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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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안평을 무이정사로 찾아 본지 며칠 뒤부터 김종서 등의 움직임이 좀더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그 행동이 차차 나타나게 보여 갔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순서로 어떤 행동을 취하려는가? 어떤 수단을 밟으려는가? 수양의 엄중한 감시의 눈은 그들의 위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태종 정사(太宗定社) 때와 같이 쿠데타 행위로 나오는 것이 가장 귀찮은 문제였다. 그렇게 일이 돌발하여 이쪽에서 손쓸 새가 없이 결착까지 지으면 속수무책이었다. 이 방면은 가장 엄중히 경계하였다.

그러는 한편 자기가 먼저 숙청 행동을 취하면, 그 뒤에 자기가 써야 할 방침에 대해서도 착착 진행을 시켰다.

자기의 배하에 끌어들여야 할 사람도 착착 골라서 접근하였다.

정치의 대 방침에는 수양 자기가 몸소 당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 아래는 사무적으로 재능 있는 인물들을 배치해야 할 것이었다.

첫째로 현재 우참찬(右參贊) 정인지(鄭麟趾)를 끌어들이기에 성공하였다.

정인지는 선왕께 고명 받은 신하 가운데 가장 정치적 기술에 능할 뿐 아니라 이 나라의 국론을 잡고 있는 집현전(集賢殿)의 원로학자로 또한 수양이 연경에 갔을 적에 연경 한림(翰林)들에게서도 정인지의 이름을 여러 번 들었는지라 이 점으로도 크게 평가할만한 사람이었다.

정인지는 비교적 쉽게 수양의 날개 아래로 들어왔다.

그 밖 집현전 학사 중에 신숙주는 물론이요, 성삼문, 박팽년 등 몇 사람과도 가까이 하여 그들을 자기의 품 아래 넣었다.

권남이며 한명회는 본시부터 수양의 수하에서 활동하던 사람이라 다시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자기의 산하에 넣은 사람 가운데도 수양은 세 가지의 성격을 보았다.

하나는 수양의 아래 붙어서 이 국가 흥기의 대업에 조력하려는 충심에서 수양을 따르는 패였다. 현하에 침체된 국정, 침체된 세태를 활기 있게 하여 옛날 세종대왕 때와 같은 지치(至治)를 보고자 하는 무리─ 수양의 역량과 수완을 믿는 집현전 학사들이 대개 이편이었다.

또 하나는 그 반대로 수양에게 딴뜻이 있는 듯이 해석하여 수양에게 붙어 두어야 되겠다는 생각 아래 온 무리였다. 한명회, 권남이며, 그 밖에 이즈음 모아들인 무사가 대개 이런 패였다.

나머지 하나는 그 중간으로 수양의 진의가 어디 있는지는 똑똑히 모르나 수양께 고임 받으면 좌우간 유리하고 수양께 협력하는 편이 국가에도 좋다는 생각을 가진 무리였다. 정인지 그 밖에 집현전 소년의 몇몇이 이런 사람들이었다.

이 무리들은 그 생각하고 바라는 바는 각각 다르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근근 수양이 일대 숙청 행동을 일으킬 것은 굳게 믿었다. 더욱이 상대 쪽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그러면서도 수양측에서의 감시가 엄중하므로 다른 행동은 취하지 못하고 그 대신 연하여 수양 일파에게 대한 고약한 테에마만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수양 측의 감시 때문에 쿠데타적 행동에는 나올 틈새가 없고, 그 대신에 세상 물론을 일으켜서 수양으로 하여금 세상의 의심을 받게 하고 이리하여서 수양을 먼저 떨구어 버리고─ 이런 순서로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이 소식은 매일 수없이 수하인들에게서 수양의 귀로 들어왔다. 그리고 수하인들은 어서 바삐 수양의 결심을 재촉하고 결단을 재촉하고 분기를 재촉하였다. 저쪽에서 단지 언사로만 농락하여 수양의 세력을 잃게 하려는 동안은 괜찮지만, 저편에서 먼저 실질적의 행동을 취하면 이편이 몰락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런 일에 어서 먼저 손을 못 쓰면─ 못 써서 저쪽에서 먼저 쓰게 하면 이쪽은 역적의 이름을 듣게 되는 것은 정한 일이었다. 이러기 때문에 수하인들은 차차 초조하여 가서 수양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수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감시만 엄중히 하여 저쪽에서 먼저 손을 쓰지만 못하게 하고 이편에서는 아직 그냥 방관만 하였다.

몇 번 종서를 빈청(賓廳)에서 만났다. 종서는 언제든 적의(敵意) 품은 불관(不關)의 태도를 취하였다.

황보인은 언제든 송구한 듯 억지의 웃음을 만면에 장식하고 안절부절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양, 민신 등 선왕의 고명을 받고 지금 수양 배척의 운동(김종서의 날개 아래서)을 도모하는 그들은, 역시 적의와 불관심의 태도를 아울러 가지고 수양을 대하였다.

안평은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안평이 입궐치 않고 수양을 찾지 않고, 수양 역시 안평을 찾지 않아서 서로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의 이 불안한 상태(나라와 및 정부의)는 내관들의 입을 통하여 왕께까지 상달이 된 모양이었다.

내관 가운데도 수양에게 호의 가지는 패와 반대하는 패가 생긴 모양으로, 왕께 상달된 소문은 수양을 나쁘게 말하는 것과 좋게 말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있었다. 왕의 어린 마음은 이런 소문에 대단한 불안을 느꼈다. 당신은 수양숙을 굳게 믿지만, 풍설이 하도 가지가지라 대중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수양숙을 믿으니, 그러고 수양숙이 태산과 같이 튼튼하여 믿음직하니 근심할 바는 없지만 그래도 풍설이 어지러우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위에 왕의 유년기와 소년 시기의 생장 환경이 환경이요, 거기서 짜낸 성격이라 이런 불안을 받으면 당신이 믿는 수양께도 당신의 심경을 호소해서 그 불안을 타개할 생각을 않고, 당신 혼자 가슴속에 불안은 감추고 참아 나가는 것이었다.

수양은 여전히 조카님께 쾌활히 대하고 아무런 불안도 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고 그렇게 하느라고 애썼지만, 왕은 당신의 불안을 당신 혼자서 감추고 겪고 있었다.

왕께 대한 대신들의 태도도 전보다 달라졌다. 친애한 맛이란 손톱만치도 없고 유난히 모(角)가 지고도 의식(儀式)적이요 은근하였다.

수양을 대하기도 몹시 어려웠다. 믿음직하고도 마주 대하면 무한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즈음은 동무로서의 정종(매부)이 가장 반가웠다. 아무 불안도 없고 압박감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오직 정종 한 사람뿐이었다.

한때 소년다이 피어가던 용안은 근자에 다시 노성해 갔다.

이러는 동안에 구월달도 다 지나가고 새달이 잡혔다. 계유년 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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