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사/일제 수난기의 음악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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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정악전습소[편집]

朝鮮正樂傳習所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장악원은 국악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지만 실제로 일반사회와의 접촉은 전혀 없었고 민중에게 개방하여 음악교육 기관으로 조직된 아악 연구 단체가 1901년에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으니 그것이 한국 정악원의 전신이다. 1909년 9월 15일에 백용진(白瑢鎭) 집에서 첫 발기회를 열어 이름을 붙이고 구악(舊樂)과 신악(新樂)의 발전을 목적으로 삼았다.

점차 그 활동면이 음악교육에 더욱 뜻을 두게 되자 1911년 6월에 명칭을 조선정악전습소라고 개칭했다. 신악으로는 풍금·사현금(四絃琴) 및 음악이론을 가르쳤고 악보편집사업도 겸행하였던 것이다. 구락부에는 가요부와 음악부의 2부를 두고 정원을 51명으로 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일시금 2,400원(元)에 매월 200원의 보조금을 주었고 총재 이강공(李堈公), 부총재 윤택영(尹澤榮), 회장 박영효(朴泳孝) 외 많은 임원과 회원들 중의 유지들이 낸 일시금 1,950원에 매월 48원씩의 찬조금으로 운영에 곤란없이 지냈는데 1912년 3월부터 1913년 4월까지의 졸업생을 보면 제1회 조선악과에 5명, 서양악과 속에 성악과 8명, 악리과에 함화진(咸和鎭) 외 4명, 제2회 졸업생 중 가곡과에 이상준(李尙俊), 그 외 거문고과 2명, 가야금과 2명, 양금과에 8명, 서양악과의 풍금과에는 염광섭(廉光燮), 4현금(바이올린)과에 홍영후(洪永厚-난파) 외 4명, 제2회 졸업생으로 거문고과에 홍석후(洪錫厚-永厚의 伯氏) 외 5명, 양금과에 10명, 서양악과의 성악과에는 강세형(姜世馨)·이하영(李夏永) 외 9명, 기악과에 홍난파·구자옥(具滋玉)·서상문(徐相文)·강세형 등 23명이었다.

위 졸업생 중에는 후일 서양음악교육계의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도 있고 또 몇몇은 크나큰 공헌을 끼친 분들로서 한국 양악사에 길이 남을 이름들로 되어 있다. 1937년에 운영자들의 별세로 해산되고 말았다.

김인식(金仁湜), 난파 홍영후(洪永厚)와 이상준(李尙俊)은 사제관계로 되어 있고 한국 양악 초창기로부터 광복 전까지 음악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사람들이다.

국외 연주가의 내연[편집]

國外演奏家-來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났던 독립만세 운동 이후 전국에 걸쳐 일제의 잔인무도한 보복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여파는 파상적으로 계속되어 만주로 쫓기거나 이동하는 동포가 속출했다. 당황한 일본 정부는 강제합방 이후 계속 무단(武斷)정치로 일관해 온 테라우치(寺內) 총독의 과오를 인정하고 문무(文武)를 겸한 전 해군대장 사이토(齋藤實)를 새로 임명했다.

그가 부임하던 1919년 9월 2일 오후 4시 남대문을 통과하던 그에게는 폭탄이 던져졌으나 다행히 화를 면한 그는 무단으로만은 안된다는 신념하에 칼을 차고 군복을 입고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평복으로 갈아입히는 등 외양상의 미소정책을 보이기 시작하며 문화주의를 표방했다. 한편 신문발행을 허용하기도 하며 언론 창달을 다짐했다.

이러한 때에 외국 대음악연주가들이 속속 내한하여 연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국 연주가들의 내연은 일찍이 동경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음악(피아노 전공)을 배운 한국 최초의 음악가이며, 부호 김영환(金永煥)의 노력과 사재로 이루어졌지만 일본의 정치적 협조가 없었던들 불가능했을 것은 사실이다. 양악계 선구자 김영환은 <경성일보> 사업부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각 언론기관을 주름잡고 있는 터여서 외국 연주가들을 초빙하기에 이르렀고 그 일에 주력하면서 한국음악계에 끼친 공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