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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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차[第四次]의 참극[慘劇][편집]

밤은 점점 깊어 간다.

은몽은 유불란의 이 무서운 공상을 어떻게 반박해야할지 통 모르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고, 그 다음에는 유불란을 비웃었고 또 그 다음에는 상대방을 경멸까지 하여 보았으나 유탐정의 신념에는 추호도 어지러워짐이 없는 것을 본 은몽은 돌연 밀물처럼 북받쳐 오르는 비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흑! 하고「테이블」위에 쓰러지면서

『너무 하세요! 유선생은 정말 너무 하십니다! 아무리 유선생이 저를 미워하고 저를 원망하신다 하더라도 그건 너무도 저를 모욕하는 말씀이예요. 아무리 제가 유선생을 저버리고 오상억씨와 가까이 하였다해서 그건 너무한 분풀이예요! 유선생이 그렇게 비겁한 사람인줄은 전 정말 몰랐어요. 무슨 증거로…… 무슨 증거가 있길래 저에게 그렇게 무실의 원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거예요? 탐정의 입장으로선 그러한 공상을 논하여 한시바삐 사건을 해결하고 싶겠지만, 저로선…저로선 너무도 억울한 누명이 아니예요?』

격할대로 격한 은몽이었다. 슬픔은 은몽의 온 몸뚱이를 폭풍우처럼 습격하는 것이었다.

『── 오변호사가 ×천읍엘 갔었을 때, 저는 명수대 제 집에서 한 발자욱도 밖엘 나와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한 처지에 있던 제가 어떻게 오변호사를 ×천읍까지 따라갔다는 말씀이에요? 부부암에서 홍서방을 대체 어떻게 죽였다는 말씀이예요 ? 유선생의 명예를 위해서 제가 유선생의 희생자가 된다면 그건…… 그건 정말 달갑게 받겠어요. 어디까지든지 유선생은 저를 그 무서운 함정에다 잡아 넣으려고…너무하세요! 무슨 증거로 저를 가르쳐 해월이라고?……』

은몽은 무섭게 흐느껴 울었다. 마자(魔者)냐? 성자(聖者)냐? 그 폐부를 찌르는 듯한 은몽의 원한에 가득찬 하소연 ── 그건 마치 원죄를 짊어진 성자의 자태 같기도 하였고, 그 성자를 황야에서 시험한 「사탄」같기도 하였다.

유탐정은 들창에 몸을 기대고 우두커니 서서 비애와 원망의 물결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은몽의 몸뚱이를 얼마동안 정신없이 바라 보다가

『으음 ──』

하고 괴로운 듯 한번 길게 신음하였다.

『은몽씨! 절대로 나를 오해하시는 것만은 그만두어 주십시요. 실연의 분풀이로 죄 없는 인간을 죄있게 만드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 할, 그러한 인간은 아니올시다. ── 아까도 은몽씨에게 말씀드린바와 마찬가지로 나는 과거에 있어서나 현재에 있어서나 그리고 영원 무궁히 은몽이라는 한사람의 여인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서운 공상을 토로하지 않으면 안되게된 저의 고충을 살펴 주십시요.』

그리고 그는 은몽의 옆으로 가까이 걸어와서

『은몽씨의 눈물을 보는 순간마다, 나는 나의 공상이 얼마나 황당무게하며 얼마나 악착한가를 깨닫읍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 은몽씨의 얼굴에서 눈물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다시 나의 공상을 보다 더 굳게 믿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은몽씨! 나의 솔직한 고백을 솔직히 받아 드려 주십시요 ── 그러나 아아!』

유불란은 마치 경탄하 듯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오변호사를 따라갔던 해월! 부부암에서 홍서방을 쏘아 죽인 해월! 나의 상상을 뿌리채 뒤집어 엎은 이 해월의 존재를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만 될 것인가?』

바로 그때였다. 옆방 서재로부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려온다.

유불란은「테이블」에 엎드러진 은몽을 그대로 남겨놓고 옆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은몽은 그때야 비로소 눈물어린 얼굴을 들고 귀를 기우렸다.

『유불란이 올시다. 삼청동…엣? 정란씨가 살해을 당했다고……』

유불란의 굵다란 목소리가 놀라움과 흥분을 싣고 은몽의 고막을 두드렸다.

아니 뭐 『 , …… 정란씨가 살해를 당했다니…… 언제? 약 십 오분 전? 어디서? 삼청동 공원에서! 그러면 문학수씨, 내 지금 곧 갈테니……그런데 임 경부는 왔읍니까? 지금 막 전화를 걸었다?…오상억씨는?…오상억씨는 아직 알리지 않았다?…』

유불란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어 광화문국 ××××번을 불러냈다.

『여보시요! 오변호사 댁입니까?…아, 바로 오변호사입니까? 유불란이 올시다.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삼청동 문학수씨 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정란씨가 또 살해를 당하였읍니다! 은몽씨 말씀입니까? 아 은몽씨는 염려 마십시요. 지금 내 집에 오셨으니까……』

유불란은 거기서 전화를 끊었다가 이번에도 또 수화기를 들고 역시 광화문 국 △△△△번을 불렀다.

『황선생 댁에 계십니까? 아, 황선생이십니까? 유불란이 올시다. 안녕하십니까? 아직 사건은 미해결입니다.……다른 것이아니라 오늘밤, 잠깐 황 선생을 뵈오러 가려고 했었읍니다. 그런데, 지금 좀 긴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아침 일찌기 찾아 뵙겠읍니다. 부디 외출하지 마시고 저를 기다려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읍니다. 네네,…그럼 내일 아침에……안녕히 주무십시요!』

전화를 마친 유탐정은 다시 서재로 돌아와서

『은몽씨! 은몽씨도 들으셨겠지만 정란씨가 또 살해를 당했읍니다!』

그러나 은몽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유불란의 창백한 얼굴을 잠깐동안 말똥말똥 쳐다 보다가

『유선생!』

하고 유불란을 불렀다.

『유선생! 저는 지금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통 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어요! 정란이가…… 정란이가 살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저에게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맛보게 하는군요! 정란이가 죽은 것은 한없이 슬프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정란의 죽음은 저를……저를 가르쳐 해월이라고 부르시는 유선생의 무서운 눈초리로 부터 저를 구해주었읍니다! 저는… 저는 유선생과 지금껏 이 방안에 앉아있지 않았읍니까?』

그러면서 은몽은 또 다시 북바쳐 오르는 비탄에 무섭게 몸부림 쳤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일로 미루고, 자아 빨리 삼청동으로 가보아야 겠읍니다!』

유불란은 그러면서 은몽을 재촉하여 허덕거리는 발걸음으로 서재를 뛰쳐나왔다.

밤은 거의 열 두시가 가까웠다.

이리하여 유불란과 은몽은 광화문 네거리 어떤「가레 ─ 지」로 가서 「택시 ──」를 타고 삼청동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유불란은 팔짱을 끼고 눈을 지긋이 감은채 고슴도치 처럼 통 움직일줄을 모른다.

정란이가 죽었다! 그것은 실로 탐정 유불란에게 있어서 글자 그대로, 아니 글자 이상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무서운 사실이었다.

『아아, 가엾은 유불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추리, 모든 공상은 모래 위에 누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란이가 죽을 때, 은몽은 분명코 나와 같이 있었다! 나와 같이 있었다!』

유탐정은 자기의 몸뚱이가 천길만길 되는 깊은 구렁속으로 쑥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월이란 대체 어떠한 놈인가?』

유불란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뜨고 묵묵히 앉아 있는 은몽의 얼굴을 곁눈질 해 보았다.

사실 은몽의 얼굴은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였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아, 저 사랑스러운 얼굴! 저 어린애처럼 무심한 얼굴!』

그리고 그가 마침내 은몽의 그 백납처럼 핼쓱한 얼굴에서 발견한 것은 의지할 곳 없고 믿을 곳을 잃어버린 고아(孤兒)로서의 무서운 고독의 빛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흘러 나오려는 뜨거운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는 듯 눈만 깜박거리며 외면한채 통 얼굴을 돌리지 않는 은몽 ── 이윽고 유불란과 은몽은 삼청동 정란의 집에 도착하였다. 근방 일대는 엄중한 경비망이다.

유불란과 은몽은 경찰의 안내를 받아 아래층 침실로 들어갔다.

『아, 정란이!……』

은몽은 방안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정란의 무참한 죽엄을 눈앞에 보고 그렇게 외치면서 피로 물들인 침대를 향하여 달려갔다.

정란의 가슴에서는 아직도 선혈이 뭉클뭉클 솟는다.

『이게 웬 일이야? 정란이!』

은몽은 그러면서 정란의 시체를 붙잡고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시체 옆에는 약혼자 문학수가 침통한 표정으로 돌부처처럼 서 있다. 한 걸음 먼저 도착한 임경부가 뒷짐을 지고 방안을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한다.

뒤이어 오상억 변호사가 뛰어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이게 대체 어찌된 셈입니까?』

하고 오상억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임경부도 말이 없고 문학수도 말이 없다.

『유불란씨!』

하고 그때야 비로소 임경부는 걸음을 멈추고 유불란을 향하였다.

『날이 밝는 대로 나는 사직원을 제출할 작정이오!』

하는 임경부의 얼굴에는 심각한 책임감이 알알이 떠올랐다.

『나는 이 이상 더 사건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읍니다. 나는 나 자신을 경멸하는 동시에 이후부터는 절대로 범죄사건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결심하였소.』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유불란씨도 나와 함께 한시바삐 전 국민에게 사죄의 뜻을 표하는게 좋을 듯 싶읍니다.』

그러나 유불란은 아무 말도 없이 정란의 시체 옆에서 흐느껴 우는 은몽의 새하얀 목덜미만을 쏘아보고 있었다.

『유불란씨! 지금 하신 임경부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그 때까지 돌부처처럼 서 있던 문학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답 밖에는 없읍니까?』

『문학수씨, 나는 오늘 아침 사람들 앞에서 사흘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선언하였읍니다. 사흘 후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해월을 체포하겠노라고요!』

『그렇습니다!』

하고 그때 오변호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사흘만 여유를 주신다면 변변치는 못하나마 이 오상억도 해월을 체포하겠읍니다!』

하는 오변호사의 시선과 유불란의 시선이 무섭게 부딪쳤다.

그러나 유불란은 곧 시선을 돌리며

『하옇든 정란씨가 봉변을 당하기 까지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하는 말에 문학수는 그런건 알아서 무얼 하겠느냐는 듯 얼마동안 대답없이 서 있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더위가 하도 심하고 해서 정란은 좀체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옆방에서 자는 문학수를 깨워 삼청동 공원으로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고 청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신변의 위험을 『 느끼면서도 이 며칠동안 바깥 구경을 못한 정란을 위하여 그의 말대로 공원엘 나갔었지요. 흐리던 날이 개이면서 공원 일대에는 달빛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읍니다. 여기서 공원까지는 실상 엎디면 코가 닿으리만큼 가깝지 않습니까. 그리고 집 주위에는 경찰들이 파수하고 있겠다 어지간이 마음을 놓고「풀」을 지나 저편 가회동으로 올라가는

「드라이브·웨이」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나타났는지, 안국동쪽으로부터 한대의 자동차가 스름스름 기어 올라오는 것이 보이겠지요.「헷드·라이트」는 무척 밝았읍니다. 자동차 안은 캄캄한 어둠이었읍니다. 우리들은 하는 수 없이 강렬한「헷드·라이트」속에서 눈을 가리우면서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지요. 그 순간 획하고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 속에서 시커먼 팔목이 쑥 나타나면서 한방의 권총소리가……아니 총 소리를 의식했을 때는 벌써 나의 팔목에 비틀비틀 쓰러질 때였지요. 자동차는 무서운 속력으로 가회동 쪽을 향하여 쏜살같이 질주하는 것이었읍니다.』

문학수의 설명이 끝나자 유불란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당황한 발걸음으로 밖으로 뛰어 나왔다. 새로 한시다. 그는 현관에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에 오르면서

『효자동까지!』

하고 부르짖었다.

이리하여 정문을 나선 자동차는 컴컴한 밤거리를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하였다.

총독부를 지나고 효자동 종점을 지난 자동차는 약 십분 후 혜전교장 황세민씨의 집 앞에서 욱하고 멎었다.

초인종을 눌렀으나 황교장은 곧 나오지 않았다. 집안에 불이 모두 꺼진 것을 보니 자는 모양이다.

이윽고 침실 비슷한 방안에 전등이 켜지며 복도를 걸어 나오는 발자욱 소리. ── 현관이 드르륵하고 열리며 나타난 것은 황교장 자신이었다.

『아, 유불란씨가 아니십니까?』

잠옷을 입은 황교장이 의아스러운 눈으로 유불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주무시는데 찾아와서…… 황송하기 짝이 없읍니다. 사실은 내일 아침 일찌기 찾아 뵙고자 하였읍니다만 사정이 좀 급해서……』

『네네, 들어오십시요.』

황교장은 앞장서서 유불란을 서재로 인도하였다.

『황선생 ──』

유불란은 의자에 앉으며 당황한 목소리로 그렇게 불렀다.

『사정이 급하시다니…… 또 무슨?……』

『정란씨가 또 살해를 당했읍니다.』

『옛 정란씨가?』

하고 놀라며

『역시 범인은 해월이?』

『물론 그럴테지요. ──』

거기서 유불란은 문학수가 한 설명을 그대로 옮겼다.

『으음 ──』

하고 긴 한숨을 짓는 황교장에게

『황선생!』

하고 유불란은 힘을 주어 불렀다.

『황선생! 아니 백문호씨!』

『옛?』

하고 그 순간 의자에서 일어나는 황세민 교장의 놀라움을 무시하고

『── 삼십 년 전 ×천읍 부부암에서 사촌동생 백영호가 떠밀어 대동강의 물귀신이 되었다는 백문호 ──』

『으, 으, 음 ──』

황교장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무섭게 신음하였다.

『당신…… 당신은 대체 그것을 어떻게……』

『문호의 애인 엄여분을 능욕한 악인 영호는 그 후 백부인 문호의 아버지에게 독약을 먹여서 살해한 후에, 유산 백만원을 상속하여……』

『오오…… 당신은, 당신은……』

번개처럼 떠오르는 지나간 날의 무서운 추억이 늙은 황교장의 전신을 뒤흔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백문호는 요행이도 해적선의 구호를 받아, 다년간 본의 아닌 해적생활을 계속하다가 ── 그리고 황선생이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것으로 보아 그 해적선이 황해와 남지나해 일대를 노리고 있는 지나인의 해적선이었을 것입니다. ── 그러다가 문호는 마침내 「쌘 프란시스코」에서 해적선을 탈출하여 명망있는 목사「윌리암·엔더 ── 슨」씨의 보호를 받다가,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삼십 만원이란 거액을 품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사회사업에 여생을 바치려 했습니다.』

『당신은 마치 자기 눈으로 본것 처럼……』

놀란움을 넘어서 하나의 기적에 당면한 것 같은 황교장의 얼굴이었다.

『── 아니, 그 보다도 먼저 문호는 악마 영호에게 대한 복수의 일념에 불탔읍니다. 그러나 천성이 선량한 문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도리어 원수와 손을 마주잡고 쓰러져가는 혜선전문학교를 위하여……』

『잠깐만, 잠깐만……』

하고 황교장은 그때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손등으로 씻으면서

『그것은 내가 그에게 청한 것이 아니라, 영호가 자진하여 자기가 범한 죄값의 만분지 일이라도……즉 사죄의 의미로서 자기의 재산의 십분지 칠 ── 칠십 만원을 제공하겠다고……』

『악마 영호에게 비하면 문호는 너무나 착한 성품의 소유자였읍니다. 그는 백영호의 죄악을 물로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오로지 사회사업을 위하여 온 정신을 바쳤읍니다. ── 그는「쌘프란시스코」에서「아메리카」에 귀화했을 때의 이름 ── 황세민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 때 물론 백문호라는 이름은 호적상의 주선(朱線)을 맞은지 오랬였었지요.』

「테이블」을 웅켜잡은 황교장 ── 아니 백문호의 두 팔이 와들와들 경련을 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면서 황교장은 유불란의 이야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수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호는 엄여분이가 죽을 때……』

『그렇습니다! 나도 그 후 ×천읍을 몇 번 찾아갔지요. 사람들 중간에 내세워서 간접으로 홍서방에게 여분의 행방을 탐지 시켜 보았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평양 어디서 죽었다는 소리밖에 못 들었읍니다.』

『그러면 여분의 몸에서 어린애가……』

『에? 어린애가아니 여분이가 그 때 어린애를 낳았습니까?』

황교장의 놀라움은 극도에 달하였다.

그 황교장의 놀란 얼굴을 유불란은 잠깐 측은한 표정으로 묵묵히 바라보고 앉았다가

『그렇습니다. 여분은 그 때 어린애를 낳고 산후가 불순하여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린애는 누구의?』

『문호가 부부암에서 살해를 당한지 육칠개월 만이니까, 그것은 문호의 자식임에 틀림이 없겠지요.』

『오오! 당신은, 당신은 그런 비밀까지……』

하고 자기의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머리를 두 서너번 흔들고 나서 그 애가 그 어린애가 『 …… 지금도 살아 있읍니까? 살아 있다면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습니까…… 이름은 뭐라고 부릅니까……가르쳐 주세요! 어서 빨리 그것을 가르쳐 주시요!』

그러면서 황교장은「테이블」위로 손을 뻗혀 유불란의 팔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이 자리에서 가르쳐 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요. 그러나 다만 한가지, 그 애의 이름만은 가르쳐 드릴 수가 있읍니다.』

『오오! 당신은 참말 이 늙은이의 귀인이요! 그애 이름은, 그 어린애의 이름은 뭐라고 부릅니까?』

유불란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해월이라고 부릅니다!』

하고 황교장을 쳐다보았다.

『옛?』

황교장은 불현 듯 잡았던 유불란의 팔목을 털썩 놓으며

『뭣이라구요?……해월이? 아니, 저 살인귀 해월이라구요?』

찢어질 듯이 부릅뜬 황교장의 두 눈에는 방금이라도 불덩어리가 튀어나올 듯이 무섭게 충열되었다. 황교장에게 있어서 그것은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해월이가 백영호씨의 미술품 수집실에 떨어뜨린「로켓트」의 사진은 지금 황선생이 가지고 계시는 사진과 똑같은 엄여분의 사진입니다.』

『음……나도, 나도 그 사실이 하도 마음에 걸려서……으음! 역시 나의 생각과 같았었던가……』

하고 황교장은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느끼면서

『해월이가 지금 어디 있읍니까? 그것을 한 시 바삐 이 늙은이에게 가르쳐 주시요.』

『황선생! 이 삼일 동안만 기다려 주십시요. 이 삼일 후엔 제가 황 선생을 해월의 곁으로 인도해 드리겠읍니다.』

『이 삼일 동안을 어떻게 기다리라고 당신은……지금 곧 해월이 있는 데로 나를 안내해 주시오!』

『아닙니다! 이 삼일 후가 아니면 해월이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 그런데 황선생께 한가지 여쭙고자 하는 것은 저번 날 밤에 황 선생을 찾아왔던 그 싯누런 이빨을 가진 사나이가 대체 어떤 인물인가를 가르쳐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읍니다.』

『아, 그 오첨지 말이요?』

『오첨지?』

『네, 오첨지는 나와 해적생활을 같이한 놈인데, 우리들은 그를 오첨지하고 불렀고, 그의 이름은 모르지요.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어디라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해적생활 시대에는 황세민 ── 아니 백문호와 오첨지는 대단히 친한 사이였으므로 백문호는 자기의 과거를 오첨지에게 하나도 숨김 없이 전부 이야기 한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하니 크나 큰 실책이었다.

백문호가 황세민이란 이름으로 조선으로 돌아온지 오년 후 어떤 날, 돌연 오첨지가 황교장 앞에 나타나서 해적생활 하던 황교장의 과거의 비밀을 지켜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혹은 몇 천원, 몇 만원씩 갈취해 가곤 하는, 말하자면 바다위에서의 친우가 육지에서는 하나의 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번 백영호 살해사건이 일어난 후부터는, 마치 거머리처럼 꼭 달라 붙어서 떨어지질 않지요. 백영호를 살해한 범인을 나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내가 백영호 일가에게 복수한다는 것을 협박 조건으로 나에게 삼만원을 강요하러 왔던 것이지요. 그 놈은 지나간 오년 동안 내 생활에 있어서 흡혈귀(吸衣鬼)였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