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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태평양지역 제국의 관계〔서설〕[편집]

韓國-太平洋地域諸國-關係〔序說〕

한국 외교는 제1공화국 시기의 정초기, 제2공화국 시기의 쇄신기, 군사혁명시기의 강화기를 거쳐 제3공화국에 이르러서는 발전기를 맞이하여 한국을 '아시아 속의 한국' 또는 '세계 속의 한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역정(歷程)을 거치는 동안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제국과 현실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그것도 특히 제3공화국 단계에 들어서고부터였다.

당시 한국은 국제정치의 다원화(多元化)와 중국 주변에서의 새로운 국제긴장의 조성이라는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새시대외교의 기본좌표'의 하나로, 아시아 반공체제의 강화와 지역내 제반 협력의 증진을 통해 추구해 나갈 것을 정하였다. 종래 진영외교(陣營外交)의 테두리 안에서 수직관계에 있었던 한국의 외교는 다원적 세계 안에서의 수평관계로 전환되는 가운데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외교기반을 확장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 동안 한국은 월남파병, 한·일 국교정상화 등으로 아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넓혀나가는 한편 반공 전선의 구축을 강화하기 위한 동남아 외교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1975년 인도지나반도의 공산화 이후 태평양 지역의 외교 상황은 급격히 변모하여 많은 국가들이 중립화 경향을 표방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한때 대양주의 국가들간에는 노동당 정권이 들어서서 남북한과의 등거리 외교를 추구하던 적도 있었다. 한국은 이런 국가들과도 적극 외교관계를 유지·강화하면서 안보외교의 성과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인도지나 사태 이후 동남아 지역에서의 공산화는 한국 외교에 달갑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아스팍을 통한 지역협력[편집]

ASPAC-通-地域協力

이동원(李東元) 외무부장관 때 한국의 선구적인 외교노력이 결실을 보아 1966년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제1차 각료회의를 개최한 결과 창설된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는 한국·오스트레일리아·중국·일본·말레이시아·뉴질랜드·필리핀·타이·남베트남 등 9개국을 회원국으로 하고 라오스·인도네시아를 업저버로 하여 발전하여 왔다. 회원국 상호간의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분야에서 협력을 증진함으로써 자유·평화 그리고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공동사회(共同社會)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지역기구는 그간 서울에서의 제1차 각료회의(1966년)와 방콕에서의 제2차 각료회의(1967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에서의 제3차 각료회의(1968년), 일본 도쿄(東京) 남방 가와나에서의 제4차 각료회의(1969년),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서의 제5차 각료회의(1970년),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의 제6차 각료회의(1971년)에 이어, 1972년 두 번째로 서울에서 제7차 각료회의를 개최하면서 아시아·태평양이 국제정치문제에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아스팍의 이념·성격·기본원칙 등을 확립하고 상설적인 지역공동체(地域共同體)로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세웠다.

특히 1972년 서울에서의 제7차 각료 회의에서는 평화공존과 국제질서의 개편을 지향하는 70년대의 세계 대세에 순응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조연설 내용이 회권국들의 동조를 얻어, 아스팍을 지역내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비적대적·비정치적·비군사적인 경제·사회·문화·기술면의 순수한 지역협력 기구로 발전시켜 비회원국까지도 문호를 개방해 나갈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아스팍은 이런 사업 목적을 위하여 사회문화센터·경제 협력센터 등 많은 부속기관을 설치하여 활동해 왔으나 중국의 유엔가입을 비롯한 국제정세의 변화로 1973년 상임위원회에서 각료 이사회의 개최를 무기연기하여 사실상 활동을 않게 되었다.

마닐라 정상체제의 기능변모[편집]

Manila

頂上體制-機能變貌월남전쟁에 적극 참여했던 나라인 한국·미국·타이·필리핀·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7개국 원수들이 회동한 1966년 10월 24∼25일의 마닐라 정상회담에서는 월남을 중심으로 점증하는 공산침략을 격퇴하려는 자유제국의 공동결의를 다짐하고 전쟁수행 과정에서나 분쟁해결 과정에서 참전국(參戰國) 간에 상호협의할 체제를 마련한 외에도 아시아·태평양 전역을 안전과 복지를 위한 하나의 협력체제로 발전시키려는 데 있어서 단합할 것을 다짐하였다. 아스팍체제와 비슷하기는 하나 이 마닐라정상체제, 다시 말해서 월남참전국 협력체제는 번영의 필수적 전제요건인 안전보장을 위해서 지역적인 집단방위(集團防衛) 노력에 보다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월남 참전국 외상회의는 1967년에 워싱턴에서 제1차 회의를 개최한 것을 기점으로하여 제2차 회의는 이듬해 워싱턴에서, 제3차는 1969년 방콕에서, 제4차는 1970년 사이공에서, 그리고 1971년의 제5차는 서울에서 각각 개최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반공 구축망을 다짐했다. 그러나 중국의 유엔 가입과 월남전의 종결 기미가 나타나 참전국들은 자국의 독자적인 외교정책 추진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게 되어 후속적인 결속은 사라지고 말았다.

월남파병[편집]

越南派兵

월남정부의 요청 및 미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국은 공산침략을 경험한 국가로서 아시아지역의 안보와 자유수호를 위해 1964년 9월 11일 1개 의무중대(醫務中隊) 및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한 것을 필두로 하여 맹호·청룡·백마부대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지원단(軍需支援團) 및 백구부대 등 1개군단 병력을 파월하여 미국 다음으로 월남전에 깊이 개입하였다. 파월 후 한국군은 월남평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월남문제에 대해서 큰 발언권을 행사했다. 1966년 10월 마닐라에서 열린 참전국 정상회담에서는 주도적 지원국가라는 점에서 박대통령이 기조연설 행하고, 월남평화방안으로서 협상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중지 등 구체적 성의를 보일 것, 월남의 의사를 존중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월남전에의 참전은 한국으로서는 최초의 해외파병으로서, 이를 통해 국위(國威)를 선양할 수 있었다는데 의의가 있거니와 동시에 월남전의 특수한 사정에 따른 경제적 이득이 부수되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며, 한국안보 문제와 관련, 한국군 현대화를 골자로 한 브라운각서(1966년 3월)를 낳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미국의 월남전의 월남화계획에 발맞추어 한국도 점차 주월군 철수를 시작, 1973년까지는 완전히 철수했고, 그후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인도지나사태 이후의 동남아 외교[편집]

印度支那事態以後-東南亞外交

아스팍을 주도하면서 아시아 제국간의 반공 보루를 다져오던 한국 외교는 1975년 월남의 공산화에 이어 라오스·캄보디아까지 적화됨에 따라 궤도수정을 해야 될 새 단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월남에 국군을 보냈던 한국은 세계 외교무대에서 공산 월남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와 비동맹회의 등에서 마찰을 일으키게 했다.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의 공산화는 비단 한국뿐이 아니라 그간 친미 반공노선을 추구하던 이 지역의 모든 나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어 독자적인 외교노선의 추구를 실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1976년에 미국에서는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어 대동남아 정책에 대한 인권문제와의 결부 등으로 불안이 겹치게 되자 이 지역 국가들은 자구책으로 탈미(脫美) 중립화 정책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역 국가들은 개별적 활동으로 동남아의 중립화 목표를 추구하는 한편 1976년 2월에는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서 수뇌회담을 열고 외부의 내정간섭을 배격하는 등의 자주 연대성을 강조한 우호협력조약을 조인했다. 이처럼 정치적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외부의 간섭을 배격하는 중립화를 내걸면서 경제협력에서는 지역내의 협력을 강조하는 아시안 협력선언을 채택했다. 한편 필리핀은 아시안 외상회의에서 '초강대국의 보장 아래 동남아에서의 강대국의 각축과 지역내 간섭을 배제하며 이 지역 국가들만의 영향권으로 선언'하는 세칭 '아시안 독트린'을 제의했다. 또 인도지나의 새로운 정치질서에 대처하기 위하여 이 지역 국가들은 중국 및 소련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서두르는 중·소 양국과 국교를 맺고, 싱가포르도 대중국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동남아 지역의 정치적인 변화 속에서 일본은 경제협력을 통한 반공노선의 강화를 지원하는 입장을 유지하는 한편 자국의 무역증대를 꾀했다. 따라서 한국은 이 지역에서 무역 증대를 통한 경제적 외교와 반공 강화를 위한 중립화 외교를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