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8. 영조 및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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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편집]

본과에서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두 왕의 치적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문화가 부흥한 양상을 가르치며, 나아가 당시의 세태를 밝혀 두 왕이 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만연한 국가의 질고(疾苦)는 치료할 수 없었음을 가르친다. 더구나 두 왕의 뒤를 잇는 여러 왕들은 모두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두 왕의 뜻을 이어 다시 정치를 개선하지 못하여 나라의 형세는 더욱 번창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강의요령[편집]

두 왕의 치적[편집]

임진란과 병자란을 거쳐 조선의 국력은 크게 피폐해졌는데, 그 후 70여 년이 지나 영조(英祖) 【제21대】 와 정조(正祖) 【제22대】 의 두 임금이 나타나 잇따라 정치에 힘썼으므로, 이때 일시적으로 부흥의 시기를 맞았다. 영조는 경종(景宗) 【제20대】 의 아들이고,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다. 두 임금이 모두 총명하고 학식이 뛰어났던 점은, 역대 여러 왕들 가운데에서 보기 드문 경우였다. 그들의 치적들 가운데 중요한 사항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을 이끌었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풍속을 바르게 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였다. 예종(睿宗) 【제8대】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한 이래, 제도가 변혁된 부분이 적지 않았으므로, 『대전』의 정리(整理)와 정정(訂正)을 실행하였으며, 또한 갖가지 서적들을 간행하여 문학(文學)을 장려하였다. 두 왕의 치세(治世)는 이와 같이 문화 부흥의 기운으로 나아갔지만, 선조(宣祖) 【제14대】 때 처음으로 붕당(朋黨)의 다툼이 생겨나서부터 해를 거듭함에 따라 그 풍조가 점점 더 심해졌다. 영조는 당쟁의 해로움을 깊이 알았으므로 즉위 초기부터 그것을 중단시키는 데에 마음을 쏟았지만, 그의 치세 동안에는 붕당의 다툼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는 상태였다. 이어서 정조도 역시 그 뜻을 이어받아 크게 힘을 기울인 결과, 이 무렵부터 당쟁은 어느 정도 격렬함이 감소하기는 하였지만, 도저히 근절시킬 수 없었다. 그 밖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각종 폐해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민력(民力)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서양 문물의 전래[편집]

이보다 먼저, 인조 때 명나라에 갔던 사절(使節)들이 화포(火砲), 【뇌관(雷管)을 이용하는 소총】 천리경(千里鏡), 【망원경】 자명종(自鳴鐘) 【시계의 하나】 과 기타 진기한 기물들과 도서들을 가지고 돌아와 그것들을 바쳤다. 【9년】 예전의 임진란 때 일본에서 조총(鳥銃) 【화승총(火繩銃)】 이 들어온 이후 이때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이 처음으로 많이 수입되었다. 대체로 명나라 말기부터 천주교의 선교사들이 북경에 와서 포교하였는데, 이들 선교사들 가운데에는 포술(砲術), 천문(天文) 등에 정통한 사람이 있었다. 조선 사절이 가지고온 것들도 선교사들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한다. 천주교는 기독교의 일종으로 그것이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온 것은 선조 무렵인데 정조 무렵부터 점차 국내에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정조는 그것을 사학(邪學)이라고 하여 엄격히 금하고 이를 어기고 믿는 사람은 처벌하였으며, 또한 집에 서양의 책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 그 책들을 모두 관에서 모아 불태웠다. 【15년】 그렇지만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으며, 이어서 청나라 사람 주문모(周文謨)라는 자가 와서 몰래 포교에 종사하였다. 【19년】 이 사람이 조선 전교(傳敎)를 위해 들어온 최초의 외국 선교사이다. 그 후 7년이 지나 주문모는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으며 동시에 살해된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순조 원년】 그렇게 처벌받은 사람들 가운데 정약용(丁若鏞) 형제처럼 유명한 학자들도 있었다.

어린 임금의 승계[편집]

영조와 정조 두 왕의 뒤로 순조(純祖), 【제23대】 헌종(憲宗), 【제24대】 철종(哲宗) 【제25대】 이 왕위를 이었지만, 모두 나이가 어렸으므로 처음에는 그들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대비(大妃)가 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이어서 외척(外戚)들이 정권을 좌우하는 것이 50~60년 동안 거의 일상적인 예가 되었다. 이리하여 현명한 두 왕의 뒤를 계승하고 그 뜻을 이어서 다시 정치를 개선하여 국력을 떨쳐 일으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비고[편집]

영조와 정조의 치적[편집]

영조(英祖) 【제21대】 는 경종(景宗) 【제20대】 의 아들로서, 아버지에 이어 즉위하여 52년간 재위하였으며, 수명이 83세나 되었다. 정조(正祖) 【제22대】 는 영조의 손자로서 재위 기간이 24년이었다. 영조와 정조 두 왕은 모두 총명하고 학식이 빼어났다는 점에서 역대로 보기 드문 경우였다. 그리고 둘 다 정사(政事)에 마음을 쏟았으므로 두 왕의 재위 기간을 합친 약 80년 동안에는 농사의 권장, 풍속의 교정, 형률(刑律)의 개선 등 열거할 만한 사적(事績)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학사(學事)를 장려하였으므로, 성종(成宗) 이후 크게 쇠퇴된 조선의 문화는 이때에 이르러 다시 부흥의 기운이 보였고, 각종 서적들의 편찬도 역시 이때 가장 활발하였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의 정치적 피폐는 두 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었으며, 두 왕이 죽은 후에는 점점 국가의 형세가 쇠퇴하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지금 두 왕의 치적들 중 눈에 띄는 것들을 아래에 열거하고자 한다.

영조의 사적[편집]

원년  오랜 기간의 당쟁(黨爭)의 폐해를 거울삼아 탕평(蕩平)의 교지(敎旨) 【‘탕평’이란 불편부당(不偏不黨)하다는 뜻】 를 내렸으며, 또한 세종이 태배(笞背)의 형벌을 없앤 것을 본받아 압슬(壓膝)의 형벌을 없앴다.

같은 해  신수시헌칠정법(新修時憲七政法) 【시헌력(時憲曆)은 서양인인 아담 샬(湯若望)이 만든 것으로, 숭정(崇禎) 초부터 중국에서 사용되었는데, 인조 12년에 관상제조(觀象提調) 김육(金堉)이 사신을 받들고 북경에 들어가, 그 계산법에 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얻어 돌아왔다. 효종 4년에 처음으로 시헌력을 사용하였다.】 을 사용하였다.

5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세종 때 명을 받고 편찬】 를 인쇄 간행하여 각 도(道)에 배포하였다.

8년  명을 내려 포청(捕廳)의 전도 주뢰(剪刀周牢)의 형벌을 없애도록 하였다. 또 명을 내려 포항창(浦項倉)을 경상북도 연일현(延日縣)에 설치하여 곡식을 비축하고, 북관(北關) 방면의 기근에 대비하였다.

같은 해  혼의(渾儀)를 만들고, 경희궁(慶熙宮) 흥정당(興政堂)의 동쪽에 계정각(揆政閣)을 지어 혼의를 설치하였다.

9년  낙형(烙刑)을 없앴다.

10년  매년 정월에 반드시 권농(勸農)의 교지를 내렸는데, 이해에 특별히 훈시하여 축우(畜牛)를 장려하고, 관개(灌漑)에 대해 주의를 주었으며, 『농가집성(農歌集成)』 【세종 때 명령하여 편찬】 을 인쇄·간행하여 8도(道)에 배포하였다. 또 여러 도에 명령하여 소금과 곡식을 비축하게 하고,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함으로써 가뭄에 대비하게 하였다.

14년  형조(刑曹)에 명하여 장혈(杖穴)을 다시 주조하게 하고, 그것을 8도에 나누어 주었으며, 형장(刑杖)의 정해진 한도를 초과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같은 해  교지를 여러 도에 내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되풀이하여 설명하였다.

15년  처음으로 친히 적전(籍田)을 경작하였다.

16년  명을 내려 경자(黥刺)의 법을 없애고, 그 형구(刑具)를 불태우게 하였다. 또 명을 내려 이 해의 전조(田租)를 줄여 주었다.

같은 해  통영(統營) 및 여러 도(道)의 수영(水營)들에 명하여, 해골선(海鶻船)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전운상(田雲祥)이 창안한 것으로, 대가리가 낮고 꼬리가 높으며 앞이 크고 뒤가 작아 모양이 갈매기처럼 생겼으며, 가볍고 빨라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일종의 전함이다.】 을 만들게 하였다. 또 포백(布帛)의 척도(尺度)를 만들어 안팎에 배포하여, 그 표준을 바르게 하였다. 【포백의 척도는 세종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17년  명을 내려 유생(儒生)들에게는 치도(治盜)의 법률을 시행하지 않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하였다.

18년  왕은 친히 탕평(蕩平)의 뜻을 비석에 새겨 그것을 성균관(成均館)의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웠다. 【이 비석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19년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을 고쳐 정하였다.

20년  『속오례의(續五醴儀)』 및 『속대전(續大典)』을 완성하였다. 【『속대전』에 관해서는 제4과 비고 8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그 후의 법전(法典)」 참조】 전가사변(全家徙邊)의 법률을 고쳐 없앴다.

22년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장을 주의하도록 하고, 기이하고 교묘한 문양이 있는 직물(織物)은 일절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또한 문양이 있는 비단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지 말도록 하였다.

23년  무격 음사(巫覡淫祀)를 금지하는 교지를 내렸다.

26년  균역법(均役法) 【군정(軍丁), 노비 등의 납세(納稅)를 절반으로 면제해 주고, 그 부족액을 어업세(漁業稅), 염세(鹽稅), 선박세(船舶稅), 은결(隱結)의 결전(結錢)으로 보충하는 법】 을 실시하고,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였다.

29년  균역청을 선혜청(宣惠廳) 【대동미(大同米), 포전(布錢) 등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는 관청】 에 소속시켰다.

32년  처음으로 기로과(耆老科)를 설치하고, 유자(儒者) 및 무인(武人)으로 나이가 60세 이상인 자들을 시험 치르게 하였다. 또 명령을 내려 여러 도의 유민(流民)이 수도에 오는 경우 혜청(惠廳)에서 죽을 끓여 그들에게 주도록 하였다.

33년  8도(道)에서 흉년이라고 보고하였다. 왕은 곧 그중 가장 심한 흉년이 든 준양(准陽), 금성(金城), 강릉(江陵), 삼척(三陟) 등 여러 읍들의 공물세[貢稅]를 줄여주고, 호서(胡西)의 재난을 당한 읍들에게 대동(大同) 【전결(田結)에 준하여 쌀, 목면(木棉) 등을 상납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의 절반을 중지시켰다. 이어서 양진청(兩賑廳)을 설치하고 굶주리는 백성 2만여 가구를 구휼하였다.

34년  호조(戶曹)에 명하여 세종(世宗) 시대의 척도로 유곡(鍮斛)을 만들어, 그것을 안팎에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36년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매년 경성(京城) 안의 개천들을 준설하게 하였다.

37년  명을 내려 수레나 가마에 금을 사용한 것은 대신 동(銅)으로 대체하도록 하여 사치를 주의하게 하였다.

38년  세종 때 편찬한 『구황제요(救荒提要)』를 인쇄하여 안팎에 나주어 주도록 하였다.

39년  영남(嶺南)에 제민창(濟民倉)을 설치하였다.

40년  처음으로 충량과(忠良科)를 설치하였다. 또한 보민사(保民司)를 설치하여 한성(漢城) 안의 속전(贖錢) 【죄를 면제받으려고 내는 돈을 말한다. 줄여서 속(贖)이라고도 한다.】 을 담당하게 하였다.

43년  왕비가 처음으로 친잠(親蠶)의 의례를 실시하였다. 또 경잠과(耕蠶科)를 설치하였다.

45년  교지를 내려 관청은 받을 때는 대두(大斗)로 하고, 줄 때는 소두(小斗)로 하며, 시전(市廛)은 살 때는 대두로 하고, 팔 때는 소두로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46년  세종 때의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測雨器)를 양도(兩都)와 팔도(八道)에 나누어 주고, 난장형(亂杖刑)을 폐지하였다.

47년  건국 초기에 설치한 신문고(申聞鼓)를 다시 설치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억울하고 원통한 죄를 호소하도록 하였다.

50년  비공법(婢貢法)을 고치고, 필요한 인력은 곡물로 대체하였다.

정조의 사적[편집]

즉위한 해  규장각(奎章閣)을 내원(內苑)에 설치하고, 선왕(先王)의 문장(文章)과 교유(敎諭) 등을 보관하였다.

2년  『흠휼전칙(欽恤典則)』을 완성하고 형구(刑具)를 제정하였다.

5년  각신(閣臣)들에게 명하여 『일성록(日省錄)』을 쓰고 매일 사건들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6년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천세력(千歲歷)을 만들도록 하였으며, 10년마다 한 번씩 고치도록 하였다.

같은 해  아이를 버리는 것을 단속하고 구제하여 부양하는 것에 관한 항목을 배포하였다.

9년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완성하였다. 【제4과 비고 8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그 후의 법전(法典)」 참조】

10년  명을 내려 북경에서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이소(金履素)는 임금에게 아뢰어, 근래에 좌도(左道)의 성행·사설(邪說) 【천주교를 가리킨다.】 의 유행은 연경(燕京) 【북경】 에서 구입한 서적에서 기인하였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같은 해  홍역이 급격히 유행하였다. 이에 양쪽 의사(醫師) 【내의원(內醫院)과 전의감(典醫監)】 에게 명하여 병에 걸린 백성들을 치료하도록 하였다.

11년  쌀값이 뛰어올라 도시의 백성들은 식량을 겪었다. 왕은 이에 선혜청에 명하여 공전포(貢錢布)를 나누어 주어, 쌀 대신 주도록 하였으며, 또한 내사(內司) 【궁궐에서 필요한 쌀, 포(布), 잡물(雜物),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 는 쌀을 풀어 직접 싸게 판매하였다.

같은 해  무늬가 있는 비단을 금지하는 항목을 인쇄하여 나누어 줌으로써 사치를 삼가도록 하였다.

12년  부녀자가 가체(加髢)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4년  침실을 일컬어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불렀다. 분명히 정조는 영조와 마찬가지로 붕당(朋黨)의 탕평에 온 마음을 기울이려고 하였다.

15년  천주교가 점차 만연하자 서양의 학문을 금지하려고 북경에 파견하는 사신(使臣)에게 명하여 패관소설(稗官小說)은 물론 경서(經書)나 사기(史記)라 할지라도 중국판 도서는 일절 가져오지 못하게 하였다. 또 명을 내려 수도의 안팎에 서양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을 관에 자수하게 하고, 책들을 수집하여 불사르도록 하였다.

같은 해  『팔도여도(八道輿圖)』의 직도(直道)를 한양(漢陽)의 자오선(子午線)에 준하여 측량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16년  각 도(道)·주(州)·군(郡)의 북극고도(北極高度)를 측량하여, 오로지 청나라 역법(曆法)의 본보기에 근거하여 각 도의 절기와 시각을 정하도록 하였다.

20년  나무로 생생자(生生字)를 새겼으며, 또한 생생자를 근본으로 삼아 활자를 주조하였다. 큰 글자 16만 자, 작은 글자 14만여 자를 만들어 그것의 이름을 정리자(整理字)라고 불렀다. 【제4과 비고 8 「활자(活字)」 참조.】

21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세종이 명하여 편찬하였다.】 및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중종 때 안국(安國)이 편찬하였다.】 의 두 책을 합쳐 수정하여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편찬하고, 그것을 인쇄·간행하여 도덕(道德)을 권장하였다. 또 명을 내려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찬하게 하고 널리 나누어 주었다.

23년  괴질(怪疾)이 유행하여 사망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왕은 인민의 장지(葬地)를 마련하기 위하여 성 밖의 민전(民田)을 사서 푯말을 세우고 경계를 정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이곳에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영조, 정조와 붕당[편집]

붕당(朋黨)의 다툼은 숙종(肅宗) 【제19대】 20년에 남인(南人)이 겁을 내고 숨을 죽임에 따라 정권은 서인(西人)의 손에 들어갔으며, 이로 인해 형세는 급변하여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제5과 비고 4 「붕당(朋黨)」 참조】

신임사화[편집]

경종(景宗) 【제20대】 때는 소론이 세력을 얻어 노론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김창집(金昌集), 【전 영의정】 이건명(李健命) 【전 좌의정】 등이 대역(大逆)을 모의하였다는 무고를 당해, 그들 두 사람을 시작으로 노론파들 중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에 처해진 사람이 수십 명에 달하였다. 이 일은 경종 원년 【신축년】 및 2년 【임인년】 에 일어난 사건으로, 세상에서는 이를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탕평의 교지[편집]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동생인 금(昑)이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영조(英祖)이다. 영조가 즉위한 초기에는 소론파(少論派)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왕은 붕당의 폐해를 깊이 느껴 붕당의 대립을 중지하고 융화시키려는 뜻이 있었다. 원년 정월에 빛나는 탕평(蕩平)의 교시를 내려, 마땅히 붕당의 습성을 버리고 공평함에 힘쓰며 불편부당하게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와 왕실을 보전해야 한다고 유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인무옥(壬寅誣獄)의 진상이 폭로되어 왕은 그 수괴 【소론】 인 김일경(金一鏡) 및 목호룡(睦虎龍)을 주살하고 소론 무리들을 귀양 보내고 노론 사람들을 채용하였다. 그렇지만 원래 왕은 당파의 조정과 융화를 주요한 것으로 삼았으므로, 한 당파에 오랫동안 정권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즉위 3년에 다시 소론의 우두머리인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등을 등용하고 노론의 무리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김일경의 잔당인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켰다가 평정되었으며, 이후 그 당파들이 여전히 여러 차례 준동을 부렸으므로, 왕은 점차 소론의 불평한 무리들을 주살하여 제거하고 많은 노론 인사들을 채용하였다. 31년에 【소론】 윤지(尹志), 【김일경의 당파인 윤취상(尹就商)의 아들】 이하징(李夏徵) 등이 반역을 꾀하자 그들을 모두 주살하였으며, 아울러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켰다고 주장되는 소론의 우두머리 및 【소론】 이광조, 조태억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국은 대체로 노론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조의 치세 중에도 붕당의 해악은 그칠 때가 없었으며, 그의 탕평의 교지에도 “붕당의 폐해가 근래에 더욱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또한 일찍이 영조는 국가의 처지를 송나라 말기에 비유하면서 세손(世孫) 【정조】 을 훈계하였다. 무릇 송나라는 붕당 때문에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정조가 뒤를 이어 즉위하자, 전 왕의 뜻을 계승하여 당파를 조정하는 데 힘을 다하였으며,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도 대부분 그들의 재능에 의거하였고, 결코 당파가 무엇인가에는 관계하지 않았다. 스스로 침실의 명칭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탕탕평평(蕩蕩平平)’이란 상서대전(尙書大傳) 홍범(洪範) 가운데에 말한 “무편무당 무당무편 왕도평평(毋偏毋黨 毋黨毋偏 王道平平)”에서 나왔으며,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뜻이다. 혹은 ‘탕평(蕩平)’이라고도 한다.】 붕당의 다툼은 이전과 같이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그 재앙은 이미 오랫동안 국가의 고질(痼疾)이 되어 쉽게 뿌리 뽑을 수 없었다. 이들 당파는 최근 이 태왕(李太王) 때에 이르러 크게 타격을 받아,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사색(四色) 【노론, 소론, 남인, 소북(小北)을 말한다.】 이라고 부르면서 그 구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제5과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참조】

붕당 이외의 폐해[편집]

영조 원년의 교지(敎旨)에서 말하기를, “붕당의 폐해가 근래에 더욱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며, 영조 5년의 교지에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폐해 중 하나는 과거(科擧)요, 둘은 정사(政事)이며, 셋은 고적(考績) 【관리의 공적을 평가하는 것】 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위에서 서술한 당쟁 외에 당시 수많은 폐해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정사(政事)에서 이서(吏胥)의 발호와 사회에서 사인(士人)의 횡포는 모두 하층민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지금 아래에서 그것을 서술하고자 한다.

이서의 폐해[편집]

이서(吏胥)들의 발호(跋扈)

이서(吏胥)란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아에 봉사하는 하급 관리로서, 문서의 취급과 기타 일체의 실무에 종사하였다. 이 직책에 해당하는 사람은 예로부터 어떤 종류의 계급에 한정되었는데, 그들을 이족(吏族) 또는 아전(衙前)이라고 불렀으며, 대부분은 세습적으로 복역하였다. 이서에게는 녹사(錄事), 서리(書吏), 향리(鄕吏), 서원(書員) 등 여러 가지 명칭들이 있었다. 녹사, 서리는 경성에 있는 관아에 속하였으며 경아전(京衙前)이라고 불렀고, 향리는 지방 관아에 속하였으며 외아전(外衙前)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지방 관아에 있으면서 세습적으로 복역하는 사람을 향리(鄕吏)라고 불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리(假吏)라고 불렀다. 그리고 서원은 경아전이나 외아전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그 지위는 매우 낮았다.

이서는 고려 시대에 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들을 두고, 각 관아에 일정한 인원을 배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이서는 전혀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고, 관아에 부속되어 복역하였으므로, 이미 폐해가 백출(百出)하였다. 명종(明宗) 【제13대】 때 조식(曹植)은 봉사(封事)에서,

“예로부터 권신(權臣)들이 나라를 독점한 경우가 있었으며, 척리(戚里)들이 나라를 독점한 경우가 있었으며, 환시(宦寺)들이 나라를 독점한 경우가 있었는데, 아직 서리(胥吏)가 나라를 독점한 지금과 같은 경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공경대부(公卿大夫)가 서로 좇아서 정치를 대례(儓隷)에게 돌리고, 군민(軍民)에 관한 정치나 나라의 기밀 업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도필(刀筆)의 손에서 유래되고, 이들은 백성에게서 재물을 모아 밖에서 탕진하고 있습니다. 망탁(莽卓) 【왕망(王莽)과 동탁(董卓】 의 간사함이라 할지라도 역시 일찍이 그러한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 【14대】 때 이조판서 이덕형(李德馨)도 역시 그것을 논하여, “주는 것은 없는데, 관청의 일을 책임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에게 도둑질해서 먹고 살기에 분주하도록 가르치게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특히 선조 이후 당쟁의 폐해로서 관리들의 교체가 빈번하자 행정에서의 실권은 자연히 하급 속리(屬吏)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점차 해독을 낳기에 이르렀다. 이수광(李晬光) 【광해군 때】 은 말하기를,

“조 남명(曹南冥) 【남명(南冥)은 조식(曹植)의 호】 은 말하기를, ‘조선은 이서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비통함이 절실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이서(吏胥)들의 해악은 더욱 심각합니다. 관리들은 수시로 교체되어, 자리가 따뜻해질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리들은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태연하게 일에 임하여,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이는 것이 오로지 그들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단지 부서(簿書)를 빼돌리고 재물을 훔칠 뿐만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숙종 【제19대】 때 이민(李敏)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이서들이 농간을 부리는 폐해는 안팎에 두루 만연되어 있습니다. 무릇 미포(米布)의 출납, 형옥(刑獄)의 완급(緩急), 호령(號令)의 조종(操縱), 부서(簿書)의 출입에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뇌물을 채근하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사건이 크면 곧 큰 뇌물을 받고, 일이 작으면 곧 작은 뇌물을 받지, 한 사건으로 뇌물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뇌물이 오가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편안하게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심하게 교활한 사람은 부서(簿書)를 빼돌리고 재물을 훔치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 송나라 사람이 말한 우리나라는 곧 서리의 천하이고 우리나라는 서리들의 손에 망한다는 조식의 말은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라고 하였다. 서리의 악습은 실로 붕당의 폐해와 함께 조선 시대 중기 이후에 국가를 좀먹는 가장 주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역대 명사(名士)들이 상소하여 그 화근(禍根)을 근절하는 데 힘썼지만 결국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지봉유설(芝峯類說)』·『경국대전(經國大典)』·『대전회통(大典會通)』】

사인(士人)의 횡포

붕당의 다툼은 영조와 정조 두 왕의 조정의 노력에 따라 점차 그 참혹하고 격렬한 정도는 감소하게 되었다. 원래 사색(四色)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이라는 것으로서, 양반은 그 어딘가에 속하였다.】 의 후손은 사민(四民) 가운데 오로지 관직에 나아가는 특권을 가지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면서도 스스로 사족(士族)이라고 일컬으면서 마을에서 활보하였으며, 혹은 지체 높은 사람들과 결탁하여 평민에 대한 약탈과 학대를 일삼았지만, 법률은 그들의 신변을 건드릴 수 없었다. 만약 평민이 사족의 학대에 분노하여 손찌검을 하면, 노비를 보내 그를 붙잡아다 채찍으로 고문을 해도 사족을 처벌하는 사람이 없었다. 평민이 사족을 욕보이면 관에서 곧바로 그를 엄벌에 처하였고 때로는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으므로, 하층민들은 사족을 두려워하기가 마치 귀신 대하듯 하였다. 특히 당시 가장 폐해가 심하였던 것은 이들 사족의 단체인 서원(書院)으로서, 한 번 서원에서 묵인(墨印)을 찍어 증서[簡]를 발행하고 서원신수전(書院神需錢)을 모집할 때는, 사족이든 백성이든 가리지 않고 주머니를 털어 그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서원에 붙들려 가서 협박을 당하고 혹형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서원이 마구잡이로 설립된 폐해가 적지 않자, 숙종과 영조 때 사적으로 건립한 서원과 사당의 철폐를 단호하게 명령하였다는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제4과 비고 7 「서원(書院)」 참조】 이상으로 정치에서 붕당의 폐해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는 계급제도의 폐해가 심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서양 문물의 전래[편집]

인조(仁祖) 【제16대】 9년 7월에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사양의 화포(火砲), 도초화(熖硝花), 천리경(千里鏡), 【망원경】 자명종(自鳴鐘), 【시계】 일구관(日晷觀), 【해시계】 자목화(紫木花) 【자색 면화】 및 여러 종류의 도서 등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왕에게 바쳤다. 이것들은 모두 중국에 수입된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들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정두원의 장계(狀啓)에는 그가 북경에서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 【탕약망(蕩若望)】 과 만나 얻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조 9년 【일본 간에이(寬永) 8년, 서기 1631년】 은 바로 명말(明末) 청초(淸初)에 해당하는데 그로부터 약 50년 전인 서기 1581년 【선조 14년】 에 천주교 선교사 마테오리치 【이마두(利瑪竇)】가 처음으로 마카오에 왔다가, 마침내 북경에 도착하여 명나라 신종(神宗)의 깊은 신임을 받고 중국에서 포교한 지 20여 년이 지났다. 그 후 수많은 선교사들이 줄지어 와서 포교에 종사하였으며, 청나라가 일어나서도 태조와 태종 등 여러 황제들은 모두 그 선교사들의 지리, 천문, 역법, 포술(砲術) 등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포교를 허락하였으므로, 천주교는 명말 청초에 중국 각지에 만연함과 동시에 그 문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들 서양 문명의 이기(利器)와 천주교가 중국에서 조선 반도에 전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천주교의 전래는 다음 항목 「천주교의 전래와 그 탄압」 참조】

유럽의 여지도(輿地圖)는 선조 때와 임진란 후에 북경에서 돌아오는 사신들이 끊임없이 가지고 왔는데, 정두원이 바친 도서들 가운데 서양 풍속기(風俗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므로, 이것으로 서양의 사정도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총(鳥銃)이 임진란 때 처음으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 과에서 말한 바와 같다. 【제6과 비고 「조총(鳥銃)」 참조】 이 총은 곧 화승총(火繩銃)인데, 정두원이 가져온 화포는 화승(火繩)을 이용하지 않고 뇌관(雷管)을 쳐서 발화시키는 것으로, 조총보다 훨씬 편리한 것이었다.

시헌력[편집]

천문에 관한 여러 서적들도 역시 정두원이 많이 가지고 왔는데, 그 후 인조 22년에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 김육(金堉)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당시 명나라에서 사용되던, 아담 샬이 편찬한 시헌력(時憲曆)을 가지고 와서, 관상감 관리인 김상범(金尙范)에게 힘써 궁리하도록 하여, 다음 왕인 효종 【제17대】 4년에 처음으로 이 서양력을 배포하여 시행하였다. 이리하여 세종 이래의 역법은 크게 바뀌었다. 【제4과 비고 11 「천문(天文)」 참조】 【『국조보감(國朝寶鑑)』·『지봉유설(芝峯類說)』】

천주교의 전래와 그 탄압[편집]

천주교가 처음으로 조선에 전래된 경로는 명확하지 않지만, 임진란 때 일본군 내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아리마 요시무네(有馬義統) 등과 같이 천주교를 신봉하는 대장들이 있었다. 이 전쟁 동안에 천주교 선교사인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Cespedes】 라는 사람이 일본에서 건너와서 포교하였던 사실이 있었으므로, 조선인이 천주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선조 【제14대】 때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또한 천주교 서적이 같은 왕 때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읽히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세월이 흘러 정조 【제22대】 7년에 관례에 따라 북경에 동지사(冬至使)를 파견하게 되자, 평택(平澤)의 현감(縣監) 이승훈(李承薰)이 사절의 일행 속에 포함되어 북경에 갔는데 거기에서 서양인 선교사와 접촉하여 천주교에 관한 많은 서적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이 종교는 크게 전파되었다. 이승훈이 귀국한 것은 이듬해인 8년 【서기 1784년】 으로, 천주교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한 기원(紀元)이 되었다. 당시 천주교를 속되게 일컬어 서학(西學)이라고 불렀다. 이 무렵에 사인(士人)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학문은 쓸데없이 장구(章句)의 하찮은 것들에 치우치고, 오로지 과거를 준비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경서(經書)를 읽지 않고 그 책들을 읽었으며, 경학(經學)의 본래 뜻을 탐구하는 것과 같은 것은 내동댕이친 상황이었다. 경학을 가장 존중하던 정조(正祖) 왕은, 서학이 조선에 들어오기 쉬웠던 이유는 이러한 정세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서학을 막기 위해 우선 정학(正學)을 장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서학은 천당과 지옥을 주장하고, 이를 믿는 사람은 부모의 제사를 없애고, 그 신주(神主)를 훼손하여 인륜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였으므로, 왕은 이 학문을 사학(邪學)이라고 하여 단호히 배척하였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서적들은 매우 위험하다고 하여 정조 10년부터 여러 차례 교지를 내려, 패관소설(稗官小說)은 물론이고 경사(經史)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의 수입을 일절 금지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사학에 감염된 사람은 처벌하며, 그 책들은 모두 관청에서 모아 불사르도록 하였다. 【신해(辛亥) 15년】 그러나 이 종교는 점차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주문모[편집]

이러한 상황에서 북경에 있는 천주교 사교(司敎)는 한국 신도들의 요구에 따라, 반도에 포교를 위해 청나라 소주(蘇州) 사람인 주문모(周文謨)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주문모는 정조 18년 12월에, 몰래 압록강을 건너 이듬해인 19년 봄 【서기 1795년】 에 비로소 경성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주문모는 신자(信者)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몰래 포교에 종사한 지 7년이 되었으므로, 천주교는 점차 사회의 각 방면에 스며들었으며 또한 각지에 전파되어 경성의 바깥 지역 경기도 광주(廣州), 【양근(楊根) 지역이 가장 심하였다.】 충청북도 제천, 충청남도 내포(內浦) 등은 모두 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신유의 옥[편집]

순조(純祖) 【제23대】 원년 신유년(辛酉年) 【서기 1801년】 에 신자의 한 사람인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었는데,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통하면서 그들의 군사력을 빌리려는 계책이 있음이 발각되었다. 그때부터 정부는 대대적으로 교도(敎徒)들을 검거하였고, 귀천(貴賤), 노소(老少), 남녀(男女)들이 빈번히 포박, 고문, 유배, 살육을 당하여 그 수가 50~60명에 이르렀다. 이를 신유(辛酉)의 옥(獄)이라고 한다. 이때 주문모도 역시 체포되었는데 교도들의 거물 수괴라고 하여 살육된 후 효수(梟首)되었다. 황사영과 황심(黃沁) 【황사영의 일파】 두 사람은 능지처참(陵遲處斬) 【머리·몸통·손·발을 찢어 죽이는 극형】 을 당하였고,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 이가환(李家煥) 등도 역시 참살되었다. 정약종은 열렬한 신도였으므로 이때 그의 형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 두 사람도 역시 유배에 처해졌는데, 그중 정약용은 유명한 학자였다. 이가환은 문예(文藝)에 뛰어나 이승훈이 중국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한 사람이다. 당시 천주교를 믿어 형벌을 받은 사람은 대다수가 남인파(南人派)에 속하였다는 것은 주의할 만한 것이다.

유방제[편집]

주문모가 주살된 후 33년이 지나 청나라의 유방제(劉方濟)가 조선에 들어와 포교에 종사하였다. 【순조 33년, 서기 1833년】 무릇 ‘신유의 옥’ 이후 국가가 여전히 금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점점 더 나라 안에 만연하여, 위로는 정부의 고관에서부터 아래로는 부인과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교도(敎徒)가 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유진길(劉進吉), 【고등 역관(譯官】 정하상(丁夏祥), 【정약종의 아들】 조신철(趙信喆) 【평민】 등 교도의 주요한 인물들이 상의하여 몰래 중국에서 유방제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 신부(劉神父)는 거주한 지 4년 만에 귀국하고 【헌종 2년, 서기 1836년】 그를 전후하여 유럽인 선교사들이 새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편집]

조선에서의 기독교의 정세는 이상과 같아서 교도의 수도 역시 수만 명에 달하였고, 【실제로는 7천 수백 명】 로마 교황은 서기 1833년 【순조 33년, 유방제와 같은 해】 에 프랑스인 브뤼기에르 【Brugiere, 소 주교(蘇主敎)】 를 주교보(主敎補)로 파견하였다. 브뤼기에르는 북쪽 국경으로 입국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도중에 만주에서 사망하였다. 때문에 다시 프랑스는 선교사 모방 【Maubant, 나 신부(羅神父)】 을 파견하였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 교도들에게 초대되어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의주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이때가 헌종(憲宗) 원년 【서기 1836년】 1월이다. 그 후 프랑스 선교사 샤스탕 【Chastan, 정 신부(鄭神父)】 과 앵베르 【Imbert, 범 주교(范主敎)】 도 잇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샤스탕은 유방제를 대신하여, 앵베르는 주교보로서 부임해 온 사람이다.

기해사옥[편집]

이들 선교사들은 모두 정하상의 집에서 잇따라 숨어 지내면서 은밀하게 포교에 종사하였는데, 헌종 【제24대】 5년 기해년 【서기 1839년】 에 그 꼬투리가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고, 세 명의 선교사들을 맞이한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도 검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선교사들은 모두 살육되어 효수(梟首)되고, 선교사를 맞이한 세 명의 신도들도 역시 참수되었으며 그 가산(家産)을 몰수당하였다. 이것은 실로 신유사옥에 이은 큰 타격이었다. 이와 동시에 국왕은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려 국민을 타일렀으며, 또한 신유년(辛酉年) 무렵부터 시행된 오가통제(五家統制)를 강력히 시행하여, 서로 경계하게 하고 그 종교에 감염되는 자는 죄를 조사하여 밝히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많은 교도들을 추방하거나 살육하였으므로 그 숫자는 한때 크게 감소하였다.

철종(哲宗) 【제25대】 이 즉위하고 재위한 14년 동안 국내는 무사하였지만, 기강이 크게 이완되어 서교(西敎)에 대한 단속도 점차 관대해졌다. 선교사 메스트르, 【Maistre】 베르뇌, 【Berneux】 오메트르 【Aumaitre】 등이 이어서 입국하여 포교에 종사하자, 교도의 수는 다시 증가하여 거의 전국에 골고루 퍼지게 되었다. 【이하 제 과 비고 참조】

정약용[편집]

정약용(丁若鏞)은 자(字)가 미용(美庸)이며, 처음에는 사암(俟菴), 나중에는 다산(茶山)이라는 호로 불렸으며, 또는 여유당(與猶堂)이라고도 불렸다. 영조 38년에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태어났다. 정조 초기에 생원(生員)에 합격하였고 얼마 안 되어 문과(文科)에 등제하였다. 관직에 나아가 승진을 거듭하여 부승지(副承旨)가 되었다. 정약용은 그의 형 정약종과 함께 서양의 학문을 좋아하였으므로 하루아침에 좌천되어 금정(金井) 찰방(察訪)이 되었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가 승지에 임명되었다. 순조(純祖) 원년에 청나라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양학(洋學)을 제창하다 체포되고, 그 종교를 받드는 많은 사람들은 많은 사형에 처해졌다. 정약종도 실제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약용은 형의 죄에 연좌되어 결국 강진(康津) 【전라남도】 에 유배되었지만, 19년 후에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며, 헌종 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시호를 문도(文度)라고 한다. 정약용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학파를 배워 문장에서 오묘함을 터득하였으며, 경(經), 사(史), 자(子), 집(集) 모두에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식견이 고매하여 근대 고증학(考證學)의 태두(泰斗)라고 칭송된다. 그는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 열심히 노력하여 오로지 독서와 저술에 뜻을 기울였다고 한다. 저서는 매우 많은데,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심서(欽欽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제경강의(諸經講義)』 등 수백 권이 있다. 모두 세상에서 읽히고 있다.

정조 즉위의 사정과 세도의 시작[편집]

영조의 적사(嫡嗣)인 행(緈)은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효장세자(孝章世子)라 하였다. 【후에 추존되어 진종(眞宗)이라고 하였다.】 영조는 이어서 둘째 아들 선(愃)을 세자로 삼았지만, 이도 역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라고 하였다. 【후에 추존하여 장조(莊祖)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35년에 선의 둘째 아들인 산(祘)을 세손(世孫)으로 삼아 효장세자의 법통을 잇게 하였다. 영조는 세손을 크게 총애하였는데 51년에 왕은 이미 80세가 넘어 기력이 점차 쇠하였으므로 세손에게 명하여 정사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세손의 어머니인 홍씨의 숙부】 은 예전부터 세손과 틈이 생겼으므로 힘써 세손의 정사를 저지하였으며, 정후겸(鄭厚謙) 【영조의 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養子)】 등과 결탁하여 세손을 끌어내리려고 계책을 세웠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52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세손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홍인한, 정후겸 두 사람을 귀양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약을 내렸으며, 아울러 그들 잔당을 주살하거나 귀양 보냈다. 이가 바로 정조(正祖) 【제22대】 이다. 정조가 세손이었을 때, 홍인한, 정후겸 등의 협박을 받았지만, 궁궐의 낮은 벼슬아치 【동궁(東宮)의 하급 벼슬아치를 말한다.】 인 홍국영(洪國榮)의 비호를 받아 그 몸은 보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조는 즉위한 후에 홍국영을 숙위대장(宿衛大將)으로 삼아 궁중 호위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정권을 모두 그에게 맡기게 되었다. 이것이 세도(世道)의 시작이었다.

세도란 군왕(君王)의 의탁에 따라 정권을 장악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가령 권신(權臣)이 세력에 편승하여 정권을 전횡하지만, 군주의 공공연한 의탁이 없으면 세도라고 할 수 없다.】 왕이 한번 명하여 세도의 임무를 맡게 된 사람은 그 사람이 비관산직(卑官散職)이라 할지라도 재상 이하 모두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국가의 온갖 정무(政務)는 모두 세도에게 먼저 물은 후에 왕에게 상주하고, 또 세도에게 먼저 문의한 다음에 그것을 결정하였다. 홍국영은 정조의 의탁에 따라 세도가 되었다.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 것이 정후겸보다 심해 세상에서는 그를 대후겸(大厚謙)이라고 불렀지만 후에 반역을 꾀한 일에 연루되어 쫓겨났다.

영조 때는 그의 탕평 정책에 따라 붕당의 해악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지만, 이처럼 새롭게 근신(近臣)이 정권을 좌우하는 악습을 낳았으며, 또한 이후에는 국왕이 모두 어려서 외척(外戚)의 권력이 강해졌으며 따라서 외척이 세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어린 임금과 외척들의 전권[편집]

명종(明宗) 【제13대】 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아직 어렸으므로, 대비(大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문정왕후의 동생】 은 사건을 이용하여 외척이 권력을 농단하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 때문에 왕권은 크게 쇠약해지고 마침내 붕당이 분립하는 폐해를 키우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제5과 비고 3 「외척(外戚)의 전횡과 왕권의 쇠퇴」 참조】 그러나 붕당의 다툼은 점차 수그러들었으며, 정조 【제22대】 때 새롭게 세도(世道)라는 것이 나타나 정권을 좌우하고, 이어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순조(純祖), 【제23대】 헌종(憲宗), 【제24대】 철종(哲宗) 【제25대】 등이 모두 나이가 어려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다시 모후(母后)가 수렴청정하거나 외척이 발호하는 형세로 자연스럽게 변화하여, 영조, 정조 두 왕이 애쓴 치적도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지금 그 사정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즉위한 나이 사망한 나이 왕후의 수렴
순조(純祖) 11세 45세 영조(英祖)의 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
김한구(金漢耈)의 딸
헌종(憲宗) 8세 23세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
철종(哲宗) 19세 33세 위와 같음

위의 표에서 보듯이 순조는 고작 11세에 즉위하였으므로 영조의 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이 즉위한 지 3년이 되어 수렴을 거두었지만 이로 인해 외척들이 점차 전횡하게 되었다. 왕 순조의 재위 기간은 34년으로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지만, 정강(政綱)은 이완되어 시행되지 않아 국운은 떨치지 못하였다.

홍경래의 난[편집]

순조 11년 12월에 관서(關西)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있었다. 그는 무리들을 모아 정주성(定州城) 【평안북도】 을 근거로 삼아, 병력을 나누어 네 방면으로 침략하였다. 청주(淸州) 이북의 읍성(邑城)들은 모두 그에게 호응하였으며 세력이 창궐하여 쉽게 진압할 수 없었다. 이듬해 4월에 이르러 겨우 평정할 수 있었다. 이때 부수찬(副修撰) 박효성(朴孝成)은 상소를 올려 이 난의 원인을 논하였는데, “조선은 당파를 나누어 사욕(私慾)을 챙기며,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자신을 생각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수재(守宰)들은 백성들을 염려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전가(詮家)는 아직도 결코 사람을 골라 뽑지 않고 있고, 창름(倉廩)은 비어 있어 구휼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기계는 무뎌서 공격과 방어에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당시 국가의 실력이 소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로서 즉위한 즉시 아버지인 호(昊) 【순조의 세자였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를 추존하여 익종(翼宗) 【광무 3년에 다시 추존하여 문조(文祖)라고 불렀다.】 으로 삼고, 어머니인 조씨(趙氏)를 왕대비(王大妃)라고 하였다. 헌종은 나이가 어려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하였으며 6년이 되어 이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의 어머니는 영돈녕(領敦寧) 조만영(趙萬永)의 딸로서,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은 헌종 5년에 들어서자 우의정이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영의정에 임명되자, 정권은 모두 조씨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왕은 재위 15년에 세상을 떠났다. 헌종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선의 관례에 따라 당시 이씨 왕가(王家)의 가장 높은 혈족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전계군(全溪君) 광(㼅) 【영조의 손자인 은언군(恩彦君) 인(䄄)의 아들】 의 셋째 아들 변(昪)을 강화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전계군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지만 변은 이때 갑자기 왕통을 잇게 되었다. 철종(哲宗)이 바로 그다. 철종은 즉위한 뒤 아버지 광을 대원군(大院君)으로 추봉(追封)하였으며, 승지(承旨)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김문근을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하였다.

철종은 즉위하였을 때 이미 19세였지만, 순원왕후가 여전히 수렴청정을 하여 모든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은 김문근이 결정하였으며, 그의 일족은 모두 요직을 차지하여, 김씨의 권세는 조정의 안팎을 휩쓸었다. 이때 삼정(三政) 【전부(田賦), 군적(軍籍), 환곡(還穀, 곡물을 사창(社倉)에 저장하여, 매년 봄에 대여해 주고, 가을에 거둬들이는 것)의 세 가지를 말한다.】 은 문란하여 폐해가 극에 달하였고 또 여러 차례 큰 역병이 발생하여 사방의 인민들은 서로 모여 난을 일으켰으므로, 왕은 관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을 대책을 강구하였으며, 이에 고쳐 바로잡을 항목들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서력동점[편집]

순조 이후에 조선의 내정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대체로 안정되지 못하였다. 동양(東洋)의 정세는 바로 이 무렵부터 크게 변하여 서양의 세력이 동양을 점령하였으며, 중국 제국은 남경조약(南京條約)에 따라 홍콩을 영국에게 할양하였고, 【조선 헌종 8년, 즉 서기 1842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와 갈등이 생겨 그 연합군에게 북경이 함락되자, 청나라 황제는 열하(熱河)로 피신하였지만,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하고 점차 화의를 강구하였다. 【조선 철종 11년, 서기 1860년】 그런데 러시아도 역시 철종 9년 【서기 1858년】 에 아이훈조약(愛琿條約)에 따라 청나라로부터 흑룡강(黑龍江)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며, 북경조약에 알선한 보수로서 우수르스크(鳥蘇里) 이동(以東)의 연해주 지방을 획득하였으므로, 러시아는 비로소 두만강을 두고 조선과 영토를 접하게 되어, 조선의 외교관계는 점차 복잡해지게 되었다. 【『국조보감난초(國朝寶鑑爛抄)』·『헌종기사(憲宗記事)』·『조선정감(朝鮮政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