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종교의 새 기운/천주교의 전파와 교세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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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전파와 교세 확대〔槪說〕[편집]

천주교는 서양문화의 유입(流入)과 더불어 전래되었다. 그것은 명(明)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서 서양의 문화가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새로운 종교의 전파에 대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이수광(李?光)·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 같은 실학자들이었다. 천주교가 본격적 신앙 실천운동으로 들어가고 따라서 사회상·정치상의 중대문제로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정조 7년(1783) 사행(使行)의 일원으로 북경에 갔던 이승훈(李承薰)의 귀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이 같은 운동에 참가한 주요 인물로서는 이가환(李家煥)·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이승훈·이벽(李蘗)·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김범우(金範禹)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약간의 중인(中人) 계급 및 예외를 빼고는 대부분 남인들이며, 그들의 단결은 공고한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양반 중에서는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의 시파학자(時派學者), 계급적으로는 억압받는 중인이나 상민 및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부녀자가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공명하여 이를 많이 신앙했다.이와 같이 천주교는 점차로 신분상의 제약을 무너뜨리고 민중 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며, 지식층이 압박에 못이겨 배교(背敎)를 했을 때도, 하류층에서도 도리어 이를 지키고 전파해 갔던 것이다. 천주교가 유행한다는 것은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인 가족제도의 사회, 유교지상주의 사회에 대한 사상적인 도전이었으며, 이로 인한 논란이 전례문제(典禮問題)로 표면화하였다.이에 국가에서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정조 10년(1786)부터는 북경으로부터의 서적 구입을 금하였다. 정조 15년(1791)에는 진산(珍山) 사건이 일어났다. 즉 진산에서 모상(母喪)에 신주(神主)를 없앤 윤지충(尹持忠)을 사형에 처한 사건으로서, 이와 같은 전례문제가 계기가 되어 천주교는 점차 탄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나라 사람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입국하여 활약함에 따라 교세가 더욱 확장되어 약 4천의 신도가 생겼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대비(貞純大妃)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자 천주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닥쳐왔으니, 이것이 신유사옥(辛酉邪獄)이었다. 이 교난(敎難)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일 뿐만 아니라 시(時)·벽(僻)파 사이의 정치투쟁과 큰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이 때에 황사영(黃嗣永)이 몰래 북경으로 백서(帛書)를 보내려다 잡혀 반대파에게 반국가적 행위라는 절호의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은 뒤에는 천주교에 대한 심한 탄압은 없었고, 그 동안 조선 교구가 독립, 서양 신부로서는 최초로 모방·샤스탕(Chastun) 등이 들어와서 천주교세가 크게 일어나려 하였으나 헌종 5년(1839) 당시 세도정치를 하고 있던 풍양 조씨에 의해 기해사옥(己亥邪獄)이 일어났다. 이후는 마카오에서 김대건(金大建)이 귀국하여 활약하다가 순교하였다.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들어서면서 안동 김씨가 집권하여 천주교에 대한 금압은 즐어들었으며, 이에 많은 서양인 선교사가 들어오고 신도도 늘어났는가 하면, 제천에는 신학교가 설립될 정도로 천주교세가 점점 커졌다.

신유사옥[편집]

辛酉邪獄

순조 즉위초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시파·벽파의 정치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사교(邪敎)배척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정조 15년의 신해사옥(辛亥邪獄) 이래 정조의 재위기간 동안은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썼고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입국함에 따라 새로운 기운이 태동했으나 순조 즉위와 함께 이런 기운은 역전하고 말았다. 나이 어린 순조의 후견(後見)을 맡은 정순대비(貞純大妃)는 남인 시파를 타도하기 위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 대금압령(大禁壓令)을 내리고 노론 벽파와 연결했다. 이리하여 시파 남인 계통의 천주교도들은 무자비한 박해와 살륙을 당했으며, 이 때에 이승훈·권철신·정약종·이가환·주문모 등이 사형당하고 정약전·정약용은 유형을 당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탄압의 좋은 구실이 되었으며, 이에 관련된 자를 모조리 죽이고, 청국 정부에는 천주교 탄압 이유와 경위 그리고 주신부 처형 경위를 보고했다. 이 옥사로 만 1년 내외에 학살당한 신도만도 300명이 넘었다.

기해사옥[편집]

己亥邪獄

헌종 5년(1839)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순조 1년(1801)의 신유사옥으로 천주교세는 몹시 위축되었으나 안동 김씨가 세도를 누리면서는 김조순(金祖純)이 시파(時派)였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없었다. 그 동안 교구가 독립하였으며, 서양인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모방·샤스탕(Chastun)·앵베르(Imbert) 등이 들어와서 천주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갔다. 이에 놀라 조정에서는 다시 박해 의논이 일어났고, 드디어 헌종 5년(1839)에 제2차 대학살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김대비를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에 대립하여 헌종의 모후(母后)인 조씨의 척족 풍양 조씨의 벽파가 새로 등장하면서 무자비한 박해 선풍이 휘몰아쳐 많은 교도가 투옥·학살되었고, 3인의 서양인 신부도 순교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막자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되었고, 따라서 박해와 살륙도 무자비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헌종은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고 5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더욱 강화시켜 천주교 신앙을 금했다.

병인사옥[편집]

丙寅邪獄

1866년(고종 3) 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크게 학살한 사건. 본래 천주교에 대해서 특별한 반감이나 원한이 없던 대원군이 갑자기 천주교도의 대학살을 감행하게 된 이면에는 천주교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나 반감보다도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원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지만, 이에 대한 대책 강구에는 속수무책이었다.이 반면에 몇몇 천주교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대책을 스스로 생각하여 이를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즉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업고 한·불·영 3국 동맹이라도 체결할 수 있다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들대로 이것이 성사되면 포교(布敎)의 자유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청을 받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모처럼의 이러한 대원군의 태도에 기민하게 응하지 못하고 시일을 지연시킨 것이었다. 지방에서 포교에 종사하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누 주교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시기가 너무 늦었다.그 동안 조정에서 그렇게도 시끄럽던 러시아인의 월경(越境) 행위와 통상 요구도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지나친 기우(杞憂)였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한편 천주교도의 지둔(遲鈍)·무능한 주선(周旋)과 무책임한 발설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만 장안에 퍼지니, 대원군도 소기의 성과는 도저히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의 출세를 적극 지지해 준 조대비(趙大妃) 이하 요로(要路) 대관(大官)들도 천주교의 책동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청나라에서도 천주교 탄압이 다시 고개를 들어, 대원군으로서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포기하고 목전의 여론에 솔선 순응함이 상책이라고 결심, 천주교 탄압령이 단시일 내에 준비되고, 이것이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1866년(고종 3) 정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처참한 학살을 당하였다. 산중(山中)으로 피신하여 쫓겨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림에 쓰러지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으며, 이 통에 신도도 아닌 자들이 박해당한 예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정부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추적하였다. 여기서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는 천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오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황사영 백서[편집]

黃嗣永帛書

1801년(순조 1)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도 황사영이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한 밀서(密書). 황사영은 경상도 창녕(昌寧) 사람으로 정약현(丁若鉉:若鏞의 맏형)의 사위이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알렉산드로라는 교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1791년(정조 15) 17세의 어린 몸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하였고, 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았다.1798

9년 경에는 서울에 머물면서 나이 많은 여러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고, 교리서를 등사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자 그를 도와 포교에 힘썼으며, 중국에까지 그의 심부름을 갔다.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鳳陽面) 배론(舟論)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도의 마을에 가서 토굴 속에 숨었다. 황심(黃心)이라는 열렬한 신자와 황사영이 연락이 닿아 위기에 놓인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책을 상의했다.그들은 조선교회가 박해받은 실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교회의 재건책을 호소하는 길이 62m, 너비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다 한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를 검은 먹으로 깨알같이 쓴 긴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북경 주교에 전달하려고 하였다. 백서 속에는 발송인 황심의 이름만이 씌여 있으며, 지은 날짜는 <천주 강생후 1801년 西滿). 달두(達?) 첨례(瞻禮)후 1일> (9월 22일:陽曆 1801년 10월 29일)이라고 적혀 있다.이 밀서를 지은 황사영은 불행히도 9월 29일 잡혀 서울로 끌려올라와 11월 5일에 처형되었으며 가산을 몰수당하고 어머니는 거제도(巨濟島), 처는 제주도(濟州道), 아들은 추자도(楸子島)에 각각 귀양갔다. 먼저 잡힌 황심과 옥천희도 며칠 전에 각각 처형되었다. 백서는 관헌의 손에 넘어가 조정을 아연케 하고 천주교의 탄압은 한층 엄준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황사영백서 사건이라고 한다.그러나 조정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사건 전말의 변명책으로 이 백서를 줄이고 원 기록에서 불리한 주문모 등에 관한 기사는 되도록 빼고 고쳐서 겨우 1행에 65자 15행, 도합 860여 자로 만들어 명주비단에 써서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북경 청제(淸帝)에게 보고하여 양해를 구하였다.오늘날 전하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의 2종이 있으며, 이것은 신유박해 후 근 백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뒤 발견되어 당시 조선 교회의 주교이던 뮈텔(Mutel)의 손으로 넘어갔다가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 순교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에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현재 영인본이 있으며 불어로 번역된 것도 있다.백서의 내용 중 원문의 내용은 대략 3개 대목으로 나눌 수 있다. 1. 당대는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사옥 때의 순교자 약전, 2. 주신부의 자수(自首)와 수형(受刑), 3. 정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4개의 근본 건의책은 아래와 같다. ① 서양 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본의 요구. ② 청황제(淸皇帝)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신부를 보낼 것. ③ 조선을 청에 부속시키고 친왕(親王)에게 명하여 조선국을 감독케 할 것. ④ 전쟁을 모르는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 6만으로 서양 전교대(傳敎隊)를 조직해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도록 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이 당시의 상식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극단의 문구까지 사용하였으며 뮈텔 주교도 불역본(拂譯本) 서문에서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라는 동시에 ‘조선 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고 논하였다. 신유사옥에 대한 귀중한 사료이다.

척사윤음[편집]

斥邪綸音

헌종 5년(1839) 서교(西敎)를 배척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내린 윤음(綸音). 태조 이후 역대의 교훈·격언을 모아 사(邪)의 폐독을 지적하고 귀정(歸正)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검교제학(檢校提學) 조인영(趙寅永)이 제진(製進)한 것으로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이 알기 쉽게 하였다.

이승훈[편집]

李承薰 (1756

1801)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領洗) 교인. 교명은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 서장관(書狀官) 동욱(東郁)의 아들. 훌륭한 양반으로 남인(南人) 학자의 가문에 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20세 전후에 고명한 학자들과 사귀었고, 1780년(정조 4)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했다.당시 남인 학자들 사이에는 베이징(北京)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天主敎)이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그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종교적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는 뚜렷한 움직임이 있었다.1783년(정조 7)에 이승훈은 동지사 겸 사은정사(冬至使兼謝恩正使) 황인점(黃仁點)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가기로 결심했다. 이 여행은 당시 남인 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렬히 천주교를 연구하던 이벽(李蘗)·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 등의 주선에 의한 것으로 떠나기 전에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와 간절히 부탁하기를 “베이징에 가거든 곧 천주당에 가서 구라파 교사(敎師)를 만나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물어서 교의(敎義)의 깊고 참된 뜻을 밝히며, 천주 교리의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또 필요하고 중요한 교리의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또 필요하고 중요한 교리에 관한 책을 모두 가지고 돌아오게. 인간이 죽느냐 사느냐 그리고 영원토록 행복하느냐 불행하느냐가 달린 큰 문제가 자네에게 매여 있네”라고 하였다. 세계 천주교상

유례 없는 민족적 자진 귀의의 특사로서 이승훈은 이해 10월 14일 서울을 떠나 12월 21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40여 일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주교좌(主敎座)이던 남천주당(南天主堂)에서 필담(筆談)으로 교리를 배운 후, 이듬해 1월 이승훈은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Peter:盤石)라는 본명(本名:敎命)을 받았다. 1784년(정조 8) 3월 24일 이승훈은 수십 종의 교리서와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默珠) 그 밖에 귀중한 물건들을 가지고 서울에 돌아왔다.마침내 1785년(정조 9) 봄 명례동(明禮洞:明洞)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최초의 조선 교회를 세우게 되고, 이벽·이가환(李家煥) 및 정약종·정약전(丁若錢)·정약용 3형제와 더불어 주일미사와 설법을 행하면서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반포했다. 1789년(정조 13)에는 관직에 나가 평택 현감(平澤縣監)을 지내기도 했으나 1791년(정조 15) 천주교의 전국적 전파를 막으려는 조정의 탄압으로 신해사옥(辛亥邪獄)이 일어나 관직을 빼앗기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 입국 사건으로 예산(禮山)에 귀양갔으며, 1801년 신유대사옥(辛酉大邪獄) 때 서울 서대문(西大門) 네거리에서 목을 잘리었다.

이가환[편집]

李家煥 (1742

1801)

조선의 천주교도.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본관은 여흥(驪興). 실학자 익(瀷)의 종손(從孫)으로 당시 이름 높았던 남인학자 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권철신(權哲身) 등과 교유(交遊)하면서 새로운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84년(정조 8) 숙부 승훈(承薰)이 베이징에서 돌아왔을 때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흥미를 갖고 이벽(李蘗) 등과 함께 교리를 번역·연구했으나 입교는 하지 않았다. 그 후 천주교가 박해를 받게 되자 교리 연구를 중단했고,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 때는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자신이 천주교를 탄압했다. 1795년 청나라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밀입국 사건으로 반대당의 모함을 받아 충주 목사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도 여전히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뒤에 파직되어 다시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계속, 마침내 신자가 되고 종교 운동에 헌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했다. 문장에도 능했으며 필법이 뛰어났다.

정약전[편집]

丁若銓

조선 정조 때의 학자. 호는 연경재(硏經齋), 정약현(丁若鉉)의 동생. 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의 형으로 서학에 뜻을 두고 천주교의 전교에 힘썼다. 남인 학자로서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은퇴하여 천주학 실천에 힘썼으며 당시 서학의 대가 이벽(李蘗)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이승훈과 더불어 전국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약종은 장살(杖殺)당하였고 약용은 강진(康津)으로 유배가고 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귀양갔다. 적소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하였다.

정약종[편집]

丁若鍾 (1760

1801)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세례명 아오스딩, 정약용의 셋째 형. 영조 때의 석학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권일신(權日身)·권철신(權鐵身)·이덕조(李德祚)·홍유하(洪有河) 등과 더불어 신앙 실천 운동에 가담, 인습타파와 계급타파의 사회운동을 촉진하여 천주교의 전교에 힘썼다. 그리하여 이승훈(李承薰) 등과 모의하고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謀)를 맞아들여 전도에 노력하였다. 그의 딸 정혜(情蕙)와 그의 형제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으며, 약종은 이승훈·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과 같이 서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것을 소위 신유사옥(辛酉邪獄:敎獄)이라고 한다. 1984년 5월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식 때 교황 요한바오로 2세로부터 성인품에 올림을 받았다.

홍봉주[편집]

洪鳳周 (?

1866)

천주교 순교자. 본관은 예산(禮山). 낙민(樂民)의 손자, 자영의 아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웠다. 조부 낙민은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순교하였으며 어머니는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이었다. 1851년(철종 2) 프랑스 신부 메스트르(Maistre:李神父)가 상하이로부터 조선에 들어와 서울 전동(典洞)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봉주가 그의 지시를 받아 1855년(철종 6) 상하이로 들어가 프랑스 사교(司敎) 베르뉘(Bernux) 및 신부 샤를 안트와느 프르티(漢名 申妖案) 등을 데리고 들어와 태평동(太平洞)에 집을 빌려 머무르게 하면서 성경 연구와 전도에 노력하였다. 그 뒤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선교사를 통해 영국·프랑스와 손잡을 것을 대원군에 건의한 바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남종삼(南鍾三)과 함께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벽[편집]

李蘗 (1754

1786)

조선 후기의 천주교도. 원명은 덕조(德祚), 본관은 경주. 정조 1년(1777)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 등의 서학(西學) 토론회에 참석한 후 천주교에 관심이 커졌다. 그 후 이승훈에게 부탁하여 남인들 사이의 동지를 규합, 선교에 투신하였으며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았다. 동왕 9년(1785) 김범우(金範禹)의 체포로 서학운동이 표면화하자 배교자 이기경(李基慶)의 권유로 천주교와 절연, 동지들과 교제를 끊었고 이듬해 페스트로 죽었다.

권철신[편집]

權哲身 (1736

1801)

조선 후기의 천주교 순교자. 일신(日身)의 형. 이승훈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 정조 1년(1777)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정약전·정약용·이벽(李蘗) 등 남인의 여러 학자와 함께 서학교리연구회(西學敎理硏究會)를 열면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순조 1년(1801) 신유사옥 때 정약종·이가환·이승훈 및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권일신[편집]

權日身 ( ?

1791)

조선의 천주교 신부. 호는 이암(移庵). 교명은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의 사위. 양근(楊根) 출생. 이익(李瀷)의 제자인 정약전·정약용·권철신·이덕조 등과 함께 1777년(정조 1)부터 한강가에 있는 산가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는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1783년(정조 7) 동지 이승훈이 그의 아버지 서장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베이징에 갔다가 이듬해 봄에 영세를 받고 돌아오자, 당초 신앙운동을 같이 하던 동지들과 함께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1785년(정조 9) 이승훈의 주재(主宰)로 서울 명례동(明禮洞:明洞) 김범우(金範禹) 집에 수십 명의 신도가 모인 가운데 이덕조(李德祖)와 함께 신부로 뽑혀 천주교의 지도자적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 뒤 집안과 이웃에 열심히 전도하여 그 문하에 이존창(李存昌):유항검(柳恒儉) 등 열렬한 신자가 나왔으며, 양근(楊根:楊平) 지방 일대에 열심히 전도하여 당시 그곳을 서학(西學)의 요람지라 하였다. 1791년(정조 15) 신해사옥으로 잡혔던 권상연(權尙然)·윤지충(尹持忠) 두 신자가 처형된 후 이승훈과 함께 서학책 간행의 혐의로 잡혀 이승훈은 삭직(削職)되고 일신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다시 예산(禮山)으로 옮겨 간 후 노모의 처지를 생각하고 신앙심에 동요를 일으켜 회개서(悔改書)를 바치고 석방되었다.

김대건[편집]

金大建 (1822

1846)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신부(神父). 세례명은 앙드레(Andr

), 아명(兒名)은 재복(再福). 경기도 용인 출생. 제준(濟俊)의 아들.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는 1839년(헌종 5)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한국에 최초로 들어온 외국 신부 모방(P. Maubant)의 주선으로 중국으로 귀국하던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Pacifique)를 따라, 다른 소년 2명과 더불어 마카오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Soci

t

des Missions Etrang

res)의 신학교에 가서 수학하게 되었다. 1843년(헌종 9) 12월 31일에 보교(輔敎)로 취임되자, 당시 우리나라 교회의 박해 후의 참상을 듣고 프랑스 신부 Joseph Ambroise Maistre와 입국을 기도하였다. 1844년 2월 함북 경원(慶源)에 이르렀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입국을 못 하고 그 해 12월에 페레올(Ferr

ol) 신부와 함께 의주에 왔으나 경비가 심하여 대건만이 입국, 위축된 교세의 재건에 매진하였다. 5개월 후에 국내 실정을 주청(?淸) 선교부에 알리기 위하여 작은 배로 황해를 건너 상하이에 갔다. 그곳 선교사들은 그의 용감한 활약에 감복하여 1845년 8월 17일 그에게 신부의 직을 주었다. 다시 그 해 9월 페레올·다블뤼(Daveluy) 두 신부와 같이 황해를 건너 입국하여 전교(傳敎)에 전력하였다. 1846년 5월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연안을 답사하려다가 등산(登山)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9월 16일 새남터에서 사형당하고 25세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복자위(福者位)에 올림을 받았다. 1972년 한강변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모방[편집]

Maubant, Pierre-Philibert (1803

1839)

한국 최초의 서양인 신부. 순조 31년(1831)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교황청이 조선 교구의 교회사업을 명령하자 브뤼기엘 주교와 함께 조선에의 입국을 기도하다 헌종 1년(1835) 압록강을 건너 입국했다. 그 뒤 정하상(丁夏祥)의 안내로 서울에 들어와 전교에 힘써, 전국에 걸쳐 9천 명의 신도를 포섭했다. 한편 그는 김대건 등을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시켜 교세 확장의 획기적 업적을 쌓았으며, 동왕 3년(1837)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전국적인 교세확장을 위해 분투하다가 다른 2명의 신부 및 2백여 신도와 함께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했다.

정하상의 활동[편집]

丁夏祥-活動

정하상은 정약종의 차남으로 천주교의 교무(敎務)를 연락하기 위하여 9회에 걸쳐 은밀히 북경을 왕복했다. 그의 북경 왕복은 신부영입운동(神父迎入運動)이 목적으로 이 사행에는 교우이자 역관(譯官)인 유진길(劉進吉) 등이 동반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에 감동한 교황청은 파리 외방전교회 산하에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를 설치, 브뤼기엘 주교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케 하는 데 성공했다. 순조 33년(1833)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를 맞아들였고, 이후 모방·샤스탕·앵베르 등의 신부를 맞아들여 조선교회의 발전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