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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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편집]

그날 왕은 이 아들을 돌려보내기가 싫어서 당신의 침전에서 저녁까지 먹이어서 밤에야 놓아주었다.

밤에야 부왕께 하직을 하고 별궁을 나온 수양은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다시 생각을 돌이켜서 삼촌 양녕을 찾기로 하였다. 사냥을 갔다가 이삼 일 전에 돌아왔다는 백부를 그는 돌아온 이래 아직 찾지 못 했던 것이었다.

남여에 몸을 담고 백부의 집으로 가는 동안 수양은 한번도 눈을 떠보지 않았다. 서슬이 푸르른 왕자 수양대군 유의 행차라고 구종 별배놈들은 의기가 양양하여 우렁차게 호령을 하며 길을 달렸지만 행차의 주인 수양은 무거운 마음으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부왕의 아까의 당부─그것은 자기도 늘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새삼스러이 마음에 걸리는 바는 아니었지만 아까의 모든 그 말이 모두 부왕의 유탁(遺託)인가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전에 그렇듯 풍만하던 볼이 아까 보니 얼마나 야위었느냐. 그것은 단지 병 때문만이 아니다. 또는 과거 삼십 년간의 노심의 탓만도 아니다. 마음에 늘 걸리는 동궁과 자기와의 문제가 근심되어 그렇듯 야위었을 것이다.

(아아. 순서만 바뀌어 났더면…… 가련하신 아버님이시여!)

자기도 잘 안다. 아버님이 이런 뜻을 입 밖에 내어본 일은 절무하지만, 마음 깊이는 늘 이 탄성이 울리고 있는 것을 잘 아는 바다.

(순서만 바뀌어 났더면─ 왜 자기가 뒤에 났던고?)

(순서가 이렇게 된 이상에는 또 하다 못해 자기의 형 동궁이 부왕의 형 양녕과 같이 활달한 인물로라도 되었더면, 그래도 좀 나을 것을 왜 그다지도 마음이 작고 좁고 약하고 투기심 많은 인물로 태어났나?)

(나는 현재의 동궁이요. 장래의 국왕이니 내 자리는 자리려니와 내 힘이 모자라는 곳은 네가 도와다오. 왜 이렇게 솔직히 나오지 못하는가?)

자기는 아무 타의가 없고 오로지 형으로서 또는 동궁으로서 성심성의 섬기거늘 왜 그렇게 자기를 의심의 눈으로 보고 꺼리고 피하고 멀리하려 하는가.

지금껏은 아직 부왕이 생존해 계시고 부왕의 아랫니 그다지 탓할 것도 없거니와 만약 부왕 승하하시고 동궁이 즉위하게 되는 날은 그때야말로 자기에게 대하여 노골적 증오와 기탄이 부어질 것이다. 자기는 모든 일을 다 참고 그날의 형왕께 끝끝내 충성되려 하지만 그 충성을 받지 않으려면 어쩌나. 왕의 잡은바 권력으로서 자기를 멀리 하려면 어쩌나?

필시 그럴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라 딱한 일이었다.

거기 항거하는 것은 군왕께 항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거기 승복하면 이는 충성이 아니다. 옹의 그릇된 일을 그대로 보고 그냥 복종하는 것도 인신의 도리가 아니다.

─어쩌나.

괴로운 입장이었다.

『컹컹컹컹.』

와르르, 요란한 소리에 펄떡 정신을 차리니 행차는 어느덧 백부 양녕의 집 대문 안에 들어섰다. 이 댁 사냥개들이 우렁차게 짖으면서 뛰어 나왔다.

수양은 남여에서 내렸다.

『이 개!』

둘러서서 짖어대는 개에게 별배들은 겁이 나서 비슬비슬 피하는 것을 수양은 우렁찬 소리로 호령하고 이 댁 하인들이 달려 나와서 개를 진정시킬 동안 중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백부님. 주상전하의 환후가 심상치 못하시옵니다.』

『음. 지금 어소에서 나오는 길이냐?』

『네……』

마주 앉은 숙질─

양녕은 조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네 얼굴은 근심에 쌓이면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다. 펴라.』

수양은 고소하였다.

『백부님은 언제든 참 근심이 없으셔서 다행이올시다.』

『내게 무슨 근심이 있겠느냐. 내 신분이 왕형(王兄)이요, 불형(佛兄─孝寧大君의 兄)이고……』

『그렇지만 저도 왕자(王子)요. 장차 왕제(王弟)가 될 신분이라도 근심이 태산 같습니다.』

수양은 적적한 듯이 머리를 숙였다.

『그다지 근심 말어라. 동궁도 마음이 약할 뿐이지, 악인은 아니다. 호랑이도 새끼를 많이 낳으면 한 마리는 스라소니가 있는 법이니라. 스라소니가 맏이 된 게 좀 탈이지만……』

양녕은 쾌활히 웃었다.

『자. 노루고기나 좀 먹어 보련?』

『싫습니다.』

『네가 노루고기를 싫다니 웬 일이냐?』

수양은 머리를 숙였다. 한숨이 입에서 새려 하였다.

『백부님. 백부님의 심경이 부럽습니다.』

『일반이니라. 나는 왕형. 너는 왕제니 네나 내나 다를 게 무에 있느냐. 마음 하나 먹기에 달렸지.』

『그럴까요? 백부님의 왕형은 편히 놀읍시고 사냥이나 다니시면 그뿐이겠지만 제 왕제 노릇은 그렇지 못할까 하는데요.』

양녕은 잠시 뚫어져라 하고 조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야. 낸들 네 마음을 왜 모르겠느냐. 다 안다. 알지만 할 수 없지 않느냐. 네 팔자 고약해서 그런 걸 어쩌겠느냐. 너도 동생을 두려면 나 같은 동생을 두었더면 좋지. 이왕에 그렇지 못한 이상에는 근심이나 하면 무얼 하느냐? 근심 걱정 다 버리고 오늘은 네 삼촌이 잡아온 노루를 안주 삼아 술이나 먹자. 음식은 먹으면 없어지지만 근심은 한다고 덜어지는 게 아니다.』

수양은 눈을 고요히 들어서 삼촌의 호활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찍이 장래의 이 국가의 주인으로 세자로 책봉까지 되었다가 그 고귀한 세자의 위를 헌신같이 내어던지고 한 개 왕자로 그 뒤는 한 개 옹형으로─사냥을 소일삼아 여생을 보내는 이 쾌활하고 호협한 노인의 얼굴을 우러러 볼 동안 수양의 마음에도 얼마만큼 우울한 기분이 사라지는 듯하였다.

수양은 밤이 꽤 깊도록 이 집에 있었다. 삼촌과 술을 나누었다.

자정이 지나도록 삼촌의 술을 얻어먹으며 삼촌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 득도한 노인의 기분이 전염된 탓도 있겠지만, 술에 얼근히 취한 수양의 마음은 꽤 가벼워졌다.

백부께 하직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댓돌에 나서서 우연히 하늘을 우러러보니 이마 꼭 맞은편 하늘에는 경오년 살별(彗星)이 꼬리를 길게 뻗치고 있다.

『살별이다. 길조(吉兆)냐, 흉조냐.』

수양은 잠시 그냥 서서 그 괴상한 광휘를 내고 있는 살별을 우러러보다가 뜰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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