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릴 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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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아직 ‘어릴 때 일’이라고 따로 잡아내어서 자랑하거나 후회하게는 되지 않았습니다. 또 그리 특별난 생활을 하여온 것이 없으니 이렇다고 자미있게 말슴할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십 칠팔 년 전 옛날 학교 이야기를 계속하였더니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여 달라는 이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번 한 이야기를 또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여러분이 하도 조르시니 학교 일, 집안 일, 동무 일을 한데 뒤섞어서 어릴 때 일을 하나씩 둘씩 추려 보기로 합니다. 지금이 몹시 바쁜 때라 이 일 저 일로 내 신변이 너무도 수선하여서 조용히 차서 있게 추려 내일 겨를이 없는 것은 이 글을 쓰는 데에 너무 섭섭한 일입니다. 순서 없이 그러나 하는 수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쓰겠으니 미리 짐작하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어릴 때에 남의 어릴 때의 이야기를 듣고서 퍽 자미있어 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한히 자미있는 한편으로 또 적지 아니 유익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행히 내가 쓰는 내 어릴 때의 심심한 일이 여러분에게 더러라도 자미있을는지……, 그것이 궁금해집니다.


철난 후 배고프던 이야기

내가 지금 어릴 때 일로 기억할 수 있기는, 일곱 살에 혼자 몰래 나가서 소학교에 입학하고 오던 그때부터 이후의 일입니다.

그 때 우리 집은 서울 야주개(夜珠峴)에 있었는데, 장사를 크게 하였는고로 돈이 넉넉히 있어서, 지금 생각하여도 대단히 큰 개와집을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여서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 집을 맨들어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 집 속에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려면 한참 동안 잊어버리고 가야 하였습니다. 그 집에서 어느 때인지 몇 살 쩍인지 큰 고모님이 시집을 간다고 작은 고모님이 나를 업고 이웃집으로 숨으러 가던 일과 증조부님 상청 앞에 친척들이 모여서 통곡들을 할 때에 처마 앞에 쌓아논 쌀섬 우에 기어 올라가서 깔깔거리며 웃다가 굴러떨어지던 일과, 길가에서 놀다가 무 장사의 말굽에 채여서 집안이 들썩거리던 일과 깍정이들이 개구리를 잡아가지고 온 것을 나를 먹인다고 조부님께서 사셔서 화로불에 굽는 것을 보고 안 먹겠다고 떼를 쓰다가 매맞던 일과 일곱 살 먹기 전 일로는 그런 일이 꿈같이 동강동강 나는 것밖에는 지금 기억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들으면 나는 그 때에 야주개 일판으로 뛰어다니면서 어느 가게든지 빈손으로 가서 엿이나 왜떡(菓子)이나 과실이나 마음대로 집어먹고 다녔다고 합니다. 가게에서는 내가 무엇을 집어먹던지 먹기만 바라고 있다가 치부책에 적기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다가 그믐께 와서 조부모님께 말슴하면 얼마든지 적힌 대로 내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도망하여서 몰래 머리를 깎아 버리고 학교에 입학한 것은 일곱 살 일이요, 간신히 아홉 살 될 때에 무엇 때문에 어떻게 망하였는지 모르나 별안간에 그 큰 집에서 쫓겨나듯 나와서 저 사직골 꼭때기 도정궁(都正宮) 밑에 조그만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큰 가게에 가득하던 물건은 모다 어데로 누가 가져갔는지 하나도 옮겨오지 않았고, 그 큰 집 두 채에 방방이 가득하던 번쩍거리는 세간도 다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마 별안간에 큰 빚에 몰리어 세간 물건을 모두 집행을 당했던지 그런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어린 때라 그저 영문 모르고 짐구루마 뒤에 따라다니는 것만 기뻐하였습니다. 그 큰 집에서 살다가 그 조그만 집으로 와 놓으니 마치 왼 집안 세간을 부엌 속에다 몰아넣고, 고 속에서 살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괴로운 일은 그 후 한 달도 못 지나서 가끔 가끔 콩나물죽을 억지로 먹어야 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먹기가 싫든지……, 몇 번이나 없는 밥을 달라고 떼를 쓰다가 매를 맞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괴롭고 설어운 일이 생겼습니다.

사직골 꼭때기에서 야주개로 돌아서 서대문으로 가서 서대문 바로 아래 있는 보성 소학교에를 다니니 어린 생각에 십리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되는 일은 학교에 싸 가지고 갈 변또밥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아침에 밥을 먹는 날보다 죽을 먹는 날이 더 많으니 변또밥을 싸가지고 갈 것이 있었겠습니까……. 없는 밥을 싸 내라고 떼를 쓰면서 울다가 어머니에게 얻어맞고 비로소 대문을 나서다가 흘낏 돌아다보면 마루 끝에 서셔서 때리던 어머니도 울고 계셨습니다. 열 살도 되지 못한 어린 아들이 배를 곯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하였겠습니까. 한 손에는 나를 때리던 매를 들고 어머니는 울고 계셨습니다. 그럴 적마다 안방에서 증조모님이 수건으로 콧물을 씻으시면서 ‘저것의 배를 곯릴 줄이야 누가 알았단 말이냐’ 하시고 따라 울고 계셨습니다.

그때에 대고모님(아버지의 고모님) 한 분이 야주개 영성문(永成門) 앞에 넉넉히 살고 계시었던 고로 ‘아침마다 빈 그릇을 싸 가지고 가다가 집으로 오면 점심밥을 담아 주마’고 하여서 어린 마음에 아무 철없이 어찌 반갑든지 친척 할머니 중에 그 분이 제일 잘나 보이고 다정해 뵈였습니다.

지금은 변또그릇이 따루 있지만 그때는 그것이 없이 장기(將棋) 주머니같이 노끈으로 짠 망태 속에 둥그런 밥주발에 뚜께 덮어 넣어서 그것을 디룽디룽 들고 다녔습니다. 아침이면 죽을 먹고 빈 밥그릇을 디룽디룽 가다가 대고모님 댁에 들어가면 거기서 더운 밥을 또 먹여 주고 점심밥을 담아 주고 담아 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남들이 점심 먹을 때에 변소 뒤에 숨어서 놀지 않고 한몫 끼여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 대고모부 되는 어른은 지금은 돌아갔지만 퍽 무섭고 말 많은 이가 되어서 그 어른이 아침에 일찍 밧같으로 나가지 않으면 점심밥을 담아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 줄은 모르고 집에서 아침 죽도 조금만 먹고 점심 그릇을 디룽디룽 들고 갔다가 대고모님이 눈짓을 하시면서 넌지시 가만한 말로 “이 애야 오늘은 그냥 가거라” 하는 소리를 들을 때 내 얼굴은 그냥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서 푹 숙으러지고 다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침도 적게 먹고 믿고 있던 점심밥이 틀어질 때 내 집이 아니니 달라고 말조차 하여 볼 수 없이 그냥 돌아서서 그 집 문을 나서기는 나섰으나 그 대문 문지방을 넘어설 때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서 앞이 보이지 않던 것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아니합니다.

걸리지 않는 걸음으로 학교에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기운 없이 가던 생각, 탱탱 뷔인 밥그릇을 그냥 들고 갔다가 점심때는 나 혼자 넌즈시 나와서 변소 뒤에 숨던 일...... 생각하면 어릴 때에도 눈물의 날이 어떻게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일 제일 몸이 저리게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온종일 배를 곯고 있다가 해지기 가까워서 배고픈 데 지쳐서 두 눈이 움쑥 들어가 가지고 빈 밥그릇을 들고 집에 가면 어머님이 밥그릇을 펴 보시고,

“밥그릇이 오늘은 으째 이렇게 말짱하냐?”

하실 때, 어린 나의 몸은 바르르 떨렸습니다. 왼종일 배고프던 하소연! 울음이 목에까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을 젠

“웨 할머니께서 안 싸 주시든?”

하고, 물으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억지로,

“네―”

하는 소리가 그만 울음 소리가 되고 눈에 고였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배가 몹시 고팠겠구나…….”

떨려 나오는 어머님 말슴에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쓸어져 울었습니다.


〈《어린이》 6권 2호, 1928년 창간 5주년 기념호〉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 배고픈 것을 참아 가면서 학교에를 다니니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서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구차한 집이라 하인이 따루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학교에 갈 때면 어머니가 쌀자루를 착착 접어 주시면서

“공부 다 하고 집으로 올 때에 이모 아주머니 댁에 가서 쌀 두 되만 뀌어 주십사고 그래 가지고 오너라. 그믐에 보내 드린다고…….”

하는 것이, 한 달이면 정해 놓고 칠팔 번씩 되었습니다. 어린 생각에 굶으면 그냥 앉아서 굶지 웨 남의 집에 가서 그런 싫은 소리를 하라는고...... 싶어서 안 가지고 가겠다고 떼를 쓰면

“그리게 너는 이 다음에 이런 꼴을 아니 하는 사람이 되어라.”

하시면서 어머님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십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눈에 눈물을 보는 것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싫다고 떼를 쓰다가도 어머님의 눈물을 보면 그만 거기 더 있지 못하고 얼른 그 쌀 주머니를 집어 들고 나서고 나서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내 눈에 고이는 눈물이 당장 쏟아져 흘를 것 같아서 그것을 어머니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까닭이였습니다.

그렇게 쌀자루를 가지고 나서는 날은 학교에서 하학 시간이 가까워 오는 게 큰 걱정이었습니다. 아침도 변변히 못 먹은 몸이 점심 시간은 또 남의 눈을 피하여 변소 뒤에서 눈물만 지었으니 배가 고파서 머리가 휭 하건만 그것도 잊어버리게 되고 어떻게 쌀자루를 들고 그 집 대문을 들어슬까 하는 것만이 큰 걱정이었습니다.

처음 들어가서 무어라고 말을 시작할까……, 그 집의 나만한 아이들이 쌀 꾸러 왔다고 웃으면 어쩌나 그런 부끄럼 저런 부끄럼 다 무릅쓰고 말을 하였다가 ‘우리도 마침 쌀이 없다’고 하면 펴들었던 쌀자루를 어떻게 다시 접어들고 돌아서서 나올까 걱정 걱정 하느라고 걸음이 잘 걸리지 않는 것을 억지로 걸어서 그 집의 대문 앞까지 가서 몇 번이나 들어갈까 말까 하고 망설거리면서 대문턱을 딛고는 돌아서고 또 가서 딛고는 돌아서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는 그 집 대문이 무서운 경찰서나 감옥 문 같이 원망스러워 보였습니다.

해가 산머리에 질 때가 되도록 밖에서 망설거리기만 하는데 마침 그 집의 아저씨가 밖에서 돌아오다가 나를 보고

“너 학교에서 인젠 돌아가늬?”

하고 묻고는

“웨 집에서 놀다 가지 밖에서 그러니?”

합니다. 별안간 어리둥절한 판에도

“아니야요. 쌀 꾸러 왔어요.”

하는 소리는 나오지도 않고

“아니야요. 얼른 가야 해요. 집에서 일찍 오라고 그러셨어요.”

하고는 그냥 꿉뻑 하고는 급히 걸어갔습니다.

골목 골목에는 두부 장사 석유(石油) 장사가 분주히 다니고 집집에는 저녁밥 짓느라고 야단인데 집에를 들어가면 마루 끝에 넋없이 앉으셨던 어머니께서

“이 애야 웨 쌀을 안 가지고 오니?”

하십니다.

“가서 그랬는데 쌀이 없다구 그래요.”

급한 대로 이렇게 꾸며대기는 하였으나 그때에 말할 수 없이 처량한 어머니의 얼굴……. 그것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아니합니다.

그리고는 그 날 날이 어두워 인쇄소(印刷所)에서 아버지와 삼촌이 돌아오실 때까지 온 식구가 고스란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볼 때에 나는 그만 뛰어나가 넓은 한길의 전기선대 밑에서 혼자 자꾸 울었습니다.

쌀 꾸러 다니기 전당국에 다니기 그런 것 외에 또 한 가지 고생스러운 일은 물 길어 오기였습니다. 하인도 없고 어른들은 활판소에 가시고 또 삼촌 한 분은 남의 상점 점원으로 가시고 물을 길어 올 사람은 열 살 먹은 나하고 여덟 살 먹은 사촌 동생밖에 없었습니다.

집이 사직골이었으니까, 우리 집에서 두어 마장쯤 떨어진 곳에 사직 뒷담 밑에 성주 우물이란 우물이 있는데 학교에만 갔다 오면 물통(석유통) 하나를 들고 가서 물을 길어 가지고 열 살짜리 여덟 살짜리가 둘이 들고 배틀배틀 하면서 집으로 옮겨 나르기에 어떻게 힘이 드는지……, ‘인제 여덟 번째다’ ‘인제 아홉 번째다’ ‘인제 세 번 남었다’ 하면서 헤여가면서 길었습니다.

그나마 여름에는 별 고생이 없지만 겨울이 되면 물이 나오지 않고 맨 밑바닥에 조금씩밖에 안 나오는 고로 물란리가 날 지경이어서 우물 앞에 차례로 온대로 물그릇을 조루루 늘어놓고 기다리어서 자기 차례가 되어서 바가지를 들고 우물 속에 기어들어가서 떠 가지고 나오게 되는 고로 우물 앞에는 물통 물동이가 골목 밖에까지 체조하는 병정처럼 늘어 놓이고 자기 차례 오기를 기다리자면 두 시간씩이나 기다리게 됩니다.

날은 차고 바람은 뺨을 어인 듯이 부는데 배가 고프고 몸은 떨리고……. 우물 옆에서 두 발을 동동 구르고 울던 일이 해마다 겨울마다 몇백 번씩인지 모릅니다.


(22줄 삭제)


지금 태평동에 있는 덕수궁(德壽宮)의 대한문(大漢門) 맞은짝에 최(崔)씨라는 우리 동무의 집이 있는데 그 집 방에 석유 괴짝을 뜯어서 거기다가 먹을 칠한 조그만 칠판(黑板)을 걸고 거기다가 토론 문제를 써 놓고 하나씩 차례로 나가 서서 옳으니 그르니 하고 힘써 토론을 하였는데 코를 조르르 흘리고 다니는 열 살짜리, 많아야 열세 살, 열네 살짜리들이 그때 무슨 소리를 하였었는지 지금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공일날마나 공일날마다 빠지는 법이 없이 하였는 고로 나중에는 토론 문제가 없어서 새 문제를 얻어오기에 퍽 고생이 되였습니다. 그래서 나종에는 아무 문제나 생각나는 대로 걸어 놓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요전번에 이 《어린이》 잡지에 현상 토론 문제를 내었던 ‘벙어리가 나으냐? 장님이 나으냐?’ 하는 것과 ‘물이 나으냐? 불이 나으냐?’ 하는 것 같은 것은 모두 내가 어렸을 때에 그 소년 입지회에서 하던 것 중에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회원이라야 열 명도 못 되는 단 팔구 명뿐이었건만은 우리들의 정성은 대단하여서 공일날 되기 전에 문제를 열심히 연구하여 골라 놓고 공일날만 되면 아침에 일직 그날 물 길을 것을 미리 부즈런히 길어 놓고 그 길로 뛰어가고 가고 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배고파 울고만 자라면서도 그렇듯 정성으로 모이는 소년 입지회가 가엾게도 안타까운 경우를 당하였으니 그것은 그 대한문 앞의 최씨 집이 다른 먼 곳으로 옮겨가게 되어서 방을 쫓겨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무 주변성 없는 코 흘리는 어린이들이였으니 방이 없어졌으면 그만 제절로 해산(解散)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나 그래도 맹낭한 일로는 그대로 헤어지지 않고 그 조그만 칠판을 손에 들고 행길로 나서서 아모 집이나 이 집 저 집 기웃기웃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방이 있는 집만 보면 덮어 놓고 방을 좀 빌려 달라고 떼를 써 보려구요.


〈《어린이》 6권 3호, 1928년 5·6월 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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