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42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42[편집]

수양이 영양위 댁 사랑에 입직 승지 최항과 잠잠히 기다리고 있을 때에,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우참찬 정인지였다.

정인지는 먼저 수양께 절하고 최항에게 자기의 참배한 뜻을 어전에 아뢰기를 분부하였다.

최항은 수양을 보았다. 수양께 어쩌리까고 의견을 묻는 뜻이었다. 수양이 인지에게 대답하였다.

『대감, 이리로 앉으서요. 성념까지 번거롭게 할 게 없습니다. 불초하지만 수양이 성의를 받들어 봉행합니다.』

『밤에─ 더구나 시어소(時御所)로 급소─ 무슨 사변이라도 돌발했습니까?』

의아한 기색이었다.

수양이 한 번 눈을 고요히 닫았다가 뜨면서 대답하였다.

『태평이 오래 계속하더니 종내 괴변이 생겼습니다그려. 좌우간 앉으서요.』

인지는 발치로 들어앉았다.

일찍이 수양에게서 그 비슷한 말을 들은 일이 있기는 하였었다. 수양은 인지의 앉는 것을 보고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계속하였다.

『일찍이 대감께도 걱정한 일이 있지만, 불상사가 종내 생겨났구료.』

『그래서?』

『─그래서 일을 더디 하다가는 뒤집힐 염려가 있어서, 미처 상계치 못하고 먼저 손을 썼소이다.』

『?』

『좌상(左相)만은 내가 아까 참(斬)했고……』

『아, 나으리께서 몸소?』

눈을 둥그렇게 하는 인지의 말에는 대단치 않고 그냥 말을 계속하였다.

『저 사람들이 거사할 때엔 측근에서 내응키로 했던 내관 김연(金衍)이와 한송(韓菘)이도 내다 베게 하고, 윤허를 받자와 지금 재상들을 부르는 중이외다.』

인지는 대개 자기의 몸에는 무슨 일이 없을 줄 짐작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동요되는 모양이었다. 불안한 기색이 현저히 나타났다.

『그럼, 나으리 이 시어소……』

그러나 수양은 그냥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니 전하는 유충하오시고 저쪽은 영상(領相) 이하 삼공육경(三公六卿)이 전부에다가 더욱이 병권까지 잡았으니 한 손만 더디면 어떻게 되겠어요? 선수를 잃었다가는 필연코 일이 거꾸로 될 것, 좌상을 참했다는 소식이 문안에 들어오기 전에 당여를 제거해야지, 그 소식이 먼저 들어와서 후수가 되었다가는 큰일이외다.』

여기서 수양은 한 무릎 인지에게 가까이 갔다. 그리고 인지에게도 가까이 오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가까이 오는 인지의 손을 탁 잡았다.

『대감, 나를 도와주시오, 외롭습니다. 고병(孤兵)이외다. 삼공육경 모두 적수(敵手)외다. 어명으로 적수를 모두 제거한다 해도, 그 뒤 누가 정부를 맡습니까? 우리 유충하오신 전하를 누가 보좌합니까? 아까도 전하께오서는 이 불초에게 만사를 부탁하오시지만─ 나 영묘(세종)의 시절보다 못지않게 해보려고 생각만은 간절하지만, 원체 힘이 모자라는 위에 역시 불초하나 신명을 전하께 바치고 모든 간난을 극복하고, 우리 전하의 어우(御宇)를 성조 고력(孤力)이 어찌 뜻대로 되리까? 대감 같으신 박학다식한 분의 협조가 있어야 될 게외다. 대감, 수양을 도와주시오. 수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전하를 위해서외다. 대감은 영묘께도 고명을 받으신 분─ 지금 대감과 또─ 참, 없소이다. 당부(黨附)하든가 기맥을 통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능하든가─ 유위한 인물은 참으로 적습니다. 대감, 수양을 도와주시오.』

『잘 알았습니다. 무재하오나 부려 주시면 힘자라는껏 나으리께 시중들리다. 아아 나으리께서 이러실 날이 있을 줄 기다렸습니다. 나으리 같으신 분을 돕지 않고 누구를 도우리까? 아무런 일이라도 시켜 주서요.』

그러나 수양은 인지를 잘 안다. 인지의 비범한 지혜와 비상한 지식 학식 등은 높이 평가하기에 조금도 흠할 데가 없다. 지혜며 지식으로는 당대에 다시 구할 수 없는 보배이지만, 그의 위인에는 흠잡을 점이 많았다. 부귀와 영화에 대한 동경심이 보통 이상으로 강한 인지였다. 아첨과 참소도 제법 할 위인이었다. 일찍이 김종서가 세종대왕께 대하여 양녕대군을 참소하듯이, 어떠한 사람께 아첨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사람을 참소하기도 사양치 않을 사람이었다. 그가 신봉하는 바의 〈유(儒)〉가 가르치는 지혜는 배웠지만, 〈유〉가 명하는 〈충(忠)〉은 실천할 만한 의지력을 못 가진 인지는 성격상의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부귀와 공명을 사모하는 정은 종서나 인지나 비슷하였지만─ 그리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점도 비슷했지만, 그 수단이 전자는 음흉한 대신에 후자는 간교하였다.

세종대왕의 분부로 전조(前朝)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함에, 고려 충렬(忠烈) 이후의 임금께는 본시의 기록에는 조(祖)며 종(宗)으로 되어 있는 것을 모두 잠칭이라 하여 무슨 왕 무슨 왕이라 고친 것은 둘째 두고, 고려 오백 년을 쇠잔 패망지국으로 만들고 더욱이 여말(麗末)의 역사는 통 뒤집어 놓았으니 아무리 이조의 신하라 하지만 이것은 과한 일이었다. 본조(本朝)의 흥기는 천명에 따름이라, 전조를 칭찬한다고 본조가 흉하게 될 것이 아니고, 전조를 헐뜯는다고 본조가 더 훌륭해질 것이 아니어늘, 인지의 생각은 그렇게 해야 본조가 더 빛날 것 같아서 한 일로, 이것은 단지 인지의 위인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양녕대군을 헐뜯어야 세종대왕께 고임을 받을 것같이 생각한 김종서의 심리와 공통되는 것이었다.

다만 저는 음흉한 데 반하여 이는 간특하거니, 음흉한 사람은 음흉한 꾀를 베풀되 간특한 사람은 간특한 꾀 이상은 베풀지 못한다. 음흉한 사람은 언제든 마음 놓을 수가 없으되, 간특한 사람은 거기 속지만 않으면 된다.

수양은 인지의 나쁜 방면을 모름이 아니로되, 그의 쉽지 않은 지식과 지혜를 높이 보아서 그를 긴히 쓰고자 함이었다.

『대감의 지혜와 지식─ 국가를 다스림에 없지 못할 것이외다. 대감과 힘을 아울러 우리 전하를 도웁시다.』

『나으리의 앞에서 견마의 노를 다하오리다.』

수양은 그냥 인지의 손을 잡은 채 입을 닫았다.

이 정인지는 미리부터 눈여겨보아 오던 사람으로, 그의 박학은 충분히 쓸 데가 있을 뿐더러, 집현전 청년학도들에게 받는 존신도 또 큰지라, 정인지 한 사람의 향배가 및는 영향이 또 적지 않다. 세력이 가는 곳에 인지도 당연히 따를 것이라, 오늘 이 부탁은 인지 쾌히 승낙할 줄은 미리 알았던 바였지만 직접 그에게 말까지 하여 맹세까지 얻어 놓으니, 한 시름은 덜어졌다. 수양은 잠시 더 있다가 입을 열었다.

『대감, 오늘 저녁으로 반드시 끝내야 할 일이 이렇습니다!』

인지에게 대하여 대강 이야기를 하였다. 문간에 지키는 무리들의 역할이며, 수양 자기의 복안 등을 수양과 인지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차례로 보고가 들어왔다. 황보인이며 조극관이며는 수양과 인지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문간에서 처치가 되어서 보고가 들어왔다. 영상 황보인이가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올 때는, 수양은 인지와 하던 수작을 멈추고 합장 명목하였다.

『천하 호인! 재능이 없으니 죽어도 아까운 데는 없지만, 공연한 일에 걸려들어서 와석 종신도 못하고, 더러운 이름 아래 죽었으니─ 아아!』

그의 호인답던 얼굴을 회상해 보고, 그 얼굴이 주검으로 변하여 길게 넘어졌을 일을 생각하고는 탄식하였다.

오늘 참내하는 사람 가운데 사부(死簿)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딴 방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수양은 인지와 대강 이야기를 마친 뒤에,

『그럼, 대감, 그렇게 아시고 대감의 박식과 다지(多知)로 불초 수양을 도와 주서요. 나는 전하께 들어가 뵈옵겠습니다. 얼마나 놀라시고 얼마나 불안하실까?』

하고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들매, 왕은 매부 정종과 내관들을 꼭 곁에 가까이 모아놓고, 용안은 불안 때문에 창백해 있었다. 수양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숙부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양은 어전에 부복하였다.

『전하, 성대에 어찌 해괴한 일이 성공이 되오리까? 간배 차례로 복주를 하는 모양이올시다.』

『난 몰랐어요. 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그런 일을 도모할 줄은 참으로 몰랐어요. 무에 부족해서……』

『신은 벌써 눈치채었습니다. 전혀 신의 탓이옵니다. 신을 기탄하와 기탄하는 나머지에 불측한 생각까지 내었던 바옵니다. 전하께오서는 신을 믿으오시고 신은 저 사람들을 믿지 않으오매, 자위지책으로 세부득이한 것이옵니다.』

『그러니 누구를 믿으리까? 선묘께 고명 받은 사람들까지 그러니……』

『신을 믿으오서요. 신만 믿으오서요.』

수양은 분명한 어조로 아뢰었다.

『숙부님, 다시 나가시지 마서요. 곁에 계셔 주서요. 무섭습니다.』

『곁에 모시오리다. 떠나지 않습고……』

『밖에는 군졸들이 있습니까?』

『네, 홍달손 휘하의 순군, 봉석주 휘하의 금위군이 성궁을 겹겹이 호위하옵고, 신이 기르던 무사들이 그 안으로 수호하옵고, 신 또한 미력이나마 내관들과 합력하와 성궁을 여기 모시옵니다.』

『밖에는 밤바람 좀 차지 않으리까? 밤도 들었는데……』

『약간 차옵니다.』

『수고를 하는군요, 군졸들─ 술이라도 한 잔씩, 나누라고 내보내 주서요.』

『이 광은을…… 군졸들이 이 광은에 얼마나 환희하올지……』

수양은 이 높은 뜻을 병졸들에게 알리게 하고, 술을 내어다 주게 하였다.


라이선스[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