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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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대낮 거리에 나를 배반하여 사람 하나 없다.

패배에 이은 패배의 이행, 그 고통은 절대(絶代)한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자살마저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래 그렇기에……

나는 곧 다시 즐거운 산, 즐거운 바다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달뜬 친절한 말씨와 눈길 ─ 그리고 나는 슬퍼하기보다는 우선 괴로워하기 부터 아니하면 아니 된다.

한여름 대낮 거리 사람들 모두 날 배반하여 허허롭고야

1[편집]

상(箱)은 참으로 후회하지 아니할까? 그렇진 않겠지. 그건 참을 수없는 냉정함보다도 더욱 냉정하여 참을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다리고 있다. 후회를…… 상에게서 후회하지 아니하는 시간은 더욱 위태하다는 그런 말일까. 그는 절실히 후회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 꼴이었다.

혼자서 못된 짓 하고 싶다. 난 이제 끝내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 필경 살아나지 못할 테지.

하나 언제나 상과 꼭 같은 모양을 한, 바로 상 자신이 아니면 아니 된다. 그림자보다도 불투명한 한 사나이가 그의 앞에 막아서면서 어정버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빛바랜 세피아 색 그림자 앞에선 고개를 들지 못한다.

어차피 살아날 수 없는 것이라면, 혼자서 한껏 잔인한 짓을 해보고 싶구나.

그래 상대방을 죽도록 기쁘게 해주고 싶다. 그런 상대는 여자, 역시 여자라야 한다. 그래 여자라야만 할지도 모르지.

그래 그는 후회하지 아니했는가. 거듭될수록 오히려 후회는 심각해지지 아니했던가. 그럴 때 그의 지쳐 버린 머리로 어떤 것을 생각했던가. 이 경우의 여자, 그의 이른바 여자란 무엇인가.

상은 사실은 이토록 후회하고 있단 말이다. 그의 머리는 ─ 이성은, 참으로 그가 고대하고 있는 것은 물론 후회 같은 씁쓰레한 서툰 요리는 아니다. 후회하지 아니하고 되는 일.

그래 이번만은 후회하지 않고 되는 첩경을 찾아내리라.

아니 이거 무슨 물건이 바로 이내 몸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겠지. 요놈을 떼쳐 버려야지…….

그러나 그건 대체 무슨 놈일까.

그는 이성은 멀쩡했었다. 그것이 보였을 만큼…… 그러나 그가 피로를 회복하기가 무섭게 이내 그의 그러한 이성은 다시 무디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 표본처럼 혼자 의자에 단좌하여 창백한 얼굴이 후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금시 도어가 열리면 사건이 ─ 사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장난이, 혹은 친구의 호주머니에 혹은 미지의 남의 가십gossip에 숨겨져 들어오지나 아니할까.

상은 보기에도 딱하게 벌벌 떨고 있었다.

아아, 후회하긴 싫다, 아무것도 갖다 주지 않는 게 좋겠다.

그렇지 그래, 오전 중에 잘라 파는 꽃을 어린아이가 사러 온다. 그 뒤로는 반드시 그 꽃보다도 어린아이보다도 신선한 유혹이 전연 유혹이라는 그 면모를 바꿔 가지고 제법 신나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2[편집]

목부용(木芙蓉)은 인사하듯 나가 버렸다. 이젠 그 이상 그는 참을 수가 없다. 그도 그 뒤를 쫓아서 나간다.

읽다 만 교과서를 접기보다도 더욱 쉽게 육친 위에 덮쳐 오는 온갖 치욕마저 그의 앞서의 후회와 함께 치워 버리곤, 그는 행복한 곤충처럼 뛰어가는 것이다.

범죄 냄새가 나는 그러한 신식좌석은 없을 것인가. 허나 그는 다시 공기총 가진 사람보다도 쉽게 그 비슷한 것을 발견해 낸다. 그는 그만 미소하면서 인사를 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 밤은 둘이 함께해야 하나 보다. 그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와 상은 한 의자 위에 걸터앉고 이젠 요리도 아주 한 사람 몫이다.

누이처럼 생각한 적도 있답니다.

케티 폰 나기 같이 아름다운 오뎅집 딸한테 그는 인제 그야말로 전혀 의미없는 말을 한마디 해보았다. 누굴 말입니까(정말 별난 소리 다 한다. 누이처럼 생각했던 사람이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가)?

난 야단친 적도 있답니다, 좀더 견문을 넓히라고요. 허어,

한데 그 여자와 악마가 걸으니까 거참 지독한 절름발이였지요. 하지만 어느 쪽이 길고 어느 쪽이 짧은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요.

나기 양은 웃었다. 그건 상의 수다에 언제나 번쩍이는, 더럽게 기독교 냄새만 나는 사고방식을 슬쩍 조소한 것일까. 어떻든 그는 별안간 아연해지고 말았다.

주기로 뻘개진 얼굴의 내면에 발그레 홍조가 도는 걸 느꼈다. 평소 그가 업신여기고 있던 것들이 실은 그로서 업신여겨선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이 내심 몹시 창피했기 때문이다.

뭐 이런 건 이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가 집게손가락으로 장난스런 주름살을 만들면서 나를 쿡쿡 찔러대기 때문이다.

(대단할 건 없다. 따돌려 버려라)해서…… 난 이후로도 그를 누인 줄 알고 위로해 주곤 할 작정입니다.

나기 양은 비로소 알아차린 것 같다. 허나 나기 양을 깨우치게 한 그 한마디는 또 얼마나 세상에 어리석기 그지없는 수작이겠는가.

이상야릇한 밤이었다. 허나 또 결정적인 밤이었다. 집 밖에서 저회(低徊)하며 가지 않는 나그네가 그제서야 겨우 집안에다 짐을 부린 것 같은……

농후한 지방색(脂肪色) 사색에 결코 접근시켜선 안 된다. 하나의 백금선의 정체를 마침내 백일하에 폭로하고 만 조롱받아야 할 밤이 아니면 아니 된다.

단 한 줄기의 백금선……(나기 양, 당신만 해도 모노그램과 같은 백금선의 바둑무늬란 말이오.)

고단한 인생에 이건 또 부질없는 농담이다. 주기가 그의 혈액 속에 도도히 밀려 흐르고 있는 불행한 조상의 체취를 더욱더 부채질 하고 있다. 허나 이 경우만은 그는 제멋대로 여전히 불길한 호흡을 시작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피해자를 낼 만한 농담은 금해야 할 것이다. 그의 뇌리에 첫째로 떠오르는 금제의 소리는 몽롱하나마 그것은 피해자에의 경계인 것 같았다. 그렇다, 상의 앞에 살해자는 육안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상을 위협하는 포즈를 계속 할 것이다. 그것은 괴롭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 저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가 나중에 무엇이라고 나무라든지 아랑곳할 것이 뭐냐.

옳지, 하고 그는 후회보다도 더욱 냉정한 푼돈을 집어던지고 오뎅집 콘크리트 바닥을 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가을바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일로(一路)…….

차압이다. 특히 네놈이 이번엔 지명당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 기세로 상의 속도에는 시뻘거니 발홍한 노여움이 충만해 있었다.

3[편집]

불길한 예감에는 그는 무섭도록 민감했다. 불길한 사건 앞에선 반드시 무슨 일에나 불길한 조짐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항상 전전긍긍하여 겁을 먹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머리 정수리를 분쇄당한 부동명왕(不動明王)같이 그의 민감은 이미 전기의자 위에 단좌하고 있었다. 푸른 눈은 허망한 전방에 무형의 일점을 택하여 불꽃 튀듯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다, 딱 잘라말하겠다. 그렇다, 하지만 그러면 나쁠까, 죄악이 될까.

그러는 소운(素雲)의 한마디에 상은 가슴팍 전면에 한 잎발[簾(렴)]의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이 불길이었던가…… 허나 이젠 이것을 똑바로 볼 수는 없다. 발 너머로 보이는 이 불길의 정체라는 건 그다지 대단한 것도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한 걸음 앞에 있는 그는 아직껏 겁을 먹고 있다. 아까보다 더욱 한층 파랗게 질려 있다. 난 우정인지 뭔지를 통 믿지 않는다는 것쯤 알아채고 있을 게다. 이런 내 말의 근거일랑 그래 가령 우정에서라도 해두기로 하자. 그러고 보면 너는 살았고나?…… 이봐…….

가볍게 주먹으로 소운의 허리께를 쿡 찌르면서, 상은 울며 웃는 상판이었다. 이런 때 그는 가장 많이 가면을 사용하는 것인데, 그 가면이야 말로 상 자신의 본 얼굴에 제일 가까운 것인 줄을, 그 자신의 본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으론 결코 알아챌 수는 없다. 모르면 몰라도 상 자신조차…… 가 그 정교함에는 미처 주의하지 못한다.

이젠 더 내 평생엔 사랑을 한다든가 하는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단다. 설령 어느 경우 이쪽에서 연연한 연정을 느낀다손 치더라도, 결국은 바닷가 조가비의 짝사랑이 되고 말 것이라고 굳게 체념하고 있었단다. 불긋불긋 녹슨 들판만 아득한 천리란다.

사귀면 손해 본다. 허나 되려 반갑다. 두셋 친구 이외에 내 자살을 만류해 줄 이유의 근원이 있을 턱이 없다.

자넨 혹은 하필이면 , 네가 그러느냐 그럴지도 모른다. 허나 난 정당방위 그것마저 준비하고 있었단다…… 아니지, 어느 경우 이건 놀림받기는 싫단 말이야. 그래서 그 손쉬운, 즉 조그마한 희생을 택했던 게야. 이러한 점에서 내가 하수인이라는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점에서만 말하자면 난 굳이 그 책임을 회피하려곤 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니, 자넨 아주 무관심한 것 같군. 하나의 조소거리를 얻을 것 같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런 날에도 어쩌다 떠오르는 추억의 조각 한강 물 반짝이는 여름햇살 보누나

여름햇살이라고 한 것은 안 좋다. 더더구나 안 좋다.

(한여름 햇살이 퍼붓는 거리에 사람들은 나를 배반한 것이다. 한 사람도 없다. 허나 나 또한 즐거운 산(山) 희롱거리는 해변을 생각할 것을 잊지는 아니 한다. 지껄대는 친절한 말과 말. 정겨운 눈매…… 나는 거리를 쏘다니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한여름 살갗을 어여 흐르는 땀에 헐떡이면서 사람 하나 없는 거리를 쏘다니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4[편집]

상은 그러나 조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저 10년이 하루 같은 몸짓을 그만 두지는 못한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다지도 재미 없는 몸짓의 연속인 것일까. 허나 그만두든 그만두지 않든 인형(人形) 자신의 의사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7월 보름밤 한강에 사람 많이 나온 것을 말하면서 주가(酒家)의 일부분(그는 쓰러지면 점원 아이의 물세례를 받을 것만 같았다……)가랑 비가 내리다가 이윽고 제법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그래도 흩어지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 속세는 더욱더 공기를 탁하게 해갔다.

타자꾸나

타자꾸나

꼭두각시 인형을 태운 보트는 그 인형을 다시 조종하면서, 또 한사람에 의해 조종받고 있었다. 상은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이 무슨 궁지. 그는 양말을 벗어던지고 여차할 때 헤엄칠 준비를 했다. 허나 그는 헤엄쳤던가. 알고 보면 그는 헤엄칠 줄 모르는 것이다.

무슨 생각에서일까. 배는 반드시 뒤집히는 거라고만 단정하고 있는 근거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전날 밤의 그의 실언(?)을 상기해 보았다. 혹은 전복을 불러 올 것 같은…… 심장의 어떤 어두운 공기를 자아낼 것 같은…….

무관심하다니, 무슨 소리냐?

이 한마디가 과연 어떻게 받아졌을 것인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 의외의 폭언이지. 그렇지, 폭언이지.

상은 그 한마디만을 뉘우쳤다. 묘한 데까지 손을 내밀고 싶어하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손을 내밀어? 어느 쪽이 손을 내밀었단 말이지? 아니면 손은 양쪽에서 함께 내밀었던 것일까. 우습기 짝이 없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군.

상은 소리를 내어(그때 그의 앞에 비굴한 몸짓으로 막아서는 자가 있었기에)

(비켯…… 비키라니깐)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는 경악했다. 처음으로, 정녕 처음으로 그의 성난 골이 무서웠던 것이다. 위험햇, 뭘하고 있나?

바보 같군…… 물이야, 한강이란 말야…… 보트는 크고 그리고 강물은 작다. 가랑비는 친절하지 뭐냐. 예서 난 혼자 낮잠을 자고 싶다.

난 젊어질 작정이야……(그리고 상은 한꺼번에 10년이나 늙을 작정이야).

그러면서 소운은 무엇인지 상에게 몰래 명령했다. 알고 있어. 난 그렇게 할게. 산다, 살지 못한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자존심, 이건 또 어쩌면 이렇게도 낡은 장난감 훈장일까. 결코 그런 건 아니다. 그런 식으론 진짜 어쩌지는 못할걸.

그럼 왜? 왜 잠자코 보트를 둘이서 탔느냐 말이다. 반대 ─ 소운이 물에 바지면 그는 배 안에 점잖이 있어야 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게다. 알고 있었지. 허나 이건 ‘하는 후회’가 아닌 ‘있는 후회’가 시킨 일일 게다.

기슭 위에 있는 것은 모두가 따스하다. 그리고 배 안에 있는 그는 차갑다. 그리고 그가 기슭에 있을 땐, 후회 때문에 모두가 반대가 아니면 아니 되었다.

피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 피해서 안전한 것을 어째서 피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이다. 한 줄기의 백금선을 백일에 드러냈던 때의 후회…… 아니다…….

그래 그것은 나중이야, 아니면 정녕 먼저냐? 예감이라니 정말 이냐. 허나 분명 얻은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송두리째 잃은 것만은 사실이다. 속일 순 없다. 이건 또 치명적인 결석이었다.

무엇일까. 누이인 줄 알고 있던 두 가지의 성격을 두 가지의 방법으로 생각했던 그것일까. 아니면, 한꺼번에 10년 후로 후퇴해 버린 자신의 위치일까. 아니면, 10년이란 먼 곳에 미소 짓는 해변의 소운…… 그 친구일까.

아니면,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일까.

훗훗한 풀냄새가 코를 쿠욱 찔러 왔다. 피로한 두 사람은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께느른하게 잠자고 있다. 모든 직업, 모든 실망, 모든 무료를 분담하면서 시방 두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는 주택군(住宅群) ─ 그 속에서 사람들은 역시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역시 걱정을 하고들 있을 테지. 보게, 이렇게. 이 레일은 경의선이었나. 예전의 그, 지금은 근교 일주, 동경의 성선(省線) 같은 거지. 한번 타보지 않겠나, 천하태평한 기차라구. 동녘이 밝아 왔구먼.

자아, 가자구. 그러지 말고 가자구. 고집 부리지 말고. 멋꼬라지없게, 새삼스레, 자아, 자아.

그렇지, 상은 결국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전연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 그래,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체 그는 어떻게 하고 있으면 좋단 말인가. 결국 가만히 있는 것.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거든.

가만히 있기는커녕, 정녕 가만히 있진 못하겠다. 이건 또 불가사의한 처지인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있지 못한단 말인가?

소운은 집에 가겠노라 했던 것이다. 집에 가서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슬픈 심정을 주체스러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괴로워하겠노라고…….

괴로워해?

그 괴로움이야말로 사람들이 원해도 쉬이 얻을 수 없는, 말하자면 괴로움같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어떤 그 무엇이지 않을까.

조용한 시간만큼 적어도 두 사람에게 있어서 싫은 것은 없을 터이다. 설상 상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외톨로 남게 되어…… 상은 소운의 팔을 잡아끌면서, 저릴만큼의 서러움을 몸에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이 자리를 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아니다, 소운으로 하여금 이 ‘눈물의 장’에서 달아나게 해선 안 된단 말이다.

억지로, 오기로도……(혹은 있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혼자 있는 건 무서워).

혼자서? 혼자서 있는 것일까 그것이? 그리고 그런 내용을 가지고 서의 혼자서 있는 것. 그것이 허용될 수 있는 일일까.

숫자는 3이다. 2와 1이라는 짝맞춤밖에는 전혀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무엇을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냐? 얌전하게 단념해야지…….

그러고 싶어. 사실은 그래도 좋다고는 생각해. 허나 그저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다 그런 소리일 따름이야. 이걸 달래 주는 법은 없을까.

상은 체념한 듯 또다시 레일 위에 걸터앉았다. 풀냄새가 한층 드세게 코로 왔다. 자연은 결코 게으르진 않은 것이다.

동녘은 더욱 밝아 왔다. 그것은 체념하는 표정과도 같은 가냘픈 탄식이었다. 벌써 아침이 오지 않는가.

절망의 새끼줄을 붙잡고…… 이 무슨 멋꼬라지 없는 하룻밤이었던가. 이미 분리된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은 적어도 비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밤이 밝아 온다. 절망은 절망인 채, 밤이 사라져 없어지듯 놓아주지 아니하면 아니 될 성질의 것이다. 날뛰는 망념 위에, 광기 어린 나유(挪揄) 위에, 그야말로 희디흰 새벽빛 베일이 덮쳐 오는 것이었다.

레일은 더욱더 차갑다. 매질하듯 상의 저주받은 육체을 가로 질렀다. 그리고 뺨엔 두 줄기 차가운 것이 있었다.

레일 앞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거기엔 오로지 그의 재능을 짓밟는 후회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아니면 그는 살아날 수 없다고 ─ 아니다, 그릇된 생각이다 ─ 내뿜는 분류를 막아 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바보 같은…… 상은 돌아다보듯 하면서, 저만치 선착해 있는 자신의 무모하고 치둔(癡鈍)함을 비웃으려 했던 것이다. 허나 돌연……

가자, 상! 가자꾸나…… 좋은 앨(창녀) 사자꾸나. 아니야, 난 이제 단념했어. 벌써 날도 샜어. 저것 봐, 제법 붉어 왔는걸.

일언 중천금! 뿔뿔이 갈라진 역류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그리하여 그들은 숙소로부터 더욱더 멀어져갈 따름이었다.

5[편집]

밤이 사라졌다. 벗어던져진 전등에는 아련한 애수와 외잡한 수다가 이국인처럼 우두커니 버림받고 있었다.

은화 에 의한 (銀貨) 정조의 새 색칠 ─ 상의 생명은 이런 섬에 당도하여 비로소 찬란한 광망(光芒)을 발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현관 신발장 께에 구두와 함께 벗어던져져 있다. 이제 이 지폐 냄새 물씬거리는 실내엔 고독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상은 녹음된 완구처럼 토오키 브로마이드…… 신나게 지껄였다. 그의 얼굴은 웃음으로 넘쳐 있었다.

─ 은선아! 전등이 꺼졌어, 졸립질 않니?(등불이 꺼지면 잠이 깬다는걸 아는 사람들은 여기 없다.)

─ 아아뇨.

─ 난 말야, 애인을 친구한테 뺏겼단 말야. 분명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아냐, 난 그 애가 내 애인인지 아닌지 그런 거 쇠통 알지 못했어. 허지만 내 친구가…… 어느 틈에 내 친구가 그 앨 좋아하게 됐단 말야. 그랬더니 그때 그 애는 내 애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단 말야. 그러고 보면 뺏기고 만 셈이지 뭐냐. 그래서 난 지각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되고 만 꼴인데, 이제 새삼 그 앤 내 애인이란 주장은 못하게 됐지. 그렇지, 주장할 수가 없지. 그래서 난 친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 그런가, 그건 안 되지. 아니, 괜찮어. 아니, 역시 안 되겠어. 그렇게 어린애를, 그건 죄악이야. 허지만 잘됐어. 그렇다면 그 애도 살게 되는 셈이니, 자네 같은 거시기 다소 나이 많은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자기 일생을 맡길 수 있다는 건, 그건 그 애로선 행복된 일임에 틀림없어. 그런 소릴 하고 얼버무려 버렸던 것인데…….

─ 예쁜 여잔가?

─ 글쎄 그렇군. 예쁘달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아주 두드러지게 특색이 있는 여자인데, 얼굴은 창백하고 작달막한 몸집에 근시이고 머리털이 빨갛고 절대로 웃지 않는다구. 그래 웃지 않기는커녕 입을 열지 않는다구. 그런 아주 색다른, 어쩌면 내일 당장 자살해 버리지나 않을까 싶은 염세형인데, 그러면서도 개성이 강해서 남의 말은 쉬이 들어먹지 않거든. 그렇지, 입술이 퍼렇지. 난 또 그 애 눈알의 검은 자위를 본 적이 없어. 즉 사람을 똑바로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 그 말야.

─ 근사한 여학생?

─ 여자 대학생 그런 종류 같은데…….

은선은 곧잘 면도칼을 갖다 대고 밋밋한 상의 뺨을 두 손으로 만지곤 했다. 털 밑 피부 언저리에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 그런 이상야릇한 여자 좋아할 것 뭐예요. 내가 사랑해 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은선은 미인이었다 . 정사하려다 남자만 죽였는지, 목 언저리에 끔찍스런 칼날 자국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 그래서 난 홧김에 여기로 끌고 들어왔단 말이야. 내일 아침, 그러니까 오늘 아침이지, 랑데부한다는 거야. 그렇지. 저 꼴 좀 보라구. 분한 김에 그러긴 했지만, 좀 안됐군(말 말라지. 저 사람이 내 애인을 뺏은 사람이거든).

─ 촌뜨기 같은소리…… 깔보지 말라구요(어째서 너보곤 내 심정을 이렇게 똑똑히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넌 또 영리해. 이 심정을 참 잘도 알어).

─ 나이는 열아홉, 처녀란 말씀이야. 이래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작자는, 그렇지 거세당한 몸이랄 수밖에.

─ 하지만 뺏길 때꺼정 자기 애인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했다니, 댁도 어지간히 칠칠치가 못했나 보군요.

─ 아이고, 사람 작작 웃겨요(요점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지극히 무사태평하다 그 말씀이야).

─ 그래 난 실은 아무 말도 안했어. 물론 둘이 다 그런 걸 알아챌 까닭은 애당초 없었지.

계산(計算)과 같은 햇살이 유리 장지문을 가로질렀다. 그리하여 1회분 표를 가진 사나이가 하나 정조의 건널목을 바람을 헤치듯 가로질러 간다. 땀이 납덩이처럼 냉랭한 도면 위에 침전했다.


1936년 7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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