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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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사람에게도 각각 다른 버릇이 있어서 예컨대 작품 중에 나오는 어떤 인물의 이름에 있어서도 가령 이러이러한 성격과 환경의 인물을 등장 시키려 하면, 그런 사람이면 이런 이름을 붙이어야 적당하리라, 혹은 또 이런 이름의 사람은 여사여사한 성격을 가지고 여사여사한 과거, 혹은 환경을 가지어야 될 것이다. ─ 이러한 일종의 독특한 취택벽(取擇癖)이 있다.

그 예에 벗어나지 못하여 나 이 김동인이는 가령 ‘송 첨지’라 하는 인물을 소설의 주인공 내지 한 등장인물로 쓰고자 하면, ‘송 첨지’라는 이름에 따라서 ‘송 첨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면 그 생김생김은 이러하고 나이는 얼마쯤이며 성격은 어떠어떠한 사람이리라 ─ 적어도 그러한 인물이 아니면 맞지 않으리라. 이러한 예정 혹은 코스가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송 첨지’라는 인물 하나를 붙들어서 그의 생애사(生涯史)의 한 토막을 독자 앞에 공개하고자 하는데, 우선 가령 ‘송 첨지’라 하면 얼른 듣기에 ‘복덕방’이라는 시양목 휘장 앞에 긴 걸상 놓고 딱선부 채 딱딱거리며 곰방대 물고 눈이 멀찐멀찐 행인(行人)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중로(中老)의 집주름쯤으로 여기기 쉬울 것이나, 내가 지금 적고자 하는 송 첨지는 학슬 대신 에보나이트 안경을 쓰고 양복 비슷한 옷에 넥타이도 매고 좀 모양은 없으나 단장도 짚고, 일본 말은 무론 영어도 제법 하고, 구두도 신고 ─ 나이는 오십 안팎 ─ 송 첨지라기보다 ‘송주사’라든가 ‘송 선생’이라든가 하여야 빨리 인식될 ─ 판에서 벗어난 종류의 사람이다.

송성(宋姓)을 대표하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몸은 정승까지 지냈으나 생김생김이며 차림차림이며가 끝까지 한 촌부자(村夫子)연 하였던 관계로 후일 ‘송씨’라면 얼른 촌부자연한 느낌을 일으키게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송 첨지도 그 칭호만 듣는 것과 실제 인물과의 새에는 꽤 상위 점이 있다.

첨지라기보다 ‘선생’이라든가 ‘주사’라여야 좋을 우리의 송 첨지는, 사실 면주사(面主事) 노릇도 해보았고, 선생 노릇도 해본 사람이다. 그러니까 역시 송주사라든가 송 선생이라야 옳을 사람이다.

학업은 동양의 학도(學都)인 일본 동경에 가서 닦았다.

학운(學運)은 좋았던 모양으로 열일곱 아직 어머니의 품 그리울 시절에 어떤 고마운 후원자의 덕으로 현해탄을 넘어가서 그때 한창 명치(明治)의 건설시대를 지나서 대정(大正)의 난숙(爛熟) 일본의 공기를 호흡하며 꿈 많고 희망 많은 소년기를 이역에서 보낸 것이었다.

미개(未開)한 토인들이 사는 열도(列島)를 한데 뭉쳐서 한 개의 근대국가(近代國家)를 형성하여 세계 열강의 틈에 끼도록 끌어올린 일대의 영걸 목인(睦仁) 일본 황제는 마지막으로 대한 합병이라는 위업을 끼쳐놓고 조상들의 나라로 떠나고 그의 아들 가인(佳人)이 당주 ─ 아비는 벌고 아들은 호사하고 손주대에는 망한다는 천칙(天則)에 따라서 표면만은 무르익고 찬란한 대정 동경(大正東京)에 이 고아(孤兒)는 그의 몸을 내어던진 것이었다.

합병된지 불과 사오 년… 조선 안에는 각곳에 그냥 의병(義兵)이 끓고 있고, 사내, 장곡천(寺內, 長谷川) 두 군인의 군정이 ‘조선’이라는 순을 줄(鏞)질하는 공황 시대에 송 군은 동경서 학업을 닦았다.

시대가 시대니만치 조선 유학생은 대개 정치나 법률에 적(籍)을 두었다.

송 군도 정치를 전공하였다.

내년이면 학업도 끝난다는 그 전해에 송 군은 묵어 있던 사숙(私宿) 주인의 딸과 눈이 어울리어 딸자식 하나를 낳는 바람에 부득이 안해로 맞아 이듬해에 조선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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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이라 하지만 송 군의 환향은 결코 금의가 아니었다. 그의 학비를 대어주던 은인도 그가 일본 계집애와 어울린 것을 알자 거래를 끊고 말았다.

금의환향하는 송군을 위하여 조선서는 어떤 시골 면서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송군은 송주사가 된 것이었다.

유학 당시의 그의 막연한 희망 내지 목표는 대신(大臣)에 있었다.

그러나 ‘나라도 없는 인종’이라는 자기의 현실적 입장과 이상(대신)과를 연결하여 생각할 때에 뚝 떨어지면서 도 장관, 도 장관도 과하니 내무부장, 아니 군수(또 다시) 면장이라도, 이렇듯 숙어들어가는, 면장 한자리도 얻지 못하고 겨우 면서기로 낙착이 된 것이었다.

면서기 재근 이 년, 이 년간이나 재근했으면 그래도 약간 지위가 오를듯 싶은데 면서기라는 구실은 오를 데도 없는 양하여 그냥 그 자리에 눌러붙어 있었다.

이 사실이 적지 않게 우울하던 차에 그의 안해가 일본인인 서무주임과 사이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본시부터 애정이 있어서 결혼한 바가 아니요, 딸자식이 하나 생기기 때문에 결혼했던 바라 핑계 좋게 안해와 헤어졌다. 동시에 그 서무주임 아래서 일하기가 싫어서 면서기도 사임하였다.

십 년에 한 번씩 큰 전쟁을 해온 일본의 군국주의는 그 기한 십 년을 그저 넘길 수가 없어서 이번은 일독 전쟁을 치렀다. 독일의 군국주의는 연합군의 무력으로 부수었다. 그리고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 강화회의에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라 하는 금간판을 내걸었다. 어떤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자신의 의사대로 결정할 것이라는 주의였다. 즉 예컨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어야 하느냐, 벗어나야 하느냐 하는 것은 조선 민족 자신의 의사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육군 원수인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의 강압정책에 눌려서 그 새 십 년간 찍소리 못하고 있던 조선인의 마음에 이 한 마디는 커다랗게 들어맞았다.

“민족자결!”

“민족자결!”

온 조선의 지하로는 이 한 마디가 홍수와 같이 싸다녔다.

이월 초여드렛날, 동경 유학생의 집단에서는 조선 독립을 선언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온 헌병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무슨 사고가 일지 못하게 하고자 만전의 책을 다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이 물결은 경찰력 헌병력의 담으로도 어찌할 바이 없었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스스로 믿는 데가 있었다.

그새 십년간을 그만치 강한 힘으로 눌러 놓았으니 조선인의 마음에는 딴 생각 품을 여지며 용기가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설사 한두 명 혹은 불온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쯤은 단 한 마디의 호령으로 삭아 버리리라. 어디 감히 맞서고 덤벼들 광인(狂人)이 있을 줄은 꿈에도 안 생각했다.

이러한 철통 같은 총독부의 감시와 틈새틈새로는 민족의 의사가 자유로이 흘러다녀 삼월 초하루 ─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의 인산(因山)날 삼천리 강산에는 그야말로 청천의 벽력으로,

“조선 독립 만세.”

의 우렁차고 힘있는 구호는 폭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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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와도 이별하고 면소도 사직한 송주사. 약간한 퇴직금으로 삭월셋방 하나를 얻어 가지고 다시 무슨 직업을 얻으려고 턱을 팔굽에 고이고 엎드려 코털을 뽑고 있을 때에 무슨 아우성 ─ 드렁장수의 소리도 아닌 ─ 이 들려 오므로 부시시 일어났다.

들을 지나 길에 나서서 비로소 알았다. 조선 독립이 선언되고 그것이 기쁘다고 온 장안은 그것으로 이 아우성을 한다고.

머리를 들어 보매 맞은편에서도 수십 명의 군중이 팔을 두르며 만세를 부르며 이리로 달려온다.

송주사는 칵 가슴에 무슨 덩어리가 뭉쳐오르고, 눈앞이 아득하여 몸을 비츨비츨 가까운 남의 집 담벽에 기대었다.

송주사는 무슨 특별한 애국자도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독립이 되면 무론 반갑고 기꺼운 일이지만, 안 된다고 큰 불편 부자유도 느껴 본 일이 없었다. 일본이 가운데 괘씸한 놈도 많지만 조선 사람이라고 다 달가운 사람도 아닐 것이다.

아직껏 특별히 독립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 본 일도 없었다. 일본 유학할 때 학우회(學友會)의 웅변회 같은 날, 혈기의 청년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망 국 한탄을 부르짖는 것을 들으면, 역시 정치과에 적을 둔 망국 청년이니만치 일종의 공명을 안 느끼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사자로서의 절실감까지는 느껴 본 일이 없었다.

말하자면 그 방면에는 매우 신경이 둔하던 것이었다. 감각도 둔한데다가 송주사로서는 주사 독특의 견해가 있었다. 즉 독립국민 노릇을 하기에는 조선의 민도(民度)는 좀 얕다는 견해였다. 이 민도의 백성에게 갑자기 ‘독립’이라는 호박이 떨어지면, 감당을 못하리라는 그의 견해였다.

그런지라 ‘조선’과 ‘독립’을 연결해서 생각해 본 일이 없었고, ‘민족 자결주의’로 세계의 약소민족이 한결같이 술렁거리고 저선의 지식층들도 적지 않게 이 문제에 관심하여 조용한 골방이나 사랑방을 고를 동안도 송주사는 오직 (면서기 아닌) 새 밥자리를 몰색해 볼 뿐, 정치와 출신의 젊은 이다운 공상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렇던 송주사의 앞에 오늘 홀연히 ‘조선 독립’이라는 위대한 소식이 뛰쳐든 것이다.

이치로 따지자면 ‘조선 독립’을 지금껏 그다지 신통히 염두에 두어 본 적이 없는 송 주사라 오늘의 이 보도에도 비교적 무관심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 송 주사이언만 지금 행길에서 그의 고막을 두드리는,

“조선 독립 만세.”

의 한 마디에 휙 온몸의 피가 얼며, 그 자리에 목박힌 듯이 서 버렸다.

망두석같이 한참을 서 있다가 송주사도 그 군중들 틈에 빨리어 들어갔다.

“만세에. 만세에. 조선 독립 만세.”

군중들의 소리에 화하여 송주사도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동서남북으로 헤매었다.

절실히 말하자면 송주사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목표로 무슨 뜻으로 하는지 추호도 이해는커녕 인식도 못하였다. 지고(至高)한 하늘의 분부에 의지하여 무의식 무인식적으로 행한 노릇이 손을 높이 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그 행동이었다.

그것은 민족의 의사였다. 그리고 또한 하늘의 의사였다. 송 주사 자신으로는 행하려 한 일도 없었고, 행하여야겠다고 생각한 일도 없었고, 누구의 시킴으로 한 일도 아니요 스스로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의식도 못하는 가운데서 저절로 행하여진 일이었다. 그리고 평일에 어느 누가 송주사에게 대하여 그런 일을 해보라고 권고하는 이가 있었더면, 송주사는 그 사람을 ‘광인(狂人)’으로 단정키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저녁때 솜과 같이 피곤하고 하루 종일의 난무(亂舞)로 꼴이 ‘미치광이’ 같이 되어 허덕허덕 내 집으로 돌아왔다.

뜰에 들어서며 보매 주인집 어린 아들(칠팔 세 가량 된)이 뜰에서 놀고 있다.

한 지붕 아래 한 울안에 살면서도 딴나라 사람같이 서로 아는 체 안 하던 새였지만, 이 날따라 송주사의 마음에는 동포(同胞)라 하는 새 관념이 생겨 남 같지 않아서 애교의 미소를 띠면서 소년에게 가까이 갔다.

“이 좋은 날 너는 만세두 안 부르구 집에 백여 있었니?”

“왜 안 불러요?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인데요.”

“그래? 독립돼서 참 반갑다. 너 올에 몇 살이더라?”

“여덟 살예요.”

소년의 이 대답에 송주사는 오연히 허리를 젖겼다.

“여덟 살이면 너는 왜종(倭種)이로구나. 그러려니 애처로워라. 이 기쁜 날을 너는 기뻐할 자격이 없어. 열 살 이하의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왜종이야. 우리같이 광무(光武)년대나 융희(隆熙)년대에 태어난 사람이고서야 오늘이 기쁜 날이지 너는 빠지거라.”

그는 광무년대에 난 사람이노라는 우월감이 무럭무럭 일어, 소년에게 한 마디의 경계를 남기고 막 자기 방으로 향하려 할 때에, 소년(대정년대에 난)의 아버지가 싱글싱글 하면서 송 주사에게로 향하였다 ─.

“송 주사 나리 선견지명이 참 귀신 같단 말씀이어. 장망지국(將亡之國)의 벼슬을 버리시자, 새 나라이 생겨납니다그려. ─ 그런데 제 자식더러 ‘왜종’이라 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 대해서 나리께 항의합니다. 부모가 아울러 한국 신민이어든 자식이 어째 왜종입니까. 남의 귀중한 자식에게 왜종이란 ─ 대체.”

여기서 누구든 한쪽이 웃어 버리면 문제는 끝날 ─ 아주 단순한 일이다.

그러나 송주사의 고집이란 천하무류인데다가 집주인은 귀한 아들을 (당시에 있어서 가장 큰 용인) 왜종이란 악구를 받았는지라 좀체 양보의 조짐이 안 보였다.

“한국이 없어진 뒤에 났으니 왜종 아니구 뭐요?”

“부모가 다 한종인데두.”

“부모 아니야 한아비가 한종이래두 한국 없을 때 어떻게 한종이 있겠소?”

“호랑이 새끼가 곰의 굴에서 났다구 곰이 됩디까?”

“곰의 새끼지.”

논란은 차차 억설로 벋어갔다 욕설로까지 전개되어 갔다.

“어디서 찌께(蛔虫) 같은 물건 하나 싸 가지고 꼴에 제법 조자룡(趙子龍)이나 낳은 듯키.”

“부모네 승강이면 승강이지 남의 집 귀동은 왜 걸거 들어가는 게야.”

차차 악화하는 논란 ─.

“저 따위가 백성이랍쇼 있으니까 되려던 독립도 틀려나가겠다.”

“무얼! 독립에 군소릴 끼어?”

딱― 쳐라! 완력, 폭력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리하여 그 저녁으로 송주사는 그 집을 떠나서 다른 데 이사하였다. ─ 송주사가 애국주의자로 변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기미년 삼월 초하룻날 온 조선에 걸치어 폭발된 만세사건은 표면으로는 십 수만 명의 감옥 죄수와 중국 상해에 한국 임시정부로 남긴 뒤에 사라졌다.

감옥의 죄수들은 만기가 되면 출옥할 것이다. 상해의 한국 임시정보는 국제적으로 승인을 못 받고 국내적으로는 조선 내지와도 연락이 미미하여 존재가 아주 미약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유지가 곤란한 가운데서 몇몇 지도자의 오직 열성만으로 버티어 가는 가운데서 차차 사람의 기억의 표면에서 엷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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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기의 자리를 내어던진 송주사는 구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사 노릇을 시작하였다.

주변성이 없는 송 주사 ─ 송 선생이라 어느 튼튼한 학교에 교원으로 자리 잡을 기회는 얻지 못하고 이곳저곳 사립학원이나 개인 교수 등으로 근근히 기아나 면하며, 이리저리 유랑하였다.

애국주의자로 전향한 송 선생 ─ 그 전향이란 것이 임시적 방편이라든가 빵 문제 때문에 한 노릇이 아니고, 그의 마음 깊이 잠재해 있던 동포 관념의 폭발 때문에 한 전향이라 변할 길이 없었다.

그동안 감옥살이 유치장살이도 여러 차례 하였다. 그러나 다시 밝은 세상에 나와서 아이들과 대하여 교편을 잡을 때는 여전히 총독부 당국에서 엄금한 바의 반만년 조선 역사의 거룩한 자태를 알으켜주고 이 거룩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자랑을 아이들의 마음에 배양하였다.

삼십 고개, 사십 고개 ─ 인생의 가장 가치있어야 할 고개 고개들을 송 선생은 이 촌에서 저 마을로 ─ 저 마을에서 또 다른 부락으로 ─ 지식의 주머니를 줄줄 흘리면서 그 흘린 지식을 남이 주워가기를 열망하면서 표랑하였다.

치자(治者) 당국이 의식적으로 말살코자 하는 ‘조선학’의 지식은 송 선생의 힘으로 북조선서 조선의 촌락 촌락에 심어졌다.

그의 꽁한 태도가 송 선생이라기보다도 송 첨지라는 편이 적절하겠으므로 어느 지방에서 시작된 칭호인지 모르지만 어느덧 송 첨지라는 칭호로써 북조선의 촌락 촌락에 그의 이름은 꽤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송 첨지가 유명해지면서 유명해지느니만치 송 첨지가 흘리고 간 지식 부스러기는 당국의 입장으로는 역한 것이므로 당국이 송 첨지에 대한 탄압도 차차 강화되고 노골화하였다.

마지막에 당국의 탄압이 하도 세밀해지므로 송 첨지는 국경을 넘어서서 만주 땅으로 들어갔다.

송 첨지의 나이 그때 서른여덟 ─ 동양의 천지에는 소위 ‘지나사변’이라는 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그리고 중국은 서울을 중경(重慶)으로 옮겨 놓은 때였다. 한국 임시정부 ─ 중국 국민정부의 비호 아래 보호되어 있던 한국 임시정부도 중국 국민정부와 함께 중경에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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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도 아니요 정치가도 아니요, 다만 열렬한 애국자로 교사로 지도자로 만주 일원의 조선인 사회에는 송 첨지의 이름은 꽤 높고 널리 전파되었다.

위엄성 있는 지도자가 아니요, 무엇을 강요하는 혁명가도 아니요. 일반 대중과 무릎을 겯고 마주 앉아서 토론하여 가면서 애국사상을 배양해주고 동족애의 관념을 길러 주는 송 첨지(선생도 아니요 주사도 아니요 단지 웃댁 형님, 아랫댁 아우님이라 부르고 불릴 수 있는 친애한 동무)는 만주 일원의 조선 사람 사회에서는 인제는 없지 못할 지도자였다. 나이도 사십을 지났으니 경의를 표하기에 남부끄럽지 않고 아무런 홀대를 할지라도 나무려워하지 않으니 어떤 좌석, 어떤 회합의 틈에라도 섞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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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대륙에서 여러 해 동안을 계속되던 인류의 잔혹한 행동 ─ 전쟁은, 그 무대가 바꾸이면서 태평양상으로 넘어가서 인종으로는 백인, 홍인, 흑인까지 뒤섞이어 유사 이래의 최다량 살인 행위가 벌려져 나갔다. 일본인이 이르는 바 소위 대동아전쟁이다.

이십 소년 시대부터 사반세기간을 조선인의 마음에 민족애가 불 일어서 민족적 대동단결을 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으로 향상시켜 우수한 민족으로 하여금 일본에게 빼앗겼던 국민을 회복할 기회를 지어 보려고 노력하여 온 송 첨지 ─ 잃어버릴 때에 아까운 줄 모르고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처음 몇 해 역시 아깝지도 않고 통분한 줄도 모르겠더니 나이가 들어 감을 따라서 나날이 국권 회복의 야심이 늘어 가고 국가 독립의 욕심이 강하여 감을 통절히 느껴졌다.

나이 반구십 ─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에 앉아서, 바라건대 내 생전에 독립 국가의 국민이 되어 보기는 가망이 천리다.

지금 한창 강성한 일본의 실력으로 보아 무력적으로 일본이 꺼꾸러질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하늘에서 무슨 기적이 내리기 전에는 내 생전 조선 독립은 다시 볼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때에 그 새 중국과 오 년간이나 싸워서 기진맥진한 일본이 세계의 부강국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 한꺼번에 싸움을 걸었으니 일본에도 군략가가 있고 정치가가 있는 한에는 이번의 전쟁이 절대로 일본의 패배로 돌아갈 것은 숫자가 넉넉히 증명할 것인데, 스스로 이 망동을 한 것은 자진하여 자멸지책을 취한 것이다 ─. 이는 하늘이 조선에 자주를 주려는 조짐이 아닐까.

만년(晩年)에 들면서 차차 미신과 운명론에 기우는 자신을 스스로 조소하면서도 이러한 꿈밖엣 꿈을 생각해 보려는 자신을 스스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이번 전쟁의 결과로서 조선이 일본의 굴레에서만은 벗어나게 될 것이다.

조그만치라도 내 실력만 있으면 이러한 절호의 기회에 온갖 세력 다 물리치고 조선 혼자서 스스로 설 기회를 지우 수 있으련만.

많은 고생을 한 탓인지 오십까지는 아직 수년간 남아 있지만, 송 첨지는 어떻게 보면 육십에 가까운 노인같이도 보였다. 그리고 최근 갑자기 체력이 감소되고 원기 없어짐을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소위 대동아전쟁은 저편이 잠잘 동안에 내려친 첫번 일격만은 원기 좋았으나 그 다음부터는 꾸준히, 일정한 속도로 쫓겨 돌아온다. 이 속도로 보아서 1945년을 넘기지 못할 것만은 인젠 확정적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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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팔월 초순.

송 첨지는 만주의 어떤 시골서 앓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었는데 날이 경과하자 병세는 더 침중해 가는 뿐이었다.

부근의 노인들이 이 소탈한 지도자의 병을 구원하고 있었다.

“첨지, 좀 어떠셔요?”

“네. 고맙소이다. 나는 이제 다시 일어나지 못할 몸이지만 전쟁도 내 보기에는 인젠 한 달을 더 못 계속될 터인데 조선 독립의 보도나 행여 듣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는데.”

“그렇게 독립이 되리까?”

“됩니다 꼭 됩니다.”

“내일 오정에 무슨 미증유의 중대 방송이 있다는데요.”

“네? 미증유의 중대 방송?”

송 첨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일 오정에 그 라디오 좀 들어다 주세요. 꼭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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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오정, 송 첨지의 부탁으로 라디오를 지키던 노인은 일본 유인(裕仁) 황제의 미증유의 중대 방송의 첫 구절만 듣고 이 미증유의 기꺼운 소식을 속히 지도자 송 첨지에게 알리고자 달려들어왔다.

그때는 송 첨지는 심이(心耳)로서 그 방송을 알아듣고, 기쁨과 감격을 금치 못하여, 소리쳐 통곡하다가 거기 엎드러진 채 세상을 떠난 삼사 초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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