, 연방과 분리된 시민권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셋째, 기존 연방조약의 내용은 제외되며, 넷째, 연방구성원의 특수지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헌법회의의 1993년 7월 초안을 그대로 인정한 부분인 연방중앙과 연방구성 단위 간의 관계는 구성단위의 크기에 관계없이 각각 동등한 것으로 했으며, 민족어를 공화국에 한해 러시아어와 동등한 공용어로 인정했고, 공화국은 자체헌법을 갖고 지방은 규칙을 갖도록 하였다.

신헌법은 또한 연방국가의 기본적인 입법부 구조인 양원제를 도입하였다. 연방제의 특성인 상원(연방의원)은 89개의 연방구성 단위(21개 공화국, 6개 지방, 49개 주, 2개 연방직할시, 1개 자치주, 10개 자치구)에서 각각 2명씩 동등하게 대표하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중앙과 지방의 공동의 사안(교육이나 보건)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고 있다(헌법 제72조).

단지 공화국과 지방은 중앙정부의 단독권한이나 지방과의 공동권한으로 밝히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는 권한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제 73조). 더구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부문에서 중앙이 권한을 행사하는 권력구조는 연방제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특히 신헌법은 지방과 공화국의 권력기관에 대하여 아무런 규정도 두지 않고, 권력기관의 구성 자체가 연방법률에 의하여 변경될 수 있도록 하였다(제 77조).

러시아 정치의 장래[편집]

Russia 政治-將來

12월 총선거 결과와 신헌법의 채택은 러시아의 정치가 정통적인 권위주의 체제로 복귀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을 제기하고 있다. 차르의 절대주의적 통치나 구소련 공산당의 전권적 통치는 정치권력을 분권화하고 제도화하기보다는 집중된 정치권력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전통을 남겼으며, 정치권력기관의 법적·기능적 역할보다는 의인화(personalization)된 권능영역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낳았다. 이러한 정치적 전통이 10월 사태까지 몰고 온 의회와 대통령간의 갈등 배경이 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될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국가의회의 개혁주의자들은 의회가 입법활동에만 집중할 것을 강조하지만 대부분의 의원들은 신헌법에서 부여하고 있지 않은 정부의 업무를 감독하고 조정하는 역할까지 원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러시아의 의회는 구헌법에서 보장된 권위 회복을 요구할 것이며, 대통령이 이에 대항하여 신헌법에 보장된 권한을 남용한다면 권위주의적 통치라는 자명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한편, 옐친이 신헌법에 부여된 권한을 정치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무기로서가 아니라 타협과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한다면 러시아의 정치는 불안정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정치권력을 기관이나 제도보다는 의인화하여 인식하는 정치문화를 고려한다면, 11월 총선거와 신헌법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정치체제의 성공 여부는 대통령의 지도자적 자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안 옐친의 통치형태는 신헌법하에서 옐친이 권위주의적 통치를 행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게 권위주의적 권력을 부여하는 신헌법이 파시즘과 공산주의 세력의 부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것은 역설적으로 러시아 민주주의의 장래를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의 드골과도 같은 호의적 권위주의 통치를 옐친이 행할 수 있다면 러시아의 민주화와 개혁전망은 밝다고 하겠다.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의회 중심의 정치제도 또는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권력분립제도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러시아적 상황을 경시한 이상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정치의 분열현상은 체제적 위기까지 초래하였으며 반대세력 간의 타협과 협상이 결렬되는 상황 하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균등한 권력분립을 이룩할 수가 없다. 더구나 법치주의의 전통이 미약하고 법에 대한 도구적 관념이 지배적인 상황하에서는 오히려 헌법적으로 강력한 권한의 뒷받침하에 체제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12월 총선거 후에 보다 극단적인 정치이념의 등장과 이에 따른 분극화 현상은 원활한 의회활동을 기대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위한 과도기적 현상으로서 선거제도와 같은 민주주의가 보장된다는 것은 러시아가 민주화를 추진하는 데 기본적 요건을 만족시킨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의회 중심적인 민주주의를 확립한 경험이 없으며 상대적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지도자에 의해서 통치되어 왔다. 오늘날의 러시아 상황에서 대통령 중심의 정치체제를 지향하고 있다. 단지 문제는 대통령 스스로 법적으로 보장된 권한을 실행하는 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통치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의회와 일부 지식개혁인들은 법적으로 강화된 대통령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의회 중심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국가권력과 다양한 사회세력을 연계시켜 주는 정당정치가 뿌리를 내린다면 의회 중심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의회중심주의 주장은 또다시 대통령과 의회 간의 권력분점을 위한 갈등의 재발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떻든 다른 많은 정치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지도력과 의회의 견제력 회복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러시아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