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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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편집]

『우리도 어렸을 적에는 그랬겠지. 우리 전하 천승의 용상보다도 상왕위를 부러워하신단 말이지.』

어전을 물러 나와 정부로 나온 수양은, 웃으면서 좌우의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영의정 정인지가 수양에게 물었다.

『그래 나으리 뭐라고 여쭈셨습니까?』

『여쭐 말씀이 있소? 웃고 말았지.』

인지는 허리에 손을 대고 두 번 허리를 젓고 또 말하였다.

『나으리, 이즈음 간간 시생 그런 생각을 해 보는데요. 즉 주상 전하 너무 어질고 마음이 약하지요. 천만 적자를 거느리실 어깨로는 너무 작단 말씀이지요. 그 때문에 관민이 모두 은근히 걱정을 합니다. 나으리도 전하께 직접 들으셨다니 더 말씀할 게 없지만, 시생이 뵙기에는 너무 무거우신 짐에 혼자 번뇌하시는 양이 분명해요. 적당한 계승자만 있으면, 전하는 상왕으로 높이 모시고 존귀한 여생을 보내시도록─이건 전하도 희망하시는 바니까─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해 올리고 싶은 생각도 간간 납니다그려. 나으리 생각은 어떠신지?』

『하하하하! 내 박학치 못해서 모르지만, 고금 동시에 〈소년 상왕〉이 있었다는 말은 듣도 읽도 못했는걸요.』

『그래도 전하께서도 그걸 희망하시는 데야! 희망까지는 혹은 말이 적절치 못한 듯도 하지만 좀 그……』

『그건 신자들의 실수지요. 정부라, 양사(憲諫)라, 삼사, 사사(五堂, 政院)에서 너무 귀찮으시게 하니까. 사람 어떤 때는 〈에라 죽어 버릴까〉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고, 정말로 죽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역해서 하시는 말씀. 그러기에 우리들이 잘 모셔서 역한 생각 안 드시도록 해 올려야 할 게 아니오니까? 우리 잘 협력합시다.』

그날 수양은 신숙주를 집으로 불렀다.

신숙주에게 문사들을 동원하여 저작 찬술의 업을 크게 일으킬 것을 분부하였다.

우선 숙주가 총재(總裁)되어 집현전 문사들의 적당한 자를 골라서 춘추관의 직을 겸임, 정원과 협력하여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사조의 사적을 찬집하기를 분부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시작이었다.

〈동국통감〉도 찬수를 시작케 하도록 그 용의를 분부하였다. 〈통문관지〉, 〈오례의(五禮儀)〉 그 밖 무수한 찬수─세종조에 착수하였다가 그사이 중단되거나 혹은 휴식 상태에 들었던 것들까지 모두 다시 착수하고, 또 새로 시작 착수할 것을 생각하고 골라 내고─ 또 선비들을 모아서 오경(五經)의 해석의 이동(異同)을 논란케 해서 거기서 가장 좋은 답안을 얻도록 하고, 역학(易學)이며 구두(句讀)를 연구케 하고─ 온갖 방면으로 유신(儒臣)들을 구사할 만한 안(案)을 만들어내기를 도모하였다. 슬기롭고 박학한 숙주는 수양의 이런 창안에 좋은 고문이 되고 협조자가 될 수가 있었다.

수양의 이런 안이 무슨 필요로 생겨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숙주는, 수양의 뜻에 부할 수 있도록 많은 안을 생각해 보기를 약속하고 그날은 물러갔다.

한가하기 때문에 생각하느니 고례문(古禮文)이요, 연구하느니 남의 흠절만이던 사사(四司)며, 예문 승문(禮文 承文), 춘추 성균(春秋 成均) 등의 문신들에게 차차 겸직(兼職)의 분부가 내렸다. 그리고 일방으로는 쓸데없는 계며 간(啓諫)은 용서 없이 거부하고 좀 심한 자는 체직 내지 파직까지 시켰다.

그 대신 좀 유용한 인물들은 쑥쑥 뽑아 올렸다. 사품 오품관에서 굴던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등등 모두 삼품관으로 오르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병석에 누운 뒤부터 지금까지 십년간 침체되고─ 침체되기 때문에 잔소리 연구나 하던 이 땅도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갑술년도 넘어가고 을해(乙亥)년이 이르렀다.


을해년 이월, 또 한 가지의 사건이 생겨났다.

지난해 연말경부터 이상한 소문이 차차 장안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왕은 그 위(位)를 수양대군께 물려드리고, 당신은 상왕(上王)이 된다.〉

이런 소문이었다.

이런 소문이 얼마나 퍼졌는지는 모르나, 이 소문이 수양의 귀에 들어온 것은 수양 부인의 입을 통해서였다. 하인배가 얻어온 소문이었다.

하인배의 귀에까지 들어가노라니 항간에는 꽤 소문이 높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한명회 권남 배도 당연히 들었을 것인데 듣고도 수양께 사뢰지 않은 것은?

너무 무서운 소문이라 차마 사뢰지 못하였는가, 혹은 자창자화(自唱自和)하는 것이라 스스로 사뢰기가 마음에 걸려서 못함인가?

부인의 입을 통하여 수양의 귀에 들어온 것은 을해년 정월이었다.

수양은 민망하였다. 그런 소문을 들은 뒤에는 모두가 자기를 주목하는 것 같았다. 항간에 널리 퍼진 소문인 모양이, 재상들도 들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날(수양의 귀에 들어온 날)부터 갑자기 눈치 달라질 것도 아니지만, 수양의 웬만한 일에는 구애치 않는 성격에도, 모두가 주목하는 것 같아서 꽤 마음 켕기었다.

그러나 재상보다도 왕께까지 이 소문이 들어가면 이 일을 어찌하나?

그날은 종내 조카님께 뵙지 못하였다. 스스로 송구하여 뵈올 용기가 안 났다.

이튿날은 왕이 시종을 보내서 부르므로 하릴없이 어전에 나아갔다. 그 풍문에 관해서 무슨 하문이 있는가, 적어도 맟색이라도 다르지 않은가고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그러나 조카님은 아무 다른 기색이 없었다. 수양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차차 며칠 지내는 동안에 이젠 어전에 나아가기도 그다지 어색치 않을만치 회복되었다.

이러는 동안 정월이 지나고 이월─

이월 초에 수양은 왕께 수유를 얻어 가지고 며칠간 좀 쉬었다. 쉰다고 누워서 쉬는 것이 아니고 백부 양녕을 따라서 사냥을 나갔던 것이다. 정무에 골몰도 하고 백부의 권유도 있고 하여서 며칠 다녀온 것이다. 떠날 때에 좌우의정과 숙주에게 자기 떠나 있는 동안 결코 번거로운 일을 꺼내서 성심 괴롭게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였다.

사냥을 다녀와서는 곧 예궐하여 어전에 뵈었다. 그런즉 용안에 매우 언짢은 기색이 있었다. 수양의 인사도 받는 듯 마는 듯하였다.

몸에 수상한 풍설을 받고 있는 수양이라, 가슴이 선뜩하였다. 왜 언짢아 하시는가고 물을 용기가 없었다.

어름어름 어전을 퇴출하여 정부로 나왔다.

정부로 나와서 알았다. 자기가 떠나 있는 동안 한 가지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세종의 第六子, 수양의 아우님)를 고신(告身)케 하고, 화의군 영(和義君 瓔─세종의 庶長男)을 보낸 것이다. 죄목은 화의군이 적제(嫡弟)의 첩과 간통했다는 죄와, 및 금성대군이 왕자의 신분으로 집에 잡배들을 (화의군도 섞였다) 모아서 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금성이 왕자다이 근신하지 않는데 대해서는 수양도 몇 번 권고를 했다. 지금 왕실의 틈새만 엿보는 무리들이 많으니 좀 삼가라고 하였다. 그래도 삼가지 않더니 내 걸려든 것이었다.

이 사건과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즉 내관 엄자치와 혜빈 양씨를 벌한 것이다. 양씨는 왕께 젖을 드린 연분이 있는 사람이다. 왕이 왕비를 맞기 전에 고적한 심경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리고자, 수양이 아뢰어 대궐에 불러다 두었던 것을 이번에 크게 꾸중하여 내쫓았다.

엄자치는 금부에 내려서 제주로 귀양보냈는데, 가는 도중에서 죽었다 하는 것이다.

그 두 사람(양씨와 엄자치)의 죄목은 항간에 떠도는 고약한 풍설을 왕께 사뢴 때문이었다. 수양은 눈앞이 아득하였다. 그런 풍설을 왕께 사뢰었으면 조카님은 얼마나 자기를 괘씸히 보시랴. 그만큼 자기는 정성껏 조카님을 위해 애썼거늘, 그런 풍설이 들어가면 모두가 허사로 돌아가는가? 아름다운 꿈, 가슴에 품고 어서 모든 일이 달성돼서, 조카님께 자랑스러운 얼굴로 환정(還政)할 날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거늘, 일조에 그 신임을 잃는단 말인가? 신임만 잃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만약 사사(賜死)의 처분이라도 내리면 이 일을 어찌하는가?

수양은 한참을 생각하였다.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너무도 액색하게 깨어져 나갔다. 문종 승하한 이래로 사년간을 공들여 조카님의 신임을 사고, 또 지금 바야흐로 이 나라를 키우려는 정치공이 시작되려는 이때에 모두가 무너져나간단 말이냐?

한참을 생각하였다. 생각한 뒤에 몸을 일으켰다. 뒤뜰로 돌았다.

거적을 하나 얻어서 몸소 옆에 끼고 조카님이 좌어해 있는 자미당 뜰 아래로 돌아갔다.

2월 얼음 언 땅에 거적을 폈다. 겨울 바람을 막으려고 굳게 닫혀 있는 문을 향하여 수양은 사뢰었다.

『전하께 죄인 수양대군 대죄한다고 사뢰어라』

창이 덜컥 열렸다. 내관이 아니요, 조카님이 몸소 내다보았다.

『아이 숙부님, 웬일이셔요? 어서 올라오셔요. 이 찬 땅에 누구 내려가서 어서 수양대군을 모셔 올려라.』

내관 두 명이 내려와서 좌우에서 수양을 부축하였다. 그러나 수양은 그냥 일어나지 않았다.

『전하, 금부에 내리시와 치죄하십시오.』

『어서 올라오셔요. 대죄가 뭐이고 치죄가 뭐입니까? 문 열어 춥습니다. 어서 올라나 오셔요. 안 오르시면 내가 내려갈 테야요.』

수양은 잠깐 우러러보았다. 용안에 약간이라도 아까와 같은 언짢은 기색이 있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의외에도 용안은 아무 다른 기색 없이 어서 수양의 오르기만 재촉하는 것이었다.

수양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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