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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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詩[편집]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빈 방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장을 모조리 쏘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을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별없는 하늘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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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한 시, 서울의 겨울밤은 깊었다. 달도 별도 없는 음침 한 하늘 밑에 갈갈이 찢어진 거리거리는 전신줄에 목을 매 어다는 밤바람의 비명이 들릴 뿐. 더구나 북촌 일대는 기와 집 초가집 할 것 없이 새하얀 눈에 덮여 땅바닥에 납작히 얼어붙은 듯하다.

퉁의동 어구에는 초저녁부터 나어린 고구마 장수의 외치는 애처로운 목소리도 끊긴지 오래다. 그때 등불도 켜지 않은 자전거를 몰아 쏜살같이 올라오는 사람이 있다. 「잣골」

막바지까지 치닫다가 윈쪽편으로 꼬부라져서 우중충한 골목 안으로 들어가더니 어느 야트막한 들창 밑까지 와서는 성큼 뛰어 내린다.

그 사람은 방한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까만 눈동자만 흰눈에 반사되어 괴물같이 번득인다. 노동복 같은 검정 외투를 입은 작달막하게 생긴 사나이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장갑 낀 주먹으로 들창문을 쾅쾅 뚜드린다. 그러나 방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다.

『김군 있나?』

자전거를 타고 온 사나이는 들창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굵 다란 목소리로 부른다.

『여보게 수영이 자나?』

하고 이웃집에서도 잠이 깰만큼 문을 뚜드리며 재분참 부 른다. 북악산 꼭대기에 자루를 박고 석벽을 깎으며 내려지 르는 하늬바람은 그 목소리를 휩쓸어 공중에서 맴을 돌리다 가는 흩여버린다.

『게 누구요?』

그제야 모기소리만큼 새어나오는 것은 잠에 취한 목소리 다.

『날세, 나야, 어서 좀 일어나게』

그러나 방안의 사람은 꿈속처럼 외마딧 소리로 대답은 했 어도 누가 와서 부르는지 얼핏 알아듣지를 못한 모양이다.

지금 김수영이라고 불리운 사람은 利일보사의 신문배달부 다.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가 없어서 비록 꽁무니에 방울 을 달고 배달부 노릇은 할망정, 어떠한 사건에 앞장을 섰다 가 자유롭지 못한 곳에서 나온지도 얼마 되지 안했고 그 뒤 로는 상관도 없는 일에 꺼둘려 다니기도 한 두 번이 아니었 다. 두어달 전에도 어느날은 지금처럼 밤중에 문을 뚜드리 며 「전보 받우, 전보요」하는 소리에 (시골집에서 무슨 변 사나 나지 안했나)하고 깜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나갔다. 그 랬더니 난데없는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마음에야 있건 없건 밥벌이를 하려니 까 몸담아 있는 곳을 숨길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지금처럼 새벽녘에 문을 뚜드리며, 친구나 찾아온 듯이 제 이름을 부 르는 소리는 그야말로 돌림병에 까마귀 소리만큼이나 듣기 싫었다.

수영이는 잠이 깨고서도 문을 열지 안했다. 목소리를 다시 징험하노라고 숨을 죽이고 들창편으로 귀를 기울였다.

창밖의 사나이는 조급한 듯이 왔다가다하다가 대문편으로 돌아가더니

『문 열게, 어서 문 좀 열어.』

목소리를 한층 더 높이며 대문짝을 발길로 걷어찬다. 왈가 닥달가닥하고 깊은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는 골목 안이 떠나가리만큼이나 요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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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는 며칠 전부터 감기가 들어서 그날 저녁에는 자기 가 맡은 구역에 신문을 일찌감치 돌리고 들어왔었다. 남의 집 행랑방에 삼원짜리 사글세로 들어있는 홀아비살림이라 약 한첩 달여먹을 수도 없었다. 온종일 비어두었던 온돌은 빈소방처럼 찬바람이 휘돌아 푼거리 장작 한단을 지피고는 땀이나 좀 내어볼 양으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었다. 눕 기는 했어도 침침한 남폿불 그림자가 아롱지는 천장에다가 부질없는 공상을 그리노라고 잠을 못이루고 고생고생하던 끝에 막 첫잠이 들었었다.

대문소리가 하도 요란히 나니까 주인집에도 미안한 생각이 나서 그는 마지못해 머리맡을 더듬어 불을 켰다. 바지춤을 추켜쥐고 일어나 들창문을 열었다. 칼끝 같은 바람이 자던 얼굴을 할퀴며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와서 진저리가 쳐졌다.

『아 이 사람아 무슨 잠이 그렇게 깊이 들었더란 말인 가?』

하며 창밖의 사람은 좀 골이 난 모양이다. 그는 한 신문사 에서 문선 직공을 다니는 서병식이었다. 그는 촌수는 멀지 만 외가편으로 친분이 되어서 수영이가 그의 집에 유숙한 일도 있었다. 나이는 병식이가 두세살이나 위지만 둘도 없 는 막역한 친구였다.

『웬일인가? 이 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그제야 수영이는 안심하고 입을 열었다. 병식이는 언발 녹 이노라고 선자리에서 체조하듯이 발을 구르면서

『신문사에서 시방 호외를 낸다구 야단법석일세, 벌써 여 판을 떠 넘겼는데 배달이 몇이나 모였어야지. 자네가 이리 루 떠나온 걸 아는 사람이 없기에 내가 통지를 하러 왔 네.』

『호외? 호외는 또 무슨 호왼구.』

『아마 ○○사건이 풀렸나보데.』

그 말을 듣자 수영의 양미간에는 금시 내천(川)자가 씌어졌 다. ○○사건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 관계했던 사건이기 때 문이다.

『추운데 미안허이. 곧 나감세.』

수영은 문을 닫고 앉으며 남폿불을 돋우었다. 허우데가 크 지는 못하나 중키는 확실하고 어깨가 벌고 가슴이 봉긋이 내어민 폼이 책상물림 같지는 않다. 콧날이 서서 성미가 좀 까다로울상 싶으나 눈이 크고 어글어글해서 성격의 조화(調 和)를 시킨다. 입술은 좀 두툼한 편인데 인중이 길어서 한번 입을 다물면 좀체로 말이 샐 것 같지 않다. 수영의 인상을 통틀어 말한다면 이렇다할 두드러진 특징은 없으나 누가 보 든지 순박하고 건실한 시골서 자라난 청년의 모습이다. 다 만 스물 네댓살쯤 된 젊은 사람으로 이마와 눈가에 잦다랗 게 주름살이 잡힌 것은 어려서부터 고생살이에 찌들은 표적 일 것이다.

수영은 푸수수하게 일어선 머리털을 손가락으로 빗어넘기 고 은을 쓴 뒤에 신문사 마크를 새긴 하삐를 걸치고 불을 입으로 불어서 끄고 나왔다. 대문 밖에서 양말을 끌어올려 감발을 하면서

『자넨 먼저 타고 가게.』하고 달음질할 차비를 차렸다.

『그럼 곧 따라오게. 얘기는 이따 만나서 험세.』

자전거는 병식의 대답을 싣고 달려갔다.

수영은 가뜩이나 몸이 찌뿌드한데다가 밤바람이 목덜미와 소맷속으로 스며들어 졸지에 전신이 으스스해졌다. 그는 신 문배달부의 독특한 걸음걸이로 한달음에 뛰어 큰길로 나갔 다. 숨이 턱에 닿아서 신문사 근처까지 오니까 윗층에는 불 이 환하게 커졌고 윤전기가 돌기 시작하느라고 천둥이 몰아 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수영은(과히 늦지는 않았군) 하고 판매소로 들어갔다. 그는 난로앞에 걸터앉은 배달감독에게

『인제야 통지를 받았어요.』

하고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간단히 하였다. 다른 배달부들은 벌써 방울 소리를 요란히 내어 쥐죽은 듯한 거 리의 밤을 깨뜨리며 뛰어 나간다. 수영은 난로에 몸을 녹일 사이도 없이 기계실로 들어갔다. 금방 박혀나와서 석유냄새 가 확 끼치는 호외 한 장을 집어들고 급히 눈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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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를 뚫어지도록 들여다보던 수영은 졸지에 흥분이 되어 서 얼었던 얼굴이 귀밑까지 화끈하고 달았다. 잠을 못자서 뻑뻑한 눈에는 핏줄이 가로 질리고 숨까지 가빠졌다.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호외의 내용을 들여다보고 섰자 니, 여러 가지 가슴 쓰라린 추억의 토막토막이 끊어지려는 활동사진의 필름처럼 머릿속을 휙휙 달렸다. 곁에서 속력을 다해 돌아가는 윤전기의 요란한 소리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이건 무슨 생각을 허느라구 얼빠진 사람처럼 섰는거야?

○○일보두 지금 나온다는데』

수영의 어깨를 탁 치며 투덜대는 사람은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배달감독이다. 해장술이 얼큰히 취해서 술냄새가 훅 끼쳤다.

수영은 뒤숭숭한 꿈속에서 소스라쳐 깬 듯이 깜짝 놀랐다.

살을 에어내는 듯한 찬바람에 코털이 얼어붙건만 추운 줄도 모르는 듯, 자기의 배달구역인 서대문 밖으로 나서서 행촌 동(杏村洞) 현저동(峴底洞) 마루터기로 올라갔다. 산비탈에 판잣집이 닥지닥지 달라붙은 좁다란 골목을 아로새기며 대 문틈으로 혹은 담너머로 호외를 집어넣었다. 꽁무니에서 딸 랑거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기계적으로 달음질은 하면서도 마음의 흥분은 그저 가라앉지 않았다.

인왕산 골짜기로 피어 오르는 뽀얀 밤안개 속에, 눈을 뒤 집어 쓰고 너부죽이 엎드린 것은 서대문 형무소다. 성벽처 럼 둘러싼 드높은 벽돌담, 죽음의 신호탑(信號塔)인 듯 우뚝 솟은 굴뚝! 수영은 발을 멈추고 서서 숨을 후유하고 길게 내뿜었다. 한참이나 박아놓은 듯이 섰던 수영의 눈에는 눈 물이 핑그르 돌았다. 그 눈물 방울은 금시 고드름이 되어 눈썹에 매어달리는 것 같다. 이 추운 겨울 밤에 다리에서 자가픔이 나도록 뛰어다녀야만하는 제 신세가 새삼스러이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 하루 밥 세끼를 얻어 먹기가 이다지도 구차하단 말 이냐?』

하고 한숨을 내뿜었다. 그러나 실상 수영의 눈에 눈물까지 맺게 한 것은 아직도 고생을 하고 있는 동지들에게 대한 미 안한 생각 때문이다. 수영의 눈앞으로는 물에 빠져 죽은 시 체와 같이 살이 뿌옇게 부풀은 어느 친구의 얼굴이 붕굿이 떠오른다. 그 얼굴이 저를 비웃는 듯이 히쭉히쭉 웃기도 하 고 그런 얼굴이 금시 백이 되고 천이 되어 일제히 눈을 흡 뜨고 앞으로 왈칵 달려들기도 한다. 생각만해도 마음괴로운 이얼굴 저얼굴이 감옥의 하늘을 온통 뒤덮었다가는 또 다시 안개 속으로 뿌우옇게 사라지곤 한다. 그 중에는 그곳에서 죽어나온 어느 친구의 얼굴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수영은 얼굴을 홱 돌리며 호외 한 장으로 코를 힝 푼 뒤에 송월동(松月洞)으로 성을 끼고 내려갔다. 방울은 떼어 하삐 속에 넣고 맥이 풀린 걸음걸이로 내려오려니 등 뒤에서 첫 닭 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무슨 닭이 벌써 우나?』

하고 수영은 발길을 평동(平洞) 편으로 돌렸다.

어느틈에 잿빛 하늘에서는 떡가루 같은 눈이 체로 거르는 것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가루눈에 섞여서 매화송이 만큼씩 눈송이가 휘날리다가는 수영의 모자와 어깨위에 사뿐사뿐 내려앉는다. 수영은 옷깃을 세우고 추녀 밑으로 붙어서 걸 으려니까 마침 순대를 파는 술에서는 술국이 끓어서 외등으 로 더운 김이 무럭무럭 서리어 올라간다. 소뼉다귀를 삶는 구수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수영은 뜨끈한 술국이라 도 한뚝배기 후룩 마셨으면 몸이 한결 풀릴 것 같았다. 그 러나 수영의 주머니 속은 뒤집어 털어도 먼지 밖에 나올 것 이 없었다. 그는 술값 외상이나 진 사람처럼 고개를 수그리 고 술집 앞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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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먹는 것보다도, 시간을 버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볼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머지 호외 한 장을 그 근처에 있 는 어느 여자의 집에 전하는 것이다. 수영은 생후 처음으로 교제한 그 여자에게 신문도 매일 넣어 주었다.

그 여자가 사숙하고 있는 집은 술집과 맞은편 골목 안인데 길거리로 들창이 뚫린 사랑채가 그가 거처하는 방이다. 수 영은 발자국소리도 내지 않고 그 돌창밑까지 왔다. 호외를 접어서 쪽문 사이로 넣으려다 말고 멈칫하고 물러섰다. 그 는 다시 들창 앞으로 다가서며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기나 긴 겨울밤도 지새려는 때다. 여자가 쓰는 단간방의 전등불 은 으스름하게 가려졌는데 더군다나 그 방속에서 사나이의 굵은 목소리가 두런두런 새어나온다. 수영의 전신의 신경은 온통 고막(鼓膜)으로 쏠렸다. 수영은 몇번이나 제 귀를 의심 하였다. 그러나 방속의 나직나직한 속삭임이 얇다란 들창의 백지한 겉장을 격하여 들리는 것은 분명히 남자의 목소리 다. 수영은

(하룻밤 사이에 이사를 가고 다른 사람이 와서 들었을리도 없는데……)

하고 억지로 마음을 누르면서 그대로 돌아서려 했으나 걷 잡을 수 없는 호기심이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아니다. 내가 오해다. 그는 밤중에 저 혼자 쓰는 방으로 사나이를 불러들일 여자가 아니다)

하고 억지로 머리를 저어도 보았지만, 제 귀로 똑똑히 들 리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번에는 으흠으흠 하는 남 자의 기침소리까지 울려나왔다. 수영은

(어쨌든지 똑똑히 알고나 말리라)

하고 도둑질이나 하러 들어가는 사람처럼 한길을 휘휘 둘 러보고는 대문 곁의 쓰레기통으로 발돋움을 하고 올라서, 벽에다가 몸을 바싹 대고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방속이 깊 고 바람소리에 말허리가 잘려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번 에는 조금 새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말수효가 많고 여자의 대답이 간간이, 또는 여무지게 들리는 것을 보 아 사나이는 무엇을 추근추근히 졸라대는 눈치요, 여자는 마지못해 서너마디에 한마디쯤 대꾸를 하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때 골목밖에서 발을 탁탁 구르는 소리와 기침소 리가 들렸다. 수영은 질겁을 해서 쓰레기통 위에서 껑충 뛰 어 내렸다. 그것은 뚝배기를 끼고 술집으로 들어가는 영감 장이가 버선 등의 눈을 터는 소리였다. 수영은 뛰어내리자 정신이 아뜩하였다. 뇌빈혈로 쓰러지는 순간처럼 머리속에 서 팽이를 돌리는 것 같았다. 그는 정신을 수습하느라고 곁 에 선 전봇대를 붙잡은채 한참동안이나 넋을 잃고 서 있었 다.

…지금 어느 남자와 밤을 새우는 여자, 수영이가 생후 처 음으로 사귀었다는 여성은 이름을 최계숙(崔桂淑)이라고 부 른다. 요사히 그는 신여성들 사이에, 또는 젊은 학생들 사이 에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여자다. 그가 누구의 입에나 오르고 내리게된 이유는 대강 이러하다. 최 계숙이가 인물이 뛰어나게 잘난 까닭일까? 실상 계숙은 미 인이라느니보다 함박꽃처럼 탐스럽게 생긴 여자다. 이목구 비가 좀 생이별같이 옹기종기 달라붙고 머리 뒤가 핥아 논 것처럼 함치르르하고 몸집이 앙바름해서 씨암탉 걸음을 걷 는 서울여자와는 정반대다. 관북의 태생이라, 손발이 좀 큰 대신에 살이 희고 목이 상큼하게 패이고 허리가 날씬한데다 가 종아리가 깍아세운 것처럼 길고 매끈해서, 뒤꿈치 높은 구두를 신으면 서양여자와 분간을 할 수 없을만큼 각선미 (脚線美)를 가지고 있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몽상하는 육체의 조건이 선천적으로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은행 껍질같이 쌍거풀이 진 눈꼬리가 조금 치켜 붙고 콧마루가 오뚝하여서 성품이 좀 날카로와 보이는 것도, 관북 여자의 특징일 듯, 촬영감독이 보았으면 탐을 내리만큼 영화배우의 소질을 풍부히 가진, 그야말로 모던걸의 타입이다. 그러나 계숙이가 거의 사회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의 외 모에만 달린 것이 아니었다.

계숙은 긍 다시에 어느 사립어학교의 학생이었다. 하루 아 침에 일이 일어나자 그는 팔을 걷고 가두(街頭)로 나서서 각 여학교와 연락을 취하고 남자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민첩하 게 활동을 하다가 육체의 자유를 잃은 몸이 되었다.

그 뒤에 감옥으로 넘어가서 여러달 동안 고초를 겪다가 나 왔기 때문에 여류 투사로서 경향에 이름이 났다. 그때에 각 민간신문에서는 최계숙의 사진을 이단으로 커다랗게 내고 약력까지 실었다. 그래서 남녀를 물론하고 그 당시에 학생 들은 신문을 펴들고

『에에키 조선의 짠다아크가 났군.』

하고 빈정거리기도 하고

『아니야, 로오자 룩센부룩을 외딴치겠는 걸.』

하고는 제멋대로 품평하듯 하며 지껄였다. 그러자 최계숙 이는 벌써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하나도 아니요 둘이나 된다. 삼각연애가 얼크러져서 죽을둥 살둥 하는 판이란다─ 이제나 저제나 남의 말에는, 더군다나 젊은 여자의 일이라 면 머리를 싸매고 덤비는 축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런 소문 이 옮아 다니는 동안에 「최계숙」이란 이름이 슬그머니 유 명해졌던 것이다.

수영이가 계숙을 알게 된 동기는 그 사건 때문이었다. 쥐 도 새도 모르게 일을 꾸밀 때에 수영은 서병식의 소개로(병 식은 등뒤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고 활자로 박힌 것은 그의 손으로 된 것이었다) 利여자학교의 학생 대표인 계숙을 처 음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계숙은 병식이가 동경서 고학을 할 때 자취생활을 하던 둘도 없는 동지 최용준(崔容俊)의 누 이동생이었는데, 그 친구가 폣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피차에 고독한 처지라 의남매를 맺고 지내왔다. 수영은 병 식이가 계숙이란 여자와 가까이 교제를 한다는 이야기를 여 러번 들었고, 두 사람의 관계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기숙 사 생활을 하던 터이라 공교히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청량리(淸凉里) 전차 종점에서 만나보라는 것이 병식의 비 밀한 지령이었다. 수영은 약속받은 시간보다 삼십분이나 일 찍이 나갔다. 난생 처음으로 눈 앞에 나타날 여자를 그리어 보면서, 또는 일종의 호기심을 가지고 오분 십분을 기다렸 다. 사람의 눈을 피하여 사랑하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것처 럼 야릇하게 흥분이 되어서 전차가 하나 둘 다녀가는 동안 이 퍽이나 지루하였다.

초겨울의 황혼 때라 날씨가 쌀쌀하여서 수영은 모교 교복 에 기다란 만또를 두르고 나왔다. 그는 기다리기가 무료해 서 구둣부리로 길바닥의 조약돌을 걷어차기도 하고 휘파람 도 불면서 왔다갔다 하려니까, 네 번째 나오는 전차가 종점 에 와 닿자 채 정거도 하기 전에 한사람의 여학생이 선뜻 뛰어내렸다. 그 여자가 바로 계숙이었다. 그는 검정 두루마 기를 짤막하게 입고 미색 목도리 한자락을 등뒤로 멋지게 넘겼다. 계숙은 내려서면서 왼편 소매를 들추어 팔뚝시계를 보고는 시선을 사방으로 두른다. 부탁받은 남자를 찾는 눈 치다. 두사람의 눈은 마주쳤다. 마침 그 근처에는 문안에서 나무를 팔고 방울소마를 딸랑거리면서 빈 길리만 지고 나가 는 소 한 마리 밖에 없었다.

계숙은 앞에 사람이 없는 것을 살핀 뒤에야 길찍한 다리를 활발하게 떼어놓으며 수영을 향하여 다가온다. 수영이도 (저사람이 틀림없으리라)하고 마중하는 의미로 몇 걸음 앞 을 질러 걸어왔다.

잎사귀는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버드나무 그 늘로 걸어갔다. 얼마 안가자 등뒤까지 여자의 구둣소리가 따라왔다. 이윽고 두사람은 돌아보지 않고 곁눈으로도 보이 리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수영은 무어라고 말을 붙여야 좋을까 하고 망설이는 판에

『김수영씨십니까?』

하고 여자편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계숙은 수영이와 반대 편으로 반쯤 얼굴을 돌리고 혼잣말처럼 물었다. 혹시 등뒤 에서 주목하는 사람이나 있지 않은가 하고 조심스러웠던 것 이다.

『네 그렇습니다.』

수영은 나직이 대답을 던졌다.

『저리로 걸어가시지요.』

여자는 여전히 딴전을 붙이듯 하며 앞을 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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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엿이 넘는 석양은 등뒤에서 무르익은 모과빛의 낙조를 던져 두사람의 그림자를 길바닥에 기다랗게 끌어당겼다. 땅 위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르는 낙엽을 밟으면서 그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동안에 수영은 몇번이나 등덜미와 귀바퀴에, 혹은 정면으로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그렇건만 수영은 수줍어서 계숙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다만 목소리가 가랑 가랑한 것과 사투리가 섞여서 억양(抑揚)이 명주고름 같이 부드럽지는 못하나, 그 말에는 열이 있고 힘이 있었다. 계숙은 수영이가 「네, 네」하고 대 답만 하니까 좀 갑갑한 듯이 대들어 선동이나 하는 태도였 다. 수영은

(얘 이 여자야말로 어지간허구나)

하고 어느 정도까지 탄복을 하면서도 여전히

『네 알겠습니다. 잘 알아들었으니까 틀림없겠지요.』

하고 피동적으로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끝으로 일 의 방침을 토론비슷이 할 때, 피차에 긴장된 얼굴을 정면으 로 대하였다. 계숙의 눈동자는 흑진주 같이 빛나고 두눈은 능금처럼 빨갛게 혈조(血潮)에 타올랐다. 그 순간의 인상이 지금까지도 수영의 머리속에 심령술(心靈術)로 사진이나 찍 은 듯이 또렷이 남았고, 계숙이도

(침착하고도 믿음직한 남자다)

하고는 매우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주 사무적이었고 서로 사사로운 환경을 물어볼 처지도 아니었 다. 두 사람은 거사할 날짜와 시간을 다시 한번 다지는 것 으로 작별의 인사를 대신하고 목례를 바꾼뒤에 헤어졌다.

그러나 전차를 타며 내려다보는 계숙의 눈과, 기숙사로 돌 아가며 돌려다보는 수영의 눈이 두 번 세 번이나 의미있게 마주쳤었다.

며칠후 모든 남녀학교의 공기가 위롱뒤롱하던 그 전날에 수영은 안국동 큰길에서 계숙을 만났다. 계숙은 여러동무들 틈에 섞여서 오기 때문에 손은 모자 챙까지 올라가다가 말 았다. 계숙은 수영을 먼저 알아보고 곁눈으로 은근히 인사 를 하였다. 머리는 숙이는 듯 마는 듯 눈썹만 찌긋이 끌어 올렸을 뿐이었다.

그 이튿날 저녁때 수영은 경찰서에서 계숙을 보았다. 유치 장이 대만원이라. 순사들이 무도장 마루방까지 사람으로 콩 나물을 길렀는데 거기서는 창살을 붙잡고 매어달지면 행길 을 내어다볼 수가 있었다. 계숙은 여전히 활발한 걸음걸이 로 친구들 보다 몇 걸음 앞을 서서 아는 집으로나 찾아오는 것 같았다. 수영은 입술을 깨물며 내어다보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나 어쩐지 제 신변이 든든해진 것 같기도 하 였다.

그러다가 시대문 밖으로 넘어간 뒤에는 피차에 소식이 끊 어졌다. 한솥에 지은 콩밥을 먹고 같은 담안의 공기를 호흡 하면서도 그야말로 지척이 천마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 로 은연중에 마음이 챙기어

『몸이나 성헌가? 과히 괴로워하지나 않나?』

하다가, 계숙이가

『그이가 먼저 나갔으면……』

이렇게 서로 빌어 주고 염려해주는 마음만은 극성맞은 간 수의 눈을 피할 필요도 없이 철창 사이를 새어서 남감과 여 감의 담을 넘어다녔다. 잡혀오던 날 병식이가 뒤를 따라오 며 수영이도 검거되었다는 말을 전했기 때문에, 계숙이 역 시 김수영도 한집에 들어와 있거니 하면 마음 한모퉁이가 든든해서 정신적으로 적지않게 위안을 받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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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두 달쯤 뒤에, 하루는 최계숙의 이름으로 세숫수 건과 잇솔이 들어왔다. 수영은 그제야 계숙이가 먼저 출옥 한 것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요, 비록 작은 물건이나마 차입해 준 것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부모의 자애와 친구의 우정 이외에 저와는 아무 인연이 없었던 여자의 따뜻한 정 을 받아 보기는 뜻밖이요. 또한 처음이었다.

수영이가 손가락으로 이를 닦으면서 그 잇솔과 손수건을 쓰지 않고 보물이나 되는 듯이 꼭꼭 싸두는 것을 보고

『아주 불천지위 위허듯 허는군.』

하고 같은 방에 있는 동무에게 놀림까지 받았다.

석달 뒤에 수영은 뜻밖에 보석이 되었다. 나오던 날은 감 옥 문앞까지 마중을 나와준 병식의 등에서 또한 뜻밖에 계 숙이가 서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변호사에게서 수영의 보석허가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서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계숙은 병식과 작반을 하기 위해서 나왔을리는 없다. 물론 저혼자라도 마중을 나 와 주었으리라고 생각하니 더한층 고마웠다. 옥문을 나서자 수영은

『고마워 고마워! 잘들 있었나?』

하면서 병식이와 두 번 세 번 혈관이 떨리도록 악수를 하 였다. 감격하기 쉬운 병식의 어깨를 얼싸안고 잠깐 동안은 말문이 막혔었다. 그는 눈물까지 글썽글썽 해가지고 동지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수수하게 차렸으나마 봄옷을 깨끗 하게 입은 계숙은, 수영의 앞으로 다가서며

『얼마나 고생을 허셨어요?』

하고 여학생 식으로 까듯이 예를 시작하였다. 수영의 머리 가 길어서 귀밑까지 덮은 것과, 구레나룻이 시꺼멓게 난 것 이 우스웠다. 그러나 입모습에는 미소를 피우면서도 영체가 도는 눈은 이슬을 머금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수영은 걷어 메었던 옷보퉁이를 내려 놓으면서

『고맙습니다. 차입해 주신걸 받구서 먼저 나오신 줄 알었 지요.』

병식과 쥐었던 그의 손은 얼떨김에 계숙의 손을 옮겨 쥐었 다. 반가움에 겨워서 계숙에게도 이윽고 악수의 차례가 간 것이요. 잠깐 쥐었다 논 것이지만 수영이가 장성한 여자의 육체와 접촉해 본 것도 또한 난생 처음이었다. 악수를 하고 나서는 겸연쩍어서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는

『둘이 꽤 가까워졌구나』하고 병식은 속으로 웃었다.

시골 아버지는 출옥한다는 통지를 미쳐 받지 못했기 때문 에 나오기는 했어도 수영은 당장 갈곳이 없었다. 병식은 수 영을 데리고 계숙이도 함께 「유각골」 막바지 저의 집으로 갔다.

병식의 집이란 깊은 두메 구석에서나 볼 수 있는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었다. 대문은 최경례를 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이마를 들어받을 지경인데 지붕은 여러해 개조도 못해서 찌 들대로 찌들고 벽은 허무러져서 흙이 떨어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안방 간반 마루 한간에다 반간남짓한 건넌방이 더 붙었는데 그나마 팔원씩 또박또박 월세를 치르어 나가는 집 이다. 한달에 겨우 사십원을 받는 인쇄직공이 살림인데다가 그 속에서 집세를 제하고 이태전에 돌아간 아버지의 상채를 그저 꺼나간다. 그뿐인가, 술잔이나 먹는 사람이라 친구와 얼리면 술추럼이 적지않게 돌아가니 객비용까지 따지고 나 면 이십원도 못남는다. 그것을 가지고 해숫병으로 골골하는 늙은 어머니와 아들 딸 삼남매를 길러나가는 병식의 살림살 이야말로 구차한 것으로는 남부러울것이 없다. 게다가 병원 아내와 처음부터 의초가 좋지 못하였다. 부지중에 자녀는 연달아 났으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한집에 살기는 해도 그는 제 아내를 밥지어 주는 부엌어멈이라고 부른나. 술이나 얼 근이 취해가지고 돌아와야.

『네나 내나 이집구석에서 종신징역을 하기는 마찬가지 다.』

하면서 아들의 팔을 끌어당기고 머리를 마주 비비고 하는 것이, 그래도 남보기에는 가장 탐탁해보이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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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은 동경서 여러해 고학을 하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우유배달을 하다가 나중에는 인력거까지 끌었다. 그러면서 도 그는 어느 사립대학 문과에 학적을 두었었다. 어려서부 터 문학에 취미를 가지고 그방면의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 에 그는 시도 짓고 소설도 썼다. 지금도 신문잡지에 익명(匿 名)으로 발표하는 그의 수필이나 평론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난 최용준의 영향을 받아서 그사람과 어느 주의를 선전하는 팜플렛을 맡아가지고 일년 동안이나 출판을 하였다. 병식은 워낙 눈썰미가 있는 사람 이라, 그 당시에 활자를 뽑고 식자(植字)하는 기술을 배워서 얼마 뒤에는 기술자로 한몫을 볼만큼이나 익숙해졌다.

그라나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가 중풍으로 덜컥 돌아가서, 병식이가 돌아와 벌어대지 않으면 식구들은 백판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모든 것을 내어던지고 돌아와보니 아버지의 유 산이라고는 잡혀먹은 집 한 채와 천원도 넘는 빚이 새로운 채무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언제 집 지니고 살 팔잔가」하고 제일 착수로 집을 팔았다. 이백원 밖에 안남은 돈을 가지고 장마통의 원뚝 모 양으로 터져 나오는 빚구멍을 이귀퉁이 저귀퉁이 틀어 막았 다. 급한 것만 간신히 마감은 했으나 인제는 길거리로 나앉 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집을 사글세로 얻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굶어죽으란 법은 없는지 요행으로 利신보 사의 문선공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여섯식구가 오늘날까지 입에 풀칠만은 겨우 해왔던 것이다.

세 사람이 들어서자 병식의 아내는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아이고 나오셨어요? 얼마나 고생을 허셨어요?』

하고 수영을 반기며 내닫다가 계숙이가 뒤에 따라들어 오 는 것을 보고 금세 샐쭉해서 물러섰다. 병식의 아내는 계숙 이와는 아주 옹추였다.

『말만헌 계집애가 남의 집 사내의 꽁무니를 멀 허자구 저 렇게 엉등 판을 흔들며 따라 댕기는거야.』

하고 계숙이가 병식을 찾아올 적마다 혀를 끌끌차며 종알 거리는 것이 한 버릇이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의누이란 다 뭣 말러죽은거람. 요샛 계집애들은 걸핏허 면 의남매두 잘헙디다. 난 진정이지 그런 꼬락서닌 보기 싫 어요.』

하고 조그마한 몸집을 뒤흔들어 가면서 남편에게 포달을 부렸다. 남편이 계숙이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볼때마다 두 눈에서 쌍심지가 돋는 듯이 강짜를 하였다. 어쩌다가 단둘 이 건너방에서 이야기를 하는 때면 안방에서 바느질을 하다 가도 시어머니 머리맡의 미닫이를 홱 열어 젖히고 공연히 헛기침도 칵칵하고 청하지도 않은 자리끼를 띠가지고 건너 가기도 한다. 건너가서는 두 사람의 가운데를 타고 앉아서 얼토당토 않은 말참여를 하다가, 남편에게 구박을 맞고서야 고양이 낙대한 상을 하고 일어선다. 계숙이도 「형님 형 님」하면서도 병식의 아내가 달라는 것 없이 싫었다. 첫째 수다스러운 것과 사람이 쫄쫄이 때가 묻은 것과 저만 똑똑 한 체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다. 아주 찰구식이면서도 신 식 경우도 아는 체하고 게다가 사람을 깔보는 것이 얄밉기 도 해서

『난 조따위 서울여자는 깜찍해서 꿈에도 보기 싫더라.』

하고 눈속을 흘겼다. 그렇건만 이런일 저런일도 병식을 만 나게만 되니까 이집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병식을 찾아올 때면 반드시 과자나 과일을 사가지고 왔다. 어린애들부터 입을 씻기고나서 너스 레를 놀면서 얼러주고 추켜주는 바람에 병식의 댁네는

『흥 네가 사탕발림을 시키는구나.』

하면서도 그때만은 좀 사그러졌다.

또 어떤 때는 계숙이로 해서 내외간에 대판으로 싸움이 벌 어질 뻔하였다. 병식도 어지간한 신경질이요. 살림에 쪼들려 악만 남은 사람이라. 성미만 건드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건만 계숙이와의 관계에 들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러는 것이 더욱 수상쩍어서 아내가 달려들어 종주먹을 대면

『그만하면 입두 아플테니 고만 좀 닫혀 둬.』

하고는 돌아누우며 무슨 생각엔지 깊이 잠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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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람은 건너방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콩밥을 먹다가 나온 사람을 찬 없는 밥을 먹일 수도 없는데, 아내가 또 뾰 루퉁해진 눈치를 보고 병식은 손수 설렁탕을 받아 가지고 들어왔다. 계숙은

『조섭이나 잘 허세요, 내일 또 오겠어요.』

하고 일어서는 것을 간신히 붙들어 앉히고 세사람이 겸상 을 하였다.

『얼굴은 과히 상하지 않었네만 아직 얼떨떨헐걸.』

『햇빛에 눈이 부신데다가 별안간에 시끄러워서』

『아뭏든 경험은 잘 했네, 우리가 아니면 그런데 구경이나 하겠나!』

『인간세상을 알랴면 감옥생활이 제일인데. 두말할 것 없 이 감옥은 인생생활의 축도(縮圖)야. 난 겨우 유치원 졸업두 못허구 나왔네만, 한 삼년 복역이나 허면 소득이 상당히 많 겠든걸.』

『그렇구 말구요. 삼년은커녕 일년만 독방에 갇혔으면 아 주 철학자가 돼 나오겠어요.』

이번에는 계숙이가 공기에 밥을 담아 수영의 앞에다 놓으 면서 말 참여를 하였다.

『그래도 나오시니까 언제 이런 세상에 살었던가 싶지 요.』

하고 설렁탕을 마시느라고 구슬땀이 숭숭 내어밴 수영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뭘요, 그저 좁은데 있다가 좀 넓은데로 나왔을 뿐이지 요.』하고 수영은 쓸쓸히 웃었다.

『난 그렇게 쉽게 나오려니 생각도 안했지만, 나올 때는 어찌나 섭섭한지 도로 들어가구 싶드군요.』

『섭섭한 것만이 아니야요. 저만 먼저 나온게 큰 죄나진 것 같아요.』

수영은 물러 앉으며 소매로 얼굴의 땀을 씻었다. 머리를 모으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한두가닥 나풀거리는 계숙의 앞머리털이 몇번이나 수영의 이마를 간지렀다. 병식도 상을 물리면서

『난 아직 큰집엔 못가 봐서 얘기 참례를 헐 자격이 없네 만……』하고 손가락을 꼽더니

『동경서 네 번, 부산서 사흘, 서울서 두 번이로군. 유치장 밥맛이야 나만큼 알겠나!』

하고 한편 입모습만 끌어올리며 웃는다.

세 사람은 그동안 세상의 변동과 동지들의 소식을 묻고 들 려주고 하느라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신통한 소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요새는 서울바닥이 폭풍우가 지나간 바다와 같이 잔잔해져서 이야기할 만한 거리도 없거 니와 그일에 관계했던 사람들은 밥벌이 구멍을 찾느라고 눈 이 벌개서 다닌다는 것과, 수영의 친구 가운데 가장 열렬하 게 날뛰던 사람들도 혹은 군청 고원이 되고 혹은 면기수로 취직을 하였다는 찐덥지 않는 소식 뿐이었다.

수영은 감옥에서 둘러메고 나온 옷보퉁이로 훔척훔척 하면 서

『자 인젠 목간이나 허구 머리나 좀 깎아야지, 온 터분해 서……』

하고는 세숫수건과 잇솔을 꺼내어 들었다. 그수건은 한번 도 쓰지 않은, 분홍실로 C자를 수놓은 것이었다. 계숙은 수 영의 손을 유심히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제가 차입해 주었 던 물건임에 틀림없다. 병식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담 배를 피우며 두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싱글싱글 웃더니

『그동안에 자네가 유명해진 걸 좀 보려나!』

하고 책상 설합에서 묵은 신문 한 장을 꺼내어 놓았다. 수 영은 눈이 동그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계숙은 병식을 곁눈으로 살짝 흘겨보면서,

『아이 오빠두 그걸 뭐라구 입때 뒀다가 내노서요!』

하고 그 눈을 옮겨서 수영을 힐끔 치어다 본다.

그 신문에는 수영의 사진과 계숙의 사진이 커다랗게 났다.

그리고 이 두사람이 인물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비춘 기사까 지 실린 것이었다.

『아주 여불 없는 신랑 신부지!』

병식은 껄껄 웃어젖혔다. 계숙의 얼굴은 수영에게 손을 잡 혔을 때보다도 더 빨개져서 석류꽃처럼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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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함께 큰길로 나갔다. 목욕탕 앞에서 계숙과 작 별하고 둘이서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

시간이 일러서 목욕탕 속에는 새로 끓인 깨끗한 물은 연기 같은 김이 서리어서 찰찰 넘쳐 흐른다. 수영은 목간 탕으로 안간힘을 쓰며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까 온 겨우내 얼어서 오그라들고 옥죄었던 혈관과 신경줄이 가닥가닥 풀리고 세 포까지 따끈한 물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욕탕 속에서 나오자 어찔하면서도 나른한 피곤이 전신을 흘렀다.

병식은 수영의 등을 밀어주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를 하던 끝에 수영에게 꼭 들어보라는 것도 아닌 것처럼 계 숙의 신변에 대한 걱정을 하였다.

『난 요새 계숙이 때문에 큰 걱정일세.』

『왜?』

비누칠을 하얗게 한 수영의 얼굴이 돌려다본다.

『자네두 알다시피 계숙은 용준군이 살았을 때부터 나를 오빠 오빠허구 딸었구, 나 역시 오늘날까지 친누이처럼 알 구 지내지만 감옥에 댕겨 나온 뒤로는 당최 맘을 잡지 못허 구 돌아다니니 큰 걱정일세.』

『당분간 시골집에 내려가 있을게지 아무 수입도 없이 서 울서 어떻게 배기누?』

수영은, 속으로는 슬그머니 계숙의 일이 궁금하건만 빗대 어 놓고 묻듯 한다.

『아니야. 시골집엔 못가 있을 사정이 있어. 저의 아버지는 밥을 굶지 않지만 계숙이는 어려서 친어머니를 잃어서 부모 의 정을 모르는 데다가 모발이 허연 아버지가 기생첩을 데 리고 산대. 그래서 그 계모두 아니요, 서모두 아닌 여편네 밑에서 눈칫밥을 먹기가 싫어서 죽어라구 시골집엔 아니 내 려가는 모양이야.』

병식은 여러달 견디기 어려운 고생을 하고 나와서도 여전 히 거무스름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수영의 건강한 몸을 부러 워하면서, 희고 가냘픈 저의 팔과 다리를 북북 문지른다.

『그럼 계숙씨는 아주 무남독년가?』

수영은 될 수 있는 대로 화제가 다른 데로 달리지 않도록 경계를 하면서 뒤미처 물었다.

『첩한테 소생은 있다는데 아직 대면도 못했대.』

『그래두 아버지는 딸 하나를 아주 모른 체하진 않겠지?』

『응, 노인은 두어달에 한번쯤은 상을 보러 올라오는데 같 이 내려가재두 세상 말을 들어야지.』

『과년한 계집애가 서울 바닥에서 굴러다니면 사람버린다 구, 암만 달래구 꾸짖구 해두, 딸 하나안나신 셈만 치세요 하고는 뻗딩기니, 송아지가 아닌 담에야 목을 매어 끌겠 나?』

『계숙이는 여간 고집이 세질 않거든.』

『여자두 고집이 있어야지, 서울 계집애들처럼 희뚝희뚝 해서야 쓰겠나.』

『그래두 계숙이는 너무 만만하지 않어. 저의 아버지는 올 러만 오면 꼭 나를 찾어와서 사정사정을 하다가 나중엔 날 더러 친부형 대신으로 감독을 잘 하다가 신랑감까지라도 골 라 달라구 신신부탁을 하구 내려가지만…… 내 코가 석자나 빠진 사람이 남의 일까지 참견할 겨를이 있어야지.』

수영은 물을 퍼서 어깨 위에 끼얹고 나서

『그럼 요새 지내기두 어렵겠네 그려?』

『벌써 두달째 동전 한푼 아니 부친대, 저의 아버지두 인 제는 격이 난 눈치야. 어느 부몬들 무작정하구 돈을 올려 보내겠나.』

『우리 아버지하구 한가지로군, 우리 집에선 보낼려야 보 낼 돈두 없지만……』

『생활문제도 문제지만 계숙이와 다른 방면의 생활이 걱정 일세. 그애가 감옥엘 다녀나온 뒤에는 무슨 명사나 된것처 럼 학생퇴물은 말할 것도 없구 나중엔 소위 신사축까지 뒤 를 내서 그애 사숙엘 무상시로 출입 한다니 이 말썽많은 사 회서 소문이 사납지 않겠나. 그자들이 다 계숙이한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다니겠나? 다 거의 청부업잘세. 어느 놈헌 테 낟찰(落札)이 될는지 모르지만……』

하고 병석은 수건질을 하면서 억지로 껄껄 웃는다.

『자네두 웃는 소린 여전허이그려.』

하고 수영이도 따라 웃었다.

계숙의 이야기는 목욕간에서 나와서 옷을 입을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계속되었다. 수영은 어쩐지 계숙의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안했다. 단둘이만 만나서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 가 있었으면 하였다.

『자 그럼 오늘은 실컨 잠이나 자게. 일찍 다녀나옴세.』

병식은 수건과 비누를 수영에게 맡기고 그길로 신문사로 향하였다.

수영은 병식의 집 건너방으로 돌아와서 네활개를 벌리고 누워서, 시골집 생각과 저의 장래며 게다가 계숙의 일까지 생각하느라고 피곤한 머릿속이 또다시 무거운 근심에 짓눌 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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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로 수영과 계숙은 병식의 집에서 종종 만났다. 수영은 임시로 병식의 집 건너방에 묵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식이 가 신문사에서 늦게 나오는 날이면 단둘이 마주 앉아서 이 야기할 기회도 있었다. 이야기를 한 대도 수영은 원체 입이 무겁고 말 수효가 적은 사람이라, 잣달은 사정이나 제의견 을 길게 늘어놓는 법이 없지만, 계숙은 수영이와 나날이 친 해질수록 제 생각이나 지내는 형편을 아무 가림새 없이 양 념을 쳐가며 이야기하였다. 얼마 전에는 급한 볼 일이나 있 는 듯이 찾아와서

『제가 취직운동을 한다는건 병식 오빠한테 들으셨겠지만 利백화점에서 오라는 통지가 왔어요. 그래 가보았더니 내일 부터라도 와서 견습을 하라니 어쩌면 좋을까요? 처음엔 십 오원 밖에 못주겠다구요. 그렇지만 밥값은 버는 셈이 아니 야요?』

수영은 손톱 여물을 썰고 앉았다가

『글쎄요. 여자두 직업을 갖는건 물론 좋은 일이지만 객지 에서 한달에 십오원을 가지구서 생활을 해나갈는지도 의문 인걸요.』

하는 대답이 시원하지 않으니까

『그럼 어떻게요. 집에선 돈 한푼 안보내주지요. 그러니 학 교엔 댕길 수도 없지만 가고 싶은 학교나 어디 있어요. 시 골 내려가 있자니 이해없는 사람들허구 그 궁벽한데서 귀양 살이가 아닌 담에야 갑갑해서 어떻게 견디겠어요』

계숙은 한숨을 짤막하게 내쉬고 나서

『뭐 옛날부텀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살랬다는데 생활전 선(生活戰線)에 나서는 것이 천하거나 창피하게 여기는 건 수영씨 부텀두 봉건사상(封建思想)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생 각이 아니서요?』

도리어 둘러 씌우듯 하면서 예기지름을 한다. 그러나 수영 은 어쩐지 계숙이를 그런 번잡한 곳에 상품처럼 내어놓기가 싫었다. 사정 여하를 불구하고 계숙이가 그런데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다시는 자주 만날수도 없겠고, 저와는 차차로 거리가 멀어질 것만 같았다. 수영은 백화점 양품부나 화장 품 파는 진열장 앞으로 계숙의 얼굴을 기웃거리며 어슬렁어 슬렁 돌아다니는 히야까시군을 눈앞에 상상해 보았다. 동시 에 그런 자들에게 일종의 질투까지 느꼈다.

『암만 생각해 봐두 재미적은걸요. 나 역시 서울서 부비대 야 무슨 끝장이든지 날상 싶어서 시골서 내려오라는 재촉이 성화 같어두 목에 넘어가지 않는 병식군의 밥을 얻어먹고 있지만, 여자는 남자와도 달러서……』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계숙이가

『그러면 어떻게요?』

하고 대어드는데는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고 또는 억지 로 우겨댈 권리가 저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 때문 에 표면으로 모지게 반대는 할 수 없었다.

그날은 병식도 기다리지 않고 일어서면서 계숙은 애처로운 이별이나 하는 것처럼 옷고름을 매무작거리더니 그 매력있 는 곁눈으로 수영을 내려다보고

『인제부텀 물건을 사시려거던 나한테루 오세요. 특별히 와리비끼해 드릴께요.』

하고 입을 뾰족하게 오므리며 「요」자를 길게 뽑고 나서 는 구두 단추를 끼울 사이도 없이 총총하게 돌아갔다. 작별 한지 사흘만에

『…아무리 곰곰 생각해보아도 별 도리가 없어서 오늘 아 침부터……백화점에 출근했습니다. 수영씨는 저의 사정을 동정하시는 터이니까 잘 양해해 주실 줄 믿습니다.

저 있는 집으로 한번 꼭 놀러 오세요. 병식 오빠에게는 인 제는 아니 가겠어요.』

이런 내용의 편지가 조그만 자회색 봉투에 담겨왔다. 그리 고 끝에는 「어느 미스?걸에게서」라고 씌어 있었다.

그 뒤로 수영에게는 몹시도 우울한 날이 계속되었다. 빵문 제를 해결하려는 고민도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두달 뒤에 신문배달부가 되었다. 직업을 얻으려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것은 다음달 이야기할 기회가 있거니와 그나마 도 병식을 졸라서 간신히 한자리로 비비고 들어간 것이었 다.

그는 신문배달부가 되던 며칠 뒤부터 계숙이가 사숙하고 있는 집에 신문 한 장씩을 몰래 넣어 주었다. 그래서 오늘 날까지 꾸준히 계속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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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를 붙잡고 섰던 수영은

『에익! 내가 여기 무엇하러 서있단 말이냐.』

하고 홱 돌아섰다.

독한 술에나 진흙같이 취한 사람처럼 간신히 몸을 가누어 가지고 큰길로 나섰다. 골목 밖에는 눈보라가 벼르고 있었 던 것처럼 수영의 가슴에 벅차게 안기다가, 길바닥을 휩쓸 고 지나갔다. 수영은 흑흑 느껴져서 소매로 얼굴을 가린채 걸음을 걸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한참이나 찬바람을 쏘여 서 나갔던 정신이 찾아들자 몸서리를 쳤다. 동시에 계숙이 와 밤을 새우는 얼굴도 모르는 자에게 대한 질투의 불길이 머리속에 타오르고 육신은 추위와 배고픔에 못견디어 사시 나무 떨리듯 한다.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지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 냐?』

마음 한모퉁이에 책망 비슷이 하면

『어째서 상관이 없느냐?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으면 너 는 얼마나 오지랖이 넓길래 그 남녀에게 그다지 질투와 분 노를 느끼느냐?』

하면서 또한 귀퉁이에서 재분참 내닫는다.

『낸들 아느냐 나도 모르겠다.』

마음속에서 수영은 손을 내젖는다.

『여자에게 대하여 자기 자신도 뜻하지 아니한 가장 날카 로운 심리적 현상(心理的現像)이 기적(奇蹟)처럼 나타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머리속에 쭈그리고 앉은 수영의 이성(理性)은 그 말씀에 다 시 부연을 달아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수영은 과연 그 엄숙한 판 결에 대하여 불복할 용기가 없었다.

─우연한 기회는 아직도 동정(童貞)인 수영의 앞에 그 상대 자를 던졌다. 큰일을 하기 위한 동지로 만났던 계숙의 열렬 한 사상과 용모와 체격이 수영의 숨었던 정열을 부채질하기 에 넉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 몸을 어디까지든지 의지 력(意志力)으로 움직이고 실수없이 가누어 나가려는 수영은 계숙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멀리하려고 애를 썼다.

뼈속까지 자릿자릿하게 느껴지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의식적으로 눌러왔다. 동시에 계숙을 한낱 여성의 동지로만 대하려고 힘을 들였다. 더군다나 원수의 극복 때문에 인력 것군 같은 복색을 하고 신문배달을 다니는 주제에 연애를 한다거나 결혼 문제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또 한편으 로는 조선의 청년으로 연애하는 것 이외에 급히 할 일이 하 나나 둘도 아니라는 생각이 장성한 사나이의 가슴에다가 불 을 지르는 본능까지도 억제해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 사 훌륭한 상대자가 나타나서 피할 수 없이 연애의 그물에 몸뚱이가 사로잡히는 경우라도, 수영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이 속으로는 꿍꿍이 셈을 칠지언정 자기의 속마음을 말로나 행동으로 상대자에게 표현할 기교(技巧)를 가지지 못한 숫보 기였다.

수영은 머리끝까지 흥분이 되어서 수십보나 발길 놓이는대 로 걸어가다가 발꿈치를 홱 돌렸다.

(그놈이 누군지나 알고 말리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과 유혹의 함정에 빠져서 허덕 이는 그 여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 여자는 둘도 없는 나의 이성의 동지다!

일종의 의협심이 수영의 용기를 돋웠다. 그 순간에는 추운 것도 배고픈 것도 잊어버렸다.

(만일 위험한 경우를 당한 것 같으면 어느 누가 그 여자를 보호해 줄 것이냐 오직 나뿐이 다!)

하는 자신도 생기고 의무도 느꼈다. 이빨을 악물고 주먹을 부르쥐고 급히 걸어가던 수영의 얼굴에는 무서우리만큼 처 참한 빚이 떠돌았다. 당장 큰 죄나 저지르려는 사람처럼 두 눈은 이상한 광채를 발한다.

『벌써 늦지나 않을까, 그 희고 탐스러운 계숙의 육체가 먹구렁이 같은 어떤 놈의 팔다리에 칭칭 감기지나 않을 까?』

이런 생각이 번갯불처럼 수영의 머리속을 왕래하였다. 수 영은 다시 계숙의 집으로 급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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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문앞에까지 당도를 하였다. 오기는 왔으나 어쩔줄 을 모르고 망설이고 섰으려니까 문안에서 미닫이를 여는 소 리가 드윽하고 났다. 사나이가 나오는 눈치다. 수영은 누가 등뒤에서 끌어당기기나 하는 것처럼 서너걸음 물러섰다.

(나오는 자가 누군지 얼굴이나 뚝뚝히 보아 두리라) 하면서 도 가슴 속에서는 두방망이질을 한다.

이번에는 남자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툇마루 끝에서 구두 끈을 메느라고 꾸부리고 하는 소리가 분명하다. 목소리는 수영의 귀에 익은 듯하면서도 여전히 양철지붕을 흔드는 바 람소리에 확실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수영은 병식에게서 들은대로 계숙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자 들의 이런 얼굴 저런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마음 속으로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다.

『과연 에로 청부업자들이 무상시로 출입을 한다는 병식이 말이 틀림없구나.』

하였다. 조금 있자

『안녕히 가서요. 퍽 고단허시겠어요.』

계숙의 목소리만은 분명히 들었다.

『다음날 또 들리지.』

이번에는 바로 지척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일 리는 만무한데……』

꿈에도 생각치 않던 어떤 한 예감이 수영의 머리를 번개같 이 후려 갈겼다.

수영은 얼굴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술집편으로 급히 도망하 듯 걸어갔다. 정탐노릇이나 하는 것처럼 맞은편 담밑에 바 짝 다붙어 몸을 가리고 모자를 눌러서 차면을 하였다.

그제야 쪽문을 여는 소리가 삐걱하고 났다. 노동복 같은 검정외투에 방한모자를 쓴 작달하게 생긴 사나이다.

그 사나이는 기생집에서나 자고 나오는 오입장이처럼 웅숭 그리고 나왔다. 뒤미처 문고리를 안으로 거는 소리가 들렸 다.

『설마 그사람은 아니겠지.』

앞으로 걸어오는 그 사나이의 걸음까지 눈도 깜짝이지 않 고 쏘아보던 수영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 사나이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걸어오기 때문에 겨우 몸뚱이의 윤곽만 보이더 니, 술집의 외등 앞으로 지나갈 때에 불빛에 뚜렷하게 드러 난 얼굴!

새매와 같이 날카로와진 수영의 눈은 그 얼굴을 정면으로 노렸다.

눈앞으로 지나가는 뒷모양까지 흘겨보던 수영은 전신의 피 가 금방 머리속으로 거꾸로 흐르는 듯하였다.

그 사나이는 갈데 없는 병식이었다. 걸음걸이를 보아 그는 발이 헛 놓일만큼이나 술이 취한 모양이다.

수영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서 눈을 꽉감 고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무척 힘을 들였다. 자기가 너무나 지나치게 흥분되었던 것을 깨닫자 (그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드면) 하였다. 무어 라고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을 짓누르리고 마음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내가 오해를 했는지 모른다. 병식이는 의남매라는 가면 을 쓰고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 짓을 하기에 는 솔짓하고 양증인 그의 성격부터 허락지를 않을 것이 다.』

하고 우정이 자별한 병식의 인격을 믿었다. 또 한편으로는

『계숙이 역시 그다지 호락호락하게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 할 여자가 아니다. 더군다나 하필 병식이와 그런 일이 있으 리라고 상상하는 사람부터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그눈!

새까만 수정알 같은 계숙의 눈! 그 눈에는 아직도 순진한 처녀의 영채가 떠돌지 않았던가? 단 한번이라도 남자를 안 여자의 눈이 그렇게 신비스럽도록 영롱한 빛에 받득일 수가 없다.』

하고 청량리에서 만났을 때의 인상이 다시금 눈앞에 떠올 랐다. 그런 여자를 의심하고 공연히 질투의 불길로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머리속의 피를 끓였던 자기 자신이 어리석은 듯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어둠속에서 얼굴을 붉혔다. 저 혼자서 원님을 내고 좌수를 낸다는 격으로, 병식을 믿고 계 숙의 변명까지 해 주고 나니까 그제서야 마음이 좀 거뜬해 지는 거 같았다. 뒤미쳐 온몸이 액체(液體)가 되어, 땅밑으 로 녹아드는 것 같은 피곤을 느꼈다.

『어쨌든 좀더 두고 볼 일이다.』

하고 수영은 맥이 풀린 걸음걸이로 큰길로 나섰다. 지리한 겨울밤은 길거리로 헤매어 다니는 젊은 사람의 등뒤로부터 동이 터왔다. 흰 눈 위에 덮였던 밤이 그림자가 뿌옇게 걷 히고 동녘 하늘은 어스름 달밤처럼 벗겨지기 시작한다. 어 느덧 눈보라도 잠자고 새파란 별이 하나 수영의 머리 위에 서 반짝거리다가 깜박거리다가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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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성을 끼고 터벌터벌 걸어 내려오면서도 도무지 발 로 걷는 것 같지가 않았다. 다리가 허전허전해서 이리저리 헛놓이고 머리속은 얼이 빠진 것처럼 아무 감각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아무리 병식이와 계숙의 행동을 호의로 해석하려고 힘을 들여도 그럴수록 둘이서 마주 붙잡고 밤을 새운 까닭 을 터득할 수 없다. 저의 추측과 상상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병식이가 저에게까지 자전거를 타고 일부러 와서, 호외를 발행한다는 통지를 해주고 호외를 돌리려고 나가는 것까지 보았는데 무슨 긴급한 일이 생겼길래 계숙을 찾아갔을까.

그때가 두시도 넘었었는데 더군다나 단둘이서 날밤을 새워 가며 무슨 이야기를 그다지 장황하게 했을까? 도무지 까닭 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병식을 호의로 생각하려면 의혹 이 생기고 그를 의심할수록 일종의 질투를 느꼈다.

『친구를 시기한다는 것은 야비한 감정이다.』

하고 마음을 눌렀다. 그러나 한번 세찬 바람이 휩쓸리기 시작한 감정의 바다는 미친 듯이 거칠은 물결이 출렁거릴 뿐. 그 파도는 점점 사나와질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다만 하나인 지기(知己)요 가장 친한 친구를 질투의 불길로 태워버리고, 생후 처음으로 숨은 정열을 남 몰래 바쳐오던 하나 뿐인 이성의 동지를 환멸(幻滅)의 함정 에다 몰아넣고보니 저 자신은 무인절도로 떠내려간 것 같은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수영은, 튼튼하던 육체는 눈이 깔린 길바닥에다 행려병자 (行旅病者)처럼 내다버리고 등신만이 남아서 제가 거처하는 집으로 기어든 듯 하였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자 개지도 않은채 몸만 빠져 나갔던 이 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이라고 빙고바닥 같아서 옷도 벗지 못한채 누웠으 려니까 이마와 무르팍이 마주닿도록 꼬부라진다. 주린창자 는 뱃속에서 얼어붙은 듯한데도 머리속에서는 오둑가지 잡 념이 소용돌이를 한다.

꿈도 아니요, 그렇다고 생시도 아닌 경계선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헤매어 다닌다. 계숙의 얼굴, 병식 얼굴이 번차례로 환등처럼 떠올랐다가 지워지고 지워졌다는 또 나타나곤 한다.

전등의 손잡이를 비틀어 불을 껐다 켰다 하듯이 정신이 들 락날락할 뿐.

여러 가지 환영(幻影)속에서 가장 몸서리 쳐지는 것은 조금 전에

(먹구렁이 같은 어떤 놈의 팔다리에 희고 탐스러운 계숙의 육체가 칭칭 감기지나 않었을까?)

하던 그 남자가 바로 얼굴만 바뀐 병식이로 눈 앞에 떠오 를 제, 수영은 그 환영을 깨물어 죽이려는 것처럼 이를 부 드득 갈았다.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우정이 무엇이 냐? 연애란 다 무엇 말려죽은 거냐!」

수영은 숨이 까빡까빡 넘어가는 사람처럼 점점 의식이 몽 롱해 가건만 이번에는 전에 느껴보지 못하던 허무감(虛無感) 까지 뒤섞여 가지고는 극도로 피곤한 육신을 들볶는데 골목 안에서 물장수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머리맡을 밟고 지나갔 다. 멀리서 공장의 첫고동소리가 뚜우하고 어렴풋이 들렸다.

그때까지 모질게도 잠은 아니왔다. 일분간이라도 빨리 모든 의식을 잊어버리려하면 이번에는 추운 것과 배고픈 의식이, 또다시 머리를 들고 지긋지긋하게도 눈이 감기지 않는다.

십여 시간이나 냉수 한모금 마시지 못한 창자는 바싹 마른 채로 등에가 붙은 듯, 인제는 쪼르록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들창에 아침 햇발이 비치고 안집 부엌에서 솔부 시는 소리를 듣고서야 수영은 간신히 잠이 들었다. 죽음과 같은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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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그동안에 계숙이가 지내온 일을 적어 보기로 한 다.

「최계숙이가 利백화점에 나왔다더라.」

「화장품부에서 물건을 판다더라.」

발없는 말이 쫙 퍼지자 계숙이가 저의 살붙이나 되는 듯이

「그 계집애두 버렸군.」

하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있고

「흥 너두 배가 고프든게로구나.」

하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계숙을 동지라고 불 러오던 사람들의 뒷공론이었다. 그밖에도 신문이나 잡지에 서 계숙의 이름을 보고 뜬 소문만 들은 축들까지

「어디 한번 가서 놀려나 볼까.」

하고 뒤를 이어 利백화점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계숙은 얼마동안 곡마단에 팔려 다니는 계집애 모 양으로 큰 길거리 진열장 앞에 나서서 구경거리 노릇을 하 였다. 계숙의 앞으로 등뒤로 비슬비슬 돌아다니면서 곁눈으 로 여자의 얼굴을 도둑질해 보는 일없는 인간들을 대개 좋 게나 나쁘게나 계숙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었 다.

「직업은 신성하다. 내 육신을 놀려서 밥을 벌어먹는데 어 째서 부끄럽단 말이냐.」

하고 이상한 용기를 내어 병식이와 여러 동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서기는 했건만, 계숙이가 아무리 활발해도 여자 의 마음이라, 처음 들어가서 사나흘 동안은 얼굴이 잘 들리 지 않았다. 푸르둥둥한 사무복을 어색하게 입고 뭇 사나이 앞에 나서기가 서먹서먹 하였다. 학교에 다닐 때에 지침을 하고 교실에 들어설 때처럼4 모든 사람의 눈총이 일제히 제 얼굴만 쏘는 것 같아서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저와 교제를 해오던 여러종류의 남자들이 일부러 제 꼴을 구경하기 위해서 찾아와서는 된 소리 안된 소리 지껄이고 갈 때에는, 속이 상하는 것은 둘째요, 다른 점원들 보기에도 몹시 겸연쩍었다.

「참말 내가 마네킹껄이 되구 말았고나.」

하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한숨까지 지었다. 더군다나 동창 생 중에도 아주 단짝으로 지내던 동무가 귀부인처럼 차리고 화장품을 사러와서는 입모습에 싸늘한 웃음을 띄우며

『그래 재미가 좋아?』

하고 「너같은 계집애들 언제 알었느냐」는 듯이 반말지껄 이로 수작을 걸다 얼굴이 마주치니까 마지못해서 인사를 하 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얄궂은 모욕까지 느꼈다. 더군다나 그 여자의 등뒤에서 그이 남편인 듯한 양복장이가 안경테 밖으로 저를 깔보는 듯한 눈초리와 마주칠 때에는 여간 불 쾌할 것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백화점에 들어가는 것을 굳이 말리던 병식이나 수영이가 혹시 찾아오지나 않을까, 그들과 딱 마주치면 어쩌나.

하고 생각만 해도 쥐구멍을 찾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다가도 얼마 지내니까

『나와 같은 여자가 더구나 남다른 주의를 가진 여자가 길 한복판에 팔을 걷고 나섰다. 직업전선에 앞잡이 노리개가 되어 편히 누워서 먹을 궁리와, 연애를 헐가로 팔어서 몸치 장이나 하려는 욕망밖에 더 있느냐.』

하는 일종의 자존심도 생기고 저를 과대하게 평가(評價)도 하였다. 몸소 훌륭한 모범이나 보이는 듯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다가 또 얼마 지나가니까 모든 일이 익숙해졌다. 물건 을 사러 들어오는 사람들의 인기(人氣)가 제게로만 쏠리는데 는, 어깨바람까지 날 것은 없어도 불쾌하지는 안했다. 손의 종류를 따라 살짝살짝 눈치를 보아 가면서 물건을 척척 내 놓고 여기저기서 부르대로 구둣부리를 척척 제겨가면서 분 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것도 어느 때는 유쾌하였다.

그러면서도 계숙 마음 속으로 생활에 대한 불안과 젊은 여 자로서, 외로움과 또는 저혼자로서는 위안을 받지 못할 충 동을 시시때때로 받았다. 그보다도

「내가 이 구석에서 청춘을 썩힌단 말이냐?」

하는 분한 생각에 남자처럼 주먹을 쥐고 떨기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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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감옥은 인생의 축도(縮圖)라고 한 수영의 말에 대를 채운다면 백화점은 인생의 쓰레기통이라고 하리만큼 사람 격난을 하기에는 알맞은 곳이었다.

백화점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큰길을 휩쓰는 티끝을 마 셔들이고, 전차나 등차소리, 버스가 사람이나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는 소리, 온갖 도회지의 소음(騷音)이 삼층으로 뽀 얗게 서리어 오르는 먼지, 뭇사람의 땀내와 후터분한 운김, 식료품부에서 풍기는 시크무레한 냄새.

그곳에서 콧구멍이 까매지도록 더러운 공기를 호흡하며 아 침 여덟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잔걸음을 치고 히야까시 군에 게 시달리고 점원감독의 눈총을 맞아 가면서 그날그날을 보 내는 계숙의 생활이야말로 겉으로 보는 것처럼 호사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루 열다섯시간 노동에 겨우 오십전! 그것은 돈있는 집 어린애의 군것질 값도 못된다. 백동전 다섯잎에 몸의 자유 를 팔고 지내는 여점원의 생활이다.

계숙이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사람에 둘려서 현기증이났 다. 마침 경품을 붙여서 소위 대매출(大賣出)을 하는 때라, 사람장마가 져서 인간사태에 머리골치가 휭휭 내둘렸다. 밤 이 되면 눈이 부시게 휘황한 몇백촉광의 전등불이 눈을 피 곤하게 하고, 신경을 자극시켜서 사숙으로 돌아가도 얼핏 잠이 들지를 안했다.

그것은 오히려 둘째 가는 고통이요, 특별히 계숙을 괴롭게 구는 것은 배딱서니 없는 남자들이었다.

『계숙이 전화 받어.』

하고 동직이 친절하게 내어 주는 전화는 대개 이름도 얼굴 도 모르는 남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오늘은 몇시에 파해 나오시나요? 利모퉁이에서 기다릴테 니 꼭 좀 만나 주세요.』

이따위 전화만이냐 하면 이번에는

『남의 전화를 받다가 딱딱 끊는 법이 어디 있느냐?』

고 사뭇 호령을 하고 나중에는

『어디 호젓한데서 만나기만 해봐라.』

하고 위협을 하는 자까지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팔바지에 칠피구두를 신고 왜 뜩삐뜩 하고 들어온 부랑청년이 화장품부로 빙빙 돌아다니 다가 사람이 흩어진 눈치를 보고는 계숙의 곁으로 슬금슬금 오더니

『실례지만……』

하고는 조그만 편지 한 장을 계숙의 손에다가 쥐어주고는 뒤도 아니 돌아다보고 나간다. 계숙은 얼떨김에 무엇인지도 모르고 편지를 받아쥐었다가 급히 뜯어보고

『여보시오. 여보시오.』

하고 친절히 부르며 그 남자의 뒤를 쫓아 나갔다.

『이리 잠깐만 들어오서요.』

하고 시빗말로 윙크를 해서 끌어 들였다.

그 사내가 무슨 수나 생기는 줄 알고 들어오는 것을 계숙 은 문을 가로막고 딱 버티고 서서

『여보 멀쩡한 젊은 사람이 그래 대낮에 할 일이 없어서 이따위 편지쪽을 써가지구 댕긴단 말요!』

하고 별안간 떠들썩하니까 점원들이 모여들고 물건 사러 들어온 사람들이 백절치듯 하는데 계숙은 정면으로 호령을 톡톡히 하였다. 그자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죄인처럼 꼼짝도 못하고 섰다.

『다시 이따위 짓을 했단 봐라.』

하고 계숙은 그 편지를 쪽쪽 찢어서 그 자의 얼굴에다 끼 얹고

『냉큼 나가!』

하고 야무지게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말 한마디 못 하고 도망질하듯 고개를 푹수그리고 빠져나가는 그자의 등 뒤로 구경군들은

『왓하하하.』

하고 조소(嘲笑)를 끼얹었다. 이 광경을 본 점원들은 계숙 이가 남자 이상으로 대담할데 혀를 빼물었다.

그뒤로도 계숙은 그러한 방법으로 장난군들을 퇴치(退治)시 켜 왔었다. 그러나 계숙이 자신은 알지못하게 그뒤를 밟는 사람이 있었다. 진날 마른날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계숙의 뒤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뒤로 수영은 일부러 계숙을 만나지도 않고 만나려고 들 지도 않았다. 신문배달부를 그만두는 날까지 그 여자는 만 나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였다. 양복때기를 입고 의자에 걸 터앉는 직업을 바라던 것은 아니건만 적어도 계숙에게만은 하삐를 걸친 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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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계숙이대로

『백화점에서 품팔이를 하는 여자라고 어쩐면 한번 찾아주 지도 않는담.』

하고 「그이가 오면 어쩌나」하다가도 수영이가 저를 모른 체하는 것이 야속하고 고까운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피차 에 잊어버린 듯이 발을 끊고 지냈다.

한편으로는 병식은 계숙이가 우물가에 세워논 어린애만큼 이나 못미더웠다. 마치 의첫증(疑妻症)이나 있는 사람처럼 계숙이가 무사히 제가 거처하는 곳까지 들어가는 것을 보지 않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저녁에도 집에 붙어있지 않는 버릇이 생긴지가 오래 다. 오늘 내일하는 어머니의 지리한 잔병 치레에도 진력이 나거니와 하고한날 여편네의 푸닥거리에는 머릿살이 지끈지 끈 아팠다. 깨알만한 활자를 줍느라고 진종일 매어 달렸다 가 더구나 신기가 불편한 날은 두 눈이 하가마가 되어서 집 구석이라고 기어들면 그의 아내는 「옳다구나 인제야 만났 다」는 듯이 밥상 머리에가 쪼그리고 앉아서 한바탕씩 바가 지를 긁는다. 그러면 병식은 「살려주, 제발 적선에 밥먹는 동안만은 닫쳐 둡시더」하고 빌다시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것저것 없다고 여러 말 할게 뭐야. 돈 한가지 만 없다면 고만일걸.』

하고 억지로 농쳐도 본다. 그러면

『밥상 받을 때나 아니면 언제 이야기할 새가 있어요?』

하고 더 한층 달려든다. 말이 옥신각신 하다가는 그예 남 편이 숟가락을 던지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직성이 풀리 는 것 같다.

어린 것이 달려드는 것도 귀찮고 겨우 돌이 지난 셋째놈의 재롱이 비상해서 그것 하나에만 마음을 붙이고 웃음도 웃을 때가 있지만, 그나마도 약하디 약해빠져서 아비의 속을 태 우는 애물이다.

『제에길, 이놈의 지옥 속엘 다시 들어오는 놈두 개자식이 다.』

하고 맹세까지 하고 나가는 날이 거진 사흘걸러큼은 되었 다. 두루마기에 팔도 채 꿰지 못하고 나서긴했어도 막상 갈 곳이 없다. 원체 구중중한 친구는 사귀지도 않지만 아는 사 람이란 말끔 궁한 친구 뿐이라, 남의 설음까지 들으러 다니 기도 싫고 기나긴 밤을 길거리에서 헤맬 수도 없다. 고작해 야 수영이나 찾아가서(수영이가 딴방을 얻어 나간 것도 반 쯤은 병식의 아내 때문이었다) 씩둑거리다가 돌아온다.

그는 같이 일을 하는 직공들과는 추축을 하지 않았다. 제 털을 빼어 제 구멍에 박는 그네들의 생활과 그들의 소시민 적 근성(小市民的根性)이 싫었고, 공장에는 인텔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와는 지식 정도가 걸맞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동지의 가면을 쓴 사람보다는 안심되는 탓으로 얼리 기만하면 주머니 털이를 하고 나야만 속이 풀렸다. 그래서 근자에 와서는 술이 취하고서야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야기는 지름길로 달렸으나 계숙이가 백화점에 다니게 된 뒤로는 병식에게 일과(日課)가 하나 늘었다. 그것은 등뒤에 서나마 계숙을 보호해주는 것이다. 세상이 쓸쓸하고 신체가 고단 할수록 병식은 하루 한번 계숙을 보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웠다. 수십간통이나 사이를 떼어놓고 뒤를 따라가는 것 이 아무리 그래도 어떠한 위안을 받는 것 같았다. 젊은 여 자가 일가친척도 없는 타향에서 밥벌이를 한답시고 밤잠을 못자고 다니는 것이 가엾었다. 그보다도 그 그림자를 따라 다니는 저 자신이 더한 층 가엾고 눈물겨웠다. 어쩐지 제 앞에 닥쳐올 운명을 생각할 때에는 앞이 캄캄도 하였다. 눈 을 감고 비탈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노상 마음이 불안스러웠 다.

그러면서도 어두운 숲속에서 반득이는 조그만 반짝불처럼 계숙이가 내 앞에서 걸어가거니하는 의식(意識)만이라도 어 둠침침한 마음의 한모퉁이에다가 빠끔하게 구멍을 뚫어주는 것 같았다. 그사이로 희미하게나마 무슨 빛이 내어다 보이 는 것 같기도 하였다. 책을 덮고 붓대를 던진지도 오래건만 그런 때는 시를 짓고 싶은 충동이 불현 듯이 생겼다. 시혼 (詩魂)이 움직이고 시상(詩想)만은 마음속에 가득찼으면서도 읊어지지는 안했다. 까닭모르고 인생을 사는 것과 같이 병 식은 까닭없이 그저 계숙의 뒤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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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가 맨처음 사귄 여자가 계숙이라면, 병식이가 연애 감이란 손톱끝만큼도 없는 제 아내 이외에 알아온 여자도 계숙이었다. 수영이가 아직도 성애(性愛)의 세계를 모르는 동정(童貞)의 남자라면, 병식은 이제까지 이성에 대한 따뜻 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남자였다. 이제껏 정신적 동정을 깨 뜨리지 않은 처녀지(處女地)는 봄이 되어도 물 한 방울 뿌려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풀 한 포기 났을 리가 없었다.

그 처녀지에 때아닌 싹이 돋고 뜻하지 않았던 꽃이 피었 다. 그것은 계숙이가 해마다 여자로서 성숙하여 가는 것을 눈 앞에 보는 동안에 남몰래 돋을 싹이요, 소문없이 핀 꽃 이었다.

『계숙아.』

하고 떨어지게 「해라」가 나오지를 않고 「계숙이」하고 반말 비슷이 부르게 되고 「이랬어 저랬어」하고 말끝을 우 물쭈물 아물리게 된 뒤부터, 병식은 계숙이와의 관계가 의 남매의 경계선을 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스스로 의심을 하게 되었다.

『못쓴다 안된다.』

하고 병식은 제마음 짓눌렀다. 죽은 용준을 생각하고 계숙 의 아버지의 부탁을 저버리지 말자하였다. 「오빠 오빠」하 고 저를 따르던, 머리를 땋아늘였을 때에 계숙이와 지내오 던 기억만을 자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러한 지난날의 추억이나 의(義)로 맺어진 친족 관 념쯤으로는 가슴속에 이미 붙어당긴 불길을 끌수가 없었다.

그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억제하고도 다질만큼 병식은 차 고 단단한 이지(理智)의 사람이 아니다.

병식은 계숙을 대할 때마다 가까이 접촉될 때마다, 제 아 내라는 사람의 움직일 수 없는 존재를 생각하였다. 죽을 달 만 기다리고 골골하는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제 앞에 층층 으로 자라나는 자식 삼남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 면 계숙의 그림자가 눈 앞에서 사라지고 그 대신 천근이나 되는 바윗덩이 같은 근심에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아서

『휘유우.』하고 갑갑한 한숨을 내뿜었다.

병식은 그 사건 당시에 계숙이와 일을 같이 해본 뒤에 비 로소 계숙의 성격을 뚜렷하게 알았다. 여자로서 부드럽고 싹싹하고 잔재미는 없는 대신, 씩씩하고 대담스럽고 의협심 이 굳센데 속으로 탄복을 하였다. 누구에게나 굽히지 않고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는 기질을 사랑하였다. 생활난과 부 대껴서 옛날의 기분과 정열이 점점죽어 갈수록 계숙을 보고 낮시간 이야기만 하고 나면 새로운 용기가 돋는 것 같았다.

부지중에 계숙의 기분 속으로 제 마음이 끌려들어가는 것을 깨달았다.

(가당치 않은 욕망이다. 계숙이는 숙명적(宿命的)으로 나와 는 연분이 없는 여자다)

하고 계숙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아주 외면을 하려고 무진 힘을 들여왔다.

그러자 계숙과 수영의 사이가 은연중에 가까워지는 눈치를 챈 병식의 고민은 날로 더 심하여 갔다.

(계숙이가 수영이 같은 사람하고 결합만 되면 앞날에 무서 울 것이 없을 것이다. 한쌍의 동지로서 더할 나위없는 인물 들이다)

하고 저의 신변에서 가장 가까운 두 남녀를, 한데 뭉치게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저에게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수영이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아침에 신문에 났던 사진을 둘의 앞에 내놓으며

『여불없는 신랑신부지』하고 웃을 때만 하여도, 겉으로는 둘의 장래를 축복하면서도 속으로는 창자를 훑어내는 듯한 쓰라린 감정을 느꼈었다.

그 감정은 단순히 시기나 질투가 아니었다. 차라리 계집 샘 같은 야비한 감정이면야 해결짓기도 단순할 것 같았다.

몸을 들볶아가며 고민할 필요도 없을상 싶었다. 그러면서도 병식은 오늘날까지 계숙에게 대하여 조금도 수상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수영에게는 오장까지 뒤집어 보이는 터이언 만 계숙은 일체에 들어서는 사색도 보이지 않아 왔던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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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에서 호외를 내던 날 밤 병식은 새로 두시나 되어서 수영을 부르러 가느라고 자전거를 얻어 타고 다녀오는 길에 계숙에게 들렀다.

(별 일이나 없나. 잘 돌아와 자나?)

하고 순경이나 도는 것처럼 그집 근처에서 그림자만 보고 가려던 것이었다. 와보니 계숙의 방에 불은 꺼졌다.

(지금이 몇시라구 벌써 잠이 들었을 걸)하고 좁고 어두운 골으로 자전거를 끌고 내려오려니까.

『인제 다 왔어요. 추운 데 너무나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저 맞은짝에 들창이 난 집인가요?』

여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바루 서 너간통 밖에 아니되는 골목 어구에서 남녀가 작별을 하는 모양이다.

(계숙의 목소리가 틀림 없는데, 어디를 갔다가 인제야 들어 올까. 더군다나 남자는 누군고?)

하고 병식은 자전거의 핸들을 돌렸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 이라 피할 데가 없다. 뒤미처 여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똑 똑히 들리더니 한 달음에 뛰어들어 오는 구둣소리가, 얼어 붙은 땅바닥을 콩콩 울려오자마자 두 사람은 딱 마주쳤다.

『에고머니나!』

계숙은 누가 달려들기나 하는 듯이 반사적(反射的)으로 두 팔을 짝 벌려 앞을 막으며 자지러지도록 놀랐다. 눈앞에 시 꺼먼 사나이가 우뚝 가로막고 선 것과 마주 닥드리자 간이 콩알만해졌다.

『어딜 갔다 인제 와?』

병식도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는 것을 참고 입을 열었다.

『아이고 오빠서요? 난 깜짝 놀랐어요.』

그제야 계숙은 안심한 듯이 반색을 하였다.

『신문사 일루 수영군헌테 댕겨오는 길인데?』

하고, 병식이가 그대로 돌쳐서기도 어려워서 망설이는 눈 치를 채고 계숙은

『잠깐만 들어오셔서 몸이나 녹여 가서요. 오늘이 아마 처 음 이렇게 춘가봐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병식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지금이 몇시라구 가 자야지.』

하면서도 병식은 못이기는 체하고 끌려 들어갔다.

「지금이 몇시라구」한 말 속에는 「이때까지 무얼 하다가 들어오느냐」는 꾸지람 비슷한 의미가 들어 있었다.

병식이가 자전거를 문안으로 들여놓는 동안에 계숙은 방으 로 들어가 전등을 켜고 미리 펴놓고 나갔던 이부자리를 둘 둘 말아서 웃목으로 치우면서

『어서 들어오서요. 참 오빠 오신지두 퍽 오래지요?』

병식은 방을 둘러보며 들어왔다. 계숙은 경대 앞에서 잠깐 얼굴을 매만지고 돌아앉으며

『어쩌면 그렇게 아주 발을 끊구 지내서요? 하마터면 얼굴 두 잊어버릴 뻔했어요.』

하고 전에 없던 애교를 떤다. 밤늦게 남자와 다니다가 들 켜서 무안스럽기도 하고, 병식의 눈치가 이상스러우니까 마 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부리는 애교였다. 계숙은 방석을 내 어 놓으며 우두커니 서있는 병식에게

『앉으서요. 그런데 방바닥이 왜이렇게 찰까?』

하며 앉기를 권한다. 계숙이가 백화점에 다니게 된 뒤로 마주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뿐 아니라 병식은 특별히 급 한 일이 아니면 계숙의 집에 와서도 방에까지 들어가는 일 이 없었다.

『그래 재미가 어때?』

하고 마지못해서 병식도 입을 열었다. 그 말이 계숙에게는

「남자들 하고 어울려 다니며 노는 재미가 어떠냐」고 비꼬 는 말처럼 들렸다.

『재미가 무슨 재미야요. 벌써 넌덜머리가 나는 걸요. 아주 고단해 죽겠어요.』

하다가 병식이가 담배를 꺼내니까 휴지 한 장을 꺼내어 재 떨이 대신 펴놓으면서

『고단하긴 고사허구 귀찮은 일이 여간 많지가 안해요.』

하고는 얼어서 오리발같이 빨개진 두손을 호호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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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병식이가 말대답도 시원치 않게 하고 꾸어다 논 보 릿자루 모양으로 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태우는 것을 보고

『오빠 왜 또 속상하시는 일이 계셔요?』

하고는 물끄러미 병식의 얼굴을 치어본다.

『내란 사람이 언제는 맘편할 때가 있나.』

『그래두 오래간만에 저를 보셨는데 화가 잔뜩 나신 것 같 으미 말씀야요. 형님허구 또 다투구 나오셨구먼요?』

『다투다니, 사람이라 상대를 허지.』

병식은 담배를 휴지에다가 비벼 끈 뒤에

『난 세상자미란 하나도 모르구 지내니깐……일테면 고민 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인생이야.』

『또 비관을 하시는군요. 그렇게 아기자기하게끔 재미가 나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있는 줄 아서요?』

계숙의 말은 듣는 듯 마는 듯, 병식은 한숨을 기다랗게 내 쉬고는 이불을 말아놓은 데 가 비슷듬히 기대어 앉은 체 또 다시 말이 없다.

얼굴빛은 창백하고 양미간에는 무거운 고민의 그림자가 첩 첩이 덮였다. 그는 정기없는 눈으로 계숙의 얼굴만 멀거니 바라다볼 뿐이다.

계숙은 얼었던 뺨이 녹아서 발그름해진 얼굴을 쳐들고 전 등불과 병식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무슨 생각을 하더니

『오빠 잠깐만 기다려 주서요. 곧 들어올께요.』

하고는 일어서며 목도리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간다.

『어딜 가! 난 지금 곧 갈텐데……』

병식도 따라 일어섰다.

『아니야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어요.』

계숙은 병식의 어깨에 매어달린 듯 해서 붙잡아 앉히고 급 히 신짝을 끌면서 밖으로 나갔다. 오분이 지나고 십분이 지 나도 계숙은 돌아올 줄 몰랐다.

(밤참을 시키러 나간게로군)

하고 병식은 주인없는 방을 지켰다.

이불 위에 팔을 고이고 누웠으려니까 고민을 간지리듯 솔 솔 풍겨 오르는 것은 연연한 여자의 살냄새다. 병식은 팔을 뻗어 이불 위에 올려놓은 네모진 베개를 무심코 끌어 당겼 다.

머리때가 곱게 묻은 베개에서는 기름냄새와 코티분 냄새가 물큰하고 났다.

병식은 그 냄새에 아찔하게 취하는 것 같았다. 그는 푹 엎 드리며 새털방석 같이 보드라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르익은 과실처럼 성숙한 젊은 여자의 육체에서 베어나온 살의 향기는, 사막(沙漠)을 걸어오던 병식을 흥분시키기에 넉넉하였다.

병식은 그 베개를 두팔로 힘껏 끌어 안고 진저리를 치듯 몸을 떨었다. 애욕의 불길은 새빨간 혀끝을 날름거리며 (계 숙은 내 누이다) 하고 앙탈을 하는 부자연한 윤리적 관념(倫 理的觀念)을 거스리려고 달려든다. 다만 병식의 눈 앞에는 몸에 실 한오라기도 감지 않은 여자가 섰을 뿐…… 이성(理 性)과 본능(本能)은 병식의 머리속에서 서로 쥐어뜯으며 맹 렬한 싸움이 개시되었다. 한참이나 엎치락 뒤치락 하는 판 에

『병식이!』

하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 듯, 맞은쪽 벽에 화다닥 나타나는 것은 두눈을 딱 부릅뜬 수영의 환영(幻影)이다.

병식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뜨거운 것이나 만지던 것처럼 계숙의 베개를 웃목으로 집어던졌다.

수영의 환영은 병식의 앙가슴을 짓밟고 지나갔다. 짓밟힌 염통은 병이 발난동기 모양으로 쿵쿵쿵 소리를 내며 갈빗대 밑에서 뛰었다.

얼마 있자 지치고 나갔던 쪽문 소리가 삐걱하고 났다. 계 숙이가 중국아이 놈에게 나무 궤짝을 들려가지고 들어왔다.

오늘밤도 병식이가 매우 울적해 하는 눈치요. 술먹는 사람 이 날은 추운데 촐촐히 말라 앉은 것이 가그러더니 이 보이 기도 해서 손수 몸풀릴 것을 시켜온 것이다.

『이 밤중에 저건 뭐라구 시켜왔어?』

병식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건넸 다.

『늦어서 뭐, 잡수게 있어야죠.』

계숙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잡채와 탕수육을 책상 위에다 옮겨놓았다. 따끈하게 데워서 알콜냄새가 쿡 찌르는 배갈 병을 보자 병식은 병째 기울여 단숨에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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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책상머리에 도사리고 앉아서 어설프게 술을 권하였 다. 독한 술기운이 짜르르하고 창자 속으로 굽이굽이 배어 들어가서 가뜩이나 복잡한 감정에 시달린 병식의 머리를 자 극시켰다. 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독헌 술이라구. 요샌 술 양두 반이나 줄었 어.』

하고 연방 사양을 하다가는

『변변치 않지만 제 취직턱인 줄만 아시구 잡수서요. 그전 엔 다찌노미(선술)를 스무잔 씩이나 헌다구 자랑을 허시지 않으셨어요?』

하고 잔이 비기가 무섭게 술을 따르면서도 계숙은 배갈냄 새가 독해서 숨을 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취직턱? 그래 취직턱으로 알구 먹지.』

술기운이 점점 더 거나하게 돌자 병식은 마음이 풀린 듯이 웃음을 띠면서 사기잔을 높이들어 계숙이 앞으로 내어민다.

계숙은 제 고집대로 백화점에 취직한 것을 이제야 병식이가 양해나 해 주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과히 취허시면 난 싫어요.』

하고 예방선을 치면서도 다시 한잔을 찰찰 넘치게 따랐다.

병식은 친구와 간빠이(乾杯)나 하는 듯이 잔을 들었다가 단 숨에 쪽 소리를 내며 마시고 나서

『이렇게 맛있는 술은 생전 첨 마시는 걸.』

하고 안주를 집는다.

『오빠두 인젠 그런 오세지(비위 맞추는 말)를 다 헐 줄 아 시네.』

하면서 계숙은 술안주로 대작을 한다.

술잔은 비록 도토리만해도 한잔 거듭하는 동안에 병식은 눈자위가 게슴츠레해지고 혀끝이 부드럽게 돌지를 못할 정 도까지 이르렀다.

조금 지나니까 술이 술을 끌어당겨서 처음에 사양하던 것 은 잊어버린 듯이 술병을 끌어당겨서 제 손으로 따라 마셨 다.

「최계숙」이도 「의누이」란 생각도 차츰차츰 흐릿하게 지워져가고 병식의 눈앞에 남은 것은 커다란 따리아 송이처 럼 화판을 벌리고서 나비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젊은 여자 였다.

점점 현황해진 병식의 눈은 그 여자의 육체를 구속했던 옷 을 한꺼풀씩 벗기고……잠자코 있던 계숙은 조금 물러앉으 며

『오빠 그런데 수영씨는 요새 뭘 하서요?』

「오빠」소리에 병식의 머릿속에서 들끓던 잡념이 화닥닥 흩어졌다.

『왜? 수영이 일이 그렇게 궁금해?』

『그럼 궁금허지 않아요? 벌써 만나지가 언제라구요.』

『그렇게 궁금허면 한번 찾아가볼게지.』

비꼬듯 허며 병식은 담배를 붙여 문다.

『그이가 오빠헌테 있을 때 제가 좀 여러번 찾아갔어요?

그러니까 자기두 인사를 아는 사람 같으면 저도 한번 찾어 야 옳지않겠어요? 신분배달을 다닌단 소문은 저두 벌써 들 었지만 그렇다구 저와 아주 절교를 하는 까닭을 모르겠어 요. 아마 남자들은 그렇게 매정스러운가봐요.』

『그 사람이 매정헌게 아니라, 생활 환경이 거북허니까 자 연 데면데면해진게지.』

병식은 수영을 변호하듯 하였다. 계숙이가 얼굴이 좀 붉어 지며 반항하듯이 무슨 말을 끄집어내려는 것을 손들어 가로 막으며

『기다랗게 시비차리듯 헐게 아냐. 그 사람의 심리두 내가 잘 알지. 원체 수줍은 사람인데다가 인력것군 같은 복색을 허구 여자의 집에를 찾어오기는 자존심이 허락을 않는게지.

일테면 그건 죄없는 허영심이야. 그렇지만 나를 만날 때마 다 거진 한번두 빼놓지 않구 계숙이 일을 묻든걸. 속으론 꽤 궁금헌 모양이든데. 그러면서두 이리루 찾어오지 않는 건 확실히 다른 까닭이 있겠지.』

『무슨 까닭이야요.』

계숙은 바짝 대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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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은 물끄러미 여자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무슨 말이든지.』하고 말꼬리를 사렸다.

『어서 말씀하서요.』

계숙은 매우 조급한 눈치다.

『담날 조용히 얘기허지.』

『오늘밤만치 조용헌 기회가 있어요? 저두 그이의 생각을 짐작은 해요. 자기가 그렇게 반대를 했건만 듣지를 않구 우 리꼬(물건파는 여자) 노릇을 허는게 못마땅헌게죠. 그렇지만 그이가 저를 속박헐 권리는 없지 않어요? 전 언제든지 제맘 대로 행동헐 자유가 있으니까요.』

『그것은 오해지. 수영군이 그만 일에 계집애처럼 비쭉할 사람은 아니요.』

『그럼 배달부 노릇을 허는게 부끄러워서 못 온단 말씀이 죠. 수영씨두 십구세기적 인물이로군요.』

『그야 두구 봐야 알지. 수영이는 어쩌면 이십 일세기의 인물인지두 모를걸.』

『그럼 도대체 무슨 까닭이야요.』

계숙은 눈을 똑바로 뜨고 대답을 재촉한다.

병식은 벽에다가 뒤통수를 기대고 잠시 망설이다가 「예에 라 술김이다」하고 용기를 내어

『계숙이 들어봐. 남자는 누구든지 여자와 단순한 교재허 는 경우에두 그 여자를 저 혼자 차지하구 싶어허는 욕심이 있거든. 그런데 계숙이 헌데 벌써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이집엘 드나든다는 소문이 파다허니까. 수영이는 계숙이가 연애허는 데 방해를 놓지 않으려는 게지. 그 사람의 속생각 이야 알 수 없지만……』

계숙은 얼굴이 불에나 익은 것처럼 빨개지고 숨까지 가빠 져서 봉긋하게 내어민 젖가슴만 들먹거린다.

병식은 술기운을 빌어가지고 자신이 알고싶던 것을 수영이 를 끌어다가 빗대어 놓고 계숙의 마음을 떠보려는 것이다.

계숙은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아녜요. 오빠버텀 저를 모르시는 말씀이예요.』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며 야무지게 쏘아붙이듯 한다.

『제가 변명을 허는 건 우습지만, 제가 입때 속마음을 준 사람도 없고, 더군다나 사랑허는 사람은 생겨나지도 않었어 요. 그야 저두 인젠 이럴애가 아니니깐 외로운 때가 없지 않어요. 아주 터놓고 말씀허면 편지를 주고 받은 사람두 있 고 또 죽여 주십사 하고 따러 다니는 남자두 두명이나 있긴 있어요. 그렇다구 제가 연애를 허는겐가요? 연애두 야시장 의 물건처럼 이놈저놈헌테 헐값으로 파는 겐가요?』하고는

『오빠까지 저를 그렇게 오해허시는게 여간 섭섭지가 ……』

하다가는 말이 콧소리로 변하더니 꽉 막혀버렸다. 어느 틈 에 속눈썹에 눈물이 매어달렸다. 눈한방울이 불빛에 반짝하 더니 치마 위로 떨어졌다.

병식은 「공연히 그런 말을 끄집어냈구나」하고 금새 후회 를 하였다. 그러나 이왕 내친 걸음이요, 조금 전에 이집에 들어올 때부터 불쾌도, 궁금도 했던 터이라.

(네가 얼마나 변명을 잘하나 보자)하고

『그럼 아까두 혼자 들어오진 않었지? 내가 모르는줄 알었 겠지만 골목 밖에서 어느남자하고 헤어지는 것까지 내 눈으 로 봤는걸. 그때까지 새로 두시 반인데 새벽녘까지 남자와 단둘이 놀러 다니는 걸 보통 교제라구만 볼 사람이 있을 까?』

『……』

계숙의 가슴의 파동은 더 심해졌다. 그러나 검사만큼이나 추궁을 하는 병식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아랫 입술 만 자근자근 깨물고 앉았다.

『왜 대답을 못해.』

병식은 검은 자위가 아래로 처진 눈으로 계숙을 노려보며 조금 악마성(惡魔性)을 띄우고 채근한다.

계숙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저고리 옷고름만 손가락에다 돌돌 말았다 폈다 할 뿐. 책상머리의 조그만 목각종이 재깍 거리는 소리만 두 사람의 귀에 커다랗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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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병식의 시선을 피하다가

『그렇지 않아두 오빠가 또 오해를 허실상 싶어서 자세헌 말씀을 허려던 차였어요.』

하고는 무릎을 세우고 고쳐 앉으며

『아주 털어놓고 말씀헐테야요. 오늘두 파해 나오는 길에 어느 남자의 집으로 가서 가투(歌鬪)를 허구 놀다가 그이가 자동차로 바래다 줘서 집안까지 같이 타구왔어요.』

『그이란 누구야? 내가 알 필요는 없지만……』

병식은 궁금해 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으려면서도 묻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비꼬지 마셔요. 꼭 알고만 싶다시면 뭐든지 다보 여 드릴테야요. 그렇지만 남의 신분에 관계되는 일이니까 비밀을 지키실 것만은 약속해 주셔야 해요.』

하고 뒤를 다지고 나서 잠겼던 책상 서랍을 열고 감추어 두었던 종이 뭉텅이를 꺼내어 땅바닥에다 쫙 펼쳐 놓는다.

병식의 눈앞에 깔린 것은 이삼십장이나 됨직한 편지다. 분 홍봉투, 미색봉투, 양봉투에 조선봉투가 뒤섞이고 괴발괴발 끄적인 글씨, 축문 글씨처럼 꼭꼭 박아 쓴 글씨가 술이 취 한 병식의 눈에는 돋보기 안경이나 쓰고 보는 것처럼 아리 숭아리숭 하였다.

계숙은 그 편지를 두손으로 끌어모아 트럼프나 섞듯이 탁 쳐서 봉투 모서리를 가지런히 모아가지고 엄지손으로 쭉 훑 다가 그중에서 여자 글씨로 겉봉을 쓴 편지 한 장을 꺼내들 고

『자 이걸 좀 보셔요.』 하고는 병식의 무릎에다 던진다.

『그까짓건 봐 뭘해.』

하면서도 병식은 그 편지를 집어 반이나 꿰져 나온 속장을 뽑아 들었다.

이 편지는 절인을 해서 보낸 듯, 피봉에는 「최계숙양친 전」이라고만 씌어 있을 뿐인데 그 내용은 간단하였다.

『일전에 올린 글월은 보셨을 듯, 날마다 시시 각각으로 고대하여도 회답을 주지 않으시니 매우 궁금합니다.

오늘밤에 내 누이들과 가투나 하고 놀고져 청하오니 제백 사하시고 잠시 오시기를 바랍니다. 편지는 경자를 시켜보냅 니다.』

병식은 편지 끝에 초서로 내두른 이름을 보고 눈이 번쩍 띄여 당장에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을 아셔요?』

계숙은 금방 심각해진 병식의 표정을 살피며 묻는다.

『글쎄……』

병식은 마지못해 대답을 하였다.

『아마 아시기가 쉬울걸요. 서울선 유명헌 사람이니깐요.』

병식은 또다시

『글쎄……』

하고 한결같이 분명한 대답을 하지않고 입을 딱 다물어 버 렸다.

계숙은 무색해서 편지를 아무렇게나 접어서 서랍 속에다 들여뜨리고는 저 역시 말문이 막혔다.

창밖에서 뒤설레는 바람소리에 문풍지가 부웅부웅하고 울 뿐……

병식은 졸지에 전신이 으스스해지는 것 같았다. 뜻 밖에 일을 또 하나 발견한 그는, 수습할 수없도록 다시금 흥분이 되어서 더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자아 또 오지. 너무 늦어서……』

하고 방바닥을 짚고는 벌떡 일어섰다.

계숙이 역시 (공연스리 편지를 보였구나) 하고 후회를 하였 다. 그 편지를 보고는 무슨 까닭인지 잔뜩 찌푸리고 말도 아니하는 병식의 앞에 앉았기가 벌을 쓰는 것만큼이나 거북 살스러웠다. 그래서

『안녕히 가셔요. 퍽 고단허시겠어요.』

하고 마주 일어서며 붙잡지를 않았다.

병식이가 타고 왔던 자전거를 끌어내려는 것을 계숙은

『약주가 취하셨는데 이건 내일 찾어가시죠.』

하고 고집을 세우며 자전거를 빼앗듯 하였다.

『아무려나.』

하고 병식은 만사에 넋이 없는 듯이 문 밖으로 나섰다.

계숙은 병식이가 말도 없이 불유쾌하게 일어서는 것을 보 고 맑은 정신으로 자전거를 찾으러 오는 때에 그 곡절을 물 어보려고 다시 기회를 지으려는 수단이었다.

[편집]

…수영은 집에 돌아와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머리가 쪼개내는 듯 아프고, 팔다리가 쑤시고 보다더 신열 이 올라서 몸둘곳을 몰랐다. 약은커녕 물 한모금 떠다 줄 사람이 없는데 앓는 증세는 감기나 몸살로는 심상치 않다.

이렇게 몹시 앓기는 열 두 살 때엔가 시골서 장감을 앓은 뒤에는 처음이다. 객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오년동안 을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감옥에서 겨울을 나고 나와서도 상록수(常綠樹)처럼 꿋꿋하던 사람이 졸지에 병이 덜컥 나니 까 황소처럼 끙끙거리고 앓는다.

진종일 앓아 누웠어도 골목 안으로 지나 다니는 장사치들 의 외치는 소리만 꿈속처럼 들렸을 뿐이다. 안집으로 사람 이 드나드느라고 대문 중문소리가 여러번이나 삐걱거리고 나기는 했어도, 덧문?지 첩첩이 닫은 행랑방을 들여다 보아 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정신이 들락날락하고 신열이 올랐다 내렸다하는 동안에 어 느덧 저녁 때가 되었다. 방바닥은 뼈가 저리도록 차 올라서 더 누워있을 수가 없다. 수영은

(신문을 돌리려 나갈 시간이 됐는데……)

하고 억지로 몸을 추슬려 문설주를 붙잡고 일어났다가 머 리가 핑 내둘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지 못한다는 통지나 해야지.』

하는 책임감이 수영을 편안히 눕혀 두지도 않았다. 마음은 달건만 심부름을 시킬 사람은 고사하고 이리친 강아지 한 마리도 구경할 수가 없다.

수영은 두 무릎 위로 머리를 떨어뜨린채 한참동안이나 눈 을 감고 앉았다가

『그래두 통지는 해야지.』

하고 이빨을 악물고 일어나 나갔다. 큰 길가의 반찬가게서 간신히 신문사로 전화를 걸고 돌아왔다.

수영은 동저고리 바람으로 찬 바람을 쏘이고 돌아와서 오 한이 더욱 심하였다. 몸이 괴로운 동시에 마음도 그만큼이 나 괴로웠다. 무인광야에 지 혼자 펄쩍 주저앉은 것 같기도 하고 깊은 바닷속에 푹 빠져서 허위적거리는 것 같기도 하 다.

수영은 방안에 짙어오는 어둠과 함께 신변을 엄습하는 고 독에 몸서리를 쳤다. 고독의 감정은 수영에게 있어서 일종 의 공포심(恐怖心)이었다. 메마른 영혼은 그 고독감에 떨었 다.

수영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저녁 바람이 목덜미를 할퀴어내 는 것 같아서

『예라, 죽든 난 모르겠다!』

하고 부르짖고는 다시 자리위에 몸을 던졌다. 조금 있자 깜박하고 정신을 잃었다. 두어시간이나 지났나. 길거리에 전 등불이 들이온지도 한참이나 되었다. 수영은 가위에 눌린 듯이 몸을 뒤틀며 헛소리를 한다.

『계숙씨!』

『계숙씨!』

신음하는 소리와 함께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다.

층암절벽의 아슬아슬한 비탈 모퉁이로 계숙이가 홑이불자 락 같은 것으로 알몸을 두르고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하고 맨 발로 달려간다. 발은 돌뿌리에 채이고 가시에 찔려 피가 줄 줄 흐른다.

계숙의 뒤로는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의 분장처럼, 뿔이 둘이나 뻗히고 눈동자가 화등잔만한 사나이가 껑충 껑충 춤 을 추듯하며 쫓아간다. 그 사나이는 언뜻 보기에 병식이와 모습이 비슷하기도 하나. 그 사나이의 매발 같은 손톱은 계 숙의 머리와 어깨에 닿을 듯 수영은 갈팡질팡 그 뒤를 따라 가며

『이놈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발은 땅바닥에 달라붙은 것처 럼 옮겨 놀 수가 없고 목소리는 속에서 무엇이 자꾸만 끌어 당기는 것 같다.

계숙은 천야만야한 절벽 위까지 쫓겨가서 뒤를 돌려다 보 며 무엇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마지막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수영은 죽을 힘을 다해서 목을 비틀리우는 듯 또다시 소리를 지르려고 몸을 뒤틀었다.

그동안에 방안에는 남포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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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누구에겐지 어깨를 흔들리워 응응 소리를 하며 몽 유병자(夢遊病者)처럼 눈을 멀거니 떴다.

『여보게, 여보게, 정신을 차리게.』

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수영의 어깨를 흔드는 사람은 병 식이었다.

병식은 취중에도 계숙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밝을 무렵에 집에 돌아가서도 눈이 말똥말똥 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 다. 그래서 아침 열시나 되어 출근하였다.

계숙에게 유혹의 손을 뻗치고 있는 남자가 수영이와 관계 가 깊은 인물이라, 이 일에 한해서만 둘이서 신중히 의논한 뒤에 대적할 방침을 세우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신문사 에서 수영이가 돌아오기를 눈이 까맣게 기다렸다. 그러나 수영은 돌아올 시간이 지나도 그림자도 비치지를 않았다.

(그 진실헌 사람이 못들어오면 사고가 있다는 통지라도 있 을텐데)

하고 궁금히 여기는 판에 몸이 불편하다고 전화가 왔다는 기별을 판매소 사람에게 간접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식은 건정건정 일을 마치고 수영을 찾아왔다가 마침 수영이가 계숙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하는 판에 들어왔던 것이다.

수영은 한참만에야 정신이 도는 듯이, 꿈속인지 생신인지 기연가 미연가해서 눈을 멀거니 뜨고 쳐다보더니

『언제 왔나?』한다.

병식은 의사처럼 수영의 이마를 짚어보고 손을 잡아 맥도 보면서

『열이 대단헌걸. 그 추운데 밤을 새구 댕겨서……이렇게 혼자 앓다가는 죽어두 모르겠네 그려.』

하고 손수건을 꺼내어 수영의 이마에 주르르 흘린 식은 땀 을 씻어 준다.

『이렇게 아프긴 처음인걸. 그런데 아마 지금 잠꼬대를 했 지?』

꿈속에서 계숙을 부르던 것이 정신없는 중에도 혹시 병식 의 귀에 들리지나 않았나 하고 물은 것이다.

『가위를 눌린 모양이데. 그건 고사하구 이러다간 앓어두 못죽구 얼어 죽겠네.』하고 요밑에 손을 넣어 보고는

『잠깐만 기다리게.』

하고 병식은 밖으로 나갔다. 마침 야근비 탄 것이 몇 십전 있어서 장작을 사가지고 들어와서 통으로 지폈다. 수영은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탁탁 튀는 소리를 듣고 미안한 생각은 하면서도 입을 벌리기가 귀찮았다.

병식은 손을 털고 방으로 들어왔다.

『뭘 좀 먹어야지.』

『싫어, 냉수나 좀 얻어다 주게.』

『냉수는 좋지 않을걸.』

하면서도 조갈이 심한 눌치를 보고 다시 나갔다. 안집 부 엌에서 설거지를 하고있는 계집애를 손으로 불러내어 냉수 를 청하였다. 수영은 찬 물을 한 사발이나 벌떡벌떡 들이켰 다.

『인제 살 것 같으이.』

『가딱하면 몽달귀신이 되겠네 그려. 어서 장가를 들든지 해야지.』

하고 보기에 딱해서 한 말이언만 수영의 귀에는 그 말이 유심하게 들렸다. 그러나 수영은 지난밤의 일을 잊어버린 듯이 오직 우정과 감사한 마음으로 병식을 대하였다. 병식 이가 계숙이와 밤을 세운 일체에 들어서는 이야기를 끄집어 낼 경황도 없거니와, 정신이 몽롱한 중에도 다시 한번 병식 의 인격과 평소의 우정을 믿었다.

『내가 오해를 헌 것이나 아닐까?』

하고 다시금 후회도 하였다. 실상 병식의 얼굴에는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이 수영에게 대한 우정으로 가득찬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늘밤엔 야근이 없나?』

수영은 병식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또 호외가 있을 듯허니까 들어가긴 해야겠네만 자네 혼 자 내버려두고 갈 수가 있나.』

『내 걱정 말어.』

『그래두 뭘 좀 먹는거나 봐야지.』

병식은 또다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 십분 뒤에 뜨끈 뜨끈한 우동에다 계란을 푼 것을 시켜가지고 들어왔다.

『그건 뭘.』

하는 수영을 억지로 일으키며

『입맛이 소태 같은걸.』

하면서도 다 마시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럼 파해 나오는 길에 또 들름세.』

하고 나가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다시 돌쳐서더니

『혹시 내 대리루 간호부 하나를 보낼는지두 모르네.』

하고는 대문을 지치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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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도 몸이 괴로웠다. 밤을 새우고 돌아다녀서 코가 막히 고 오슬오슬 추운 것이 눕기만 하면 저도 한바탕 앓을 것 같았다. 광화문통 넓은 길을 웅숭그리고 내려가면서

『계숙이헌테나 기별을 헐까.』

하고 몇번이나 망서렸다. 수영의 앓는 품은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을만큼 침중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병구 완을 해줄 친구는 하나도 없다. 그렇기로서니 피차에 오랫 동안 만나지를 않은 모양인데 계숙을 임시 간호부로 파송을 시키기만 거북한 노릇이다. 또는 당자의 의향이 어떤지도 모르고 계숙이더러 불쑥 가보아 주라고 명령을 할 수도 없 는 경우다.

그러나 비록 잠시라도 수영을 진심으로 간호하고 위로해 줄만한 사람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계숙이 하나 밖에는 없을 상 싶었다.

병식은 신문사로 들어가서 난로에 몸을 녹히면서 곰곰 생 각해보았다. 다심하고 자상한 병식은 수영이가 그렇게 혼자 서 꿍꿍 앓다가 병이 더쳐서 죽으면 어떡허나 하고 걱정스 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계숙의 친오라비 용준이가 만리 타향에서 폣병이 들어 갖 은 고생을 다하다가 일인의 집 이층 삼조 방에서 피를 토하 며 마지막 숨을 몰다가

『아아 괴롭다.』

하고 부르짖고는 덜컥 쓰러지던 전경이 눈앞에 선하였다.

용준이가 「아아 괴롭다!」하지 않고 「아아 외롭다!」라고 외친 최후의 세리후(劇白)가 가슴을 찌르던 것이 바로 엊그 제 같아서

(수영이가 설마 그렇게 죽기야 하랴)

하면서도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병식은 벌떡 일어나서 조용한 숙직실로 내려갔다. 전화의 수화기를 떼어들고 利백화점의 번호를 불렀다.

한참만에야 계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네, 그렇게 대단해요? 거 안됐구면요.』

계숙의 대답은 뜻밖에 냉정하였다. 긴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바쁜 모양도 같았다.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아무도 간호를 해 줄 사람이 없다」는 말도 「좀 가보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말할 사이가 없었다.

병식은 끊어진 전화의 수화기를 귀에서 떼기도 전에

『공연히 전화를 걸었구나.』하였다.

한편으로 계숙은 전화를 받고 나서 진열장 앞에서 한참이 나 서성거렸다. 몇 달 동안이나 발을 끊고 서름서름하게 지 내온 터에 문병을 가기는 발이 내키지를 않았다. 배달부 복 색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저를 만나지 않겠다는 사람을 연통 도 아니하고 찾아가면 반가와 할는지도 의문이었다.

수영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을 넣어 준 것만 하더라 도 계숙이 자신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숙하고 있는 집 의 주인마누라가 「돈은 누구더러 달랄려구 신문은 자꾸 갖 다 넣는거야. 몰래 집어넣구 뺑소리를 치니 붙잡을 수가 있 어야지」하고 배달부를 벼르는 소리를 몇번 듣기는 하였다.

혹시 일찍 들어가서도 몽상을 하느라고 잠이 아니 올 때면

「요샌 소설이나 재미있는 것이 나나」하고 주인마누라에게 신문을 청해서 보기도 한두번 하였건만 그 신문을 수영이가 직접 넣어 주는 줄은 알 까닭이 없었다.

계숙은 가볼까 말까 하고 그 생각만 골똘히 하느라고 물건 을 사러온 사람이 무어라는지 몰라서 딴전까지 하였다. 길 거리의 황홀한 전등불만 바라다보고 섰다가

(암만해도 가 봐야겠어)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병식이가 일부러 전화까지 걸어준 터에 몰랐으면 모르거니와 알고서도 잠깐 들여다보지 않는 것은 인사가 아닐상 싶었다. 그보다도

(수영씨는 내 동지다!)

하고 지난날의 의식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을 위해서는 생사를 같이 하자고 맹세했던 남성 동지다. 만일 내가 몹시 앓는다면 그이는 벌써 한달음에 뛰 어 왔을 것이다.』

하였다. 계숙은 더 주저할 수도 없었다. 「집에 급한 환자 가 생겼다」고 조퇴를 하고 식료품부에서 모과수 한통을 사 들고는 총총히 백화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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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길거리로 나오기는 했어도 발을 어느편으로 띄어 놓아야 할지 몰랐다. 수영이가 병식의 집에서 떠나간 줄은 알았으나 한번도 찾지를 않아서

(내가 덮어 놓고 어디로 갈 작정으로 나섰을까?)

하고 뉘우치기도 하였다.

계숙은 길거리 포목전으로 들어가서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 다. 몇번이나 오하나시쮸(얘기중)라고 전화가 통하지를 않다 가 한참만에야 병식이가 나왔다.

『저야요 계숙이야요. 아까는 바뻐서 헐 말씀도 못허구 전 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수영씨가 새로 옮겨간 번짓수를 좀 알으켜 주서요.』

『왜 가볼테야?』

병식은 내가 못가니 네가 좀가보아 주라는 듯이 묻는다.

『글쎄요. 혹시 틈이 있으면 가볼까하구 말씀야요.』

계숙은 일부러 수영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 다. 동명과 번짓수까지 물어서 알고 나서도 어쩐지 혼자 수 영을 찾아간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가 않았다.

계숙은 효자동 전차를 탔다. 벌써 거진 아홉시나 되어서 전차 속은 텅 빌만큼 승객이 없다.

계숙은 거울 앞으로 앉아 환한 전등불 빛에 비치는 제모양 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를 지져서 몇가닥을 이마에 꼬부려 붙이고 눈썹을 그리고 한갑에 이원이나 하는 코티분을 바른 제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비단안을 받친 유록빛 외투에, 녹 비 장갑에, 굽높은 구두에, 아주 모던껄로 변한 저의 차림차 림을 둘러보고 굽어 보았다.

계숙은 분을 바르고 다니는 동무를 보고 「저앤 기생으로 팔려 가려나」하고 욕을 하던 학생시대를 생각해 보았다.

검정 목세루 치마저고리 한벌을 단거리로 입고, 각 학교로 가두(街頭)로 뛰어다니던 그 사건 당시의 저를 돌려다 보았 다. 그 때의 순진하고 검소하던 저와는 아주 딴판으로 변해 서 백화점 상품과 같은 「최계숙」이를 거울 속으로 노리고 들여다볼 때, 이불 속에서 졸지에 찬바람을 쏘인 것처럼 숨 었던 양심이 떨렸다. 더구나 일금 십오원에 팔린 몸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에는 마음이 아팠다.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도회지의 탈(假面)을 뒤집어 쓴 저 자신에 향해서

『아아 옛날의 계숙이가 아니로구나!』

하고 한숨을 지었다. 더구나 말쑥하게 몸치장을 한 것이 제가 애를 써서 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간접으로나마 어느 남자의 도움을 받은 것을 새삼스러이 깨달을 때, 계숙 은 전차에서 되짚어 내려오고 싶었다.

(이러고 수영씨헌텔 가?)

(내 꼴을 보면 눈살을 찌푸릴걸)

하다가

『그럼 어떡헌담. 남들허구 얼려 싸이려니까 헐 수 없지.』

하고 변명도 해본다. 그리나 그 별명이란 구차스럽게 꾸어 다 붙이는 수작 같아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계숙은 전차에서 내려서 어둡고 호젓한 잣골 막바지로 더 듬어 올라갔다. 인왕산 꼭대기에서 쏟아진 듯하는 찬바람이 코끝과 귀뿌리를 떼어가는 것처럼 매웠다.

외투 깃을 올려 머리를 파묻듯 하고는 병식이가 일러준대 로 수영의 집을 찾았다. 맞은편 반찬가게의 외등에 비취어 번지까지 찾기는 하고도 선뜻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숙은 한 이삼분 동안이나 납작한 초가집 앞에서 구둣소 리도 내지 않고 서성거렸다. 남포불마저 꺼졌는지 들창의 창살만 충충해 보일 뿐. 근처는 무거우리만큼 괴괴하다. 한 참만에야 계숙은

(여기까지 와서 주저할 게 뭐야)

하고는 지쳐논 대문짝을 조심스러이 떼밀었다.

계숙은 중문간으로 들어서서도 수영이가 설마 행랑방에야 들었으랴 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나 안집의 중문이 닫힌 것 을 보고는

『수영씨!』

하고 행랑방 문을 향해서 나직이 불렀다. 방안에 불은 켜 진 모양인데 대답이 없다.

『수영씨 계시오?』

좀더 큰 목소리로 불러도 여전히 대답이 없다.

계숙은 지게문을 살그머니 열고는 구두를 뒤로 차버리듯 벗어던지고 들어섰다.

방바닥은 뜨겁고 외풍은 찬데, 희미한 남포불만 꿈벅거린 다. 수영은 이불로 아랫도리만 걸치고 누워서 혼곤히 잠이 든 듯.

계숙은 외투와 장갑을 벗으며 방안을 둘러 보았다.

방안의 세간이라고는 길바닥에 내던져도 집어가지 않을 고 리짝 하나와 고물이 다 된 책상과 그리고는 냉수대접 하나 밖에 없다. 빈대 죽인 흔적이 아직도 또렷한 벽에는 넝마 같은 만또와 단추만 바꾸어 달은 학생복이 걸렸다. 그러고 는 웃목에는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배달부의 하삐가 너부죽 이 엎드렸을 뿐이다.

그 만또와 교복은 두 사람이 청량리서 처음 만났을 때에 수영이가 입고 나왔던 것이 분명하다. 계숙은 그 옷이 반가 왔다. 그때가 바로 며칠 전인 듯 싶었다. 수영은 첫 번 만났 을 때 제가 선동이나 하듯 연설 구조(口調)로 열변을 토하던 생각과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황량한 전찻길을 걸어다니 던 광경이 눈에 선하였다. 그와 동시에 불과 몇 해도 못되 는 동안에 수영과 저 자신이 변한 것을 내려다 볼 때, 그 만또와 그 학생복을 끌어안고 느껴울고 싶은 충동에 콧마루 가 시큰하였다.

계숙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홀아비 살림이기로 어쩌면 이렇게 신산할까?)

하고 다시 한번 방안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끄물거리는 남포불 아래에서 숨결을 거칠게 쉬고 입을 조 금 연채 모로 누워 있는 수영의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 보 았다.

괴로움을 못 이겨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으흥 으흥」 신 음하는 소리를 듣자 계숙은 눈두덩이 뜨끈해지는 것을 깨달 았다.

외롭고 쓸쓸하게 앓아 누운 수영이가 무한히 가엾었다. 저 다지 튼튼하게 생긴 한사람의 남자가 이 넓은 서울바닥에 몸담을 곳이 없고 의지할 사람조차 없는 것을 생각하는 수 영의 환경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젊은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하며 저주의 감정은 어떠한 분노로 변하였다. 계숙은 남자 처럼 주먹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수영의 머리맡에 말 없이 앉은 계숙은 깨울까 말까 하고 앓는 사람의 얼굴만 들여다 보았다. 넋을 잃은 사람같이 머 리맡을 지키고 있자니 수영의 외로움과 괴로움이 제게로 옮 겨두는 것 같았다. 생각하니 저 역시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는 가엾은 존재(存在)가 아닌가.

천리 타향에서 굴러 다니며 마음에 없는 밥 벌이를 한다고 종로바닥 장사치의 노예가 된 저의 신세를 돌려다 볼 때, 다른 사람을 동정할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지난날의 의기와 정의를 위해서는 산 제물로서 한 몸을 바치려던 과거를 회고할수록 새삼스러운 설움이 복받 쳐 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다. 울어도 몸부림을 쳐도 시원치않을 것 같다.

수영의 신음소리는 점점 높아가고 겨울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수영의 얼굴은 열에 떠서 벌겋게 익은 듯 숨소리는 더욱 가빠져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계숙은 홑이불도 시치지 않는 이불을 끌어올려 들먹거리는 수영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무르팍으로 기어서 머리맡으로 돌아가서는, 제 수건을 꺼내어 송송 내솟은 수영의 이마의 구슬땀을 씻어 주었다. 그리고는

(내 손이 차지나 않을까?)

하고 이마를 조심스러이 짚어 보다가

『끄응.』

하고 수영이가 몸을 뒤트는 바람에, 기급을 해서 손을 떼 었다. 만지지 못할 것에 손이나 댄 듯 계숙의 가슴은 달랑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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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서요?』

계숙의 목소리는 수영의 귀에 들릴락 말락 하였다. 수영은 찬손이 이마에 닿아서 선뜩했던지 놀라서 실눈을 떴다. 눈 동자는 차차 커졌다. 계숙이가 눈 앞에 와서 앉은 것은 천 만 뜻 밖이라, 어리둥절하는 모양이더니 차차 제 정신이 돌 자

『아 이게 누구세요?』

하고 고개를 들며 몸을 일으키려고 든다.

『누서요? 그대루 누워계서요. 혼자 이렇게 앓으시니 얼마 나 괴로우시겠어요?』

그 말은 정을 담뿍 담아가지고 계숙의 입을 새어나왔다.

『여긴 어떻게 아셨나요?』

수영은 혼잣말 하듯 한다.

『병식오빠가 전화를 걸어서 편치 않으신 줄 알았어요.』

하고는 유난히 까만 눈동자가 눈물에 불려(潤)가지고 남자 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그러나 수영이가 저 때문에 그 추 운 새벽에 헤매어 다니고 극도로 흥분이 되어서 몸져 눕기 까지 된줄이야 짐작할 리가 만무하다.

『약이나 잡수셨어요?』

계숙의 묻는 말에 수영은 고개만 흔들어 보일뿐.

병식이가 왔을 때에 꾸던 지겹고 조마조마하던 꿈을 머릿 속에서 어렴풋이 되풀이하면서 (꿈두 영절스럽다) 하는 듯이 계숙의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 본다. 분한 것도 아니요, 그 렇다고 질투라고 꼭 잡아 낼 수 없는 야릇한 감정에 지배를 받으면서도 어쨌든 계숙이가 반가왔다. 간밤에 지낸 일은 옛날 이야기 같고, 당장에 계숙이가 제 머리맡에 와서 앉은 것만 기적같이 신통 하였다. 죽었던 사람이나 만난 듯이 반 가왔다. 설사 병식이와 불순한 관계까지 있었다손 치더라도 문병을 와준것만이 고마웠다. 모든 것을 용서해 주고 싶었 다. 그만큼이나 수영은 사람이 아쉽고 그리웠다. 사랑보다도 동정과 친절에 주렸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십분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서로 격조했던 사정은 피차에 말하지 않으려면서도 마음과 마음 이 무언중에 서로 비추어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 다지도 몹시 오해했던 일까지도 봄눈 녹듯 서로 풀어줄 아 량(雅量)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부지중에 쌓인 감정의 성벽은 분명 한번 온 것 쯤으로 무너질 수 없 었다.

『입맛은 없으시겠지만 뭘좀 잡수셔야죠.』

계숙이가 먼저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시원헌 것 밖엔……그 냉수 다 먹었지요?』

하고 수영은 고개를 돌리려다 빈 사발을 턱으로 가리킨다.

『그럼 이걸 잡숴 보실까요?』

계숙은 모과수 통을 닦아다 놓고, 수영의 주머니 칼로 꼭 지를 떼느라고 한참이나 에를 썼다. 모과수 통에 구멍이 뚫 리자 노르스름한 국물이 방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수영은 겸 사도 할 사이가 없었다. 폭양이 내려쪼이는 사막을 걸어가 던 사람처럼 염치불구 하고 모과수 통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시원한 국물을 단숨에 들이킨다. 시골서 물을 긷는 처녀가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을 퍼줄 때는 버들잎을 죽 훑어서 바 가지에 끼얹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계숙은

『좀 남겼다 잡수시죠.』

하였다. 수영은 건더기까지 꺼내어 어적어적 씹고는

『어 시원하다!』

하고 다시 드러누우며 입맛을 다신다. 갈증을 면하니까 속 이 후련하고 정신도 드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별안간 찬 것 을 마셔서 오한이 나는 듯 윗도리를 떨어 이불을 끌어덮는 다.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계숙은

『왜 또 머리가 아푸서요?』하고 다가앉는다.

『아니요. 다리 팔이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어요.』

하고 수영은 오그렸던 다리를 이불속으로 쭉 뻗는다.

계숙은 수영의 발치로 돌아갔다. 너무나 고통이 심해하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듯 머뭇머뭇하더니 용기를 내어

『좀 주물러 드릴까요?』

하고는 수영의 다리를 꽉꽉 주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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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미안 허구먼요.』

하면서도 그만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쥐가 나는 것 같이 켕기고 뻑적지근하던 다리가 곪겨서 터 지려는 종기처럼 근질근질 하고 뼈마디가 자릿자릿하더니 나중에는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아픈 기운이 가시는 듯하 다. 비록 간접이나마 여자의 촉감이란 부드랍고 따뜻하였다.

계숙이도 간지럼을 타는 듯한 감촉이 손끝으로부터 전선으 로 감전이나 되는 것처럼 옮아드는 것을 느꼈다. 부지중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수영은 이때까지 물결 거칠은 바다에 빠져 허위적거리다가 아늑한 항구로 떠밀려 들어오기나 한 것처럼 마음이 놓였 다. 바윗돌에다가 등을 기댄 듯 신변이 든든한 것도 같았다.

이렇게 앓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계숙이만 곁에 있으면 눈이 감겨질듯한 만족과 행복을 느꼈다. 아까 혼자 앓을 때 보다는 육체의 고통이 정신상 위안으로 말미암아 한결 덜리 는 듯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을 기운도 났다.

『고만 두시지요. 내 다리는 시원하지만 계숙씨 팔이 아프 실걸요.』

『괜찮아요. 좀 더 주물러 드릴테야요. 소중허신 다리니 깐……』

『소중하긴 왜 소중해요?』

『수영씨나 나나 다리로 벌지 않어요? 수영씨는 저녁 때면 한바탕 마라톤을 허시죠? 그리고 난 진종일 잔걸음을 치니 깐 다리품을 팔기는 매한가지가 아니야요?』

수영은 처음으로 빙긋이 웃었다. 그 웃음은 무엇에 대한 비웃음과, 기막힌 웃음을 반죽한 웃음이었다.

『둘이 다 다리품 파는걸 창피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그 뒤 로는 피차에 끊구 지내지 않았어요?』하고 나서는

『그렇지요 네?』

하고 손에 힘을 주어 주무르던 다리를 아프지 않을만큼 꼭 누르며 동감(同感)이 아니냐는 듯이 대답을 재촉한다.

『아니요. 신문배달부 노릇을 허는게 창피해서 그런게 아 니예요.』

그 대답은 매우 무거웠다.

『그럼 뭣 때문이야요?』

계숙은 조금 더 바싹 다가앉는다. 수영은 여전히 입을 딱 다물고 가쁜 숨을 죽이고 있다가 머리를 들어 팔벼개를 하 고는 더듬더듬 입을 연다.

『앞장을 선 병정은 싸움을 해야만 헙니다. 그런데 우리는 싸움을 허다 말구 허기가 져서 밥을 찾지 않았어요? 몇자밖 에 안되는 창자를 채우기 위해서…… 그것이 구차허구 창피 스러워요. 이 현실에서 밥을 얻어먹으려면 우리가 싸우려는 상대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허니까요.』

『참 그래요. 남의걸 얻어먹을 수도 없고, 굶어 죽을 수두 없는 세상이야요. 나만해도 하루에 열다섯 시간이나 자본주 의 종 노릇 헌 값이 겨우 몇십전이니 참 정말 기가 막혀 요.』

계숙이는 얼굴이 발개지도록 상기가 되었다.

수영은 윗목에 제가 벗어던진 배달부 복색 곁에 벗어 논, 하얀 털을 댄 계숙의 외투를 번갈아 유심히 바라다본다. 한 참 있다가 입모습에 씁쓸한 웃음을 띠우고는

『그런데 말씀이예요. 다 같이 다리품을 파는 처지에 있으 면서두 저런 훌륭헌 외투를 입는 귀부인두 있구, 저 헌털방 이를 두르구 댕기는 사람도 있으니 세상이 공평치 않을 밖 에요.』

하고 슬그머니 계숙의 비위를 긁어 주었다. 그러나 일부러 비웃는 수작이 아니라 「저런 허영 껍질을 벗어 버리기 전 에는 앞잡이 노릇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호의로 암시 한 말이었다.

속으로는 육체의 고통과 싸워가면서 힘을 들여 한 말이언 만 계숙은 무안에 취해서 귀밑까지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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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이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변명할 궁리를 하는데 대문 소리가 났다.

방문을 펄쩍 열고 다짜고짜 들어서는 것은 병식이다.

계숙은 무슨 부끄러운 짓이나 하다가 들킨 것처럼 재빠르 게 수영의 발치에서 물러 앉았다.

『어 계숙이가 왔군. 일등 간호부가 와 있는걸 모르고 난 괜히 왔지.』 하고 데퉁그러진 소리를 하고 병식은

『좀 어떤가?』

하며 두 사람의 사이에 가 펄썩 주저앉는다.

『응 좀 정신이 났어.』

수영도 계숙에게 다리를 주물리우는 현장을 병식에게 발견 된 것이 어쩐지 거북해서 다리를 오그리고 몸을 반쯤 일으 켰다. 병식은 수영의 이마를 짚어보며

『열은 많이 내렸군. 이 약을 먹구 내일은 일어나게.』

하고는 외투주머니에서 해열산 봉지를 꺼내 놓는다.

병식은 술이 얼근히 취하였다. 계숙의 코에는 그 술냄새가 맨 먼저 맡혔다.

『오빠 또 술 잡수셨구먼요?』

계숙은 덤덤하니 앉았기가 싱거워서 말을 붙였다.

『왜? 언제 계숙이가 나 술받어 줬나?』

병식은 눈꼬리가 처져가지고 계숙을 흘겨본다. 그 순간에 계숙은 수영의 편으로 한눈을 찌끗하고 머리를 잘래잘래 흔 들어 보인다. 어린애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어른에게 이르 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지난밤에 제게서 술을 먹었다는 것 과, 어느 남자의 편지를 본 것을 수영에게는 말하지 말아달 라는 암호였다.

병식은 곁눈으로 계숙의 표정을 알고도 모른 체하고 고개 를 돌렸다. 콧등을 쭝긋쭝긋하고 방안의 공기를 맡아 보더 니

『총각 냄새에 처녀 냄새가 골고루 나는군. 오늘밤엔 사람 이 사는 방 같은걸.』

하고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계숙은 두 사람의 틈에 끼어 앉은 것이 면구스럽기도 해서

『약을 잡수서야죠.』

하고는 안집으로 물을 뜨러 들어갔다.

『오늘은 호외가 없었나?』

『응 좀 더 기다리라는걸 궁금해서 먼저 나왔네. 나두 어 째 병이 날 듯 날 듯 한걸. 계숙이 같은 간호부나 곁에 있 으면 적어도 석달 열흘은 앓겠네만……』

하고 또 실없어진다.

평상시에는 노상 우울하게 지내는 사람이, 술기운만들면 유모어가 나오고 재치 있는 말이 주워담을 만큼 쏟아진다.

집에서는 말 한마디하기도 귀찮아 하면서 술김에 말문이 한 번 터지기만 하면 예사로 밤을 세우며 떠들어 댄다. 기발한 풍자(諷刺)는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이 날카롭고 정치 나 시사문제를 붙잡아 가지고는 기탄없는 비판도 한다. 그 럴적마다

『서군은 재사야. 공장에서 썩기는 참 아까운 인물이지.』

하고 수영은 속으로 탄복할 때도 많았다.

계숙이가 약 먹을 물을 얻어 가지고 나오니까

『지금 같아선 과히 아프지도 말구 그저 일어나지 못헐만 큼 앓어 눴으면 똑 좋겠지?』

병식은 다시 한번 두 사람을 놀리고는 껄껄껄하고 호걸웃 음을 웃는다. 오늘 저녁에는 한두잔만 마신 것이 아닌 모양 이다.

『차차 나오는군요.』

계숙은 해열산 봉지를 뜯으며 병식의 불쾌한 얼굴을 할끔 치어다 본다.

『나오긴 뭐가 나와? 초란이가 나와?』

『연설말씀 말예요.』

『그럼 터진 입가지구 떠들지도 말란말야.』

언제부터는 시빗조로 나간다.

『아니야요. 오빠얘기는 재미는 있지만요……』

『재미있지만 어째? 듣기는 싫단 말이지?』

『아이 오빠는 왜 자꾸만 이상하게 생각을 허서요.』

하고는

『인젠 오빠가 교대를 허셨으니까 난 갈데야요. 낼 봐서 또 올게 조섭허서요.』

하고는 계숙은 외투와 장갑을 들고 일어섰다. 병식이와 말 이 옥신각신 하다가는 무슨 소리가 터져 나올는지 겁이 났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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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병식은 집에 들어가기 싫은 김에 아주 수영에게서 묵으면서 간호를 해 주었다. 계숙이 도 아침저녁으로 번을 들며 약시중도 하고 앓는 사람의 음 식 바라지까지 하였다.

수영은 아직도 혀에 백태가 하얗게 낀채 가시지를 않고 머 리가 무겁건만

『너무 여러날 빠져서……』

하고 배달시간에 가려는 것을

『이 사람아 어느 새 일이 다 뭔가? 게다가 또한번 촉상만 되면 이번엔 큰일나네. 의자를 타구 가만히 앉지두 못허는 주저에……』

하고 병식이가 굳이 말린다. 사나흘 동안 붙잡아 앉히고 조섭을 시켰다.

병식도 낮에는 신문사로 가고 아무도 없는 어둑침침한 방 속에서 수영은 천장만 바라다보고 혼자 멀거니 누웠자니 진 종일 공상만 하게된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면 골이 앞으로 쏟아지는 듯이 아팠다. 그럴수록 제 신변에 관한것과 병식 의 생활이며 계숙의 장래를 염려해주는 온갖 걱정과 갖은 근심이 머릿속에서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겼다. 다만 한가지 계숙이와 병식이 사이가 아주 깨끗하였고,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확실히 인정하게 된 것만은 매우 유쾌하였 다. 그동안 두 사람이 저에게 극진하게 해준 것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울뿐더러 여러 날을 두고 눈치를 보아야 조금, 이상스러운 행동은 물론 없거니와, 무슨 비밀을 가진 사람 들이면 더구나 제 앞에서 그다지 천연할 수가 있을까? 어쩌 면 저렇게 사색도 보이질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내가 정말 저 사람들에게 가당하지도 않은 치의를 했구나)

하고 제가 어리석었음을 또다시 후회하였다.

(이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있든지 두사람의 사이를 의심치 말리라) 하고 속으로 맹세까지 하였다.

더군다나 병식의 입에서

『계숙이 헌테서 배갈을 과히 먹은게 그저 속이 좋지 않은 걸.』

하는 솔직한 말도 들었고

『계숙의 일로 자네허구 꼭 의논을 할 말이 있는데 급허긴 허지만 자네가 정신을 차린 뒤에야 얘기를 허겠네.』

하고 계숙의 신변의 무슨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것까지 펴놓 고 말하는 것을 보면, 더구나 털끝만큼도 의심할 여지가 없 었다. 한입으로 두가지 말을 하고 안벽뒷벽을 치는 이중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 결코 아니다 하고 도리어 병식에게 대 한 우정이 두터워졌다. 동시에 계숙에게, 대해서는 「동지」

의 경계선을 넘어서 저의 정신과 육체를 반에 쪼갠 것 같은 그 어떠한 감정으로 슬그머니 변하였다. 감정이란 단순한 연애도 아니요. 그렇다고 동지에 대한 우정 뿐만도 아니다.

따로따로 분석할 수 없는 정신상의 칵텔(혼합주)이었다.

하여간 오래간만에 계숙과 조석으로 만나고, 그의 정성을 다한 간호를 받은 뒤에는 (저 여자를 떠나서는 못살 것 같다) 하는 일종의 신앙심 같 은 느낌의 지배를 받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계숙이가 오면 명랑한 세상이 그의 등뒤에 묻여 들여오는 것 같고

『낼 또 오께요.』 한 마디를 남기고 제 곁에서 떠나가면 방안에 꽉 찼던 세상이 저 하나만을 동그마니 남기고 다시 금 계숙이 뒤를 따라는 듯 몹시 허전하고 졸지에 쓸쓸해졌 다.

눈을 뜨면 천장과 바람벽에 어른거리고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기어드는 것은 온통 계숙의 그림자 뿐……수영의 마 음은 계숙의 환영(幻影)을 비추기 위한 한폭의 스크린(영사 막)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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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극성맞던 추위도 오늘은 오후가 되자 좀 풀린 것 같다. 지붕 위에 쌓였던 눈이 처마 끝에 고드름 줄기로 녹 아내리는 소리가 뚜욱뚜욱하고 들렸다. 바깥 날씨는 매우 따뜻한 모양이다. 골목 안 양지쪽에서 눈장난을 하는 아이 들의 재절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거 온 갑갑해 사람이 살겠나.』

하고 수영은 제 몸에 들어붙은 병마를 발길로 걷어차듯 하 고 벌떡 일어났다. 자릿저고리 바지에다가 만또를 둘러 옷 이란 옷은 겹겹이 껴입고 들창문을 열어 젖혔다.

싯누런 햇발에 눈은 부시건만, 방안으로 풍겨드는 바람은 맵지 않을 만큼 차기는 해도 시원하였다. 반찬가게 앞에 만 들어 세운 눈사람이 녹아서 코가 떨어진 것이 맨 먼저 눈에 띄었다. 수영은 폐량(肺量)껏 바람을 들이마셨다. 심호흡을 두어번 하고 나니 어찔어찔해져서 들창고리에 잠시 매어달 린 듯 하였다.

인왕산 허리에 하얗게 눈이 덮인 것과 얼어붙은 항구와 같 은 파란 하늘을 맥없이 바라다보고 섰자니, 생각하지 말자 하던 고향 생각이 불현 듯이 났다. 여러해 동안이나 가보지 않은 고향의 산천이 그리워졌다. 한동네에서 자란 동무들이 그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머니 아버지가 그리웠다.

몇백리 타향에서 이다지도 고단한 신세를 지어 죽도록 앓 아 누운 것을 보시면, 어머니는 나를 얼마나 가엾어 하실까.

어머니가 뼈가 저리도록 염려해 주실 생각을 하니까 뼈가 마디마디 아픈 것 같다.

새파란 하늘바다에 형형색색으로 수채화를 그리는 구름을 멀거니 바라보면 볼수록 방향없이 떠돌아 다니는 구름장이 제 신세와도 같고 고생살이에 주름살이 잡힌 어머니의 얼굴 과 푸수수한 백발이 흰구름 속에서 내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아들을 찾아 구름산 언덕 비탈 로 기어오르는 듯도 하다.

어린 동생 복영이도 눈에 암암하다. 시골집에서 논에 물꼬 를 보러 다닐 때나 밭에 원두를 거두러 다닐 때에 제 뒤에 졸랑졸랑 따라다니던 복영이, 복실복실한 우리 복영이.

(그 동안에 퍽 컸을걸. 올봄엔 보통학교를 졸업허겠구나)

하고 꼽아보다가

(널랑은 형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이 되지 말아라)

하며 아우가 눈 앞에 와서 섰는 듯이 팔을 벌려 제 가슴을 껴안았다. 그러다가

(아 나는 내 고향을 잊었구나!)

하고 긴 한숨을 내뿜었다. 수영의 눈에는 더운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그래도 나를 첫정을 들인 맏아들이라구 믿구 지내시겠지. 모든 소망을 내게다 붙이구 지내시겠지. 서울서 월급자리라도 붙어서 돈벌이를 착실히 허다가 장가 까지 들어가지고 내려올 양으로 그녀석이 안내려오는거야. 그러길래 늙은 어미아비를 모른 체허는게지.)

하고서 주야로 저의 건강과 장래를 빌어 주실 생각을 하니 죄송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

수영은 고향의 모든 것이 그리운 나머지에 질화로 곁에서 보글보글 끓던 우거지 찌개까지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아 랫목에 파묻었다가 꺼내 주시던, 김이 무럭무럭 나는 잡곡 밥─얼근쌉잘한 통배추김치─생각만해도 입이 침이 고였다.

(내가 무얼 얻어먹자구 서울바닥에서 이 고생을 하나. 고생 끝에는 무엇이 올까? 사회운동─감옥─자기 희생─명예─공 명심─그러고는 연애─또 그러고는 남은 것이 과연 무엇이 냐? 청춘이 시들어지는 것과 배고파 졸아붙는 창자 뿐이 아 니냐?)

수영은 혼자 부르짖고는 산도 하늘도 구름도 보지 않으려 는 듯이 들창문을 탁 닫았다.

(병식이도 왜 이틀째나 안 올까?)

중얼거리듯 하고 수영은 닷새만에야 큰길로 나섰다.

계숙도 무슨 긴급한 일이 생겼는지 어제 오늘은 발그림자 도 비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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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허전허전한 다리를 이끌고 기동을 할겸 병식의 집 을 찾아갔다. 문간에서 「병식이」 하고 찾으려니까 안에서 무명쪽을 찢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에 귀가 따가왔다.

수영이가 문간에서 머뭇거리려니

「글쎄 똑바루 말을 해요. 앓는 사람헌테 무슨 정성이 굴 뚝같이 뻗혀서 이틀 사흘씩이나 나가잔단 말요? 그동안 집 안 식구가 궁금할 생각을 좀 해야죠.」

병식의 아내가 한참 바가지를 긁는 판이다.

『내야 나가 자든지 길바닥에가 쓰러지든지 웬 참견야 참 견이. 요 집안 망할 것 같으니라구, 누구를 못잡어 먹어서 날만 보면 악을 바락바락 쓰느냐 말야?』

병식의 흥분된 목소리다. 오늘도 술잔이나 먹은 모양인데 까딱하면 육박전이 일어날 형세다. 아니나 다를까 마루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에고머니! 에고머니! 누굴 쳐요? 누굴 쳐?』 하고 발악하 는 소리를 듣다 못해서 수영은

『이건 또 전쟁인가.』

하며 들어섰다.

그통에 병식의 아내는 풀어진 머리채를 휘감아 쥐고 안방 으로 뛰어 들어가고, 병식은 얼굴이 세파랗게 질려가지고 꿩을 놓친 매처럼 할딱거린다. 어린 것은 남생이를 발딱 잦 혀논 것처럼 바둥거리며 악을 쓴다. 병식은 분을 못이겨 말 도 아니나오는 듯 수영에게는 왔느냐는 인사도 아니하고 방 으로 들어가 벌떡 누워버린다.

『왜들 그래. 한 십년 싸웠으면 그만 휴전조약을 맺을때두 됐을텐데……』

하면서 수영이가 따라 들어갔다. 병식은 친구를 치어다보 려고도 아니하고 분을 삭이느라고 이를 갈며 안간힘을 쓴 다.

『자네 오늘도 술먹었네 그려?』

『집안이 이렇게 난장판이니 술 안먹구 견디겠나?』

『허구헌날 자네가 술을 먹으니까 전쟁이 벌어지는게 아닌 가? 한 이틀 댁에두 안오구 다른데가 쓰러져 잔 눈치니 어 느 부인인들 좋다겠나? 첫째 고만 술을 좀 정침허게.』

『뭐? 술을 먹지말라구? 술에 마취가 돼두 못견디겠는데 날더러 정신이 말똥말똥해 앉었으란 말인가? 자넨 큰일 날 소리를 다 허네.』

『그렇게 핑개김에 술만 먹다가 아주 중독이 되면 어쩌려 나?』

『그렇잖어두 우리 아버지를 술이 잡아갔으니까 나도 효자 노릇을 헐 날이 며칠 안남었네.』

병식은 누웠다 일어났다 안절부절을 못한다. 수영은 병식 이가 보기에 딱해서

『술로 모든게 해결이 된다면 나두 죽기 작정을 허구 먹겠 네만……』

하고 타이르듯 한다. 안방에서 어린애 우는 소리에 어른의 푸념에 시끄럽기 짝이 없다. 병식은 짜증을 버럭내며

『술 아니라 아편이라두 있으면 빨겠네. 그두 못허면 침절 이라두 헐테야. 날이 갈수록 참 정말 살기가 싫어 뭐구뭐구 지긋지긋해!』

수영은 핏기없는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띄우며

『자네처럼 참을성이 없어서야 조선의 젊은 사람은 어디 하나나 살겠나? 그럴수록 괴로운 걸 참고 견디어 나가야 지.』

『날 이놈의 현실을 저주하기 전에 삼십년전에 생색없이 떨어뜨린 우리 아버지의 정충 몇방울을 저주허네.』

하고 나서는 병식은 금새 미쳐나는 사람처럼

『핫하하하하.』

하고 천장을 쳐다보며 허청웃음을 웃는다. 안방에서는 병 든 어머니까지 한몫을 보느라고 어린애를 덧들여 놓았는지 어린 아이가 뒤섞여서 지지고 볶고 사뭇 난장판 같다.

건너방의 두사람은 반시간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다가

『그래 오늘은 아주 몸이 깨끗헌가?』

하고 병식이 청처짐하게 문병을 한다.

『응 하두 갑갑허길래 바람도 쏘일 겸 나온 길일세.』

『자네두 좀더 솔직해지게. 궁금헌일이 있어서 내게 온게 아닌가?』 하고 병식은 수영을 똑바로 치어다본다.

아닌게 아니라 수영은 계숙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일절이 속으로는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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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은 안방의 난리가 진정이 된 뒤에도 눈을 딱 감고 한 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더니 일어나서 수영과 얼굴을 마주 비 빌만큼 가까이 다가앉으며

『내야 자네처럼 꿍꿍이 셈을 대는 사람이 아니니깐 내 귀 로 듣구 알아본대로 얘기를 험세.』

하고 말 허두를 끄집어낸다.

『계숙이가 요새도 바싹 모양을 내구 댕기는 게 자네 눈에 는 거칠지 않든가?』

『글쎄 전과는 사뭇 달라졌어. 백화점의 수입만 가지고는 그렇게 차리구 댕기지를 못헐텐데.』

수영은 병식의 입만 주목한다.

『그러길래 문제가 단순치 않거든 계숙이도 어느 정도까지 는 실속 이야기를 허데마는 내 짐작같어서는 어느 돈있는 남자의 손에 단단히 걸려든 눈치야.』

『그 남자란 누군데?』

수영은 조급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차차 들어보게. 그렇게 호락호락헌 인물이 아니니까 우 리가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긁어 부스럼이 되기가 십중팔구 야.』 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어쨌든 요새 계숙이가 그 남자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든 것만은 확실해.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에게 돈은 비상이거 든. 상대자가 돈이란 무기를 제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사 람이면 정말 위험천만일세.』

『여보게 요령부텀 얘기를 허게. 서론이 왜 그리 긴가?』

수영은 갑갑증이 났다.

『가만 있게. 자네 같은 숫보기는 우선 내 설교를 들을 필 요가 있네. 제아무리 의지가 굳은 체허는 여자두 돈의 미끼 를 물어서 날카로운 낚시끈이 그 여자의 허영심을 정통으로 꾀기만 허면야 그뒤엔 줄을 급히 감어 들이든지 느슨히 늦 추어가지구 제 맘대루 놀리든지 그건 낚시질 허는 사람의 자유란 말일세.』

수영은 벽에가 기대 앉아서(무슨 말을 끄집어내려고 저렇 게 장황히 늘어 놓누) 하고 여전히 병식의 입만 쳐다본다.

병식은 담배를 붙여 깊닿게 흡연을 하고는 담배연기에다 말 을 섞어 내보낸다.

『그런데 그 날카로운 낚시에 바늘이 한번 꼬이기만 허면 몸을 비틀고 용을 쓸수록 낚시끝은 자꾸만 살 속으로 깊이 꼬여들어만 가는 법이란 말야.』

『그럼 계숙이가 벌써 그 낚시에 꼬였단 말인가?』

수영은 어느 틈에 병식의 이야기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제 수입은 기껏해야 한달에 십오륙원 밖에 안되구, 제집 에선 일전 한푼 보내주지 않는 걸 번연히 아는데 전에 못보 던 털댄 외투에 순금 팔뚝시계에 칠피구두가 다 어서 생긴 거냐 말일세. 그게다 미끼를 준 증거가 아닌가?』

『글쎄 나 역시 과분허게 치장을 허구 댕기는 게 수상해서 히니꾸(놀림)을 했네만……』

병식은 점점 긴장해서

『난 그 사내의 편지를 봤네. 접때 계숙이가 내보이데 그 려. 그러나 그 사내 집에까지 종종 놀러두 댕기구 같이 자 동차를 타구서 드라이브도 한두번 했다는 말까지 허데. 저 번날 저녁에두 새루 두시나 돼서 그 사내가 계숙이를 자동 차루 바래다 주다가 내게 들켰단 말야. 제가 아무리 솔직허 게 실토설을 헌댔자 그건 와리비끼(할인)가 많을 테니까 내 추측 같아선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아까운 여자 하나를 버 리겠어. 그렇지만 내 코가 석자 가웃이나 되니까……』

하고 나서는 「난 모른다」는 듯이 자리 위에가 쓰러진다.

『그렇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대루 두고 볼 수는 없지 않 은가?』

『그렇기에 자네헌테 얘기허는 게지.』

『도대체 그 사내란 누군가?』

『꼭 알고 싶은가? 나보덤 자네가 더 잘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내딴엔 신중허게 생각을 해보느라구 입때 말을 안했 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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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은 계숙에게서 본 편지를 머리속에서 되풀이 하였다.

맨 끝에 갈겨쓴 남자의 이름이 또렷이 눈앞에 떠올랐다.

『자네 조경호 알지!』 하고 수영의 표정을 살핀다.

수영은 고개를 비꼬고 잠간 생각해 보더니 안다는 말도 모 른다는 말도 아니 나오리만큼 속으로 놀랐다.

『아 利전문학교 교수 말일세, 왜 자네의……』

『바루 그 사람이야?』

수영은 병식의 말을 가로 막으며 금시 상기가 되어서 얼굴 이 벌개졌다. 흥분이 되면 말이 없는 그의 버릇으로 아랫입 술만 깨물고 앉았다가

『정말 그 조경호가 틀림없나?』 하고 다시 한번 다진다.

『그거야 내 눈이 보증허구 사실이 증명헐걸세. 그러니 우 리헌테 여간헌 강적이 아니란 말야.』

병식은 손톱끝이 노랗게 타 들어가도록 담배를 빤다.

조경호(趙京鎬)란 인물을 병식이가 알기는 벌써 여러해 전 이다. 조경호는 벼슬깨나 다닌 사람으로는 모를 사람이 없 는 교동(?洞) 조판서의 손자요 조승지의 외아들이다. 병석이 와는 직접 교제는 없지만 경호가 동경서 어느 대학에 다닐 때에 한번 똑똑히 부딪쳐본 일이 있었다.

병식이가 계숙의 친 오라비 용준이와 어느 잡지를 발행할 때였다. 원고는 다 모아놓았는데 인쇄비가 없어서 쩔쩔 매 던 끝에 용준이가 꾀를 내었다. 조경호가 온쳇집을 별어서 서울서 반빗아치까지 불러들이고 저의 집의 피아노를 중심 으로 모여드는 순결한 여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낚아들인다 는 유명한 색마로 유학생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때다.

그래서 학생의 신분으로 너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뿐 아 니라 조선학생의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구실을 잡아가지고 동무들을 충동하였다. 용준이가 앞장을 서고 그 잡지에 관 계했던 고학생들이 패를 지어서 밤중에 조경호를 습격한 일 이 있었다.

병식이도 여간 팔팔하지 않았던 때라 무슨 결사대나 되는 것처럼 몽둥이까지 차고 따라갔었다.

처음에는 경호를 애워싸고 좍 둘러앉아서

『잡지를 박일텐데 인쇄비 이백원만 돌려주시오.』

하고 말씨 부드럽게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마에 송곳을 박아도 진물 한점 나오지 않으리만 큼 인색한 경호는

『돈두 없지만 이렇게 여럿이 작당을 해와서 누구를 위협 하는 거요?』

하고 되잡으려는 것이 얄미웠다. 더구나 「가택침입을 했 느니」 「폭력행위를 하면 좋지 않느니」하고 깐죽거리고 앉은 것이 어찌나 얄미웠던지 혈기가 괄괄한 패들은 분이 머리끝까지 뻗쳐서

『이놈아! 너 같은 놈의 돈좀 뺏어 쓰지 못할 게 뭐냐? 네 애비 네 할애비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구 긁어모은 게 아니냐?』

하고는 우르르 달려들어 경호를 엎어놓고 사매로 뚜들기고 한패는 유성기, 피아노 할 것 없이 값진 세간만 으지끈 으 지끈 부수어대는 통에 경호는 겁이 더럭 나서

『가진 돈은 이것 밖에 없쇠다.』

하고 십원짜리 여덟장을 내놓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보내던 위인이다.

그 뒤로 경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문학사의 학위를 얻어가 지고 돌아왔다.

조경호씨 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신문기사의 활자는 공교 롭게도 병식이가 제 손으로 뽑았었다.

(흥 조선 사회에 청보의 개똥이 또 하나 늘었군)

하며 공장의 마루바닥에다가 침을 탁 배앝던 생각까지 났 다.

그 뒤로 경호는 저의 아버지가 利전문학교에 돈을 낸 이사 인 관계로 그 학교의 교수가 되었던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에 이따금 발표되는 덜익은 열무깍두기를 씹는 듯 한 경호 의 논문도 보았다. 몇 달 전에도 「利평론」이란 잡지에 실 린 경호의 글을 가지고 병식과 수영은 「천하의 명문이로 군」하고 입방아를 찧는 자료를 삼았었다.

그러나 병식은 그런일로 경호를 알았을 뿐이지만 수영에게 있어서는 경호가 직접적으로 저의 집식구의 생활문제에 관 계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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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호? 조경호!』

하고 수영은 몇번이나 입속으로 뇌었다. 경호에게 대한 증 오(憎惡)의 감정은 두근거리는 염통 속에서 폭발이 될 듯, 머릿골치가 다시 터지는 듯이 아팠다. 생각할수록 운명의 장난이란 주착이 없는 것 같다. 계숙이가 그 흔한 남자 중 에 하필 저까지 삼대째나 소인소인하고 마름 노릇을 하는 조승지의 아들에게 걸렸을까.

수영은 바로 앓아 눕기 사나흘 전에도 경호를 만났다. 신 문을 돌리느라고 서대문 밖으로 나가다가 누런 낙타털 외투 를 입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전차를 기다리느라고 서성거리 는 경호를 보았다. 인사는 안했지만 안경 밖으로 흘겨보는 경호의 곁눈과 마주친 것까지 생각이 난다. 그러면 그때도 계숙에게를 다녀가는 길이 아니었던가 하매 수영은 모르는 사이에 이가 부드득 갈렸다.

『여보게 그렇게 흥분이 돼선 못쓰네. 일이 난처헐수록 냉 정히 생각해 보아야지.』

병식도 인제는 술기운도 다 가신 듯 속으로 제 일과 조금 도 다름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수영은 눈을 딱 감고 있다가

『내가 자네헌테두 입때 얘기 아니헌 일이 있네. 너무나 창피스러워서……』 하고 나서

『자네만 꼭 알아두게.』

하고 다시 한번 뒤를 다지고는, 병식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는 사정을 좍 이야기하였다.

수영은 감옥에서 나와서 병식의 집에 묵고 있을 때, 십여 번이나 조경호를 찾아다녔다. 신문사 월급을 가지고는 한달 의 계량도 변변히 못하는 병식의 밥을 얻어 먹으며 덧붙이 기로 있는 것이 바늘 방석에 나앉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 선 취직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떻게든지 밥 이나 얻어 먹어 가면서 지난날의 동지들과 서서히 기초운동 을 계속하려는 결심이었다. 그러려면 시골로 내려가서는 연 락도 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래도 서울바닥에서 무슨 구멍을 뚫어야 하겠다하고 시골집에 내려갈 것은 단념을 했 었다.

그래서 병식도 모르게 구두한 켤레가 다 닳도록 돌아다녔 다. 직업소개소를 위시해서 닥치는 대로 명함주문을 다니듯 직업을 구하였다. 그러나 입에 맞는 떡이 수영을 기다리고 있을 리 없었다.

어느 비료회사에서는 수영의 정성에 감동이 되었던지, 한 이십원 가량으로 쓰겠다고 승낙까지 하였다. 그러나 「농업 학교로 조회를 해본 결과 감옥에까지 갔던 사람은 채용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들어가는 날이 쫓겨나는 날이었다.

그렇기로 이른바 신문을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수영은 짠발쟝의 비애를 여러번이나 톡톡히 맛보았다. 나중에는 생 각타 못해서 마지막으로 조경호를 찾았다. 조선 사회의 유 력한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아는 사람이 없는, 시골뜨기인 김수영에게 있어서는 어쨌든 저의 집답주의 아들인 조경호 가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일년에 한번쯤 조승지의 생일 때면 올라와서 기숙사에 있는 아들을 데리고 인사를 치르러 문안으로 들어갔다. 가시는 큰 사랑 뜰아래서

『영감마님께 문안 드립니다.』

하고 하정배를 하고 나서 두손길을 마주 비빈다. 수영은 곁에서 저의 아버지가 하는대로 흉내를 내지 않을 수 없었 다.

다 같이 늙어서 모발이 허옇게 센터에 한사람은 「영감마 님」을 개올리고 어떤 사람은 미닫이를 열고 기다란 담뱃대 만 내밀면서

『오오 너 올라왔니? 그래 네 집엔 별고나 없느냐?』

하고 제 손자새끼나 되는 듯이 다라지게 해라를 한다. 수 영은 그처럼 하대를 받으면서도 「네네」 하고 긴대답을 하 면서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는 저의 아버지가 불쌍한 것이 지나쳐 너무나 비굴한 것이 몹시 미웠다. 꾸부리고 섰는 등 을 주먹으로 푹 쥐어지르고 싶도록 미웠다. 그런 때에도 수 영은 삼팔 옹구바지를 입고 작은방 사랑에서 큰사랑으로 드 나드는 경호를 몇번이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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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에도 수영은 강호를 만났었다. 동경가 있다가 방학 때에 나와서 바짓금이 배질 듯 한 양복을 말쑥하게 입고 저 의집 인력거를 타고 일갓집으로 인사를 치르러 다니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수영은 경호와 딱 마주치면 마지못해서 모 자를 벗는 체하다가 지나만가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 러니 경호는 수영의 이름을 기억할리도 없을 뿐아니라 경호 의 안중에 수영이가 있을리 없었다.

수영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건만 (잠시 네 손을 벌면 고만 이다)하고 경호를 찾아갔었다. 경호만 힘을 써주면 그만취직 은 용이하리라고 생각되었고 저의 집마름 외아들이니까 과 히 괄시는 하지않으리라고 지래짐작을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학교로 찾아갔다. 응접실에서 처음으로 경호를, 똑바로 대하였다. 경호는 청년교수로서의 위신과 지주로서 의 점잔을 빼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수영의 가정형 편과 사정의 경향까지 물었다. 수영은 제 사정만을 간단히 말하고는 묻는 말에나 대답한 말에나, 그저 「네, 네」 할 뿐이었다. 경호는 다리없는 안경을 억지로 끼어서 콧등에 옥죄어 오른 것이 매우 거북할상 싶어서 그것만 바라보았 다.

경호는 좋은 방침이나 있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는

『지금 학교엔 자리가 없지만 다른 방면에 교제가 있으니 까 어디 한군데 말해 보지.』

하고 「그만 청쯤이야」라는 듯한 태도였다.

수영은 반말지껄이에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지만 「이것 도 없는 놈의 설움이다」하고 꿀꺽 참았다. 며칠 뒤에는 집 으로 찾아갔다. 조승지의 집은 퇴락하기는 했어도 솟을 대 문에 줄행랑에 아직도 재상가의 체모를 차리고 있다.

수영은 작은 사랑채로 들어가서

『조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주인을 찾았다. 「나으리」란 말은 나오지 않던 것이 다. 청지긴지 하인인지 모를 사람이 나와서

『연회에 가셨오.』

하고는 뒤도 아니 돌아다보고 들어갔다. 그 이튿날은 학교 로 찾아갔다.

『오늘은 병환이 나셔서 못나오셨오.』

한다. 며칠 후 또 집으로 찾아갔다.

『손님이 오셔서 저녁을 잡수시는 중이요.』

하고 전번에 보던 자가 나와서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던지 고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는 문을 탁 닫는다. 그러나 수영이가 고개를 수그리고 그집 담모퉁이를 돌아가려니

『펑』

『훌라.』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짱」 짝을 짓느라고 대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영은 그럴수록 (그예 만나보고야 말껄)하고 지궁스럽게 쫓아다녔다. 아침 일찍 집으로 전화를 걸면 번번이 「그저 기침을 않으셨다」하고 저녁때 학교로 걸면 으레 「벌써 나 가셨다」한다. 나중에는 하다못해서 편지를 두 번이나 했건 만 그것도 꿩 구워먹은 자리였다.

(예에라 너 같은 놈을 믿구 따라댕긴 내가 어리석은 놈이다)

하고 수영은 길에서라도 경호를 만나기만 하면 톡톡히 욕 을 보여 주리라하고 벼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밤낮 어느 곬으로 쏘다니는지 코빼기도 얻어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월전에는 종로 뒷골목 전당포앞에서 경호를 만났다. 「난원 카페」에서 술이 진흙같이 취해서 여급들에게 부축이 되어 자동차를 타는 것을 흘끗보았었다. 수영은 극도로 분개한 나머지에

(무엇은 못하랴. 똥통구르마는 못 끌까보냐)

하고 조경호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리로

『자넨 힘에 겨워 못허네.』

하고 굳이 말리는 병석을 졸라서 신문배달부가 된 것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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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허구 관계가 그렇게까지 될 줄은 까맣게 몰랐었네 그려.』

병식은 수영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수영의 입이 너무 무거운 것이 새삼스러이 감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감복도 되었다.

『나두 인젠 시장헌데 밥은 싫구……』

하고 병식은 나가서 군 고구마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두사람은 빡빡하게 고구마를 까먹다가

『이 일을 어떻게 조처를 했으면 좋겠나! 계숙이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병식은 당장에 무슨 행동이나 취하려는 것처럼 조급 하게 묻는다.

『어떤 수단에 끌려 들어가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난 계숙 씨를 믿구 싶은걸.』

아무리 계숙의 지내는 형편이 내용으로는 말이 못되고 경 호가 유혹하는 수단이 제아무리 교묘하더라도

『계숙이는 그런 자에게 녹록히 넘어갈 여자가 아니다.』

하고 믿었다. 더구나 이번 제가 앓는 기회로 저에게 친절 을 다해서 거리가 전보다 더 가까워진 것은 생각하니 계숙 이가 매춘부처럼 이 사람 좋다 저 사람 좋다 할 여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제까지의 계숙의 사상경향이나 생활감정을 보아 단순히 물질에만 혹해서 여자로서 마지막 가는 탈선을 하리라고는 암만해도 머리가 끄떡여지지 않았다.

『난 무슨 일이 있든지 계숙씨를 믿구 싶어.』

수영은 고개를 쩔래쩔래 흔들며 저의 신념이 굳은 것을 표 시한다. 병식은 좀 비웃는듯한 웃음을 띄우고 수영의 말을 부인하는 태도로 고개를 마구 흔들며

『들어보게 이 사람아. 자네 같은 숫보기 총각이 무얼 알 겠나. 여자의 일이라면 모든걸 호의로만 해석허려고 들지만 사실은 자네 생각과 정반대란 말야.』

하고 나서는 푸수수하게 일어선 앞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을 못참아서 어린것까지 있는 몸으로 더군다나 동지라고 하는 남편의 절친한 친구의 품에서 품으로 두 번 세 번 넘어 댕기면서 사생아를 나비가 알깔기 듯허는 여자가 있지 않는가』

『글쎄……』

『글쎄구 갱밋돈이구 좀 들어봐. 그뿐인가? 남편에게 성적 으로 불만을 느끼면서두 생활조건과 제 명예 때문에 한집에 살면서 꾀꾀틈틈이 뒷문을 열어 놓기를 예사로 허는 중년 매담……』

『그건 누군가?』

『압따 그런 숙녀가 있는줄만 알게그려. 또하나 예를 들까.

이건 자네두 아마 잘 아는 사실일세. 맨 밑바닥까지 타락을 허다 못해서 미국 유학을 가는 학비를 얻으려구 어느 돈있 는 놈의 첩노릇을 그나마 겨우 일주일쯤 하고 나온 일류 성 악가는 알겠지? 그건 원첩두 못되고 신마찌갈보 할가지란 말야. 그러다간 처자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남자의 목을 얼 싸안구서 물귀신이 되었는데 아직두 죽었느니 살았느니 허 구 떠들지 않나?』

『살기는 어떻게 살어? 고기밥이 된지두 옛날일걸.』

『죽고 살것이 문제가 아니야. 그 여자가 그렇게 비참헌 최후를 밟은 동기나 경로만 알면 고만이지. 그나 그뿐인가?

또 하나 들어보려나? 이것두 일류 음악가거든. 예술가로 출 세한 아내를 위해서 건강까지 희생을 해서 병이 든 남편이 눈두 감기전에 히구라이 신사와 결혼계약을 해가지고 그자 의 제인가 제삼부인으로 들어앉은 利는 짐작하겠지?』

병식은 목에 침이 마르도록 주워 섬기고는

『이런건 다 드러난 사실이지만 여학생이 어린애를 낳아서 공동변소에다 버리지를 않나. 입에서 아직 젓내가 나는 계 집애가 성도 모를 자식을 낳아서 개구멍받이로 들여밀지를 않나. 이따위 얘깃거리는 내가 듣구 본것만해두 열손가락이 모자라 못 꼽겠네. 어쨌든 지금 조선은 성(性)의 수난 시대 (受難時代)인 것만은 사실이 증명하네. 소위 신여성이 남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쯤은 인젠 아주 예사야. 시비하는 사람 까지 없을만치 됐거든.』

수영은 병식의 말을 비판할 수 없을만큼 머릿속이 얼떨떨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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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는 이야기에 열중해서 전깃불이 들어 올때까지도 군불을 그저 때지 않아서 구들이 차오는 것도 몰랐다.

수영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아니하고 연설조로 나오는 병식의 말을 유심히 듣느라고 황소처럼 두 눈만 꿈벅꿈벅한 다. 병식은 「마코」를 붙였다가는 몇모금 빨지도 않고 끄 고, 껐다가는 또 붙여물면서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말일세, 이상헌 현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종류 의 여자는 말끔 외국까지 가서 공부를 허구 돌아온 교양있 는 여자일세그려. 그런 신여성 헌테서만 그 얌전헌 표본을 볼 수가 있단말야. 몸뚱이는 십팔세기의 환경속에 갇혀 있 으면서 모가지만 이십세기로 내어밀려는 건 한폭의 만홧거 리가 아닌가? 황새를 따라 가려는 뱁새처럼 가랑이가 찢어 진 과도기(過渡期)의 희생자만 서너집 걸러하나씩은 있네그 려. 그러니 자네부터 똑똑히 귀담어 들어두란 말일세.』

하고는 수영의 앞으로 다가앉는다. 손가락으로 수영의 코 를 찌를 듯이 가리키며 목소리를 한층 높이

『그 여자들은 결단코 최계숙이만치 똑똑지 못헌 여자가 아니란말야. 그 이상 재주있구 영리한 게 화근이 아니겠 나?』 하고나서

『계숙이헌테는 지금이 고작 위험한 때야. 여보게 수영 이!』

하고는 혼자 흥분이 되어 주먹으로 제 무릎을 탁 치며 수 영의 기색을 살핀다.

수영은 병식의 말을 듣고나니 모든 것이 그럴싸 하였다.

조금 전까지도 계숙을 믿던 마음이 점점 스러지는 것 같다.

수영의 눈에는 계숙이가 그 핥아 논것처럼 빤들빤들하게 생긴 경호의 첩이 되어서 최신식 구렁이 허물같은 양장에 여우털목도리를 두르고 극장 특등석에 나란히 앉은 것이 보 였다. 꺼먼 윤이 번질흐르는 자동차를 타고 호텔로 백화점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가는 으스름하게 삿갓을 씌워논 전등밑에 폭신폭신 해 보이는 떠블벧드가 보였다. 머리맡으로 나란히 모서리를 마주 모은 새털베개가 보였다. 하느르르한 연분홍 자리옷을 입은 계숙의 반나체가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러다가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음탕한 눈자위로 희멀건 계숙의 살덩이를 노리는 경호가 나타난다. 가슴의 시꺼먼 털이 숭숭난 것이 허리띠가 풀어진 서양침의 사이로 드러난다. 오직 경호의 성욕의 대상이 되는 계숙은 활동사진의 이동장면처럼 점점 커지며 눈앞으로 달려든다. 경호의 손은 털을 튀해서 하얗 게 벗겨논 양과 같은 계숙을 엎쳐놓고 잦혀놓고 하면서 제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광경이 한간통도 못되는 거리에 보인 다. 바로 눈썹밑에서 보인다. 환상(幻想)으로는 너무나 똑똑 히 보인다.

수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을 쥐었다. 조금있자 그 주먹은, 땀을 쥔 주먹으로 부르르 떨렸다.

『싸움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싸움밖엔 없다!』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직 같어선 그닥지 위험헌 고비까지 빠져들어 가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단단히 경계는 해야겠는데……』

병식도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모든게 사실이라손 치더래도 경호가 어떠헌 수단을 쓰구 있는지 누구를 앞장을 세워가지구 계숙에게 다리를 놓는겐 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수영은 억지로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힘을 들이며 묻는다.

『가만있게. 내가 정탐을 해봄세. 또 한편으로 감시를 단단 히 해야겠는데 자네 계숙이 미행(尾行)을 좀 허려나?』

수영은 고개를 저면서

『아아니 자네가 적임자지. 내야 뒷배나 보다가 여차직허 면 앞장을 서겠네.』

『그럼 염탐 노릇허는건 당분간 내게 맡기게.』

두 친구는 밤이 이슥하도록 머리를 짜내어가며 그 궁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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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열시나 되었다. 利백화점은 손님의 발길이 끊진지도 오래다. 화장품부에는 전등불만 휘황한데 난로가에는 여점 원 서넛이 둘러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다.

『아이 조선극장에 좋은 사진이 왔다는데 구경 한번 못간 담.』 하는 탄식과

『눈이 저렇게 녹았으니 질척거려서 어떻게 가.』

하는 것이 그들의 걱정이다.

계숙은 따로 떨어져 앉아서 피곤한 다리를 뻗고 새로 나온 부인잡지를 보기에 정신이 없다.

계숙은 다른 점원들과는 얼리지도 않을뿐더러 계집애들이 틈만 나면 모여서서 참새처럼 재잘대는 것이 시끄러웠다.

그래서 손님이 없을 때에는 한귀퉁이에 돌아서서 소설이나 잡지를 읽었다. 「코론타이」의 「붉은 사랑」 같은 것은 읽어 넘긴지도 오래지만 일본의 좌익작가의 소설을 끼고다 니며 틈틈이 읽었다.

바로 몇해 전에는 연애편지 한 장도 똑똑히 못쓰던 동무들 이 요새와서 시를 쓰느니 소설을 짓느니 하는 것이 속으로 는 우스웠다. 수학 여행을 하고 돌아온 여학생의 기행문이 나 감상문 조각을 노루 꼬리만큼 내는걸 가지고 별안간에 여류시인이니 여류문사니하고 신문 잡지에서 추켜세우는 바 람에 제가 젠척하면서 곤댓짓을 하고 다니는 꼴을 볼 때에 는 구역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든지 지기를 싫어하는 계숙은 「어디 두구 보자」 하고 성벽을 내었다. 잡지를 보다가는

『이까짓걸 글이라구 썼담.』 하고 혀도 끌끌 차고

『내가 글을 좀 쓰려두 서푼짜리 여류문자 속에 낄가도 싫 드라.』

하고 어지간히 저 자신을 믿었다. 동시에 저도 문예방면에 많은 취미를 가지고 남의 글이라고는 거진 하나도 빼어놓지 않고 읽었다. 사숙으로 돌아가서도 졸음을 참아가면서 인텔 리 직업여성으로 더구나 감옥에 다녀나온 과거의 관계도 있 어서 신문 잡지의 기자들이 원고를 얻으려고 뻔질나게 찾아 왔다. 그래서 마지못해 몇줄씩 써준 것이 사진과 함께 기다 랗게 발표가 되어서 여류문사들 축에도 한몫 끼게되었다.

그것이 한편으로 부끄럽기는 하면서 그다지 불쾌하지는 안 했다. 그럴수록 정말 문사가 되려는 결심이 점점 굳어진 것 이었다.

쓸쓸한 백화점안에는 벨소리가 요란히 났다. 파해나갈 시 간이 된 것이다. 계숙이도 책과 변또를 책보에 싸들고 체경 앞에서 매무지를 고치려니까 거울 속으로 동무 하나가 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경자!』 하고 계숙은 돌아섰다.

『오늘은 좀 일찍 파허는구먼.』

경자란 여자는 계숙의 앞으로 다가온다. 경자는 계숙이의 동창생이요 역시 여류문사로 요새 한참 신문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여자다. 키는 계숙의 어깨에 닿을 만큼이나 작 고, 앙바름한 몸에는 역시 까만 털을 댄 외투를 입고 허리 를 졸라 매었다. 악어껍질로 만든 핸드백을 들고 키가 커 보이게 하느라고 특별주문을 했는지 몸이 앞으로 곤두박힐 만큼이나 뒤축이 높은 캉가루 구두를 신었다. 차림차림이 기껏 모양은 냈어도 체수가 너무 작아서 어울리지를 않는 다.

『어딜 갔다 오는길야?』

계숙은 경자를 반가이 맞았다.

『조선극장엔 갔다가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나왔어.』

순전한 서울말이다. 조그맣게 오무린 입을 벌리기만 하면 금니가 빤짝한다. 백납같이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 눈두 덩은 은행껍질같이 얇다란데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것이 경자 의 버릇이다.

『어느새 집이 들어가긴 싫으니 우리 산보나 갈까?』

경자는 책보를 들고 나오는 계숙을 꼬였다.

『고단해서 오늘은 일찌감치 잘테야.』

『날두 이렇게 풀렸는데 우리 홈부라(본정으로 산보한다는 말)나 한번 허구 들어 가자꾸나.』

하고 백화점을 나서서는 계숙의 외투소매를 끌어당긴다.

둘의 사이는 서로 「해라」를 할만큼이나 가까운 모양이 다.

『그럼 오늘밤엔 잠깐만 놀다 들어가아. 날마두 놀러만 댕 기면 어떻게 해.』

계숙은 마지 못해 경자에게 끌려 본정통을 향하여 나란히 걷는다.

그때 그 누가 저희들의 뒤를 밟는지 두 여자는 알 까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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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은 백화점 앞에서부터 먼발치로 두여자의 뒤를 따랐 다. 검정 두루마기를 통통하게 입고 눈에 띄지 않도록 목도 리로 얼굴을 가리고는 멀찌감치 뒤떨어져 천천히 쫓아갔다.

(조 계집애가 아마 계숙이를 꾀어내는 조방구닌가보다)

하고 경자의 뒷모양을 노리며 어둠침침한 상점의 추녀밑으 로 바싹 붙어서 걸었다.

어깨를 나란히하고 걸어가면서 무어라고 속삭이는 두 여자 의 이야기를 듣고는 싶지만 들을 도리가 없었다.

두 여자는 본정통으로 접어들어서 어느 찻집 앞에서 서성 거린다. 찻집은 문을 닫아서 가등만 으스름하게 두 사람의 흰 얼굴을 비춘다.

병식은 맞은편 골목안으로 꺾어 들어가서 눈만 내밀고 건 너다 보다가

(차를 마시러 왔다가 헛걸음을 치는구나. 인제 어디루 갈셈 인구)

하고 건너다 보려니까 두여자는 오던길로 돌쳐저서 명치정 (明治町) 골목으로 내려온다. 이번에는 병식이가 앞장을 설 수 밖에 없다. 앞을 서서 휘적휘적 가다가 뒤에서 구둡소리 가 끊친게 이상해서 돌려다 보았다. 두 여자는 금새 그림자 도 없어졌다. 병식은 달음박질을 하듯 추격을 했건만 하나 도 아니요 둘이나 되는 여자의 종적이 묘연하다.

(금방 어디로 갔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스끼야끼라고 빨간 글씨로 쓴 외등이 달린 조그만 일본 요릿집 앞까지 쫓아가 보았다. 슬리퍼를 신고 층층대로 올라가는 여자의 발이 발견되었다. 한 이삼 분 뒤에 병식도 곰방와(밤인사)하고 휘장을 걷으며 들어섰 다. 분을 횟박같이 뒤집어 쓴 하녀가

『이랏샤이 마세.』(어서 오십시오)

하고 나오더니 병식이가 조선옷을 입은 것을 보고

『아노오 고잇쇼데스까?』(저어 한데 오셨습니까?)

하고는 윗층으로 눈을 할낏해 보인다. 병식은 잠자코 고개 만 흔들며 우적우적 윗층으로 올라갔다.

일본집이라 윗층에는 방이 여럿이요. 얇다란 백지로 바른 일본장지 한 장을 격했으니까 바루 옆에 방으로 들어가 앉 기만 하면 이웃방의 이야기는 넉넉히 엿들을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올라갔다. 층층대를 조심스러히 밟고 올라가면서 도 (이러다 마주치면 대 창핀걸)하고 무슨 죄나짓는 것처럼 조 마조마 하였다.

안내하는 하녀가 미쳐 따라 올라오기도 전에 병식은 슬리 퍼 두켤래가 나란히 놓인 방을 지나서 바로 그겉에 방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복도를 건너서 맞은편 방에서는 남녀가 뒤섞여 술들이 취해서 노래를 하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요 란스럽다.

『이왕 정탐을 하려면 철저하게 해야지.』

하고 병식은 다다미 위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종이 한 장쯤 드나들만하게 빠끔히 열린 장지탐으로 방안을 들여 다 보았다.

계숙은 바로 맞은편에가 앉아서 화롯불을 쪼이느라고 손길 을 비비고 눈앞에 한치도 못되는 거리에는 경자가 앉은 모 양이다. 경자가 머리와 몸을 기대는대로 장지들이 병식의 눈썹을 스친다.

『우리 스끼야끼나 시켜먹을까?』

경자의 목소리는 한방속에서 나는 것처럼 똑똑히 들린다.

『오늘 또 한턱을 낼테야?』

『턱이 무슨 턱야. 인제 양식은 냄새두 맡기싫어.』

하고 조그만 손벽을 딱딱 친다.

『하아이.』(네)

하고 하녀가 올라오다가 등 뒤? 장지를 펄썩 여는 바람에 병식은 기급을 해서 물러앉았다.

『오사께 잇뽕.』(술한잔)하고 정종 한병을 청하였다.

하녀는 다시 「하이」하고는 옆방으로 돌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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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끼야끼가 지글지글 끓는 냄새와 함께 경자와 계숙의 이 야기는 옆방으로 세어 들어왔다. 인제는 주정군들도 흩어져 서 근처는 더욱 조용해졌다.

『내가 계숙이를 만나기만 하면 늘 허는 말이지만 인젠 백 화점을 고만두는 게 어때?』

말 끝에 경자는 한 마디를 끄집어 내고는

『정말 계숙이 같이 재주있고 장래있는 여자가 오래 댕길 데가 못돼. 난 계숙이 일이 딱해 죽겠드라.』

하고 연방동정을 하면서 싹싹한 말씨로 의논성스럽게 묻는 다.

『누군 첨버텀 댕기구 싶어서 댕긴줄 알어? 벌써 진력이 난지도 오래지만 그나마 내놓면 헐일이 있어야지.』

『그런데서 치어나면 첫째 사람의 치수가 멀어진다 말야.

그렇다고 오늘낼 결혼생활을 헐것도 아닌데……』

『그럼 경자는 아는 사람도 많고 발이 넓으니까 어디 한군 데 소개를 좀 해봐.』

『그렇잖어도 벌써부텀 난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럼 나허 라는대로 헐테야?』

경자는 뒤를 다진다. 먹는 것도 잊어버질 듯 둘이 다 비인 젓가락질만 하면서 더 가까이 다붙어 앉았다.

『말해봐. 그렇지만 내게 해로운 일이면 안들을 테야.』

하고 계숙은 웃고싶지 않은 웃음을 호호호하고 웃는다.

『난 퍽 오래 두고서 생각해보고 허는말야.』

하고 경자는 긴급한 소청이나 되는 듯이

『여봐 계숙이, 내일부텀이라도 백화점일랑 고만두구 나허 구 동무삼아서 우리집에 와있으면 어때 계숙이는 우리집 형 편을 잘 아니까 말이지, 어머니허구 나허구 내동생허구 정 작 식구는 단 셋 밖이 없으니깐 여간 오붓허고 조용하지가 않단말야. 아직도 큰집에서 살림을 대주니까 맘대루 쓰긴 어려워도 살긴 넉넉해.』

『아 요컨데 내손으로 벌어먹지도 말구서 날더러 부잣집 찬밥을 치러 오란말야?』

계숙의 한마디에 경자의 얇다란 얼굴가죽은 물갈침을 한 것처럼 빨개졌다.

『왜 내가 계숙이더 강아지 새끼처럼 우리집 찬밥을 치러 오랬어? 난 그래두 계숙이헌테 내힘껏은 허느라구 했는데.

입때 계숙의 뒤치다꺼리를 누가 해왔느냐말야? 왜 그렇게 공 모르는 소릴 해?』

하고는 고개를 싹 돌린다. 조금만 제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양철쟁개비 끓듯이 빨끈하는 앙상을 내는 경자의 성미 를 잘 아는 터이라 계숙은

『아아니 일테면 웃음엣 소리로 헌말이야. 자 어서 말을 해.』

하고 어린 동생을 달래 듯한다. 그러나 계숙이가 경자에게 무엇에든지 단단히 꼬리를 잡은 눈치만은 확실하다.

경자는 금방 성미가 풀려서

『그렇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약을 올리니 누가 듣기 좋 아?』 하고는

『나도 올봄엔 동경으로 갈테야. 고등음악원 같은 데로 들 어가서 피아노 한가지라도 배워가지고 나올 결심인데.』

『그럼 나허구 같이 가잔말이지?』

계숙은 경자의 말의 허리를 잘랐다.

『가만있어.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해 그러니 두말말고 그동 안 우리집에 와서 같이 있잔말야. 우리 어머니 눈에만 들면 동경까지 같이 간대도 학비쯤은 걱정없어. 그렇게만 되면 어머니도 퍽 든든하게 여기실걸.』

『글쎄, 말은 고맙구먼……』

계숙은 조금 머리를 흔든다.

『글쎄가 뭐야? 백화점 구석에서 청춘을 썩히는 것 보담은 낫지 뭐야?』

『글쎄……』

계숙은 다시 한번 고개를 비꼰다.

『다른 때는 퍽 활발스러우면서 내말에 왜 얼른 대답을 못 해.』

경자는 뾰족한 턱을 바짝 들여다 밀며 조르듯 한다. 그래 도 계숙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까

『아이 갑갑해 똑 죽겠네. 우리집이 조용허구 방두 넓으니 깐 와 있고 싶다는 동무들은 많어. 그렇지만 다른 애들은 내 맘에 맞지를 않으니깐 계숙이 허구만 어떻게해서든지 동 경까지 가구야 말테야.』

하고 소녀끼리 동성애나 하는 듯한 태도로 오늘저녁에는 유난히 붙임성이 있게 군다. 계숙은 한참이나 손톱여물을 썰고 있다가

『경자말은 퍽 고맙지만 덮어놓고 경자의 집으로 들어가긴 어려운 사정이 있단말야. 그러지 않아도 어쩌니 어쩌니허구 내말들이 많은 판에 공연시리 소문만 나뻐지지 않겠어?』

『아냐 날좀봐. 지금 이화에 댕기는 내동생 봤지? 그애가 당초에 공부를 안해. 그러니 그애를 붙잡구 공부허는 거나 봐주면 고만인걸 뭘그래? 일테면 가정교사 노릇을 허는게니 깐 선생님 노릇을 허는 보수는 따로 얻어낼 수가 있거든.

백화점에서 생기는 것 갑절쯤은 대접헐테야.』

경자는 자기집에 와서 있어 달라는 조건까지 작정을 하고 는 무릎이 마주 닿도록 더 가까이 다가 앉으며 어떠한 대답 이 떨어지나 하고 계숙의 입만 말끄러미 쳐다본다.

『가만있어. 내 신변에 중대한 일이니까 좀더 생각해보구 서 대답헐게. 누구허구 의논도 좀 해봐야겠어.』

한참이나 뜸을 들였건만 대답은 여전히 시원치 않다.

『난 계숙이가 그렇게 결단성 없는 여잔줄은 몰랐어. 그럼 백화점은 누구허구 의논해보구 들어갔었나?』

경자는 한마디를 톡 쏘아붙이고 또 다시 샐쭉해졌다.

『난 경자가 너무 조급허게 구는 것 같어. 거진 날마다 만 나는터에 오늘 저녁에 꼭 대답을 허라고 졸라댈 까닭이 뭐 야?』 하고 계숙은 더 한층 냉정해진다.

병식은 혼자 느리잡고 앉아서 도토리만한 잔으로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흉내만 내려니 싱겁기가 짝이 없다.

두 여자의 이야기를 거진 한마디도 빼어놓지 않고 듣는 동 안에

『옳지, 계숙이가 저 계집애에게 단단히 발목이 잡혔구 나.』

하고 몇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고받던 이야기를 귀담 아 듣고보니 계숙이가 상대의 여자를 속으로는 깔보고 하치 않게 여기는 눈치다. 그러면서도 말대답을 시원스럽게 던져 주지를 않고 자꾸만 뒤를 사리는 것이, 평소의 계숙의 성격 으로 보아서 둘의 사이에 무슨 까닭이 단단히 붙은 것만은 틀림 없으리라고 추측되었다.

『아이 졸려, 인젠 고만 가 자야지. 아마 전차도 끊어졌을 걸.』

하고 계숙은 그 자리에 오래 앉았기가 괴로운 듯 먼저 일 어서는 모양이다. 그러나 경자는 그저 뾰로통해 앉아서 냉 큼 따라 일어서지를 않는 것 같다.

병식은 약빨리 낌새를 채고 술값을 미리 꺼내들고는 벌떡 일어서서 층층대 난간을 붙들고 미끄럼을 타듯이 내려갔다.

혹시 뒷모양이라도 들킬까보아 밖으로 나가서는 몇 간통이 나 줄달음을 치면서

『내가 이거 무슨 까닭으로 이 쑥스런 짓을 허구 댕기 노.』 하고 저자신의 행동이 우습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내 그계집애의 정체까지 알구야 말리라.』

하고 전차길에서 헤어지는 경자의 뒤를 바짝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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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끼야끼 냄새가 털외투 목도리에까지 베어들어서 계숙은 옷자락에 먼지를 털듯하며 사숙으로 돌아왔다.

자리는 미리 깔아놓고 나갔지만 방바닥이 싸늘하게 식어서 오늘밤에는 더 한층 쓸쓸하다.

이불속이야 차든지 덥든지간에 계숙은 옷을 훌훌 벗고 자 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반드시 누워서 두 다리를 쭉 뻗으며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자, 나른한 소름이 끼치는 듯 사지 를 훌렸다.

몹시 피곤은 하건만 이생각 저생각에 잠이 오지를 않는다.

잠을 청하다 못해서 얇은 속옷바람으로 일어나서 전등의 손 잡이를 비틀어 끄고는 얼핏 이불속으로 다시 뛰어 들었다.

그래도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져서 잠은 천리만리나 달아난 것 같다.

계숙은 백화점으로 처음들어 갔을 때와, 들어가서도 남과 같이 몸치장을 허느라고 심지어 용돈까지 경자에게서 무조 건하고 얻어 쓴 것을 후회하였다.

『내가 미쳤지. 뒷생각은 못하고서 돈을 얻어 썼어. 아마 더금더금 취해 쓴게 백원도 넘을걸.』

하고 꼽아보니 저로서는 도저히 갚을 재주가 없는 큰 금액 이었다.

『돈이 많아서 주체를 못허는 부잣집 딸의 돈좀 얻어 쓰기 로서니 문서 없는 돈인데 어때.』

하면서도 제가 대담스러웠던 것을 뉘우쳤다.

『내가 무어 내밀게 있다구 무작정하고 그런 짓을 했었드 람.』

하고 열번 스무번 제가 너무나 아쉬운김에 경솔했던 것을 깨닫기는 했건만, 다 삭아버린 돈을 인제와서 물어놀 도리 는 까마득하다.

실상인즉 계숙이와 경자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같은 학교에도 잠시 다닌 일이 있었고 학생시대부터 모양 잘내기로 장안에 유명한 터이라 길에서나 무슨 회석에서 경 자를 유심히 보아오기는 했었다. 경자의 차리고 다니는 꼴 을 보고는

『합쭉새같이 생긴 계집애가 꼬랑지 치레만 허는군.』

하고 대표적 못된 걸로 아주 멸시하는 태도로 보아왔었다.

더구나 그 사건이 한번 터지자 경자는 서울안에서 볼 수가 없었다. 무슨 큰 난리가 나서 붓잡혀가기만 하면 죽을 줄만 알고 저의 집건너방에 감금을 당했었다. 누구에게 감금을 당한 것이 아니라 문밖에 나서기도 겁이나서 저 자신을 감 금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계숙이가 백화점으로 들어간지 한 이주일뒤부 터 경자가 거의 날마다 백화점에 나타났다. 와서는 계숙에 게 화장품도 사고 다른 부에서 흥정을 할 것이라도 꼭 계숙 을 중간에 넣어서 생색을 내주었다. 그러다가는 차츰차츰 더욱 친절히 굴더니 근자에 와서는 살이라도 베어먹일듯한 태도로 계숙의 사정도 알고 금전으로 동정까지 사게 된 것 이다.

계숙은 처음 여점원으로 나오면서부터 동무들과 발을 끊고 지냈고

『흥 너희들은 내기 여점원 노릇을 한다고 창피해서 발낌 도 안허는구나.』

하고 고까운 생각이 잔뜩 들었던 참이라 저역시 외롭고 아 쉽던 차에 경자에게 호의도 보이고 여러 번 집으로 놀러도 다녔다. 남보아도 둘이서 단짝으로 지낸다고 손가락질을 당 할만치 얼려다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계숙은 한가지 큰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나같은 동무는 제 눈에 차지도 않을텐데 경자가 어째서 별안간 그렇게 친절하게 할까? 더군다나 돈까지 물처럼 써 가면……』

하고 몇번이나 고개를 비꼬아 보았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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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반쯤 몸을 일으켰다 하면서 생각을 계속한다. 생각해볼수록 경자가 저의 집에 가정교사 비슷한 명목으로 들어와 있다가 동경까지 같이 가자고 사뭇 조르는 까닭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무조건하고 저를 도와도 준 터이기로서니 참새 굴레를 씨울만큼이나 약 고 얕은 꾀가 얼굴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경자가, 제가 아무 이해상관이 없이 동경 유학을 같이가자고 애가 말라서 조를 리가 없으리라고도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자의 꼬임에 귀가 솔깃하지 않은 것 도 아니다.

(경자의 말마따나 내가 백화점 구석에서 청춘을 썩히고 만 단말이냐. 남들은 다 한번씩 일본가서 공부를 허구 가다가 끼(?書)를 붙이고 나오는데…… 어쨌던 이번 기회가 좋으니 덮어 놓고 따라가 볼까? 동경까지 가기만허면 무슨 짓을 해 서든지 학교 하나는 마치고 나오게 되겠지) 하다가는

(그렇게만 되면 되지 못헌것들이 젠체하는 꼬락서니는 안 볼거야)

하고 아무 밑천도 없이 예술가니 문사니 하고 떠드는 동무 들에게 대한 일종의 반발심도 생긴다.

(부잣집 계집애를 한번 이용해 볼까? 좀 창피는 허지만 조 선 있다가는 밤낮 이모양일 테니 용기를 내서 펄쩍뛰어볼까?)

생각할수록 온갖 잡념과 갖은 공상이 너도나도 하고 들끓 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머릿속에는 장마철의 하늘 모 양으로 형형색색의 구름장이 떠돌고, 이 봉오리 저 봉오리 가 불쑥불쑥 솟아올랐다가는 금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 다. 온갖 공상이 한테 엉키어서는 머리위를 짓누르는 듯, 계 숙은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골목안도 방안도 무서우리만큼이나 괴괴하다. 새벽녘이되 니까 싸늘하게 식은 온돌은 찬 기운이 돌아서 계숙은 이불 자락으로 어깨를 두르고 앉아서 곰곰 생각을 한 끝에 입때 까지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한테 이용를 당하고 착취만 당 했으니까, 남의 오해를 받거나 잠간 창피는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경자를 단단히 이용해서 내 앞길을 개척해보자)

하는 결론을 얻었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나서는

(인제 더 생각할 게 없어. 한번 맘 먹은 대로 실행만 허면 고만이다)

하고는 이불자락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였다.

여전히 머리만 아프고 잠은 아니와서 불을 켜고 팔뚝시계 를 보니 새로 세시다. 이번에는 전부터 가보고 싶던 문화의 중심지인 동경의 모든 생활이 눈 앞에 떠올랐다.

네온싸인이 휘황한 은좌통(銀座通)으로 양장을 하고 활발히 산보를 다니는 저의 자태를 그리어 보았다.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기를 펴고 어느 대학에 입학해서 문학에 관 한 강의를 듣고 앉은 제얼굴이 보였다. 그러다가 몇해 뒤에 여러 동무들이 정거장에 가득히 마중을 나와서 여봐라는 듯 이 뽐내고 내리는 장면까지 상상해보았다. 그 뒤에는 가장 진보된 인텔리 여성으로 각방면에 활동을 하고 전문잡지에 저의 얼굴이 실려서 아주 여류 문단을 독차지할 그날이 바 로 내일 모레인 것같았다. 그러다가는

(그래두 병식 오빠나 수영씨헌테 의논이나 한번 해볼까?)

(그럼 백화점에 들어갈 때처럼 또 반대를 헐걸)

하고 제가 묻고는 일변 제가 대답을 한다.

(내가 그렇게 병구완을 해 주었는데 어쩌면 한번두 나를 찾지 않을까? 사람이 왜 그렇게 무뚝뚝하게 생겼어?)

하고 수영이가 한번도 찾아 주지 않은 것이 야속도 하였 다. 또 그러다가

『참 조경호는 그렇게 편지질을 하더니 왜 요샌 소식이 없 을까? 벌써 사랑이 식었나?』

하고는 호호호 하고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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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났네. 큰일 났어.』

병식은 신문을 배달하고 들어오는 수영을 판매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계실 옆으로 끌고가며 호들갑을 떤다.

『뭬 별안간 큰일이 났단말인가?』

수영도 계숙의 일이 매우 궁금하던 참이라 눈이 동그래지 지 않을 수 없었다. 배달복 소매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이리 들어오게.』

하고 병식을 배달부들이 모이는 판매소 옆방으로 끌고 들 어갔다.

『여보게 우리 나가세. 여기서 어디 얘기를 하겠나?』

『여기두 조용한데 아무데면 어떤가? 나가면 자네 또 술먹 게.』

하고 두 사람은 신문을 접느라고 흐트러 놓아서 쓰레기통 을 이어논 것처럼 지저분한 속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병식이가 이틀 동안이나 경자의 뒤를 따라다니며 염탐을 한 결과 계숙을 꼬여내는 계집애가 「조경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인 것이 판명되었다. 동시에 조경자는 조경호의 사촌누이로 십여년 전에 죽은 경호의 삼촌이, 해주로 벼슬 을 갔다가 데려온 기생의 몸에서 난 딸이라는 것까지 수소 문을 해서 수영의 앞에 탄로를 시켰다. 그리고 경자가 계숙 이와 스끼야끼 집에서 나오는 길로 자정도 넘었는데 관수동 (觀水洞)에 있는 저의 집에는 잠깐 다녀만 나와서 교동(校 洞) 큰집으로 불이나케 간 것으로 보아 경자가 그 날밤의 경과를 시급히 보고하라는 경호의 명령을 받았던 것이 틀림 없으리라고 추측되었다.

『계숙이가 정말 경호의 미끼를 단단히 물었네그려. 인젠 줄을 감는대로 끌려 들어가는 판이야 경호의 적지 않은 돈 이 경자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은, 그 천진이 그저 모르는 눈 치니 딱해 죽겠네그려 제 아무리 영악한 체를 해두 계집애 는 제꾀에 넘어가는 법이거든.』

병식은 제가 정탐에 성공한 것을 자랑비슷이 떠들어댄다.

수영은 눈썹 끝까지 긴장이 되어서 병식의 보고를 들었다.

흥분이 될수록 입을 꼭다무는 그의 버릇으로 병식의 말에 일일이 맞장구는 치지 않아도 속으로는 (저 사람의 말이 틀 림 없구나) 하고 끄덕였다.

『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자네 생각엔 어떡했으면 좋겠 나?』

수영은 창졸간이라 무엇이라고 대답을 할지 삭막했다. 두 시간 동안이나 달음박질을 한 끝에 그런 소리를 들어서 얼 굴은 술이 취한 사람처럼 벌개 가지고 씨근씨근 숨만 가쁘 게 쉬고 앉았다.

두 친구의 표정은 비상히 긴장하여졌다.

『나가세. 찬바람이나 좀 쏘여야겠네.』

병식이가 나가자고 할 때는 말리던 수영이가 벌떡 일어선 다.

『왜 싫다더니.』

병식은 오금을 박고 따라 일어섰다.

길거리로 나와서 걸어다니니까 찬바람을 쏘여서 머리는 좀 식는 것같으나 무작정하고 왔다갔다 하기가 멋쩍어서

『어디 좀 들어 앉을까?』

하고 이번에도 수영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금이 있나?』

『응, 오늘은 신문 대금 받은 게 있네.』

두 사람은 골목안의 조그만 청요릿집으로 들어갔다. 조용 한 뒷방에 단둘이 들어앉아서 머리를 마주 보았다.

전깃불이 들어 왔다. 조금전까지 벌겋게 익은 듯하던 수영 의 얼굴이 해쓱해진 것이 병식의 눈에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자네 왜 또 몸이 불편한가?』

병식의 묻는 말에 수영은 고개만 흔들어 보인다.

배갈 반병에 우동 두 그릇이 들어왔다.

『이한 겸 난 우선 한잔 해야겠네. 심기두 불편헌 모양이 니 자네두 오늘일랑 좀 마셔보게.』

하고 병식은 술을 권한다. 수영은 술잔을 받아들고

『고뿌로 한잔 쭈욱 들이켰으면 좋겠네만……』

하고는 그잔을 상위에다 폭삭 엎어 놓는다.

수영은 아무말도 아니하고 국수국물만 후룩후룩마시다가

『난 지금 계숙씨 한테루 가겠네!』

하고 수영은 젓가락을 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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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가긴 어딜 간다구 이렇게 서두르나?』

병식은 도망군이 붙들 듯 수영의 배달복 소맷자락을 붙잡 았다.

수영은 병식의 손을 뿌리치며

『놓게, 놔! 난 계숙이를 그대루 내버려 둘 수가 없네.』

『그건 나두 동감이야. 계숙의 일에 자네만 걱정이 될게 아니겠지. 그렇지만 가서 어떻게 허겠다는 말이나 허구가야 허지않겠나? 날더러 여기 앉아서 멀거니 기다리구 있으란 말인가? 앞뒷 생각을 헐만한 사람이 왜 이렇게 조급히 구 나? 자 앉게, 가드라도 내말을 좀 듣구 가게.』

병식은 씨근거리고 섰는 수영의 어깨에 매어 달리 듯한다.

『그러지 않어두 나역시 생각헌게 있으니 잠깐만 앉게.』

수영은 병식이가 「나두 생각헌게 있다」는 말에 못이기는 체하고 엉거주춤 한다.

『그래 자네 생각엔 이 일을 어떻게 조처했으면 좋겠나?』

『난 참 정말 계숙이가 의식적으로 유혹을 당허는 것인가 아닌가를 물어 볼 텐데. 조경자의 집으로 정말 들어갈 것인 지 알아 보고나서 내 힘껏은 반대를 허겠네.』

『무슨 자격으로 자네가 계숙의 일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 라 참견을 한단말인가? 그러길래 아직도 숫배기란 말일 세.』

『자격은 무슨 자격? 잘 아는 사람으로서 권고두 못헌단 말인가?』

수영은 불끈하고 성미가 났다.

『그게 쑥스럽단 말야. 첫째 자네는 아직 아무 자격두 없 네. 더군다나 여자는 저의 비밀이나 남몰래허는 일을 이편 에서 아는 체허면 대단히 싫어하는 법이니 아주 질색을 허 는 여자두 있어. 그러니 자네는 계숙이를 만나드래두 그 일 만은 모르는 체허구 시침을 딱 잡아떼야지, 잘못건드리면 그야말로 자는 호랑이 코침 주길세. 또는 계숙이가 여간 고 집이 대단허구 자존심이 굳센 여자라구.』

『그럼 자네가 생각헌걸 솔직허게 얘기를 좀 해 주게그 려.』

수영은 거진 애원이나 하듯 병식의 앞으로 다가 앉는다.

병식은 마시다 남은 배갈을 고뿌에다 퐁퐁퐁 따라서 단숨에 들이킨다. 술이 독해서 딸국질이 나는 것을 코를 쥐고 억지 로 참다가

『여보게 그럼 내가 묻는 대로 꼭 대답을 허겠나?』

『해두 괜찮을 말이면 허지.』

『아닐세. 내가 자네의 속을 뽑아 보려는게 아니라, 자네의 생각을 똑바루 알아야만 내가 좋은 방침을 말할 수가 있으 니까 말일세.』

『뒤는 고만 까구 어서 말을 해봐.』

수영은 매우 갑갑해서 채근을 한다. 병식은 무슨 명상(瞑 想)이나 하듯이 눈을 딱 감고는 한참이나 ?을 삭히고 앉았 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난산하는 부인네의 표정이 된다.

『어서 말하게. 온 갑갑해 죽겠네 그려.』

그래도 병식은 여전히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난 오늘까지의 자네와 나 사이에 친 형제보덤 더 가까운 우정으로……』

하고는 또 말끝을 맺지 않는다.

『그런 말은 뭐라구 새삼스럽게 허는겐가?』

병식은 술기운을 빌었다.

『자네 진심으로 계숙이를 사랑허나?』

이만 한 마디가 천근이나 되는 듯 병식의 입에서 떨어지기 가 어려웠다.

『……』

『대답허게. 솔직한 대답을 들려 주게. 어쩌면 자네의 말 한 마디로 몇 사람의 운명이 좌우될는지도 모르네.』

『……』

수영은 방바닥을 뚫어지도록 내려다 보고 입술만 깨문다.

『갑갑허이 어서 한 마디만.』

하고 병식은 잠이나 깨우는 것처럼 수영의 소매를 잡아 흔 들며 조급히 대답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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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검은 수영의 눈은 어떠한 결심의 빛으로 번뜩였다.

『사랑허네! 난 계숙이를 진으로 사랑허구 있네!』

그 목소리는 응성깊으면서도 조금 떨려 나왔다.

병식은 수영의 이말 한 마디에 전신에 감전이나 된 것처럼 머리를 떨어뜨린체 꼼짝도 못하고 앉았다. 원체 핏기없는 얼굴이 더한층 창백해 보인다.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참기 어려운 고통이 병식 의 머리속을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수영의 눈앞에 나타내지를 않고 억지로 짓누르기가 또한 견디기 어려운 고 통이었다.

수영의 입에서 나는 계숙이를 사랑허네 하는 가장 중요한 한마디가 떨어진 것은 미리부터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 다. 그러나 병식에게는 그말한 마디가 영혼에 치명상을 받 는 것과 진배없이 아팠다. 짝사랑에 들볶이던 가슴을 너무 나 날카롭게 찔렸다. 수영이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앉아있 는 것조차 괴로워서 당장에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고 싶었 다. 제 몸뚱이가 이 세상 아무의 눈에나 띄우지 말았으면 하였다.

(참어라! 참지 않으면 네가 어쩔테냐?)

하고 제 마음을 꾸짖었다. 부지중에 눈물이 뜨끈하고 눈두 덩으로 배어나오는 것을 수영이 몰래 손등으로 부볏다.

수영도 병식의 눈치가 뜻 밖에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저 사람이 무슨 까닭에 나보다도 더 흥분이 되었을까?)

하고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병식은 한참만에야

『여보게 수영이!』

하고 수영의 손을 쥐었다.

『끝까지 계숙이를 사랑해 주게! 그러면 내게두 더 기쁜일 이 없겠네.』

하고 입모습의 근육을 끌어 올리며 웃는다.

그것은 웃는다느니보다 울음이 터지려는 표정이었다.

수영이가 저의 시선을 피해서 외면을 하고 잠자코 있는 것 을 보고 병식은

『이 쓸쓸헌 세상에서 계숙이는 내게두 단 하나 밖에 없 는……』 하고 말문이 막혔다가

『누구보다도 사랑허는 내 누이였네!』

병식은 감격에 겨워 소리 없이 느꼈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는 어린애와 같이 목젖만 껄떡인다.

수영은 병식에게 대해서 고맙다고 해야 옳을지, 미안하다 고 해야 옳을지 몰랐다. 병식의 말과 표정이 과도히 흥분된 것으로 보아 병식도 속으로는 계숙을 무한히 사랑하고 있었 다는 것만은 짐작이 되었다.

(내가 그 눈치를 인제야 채다니 참말 멍텅구리였구나)

하였다.

『고만 나가세. 머리가 아퍼서 바람을 좀 쏘여야겠네.』

수영이 역시 병식의 앞에다가 저를 오래 앉혀 놓고 싶지가 않았다.

『이왕이면 한잔 더 내게. 내야 갈데가 없는 사람이 아닌 가?』

『오늘은 술을 더 먹어선 못쓰네. 자! 나하구 같이 집으루 가세.』

『집에를 뭣하러 벌써 들어간단 말인가? 아직두 초저녁인 데.』

『어쨌든 나가세. 난 더 앉았기가 정말 싫으이.』

수영은 병식을 억지로 일으켜 부축하듯 하고 집으로 끌고 갔다. 병식이가 중간에 다른 데로 새기만 하면 술을 정신이 없도록 퍼부을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거리에는 벌써 행인의 발자취가 끊지고 군데군데의 구멍가 게는 문을 닫았다. 어둠침침한 골목으로 올라가자니 바람만 흑흑 느껴지도록 불어내린다.

병식의 집까지 당도하도록 두 친구는 말이 없었다.

병식이가 대문을 발길로 걷어차고 들어가도 안방에서는 벌 써 잠이 들었는지 내어다보는 사람이 없다. 건넌방으로 들 어가자 병식은 머리맡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들었다. 불빛에 눈을 찌긋하고 보다가 잠자코 뒤에 따라 들어오는 수영에게 그 편지를 던져 주듯한다.

그것은 계숙이가 부친 속달우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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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급히 갈겨쓴 글씨였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두사람의 입에서 똑같은 말이 동시에 나왔다. 병식이더러 피봉을 찢으라고 해서 둘이 머리를 마주대고 읽었다.

「한 시간쯤전에 수영씨에게 들였다가 허형을 하였습니다.

요새 아주 쾌차하신지요. 오빠께서도 요새는 별고나 없으실 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런데 두분께 긴급히 의논할 말씀이 있으니 미안하지만 제게로 잠깐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아홉 시까지 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즉일 오후 일곱시반」

계숙의 편지를 읽고나서 병식은 무릎을 탁 치며

『마침 잘됐네. 필경 그일루 의견을 들어보려는 모양인데 자네가 대표루 가 보게.』

『글쎄.』

『글쎄가 뭔가? 사람이 왜 그렇게 냉뛸성이 없나? 이왕 기 회가 좋으니 쇠뿔두 단김에 빼랬다구 자네 속생각을 단도직 입으로 설파허게그려. 경자가 저의 집으루 들어가자구 짓조 르듯 허니까, 어쩔 줄을 몰라서 갈팡질팡허는 눈치니 그말 이 나오기 전에 앞질러서 토설을 허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수영은 뒤통수만 긁는다.

『그 사람 참 벽창홀세. 「난 당신을 사랑허니 계숙씨두 나를 사랑허느냐」구 바싹 달겨들란말야. 그러면 얘쓰나 노 오나 간에 대답이 있을게 아닌가? 그담엠 자네헌테 정말 자 격이 생긴단 말일세.』

『글쎄 자격이 무슨 자격이여?』

『온 그 사람 말귀두 못 알아듣네. 연애두 배워가며 헌단 말인가? 사랑허는 사람, 즉 생사와 고락을 같이 허자구 맹 서헌 사람으로서의 자격말이야. 그 자격을 얻은 담에야 정 정당당허게끔 시비를 가릴 수가 있지 않은가? 그때는 그일 에 찬성을 허거나 반대를 헐 권리가 생긴단 말일세.』

수영은 이제 와서 병식의 코취를 받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 고 우습기도 하였다. 속으로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리라) 하면서도 병식이가 시키는 대로 (네 그저 분부대로하오리다) 하기는 자존심이 땅겨서

『온 구변이 있어야지.』

하고 이번에는 일부러 못난 체를한다. 병식은 혀를 끌끌차 면

『말이란 솔직하게 진심껏 허면 누구나 감동이 되는 법이 야. 이건 웅변대회엘 가는줄 아나.』

하고 연방 놀려댄다. 얼마전까지도 그다지 침울해 하던 사 람이 실없다고 하리만큼 태도가 변하였다. 술기운에 말이 헤퍼진 것도 사실이지만, 병식은 제 성질대로 양증으로 말 과 행동을 가져서 수영의 기분까지 밝게 해준다.

『꾸물거리지 말구 어서 가보게. 지금 몇 시나 됐을까? 제 어길 시계를 그저 못찾어서……』

하고 방안을 둘러보다가, 일어서서도 머뭇거리기만 하는 수영의 등을 떠다 밀며

『온 갑갑해 죽겠네. 자네허구 말을 허느니 쇠귀에 경을 읽는게 낫겠네.』

하고는 (가든 말든 난 모른다)는 듯이 아랫목에 가 퍽 쓰러 져버린다.

수영이가 문을 열고 문지방을 타고 서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이 사람아 추으이! 문닫게.』

하고 병식은 짜증을 더럭 내며 모로 누워버린다.

『그럼 다녀옴세. 꼭 기다려 주게.』

한 마디를 던지고 수영은 밖으로 나갔다.

큰길로 휘걱거리고 (걸어가면서도 계숙이와 마주 앉으면 무슨 말을 어떻게 꺼집어낼까) 하고 생각을 허니 가슴부터 울렁거린다. 만나서는 이리이리 하리라하고 글을 외듯하고 걸어가건만 어느틈에 얼토당토 않은 잡념이 쐐기를 지른다.

계숙이가 들어 있는 그 눈에 익은 들백 앞까지 다달았을 때 이웃집에서 아홉시를 치는 자명종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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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의 방에는 불이 환하게 켜졌다. 수영은

(집에 가서 양복이나 바꾸어 입구 올걸)

하고 배달복 앞자락을 여몄다. 「이리오너라」하기도 안됐 고 「계숙씨 계십니까?」 하고 부르기도 무엇해서, 대문앞 에서 버정거리며 헛기침을 두어번 하였다.

들창문이 빠금히 열렸다. 처음에는 계숙의 눈만 보이다가 들창을 들어올리는대로 걀쯤한 얼굴이 반쯤 내밀었다. 등뒤 의 전등불이 내려비쳐서 저녁화장이 곱게 먹은 계숙의 얼굴 은 달밤에 갸웃이 담을 넘겨다보는 흰 불두화송이와도 같이 환하게 비쳤다. 수영은 눈이 황홀할 지경이었다. 으레 기다 릴 줄 알았고 만날 줄도 알고 간 것이언만 뜻밖에 마주친 것처럼 가슴속에서는 방아를 찧는다.

『어서 들어오서요.』

계숙은 들창문을 탁 닫고 약빨로 돌아나와서 문을 열어 준 다. 수영은 굽실거리면서도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계숙은 수영을 방으로 안내하며

『이렇게 누추헌데를 오십사고 해서……』

하면서 경대를 밀어 놓며 방석을 깔며 부산을 떤다.

『서군이 몸이 불편해서…… 내가 마침 갔다가 그래서……

왔세요.』

혀끝이 짧은 사람처럼 말이 떠듬떠듬하다. 둘이 그만큼 친 해졌건만 계숙을 사사로이 찾아온 것은 처음일뿐더러, 이기 나 지나간에 단판씨름을 할 생각을 하니까 입학시험이나 보 러간 학생만큼이나 긴장이 된다. 윗목에 가서 상진가는 꿀 단지처럼 앉았으려니 무릎 위에 올려 논 손이 조금씩 떨릴 지경이다. 계숙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왜 오빠가 대단히 않으세요.』

하고 놀란다. 가랑가랑한 목소리가 오늘 저녁에는 더한층 부드럽고 은근한 맛이었다.

『아니 뭐 누을 지경은 아니지만……』

『또 술병이 나신게로군요. 몸은 약한데다가 자꾸만 비관 을 허구 약주만 잡숴서 큰 걱정이야요.』

그 동안 열인을 많이 한 계숙의 눈에는 수영이가 제 앞에 서 새삼스러이 수줍어 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십년이나 뚜드려 먹은 목탁처럼 빠들빠 들하게 낧아서 대갈마치가 다 된 서울청년, 더구나 조경호 와 같은 인물과 비교해볼 때, 어수룩하고 듬쑥한 맛이 몸을 턱 살리고 싶을 만큼 믿음성스러웠다.

『서군이 편지를 받구 올겐데 궁금허니 날더러 대신 가보 라구 해서……』

『왜 꼭 오십시사고 청해야만 오시나요? 우리가 만난지는 벌써 언젠데 저 있는 데로 찾어 오시긴 오늘이 첨이시죠?

오늘은 바람이 잘못 불었구먼요.』

하고 살짝 웃어 보이며 아프지 않을만큼 꼬집는다.

『이 근처엔 날마다 오지만 늘 안계신 줄 아니까……』

수영은 또다시 배달복 자락을 여미며

(여기 온 체통이 사나와서)

하고 다시 한번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온 것을 후회하였 다. 계숙은 말끄러미 수영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참 고맙습니다.』

하고 일본 여자처럼 두 손등에 이마가 닿도록 납신 절을 한다.

『무에 그렇게 고마우세요?』

『신문을 넣어 주셔서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신문을 넣고도 당초에 돈을 받으러 오질 않길래 어림치 구 짐작을 했죠. 안주인이 몇번이나 꽂아나가기까지 했드래 요. 내가 봤드면 청허지두 않었는데 왜 신문을 몰래넣고 달 아나느냐고 야단을 칠걸 그랬어요.』

하고 간지럼을 타는 듯한 웃음을 웃는다.

계숙의 말과 표정에는 애교가 넘친다. 수영도 긴장되었던 신경이 가닥가닥 풀리고 계숙이가 풍기는 명랑한 기분에 끌 려 들어가서

『그럼 지금 당장에 몇 달치 신문 대감을 내시지요.』

하고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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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미리 준비하였던 과일과 과자를 꺼내놓고 연방 권 한다. 두 사람은 그 사건 당시에 함께 활동하던 추억담으로 한시간이나 보냈다. 붙잡히 가던 일, 감옥에서 지내던 생각 을 되풀이 하는 동안에 수영과 계숙의 마음은 차츰차츰 한 끄나풀에 얽어 매어지는 것과 같이 바빠졌다. 영혼과 육체 가 한 살 한뼈로 녹아 들어가는 듯이 친골해지는 것을 둘이 함께 느꼈다.

『난 그 시절이 그리워요! 온 몸의 피를 끓이던 그때가 여 간 그립지 않아요!』

계숙은 수영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들비비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그립구 말구요. 우리는 언제든지 그때의 기분으로 살어 야 합니다! 정열(情熱)이 식은 사람은 산 송장이니까요. 다 만 가슴속의 불덩이를 아무 때나 함부로 꺼내지를 않을 뿐 이지요!』

두 사람은 머리를 숙였다. 가장 친한 친구의 주검 앞에서 묵도를 올리 듯하며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야 계숙은 머리 를 들고

『그런데 오늘 저녁에 오십시사고 헌건요. 저 다른게 아니 라……』

그 순간에 수영은 병식이가 먼저 자격을 얻은 다음에 다른 일을 조처하라고 일러 준 생각이 언뜻 나서 헛기침을 칵 한 뒤에

『그런데……』

하고 제딴에는 매우 기민하게 여자의 말을 중간에 체뜨렸 다.

『나두 계숙씨허구 단 둘이서만 헐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 요.』

『무슨 얘기야요?』

계숙의 눈은 호기심에 빛난다. 까만 구슬을 박아논 듯한 두 눈동자는 수영의 입가에 맴돌고 달린 듯,

『저……』

『무슨 말씀인데 그렇게 끄내기가 어려우서요?』

계숙은 바싹 다가앉는다. 수영은 얼굴에 심줄이 서고 숨까 지 가빠졌다. 다시 한참이나 숨을 돌리다가

『난 계숙씨를 사랑헙니다!』

무두무미하게 한 마디를 쏟아 놓고는 큰 짐이나 부린 듯 어깨로 숨을 쉰다.

『……』

수영의 턱밑에 쳐들고 있던 계숙의 얼굴은 황혼 때에 해바 라기처럼 폭 수그러졌다. 잠이 든 연봉오리같이 꼭 다물어 진 입술은 좀체로 열릴 것 같지가 않다.

수영은 전신의 용기를 다해서 그 넓적하고 두툼한 손으로 계숙의 손을 덥썩 쥐었다. 「아야야」 하고 소리를 지를만 큼이나 힘껏 쥐었다.

떡가락을 비벼논 듯 희고 매끈한 여자의 손가락은, 남자의 손아귀속에서 조금 꼬물거렸다. 반항이 아닌 반사운동이다.

계숙은 제 육체의 한 부분을 남자에게 가져가라고 내맡긴 듯이, 빼어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영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 그러나 저력 있게

『난 청량리서 계숙씨를 첨으로 만났을 때부터 인상이 퍽 깊었어요. 감옥에서두 하루두 빼놓지 않구 생각했구요. 나와 서두 계숙씨를 단지 한 사람 밖에 없는 여성의 동지루 여기 구 믿어왔어요. 그렇지만 신문배달 노릇을 해먹는 이 보잘 것 없는 나를 아무리 계급의식을 안 가진 계숙씨래두 상대 해 줄 것 같지가 않았어요. 더군다나 계숙씨는 사랑허는 사 람이 있는듯두 해서 입때 내맘을 표시허지 못허구 지냈지만 인제와선 계숙씨의 대답을 듣지 않구선 견딜 수가 없게 됐 에요.』

허고 마른 침을 꿀떡 삼키고 나서

『계숙씨 솔직히 대답을 들려 주세요!』

하고 계숙의 손을 잡아 흔든다.

수영이가 말의 구절구절을 꾹꾹 누를 때마다 계숙의 가슴 이 꾹꾹 눌리는 것 같았다. 조금도 말을 꾸미지는 않았어도 수영이로서 평생 처음으로 힘을 들인 웅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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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잡혔던 손을 살그머니 빼냈다. 찬바람을 쏘이고 다 니다가 난로 앞에가 앉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화끈달았다.

수영이가 벼르고 벼르던 끝에 치마 앞자락에다가 쏟아논 사 랑의 고백은 아직도 처녀인 계숙의 마음속에다 불을 지르고 야 말았다.

계숙은 눈을 내리깔고 될 수 있는대로 냉정히 생각해보려 고 무진 애를 쓴다. 저역시 수영을 사랑한다든지 아니한다 든지 양단간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부닥친 것 이다.

계숙은 이제까지 저를 따라다니던 연애의 걸신병이 들린 환자들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편지지에 향수를 뿌려보내는 남자를 보았다. 얼굴을 솜털 하나도 없이 면도를 하고 핥아 논것처럼 머릿기름을 바르고 와서 제 앞에서 알씬거리는 소 위 모던?뽀이를 보았다. 나중에는 하꾸라신사 전문학교 교 사 부잣집 아들, 피아노, 문화주택, 하다가 조경호를 눈앞에 붙잡아다 앉혔다. 수영의 곁에다가 꿇려놓고 번차례로 두 사람의 무게를 달아본다. 저울추는 수영의 편으로 묵직하게 처졌다.

경호의 몸에서 향수냄새가 품긴다면 수영의 몸에서는 조선 의 흙냄새가 맡히운다. 거름냄새까지 날 것 같다. 경호의 몸 무게가 여름 저녁 얕은 하늘에 떠도는 오색 영롱한 구름장 이라면 수영은 밭귀퉁이나 바닷가에서 비바람이 힘궂어도 꼼짝도 아니하는 바윗덩이 만큼이나 무겁고 든든하고 의지 성이 있다.

계숙은 수영의 곁에도 앉혀논 경호의 환영(幻影)을 손톱끝 으로 튀겨버렸다.

계숙은 전날에 지내온 관계는 그만두고라도 오늘 저녁의 수영의 태도만에도 머리가 숙어졌다. 인력것군의 복색을 하 고와서도 조금도 국축하는 기색이 없고 꺼칠꺼칠한 수염도 깎지 않은 얼굴에 땀을 흘려가며 떠듬떠듬 한마디씩 토하는 우렁찬 목소리! 여자 앞에서 조금도 굽힐 줄을 모르는 그 순박한 몸가짐 더구나 인생의 운명이 좌우될 그 대답을 입 을 꽉 다물고 앉아서 태연히 기다리는 태도에 적지 아니 감 동이 되었다.

한 십분이 지난 뒤에야 계숙은

『지금 제가 사랑허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지요?』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딴전을 붙였다. 고개를 반쯤 쳐들고 할끔 남자의 눈치를 보는 계숙의 두뺨은 온통 연지칠을 한 것같다.

『……』

『왜 말씀을 안허서요?』

『일태면 그런 사람이 있지나 않은가 허구서 헌말이에 요.』

수영은 발이 저려서 고쳐 앉으면서 발목을 주무른다.

『안얘요. 그렇지 않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그것버터 알어 야겠어요.』

『글쎄, 그건 혹시나 허구 가정(假定)해서 헌 말이라니까 요.』

『안될 말씀이죠. 남의 풍설을 들으셨다든지 짐작허시는게 있길래 그런 말씀이 입밖에 나온게 아니겠어요? 어서 똑바 루 말씀해 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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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저렇게 구중중헌게 다 들어와 앉어 있을까?) 하고 될 수 있는대로 멀찌감치 비켜 앉는다. 수영의 눈모 비단양말 로 덧버선을 신은 두 여자의 종아리로부터 머리를 지져서 꼬부려붙인 경자의 좁다란 이마까지 얼른 다녀내려갔다.

『그런데 오늘 왜 안갔어? 우린 지금 그리로 댕겨오는 길 야.』

『우리 시골서 저 손님이 오셔서 좀 일찍 나왔어.』

하다가는 점적허니 앉았던 수영이더러

『참 인사 하시죠.』

하고 두 여자를 소개한다. 경자는 마지못해서

『전 조경잡니다.』

하고 이화학당 출신처럼 고개만 까딱해 보인다.

『난 김수영이예요.』

수영은 경자의 얼굴을 흘껏 쳐다보고는

(옳지 네가 조경자로구나)

하고 고개를 정신에게로 돌렸다. 계숙은

『저 利瘤?부인 기자로 댕기는, 그리구 문사로 유명헌 ……』 하고 손을 펴다 대니까

『유정신이 올시다.』 하고 정신이는

(利일보사 배달부가 뭣허러 뒤어들어 왔을까?)

하면서 수영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정신이도 그때 퍽 활동을 했었어요. 이름은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계숙이가 파임을 낸다. 수영은 억지로 고개만 끄덕여 보였 다. 경자와 정신은 발가락으로 서로 꽁무니를 꼭꼭찔러가면 서 두 사람의 눈치만 힐끔힐끔 보고 앉았다.

수영은 두 계집애를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싶도록 얄미웠 다. (남은 지금 일평생에 중대한 의논을 허는 판인데 요망스 런 것 때문에 고만……) 하고 참을 수 없이 분하였다. 계숙도 그런 장면을 하필 정 신의 눈에까지 들킨 것이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정신이는 입이 빠르기로 유명할뿐더러 남의 소문을 잡지 에 내는 것이 직업인데 조계집애가 하필 오늘 저녁에 끌구 왔을까? 대문을 지쳐나 두었드면……)

하고는 후회를 하였다. 그렇건만 사색도 아니 보이고 앉았 으러니 마음이 여간 땅기지를 않는다. 정신은 빽빽한 방안 의 공기를 농치려고

『참 계숙이헌테 칭할게 있어 왔는데, 이월호에 원고하나 써 줄테야? 수필이든지, 단편이든지.』

하고 아직도 발그레한 계숙의 눈치를 본다.

『온 천만에 별소리를 다 허는구나. 내가 글이 다뭐냐? 백 화점의 여점원이……요새 들날리는 너같은 문사나 쓰지.』

하고 계숙이는 「해라」를 붙인다. 사실 둘의 사이는 그만 큼이나 가까웠다. 정신이는 그 사건 당시에 계숙이와 같이 가두의 연락을 하던, 일테면 동지였지만 계숙이가 백화점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잡지에다 써서 맨먼저 소문을 퍼뜨렸다.

그래서 근자에는 서로 틀린 사이였는데 어쩌다 경자의 동행 이 된 눈치다.

수영은 그 자리에 더 앉았을 수가 없어 「쨌」을 돌돌 말 아 쥐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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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병식을 허청대고 찾아 갈 수도 없었다.

『먼데는 나가지 않었길래 모자는 있지요.』

하고 병식의 댁내는 어린애가 칭얼거려서 안방으로 건너갔 다.

수영은 공연히 불길한 조짐이나 본 듯, 병식이가 다시 돌 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아랫방 머리맡으로 잉크 병이 놓인 곁에 꾸기꾸기 해서 내버린 원고지가 여러장이나 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병식이가 무엇을 적어놓고 나간 것 이나 아닌가 하고 그것을 펴보았다.

「일그러진 깨어진」 이러한 형용사만 쓰다가는 박박 긁어 버려서 의미를 뜯어볼 수가 없다. 시를 쓰려다가 쓰지를 못 하고 꾸겨 던진 모양이다.

수영은 그 종이에 구김살을 펴서 조각을 맞추어 보았다.

거기에는 커다란 글씨로 「서병식」 이라고 쓰고 나란히 다붙여서 최계숙 이라고 썼다. 그러고 바로 그 왼편에는 김 수영이라고 이름 셋을 나란히 썼다. 그러고 나서는 서병식 이란 제 이름을 잉크틈 듬뿍찍은 철필 끝으로 굵다랗게 꺾 쇠(ㄱ)를 쳤다. 세 사람 중의 저 한 사람을 도려낸 것이다.

그 힘있게 친 굵은 획은 드는 칼로 병식의 몸뚱이를 어깨 로부터 내려 찍어서 반에 쪼개낸 것 같아서 끔찍해 보였다.

수영은 부지중에 소름이 끼쳤다. 제 이름을 드러낸 뒤에 그 종이를 삼각형으로 접어서 그 한귀를 물어 뜯다가 팽개 를 친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수영은 병식의 심리상태가 유리쪽이나 대고 들여다보는 듯 하였다.

(아뿔싸, 내가 거기까지 몰랐구나!)

하고 제가 민감치 못했던 것을 뉘우쳤다.

(내가 아까 기쁨에 충만한 얼굴로 들어왔을 때, 병식이가 있었드면 어쩔번 했노, 병식의 푸수수한 머리를 꺼둘르며, 계숙이와 이러구 저러구 했다고 사랑을 허구 우리의 장래를 축복해달라고 꺼불었드면 어쩔번 했노)

수영은 한달음에 병식에게로 뛰어가고 싶었다. 무도나 하 듯이 껑충껑충 뛰어가고 싶었다. 요망스런 계집애년 때문에 장래일 까지는 의논을 못하고 일어선 것이 분하지만 어쨌든 그다지 자신이 없던 시험에 훌륭히 합격이 된 기쁨이란 비 길데가 없다.

서대문통 큰 길을 올라오면서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할 것 없이 닥치는대로 붙잡고 사랑의 승리를 자랑하고 싶었다.

유기전 앞을 지나다가 좌판에 벌여논 놋대야를 보고는 시골 서 추석이나 정월대보름날 꽹과리를 치고 두레를 놀며 뛰노 는 농군들을 연상하였다.

그것은 마치 가지고 싶어 못견디겠던 장난감을 저 혼자 얻 어가지고

『난 이거 가졌다누.』

하고 보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는 어린애와도 같았다.

날보라는 듯이 가슴을 내밀고 광화문통 큰길을 올라가는 데, 앞으로 벅차게 안기는 비바람이 ??리와 코끝을 따가는 것같건만, 수영에게다 대지(大地)의 숨결과 그 촉감이 봄바 람인 듯 부드러웠다. 휘파람으로 가장 유쾌한 때만 불던, 다 만 한가지 밖에 모르는 군함행진곡을 불면서 그 곡조에 발 을 맞추어 올라갔다. 북악산 등뒤에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듯 앞길이 환 한것도 같고, 길바닥이 바다처럼 환하게 트인 듯도 하다. 좀 더 과장해 말한다면 그다지 어둡고 캄캄하던 조선의 하늘이 화닥닥 밝아지는 것같기도 하였다. 연애는 젊은 사람의 감각을 때로는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 는 요술을 부리는 것이었다.

어서 일분 동안이라도 빨리 가서 병식의 머리를 껴둘르며

『흥 자네, 나를 빈충맞은 놈으로만 알었지? 아주 바보루 만 여겼지? 자! 이걸 보게!』

하고 몇십분 전에 얻은 무형의 선물을 가슴속에서 꺼내어 보이고 싶었다. 돈이 있으면 병식이를 술이라도 사주고 권 하기만 하면 저도 오늘 저녁만은 몇 사발이라도 마실 것 같 았다.

병식이가 제게 대해서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 계숙이 를 단넘 하느라고 친구를 보내놓고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 그까짓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저의 승리를 자랑 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할 뿐이었다.

어느덧 병식의 집 앞까지 당도하였다.

『병식이!』

하고 중문턱에 재분참 불렀다. 그제야 끝엣놈의 볼기짝을 종싹찰싹 뚜드리는 소리와 함께

『글쎄요 망할놈의 자식같으니 오늘두 삼전씩이나 까먹구 서 야끼모는 또 무슨 야끼모냐.』 하고는

『밖에 누가 왔나보다.』

하고 병식의 댁내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수영이가 마당에 들어선 것을 보고

『건너방에선 뭘해요?』

하고 조급하게 묻는다. 그래도 건너방이 잠잠하니까

『들어가 보셔요. 아마 자나봐요. 얘들이 하두 극성맞어 서……』 하고 수영이는 건넌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꼭 기다리고 있을줄 알았던 병식이가 간데 온데가 없다.

『어딜 갔을까?』

혼잣말을 하며 방안을 휘후 둘러보았다. 모자는 걸린 채 있는데 병식이가 입고 다니는 외투가 눈에 띄우지를 않는 다.

『어딜 나갔나요?』

안방 편으로 대고 소리를 질렀다.

『왜 방에 없어요?』

되려 물으며 병식의 댁내가 치마끈을 매며 건너 왔다.

『온 별일두 다 많지. 입때 저녁두 안하구 있다가? 어린애 를 올린다구 소리를 질른지가 얼마 안됐는데……』

하고 눈이 둥그레서 수영을 쳐다본다.

[편집]

수영은 병식을 허청대고 찾아 갈 수도 없었다.

『먼데는 나가지 않었길래 모자는 있지요.』

하고 병식의 댁내는 어린애가 칭얼거려서 안방으로 건너갔 다.

수영은 공연히 불길한 조짐이나 본 듯, 병식이가 다시 돌 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아랫방 머리맡으로 잉크 병이 놓인 곁에 꾸기꾸기 해서 내버린 원고지가 여러장이나 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병식이가 무엇을 적어놓고 나간 것 이나 아닌가 하고 그것을 펴보았다.

「일그러진 깨어진」 이러한 형용사만 쓰다가는 박박 긁어 버려서 의미를 뜯어볼 수가 없다. 시를 쓰려다가 쓰지를 못 하고 꾸겨 던진 모양이다.

수영은 그 종이에 구김살을 펴서 조각을 맞추어 보았다.

거기에는 커다란 글씨로 「서병식」 이라고 쓰고 나란히 다붙여서 최계숙 이라고 썼다. 그러고 바로 그 왼편에는 김 수영이라고 이름 셋을 나란히 썼다. 그러고 나서는 서병식 이란 제 이름을 잉크틈 듬뿍찍은 철필 끝으로 굵다랗게 꺾 쇠(ㄱ)를 쳤다. 세 사람 중의 저 한 사람을 도려낸 것이다.

그 힘있게 친 굵은 획은 드는 칼로 병식의 몸뚱이를 어깨 로부터 내려 찍어서 반에 쪼개낸 것 같아서 끔찍해 보였다.

수영은 부지중에 소름이 끼쳤다. 제 이름을 드러낸 뒤에 그 종이를 삼각형으로 접어서 그 한귀를 물어 뜯다가 팽개 를 친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수영은 병식의 심리상태가 유리쪽이나 대고 들여다보는 듯 하였다.

(아뿔싸, 내가 거기까지 몰랐구나!)

하고 제가 민감치 못했던 것을 뉘우쳤다.

(내가 아까 기쁨에 충만한 얼굴로 들어왔을 때, 병식이가 있었드면 어쩔번 했노, 병식의 푸수수한 머리를 꺼둘르며, 계숙이와 이러구 저러구 했다고 사랑을 허구 우리의 장래를 축복해달라고 꺼불었드면 어쩔번 했노)

하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얼굴이 화끈하고 달았다. 병 식에게 대해서 큰 죄나 지은 것처럼 혼자 앉아서도 머리가 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성급한 사람이 참을 수 없는 감정을 짓누르고 견디 기 어려운 고민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계숙을 저에게 사랑을 심어준 그 친구의 흉중을 살펴보니 고맙다고 해야 할는지 미안하다 해 야 할는지 몰랐다.

그런 것을 이제까지 그 사람이 옳다구나 하고 뛰어갔던 저 와 저의 신변에도 단지 하나인 여자를 여러해두고 골독히 유렴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기혼한 남자라는 것과의 누이 라고 불러온 윤리감(倫理感) 때문에 사랑을 희생한 병식의 태도를 비교해볼 때, 부끄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와서는 물건을 흥정하듯이 계숙의 사랑을 「옛 다 가져가거라」 하고 도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영이 역시 그 종이쪽을 폈다 접었다하며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심각한 고민을 맛보았다. 호소할 길 없는 슬픔에 가 슴이 벅찼다.

수영은 비로소 운명이라는 것보다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얼기설기 얼크러지는 모든 복잡한 관계가 사람의 두뇌는 풀 어 볼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병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열 한시가 지 나고 자정이 넘도록 돌아올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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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병식을 기다리다 못해서 찾아 나섰다. (술집 밖에는 갈 데가 없으리라) 하고 근처의 술집을 모조리 뒤졌다. 목로 중에도 아주 너절한 집 부엌 바닥에 또 아리방석을 깔고 쭈 그리고 앉아서 어웅한 숲속의 부엉새 모양으로 두 눈만 꿈 벅꿈벅 하고 있는 병식을 발견하였다. 술군은 하나도 없는 데 술청의 마누라는 앉아서 코를 곤다.

『아 자네 여기 있었네 그려.』

하고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병식은 한참이나 얼이 빠진 사람처럼 물끄러미 수영을 쳐다만보다가

『어떻게 됐나?』

하고 쓸쓸히 웃어 보인다. 그 웃음은 실성한 사람이 웃는 입모습의 표정과 같이 언뜻 보기에도 이상스러웠다. 술은 입만 먹어도 얼굴만 해쓱해지는 사람이지만 혀끝이 말을 아 니들을 정도로 취한모양이다.

『집으루 가세. 여기서 무슨 얘기를 허겠나.』

수영이가 병식의 겨드랑이를 거드니까

『가긴 어딜 가? 내란놈이 집이 어디 있어?』

하고 뿌리친다.

『어서 일어나게. 글쎄 이 행길 같은 데서 밤을 샐텐가?』

병식은 팔을 공중으로 내저으며

『가만 내버려 둬! 글쎄 어떻게 됐느냐 말야?』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자네 말대루 자격은 얻은 셈일세. 그렇지만 중간에 경자 란 계집애가 뛰어들어서……』

하고는 하는 수 없이 대강 경과를 보고하였다. 병식이가 정신을 차리고 듣건말건 간단하게나마 보고를 할 의무를 느 꼈던 것이다.

『거 잘됐군 잘됐어. 내 짐작이 틀릴 리가 있나.

하고는 또 물끄러미 수영을 쳐다보더니

『그럼 한턱 내야지 어쩐 말이야. 김수영이가 내게 한잔을 안내야 경계가 옳은가?』 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여보 안주없이 곱빼기루 두잔만』

하고 술잔을 들었다 턱 놓는 바람에, 술청의 마누라가 잠 이 번쩍 깨서 양푼을 잡는다.

『오늘저녁엔 자네두 한잔먹을 테지. 독약이 아닌담에야.』

『먹겠네.』

수영은 한숨을 섞어 대답을 하였다.

『그렇지만 여보게 오늘은 술을 정침하게. 내가 대신 먹어 줌세.』

『오늘만 더 먹겠네. 먹다먹다 못다 먹으면 저 술독에 가 빠져 죽을테야. 그러면야 팔자가 좀 좋겠나.』

그러자 술청에서

『두분 약주 듭쇼.』 한다.

병식은 수영의 어깨에 팔을 얹고 몸을 실리듯 하고 술잔을 높이 들면서

『요오 우리 매부두 한잔 들게.』

하며 의미깊은 웃음을 웃는다.

『어느새 그게 다 무슨 소리여?』

매부라는 말이 뜨끔하게 수영의 고막을 울렸든 것이다. 매 부? 매부! 하고 몇 달이나 속으로 뇌였다.

사기사발은 쟁그렁하고 소리를 내며 마주 부딪쳤다. 수영 은 병식의 술을 빼앗듯 해서 제갈에 다반이나 지워 가지고 거진 단숨에 한사발이나 실하게 되는 약주술을 벌떡벌떡 들 이켰다. 그만한 분량의 술을 마셔보기는 생후 처음이었다.

병식은 상을 찌푸리고 두어 모금 마시다가는 구역이 나서 부엌바닥에다 끼얹었다. 그러면서도 주인없는 빈방을 지키고 앉았자니 무미하기 짝이 없어서 수영은 웃목에 조그만 책상위에 흩으려 놓은 잠지를 이것저 것 뒤적 거렸다. 시고 소설이고 간에 문예방면에는 취미도 없거니와 일부러 그 방면에는 재미를 붙이지 않으려는 터이 라 문예난은 훌훌넘겼다. 그러나 제가 항상 유의하고 틈만 있으면 아직도 공부를 계속하는 농촌문제에 한하여서는 새 로나오는 잡지나 신문이나 하나도 빼어 놓지 않고 읽어왔 다. 정말(丁抹) 다녀온 이야기를 두고 두고 우려먹고 「조선 농촌 문제특집」이니 농촌 진흥운동이니 궁민구 제책이니 하니 기사를 보다가는

『이게 다 무슨 어림없는 공상이냐. 저희는 하얀 이밥을 먹고 자빠져서 심심풀이로 이따위 소리를 늘어놓는 게지.

참 정말 조선농민의 생활을 저희가 알 까닭이 있나?』

하고 혼자 분객을 하기도 여러번이었다. 그러면서 수영은 누구에게나 저의 사상이나 또는 농촌 문제에 관한 의견을 발표하는 법이 없다. 사상문제나 예술 문제를 가지고 병식 이와도 여러번 밤을 새우다시피 토론을 하고 얼굴에 핏대까 지 올려가면서 서로 저의 주장을 고집하다가도

『이론이란 결국 공상일세. 우리는 인제부터 붓끝으로 나 입뿌리로 떠들기만 허는 것을 부끄러워헐 줄 알어야하네.』

하고 저역시 이론을 캐느라고 긴 시간을 허비한 것을 후회 하고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수영은 잡지중에서 새로 나온 것 한 권을 펴들고 제목만 훑어 보다가 병식의 시가 실린 것을 발견하였다. 그 시는

「조선은 술을 먹인다」 라는 제목으로 산문시(散文詩) 체로 쓴 것이었다.

조선은 술을 먹인다.

젊은 사람의 입을 어기고 독한 술을 들어붓는다.

그네들의 마음은 화장터의 새벽처럼 쓸쓸하고 그네들의 생활은 해수욕장의 가을과 같이 공허(空虛)하여 그마음 그 생활에서 다만 한 순간이라도 떠나 보고자 술을 마신다.

아편 대신으로 죽음 대신으로 알콜을 삼킨다.

거리마다 양조소(釀造所)요 골목마다 색주가다.

카페의 테블을 뚜드리며 술잔을 부수는 창백한 얼굴이 이땅의 테로리스트라면, 문앞에 오줌을 기는 용감한 사나 이는 피가 끓는 가두의 반역아란 말이냐?

그렇다면 밤 깊은 거리의 전봇대를 붙잡고 통곡하는 흰 두루마기는 이 바닥의 비분을 독차지한 지사 로구나!

아아 조선은 술을 먹인다.

마음 약한 제 자손의 입을 어기고 술을 퍼붓는다.

생재목에 알콜을 끼얹어 태워버리려 한다.

수영은 병식의 시를 읽고 나서 눈살을 찌프렸다.

『조선은 술루 망해. 술을 먹는데두 환경 탓이람. 젊은 놈 들의 꼴이 낙지발처럼 흐득거리니 밤낮 이꼴일 수 밖에.』

하고는 보던 잡지를 책상 위에다 동댕이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제 마음의 고백을 솔직하게 써 서 발표한 병식의 서글픈 심정이 가엾기도 하였다. 그와 동 시에 비록 잠시잠간이라도 한독 술에다가 벌룽거리는 청춘 의 염통을 젓담그려는 조선의 일군들이 무한히 불쌍하였다.

털끝만한 위안도 받지 못하고 현실에 짓눌려 허덕이는 그네 들 풀한 포기 없는 사막을 맥이 풀려서 터벌터벌 걸어가는 그네들! 어떠한 희망의 목표를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생활 에 쪼들리며 비틀걸음을 치다가 이름 모를 잡초와 같이 길 거리에 식어져버리는 그네들!

수영은 그네들을 위하여 울고 싶었다. 저 자신도 그 중의 한사람을 면치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주먹으로 가슴을 뚜드 리며 통곡을 하여도 시원치 않을상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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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병식을 기다리다 못해서 찾아 나섰다. (술집 밖에는 갈 데가 없으리라) 하고 근처의 술집을 모조리 뒤졌다. 목로 중에도 아주 너절한 집 부엌 바닥에 또 아리방석을 깔고 쭈 그리고 앉아서 어웅한 숲속의 부엉새 모양으로 두 눈만 꿈 벅꿈벅 하고 있는 병식을 발견하였다. 술군은 하나도 없는 데 술청의 마누라는 앉아서 코를 곤다.

『아 자네 여기 있었네 그려.』

하고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병식은 한참이나 얼이 빠진 사람처럼 물끄러미 수영을 쳐다만보다가

『어떻게 됐나?』

하고 쓸쓸히 웃어 보인다. 그 웃음은 실성한 사람이 웃는 입모습의 표정과 같이 언뜻 보기에도 이상스러웠다. 술은 입만 먹어도 얼굴만 해쓱해지는 사람이지만 혀끝이 말을 아 니들을 정도로 취한모양이다.

『집으루 가세. 여기서 무슨 얘기를 허겠나.』

수영이가 병식의 겨드랑이를 거드니까

『가긴 어딜 가? 내란놈이 집이 어디 있어?』

하고 뿌리친다.

『어서 일어나게. 글쎄 이 행길 같은 데서 밤을 샐텐가?』

병식은 팔을 공중으로 내저으며

『가만 내버려 둬! 글쎄 어떻게 됐느냐 말야?』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자네 말대루 자격은 얻은 셈일세. 그렇지만 중간에 경자 란 계집애가 뛰어들어서……』

하고는 하는 수 없이 대강 경과를 보고하였다. 병식이가 정신을 차리고 듣건말건 간단하게나마 보고를 할 의무를 느 꼈던 것이다.

『거 잘됐군 잘됐어. 내 짐작이 틀릴 리가 있나.

하고는 또 물끄러미 수영을 쳐다보더니

『그럼 한턱 내야지 어쩐 말이야. 김수영이가 내게 한잔을 안내야 경계가 옳은가?』 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여보 안주없이 곱빼기루 두잔만』

하고 술잔을 들었다 턱 놓는 바람에, 술청의 마누라가 잠 이 번쩍 깨서 양푼을 잡는다.

『오늘저녁엔 자네두 한잔먹을 테지. 독약이 아닌담에야.』

『먹겠네.』

수영은 한숨을 섞어 대답을 하였다.

『그렇지만 여보게 오늘은 술을 정침하게. 내가 대신 먹어 줌세.』

『오늘만 더 먹겠네. 먹다먹다 못다 먹으면 저 술독에 가 빠져 죽을테야. 그러면야 팔자가 좀 좋겠나.』

그러자 술청에서

『두분 약주 듭쇼.』 한다.

병식은 수영의 어깨에 팔을 얹고 몸을 실리듯 하고 술잔을 높이 들면서

『요오 우리 매부두 한잔 들게.』

하며 의미깊은 웃음을 웃는다.

『어느새 그게 다 무슨 소리여?』

매부라는 말이 뜨끔하게 수영의 고막을 울렸든 것이다. 매 부? 매부! 하고 몇 달이나 속으로 뇌였다.

사기사발은 쟁그렁하고 소리를 내며 마주 부딪쳤다. 수영 은 병식의 술을 빼앗듯 해서 제갈에 다반이나 지워 가지고 거진 단숨에 한사발이나 실하게 되는 약주술을 벌떡벌떡 들 이켰다. 그만한 분량의 술을 마셔보기는 생후 처음이었다.

병식은 상을 찌푸리고 두어 모금 마시다가는 구역이 나서 부엌바닥에다 끼얹었다. 그러면서도

『이사람 한잔 술에 눈물 난다네. 중매쟁이 대접은 소홀히 못하는 법이니. 소불과 석잔은……』 하고는

『한잔 더.』

하면서 턱으로 술잔을 가리킨다. 수영은 술청 앞을 딱 막 아 서서

『안돼!』

하고 머리를 내저었다. 병식은 다시 부엌바닥에 가 펄썩 주저앉아서도 잠꼬대처럼

『술 술 내라.』

하고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다가는 푹 엎드려졌다.

북촌의 밤바람은 더 한층 차고 쓸쓸하였다. 골목 안을 휩 쓸고 들어오는 바람에 기름때 묻은 휘건 자락이 날리고 안 주를 벌여논 진열장의 유리창이 왈가닥거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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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노집의 파리똥이 닥지닥지 앉은 자명종은 느릿느릿하게 두시를 쳤다. 근처는 귓바퀴에서 잉잉 소리가 날만치나 고 요하였다.

수영은 병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억지로 마신 술이 전신을 돌아서 얼굴이 붉어가고 숨이가빴다. 술청에다 팔을 고이고 기대 섰자니 쥐가 마른 안주를 담은 목판을 쏘느라 고 사각사각 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자 수영의 귀에는 이상한 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는 눈을 돌려 소리나는 곳을 찾았다. 그것은 병식이가 두 손으 로 얼굴을 가리고 엎드려서 흐느껴 우는 소리였다. 가늘게 떨리는 울음 소리는 점점 커진다. 수영은 보다 못해서 병식 의 곁으로 가서 들먹거리는 어깨를 짚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여보게 이러지말게. 난 자네의 고민을 잘 이해하네. 진정 으로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네그려.』

하고 아무리 간곡히 위로를 해주어도 설은 사람은 덧들여 놓으면 더 한층 목이 매어하듯이 병식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병식이, 여보게 병식이! 날좀 보게. 내 가슴두 자네만큼 이나 터질 듯허니. 자 일어나 정신을 좀 차리게.』

하며 자꾸만 병식의 어깨를 흔들었다.

병식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비비고 코를 마시더니

『미안허긴 뭐 미안허단 말인가?』

하고 나무라듯 하며 벌개진 눈을 다시 비비며

『술집에서 내가 울다니 추태다 추태야. 이런 데루 돌아다 니면서 눈물이나 흘리는 내 꼬락서니가 보기싫어서 불원간 내 몸뚱이를 아주 처치해 버릴 작정일세. 전엔 술주정은 했 어두 공연히 서글퍼 본적은 없었는데……』

하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자네 내 고민을 안댔지? 나처럼 고단헌 사람이 의누이 하나를 뒀다가 남의 사람이 될 모양이니까. 섭섭은 허이. 내 속맘을 그렇게만 알어 주면 고만일세. 어쨌던 자네허구 성 사만 되면야 두말헐게 있나? 누이는 누이대루 있구, 자네같 이 훌륭헌 매부를 덤으루 받으니 영광이 몸에 넘치지.』

하고는 시꺼멓게 그을어 거미줄만 엉킨 천장을 우러러

『허허허허.』 하고 허청 웃음을 웃는다.

수영은, 병식이가 취중에도 저의 속중을 발라내어 보이지 않으려고 짐짓 꾸며대는 말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 되었 다. 그래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만 가세. 담날 또 얘기를 허기루 하구.』

하고 병식의 팔을 끌었다.

병식은 졸지에 으스스해져서 찬물에 빠졌던 오리처럼 몸을 흔들며 무릎을 짚고 일어서더니

『이거 안됐군. 주사 한 대를 더 맞어야겠는걸.』

하고 술청 앞으로 가서 저 혼자 찬술로 사발찜질을 한다.

수영이가 굳이 말리는 것을 쌈싸우듯 뿌리치고

『휘유우.』

하고는 술에 오장이 썩는 듯한 냄새를 긴 한숨과 함께 내 뿜는다. 맑은 정신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 무서워 모든 추억 과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서 찬술을 들이킨 것이다.

병식은 신분도 못되어 또다시 알콜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되었다. 가슴이 아파서 잔기침을 자꾸만 한다.

수영은 보다 못해서 완력으로 병식을 끌어내었다.

난 여기서 죽는다고 발버둥질을 치는 것을 겨드랑이를 바 짝 끼고 술집을 나왔다. 나와서도 수영을 발길로 차려다가 는 고꾸라지고 쓰러졌다가는 길바닥을 휩쓸고 일어난다.

미쳐나는 사람처럼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 다가 저의 집 문앞까지 끌려와서도 왈칵 토해낸다. 장속에 술만 들여 부어서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창자끝이 묻어나도 록 왈칵하고 헛구역을 하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

수영은 병식의 등을 두드려 주며 간신히 진정을 시켜서 건 너방으로 업어다가 뉘었다.

병식의 아내는 잠에 절벽같이 들었는지 남편이 초죽음이 되어 들어왔건만 내어다보지도 안했다.

[편집]

수영이가 나간 뒤에 경자와 정신이는

『그 어리배기가 누구냐?』

『꾸어다 논 보릿자루처럼 앉었는게 어떻게 우슨지 간신히 참었다 얘.』 하고 번차례로 찧고 까불고 하다가

『아아 너허구 헌겁붙이나 되는 남자지?』

정신이가 계숙의 속을 떠보려면, 경자가 마주 대들며

『아냐 눈치를 보면 몰라. 기자는 제육감(第六感)이 빨러야 헌단다. 그자두 필경 여왕의 신?에 입을 맞추려는 무사 중 의 하난게지.』 하고 해죽해죽 웃었다.

『듣기 싫다 얘. 우리 시골 사람인데 이번엔 볼 일이 있어 서 내려갔다가 아버지 부탁을 전하러 온 거라니깐. 온 나중 엔 별 소리들을 다 허는구나. 너희 눈으로 보아 몰라서 내 가 아무려니 신문 배달부허구야 얼리겠니?』

하고 말뿌리를 돌리면서

『그러길래 말야. 계숙이가 어떻게 눈이 높다구. 그렇지만 여왕님이 되려 보잘 것 없는 무사의 무릎에다 최경례를 허 는 걸 이 눈으로 봤으니깐 기적이거든.』

정신은 여정탐노릇이나 하는 듯이 무안에 취한 계숙의 얼 굴을 꿰뚫을 듯이 노려본다. 계숙은 그말이 몹시 불쾌해서

『넌 얼마나 오지랖이 넓길래 남의 일에 그렇게 미주알 고 주알 캐는 거냐? 그래 내가 신문배달부허구 연애를 헌다.

구루맛군이라두 좋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왜 또 잡지에 내먹을련? 내가 백화점에 간것부텀두 더 굉장헌 뉴스로구 나.』

하고 총알같이 쏘았다. 경자는 둘의 사이의 공기가 험악해 지는 눈치를 채고

『저런, 웃음엣 소리를 다 곧이 듣는담, 인제 고만 나가자 꾸나.』

하고 정신의 넓적다리를 꼭 찔렀다. 그러나 정신이도 성미 가 발끈하고 나서

『잡지에 내든 안내든 그건 내 자유다. 계숙이가 연애허는 남자가 또 하나 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계숙은 참다 못해 발딱 일어나며

『연애를 허든말든 그것도 내 자유다. 웬 참견이냐? 의리 없는 계집애 같으니, 너는 나하구 학교에 댕길 때 어떻게 지냈니! 학생사건 때부텀두 넌 우라기니모노(배신자)야!

「최계숙이 바람에 멋모르구 그랬다구」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온건 누구냐! 내가 먹고 지낼 수가 없어서 우리꼬(여 점원) 노릇을 허기로서니 그래 타락을 했느니 뭇 사내앞에 나오고 싶은 허영심이 발동을 했느니 허구 잡지에다 대문짝 같이 내야 옳단 말이냐?』

하고는 팔을 걷고 정신에게로 달려들 형세를 보이며

『잡지는 말구 신문의 호외라두 내려무나. 어서 가서 네맘 대루 해봐! 누가 왼눈 하나 깜짝이나 허나.』

계숙은 정신에게 오랫동안 쌓였든 분이 머리끝까지 끓어올 라서 온몸을 떨며 물퍼붓듯 몰아세웠다.

정신은 독기가 오른 눈을 매섭게 뜨고 선불맞은 날짐승처 럼 할딱거리고 앉았다.

『글쎄 왜들 이래? 계숙인 똑 사내처럼 성미가 부푸드 라.』 하고 경자는 둘의 사이를 가로 타고 앉으며

『고만 일어서자, 놀러 오자구 헌 내가 미안허구.』

하고 정신이를 달래듯 해서 일으켜 세웠다.

언제나 조용하던 바깥방에서 떠들썩하니까, 주인마누라까 지 눈을 비비고 나와서

『뭣들을 이렇게 떠들우?』

하고 방문을 열고 기웃이 들여다보고는

『난 쌈들을 허는 줄만 알었구려.』 하고 들어갔다.

두 여자가 구두를 신고 나갈 때까지 계숙은 내어다보지도 안했다. 경자가

『계숙이 정말 미안해. 내 내일 또 올게.』

하는데 대답도 아니하였다.

정신이는 대문간을 나서서 외투 깃을 올리고는 왼쪽발을 탁 구르며

『흥 너 어디 두구 보자!』 하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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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그날 밤에도 잠을 편히 못잤다. 정신이와 경자에게 대해서 몹시 불쾌한 흥분을 느낀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하 였다. 무엇보다도 저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느라고 눈이 감 겨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경솔하게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도 하였다.

(아무리 특별한 인연으로 여러해를 알어 오던 사이였지만, 수영이가 저 마음을 솔직히 말한다고 그 당장에 저두 김수 영씨를 사랑합니다 하고 대뜸 허락을 한 것이 도리어 수영 에게 제가 호락호락하게 남의 말에 넘어가기 쉬운 여자라는 느낌을 주지나 않았을까?)

(창졸간에 취한 내 태도가 너무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이 지나 않았을까?)

하고는 계숙은 책상머리에 턱을 고이고 앉아서 몇번이나 제가 한 일을 돌이켜보았다. 그러다가는 (아주 처녀로 늙을 작정이 아닌 담에야 언제고 한번은 결 혼문제와 부닥치고 말 것이 여자의 운명인데 한번 결심을 한 뒤에야 선선히 대답을 해버린건 잘했지. 깐죽깐죽하게 끌기만하구 빗새는 여자는 내가 남자래도 싫겠어)

하고는 저 혼자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도 본다.

그러다가는

(어느새 시집을 가서 들어앉어 밥이나 지어주구 사내치닥 거리나 하긴 싫어)

하고 이번에는 커다랗게 머리를 내저었다.

(그렇다. 얼마 아니면 어린애를 낳겠지. 어린애한테 매달려 서 아까운 청춘을 썩힌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무것도 못하구 늙어 죽기는 아까운걸)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는 경대 앞으로 옮겨 앉아서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을 처음보는 사람이나 대한 것처럼 갸웃거리 며 요모조모 뜯어보기도 하고 활동사진 배우처럼 가지각색 으로 표정도 해본다.

(그래 너 정말 김수영이란 사람한테루 시집을 갈테냐?)

하고 거울 속의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러도 본 다. 그러면 맞은편의 계숙은

(안된다 얘. 어느새 시집이 다 뭐냐? 한참 공부를 할 나인 데. 적어두 한 삼년 동경 같은데 가서 공부를 허구와야지. 한번 시집만 가면 볼 일 다 본다. 평생 남의 종노릇이지 뭐 냐?) 하고 손을 내저으며 반대를 한다.

(아닌게 아니라, 결혼은 여자한테 막다른 골목이야.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돌아나올 수가 있어야지)

하다가는 또

(연애만 헐 수 없나? 아주 깨끗하게 지내오다가 경제적으 로 독립을 헌 뒤에 여봐란 듯이 예식을 해야해. 그래야 남 자의 노예를 면하지. 그렇지 않으냐? 계숙아)

하고 제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자 눈같이 흰 면사포를 쓴 저와 연미복을 입고 제 팔을 낀 수영이가 거울 속에서 나란 히 발을 맞추어 나온다.

다아다앙따따, 다앙다앙따따 하고 웨딩마치의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예복 입은 체격이 왜 저리 어색할까? 뽀타이 하나 똑바로 맨줄을 모르네. 저고리는 품이 좁고 바지는 금이 꾸기꾸기 해서 똑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같으이)

하고 혀를 찼다. 수영의 옷입은 꼴은 제가 창피할 지경이 다.

(조경호 같으면 몸에 착 달라붙는 제양복에다 힌 뽀타이를 나비같이 매구서 아주 말쑥하게 거들었을 걸)

하자 수영을 떠밀고 그대신 경호가 나타나니까

(그렇지만 넌 미끄러져라)

하고 계숙은 거울보를 씌워 버렸다.

(그까짓 형식이 다 무슨 일이 있어)

하고 옷을 벗고 누워서도

(피차에 제 생활도 못 꼬나 나가는 주제에 결혼이 다 뭐야. 공연스려 쓸데없는 공상만 했군)

하고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렇지만 옹이의 마디로 하필 고년의 계집애들 때문에 퍽 모양이 사납에 됐으니깐 내가 찾어가 봐야 옳지. 내일은 하 루 쉬어야겠어)

하고 계숙은 수영을 만날 궁리를 하다가 다 밝기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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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저좀 보셔요.』

경자는 안으로 통한 작은 사랑채의 뒷문으로 살그머니 돌 아 나와서 나직히 경호를 불렀다. 경호는 저녁마다 아주 습 관이 된 마작판을 벌이고 노름에 정신이 팔려서 경자가 부 르는 소리도 못알아들었다.

경호가 쓰는 따로 떨어진 사랑채는 아홉시쯤 되면 대문 중 문을 닫아걸고 덧문과 미닫이 갑창까지 바람샐 틈도 없이 첩첩이 닫고는 마작판을 벌였다. 모여드는 마작군들은 조선 사회에서 한다한 신사들 뿐이다. 낮에는 제각기 내노라고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재고 다니는 점잖은 축들이다. 경호 와 같이 서양 유학을 하고 학사니 박사니 하는 학위까지 받 아가지고 돌아와서 전문학교의 교수노릇을 하는 사람이 두 엇이나 저녁마다 출근을 하고, 법정에 나서서는 애매한 형 사피고인과 사상범인의 무죄나 감형을 열렬히 주장해서 그 의 이름과 사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사회에서는 지사 와 같이 여기는 현직 변호사도 서너 사람이나 저녁만 먹고 나면 서로 전화질을 해서 자가용 인력거를 타고 모여든다.

그 밖에 신문사 퇴물도 가끔 한몫을 보아 판돈을 떤다. 그 나마 심심 소일로 오락을 하기 위한 장난이 아니라, 근래에 와서는 순전한 도박으로 변하였다.

처음에는 맨꽁무니로 하기는 심심하다고 내기를 하기시작 했다. 담배 내기도 하고 밤참내기도 하던 것이 차츰차츰 정 말 돈내기로 변하였다. 그것도 처음에는 『량모짱』 『쓰모 짱』으로 개시를 한 것이 근자에 와서는 지전 뭉텅이를 차 고 와서 『이전짱』이나 『삼전짱』까지 벌이는 것이 보통 이다. 그러다가 또 근자에 와서는 『솟수』를 빼고 셋마작 이 유행되었다. 『솟수』는 밤을 새우려면 눈에 아물아물해 서 알아보기도 힘들거니와 넷마작은 돈내기 하기에 갑갑도 한 까닭이었다.

하루저녁에 수백원씩이나 득실이 있는 터이라 피차에 몸이 달아서 겨울밤을 꼬박이 앉은채로 하얗게 밝혀가며 「펑」

「깡」 「후우라」를 부른다.

그러나 나중에는 밑천이 달리면 집을 잡히고 식산은행이나 동척회사에 대대로 물려오던 전답이며 산림까지 저당을 하 였다. 그뿐 아니라 일러도 새벽녁에야 노름이 끝나니까 그 들도 사람이라 그때부터 쓰러져 잠을 자야한다. 남들은 사 무를 개시할 시간에 잠을 자자니 경호나 그 밖에 교육가는

『오늘 몸이 불편하셔서……』

하고 학교로 대릿전화를 걸 수밖에 없고 변호사들은 친구 변호사에게 제가 맡은 사건을 복대리를 시키거나 그렇지 않 으면 사건을 맡긴 사람은 죽고사는 문제가 달린 것을 맡아 서 착수금만 받아먹고는 그 사건의 기록도 똑똑히 들여다 보지 못한다. 허둥지둥 법정에 들어가서는 꼬박 꼬박 졸기 가 일쑤다. 얼마 전에도 제가 변호할 차례에 침을 흘리고 졸다가

『변호인은 뭘하고 있느냐?』

하고 판사에게 호령을 받은 변호사까지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경호의 집에 다니는 노름꾼이었다. 경 호는 세 번째에나 경자의 목소리를 듣고 안으로 향한 문고 리를 벗기고 나왔다.

『오빠는 마작에두 홀리셔서 남은 반시간이나 한데서 기다 리는 지도 모르셔요?』

경자는 무슨 덕색이나 하듯이 어둠침침한 뒤꼍에서 안경만 뻔적거리는 사촌오라비의 얼굴을 쳐다본다.

『딴소리 말구…… 그래 어떻게 됐니?』

경호는 경자의 곁으로 다가서며 귀를 기울인다.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야 요?』

『글쎄 오늘 간 일은 어떻게 됐느냔 말야? 그저 제고집을 세우구 같이 와 있지를 않겠다든?』

『오늘은 길에서 정신이란 애를 만나서 같이 가게 됐어요.

그래 말도 못 붙이구 왔어요.』

『왜 동무는 끌구 갔단 말이냐?』

경호는 발끈하고 골이 났다.

『그럼 저도 일이 있다구 따라서는 걸 어떻게 따돌려요?』

『모르겠다. 한번 네게다 맡겼으니까 재주껏 해보려무나.

그까짓 일을 그렇게 오래 끌어서 어떡허니? 꼬리가 길면 밟 힌다구 내일 또 일찌감치 쫓어가서 이번엔 아주 탁방을 내 구 와!』

하고 명령을 하고는 들어가려는 것을

『그런데 오빠, 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어요.』

하고 경자는 경호의 소매를 끌어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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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또 큰 걱정거리란 말이냐?』

어둠속에서도 경호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이 보이는 것 같 다.

『얘기가 좀 길텐데요, 안으로 잠깐 들어가시죠.』

『여기서 대강 허려무나. 남들이 기다리고 앉었는데 중간 에 빠질 수가 있니.』

『글쎄 인제 마작일랑 고만 집어치서요. 소문이 사나운건 둘째구요……』

『그건 네가 참견헐게 아니야. 어서 말이나 해라.』

경호는 몸이 달아서 경자의 말을 재촉한다. 경자의 말대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야기를 듣고는 싶지만 마작판을 못 잊은 것이 아니라. 남매가 모여 앉아서 쑥덕거리는 것을 제아내에게 들킬까 보아 재미가 적었다. 계숙을 후려들일 음모는, 눈치도 보이지 않으려고 남매 사이에만 감쪽같이 꾸며왔기 때문이다.

실상 경자도 경호의 아내가 무서웠다. 아직도 적서를 유난 히 보는 집안일 뿐 아니라 경호의 아내는 조승지집살림살이 의 실권을 잡고 있는 까닭도 있다. 경호는 이름만 맏아들이 어서 어려선 응석동이로 숙맥을 분별치 못하였고, 커서는 일본으로 서양으로 십년이나 넘도록 유학을 다니느라고 이 제까지 집안의 살림살이는 도무지 모른다. 잣달은 살림살이 는 아는 것이 도리어 수치나 되는 듯이 알려고 들지도 않았 다. 그래서 열 여섯 살에 시집을 온 맏며느리인 경호의 아 내가 시부모의 절대의 신임을 받았다. 나이는 어렸건만 일 년에 십여번이나 되는 제사범절이며 혼상 간에 큰일을 치루 어 나가는 것이나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수단이 제법 익숙해 서

『우리집이 되느라고 어서 업이 들어왔어. 외모가 덕기있 게 생긴데다가 위인이 칠칠해서 제남편 버담은 났거든.』

하고 경호의 아버지는 마누라를 보고 칭난을 하면

『그야말로 부잣집 맏며누릿감이지요. 제법 큰 살림을 해 보든 애 같어요.』

하고 내외가 번갈아가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었 다.

사실 경호의 아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식구가 번열하고 층층시하의 뒤숭숭한 재상가에 들어와서 저 한몸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휘갑을 쳐나가느라고 남편과 의좋게 지날 생 각까지 할틈 없었다. 심지어 동자아치 반빛아치의 뒷치다꺼 리까지 하니, 하루 몇시간 자는 시간 밖에는 눈코 뜰사이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오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났다. 잉편 한 시어머니가 어린 며느리에게다가 살림을 아주 내맡긴지 도 벌써 여러해다.

경자는 사촌오라비댁이 달라는 것 없이 미웠다. 저의집 살 림까지 맡아서 일일이 참견을 해주는까닭에 경자는 제 마음 대로 돈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 청구대로 듣지를 않 을 때는

『오빠는 바지저고리만 앉어 계서요? 난 도무지 언니가 아 니꼬아서 죽겠어요. 돈 몇십원 쓰겠다는 데두 안주구 서홉 에 참견 닷곱에 참견이죠. 그러니 누가 아무것도 모르게 여 편네 압제 밑에서 살아요?』

하고 경호를 붙들고 포달을 부리기도 여러번이었다.

그래서 근자에 와서는 제 용돈이나 소위 교제비는 경호의 손을 거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런 관계도 있거니와 동경 같은 데를 가려면 집안에는 경 호밖에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 저의 어머니가 죽어 라고 딸을 내노려고 들지를 않으니까, 최후로 후원을 받을 사람도 경호가 있을 뿐이다.

그럴수록 경자는 경호의 비위를 맞추어 줄 필요를 느꼈다.

비위를 맞추어 주려며는, 또는 오라비댁의 세력을 꺾어서 일종의 보복을 하려면 경호에게 제 동무 하나를 소개해서 붙여주는 것이 가장 생색도 날뿐 아니라, 그 공로로 동경 가서 마음놓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볼 수도 있으리라고 생 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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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계숙이한테 벌써 뭬 있는 눈치야요.』

경자는 바싹 다가서며 귓속하듯 하였다.

『뭬 있다니 그건 또 무슨소리냐?』

경호 역시 누이의 뺨의 분냄새가 맡힐만큼 얼굴을 들이 대 었다.

『利일보 배달부헌테 따러 다니는 모양이야요.』

『利일보 배달부?』

『네.』

『설마 그럴라구.』

『설마가 사람을 잡어먹는단 말을 모르셔요?』

『그래 네눈으로 봤단 말이냐?』

『계숙이가 바로 그 시골뜨기 무릎에가 엎드린걸 우리한테 들켰는데요.』

『그래서?』

『실례했다고 하고서 그냥 오랴다가 좀 똑똑히 알아볼량으 로 정신이허구 들어가서 인사까지 했어요.』

『그럼 그자의 이름을 알겠구나?』

『저……김수……경이라든가 수영이라든가 아무튼 김가는 확실해요. 말을 입속에다가 넣고 우물쭈물 하는게 아즉어리 배기 같아요.』

『김수경이? 김수영이?』

하고 경호는 고개를 비꼬고 입속으로 외었다. 알 듯하고 모를 듯도 한 이름이다. 어디서 들은법 하기도 한데 입에서 만 뱅뱅 돌고 얼른 생각 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허구 한 고장 사람이라구 그러그드군요.』

『말허는게 계숙이 허구 같은 시골사투리를 쓰든?』

『아니요. 그러잖어두 가짓말 같아서 일부러 몇마디 말을 시켜 봤는데요. 외려 남도 사람같습디다.』

『음.』

하고 경호는 더운 방에 들어 앉았다가 졸지에 추워져서 팔 장을 끼며 코밑에 붙여논 것 같은 수염을 아랫입술로 빨아 들이며 김수영이란 이름의 주인공을 제 기억에서 꼬집어 내 려고 애를 쓴다. 백판모르는 사람같으면야 귀담아 들을 것 도 없지만 생각이 날듯날듯하다가도 삭막해서 조츰증이 날 지경이다.

『아이 오빠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아시겠어요? 난 이젠 추워서 들어 갈테야요.』

경자가 언 발을 동동 구르며 들어가려는 것을

『얘!』 하고 경호가 다시 불러 세웠다.

『그래 그자보담 너희가 먼저 나왔니?』

『아아뇨. 우리가 불쑥 들어가니깐 계숙이가 얼굴이 홍당 무가 돼 앉었다가 제 변명이나 허는 것처럼 인사를 시킨 뒤 에 그자는 무슨 죄나 짓다가 들킨것처럼 슬슬 꽁무니를 빼 구 갔어요.』

『계숙이가 그뒤를 따라나가든?』

『쫓어 나가서 작별이라두 허구 들어올 줄 알았드니 안나 가든데요.』

『응 그래.』

경호는 그제서야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드는 듯

『오냐, 알었다.』

하고 마작하던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또다시 들쳐서며

『어쨌든 그 잡지사에 댕긴다는 정신이란 계집애를 잘 사 괴둬라. 한번 데리구 놀러와도 좋아.』

하고는 어깨를 응승그리고 들어가버렸다.

경호는 그 김수영인가 하는 남자가 계숙의 집에서 나갈 때 에 계숙이가 따라 나가며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 결코 계숙이와 서투른 사이가 아니요. 무상시로 출입을 하 는 친근한 사이일 것을 터득하였다. 동시에 염탐하나를 더 늘일 필요도 있거니와 또 다른 급한 일이 생길 때에 긴하게 써먹기 위해서 부인기자 하나를 매수해 둘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날밤 경호는 마작도 재미가 없어서 일찍이 걷어치우고 자리에 누워서도 아침 저녁 길거리로 쏘 다니는 배달부들의 얼굴을 모조리 눈아래 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두어달 전에 서대문우체국 앞 전차 정류장에서 저를 몹시도 흘겨보 던 利일보의 하삐를 입은 배달부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자 취직을 시켜달라고 집으로 학교로 귀찮게 쫓아다니 던 저의 집 마름(?音)의 아들 김수영!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경호의 머리에 떠올랐다. 경호는

『옳지 그자로구나!』 하고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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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계숙을 속으로는 기다리면서도 찾아 가지를 안했 다.

(내가 헐말은 다했으니까 제가 헐말이 있으면 나를 찾아 올테지)

하고 버티고 가지를 안했던 것이다. 그렇건만 공연히 마음 이 들썽들썽 하였다.

어느때 찾아 오겠다는 약속을 한것도 아닌데 자꾸만 기다 려지고 골목밖에서 바스럭소리만 나도 계숙의 발자국 소리 로만 들렸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은 계숙을 찾아보려고 나섰다. 利백화 점이 공휴일로 노는 줄 알았기 때문에 (오늘은 집에 있겠지) 하고 기껏 모양을 내고 나섰다. 모양을 낸댔자 여전히 단추 만 바꾸어 낀 학생복을 손질을 해입고 몇해를 두고 병식에 게 흉을 잡히던 만또를 벗어버리고 고물상에서 산 오버를 입은 것이다. 그렇건만 수영은 제가 여간 모얄을 낸 것 같 지가 않아서 앞을 굽어보고 먼지를 털고 하였다.

(이제야 내맘대로 찾아다닐 감찰(鑑札)이 생겼는데)

하고 뽐내고 나가다가 큰길 어구에서 달음질을 하다시피 급히 걸어오는 계숙이와 딱 마주쳤다. 이날 계숙은 외투를 벗어버리고 두루마기에 목도리만 둘렀기 때문에 얼른 알아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어딜 가서요?』

계숙이는 숨이 턱에 닿았다.

『어딜 이렇게 급히 가세요?』

수영이도 마주 물었다.

『일찌감치 와야 나가시기 전에 만날 듯해서……』

『오늘이 공휴일이니까 집에 계실 듯 해서……』

대답도 둘이 똑같이 하였다. 동시에 둘의 입에서는 명랑한 웃음이 터졌다. 계숙은 서양 계집애 인사하듯

『요전엔 퍽 미안했습니다.』

하고 무릎 하나를 잠깐 꼬부렸다 편다.

『천만에요, 내가 실례를 했지요.』

둘의 얼굴은 지난 일을 생각하고 살짝 붉었다.

『나 있는데루 가십시다.』

수영이가 돌아서니까

『가만히 계서요. 오늘 모처럼 이렇게 날도 풀리고 했으니 문밖으로 산보나 갈까요? 오늘은 아주 봄날 같지요?』

수영은 그러자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를 안했다. 내왕 전차 값 점심값을 따지면 적어도 돈원이나 가져야 첫 번 출입에 남자의 체면이 서겠는데, 마침 돈이라고는 백통전 몇푼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 거릴 뿐이었다. 그러니 맨꽁무니로 여자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가기는 노루꼬리만한 자존심 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가지요.』

할 수 밖에 없었다.

『내친걸음에 나갑시다요. 저녁때까지만 들어가시면 좋지 않아요?』

말이 아양스럽다느니보다도 아주 더 할 수 없이 절친한 손 윗사람에게 응석을 부리듯 조른다.

수영은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옳을는지 어리벙벙 하였다.

그렇다고 뻣뻣이 서서 제 고집만 세울 수도 없어서

『그럼 저 전차 정류장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오후에 누가 온다구 했는데 못만난다구 방문에다가 써붙이고 와야 겠어요.』

말을 내던지듯 하고는 뒤도 아니 돌아다보고 달음질을 하 였다.

비상수단으로 돈변통을 할 작성으로 가자고는 해놓고 달음 질을 하면서도 어디로 가서 어떻게 돈구처를 해야할는지 막 연하였다.

(앞 가게에 가서 좀 취해달랄까?)

(창피는 하지만 안집에 말을 해 볼까?)

하다가 제 방으로 구두를 신은채 뛰어들어갔다. 고리짝을 뒤져서 하나 밖에 없는 귀중품을 꺼냈다. 그것은 하루 두 번씩은 영락없이 맞는 백통시계다. 사년전에 아버지가 올라 왔다가 우등한 상금으로 사주고 간것인데, 틀어놓면 한 오 분동안은 다리를 절고 가다가 쉬는 증세가 있는 고물이다.

수영은 가겟집 시계와 시침분침을 맞추고 뒷골목에 있는 전당포로 뛰어갔다. 가서는 문앞에서 태엽을 감았다. 진고개 로 책은 팔러 다녔어도 잡혀먹을 거리가 없는 덕택에 전당 국 출입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영은 싸움싸우 듯해서 겨우 팔십전을 받아 넣었다. 그리 고도 혹시 계숙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하고 전당포의 껌정포 장 사이로 얼굴만 내밀고 큰길을 둘러보고서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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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청량리로 나갔다.

『우리가 처음 만나든 데로 기념삼어 가보십시다.』

하고 계숙이가 제의를 하였던 것이다.

그날은 일기가 아침부터 매우 맑았다. 산과 들게 햇발이 골고루 퍼져서 등이 솜을 둔것처럼 포근하였다. 옷소매로 목덜미로 스며드는 바람도 제법 부드러웠다.

얼음이 꽁꽁 얼었던 논과 시냇가에서 귀를 기울이면 얼음 장을 뚫고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송림사이 응달진 언덕에 아직도 무더기 무더기 쌓인 눈을 헤치고 맡 아보면 흙속에서 봄냄새가 풍길 것 같기도 하다.

계숙은 몇 달동안 백화점 속에서 들어마신 더러운 공기를 한꺼번에 토해내듯 기다랗게 내쉬고 맑고 신선한 교외의 공 기를 폐량껏 심호흡을 하였다. 그 깨끗한 공기는 계숙의 몸 의 세포(細胞)를 녹여서 씻어 내는 듯 여간 상쾌하지가 안했 다.

계숙은 길가에 늘어진 잎사귀 떨어진 버들가지를 꺾어서 손가락에다 휘감아 보면서

『이거 보셔요. 버들가지에 벌써 물이 올랐나봐요.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는 말이 퍽 의미깊은 말이지요?』

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수영을 쳐다본다.

『올엔 철이 일다지만 어느새 봄이 올라구요?』

하고 대답을 하며 계숙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도 수영은 아침요기도 그저 못해서 아까부터 매우 시장하였 다. 계숙에게를 들렸다가 상밥집으로 가려던 것이 중간에 붙잡혔기 때문에 말도 못하고 끌려오다시피 하였기 때문이 다.

(이 빌어먹을 배는 왜 이렇게 쪼아당기며 고풀까?)

하고 체면 모르는 창자를 꾸짖었다. 그러다가는

(사랑이 연애를 뜯어먹구는 살 수 없나?)

하고 씩 웃었다.

『뭘 그렇게 혼자 웃으셔요? 좋은걸 보셨어요?』

하고 계숙은 그 웃음을 나눠 웃자고 달려들 듯한다.

수영은 할 말이 없어서

『우리헌테두 새봄이 닥쳐올 생각을 허구 웃었어요.』

하였다. 계숙은 발을 멈추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영 의 오버자락을 끌어당기며

『지금 봄이 어디와 있는지 아셔요?』

하고 무슨 신비스러운 암시나 주는 듯이 묻는다.

『글쎄요. 아직두 눈이 저렇게 녹지를 않으니까……』

계숙은 미소를 띄우고 곁눈으로 말끄러미 수영을 쳐다보더 니 장갑을 벗고는 수영의 가슴과 제 가슴을 꼭꼭 찔러보이 며 입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웃는다. 수영도 제 가슴속에 찾 아든 때아닌 봄을 계숙에게 진찰을 당하고나서 빙긋이 웃었 다. 함께 웃는 입과 입으로는 사실 봄바람이 들락날락 하는 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전차끝에서 한참이나 걸어나가 처음 만났던 장 소에 다달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감개가 무량한 빛이 떠돌았다.

『우리가 첨 만났을 때는 이렇게 둘이서 다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요?』

하며 계숙은 수영에게 기대듯이 몸을 바싹 붙인다.

『그러길래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 수 없지요. 우리를 이 자리에서 만나게 해준 병식군은 지금…』

하니까

『아이 그런 말씀일랑 하지 마셔요. 오늘은 될 수 있는대 로 유쾌하게만 지내요 네?』

하고 계숙이가 말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수영은 병식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동안 조선에는 사회적 변 동도 많았고, 그때 친구들의 신변에 변화도 심하였다. 더구 나 그 당시에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활동을 하고 두 사람을 소개해서 여기까지 다시 나오게 된 동기를 지어준 병식이가 모든 희망을 잃고 아주 파락호가 되어서 스스로 타락의 길 을 밟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무얼 또 그렇게 생각하셔요? 어디가 다리나 좀 쉬십시 다.』

계숙은 수영을 끌듯하고 앞을 섰다.

[편집]

두 사람은 송림사이를 거닐다가 도도록한 언덕위에 소나무 뿌리가 뻗어 오른데 가서 손수건을 깔고 나란히 앉았다. 계 숙은 머리를 숙이고 구두뿌리로 양지쪽의 마른 잔디를 후비 적거리며 무슨 생각에 잠겼다.

『아 이것좀 보셔요?』

반색을 하면서 허리를 굽히더니 뗏장 밑에서 파랗게 벋어 오르는 풀 한포기를 파내 들고

『이게 무슨 풀일까요? 어쩌면 어직두 땅이 덜풀렸는데도 조그만 풀잎이 어떻게 뚫고나올까요?』

하고 경이(驚異)의 눈을 뜨고 들여다본다.

『그게 냉이가 아니예요? 어느새 피어났을라구요?』

수영도 계숙의 손꼽을 들여다본다. 계숙은 시골 계집애들 이 풀 뿌리를 캐어가지고

『신랑방에 불켜라 색시방에 불켜라』 하며 소꼽장난을 하 듯이 조그만 풀잎을 어루만지며 각시처럼 쓰다듬어도 준다.

수영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계숙의 손위에 제 손을 없으며

『그 풀이 파랗게 살어난게 그렇게두 신기하시오?』

수영이도 풀잎을 비벼본다.

『그럼요. 요 연한 싹이 땅바닥을 꿰뚫을 힘이 어디서 났 을까요?』

『그 까닭을 모르세요?』

『봄마중을 허러 머리를 내민게지요.』

『아니요. 봄이 올테니까 살어난게 아니라 그 뿌리가 말러 죽지를 안했으니까 싹이 나온게지요, 그것 보세요, 그 긴 뿌 리가 땅속으로 깊이 뻗어 들어갔기 때문에 얼음장이라두 뚫 고 나올 힘이 생긴 게 아니예요?』

『참 그래요, 죽지만 않으면 살어날 때가 있나봐요.』

수영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계숙의 손위에 제손을 얹으며

『계숙씨! 우리도 그 뿌리가 됩시다! 뿌럭지는 사철 흙속에 만 파묻혀서 명랑한 햇빛두 못보구 시원스럽게 가지두 뻗어 보지 못하지요. 더군다나 봉오리처럼 꽃이 피어 보지도 못 혀구요. 그렇지만 잎사귀나 그 꽃이 다 뿌럭지가 빨어올리 는 수분, 즉 양분을 받기 때문에 뻗어오르고 너울거리고 열 매까지 맺는게 아니겠어요?』

수영이는 저력 있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한다.

『지금 우리 조선사람은, 더구나 젊은 사람들은 뿌럭지가 시들고 말러버린 줄은 모르고 죽은 나무에서 어서어서 싹이 돋고 하루 바삐 꽃이 피기만 조급하게 바라는 것 같어요.』

『사람두 생물인 이상 생물학의 원리를 거슬리고는 잠시두 살지를 못혀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근본문제를 해결짓기 위해서 노력헐 것 뿐이예요. 꽃피고 열매가 여는 것은 우리 가 아는 체 할 게 없이 우선 마르고 썩은 뿌럭지에 물을 주 구 거름을 주구 버러지를 잡어 주는 일이 제일 급한 일이지 요!』

계숙이는 선생의 강의나 듣는 것처럼 머리를 숙이고 뿌리 만 매무적거리며 앉았다. 수영이는 목소리를 좀 높여

『나는 농촌을 토대로 삼고 일을 허지 않으면 민족적으로 나 사회적으로 우리의 살길을 발견하지 못할줄 알아요. 그 밖에 모든건 공중누각이지요. 아주 가까운 예를 들자면 아 침을 그저 못 먹은 나는 이런 강의 비슷한 말을 지껄이고 앉었어두 당장 시장헌 생각이 앞을 서는게 사실이예요.』

『지금 나는 무엇보다 내 육체를 활동시킬 원동력이 될 걸 집어 넣는 것이 이야기를 허는 것버덤두 연애를 허는 것버 덤두 긴급헌 문제예요. 이것두 속일 수 없는 진리(眞理)지 요.』 하고 나서는 제배를 두드려 보이며

『여기다 뭘 좀 집어 넣구 나야만 계숙씨가 더 삐우티풀 (어여쁘게)혀게 뵈겠단 말씀이예요.』

하고 의미깊은 웃음을 띄우고 계숙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계숙은 무엇보다도 수영이가 시장해하는 것이 가엾다.

『아 그저 공복이셔요?』 하고 놀라며

『자 고만 일어 나시죠. 얘길랑은 수영씨 말씀대로 근본문 제를 해결시킨 뒤에 계속허기로 허구요.』

하고는 어디로 갈까하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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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청량관을 훨씬 지나 승방근처의 조그맣고 정갈 한 여염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두루마기에 커다란 덧버선을 신은 주인 마누라가, 만지작거리던 염주를 던지고 나와서 깨끗하게 치어논 건너방으로 젊은 남녀를 안내하였다. 계숙 은 채올라서기도 전에 점심을 시켰다.

밖으로 나다니다가 들어와서 방안이 좀 침침은 해도 도리 어 아늑한 맛이 있다. 추녀 끝을 스치는 한들바람에 풍경소 리만 댕그랑댕그랑하고 한가로운 절간의 정적을 고요히 흔 들 뿐. 몇집 건너 오막살이에서는 낮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데 와서 한주일 동안 잠이나 실컨 잤으면 좋겠어 요.』 하고 계숙은 그 갸름한 다리를 쭉 뻗는다.

『일주일은커녕 단 하루동안만 이 다리를 좀 쉬었으면 ……』

하고 수영이도 다리를 쭉 뻗으며 제 무르팍을 주먹으로 탁 탁친다.

계숙은 수영의 얼굴을 곁눈으로 살짝 보면서

『또 좀 주물러 드릴까요?』

하고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은 웃음을 웃는다. 수영 도 앓던 때 생각이 나서 퍽 웃었다.

계숙은 잊어버렸던 것이나 생각한 듯이

『참 외투나 벗구 앉으시지요. 방이 이렇게 뜨뜻헌데.』

하고는 어디 출근을 했던 남편이 사퇴나 해나온 것처럼 재 빠르게 일어서서 수영의 외투를 벗겨서 걸어 준다. 수영은

(먹을 것만 걱정이 없으면 결혼생활두 미상불 괜찮겠는 걸)

하고 속마음이 흐뭇하였다.

그러자 피차에 고향 생각이 나서 시골의 자연과 풍속이며 집안 형편을 이야기하는 동안에 밥상이 들어왔다. 아담한 교자상에 금방 끓여서 올려논 두부전골이 절간의 냄새를 풍 기고 튀각과 고비나물에 손벽같은 취를 곁드렸다.

수영은 가장과 같이 아랫목에 가 떡 앉고 계숙은 신혼한 가정의 주부처럼 무릎을 꿇고 수영의 시중을 들었다.

수영의 밥공기는 밥통과 입사이에 날라 다니 듯한다. 계숙 은 취쌈을 하나 맛있게 싸놓고는 먹을 사이가 없었다. 밥을 담아 주기가 무섭게, 빼앗아 가 듯하는 바람에 계숙은 젓가 락만 들었다 놓았다한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너무 스피드를 내면 뱃속에서 취체를 헐걸요?』

하고 웃으니까

『뭘요, 남의 땅덩이를 막 삼켜두 곱게만 새기는데 이까짓 밥 몇공기 쯤이야……』

하고는 여전히 범본놈 창구녁 들어 막듯한다. 여섯 공기나 게 눈 감추듯하고 나서야 숭늉을 마시고

『이젠 살었군.』

하고 물러 앉는다. 한 사나흘 굶은 사람처럼 반찬을 걸터 듬 해서 어기어기 씹는 것이 무식은 해보여도 솟기 좋게 먹 는 것이 남성적이어서 계숙도 덩다라 식욕이 동할만큼 탐스 러워 보였다.

계숙은 그제야 밥 한 공기를 겨우 먹고나서 어쩌나 보려고

『아침 점심은 얼려 잡수셨지만 이왕이면 아주 저녁까지 때워버리시지요.』

하고 밥 한 공기를 고봉으로 담아가지고 내어 밀었다.

『아니요, 이 이상 더 먹는건 민족경제상 문젠걸요.』

하고 머리를 저으면서도 권에 못 이기는 체하고 다가 앉으 며 밥통을 들여다 본다.

『이거 염치가 없는걸.』

하더니 전골국물에다 말면서도 계숙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 다보며 식은죽 마시듯 하고 나서 장비야 내배 다칠라 한다 는 격으로 배를 안고 기대어 앉는 것을 보고 계숙은

『참 엄청나군요.』

하고 혀끝을 내둘렀다. 수영이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아마 우리는 베천이나 해야 살겠는걸?』 하니까

『그게 지금버텀 걱정이셔요?』

하고 계숙이가 말끝을 채뜨려가지고 놀리 듯한다. 아이는 배기도 전에 기저귀 장만부터 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하마트 면 사레가 들릴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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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귤과 사과를 들여다가 입가심을 하면서 이런 이 야기를 주고 받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수영은 이야 기를 하면서 (기회를 놓치지 말자) 하고 속으로 몇번이나 벼르다가

『참 그런데……』

하고 정숙한 표정으로 고치며 말을 끄집어 냈다.

『조경자의 집으로 들어가실 생각이 있지요?』

하고 넘겨 씌우는 것이 그야말로 어둔 밤에 홍두께 내밀기 다.

『별안간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계숙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경자가 경 호와의 관계를 수영이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 밖일 뿐아니 라. 단도직입으로 질문의 화살을 정면으로 꽂는데는 가슴이 찌르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니요? 난 확실치 못한 것을 말허는 사람이 아니예요. 지난 일은 지금 와서 끄낼 필요가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헐 생각이라는 것쯤은 얘기해 주셔두 좋을 듯헌데 요?』

하고 인제는 완구히 사랑하는 사람의 자격으로써 준절히 묻는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계숙은 머리를 숙이고 모든 것을 시인(是認)하면서도 몰래 저지른 죄악이나 탄로된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대관절 어떡허실 작정이세요?』

수영은 더 가까이 다가앉으며 위협하듯 재분참 묻는다.

계숙은 어쩐지 머리를 쳐들고 수영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 가 없었다. 여자로는 자존심도 어지간히 있고 고집도 여간 세지가 않지만 수영에게는 일종의 위압을 느꼈다. 그러면서 도 (어디서 누구의 말을 들었느냐) 고 묻고도 싶고 여간 궁금 하지가 않건만 바득바득 대들며 물을 용기도 나지않았다.

『글쎄 자꾸만 같이 가 있자구 조르는데 어떡허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하고 저고리 고름만 손가락에다가 돌돌 말았다 폈다한다.

『경자란 여자가 무슨 까닭으루 어떠헌 필요가 있어서 계 숙씨를 저의 집으로 끌구들어가려는 겐지 아시겠어요?』

수영의 혀끝은 점점 날카로와진다.

『저의 동생 공부 허는거나 봐주다가 동경으로 같이 가서 공부를 허자고 그러는데요.』

『그래 그럭자허구 속으로 결심을 허셨단 말예요? 그렇게 말씀하기 어려울게 있에요.』

하고 또 한번 꼭두를 누른다.

계숙은 수영이가 저를 형사 피고인이나 다루듯 하는 것이 조금 불쾌도 하거니와(좀 더 생각해 보고 대답하리라) 하고 는 아랫 입술을 꼭 물었다. 실토를 한다면 수영의 강경한 반대론이 나올 것은 뻔한 일인데 수영의 공격을 받을것이 두렵다느니 보다 수영의 면전에서 저의 솔직한 의견을 말할 수는 차마 없었다.

그 솔직한 의견이란 별것이 아니다. 둘이 다 지금 형편으 로는 도저히 결혼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생활문제도 물론 크거니와 조금 모험을 하드래도 저는 저대로 공부를 계속해 서 직업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독립을 하고난 뒤에야 결혼 을 하겠다고 고백을 한다면

(옳지 내가 아주 가난뱅이고 배달부 노릇 밖에 못할 위인 이니까 저나 출세를 해서 되려 먹여살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게로구나)

하고 수영이가 고깝게 생각을 할까보아 겁이 났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모처럼 유쾌한 하루를 보내려고 나와서 그 런 빡빡한 말을 주고 받아서 머리골치를 아프게 하기에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였다.

계숙은 한 삼분동안이나 눈을 내리깔고 미닫이에 박아논 유리 쪽을 뚫고 들어오는 돈짝만한 햇살이 장판바닥에 아롱 지는 것만 들여다보다가

『그 이야긴 그리 급헌 일도 아니니 좀 뒀다 했으면 좋겠 어요.』

하고는 잠시도 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수영의 얼굴 을 애원하듯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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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씨는 누구헌테서 그런 말을 들으시고 또 어떻게 생 각을 허시는지도 모르지만 덮어놓고 나를 믿어 주서요. 내 입으로 이런 말씀을 허는건 우습지만요, 나는 조경자쯤 헌 테 속아 넘어갈 여자가 아니라는 것만 꼭 믿어 주서요!』

애원하는 듯 쳐다보는 계숙의 까만 눈동자와 앵두문 것 같 은 입술, 그리고도 어떠한 유혹이 있는지 넉넉히 물리칠 자 신이 있는 듯한 태도는 상대자의 마음을 녹이고 말았다.

모든 것을 믿고 의심치 말아달라는데 부득부득 묻기도 거 북하거니와, 저 역시 모처럼 계숙을 만나서 말도 듣기전에 너무 욱박지르지나 않았나하여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들 었다. 그래서

『정 그러시다면 그 이야긴 다음날 듣지요.』

하고 너그러이 웃었다.

방안에는 다시 화기가 돌았다. 계숙은 까먹고난 귤껍데기 를 손톱끝으로 제키고 앉았다가

『그런데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어 나가야 할는지 걱 정이야요.』

하고 빗대어 놓고 수영의 속을 떠본다.

『생활 문제 말씀이예요?』

『그것도 지금 같아선 걱정이지요. 우리는 소년 소녀들처 럼 달콤헌 연애만 허는게 아니니까요.』

수영은 눈을 떡 감고 기대 앉았다가

『생활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구 있어 요.』

하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우리가, 또는 이 현실(現實)에서 도저히 안락한 생활은 꿈도 꿀 수 없어요. 또 그런 문화생활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도 아닐뿐더러 어떻게 생각하면 점원 노릇을 하거나 다리 품을 팔어서, 어쨌든 하루 세끼 밥이 입에 들어가는 것만 해두 난 다행인줄 알어요. 지금 시굴서는 이밥 한그릇을 제 대로 먹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이 현실에 만족허구 지내지는 못헐 게 아니어요?』

『그렇지요. 무슨 변동이 있어야지요. 당분간 허는 수가 없 으니까 밥이나 얻어 먹으려고 제시간 전부를 바치는게지 앞 으로는 물론 다른 길을 개척해야만 허지요.』

『그 길이 어떤 길이야요? 난 그 말씀이 듣고 싶었어요.』

계숙의 정신은 온통 수영의 입에 매어달린 듯, 두툼한 남 자의 입술을 바로 턱 밑에서 쳐다본다.

수영은 무슨 생각에 잠겨 눈을 딱 감고 눈동자만 굴리다가 무거이 입을 연다.

『그건 좀 뒀다 얘기 허지요.』

하니까

『그렇게 당장에 오금을 박는 법이 어디 있어요?』

고 계숙은 금새 입이 뾰죽해졌다.

『천만에, 일부러 오금을 박는게 아니라 아직 말헐 시기가 못됐으니까 차차 의논을 허려는 게지요.』

수영은 아직 계숙의 처녀적 공상과 장래에 대한 커다란 꿈 을 무자비하게 깨뜨려주고 싶지가 안했던 것이다. 조만간 지금 제가 품고있는 포부와 희망대로 같은 길을 걸어줄 줄 은 믿으면서도 저의 계획을 겉으로 나타내어 발표하고 싶지 가 안했다.

『무슨 일에든지 자신있게 착수하기 전에는 말부텀 앞을 세우지 않으려는건 내 모토(標語)예요. 그러니 아직은 그 점 만 양해해 주실 줄만 믿지요.』

하고 계숙의 눈치를 본다.

계숙은 무거운 것에나 짓눌리는 것처럼 다시 가슴이 답답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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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둘이 약혼까지 한 셈인데 왜 자기 생각을 속시원 허게 얘기를 못헌담)

하고 계숙은 저를 든든히 믿어 주지 않는 것이 야속도 하 였다.

수영은 그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은 아니건만

(지금부터 시굴 가서 살자면 펄쩍 뛸걸. 요새 여자들은 시 굴이라면 아주 백색 노예 들만사는 토굴로만 아니까…… 암 만해두 시기가 일러)

하고는 속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수영은 벌써부터 공허한 도회의 생활에 넌덜머리가 나서 제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들 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농촌 운동에 몸을 바칠 결심을 단단 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멀지않은 장래에 어느 기회에든지 이제까지의 생활을 청산 해버릴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 다. 그것은 병식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당한 시기 가 돌아만 오면 물론 계숙에게도 저의 주장과 실행할 방침 까지라도 토론을 하리라고 굳이 침묵을 지켰다.

또 한편으로는 수영이 역시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모든 세 상근심을 훨훨 떨어버리고 유쾌하게만 보내고 싶었다. 오랫 동안 옥죄었던 신경과 국축되었던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마음껏 펴보고 뻗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로부터 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만날 기회가 있을 것만 믿었다. 또는 (면대해서 말을 하기 거북한 일이있을 경우에는 편지로 하 리라) 하고 골치 아픈 문제에는 접촉되기를 피하였다.

『지금 몇시나 됐을까?』

수영은 혼잣말 하듯하고는 유리창 밖을 내어다 본다. 그 구벽다리 시계를 잡히느라고 갈팡질팡하던 생각이 나서, 터 져 나오는 웃음을 꽉 깨물었다.

『인제 세시 반인데요.』

계숙은 팔뚝시계를 올려서 저만 보고는 에누리를 하였다.

실상은 네시도 십분이나 넘었건만 수영이가 신문사로 들어 갈 시간이 되었다고 일어설까 보아 좀더 붙잡아 앉히려는 수단이었다.

서로 기다리던 때와는 정반대로 만나고 본즉 시간은 사뭇 줄달음박질을 하는 것 같았다. 가슴속에 길로 쌓인 듯하던 이야기거리는 뿌리만 겨우 따다가 말았는데, 벌써 밑바닥이 긁히는 것 같았다.

유리창 밖에는 산골짜기로 저녁 연기가 골 아개처럼 피어 오르는 것이 한폭의 담담한 묵화와 같이 내어다 보인다. 근 처승방에서는 목탁 뚜드리는 소리와 함께 여승이 앳된 목청 으로 염불하는 소리가 끊쳤다 이었다 한다.

그러자 저녁 바람을 타고 산등성이를 넘어 꿈속같이 울려 오는 것은 은은한 쇠북소리였다. 두젊은 남녀의 영혼은 그 쇠북소리의 음파에 실려 아득히 먼 나라로 사라지는 듯, 눈 앞에 만수향 줄기와 같이 뻗어오르는 두어줄기 저녁연기는 얼크러지려는 두 사람의 애틋한 정서(情緖)를 한가닥으로 꼬 면서 공중으로 올라간다.

두 사람은 무슨 향기 높은 마취약에나 아찔하게 취한 것처 럼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다가는 힘없이 고개를 쳐들고 멍하 니 상대자의 얼굴을 바라다 볼뿐…… 수영은

『자 내일이라두 또 만나기로허구 오늘은 일어 섭시다.』

하고 일어선다. 양복 주머니에서 백동전 소리가 절그렁거 리며 났다. 수영은 불시에 가슴속에다 불을 지르는 이성에 게 대한 야릇한 충돌을 억제하려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하고는 자리를 떠나려는 것이 다. 계숙이 역시 이대로 헤어지기는 무미하고 불만도 느껴 져서

『벌써 가실테야요?』 하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다.

『마라손을 할 시간이 됐으니까 곧 들어가야겠어요.』

수영은 외투를 떼어입으려 한다.

계숙은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앉았더니

『그럼 좀 기다려 주서요. 요 앞에 잠깐만 다녀 들어올께 요.』

하고는 한쪽 눈을 찌끗해 보이더니 급한 볼이나 생긴 듯이 총총히 나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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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분─십분.

계숙은 한 이십분만에야 돌아왔다. 수영은 급해서 마음이 조이는데

『기다리시기 지루허셨지요?』

하고 상글상글 웃으며 계숙은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들어 왔다.

『아 어딜 갔다 인제야 오세요?』

수영은 좀 뿌루퉁해서 마루 끝으로 나왔다.

『전화 걸구 왔어요.』

『전화는 무슨 전화예요? 오늘이 공휴일이라면서……』

『나 혼자 놀면 미안허지 않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남의 일 맡은거야 충실히 해야지요.

수백명이나 되는 독자가 서간만 되면 신문을 기다리니 까……』

『걱정마서요. 급헌 볼일이 생겨서 오늘은 못들어 가신다 고 신문사로 미리 기별을 했으니까 맘 턱 놓구 계서요.』

『신문사루요?』

하고 수영은 놀랐다. 더구나 여자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는 것이 재미적었다. 제곁을 떠나고 싶지가 않아서 멀리 가 서 전화까지 빌어 하고 들어온 계숙의 마음이 고맙기는 하 면서도 다른 사람이 서투른 구역에 신문을 돌르느라고 수고 를 할 생각을 하니 여간 미안 하지가 않았다.

『어쨌든 나갑시다.』

하고 수영이가 구두끈을 매니까

『왜 어느새들 들어가시렵쇼?』

하고 주인 마누라가 나와서 합장을 한다.

『참 밥값을 줘야지.』

하고도 (이걸룬 모자랄 것) 하면서 수영이가 돈을 꺼내려니 까

『고만 두서요. 여기 있어요.』

계숙이가 앞을 막아서며 조그만 지갑을 연다.

『아아니, 내가 내지요.』

하고도 주머니 속의 백동전을 철렁거리며 끄집어 내기는 하면서도 「내가 낸다는 목소리는」 모기소리보다는 조금 컸을까. 계숙은

『쌈짓돈이 주머닛돈이 아니야요?』

하고 상긋이 웃으며 약빨리 일원짜리 두장을 꺼내서 주인 마누라의 손에다 쥐어 주었다.

수영은 뒤통수를 긁으며 계숙의 뒤를 따라나.

『자 어디루 갈까요?』

『마음 가는대로 발길 내키는대로 가지요.』

하며 계숙은 서양 여자처럼 왼편 팔을 남자에게 내밀어 준 다. 수영은 무쇠같이 튼튼한 팔로 포동포동한 계숙의 팔을 흐벅지게 끼고 언덕을 내려와 송림 사이를 걸었다.

석양은 뉘엿뉘엿 산등성이를 넘으려한다. 거칠은 벌에 저 녁바람이 일기 시작해서 계숙의 머리카락과 옷깃을 날린다.

바람은 쌀쌀하여도 두 사람은 조금도 추운 줄을 몰랐다.

뻘겋게 상기가 된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여름날 이른 아침 에 냉수를 끼얹어 세수나 하는 듯이 시원하였다.

『문안까지 걸어 들어갈까요?』

『좋지요. 걸어갑시다. 스파르타 청년들은 사랑허는 사람을 만나려고 밤중에 삼십리나 되는 지부랄타르 해협을 헤엄을 쳐서 건너다녔다는데요.』

하고 수영이도 매우 로맨틱해졌다.

두 사람은 큰길로 내려와서도 지나가는 사람이야 비웃건 말건 여전히 팔을 끼고 걸었다. 무인지경을 행진하는 군대 처럼 처벅처벅 발을 맞추었다. 한참 걸으니 속옷에 땀이 웬 만큼 후끈하고 더웠다.

『우리는 행복이란 것을 믿지 마십시다. 그렇지만 우리는 둘이 다 이렇게 튼튼한 것이, 건강한 것만이 단 한 가지 우 리의 밑천이예요!』

『그래요, 이렇게 수영씨허구만 발을 맞춰서 걸어나가면 앞에 무서울 게 없겠어요.』

『그럼요, 젊은 남녀가 합심합력을 해서 씩씩허게 싸워나 가면 거칠 게 없지요, 겁날 게 없지요.』

『난 수영씨만 믿을테야요. 이 목숨이 끊지는 날까지 수영 씨의 이 단단한 팔에 매달릴테야요!』

하고 계숙은 수영에게 몸을 실리듯 하며 걷는다.

『책임이 너무 무거울걸요. 내가 되려 매달리면 어떡 허실 테야요?』

『아이구 그럼 난 아주 찌부러지게요?』

무르익은 복숭아를 쪼개논 듯한 계숙의 입술은 바로 수영 의 턱밑에서 경련이나 일으키듯 조금씩 떨린다.

누가 떠다민 것도 아니요, 끌어당긴 것도 아니언만 두 사 람의 그림자는 호젓한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가서는 한덩어 리로 뭉쳤다. 가쁘게 숨을 내쉬는 계숙의 젖가슴은 따로 살 아있는 생물처럼 얇다란 속옷속에서 벌룽거린다.

수영은 지구 덩어리를 껴안고, 계숙은 태양을 붙잡은 듯 조그만 반항도 없이 입술의 처녀를 바쳤다.

[편집]

두 사람은 가슴벅찬 흥분과 불붙는 정연을 식히느라고 힘 을 들였다. 그러다가 길거리에 전등불이 쫙 들어오자 신비 의 세계는 날아가 버렸다.

남녀는 황급히 떨어져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묵묵히 문안으 로 들어왔다. 얕은 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이듯 큰 길 좌우와 남산 일대에 깔린 전등불이 이날은 여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저주의 대상이던 도회, 모든 불평의 소굴이던 서울 이 눈이 부시도록 찬란해 보였다.

배오개까지 걸어 들어오는 동안에도 다시는 말을 아니할 듯이 두 입은 다문채로 있었다. 서로 얼굴을 대하기가 부끄 럽고 수줍었던 것이다.

『저녁을 또 먹어야지요.』

하고 수영은 길가의 설렁탕 집앞에 와서 우뚝 선다.

『나두 좀 시장해요. 아꾸 하두 탐스럽게 잡수시는 통에 난 한 공기 밖에 못먹었서요.』

『들어오세요.』

명령하듯 하고 수영은 누린 냄새와 함께 더운 김이 연기처 럼 서리어 나오는 설렁탕 집으로 쑥 들어간다. 계숙은

(아이 여기서 어떻게 저녁을 먹는담)

하면서도 비슬비슬 따라 들어섰다. 계숙이가 설렁탕 집에 를 들어가기는 물론 처음이었다.

각반을 친 노동자가 대여섯이나 설렁탕 뚝배기에 머리를 틀어박듯 하고 먹다가 일제히 거무테테한 얼굴을 쳐들고 계 숙을 주목한다. 주발에다 조밥덩이를 껴안고 들어온 영감장 이까지 계숙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그네들도 이런데서 이런 말쑥한 젊은 여자를 맞이하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수영은 납작한 나무 걸상에 다리를 오그리고 걸터 앉아서 한눈도 팔지않고 설렁탕 국물을 훌훌마신다.

계숙은 핸드빽에서 지리가미를 꺼내어 검은 때가 덕지덕지 묻은 숟가락을 닦아 가지고 홀짝홀짝 국물을 떠넣는다.

그렇건만 수영은 무거리 고춧가루며 꺽둑꺽둑 쩔어논 파양 념을 듬뿍 타가지고 밥덩이를 두어번 끄더니 어느 틈에 뚝 배기 밑바닥까지 득득 긁는다.

설렁탕 값은 수영이가 버젓이 치르고 나왔다. 나가다가

『자 우선 좋은 경험 하셨지요?』

하고 수영은 양치질을 왈각왈각해서 길바닥에다가 배앝는 다.

『그 사람들이 자꾸만 쳐다봐서 난 먹는 숭내만 냈어요.』

『체면을 차리면 언제든지 손해 밖에 볼게 없지요.』

하고 수영은 계숙을 비웃었다. 계숙은

『우리 내친 걸음이니 구경 갈까요? 조선극장에 좋은 사진 이 왔는데……』

하고 응석을 부리듯 한다. 수영은 여전히

『글쎄요……』

할 수 밖에 없었다. 구경도 한번 가고는 싶지만 입장권 살 것도 걱정이요. 그런 번화한 데서 신문사 사람들을 만날까 보아 주저하였다.

『다음날 갑시다.』

하는 것을 계숙은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사동 골목으로 들 어섰다.

계숙은 몇걸음 앞을 서서 달음질을 하듯 극장으로 가서 표 두장을 사다가 뒤떨어져 오는 수영을 준다.

『에라, 오늘 하루만 철저허게 놀자.』

하고 수영은 제가 표나 산 것처럼 앞장을 서서 버티고 들 어갔다.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층층대로 올라가는데

『계숙이!』

하고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봐 계숙이!』

새띈 여자의 목소리는 층층대로 따라 올라온다.

계숙은 위층에서 멈칫하고 내려다 보았다. 그서은 경자였 다. 계숙의 수영의 뒤를 허겁지겁 쫓아올라가서

『저 앞줄에 가 앉아 계서요.』

하고 이르고 층층대로 내려오자 놀란 토끼와 같이 뛰어올 라오는 경자와 마주쳤다. 경자의 뒤를 천천히 따라 올라오 는 경호의 안경이 휘황한 전등불 아래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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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는, 오늘 저녁때까지 오겠다고 찰떡같이 맞춘 계숙을 기다리다 못해서 암상이 통통히 났었다. 그러다가 조선극장 에 훌륭한 발성영화가 오늘밤부터 상영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좀이 쑤셔서 경호를 충동여 가지고 구경을 왔다. 왔다 가 뜻밖에 문간에서 계숙이가 올라가는 것이 언뜻 눈에 띄 었던 것이다. 수영은

(왜, 먼저 올라가 있으라구?)

하고 계숙의 뒤를 내려다보다가 계숙이가 경자에게 꾸지람 을 들 듯 하면서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고

『조계 언제 왔어.』

하고 위층 꼭대기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저 사람허구 종일 얼려 댕겼군.』

하고 경자가 위층으로 대고 입을 삐쭉해 보이는 것을

『아니야 모처럼 구경이나 한번 시켜달라는걸 어떡해.』

하고 계숙은 마음에 없는 거짓말로 꾸며대었다.

『그럴거야.』

하면서도 경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네가 누구를 속일 려구) 하고 계숙을 한껏 흘겨보면서 올라왔다.

계숙은 고개를 돌려 수영을 찾았다. 그러나 첫날이라 사람 이 꾸역꾸역 들이밀려서 찾을 수가 없었다. 위층 맨 꼭대기 로 올라가 학생들 틈에 끼어 앉은 수영이가 눈에 띄울 리가 없었다.

경자는 계숙의 표까지 특등으로 바꿔가지고 올라와서

『이렇게 사람 많은데 찾기는 뭘 찾어?』

하고 계숙을 맨 앞줄의 좌석으로 끌고 간다. 경자는 계숙 이와 나란히 앉았다가 경호가 들어오니까 냉큼 일어나 제 자리를 내어 준다. 경호는 넥타이를 매만지고 위엄을 꾸미 며

『구경 오셨에요?』

하고 은근히 머리를 잠깐 숙이며 목례를 한다. 계숙이도 조금 몸을 일으키며

『오셨어요?』

하고는 외면을 하고 앉았다. (하필 내 곁에 와 앉을게 뭐 야) 하고 경호와 어깨가 마주닿도록 가까이 앉았으면서도 될 수 있는대로 몸을 비키려고 한다. 마지 못해 끌려와 앉 았노라니 그야말로 바늘방석에 가 앉은 것 같다. 수영의 송 곳끝 같은 시선이 자꾸만 좌우와 등뒤에서 저의 뺨과 목덜 미를 찌르는 것 같아서 송구해 견딜 수가 없다.

(얼른 불이나 꺼졌으면)

하자 극장 안이 꿈벅하더니 사진이 비치기 시작한다.

수영은 세 사람을 내려다보다가

(계숙이를 다른 자리로 빼앗어 가지고 옮겨 앉을까. 경호 남매의 골을 좀 단단히 올려 줄까)

하고 몇번이나 들먹거리다가

(에라 점잖지 못하다)

하고 도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사진이 재미있는 고비를 넘 을 때마다 으스름한 붉은 전등빛 아래서 경호가 몇번이나 계숙이게 몸을 기대듯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수영의 눈은 계숙이 머리 뒤에가 달라붙고 계숙이 역시 스 크린(映寫幕)이 등뒤이 달린 것 같아서 끝이 날때까지 무슨 사진을 보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불이 또 다시 휘황하게 켜졌다. 계숙이는 손수건으로 얼굴 을 반이나 가리고 머리를 숙이고 앉았다.

그러다가 왼쪽 부인석의 기생들 틈에 정신이가 끼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신은 경호와 계숙이 편만 노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특등석으로 비비고 들어온다.

경자가 먼발치로 보고 손짓을 했던 것이다. 정신은 경자더 러

『나 조금 아까 들어왔어.』

하고 묻지 않은 말을 하고 계숙의 얼굴을 처음보는 사람처 럼 들여다 보고는

『아아니 난 누구라구. 계숙이두 왔구먼.』

하고는 경호와 계숙을 번갈아 보더니

『재미가 퍽 좋군.』

하고 의미 깊은 웃음을 웃는다.

계숙은 인사 대답도 아니하고 발딱 일어났다. 그 자리에 앉았기가, 더구나 정신의 눈앞에 앉았기가 정말 싫었던 것 이다.

『어딜 가?』

경자가 놓치면 큰일이나 날 듯놓 따라 일어나며 다시 계숙 을 붙잡아 앉히건만

『머리가 아퍼서 잠깐 바람을 씌구 들어 올테야.』

하고 경자의 손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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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제가 일어서 나오는 것을 수영이가 어느 구석이서 든 보았으면 으레 따라 나올 줄 알았다. 위층복도에서 서성 거리다가 나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밖으로 나갔다.

경호의 곁에서 머릿기름 냄새를 맡으며 오래 앉았다가 수영 의 오해를 사기 쉬운 것보다도 정신에게 그런 장면을 들킨 것이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나오긴 나왔어도

(수영씨헌텐 작별을 해야 허겠는데……)

하고 다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섰으려니까 기다리는 수영은 나오지 않고 경자가 층계를 굴러내리듯 하며 쫓아 나왔다.

『왜 구경을 허다말구 혼자만 나와? 아마 정신이가 보기 싫어서 나왔지?』 하며 어린애를 달래듯 한다.

『기분이 나뻐서 일찍 잘테야.』

하고 계숙은 발꿈치를 홱 돌렸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갈까? 아직 초저녁인데……』

『아냐. 머리가 아퍼서 아무데도 가기가 싫어.』

『그래두 오늘저녁엔 우리 집으로 가야만 할걸.』

『가야만 헐게 어디 있어?』

계숙은 경자의 말을 되받았다.

『그동안 이사를 했어.』

『이사를 허다니?』

『우리 집으루……』

『누가 이사를 했단 말야?』

『내가 아까 가서 계숙이 짐을 다 옮겨 왔는걸.』

『뭐?』

계숙은 깡충 뛰어 오를만큼 놀랐다. 그날 저녁때 경자는 계숙을 기다리다 못해서 사숙으로 갔다가 아무말도 없으니 까 계숙의 이부자리며 책상 경대 등 속옷을 자동차로 실어 서 저의 집으로 옮겨갔다. 아무리 저의 집으로 같이가 있자 고 졸라도 차일피일 끌기만 하고 수영이가 드나드는 것이 위험도 하였다. 그래서 경호의 밀령을 받아가지고 계숙이가 없는 틈을 타 비상수단을 쓴 것이다.

처음에는 주인 마누라가 쫓아 나와서

『임자두 없는데 짐을 내놀 수 없오.』

하고 막무가내고 방문 열쇄를 내놓지 않는 것을

『글쎄쎄 계숙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별안간 배가 아 프다고 누워서 내가 대신 왔어요.』

하고 전부터 계숙을 가정교사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이 있었 다는 말까지도 해도

『어쨌든 그 학생이 오기 전엔 못 내놓겠다는데 웬 여러말 요?』 하고 머리를 내저었다. 경자는

『아이 마님두 거진 날마다 놀러오는 나를 못믿어서 그러 슈?』

하고 계숙의 방값 밀린 것과 계숙이가 신세를 졌다고 전해 달라는 말하고 십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손에다 넌지시 쥐 어 주었다. 그제야 주인 마누라는

『온 이건 뭘 다 준단 말요? 나두 여간 섭섭치 않구려. 내 한번 찾아가 보리다.』

하고 경자의 집 번짓수를 적어달래 가지고는 순순히 짐을 내주었던 것이다.

계숙은 발끈하고 성미가 나서

『그런 경우가 어디 있어? 내 말두 안들어보구 제 맘대루 남의 짐을 옮겨가?』 하고 발을 굴렀다.

『그렇게 성을 낼 일이 아니야. 계숙이가 왜 반승낙은 허 지 않었어? 집에선 다 올 줄 알구 기다리고 있는데. 어머니 도 사람이 얌전허다구 기왕이면 하루바삐 다려오라구 해서 그래 돈까지 주길래 묵은 셈을 다허구 돈 십원을 더 주구 왔어.』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뭇 애걸하듯 한다.

계숙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제몸 주체를 다른 사람이, 더구나 경자가 해준다는 것도 매우 우스운 일이거니와 이부 자리까지 없는 텅 빈 방으로 자러 가는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장에 경자의 집으로 쫓아가서 짐을 도로 빼앗아갈 형편도 못된다.

전등불이 눈이 부시게 내려비치는 극장 앞에서 언제까지나 서서 수영이가 나오기만 기다릴 수도 없어서 계숙은 몸둘 곳을 몰랐다. 당장에 피곤한 다리를 뻗을 곳이 없고 모든 감정이 삼줄과 같이 엉클어진 머리를 쉴 곳이 없었다.

(여관으로 갈까?)

(수영씨를 내쫓고 그 집에 가 잘까?)

계숙은 마음의 방황으로 곁에서 저의 집으로 가자고 자꾸 만 조르는 경자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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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사진을 볼 생각도 아니하고 눈을 딱 감고 앉았었 다.

(계숙이가 만일 경호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면 저녁마다 둘 이서 구경이나 다니렸다. 저렇게 특등석에 나란히 앉으렷다)

하고 불쾌한 공상과 질투에 몸을 떨며 앉았다가 눈을 떠보 니 계숙이가 앉았던 자리에서 없어졌다.

(나를 찾어 올러오지 않았나?)

하고 곁을 둘러보아도 여자는 하나도 없다.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자리를 뜬게로군.)

하고 신지무의 하고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계숙이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제야

(경자가 또 어디로 끌구 갔구나)

하였다. 그러나 경호가 그저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을 보고야 안심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혼자 구경을 할 재 미도 없었던 것이다.

(인사두 안허구 갔을 리가 없는데……)

하고 계숙에게 들르려다가 (밤에 또 찾어가는 건 재미적어) 하고 저 혼자 짓골로 올라가려니 갑자기 반편이 된것처럼 허전하고 신변이 외로운 것을 느꼈다.

사국으로 들어가 군불을 때면서도, 두 사람의 애정이 저 불길처럼 활활 타기만 하고 영원히 꺼질 때가 없었으면 하 고 속으로 빌었다. 수영은 더욱 쓸쓸한 방으로 들어가 남폿 불을 켜고 이불을 두르고 앉아서 편지를 썼다.

미진했던 말을 더구나 면박하게 할 수 없던 일을 솔직하게 썼다. 사연은 대강 이러하였다.

…계숙씨가 그 집으로 들어가시려는 것을 내가 반대하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활환경과는 아 주 딴 세상인 부르조아 가정에서 보고 배울 것이 조금도 없 는 것과 둘째는 경자에게 취해쓴 돈 (금액은 알고 싶지도 않지만 적은 돈이 아닌 줄만 추측됩니다)을 갚을 길이없기 때문에 또는 은혜를 입은 사람의 소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서 조경호와 간휼한 음모로써 경자를 매파(媒婆) 삼아 계획 적으로 유혹하는 것을 번연히 인식하면서 자기 발로 걸어서 함정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한치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행 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하면 대단히 불쾌하실지도 모르나, 그것은 기생이나 더 심하게 말씀하면 색주가나 유곽에 있는 여자도 다 그와 비슷한 사정으로 몸을 판 것입니다.

반면에 봉건적인 효도사상에 희생이 되어서 그들은 인육까 지 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계숙씨의 경우는 그 동기가 그네만도 못합니다. 부모나 형제를 살리기 위함도 아니요, 단순히 몇 달동안 빌린 밥값과 몸치장을 한 대가(代價)로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계숙씨에게는 여러 가지 변명할 재료가 있겠지요마는 요컨 대 그런 구구한 변명쯤으로는 벌써 귀를 기울일 사람이 없 을 것입니다.

나는 한달에 잘해야 이십 여원 밖에 못되는 수입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내일부터라도 신문사 판매소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자고 밥만 사먹으면 수입의 절반은 계숙씨에게 보조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경자의 빚을 다달이 꺼나가십시오!

당신의 말씀과 같이 「쌈짓돈이 주머닛돈」이니 조금도 사 양하실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 한 신선한 의무로 알고 방울소리를 크게 내며 서울의 거리 를 기쁘게 뛰어다니겠습니다.

나는 이 이상 더 쓰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총 명하고 조금도 마비되지 않은 양심을 가진 당신의 인격을 존중하며 겸하여 깊이 생각하신 뒤에 결정하실줄을 믿고 간 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일간 또 반가이 만나 뵈옵겠으나 이 편지의 답장만은 속히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영원히 기념할 날 김 수 영 수영은 편지를 다시 읽어보며 사연이 너무 과격하지나 않 을까? 혹시 도리어 오해나 하지 않을까? 하고 주저하다가

(이만이나 해야 콕 찌르는 맛이 있지)

하고 몇번이나 읽고 하다가 꼭꼭 봉한 뒤에 길거리로 나가 서 우체통에다 넣었다. 넣고 나서도 편지가 중턱에 걸리지 나 않았나 하고 우체통의 옆구리를 쳐보고서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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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저녁때까지 수영은 답장을 기다리다가

(내일 아침에 꼭 오겠지)

하고 신문사로 들어갔다. 직접 계숙의 집으로 찾아가지 못 할 것은 아니지만 백화점에서 잘 때나 되어서 돌아오는 사 람을 찾아가서 못자게 굴기가 애처로왔던 것이다.

그날이 신문대금 받은 것을 마감하는 날이라 수영은 판매 소로 들어가서 셈을 하려니까 주임은

『참 조금 아까 이런 사람이 와서 찾데.』

하고 종이쪽에 적어 두었던 것을 내어준다. 거기에는 저의 당숙되는 사람의 이름이 씌어있었다.

(어째서 올라왔을까? 일부러 사람까지 보냈을 때는 집에 무슨 연고가 단단있는 모양인 걸)

하자 해숫병으로 일년이면 반년은 누워서 지내는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궁금증을 참다 못해서 신문사 밖 으로 나가서 버정거리며 기다리자 얼마 아니해서 찌부러진 갓을 비딱하게 쓴 시골양반이 입을 헤에 벌리고 두리번 거 리면서 걸어왔다. 수영은 달려가서

『아저씨 어째 올라 오셨에요?』

하고 시골서 하듯 땅 위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혀 절을 했 다.

아저씨 되는 사람은 수영이가 서울서 신문사에 다닌다니까 조금 전에 영업국으로 찾아 들어올때의 죽 늘어 앉았던 사 원들처럼 양복을 말쑥하게 입고 있을 줄 알았다가 뜻밖에 인력것군 복색을 하고 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이게 수영인가?) 하면서도

『그동안 몸성히 있었니?』

하고 고개를 끄떡이면서 잠시 어리둥절하는 눈치다.

당숙되는 사람은 과연 수영에게 급한 소식을 전하였다. 그 것은 수영의 아버지가 수일 전에 타동 사람에게 잎담배 몇 줄을 사다 먹다가 전매국 관리에게 들켜서 담배를 판 사람 을 대라고 몹시 얻어맞고 주재소까지 끌려갔다가 나와서 인 사불성으로 몸져 누웠다 한다. 벌금 이십원을 당장에 바치 지 못하면 오십리나 되는 경찰서로 가서 구류처분을 받으라 고 순사가 마지막 통지를 하고 갔다 한다. 그러나 온동네를 털어서 단돈 몇 원도 구처를 할 도리도 없으니 어떻게든지 돈변통을 해가지고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만해도 놀라운 소식인데 당숙되는 사람은

『돈은 둘째구 아주머니께서 말씀이 아니시다. 형님이 매 맞고 넘어지고 순사가 나오고 허는 통에 고만 몹시 놀라셔 서 기절을 하신채 그저 깨어나지를 못허시는구나. 급히 서 둘러 가지 않으면 아마 임종두 못허기가 쉽겠다.』 하고 입 맛만 쩍쩍 다신다.

수영은 앞이 캄캄해졌다. 늙은 아버지가 매를 맞고 운신을 못한다는 것도 차마 듣기 어려운 소식인데. 그다지 저 때문 에 오매불망을 하시던 어머니의 임종도 못할 생각을 하니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그러나 수영은 슬퍼 할 겨를도 없었다. 더구나 당숙되는 사람이

『내려가는 길에 관재두 사가지고 가야겠다. 차마 들것에 야 모실 수 있니?』

하고 말하는 눈치를 보면 그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 기도 하다. 수영은 목이 메어서

『아 어머니가 벌써 돌아가시지나 않으셨에요? 똑바루 말 씀을 해 주세요. 속이나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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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가 평생을 두고 장리와 중변을 놓아 눌여서 오륙천석 이나 받게 된 것이다.

수영의 집에서는 대대로 충실히 마름노릇을 하여 왔다. 말 하자면 수영이도 그 덕택으로 근처에서는 처음되는 서울 유 학을 하게 된 것이다.

…마침 그날밤에 떠나는 서편이 있었고 요행으로 순풍이 불어서 그 이튿날 해질 무렵에 수영은 삼년만에 고향의 붉 은 흙을 밟았다.

배에서 내리자,

『언니!』

하고 주막집에서 뛰어나오는 것은 사랑하는 아우 복영이었 다.

『네가 어떻게 나왔니? 퍽두 컸구나. 그래 어머니가 어떠 시냐!』

하고 수영은 반가움에 겨워 아우를 얼싸안고는 머리를 쓰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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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영은 느껴오르는 울음을 꿀걱꿀걱 참으면서

『어머니가 인젠 나두 못 알아보신다우.』 하다가는

『그 망헐놈의 자식들이 와설랑 아버지 뺨을 때리구 막단 장으루……』 하고 울음이 터져서 말을 아물리지 못한다.

복영은 늙은 아버지가 형의 나이 밖에 안되는 전매국관리 에게 여러사람 앞에서 사매로 얻어맞고 온갖 욕을 다 당하 면서도 마주 대들어보지도 못하다가 매에 못이겨 마당에 넘 어질 때의 기막히던 광경을 다시 눈 앞에 그려보고는 오래 간만에 만난 형에게 매달려 하소연을 하였던 것이다.

수영은 아우의 목을 얼싸안았다가 들먹거리는 등을 어루만 지며

『울지 말아, 응 복영아 울지 말어. 인제 언니가 가면 반가 워서 일어나실걸. 자! 어서 가자.』

하고 눈물을 씻어 주며 앞장을 세웠다.

열네살 밖에 안된 어린 동생이 삼사십리나 걸어서 마중을 나온 생각을 하니 수영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백리길이라도 걸어갈만큼이나 기운이 났다.

뒤에 따라오던 당숙되는 사람은

『쟤가 점심두 그저 못먹은 모양이니 요기나 좀 시켜가지 구 가자.』

하고 주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복영은 찬밥을 데워 먹이 고 자기는 막걸리 한사발을 마시고 나왔다.

해는 멀리 고향의 산등성이 너머로 떨어진다. 제일 높은 산 마루터기 위로 주저앉는 유난히도 크고 붉은 태양은 눈 아래로 올망졸망 모여들어 몇십리나 연접한 작고 큰 apt부 리와 봉우리의 황소 잔등이 같이 느슨히 흘러내린 산허리 로, 주황빛 낙조를 부챗살처럼 펼쳐 내린다.

그러다가는 산너머 동네에다가 온통 불을 지른 것처럼 구 름이 타고 하늘이 그슬릴 듯이 황홀하다.

산기슭의 납작납작 엎드린 초가집에서 서리어 오르는 몇줄 기 저녁 연기와 함께 응달르 기어드는 어둠이 각일각으로 짙어갈수록 정이 든 산천의 윤곽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 햇발이 바라 위로 떨어져서는 수평선 위에 넘노는 물결 이 황금빛으로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듯 포구로 돌아드는 어 선 두어척의 흰 돛은 눈이 부시게 번득인다.

그 바다 위를 갈매기가 수십마리나 행렬을 지어, 물독속의 장구벌레처럼 날개를 너울거리며 지나가다가는 삐익삐익하 고 몇마디 애처로운 소리를 땅 위에다 흘리며 수영의 머리 위를 가로 질렀다.

오리도 못가서 해는 고요히 운명(殞命)하고 어둠은 길걷는 사람의 신변을 에워쌌다.

수영의 일행이 한 오리쯤 더 걸었을 때 날은 아주 캄캄해 졌다. 해변을 끼고 도는 길이라 드센 바람에 앞서가는 복영 의 두루마기 자락이 풀풀 날린다. 집채 같은 파도가 닥쳐오 는 듯 쏴쏴하고 수영의 귓바퀴를 스치는 것도 바람소리다.

수영은 아우의 손을 이끌고 조약돌이 울퉁불퉁하게 깔린 신작로를 될 수 있는 대로 급히 걸었다. 도랑을 만나면 같 이 뛰어 건너고 갯고랑을 지날 때에는 업어 건냈다.

걸어가면서 집안 일을 물어도 보고 서울 이야기도 들려 주 었다.

그러나 수영의 머리는 서글픈 추억으로 가득 찼다.

오래간만에 고향의 산천을 대하는 수영은 주위의 경치를 바라다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만 이제까지 제가 밟아 온 길을 돌려다 보기가 급했다.

수영의 마음은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캄캄한 밤 그늘보다도 더 컴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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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신작로를 버리고 더가까운 산길로 들어섰다. 어려 서부터 다니던 길이라 발은 익건만 나무위에 깃을 들던 까 막까치가 선잠을 깨어 머리 위에서 푸드득푸드득 날으고 짐 승처럼 웅승그린 솔포기가 발을 띄어놀 적마다 부스럭거려 서 머리끝이 쭈뼛쭈뼛 하였다. 그런 때마다 복영은 형의 옷 소매를 단단히 끌어 당겼다.

수영은 무섭도록 고요한 어둠을 헤치며 걸었다. 하늘의 총 총한 별을 우러러 방향을 잡고 걸어가면서 칠년전에 고향을 떠난던 때를 생각하였다.

그때도 이 길을 밟았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달이 밝았었 다. 아버지는 안방에서 담뱃대만 재떨이가 깨어져라하고 두 드리며 내어다보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대문 밖에 기대 서서

『잘 다녀오너라.』

소리를 몇번이나 되풀이를 하시며 차마 손을 놓지 못하시 는 것을

『어머니 내 공부 잘허구 올께유.』

하고 떨리는 손을 뿌리치듯 하였다. 그러나 동구 밖에서 돌려다보니 하얀 옷을 입으신 어머니는 돌아서서 우시는 모 양이었다. 재작년에 시집을 간 누이동생 영순이는 치맛자락 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내어 울었었다.

그해에 일곱 살 밖에 안되었던 복영은 형의 두루마기 고름 을 감아 쥐고 신작로까지 따라나오며

『언니 잘 가우. 방학 때 꼭 와유』 하다가는

『나두 서울 갈테야.』

하고 논두렁에 가 펄썩 주저앉으며 발버둥질을 치는 것을 간신히 달해서 보내던 생각이 났다.

그해에 저와 함께 보통학교를 졸업한 동무들은 십여명이나 나루께까지 전송을 나왔었다. 달이 대낮같은 바닷가에서 바 위에 철썩철썩 부딪치는 물결 소리를 반주삼아 그 당시에 한참 유행하던 「둥근달 밝은 밤에 바닷가에는 엄마를 찾으 려고 어린 물새가」 하는 창가를 목청껏 합창을 하였다. 지 금도 그 노랫소리가 산등성이 하나를 격한 바닷가에서 들려 오는 것같다.

그러다가는 똑딱선을 기다리는 동안에 바심마당처럼 평평 한 백사장 위에서 여러 동무들은 큰벼슬이나 하러가는 사람 처럼 저를 어깨 위에다 높다랗게 덩을 태워가지고 돌아다니 며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 남자야.』

를 불러 주던 생각과 그러다가 배가 떠날 때에는 서로 감 격해서 번갈아 가며 손을 힘껏 쥐고 흔들며

『공부 잘 해라.』

『성공허구 오너라.』

『우리 동네엔 수영이 하나 뿐이다.』

『우리들을 잊어버리지 말어라.』

하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오냐 성공 못허면 죽어두 안올테다. 잘들 있거라!』

하며 손을 놀 줄 몰랐었다. 뛰하고 새된 기적소리가 들리 자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느껴가며 우는 동무도 있었다.

배가 쿵쿵 소리를 내며 고향의 산허리를 끼고 돌 때까지 달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리는 백사장 위에 동무들은 바윗덩 이 같이 까맣게 한데 뭉쳐 앉아서 언제까지나 흩어질 줄을 몰랐다. 저도 선창에 기대 서서 그 우정의 뭉덩이(結晶)를 바라다보며 바다 위에 뜨거운 눈물을 뿌리던 그때가 바로 몇 달전 같다.

그후 철년동안에 수영은 방학때면 각처 농장으로 실습을 가고 단체로 여행을 다니느라고 집에는 두어번 손님 다녀가 듯 하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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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생각을 계속한다.

나는 그동안 부모의 정을 끊고 그렇듯 자별하던 동무들에 게도 근년에 와서는 엽서 한 장 아니하고 지냈다.

몇대나 내려오던 내 고향, 나를 풀어 주고 길러 주던 산천 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던가, 성공못하면 죽어도 아니 돌아오 겠다던 나는, 지금 누더기를 입고 고향에 돌아온다. 동무들 을 만나면 무어라고 구차한 변명을 할까? 지금까지도 변함 이 없이 내가 성공하고야 돌아올 것을 믿어 주고 축복해 주 고 게다가 많은 기대와 촉망을 붙이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 그 순진한 친구들을 도대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 가?

다섯해 동안 책하고 씨름을 했고 학교 기숙사에 갇혀있다 가 붙들려가서 콩밥을 먹은 것과 또 몇 달동안 방울을 차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최근에 배달을 한 것 밖에는 과 연 무슨 일을 하였는가, 서울로 올라가서 금 같은 학비를 올려다 쓰며 도대체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웠는고?

하니 수영은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록 급한 일로 다니려 온 길이라도 이 기회에 부 모나 동무들에게 그동안의 모든 것을 결산해서 보고할 의무 를 느꼈다. 그러다가 수영은 (인제부터 정말 일을 해야 된다. 나는 지금 내 일터를 찾아 오는 것이나 아니냐?) 하고 속으로 부르 짖었다.

…무거운 생각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걷는 동안에 어느덧 가난고지 (이 동리 이름은 경호의 증조가 지은 것이다) 동구 앞까지 왔다.

컹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둥이란 놈이 어느결에 보았는지 복영의 앞으로 달려오며 길길이 뛰어오른다. 점둥 이는 수영이가 삼년전 겨울방학에 잠깐 왔을 때에 이웃동리 서 소매속에 넣고 와서 복영의 아람치로 기른 강아지의 이 름이다.

『허 그놈 엄청나게 컸다.』

하고 수영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까 저도 큰 주인을 알 아보는 듯 꼬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알아보지를 못하게 크 기는 했어도 눈 위에 흰 점이 박힌 것이 어둠 속에서도 뚜 렷이 보였다.

복영은 한달음에 안으로 뛰어들어가며

『어머니! 언니 왔수. 서울 언니 왔수.』

하고 대문간에서부터 소리를 지른다.

바깥 방문이 열리더니 대님짝으로 머리를 동인 아버지의 얼굴이 내어밀었다. 희미한 석유등 불빛에도 아버지의 수염 이 백발이 다 된 듯이 언뜻 눈에 띄었다.

『아버지!』

하고 부르며 수영은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절을 하였다.

아버지는 일어나 앉으려고 떨리는 팔을 짚으며

『이자식아 인제야 온단 말이냐?』

한다. 그 목소리도 가슴 속에서 떨려 나오는 것 같다.

『얼마나 욕을 보셨어요? 세상에 그런……』

『난 괜찮다. 허리를 삐어서 안직 기동은 못해두 인젠 일 어날테지. 그게 다 신수가 불길한 탓이다. 어쨌든 네가 몸성 이 왔으니 다행이다마는 암만해두 네 어머니가 내 앞을 서 려나보다.』

하면서 탐이 나는 물건을 보는 것처럼 아들의 얼굴에서 눈 을 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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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에 다녀 나오겠어요.』

하고 수영은 신도 바로 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수영이 왔구나!』

하고 마루끝으로 내닫는 것은 수영의 고모였다. 그는 소년 과수로 친정살이를 하는 여인네다.

『어머니까 좀 어떠세요?』

하고 지겟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섰다. 신문지로 한 도배 도 다 찌들은 흙방 아랫목 기직자리에 이불을 덮고 반듯이 누운 어머니는,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실눈은 떴으 나 눈동자는 정기가 빠져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는 것 같 다. 방바닥에 떨어뜨린 손은 뼈와 심줄 뿐이다. 뵙지 못한 삼년동안에 어머니는 파파 노인이 되었다. 수영은 아무말 없이 어머니의 손을 쥐자 눈두덩이 뜨끈해졌다. 고모와 복 영이가

『형님, 수영이 왔어요.』

『어머니 어머니, 언니 왔수, 정신 좀 차리슈.』

하며 번갈아 가며 어깨를 흔들어도 여전히 정신이 들락날 락하는 모양이다. 수영은

『아서라 떠들지 말아. 주무시나보다.』

하고 조용히 형태만 남은 어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실 날같은 숨소리를 듣고 있다가 돌아앉으며 소매로 얼굴을 가 린다. 복영이가 따라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를 저렇게 지레늙게 하고 산송장을 만든 죄가 그동 안 모른 체했던 저에게 있는 것 같았다.

자녀에게 대한 어머니의 자애가 봄비와 같다면 이 모자는 비를 내리지 못하는 하늘이요. 이슬을 받지 못하는 땅이었 다.

구차한 살림살이에 쪼들리고 애정에 주린 끝에 뼈만 앙상 해진 어머니! 꿈벅거리는 등잔 밑에서 수영의 설움은 길었 다. 길잡을 수 없는 눈물이 마음 속으로 흘러 내렸다.

엄마 있자 어머니가 신음하는 소리와 함께 모로 누우려는 것을 보고

『어머니 언니 왔수.』

하고 복영이가 어깨를 짚으며 목소리를 좀 높였다. 어머니 는 잠꼬대처럼

『응?』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멀거니 눈을 뜨며

『뭐?』 하다가

『어머니!』

하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큰아들을 한참동안이나 기연 가미 연가하고 쳐다본다. 그제야 조금 의식이 드는 듯 무슨 말을 하려고 무진애를 쓰다가 발발 떨리는 손을 들어 허공 으로 내젓는다. 아들은 그 손을 쥐고 제 가슴에 끌어안으며

『어머니! 수영이예요. 수영이가 왔에요.』

하며 잡은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금시 운명이나 하는 사람처럼 끓어오르는 가래를 간신히 삼키고 외마디 소리를 하듯

『수 수영이……』

하면서 손에 힘을 주며 아들의 손을 끌어당긴다.

모기소리만한 그 목소리는 몹시도 애련하였다. 어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이 보일듯말듯한 웃음을 그 수척한 입모습에 띄운채 다시 기함이 되어서 눈을 감는다.

『어머니, 제가 인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테니 아무 걱 정 마시고 일어나세요. 네? 어머니!』

하고 수영은 몇번이나 눈물을 삼켰다.

윗간에서 치마끈으로 눈두덩을 비비고 앉았던 고모는

『세상엔 제 혈육이 제일이야. 나흘째나 정신을 못차리더 니 너는 알어보시는구나.』

하고는 아들 하나 없는 자기의 신세를 새삼스러이 한탄한 다. 그리고는 그동안에 집안에 불의지변이 생겼던 것이며, 오라버니 내외의 병세가 여간 위중하지가 않았었고 영순의 시집이 불과 사십리밖에 안되는데 몇번이나 급보를 했건만 불일간 산고가 있을 듯하다고 근친을 시키지 않는다는 말을 수다스러이 늘어놓다가

『아이 참 시장허겠구나.』

하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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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이 약을 우선 한첩만 달여 주세요.』

하고 수영은 짐을 끌러 약 한첩을 꺼내서 고모에게 주었 다.

내려올 때 의원이, 노엔네 병이라 앉아서 집증을 할 수가 없으니 우선 보제약이나 한제 써보라고 해서 지어가지고 내 려온 십전대보탕이었다.

고모가 부엌에서 불을 지피느라고 솔가지 꺾는 소리가 나 더니 얼마 아니 있자 고모는 복영이와 겸상을 해가지고 들 어왔다.

굴을 넣고 끓여서 냄새만 맡아도 구수한 우거지국에 배추 포기가 사발로 하나 가득 찬 싱싱한 통김치를 보기만해도 침이 고였다. 질화로 가에는 달걀찌개가 끓다가 졸아붙었다.

수영은 고봉한 밥을 세모를 지어서 푹푹 퍼먹었다. 먹으면 서 기숙사의 사철 싸늘하고 구드러진 밥과 남이 먹던 찌꺼 기를 그러모아 주는 상밥집 반찬 생각이 났다. 더구나 소금 국물에다가 젓가락만 대면 와르르 헤지던 감옥의 콩밥을 맛 있게 먹던 생각을 하였다.

훈훈한 안방 아랫목 어머니 곁에서 집을 떠난 뒤에 처음으 로 수영은 마음을 놓고서 더운 밥 한주발을 게눈 감추듯 하 였다.

허리띠를 늦추고 늦은밥 숭늉을 훌훌 마시고 나니 세상에 더바랄 것이 없는 듯이 마음이 느긋하였다.

어머니는 어느 겨를에 침침한 등뒤에서 아들 형제가 탐스 럽게 밥을 먹는 양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수영은 어머니의 신경을 더 피곤하게 하지않을 양 어머니 에게는 일부러 말을 하지않았다. 고모에게 약을 내어 주고 도 못미더워서

『약이 다 끓었을까요?』

하고 부엌으로 내려가서 약봉지를 덮어 안쳐논 것을 보고 야 바깥방으로 나갔다.

바깥방에는 탈망을 하고 마을에서 온 영감들이 가뜩 들어 앉았다. 담배연기가 사람 얼굴을 분간하지 못할만큼이나 자 욱하다.

수영이처럼 잘재미가 없고 말수효가 적은 아버지는 아랫목 에 가 기대 앉아서

『저녁 먹었니?』

하고 아들을 쳐다볼 뿐이다.

『네.』

하고 수영은 문틈을 뻐개놓고 나서 영감님들에게 차례차례 절을 하였다.

『오 수영이 참 여러해만이로구나.』

『못 알아보게 건장해졌는걸.』

『그래 친환이 대단허셔서 얼마나 염려가 되느냐?』

동네 늙은이들은 절을 받으며 한마디씩 한다.

『차차 나시겠지요.』

하고 수영은 양복바지가 거북한 것을 억지로 참고서 웃목 에 가 앉았다.

『이왕 내려왔으니 늙으신 부모 생전에 모시구 예서 살어 라. 번화한데루 떠돌아다녔으니까 갑갑은 허리라마는 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들두 별 수가 없드라.』

하고 이야기 참견을 하면서도 손을 놀리지 않고 청올치를 꼬고 있는 차돌이 아버지가 훈계하듯 한다.

『네, 안직 뫼시구 있겠습니다.』

간단히 대답을 하면서 수영은 그네들의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버지가 봉변을 할 때의 광경을 번차례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이 시골 구석에서 한평생을 흙을 파헤치 느라고 손톱발톱을 닳린 노인들의 흙빛보다도 더 누르다 못 해 꺼멓게 기미가 앉고 장마뒤에 갯바닥처럼 주름살이 잡힌 얼굴들!

『내가 여기 와 묻히면 필경은 저 늙은이들의 꼴이 되구 말겠구나.』

하니 수영은 제얼굴에도 금방 주름살이 잡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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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 개나리 울타리에서 짹짹거리는 참새들이 수영의 곤 한 잠을 깨웠다. 두어 아름이나 되는 장독대곁의 소나무가 지에는 까치들이 모여앉아 집을 굽어보며 궁둥이를 깝죽깝 죽 쳐들면서 깍깍거린다.

수영은 기다란 하품과 함께 네 활개를 벌리고 기지개를 켠 뒤에 일어났다. 어제 온종일 배에 흔들리고 집에 와서는 이 런 생각 저런 근심에 머리가 휘잉한데다가 노독까지 나서 넓적다리가 뻐근하였다.

그러나 뜨뜻한 방에서 잠을 푸근히 자고 났기 때문에 몸이 거뜬한 듯도 하였다.

『옷 한벌 있건 주세요.』

하고 고모에게 청하니까

『글쎄다. 아버지 옷이 네게 맞을는지 모르겠다.』

하고 고모는 장롱 속에서 흰 솜바지 저고리를 꺼내놓는다.

어머니가 손수 짜신 툭툭한 무명옷이다.

어머니는 밤사이에 매우 동정이 있는 듯하였다. 곁에 황소 만한 아들이 누워 자는 것을 보니 마음이 든든해서 무형한 가운데에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위안을 받은 것같다.

(저렇게 든든하고 믿음성스러운 맏아들이 인제는 내곁을 떠나지 않으려니)

하는 짐작만으로도 보약 몇제를 먹은 것보다도 나을지 몰 랐다.

아들은 자기 앞으로 달려드는 병마와 고적과 모든 불행을 막아 줄상 싶고 (저 커다란게 내속으로 난 아들인가?) 싶었다. 어머니는 실 낱같은 목소리로

『아이 갑갑해. 날좀 일으켜다우.』

하며 팔을 내어미는 것을

『오늘 하루만 더 누워 계시지요.』

하면서 등뒤로 가서 조심스러이 안아 일으켰다. 마른 풀뿌 리처럼 흐트러진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니까

『그래 서울 재미가 그렇게 좋든?』

하고 혀끝이 잘 돌지 않는 말로 지내던 형편을 묻는다.

수영은 그 동안 지난 일을 대강대강 이야기해 드렸다. 고 생을 몹시 했다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건만

『아이고 감옥소!』

하고 어머니는 몸서리를 쳤다. 어머니 생각에는 감옥소란 말만 들어도 지겨운 곳이었다. 서천 서역국만큼이나 아득히 멀고, 염라대왕이 사는 나라보다도 더 무서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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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뒤에 수영은 복영의 손을 이끌고 울밖을 한바퀴 돌았 다. 그 동안 외면으로 본 집안의 변동도 적지 않았다. 집채 가 서쪽으로 쏠려서 장대 같은 참나무로 서너군데나 버티었 고 여러해 지붕을 해 이지 못해서 가뜩이나 후락한 집이 더 한층 낡아 보였다. 복영은 형을 외양간으로 끌고 가며

『아버지가 누신 뒤엔 내가 줄곧 여물을 쑤어 멕였다. 새 벽에 일어나면 벌이 총총허겠지. 그러군 학교엘 가야지. 갔 다 와선 또 깍지를 삶어 줘야지. 아주 혼났수.』

하고 응석부리듯 공치사를 한다.

『어이참 애썼구나. 인젠 언니가 해주지.』

하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돼지우리에는 토수시짝만큼씩 한 새끼가, 까만 놈, 하얀 놈 얼루기 할 것 없이 여닐곱 마 리가 검부저기 속에서 오물오물 한다. 팔을 벌려 한아름에 끌어모아 안아주고 싶도록 털이 윤택하고 함함해서 여간 대 견하지 않았다.

『접때 무녀리가 울밖으로 빠져 나간걸 늑대가 물어갔다 우.』

복영은 여간 분해하지를 않는다. 수영은 제가 지금 복영이 만 했을 때 밤에 동네로 마을을 갔다가 늑대를 만나서 어찌 놀랐던지 오도가도 못하고 길바닥에 가 주저앉았던 생각을 하였다.

남쪽 해변의 일기는 서울보다 삼사도 가량이나 온도가 높 았다. 더구나 금년에도 절기가 일러서 그런지 봄기운이 활 실히 떠돌았다.

수영은 들로 향한 바깥방 툇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아침 햇발이 골고루 퍼진 문앞의 밭과 논과 벌판을 내려다 보았 다. 바다 건너 아득히 먼 산봉우리에는 아직도 눈흔적이 지 워지지 않았건만 흰포목을 펼쳐논 것 같은 바다를 안을 듯 이 좌우로 활등같이 휘어져 내린 산허리에는 아지랑이가 뽀 얗게 피어오르는 듯 눈이 아물아물하다.

눈 앞의 기다란 보리밭 사례에는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 나 왔다.

동저고리 바람으로 등에 아침해를 받으며 지게를 지고 다 니는 농군들이 하나 둘 늘었다.

남향으로 환하게 터진 논바닥에는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이 가득히 고였다. 아침바람에 불려 숭어의 비늘같은 잔물결이 논두렁덩에 남실남실한다.

논둑에는 황새 서너 마리가 모를 심는 농군처럼 다리하나 를 껑충하게 걷어올리고 섰다가 무어라고 저희끼리 군호를 하더니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날은다. 새파란 하늘에다가 백 묵으로 원(圓)을 그리다가는 유유히 날아 다시 그 자리에 와 앉는다.

어디선가 이따금 청승맞은 산비둘기 소리까지 꾸루룩 꾸룩 꾸루룩하고 들려온다.

『아아 나의 고향이여!』

수영의 입에서는 이런 시(詩)의 첫구절같은 감탄사가 저절 로 새어 나왔다.

(이 깨끗하고 한가하고 정다운 내 고향을 내가 어째서 잊 어버리고 지냈던가! 티끌 천지인 도회지에서 무엇을 하려고 허덕였던고)

하고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영은 불행한 시인인 병식을 생각하였다.

이 원시적인 자연을 보여 주고 이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 시게 해주고 싶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 제손으로 심었던 축등의 미루나무는 비록 잎사귀는 떨어졌으나마 헌칠하게 벋어 올라서 두서너 뭉텅이 오락가락하는 구름을 이리저리 비질을 하는 것을 보 니 더욱 친구의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 어수선스러운 신문사 공장 속에서 진종일 납덩이만 주 무르다가 시크무레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술집에서 술집으 로 헤질러 다니는 병식을 또다시 생각하였다.

시꺼먼 석탄연기에 굴뚝속 같이 그을은 가슴을 이 깨끗한 바람으로 저와 같이 씻어냈으면 하였다.

그러나 어쩐지 앞으로는 병식이와 전처럼 의좋게 지낼 것 같지가 안했다. 어쩌면 다시 만나서 다정히 이야기 할 기회 조차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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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이가 내려왔다더라!』

는 소문이 밤사이에 논틀 밭틀을 건너 다녀서 저녁때가 되 니까 동네의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십리도 넘는 곳에서 찾아온 동무도 있었다. 그들은 수영이가 처음 고향을 떠날 때, 그 달 밝은 밤에 전송을 해주던 글방 동접 이요 보통학교의 동창생들이었다. 삼년전 겨울 방학때 왔을 때에는 꿈결같이 다녀 갔기 때문에 그중의 몇 사람 밖에는 찾아보지를 못했었다. 맨 먼저 동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온 친구를 보고

『아 오봉이가 아닌가?』

하고 수영은 마당으로 뛰어내리며 친구의 손을 잡았다.

『어 수영이 여러 해만일세. 그래 서울재미가 좋았나? 오 늘 아침에사 내려왔단 소문을 들었네.』

그러자 또 서넛이나 오봉의 뒤를 이어서 왔다. 친구들은 반가움에 겨워서 굳게굳게 악수를 하고 서로 어깨를 얼싸안 듯 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만큼이나 장성하였다. 손톱이 갈퀴발같이 닳아서 몽톡해진 실농군들 이 되었다.

검정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 붉은 흙이 묻고 북어대가리 처럼 해어진 버선에 짚신을 신은 친구들이 바깥 방 툇마루 끝에 죽 늘어 앉아서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들중에 장가를 들지 않은 총각은 수영이 하나밖에 없었 다. 동시에 그네들은 거진 다 수영이가 서울서 여학생에게 장가를 들었으리라고 짐작하는 눈치다.

동무들 중에도 제일 키가 적고 꼬맹이란 별명을 듣던 오봉 이가 벌써 자녀를 삼남매씩이나 두었다는 말을 듣고

『정말 농사를 일찌감치 지었네그려.』

하고 놀리니까

『여보게 남부끄러워이. 나처럼 천냥두 없는 주제에 자식 만 꾸역꾸역 내지르니 큰 걱정거릴세.』

하고 소태나 먹은 것처럼 입맛을 다신다.

차차 이야기를 듣고보니 그들의 생활상태는 상상하던 이상 으로 비참하였다. 옛날 동무들 중에 가장 높게 출세를 한 사람이 면서기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몇십리 밖 소학교 에 임시 교원으로 간 동무가 하나 있을 뿐, 그밖에는 남의 논마지기 밭뙈기나 일어 먹고 타동 사람의 도지집에 들어있 는 사람이 거진 전부였다. 더구나 사철 꽁보리밥이 아니면 강조밥에 푸성기나 뜯어먹고 어부렁하게 자라기는 하였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중의 몇 사람의 얼굴이 누렇게 들뜨고 맥이 풀린 것같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앉은 것이 유심히 보였다.

(영양 부족이로구나, 그렇지 않으면 기생충이 있든지)

하고 수영은 다시금 마음이 어두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두루마기도 못입고 팔짱들을 끼고 앉은 것이 으스스해 보 여서

『자 우리 방으로 들어가세.』

하고 수영은 동무들을 데리고 바깥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누웠던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의 병 문안을 받으 며

『어 인젠 괜찮어이, 어서들 들어와 놀게.』

하고 문설주를 붙들고 일어서더니 아들의 동무들에게 자리 를 내어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도 서너 사람이나 더 찾아와서 두간이나 되는 방이 데를 멜만큼이나 가뜩 들어앉았다.

안방에는 시골사람의 독특한 냄새와 후터분한 운김이 돈 다. 장판도 아니한 흙방 거적 바닥에서는 풀썩거리는 대로 매캐애한 먼지가 풍긴다.

그 냄새가 수영이로 하여금 이 방에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던 지난날의 생각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수영의 마음은 더 한층 아파졌다. 그 네들은 누구나 데쳐논 나물처럼 생기가 느릿하다. 그중에 아직도 좀 생기가 있는 것은 오봉이 하나뿐이었다. 오봉이 는

『박대포가 왜 그저 안온대여? 대흥이가 와야 잘 떠들텐 데…』 하고 문을 열고 밖을 내어다 본다.

『참 대흥이는 어떻게 지내나?』

하고 수영이가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당에서 유난히 큰 목소리로

『아 수영이가 왔다지?』

하고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오는 것은 박대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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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두 제말을 허면 온다드니.』

『에에키 교장나리가 오시는군.』

하고 방안의 사람은 일제히 몸을 일으킨다. 수영은 툇마루 끝으로 튀어나가서 대흥의 손을 잡아흔들며

『여 대흥군 참 오래간만일세.』

하며 방으로 끌어 들였다.

『사람이란 오래 살구 볼일일세. 살어 생전에 자네를 다 만나보니 허허허.』

하며 말이 끝난뒤까지도 수영의 손을 쩔레쩔레 흔든다. 그 붉고 넓적한 얼굴, 육척이나 됨직한 멀쑥한 키와 메기 입 같은 커다란 입에서 물병을 거꾸로 기울인 듯 쏟아지는 너 털웃음은 방안의 따분하던 공기를 별안간 휘저어 놓았다.

『이거 가난고지의 유지청년들이 대회를 열었구먼.』

하고 방안을 둘러보고 떠들어대는 품이 여간이 아니다.

박대홍은 학교에 다닐 때 수영이 보다는 삼년이나 상급이 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싸움도 여러번 하였지만 수영은 대흥의 그 뱃심 좋고 쾌활한 성격을 좋아하였다. 그는 서울 로 뛰어 올라가서 만두장사를 해가며 어느 사립중학교를 다 니다가 스트라이크통에 앞장을 서다가 쫓겨났다. 그뒤로는 경향으로 떠돌아다니며 거진 못해 본 것이 없을만큼 이일 저일에 손을 대어보다가 할 수 없이 되어 시골집으로 기어 들었다. 그러나 이동네에서는 가장 견문이 넓고 새로운 지 식을 흡수한 인텔리요 유일한 지도자였다. 큰 소리를 탕탕 잘하고 누구 앞에서나 바른말을 잘 쏘기 때문에 「대인」라 는 별명을 듣는다. 재작년부터는 맨먼저 설두를 해서 동네 한가운데 공지에다가 움을 파서 야학을 설치한 뒤에 명실 (名實)이 함께 교장이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부지런한지 엄동설한에도 새벽이면 삼태기 를 걸머지고 개똥을 주우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어서들 일어나라」고 호통을 한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대흥이를 「개똥교장」 이라고 별명 을 지어 부르는 것이었다.

대흥은 방에 들어와서도 옆구리에 왼손을 찌른채 엉거주춤 하고 섰는데 두루마기 속에서는 무엇이 푸드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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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요?』

하고 오봉이가 물으니까

『이놈에 것이 왜 이리 버둥거려.』

하고 끄집어내는 것은 커다란 수탉이었다. 대흥이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안마당으로 내어던지는 것을 보고

『계란 춘부장 하나가 또 대명을 갔군.』

하고 방안의 청년들은 깔깔 웃는다.

『계란 춘부장』이란 유래가 있는 말이다. 이 동네에서 시 오리 밖에 무라끼(村木)란 순사 퇴물이 떠돌어와서 사는데 하루는 수탉 한 마리를 잡아먹으려고 산채로 털을 뜯다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빨가벗은 닭이 신작로로 뻥소니를 쳤 다. 깜짝놀란 무라끼는 게다짝을 벗어들고 닭을 추격하다가 고만 잃어버리고 나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서투른 조 선말로 급한 김에 하는 소리가 하고는 보시기에다가 거무스 름한 막걸리를 찰찰 넘도록 따라서 돌린다. 수영은

(가나 오나 술 때문에 큰 일이야)

하면서도

『자 한잔 들게.』

하고 내미는 술잔을 아니받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술을 먹든가?』

하면서 병에다 부으려고 하니까

『암 그럴테지, 서울양반의 명주고름같은 목구멍에 이따위 씹어 넘기는 탁배기가 넘어가겠나?』

하고 대흥이가 사뭇 화젓가락 윗마디 꼬듯하는 바람에 수 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잔은 마셨다.

방안에는 모두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돌았다. 남산골 샌님 처럼 도사리고 앉았던 사람도 얼굴이 붉어지고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얻어 먹은 듯이 홀쭈군 하던 친구들도 폭양에 시들었던 풀잎이 이슬을 맞은 듯 생기가 돌았다.

음식은 씹지도 않고 침만 발라 삼키는 듯 어느 겨를에 종 지의 간장만 남기고는 설거지까지 해놓았다.

복영이가 나와서 사기등잔에 불을 켜고 일변 상을 물렸다.

몹시들 시장하던 판이라 긴급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에는 한 마디도 주고 받을 겨를이 없었다.

『어 인젠 살었군!』

하고 동무들은 벽에가 턱턱 기대 앉는다.

저녁이 되자 밖에는 바람이 일었다.

문풍지를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등잔불이 흔들려 젊은 사 람들의 얼굴 위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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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리 수영군에게 훌륭한 이야기나 듣세. 서울 소식이 야 우리같은 사람이 들어도 소용이 없지만 수영군은 다년 신학문을 닦았고, 더군다나 농업에 관한 전문학교를 마치었 을 뿐 아니라 연전에는 큰 운동을 일으켜서 많은 활동을 하 던 끝에 감옥에까지 다녀나왔고, 더구나 근자에는 우리민중 의 이목이라고 헐만한 신문사에 다니다 왔으니까 여러 가지 의미로 농토에 파묻쳐서 아무 전문이 없이 흙이나 뒤져먹는 우리의 선배일뿐 아니라 몽매헌 우리의 지도자가 될 것은 두말헐 것도 없네. 농촌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라든지 장차 우리가 어떠한 길을 밟아나가야 하겠다는 경륜이며 포 부를 들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하고 대흥은 무슨 연설회의 사회나 하는 듯한 어조로 수영 에게 말을 청한다.

『우리는 그동안에 헌 것이라고는 아무것두 없네. 움을 파 구 야학을 개시해서 한 사오십명의 어린이들의 눈을 띄어주 고 간단헌 셈수를 알으켜 준것과 이발부를 조직해서 상투를 한 스무개 자른 것과 조그만 규모의 소비조합을 하나 만들 어 논 것 밖에 아무것두 헌일이 없네. 그 밖에는 셈에 칠것 두 아니지만 조기회를 발기해서 우리동리 청년들은 아침 여 섯시면 야학집 앞에 모여서 체조를 한바탕씩 허는 것과 또……』

하고 대흥이가 주워섬기다가 말이 막히니까

『단연회두 한몫 넣어서 수영군이 보다시피 우리는 일년전 부텀 단연회를 조직해 가지구 곰방대를 모아서 말끔 꺾어 던진뒤엔 죄다 담배를 끊었네. 수일전에 자네 춘부장이 욕 을 보신뒤에 노인네들두 거진 다 담뱃대를 꺾어버렸네.』

하고 오봉이가 나앉으며 대흥의 말을 거든다. 다른 동무들 은 모두 입을 다물고 눈을 꿈벅거리며 수영과 대흥의 얼굴 만 번갈아 보고 앉았다. 수영의 입에선 어떠한 말이 떨어지 려는지 그것만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수영을 자기네의 앞 을 지도해줄 선배나 계몽(啓蒙)을 시켜줄 선각자로 아는 모 양이다. 그점이 수영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 너무 과분하 게 남의 신뢰와 기대를 받는 것도 고통의 하나일뿐 아니라.

실상 따지고보면 서울서 아무것도 한일이 없는 것을 생각하 니 여러 사람 앞에서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 었다.

『수영군, 우리는 자네가 돌아오기를 여간 기다리지 않었 네.』

하는 것은 방안의 모인 동무들 전체의 생각이요,

『수영군이 나서기만 하면야, 동네일은 썩 잘되어 나갈겔 세. 그만 자격을 가진 사람이 타동에야 어디 있나?』

하는 오봉의 말에 수영은 더구나 두 어깨가 눌리는 듯한 책임감을 느꼈다.

수영은 언제나 마찬가지 버릇으로 눈을 딱 감고 앉아서 다 른 동무들이 갑갑하게 여기리만큼 입을 열지 않았다.

저의 평소의 주장과 같이 말만 앞세우기가 싫기도 하거니 와, 방안의 모든 동무가, 아니 「가난고지」를 대표한 청년 들이 한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을 하고 제앞에서 말 이떨어지는 대로 고지식하게 밀어줄뿐 아니라, 즉시 행동에 까지 옮길 생각을 하니 가벼이 제 의견을 꺼낼 수가 없었 다.

더구나 그네들은 야학을 설치하고 상투를 깎고 무슨 조합 을 만드는 것이 농촌운동의 전부로 알고 다만 막연하게 동 네 일을 한다는 것은 크게 생각해 볼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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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 중에도 성미가 팔팔한 오봉이가 말이 없이 뚱하고 앉았는 수영을 똑바로 쳐다보며

『여보게 왜 말을 안허나? 우리들이 배운 것이 없구 견문 이 없기루 자네말을 대강 짐작이야 못하겠나?』

하고 고깝게 생각하는 눈치다.

『아닐세!』

수영은 오봉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건 자네 오핼세. 내가 서울 바람이나 쏘였다구 그러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을 솔직허게 말을 허기가 어려워서 그러 네.』

『우리끼리 모여 앉았는데 무엇 때문에 말허기가 어렵단 말인가?』

오봉은 질문하듯한다. 대흥은 손을 들어오봉을 제지하면서

『여보게 수영군 우리를 잊어버리지 말게! 시뻘건 흙이나 뒤져먹는 사람이라구 없인여기지 않을 줄을 아네마는 자네 가 우리동네를 떠나던 날 밤배를 타면서 우리허구 뭐라구 약속을 했었나? 뭐라구 맹세를 허구 떠났나? 우리는 입때까 지 그말을 잊어버리지 않었네. 여보게 수영군! 우리는 한사 람의 지도자, 아니 같이 손을 붙잡고 일헐 사람이 꼭 있어 야겠네.』

하고 말 구절마다 힘을 준다.

『내게는 너무나 무거운 책임일세, 짐이 무거운건 좋지만 지지 못허구 쓰러지면 어떡허나?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겠 네.』

수영이가 여전히 시원한 대답을 아니하니까 대흥은 고만 부아가 났다.

『생각을 해보다니 그게 무슨 섭섭한 말인가? 난 조금두 생각해 볼 여지가 없는줄 아네. 우리는 신문 한 장을 온동 네가 돌려보구 지굿덩이가 어디루 돌아가는지 대강짐작을 허네마는ㅅ 닌문 잡지에는 밤낮 「브나로드」니 농촌으로 돌아가라느니 핥구 떠들지 않나? 그렇지만 공부헌 똑똑헌 사람은 어디 하나나 농촌으로 돌아오든가? 눈을 씻구 봐두 그림자도 구경을 헐 수가 없네그려. 그게다 인젠 헛소리가 없으니까 헛방구를 뀌는 거지 뭔가?』

하고 한층 더 흥분이 되어서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저이들은 편하게 의자나 타구 앉아서 월급이나 타먹구 양복대기나 뻐낄르구서 소위 행세를 허러다닌단 말일세. 무 슨 지도잔체허구 입버릇으루 애꿎은 농촌을 찾는 게지. 우 리가 피땀 흘리며 농사를 지어다 바치는 외씨같은 이밥만 먹구 누웠으니깐 인젠 염치가 없어서 그따위 잠꼬대를 허는 거란 말야.』

수영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아서 대흥의 말에 귀를 기울 일 뿐. 다른 동무들의 눈은 모두 대흥의 입에 매어달린 듯 하다. 대흥은 굵다란 목소리를 가다듬어

『참 정말 우리 조선사람의 살길이 농촌 운동에 있구, 우 리 청년들의 나아갈 막다른 길이 농촌이라는 각오를 단단히 했달 것 같으면 그자들의 손목에는 금두겁을 씨워서 호밋자 루가 쥐어지질 않는단 말인가? 그래 어떤 놈은 똥거름 냄새 가 구수해서 떡주물 듯 허는줄 아나? 일테면 도회에 있는 놈들은 저이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대흥의 입의 침이 수영의 얼굴에 까지 튀었다.

『그렇다! 서울놈들 공부했다는 놈들의 수작은 잠꼬대다!

우리를 속여 먹으려는 멀쩡한 거짓말이다!』

하고 오봉은 주먹으로 기직 바닥을 뚜드리며 대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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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은 대흥이와 오봉에게 선동이 되어 적의(敵意)나 품은 듯이 수영의 얼굴을 쏘아 본다. 수영은 듣다 못해서 손바닥의 땀을 비비며

『아닐세!』

하고 굵고 침착한 목소리로 방안의 공기를 더 한층 긴장시 켰다.

『자네들의 말은 잘 들었네. 다 옳은 말일세. 그렇지만 내 게 대헌 생각만은 오해라는 rjten 밝혀둘 필요가 있네. 이번 엔 급히 다니러온 길이니까 서울에 미진한 일이 있기는 있 네만 내가 도회지에 그다지 애착이 있어서 좀더 생각해 보 겠다고 헌말이 아닐세. 솔직하게 고백을 허면 그동안 나는 소위 지식분자로는 누구나 천하게 여기는 신문배달부 노릇 을 해서 구처허게끔 연명을 해왔네, 변변치 못헌 가두의 노 동자를 보구 그런 말을 허는건 듣기에 억울허이.』

하고 약간 제 변명을 하고 나서 저만 주목하는 여러 사람 을 둘러보며

『자네들 말마따나 요새 신문이나 잡지에서 떠드는 개념직 이요 미적지근헌 농촌운동이라는 것부터 냉정허게 비판을 해본 뒤에 우리 현실에 가장 적실한 이론을 세워서 새로이 출발을 하지않음년안되네. 그 새로운 이론을 세우고 참 정 말 막다른 골목에 다다러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빈 궁한 농민들의 살길을 위해서 즉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싸 워나가려면 그만치 단순한 준비가 있어야겠다는 것이 내 의 견일세. 한줌의 흙이라도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이니만치 맹목적으로 겠뛰어서야 되 겠나? 그래서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보자고 헌말일세.』

수영의 목소리는 부지중에 점점 높아갔다. 대흥과 오봉을 위시하여 여러 동무들은 숨도 크게 쉬지를 않고 수영의 말 을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자네들이 인정해 주듯이 난 학교에 다닐때버텀 농촌문제 에 대해서는 쉴새 없이 생각허구 있었네. 집으루 오던 날두 인제는 내가 정말 일터를 찾어 오는게 아닌가 허는 생각이 들었네. 그렇지만 우리가 다 같이 생각해 보세. 지금 우리 조선의……』

수영은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한 자리에 꼬바기 앉아서 평소에 생각한 바 조선의 현실과 농촌운동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실로 혀 끝에 불이 붙는 듯한 열변이었 다. 조금도 말을 꾸며서 할 줄은 몰라도 말의 내용은 조리 가 닿고 구절마다 힘이 있었다. 수영은 말을 마친 뒤에 소 매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이 이상 말헐것이 없네, 우리는 이 두 가지만 명심허고 싸워나가면 고만일세. 첫째는 우리의 앞길을 결코 비관하지 말 것. 둘째는, 우리의 몸뚱이가 한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는 것. 그리고 그 몸들을 한 뭉텡이루 뭉칠 것 뿐일세!』 하 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가등잔의 기름은 졸아 불꽃은 끔벅거리고 여러 젊은 사 람의 가슴은 새로운 자극과 감격에 떨렸다.

대흥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가 되어 씨근거리며 가쁜 듯이 숨을 쉬고 앉았다.

『수영군! 자네가 벗구나서서 우리와 같이 일을 헌다면 우 리는 무슨 일든이 허겠네. 목숨두 아끼지 않겠네!』

하고 수영의 손을 힘껏 잡아 흔든다.

『우리 함께 일허세! 그렇지만 나를 무슨 지도자처럼 알어 선 안되네. 난 우리 동지들의 한 조그만 종이 되려는 것 뿐 일세!』

하는 것이 수영의 맨 나중에 남긴 말이었다.

자정도 넘어서 동무들은 흩어졌다. 뜨거운 감격을 안고 찬 달 그림자를 밟으며 둘씩 셋씩 짝을지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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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병식이는 수영이가 시골로 내려간다는 엽서를 받 고도 답장할 경황이 없이 지냈다. 엽서를 받은지 사흘만에 야 저녁 때에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인제는 술에 늙어서 한번만 몹시 취하면 이틀 사흘씩 몸져 누워서 앓았다. 그는 아직도 머리골치가 띵하건만 행기를 할겸 신문사로 가보았 다.

어쩐 일인지 윤전기가 돌아갈 시간인데도 신문사 근처는 아주 잠잠하다. 문안으로 들어서니 안팍이 수성수성 하고 제 자리에 앉은 사람이 없다. 편집국원들은 붓대를 던지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사람, 턱을 고이고 먼산만 바라다 보고 앉은 사람 할 것 없이 급사들까지 분주히 윗층으로 오 르내린다.

사장실에는 문을 안으로 걸어잠그고 중역들이 모여서 무슨 중대한 의논을 하는 모양이다. 사내의 공기가 긴장된 품이 큰 돌발사건이 생긴 눈치다.

조금 있자 사장이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그 뚱뚱한 몸 집이 인력거 위에서 굴러내리 듯한다. 입을 꽉 다물고 윗층 으로 뒤룩거리며 올라가는데 사원들은 그 뒤를 황급히 따라 올라간다.

사장이 모닝?코트속에서 무기정간의 지령장을 꺼내었다.

그 전날 발행한 신문에 시사문제를 취급한 사실이 당국의 기휘에 저밀이 되어서 청천의 벽력이 내렸던 것이다.

신문사의 심장인 윤전기 소리가 그치고 보니, 백여 명이나 되는 종업원들은 숨이 끊긴 사람의 팔다리처럼 그날로부터 실직을 하게 되었다. 무기정간이라 언제나 풀릴는지 창창한 노릇이다. 병식이가 다니는 신문사는 가뜩이나 재정 곤란으 로 경영이 말씀이 아니던 판이었다. 엄부렁하게 외면치레만 해오던 터이라 정간이 된 동안에 내부에서 또 무슨 갈등이 생길는지 알 수 없다. 병식은

『흥 그나마 밥줄이 끊어졌구나!』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고 공장 한 모퉁이에 서서 멀거니 창밖을 내어다 보았다. 뿌옇게 새어들어오는 석양이 첩첩이 활자를 꽂아논 케스위에 어른거려서 그 높다란 목판이 멀어 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다른 직공들도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는 말이 없다. 창앞에 뒷짐을 지고 서서 저녁 연기에 쌓인 길 거리를 내려다보는 늙은 직공도 두엇이나 있다. 그들은 자 기 한 사람에게 목숨을 매어달은 늙은 부모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기한에 떠는 꼴을 눈 앞에 그려보는 것이었다.

그네들의 월급이란 참으로 갈급인데다가 그나마 두달석달 씩 왼월급을 타지 못하였다. 싸전, 마뭇장, 반찬가게에 전표 질을 해서 간신히 그날 그날 끼니를 이어오던 터인데 신문 사가 거덜이 났다는 소문이 한번 퍼지기만하면 장사치들이 아귀처럼 달려들 것만은 사실이다.

그들보다 조금도 못지않게 병식이도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하였다.

제집 한간을 지니지 못하고 쌀 한되 꾸어줄 친구조차 없는 병식은 그네들보다 한층 더 호구할 길이 아득해서 바로 한 치 앞이 낭떠러지 같았다.

『인젠 아주 막다른 골목이다.』

하고 병식은 동료들에게 인사도 아니하고는 머리를 떨어 뜨리고 나왔다.

그렇건만 한편으로는 계숙의 일이 궁금해서

(그동안 왜 발그림자도 아니할까?)

하고 어느 잡화점에서 전화를 빌렸다. 백화점으로 걸고 계 숙을 찾으니까

『최계숙이 말씀이죠? 안댕겨요. 여길 고만 뒀어요.』

하는 것은 전화 교환수의 쌀쌀한 목소리다.

『언제부터 고만 뒀나요?』

하고 재쳐 묻는데 전화는 매몰스럽게 뚝 끊겼다.

(아뿔사 그예 조경호의 수중으로 들어갔구나)

하면서도

(그래도 집에나 있을까?)

하고 병식은 계숙의 사숙으로 향해서 총급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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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은 계숙이가 묵고 있던 집에 당도해서 지쳐논 대문을 밀고 들어서며

『계숙이.』

하고 두어번 연거푸 불렀다. 하참만에야

『누굴 찾소?』

하고 주인 마누라가 댓돌에다가 담배불을 털며 나온다. 주 인 마누라는 몇번 보아서 병식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병식은 그 마누라에게서 경자가 와서 계숙의 집을 옮겨간 전말을 들었다. 마누라는 계숙이가 떠나간 뒤에는 한번도 찾아오지를 않으니 남남간이란 으레 그렇다고 매우 섭섭해 한다. 그리고는

『참 편지가 두 장이 왔는데……』

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두툼한 봉함 한 장과 엽서 한 장 을 들고 나왔다. 봉함은 수영이가 청량리서 다녀오던 날밤 에 써붙친 것이요. 엽서는 시골로 떠나던 날 우편국에서 급 히 갈겨 쓴 글씨로 저에게 한것과 같은 사연이었다.

병식은 편지 겉봉만 보고

『당자가 오거든 주시지요.』

하고는 인사도 하는 체 마는 체하고 나왔다. 편지를 맡았 다가 계숙에게 전해 주고도 싶었으나 수영의 편지 심부름까 지는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병식은 여전히 머리를 떨어 뜨리고 허전허전한 발을 정처 없이 떼어 놓았다.

어느듯 날은 저물었다. 보구니에다 빳빳이 얼은 명태 한 마리에 두부 한 체를 받아 가지고 손을 행주치마 속에 다찌 르고는 종종걸음을 치는 계집애의 댕기꼬리는 북촌 좁다란 골목안의 황혼을 흔들었다.

병식은 실신한 사람처럼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잿빛 하 늘을 쳐다보다가 길바닥의 돌뿌리를 탁탁 걷어차며 걸으면 서도 어디로 발길을 옮겨 놓아야 할지 몰랐다.

월급장이나 공장에서 변또를 끼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오막 살이나마 제 보금자리로 분주히 기어들건만 병식은 제집으 로 다시 기어들고 싶지가 않았다. 지옥을 벗어져 나온지가 몇 시간도 못되어 또다시 그 구석으로 찾아들기는 진정 싫 었다.

병식은 직업도 사랑하는 누이도, 하나밖에 없던 친구도 모 두 잃어버렸다. 그들은 한꺼번에 저의 신변에서 떠나버리고 말았다. 흐릿한 가로등 밑에 두 어깨를 축 처뜨린 그 그림 자를 이끌고 걸으려니 마음속으로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고 독과 우울에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돌담밑 쓰레기통 밑 에서 눈먼 늙은 거지가 이마로 땅바닥을 비비며

『한푼 적선 합쇼. 나리 한푼만 적선 합쇼.』

하며 뽀옇게 먼 눈을 희번덕거리는 것을 한참이나 유심히 내려다보다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는 휘적휘적 천변 을 끼고 걸었다. 늦은 가을빛 뭇 사람의 발바닥에 밟혀 바 삭바삭 으스러지는 낙엽의 신세와도 같이 병식은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어 다녔다.

그러다가 병식은 불현 듯 계숙이가 보고 싶었다. 길거리에 서라도 만났으면 하였다. 이미 저와는 아주 인연이 끊긴 사 람이언만 비록 조경자 집 문간에서라도 단 일분 동안이라도 보고 싶었다.

(만나면 뭘 하나?)

하고 제 자신에게 물으면서도 아무 조건도 없이 만나고 싶 은 충동을 이길 수 없었다.

(내가 몰랐으면 모르지만 알고야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있나. 더구나 수영군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급작스리 경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됐을까?)

하고 계숙을 찾아가볼 결심을 하였다. 오라비로서의 나머 지 의무를 느꼈다느니 보다도 경자의 집에서 계숙을 빼어오 려는 일종의 의협심이나 의분보다도 덮어 놓고 계숙의 얼굴 이 보고싶었다. 그 화색이 돌고 어글어글한 얼굴을 보고 그 가랑가랑한 목소리로 한번 듣기만해도 옥죄인 마음이 풀리 고 오만살이나 찌푸려졌던 기분이 바뀌일상 싶었다.

병식은 불고깃집에서 뒤를 밟아가던 때처럼 경자의 집편으 로 발꿈치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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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장에 갔던 날 밤 계숙은 하는 수 없이 경자의 집으 로 끌려갔다. 끌려갔다느니 보다 저의 침구며 짐은 찾으러 갔다. 걸어도 십 오분 밖에 아니 걸릴 데를 경자는 자동차 를 불러서 계숙을 태워 가지고 갔다.

계숙은 자동차를 타기전부터 머리가 몹시 아프고 신열이 나서 오슬오슬 추웠다가 온몸이 화끈하고 달는 것을 깨닫고 이마를 짚었다.

『내가 왜 이럴까? 몸살이 나려나 보다.』

하고 자동차에서 내릴 때에는 땅이 내둘려서 경자의 어깨 를 짚고 간신히 진정을 하다가 들어갔다. 머릿속이 온종일 복잡한 감정에 숲속에 물끓 듯하다가 또다시 가슴 벅찬 흥 분으로 급자기 신열까지 났던 것이다.

『내 짐을 내놔! 이부자리 만이라두 가지고 갈테야!』

하고 계숙이가 대문 밖에 버티고 서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밤이 늦었는데 도망군이처럼 짐을 싸 가지구 어딜 갈테야. 온 별소리를 다하네.』

하고 경자는 계숙을 억지로 끌었다.

계숙은 금방 쓸어질 듯이 아뜩아뜩해서 할 수 없이 벽을 짚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안방 덧문은 닫혔는데 건넌방에는 경자의 자리만 아 랫목에다가 깔아놓았다.

계숙은 방으로 들어가며 펄썩 주저앉았다. 경자는 옷을 갈 아 입으며

『오늘 밤엔 거북허드레도 여기서 나허구 자아. 뜰아랫방 을 말끔하게 치워는 놨지만 쓸쓸해서……』 하고는

『시장하지 않어? 뭘 좀 시켜다 먹을까?』

하는 것을 계숙은 고개를 흔들었다.

계숙은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말마디 도 하지 않았다.

따끈한 방바닥에 몸이 녹으니까 사지의 맥이 가닥가닥 들 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는 마디마디 쏙쏙 쑤시기도 하고 등에서 찬바람이 돌아서

『에라 난 모르겠다.』

하고는 이불 위에다 몸을 던져버렸다.

몸이 불편하니까 만사가 다 귀찮았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

『경호가 설마 오늘 밤에야 따러오랴.』

하고 안심도 되어서 하룻밤을 경자의 이불속에서 정신 없 이 앓았다.

이튿날 계숙은 요란한 유성기 소리에 잠이 깨었다.

경자는 눈을 비비고 나면 자릿속에서 유성기를 틀어놓는 것이 버릇이 된 모양이다.

삼백원짜리 빅터기계에서 들러나오는 째스 노래나 유행가 의 멜로디에 맞춰서 발을 까불고 고개를 까댁까댁하고 곤댓 짓을 하다가 일어나야만 아침의 기분이 좋은 듯.

계숙은 자릿속에서 눈만 멀거니 뜨고 으리으리하게 꾸며논 방치장을 처음 보는 것처럼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물려준 자게 삼층장, 순 화류의 거리 대문짝같은 체경이 달린 양복 장이 반쯤열어논 반첩안로 보꾹에 닿도록 드러찼다. 유성기 밖에도 뜬는 것은 구경도 하지못한 맨돌린이며 대청에 놓인 이천어원짜리 독일제 피아노며 그리고 벽에는 라디오까지 설치를 하였다. 그 뿐아라 커다란 채경의 주위에는 서양 여 배우들이 가지 각색으로 옷모양을 내고 반나체로 박인 브로 마이드가 사진틀 끼워서 백화점의 진열장 속같이 늘비하게 붙었다.

계숙이가 덮고 누운 이불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무늬가 혼 란한 비단이다.

아침불을 지핀 방바닥은 피곤한 계숙의 몸을 더한층 노곤 하게 하였다.

『자구나니까 어때? 방이 춥지나 않어?』

하고 경자는 이마를 다 짚어보며 여간 싹싹하게 굴지를 않 는다.

계숙은 두 손으로 깍지를 껴넘겨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수영이가 앓던 행랑방과 제가 들어있는 하숙집과 그리고 저 의 고향의 흙방을 생각하였다.

『누구는 이렇게 차려놓고 산담.』

하는 형용키 어려운 일종의 분한 생각이 계숙의 머리 끝까 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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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도무지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을 남의 집에서 늦도 록 들어 누울 수가 없어서 억지로 일어났다. 상직하는 마누 라가 떠다바치는 세숫물에 세수를 하고 머리와 얼굴을 매만 졌다. 상직군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아가며 어찌나 능글능글 하게 시중을 드는지 수십년이나 수모노릇을 해먹은 여편네 같다.

계숙은 정말 부잣집으로 시집이나 온 것 같아서 몸이 군시 러울 지경이었다.

이 집에는 자고만 나면 자리를 개키는 사람, 방을 치는 사 람,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사람이 따로 따로 있는 모양이다.

계숙이가 세수를 하는 동안에 각장 장판이 번지르르하게 윤 이 흐르도록 걸레질까지 쳐 놓았다.

경자는 무대 뒤 화장실에서 화장을 하는 여배우 모양으로 웃통을 벗고 겨우 젖꼭지만 가리고는 아침 화장을 한다. 코 티 분과 품페이안 향수 냄새를 머리가 아프도록 풍기고 앉 았다. 그때

『언니.』

하고 문을 방긋이 열고 경자의 동생 춘자가 들어선다.

『이 분이 내가 말허든 최계숙씨란다. 너 이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해.』

하고 경자는 분을 바른 제 뺨을 찰싹찰싹 두드리며 곁눈으 로 가정교사를 소개한다.

춘자는 납신하고 예를 하고는 「저이가 내 선생이람」 하 는 듯이 말끄러미 계숙의 얼굴을 바라다보다 가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섰다. 계숙은 속으로 (너두 형처럼 까불면 걱정거리다) 하고는

『거기 앉어.』

하고 춘자의 땋아 늘인 머릿뒤까지 훑어보았다.

살결이 분을 따서 넌 듯이 흰것과 까만 눈동자가 또랑또랑 한 것과 얼굴의 윤곽은 형과 비슷하나 열 두 살로는 좀 잔 졸한 편이었다.

경자의 아버지가 부족증으로 죽은지 달포만에 경자의 어머 니 해주집이 입덧이 나고 다달이 있던 것이 보이지 않아서 유복자나마 손은 끊지지 않겠다고 대소가에서 아들낳기를 여간 바라고 기다리지를 않았었다. 경호의 아버지 즉 경자 의 큰 아버지는 「만득」이란 아명까지 미리 지어놓고 해산 할 임시에는 용이 든 보약을 첩첩이 지어서 아우의 집으로 보냈었다. 경자의 어머니도

『설마 삼신이 아들 하나나 점지해 주시겠지.』

하고 춘향모 본을 따서 뒤꼍에 칠성단을 모으고 백일기도 까지 드렸다.

그러다가 달도 채 차지 못해서 온동네가 북적거리도록 떠 들며 유난스럽게 버릇이 나는 것이 고추자지의 반대인 춘자 였다.

그때 산모는 산후에 소복도 못한채

『돌아가신 영감께 면목이 없다.』

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 중노릇이나 하겠다고 치신사납게 날뛰는 것을

『내가 아들 하나만 더 나면야 아우의 후사를 잊지 않을 도리가 있나.』

하고 조참판이 굳이 분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참판은 첩을 둘씩이나 갈아 들여도 아들은 보지 못하고 근년에 와서는 양자라도 해서 아우의 손을 이어 줄 유의를 하고는 아우에게 분재한 재산 전부를 자기가 관리하 고 심지어 시량이나 용돈까지도 큰 집에서 일일이 차를 해 주었던 것이다.

춘자는 계숙의 헌칠한 체격과 서글서글해 보이는데 첫인상 이 좋았고, 계숙은 수줍은 듯이 댕기꼬리만 매무작거리고 앉은 춘자가 형처럼 약고 반지빨라 보이지 않는데 호감을 갖게 되었다.

계숙은 저 역시 오늘부터 춘자의 가정교사가 된 듯이

『그래 몇학년이야? 학과 중에 뭘 제일 좋아해?』

하고 물어도 보았다. 그것은 춘자와 할 말이 없어서 그런 말을 물어 본 것이다.

(어쨌든 이사람네의 생활을 보아두는 것도 괜찮어)

하고 계숙은 경자 형제에 끌려 안방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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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안방으로 들어가서 경자의 어머니를 뵈었다. 조선 절을 잘 할 줄 모르고 하기도 싫어하는 계숙은 이런 구식 여자, 더구나 양반의 집 여편네를 만나면 딱 질색이었다. 그 래서 학생시대에는 음력 정초에는 동무 집에서 청해도 가지 를 않았었다.

각색 화초를 수놓은 병풍을 높다랗게 둘러 치고 모본단 보 료 위에 남자처럼 안석에 가 반쯤 기대 앉았던 주인마님은

『이리와 앉지. 인제 한집안 식구로 지낼걸, 시스러워 허지 말구.』

하면서 반질반질하게 단 염주를 세어 넘기던 손을 들어 아 랫간 웃목을 가리킨다. 계숙은 여학생식으로 굽실하고 우물 쭈물 인사를 하였다.

경자의 어머니는 나이 오십을 넘어서 앞머리는 미어졌어도 생산을 적게 하고 몸부드럽게 지내서 그런지 살이 피둥피둥 하게 쪘다. 손등에는 어린애 모양으로 옴폭옴폭하게 우물이 지고 손가락처럼 희고 매끈해 보였다. 옥색 삼팔로 아랫웃 매기를 감았는데 눈 가장자리에 잘다란 주름살이 펴면 영락 없이 몸집만 똥똥한 경자였다. 아직도 막내둥이 하나쯤은 남직해보였다.

경자는 계숙의 손을 끌어가다 아랫간 웃목에다 앉히고

『어때요? 어머니 눈에 차시죠?』

하고 어머니와 계숙을 번갈아 본다.

『응. 때 눈이 범연허겠니. 잠시 보매도 사람이 매우 숭글 숭글해 보이는구나.』

하고는 둘째딸을 턱으로 가리키며

『저 애가 옛날 같으면 시집을 갈 나인데 그저 응석이나 부릴 줄 알었지 온 미거해서…… 같이 지내려면 속이 좀 상 할걸.』한다.

계숙은 입속으로

『천만에.』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말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정교사고 무엇이고 아직 제 마음으로 확정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저 를 눈앞에 앉혀놓고 모녀가 번차례로 품평을 하는 것이 불 쾌해서 얼굴이 화끈화끈달았다. 또 한가지는 부지중에 시골 사투리가 나와서 혹시 흉이나 잡히지 않을까 하고 조심도 스러웠다.

(제 고장 말을 하면 어때)

하면서도 남에게 흉은 잡히고 싶지가 않았다.

경자의 어머니는 아직 세수를 할 생각도 아니하고 매무작 거리던 염주를 수선화분이 놓인 문갑 위에다 올려놓더니 보 료 밑에서 빨갛고 조그만 염낭을 꺼내서 골패짝을 방바닥에 다 쏟아놓는다. 곁에는 사람이 없는 듯이 골패를 대그락거 리고 반쯤 돌아앉아서 오관을 떼어 일수를 모는 모양이다.

계숙은

(내가 어쩌다가 이런 집에 와 앉었을까?)

하고 생각할수록 꿈속 같았다.

(내가 어떻게 되려고 이런 집안으로 끌려 들어왔을까?)

하고 새삼스러이 제 자신에게 물어도 보았다. 물어보아도 확실한 대답은 아니 나오고, 다만 꿈속같이 머릿속이 험하 고 지난 밤의 고통으로 몸이 찌뿌드드한데 늙은이 앞에 오 래 앉았기가 거북해서 그 자리를 얼른 떠나고만 싶었다.

경자도 곁에 앉은 계숙이는 잊어버린 듯 어머니가 하고 앉 은 골패짝을 저어주며 오관 떼는 참견을 하고 앉았다.

계숙은 값진 세간으로만 도배를 한 방안의 치장과 갑창을 닫고 병풍은 치고도 부족하여 방장까지 꼭꼭쳐서 바람 한점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차리고 그 속에는 식전부터 골패를 젓고 앉았는 늙은 마누라의 윤이 흐르는 얼굴만 한참이나 바라다 앉았다.

바람 세찬 북극의 바닷가에서 정어리 광주리를 이고 발은 벗은채 몇십리씩 걸어다니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폭양에 강냉이 밭은 매고 감자를 캐면서도 그것을 한평생할 일로 알다가 약 한첩 얻어 자시지 못하고 돌아간 그 자애깊은 어 머니 생각이 불현 듯이 났다.

『이 놈의 세상은 어째서 이다지도 고르지를 못한가?』

하는 의문보다도 눈앞에 나타나는 어머니의 초췌하던 얼굴 을 보니 당장 앉아있는 모본단 방석에 바늘이 돋아올라서 온몸을 꽉꽉 찌르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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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가 넘도록 아침상은 들어올 생각도 아니한다. 일곱시 반에 아침을 먹고 나서던 계숙은 하숙 같으면

『밥 얼핏 줘요!』

하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안잠자기와 차깁과 마나님의 잔 시중을 드는 계집애가 방을 치고 동자치와 반빗아치가 오르내리 며밥을 짓고 도마소리를 내며 반찬을 만드는 동안 이 두시간도 넘었다. 이집의 밥을 얻어먹고 꿈지럭거리는 여편네들은 (이집에는 행랑아범 밖에 남자라고는 구경도 할 수가 없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계숙의 눈에는 병든 굼벵이 같이만 보였다.

마나님은 세수 제구와 경대를 안방으로 하나를 벌여 놓고 젊은 여자처럼 분때를 밀고 견비통이 대단하다고 엄살을 하 면서도 안잠자기가 머리를 빗기는 대로 거울 속의 얼굴을 요모조모 들여다본다. 계숙은

(기생년의 티를 그저 못벗었고나)

하고 호기심으로 바라다보았다. 마나님은 한나절이나 버티 고 앉았기가 심심한 듯이

『그래 시골집엔 누가 있어?』

하고 계숙의집 형편을 묻고 경자의 집 가문 자랑과 자기가 홀로 된 뒤에 딸 둘을 의지하고 그것들을 기르느라고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과,

『경자는 저렇게 과년한 것이 당초에 시집갈 생각두 않으 니 온 요새 계집애들이람 부모의 말을 들어먹어야지. 시집 을 보낸대도 내 앞이 쓸쓸할 생각을 하면 갑자기 내놀 수도 없고.』

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어찌나 진력이 났던지 벌떡 일어나 뚱뚱한 마누라의 꽁무니를 발길로 걷어차고 싶을 지 경이었다.

열 한시나 아침상이 들어왔다. 경자의 어머니는 근자에 와 서 불도를 닦아 연화대로 갈 준비를 하느라고 육식을 금하 기 때문에 소찬만 먹는다. 그러니 늦은 봄이나 여름철이 아 니면 얻어 볼 수 없는 값진 채소를 갖은 양념을 해 놓았다.

계숙은 큰 상에 오른 넓다란 취잎사귀를 보고 청량리서 수 영이와 맛있게 쌈을 싸먹던 생각이났다.

오늘이 마침 공일이어서 춘자가 놀기 때문에 세겸상이 들 어왔다. 그 상에는 산진해수가 늘어놓였고 진구이로 암소가 리까지 구워서 조그만 나주반에 받쳐서 아이 종이 곁상으로 들려 왔다. 계숙은 저의 집 생일이나 큰일 때에도 이집에서 보통으로 먹는 것만큼 차린 것을 보지 못하였다.

찬은 없지만 많이 들어.

하고 경자는 은젓가락 끝으로 반찬을 헤집으면서 입맛만 다시듯 밥을 되새기고 앉았는데 계숙은 (너희들이야 흉을 보건 말건 제 앞에 닥친거야 먹고 볼일 이다) 하고 밥을 푹푹 퍼넣었다. 그러면서도

『근본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계숙씨가 더 비우티풀해 보 이겠단 말에요.』

하고 배를 두드려 보이던 수영이를 다시 한번 생각하였다.

수영에게 무슨 연고나 생기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아침을 먹고는 (집으로 찾아가 봐야지. 이리로 끌려온 걸 알기만 허면 여 간 오해를 허지 않을걸)

하고 숟가락을 놓는데 쟁반에 숭늉을 받쳐들고 들어오던 아이년이

『마님, 큰댁 나으리 오셨습니다.』 하고 고한다.

경자는 숟가락을 던지고 발딱 일어서 나가며

『오빠 아침에 웬일이셔요?』

하고 마루 끝으로 내닫는다. 계숙은

(네가 벌써 대서는구나)

하면서도 가슴 속에서 두방맛이질을 하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오늘이 공일이 아니냐?』

하고 경호는 여전히 아침 햇볕에 안경을 번득이며 마당에 서 서성거린다.

『인제야 아침을 먹었니?』

하고 묻는 경호의 시선은 안방과 건넌방과 뜰아랫방을 휘 두르다가 경자의 얼굴에 와서 멈춘다.

경자는 약빨리 그 눈치를 채고 안방으로 향하고 바른편 눈 을 찌긋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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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는 경자가 눈짓한 것은 못본 체하고

『올러 오서요.』 하고 누이의 말에

『오늘두 볼 일이 있어서……』

하고 올라갈까말까 하고 망설이고 섰다. 안방 쌍창이 연리 더니

『어서 들어요. 요샌 왜 그렇게 한번도 안들렀오?』

하고 서숙모가 내다 본다. 삼촌이 생존했을 때는 저의 집 습관대로 「해주집」 이라고 부르고 공대도 아니했었고 해 주집도 경호가 아무리 큰집의 맏아들이지만 나이가 치지해 서 반말 비슷이 하던 것이 근년에 와서는 마주 「허우」를 하게 되었다. 경호는

『공연히 분주헌데다가 졸업시험이 가까워서……』

하고는 단장끝으로 축대 밑만 쑤시고 섰는 것을

『들어오시구려. 춘자 선생허구 인사두 헐 겸.』

하고 경자가 오라비의 외투소매를 끌어당겼다.

『으흠, 으흠!』

헛기침을 하며 못이기는 체하고 들어오는 경호의 걸음걸잉 따르도는 한층 더 점잖다.

계숙은 못본 체하고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서며 경호 를 맞는듯마는 듯 웃간으로 비켜나가며 고개를 조금 숙여보 였다.

경호 역시 인사를 받는듯마는 듯 하고 아랫간으로 내려가 서 외투를 벗고 빳빳하게 다려입은 양복 바지의 금이 구기 지 않도록 끌어올리고 앉는다. 면도를 너무 바싹하다가 살 쩍에 포를 뜬 것이 계숙의 눈에 띄었다.

『오빠, 내 동무가 춘자 선생으로 와 있게 됐어요.』

하고 경자는 시치미를 떼고 계숙에게 인사를 시킨다.

어머니가 저의 남매의 음모를 알 리가 없고, 더구나 오라 비와 계숙이가 미리 아는 눈치를 채게 하는 것은 장래를 위 해서 좋지 못할 염려가 없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것 처럼 수작을 부친것이다. 경호는

『응 그래.』

하고 웃간편으로 고개를 조금 숙이는 체하고는 가정교사에 게 쯤 정중하게 인사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태도로

『춘자는 어디 갔니?』

하고 딴전을 붙인다. 계숙은 더 똑똑히 경자의 창자속까지 유리쪽을 대고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발딱 일어났다. 건넌 방으로 건너가려는데 건넌방에서 춘자가 숙제를 풀다가 책 을 들고 마주 건너왔다.

『이것 좀 봐 주서요.』

하고 앉는 바람에 계숙이는 또 붙들려 앉았다.

경호는 덤덤히 앉았기가 거북해서

『견비통이 대단하다드니 요샌 좀 어떠우?』

하고 서숙모에게 말을 건넨다.

『밤이면 쑤셔서 잠을 못자요. 그런데 참 건넌방 댁이 감 기로 눴다구 전갈이 왔더니 인잰 기동을 허우? 크나큰 살림 을 맡은 사람이 원체 약질이라서……』

하고 시키지 않은 말을 불쑥 한다. 시키지 않은 말 뿐이 아니라, 계숙이 앞에서 제 아내의 말을 끄집어 내는 것이 경호에게는 딱 질색할 노릇이었다. 그동안에 눈치 빠른 경 자의 눈은 계숙의 표정을 번개같이 흘겨 보았다.

경호는 무어라고 말대답을 해야 옳을지 몰랐다. 두눈을 말 똥말똥 뜨고 있는 제 아내를 죽어 나갔다고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더구나 여자의 앞에서는 될 수 있는대로 구기를 하는 제 아내의 존재를 하필 계숙이가 듣는데 일깨워 주는 것은 어느 모로든지 재미가 적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아니 하는 것은 더욱 수상스러울상 싶어서

『누가 알우. 남 못할 노릇을 허느라구 진작 죽지두 않으 니까.』

하고 경호는 저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남들이 제 아내라 고 부르는 물건은, 저에게 당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차 라리 죽어 없어지느니만도 못하다는 것을 발뺌 비슷이 해서 계숙이더러 귀담아 들어달라는 수작이었다.

『온 도섭스러라. 그게 무슨 방수끄런 말요?』

하고 경자의 어머니는 무슨 시단이나 하려는 듯이 손벽을 치며 경호의 앞으로 다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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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댁의 기둥인데 장가를 열번 들면 그만치 칠칠 허고 일새 빠른 사람을 구경이나 헐 줄 아우? 당초에 집안 살림살이를 모르고 지내니깐 그렇지, 단 하루래도 주장이 없어 봐라 큰 집안의 살림꼴이 뭐 되나? 환갑이 넘은 노인 네가 사시면 몇해나 사시겠오? 온 그런 사위스런 말을랑 아 예 입 밖에도 내들 마우.

한번 터지자 시작한 마나님의 연설은 지긋지긋하게도 끝이 나지 않을 형세다. 그러나 말하는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어 서 경호는 궁둥이를 들먹거리면서

『왜 그렇게 사정 모르는 말만 허우? 집구석에 아랫 것들 허구 입씨름이나 헐 줄 알면 남의 아내가 된단 말요?』

경호의 이마에는 핏줄이 다 섰다. 계숙은

『나두 죄다 잊어버렸어.』

하고 춘자의 대수(代數) 숙제를 풀어주며 (저다지 극성스런게 제 여편네 흉을 보지 못해 애를 쓸게 뭐야) 하고 속으로 비웃었다.

『그야 나이 삼십이 넘도록 생산을 못허니 가뜩이나 자손 귀헌 집안에 큰 걱정이지만…… 귀밑머리 마주 푼 큰댁네가 소중헌가봅니다.』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염주를 굴린다. 돌아간 영감이 자기 를 장중의 보옥같이 귀애도 하고 자기에게 아주 빠진 듯 하 면서도 집일은 큰마누라 하고만 의논을 하던 생각을 하였 다.

아까부터 어머니의 수다에 눈살을 찌푸리고 앉았던 경자가

『어머닌 공연시리 쓸데 없는 걱정을 허구 앉으셨구려. 애 초버텀 금슬이 좋아야 여린애구 목두깨비고 생기죠. 남들은 다허는 생산을 못허니 멀쩡한 병신이지 뭐유?』

하고 쏘가리 쏘듯 어머니를 쏘아붙인다. 대답에 궁해진 오 라비를 거들어 줄 의무를 느낀 것이었다.

어머니도 딸에게지지 않으려는 듯이 언성을 높이며

『온 계집애가 별 참섭을 다 허는구나. 남편이라고는 근처 도 안가는데 여편네 혼자 어떻게 수태를 헌단말이냐?』

하고 꾸지람 하듯 혀를 끌끌 차고는 경호편으로 얼굴을 돌 리며

『정 가까이 허기가 싫거들랑 요새 길에 널린게 말만큼씩 헌 계집앤데 하나 끌어들여서 손이나 보구려. 그렇게 남의 탓만 헐게 뭐 있단 말요. 주변이 없어 그렇지 연 계집 버리 는 사내 없다고 대장부가 외입 한번 못해본단 말요?』 하고 는

『내가 사내 같으면 나이 젊겠다. 외화가 저만 하겠다. 그 만 돈쯤이야 흥청거리고 쓸 수가 있겠다. 맘껏 한바탕 놀아 보겠오. 남녀간에 이렇게 속절없이 늙고 보면 볼 일을 다 보넨다.』

하고 마나님은 젊어서 노류장화로 흥청거리고 놀며 오입장 이들의 품에서 품으로 넘놀던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고 나이 찬 딸이 곁에 앉은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계숙은 저를 빗대어 놓고 하는 말 같아서 참을 수 없는 모 욕을 느꼈다. 그보다도 조선의 젊은 여자 전체를 대표나 한 것처럼 분해서 치를 떨었다. 경호도 그 자리에 더 앉아 있 을 수가 없었다. 경자는 아까부터 고만 일어서라고 몇번이 나 눈짓을 했었다.

경호는 시계를 꺼내보고 일어서며

『날이 인젠 제법 봄날 같군.』

하고 딴청을 하며 목도리에 잘을 댄 외투를 입는다.

더 놀다가 점심이다 자시고 가구려.

하는 마나님의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장지틀을 넘으면서 마주일어나 비켜서는 계숙에게 은근히 목례를 하고 나왔다.

경자는 슬립퍼를 짝짝 끌며 오라비의 뒤를 따라 나가더니 한참이나 무슨 이야기를 속삭이고 들어오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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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방으로 건너가 있으려니 어느덧 점심때나 되었다.

계숙은 빠져 나갈 궁리를 하던 끝에 수건과 비누를 싹들고

『나 목욕 갔다 올테야. 곧 댕겨 들어오께.』

하고 나가려니까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서 다리를 바둥 거리며 부인잡지의 그림을 뒤적거리고 누웠던 경자는 계숙 을 빤히 쳐다보더니

『나두 여러날 못했는데 그럼 같이 가.』

약속했던 일을 깜빡 잊어버리고나 있었던 듯이 발딱 일어 나니까

『언니 나두.』

하고 춘자마저 따라선다. 일껏 목욕을 하러 나간다고 꾀를 낸 것이 틀리고 말았다.

다 각기 목욕 제구를 싹들고 하나는 앞을 서고 하나는 뒤 를 따르는 것을 저 혼자 가겠다고 따돌릴 수도 없고 경자가 얄밉기는 하지만 말만 앞을 세우고 아니 간다는 수도 없다.

(오전중에 가야 수영씨를 만날텐데)

하고 계숙은 속에서 조바심을 하건만 졸지에 묘책이 나서 지를 않았다.

『그럼 같이들 가요.』

하고 분합 마루로 나왔다. 비록 목욕탕 속에서라도 경자에 게 제 육체를 더구나 나체를 보이고 싶지가 않아서

『난 천천히 갈게 먼저들 다녀와요.』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을

『에라 유난스럽게 굴게 없다.』

하고 뜰아래로 내려섰다. 경자 형제가 막 구두끈을 매고 나오려는데 큰집의 계집 하인이 허겁지겁 들어와서 뜰아래 서 안방을 향하여

『마나님께 여쭙니다. 저 큰 아씨께서 아침 잡순 게 관격 이 되어서 아주 자반뒤집기를 허시는뎁쇼. 마나님께서 저번 에 갖다 쓰신 사향수 아반이 남었거들랑 보내 줍시사구 허 십니다.』

하고 급한 전갈을 한다. 마나님은 몇십년이나 두고 되풀이 를 하는 옥루몽(玉樓夢)을 보고 누웠다가 돋보기 안경을 콧 등에다 걸고 쌍창을 밀치고 내다보며

『뭐야? 큰아저씨가 관격을 하셨어? 그렇게 우환이 떠날 날이 없으니 무슨 살이 뻗친게다.』

하다가 커다란 계집애들이 떼를 지어 중문간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얘들아, 너희는 밤낮 쏘다닐 생각만 허느냐? 형이 대단 히 앓는다는데 공일날이나 한번 큰집에 가보렴.』

어머니는 벽장에서 환약을 꺼내어 춘자에게 던져 주며

『옛다, 이걸 갖다 먹이고 동정이 어떤가 보구 오너라.』

하고 분부가 내렸다.

『허구헌날 않는 걸 뭘 해요. 우린 목간 허러가는데.』 하 고 경자가 종알거리니까

『커다란 계집애들이 목간은 꼭 대낮에 가야만 허니?』

그래도 딸이 못들은 체하고 높은 구두 뒤축을 뒤뚝거리면 서 나가는 걸 보고는

『얘야! 어미 말이 말같지 않으냐?』

하고 역정을 버럭 낸다.

『언니 저녁에 갑시다.』

천자는 형을 끌었다. 경자는 샐쭉해서 들어오더니 비누갑 을 마루에 메어다 붙이듯 하며

『그럼 내나 다녀올테야.』 한다.

계숙은 옳다구나 하고 누가 등이나 밀어내는 듯이 빠져 나 왔다. 감금이나 당했다가 놓여나오는 듯 마음이 거뜬하였다.

…수영의 방은 자물쇠가 채워있었다.

지금이 집에 있을 텐데 웬일일까?

하고 머뭇거리다가 안집에 들어가 물어보았다.

『요새 통 안들어와 잤나봐요.』

하는 것은 어린애를 업어 주는 계집애의 똑똑치 못한 대답 이다.

『대체 웬일일까?』

하고 계숙은 고개를 비꼬고 나와서 반찬가게서 전화를 빌 어 신문사로 걸었다. 서너번씩이나 걸어도 이야기 중이더니 교환수가 나오지 않고 커다란 사내목소리로

『김수영이를 찾으시오? 신문이 정간이 돼서 배달들이 안 들어오니까 알 수 없쇠다.』 하고 딱 끊어 버린다.

[편집]

신문이 정간이 되었다는 소식도 놀라왔거니와 그렇다고 수 영이가 며칠씩 집에 돌아오지 않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또 무슨 일이 생겨서 검속이나 당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났다. 간데온데가 없는 것을 보면 유치장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였다.

(하여간 병식 오빠는 소식을 알테지)

하고 어쩐지 가기가 싫은 것을 하는 수 없이 병식의 집으 로 발을 옮겨 놓았다.

그동안 병식은 경자의 집까지 찾아가는 길에 또 술꾼에게 붙들렸다. 관수동 천변을 끼고 내려오다가 앉은 술집으로 들어가는 신문사축과 마주쳤다.

『신문사두 인젠 거덜이 났는데 술이나 하룻저녁 실컷 먹 세.』 하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에라 죽던 살던 술허구나 단판 씨름을 허자)

하고 병식은 끌려 들어갔었다. 들어가서 자정이 넘도록 공 복에다가 술의 매를 맞고 인사정신을 몰랐다.

새파랗게 질려서 송장이 다 된 것을 좀 덜 취한 동료들이 간신히 집에까지 떠메어다가 주었다.

계숙은 병식의 아내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문간으로 가만히 들어서서 건넌방 툇마루에 흙투성이가 된 병식의 구 두가 놓인 것을 보고 사뿐사뿐 걸어들어가 창밖에서

『오빠 계서요?』 하고 나직이 물었다.

『들어와, 난 다시 못볼 줄 알었지.』

병식은 문을 열고 맞아 들인다. 머리를 말갈기처럼 쳐뜨리 고 엎드려서 무엇을 쓰고 있다가 종이를 요밑에 다급히 감 춘다. 계숙은

『뭘 그렇게 몰래 쓰서요?』 하고 들어섰다.

병식의 얼굴은 전보다 더 핏기가 없고 광대뼈가 나오도록 수척하였다.

계숙은 병식이의 저에게 대한 감정을 빤히 알고 있는 터이 라, 병식의 태도가 전처럼 찐덤지 않기로 섭섭할 것은 없어 도 너무 초췌한 것이 보기에 딱해서

『요새두 그저 깨긋치 못허신가보군요.』

하고 발치에 가 쪼그리고 앉으니까

『차차 땅 냄새가 구수해 오는게지.』

하고 코웃음을 웃는다.

『참 신문이 정간이 됐다죠? 오늘 전화를 걸어보구야 알았 어요. 그러니 가뜩이나 어려우신 터에 인제버텀 어떻게 지 내셔요?』

하고 진심으로 동정을 하였다. 병식은 계숙의 얼굴을 뚫어 질 듯이 들여다보더니

『죽지 않으면 살겠지. 나두 여자로나 태어났더면 부잣집 에서나 모셔갈걸.』

하고 쓸쓸히 웃는다. 병식의 입만은 여전히 뾰죽하다.

여자를 쏘아보는 병식의 그 독특한 신경질적인 눈! 거기서 는 계숙에게 대한 원한과 또 경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 데 대한 비분과, 또 그리고 그만큼이나 간곡히 권했는데도 말을 아니들은 것을 꾸짓는 착잡하고도 가슴벅찬 감정이 흘 러나온다. 그 날카로운 눈으로부터 무슨 독기 있는 광선이 일직선으로 계숙의 얼굴 위에 쏟아지는 것 같다.

계숙은 얼굴 가죽이 따가운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만에야 발갛게 익은 듯한 얼굴을 쳐들고

『오빠가 저를 단단히 오해하신 줄은 짐작허지만요. 얼마 동안 두고 보시면 자연 아실 날이 있을 테니까 변명도 허지 않을테야요. 그집엘 들어가 있든지 나와 있든지 간에 말씀 야요.』

하고 슬그머니 제가 경자의 집에 가있게 된 일절에 대해서 는 묻지도 말아 달라는 예방선을 쳤다. 그러자

『이리 오너라!』

하고 문간이 떠나가도록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병식은 미닫이가 닫혔는데도 질겁을 해서 한구석으로 비켜 앉는다.

十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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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밖에서는

『주인 있오?』 하고 재분참 안으로 들이대고 부른다.

『나무장수가 왔으니 좀 내다봐요.』

하고 병식의 아내가 방안에서 마주 소리를 지른다.

『없다구 그러지 못해.』

병식이가 지게문을 연고 따달라고 하니까

『하루두 연두번씩이나 오는 걸 번번이 어떻게 따란 말요.

나는 몰라요.』

하고 나무장수만 못지않게 소리를 지른다.

나무장수는 안 여편네의 새된 목소리를 듣고

『여보 사람이 찾으면 내다나 봐야 옳지 않소?』

하고 중문간으로 들어서서 호령하듯 한다. 병식은 눈쌀을 잔뜩 찌푸리고

『에에 빌어먹을 것 같으니 도적질두 손이 맞아야 해먹 지.』 하고 마지못해 나갔다.

『글쎄 며칠만 더 참어달라는데 내가 그동안 급살이나 맞 을까봐서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단 말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계숙은 불안스러워서 더 앉았을 수가 없건만 병식이가 무 슨 비밀문서나 꾸미듯 하다가 감춘 것이 수상해서 요밑을 떠들어 보았다. 요밑에는 수영에게서 온 엽서가 있었다. 시 골로 내려가는 길에 부친 것이 인제야 계숙의 눈에 띄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겉에 봉함엽서는 수영의 긴 편지가 반쯤 봉투 밖으로 내밀었다.

계숙은 도둑질이나 하는 듯이 가슴이 울렁거리건만 한참 궁금하던 판이라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펴들고 두줄 세줄씩 급히 눈을 달려서 편지 사연의 요령만은 머리에다 집어넣었 다. 병식이가 쓰다가 감춘 것은 그 답장이었다.

『그동안 신문이 정간이 된 것과 계숙이가 내게도 말이 없 이 경호의 누이의 집으로 들어간 모양인데 내야 만사에 넋 을 잃고 지내는 터이라 그 집으로 찾아가기도 싫으니 시골 집에 급한 볼 일만 보고는 곧 올라와서 단단히 조처를 하 라. 그렇지 않으면 계숙에게 대해서는 영영 단념을 하는 수 밖에……』 까지 쓰다가 말았다.

계숙은 그동안의 경과만은 환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수영 이가 무슨 볼 일이 있어 급자기 내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저에게는 편지를 했을 터인데 그 편지는 사숙하는 집 주인 마누라가 받아 두었거나, 반환을 시킨 것이 틀림없 으리라 하니 잠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병식은

『이렇게 허구헌날 쪼들리구 살테면 살림이구 뭐구 애진작 뒤엎어버려야 해.』

하며 문짝이 부서지도록 탁 닫으며 들어온다.

계숙은 편지를 몰래 본 것이 무슨 죄나 지은 것 같아서

『오빠, 난 편지 봤다나요.』

하려다가 (아서라 화만 더 돋우어 줄 게 없다) 하고

『나무 값이 얼마나 돼요?』

하고 묻고 싶지 않은 말을 물었다.

『그걸 알어 뭘 해.』

병식은 핀잔하듯 계숙에게까지 화를 끼얹는다. 계숙은 무 안에 취해서 잠자코 앉았다.

『틈 있는대로 또 오께요. 제 일을랑 걱정하지마서요.』

하고 일어섰다. 병식은 천하만사가 다 귀찮은 판이라.

『얘기두 못허구 가서 미안허군. 요샌 더 기분이 좋지 못 해서……』 하고 붙잡지를 않았다.

계숙이가 문을열고 나가려니까

『수영군헌테선 편지가 왔겠지?』

하고 딴전하듯 묻는다.

『아아뇨.』 하고 계숙은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그럼 먼저 있던 집으루 가봐. 그리룬 왔기가 쉬우니 까……』 하고 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열며

『계숙이!』 하고 나지막하게 부른다. 계숙은

『네?』 하고 돌아섰다.

『내가 전처럼 계숙이를 믿어두 좋아? 무슨 일을 당하든지 타락만은 허지 않는다구 그랬지?』

그 애원하는 듯한 말에는 눈물이 섞였다. 계숙을 유심히 쳐다보는 병식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네 오빠, 오빠나 어서 기운을 차려 주서요!』

하고 굳세게 대답을 하였다.

계숙이도 감격하여 눈물을 머금으며 그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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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부리나케 사숙하던 집으로 갔다. 가보니 제가 들었 던 방에는 벌써 다른 학생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 주인 마누라를 찾았건만 마누라조차 밖에 나들이를 가고 없다고 한다.

진고개 일본사람 상점에 심부름을 해주고 거기서 숙식까지 하는 열 칠팔세쯤 되는 아들이 첫 공일이 돼서 저의 집에 나와 쉬다가, 집을 보게 된 모양이다. 주인의 아들과는 몇번 문간에서 마주쳐서 피차에 얼굴을 알고 지내던 터였다. 주 인의 아들은

『조금 아까 나가셨는데요. 바깥 방에 들었던 학생헌테 온 편지를 전허구 오신다구, 날더러 집을 보라섰에요.』

한다.

아이 이를 어째. 조금만 일찍 왔드면.

하고 계숙은 발을 동동 굴렀다.

주인 마누라가 지궁스럽게 편지를 들고 경자의 집으로 찾 아간 것이 분명하다.

(중간에서 올지갈지가 되어서 만나지를 못했나 보다)

하고 계숙은 그집을 뛰어나오듯 하였다.

주인 마누라는 한동안 주객간으로 계숙이와 정다이 지내던 터이라, 작별을 못하고 떠나 보낸 것이 섭섭도 하려니와, 돈 을 십원씩이나 얹어 준 치사도 할 겸, 편지도 전해줄 겸 겸 사겸사해서 경자가 번짓수 적어 준 것을 간수했다가 별러서 나선 걸음이었다.

계숙은 자동차라도 불러타고 마누라의 뒤를 쫓아가고 싶었 다. 제가 나온 사이에 마누라가 경자의 집에를 찾아가서 귀 등대등 수다를 늘어놓다가 수영의 편지를 경자에게 맡기고 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그 편지를 경자가 몰래 뜯 어보고 경호의 손에까지 굴러들어가기가 쉽지 않을까?

(어쩌면 그 계집애가 편지를 받고도 안받았다고 새침을 뗄 지도 모르지)

하고 계숙은 달리는 전차로 남학생처럼 뛰어올랐다. 금새 숨이 가쁘고 혓바닥에 백태가 끼도록 몹시 초조하였다. 차 창 밖으로 길거리를 내다보며

(혹시 그 마누라쟁이가 지나가지나 않나?)

하고 눈에 띄우기만하면 붙잡으려고 뛰어내릴 준비까지 하 고 섰자니 마음이 여간 타는 것이 아니었다.

수영의 편지에 어떠한 사연이 씌어있는지 간에 경자의 수 중으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분하였다.

죄없는 마누라장이까지 몹시 미웠다.

푸줏간으로 들어가는 암소 모양으로 진정 들어가기가 싫은 것을 계숙은 하는 수 없이 그 편지를 찾기 위해서라도 다시 경자의 집으로 발을 들여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계 숙은 될 수 있는대로 아무런 눈치도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서, 뒤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경자의 집 중문간으 로 들어섰다.

경자는 그동안 큰 집에는 벌써 다녀왔는지, 행랑어멈을 다 리고 뜰아랫방을 말끔히 치워놓았다. 허접스레기 세간창고 로 쓰느라고 겨우내 폐방을 해두었던 뜰아랫방을 부랴부랴 치우고 일변석 탄을 지피고 책상과 이부자리를 내려오고 하 느라고 법석을 하는 중이었다. 안채와는 판장으로 차면까지 해놓아서, 이방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안에서는 모르게끔 되었다. 경자는 무슨 청결이나 하는 것처럼 수건을 쓰고 행 주치마를 두르고 하인들을 총찰하다가

『아니 무슨 목간을 자그마치 세시간씩이나 허구 와? 아주 한꺼풀 벗겼남.』

하고 들었던 총채로 방안을 가리키며

『우리 오늘버텀 이방을 응접실로 쓰자구요. 건너방은 안 방하구 너무 가까워서 맘대로 떠들고 놀수가 있어야지. 누 가 혹시 찾아와도 여간 거북하지가 않어. 폐방을 했던 데가 돼서 아직은 쓸쓸하겠지만 우리가 내려와 있을테니까 괜찮 지?』

하고 아무말도 아니하고 제 거동만 노려보는 계숙의 양해 를 구하기에 바쁘다.

『아무려나. 조용해 좋겠구먼.』

혼잣말 하듯 하고 계숙은 문지방에가 걸터앉았다. 급하고 궁금한 품으로는 당장 편지를 내놓으라고 싶지만

『그동안 누가 날 찾아오지 않었어?』

하고 넌지시 물어 보았다.

경자는 행랑어멈의 눈치를 힐끗 보고서

『아니.』 하고 고개를 짤래짤래 흔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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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밤 계숙이는 경자를 떠다밀어 방바닥에다가 발딱 자빠 뜨리고, 배를 깔고 앉아서, 생선창자를 발라내듯이 편지를 꺼내고 싶은 것을

(네가 어디 안내놓나 보자)

하고 안간힘을 쓰며 참는다. 경자가 『아니』 하고 대답을 할 때, 행랑어멈의 눈치를 본 것으로 보아 누가 다녀갔다는 것을 혹시 묻더라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해둔 것이 분명 하였던 것이다.

(무슨 수단으로든지 오늘 밤 안에는 빼앗고야 말걸. 그렇지 만 잘못 덧들여 놓았다가는 안돼)

하고 꿀꺽 참았다. 조용한 때 춘자를 살금살금 꼬여가지고 들어보면 알 수가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계숙은 비록 하룻저녁이라도 이 호젓한 뜰아랫방을 쓰고 싶지가 않았다. 뜰아랫 방으로 몰아넣는 것도, 모두 경 호 남매의 음모만 같았다. 건너방에 같이 있으면 저부터 불 편할 뿐 아니라, 경호가 오더라도 어머니도 모르게 조용히 만나게 할 수가 없으니까, 아주 딴집 같이 으늑한 방으로 격리를 시켜논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무상시로 출입을 하자 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이 버쩍 들었다. 굿을 하더라 도 모르게끔 이방에서, 옷을 벗고 혼자 정신없이 자는데, 경 호가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찌 할까? 술이나 취 해가지고 달려들어서 완력으로 찍어누른다면 무슨 힘으로 항거를 할 수 있을까? 소리를 질러 경자나 행랑에서 듣는댔 자, 못들은 채할 것은 분명하다.

이런 공상을 하자니 계숙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일테면 돼지나 같은 식용동물을 잡아먹기 전에 가두어 두 고 실컷 먹이는 것이, 제 살을 뜯을 그 적당한 때까지 이방 에다 감금을 하는 것이 분명치 않을까 하니, 계숙은 더 한 층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위험을 동시에 느꼈다.

경자는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하더니 계숙이 몰래 큰 집으 로 가서 밤이 가도록 돌아오지를 않았다. 춘자의 말을 들으 면, 어머니께는 전에 없던 오라비댁의 병구완을 해 준다는 핑계로 나갔다 한다. 춘자더러

『누가 다녀간 사람이 없어? 편지한장을 가져왔지?』

하고 물어보았건만 상글살글 웃기만 하고 안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수영의 편지가 경자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만은 확 실하다. 그러나 좌우간 경자를 기다리노라니까 옮겨다 논 자리 위에 누워서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계숙은 경자를 기다리다 못해서

『오늘 밤만 드새자.』

하고는 이불을 덮고 누우려다가, 신변이 허수해서 일어나 덧문 고리를 단단히 걸고 나서야 옷을 벗고 누웠다.

계숙은 불을 끄고 누워서도

(이러다가는 내가 그 남매를 이용한다는 것이 전연 공상으 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의문이 생겼다. 경자의 비위를 맞추어 동경가서 공부 할 학비가 나오도록 조정을 하는 동시에 경호를 장중에다 넣고 잘 주물러 보겠다던 야심이 어쩐지 자신이 없는상 싶 었다. 얼마동안 제꾀에 넘어갈는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도리 어 속아넘어가서 회복할 수 없는 큰일을 저지르고야 말게 될것만 같다. 수영과 병식이가 지성으로 말리던 것이 결코 저를 못미더워하고 일종의 질투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 각도 되었다.

(저희들 남매는 때때로 만나서, 세워논 계획이 착착으로 진 행하는 눈친데, 저는 아무러한 방어선(防禦線)도 치지 않고 자꾸만 옭혀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다가

(흥 너희들헌테, 속아넘어갈 내가 아니다. 나를 누구로 알 고, 없는 사람이면 여자면 다 제 손아귀에 들 줄 알었다간 큰코를 다칠걸)

하고 이불 속에서 활개를 치고 나서 잠을 청하였다.

그날 밤새도록 뒤숭숭한 꿈은, 온통 수영의 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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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그동안 마음의 안정을 잃고 지냈다.

(내가 왜 이리 침착해지기를 못할고?)

하고 하루도 한번씩 제 자신에게 물어도 보았다. 노름판에 서 밤을 새운 사람처럼 입술이 타들어 가도록 초조해서 잠 시도 기분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생후 처음으로 당하는 경 험이었다.

제가 일평생의 일터로 작정한 농촌이, 과찰을 거듭할수록 한숨과 환멸(幻滅)을 느끼게 할 마름이요, 차라리 저주하고 싶은 생각이 앞을 설 때도 있었다.

게다가 차차 알고 본즉 집안 형편이 또한 말씀이 아닌 정 도로 속이 곯았다. 그것이 차츰차츰 눈에 띄울수록 수영의 가슴은 바윗돌에나 눌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병은 아직도 늦은 봄날같이 지지하게 끌기만 한 다. 기름이 졸아붙는 등잔불처럼 가물가물 하면서도 깜박 꺼지지도 않는다. 다만 피가 싸늘하게 식지는 않았을 뿐. 미 지근한 시체가 안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줄창 누워있다. 그 동안 아들이 반가운 김에 기동을 한 것이 또 실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도 정신만 빠끔하면

『이십 안 자식이요. 삼십 전 천량이라는데 글쎄 어떻게 생긴 애가 장가는 들어볼 생각도 안헌담 온 딱한 일도 많 지. 합당한 자리가 있대두 들은체 만체 허니.』

하고 영감이나 아들만 보면 아침저녁으로 염불 외우듯 하 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외우고 또 외우고 하 는 말이 어쩌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의의 머릿살 아픈 사정도 하나 둘이 아니어니와, 계숙의 일도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편지를 받았다는 엽서 한 장도 오지를 않는 것을 보면 그 동안 계숙의 신변에는 중대한 변동이 생긴 것 만은 짐작할 수 있다. 기어이 경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손치더라도 몸성이 있다는 안부쯤은 전해 줄상 싶은데, 한번 내려온 뒤에는 소 식이 뚝 끊지고 보니, 수영은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무슨 생각도 조리있게 할 수가 없었다. 수영은 서울 소식을 기다 리다 못해서 (병식이마저 죽어버렸나? 요새두 밤낮 술타령만 허는게로 군) 하고 친구조차 원망스러웠다.

오늘이나 올까, 내일이나 올까. 아침에 안왔으니까 저녁에 는 오겠지 하고 눈이 빠지도록 체부를 기다렸다.

동구 밖만 내다보고 앉았으려면 나중에는 눈이 다 아물아 물 해서 길언덕의 고용나무가 꺼먼 복색을 한 체부로 보일 때도 있었다.

일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도는 전파에 음파를 실 어, 동반구(東半球)와 서반구의 거리(距離)를 단칸방 속같이 졸라매는 라디오가 한참 행세를 하고, 동경 사람과 뉴욕 사 람이 제 자리에 앉아서 여보시오 한번이면 숨쉬는 소리까지 듣고 앉았는 이 시대다.

그런데 「사발통군」이 속달우편이요 「파발」이 전보 노 릇을 하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대의 교통 상태와 다름이 없는 시골이 조선 안에 있다는 것은 더구나 서울서 불과 삼 사백 리 밖에 아니되는 곳에 있다는 것은 도회의 사람으로 는 꿈에도 생각 못할 사실이다. 교통기관의 시설이 없다는 것보다도 더한층 놀랄만한 사실은 모든 근대의 문명이 농촌 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문명의 혜택을 입기는커녕, 이 고 장 주민들은 적어도 몇백년 전의 공기를 오늘까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농민이다. 도회의 양반들에게 외씨 같은 이 밥을 먹여주기 위하여 저 밭에서 논에서 대대 손손이 등이 휘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하는 것은 농민이다. 그리고 그 대가(代價)로 강조밥 꽁보리밥도 제때에 못얻어 먹고, 짐 승도 아니먹는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먹다가 부황 이 나고 똥구멍이 막히는 것이 누구냐? 오오 농민이다!)

하고 수영은 몇번이나 부르짖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연애를 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기다린다는 것부터 사치스러운 것 같았다.

배부른 놈의 장난같이도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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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저녁때 수영이가 돼지우릿간을 고치고 있으려니까 학교에 다녀오는 복영이가,

『언니 편지 왔수』 하고 저도 반가운 듯이 두툼한 봉함 편지 두 장을 조끼주머니에서 꺼내준다.

수영은 아우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듯 하였다. 계숙의 편지 는 없었다. 없을 뿐 아니라 그동안 계숙의 사숙으로 부쳤던 편지가, 수신인이 없다는 쪽지가 붙어서 인제야 돌아왔다.

수영은 병식의 편지를 북 뜯었다. 벽두로 신문이 정간이 되었다는 것과 수인사가 끝난 뒤에,

「인제는 정말 거리의 룸펜이 되고 말았네. 자네처럼 피난 할 구석도 없는 나는, 여닐곱이나 되는 식구를 끌고 굶는 길로 달릴 수 밖에 없네.

사 오일 동안이나 다른 신문사와 인쇄소마다 쫓아다니며 밥구멍을 뚫어 보았지마는, 당초에 말도 붙여볼 수가 없는 거야 어찌 하겠나? 인젠 세상 만사가 아주 시들버들 허이, 사람의 새끼가 이렇게까지 먹기에 안달을 하여야 하는 이유 를 도무지 찾을 수 없네. 동시에 나라고 하는 인생, 겨자씨 만한 기생충의 생존가치를 스스로 의심할 뿐일세.

생활은 변문제로 치고도 나는 요새처럼 신변의 적막을 느 껴본 적은 생후 처음인가 하네. 무덤속에 백골도 나처럼 고 독하지는 않을 것 같이 생각이 드네.

나는 그동안 자네에게 주정도 하고 내 심경(心境)을 하소연 도 해왔네마는 지금 와서는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고 하염없 이 생각되는 동시에, 「오직」 죽음이라는 시꺼먼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내마음을 엄습하고 유혹할 따름일세.

연애고 무엇이고 그것도 자네와 같은 사람이나 할 일이지, 나처럼 떡심이 풀린 인간에게는 이생에서 인연이 없을 것만 은 사실일세. 계숙은 기어이 그집으로 들어가고 말았네. 진 정 딱한 일일세. 계숙의 자질(資質)이 몹시 아깝지만 온갖 자격을 잃어버린 나로서야 속수무책일세 그려. 송장에게 입 이 없는 거와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일전에 한번 찾아오기는 했네. 그런 것을 말 한 마디 아니 하고 돌려 보냈네. 그때 쓰던 편지를 찢어버리고 인제와서 겨우 이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것일세. 그러나 자네하 고는 편지 왕래가 빈번할 터이니, 계숙의 소식을 내손으로 길게 적기는 싫으이.

어쨌든 계숙이가 우리들이 기대하던 정반대로 조선의 인텔 리 여성들이 보통으로 밟는 길로 빠져들어갈 것은 도리어 예사로 생각하네만, 그로 말미암아 헛되이 정열을 소비하는 자네가 매우 가엾을 따름일세.

첫사랑에 상처난 가슴의 낙인(烙印)은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느니. 평생을 두고 그 상처가 쓰라리고 아픈 법이니, 자네 보다도 더 가엾고, 자네보다도 더 가슴 쓰라린 사람 이 세 상 한구석에서 가쁜 숨을 몰고 있는지도 모르네마는……

시골에는 봄이 왔나? 봄기운이 떠도나? 보릿고개(麥嶺) 아 득한 시골 사람들의 정경도 보는 듯허이.

쓰레기 통을 뒤지는 비렁뱅이의 잔등이에 삐죽삐죽 내어민 솜이 터분해 보이고, 선술집에 파리가 소생하니 서울도 아 마 봄이 오려나보이. 수영군 아 이람아! 자네마저 내곁을 떠 나고 만단 말인가? 급한 불만 끄고는 곧 올라 오게. 계숙의 일은 하루바삐 자네의 손으로 단단히 조처하지 않으면 후회 막급일걸세. 벌써 계숙이는 자네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까지 되었는지도 모르네」

편지를 든 수영의 손은 부르르 떨렸다. 편지를 수세미처럼 뭉쳐서 거름구덩이에다가 틀어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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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의 편지에 무슨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만, 수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까지 마음을 졸이 며 고대하던 편지가, 그따위 기막힌 소식인가 하면 여간 분 한 것이 아니었다. 체전부가 눈 앞에 있기만 하면 퍽퍽 뚜 드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신문이 정간이 된 것이야 그다지 놀라울 것은 없지만, 계 숙이가 경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에는 혈관 속을 급행 열차와 같이 달리던 피가 무뜩무뜩 정거를 하는 듯 하였다.

(옳지 그래서 소식을 끊구 지냈구나)

하고 한참 생각한 뒤에

『얘, 오늘 물참이 몇신지 아니?』

하고 수영은 어쩐 영문인지 모르고 곁에 서 있는 아우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복영은 무슨 꾸지람이나 들은 듯,

『몰라유.』

하고 손을 비빈다. 수영은 당장에 서울로 떠날 결심을 하 였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도 시골에 주저 물러 앉았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서울로 쫓아올라가서 양단간에 제 손 으로 계숙의 일을 조처하고 와야할 의무라느니보다도 참을 수 없는 의분과 계숙에게 대한 일종의 증오(憎惡)까지 느꼈 던 것이다.

(에익 너두 결국은 계집애로구나. 돈에 몸뚱어리를 파는 계 집애에 지나지 못하는구나)

하고 혼자서 부르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날은 서편이 없어서 이튿날 새벽에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수영은 하룻밤을 기다리기도 갑갑한 듯이 벌판으로 나갔다.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뛰어나갔다. 시원한 바람이나 쏘여서 머리를 식혀보려는 것이다. 점둥이란 놈이 어느틈에 보았는지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뒤를 따랐다.

벌판에는 논배미마다 물이 가득가득 고여서 논두렁으로 철 철 넘쳐 흘러, 온통 바다를 이루어 비스듬히 내려쪼이는 석 양을 눈이 부시게 반사한다. 수영이가 침울하게 지내던 며 칠 동안에 봄은 여러 걸음이나 산과 들로 기어 들었던 것이 다. 구름장이 눈사탕처럼 녹아내리는 듯, 자회색 아지랑이가 산허리를 휘감았다가는 마루터기로 골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 산기슭에 조그만 계집애들이 분홍치마를 입고 쪼그리고 앉은 것 같은 것은, 한 무더기 두 무더기 피기 시작한 진달 래꽃이었다. 그 연연한 꽃 입술은 보드랍게 봄을 토하는 것 같았다.

『어느 틈에 꽃이 피었나?』

하고 수영은 군소리하듯 하며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잔디를 밟고, 이름 모를 풀잎을 골라 디디며 집 뒤 언덕으 로 올랐다. 눈앞에서 별안간,

『끽끽.』

하는 소리에 산골짜기가 울렸다. 동시에 푸드득하고 나는 것은 털빛이 혼란한 장끼(雄雉)였다. 점둥이가 사냥개처럼 꿩을 튀겼던 것이다.

수영은 벌써 송중이가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소나무를 의지 하고 무릎을 얼싸안고 앉았다. 눈앞에 질펀히 깔린 논과 밭 을 내려다 보며 모든 복잡한 생각을 흩여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대지에 가득히 차오는 봄을 봄답게 보고 느껴보려고 하였다. 조선 청년으로서의 고민과 청춘의 오뇌와 사랑의 쓰라림을 어린 아기의 입김같은 봄바람에 흘려버리고 싶었 다. 잗다란 세상 근심을 발밑에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장난 감 배처럼 띄워버리고 싶었다.

꽁꽁 얼었던 흙은 나날이 풀려서 가지각색의 초목은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움이 돋지 않는가? 온갖 새들은 닥쳐올 봄날을 목청껏 찬미하고 갖은 짐승들은 제멋대로 뛰고 달리 지 않는가? 굼벵이나 지렁이까지도, 소생하는 기쁨에 꿈틀 거리지 않는가!

그러나 수영의 마음속은 영원한 겨울과 같았다. 가슴속에 슬은 성에는 언제나 녹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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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의 머릿속은 오직 첩첩한 근심만의 들끊었다. 그 근심 은 감옥의 철문처럼 수영의 눈앞에서 움직이는 봄을 가로막 고 있다. 그 가로 막힌 속에서 또 다시 갈피를 잡을 수 없 는 공상과 잡념과 그리고 분노와 질투의 또 그리고 집의 형 편과 생활에 대한 불안이 어웅한 구멍텅이로 쏟아져내리는 폭포수처럼, 뒤섞였다가는 용솟음을 친다.

수영은 그 모든 참기 어려운 감정을 꽉 깨물고 앉았으려니 까, 눈앞으로 기울어진 언덕에는 새로 밭을 일구느라고 종 아리를 걷어붙인 상투 달린 사람들이 대여섯이나 종가래질 을 하고 있다. 종가래 끝은 돌뿌리에 부딪쳐 불이 번쩍번쩍 난다. 그들은 껄끄러운 잔디밭을 맨발로 들어서서 연방 흙 을 파헤치며 괭이로 나뭇등걸을 캐면서 올라온다. 저 시뻘 건 흙에 언제나 거름을 하고 씨를 뿌려야 하는지 난감해 보 였다.

그 맞은편 언덕에는 보리밭을 매는 아낙네들이 역시 맨발 로 한 고랑씩 맡아가지고 재빠르게 호미를 놀린다. 그들의 등뒤에는, 이맘때면 콧노래를 부르면서 냉이나 소루쟁이를 캐러다닐 조고만 계집애들이 돌을 고르고 풀을 뽑는다.

수영은 저혼자 하는 일 없이 맥놓고 앉아서 남이 일을 하 는 것을 내려다만 보기가 미안쩍어서 한숨과 함께 일어섰 다.

(대흥의 집이나 찾아 갈까? 오봉이는 어째 요새는 한번두 만날 수가 없나?)

하다가 금새로 사람도 만나고 싶지가 않아서 바다로 향한 비탈길로 내려갔다.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내려가려니까 쭐렁쭐렁 앞을 서가던 점둥이가 무엇에 놀랐는지 컹컹 짖으 며 달려왔다가 되짚어가서는 어서 오라는 듯이 주인을 부른 다. 까치들이 수십 마리나 소나무 위에 몰려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깍깍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무슨 이상한 변사 가 생긴 것은 분명하였다.

수영은 불길한 조짐이나 느낀 듯이 머리 끝이 쭈뼛하였다.

(무얼 보았길래 저렇게 짖노?)

하고는 참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점둥이 뒤를 쫓아갔다.

가다가는 멈칫 물러섰다. 고총들이 촘촘히 들어박힌 봉분 사이에 시꺼먼 무슨 덩어리가 뭉쳐 있는 것이 선뜻 눈에 뜨 이었다.

점둥이는 시꺼먼 것을 물려는 듯이 달려들며 고개를 쳐들 고 맹렬히 짖는다. 수영은

(송장이나 아닌가?)

하고 걸음이 내키지를 않는 것을 개가 곁에 있는 것이 든 든해서 가까이 가 보았다.

꺼먼 뭉텅이는 사람이었다. 눈을 감고 모로 쓰러진 얼굴을 보니 열 두어살쯤 되는 소년이다.

무슨 조그만 베보자기를 끌어안고 푹 고꾸라진 모양이다.

송장을 내다버린 것이 아닐 것만은 분명하건만 수영은 손을 대기가 실쭉하지만, 할 수 없어 뒤통수를 건드려 보았다. 소 년은 꿈지럭거린다. 수영은 그제야 달려들어서 경찰 의사가 검사나 하듯이 소년을 잦혀놓고 맥을 짚어보고 가슴에다 손 도 대어 보았다.

얼굴은 흙빛 같이 변하였으나 몸에 아무 상처는 없고, 약 하나마 맥도 뛰었다.

더 가까이 가보니 무엇인지 물어 뜯다가 놓친 것이 머리 맡에 놓였다. 그것은 껍질도 벗기지 않은 칡뿌리였다.

수영은 노닥노닥 기운 베보자기를 끌러 보았다. 수수와 보 리를 섞어서 지은 검은 밥덩이와 짠지쪽이 꾸드러졌다.

(아하 네가 누구의 밥을 날러다 주려다가 고만 급자기 병이

났구나!)

하고 수영은 소년을 들쳐 업었다. 소년은 비탈길을 남에게 업혀서 내려오면서고개를 쳐들 기운도 없는 모양이다. 수영 은,

『이보슈, 날좀 보슈.』

하고 밭을 일구는 상투장이를 소리쳐 불렀다. 상투장이는 다가와서 소년의 쳐뜨린 머리를 쳐들고 들어다보더니,

『아 이게 성칠이 아들 정남이가 아닌가?』

하고 놀란다.

『물을 좀 얻어다 주슈』

하여 일꾼들이 가지고 나온 오지병의 물을 갖다가 정남의 입을 어기고 들어 부었다. 정남이는 그제야 신음하는 소리 와 함께,

『울아버지 밥……』

하고 꿈속처럼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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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여기 있다. 어서 정신을 차려라. 변변치 못 헌 것 같 으니라구.』

상투장이는 정남이를 나무라듯 한다. 수영은,

『네 집이 작은말이지? 내 업어다 주마.』

하고 정남을 다시 업고 언덕을 넘으면서

『너 어디가 아파서 그랬니?』

『……』

『왜 대답을 못허니? 어디가 아퍼서 그랬어?』

『아아니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다.

『아니유라니, 너 그럼 배가 고파서 쓰러졌었구나?』

『……』

『너 온종일 아무것두 못먹었지?』

『……』

정남은 수영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소리를 죽이며 흑흑 느껴 운다.

『아버지 밥 갖다 줄테유.』

하고는 발을 버둥거리며 내리려고 든다. 정신이 드니까 아 버지에게 점심을 늦게 가져왔다고 꾸중을 들을 것이 겁이 났던 것이다.

『걱정마라, 내 갖다 줄테니 나허구 집으루 가자.』

수영은 정남을 달래며 추켜업고 내리지 못하게 뒤로 깍지 를 꼈다.

정남의 병은 배고픈 병이었다. 어린 창자가 쪼그라 붙는 기갈병이었다. 한참 잘먹을 나이에 곁두리 때가 지나도록 아무 것도 얻어 먹지를 못하고 (어쩌면 엊저녁도 굶어잤는 지 모른다) 일하러 나간 아버지의 점심을 날러다 주러 가는 길이었다. 배고픈 것을 참다 못해서 칡뿌리를 캐어먹으며 산길을 혼자 걷다가 기진맥진해서 쓰러지면서 그만 까무러 쳤던 것이다.

(들고 가던 수수덩이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랴?)

하니 수영은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저희집 근처까지 오니 까 정남이는

『어머니헌테 매 맞어유.』

하고 울면서 몸을 뒤튼다.

『걱정마라. 내 잘 말해 주께 울지 마라 응, 울지 말어.』

하고 달래주려니 수영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앞이 어른어른해서 발을 옮겨놀 수 없었다. 그 눈물은 수영의 눈 에서는 보기 어려운 뜨거운 눈물이었다.

정남의 집은 굴속같은 납작한 토담 집인데, 그나마 찌부러 져서 한쪽 추녀는 땅에 가 마주 닿았다. 사람의 집이라느니 보다는 차라리 돼지우리였다.

정남의 어머니는 흙방 속에서 문지방을 비고 늘어졌는데 걸레 조각 같은 치마로 앞만 가리었을 뿐.

서너살, 두어살쯤 되어 보이는 정남이 누이동생은 무말랭 이처럼 쪼글쪼글하게 말라서 가죽만 축늘어진 어머니의 젖 꼭지를 하나씩 갈아 물고 엎드렸다.

빨아도 빨아도 젖이 나오지 않으니까 때가 반들반들한 저 고리 하나만 걸친 발가숭이는 젖꼭지를 쥐어뜯으며 다 죽어 가는 소리로 픽 픽 운다. 저혼자 울다가 울다가 그만 지쳐 서 목이 다 쉬었다. 어머니의 젖에서는 고 어린것들의 가느 다란 창자를 축여줄 한 모금의 젖도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 다.

『여보 일어나우.』

하고 수영은 정남을 기직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정남의 어 머니는 흐트러진 머리를 들고 일어나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수영과 아들을 번갈아 본다. 하늘이 돈짝만 하게 보이도록 어찔어찔한 모양이다.

정남이는 일어나 맞을까 보아 윗목으로 비슬비슬 피해간 다. 수영은

『얘가 허기가 져서 길바닥에 쓰러진걸 업구왔소.』

하고 정남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변호해 주었다.

『아이구 고마우서라. 저것들은 엊저녁버텀 아무것도 처먹 지를 못했지유. 배지가 고파서 그랬구만요.』

하고 정남 어머니는 무슨 영문인줄을 몰라서 손가락만 빨 면서 두리번 거리는 어린 것을 돌아보고는

『울지들 말구 있거라. 내 얼핏 아버지 곁두리 갖다주구오 께. 종일 굶구 어떻게 일을 헌단 말이냐.』

어린 것들에게 애원하듯 하며 무릎을 짚고 비슬비슬 일어 선다.

어린 것들은 피를 짜내는 듯 떨며 어머니의 몽드라진 치맛 자락에 매어 달리며

『밥……엄마 밥!』

하고는 어머니가 들고 가려는 밥 보자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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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로구나!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로구나!)

수영은 사십짝 문을 탁 닫으며 나와서 저녁놀이 시뻘겋게 낀 하늘을 우러러 보고 무어라고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다 시금 눈두덩이 뜨끈해져서 몇번이나 주먹으로 눈을 비볐다.

문밖으로 몇걸음 걸어가다가는 돌쳐섰다. 정남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서는 방으로 머리를 쑥 들여 밀었다.

정남의 어머니는 어린 것들을 엎어놓고 마른 볼기짝을 때 리며,

『요놈의 새끼야 뒤져라. 진작 뒤져. 누굴 못 잡아먹어서 요 극성이냐.』

하고 발악을 한다. 그러나 어머니도 기신이 하나도 없어 목구멍에서 헛김이 나는 것 같다. 어린 것들은 얻어 맞는 대로 발에 밟힌 개구리처럼 사지만 버둥거린다. 수영은 보 다 못해서,

『여보 때리지 마우. 그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구 손을 댄 단 말요.』 하고 말렸다.

흘낏 돌려다 보는 정남의 어머니의 눈도 침침한 속에서 번 뜩였다.

『이리 주우. 그 밥은 내 갖다 주리다.』

하고 수영은 밥보자기를 채뜨려 빼앗듯하고 나왔다.

정남의 아버지가 일을 하는 곳은 수영의 집에서 오 리 가 량이나 되는 바닷가였다.

삼 만 평이나 되는 간석지(干潟地) (조수가 드나드는 개흙 바닥을 가로막아서, 짠물을 빼낸 뒤 논을 푸는 땅)의 원둑 (堤防)을 쌓느라고 「가난고지」의 주민들은 장정만 칠 팔 십 명이나 풀려나왔다. 개흙은 파서 나르며 한편으로는 산 등성이 하나를 넘어다니며 짠 물을 먹고 자란 뗏장을 떠다 가 입힌다. 질펀한 개흙 바닥에는 사람이 하얗게 널렸다. 문 전의 밭과 논은 여편네와 어린애에게 맡기고 품을 팔러 나 오지 않을 수 없는 그네들이었다.

이 공사는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똑딱선을 부려서 돈을 모 은 사람이 허가를 맡아 가지고 여러 해를 두고 계획하는 거 창한 일이었다.

조금때(干潮)에 수백명 인부를 들여서 막아놓으면 사리때 (滿潮)에 들어 미는 세찬 물결에 씻겨내려가고 밑동이 허물 어져 나가서, 그것을 다시 쌓고 북돋으려면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둑만 튼튼히 쌓아놓고 그 넓은 벌판에 논을 풀기 만 하면 적어도 삼 사 백 석 추수는 무난히 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욕심껏 일을 시키는 것이다.

벌써 수면에서 열 자 가량이나 쌓아올린 원둑 위에는 주인 대리로 온 사람이 장화를 신고 몽둥이 같은 들고 서서 총찰 을 한다. 다년 그 사람을 따라 다니는 감독이 서너 명이나 각반을 치고 지까 다비를 신고 왔다갔다 하다가는,

『오서 오서.』

『빨리 빨리.』

하고 거위 멱따는 소리를 꽥꽥 질러가며 인부들을 몰아센 다.

수영은 조선사람 감독을 불러서 정남이 아버지를 찾아 달 라고 부탁을 하였다.

『지금 한참 바쁜데 언제 밥을 먹고 있단 말요?』

하는 퉁명스러운 말에 비위가 꿰어지는 것 같아서

『여보, 당신더러 먹으라니 걱정이요? 입때 굶구 일허는 사람 생각을 좀 해보.』

하고 억지로 밥 그릇을 처맡겼다.

수영은 그 자리에 서있기가 불쾌해서 원둑 밖으로 나갔다.

해금내 같은 개흙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흙은 버선 목이 넘도록 푹푹 빠진다.

그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굴껍데기와 조갑지가 깔린 위에 쭈그리고 앉으며 간석지 일대를 내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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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지금 한참 써는 중이라, 짙은 회색 빛으로 바다의 뱃 바닥이 드러났는데 우박맞은 잿더미처럼 게구멍이 숭숭 뚫 렸다. 그 바닥에 희뜩희뜩 보이는 것은 바위 틈의 굴을 쪼 아내고 갯바닥을 쑤셔서 낙지를 잡아내는 수건 쓴 여인네들 이었다.

여인네들은 물만 써면 바다로 달려나가서 그 차디찬 진흙 을 맨발로 쑤시다가 들어온다. 한나절이나 추위에 부들부들 떨고서 잡은 낙지나 굴 같은 것은, 자기네가 저녁 반찬을 해먹는 것이 아니라 쪽 떨어진 바가지에 반도 못찬 것을 마 을로 들고 돌아와서는 안 참봉댁이니 권 주사네니 하는 밥 술이나 먹는 집으로 가지고 간다. 잘해야 돈 한냥(십전) 쯤 하고 바꾸거나 그렇지도 못하면 보리나 좁쌀을 그 바가지에 다가 구걸을 해가지고 가는 것이다.

날은 어스레해졌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닷가에서 일 을 하는 사람들의 걸친 옷이 몸에 붙어 있지 않으리만큼 세 차게 분다. 그런데도 일군들은 말끔 발을 벗고 바지를 사추 리까지 걷어 올렸다. 그 차디찬 갯바닥에 아랫도리를 잠그 며 삽으로 괭이로 차디차진 흙덩이를 파올리면, 바소쿠리를 짊어진 일꾼들은 그 흙을 허리가 휘도록 지다가 원둑 밑에 다 붓는다. 짐은 무거운데 수렁같은 개흙바닥은 한 다리를 빼내면 한 발이 빠지고, 빠진 발을 빼내려면 빼낸 발이 다 시 빠져 들어간다. 그네들은 굵다란 지렁이같이 힘줄이 일 어선 모가지를 자라목처럼 늘이고 지척지척 가다가는 짐을 부린다. 그러면,

『요게 뭐야? 요렇게 조금씩 일을 하면 무슨 돈을 주나.』

하고 원둑 위에서 호령이 내린다.

아침 해가 돋기 전부터 어둑해서 사람의 얼굴을 분간하지 못할 때까지 못할 때까지 일을 한다. 정남의 아버지처럼 잔 입으로 나오는 사람도 정겅드뭇하다. 점심을 가지고 나온 사람도 조밥이나 수숫덩이가 구드러진 것을 먹고 찬물을 마 시고는 이내 일을 시작한다. 그러면 나중에는 몸뚱이가 남 의 살같이 뻣뻣해지고 눈이 달린다. 황혼 때도 지나서 집구 석이라고 찾아들면 잘해야 시레기죽 한 사발이나 나깨범벅 한덩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도 못하면 정남의 집과 같은 광경을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네들이 진종일 판 삯은 얼마나 되는가? 겨우 삼 십전이다! 그 삼십 전도 날마다 또박또박 받는 것이 아니다.

원둑막이 하는 주인에게 지난해 이른 겨울부터 돈도 취해다 쓰고 양식도 장리(長利)로 꾸어다 먹었기 때문에 그 품삯으 로 메꾸어 나가는 사람이 거지반이라는 것을 수영은 지난 밤에도 동지들에게서 들었다.

그러니 그네들은 백통전 한 푼도 만져보지 못하고 보리쌀 한 됫박도 팔아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수영이는 한 눈도 팔지 않고 앉아서 그네들의 일하는 것을 바라다보았다. 그것은 농촌이 피폐하다든가, 몰락되었다든가 하는 말로는 도저히 형용을 할 수 없는 참혹한 정경이었다.

동정을 한다든지 눈물이 난다든지 하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 의 이야기였다.

수영은 생각을 계속하였다.

(남의 논마지기나 얻어하는 우리집도, 여기 앉아서 남의 일 처럼 구경을 하고 앉았는 나도 조만간 저회들과 같이 되겠 구나. 내 등에도 저 지게나 바소쿠리가 지워지겠구나) 하니 몸서리가 처졌다.

그것은 공상에서 나오는 어떠한 예감이 아니고, 바로 눈 앞에 닥쳐오는 엄숙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 앞에서 수영은 몸과 마음이 함께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입술을 꼭 물고 앉았으려니 부잣집 마름의 아들로 태어난 제가, 손끝맺고 앉아 있는 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감정은 일종의 공포 (恐怖)와도 같아서 더 앉아 있기가 송구할 지경이었다.

(저 사람들을 저대로 내버려 둘 것이냐? 그렇다, 나부터도 그들의 속으로 뛰어들어야겠다. 그러고 나서……)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막 일어서려는데

『아 이 사람아 뭘 그렇게 혼자 궁리를 허구 있나?』

하고 등뒤로 와서 어깨를 치는 사람은 대흥이었다.

『어, 대흥이.』

하고 수영은 꿈에서나 깬것처럼 친구의 얼굴을 돌려다 보 았다.

十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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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허느라구 이 쌀쌀헌데 청승맞게스리 쭈구리 고 앉었나?』

『저 사람들이 언제나 사람다운 생활을 해볼는, 하두 보기 에 답답해서……』

하고 수영은 대흥에게 이끌리듯 하여 언덕에서 내려왔다.

『흥 자넨 걱정두 많으이, 줄창 저런 광경 속에서 사는 우 린, 신경이 마비가 됐는지 인젠 아무렇지두 않으이. 난 모든 걸 억지로라두 낙관을 허구 지나네. 그렇지 않으면 이 시골 구석에서 살 수 있겠나?』

『그렇지만 들어보게. 지금 우리 젊은 사람들헌테 무엇이 제일 무서운 적(敵)인 줄아나?』

수영은 대흥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논두렁을 건너면서 이 야기를 재촉한다.

『그야……』 하고 대흥은 서슴치않고 대답한다.

『그건 말할 것두 없지만.』

하고 수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들 헌테 제일 무섭고 두려운건 우리같이 젊은 사람 들이, 소위 지식 계급에 처한 청년들이, 자기가 처해있는 환 경에 대해서 낙심을 하고 실망하는 것이라구 나는 생각허 네! 그렇다고 자네처럼 덮어 놓고 낙천주의자(樂天主義者)가 된다는 것도 큰 의문이지만…… 어쨌든 서울이고 시골이고 간에 공부를 좀 한 사람은 더구나 해외바람을 쏘인 인텔리 들은 손끝맺고 앉아서 노란 사탕물이나 마시고 앉어서 멍허 니 세월을 보내거나 끽해야 계집의 꽁무니나 어슬렁어슬렁 따러다니고, 아편침을 못맞는 대신에 알콜에나 염통을 담그 고 (하다가 병식의 생각이 문득 났다) 비틀 걸음을 치는 동 안에는, 우리 조선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는 못하네. 자꾸만 뒷걸음질을 칠 뿐이지 잠시잠깐 모든걸 잊어버리거나 덮어 놓구 환경을 저주만 한다는게 아무짝에 소용이 없다는 말일 세. 모든 고통을 웃으며 받는다는건 모르지만, 헤식게 웃기 만 하는 것도 큰 일날 장본인 줄 아네.』

『참 그래. 자네말이 옳으이. 학교깨나 졸업을 허구 나오면 의례 놀구 먹을 줄 아는게 큰 병통이야. 그러니 저 농민들 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까지 먹여 살리려구 저렇게 죽을 고 생을 허는겔세그려.』

대흥이도 수영의 의견에 매우 동감인 모양이다.

『지식계급이 어느 시대에든지 무식하고 어리석은 민중들 을 끌고 나가고, 그들을……하는 역할(役割)까지 하는게지만 지금 조선의 지식분자 같어서야 무슨 일을 허겠나? 얼굴이 새하얀 학생 퇴물은 실제 사회에 있어서 더구나 농촌에 있 어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일세. 구름장 같이 떠 돌아서 가나 오나 거치장스럽기만 헐뿐이지.』

『허나 어디들 그런가, 관청이나 회사 같은데 고원 노릇이 라두 해서 의자를 타구앉어 월급이나 따먹을 궁리를 허지.

그러니 이런 시골 구석에서, 아이들 허구 씨름을 허구 콧물 이나 씻겨주는 우리야 말루 신세가 가련허지, 허허허.』 하 고는 여전히 쾌활한 웃음을 웃는다.

『우리의 뿌릭지를 붙잡고 북돋아 나가는게 가장 신성한 의무가 아닌가? 우선 그들의 눈을 띠워놓구야 볼일이니 까……계몽운동이란 것은 어느 때에든지 가장 필요할줄 믿 네. 더군다나 우리에겐 무엇보다도 시급헌 일일세. 정신적 토대를 지어놓구서야 볼일이 아니겠나 그 뒤라야……』

수영과 대흥은 야학당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손방울을 긁어다 피운 화덕 앞에서 손을 쪼이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어느 틈에 오봉이를 선두로 동네의 젊은 사람들과 백로지 로 맨 공책을 낀 아이들이, 가득히 모여서 두 사람을 둘러 싸고 있었다. 기침 하나 아니하고 수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 고 있었다.

이른 봄 저녁은 매우 쌀쌀하였다. 그러나 수십 명이나 되 는 아이들에게 포위를 당한 수영은 그 마음이 훗훗하리만큼 이나 더운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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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야학이 파한 뒤에 수영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 논에서는 저 혼자 세상을 만난 듯이 와글와글 끓는 개구리 소리를 베개삼고, 누워서 첫닭이 울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 였다.

흙방 속에서 벽에다가 머리를 들비비며 손톱여물을 썰면서 곰곰 생각을 해보았다. 나중에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연애가 다 뭐냐? 계숙이가 다 뭐냐?)

하고 주먹으로 기직바닥을 탁 쳤다. 그 바람에 곁에서 자 던 복영이가 눈을 번쩍 떴다가 도로 감고 돌아 누웠다.

그네들의 전체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비참한 현실과 비 교해 볼 때,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것은 극히 개인적인 조그만 일일뿐 아니라, 남몰래 돌아 앉아서 나쁜 짓이나 하 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한 몸뚱이를 바치자! 그러랴면 내 신변에 거치장스러운 물건이 없어야 한다. 물론 여자는 소용이 없다)

하였다. 총각으로 늙을 수 없는 사정이면 서울구경 한번도 해보지 못한 촌색시에게 장가를 들면 고만이다. 몸만 튼튼 해서 마주 붙잡고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여자면 족하다. 정 신적 사업은 돕지 못한다 하더라도, 호미를 잡을 줄 알고 길쌈을 할 줄 알고 때로는 발을 벗고 논에라도 들어서는 것 을 부끄럽게 알기는커녕, 오히려 시골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에는 누구나 해야만 할 천직으로 여기는 그런 여자와 결혼 을 하는 것이 저의 분수에 합당하다하였다.

그러면 차라리 자작자급의 길이나 될 수 있다. 소위 이상 이 있고 이해가 깊다는 모던 껄, 인텔리 이성을 이 벽강궁 촌에다 잡아 넣을 수 있을까? 몽당치마를 벗기고 굽높은 구 두 대신에 짚신을 신기기까지의 노력은 여간이 아닐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면 속도 무한이 썩어야겠고 애도 무진 태워 야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꿩의 새끼를 잡아다 기르면 기어 이 산으로 기어올라가듯이 애쓰고 속태운 보람이나 있을는 지가 매우 의문이요. 또한 미리 장담 못할 노릇이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즉 제 버릇이 생기고 지루 꿰진 여자 하나를 길을 들이고 조련을 시키는 시간과 노력을 다 른 일에 기울인다면 적지 않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 까? 파멸의 구덩이속에 빠져서 허덕이는 농민들을 건져내는 데 팔 하나라도 빌릴 수가 있지 않을까? 하였다.

수영은 다시 생각을 계속하였다. 병식의 편지를 머릿속에 서 되풀이해 보았다. 그러다가는 벌떡일어나며 꺼져가는 사 기등잔의 심지를 돋았다. 복영의 공책을 북 찢어가지고 뭉 뚱한 연필에 연방 침을 묻쳐 가면서 편지를 썼다.

「계숙씨!

나는 지금 일개 여자의 허영심을 깨뜨려주기 위하여 노력 할 시간이 없소이다. 조경호의 손으로 들어간 당신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기보다 더 크고 가슴벅찬 고민에 머리를 들 수 없소이다.

나는 도회와 여자와 또 그리고 과거의 모든 공상을 깨뜨리 고 이 궁벽한 농촌 구석에서 흙의 사도(使徒)가 되려고 결심 하였으니, 한번 작정한 것을 변경할 수 없는 이상 당신과의 인연도 자연히 끊어지고 말 것이외다.

어제도 오늘도 죽지 못해서 움직이는 이 고장 주민들의 생 활상태를 목도하고, 서울과는 영영 발을 끊고서 그들을 위 하여는 소나 말과 같은 수고라도 아끼지 않을 것을 스스로 맹세했소이다. 지금 와서 당신의 행동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지만 계숙씨의 장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유한으로 여기 고 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 한모퉁이에 있는 줄이 나 기억해 두시기 바랄 뿐이외다.

자, 그러면 이 편지 한 장으로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청산 해 버리기를……」

수영은 병식에게도 답장을 써서 그 속에다 계숙에게 한 편 지를 집어 넣고,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수영은 불을 훅 불어 끄고 누워버렸다. 창밖의 개구리 소 리는 한층 와글와글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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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그후 경자의 집에 꼭 갇혀있었다. 갇혔다느니보다 저 스스로 제 몸을 감금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길거리로 얼 굴을 들고 나서지 못한 사건이 계숙의 신변에 돌발되었던 것이다.

편지 조건으로 경자를 조르다가 싸움까지 해도 종시 시침 을 떼는 것이 어찌나 얄미운지 저녁이 지난 뒤에 사숙하던 집마누라를 찾아보고 확실한 것을 알리고 나섰다. 막 중문 밖으로 몰래 빠져서 나가려는데, 건넌방에서 춘자가 보던 잡지를 들고,

『아이 이것 좀 보서요.』 하고 뛰어 내려온다.

『뭐 재미있는게 났어?』

하고 계숙은 발을 멈추었다. 춘자가 들고 내려온 잡지는 그날 발행된 利戮繭遮부인 잡지였다.

『여기 사진이 났어요.』

하는 춘자의 손가락을 따라 계숙의 눈은 달렸다.

계숙은 깜짝 놀라며 구두를 벗어 던지고 방으로 들어가 급 히 전등의 스위치를 비틀었다. 잡지의 중간쯤 아랫단으로 여인동정(女人動靜)이란 꼬십란에 「최 계숙양 종적 묘연」

이란 조그만 제목이 걸리고 타원형으로 사진이 났다.

기사의 내용인 즉

「○○사건 때 앞장을 서서 감옥까지 다녀나온 후 일약 여 류투사로 이름을 드날리고, 근자에는 여류문사로 이채를 발 휘하는 최 계숙양은, 최근 모 백화점에서 그림자까지 아울 러 사라졌다. 무슨 까닭으로 그가 돌연히 종적을 감추었을 까? 최양과 절친한 어느 동무가 극비밀리에 탐지한 바에 의 하면 최양은 그 사건 때에 같이 관계했던 김모(지금은 어느 신문사의 배달부)와 연애의 실마리가 얼크러져 청량리행 전 차를 부지런히 타더니 돈없는 남자에게 싫증이 났는지, 헌 신짝 버리듯하고 어느 전문학교 교수요 부호로 유명한 조정 하(가명)의 제 이인가 제 삼 부인으로 들어 간 것이 판명이 되었다. 오 위대한 돈의 힘이여, 인제는 최양(?)의 염려한 자태를 호텔이나 극장 가족석에서나 발견될는지? 그러나 벌 써 사랑의 결정까지…… 두문불출하고 정양중이라니 최계숙 양이여, 길이 길이 행복할지어다.

라고 육호 활자로 깨알같이 박은 것이었다.

계숙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잡지의 글자마다 산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는 확 흩어지기도 하고 금방 눈속으로 달려들 기도 한다. 나중에는 기절을 해서 쓰러지려는 것처럼 방안 의 모든 것이 팽팽 내돌려서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폭 엎드 렸다.

계숙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고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웃어야 할지 방바닥을 치며 엉엉 울어야 할지 몰랐었다.

남에게 한참 쫓겨 다니던 것처럼 숨이 가빠지고 졸지에 가 슴이 답답해졌다.

『고 망할 계집애를……』

하고 부르짖으며 계숙은 잡지를 집어 갈갈이 찢어서는 바 람벽에다가 끼얹었다. 종이조각은 방안으로 가득히 흩으려 갔다.

계숙은 미쳐나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섰다. 구두를 되는대 로 신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주먹을 부르쥐고 먼저 잡지사로 달려갔다. 잡지사에는 심 부름하는 애 하나 밖에 없었다. 계숙은 그 잡지사에 불을 지르고 싶었다. 정신이가 눈 앞에 있기만 하면야 달려들어 쥐어물고 물어뜯고 하다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 았다.

계숙은 떨리는 다리를 급히 놀려 저도 모르는 겨를에 원동 에 있는 정신의 집에 당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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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사숙하고 있던 집에 없었다. 정신이가 쓰는 방에는 조그만 맹꽁이 자물쇠가 매달렸다.

(고년의 계집애가 어디로 까질러 갔을까?)

하고 나오다가 주인에게 물어보니 저녁을 먹고 나간지 얼 마 아니되었다 한다.

방문을 채우고 나가지만 않았더면 계숙은 방에가 들어 앉 아서 언제까지나 정신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어떻게든지 요 절을 내고 나왔을 것이다.

계숙은 또다시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정처없이 떼어놓 는 발길은 어둠침침한 골목으로 길거리로 헤매었다.

(김 수영이를 버리고……)

(조경호의 첩이 됐다.)

(아이를 배고 정양중이다.)

계숙은 그런 말을 속으로 뇌이기도 불쾌하였다.

불쾌할 뿐이 아니라 그런 구절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전등불이 환한 큰거리로 나서자 졸지에 전신이 움치러지는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제 몸을 밤 그늘 속에다 파묻 고 싶었다.

길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이 더구나 젊은 남녀들이

(저게 최계숙이다)

(조 경호의 첩이다)

하고 미친 여편네를 따라다니며 놀리듯이, 손가락질을 하 고 낄낄대며 웃는 것 같아서 얼굴이 빨개졌다. 길을 걷는 사람이 모두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저를 잘 알고 있고 무 심히 제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도 일부러 건드려보는 것 같았다. 상점의 전등불도, 자동차 자전거의 헤드?라이트 도 제 얼굴만을 쏘는 듯이 비치는 것 같아서, 목도리로 얼 굴을 싸며 고개를 푹 수그리고 걸었다. 천하에 얼굴을 들지 못할 죄를 지은 것 같았던 것이다.

가겟집 추녀 밑으로 바짝 붙어서 사동 골목으로 빠져나왔 다. 뽀기 전차가 뽕뽕거리며 앞으로 달려온다.

『에끼, 이런 욕을 당허구서 살어선 뭘해.』

하고 계숙은 전차로 뛰어들어서 수치와 모욕에 더럽힌 육 신을 두 토막 세 토막 내고 싶었다. 머리가 으깨어지고 동 체(胴體)를 떠난 팔과 다리가 따로 따로 떨어져서 살이 실룩 실룩 하는 것이 보였다. 검붉은 피로 물들인 철로 바닥! 저 의 무참한 시체를 겹겹이 에워 싼 군중들, 달려드는 순사와 신문기자, 그 속으로, 정신이가 뛰어들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갈갈이 찢긴 저 의 육체를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자살을 한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고 큰 기사 재료나 발견한 듯이 호기심에 빛나는 눈, 아직도 발발떠는 저의 입이 그 얼굴에다 피를 홱 뿜는 광경이 눈 앞에 보이는 듯, 계숙은 복수의 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한번 몸서리를 쳤다. 그러다 가,

(아니다. 그런 소극적 복수로는 결국 내가 지는 것이다.)

하고 곁에 사람이 알아들으리만큼 부르짖고는, (어느 누가 무슨 소리를 허든지, 잡지 아니라 신문 호외로 그런 소식을 퍼뜨렸더래도, 나 한 몸만 깨끗하면 고만이다. 내 양심에 조금도 부끄러울게 없는 바에야 왜 자꾸만 이 따 위 약한 생각을 할까)

하고는 눈 앞으로 지나가는 전차를 서너대나 유심히 바라 다 보았다.

(병식 오빠헌테나 가서 의논을 할까?)

하고 돌쳐서다가

(무슨 장한 소식이라구 남에게 하소연 하는 것버텀 비겁하다.)

하고는 안전지대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너희들이 아무리 찧고 까불어 봐라)

하고 경자의 집 편으로 발꿈치를 돌렸다. 정신에게 대한 또는 여자의 신분에 치명적 테마를 퍼뜨린 잡지에 대한 일 종의 반동심리가 움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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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경자의 집으로 다시 들어간 뒤에 계숙은 한발 자국도 대문 밖에 발을 내놓지 않았다. 잡지사로 가서 야단을 치고 취소를 낸댔자 한번 쫙 퍼진 소문을 줏어담을 수 없고, 정 신이를 쫓아다니며 분풀이를 똑똑히 한 대도 도리어 창피만 할 것 같았다. 저 한몸이 이 세상에서 죽어 없어진 셈만 치 고 이를 갈며 참았다. 입술을 악물고 더 할 수 없는 치욕과 억울한 것을 참고 생으로 성미를 죽이자니 진정으로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며칠 동안에 계숙은 두 볼이 여위고 눈두덩이 푹 꺼졌다.

열병을 앓고난 사람처럼 머리가 휭휭 내둘리고 책상머리에 가 멍하니 앉았다가도

「조경호의 첩」 「아이를 배고……」

라고 난 잡지의 활자만 눈 앞에 나타나면 그만 어찔어찔해 져서 방구석에 가 쓰러져버리곤 하였다. 밤이면 헛소리를 하고 식은 땀을 흘렸다.

경자는 아래 위로 오르내리며,

『왜 어디가 불편해 걱정 허는 일이 있어?』

하고 위로하듯 하면서 계숙의 눈치만 살금살금 보다가는 하루도 두 세 번이나 어딘지 나돌아 다니다가 들어온다.

경자가 그 잡지의 기사를 못 보았을 리가 없건만 얼부러 시침을 떼는 것을 보고는

(내 입으로 그일을 끌어 내긴 싫어.)

하고 계숙이 역시, 그 일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속으 로만 끙끙 앓았다.

실상인 즉 경호의 남매가 정신이를 끼고 한짓이라는 것까 지는 계숙이가 몰랐다. 다만 정신에게 수영이와 만나는 장 면과 극장에서 경호와 나란히 앉았던 것을 들켰기 때문에, 또는 저에게 대한 일종의 시기심으로 일부러 중상을 한것이 리라고 추측을 하였다. 정신이와는 이일 저일로 싸우기도 여러 번 해서 소리없는 총이 있으면 놓고 싶을 만큼 서로 미워하던 터이라, 일부러 골리기 위한 악선전으로만 여기고 정작 경호의 남매에게는 혐의를 씌울 줄 몰랐다. 분하고 절 통한 생각만이 옆을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들지를 못했던 것이다.

경호는 계숙을 작은 첩에다 옭아다 넣기는 했어도, 직접으 로 손을 대기는 만만치가 않았다. 제 손아귀에다 집어 넣으 면 우선 어색한 계숙의 성격부터 꺾어놀 필요를 느꼈다. 된 서리를 맞혀서 한풀 죽여논 뒤에,

『기왕 그런 소문까지 세상에 퍼진 담에야 아무려나 될 때 도 되려무나.』

하고 아주 자포자기를 해서 순순히 말을 들을 때가 올 것 을 믿고 그런 수단을 쓴 것이었다.

『열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가 어디 있단 말이냐. 네 가 아직은 가시가 선채 하지만 어디 내 손에 견디어나나 보 자.』

하고 경자를 시켜서 계숙의 일동일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 러면서도 저 자신은 일부러 작은집 에는 발그림자도 아니하 였다. 경자에게도 그일에 대해서는 아주 모르는 체 하라고 함구령을 내렸다. 동시에 경자를 시켜서,

『동경으로 가려면 입학할 날짜가 한 달도 못 남었는데.』

『어서 떠날 차비를 차려야지.』

『참 계숙이도 가방이 하나 있어야지 옷은 양복을 마출 까?』

이런 따위 소리만 이따금 들려주었다. 그래도 계숙이가 아 무 표정이 없는 것을 보고는,

『오빠가 따루 한 달에 백 원쯤은 보내주마구 그랬어.』

하고 귀에다 대고 비밀한 연통이나 하듯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계숙은 조선이 싫어졌다. 연애도 아무 것도 다 귀찮고 수영에게 대한 향념까지도 식어가는 한편이었다.

저를 개구멍받이와 같이 내버리고 돌보아주지 않는 아버 지, 조금만 움직이면 利을 채우는 환경살이 살을 먹으려는 동무, 저를 믿어주지 않는 사랑을 허락한 사람, 도무지가 싫 었다. 잇새에서 신물이 돌도록 조선의 모든 것이 지긋지긋 하게도 염증이 났다.

(훨 훨 바다밖으로 나갔으면, 어서 하루 바삐 조선 사람이 없는데로 가서 기를 펴고 지냈으면─)

하는 것이 그뒤로 계숙의 소망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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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어느날 아침 계숙이가 뜰아랫방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여기 최계숙이 있소?』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뛰어 나갔다. 그것은 우편배달이 었다.

『네, 나야요.』

하고 계숙이가 나가서 편지를 받으려는데,

『어디서 편지가 왔어?』

하고 건넌방에서 경자가 뛰어 나온다.

『아냐, 내게 온거야.』

하고 계숙은 편지를 젖가슴에다 집어 넣고 들어갔다. 경자 도 어느 대학생과 편지 내왕이 빈번한 터이라, 제가 기다리 는 편지도 있었거니와, 한편으로는 계숙에게 오는 편지를 중간에서 압수를 하려다가 이번에는 당자의 손으로 들어가 고 말았다.

『나좀 봐, 어디서 편지가 왔어?』

하고 아랫방으로 따라 들어와서 조르는 것을

『에고 망칙해라, 남의 편지는 왜 보자는거야.』

하고 종시 꺼내 보이지를 않았다.

『겉봉만 좀 보면 어때.』

하고 바득바득 달려드는 것이 얄미워서

『경자한테처럼 두군데 세군데서 연애 편지가 오지는 않을 테니 헛앨랑 쓰지 말라구.』

하고 쏘아 붙이는 바람에 경자는 삐쭉해서 올라갔다.

계숙은 편지를 꺼냈다. 뒤에 부친 사람의 주소 성명도 쓰 지 않았다. 급히 뜯어보니

『수영군이 이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이 있어 동봉하거니 와, 긴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꼭 나와달라.』

는 병식의 편지에 싸인 것은 잡기장을 찢어서 연필로 갈려 쓴 수영의 편지였다.

수영의 편지를 읽는 계숙의 손은 떨렸다. 마음이 떨렸다.

나중에는 전신이 부르르 떨린다.

(시골서도 그 잡지를 본게로구나─)

그러나 아무리 오해를 했기로,

「당신과 같이 허영에 빠진 일개 여자를 위해서 고민한 겨 를이 없느니……」

「이 편지 한 장으로 과거의 모든 관계를 청산해 버리자느 니……」

하는 것은 너무도 심하지 않는가?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 가?

(이왕 피차에 일생의 고락을 맹세까지 하고 서로 반석같이 믿어오던 터에 설사 내가 타락의 길로 빠져 들어가기로서니 그는 나를 붙들어 주고 건져줄 의무가 있지않은가? 세상에 서 나를 오해하고 죽일 년 살릴 년하고 손가락질을 하더래 도 김수영이 한 사람만은 나의 깨끗한 것을 믿어 주어야 옳 지 않을까? 누구보다도 앞을 서서 간악한 자들과 용감히 싸 워가며 변명을 해 주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하고 계숙은 너무나 수영이가 야속하였다. 그따위 얼토당 토 않은 소문을 뇌뜨려서 잡지를 팔아먹은 놈들보다도 동무 하나를 생으로 죽이려는 정신이 보다도 몇갑절이나 수영이 가 야속하였다.

계숙은 경대 앞에 엎드려 울었다.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날은 아침도 굶고 점심도 굶고 머리를 짚고 누워서

『왜 어디가 아프서요?』

하는 춘자의 말에도

『무슨 편지가 왔길래 이렇게 유난스러이 울어.』

하고 경자가 어깨를 흔드는 것도,

『왜들 이래, 귀찮어!』

하고 쏘아붙이고는 돌아누웠다.

『이 세상에서 누구를 믿으랴?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 냐?』

하고 주먹으로 바람벽을 치며 몸부림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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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또 며칠이 지났다. 하루는 밤 열시나 지나서 계 숙이가 막 불을 끄고 누우려는데 대문 중문 소리가 연거푸 삐걱하고 나더니 뜰아랫방의 덧문을 똑똑 뚜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숙은,

『누구서요?』

하고 나직이 물었다.

『나에요.』

『나가 누구서요?』

계숙이는, 목소리를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물 어보았다.

『나 조 경호에요.』

나직한 목소리다.

계숙은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왜 경자가 건넌 방에 없어요?』

하고 경자에게로 떠다 밀었다.

『좀 늦었지만 얘기할 일이 있어서……』

『그럼 올라가 보시죠.』

경호가 번연히 저를 찾아온 줄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체를 하였다.

『아니, 계숙씨허구 좀 의논할 일이 있는데요.』

하고 덧문을 잡아당겨보는 모양이다.

『그럼 내일 오시죠. 전 지금 막 잘려는데요.』

계숙은 치마까지 벗고 속옷바람으로 있었다.

『내일은 어디 좀 가게 돼서……』

경호는 우물쭈물하고 문을 열기만 기다린다.

계숙은 열어 줄까 말까하고 망서렸다. 한편으로는, 경호가 오래간만에 일부러 찾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궁금도 해서,

(설마 어떨라구.)

하고

『그럼 잠깐 기다리서요.』

하고 주섬주섬 치마 저고리를 입고 펴놓았던 이불을 걷었 다. 덧문고리를 벗기는 소리를 듣고 경호는 미닫이를 열며,

『밤이 좀 늦었는데 실례지요.』

하고 윤이 번지르르한 칠피구두의 끈을 끄른다. 밤공기가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술냄새가 계숙의 코에 풍겼다.

경호의 얼굴이 불그스름한 것을 보니 얼근히 취한 모양이 다.

계숙은 금방 열어 준 것을 후회하였지만,

(어쨌든 무슨 말인지 들어나 보자)

하고 웃목으로 방석을 내밀었서

『앉으시오.』

하였다.

경호는 외투를 벗고 양복바지를 걷어 올리고 앉으며,

『진작 한번 와서 인사를 하려다가 공연히 이일 저일에 바 빠서…… 오늘도 연회가 있는 걸 간신히 빠져나왔어요.』

그 태도는 매우 은근하다. 그러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계숙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며,

『요새 신색이 좀 못해지셨군요. 경자가 제딴에는 대접을 하느라고 허겠지만 어쨌든 객지가 돼서 대단 불편한 껄 요.』

하고 점잖이 인사를 늘어놓는다.

『천만에요.』

하고 계숙이 역지 경호의 태도를 주목하면서

(다짜고짜 무슨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두 예방선은 치구있 어야지 안에선 벌써들 자나?)

하고 경호의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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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는 담배를 꺼내 붙이며,

『경자와 올봄에 동경으로 음악공부를 가겠다구 졸라서 허 락은 했는데, 그애는 아직 철이 안났에요. 세상을 모르고 자 라나서 당초에 마음이 놓이질 않는데, 마침 계숙씨가 동행 을 해주실 의사가 계시다는 말을 듣구 안심을 했어요. 들으 니 계숙씨는 음악 뿐 아니라 문학방면에두 많은 취미를 가 지구 계시다니 그 방면으로 공부를 하시면 대단히 좋을 줄 알아요. 조선에는 누구니누구니 해두 정말 여류문사란 하나 두 없다구 해두 과언이 아니니까요. 동경 가셔서 몇해가 되 든지 학교 하나를 졸업하고 나올만한 학비쯤야 염려가 없으 니까요.』

하고 빤들빤들하게 면도를 한 제 턱을 쓰다듬는다. 계숙은,

『네 고맙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요……』

하고 경호는 담배를 끄며 계숙의 앞으로 다가앉는다.

한참 경호는 뜸을 들인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떠나는 준비라든지 학비는 과히 군색치 않게 경자와 똑 같이 대어 드리겠지만 떠나기 전에 다른 준비가 있어야겠는 데요.』

하고 계숙의 얼굴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그날밤 계숙의 얼굴은 한층 더 어여뻐보였던 것이다. 머리도 빗지 않고 자리옷을 입고 앉은 거라든지, 평시보다 두볼이 여윈 데다가 펫병 초기에 있는 사람처럼 뺨이 발그스름하게 달아 서 연분홍 화색이 돌았다.

술이 알맞게 취한 경호의 눈에는 당장에 달려들어 얼굴을 맞비비고 싶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계숙은 떠나는 준비 외에 또 다른 준비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막연하게 추측되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이 제까지 경호가 저에게 장편소설같은 연애편지를 몇번이나 한 것을 답장도 않고 지냈으니까, 필경 이 기회에 회답을 해달라는 것이나 아닐까 하였다.

저와 약혼이라도 하지 않고는 경호로서도 적지 않을 학비 를 대어 줄 수가 없다는 것이나 아닐까 하였다. (으레 그런 수작을 할 줄 알았다.) 하고도 계숙을 짐짓,

『준비가 또 무슨 준비야요?』

하고 고개를 갸웃이 비꼬며 물었다. 그러나 경호의 대답은 추측하는 것과는 달랐다.

『우선 어학 준비를 해야지요. 음악이든 문학이든 간에 전 문학교에 입학을 하려면 어느 정도까지 영어를 알아야 허는 데 여학교에서 배운 것쯤으로는 입학시험을 치를 생각도 못 헐게 아니에요? 정과로 들어가려면……』

계숙은 어학을 준비해야겠다는 말에 우선 안심이 되었다.

『학교서 배운게 오죽해요. 단자 몇 개 알던 것도 다 잊어 버렸어요.』

하니까,

『다른건 몰라도 영어야 본바닥에서 여러해 전문으로 배웠 고, 그네들과 생활을 같이 해 왔으니까 계숙씨를 가르쳐 드 릴만이야 허겠지요.』

하고 경호는 자랑스러운 웃음을 지어 웃는다.

『그럼요. 인제 논문만 제출허시면 박사가 되실껄요.』

하고 속으로는 놀리면서도 생긋 웃어 보였다. 경호는

『그야 연구를 더 해야겠지만 학교일에 매달려서……』

하다가 계숙의 앞으로 더 바싹 다가 앉으며

『그러니 낼버텀이라두 하루 한시간씩만 배우시지요. 틈이 없으면 밤에라두 빠지지 않구 올테니까요.』

하고 다시 순은 담뱃갑에서 해태를 꺼내어 피어문다. 계숙 은 그만 소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동경이 아니라 끝없는 시베리아 눈벌판으로라도 훨훨 떠나 보고 싶은 생각으로 충만한 판이라, 다만 몇 달이라도 영어 에 대한 의수 눈이라도 떠야할 필요도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틈이 계시겠어요? 너무나 미안해서……그럼 경자 두 같이 배워야겠지요.』

하고 뒤를 다졌다. 저 혼자 쓰는 방에 경호가 밤늦게 드나 들 것이 싫기도 하려니와 미상불 위험도 하였다. 언제든지 경자나 춘자와 같이 앉아 있다면 날마다 접촉을 한 대도 상 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경호는 고개를 비꼬고 생 각을 해보더니,

『그야 경자도 배워야겠지만 그애는 서양사람의 학교를 다 녀서 아마 입학시험을 치를 정도는 넉넉할껄요.』

하고 또 얼굴을 문지르며 무슨 생각을 한다.

그러자 건넌방의 덧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건넌방의 덧 문까지 닫고보면 아랫방은 아주 절벽이 된다. 무슨 짓을 해 도 모를 것이다. 경호의 눈초리가 점점 거슴츠레해가지고 어름어름하는 것을 흘낏 흘겨볼 때, 계숙은 가슴이 뒤설레 었다. 방안은 폭풍우 전의 정적과 같이 고요하다. 경호의 가 쁘게 쉬는 숨소리까지 계숙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편집]

그 자리를 무사하게 모면하려면 비상수단을 써야겠다고 계 숙은 생각하였다.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끄집어 내서 질질 끌다가는 꼬리를 밟히기가 쉬운데,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앉았기도 거북한 노릇이었다.

(내가 경호의 앞에서 너무 방심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후회를 하면서도

(어딜 네가 내 몸에다 손가락 하나라도 대개 하나 봐라.)

하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나니까 남자 하나가 달려드는 것쯤은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다.

경호는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짚고 앉은 계숙을 보고

『그런데 뭘 그렇게 생각허세요?』

하고 더욱 은근히 묻는다. 말 한마디를 할 적마다 한걸음 씩 조금조금 다가앉으면서……

계숙은 머리를 짚은채,

『며칠째 머리가 아퍼서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요.』

하였다. 그것은 슬그머니 경호더러 그만 일어서 달라는 말 이었다. 경호는 납작한 백금 시계를 꺼내보며

『아직 열 한 신데 난 지금이 초저녁인걸요. 그런데 아마 감기가 드신게로군요. 방이 차지나 않아요?』

하고 번연히 방바닥이 더운 줄 알면서도 바로 계숙이가 도 사리고 앉은 요밑에다가 손을 넣어본다.

계숙은 벌레나 다가오는 듯이 닁큼 뒤로 물러 앉았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하고 경호는 비웃는 한 의미깊은 웃음을 띄우며, 능금처럼 빨개진 계숙의 얼굴을 집어나 삼킬 듯이 들여다본다. 계숙 은 각일각으로 닥쳐오는 남자의 압력을 전신에 느꼈다. 경 호가 처음에 올때에는 영어를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출입을 하다가, 차차 좋은 기회를 붙잡기만 하면 그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막상 무르익은 과실의 냄새를 맡고 보니, 전 후의 계획이 머릿속에서 뒤바뀌어 갑자기 깨끗하지 못한 욕 심으로 전신의 피가 끓어올랐던 것이다. 경호는 벌써 그 욕 망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이런 좋은 기회에……)

하고 마지막 간섭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눈치를 못챌 계 숙이도 아니었다.

『초저녁이 뭐야요? 온 안에선 벌써들 자나?』

하고 벌떡 일어섰다. 소매로 경호의 어깨를 스치고 일어서 나가려니까,

『좀 앉으세요, 더 긴급히 얘기헐 것이 있으니……』

하고 경호는, 계숙의 손을 잡으려고 몸을 뒤치는 것을 계 숙이는 그 손을 약삭빨리 뿌리치고 미닫이를 열고 나서며 안으로 들이대고,

『경자 벌써 자?』

하고 새되게 소리를 질렀다. 그 통에 계숙의 손을 잡아당 기려던 경호의 손은 허공에다 헛손질을 하였다. 경호는 무 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조용허세요! 안방에서 깨면……』

하고 명령을 하듯 하고 따라일어서며 붙들어 들이려는데 계숙은 벌써 마당으로 내려섰다.

『춘자 자? 큰집 오빠가 오셨어!』

하고 이번에는 일부러 안방으로 대고 외치듯 하였다. 건넌 방에서는 여전히 쥐죽은 듯이 있는데, 방의 김창을 드윽 여 는 소리가 나더니

『뭐야? 누가 왔어? 왜 잠도 못자게들 떠들어?』

하고 경자의 어머니가 마주 소리를 지른다. 가뜩이나 잠이 없는 터에 막 첫잠이 어렴풋이 들었다가 발악하는 듯 한 계 숙의 목소리에 놀라 깨었던 것이다. 그제야 건넌방에서

『왜 그저 잠을 안자구 야단야?』

하고 경자의 꾸짖는 듯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오셨는데 모르구서 잠들만 자니까 그렇지, 일어 나라는 게 잘못이야?』

하고 맞서며 계숙은 건넌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전등블 켜고보니 경자는 자기는커녕, 옷도 아니 벗고 뜰아 랫방으로 향한 벽에 가 붙어 앉아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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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는 잠시 어쩔 줄을 몰랐다. 집안이 온통 깨어서 행랑 방에서까지 아범의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호는 급히 외투를 주워입고 뜰아래로 내려섰다. 시숙모에게는 지금 막 들어온 것처럼 꾸미려고 일부러 구두소리를 내면서 댓돌 위 로 올라서며,

『아 공부허는 애들이 무슨 잠을 벌써 자느냐?』

허고 점잖을 빼었다.

『밤이 늦었는데 웬일이요?』

하고 안방에서는 내다보지도 않고 묻는다.

『아 근처까지 왔던 길에 들렀는데 도적이나 든 것처럼들 떠드는구료……』

하고 너그러운 웃음을 웃는다. 경호는 계숙이가 안으로 뛰 어들어가듯 하며 외티는 통에 제 정신이 번쩍 들자,

(공연히 선불을 맞혔구나. 이래선 안되겠다)

하고 속으로 다음 날을 단단히 벼르면서 태연한 태도를 지 었던 것이다. 경자는 대청으로 나오면서

『들어오시죠. 어딜갔다 늦으셨어요?』

하고 딴전을 붙인다.

『가 자겠다. 참 그런데 내일부터 하루 한시간씩 영어를 가르치려 올테니, 준비허구 기다려라. 둘이 함께 배워두 좋 구……』

하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경 자는,

『네에.』

하고 오라비의 뒤를 따라나가서 무어라고 숙덕거리다간 대 문의 빗장을 걸고 들어왔다.

그동안에 계숙은 뜰아랫방으로 내려가서 뒷문고리를 꼭꼭 걸고 불을 끄고 누워버렸다. 건넌방에 앉았다가는 경자의 이러쿵저러쿵 말을 주고 받을 것이 귀찮았던 것이다. 경자 도 모른 체허고 제 방으로 올라가더니 감감해졌다.

계숙은 자리를 펴고 누워서도 그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 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남자란 다 그럴까? 하마터면……)

하니까 외나무다리를 건너온 것처럼 조마조마하였다. 그러 면서도 한편으로는,

(흥 네까짓것한테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줄 아느냐.)

하고 경호가 나간 대문편으로 대고 입을 삐죽해보였다.

경호 남매의 뱃속이야 유리쪽을 대고 들여다보는 것 같지 만 그렇다고 지금와서 정면으로 반항을 해서 경호의 감정을 악화시키는 것은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을 수 없 다.」는 말도 되풀이해 보았다.

(동경으로 떠날 때까지 아직도 한달이나 남았는데 그동안 에 어떡해야 경호의 손에 잡히지를 않을까?)

하니 도무지 좋은 꾀가 나지를 않았다. 경호가 달려드는 것쯤이야 당장당장에 임시처분으로 모면을 한다손치더라도, 아무 약속도 없이 그저 유학을 보내주고 학비를 대어 줄리 는 만무할 것은 환하지 않은가? 적어도 약혼까지는 허락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닐까?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본처와 깨 끗이 이혼하고 난 뒤에야 정식으로 결혼을 하자는 핑계로 강경히 버티어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다가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 한복판을 칵 찔리는 것 같아서 몸서리를 쳤다.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수영의 환영이 나타났던 것이다.

(타락한 여자 하나를 위하여 고민할 겨를이 없다는 사람을 생각해 뭘 해. 그 내국놈처럼 무뚝뚝한 남자를─시골서 촌 색시헌테 장가를 들테지.)

하고 수영의 생각을 할수록 여간 불쾌하지가 않았다.

(시골구석에서 썩거나 말거나 내가 알게 뭐야. 꿈 한바탕 꾼 셈만 치면 고만이지.)

하고 수영이가 눈앞에 와서 앉았기나 한 듯이 아랫목 편으 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도, (그렇지만 끝까지 내가 깨끗했다는 증거는 보이구 말걸. 오 해를 풀고 내 앞에서 무릎을 꿇구서, 애걸복걸을 허는 꼴을 보구야 말걸. 그럴수록 어떻게든지 해서 동경가서 학교 하 나는 마치고 나와야 해.)

하고 다시 한번 이불 속에서 활개를 쳤다.

十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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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 날 안방에서 밥상을 받으며 계숙은,

『아이 머리가 아퍼서 못먹겠어.』

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주인마나님은 계숙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더니,

『왜 방이 차든감? 남의 집에 있으면 자연 고생이 되지.

요새로 얼굴이 좀 못됐구먼.』

하고 동정을 한다. 사실 계숙은 감기가 들어서 코맨소리를 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리라) 하고 계숙은

『방이 혼자 쓰기는 너무 넓어서 밤이면 무서워요.』

하였다.

『암 그렇지, 횡덩그러니 비인 방에 젊은 여자가 혼자 자 니 휘젓두 할테지. 겨우내 비어두어서 외풍두 셀걸.』

한다. 그러자 계숙이와 겸상을 해먹던 경자가 어머니의 말 끝을 채뜨려가지고

『뭘 지내나면 괜찮을걸요. 오늘 저녁엔 화로나 하나 들여 놀까?』 하고 계숙을 본다.

『난 숯내를 못맡어.』

하고 계숙이가 외면을 하고 대답을 하니까,

『그럼 기왕 춘자 공부를 시켜 주려고 들어온 터이니 오늘 저녁부터 춘자하고 식모를 내려보낼테니 같이들 자게하려무 나.』

하고 마나님의 명령이 내렸다. 경자는 어머니의 명령에 여 간 불복이 아니지만 빠득빠득 우길 이유가 없어서,

『조용하게 공부를 하려면 일부러 딴방을 쓰는데, 구중중 허게시리 식모까지 내려보낼게 뭐야요.』

하고 뾰로퉁해서 앉았다. 춘자는 이른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기 때문에 어머니의 명령을 직접 듣지는 못하였어도, 어 머니 곁보다는 계숙이 하고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

계숙은 우선 안심이 되었다. 춘자와 더구나 식모까지 뜰아 랫방에 내려와서 같이 자기만 하면 경호가 어느때 오든지, 지난 밤과 같은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이 든든하였다.

그래서 그날 저녁부터 춘자와 식모를 데리고 잤다. 그러나 예방선을 쳐놓던 날은 성호가 오지를 않았다. 경자가 영어 책과 노트를 사가지고 들어와서 기다렸건만 어쩐 일인지 밤 열 한 시가 지나도 영어선생은 오지 않았다.

계숙은 경호가 오지 않는 것이 도리어 궁금해서,

『오빠가 어째서 안오셔?』

하고 경자더러 물어도 보았다. 그날 밤은 춘자의 숙제를 풀어주고 작문 지은 것을 보아 주다가 잠이 들었다. 식모는 종일 잔걸음질을 치다가 곤해서 웃목에서 쓰러지더니 초저 녁부터 코를 골았다.

실상인즉 경호는 그날 밤 계숙에게 대해서 채우지 못한 욕 망을 다른 데로 가서 채웠다. 자는 친구를 두드리 깨워가지 고 본정으로 가서 카페로 요릿집으로 밤을 새우며 돌아다녔 다. 교육가나 교회에 관계하는 신사들은 소문이 사나울까보 아 조선요리집이나 카페는 가지 않고 오늑한 남산밑 일본요 릿 집으로 다니는 것이었다.

경호는 그날 밤 술이 몹시 취해서 친구의 어깨로 달장을 삼고 헤매이다니다가, 일본 기생을 싣고 자동차를 몰아 백 운산장(白雲山莊)으로 나갔다. 나가서는 병정을 설 친구와 화풀이를 실컷하다가 계집 하나씩을 차지하고 하룻밤을 밝 혔다. 물론 그 이튿날은 학교를 쉬었다. 아침 열 시도 넘어 서 집으로 돌아가 반나절이나 이불을 뒤집어 쓰고 주색에 지친 몸을 쉬었다.

그 이튿 날 저녁때에 경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이 작 은 집으로 갔다.

『어저께는 몸이 좀 불편해서 학교에두 못갔는걸……』

하고 이번에는 건넌방으로 올라갔다. 남매가 무슨 이야긴 지 한참 수근거리다가 경자는,

『계숙이.』

하고 뜰아랫방으로 대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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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경자의 방으로 올라가서 그날부터 경호에게 영어를 배웠다. 경호는 전날의 모든 일은 아주 기억에도 없는 듯이 점잔을 빼고 앉아서, 될 수 있는 대로 계숙의 얼굴도 쳐다 보지 않았다.

계숙이와 경자를 나란히 앉혀놓고 두 시간 동안이나 새로 난 교과서의 단자를 새겨주고

『이건 영국식 발음이요. 저건 미국식 발음이라.』고 일일 이 형용까지 해보이며 소상분명한 저의교수법을 자랑하였 다.

『그만 정도면 넉넉허군요. 단자두 꽤 많이 아시는데요.』

하고 칭찬도 하였다.

계숙이 역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태도로 경호가 시키는 대로 발음을 해보고 쎈텐스를 읽어도 보았다. 그러노라니 아무 근심걱정이 없이 지내던 학창시대가 그리워졌다. 순진 한 일본식 발음을 하는 영어교사를 놀려먹던 생각도 났다.

그러나 한번 지나간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 하 니 벌써 인생의 길을 반이상을 걸은 것 같은 느낌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경호는 흘금흘금 계숙의 눈치를 보면서

(암만 해두 녹록치가 않어)

하고 마음속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보통여자 같으면 그런 일이 있은 뒤라, 제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할 것 같은데 천 연스럽게 앉아서 그런 사색도 아니하는 계숙을 눈앞에 앉혀 놓고 보니, 행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나 춘자 와 식모까지 아랫방으로 끌고 내려가서 제게 대할 예방선을 딱 서는 것에 이르러서는,

(여간 섣불리 손을 대었다가는 큰코 다치겠는걸)

하고 감탄치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계숙이도,

(흥, 네가 아주 시침이를 딱 갈기는구구나. 네 속쯤이야 내 가 모를 줄 알구……)

하고 서로 일부러 피하는 시선이, 의미깊게 몇번이나 마주 쳤다.

경자는 그만 정도의 영어는 같이 배울 것도 없다는 듯이,

『아이 골치 아퍼, 오늘은 그만둡시다.』

하고 책을 덮는다. 그리고는 오라비의 눈치를 할끔 본 뒤 에,

『참 오빠, 나 온천에 가서 며칠 있다 오게 해주서요. 요샌 왜 그런지 몸이 찌뿌드드하고 아주 기분이 나쁜데 탕이나 실컷 허구 오게요. 네 오빠.』

하고 간사스럽게 조른다.

『온 별소리를 다 허는구나. 커다란 계집애가 혼자 온천같 은 데를 가?』

『왜 첨인가요? 작년엔 어머니 때문에 목욕을 실컷 못하고 올라오지 않었어요?』

『그럼 계숙이허구 같이 갈테야요. 계숙이도 요새 괜이 우 울하게 지내는 것 같으니……』 하고

『계숙이 어때? 우리 며칠 시원하게 바람이나 쏘이고 오면 좋지 않어?』

하고 계숙의 눈치를 본다. 경호 역시 계숙의 대답만 기다 리고 있다.

『글쎄……』

하고 계숙은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다. 경자가 살그머니 저 를 꼬여가지고 진천이고 온양이고 간에 온천으로 가자는 까 닭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특별한 볼 일도 없는데 오래비 에게 그러한 청을 할까? 암만해도 무슨 까닭이 붙은 것만 같았다.

『계숙씨허고 동행이 된다면야 안심이 되지만 너 혼자는 못간다.』

하고 경호는 슬그머니 조건을 붙여서 허락을 한다.

『응 같이 가아.』

경자는 손가락으로 계숙의 넓적다리를 꼭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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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싫어!』

계숙은 고개를 흔들며 야무지게 반대를 하였다. 경호 남매 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싫긴 왜 싫어? 한 이틀 다녀오면 좀 좋아? 일본 여관에 들면 여간 편리하지가 않은데.』

『가서 묵을 데가 만만치 않어서 싫다는게 안야. 내달에 떠난다면 하루도 놀지 말고 준비를 해야 헐텐데 그런데까지 놀러다닐 겨를이 있어?』

하고 정면으로 반대를 하였다.

경호는 잠자코 앉아서 담배연기만 풍기는데

『모처럼 여행하는 기분도 맛볼 겸 서울을 떠나보자는데 그렇게 머리를 내 저을게 뭐야?』

하고 또 뾰로통해진다.

『얼마 아니면 천리 만리나 훨훨 떠나갈텐데 잠깐만 참지, 뭐 그리 급해.』

계숙의 어조는 매우 날카로웠다. 경자가 저를 온천으로 끌 고 가려고 꼬이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역시 경호가 꾸며낸 연극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기 때 문이다.

쥐죽은 듯이 고요한 이른 봄의 온천, 욕탕 속에서 끓어올 라 찰찰 넘쳐 흐르는 물속에 연어와같이 움직이는 발가벗은 여자와 남자들, 그러고 나른한 피곤에 늘어지는 사지를 풀 솜 같은 까운으로 누르고 여관으로 들어가 깨끗하고 푹신푹 신한 일본 이불 위에 누워서 기지개를 켜는 저 자신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러자 경호가 술이 거나해가지고 장지를 살그머니 열고 들어선다. 그러고 그 뒤에는……

계숙은 환상을 깨뜨리자, 눈앞에 앉아서 제 대답을 기다리 고 있는 경호가 얼굴을 보니 전신에 소름이 쭉 끼쳤다.

이번에 경자를 따라 가고만 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몸을 빼 쳐낼 도리가 없을 뿐 아니라, 처녀로서 아주 마지막 가는 길을 밟게 되는 것이 확실하였던 것이다.

경자는 그 이상 빠득빠득 가지고 우기다가는 계숙에게 핀 잔을 맞을까보아 오라비에 눈치만 본다.

『그럼 의논을 해서 허렴, 아닌게 아니라 동경 갈 준비두 급허니까……』 하고 경호는 일어섰다.

(세상에 말을 고분고분히 들어먹어야지)

하고 나가다가

(네가 얼마나 버티나 두구 보자)

하고 경호는 다음 기회를 벼르고 돌아갔다. 경자는 또 오 라비의 뒤를 따라 나가서 한참만에야 들어왔다.

그런지 사흘이 지났다. 그날은 아침부터 집안이 수선 수선 하였다. 그날이 경호의 아버지 조판지의 진갑날이라고, 작은 집 식구는 모두 큰집으로 들끓어 갔다.

주인마나님은

『오늘 집이 빌테니 아무데두 나가지 말고 집을 보아줬으 면.』

하고 긴히 계숙에게 부탁을 하고는 인력거를 타고 큰집으 로 갔다.

경자도 아침은 큰집에 가서 먹어야 한다고 동자치 행랑어 멈까지 데리고 가면서,

『계숙이 아침은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 보낼게.』

하고 이른다. 으례 계숙이도 다리고 갈 일이지만 경호가 제 아내와 계숙이가 대면할 것을 딱 질색을 하는 까닭에,

『계숙이는 집을 보게 허구 어머니허구 너희들만 오너 라.』

하고 단단히 일러 두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계숙은 혼자서 집을 보게 되었다. 열 한 시 나 되어서 동자치가 계숙의 아침을 이고 왔다가

『시골 손님도 많이 올러오셔서 마님은 아마 저녁때나 오 실껄요. 혼자서 오붓하게 잡수시구 집이나 잘 보서요.』

하고 도로 큰집으로 갔다.

계숙은 어쩐지 신변이 허전해서 대문 중문을 닫아 걸고 들 어왔다. 긴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꼭 와달라고 한 병식에 게 「당분간 아무데도 나가지 않을 결심을 했다」는 편지 답장을 썼다.

저녁때나 되어서 대문 흔드는 소리가 났다.

(춘자가 하학을 했으면 바로 큰집으로 갔을텐데……) 하고

『누구요?』 하면서 계숙은 문간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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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흔드는 소리는 또한번 났었다.

(이집 식구들은 저녁까지 먹고 오는 모양인데……)

하고 계숙은 중문간에서 망서렸다. 병식이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찾아왔을 리도 없고. 더구나 수영이가 올라올 리는 없을상 싶은데 이번에는 구둣발길로 대문을 걷어차는 소리 가 요란히 났다.

『누구요?』

계숙을 문짝 하나를 격해서 나직이 물었다.

『나예요.』

그것은 경호의 목소리였다. 계숙의 가슴이 달랑하였다. 어 쩐지 문을 열어 주고 싶지가 않지만 옆방의 주인이 와서 열 라는데, 아니 열어 줄 수는 없어서

『웬일이서요?』 하고 빗장을 벗겼다.

우선 계숙의 코에 훅 띈 것은 술냄새였다. 눈에 먼저 띄운 것은 조선옷을 입고 목도리를 잘 댄 임바네스를 걸친 경호 의 빨개진 얼굴이다.

『혼자 집을 보시게 돼서 미안하군요. 엊저녁에는 내 손들 을 대접허게 돼서……잠깐 가르쳐 드리구 가려구 왔는데 세 상 문을 열어 줘야지요.』

하고 뒷손길을 해서 대문고리를 걸고 들어선다.

『퍽 분주허실텐데 오늘은 고만 두시죠.』

계숙은 경호를 따려고 들었다.

『그래두 한번 시작한 걸 하루래두 걸드면 쓰나요.』

하고 경호는 건너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술이 얼큰한 지 경을 지나서 혀끝이 마음대로 돌지 않을 만큼이나 취했다.

모자와 임바네스를 벗어서 앞목에다 던지고 앉아서 계숙을 쳐다보는 눈자위가 거슴츠레헌 것이 심상한 표정이 아니다.

경호는,

『앉으시지요.』 하고 턱으로 제 곁에 방석을 가리킨다.

『약주가 취하셨군요.』

하고 계숙은 책장을 격해서 멀찌감치 앉았다.

『내 손님대접허느라구 억지루 몇잔 먹은 게 바짝 오르는 걸요.』 하고는 다가앉으며,

『오늘은 영어두 배려니와 우리의 숙제버텀 풉시다.』

하고 대어드는 폼이 단장에 무슨 풍파가 일듯하였다.

『숙제가 무슨 숙제야요? 하루 한과씩 배우면 고만이죠.』

하고 계숙은 쌀쌀스럽게 딴청을 붙였다. 일부러라도 멥쌀 스럽게 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계숙씨는 공연히 알면서두 딴청을 붙이시는군요. 요 벌 써 여러 달을 두고 내려오는 우리들의 숙제를 풀어보잔 말 이지요. 그만허면 아시겠지요?』

하고는 해여 길게 흡연을 하며,

『계숙씨가 내 성의는 짐작해 주실 줄 아는데……하여간 나로서는 동경으로 떠나시기 전에 계숙씨의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것두 무리는 아니겠지요.』

하고 그는 죄지은 사람의 자백이나 받으려는 듯한 태도다.

계숙은,

(네가 인젠 단도직입적으로 달려드는구나.)

하면서도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어뜨 리고 외면을 하고 앉아서,

(이럴 때 누가 오기만 했으면.)

하고 대문 편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넓다란 방안은 뒤죽은 듯이 고요할 뿐, 씨근거리는 경호의 숨소리만 점점 높아갔다.

『모처럼 오늘같이 조용헌 기회를 탔으니까, 좌우간 확실 한 대답을 들어야겠는데요.』

경호는 바짝바짝 다가앉으며 대답을 재촉한다. 이 자리에 서 무어라든지 딱 부질러서 말을 하지 않으면 경호의 추궁 을 모면할 도리가 없을줄 알면서도 계숙은, 저고리 고름만 자근자근 깨물었다. 생각다 못해서,

『더 똑똑히 말씀하서요. 전 물으시는 말씀을 잘 알어듣지 못하겠는데요.』

하고 다시 한번 딴전을 붙였다. 그럭저럭 시간만 끌어 보 자는 수단이다. 그러나 계숙에게는 두 번씩 모면할 수 없는 위험한 기회가 닥쳐온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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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똑똑하게 말을 허라구요?』

경호는 계숙의 말을 받아서 뇌다가

『그럼 아주 똑똑히 들으세요.』 하고 다지더니,

『난 계숙씨를 사랑해요. 계숙씨가 마음만 허락해 주신다 면 난 무슨 일이든지 헐 결심이예요. 이혼이라두 허라면 헐 테구 동경 아니라 서양 유학이라두 시켜드릴테니 예쓰나 노 나 간에 이 자리에서 확실한 대답만 해주세요.』

하고는 할난 두루마기를 입은 팔을 뻗어 계숙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에그머니 망칙해라! 이게 무슨 짓이야요?』

계숙은 발악하듯 하면서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안경 속에 서 상기가 된 경호의 눈은 독사와 같이 매서웠다.

『허허허, 내 손이 닿는 게 그렇게 싫어요? 대단히 실례를 했군요. 자 그럼 멀찌감치 앉어서 대답이나 들읍시다.』

하고 슬쩍 농친다. 사실 더러운 것이나 묻은 듯이 경호에 게 잡혔던 손등을 치맛자락에 문지르며 얼굴이 홍당무가 되 어서 반 간통이나 물러 앉았다.

(손가락 하나라도 내몸에 대게 허나봐라)

이런 생각을 하자, 분을 못이겨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경 호가 단단히 벼르고 온 줄을 모르고 문을 열어 준 것을 후 회하였다.

경호는 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 듯,

『에이 더워!』

하더니 두루마기를 훌떡 벗어던진다. 옥색 모본단 마고자 에 달린 커다란 밀화단추가 번득였다.

『자 그러지 말구 순순히 대답을 허시지요. 내 성미가 조 급헌건 용서허시구요.』

하고 다시 한번 늦춘다. 계숙은 경호의 허는 짓이 사람을 매어달아놓고 포승줄을 옭아당겼다 늦추었다 하는 것만큼이 나 미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지지않은 경호의 돈을 무 조건으로 쓴 것과, 잡지 일로 조선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된 바에, 경호의 성미를 멋들여서 다된 일을 제 손 으로 훼방을 놓으면 동경유학도 한바탕 꿈이 되고 말 것을 생각치 않을 수 없었다. 몹시 불쾌한 것과 참기 어려운 모 욕을, (한번만 더 참아보자) 하고 감정을 죽이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졸지에 그런 중대한 대답을 어떻게 허 란 말씀이야요?』

하고 일부러 말씨를 부드럽게 대답을 하였다. 경호는,

(허는 수 없이 인제 수그러드는구나)

하고 미소를 띄우며,

『이런 조용한 기회를 정말 얻을 수가 있어야지요. 졸지에 라니 난 계숙씨의 대답을 한 십년이나 기다린 것 같은데 요.』

경호의 흥분된 눈은 차마 밖으로 뻗은 계숙의 희멀쑥한 종 아리로부터 상큼하게 패인 하얀 목덜미까지 더듬어 올라갔 다.

계숙은 경호의 시선이 몸에 닿는 것조차 징그러운 듯이 다 리를 오그리고 치마끝을 잡아당기면서,

『더군다나 오늘은 약주가 취허지 않으셨어요? 다음날 더 생각해 보고 마지메(진실한) 헌 대답을 해드릴게 오늘은 고 만 가셔서 손님 대접이나 하서요. 하인들이라두 보면 모양 이 사납지 않아요?』

하고 타이르듯 하며 살금살금 꽁무니를 빼려고 한다. 그러 나 그 눈치를 채지 못할 경호도 아니다.

『술을 먹었다구요? 나란 원체 수줍은 사람이 돼서 일부러 술기운을 빌어가지구 왔는걸요. 계숙씨의 사랑을 받고 못받 는게 내게는 우리 아버지 진갑은 커냥, 죽고사는 문제가 달 린 게니까요.』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더니,

『난 진심으로 계숙씨를 사랑해요. 내 재산보다도 명예보 다도, 아아 내 생명보다도……』

하고 부르짖으며 계숙의 무릎에 가푹 엎드리다가 계숙이가 냉큼 물러앉는 바람에 경호는 방바닥과 이마받이를 할 뻔하 였다. 그 꼴도 우습거니와 「재산보다도 명예보다도 아아 생명보다도」 하고 외치는 것이 꼭 신파배우의 어설픈 독백 (獨白) 같아서 계숙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꼭 깨물었 다.

그러나 경호는 일부러 이러한 연극을 하면서도 미꾸라지 모양으로 제 손 사이에서 매끈매끈 빠져만 나가는 계숙을, 이러한 미지근한 수단으로 다루어서는 도저히 목적을 달하 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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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오늘 그냥 갈 줄 아시오? 이리 핑계 저리 핑 계를 해서 질질 끌어만 가려는 당신의 속을 모르는 줄 알 고……』

경호는 협박하듯 한다.

계숙이도 다시 흥분이 되었다. 경호가 제 속을 빤히 들여 다보고 달려드는 데는 마음에 없는 애교를 부리는 짓쯤으로 는 도저히 이 자리를 모면할 수 없을 것을 깨닫자, 그 순간 에 마음이 홱 변했다.

(내가 너무나 비겁했다. 내 태도가 분명치 못하기 때문에 너한테 위협까지 당하는 게 아니냐.)

하고 스스로 책망을 하고,

(될대로 되려무나! 너 돈이 아니면 가구 싶은 데를 못 갈 줄 아니? 이다지 구구하게 동경 유학을 해설 뭘 해)

하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으니 겁날 것이 없었다.

경호는 어깨로 숨을 쉬며,

『사람 대접을 해서래도 좌우간 대답을 헐게 아니요?』

샐쭉한 눈초리로 계숙의 얼굴을 사뭇 대패질을 한다. 계숙 은 또 한참이나 손톱 여물을 썬 뒤에 경호의 앞으로 다가앉 으며,

『정 갑갑하시다면 말씀하죠. 경호씨가 나를 사랑하고 안 하는 건 경호씨의 자유지요. 그외 마찬가지로 내가 경호씨 를 사랑허든지 미워허든지 간에, 그것도 내 자유가 아니겠 어요? 사람의 맘이란 강제로 못허는 게니까요.』

하고는 경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경자로 다리를 놔서 경호씨의 신세를 많이 진 것은 고맙 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물질로 여자 하나를 낚으려는 건, 서 양까지 다녀오신 전문학교 교수로는 너무나 비겁한 생각인 데요. 얼마 전까지는 돈만 가지면 여자의 정조를 살 수가 있었지만 그런 어수룩한 시대는 벌써 지나간 것 같은데요.

적어도 최 계숙이 하나만은 그렇게 쉽사리 돈 있는 사람의 꼬임에 빠지진 않을 줄 아시오.』

하고 말끝을 아물린다. 경호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계숙의 얼굴만 쳐다본다.

『간단허게 말씀하면 경호씨나 나나, 둘이 다 사랑을 허느 니 해달라느니 할 자격이 없어요. 경호씨헌텐 남 달리 무던 헌 아내가 눈을 뜨고 있고요. 난 나대로 사랑을 허락한 사 람이 있으니까 두말헐게 없지 않어요?』

허고 똑 잘라버린다.

경호는 다른 말은 일부러 귀밖으로 흘리고도,

『그래 누구헌테 사랑을 허락했단 말요?』

하고 톡 쏘니까,

『흥 내가 모르는 줄 알구. 김 수영인가 수경인가 하는 어 리배기 말이지? 그건 내 집 마름의 자식……』 하는데

『뭐요?』

하고 계숙은 경호의 말의 토막을 쳤다. 수영이를 어리배기 니 시골뜨기니 하는 것보다도 「내집 마름의 자식」 이라는 데 고만 오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뭐 어째요? 당신네 집 마름의 자식이니 어떻단 말씀아 요? 부잣집 마름의 자식허구 함경도 물장수의 딸허구 열애 를 헌다는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야요?』

계숙은 극도의 히스테리가 걸린 여자처럼 말과 태도가 차 고도 날카로웠다.

경호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아침부터 마신 술이 일시에 깨 었다. 그만 얼굴이 핼쓱해졌다.

『뭐 어쩌구 어째? 남의 신세를 모르고 고따위 공없는 수 작을 뒤게다 허는거야?』

하고 무릎을 탁 치며 사뭇 호령을 한다.

언제부터는 서로 반말지꺼리다. 열애 장면이 아니라 싸움 판이 벌어졌다.

『뭐 공없는 소리? 입때까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등 골을 뽑아 먹었으니깐 난 있는 놈의 걸 좀 이용해 보려고 들었어요! 내가 어리석어서 이번엔 실패를 했지만……』

그러자 경호는

『뭐야?』

『날 누군 줄 알구 그렇게 함부루 입을 놀리는거야?』

하고 계숙의 앞으로 왈칵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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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이게 무슨 점잖지 못헌 짓이야요?』

하고 발딱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경호에게 붙잡혔 다. 그통에 저고리 고름이 몽땅 떨어졌다.

『놔요!』

하고 계숙이가 새되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어도 미친 듯 날뛰는 경호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계숙의 허리는 경호의 팔에 단단히 휘감기고 말았다. 어깨 너머로 썩은 연감냄새 같은 경호의 입김이 후끈하고 맡히었 다. 동시에 경호의 팔에 젖가슴이 죄어들어서 숨을 쉴 수가 없다.

계숙은 고만 아찔해서 보료 위에 가 쓰러졌다. 이번에는 경호의 가슴이 계숙의 가슴을 찍어 눌러서 소리를 지를 수 없이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자 죽을 힘을 다해서 다리를 버둥거리는 사품에 치마 폭이 부욱 찢어지며 속옷이 드러났다. 속옷과 양말 사이의 살이 하얗게 드러났다.

계숙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다해서 반항을 하건만, 죽을둥 살둥 모르고 날뛰는 술취한 사내의 억센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한 오분 동안이나 둘이서 씨근덕거리며 엎치락뒤치락 하였 다. 텅 빈 집에서 소리를 지른댔자 소용이 없는데, 대문 소 리조차 나지 않는다.

계숙의 앞머리는 가닥가닥 흐트러지고 핀을 찌른 젓가슴까 지 풀어졌다. 그래도 계숙은 마지막 힘을 다해서 안간힘을 쓰며 반항을 하였다. 그러자 경호의 손이 계숙의 얼굴을 비 비더니 파랗게 질린 계숙의 얼굴에 뜨겁고 무거운 것이 눌 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계숙은,

『퉤.』

하고 침을 내뱉으면서 비틀렸던 팔을 빼내자 번쩍 쳐드는 경호의 면상을 주먹으로 힘껏 쥐어 박았다.

『에구!』

하면서 경호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안경이 깨어지며 유리조각이 들어가 눈알맹이가 베진 모양이다. 경호의 손바 닥에는 피가 묻어 나왔다.

피를 본 경호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으흥!』

하고 부르짖으며 아픈 것을 못이겨 쩔쩔 매면서 보룔위에 서 대굴대굴 구른다. 그통에 계숙이는

『에끼 더러운 놈 같으니.』

하고 대청으로 튀어 나왔다. 경호는 손수건으로 눈을 누르 고 소경처럼 더듬더듬 쫓아나오며

『의사! 의사를 좀.』

하고 부르짖는다. 고통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눈동자를 굴리는대로 칼끝보다 더 날카로운 유릿조각에 긁고 긁히는 대로 아프고 쓰라려서 천지가 아뜩아뜩한 모양이다.

『의살 좀 불러 줘요!』

이번에는 울음이 섞여 애원하는 목소리다.

『사람을 잘못 보는 눈깔은 빠져두 좋아!』

하고 계숙은 뜰아랫방으로 달음질을 해 내려갔다. 내려가 서는 수세미가 다 된 옷을 훌훌 벗고 고리짝에서 백화점에 다닐 때 입던 저고리 치마를 꺼내 입었다.

경호의 몸뚱이가 닿았던 옷조차 더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는 털을 댄 외투와 함께 팔뚝시계를 끌러서는 마당으로 내 던지며

『자 너의 건 다 가져가거라!』

하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아직도 마루 위에 누워서 일어 날 줄을 모르는 경호를 한번 흘겨보고는 대문을 열고 나섰 다.

『휘유.』

하고 긴 한숨이 저절로 쉬어졌다. 속옷에까지 땀이 내배었 는데 골목 안의 저녁바람이 스며들어 선뜩하면서도 시원하 였다. 그보다도 지옥에서 벗어져 나온 듯이 계숙의 마음이 더 시원하였다. 천 근이나 되는 짐을 벗은 듯이 몸이 거뜬 한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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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몸이 홀가분한 것을 느끼면서도 새삼스러이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시골 아버지가 야속하였다. 젊은 첩의 베갯머 리 송사에 넘어가서 허덕지덕하는 것이 가엾은 생각이 들기 도 하나, 그래도 자기네는 먹고 입고 살면서 일년이나 되도 록 딸자식 하나를 모르는 체하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 았다. 저 역시 골육의 정의까지도 잊어버리고 지내자면서도 신변의 무슨 변동이 생길 때마다 제몸의 고단한 것을 느낄 때마다 고향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야속하였다.

그럴수록 계숙은

(장성한 내가 아버지의 신세를 지는 것도 체면 좋은 의뢰 가 아니냐. 아버지가 모르는 체하는 것을 야속하게 생각하 는 것부터 내게 노예 근성이 남아 있는 증거다.)

하고 제 마음을 꾸짖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단념하고 지 내야 속이 편할성 싶었다.

길거리는 전등불이 들어왔다. 오랫동안 경자의 집에서 촌 보도 옮기지 않았고 신경이 극도로 흥분되었던 끝이라 등불 도, 오고가는 행인들도 돋보기 안경을 쓰고 보는 것처럼 어 른어른해 보였다. 다리가 허전허전하고 현기증이 났다. 그러 면서도,

(경호의 눈이 멀지나 않았을까?)

하고 슬그머니 걱정도 되었다.

(눈이 멀어도 싸지. 내가 알게 뭐야)

하고 고소한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등뒤에서 경자나 그집 사람이 「저년 잡아라!」 하며 쫓아나오는 듯 뒷덜미를 끌 어당기는 것 같아서 도망군 처럼 골목길로 들어섰다.

계숙은 생각다 못해서 일 년 동안이나 주인을 잡고 있던 서대문 밖으로 나갔다. 제가 묵던 방의 들창앞까지 다다라 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계숙은 그 들창이 반가왔다. 수영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던 생각이 문득 났다. 말 한마디 하기에 땀을 흘리며 손 한번 잡아볼 생각도 못하던 수영이. 그 수줍어하던 태도를 불과 십분 전의 경호의 행동과 비교해볼 때, 계숙은 금시로 수영 이가 그리워졌다. 눈앞에 있으면 그의 그 넓은 가슴에 안겨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지난 일을 하소연하고 싶었다. 무 조건하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계숙은 그 정다운 들창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지쳐논 대문 을 열고 들어섰다. 안마루 끝에서 찢어진 부채로 풍로의 불 을 붙이며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던 주인 마누라는,

『아 이게 누구요?』

하고 반색을 하며 내달아 계숙의 손을 잡는다.

『왜 그동안 한번두 안왔소? 어쩌면 그렇게 매정스럽게 발 을 끊고 지낸단 말요. 그런데 그 탐스럽던 얼굴이 왜 저렇 게 쪽 빠졌을까? 부잣집 음식이 내가 끓인 된장찌개만 못허 든게로군.』

하고 수다를 늘어놓으며 막내딸이 근친이나 온 것처럼 방 으로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계숙은 인사를 할 겨를도 없었 다. 계숙은 방으로 들어서며,

『또 얼마 동안 신세를 지려고 왔는데 괜찮아요?』

하니까

『왜? 그집이 여간 큰 부자가 아니든데……주인허구 뜻이 맞지 않던게로군. 송사리두 놀던 물이 좋다구,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끼리 살어야 헙넨다.』 하고는,

『바깥방은 새를 줬지만 얼마동안 안방에서 같이 잡시 다.』

하고 저녁을 겸상을 해가지고 들어온다. 계숙은 주인 마누 라와 한주발의 밥을 나눠 먹으면서 지난 일을 대강 이야기 해 들려 주었다.

마누라는

『저를 어쩌나? 그럼 고 계집애가 뚜쟁이었구먼.』

하고 연방 혀를 차면서 계숙을 동정한다.

어런 아들 하나를 일본집 고용살이로 들여보내고 담뱃대 하나로 벗을 삼고 지내는, 인정에 주린 마누라는 진정으로 계숙이가 반가왔던 것이다. 하도 옹색해서 몇 년이나 계숙 의 밥값을 조르고 듣기 싫은 소리까지 했던 것까지 뉘우쳤 다.

계숙은 수영이가 이 집으로 했던 편지가 경자의 손으로 들 어간 것을 그제야 마누라에게서 들었다.

저녁 뒤에 계숙은 아랫목에 가 잠깐 누웠다가,

『내 어디 잠깐 다녀오께요.』

하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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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은 집에 있었다. 촛불을 켠 컴컴한 방에서 대님짝으로 머리를 동이고 무슨 약관고책 같은 것을 뒤지고 앉았다가,

『오빠!』

하고 들어서는 계숙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내 집엘 올 때가 다 있군. 아마 수영이 소식이 궁금헌게 지.』 하고 첫박에 무안을 준다.

『오지 못할 사정이 있어 그랬어요.』

계숙이는 억지로 웃음을 띄우며 마주 앉았다. 어쩐 일인지 병식의 아내는 부엌에서도 마루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병식의 얼굴은 전번에 볼 때보다도 더 수척해서 이마에는 가는 줄이 지렁이처럼 솟았다.

(왜 촛불을 켰을까?)

하고 천장을 쳐다보다가 전등을 끊어가고 그 자리에 파아 란 쪽지를 붙인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 한 가지만 보아도 근자의 병식의 생활이 더 한층 말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저녁을 굶고 앉았는지도 몰랐다. 실상 병식의 아내 가 눈에 띄우지 않는 것은 마지막으로 옷가지를 그러모아 가지고 전당을 잡히러 나갔던 것이다. 어른들만 같으면 한 두끼 참을 수도 있겠지만 병든 어머니는 허깃증이 났는지 지각없이 고기 반찬만 찾고, 어린 것들은 끼니때만 되면 아 우성을 친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병식이가 겨우내 걸치 고 다니던 외투까지 싸들고 나간 것이다.

『그게 무슨 책이야요?』

할 말이 많은데도 할 말이 없고 그냥 앉았기도 수줍어서 계숙은 한 마디를 건넸다.

『이런걸 알어서 못써, 잠을 자다가 곰닿게 죽는 약을 골 라 보는 중야.』

하고 병식은 쓸쓸히 웃는다. 그 웃는 얼굴이 어쩐지 무서 워 보였다. 표정 근육의 움직임이 다 죽어가는 환자가 이빨 을 앙상하게 드러내며 억지로 웃어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동안 재미 좋았어?』

병식은 우묵한 눈으로 흘겨보며 여전히 비꼬기만 한다.

『오늘 그 집에서 나왔어요. 인젠 시원허시죠?』

계숙은 면구스러운 듯이 병식의 시선을 피해가면서 경자의 집에서 나오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병식은 고개만 끄덕이며 침울한 표정을 하고 들을 뿐, 전 같으면 그동안에도 끊일 사이 없이 담배를 피웠을 터인데 덤덤히 앉았는 것을 보니 요새는 그 좋아하던 담배까지 끊 은 모양이다. 끊은 것이 아니라 마코 한 개도 얻어 피우지 를 못하는 눈치다.

『진작 우리말을 들었으면 그런 욕을 안봤지.』

하고 병식은 간단히 오금을 박는다.

『어쨌든 경험은 잘했어요. 인젠 누구헌테나 속지를 않을 테니까요.』 하고 계숙이가 장담을 하니까

『코 큰 소리 말어, 인간 세상의 고생길을 밟으려면 실날 두 안꼰 셈인데……』

하고 병식은 눈을 아래로 깔고 또 무슨 생각에 깊이 잠기 는 모양이다. 외풍에 흔들리는 촛불이 병식의 얼굴 위에서 꿈벅거릴 뿐, 한참이나 침울히 앉았다가

『계숙이, 내좀 부탁할 일이 있는데 여편네가 들어오면 거 북허니 잠깐 나허구 산보를 나갈까?』

하고 간절히 청한다.

『네.』

하고 계숙이가 먼저 일어섰다. 그러지 않아도 병식의 아내 가 들어오기 전에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병식은 동저고리바람으로 부지깽이 같은 담장을 짚고서 앞 을 서고, 계숙은 어떤 상서롭지 못한 예감을 느끼며 머리를 숙이고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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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뒤떨어져 가다가 가게서 담배 한 갑을 사서 소매 속에 넣고 병식을 따라 사직단(社直壇) 송림 속으로 들어갔 다. 멀리서 흘려오는 전깃불이 희미하게 어둠을 해치는데 저녁 산보를 나온 사람이 더러 흐뜩희뜩 보일뿐, 근처는 제 발자국 소리에 놀랄만큼 고요하다.

병식은 여기까지 올라오기도 숨이 찬 듯이 반석 위에 걸터 앉으며,

『앞을 내다보려면 이 자리가 제일 좋아.』

하고 계숙에게 그 곁에 앉기를 권한다. 북쪽 일대의 총총 한 전등불이 눈아래에 깔렸는데 멀리 꿈속처럼도 회의 소음 (蘇音)이 들린다.

머리 위에는 솔가지가 어둠의 날개 모양으로 축축 늘어졌 다. 그 부러진 가지에 바람이 다시 흔들리는대로, 까치집의 삭정이와 솔잎이 하나 둘 계숙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계숙은 이 폐허(廢墟)를 싸고 도는 황혼의 분위기가 처량스 러웠다. 이른 봄의 저녁답지 않게 쓸쓸하였다.

병식이가 곁에 앉았건만 호젓한 생각이 들어서 어깨를 떨 었다.

『오빠, 담배 태세요.』 하고 궐련을 꺼내 주니까,

『이건 왜 샀어? 아주 끊어버리려는데……』

하고 병식은 계숙이가 그어대는 불에 담배를 붙여 한모금 을 길게 마시다가,

『아이 어지러워.』

하고는 담배를 돌 위에 비벼 끄면서 기침을 한다.

『빈 말씀만 허긴 싫지만 요샌 지내시기가 더 어려우실텐 데……어디 취직이나 허시게 돼요?』

하고 진심으로 동정을 하니까,

『계숙이는 계숙이 걱정이나 부지런히 해. 제 코가 석자나 빠져가지고……』

하고는 한참 있다가 말을 이어,

『모든 건 해결지을 날이 있겠지. 그것두, 며칠 안 남었 어.』

하고는 무슨 무거운 생각이 머리를 짓누르는 듯 고개를 떨 어뜨린다.

『해결요? 어떻게요? 무슨 수가 생긴단 말씀이죠?』

계숙은 말만 들어도 반가운 듯이 연거푸 물었다.

『암만 생각해봐두 수는 한가지 수 밖에 없어. 세상만사를 영원히 잊어버리는 수가 제일이거던.』

하고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머리 위로 뻗어오는 팔뚝만큼 굵은 소나무가지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저 나무가지에 그네를 매구 뛰었으면 좋겠지? 요샌 저녁 마다 올라와선 꼭 이 자리에 앉았다가 내려가는데, 저 휘어 든 가지만 보면 공중에 매달려 그네를 뛰구 싶은 충동을 받 는단 말야.』 하고는 턱을 어루만진다.

『학교에 댕길 때 단옷날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그네는 둘이 얼려서 쌍그네를 뛰는 게 퍽 보기 좋드구만요.

공중에서 비단 치맛자락이 펄펄 날리고……』

계숙은 병식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양이다.

『쌍그네를 뛰어 보고는 싶지만, 그것두 행복한 사람이나 흉내를 낼께지, 나처럼 평생을 외롭게 굴러 다니는 사람이 야 혼자라두 뛸 수 밖에……』

하면서 여전히 머리 위로 꿈틀거리고 뻗어오른 소나무 가 지를 쳐다본다.

병식의 말은 무심코 해던지는 말 같지가 않았다. 매우 심 상치 않은 암시를 계숙에게 주었다. 계숙의 마음은 불시에 시꺼먼 구름장이 덮는 것 같았다. 병식이는, 한 십 분동안이나 입을 꼭 다물고 앉았다가

『계숙이─』 하고 침묵을 깨뜨린다.

『네?』

『계숙이』

『네?』

두 사람의 목소리는 함께 떨렸다. 병식은 푹 엎드리며 계 숙의 치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계숙의 손을 더듬 어 찾아 가지고 조금 떨리는 손등에다가 입술을 대고는 흑 흑 느낀다.

十四[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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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손을 뿌리칠려고도 아니하였다. 병식이와 지난 날 의 정분으로는 제 육체의 한부분쯤은 떼어주어도 아깝지 않 을 듯도 싶었다. 그다지 가까이 지냈건만 병식의 육체와 부 닥쳐본 때는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수영의 입술의 감촉이 태양과 같이 뜨거웠다면 병식의 입술은 달과 같이 찬 것을 느꼈다. 좁쌀 같은 소름이 손등에서부터 전신으로 쭉 퍼지 는 듯하였다. 계숙은 얼굴을 들었다. 송림 사이로 엿보는 별 들이 꺼졌다가는 켜지고,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들어 무슨 신비스러운 것을 속삭이는 듯.

병식은 그저 입을 뗄 줄 모르고 가늘게 소리를 내며 운다.

그러나 계숙의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만은 뜨거웠다. 계숙이 역시 무어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격에 사로잡혀,

『오빠……저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오빠의 고민은 짐작을 허고 있어요. 한번도 제게 터놓고 말씀을 허지 않으셨어도 지난 겨울에 제게 자전거를 타고 오셨던 날 밤에 오빠가 무 엇 때문에 괴로워 허시는지 확실히 알긴 했어요.』

어느덧 계숙의 목소리도 콧소리로 변하였다.

『그렇지만 오빠! 오빠의 속을 알기로서니 오빠의 처지나 제 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아니야요? 제게는 눈치도 보이지 않으시고 참을 수 없는 감정을 억지로 참으 시는 괴로움을 안고 저도 퍽 괴로웠어요.』

계숙은 목소리는 약간 울음을 섞었다.

『오빠, 저는 오빠를 동정해요. 무한히 동정해요! 그럴수록 오빠의 환경이나, 우리들의 환경을 저주하고 싶어요. 그렇지 만 동정을 한다고 이해를 한다고 오빠를 만족하게 해드릴 수는 없지않어요? 저는 오빠의 고민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한몸을 바친다 하더래도, 제 몸을 받으시는 오빠는 아마 지 금 버담도 더 괴로운 처지에 빠지게 될 것만 같어요. 그러 니 어쩌면 좋아요. 네? 오빠』

무릎 위에 쓰러져 밤바람에 가닥가닥 흩어지는 병식의 머 리를 왼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달래듯 하였다.

병식은 말을 하기에는 그 설움이 너무 크고, 그 괴로움에 가슴이 벅찼다.

계숙이가 저의 감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제 가 할 말까지 미리 다 해버린데야 오직 흐느껴 흐르는 슬픔 을 꽉 깨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병식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잊지 않았다. 여 자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고 외면을 하면서 소매로 눈을 비볐다. 계숙이도 코를 마시며

(아아 인생이란 참 정말 비극이다!)

하고 속으로 부르짖고는 병식의 싸늘한 손을 쥐며

『오빠 저를 용서해 주세요! 영원히 오빠와 누이로 지내는 게 더 깨끗허지 않어요?』

하고 애원하였다. 실상 이 비극의 주인공을 버리는 것은 저승에 가서도 저주를 받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미리 속죄 를 받으려는 듯이 용서를 빌었던 것이다.

『아니, 나는 누구를 사랑하거나 용서할 권리도 없는 사람 이야.』

병식은 눈을 감은채 머리를 흔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통통한 소나무 위에 깃을 들었던 까치가 무엇에 놀랐는지 프드륵프드륵 날개를 친다. 한참만에 병식은,

『계숙이 진정으로 수영이를 사랑해?』

무슨 다짐을 받으려는 듯이 묻는다.

『네. 장래를 약속까지 했으니까 사랑헐 의무가 있어요. 그 렇지만 그이는 저를 오해하고 지난 일은 꿈으로 돌려보내자 고 허지 않았어요?』

『아니야, 그만 오해는 저절로 풀릴 날이 있어. 그것만은 내가 보증하지, 더 큰 고민에 부다껴 그러는게지 계숙이헌 테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니까…… 또는 결단코 신의를 저 버릴 사람이 아닌걸 믿어야 해.』

하고 나서 또 한참 생각한 뒤에,

『수영이를 따라 내려가! 지금 계숙이헌테 그길 밖에 없어, 어서 내일이라두.』

병식은 두 번 세 번 단단히 부탁을 하고는 일어서 저혼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계숙이가 쫓아가면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 이튿날부터 계숙이도 서울서 종적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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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얼마동안 수영은 마음이 매우 거뜬하였다. 이른 아침 이면 해도 뜨기 전에 나가서 보리밭을 매었다.

복영이도 노는 날이면 호미를 들고 형의 뒤를 따랐다. 집 뒤 언덕 위에 하루갈이나 실히 되는 보리밭은 사 오년전에 새로 일군 것인데 이 밭만은 조참판의 땅이 아니었다. 수영 의 아버지가 손수 가시덤불이 엉키었던 황무지를 두고두고 조금씩 일구어 올라간 것이 작년에는 보리를 예닐곱심이나 타작을 하였다.

실상 수영의 집에도 양식이 떨어졌다. 요새는 잡곡으로만 끓여먹는데 그것도 공석 밑바닥이 긁히기 시작하였다. 쌀이 라고는 어머니의 죽을 쑤어드릴 것 밖에 남지 않았다.

일러도 망종(芒種) 때나 되어야 햇보리를 먹을 터인데, 그 러려면 아직도 두 단하고도 십 여일이나 기다려야 한다. 궁 춘에 보릿고개를 넘기란 참으로 지리한 것이었다.

수영의 집도 그때까지 장릿벼라도 얻어먹어야겠는데, 이 동네에서는 벼 한말도 꾸어 줄 여유가있는 집이 없었다. 서 울 부잣집 마름의 집 형편이 이 지경이니 다른 사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수영의 집 식구의 생명은 이 보리밭에 달렸다. 어서 무럭 무럭 자라서 보리 풍년이나 들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 다.

사래 긴 보리밭은 초록색 자리를 펼쳐논 듯, 이랑마다 새 파란 먹줄을 튀저논 것 같이 생생하다. 벌써 한 두어치 가 량이나 뾰족뾰족하게 자라났다. 비만 한번 흐뭇하게 내리면 우쩍 자랄 것 같다.

그 곱다란 보리밭을 아침바람이 보드랍게 어루만진다. 그 러면 보리싹은 강아지 풀처럼 조그만 꼬리를 살래살래 흔든 다.

수영은 밭두둑의 돌도 고르고 오줌장군을 메고 다니며 거 름도 날랐다. 아버지도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아들이 일하 는 것을 보고만 섰는 것이 미안쩍은 듯이, 밭머리로 왔다갔 다 하면서,

『상일은 연골에 배워야 허지. 뼈가 굳으면 헐레두 못허느 니라.』

하고 작은 아들이 조력을 할 때면 군소리를 한다.

『너 그래두 일허는 게 보매 과히 서투르지는 않구나.』

하고 큰 아들을 칭찬도 한다. 아버지는 책상물림인 아들이 벗어붙이고 대어들어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것이 보기에 황송할 지경이었다. 늙고 병이 들어서 자식들의 뒤라도 거 두어주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찌들고 쇠잔한 그의 얼굴에도 보리밭 고랑에서 피어오르는 새봄의 연연한 빛이 반영되는 것이었다.

수영은 보리밭을 다 맨 뒤에는 들로 나가서 일군들과 똑같 은 차림차림으로 일을 하였다. 못자리를 갈기는 힘에 부치 건만 다른 사람의 뒤에 떨어지기는 싫었다.

『이이러, 이놈의 소.』

『에디어 쩌쩌쩌.』

혀를 차가며 쟁기질도 하였다. 쟁기질은 학교에서 실습할 때에 더러 해보았건만 새로 멍에를 맨 어린 소가 엄매엄매 하고 보채며 우뚝우뚝 서기가 일수요. 비틀걸음을 쳐서 애 를 먹었다.

그러나 시꺼멓게 기름진 흙이 보습 밑에서 좌우로 뒤집혀 오르는 것을 내리다볼 때에는 퍽 상쾌하였다.

(이대로 어디까지나 갈아나갔으면 산이고 들이고 막 무찌 르고 나갔으면 시원하겠다) 하면서 쟁기체를 꼬났다.

『이사람 급작시리 너무 근력을 쓰면 못쓰네.』

대흥이와 오봉이와 다른 동지들은 수영의 일하는 것을 일 부러 보러 와서 말벗이 되어 준다.

『서울 가서 공부한 사람이 일을 제법 하네.』

하는 것은 다른 논배미에서 일을 하는 동네사람들의 공론 이다.

그러나 해가 떨어진 뒤에 집에 돌아와서는 세수를 하고 발 을 씻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일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지나치게 피곤하도록 일을 해야만 잠이 오고, 잠이 와야만 모든 고민을 잊을 수가 있었다. 잠시도 눈앞을 떠나지 않는 계숙의 환영도 지워버릴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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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방으로 들어가서도 당초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기등잔의 불만 몇번이나 껐다가는 다시 켰다. 앉았다 누 웠다 기직자리 위에 엎드렸다 하며 몸을 둘 곳을 몰랐다.

(편지를 쓰자) 하고 복영의 공책에다가,

「계숙씨!」

하고 서두를 꺼내다가 연필을 던졌다.

(내가 편지 할 까닭이 없다. 직접으로 사과를 할 필요까지 는 없다.)

하고 종이를 구겨서 내던졌다. 편지를 부치려도 경자네집 번지도 모르거니와, 제 손으로 들어간 것 같지도 않았다. 편 지가 경호 남매의 손에 가로채일 것 같으면 그런 창피가 없 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병식에게나 편지를 하리라. 우선 간접으로 내 의사를 전해 두었다가, 계숙의 태도를 보아 솔직한 긴 편지를 주리라) 하 고 다시 뭉특한 연필에 침을 묻혔다.

「병식군!

내가 너무 오래 소식을 끊고 지냈으니, 자네가 편지를 안 한다고 책망헐 염의가 없네. 그러나 그날 그날의 일에 몰려 서 연자매를 가는 당나귀 모양으로 곁눈질을 할 겨를조차 없기 때문에 안부도 건네지 못하고 지낸 것이니 무심한 친 구라고 과히 꾸지람이나 허지 말게. 그래 요새는 어떻게 지 내나? 자네의 지네는 형편이 보는 듯 짐작이 되네. 그러나 자네는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니 그동안 어느 한군데 밥구멍이 뚫렸을 줄 믿네.

근자의 내 생활은 자네의 추측에 맞기네. 보고할 재료가 있다면 많고 없다면 없네. 꿀벌이나 개미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해서 모든 고민을 잊어보려고 애를 쓸 뿐. 「아 침에 생각하고 낮에 일하고 먹고 자면 고만」 이라고한 윌 리암 뿌렉인가 하는 시인의 말을 본받으려 하나 아침에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 근자의 나의 생활일세.

그러나 보리밭을 메고 못자리를 갈고 하는 것만이 내 일은 아닐세. 야학에 가서 아이들과 학습을 하고 소비조합 같은 것을 만들고 하는 것만이 물론 내 일의 전부는 아닐세.

우리 동네에는 순박하고 건실한 동지들이 추리면 칠 팔명 이나 있네. 그네들은 이른바 도회지 고민을 모르는 사람들 일세. 나는 그네들을 버릴 수 없네. 그네들은 무조건하고 나 를 따르고 신뢰하네. 그것이 마음에 괴롭기도 하고 짐이 너 무나 무거운 것을 느끼면서도 내 성의껏은 같은 처지에 있 는 우리들의 단결을 위해서 전력을 다할 결심일세. 동시에 우선 이 조그만 동네 하나만이라도 한덩어리로 뭉치는 것과 자기의 환경을 적당히 인식시키고 앞으로 용기있게 나아가 게 하는 것이 당연한 나의 의무로 아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떠한 박해가 닥쳐오든지 이 동네의 젊은 사람들만 은 가시덤불과 같이 한데 엉키고 상록수처럼 꿋꿋이 버티어 나갈 것을 단단히 믿는 바일세.」 하고 끝을 마친 뒤에,

「그런데 이보게 그동안 계숙씨는 어찌 되었나? 몹시 궁금 허이. 자네라도 소식을 전해줄 줄 알았더니……

그의 신변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더라도 나는 그에게 대한 신의만은 잊을 수 없네. 그가 허영의 꿈을 깨뜨리고 알몸뚱 이가 되어 나를 따라온다면 전날과 다름없는 이성의 동지로 서 그를 맞겠네! 이 뜻을 전해 줄 수 없을는지?」

하고 계숙에 관한 말은 일부러 노루꼬리만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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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이가 술이나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못 자는 반면에, 수영은 사지가 솜같이 졸리도록 일을 하지 아니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집안 형편도 동네 일도 그밖에 제 앞에 닥쳐올 모든 것이 걱정거리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수영의 마음 속에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들어앉 은 것은 역시 계숙이다. 뽑을래야 뽑히지 않는 큰 뿌리가 깊이 박혀서, 수영의 마음을 밑동으로부터 흔드는 것이다.

아무리 버티어도 입술을 깨물며 참으려도 이성(理性)과 감정 이 아울러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농촌의 달은 유난히도 밝다. 티끌 하나 없는 대지 위에 달 빛은 쏟아져내려 초가집 지붕을 어루만진다. 아득히 내어다 보이는 바다는 팔팔 뛰는 생선의 비늘과 같이 번득인다. 황 금빛으로 혹은 은빛으로 눈이 부시게 끓는다.

수영은 밤중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뒷문을 활짝 열 고 툇마루로 뛰어나갔다. 앞뜰에서 와글와글 끓는 개구리 소리가 핀트가 어그러졌다가 맞는 발성영화처럼 요란히 들 린다.

혼자서는 위로할 수 없는 청춘의 오뇌가 이른 봄 깊어가는 밤에 흙방을 홀로 지키는 수영의 곤한 잠을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수영은 창백한 달빛으로 온몸을 적시면서 턱을 고이고 앉 아서 계숙을 생각하였다. 병식과 서울의 모든 것을 생각하 였다. 가지만 앙상한 집 뒤 홰나무와 축동의 비류나무 졸가 리를 스치고는 바깥마당을 휘도는 가벼운 바람이 쌀쌀하건 만 수영은 마음이 뜨거워서 추운 줄도 몰랐다.

저는 계숙을 끊겠다하고 과거의 모든 것을 청산하자고까지 편지를 하고도, 계숙의 편지를 슬그머니 기다렸다.

(저도 아주 단념을 한게지) 하면서도,

(그렇기로 편지를 받았다는 답장이야 해야 옳지 않을까?)

하고 섭섭도 하였다.

(여자란 그렇게 매정스러운 것일까?)

하고 제가 한 일은 잊은 듯이 계숙의 태도가 냉정한 것만 나무랐다.

달은 구름 사이를 달린다. 새하얀 구름장 속으로 빠져나오 는 달은 풀솜으로 닦는 구름처럼 더 한층 영롱하다. 땅 위 로 떨어질 듯이 윤곽이 또렷하다.

달리는 달과 함께, 구름과 함께, 수영의 마음은 계숙의 환 영을 싣고 무한히 넓은 허공을 달렸다. 그러다가는 불현 듯 이 계숙이가 보고 싶었다. 동시의 저의 행동이 너무나 경솔 하지 않았나 하고 뉘우쳐도 졌다.

계숙이가 제가 앓을 때 다리를 주물러주던 생각, 벼르고 벼르다 찾아가서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사랑을 고백하던 생 각, 청량리에서 돌아오던 길에 지굿덩이를 껴안는 듯한 포 옹과 그 화판 같은 입술에 끓어오르는 정열을 식히던 생각 ─그러다가는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학생사건 시대에 같이 활동하던 생각이 바로 엊그제같이 났다. 모든 정경과 잊지 못할 추억의 토막토막이, 두서없이 수영의 눈앞에서 달빛과 함께 아물거렸다.

(내가 잘못이다. 나는 신의를 잊은 사람이다. 한 여자에게 대한 맹세와 신의를 잊어버린 사람이 더 큰 맹세와 신의를 지키려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 속으로는 이다지도 계숙을 그립고 아쉬워하면서, 사랑이 조금도 변치 않으면서도 좀더 큰일 좀더 시급한 일을 한다고 계숙을 억지로 단념하려고 한 것은 요컨대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닐까? 제 감정을 속이 는 것은 결국 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계숙이가 타락을 하였기로, 경호의 첩이 되었기로 그럴수 록 그를 건져내고 붙들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 사랑 을 맹세한 사람의 의무가 아닐까? 나는 그 신성한 의무를 일부러 회피하려고 든 비겁한 사나이가 아닐까?)

하고 수영은 첫닭이 울 때까지 달빛에 기다란 그림자를 이 끌고 마당을 거닐었다. 거닐면서 생각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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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 사흘 뒤였다. 저녁에 수영이가 재너머 원두밭에서 외와 호박씨를 놓느라고 괭이로 구덩이를 파며 거름을 주무 르고 있으려니까 학교에 다녀오던 복영이가 껑충껑충 뛰어 오면서

『언니! 전보가 어디서 왔어?』

수영은 거름이 묻은 손을 털 사이도 없이, 복영이가 내어 미는 전보를 채뜨려서 황급히 뜯었다.

『병식급사즉래계숙』

수영은 깜짝 놀라 전보지를 떨어뜨릴 뻔하였다. 꿈에도 생 각지 않던 일이라, 전신의 신경은 이 급보를 전하고 우들우 들 떨었다. 마른 날에 벼락이나 맞은 듯 한동안은 장승처럼 선채로 꼼짝할 수 없었다.

『푸른 줄로 정간을 친 전보지에 시꺼먼 복사지를 데고 굵 다랗게 갈겨 쓴 글씨를, 가로 보고 세로 보아도,

「병식이가 급히 죽었으니 속히 오라」

는 것과, 계숙이의 이름이 또렷하였다. 일부인을 보니, 놓 은지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별사배달이나 시키지 않으면 보통 전보는 사흘 만에야 오는 이 두멧구석에서, 이틀 만에 온 것만 해도 매우 빨리 배달이 된 셈이었다.

수영은 심상치 않은 형의 눈치만 쳐다보고 섰는 아우의 손 에서 「김 수영군 진진」이라고 피봉에 쓴 편지를 잠자코 받아들었다. 그 편지 무게에 허리가 척 휘는 듯, 그 손은 수 전증이 난 것처럼 떨렸다. 언뜻 보아도 눈에 익은 병식의 필적이다.

수영은 계숙의 전보가 거짓말 같았다. 획마다 살아있는 병 식의 글씨를 들여다볼 때 병식이가 죽었으리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편지를 부욱 찢기가 서먹서먹하였다. 그 봉 투 속에서 몸서리를 칠만큼 무섭고 가장 비통한 글발이 꿈 틀거리고 튀어나올 성싶었다. 그러나 궁금한 시간을 될 수 있는대로 오래 끌면서도 수영은 그 편지를 찢지 않을 수 없 었다.

『친애하는 수영군!

이 편지가 자네 수중에 들어갔을 때 내 영혼은 벌써 내 육 체를 떠나서 자네의 머리 위에서 떠돌 것일세. 나는 지금 내 생명을 해소(解消)시킬 용기나마 남아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마지막 붓을 잡는 것일세. 나는 유언이라는 것 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은 모든 약속과 같이 헛되고 가 소로운 것으로 아네.

만일 내가 목숨을 끊은 후, 나의 늙으신 어머니와 죄없는 처자가 불쌍하니, 굶어 죽지나 않을 도리를 차려 줌시사 하 는 간절한 유서를 쓰고 죽는다손 치세. 그러면 그 뉘라서 유언대로 실행해줄 사람이 있을 줄 아나? 그것은 사람이 죽 는 날까지도 비열한 수작을 해보는데 지나지 못할 것일세.

친애하는 수영군!

그러나 어리석은 줄은 알면서도 자네와 나와의 작별하던 우정이, 글씨 한줄이라도 끼치게 하네그려. 자네에게 내 부 고(訃告)를 손수 쓰지 않고는 조만간 저승에서 만나더라도 외면이나 하지 않을는지? 그러면 섭섭할 것도 같아서, 나의 최후의 필적을 자네에게 남기고 가는 것일세.

내가 짧고도 지리하던 삼 십 세의 일생을 영원히 청산해버 리는 행동을, 또는 그 원인과 동기를 자네는 마음대로 추측 하고 아무렇게나 비판하게. 세상놈들이 무어라고 제멋대로 떠들든, 그것은 내가 알 까닭이 없네. 계집을 껴안고 정사도 못하는 출신이니 신문기사의 재료가 될 리도 없겠고, 내 무 슨 병사도 아니니 남의 입에 오르내릴 까닭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시체나마 채찍을 맞을 염려조차 없는 것만은 불행중 다행으로 여기네.

친애하는 수영군!

나는 벌써 연전부니 이 살뜰한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네. 이왕 마지막 가는 길이면 그 최후나마 멋지게 꾸며 볼 공상도 하였네. 달밤에 큰 기선을 타고 가다가 태평양 한복판에 풍덩 몸을 던지는 것도 통쾌하였고, 시뻘건 불길 을 하늘로 치뿜는 분화구 속에 곤두박혀서 더러운 육체를 재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는 것도 해롭지 않을 것 같으나, 그것조차 나와 같은 프로레타리아로서는 꾸지도 말라는 꿈 이었네. 개처럼 올가미나 쓰는 것이 나의 숙명(宿命)이었나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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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수영군!

오늘은 끝까지 아끼던 책 몇 권을 팔아서 그 돈으로 과일 과 과자를 한아름이나 사가지고 들어왔네. 그것으로 지금 어린 것들을 데리고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영걸의 다과회 를 열었네.

어린 것들은 영문도 모르고 「이게 웬떡이냐」는 듯이 마 치 푸른 풀잎을 만난 망아지처럼 기뻐하여 냠냠거리고 먹 네. 내가 제일 귀애하던 끝엣놈은 눈물을 깨물고 앉은 나에 게 제 입자국이 난 왜떡 한 조각을 내밀며 「아빠, 머」 하 고 자꾸만 입에다 넣네 그려. 그 자식들 앞에서 나는 이 편 지를 한줄씩 쓰는 것일세. 저희들을 이 괴로운 세상에 낳아 준 잘못과, 아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 가느다란 창자 까지 굶주리게한 미안한 마음을, 이 왜떡 몇 십 전어치로 풀리는 것일세. 속죄를 하려는 것일세.

『저녁거리도 없는데 무슨 돈으로 애들만 군것질을 시킨단 말요?』 하고 아내는 마지막으로 바가지를 긁었네. 나는 잠 자코 웃어보였네. 아마 내 얼굴에서 웃음을 찾기는 몇 해만 일 것일세. 그는 내가 무슨 반가운 소식이나 들고 들어온 줄만 알았는지, 그 역시 웃음을 띄우며 건너갔네. 어쨌든 가 엾은 인생들이 아닌가.

친애하는 수영군!

내가 이 숨막히는 조선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도, 고민 투 성이었던 내 과거를 되풀이해 보는 것도 앞으로 몇 시간 밖 에 남지 못했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공포를 느끼지 않네. 지금 내 심정은 먼 곳에 여행을 가려 고 집을 꾸리는 사람처럼 마음이 좀 뒤숭숭할 뿐일세. 그것 은 아마 최근 몇 달을 두고 주야로 죽음의 그림자와 접촉을 해서 자연히 친밀해진 까닭인가보이.

지금 내 눈앞에 미치는 인생은 비극도 아니요, 그렇다고 희극도 아닐세. 다만 억지를 써가며 구차히 살아갈 필요와 흥미와, 또는 살아나아갈 정신상 육체상 에네르기를 잃어버 린 조알만한 존재가 주체궂어서, 일찌감치 내 손으로 처치 해버리는 것일세. 피곤한 자는 자야만 하네. 나는 그 잠을 좀 오래 자려는 것 뿐……

친애하는 수영군!

최후로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은 단 한가지일세. 계숙이를 끝까지 사랑해주게. 나는 행복이란 말을 믿지 않지만, 그래 도 한 세상 살아가려면 뜻이 맞는 동반자를 얻는 것이 행복 까지는 몰라도, 삶에 대한 애착심만은 가지게 된 줄로 생각 하네.

나의 비명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애석히 여기고 지난 날의 정의를 잊지 못하거던, 그 가엾이 생각하는 마음과 변함없 는 그 우정을, 계숙에게 길이길이 쏟아주게! 계숙은 내가 본 여정들 중에는 자네와 한평생의 동지가 될 만한 소질이 있 는 여자일세. 동시에 그가 아직까지 육체적으로 순결하다는 것을 나는 보증하네.

두 사람이 마주 붙잡고 가시밭이라도 걸어나가게! 그러면 평생을 고적에 울던 이자 병식은 황천에서라도 「영원의 미 소」를 던짐세. 길이길이 그네들의 장래를 축복해줌세.

나의 가장 친애하는 벗이여!

병들고 늙으신 어머니에게도, 말 한마디 정다이 하지 않던 아내라는 사람에게도 작별의 인사 한마디 아니하겠네. 그럼 내가 자네에게만 이다지 장황한 편지를 쓰는 까닭을 알겠 나? 이것은 우정도 설움의 사정도 아닐세. 김 수영이란 인 간도 먹고 똥싸고 생식이나 하는 동물의 일종이겠지. 그러 나 가장 곤란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희 망을 창조해 가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 굳센 의지 (意志)와, 무쇳덩이라도 물어뜯으려는 만용(蠻勇)에 가까운 그 용기를 나는 부러워 마지아니하네. 그 정신에 경의를 표 하기 위해서 이 붓을 든 것을 기억해 주기 바라네.

자! 그러면 끝까지 힘껏 싸우고 잘 살다 오게!

柳 六 戮일인생의 짤막한 페이지를 덮으며 서 병 식 또 한마디─이것은 욕심일세만. 내 시체는 미아리(彌阿里) 공동묘지에 외로이 누운 최용준(계식의 친오라비)곁에 묻어 줄 수 없겠나? 먼저 간 친구와 나란히 누워나 보려는 것일 세.』

수영은 편지를 든 채 밭두둑에 펄썩 주저앉았다. 얼굴은 흙빛과 분간할 수 없이 변하고, 감정이 얼어붙은 것처럼 눈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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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가 병식의 집에 도착한 것은 그 이튿날 저녁이었다.

마침 새벽에 떠나는 전편이 있어서 동네의 곗돈 십 원과 대 흥이가 돼지 판 돈을 돌려가지고 부랴부랴 떠났던 것이다.

똑딱선에서도 기차 속에서도, 수영은 병식의 생각 이외에 들은 것도 본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저 역시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고, 병식의 편지에 씌어있 는 죽음의 세계에서 마음이 헤멜 따름이었다.

경성역에 와 내리자 휘황한 전등불과 전차 소리, 버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며, 사람들의 와글와글 들끓는 소리가 귀 를 틀어막고 싶도록 시끄러웠다. 간밤에 눈도 붙여보지 못 하였고 온종일 휘둘러 오느라고 극도로 피곤한 신경을 더욱 자극시킬 뿐이었다.

병식의 집 다 쓰러져가는 문간에는, 백지 초롱이 달려서 음침한 중문간을 비치었다. 거적을 깔고 앉았던 상여도가에 서 온 일군들이 수영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비켜 앉는다.

수영은,

『병식이!』

하고 부르려다가 멈찟하고 어린애의 이름을 부르며 마당으 로 들어섰다. 수영이가 들어서는 것을 보자 안에서는,

『아이고오, 아이고오!』

하고 울음 소리가 터졌다. 병식의 아내는 머리를 풀어헤치 고 건너방을 향하여 마루바닥을 두드리며 운다. 무어라고 사설을 해가며 울기는 해도, 목이 꽉 잠겨서, 그 울음 소리 는 피를 짜내는 것 같다. 어른을 따라 우는 어린것들의 울 음 소리는 차마 애처로와 들을 수가 없다. 그 곁에 기둥을 짚고 서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우는 것은 계 숙이었다.

이웃 집 마누라와 신문사 사람이 두어 명 섞여있을 뿐, 눈 물이 핑 돈 수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물속을 들여다보는 듯 어른어른하였다.

『대체 이게 웬일이예요?』

계숙에게 밖에 물을 데가 없었다. 계숙은 댓돌을 발로 더 듬어 신짝을 꿰고 뜰아래로 내려서면서도, 눈물이 듣거니 맺거니 앞을 가려서 머리를 쳐들지 못한다.

『자결을 하셨어요. 사직단 뒤 솔가지에…… 오늘 삼일장 으로 지낸다는 걸 올라오시면 발인을 허자고……』

계숙은 이마로 수영의 어깨를 쪼듯 하며 다시 목이 메인 다. 수영은 고개만 끄떡이다가 쏟아지는 눈물을 앞세우고 건너방으로 들어갔다. 둘도 없는 친구의 얼굴이나 마지막 떠들어보자고 했으나, 벌써 입관을 해서 얄팍한 관이 웃목 에 가 길이로 누웠다. 민초 한가닥이 머리 맡에서 꿈벅이다 가 탁하고 불똥이 튄다. 방 한구석에서는 만수香의 가느다 란 연기가 서리어 오를 뿐, 수영은 가슴이 서늘하였다. 입술 만 지근이 깨물고 묵도(?禱)를 올리는 자세로 섰다가, 관머 리를 얼싸안고 엎어지며 울었다. 관 모서리에 이마를 비비 며 통곡하였다.

뜻밖에 편지를 볼 때부터 참고 눌렀던 울음이 일시에 터질 것이다.

『병식이! 수영이가 왔네 응, 병식이!』

하고는 걷잡을 수 없는 오열(嗚咽)에 전신을 떨었다. 마루 에서는 또다시 울음소리가 일어났다. 계숙은 제 설움까지 얼려서 사뭇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어린애들은 어른의 흉 내를 내듯 하며 먹을 것을 조르는 조자로 운다.

『난 자네가 생목숨을 끊은 까닭을 아네. 모든 걸 잘 이해 하고 있네. 인제 자네 한 몸은 편하겠네그려!』

수영은 더 힘있게 병식의 머리맡을 껴안으며,

『나는 자네처럼 살길을 찾지 못하는 우리의 젊은 사람들 을 얼싸안고 우는 것일세!』

그러나 수영의 독백(獨白)은 곁의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것이었다.

계숙은 수영이가 너무나 뼈아프게 우는 소리를 듣고 들어 가서,

『고만 그치세요. 네? 고만요.』 하고 어깨를 흔들었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수영은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마루로 나갔다.

『아이고 인제 어떻게 살아요? 저것들을 데리고.』

병식의 아내는 남편의 친구의 앞에 고꾸라지며 운다.

[편집]

계숙은 사직단 송림 속에서 병식을 잃어버린 후 어쩐지 마 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설마 어떠랴 하고 사숙하는 주인 마누라에게서 노 자를 취해가지고 그날 밤 막차를 타고 시골집으로 떠났다.

수영에게로 내려가라는 병식의 부탁에 귀는 기울였으나 그 렇다고 청치 않은 손이 먼저 온다는 격으로 어슬렁거리고 가기는 싫었다. 더구나 몸담을 곳이 없게 되어 수영에게 의 탁하기는 더욱 자존심이 허락을 아니하였던 것이다. 한편으 로 경호의 남매의 추격이 귀찮기도 하고 경호의 눈이 멀어 서 병신이 되었다면 큰 문제가 일어날 것도 슬그머니 걱정 이 되었다.

(이왕 내친 걸음이니 동경까지 가고야 말리라)

하고 아버지와 담판을 하려고 병식에게만 엽서로 그 뜻을 전하고 이태 만에 고향으로 떠났었다.

잔뜩 벼르고 내려는 갔으나, 아버지는 금점판으로 따라 다 니는 중이라, 언제나 돌아올는지 몰랐다. 서모라는 여편네 는,

『아버진 언제 오실지 몰라. 그런데 어째 내려왔어?』

하고 대우가 전보다도 더 찼다. 계숙은 집이라고 찾아온 것을 후회하면서, 선친도 보기가 싫고 동내 사람을 만나기 도 싫어서, 문을 닫고 들어앉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 과 공상의 하루 이틀을 보냈다. 그러나 병식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 답장이라는 것은 편지 사연이 아니요, 원고지 한 장에다가 갈겨쓴 시 한편이었다.

나는 그네를 뛰련다.

구부러진 솔가지에 이 몸을 매달고, 훨훨 그네를 뛰면서 모든 시름을 잊으련다!

그대와 나란히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대의 손등에 피 끓는 정열을 뿜던 그 창백하던 별 밑에서, 아아, 나는 그네를 뛰련다!

그네를 뛰는 것이 보기 좋을 줄이야.

내 어찌 몰랐으랴 그네줄 한 가닥에 두 사람의 운명을 맡기고 번차례로 발을 굴러 펄펄 날러 보기를 내 어찌 바라지 않았으랴!

아아, 그러나 나는 나 홀로 그네를 뛰련다.

구부러진 고목가지에 고달픈 이 몸을 매달고 모든 근심을 잊으련다!

계숙은 이 시의 의미를 깨닫고, 가장 불길한 예감과 같아 서 가슴이 선뜩하였다. 그날 밤에는 병식이가 핼쓱한 얼굴 로 달려들어도 보이고, 높다란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전신에 피를 흘리며 입으로도 선지피를 부걱부걱 토하고 쓰러지면 서,

『계숙이! 계숙이!』

하고 외마디 소리를 부르짖는 끔찍한 꿈까지 꾸었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에

「후사를 부탁한다 미안하다」

는 전보를 받고는 부랴부랴 올라왔던 것이다.

병식이가 전보를 치던 이튿날 아침에 순사와 동네 사람들 이 병식의 시체를 들것에다 떠메어가지고 들어갔다. 눈망울 이 솟고 혀를 빼물었는데, 푸르죽죽해진 얼굴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아침에 운동을 하러 올라갔던 학생들이, 사직단 뒤 솔가지 에 사람이 매어달린 것을 발견하고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 다. 순사와 경찰의가 달려와서 검시를 하다가 다행히 조끼 주머니에서 주소를 박은 명암이 나와서, 즉시 집으로 떠메 고 온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까무러쳤다가 깨어난 병식의 아내 의 말을 들으면, 그 전날밤 남편은 전에 없이 유쾌한 듯이 어린애들에게 과자를 사다먹이고 안방 건너방으로 왔다갔다 허면서 자는 어린애까지 놀렸다 한다. 그러다가

『나 바람좀 쏘이구 들어오리다.』

하고는 마루 끝에서 자기의 손목을 은근히 쥐고 나갔는데, 저녁이면 날마다 나다니는 터이라 신기두 의하고 어린애를 눕히고 꼼박 들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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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기식이 엄엄하던 병식의 어머니는,

『아이구 몹쓸자식!』

하고 가슴을 짓찧고 쓰러진 뒤에는, 오늘까지 미음 한 모 금도 마시지를 않았다. 그래서 죽은 사람보다도 산송장을 주체하기가 더 어려웠다. 병식의 아내는 실성을 한 듯이 정 신을 못차려서 시체를 가누어줄 사람도 없었다.

계숙은 수영에게 전보를 치며 일변 정간된 신문사의 간부 들을 찾아다니며 사정을 해서 겨우 초종을 치를 비용을 비 럭질하듯 해왔다.

죽은 사람과 같이 일을 하던 직공들이 대여섯이나 조상을 오기는 했어도, 빈손을 들고온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 람들이 사망신고를 하고 매장 허가를 맡아오고 허여, 몸 수 고를 해준 덕택에 이관까지는 시켜논 것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하면서부터 철 아닌 비가 내렸다. 밤이 들자, 비는 장마때처럼 주루룩 쏟아졌다.

고양이 이마빼기만한 마당은 수렁이 져서 질척거려 드나들 수가 없다.

빈소 방에는 천장이 새어 관 위에 누런 빗물이 뚝뚝 떨어 진다. 수영은 전신의 세포가 녹아내리는 듯 몹시 피곤해서 관 옆에가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양철 대야를 들여다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도당도드랑 허고 관위에서 장단을 치 는 낙수 소리가 듣기 싫어서, 신문지로 천장의 쥐구멍을 틀 어막았다.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짚 썩은 물이 또 누렇게 배어나오곤 한다.

병식이가 생시에 제일 귀여워하던 세 살 먹은 끝엣놈은 집 안이 떠들썩하니까 무슨 잔치날인 줄 아는지, 안방 건너방 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알아듣도 못할 소리를 웅얼웅얼 노래를 부른다. 건너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아부지이.』

를 부르며 발버둥을 친다. 그것이 차마 볼 수 없어 들어놓 면 수영이와는 낯이 익은 터이라,

『아저씨!』

하고 응석을 부리며 수영의 무릎으로 깡충깡충 뛰어 오른 다.

『이게 뭐야? 나 올라갈테야.』

하고는 홑이불을 씌워놓은 아비의 관을 가리키면서 바득바 득 올라가겠다고 떼를 쓴다.

그러는 것을 돈을 주어 군것질을 시켜가며 꾀송꾀송 달래 노라면 여러 사람의 가슴에는 새로운 설움이 부걱부걱 고여 올랐다.

계숙이도 심신이 피곤해서 안방 한구석을 비비고 쓰러졌 다. 그러나 창밖에서 뒤설레는 비바람 소리와 곁에 누운 늙 은이가 그르랑그르랑하고 목구멍에 가래를 끓이는 소리에 잠이 들 수 없었다. 더구나 삼 년 전에 폐병으로 죽은 친오 라비의 초종을 치르던 생각이 눈에 선해서, 누웠을 수도 없 었다.

건너방으로 건너가서 수영이와 격조했던 이야기도 하고, 그 동안의 얼크러졌던 오해를 풀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하였 다. 계숙은 수영이가 시골서 제 소식을 매우 궁금히 여기고,

『그가 허영의 꿈을 깨뜨리고 알몸뚱이가 되어 나를 따라 온다면 전날과 다름없는 이성의 동지로 맞겠다.』

하고 병식에게 그 뜻을 전해달라고 한 편지를 보았던 것이 다.

그 편지의 수신인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밟던 이튿날에야 그 편지가 계숙의 손에 전달되었었다.

그 편지를 보고 계숙은 수영의 속생각을 알았다. 마음 한 구석에 꽁꽁 뭉쳤던 오해를 풀었다. 그러나 아무리 경황이 없는 중이라도 수영의 태도는 여전히 더면더면하다.

더구나 병식의 시체를 뻗혀놓고 그 곁에서 둘이 소근거리 는 것은 차마 못할 것 같았다.

병식의 아내는 사흘 동안에 삼 년이나 늙은 듯, 가뜩이나 강파른 사람이 두 볼이 쭉 빠지고 눈두덩이 푹 꺼졌다. 그 러나 남편이 천만 뜻밖에 그렇게 된 뒤에는 계숙이와 아주 웅치였던 사이가 풀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걸 공연스레 강짜를 했구나) 하고 후회도 하였다. 남자처럼 걷어붙이고 덤비는 계숙이가 아니었더면 안팎 일을 그렇게 선선히 서둘러줄 사람이 없었을 것을 생 각하니, 도리어 매우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오빠 오빠 하고 따러는 다녔지만 어쨌든 남남간인데 어쩌 면 저렇게 설어워할까?) 하기도 하고,

『그래두 산 사람은 먹구 정신을 차려야 허우.』

하고 전에 없던 「허우」까지 하며 음식도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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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도 잠이 아니 왔다. 모든 감각을 잃었기로 친구의 시체 곁에서 쿨쿨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빡빡한 눈을 딱 감 고 누웠으려면 옆에 병식이가 부스럭거리고 일어나 앉는 것 같기도 하고, 별안간 관이 우뚝 섰다가 쿵 하고 머리 위로 넘어 박히는 듯도 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장성이 세지를 못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누워있으려면, 이번에는 관의 천개가 쩍 빠개지며, 술이 엉망으로 취해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병식이가 비틀거리고 나온다.

『이놈아 너희들만 잘 살아라. 천 년 만 년 잘 살아라.』

갖은 악담을 다하고 달려들어 머리를 꺼둘르는 듯도 하다.

수영은 가위를 눌리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서 헛기침을 칵 하며 미닫이를 밀쳤다.

이웃집 양철 지붕에서 장독대에 떨어지는 밤비 소리는 더 욱 요란스럽다. 축축하고도 음산한 바람이 휘둘며 빗발과 함께 방안으로 휘둘려들어 촛불이 훅 꺼지곤 한다.

그러는 동안에 초는 세 가락이나 닳았다. 그때까지 마루에 서 병식의 아내가 흑흑 느끼는 소리는 끊일 줄 몰랐다.

장삿날 아침에는 비가 멈췄다. 뭉개뭉개 피어오르다가 큰 이무기처럼 꿈틀거리는 시꺼먼 구름장 사이로 돈짝 만큼 파 아란 하늘이 빠끔히 내어다보이다가는, 금새 얼굴을 가린다.

바람은 그저 자지를 않아서 가을 일기처럼 쌀쌀하다.

점심때가 겨워서 장례의 행렬은 동소문 밖으로 나섰다. 행 렬이라도 조그만 아기 상여에 겨우 상여군 넷이 두 패를 질 렀고, 뒤에는 수영이와 계숙이와 신문사 사람 두 세 명이 우산을 들고 따를 뿐… 목매달아 죽은 송장이라고 구기하는 사람도 있을 뿐 아니라,

『애들은 데리고 나가 무얼해요.』

하고 수영이가 굳이 말려서 집에다 어린 상주까지 떼어놓 았다.

발인할 때에는 병식의 아내가 목이 잠겨 울지도 못하면서 엎뜨러지며 곱뜨러지며 좇아나오는 것을 계숙이가 간신히 안아 들어갔다. 금새 숨이 넘어갈 듯한 시어머니를 혼자 두 고 나갔다가는 두 초상이 날른지도 몰랐던 것이다.

영구 자동차를 쓰는 것이 속하고 간절한 줄은 알면서도 그 것도, 수영이가 우겨서 상여를 샀다. 볼성모양이지만 한푼이 라도 남겨서 유족에게 주려는 뜻이었다.

길은 몹시 질고 미끄러웠다. 영정 세우지 않은 상여는

「워허」 소리와, 요령 소리도 없이 질퍽질퍽 빗물을 건너 고 묵묵히 언덕을 넘었다.

그 동안에 수영과 계숙은 혹은 앞을 서고 혹은 뒤를 따랐 다. 그러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때도 있건만 두 사람 은 피차에 입을 다물었다.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벙거지 같 은 캡을 쓴 수영의 얼굴은 비통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표 정은 사람이 가까이 하지 못하리만큼이나 엄숙하였다.

미아리(彌阿里) 공동묘지 앞턱까지 오자, 앞에서 상여채를 매었던 상여군 하나가 진흙에 미끄러지자 발목을 삐고는 갑 자기 무릎을 꿇었다. 관머리가 가꾸로 숙이며 땅에가 곤두 박질 하려는 찰나에 수영이가 번개같이 달려들어 상여채를 힘껏 떠받들었다. 계숙이도,

『에고머니 저를 어째!』

하고 기울어진 편을 뻐뚱기며 바로 잡았다.

수영은 철퍽거리는 두루마기를 벗어서 계숙이에게 던지고 말을 삐고 절뚝거리는 사람 대신에 상여의 앞채를 매고, 계 숙이도 한손으로 뒷채를 밀었다. 상여 속의 병식이도 그제 야 편안한 듯 반듯이 누워서 묘지까지 올라갈 수가 있었다.

十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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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의 무덤자리는 유언에 의해서 최 용준의 무덤 곁에 잡 으려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벌써 전후 좌우를 차지해서 그 도 똑같이 못하였다. 그래서 최 용준의 무덤과 비스듬히 마 주 보이는 비탈길 언덕에 광중을 파게 한 것이었다.

『남의 산소의 제절이야 팔 수가 있어야죠.』

하는 것은 부탁을 받고 나왔던 인부의 변명이었다.

곡도 없고 아무 절차도 없는 장례는 간단히 진행되었다.

수영이가 손수 관머리를 안아내려 하관을 하였다.

그리하여 병식은 마지막으로 바라던 안식의 자리 위에 누 웠다. 회색의 고민도, 실연의 쓰라림도, 생활에 들볶이던 육 체도, 한 평도 못되는 흙속에 영원히 파묻혀버리고 마는 것 이었다.

계숙은 얼굴의 근육을 경련시키면서 입속으로,

『오빠, 편안히 주무서요!』

하고 하고 흐느껴 울며 소맷 속의 손수건을 꺼내다가 관 위에 그 수건을 떨어뜨렸다.

일꾼들이 집어올리려는 것을 계숙은,

『고만두서요. 그대로 덮으서요.』

하고 횡대를 덮게 하였다.

수영은 맨 먼저 붉은 흙을 한 부삽 떠서 끼얹으며,

『애끼 몹쓸사람!』

하고 한 마디 꾸짖듯 하고는 무삽을 던지며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떤다. 일꾼들은 사정없이 흙을 푹푹 얹는다.

얼마 안 있지 새로운 묘표를 박는 소리가 죽음과 같이 적 막한 공동묘지의 공기를 흔들었다.

일꾼들은 상여를 흐뎌가지고 내려갔다. 겔 듯하던 하늘은 다시 오만상이나 찌푸려 빗발이 오락가락한다.

수영은 산에서 내려와 공동묘지를 지키는 사람의 집 근처 에서 한참이나 기다렸건만 계숙이만은 내려오지를 않는다.

수영은 기다리다 못해서,

(어디로 갔길래 그저 안내려 올까?)

하고 계숙을 찾으러 산으로 올라갔다.

높고 낮은 무덤만 콩방석을 깔아논 것 같은데 새로 쌓아 올린 봉분 곁에도 계숙은 없다.

(혼자 어디로 갔을까?)

하고 수영은 다시 군소리 하듯하고 공동묘지의 제일 높은 마루터기로 올라가서 사방으로 눈을 달렸다.

그러나 비스듬히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의 더 촘촘히 달라붙 은 고인들 사이에서 하얗게 소복을 한 여자가 돌아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계숫은 저의 친오라비의 무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손길을 마주 잡고 서 있다.

의외로 오라비의 성묘를 하게 된 계숙은 묵은 슬픔과 새로 운 설움에 잠겨 이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꽃이나 한송이 꺾어다 꽂았으면)

하고 두루 찾아다녔으나 애총들 사이에는 시들어가는 할미 꽃 몇 포기 밖에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한식 때에나 누이의 신방을 받는 최 용준의 무덤은, 사초도 못해서 땟장이 반남아 벗겨지고 모표가 비 스듬히 쓰러졌다.

수영이가 가까이 갔을 때에 계숙은 그 묘표를 바로 잡아 세우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수영은 잠자코 큰 돌을 들어다가 쾅쾅 박아주었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 모자를 벗고 잠깐 머리를 숙였다. 병식에게서 용준의 이야기는 익숙히 들었지만 생전에 면분은 없었다.

『입때 아래 계셨어요?』

고마운 듯이 쳐다보는 계숙의 눈은 밑을 벌을 쏘인 것만큼 이나 부어올라서 그의 특징인 쌍꺼풀이 없어졌다. 수영이가,

『인제 고만 내려갑시다.』

하니까 계숙은,

『내려가도 나는 갈 데가 없는 사람이야요.』

하고 애소하듯하며 제절 앞에가 쪼그리고 앉는다.

『나두 두 오빠 틈에나 누워버렸으면……』

계숙의 눈에는 또다시 더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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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계숙이가 가엾어 보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다만 하나였던 동기까지 잃어버린 후 더구 나 사고무친한 타향에서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동정에 겨웠 다. 의오라비 구듭을 끝까지 치워주고 공동묘지까지 따라와 서 눈이 붓도록 운 것도 반은 제 설움에 겨워서 운 것이 틀 림없으리라 하였다.

『그럼 여기서 사나요? 자 나허구 내려갑시다.』

수영은 매우 다정히 일어서기를 권하였다.

『같이 가면 어디까지 같이 가나요? 헤어지면 마찬가지죠.

어서 수영씨나 내려가세요. 난 두 오빠가 계시니깐 든든해 요.』

하며 계숙이가 멀거니 바라다보는 대로 수영의 시선도 따 라갔다. 뗏장도 입히지 못한 붉은 흙만 두툭하게 쌓아올린 병식의 무덤이 마주 건너다보였다.

『두 친구가 과히 외롭진 않겠군.』

수영이도 말에 한숨이 섞였다. 계숙은 젖은 잔디를 어루만 지며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다가,

『참 오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수영씨헌테는 편지로라도 무 슨 유언이 있었겠죠? 뭐라고 그랬어요?』

『……』

수영은 그 말대답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병식의 유언의 다만 한 가지 간절한 부탁은 계숙이를 길이길이 버 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네? 무슨 말이던지 있었겠죠?』

하고 계숙은 다구쳐 묻는다.

그래도 우물쭈물하고 대답을 하지 않으니까,

『왜 내가 알아선 못 쓸 비밀이야요?』

수영의 눈치를 더욱 유심히 보면서 채근한다.

『아니요.』

수영이도 그 곁에 가 쭈그리고 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렇게 주저허실 게 뭐야요? 우리도 얼마 안 있으 면 저렇게 땅속으로 들어가고 말 걸. 피차에 속마음을 감추 고 지낼 게 뭐 있어요? 인생이란 참말 허무한 걸요.』

계숙은 병식의 유언을 꼭 알려는 것보다도 오래간만에 단 둘이 만난 김에 가슴속의 맺혔던 응어리를 풀어보자는 수작 이었다.

『그건 차차 알기로허구 어서 내려갑시다. 비가 또 쏟아질 것 같은데……』

계숙은 수영이가 꾸물거리는 것이 갑갑한데다가 말대답은 안하고 자꾸 내려만가자는데 성미가 났다.

『싫어요! 억수장마가 져도 난 안 내려갈테야요.』

수영이도 마지못해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고집을 세우실 것 아니에요. 그런 이야기야 담날 얼마든지 헐 기회가 있으니까요. 실상 말을 허자면 시간이 길어질 테니까 이 자리를 떠나자는 말이지 무슨 비밀이 있 어서 말하기를 꺼리는건 아니에요.』

하고 뿌옇게 변명을 하였다. 그래도 계숙은 꼼짝도 아니하 고 앉았다.

『난 수영씨의 속을 다 알고 있어요. 날 오해하고 계실 줄 도 잘 알아요. 내려가신 뒤에 편지도 가끔 해드리지 못한 사정은 나도 이 자리에서 길게 말씀하고 싶지 않아요. 퍽 미안은 했지만요. 난 벌써 그집에서 나왔어요. 인제 아주 관 계가 없게 됐어요. 남자들은 공연시리 여자를 못미더워하는 습관이 있지만, 난 그렇게 철없는 여자도 아니구요, 두 가지 맘을 먹을 줄도 몰라요. 그야 처지가 처지니까 공상도 많이 하고 이 궁리 저 궁리 많이 했던건 사실이지만 난 수영씨를 잊어버렸거나 한번 약속한 사람을 배반할 행동을 허지 않았 어요!』

하고 열변 제 변명을 해가며 그동안 지낸 일을 하나도 떼 어 놓지 않고 청산유수로 보고를 하였다.

굵기가 콩알만큼씩이나 한 빗방울이 계숙의 이마에, 수영 의 어깨에 떨어진다.

계숙은 손등으로 빗방울을 씻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한다.

문안으로 들어간대도 조용히 이야기헐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서, 말난김에 단단히 붙잡고 지난 일이나 속시원하게 이야 기나 해버리려는 ?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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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의 감정에 칭칭 감겼던 오해의 줄은 올올이 풀렸다.

어떻게든지해서 남자의 노예가 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 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보려던 수단은 매우 유치하였다.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 같은 위험한 짓을 하였다.

그러나 그 동기만은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앞을 재기를 싫어하는 성미야요. 어떻게 될지 나버텀 모르는 일을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수영씨헌 테도 조 경자를 이용해보려는 계획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던 게지, 결단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숙의 말을 믿었다. 경우가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고 양해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모르고 오해만 했던 것을 뉘우치기도 하였다.

더구나 계숙이가 전후 사정이며 그 동안의 경과를 열심히 웅변으로 이야기하는 동안에, 수영은 매우 흥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흥분은 조금도 육감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년 전 병식의 소개로 계숙을 처음 만났을 때에 저에게 선동이 나 하듯이 열변을 토하던 그 어조와 그 가랑가랑한 목소리 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을 느낄 때, 측량하기 어려운 감 회가 끓어 올랐던 것이다. 수영의 마음은 당시의 추억으로 가득찼다.

계숙이도 수영이가 고개만 끄떡이고 앉아서 대답도 쾌활하 게 아니하는 것이 갑갑하긴 하면서도 부지중에 수영이와 같 은 감정으로 얼려들어갔다.

『잘 알아들었애요. 내가 오해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 이젠 고만 내려갑시다.』

하고 계숙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 집어치우고 마음을 확 풀어버리자는 의미였다.

그때에 계숙은 비로소 볕에 시꺼멓게 그을은 수영의 얼굴 을 똑똑히 보았다.

(아이, 구롬보 하고 사촌간은 되겠네.)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동안이 한 시간은 넘었다. 저녁 하늘에는 인생의 모든 비극을 걷어간 듯 구름이 걷히고 세차게 부는 바람은 궂은 비를 좇았다.

환하게 되어가는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햇발에 병식의 무 덤은 황금덩이처럼 싯누렇게 빛났다.

두 사람은 상여 뒤를 따라갈 때와는 딴판인 기분으로 공동 묘지에서 내려왔다. 계숙은,

『서병식지요(徐丙植之墓)』

라고 쓴, 먹 흔적이 선명한 묘표 앞에서 공손히 예를 하고 나서 또 눈물이 갈쌍갈쌍해지며 차마 돌아서지를 못하는 것 을,

『자 눈물은 고만 거둡시다. 운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나 요? 인젠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먹여살릴 도리를 차려야지 요.』

하면서도 수영이 역시 얼른 돌아서지를 못하였다.

다만 하나이던 친구를 발가벗겨서 벌판에다 내버린 것 같 아서,

(오늘밤에 비나 오지 말았으면……)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돌아서 내려오자니 병식이가 등덜미를 끌어다리는 것 같 고,

『여보게 혼자들만 가나?』

하고 소리를 지르며 따라내려오는 것 같아서 걸음이 잘 걸 리지 않았다.

문안으로 들어오면서야 수영의 말문이 열렸다.

시골 형편과 농민의 생활과 그동안 지낸 일이며 겹쳐서 어 떠한 길을 밟아나아가겠다는 포부를 이야기하였다. 그것이 고맙기도 해서,

『네, 네.』

하고 일일이 쾌활한 대답을 해서 말을 끄집어내었다.

더구나 비참한 농민들의 생활과 수영이가 실행하려는 모든 계획이 구구절절이 계숙이에게는 큰 감동을 주었다.

계숙은 「가난고지」의 자연과 인물과를 그려보고 수영이 와 함께 내려가서 그네들을 위하여 활동할 공산도 해보았 다.

계숙의 눈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었다. 동시에 새로 운 희망과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로부터─수영이가 시골로 내려가 어떠한 계획으로 어 떻게 활동한 것을 계숙에게 힘들여 말한 가장 중요한 내용 을 부득이한 사정으로 쓰지 못한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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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수영이의 이야기에 취해서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 다. 「삼산평」을 지나 시소문 턱을 먼을 때까지도 수영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수영의 입에서,

『우리 시골로 같이 내려갑시다.』

하는 최후의 한 마디가 나올 듯 하면서도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계숙은 그것이 무한히 섭섭하였다.

『우리 이번에 같이 내려갑시다. 예산없이 동경유학할 공 상도 말고, 허는 일 없이 서울서 지내볼 생각도 다 집어치 우고, 서울로 내려갑시다. 갑갑하고 고생은 되겠지만 농촌 밖에 우리의 일터도 없겠고 더구나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촌 여편네의 그네들의 자녀를 위해서 일생을 바칩시다. 한 사람의 일을 두 사람이 노나서 맡는다면 얼마나 의지성 있 고, 서로 용기를 돋아나가면 얼마나 유쾌한 마음으로 어떠 한 고역이라도 할 수 있을게 아니에요. 계숙씨, 이번 기회가 좋으니 나를 따러 내려온다느니보다도 나의 주의와 사업에 공명을 할터이니 아주 자발적으로 내려갑시다.』

하고 은근히 권하기도 하고, 손을 잡아 끌어주었으면 얼마 나 고마울까?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할 말 이 아닐까?

그런데 수영은 말을 그 근처까지 빙빙 돌리기만 해서, 가 려운 데 손이 닿지 않는 듯,

『자기 얘기만 했지그려, 날더런 어떡허란 말야?』

하고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계숙이 역시,

『이번에 데리고 가 주서요.』 하기는 싫었다.

(뉘 입에서 먼저 그런 말이 나오나보자)

하고 속으로만 단단히 별렀다.

큰길에서 극장의 광고를 돌리느라고 인력거를 탄 악대가 뽕뽕거리고 지나간다. 기생을 실은 자동차가 흙탕물을 끼얹 고는 눈앞을 달린다. 비 뒤의 교외의 절간으로 하룻밤의 향 락을 꿈꾸려고 나가는 모양이다. 유성기 상회의 전기 축음 기는 한길로 나팔을 벌리고 유행가의 째즈 곡조를 아?다.

스푸링 코트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자를 오그려 쓴 젊은 남자가 찻집에서 나와서, 어슬렁거리고 걸어오다가 수영과 계숙에게 곁눈질을 하며 지나간다. 저고리는 젓통만 가리고 구렁이 껍질같은 치맛자락을 구두 뒷축까지 느린 단발랑(斷 髮娘)은 카페의 여급인 듯 값싼 향수 냄새를 품긴다.

『저런 꼬락서니를 안 보니까 살이 찔 것 같아요.』

계숙은 수영의 말문이 열린 김에

『참 그런데 어느 날 떠나서요?』

하고 다가서며 물었다.

[편집]

『글쎄요.』

또 「글쎄요」다.

『뒷일을 어떻게든지 처치를 해야 헐테니까 며칠 더 있어 야 떠나게 되겠어요.』

이번에도 같이 내려가자는 말은 할 생각도 아니한다.

(아이고 저런 뚱딴지를 어떡허면 좋아.)

하면서 계숙은 수영의 얼굴만 곁눈질을 해 보았다.

…주인을 잃은 병식의 집은 의외로 고요하였다.

반우도 기다린 것이 없거니와 인제는 아무 떡심이 풀려서 모두들 누워있었다.

건넌방에 걸어놓은 두루마기와 뒤축 찌그러진 구두가 새로 운 눈물을 자아낼 뿐 병식의 아내는,

『얼마나 고생들을 허셨어요? 저녁을 잡수셔야지요.』

하고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시어머니의 미음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내려가는 것을,

『우리는 뭘 좀 사다 먹을테야요.』

하고 계숙이가 가로막았다.

병식의 아내는 아무리 처지가 어렵더라도, 사진이나 걸어 놓고 조석 상식을 지내겠다는 것을

『그런 형식은 다 집어치시지요.』

하고 수영이가 반대를 하였다. 그리고는,

『잠깐 다녀 들어오리다.』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는 한참 만에 쌀 한 가마니와, 장작 한 마차를 사들여다 쌓느라고 부산하였다.

『우선 얼마 동안만 지내시면 무슨 도리든지 생기겠지 요.』

하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올라오던 전날밤에 대흥의 도야 지 판 돈과 곗돈을 돌려가지고 온 것을 입때 집어넣어두고 돈가진 싹도 보이지 않고 있다가 장사까지 치른 뒤에야 내 놓은 것이다.

『아이고 너무나 염치가 없습니다. 이 태산 같은 신세를 언제나 갚나요.』

하고 백배사례를 하는 젊은 과부는 측은해 볼 수가 없다.

수영은 마루 끝에 걸터앉으며,

『아직 정신을 차릴 수 없으시겠지만 앞으로 어떡허실 작 정이세요?』

하고 병식의 아내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시골집의 형편이 웬만하면 유족을 끌고 내려가고도 싶지만, 저의 집이 빚에 치어 죽을 지경이니 그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빈말도 생색만 내기도 싫었다.

『글쎄요, 아주 망막해요. 어머님이나 기동을 하시면 친정 으로나 내려가볼까 하는데요. 저의 집도 살기가 말이 아니 야요. 그래도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니깐 내쫓지는 않으시겠 지만, 이 꼬락서니를 하고 친정엔들 무슨 낯을 쳐들고 가서 이 여러 식구를 떼밀겠어요.』

하고 난감해서 한숨을 쉰다.

『나 역시 여러 가지로 생각은 해봤지만 별도리가 없는 걸 요.』

하고 수영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앞에 돈 백 원이라도 있으면 구멍가게라도 내서, 몇 식구가 뜯어먹고 살도록 주선을 해볼 생각도 없지 않으 나, 그도 여의치 못하였다. 사글세 집이라도 방이나 여럿이 면 학생이라도 쳐보겠는데, 그것도 부질없는 공상이었다.

『염려 마서요. 살 사람이야 설마 굶어 죽겠어요?』

하고 병식의 아내는 도리어 수영이를 위로해 준다. 더구나 그는 뒤늦게 팔자를 고칠 형편도 못 되지 않은가?

계숙이 역시 방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서 건넌방 툇마루 끝 에 걸터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오늘은 여기서 주무실 테지요? 난 먼저 있던 집으로 가 서 일찍 좀 잘 테야요.』 하고 일어선다.

『오늘은 가서 편안히 쉬우. 며칠째 잠도 못 자고 그 애를 썼으니 오직 고단허겠수.』

병식의 아내는 친절을 다해서 계숙을 위로한다. 계숙은,

『난 괜찮아요. 인젠 일찍 주무서요. 그러다가 생병이 나시 면 어떡해요.』

하고 벗어놓았던 검정 두루마기를 껴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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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계숙의 뒤를 따라나갔다. 컴컴한 골목에서 계숙의 손을 잡으며,

『내일이라두 한 번 찾어가지요. 여기서 또 만나든지 ……』

하고 작별을 하였다. 계숙은 그저,

『네.』

할 따름이다. 단 둘이 마주앉아서 밤이라도 새워가며 좀더 실컷 의견을 바꾸고 무슨 결정을 지을 생각은 간절하나, 하 숙이나 병식의 집 건넌방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상싶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병식의 아내가 듣는데 단둘이 붙어 앉 아서 숙덕거리는 양심이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저 녁은 서로 미진한 채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계숙은 가다가 돌아서며,

『그럼 내일 저 있는 대로 와주세요.』

하고 손짓을 해보였다.

하숙하던 집에 들어서자 주인마누라의 인사를 받을 사이도 없이, 계숙은 안방 아랫목에가 쓰러졌다. 여러 날 동안 노심 초사를 한 끝에 찬비까지 맞고 돌아다녀서 오슬오슬 오한이 나던 몸이 녹자, 신열이 났다. 다리 편이 쑤시고 머리가 쪼 개지는 듯이 아파서,

『내가 아마 몸살이 났나봐요.』

한 마디를 하고는 주인 마누라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 다.

병식의 장사 전날 잠깐 이 집에 들렀기 때문에 마누라는 의오라비가 변사가 나서 계숙이가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는 줄을 알고 있었다.

『아이 가엾어라, 너무 여러날 삐쳐서 몸살이 났구먼. 머리 가 사뭇 펄펄 끓는걸. 약이나 한첩 지어다 주리까?』

하고 마누라는 계숙의 이마를 짚어주며 처네를 내려서 덧 덮어주며 부산을 떨다가 머리맡에 가 앉아서 담배를 퍽퍽 피더니,

『참 이봐요. 내가 나가서 약을 지어가지고 들어올게. 불을 끄구 누워요. 어렵드라두 나가서 중문을 걸구.』

하고는 치마를 갈아입느라고 부스럭거린다. 계숙은 말대답 을 할 경황도 없이 약까지 지어올 꺼 없다는 뜻으로 이불 밖으로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아니야, 벌써 열 사흘째 고 조 경잔가허는 조방구니가 왔어. 무상시루 와서는 애매한 나를 붙잡구선 계숙이 간 데 를 알으켜달라구 애가 말라서 묻겠지. 그래 한번 떠나간 뒤 엔 당최 소식을 모른다고 딱 잡아뗐지. 그래두 일전에 행길 에서 이리루 오는 걸 분명히 본 사람이 있는데 무슨 딴전이 냐고 빠득 빠득 우기고 세상에 가야지.』

『그래서요?』

계숙은 팔로 이불자락을 젖히며 머리를 번쩍 들었다.

『아, 그러니깐두루, 이 집에 있는 걸 번연히 아는데 속이 면 나중에 자미가 없을테니 그런줄 알라구 발을 동동 구르 면서 사뭇 으르딱딱거리구 갔는데……』

『그래 오늘두 왔다 갔어요?』

하고 이불 밖으로 내다보는 계숙의 얼굴은 빨개졌다. 신열 이 난데다가 매우 흥분이 된 것이다.

『아니, 그래서 오늘은 종일 중문을 걸구 있었는데 어쩌면 또 오기가 쉬울걸. 내 고따위로 악지가 세고 약어빠진 계집 애년은 첨 봤어. 그러나 마루끝에다 내던지고간 옷보퉁이를 들켰으니 어쩌면 좋아? 「조 책보가 눈에 익은걸 단거리 옷 보퉁이를 두구 나갔군」 하고 입을 삐죽거리면서 언제까지 든지 들어오는걸 만나보구야 가겠다구 빚쟁이처럼 떼를 써 요 글쎄. 그러는걸 별별소릴 다해 보냈어요.』

하고는 마루끝으로 나가더니 계숙의 구두를 집어가지고 들 어와서

『정말 이건 들키면 어떻거리구.』

하고 장밑에다 감춘다.

계숙은

『아아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오면 어때요? 누가 무슨 죄 를 졌나요? 아무 염려마서요.』

하고는 말할 기운도 없어서 도로 머리를 떨어뜨렸다. 머리 가 어찌 쑤시는지 잠자면서도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겁날 거야 없지만, 어저께는 설거지를 허면서 내다 보니 까 문밖에서 웬 검정외투를 입은 사내가 자꾸만 기웃거리겠 지. 여편네 혼잣 살림이라, 아닌게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길는 지 겁두 나요.』

하고 호들갑을 떤다.

『약은 무슨 약이야요. 제발 고만두세요.』

하고 계숙이가 말려도,

『그러나 큰 병이 나면 어쩔라구.』

하면서 마누라는 그예 고집을 세고 약을 사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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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가 나간 뒤에 계숙은 매우 조마조마하였다. 그러나 신열이 더 높아져서 구들장 위에서 지진이 터진데도 꼼짝달 싹 못할 것 같다. 대문을 걸기는커녕 일어나 전등불을 끌 수도 없었다.

그러나 혼몽중에도 경자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는 것 같 기도 하고 눈 하나가 뽀얗게 먼 경호가 만장을 들고 뛰어드 는 것 같기도 하여서 그럴 때마다 등어리에다 찬물을 쫙쫙 끼얹는 듯하였다. 그렇지만 계숙은

(오면 왔지 저희들이 어쩔라고? 겁날게 뭐야)

하고 안간힘을 썼다. 아픈 것을 참고 일어나서 불을 끄고 문을 닫는 것은 더구나 비겁할 것도 같아서 닥드리기만 하 면 담판 씨름을 할 각오를 하고 누웠다.

한 반시간만에야 마누라가 약을 지어가지고 돌아왔다. 마 누라가 문간으로 들어서자 대문 소리가 왈가닥거리며 떠들 썩하더니,

『누가 도적질을 허러 들어가는 줄 알아요? 사람이 들어가 는데 문을 닫게.』

하는 젊은 여자의 샛된 목소리와

『온 별꼴을 다보겠네. 내 집문을 내가 닫는데, 못들어온다 면 못들어 왓지 그래 무슨 잔말야.』

하고 사설하듯 하는 마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년의 것이 그예 묻어 들어왔군!)

하고 계숙은 이불을 푹 뒤집어 썼다. 몸만 성하면 뛰어나 가서 한바탕 해내겠지만 골이 휭휭 내돌려서 만사가 귀찮았 다.

경자와 마누라는 마당에서 서로 떠다 밀면서 아귀다툼을 한다.

『글쎄, 오늘 저녁엔 이 집으로 들어오는걸 내눈으로 봤다 니깐 그래요. 들어온지가 한 시간쯤밖에 안 됐는데 노인네 가 왜 거짓말을 해?』

하고 경자가 댓돌로 올라서려는 것을

『왜 거짓말을 해? 반지빠른 계집애같으니라구, 넌 네 어 미두 없구 네 할미두 없단 말이냐. 누구더러 반말이야, 그래 네 눈엔 내가 너의 집 안짬이나 벅데기루 뵌단 말이냐? 요 배지 못헌 계집년 같으니라구!』

하고 마누라는 손녀뻘 밖에 안되는 경자에게 반말을 듣고 화가 꼭두까지 뻗쳐서 경자의 앞가슴을 떠다 밀며 발을 구 른다. 그래도 경자가 깐죽깐죽하게 마루 끝에 가 걸터앉으 며,

『암만 욕을 해 보구려. 내가 가나. 방안에 있는 사람을 없 다면 돼요.』

하고 안방 미닫이에 붙은 유리 쪼각으로 갸웃이 들여다본 다.

『왜 남의 집 방속은 들여다 보는거야, 주인이 나가라면 나갔지그려. 여북해야 계집애 년이 뚜쟁이 노릇을 하구 댕 긴담 얘이 더러.』

하고 마누라는 안방문을 막아서며,

『에이 튀 튀.』

하고 경자의 어깨넘어도 침을 뱉는다.

『왠만허면 나두 비릿비릿 허게끔 이 욕을 당해가면서 좇 아 댕기질 않아요. 계숙이를 꼭 보구 급히 전헐 말이 있으 니깐 그러는게지.』

『글쎄 큰일 아니라, 마른날 벼락을 치더라두 내가 아랑곳 헐게 아닌데야 무슨 여러 잔말이냐 말야. 온 나이 육십이 넘었어두 요따위루 말귀 못 알어듣는 계집애는 첨봤어.』

하고 악탕관을 찾아서 지어온 약을 다리려는데 경자가 방 문을 팔싹 열고 들어설까 보아 뒷짐을 지고서서 꾸중만한 다.

계숙은 바로 중방 하나를 격해서 둘이 싸움 싸우듯하는 것 을 듣고 누웠자니, 커다란 송곳으로 가슴 한복판을 쑤시는 것 같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큰 죄나 지은 것처럼 숨을 죽이고 누워 있는 저 자신이 너무나 비겁한 것도 같았다. 더군다나 아무 까닭이 없는 주인 늙은이가 한테서 막음을 하느라고 애를 쓰는 것이 몹시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경자는 최후의 결심을 한 듯

『암만 고집을 해봐요. 내가 들어가 보고야 말걸.』

하고 뛰어올라가 방문고리를 잡자, 그와 동시에

『나 여기 있다! 어쩔테냐?』

하고 계숙이가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밀치고 내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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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이가 지계문을 홱 떠다미는 바람에, 경자는 바로 문고 리에다가 이마를 부딪고 잠시 쩔쩔맸다. 경호가 눈을 다치 고 어쩔줄을 모르듯이 이마를 짚고는 마루 위에서 매암을 돌았다.

『인제와서 너희허구 무슨 상관이 있길래 쫓어 다니면서 남까지 성화를 시키는거냐? 요 빤빤한 계집애 같으니.』

계숙의 입에서도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경자는 눈물까지 핑돌아가지고 계숙을 노리며 말도 못하고 할딱거리더니,

『오빠가 입원을 허셨어, 바로 눈동자에가 유리쪼각이 박 혀서 수술을 했는데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 아주 병신이나 될까봐 야단이 났었어. 그래 말쩡한 사람을 소경을 만들어 놔두 괜찮단 말야? 요 독사같은 계집애년아.』

하고 말려들어 계숙의 저고리 앞섶을 잡는다. 계숙은 경자 의 팔을 잡아 뿌리치며,

『뭐야? 날더러 독사같은 계집애라구? 그 능구렁이같은 놈 의 눈깔 하나쯤 탕 빠져두 좋다. 사람을 놀린 벌이 내린줄 모르고 누구를 탓허는 셈이냐? 나가! 냉큼 안나가면 네 눈 깔을 마저 빼줄테다!』

하고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달려드는 품이 여불없이 열병에 들뜬 사람같다. 계숙의 서슬이 푸르니까 경자는 한풀이 꺾 여서 사정하듯,

『계숙이 들어봐. 그렇게 되립다 내게로 덤벼들게 아니라, 오빠가 수술을 하고 나서는 자꾸만 잠꼬대하듯 계숙이를 부 르면서 마지막으로 꼭 한 마디만 헐말이 있으니 날더러 데 려다 달라구 애원하듯 허시니 어쩌면 좋아?』

하고 대번에 싸그러진다. 실상 경호는 눈을 다치고 병원으 로 인력거를 타고 가서는 계숙에게 봉변을 한 것은 경자에 게만 귀뚱을 했을 뿐이요. 큰집이 발칵 뒤집혀서 병원으로 들끓어 왔을 때는,

『술이 취해서 발이 헛놓여 개천에 가 빠지면서 안경을 쓴 체 전봇대에다 부딪쳤다.』

고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계숙에게 봉변을 한 소문이 쫙 퍼져서, 신문이나 잡지기자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저의 신분은 아주 망치고 말 것이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술을 한 뒤에 마취된 정신이 깨어나면서,

『계숙이를 좀 불러다우. 어서 불러와.』

하고 헛소리 하듯 하였다. 속으로는 여간 분하지가 않고 갈아 마시고 싶도록 계숙이가 밉지마는 무슨 명예의 부상이 나 당한 것 처럼 붕대로 눈을 퉁퉁이 처매고 누운 제 꼴을 보면, 그래도 여자의 마음이라 계숙이가 회심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어떠한 비굴한 수단으로라도 최후의 목적을 달하고 말리라. 그런 뒤에는 헌 신짝 버리듯 해서 제가 눈 을 다친 것보다 더 큰 상처를 계숙의 가슴 한 복판에 내어 주려는 복수의 수단이 마지막으로 남았던 것이다.

계숙은 가뜩이나 몸이 아픈데 분노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 면서,

『나허군 더 말헐 게 없다. 헐 말은 무슨 말이고 가긴 또 어딜 가잔 말이냐? 사람을 그만큼 욕을 뵀으면 고만이지, 요 가증스런 계집애년아!』

하고 달려들어 사내처럼 경자의 멱살을 바짝 추켜쥐고는 마당으로 끌고 내려갔다. 마누라도,

『조런 계집애는 버르쟁이를 톡톡히 가르쳐 놔야해.』

하고는 뒤에서 경자의 등을 떠다민다. 경자는 목을 졸려서 숨이 막혔다가,

『너 이럴테냐? 널 그냥 내버려둘 줄 아니? 고소를 할테 야. 나가는 길로 파출소로 갈테야.』

하고 발악을 하며 한편으로는 위협을 하는 것을

『흥 고소를 해? 어디 그래 봐라, 누가 창피한가? 어서 나 가서 순사라도 불러와! 내가 먼저 너희 연놈들을 유인죄로 고발헐테니 어서 맘대루 해봐!』

하고는 경자의 꼭두를 집어 대문 밖으로 떠다밀고는 빗장 을 덜컥 질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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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병식이가 쓰던 텅 비인 방에 홀로 누워 끔벅이는 촛불 아래서 앞일을 곰곰 생각해 보느라고 밤 늦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곁으로는 무언이 같은 수영이언만 내심으로는 계숙에게 대 하여 작정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당자에게 표시하 지 않은 이유는 별 것이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계숙이를 데리고 내려가야 한다. 당자가 아직 도 시골가서 살 결심을 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먼저 권해야 만 한다) 하다가도,

(그럴게 없다. 내가 먼저 끌어선 안된다)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계숙은 제 이야기를 통해서 시골 형편을 자세히 들었고 농촌을 토대로 앞으로 활동할 계획이 며 저의 주의 주장에 공명은 하였으나, 막상 시골로 내려가 보면 지금 상상하던 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 사실이다.

(설마 이 지경일 줄은 몰랐다)

하는 병식과 함께, 닥쳐오는 실망과 환멸을 막아 줄 도리 가 없을 것 같았다.

또 한 가지는 이제까지 서울서 견문 많은 높은 여자가, 아 무리 사랑이 중하고 저의 감화를 깊이 받았다 손치더라도, 도회 여자의 탈을 일조일석에 훨훨 벗어버릴 성싶지가 않았 다. 생활의 환경을 바꾸기는 가장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몸에 베옷을 걸치고 꽁보리 밥에 고치장을 비벼먹고도 배탈 이 아니 날만큼 단련을 받으려면, 여간한 각오와 참을성이 없이 농촌 생활은 흉내도 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계숙에게 그럴 수 있는 소질만은 있다. 그렇지만 암만해 두……)

하고 다시 한번 머리를 흔들었다.

(더구나 자진해서 가겠다고 하면 모르지만 내가 먼저 가자 는 말을 내면 안돼. 저헌테다 책임을 단단히 지어 주어야지)

하고는 계숙이가 자발적으로 따라서기 전에는 제가 같이 내려가자는 말을 내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계숙이가 조만간 반드시 저를 따라 시골로 내려오고야 말 것이 단단히 믿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병식의 머리때가 묻고 눈물 흔적이 얼룩얼룩한 베개를 비 고 누웠자니,

(내가 서울에 있었더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었을 걸)

하고 수영은 친구와 너무나 격조해 지냈던 것이 다시금 후 회가 났다. 안방에서 어린 것이 잠을 안자고 칭얼거리는 소 리에 억지로 눈을 감고 누워서,

(이럴 때 담배나 피울 줄 알았더면)

하고 답답증을 못이겨 애를 쓰는 판에,

『문열어라!』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소리가 요란히 났다. 그 목소리를 먼저 알아 듣고 뛰어나가는 것은 병식의 아내였다.

『아이고 오빠.』

『그런데 대체 이게 웬 일이란 말이냐?』

허는 목메인 대화가 중문간에서 들렸다.

병식의 큰 처남이 그제야 통부를 받고 막차로 왔던 것이었 다. 병식의 처남은 다른 지방엘 갔다가 어제 통부를 받고 왔다는 변명을 한 후 마루끝에서 누이로부터 변사가 난 경 과를 듣고 남매가 마주 붙잡고 울다가 건넌방으로 들어왔 다.

수영은 불을 켜고 이불을 걷어치운 후에 서로 수인사를 하 였다. 병식의 처남은 나이 사십이나 된 진실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밤 늦도록 세 사람이 앉아서 의논한 결과 수영은 비로소 병식의 유족에 대하여 안심을 하였다.

병식의 처남은 작년에 새로 정미소를 하나 냈는데, 영업이 해롭지 않게 되어서 식구가 먹고 살만은 하다는 것과 기왕 일이 이모 양으로 된 바에야 모두 시골로 거산을 하는 도리 밖에 없다고 하며 솔가할 준비까지 해가지고 올라왔는 것이 었다.

[편집]

이튿날 아침 수영은 계숙을 찾아갔다.

두 사람 관계를 대강 알고 있던 주인 마누라는,

『최계숙씨가 여기 있지요?』

하고 들어서는 수영을 보고,

『어서 들이오. 몸살루 엊저녁엔 대단히 앓었는데 식전엔 좀 정신이 났나보우.』

하고는 오래간만에 만난 사위나 영접하듯이 수영을 맞아들 였다. 얼굴은 꺼멓게 그을었는데 두껍다란 검정 두루마기를 입은 것을 훑어보고,

(외화가 색시감만 못허군)

하면서도 옷모양이나 내고 하얀 얼굴이 빤들빤들하게 달은 서울의 젊은 사람보다는 잠시 보매도 건실하고 믿음직스러 워 보였다.

수영은 서슴치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계숙은 일어나 이 불을 두르고 앉으며,

『벌써 아침을 잡숫고 오시오?』

하고 푸수수한 머리카락을 매만져 올린다.

『왜 어디가 편치 않으세요? 밤새에 그런 줄을 몰랐구면 요.』

『몸살이 났는지, 엊저녁엔 아주 혼났어요.』

『너무 애를 써서 그랬구먼요.』

하고 수영이가 머리맡에 앉으니까 마누라는 자리를 비켜 주려고 밖으로 나가며,

『방안이 턱 얼리는군. 인젠 든든허지?』

하고 두 사람을 흘금흘금 번갈아 보다가 계숙을 놀려 준 다.

『노인네가 손수 약을 지어다 두첩이나 연거퍼 다려 주셔 서, 열은 거진 다 내렸어요. 저 노인의 신세를 어떻게 갚을 는지 몰라요.』

하니까,

『온 천만에, 언제 둘이 살림살이를 재미있게 허거들랑 집 구경이나 시켜줘요. 평생 좋아허는 담배나 피여 올리구.』

하고는,

『뭘 좀 먹어야지 감기몸살엔 먹구 앓어야 해.』

하고 부엌으로 내려간다.

수영은 제가 앓을 때에 계숙이가 와서 다리를 주물러주던 생각이 나서, 싱글싱글 웃으면서

『다리좀 주물러 드릴까요?』

하고 다가앉는 것을,

『다리 주물른 품앗일랑 이담에 하서요.』

하고는 두 사람은 잠시 지난 날의 추억에 잠겼다.

수영은 병식의 처남이 엊저녁에 올라와서 누이의 식구들을 다 데리고 내려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참 잘 됐구면요. 나두 뒷일이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어 요. 그래 언제 떠난대요?』

『암만 없는 살림이라두 벌여 놓고 살던거니까, 이삿짐을 꾸리려면 오늘 낼은 못 떠날껄요.』

『그럼 수영씨는 떠나는 것까지 봐 주고 내려가시겠어 요?』

『글쎄요. 병든 노인네를 어떡했으면 좋을지 걱정인걸요.

떠나는 것까지 보아 주긴 해야 옳겠는데 시골 일이 하루가 급해요. 지금이 여간 바쁜 때가 아닌데……』

하고는 여전히 내려갈 날짜를 똑똑히 말을 아니한다. 계숙 은,

『그런데 나도 송구스러워서 하루라도 이 집에 더 있긴 싫 어요.』

하고는 이어서 엊저녁에 경자가 찾아와서 한바탕 야료를 하다가 쫓겨났다는 것과, 그 동안 경호의 경과를 이야기하 였다. 그런 말은 수영에게 들려 줄 필요도 없겠고 이야기하 기도 매우 불쾌하건만 경호의 집과 수영의 집의 관계를 아 는 계숙이로서는 수영에게 그동안 지난 일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 관계라느니보다도 저 하나 때문에 수영의 집 생활문제에까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영은 고개만 끄덕이면서 계숙의 말을 듣고 앉았 다가

『앞으로는 더 귀찮은 일이 생길는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혼자 있으면 만만하게 보구 또 무슨 수단을 쓸는지두 모르 니까요. 그렇지만 그까짓건 걱정헐 게 없어요. 하루바삐 자 리를 뜨면 고만이지요.』 하고 유산태평이다.

『그래도 제 말마따나 상해죄로 고소라도 하면 귀찮지 않 어요?』

하는 계숙의 말에,

『온 별 걱정을 다 허시는구려. 그럼 미국경제학사 ○○전 문학교 교수의 체면은 어디로 가구요?』

하고 수영은 무릎을 치며 껄껄 웃는다.

十六[편집]

[편집]

아침 여섯 시 인천행 첫 차는 경성역을 떠났다. 찻간에는 승객이 별로 없는데 수영은 맨 끝엣 간을 탔다.

전송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 떠나는 길이었다. 그 전날 밤 수영은 다시금 신중히 생각해본 결과 계숙이를 그대로 내버 려두고 인사도 아니하고 내려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수영의 눈에는 암만해도 계숙이가 아주 농삿군의 아내가 될 성부르지 않았다.

만일 제가 먼저 내려가자고 권했다가, 정구지역을 견디지 못해서 도로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하는 날이면, 그 책임은 제가 져야만 한다. 책임을 지는 것쯤은 겁날 것이 없지만, 그렇게되고 보면 시골 일은 죽도 밥도 아니된다. 더구나 그 까닭으로 둘의 사이까지 뜻밖에 파탄이 생기게 될까 염려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정말 나를 따라올 결심을 했다면야 제 발로 걸어올 일이지.)

하고 계숙이가 제출풀에 내려오기만 다시금 바랐다. 그러 면 나중에 후회도 못할 것이요, 책임감이 더 굳세어져서 무 슨 일이든지 괴롭다 아니하고 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어쨌든 한번 더 시험을 해 보자.)

하고 일부러 찾아가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시골 일이 급해서 오늘 아침 첫차로 떠납니다.─」

하고 엽서 한 장은 정거장에서 써 부쳤다.

그러면서도 기차가 떠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공연히 계 숙이가 기다려졌다.

떠나는 날짜까지 알으켜 주었으니까 바로 정거장으로 나오 지나 않을까?

뛰어 나와서는 허둥지둥 표를 사가지고 개찰구로 달음질을 치는 것 같아서, 자꾸만 창밖이 내어다보였다.

그러나 뛰잇 소리가 나고 찻 바퀴가 구르건만, 넓은 정거 장 구내에 계숙은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는다.

(공연스리 쑥스런 연극을 허지 않었나? 이번에 또 오해를 사면 풀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을텐데……』

하여도 보았으나, 후회막급이다.

인제 떠나면은 졸연히 올라올 기회가 없을 성싶어서, 수영 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는 창밖에 높고 낮은 집들과, 아침 연기가 피어오르는 공장의 굴뚝과 거리에 널리기 시작한 사 람들을 내어다보았다. 차창에 가 시름없이 기대어 앉았자니 형용키 어려운 무한한 감개가 가슴속에 끓어올라서 눈을 딱 감았다.

한편으로 계숙은 그 이튿날에야 일어났다. 몸이 깨끗치는 못하건만 더 누워있기가 미안해서 일어났다.

바깥 바람이 쏘이기가 싫어서 나가지는 않고 들어앉아서,

(그래도 내려가기 전에는 그이가 또 한번 들르겠지.)

하고 진종일 수영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눈이 캄캄하도록 기다려도 수영은 오지 않았다.

계숙은 그만 성미가 났다.

(오려건 오구 말려건 말려무나. 내가 먼저 찾아가서 데리고 내려가 달라구 빌 줄만 알구……)

하고 마주 켕기다가 그날도 저물었다. 밤이 되자 야기를 쏘이고 나가기도 싫고 길에서라도 경자의 남매를 만날까 보 아 일찌감치 문을 걸고 누워서, 잠없는 주인 마누라의 잔소 리에 대꾸를 하면서도 시골로 내려갈 공상만하였다.

(노자는 몇 원 안드니까 가진게 있고, 입은 옷에 빠스켓 하 나만 들면 고만이니까, 내일 아침엔 정말 떠나는지 가보기 나 허리라.)

하고 또다시 머리가 아프도록 공상만 하다가 새벽녘에야 늦잠이 들었다.

아랫목 벽에 걸린 구벽다리 쾌종이 여섯시를 치는 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쳐 깨었다. 세수할 사이도 없이 빠스켓 하나 를 들고 허겁지겁 병식의 집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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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식의 집에는 허접스레기 세간을 마당에다 잔뜩 늘어놓고 일꾼을 들여 짐을 묶느라고 부산하다. 병식의 식구도 그날 시골로 떠나는 모양이다. 계숙이가

『수영씨 떠나셨어요?』

하고 황급히 달려들며 묻는 말에

『아이구 저를 어쩌나. 지금 막 떠나셨는데…… 밤늦도록 짐을 싸주시느라구 눈두 못붙였다가 시간이 늦다구 아침두 변변히 안자시고 급히 나가신지가 아마 십 분 밖에 안됐을 걸.』

하는 것이 병식의 아내의 대답이었다.

『그럼 안녕히 내려가서요. 섭섭한 말씀은 다음날 허죠.』

하고 한 마디를 던지고 계숙은 갈팡질팡 전찻길로 뛰어나 갔다. 행인이 적은 이른 아침이라 전차는 매우 빨리 운전을 하건만, 계숙은 운전수를 떠다밀고 제 손으로 노치를 놓아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었다.

『좀 빨리 틀어주서이러』

승강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마음을 조리다가 정거장 앞 까지 와, 뛰잇 하고 새된 기적소리가 들렸다. 계숙은

『에고 이를 어째!』

하고 전차에서 뛰어 내려서 앞뒤를 휘휘 둘러 보았다. 마 침 빈 차로 지나가는 택시를 손짓을 해서 잡아 타고 속력을 다하여 용산역으로 달렸다.

그동안 수영이가 탄 기차는 용산역에 닿아서 씨익하고 김 을 뺐다. 급행차가 아니어서 한 이분가량은 정거를 하였다.

수영은 몸이 느른해서 눈을 좀 붙여보려고 다리를 오그리 고 누웠다.

(내가 너무 섭섭하게 굴었구나)

하고 다시 한번 후회를 하고 시골 가서는 곧 내려오라는 편지를 하리라 하고 눈을 감았다.

계숙은 용산역에 와 닿자, 굴러 떨어지듯이 자동차에서 내 렸다. 택시삯 팔 십 전을 거스를 사이가 없어, 일원짜리 한 장을 운전수의 얼굴에다 끼얹고는 정거장 구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숨이 턱에 닿아서 표를 사려고

『인천 한 장.』

하고 돈을 내밀려는데 또 다시 뛰잇 하고 기적소리가 새되 게 났다. 표 파는 일본여자는,

『모오 나메데스.』(인젠 틀렸소)

하고는 딱깍하고 천망을 씌운 매찰구를 닫아버린다. 계숙 은 발을 구르며 쩔쩔 매었다.

기차는 객차의 마디와 마디가 서로 부딪느라고 떨커덕떨커 덕하면서 푸우파아거리고 굴러나간다.

『애라, 치어 죽으면 고만이다!』

계숙은 부르짖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은 뒤에 개찰구 난간 의 고리를 벗기고 플랫홈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등뒤에서,

『아부나이!』(위험하다) 경수가 소리를 질렀다. 계숙은 점 점 속력을 놓기 시작한 기차의 꽁무니를 따라 곤두박질을 쳤다. 맨 끝엣 간은 손잡이가 잡힐 듯하고 아니 잡힌다. 계 숙은 그 길짝한 다리로

(날 살려라)

하고 죽을 힘을 다해서 뛰어가 손잡이를 턱 붙잡았다.

붙잡기는 했어도 성큼 뛰어 오르지를 못하고 매달린채 질 질끌려가는 것을 모자끈을 ?? 차장이

『아부나이자나이까?』(위험하지 않으냐?)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계숙의 소매를 잡아 끌어올렸다.

수영은 창밖에 이런 활극이 있는 줄 모르고 그 자리에 누 워있었다.

계숙은 바로 수영의 등뒷 자리에가 펄썩 주저 앉으며 휘파 람을 불 듯이,

『휘유.』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를 어떻게 탔는지 정신이 아득하였다.

기차가 우루루하고 한강 철교를 건널 때에, 계숙은 아직도 뚝딱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하고 수영을 찾으려고 일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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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몇걸음도 떼어놓지 않아서, 바로 등뒤에 누워있는 수영을 발견하였다.

눈을 딱 감고 배포 유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니, 달려 들어서 퍽퍽 두들겨 주고 싶었다. 수영은 맞은편 자리에 누 가 와서 앉으니까, 뻗었던 다리를 오그리며 실눈을 떠보다 가 금세 눈이 휘둥그래져서 벌떡 일어난다.

『이게 웬일이세요.』

하고 능청맞게 눈을 꿈벅이는 것이 하도 밉살스러워서

『아 어딜 가세요?』

하고 잡분참 묻는 말에도 계숙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대 답을 아니한다. 수영은 계숙의 기색을 보니까 여간 톡톡히 골이 난 것 같지가 않아서, 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뒤통수를 긁으며 눈치만 슬금슬금 보다가,

『아 어딜 가시는 셈이에요? 시골집으로 가실 테면 북행차 를 타야 헐텐데……』

하고 또 한마디 짖궂게 묻는다.

그러나 야속한 생각에 꽁꽁 뭉친 계숙의 감정은 졸연히 풀 리지 않았다. 「고향으로 가려면 왜 북행차를 타지 않았느 냐」는 말에 더 한층 골이 올라서, 얼굴이 발개져 가지고 속으로만,

(누가 말을 허게요?)

하고는 아주 토라져서 고개를 홱 돌려 외면을 해버린다.

수영은 짐적해서,

(이거 공연스리 선불을 질렀군.)

하구 마주 앉았기가 거북할 지경이다. 그러자 차장이 왔다.

『표도 안사고서 더군다나 여자가 달려가는 열차에 그렇게 뛰어 오르다가 치었다면 어쩔뻔 했소?』

하고 훈계하듯 주의를 시키고 나서,

『어디까지 가우?』

하고 묻는 말을 듣고서야 수영은 계숙이가 한바탕 모험을 한 줄 알았다.

『인천까지.』

하고 수영이가 돈을 내려니까

『고만 둬요!』

계숙은 쏘가리처럼 툭 쏘아 붙이면서 제 돈을 내주었다.

……기차에서 내려 선창으로 가서 배를 탈 때까지도 계숙 은 말을 하지 않았다. 수영이를 놓치면 큰 일이나 날 듯이 뒤를 바싹 따라오면서도, 묻는 말에 대답도 아니하였다. 그 동안 속으로는 노염이 거진 다 풀리고 수영이가 도리어 거 북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우습기도 하건만 언제는 열없어서 말이 아니 나왔다.

수영이도,

(어디 언제까지나 벙어리로 지내나 보자.)

하고 같은 선실에 들면서도 일부러 입을 꽉 다물었다.

삼십톤 밖에 아니되는 조그만 석유발동선은, 항구밖으로 퉁퉁거리고 나가자, 풍랑이 일어 좌우로 갸우뚱거린다.

지하실 같은 좁다란 선실 안에는 늙은 촌마누라 두엇과, 배짐군인 듯한 노동자가 칠팔명이 들어 앉아서 화투를 한 다.

계숙이가 똑딱선이라는 것을 타보기는 처음이다. 석유냄새 가 코를 찌르는데, 게다가 뱃바닥이 바로 기곗간이라 아래 윗니가 마주치도록 퉁퉁거리며 들까분다. 속이 메스꺼워 오 르는데, 겉앳 늙은 마누라는 벌써 수질을 한다. 왝왝 하고 다다미 바닥에다가 토해 내는 것을 보니까, 계숙은 가뜩이 나 앓고 난 끝인데, 오장이 뒤집히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

(인단이나 있었으면.)

하고 계숙은 군침만 삼키느라고 애를 쓰는데, 수영은 모른 체하고 한 귀퉁이에 가서 눈을 딱 감고 기대어 앉았다.

배가 섬을 끼고 지나갈 때에는 바람을 타지 않아서 조금 안정이 되어도, 허허바다로 나가면서부터는 사뭇 자반뒤집 기를 한다. 동그란 유리로 산더미 같은 파도가 철썩하고 부 딪치면 뱃머리가 번쩍 들리고, 들렸다가는 바닷속으로 푹 가라앉는다. 그러면 승객들은 이 귀퉁이에서 저 귀퉁이로 떼굴떼굴 굴러다닌다. 배가 조리질을 하는 바람에 계숙은 잔뜩 움켜쥐고 있던 문의 손잡이를 놓쳤다. 그러자 마침 맞 은 쪽에 기대어 앉은 수영의 가슴에다 머리를 틀어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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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이가 머리로 하필 가슴을 들이받는 통에 수영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배가 또 우쩍 솟아오르니까 다시 굴러가 지 못하게 하느라고 계숙의 허리를 덥썩 껴안으며 씩 웃었 다. 계숙은,

『사람이 죽겠는데 웃긴 왜 웃어요?』

하고 여전히 쏘면서도 저 역시 기막힌 웃음을 웃는다.

『인제야 말문이 터졌군요?』

하고 수영은 팔에다 더 힘을 들여서 계숙을 끌어 안았다.

체면없이 끌어 안았어도, 몸뚱이를 한데 뭉치고 발로 벽을 뻗디디지 않고는 거꾸로 설 지경이었다.

계숙은

『말시키지 말어요. 사뭇 오장이 뒤집혀요.』

하고는 수영에게나 몸을 턱 실린채 아주 정신을 잃은 사람 처럼 고개를 떨어뜨린다. 속이 메스꺼워 자꾸만 구역이 나 서, 이를 악물고 참느라고 이마에 땀을 다 흘렸다.

수영이도 현기가 나고 뱃속이 울렁거리건만 돌부처처럼 꽉 참고 앉아서 제 무릎에다 계숙의 머리를 누였다.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어 올려 주기도 하고, 땀방울이 송송 내어밴 이마도 짚어 주며 해쓱해진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나를 따라 오느라고 이 죽을 고생을 하는구나.)

하니 계숙이가 무한히 가엾어 보였다. 그 다음에 뒤를 받혀,

(오오 인젠 이 사람이 내것이로구나! 내 사람이 되구 말었 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마음이 흐뭇한 것을 느꼈다. 싸우지 않 은 승리에, 저절로 미소가 띄어졌다.

(이 손으로 어떻게 호미를 쥐고, 절굿공이를 잡노? 이 손바 닥에 못이 박히겠구나)

하고 떡가래같이 희고 매끈한 계숙의 손을 슬그머니 쥐어 도 보았다. 계숙은 아주 정신을 잃은 듯이 수영의 무릎을 비고 누워 저 역시 마음이 든든한지 눈을 감은채 말이 없 다. 수영은 다시금 계숙의 얼굴을 내려다볼수록 가엾고 애 처로운 생각이 들어서 길에 사람이 없으면 꽉 끌어안고 얼 굴을 마주 비벼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섯 시간만에야 배는 물에 닿았다.

『아이고 인젠 살었나보다.』

하고 계숙은 수영에게 손을 잡혀 내렸다.

머리는 쑥방석같이 되고 세무 치마는 수세미가 다 되었다.

땅이 노랗고 머리가 핑핑 내둘려서 수영의 어깨에 다가 몸 을 실리고 배 회사 출장소로 들어가서, 대합실의 의자에 가 빠스켓을 베개삼고 누워서 간신히 뱃멀미를 진정하였다.

그리하여, 수영은, 반생의 가장 절친하던 친구 하나를 잃어 버리고, 그 대신으로 인생의 고락을 같이 할 반려(伴侶)를 얻어온 것이다.

계숙은 한 시간 뒤에야 간신히 머리를 짚고 일어났다. 일 어나기는 했어도 마룻바각이 폭삭 꺼지고 벽이 움푹움푹 물 러나고 천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서, 머리가 내둘리기는 일 반이었다.

그러다가 찬물에 세수를 하고 땅냄새를 맡으니까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았다.

수영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으로 대어 들어갈 모양으로,

『뱃멀미에는 약이 없어요. 자 찬찬히 걸어갑시다.』

하고 계숙을 앞세웠다. 그러면서도 저 역시 머리가 멍해서 이마를 짚는다.

『아이구 난 아주 어지러워 죽는 줄만 알았어요.』

계숙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고 치맛주름을 잡아당겨 펴면 서 비슬거리고 걸었다. 수영이가

『그것보슈. 시골이란 오기버텀두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하니까 계숙은,

『이러면 어떻게들 다녀요? 그런데 어쩌면 끄떡두 아니하 서요.』 하고 혀를 내두른다.

『그러길래 뭐든지 단련이 제일이지요.』

하고 수영은 계숙의 팔을 끼고 조약돌이 울퉁불퉁한 신작 로를 걸었다.

[편집]

『그런데 여기선 집까지 얼마나 돼요?』

『한 삼십리가 실허지요.』

『아유 그 먼 델 어떻게 걸어가요?』

『그러길래 굽높은 구두가 차차 소용이 없게 되지요. 툼한 버선에 짚세기를 신었으면 걷기가 좀 편허겠지요.』

하고 수영은 듸뚝거리는 계숙의 구두 뒤축을 내려다보다 가,

『그래 이 드매구석으로 내려와서 갑갑해 어떻게 지내실 테에요?』 하니까,

『왜 시골은 사람 사는 데가 아닌가요?』

하고 계숙은 예사로 대답을 한다.

『그렇지만 똥거름 냄새를 밤 잦히는 냄새루 알어야 할껄 요. 더군다나 도회사람이 한적하고 경치가 좋으리라고 공상 하는 그런 농촌은 벌써 잃어버린지가 오래니까요. 서울바람 야 우선 공기가 깨끗허구 신수가 좋다면 좋지만, 시골서 살 려면 그런 경치를 보고 앉었을 틈이 없는 것두 미리 착오를 해야만 해요.』

수영은 다시 한번 다짐을 받는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왔겠어요? 무슨 일이든지 남허는 흉내 야 못낼라구요.』

핀잔하듯 하며 계숙이도 제 결심을 보였다.

그러나 계숙은 수영이를 따라가면서도 표시도 하지 못할 큰 걱정이 있었다.

(결혼도 아니하고 오늘버텀 저이허구 막 한방에서 자나?)

하고 처녀다운 부끄러움에 저 혼자 얼굴을 살짝 붉혔다.

무슨 신비로운 세계로 몸이 끌려가는 듯하면서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어떠한 기대를 속으로는 살그머 니 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야릇한 흥분까지 느끼면서,

(처녀시대와의 작별을 이렇게 싱겁게 하나)

하니 눈물이 날만큼 섭섭하였다. 그러다가,

(뭘 가는 날버텀 상스럽게 굴기야 헐라구)

하고 앞을 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는 수영의 점잖음을 믿어 도 보았다.

(가서 얼맛동안 지내다가 구식으로라도 예식을 허구 그러 고 나서……)

하다가 또 얼굴이 화끈 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얼맛동안은 저이의 어머니하고 안방을 써야지)

하고 저 혼자 작정도 해본다. 그러나 조만간 닥칠 일은 닥 치고야 말려니와,

(저이의 집에를 무슨 명색으로 들어가나?)

하는 것이 또한 큰 걱정거리다.

그이들은 아주 찰구식일텐데 친정에서 혼인을 해가지고 심 부례를 해내려오는 것도 아니요. 나이 이십도 넘은 말만한 처녀가, 민며느리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저이가 나에게 무슨 명색을 붙일텐가? 무어라고 부모나 일가들이나 동넷사 람들에게 소개를 할 뱃심인가? 그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러나,

『그래 나를 당신의 무어라고 부를테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한가지 걸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제 행색이 너무나 초 라한 것이다. 도망군을 붙들어 오더라도 괴나리봇짐이나마 짊어진 것이 있을텐데, 백판 맨손을 저으며 들어가니 손이 허전허전 하기는커녕 마음이 허전허전하였다. 옷이라고는 겨우 앞을 가린 것 한벌 뿐이니 그것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떡허다가 내가 이꼴로 끌려 오듯 한담)

하니 한편으로는 분하기도 하였다.

수영도 계숙이와 비슷한 공상을 하면서 말없이 걸었다. 계 숙이와 한집에서 지낼 일을 생각하다가 (어떻게든지 결혼식을 해야 할텐데) 하다가는

(그까짓 형식은 차려 뭘 허누)

하고 이 십 리 가량이나 와서, 길거리 주막으로 들어갔다.

둘이 다 몹시 시장했던 것이다. 소태같이 쓴 짠지쪽에 펄펄 뛰고 싶도록 매운 이리굴젓에 찬밥을 데워 먹고는 기운을 차리 나서 걷기를 시작하였다.

『아이 발이 부르텄나봐요.』

하고 계숙은 다리를 절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집까지 칠 오 리를 남았는데, 동녘 하늘이 놀이 든 것처럼 뻘겋게 ?? 든 것이 눈에 띄었다. 갈수록 가까이 산화가 난 것처럼 그 근처가 환하다. 급히 언덕위로 올라가 보니, 불빛이 분명하다. 난데 없는 화광은 하늘을 거스를 듯 하다. 그것은 「가난고지」 편쪽인 것이 틀림없었다.

[편집]

매우 초조한 마음으로 집에까지 거진 다 와서 마루터기로 급히 올라가보니, 그 불은 수영의 집에서 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였다. 그 불은 집이 겅성드뭇한 작은말 간난네 토담 집에서 난 것이 분명하였다.

아래윗 동리가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났는데, 여기저기서 징 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히 들린다. 바람결에

『불야! 불야!』

하고 외마디 소리도 들린다.

『누 집이야요? 네? 수영씨 집은 아니죠?』

계숙은 두눈을 방울처럼 똥그랗게 뜨며 수영의 소매를 잡 아당긴다.

『아니요. 간난네라구 우리 동리서두 제일 구차헌 집이에 요. 저집 사내는 인천으루 모군을 사러 간다구 떠나는걸 봤 는데……』

하고 수영이도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두루마기 아구통 이로 손을 집어 넣어 허리띠를 졸라매고 몸을 추스르더니

『난 가봐야겠는데 찬찬히 따라오슈.』

한마디를 던지고 수영은 한달음에 언덕을 뛰어내렸다.

해변의 저녁이라, 서북풍이 쏴쏴 하고 마주 부는데, 불길은 새빨간 혀끝으로 하늘을 핥으려는 듯 활활 타오른다. 온동 네가 번갯불이 번쩍하는 순간같이 환하게 비치는데 동네 사 람들은 물지게를 지고 갈팡질팡한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시꺼먼 연기가 공중에다가 큰 기둥을 세웠다가는 바람결을 따라 이리저리 쓰러지는대로 수영의 뒤를 급히 따라가는 계 숙의 코에까지 독한 연기가 훅 끼쳤다.

수영은 한달음에 간난네 집으로 뛰어내려갔다. 가보니 불 길은 벌써 토담집을 다 둘러쌌다. 서까래가 탁탁 튀는 소리 와 함께 커다란 불똥이 바로 수영의 발등 아래 떨어졌다.

동두난발을 한 동넷사람들의 호통과 부녀들의 부르짖음이 뒤섞여, 그 근처는 악머구니 끓듯한다. 벌써 이 집 앞도랑의 물은 다 마르고 이어오고 지게로 져오는 물쯤으로는 그야말 로 시뻘겋게 단 화로에 눈 한줌을 끼얹기다. 물이 마르니까 나중에는 오줌독에 지린내가 터지게 나는 오줌을 퍼서 끼얹 느라고 야단법석이다.

수영이도 현장으로 달려들어 웃통을 걷어붙이고 곁엣사람 의 부삽을 빼앗아 가지고 정신없이 흙을 파 끼얹었다. 그럴 수록 불길은 더 극성스러이 몸재로 옮겨 삽시간에 지붕으로 불붙는다.

『사람은 다 나왔나? 사람은 다 나왔어?』

수영은 우물우물 떨고만 섰는 집엣사람을 보고 소리를 쳤 다. 그러자

『아이고 우리 간난이─아이고 사람살류─』

하고 새되게 악을 쓰는 소리와 울음소리가 수영의 귀에 들 렸다. 갓난 어머니는 자꾸만 불로 기어들면서 절을 하듯 궁 둥방아를 찧으며 어린애처럼 운다.

그러자 외양간에 매었던 송아지가 시꺼멓게 털을 그슬려 가지고 소고삐를 끊고는 껑충껑충 뛰어나왔다. 눈도 뜨지 못하고 기어나오다가 앞발을 꿇고 거꾸러지자, 탁하고 뼛가 죽이 터졌다. 창자가 허옇게 불거져 나왔다. 그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여러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타죽는다고 아무리 외쳐도 하나도 불 속으로 들어 가는 사람은 없다.

근처 우물에 물은 죄다 마르고 오줌독까지 모조리 끼얹었 는데 흙을 퍼 끼얹던 턱가베까지 기어코 부러졌다.

평시에 아무 훈련이 없는 동네사람들은 허겁지겁 날뛰기만 하다가, 인제는 헤다벌리고 불길만 바라다볼 뿐이다.

수영은 눈앞에 꺼꾸러진 송아지를 보니, 방 속에서 타죽는 간난이의 참혹한 꼴이 눈앞에 떠올랐다. 바람결에 으아─으 아─하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수영은 아랫 입술을 깨물 었다.

수영이는 옆엣 사람의 목에 감은 수건을 끌러, 마침 큰마 을 청년들이 짊어지고 달려오는 물통 속에다 덤벙 담갔다가 머리를 질끈 동였다. 물통을 번쩍 들어 어깨부터 전신에 물 을 주루루 끼얹더니 방을 향하고 뛰어들려고 몇걸음 물러서 는 것을 보고

『어딜 들어가서요?』

하고 뒤를 따라온 계숙이가 소리를 지르며 와락 달려들어 수영의 허리를 껴안았다.

『놔요!』

소리와 함께, 수영이는 계숙의 팔을 힘껏 뿌리치고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뜨더니, 몸을 날려 비호같이 불속으로 뛰 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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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가 뛰어 들어간 방속에는 시꺼먼 연기만 용솟음을 친다. 그 연기에 불길이 시뻘겋게 당긴다. 계숙은,

『사람 살려요! 사람이 저 속엘 들어갔는데 보구들만 섰단 말요?』

하고 사뭇 까치처럼 깡충깡충 뛴다. 이가 딱딱 맞혀서 목 소리도 기껏 나오지 않았다.

『저를 어쩌나? 저를 어째!』

불을 잡던 사람들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수영이가 불 속엘 들어갔다!』

그제야 불이 난 현장으로 달려온 대흥이가 외쳤다. 쇠스랑 을 들고 달려들면서, 뒤를 따라오는 청년들을 돌려다보고 응원을 구한다. 그래도 수영은 나올 줄 모른다.

계숙은 보다 못해서,

『글쎄 사람이 타죽는데 보구만 섰단 말요?』

하고 발을 구르며 새되게 외치다가 치맛자락을 걷쥐고 불 속으로 달려드는 찰나에,

『여보!』

소리와 함께 대흥이가 계숙의 소매를 왈칵 잡아당겼다. 어 떻게 세차게 끌어당겼던지 계숙은 뒷걸음질을 치며 돈대 아 래에 가 넘어졌다.

여러 청년들은 불이 당긴 나무토막을 찍어내리고 물을 끼 얹고 미친 듯이 날뛰는 판에 수영이가 뛰어나왔다.

어린애를 포대기에다 싸들고 나왔다. 그 동안이 이 분도 채 못되는데 수영은 얼굴을 시꺼멓게 그슬려 가지고 앞을 못보고 나와서는 창자가 꿰어져 넘어진 송아지 곁에가 쓰러 지자, 바로 등뒤에서 지붕이 탐싹 하고 내려앉았다. 동시에 여러사람의 가슴도 털썩 내려앉았다. 뒤미처 담이 오루루 하고 무너지고 불붙은 재는 화약처럼 사방으로 확 흩어졌 다.

수영은 쓰러져 숨을 몰아 쉬면서도 어린애만은 잔뜩 껴안 고 있다. 조그만 생명을, 가난한 집의 딸 하나를 죽음에서 건져낸 것이다.

계숙은 달려들어 그 어린애를 받아 안았다. 돌이 지냈거나 말았거나 한 어린애는, 머리털이 곱슬머리가 되고 얼굴 반 쪽이 빨갛게 익어서 누린내까지 훅 끼친다. 그래도 숨발은 사로잡힌 참새처럼 할딱할딱 쉬고 있다.

수영은 뜨겁고 독한 연기에 숨이 턱턱 막히고 눈은 뜰 수 없는데 두 손으로 방바닥을 더듬거려 뭉클하고 만져지는 것 을 번쩍들고 나오다가 불길이 앞을 막으니까 다시 웃간으로 가서 포대기를 찾아서 씌워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미리 물 을 끼얹고 들어갔기 때문에 옷에 불은 달기지 않았으나, 눈 썹이 꼬불꼬불하게 그슬리고 이마와 뺨은 꺼멓게 그을기만 했어도, 바른편 팔이 뻘겋게 데어 벗겨졌다.

수영은 한편 쓰러진채 정신을 못차리고 헐떡헐떡하고 숨만 가쁘게 쉬는 것을, 계숙이와 대흥이가 잔디밭 위에다 반듯 이 누이고 얼굴에다 찬물을 끼얹으면서,

『이만헌게 천행이지. 글쎄 어쩌자구 그 속엘 뛰어든단 말 인가?』

하고 수영의 팔을 머리 위로 폈다 오그렸다하며 인공호흡 을 시켰다.

계숙은 아직도 정신이 사시나무 떨리 듯해서 말도 못하는 데, 어느 틈에 왔는지 복영이가 곁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수영이의 아버지도 지팡이를 짚고 쫓아와서 아들의 꼴을 보고는 말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한다.

수영은 동넷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기진 한 시간 동안이나 까무러친채 누웠었다. 화독대를 맡아 호흡이 질식된채로, 용 광로(鎔鑛爐) 속 같은 그속에서 죽은둥 살둥 날뛰었으니, 아 무리 튼튼한 사람이기로 얼른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허니 눈을 떠 불빛에 훤한 허공을 치어다보더니

『계숙씨!』 하고 손을 내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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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 여깃서요.』

계숙은 어린애를 안은채 수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간난이 어머니는 아주 실신을 한 것 같아서 이웃집으로 떠 메어 간 뒤였다.

『어, 어린애 괜찮어요?』

『죽지 않을까봐요. 이 앨랑은 내가 안고 있으니 걱정 마 셔요?』

수영은 정신이 없는 중에도 고개를 끄떡였다. 죽기 작정하 고 구해 내온 어린애가 살겠다는 말에 만족한 모양이다.

『자 얼핏 집으루 가게.』

대흥은 아직도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수영을 일으켜 세웠 다. 계숙이도 따누 일어섰다. 동네 여편네들이

『어린애 이리 주시유.』

호기심에 번득이는 눈으로 계숙을 바라보며 손을 내미는 것을

『집에 데리구 들어가 약이나 해줘야죠.』

하고 어린애를 내주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부축이 되어 걸어가는 수영의 뒤를 따르려니 까,

『저게 누구여?』

『서울 여학생인가분데……』

『수영이허구 같이 왔나부지.』

하는 소리가 등뒤에서 몇번이나 들렸다. 수영의 아버지도 그제야 겨우 안심을 하고,

(저 여학생이 누굴까?)

하고 머리를 체머리 흔들 듯 하며 따라온다.

집앞까지 오자,

『다들 놔. 이러구 들어가면 어머니가 놀라서.』

하고 수영은 부축한 동지들을 뿌리치고 걸음발을 타는 어 린애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계숙은 어린애를 안고 수영의 지팡이 노릇을 하며 앞을 섰 다.

수영은 마루 끝에 가서 기둥을 얼싸안고 앉으며 안방으로 들이대고 어리광하는 어조로

『어머니이.』 하고 부르더니

『어머니 며느릿감 데려왔수.』 한다.

계숙은 별안간 며느리가 누군가? 하다가 저 자신인 것을 깨닫자, 고개가 폭 수그러졌다.

수영의 어머니는 아들이 없는 며칠 동안에 매우 기운을 차 렸다. 평생 좋아하는 햇나물과 달래장아찌로 밥을 다비벼먹 고 혼자 몸을 추슬러 방안을 거닐기도 하였다. 그날도 오래 간만에 변소에를 붙들어 주는 사람도 없이 다녀오고, 뒤꼍 을 한 바퀴 돌아간 것이 너무 곤해서 쓰러졌다. 그저 혼곤 이 잠이 들어서 동네에서 불소동이 난 것도 몰랐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알아듣고,

『응 뭐야? 며느리를 데려오다니?』

하며 지겟문을 열고 문지방을 무릎으로 기어넘는다.

어머니는 눈을 찌긋하고 어둑어둑한 마당을 내려다보며 낯 선 사람을 찾는다.

복영은 등잔을 마루로 내다가 불을 켰다.

수영은 씽긋이 웃으며 어린애를 안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선 계숙을 향하여 눈을 찌긋해보인다. 계숙은,

(이왕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어린애나 내려놓고 인사를 하리라)

하고 마루에다 내려놓으려니까

『으아!』 소리를 지르며 갓난이는 귀가 따갑게 운다.

『저 어린앤 또 웬거냐?』

어머니는 어쩐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한다.

계숙은 하는 수 없이 어린애를 안은 채 「제가 당신의 며 느릿감입니다」 라는 듯이 여학생식으로 예를 꼬바기 하였 다.

어머니는 무슨 짐작이나 서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계숙의 턱밑까지 가서는 면구스럽도록 쳐다보며

『온 저런 어느 틈에 어린애까지……』 한다.

그때에 뒤에 따라들어와서, 이 광경을 보던 영감은 불에 뛰어들었던 아들이 다행히 다치지를 않은 것이 안심이 되는 데다가, 모든 눈치를 채고,

『온 마누라는 욕심두 많소. 보아허니 며느리는 틀림없나 보오마는 손자까지 우리 차지가 아닌가보오.』

하고 흐뭇한 웃음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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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돌아서며 수영의 아버지에게도 꾸뻑하고 예를 하였 다.

영감은 무슨 말을 잘못할까보아 허리만 굽혀 황송한 듯이 답례를 한다. 그리고는 아들을 보고,

『얘 넌 방에 들어가 눠라. 어쩌자구 그 불 속엘 뛰어든단 말이냐. 온 자식두 제 몸 사릴 줄을 모르고…… 큰일 날뻔 했지그려.』

하고는 혀를 끌끌 차며

『어서 김치국이라두 떠다먹여. 화독내 맡은 데는 김치국 이 제일이니라.』

이것은 시아버짓감이 며느릿감에게 빗대어 놓고나마 맨처 음 내린 명령이다. 그러자 어린애는 간난이 아주머니란 여 편네가 들어와서 받아들었다.

수영은 건넌방으로 들어가며 턱 누워버렸다. 병중에 어머 니가 놀랄까보아 억지로 참고 간신히 버티었으나, 숨을 쉬 려면 숨통이 꽉꽉 막히는 것 같고, 가슴이 눌리는 듯이 갑 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코에서는 그저 단내가 맡히고 헛 구역이 자꾸 나는데, 뻑뻑한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른다.

조금 전까지도 아픈 줄 몰랐던 불에 데인 팔이 바늘 끝으로 찌르는 듯이 따갑고 쑤시고 옥죄어 들어서 참을 수 없이 고 통이 심해졌다. 부지중에

『끙끙.』

하고 앓는 소리가 나왔다. 계숙은 집안 형편을 둘러볼 사 이도 없이 간병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영의 곁에 앉아서 손등의 꽈리같이 부풀어 오른 것을 바 늘로 따서 진물을 뺐다. 수영은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고통 을 참는다. 가루분이라도 있었으면 뿌려 주겠는데 이 집에 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달걀을 얻어다가 흰자위를 개 어 바르고 베수건을 찢어서 상처를 처매어 주었다. 이 시골 구석에서 붕대요, 소독약이요 하고 찾는 것부터 망계였다.

약은 바르지 못하더라도 덧나지나 말았으면 하고 속으로 빌 면서,

『신열이 나는군요. 머리가 사뭇 끓는데요.』

하고 냉수를 떠다가 이마도 축여주었다. 계숙이 역시 뒤를 이어 일어나는 불의지변에 어찌나 심신이 피로한지 손가락 으로 건드리기만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조그만 사기등잔의 석유불이 어찌나 침침한지

(남포나 켰으면.)

하였다. 도배도 아니한 흙벽, 매캐한 냄새가 풍기는 기지바 닥에 세간이라고는 신문지를 바른 희연 궤짝 하나 뿐이다.

계숙의 안목으로는 과연 모든 것이 상상 밖이어서, (이것이 조선의 시골인가) 하는 생각이 아니 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짐만도 못헌 집이 더 많은 걸)

하고 억지로 안심을 하려니 제 가슴도 곁에 누워서 신음하 는 수영의 가슴만큼이나 답답하였다. 그러자 수영의 어머니 가 건너왔다. 아까부터 건너가겠다는 것을,

『편히 좀 쉬게 내버려 두구려.』

하고 영감이 말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감은,

『이웃지간에 집을 태우고 갈데 없는 사람을 차마 그대로 두구 볼 수가 없다.』

고 갓난네 식구들을 데리고 안방 웃간으로 들어왔다. 이 집 밖에는 잠시라도 몸담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갓난이 어머니는,

『댁 젊으신 양반이 아니었더면 이 자식 하나는 벌써 타죽 었시유.』

하고는 열 번 스무 번 늙은 양주에게 절을 하며 고마운 눈 물을 흘렸다.

영감은 건너방에서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인제 좀 건너가보우.』 하였다.

아들이 과히 다치지나 않았는지 들여다보고 싶으나 며느릿 감이 있어 거북한데다가 어떻게 되는 일인지 매우 궁금도 해서 먼저 마누라를 파송시킨 것이다.

마나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계숙은 발딱 일어나 웃목으 로 가서 손을 잡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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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님은 안방에서 아들이 불속으로 뛰어들어갔었다는 이 야기를 대강 듣고 건너왔다.

『게 앉어. 퍽 고단허지? 오자마자 뜻밖에 일을 당해 서…… 저녁두 안 먹었을 텐데.』

하며 첫밗에 해라는 할 수가 없어서 반말 비슷이 말끝을 무지른다. 어쩐 영문인지 똑똑히 알지도 못하는 터이라, 장 성한 남의 집 섹시를 보고 대뜸 하대는 나오지 않는 눈치 다.

계숙은 곁에 가 조심스러이 앉으며,

『괜찮습니다. 저녁은 오다 사먹었습니다.』

하고 공손히 대답을 하였다. 병치레와 고생살이에 찌들대 로 찌들고 늙을대로 늙어서 꺼풀만 남은 늙은 마누라가 몹 시 가엾어 보였다. 곁에 누운 황소만한 수영이가 (저이의 속 으로 난 아들인가) 싶었다. 목소리도 귀를 기울여야 알아들 을만하게 가냘프다.

『참 그동안 대단히 편치 않으시단 말씀을 들었는데 요샌 좀 어떠십니까?』

며느리 재목의 수인사가 깍듯하다. 마나님은 이마의 주름 살을 펴며,

『응, 난 좀 낫서, 며느리 하난 보고 죽으란 팔잔지……』

하고 입모습에 웃음을 담아 보이고는

『난 그만허지만 저 애가 몸을 다쳐서 큰 걱정인걸. 원수 의 드메구석이 돼놔서 약이란 구경도 헐 수가 있어야지.』

하고 아들의 이마도 짚어보고 다친 팔도 만져본다. 그러다 가는 계숙의 치맛단을 잡아당겨보며

『애고머니나. 종아리가 시려서 이 몽땅치마를 어떻게 입 구 왔담. 저고리두 얇다쿠면.』

하면서 계숙의 등을 어루만져본다. 이 마누라는 젊은 여자 가 머리를 틀어올린 것을 본 것도 평생 처음이라 핀을 찌른 것이 이상한 듯, 계숙의 머리 뒤를 더듬더듬 만져도 본다.

어느 해 연분엔가 줄다리는 장애를 갔다가 먼발치로 트레머 리에 통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을 본 생각이 났다.

『그래 이 시골 구석에서 뭘 취해 왔어? 온 저앤 저렇게 돼서 말도 못하니 사람이 갑갑해서……』

슬그머니 여기까지 아들을 따라 온 경과를 보고하라는 말 이다.

수영의 어머니는 계숙이가 첫눈에 들었다. 서울 여학생이 란 건방져서 안하무인이란 말을 종종 들었는데, 이 학생은 어른에게 대한 인사가 분명하고 말씨까지 공손하다. 차림차 림은 이상도 하고 눈에 거칠어도보이나, 유심히 쳐다볼수록 이목구비가 한군데 곯은 구석이 없는데 그중에도 눈이 어글 어글해서 반가와보였다. 살결은 어찌나 희어보이는지 침침 한 방안이 다 환한 듯,

(어쩌면 살결이 저렇게 분을 따고 넣은 것 같을까?)

하고 또 감탄을 마지 않는다. 더구나 팔자 좋은 서울 계집 애들은 방속에서나, 뭉개고 응달에서나 사는 아주 섬섬 약 질로만 알았더니, 이 색시는 키가 크고 허리가 늘씬한데 마 디가 굵직굵직해서, 보리방아도 찧어먹고 상일도 할 성 싶 었다. 속으로,

(외화가 내아들버덤 낫군. 제게는 과분헌, 걸!)

하고는 아들의 머리맡에다 대고 혼잣말 하듯,

『내가 그렇게 장가를 들라고 성화를 해두 들은척두 안허 더니, 이렇게 따로 연분이 있는 걸 모르구 공연시리 입을 달렸군.』

하는 것이 매우 마음에 흡족한 눈치다.

계숙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 는,

(마음이 퍽 좋은 노인넬세. 저 무뚝뚝헌 아들버덤은 잔재미도 있고……)

하였다. 마누라는 궁금해 견딜 수가 없는 듯이 앉아 계숙 의 손을 잡으며,

『그래 혼인은 서울서 허구 내려왔어?』

하고나서 다시 아들 편으로 얼굴을 돌리며

『자식두 엉큼스럽지. 친구가 죽었다구 부랴부랴 올러가더 니만……』

하고 번차례로 다져 묻는다. 계숙은 정말 수줍은 색시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붉힐 뿐. 그러자 앓는 소리를 하며 못 들은 체하고 누웠던 아들이 머리를 들며,

『혼인은 인제 헐 테유.』

하고 한 마디를 하고는 돌아눕는다.

안방에서는 아까부터 수영의 아버지가,

(입때 뭘 좃노. 자기만 궁금헌가?)

하고 혼잣말을 하며 기다리다 못해서 방문을 열고,

『여보 인제 고만 좀 건너오.』

하고 마누라를 불렀다.

十七[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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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건너간 뒤에도 수영은, 자몽을 할 듯 잠이 든 모 양이었다. 그러나 숨소리만은 씨근씨근 하고 거칠었다.

계숙은 피곤한 것을 견디지 못해서 수영이가 누운 반대편 에 가서 쪼그리고 누웠다. 이웃 마누라가 안방에서 이불을 들어다 데밀고 나갔건만, 이불을 덮기는커녕 옷도 끌르지 않은채 누웠다. 수영이와 한자리도 아니요, 더구나 하나는 대단한 고통을 받는 중이언만, 남자와 한 방에 눕기가 처음 이라 어쩐지 잠이 아니왔다.

(안방으로 건너가 잘까?)

하여도 보았으나, 안방은 늙은이 내외가 차지를 한 모양이 요, 윗간은 간난네 피난소가 되었다. 그렇다고 유난스럽게 이부자리를 들고 마루로 나갈 수도 없다.

(아무데서나 하룻밤 드새면 고만이지.)

하고 잠을 청하건만 수영에게로 향한 반신이, 근지럽고 군 시러운 듯, 객지로만 떠돌아다녀서 아무데나 쓰러지면 잠이 왔었으나, 이날 밤에는 자리가 거북해서 몸이 배겼다.

게다가 화상을 당한 간난이가 자꾸만 보채고 우는 소리에 잠이 들 듯하다가도 눈이 번쩍 떠졌다.

며칠 동안 겪은 일과, 수영이와 그예 한방에까지 들게 된 지난 일이 꿈결인 듯 활동사진인 듯 머릿속을 휙휙 지나갔 다. 그러다가 고생고생한 끝에 잠이 들었다. 눈을 붙였다가 도 (수영이가 혹시 깨지나 않을까? 더 괴로워하지나 않나? 물이라도 찾으면 떠다주어야지)

하고 사로잠을 잤다. 그러노라니 신경의 반은 수영의 편으 로 깨어 있었다.

그러나 한 세 시간이나 잤다. 경풍을 하는 것처럼 간난이 가 우는 소리에 잠이 또 깨었다. 혼자 잠을 잔 것이 큰 잘 못이나 되듯 벌떡 일어나 수영을 들여다 보았다. 수영은 그 저 숨을 가쁘게 쉬는데, 눈을 딱 감고 두툼한 입술을 꽉 다 물고 반듯이 누웠다. 이마를 짚어보니 신열은 여전한데 관 자노리가 벌떡벌떡 뛰논다.

계숙은 기름이 졸아 꺼지려는 등잔불 빛에 청동색(靑銅色) 조각(彫刻)과 같은 수영의 얼굴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언제 까지나 침묵한 가운데에 들여다보고 앉았다.

계숙의 가슴 속에는 전에 느껴지지 못하던 감격의 샘이 솟 아 올랐다. 수영이가 생명이 위태한 것을 돌아다보지 않고 맹렬한 불속으로 뛰어들어가던 생각을 하고,

(그런 용기가 어서 났을까? 저렇게 굽떠게 생긴 사람이 어 쩌면 그렇게 몸이 날쌜까?)

하였다. 연극이나 활동사진에서 애인을 위하여 싸우다가 저 한 몸을 희생에 바치는 사람도 보았고, 나라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불에 타죽는 짠다아크도 보았다. 간첩노릇 을 하다가 적군에게 총살을 당하는 군인도 보았다. 그러나 수영이처럼 어린애 하나의 조그만 생명을 구하려고 활활 타 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보기는커녕 듣지도 못하였 다. 그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자기하 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한번 보지도 못하였을 이웃 집 어 린애 하나를 건지는데 전신의 피를 끓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한사코 붙잡는데도 불구하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그 용 맹한 자태! 그 대담스러운 행동! 자기가 안고 나온 어린 것 이 죽지 않은줄 알고야 비로소 빙긋이 웃는 그 너그러운 마 음!

그 모든 것이 계숙에게 무한한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저이를 위해서는 무엇을 못 바치랴. 저이의 일을 위해서 는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래도 아깝지 않다!』

하고 온몸을 감격에 떨었다.

계숙은 불에 끄슬린 수영의 눈썹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수 건으로 처맨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어루만졌다. 그러다 가는 아직도 화덕내가 나는 그의 손등에 입술을 대고 눌렀 다. 수영의 영혼에다 제 영혼을 틀어박는 듯.

계숙이가 오늘까지 수영에게 대해서 이다지도 애틋하게 사 랑과 기쁨을 느껴보기는 실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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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이른 아침 계숙은 안방으로 건너갔다. 어머니도 밝 은 날 다시 뵙고, 수영이가 새벽녘에는 좀 정신이 나서 일 어나 앉기도 했다는 전달도 할겸 건너갔다.

아무 부끄러워할 일도 없었으면서도 집안 식구들이 사나이 하고 한방에서 자고 나온 제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머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지 않어두 내가 지금 건너가 보려는 찬데.』

어머니는 방바닥을 훔치느라고 걸례를 들고 문쳐다니다가, 계숙의 손목을 잡아 앞에다 앉히고 다시 한 번 며느릿감의 요모조모를 뜯어본다.

윗간에 피난을 온 간난네집 식구도 일어나 앉았다. 자고 나서 일어나 앉은 것이 아니라, 젊은 어머니는 간난이를 안 고 앉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것이었다.

어린애가 눈도 못뜨고 젖도 아니 빨고 우는 것은 살점을 에어내는 것같이 애처러워 마주볼 수가 없다. 간난어머니는 멀리 일을 간 남편이 돌아와보면 오직이나 섭섭해할까 하고 눈이 붓도록 울었다. 「어떡하다가 불을 냈느냐?」고 야단 을 만날까보아 겁도 났다.

간난의 아버지 수만이는, 삼 십이 넘도록 아랫마을 권주사 네집 머슴을 살다가 간신히 장가라고 들어 토담집을 제 손 으로 짓고, 나온 지가 이태도 못되었다. 남의 집 밭낱같이나 부쳐먹으며 살림배포를 차린 것인데, 세간이라고는 솥 하나 사발 몇 개 물독 하나 먹동구미 석유 궤짝으로 만든 찬장 등속이라 길바닥에 내던져도 집어갈 사람이 없을 만할 허섭 쓰레기언만 그래도 이만한 세간을 모으는데 내외가 여간 공 을 들이지 않았었다.

술도 담배도 아니먹고 부지런하기로 이름이 난 수만이언만 춘궁이 들자, 연명할 것이 없으니까 몇 백 리 밖으로 모군 을 서러 떠났다. 한번 떠난 뒤는 잘갔다는 소식조차 없었다.

원체 기성명도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살았는지 죽었는 지 기별조차 없는데, 그집에다 덜컥 불을 내어놓았다. 알뜰 살뜰이 모은 세간을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소지를 올린 것 이다.

불이 날 까닭도 말하자면 간난네집이 구차한 탓이었다. 도 야지우리 같으나마 평화하고 단란하던 간난네집에 불을 지 른 방화범은 가난(貧)이었다.

간난어머니는 그날 어린 것을 혼자 재워놓고 동네 여편네 들과 바다로 나갔다. 굴을 따려고 나갔다가 굴은 반바가지 도 못 땄다. 바닷바람에 사지는 떨리고 속은 쓰린데 어린 것이 깨어서 울 생각을 하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요행으로 간난이는 그저 콜콜 자고 있었다. 그러나 속이 쓰린 것을 참지 못하고 나깨로 죽이나 쑤어 요기나 하려고 불을 때다가 아궁지 앞에서 꼬박 졸았다. 찬 바닷물에 얼었 던 아랫도리가 불기운에 녹자, 사르르 잠이 왔던 것이다.

그동안에 아궁이의 불은 배암의 혓바닥처럼 남름거리고 나 와서 간난어머니의 몽드라진 치맛자락에 당기자, 등뒤에 잔 뜩 쌓아논 마른 나뭇가지에 가 확하고 붙었다.

깜짝 놀란 간난어머니는 그만 혼비백산을 해서

『불야─』

소리를 외치며 뛰어 나갔다가

『애고 우리 간난이!』

하고 불속으로 달려드는 것을 동네사람이 간신히 붙잡았던 것이다.

계숙은 수영의 어머니가 기침을 섞어가며 뜨염뜨염 들려주 는 간난이네집의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지었다.

간난어머니는 친상을 당한 것처럼 머리를 풀어 헤쳤는데 갈가리 찢어져 살이 삐죽삐죽 나오는 걸래조각으로 젊은 여 자의 몸을 둘렀다. 어쩌면 앞을 못보는 병신이 될는지도 모 르는 어린거를 그나마 누가 빼앗기나 하는 듯이 부둥켜 안 고 앉았다. 그 곁에는 타다가 남은 곡식자루와 씨앗봉지를 무슨 보물이나 되는 듯이 방구석에다 감추어 놓은 것을 볼 때,

『저 사람들이 무슨 죄를 졌길래 저다지 참혹한 벌을 당할 까?』 하고 떨려오는 으ㅡ늬분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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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들기름 냄새가 비위에 받지 않는 나물 한 가지와, 맨된장찌개로 아침을 먹고 약을 사오려고 떠났다.

『읍내가 사십 리나 되는데 다른 사람을 보내든지 허지 더 구나 초행에 당일 다녀오지두 못헐걸.』

하고 수영의 아버지 내외가 굳이 말리는 것을,

『무슨 약을 발러야 헐지, 의사를 찾어보고 사와야 헐테니 까 제가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나섰다. 소독도 못한 수영의 팔이 짓무르면 큰일이어 니와, 눈을 못 뜬 채 인제는 고만 기진해서 울지도 못하는 간난이가 불쌍해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불속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는데 내왕 팔십 리쯤이야 설마 못 걸을라구.)

하고는 입맛이 깔깔한 것을 억지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 섰다.

『그럼 사람이나 하나 데리구 가야지, 길을 잃으면 큰 욕 을 본다.』

하고 수영의 아버지는 머슴애 하나를 따라 보냈다. 실상인 즉 제 손으로 약을 사다가 수영이를 친히 간호해 주고도 싶 었던 것이다.

계숙은 엊저녁에 타다가 폭싹 무너진 간난네집 자리가 보 기 흉해서 고개를 돌리고 신작로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바 람에 재가 훌훌 날려서 화덕내가 끼쳤다.

아까시아 나무를 심은 신작로는 빤하게 내어다보이면서도 언제까지나 끝이 나지를 않았다. 울퉁불퉁한 조약돌에 구두 코가 벗겨지고 타박타박해서 도무지 걸을 수가 없다. 높은 굽이 요리 삐끈 조리 삐끈해서 발목만 시큰거리는데, 한 이 십 리도 못가서 발이 부르텄다.

뒤꿈치 높은 구두의 비애를 눈물이 나리만치 맛보면서 그 래도 이를 악물고 걸었다. 나중에는 참다 견딜 수가 없어서 구두를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을 만나 면 신고, 지나가면 도로 벗어들었다. 콩알만하게 부르튼 발 바닥은 모래가 끼어 따가워 깡충깡충 뛰겠는데 발톱 끝이 돌부리와 부딪쳐서 피가 빨갛게 배어나왔다.

(이 빌어먹을 구두 때문에……)

하고는 논구퉁이에다가 주체궂은 구두를 팽개치려다가 그 ( 래도)하고 들고갔다. 그러나 간신히 길가의 담뱃가게까지 대 어가서는 짚세기를 찾았다. 그러나 계숙의 발은 둘이나 들 어감직한 사내 짚세기밖에 없었다. 계숙은 하는 수 없이 그 짚세기 코를 노끈으로 얽어서 졸라 매가지고 발에 꾀었다.

이번에는 발등이 꼬집히는 것처럼 물리고, 뒤축이 헐떡거려 서 맨발로 가느니보다도 더 거북하였다.

읍내까지 간신히 대어 들어가서는 알콜 한 병과 붕산연고 한 통을 사가지고 왔다. 쓸만한 약도 없거니와 의사라고는 공의 한 사람과 지질치 않은 개업 의사 둘 밖에 없는데, 하 나도 만날 수가 없었다. 군내의 인구가 십이만명이나 된다 는데, 의료기관은 말도 말고, 의사가 겨우 세 사람밖에 없다 는 것도 놀랄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시골의 백성 들은 병만 들면 상약이나 해 보다가 직접으로 공동묘지를 찾아간다. 역질이니 양마마니하는 전염병이 한 번 들기만 하면 어린애를 열명 스무명씩 삼태기로 쳐담아내듯 한다.

지난해 봄에는 이름도 모르는 병에 집집마다 서너살이나 먹 여 다 키워놓은 어린애만 하나씩을 추넘을 내듯이 내어다 버렸다는 것은 데리고 간 머슴애의 이야기였다. 그렇건만 관청에서는 나와서 조사 한번도 아니한다. 그러나 세금 독 촉이나 담배나 밀주를 뒤지기 위해서는 뻔찔나게 자전거바 퀴를 달린다는 것이다.

계숙은 날이 저물어서 머슴애의 어깨를 짚고 초주검이 되 어 돌아왔다.

『아아유, 팔십리가 뭐예요. 백 리도 넘나본데요.』

하고 계숙은 마라손 선수가 결승점에나 들어오는 모양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혼났지요?』

하고 수영은 일어나 불을 켜둘고 빙긋이 웃으며 마루 끝까 지 나와서 계숙을 맞아준다.

계숙은 그 다정한 말 한마디와 웃는 얼굴을 보자, 노독이 난 것도, 쓰러질 듯 피곤한 것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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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대엿새나 지났다. 수영의 집에서는 떡방아 찧는 소리가 동네가 울리도록 쿵쿵 하고 났다. 설이 되어도,

『자식은 서울서 객고를 허는데……』

하고 흰떡 한 모태도 아니 해먹던 김 창봉네집 중문 간에 서는 여러 해만에 들리는 떡방아 소리였다. 안에서는 국수 틀을 빌려다 국수를 누르고 두부를 만들고 지짐질을 하느라 고 부산하다. 수영의 혼인 날이 이틀밤에 아니 남았던 것이 다.

수영의 팔은 계숙이가 지성으로 간호를 해서 거진 다 나았 다. 팔과 손등에 허물이 벗고 새 살이 나오기는 했어도 가 죽이 땅겨서 아직도 마음대로 쓰지는 못하고 어깨에다 걸어 메었다.

수영의 아버지는 제발로 걸어온 며느리가 어디로 갈 것이 아니언만, 일이 그렇게 순리로 된 바에야, 하루래도 더 두고 보기가 수통스럽다고 혼인날짜를 다갔던 것이다. 실상 당사 자들의 생각에도 익을 대로 농익은 과실이 잎새 떨어진 가 지에다 대룽대룽 매달린 것 같아서, 하루바삐 혼인 날이 오 기를 속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궁합이나 맞어야지?』

『궁합이 맞지 않는다구 인제와서 물르나요?』

하고 늙은이 내외가 수근거리는 것을,

『원 별 말씀을 다 허시는구려.』

하고 수영은 웃었다. 천기대요(天機大要)를 얻어다 놓고 택 일을 한다는 것도,

『아무 날이나 해 뜨는 날이면 좋지요.』

하고 또 고집을 세우니까,

『저렇게 급헌걸 어떻게 입때들 참었니?』

하고 어머니가 우겼다. 어머니는 이따금 현기가 난다는 것 만 걱정이지, 요새는 아주 회춘을 하였다. 면화를 따서 뭉쳐 두었던 것으로 이불솜을 트느라고 다락으로 헛간으로 오르 내리고 안팎으로 드나들며 음식 만드는 총찰까지 맡았다.

영감은,

『당초에 꿈도 꾸지 않던 혼인을 백판 빈손을 들구 허자 니……』

하고 동네 사람을 만나는 족족 엄살을 한다. 엄살이 아니 라, 양식이 떨어져가는 집에 무슨 큰일을 치를 준비가 있었 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대(代)를 이 고장에 근거를 잡고 살던 덕택에 큰 부조는 못해도 집집마다 음식 한 가지 씩을 맡아다 해주게 되어서 당일의 손을 치를 엄두를 낸 것 이다. 그것도 수영은 남의 신세만 지게 된다고,

『그렇게 떠벌릴게 없에요.』

하고 자미적게 여기는 것을 어머니가

『이애야, 그럼 내가 섭섭허다. 네 어머니가 살어나서 환갑 이나 지내는 줄만 알려무나.』

하면, 아버지는,

『육십이 넘어 며느리를 보는데 그래 늙은이끼리 술 한잔 두 논아먹지 못허면 모양이 됐느냐. 가뜩이나 불성모양이라 온 남이 부끄러운데……』

하고 마누라의 편을 들며 집에서 기르는 도야지를 잡는다 고 전에 없이 수선을 떤다.

한편으로 대흥이와 오봉이와 그밖에 수영의 동지들은 동네 로 수영의 집 바깥 마당으로 군을 모아가지고 돌아다니며,

『흥, 요샌 색시버텀 데려다놓구서 예식을 허드라.』

『최신식 혼인법이 생겼군.』

『그도 딴은 그럴 듯 해. 미리 잡어다 어리를 씌워놓면 누 구헌테 가로채일 염려는 없을테니까.』

『여보게 뭐구 뭐구 그 색시야말루 잘 생겼네, 참 정말 돋 아오르는 반달 같던걸.』

『제길 우리 여편넨 벌써 말러빠진 배추꼬리처럼 시들어서 시들새들헌데……』

『에이 이사람, 그렇게 남의 여편네 탐을 내다가 날벼락을 맞으네.』

하고 서로 주고 받고 떠들었다. 사실 그들은 계숙이만치 희멀겋고 헌칠한 미인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불이난 현장 에서 얼떨김에 잠깐들 보았건만 불빛에 계숙이를 한번 본 가난고지의 젊은 사람들은 계숙의 아름다움에 눈의 황홀해 져서, 졸지에 제 여편네들은 말끔 박색으로 보였던 것도 사 실이었다. 그들은,

『혼인날 한턱을 부실하게만 내봐라.』

『대들보에다 가꾸로 달어 매구서……』

하면서 참나무 몽둥이를 깎아 꽁무니에 찌른 친구에, 빨랫 줄을 둘러메고 다니는 사람에, 벌써부터 시위운동이 굉장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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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숙은 새삼스러이 내외나 하는 듯이 건넌방 속에 가 문을 꼭꼭 닫고 앉아서, 혼인날 입을 옷을 제 손으로 말랐다. 수 영이가 혹시 의논할 일이 있어 건넌 방으로 들어가면,

『남녀가 유별한데 어딜 들어오서요?』

하고 일부러 톡 쏘며 문을 탁 닫았다. 그러면 수영은 빙긋 이 웃으면서도 멀쑥해서 문 밖으로 나가 헐 말을 일르군 하 였다. 더구나 밤에는 안에를 들어갈 생각도 못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동네 사람의 인사를 받기가 쑥스럽고, 동지들이 놀려대는 것이 귀찮아서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그러노라니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오는 혼인 날이 한 두어 달이나 남은 듯 기다리기가 지루하였다.

계숙이 역시 처음 보는 동네 여편네들이 들끓어와서 온종 일 건넌방 문이 닳도록 펄럭거리고 드나들며, 제 얼굴을 물 끄러미 쳐다도 보고 쓸데없는 잔소리를 한바탕씩 하다가 나 가는 것이 귀찮다 못해 나중에는 골치가 아팠다.

『서울 여학생이 바느질을 다 헐줄 아네.』

『어쩌면 혼인 날 입을 옷을 제 손으로 꼬메고 앉었어.』

하고 나가서는 흉을 보는 겐지 놀리는 겐지 알 수 없는 소 리를 한마디씩 한다.

눈 어두운 늙은 어머니는 바늘을 논 지가 벌써 여러 해요, 마름질을 해준대로 다른 사람을 시키면 몸에 맞게 꿰매줄 것 같지가 않아서,

『이건 제가 허지요.』 하고 맡아다가 하는 것이다.

색시 옷이라고 모두 툭툭한 보병옷이요, 그나마도 단 한 벌에 인조견 저고리 치마 양단뿐이었다. 제 옷만은 객지로 굴러다니던 덕택으로 우물쭈물 꿰맬 줄은 알았지만 구경도 못한 신랑의 옷이 재차례에 올까보아 계숙은 겁이 더럭 났 다. 그러나 수영이가 혼인날 입을 일습은 일가집에서 맡아 가는 것을 보고야 안심을 하였다.

그 전날도 계숙은 밤중까지 혼자 앉아서 그 옷을 꿰맸다.

옷감을 마르자고 바늘을 놀리고 인두질을 치면서도 눈물이 어려서 몇 번이나 바늘귀가 헛꿰었다. 돌아간 어머니 생각 이 불현 듯이 났던 것이다.

(어머니만 생존해 계시면 이옷이야 내 손으로 꿰매고 앉었 으랴? 아무리 없더래도 색색이 비단옷을 구색을 맞춰서 장 롱 속에 첩첩이 쌓어주셨을걸.)

하고는 반짓고지에가 엎드리며 몇 번이나 소리없이 느껴가 며 울었다. 젊은 첩에게 홀려서 혼인은커녕 딸자식 하나의 생사조차 알려고도 아니하는 아버지가 더한층 야속하였다.

이날도 어수선스러운 중에 날이 저물어왔다.

(아이 오늘 해두 다 갔구나.)

하고 계숙은 야트막하게 한숨을 쉬고 창문을 빠끔이 열고 바깥 바람을 쏘이는데, 안반을 들여놓고 떡을 치던 중문간 이 떠들썩하더니,

『어머니!』

하고 어린애를 안고 앞장을 서서 달려들어오는 것은, 작년 에 시집을 간 수영의 누이동생 영순이었다.

『아이고 네가 웬일이냐? 난 못올 줄만 알었는데 온 삼칠 일도 못지낸 조 어린걸 어떻게 꺼둘러가지고 왔니?』

하고 어머니도 엎드러지며 곱드러지며 마당으로 내려가 딸 을 맞아들인다.

뒤를 따라 들어온 수영은

『그동안 어머니가 아주 돌아가실 뻔했단다. 산후라고 네 게는 일부러 기별두 안했지만.』 하고는,

『어어디 보자.』

하고 생질을 받아 안는다. 거진 이태만에야 처음으로 근친 을 온 영순은, 고만 목이 메어서 말을 못하고 이마로 어머 니의 어깨를 비비며 흐느껴 울 뿐…… 어머니도 몇 번이나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씻었다.

그러자 내일 장을 보러갈 사람을 구하러 나갔던 영감이 밖 에서 무슨 큰일이나 난 듯이 허겁지겁 들어오더니 딸은 알 은 체도 할 사이가 없는 듯, 아들을 보고,

『이애 서울 판사댁에서 편지가 왔구나. 네 혼인을 어떻게 아시구 무슨 처분이 계신가보다. 어서 좀 뜯어봐라.』

하고 내미는 것은 조참판의 청지기의 이름으로 부친 등기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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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아버지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들고 겉봉을 앞뒤로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무슨 편질까?)

하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조참판이 직접으로 한 편지도 아니요, 도청지기의 이름으로 부친 것이 더욱 수상하였다.

『얘야 어서 좀 뜯어봐라. 궁금허구나.』

아버지는 목을 길게 늘이며 재촉한다. 수영은 반쯤 돌아서 며 피봉을 북 뜯었다. 두루마리에다 먹으로 쓴 국한문 편지 였다. 그 간단한 내용인즉 서두에 수인사도 없이,

「지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불일내로 상경하라. 만약 올 러오지 않는 경우에는 상의할 일을 참판영감의 분부대로 처 리할터이니 그리 알라.」

는 것이었다. 수영은 아무말도 없이 편지를 꾸기꾸기해서 호주머니에다 집어넣었다.

아들의 가색이 이상한 것을 보고 아버지는

『뭐라구 그랬니? 응, 뭐라구 그랬어?』

하고 앞으로 달려든다. 수영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고 편지 내용을 속이려다가,

『아버지 병환이 어떠시냐구 그랬구먼요. 환갑 때 못 올라 와서 섭섭했으니 한번 올러 오시라구요.』

하고 무거이 입을 열었다.

『난 네 혼인에 무슨 처분이 계신 줄만 알었지. 아닌게 아 니라 환갑때 올러가지를 못해서 여간 죄송하지 않았는데 큰 일이나 치러야 올러가지 않겠느냐?』

하고는 실심한 듯이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갔다.

수영은 뒷곁으로 가서 벽을 기대고 서서 황혼의 하늘을 쳐 다보며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는,

(대체 긴급히 상의할 일이란 무엇일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아버지 를 등기편지로 호출한 것은 경호가 계숙이를 놓친 분풀이와 보복을 간접으로 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수단이란 마 름을 갈고 논밭을 떼고 집을 내어노으라는 것밖에 없으리 라. 양대나 농사를 지어다 바치던 소작권을 박탈하고, 들어 있는 집에서 내어 쫓아서 생활의 위협을 주려는 최후의 행 동을 하려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였다. 그것을 깨닫자, 수 영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더할 수 없는 치욕을 당 한 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버지까지 올라가서 욕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 진작 내 손으로 결단을 하지 못하고 문짓거리고 있다가 이런 욕을 당했구나.)

하고 달음질하듯이 대흥의 집으로 갔다. 저의 집에서는 어 수선해서 들어 앉을 데도 없어, 친구의 집으로 가서 지필을 빌었다. 수영은 무딘 철필에 잉크를 듬뿍 찍어가지고 직접 경호에게다 편지를 썼다. 분노의 떨리는 손으로 아래와 같 이 갈겨 썼다.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간접으로 썼다고 생각되 는 등기편지는 틀림없이 받았소이다. 가친더러 올라오라 하 고 또는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는데, 올러오지 아니하면 임 의로 처리하겠다는 그 뜻도 잘 짐작하고 있소이다.

나는 우리집의 맏아들 되는 자격과 책임으로써, 당신의 집 의 마름을 봐오던 것과 토지를 소작하던 것 전부와 지금 들 고있는 집까지도 내어놓기로 결심하였으니 이 뜻을 어르신 네께도 전달해 주시오. 그밖에 일은 당신네가 임의로 처리 할 것이니 내가 말할 바가 아니외다.

이로써 몇대를 내려오며 주객의 관계라느니보다도, 상전과 노예의 관계가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 무한히 유쾌할 뿐이외 다. 늙으신 아버지까지 올러가시게 할 필요조차 없겠으므로 내가 대필을 하는 것이외다.」

라고 글을 마치었다. 그 편지는 그 이튿날 이른 아침 장흥 정을 가는 사람편에 역시 등기로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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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뒷곁으로 다시 돌아온 수영은, 벽을 의지하고 굴뚝처럼 한 자리에 꼬바기 서서 앞으로 살아갈 길을 생각 하였다. 안에서 떠들썩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땅속으로 스며드는 어둠만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듯 두 눈을 딱 부 릅뜨고 섰다.

(인제는 먹을 것도, 들어있을 집도 없어졌다. 양대나 두고 수다식구가 구차히 목숨을 이어오던 생활의 뿌리가 완전히 뽑히고 말었다. 아니다! 뽑힌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뽑아버 린 것이다. 어 시원하다!)

하고 허공으로 팔을 벌리고 부르짖었다.

두 어깨를 짓누르던 천근이나 되는 점을 활딱 벗어버린 듯 거뜬도 하고 통쾌도 하였다.

(인제는 남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겠고, 굶고 헛벗더라 도 마음은 편할 것이다. 차라리 기한을 참고 나가는 것이 깨끗하다. 떳떳하다.)

하고 뜰앞에 질펀히 깔린 전장을 내려다 보았다. 저의 집 안식구와 거진 온동리의 농민들이 손톱발톱을 닳리며 소작 을 해먹고 살던 조참판의 논과 밭은, 황혼의 쇠잔한 광선을 받아 복화와 같이 어스래한 중에도 반투명(半透明)의 유리쪽 같이 번득인다. 그 논에 흥건히 고인 물은 물이 아니라 저 의 집 식구와 수십명 소작인들의 피와 땀이 흥건히 고인 듯, 수영은 고개를 홱 돌렸다.

두 아름이나 되는 홰나무 잎새와, 피어나기 시작하는 느티 나무, 그리고 제 손으로 심어 어느덧 하늘을 뚫을 듯이 솟 아오른 미루나무, 또 그리고 역시 제 손으로 심어서 노랑꽃 이 피어오르는 개나리 울타리!

저녁 바람에 흔들거리는 이 모든 초목이 제앞으로 달려들 어 굽실거리고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는 듯, 수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눈두덩이 뜨근해지는 것을 그 눈물을 꽉 깨물 었다. 모든 것이 졸지에 저의 신변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가는 듯 무한히 섭섭하였던 것이다.

(아아 인제는 아주 벼 한 톨 없는 무산자가 되구 말었구나!)

하고 또다시 부르짖으며 주먹으로 힘껏 벽을 쳤다. 그와 동시에 늙은 부모와 어린동생과 아내가 될 사람과 또는 앞 으로 늘어갈 식구의 생활문제가 저의 두 어깨를 짓누르는 듯, 허리가 휘도록 무거운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을 제 손으 로 말끔히 청산한 것이, 더러운 옷을 훨훨 벗어버린 것처럼 시원하고 거뜬한 것을 느끼면서도, 제가 먼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기생충의 생활을 포기한 것이 통쾌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사실 망단하였다. 늙은 부 모가 이 일을 알면 제마음대로 처리한 것을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비통해 할까? 그것도 걱정이 아니될 수 없었다. 그 러다가는.

(오냐, 어떠한 고난이 닥쳐 오더래도 뚫고 나가자! 맨주먹 으로 헤치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 인제부터 내 힘을 시 험할 때가 온 것이다. 아산이 깨어지나 평택이 무너지나 닥 판 씨름을 할 때가 닥쳐 온 것이다!)

하고 어둠 속에서 주먹을 부르쥐고 새로운 결심과 희망에 전신을 떨었다.

수영은 앞으로 살아나갈 방침이며 겸하여 동네일을 어떻게 꼻아 나갈까 하는 계획을 세우느라고 일생에 가장 중대한 일이 바로 눈썹 밑으로 닥쳐온 것까지도 잊어버렸다. 저녁 을 그저 아니먹어 시장한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오빠 어둔데 혼자 서서 무슨 궁리를 그렇게 하우?』

하는 누이의 목소리에 수영은 놀래서 고개를 돌렸다.

『어린앤 자니?』

한참만에 입을 연 수영은 그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자요. 어서 들어가 저녁 잡수서요. 난 어딜 가셨다구. 너 무 좋아서 시장한 서두 잊어 버리셨구려.』

하고 누이는 오래비를 놀린다.

『너무 좋아서?』

수영은 군소리하듯 누이의 말을 받아서 흉내를 내듯 하며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다가, 건넌방 들창에 턱을 고이고 서서 먼산 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골독히 하고 섰는 계숙이와 얼굴 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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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의 혼인 날은 바람 한점 없이 개었다. 연두빛 장막을 친 듯 신록이 피어오르는 앞마당에 높직히 차일을 쳤다. 일 가들과 수영의 친구들이며 동네 사람들이 마당 그뜩히 모여 서 초례를 지냈다.

예식은 재례의 형식과 절차를 버렸다. 물론 수모도 없는 말하자면 「정안수식」 결혼이었다. 큰 소반에 냉수 한 사 발을 정하게 떠다놓고 사모관대도 활옷도 입지 않고 보통때 입는 조선옷을 깨끗이 입은 신랑과 신부는 마주서서 절 한 번씩을 공손히 하였다. 수영이가 넙죽 엎드렸다가 한참만에 야 일어나 엉거주춤하고 두 손길을 마주잡고 선 것을 보고,

『여보게 그렇게 황송할거야 뭐 있나?』

하고 대흥이가 놀렸다. 계숙이도 조선 절을 잘 할 줄 몰라 서 흡사 남자가 여자절을 하는 것처럼 어설퍼 보였다. 가뜩 이나 부끄러운데,

『웃으면 첫딸 낳는다!』

고 외이는 소리에 약간 분때만 밀은 색시의 얼굴이 연지칠 을 한 것만치나 빨개졌다.

『저것 봐. 그래두 웃네.』

동경 마누라까지 놀리는 바람에, 신부는 정말 웃었다. 탐스 러운 두 볼에 우물이 살짝 졌다가는 지워졌다. 신랑도 신부 의 절하는 것을 슬쩍 보고는 씩 웃었다. 신부는 조선 버선 을 억지로 신느라고 땀을 흘렸고 솜씨껏 해입은 치마저고리 는 몸에 붙지를 않았다.

『아이 껑충한게 왜장녀 각으이.』

초례청을 둘러싼 여편네들이 또 숙덕거렸다. 신부는 워낙 다리가 긴데다가 치마까지 길어서 더 멀쑥해 보였던 것이 다.

시부모에게도 폐백 드리는 절차를 제례하고 신랑신부가 나 란히 서서 절만 한 번씩하였다.

찌그러진 갓을 삐딱하게 쓰고 앉은 김 참봉은, 기쁨이 넘 쳐 얼굴에 주름살이 펴진 듯 마나님은 폐백을 받지 못하는 것을 섭섭히 여기면서도,

『둘이 마주 서니깐 퍽 얼려 보이는구려.』

하고 대견해서 영감을 돌아다보며 입 모습에 웃음을 띄웠 다.

혼인 잔치는 밤이 이슥토록 끝이 날 줄 몰랐다. 닭에 도야 지에, 약주술에, 막걸리에, 떡에, 국수에, 수영의 집 형편으 로는 과하다 하리만치 음식이 숫하게 많았다. 시골 잔치로 는 더할 나위없이 풍성풍성하였다. 새로 벼른 낫(鎌)같은 초 생달이 집 뒤 오동나무 가지에 걸릴 때까지 동네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이른 봄날의 하룻밤을 뛰놀았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은 듯이……

신부는 팔을 걷고 부엌에 내려서서 동네 여편네들 속에 섞 여 왔다갔다하며 음식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가,

『오늘 하루는 들어앉어 색시 노릇을 해야지.』

하고 들어가라고 성화를 하건만,

『네, 네.』

대답만 하고 시누이와 함께 음식상 분별을 하였다.

안마당에도 동네아이들과 계집애들이 가뜩히 멍석을 깔고 앉았다. 떡이고 국수고 처음 보는 것처럼 걸터듬을 해서 먹 는 것을 보고,

『아이구 잘들두 먹는다.』

하고 하도 엄청나서 계숙은 혀를 내저었다. 그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저이의 의무인 것처럼 나중에는 떡을 시룻째 번쩍 들어다 주었다.

바깥에서는 술들이 거나하게 취하니까, 장구를 얻어오고 소구를 치고 나중에는 징, 꽹가리를 두드리며 춤을 추었다.

『얼씨구나!』

『좋오타!』

하는 소리가 연방 들렸다. 그중에도 대흥의 아우는 호적의 명수였다. 마디마디 청승스럽게 꺾어넘기는 양산도 가락에, 여편네들까지도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가듯 끝판에는 흥에 겨우니까 늙은이 아이들 할 것 없이 막 뒤섞여서 두루마기 자락을 훨훨 날리며 떵더꿍 떵더꿍 춤을 추었다. 술이 지나 치게 취한 젊은 사람들은 신이 오른 무당처럼 사뭇 껑충 껑 충 뛰면서 마당을 나졌다.

신랑은 장난군 동지들에게 몇 번이나 꺼둘려 나갔다. 신랑 을 덩을 태우고 돌아다니다가,

『어엇사, 어엇사!』

하고 행가래를 쳐서 길길이 치켜 올리다가 두루마기까지 찢었다. 그 북새통에 복영이는 늦게 온 손의 국수상을 들고 나가다가 두 번이기 깨빡을 쳤다.

대흥이와 오붕이와 그밖에 장난군들은,

『우리 신랑 신부를 한데 묶자.』

하고 고함을 지르며 밧줄을 둘러메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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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군들이 불한당처럼 우루루 달려드니까 신부는,

『에그머니나!』

소리를 지르며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부엌문을 세차게 떠다미는 것을 당할 수가 없어 계숙은 재빠르게 뒷문으로 빠져나가 뒤란으로 돌아서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그대신으로 수영이가 붙들렸다.

『네 색시를 냉큼 불러내지 않으면 혼이 날줄 알어라.』

하고 수영이가 무슨 큰 죄인이나 되는 듯 밧줄로 칭칭 얽 어서 잦혀놓고 발을 옭아서 둘러메고는 발바닥에 사뭇 방망 이 찜질을 한다.

『여보게 이건 경찰선줄 아나?』 하고 수영이가 뻐뚱겼다.

『이놈 그래두 여러 말야? 빨리 네 색시를 불러내라.』

하고 나중에는 발바닥에서 딱 딱 소리가 나도록 사매질을 하는 통에 견디다 못해서 신랑은,

『여보오 사람살류, 계숙씨 잠깐 나오슈.』

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신부는 나오 지 않고, 어머니가 버선발로 마당에 내려서며,

『무슨 장난들을 이렇게 상스럽게들 하나? 앗게들 아서.

가득 팔 하나를 그저 못쓰는 사람을…』

하고 뜯어말려서 간신히 묶었던 것을 끌렀다. 수영은 거꾸 로 매달려서 어찌 혼이 났던지 이마에 땀을 다 흘렸다.

『어이 장가들기두 힘드네.』

하고 군소리하듯 하며 발목이 아픈 것을 간신히 일어났다.

바깥방에서는 안채가 왼통 떠나가는 듯이 떠들어대는 것도 모르고 그저 술상을 벌리고 있었다.

김 참봉도 술이 거나한 정도를 지났다. 늙은 친구들과 잔 을 주고 받으며 먹는 것 걱정없이 지내던 시절을 생각하고 자기네의 청춘시대를 회고하고는,

『제에기, 우리가 저렇게 놀아보기는 틀렸네 그려.』

『흥 그야말루 꽃집이 앵돌아졌네.』

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상바닥을 쳤다.

『오늘 저녁처럼 풍성풍성하면 한 육십년 더 살구싶으 이.』

하고는 무릎장단을 치며 수영이 아버지는,

『사람이 살면은 몇백년이나 사드란 말이냐!』

하고 몇 십 년 만에 육자백이를 꺼냈다. 다른 늙은이들도 목에 힘줄을 세우면서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중에는 피 차에 끌어안고 흰 머리털을 마주 비비며 눈물까지 흘려가면 서 노래를 불렀다. 늙은 이들의 노래는 차라리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수영이도 동지들이 입을 어기고 퍼붓는 술을 서너잔이나 마셨다. 약간 흥분이 된 눈에는, 상글상글 웃으며 부엌으로 들락날락하는 계숙이가 형용할 수없이 어여뻐 보였다.

저의 편으로는 부모는 고사하고 일가 한 사람도 참례 못한 설움과 섭섭함을 가슴깊이 감추고, 진일 마른일을 웃어가며 하는 것이 무한히 가엾어도 보였다. 보는 사람만 없으면 부 엌으로 뛰어 들어가서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삼경도 훨씬 넘어서 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바깥방과 안 방에는 술취한 늙은이와 진종일 잔걸음에 지친 동네 여편네 들이 즐비하게 쓰러져서 드르렁 드르렁 코까지 곤다.

『오빠, 고단한데 어서 들어가 주무슈. 그러다 밤을 새겠구 려.』

하고 누이만은 그저 자지를 않고 수모노릇을 한다. 어머니 가 그저 자지를 않고 딸을 시켰던 것이다.

수영은 누이의 뒤를 따라 신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구석에 서는 촛불이 꿈벅이며, 이날 밤의 주인을 맞았다. 아랫목에 는 새 이불 두채를 나란히 깔고 헌 병풍은 야트막하게 둘러 쳤다.

먼저 들어와 기다리던 신부는 얼굴이 발개져서 일어서며 신랑을 맞아들였다.

『그럼 오빠 안녕히 주무서요. 첫아들 날 꿈이나 꾸시고 요.』

하고 누이는 의미깊은 웃음을 던지고 조심스러이 문을 닫 고 나갔다.

신부는 아무말 없이 머리맡에 벽을 가리고 섰다가,

『나 요술 하나 하께 보서요.』 하고 비켜 선다. 신랑은,

『이게 뭐예요?』

하고 눈이 휘둥그래서 벽에다가 색종이로 오려붙인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수영이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병식이가 묵은 신문 을 둘의 앞에 꺼내놓며,

『여불없는 신랑 신부지?』

하고 웃던, 둘이 나란히 타원형으로 났던 그 사진을 오려 서 이제까지 간직해 두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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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그 사진앞에 나란히 서서 묵묵히 머리를 숙였다. 평생을 가난과 고적에 울던 병식을 생각하 였다.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죽음에 다시금 애도의 뜻 을 표하였다.

수영의 입에서는,

『병식이 미안 허이!』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수영은 병식에게 대해서 감사하다 할는지 사과를 해야 옳을지 모르는 감정에 사로잡혀 눈을 감고 머리를 떨어뜨리고 섰을 뿐…邑 계숙이도 수영이와 똑같은 감격과 추억으로,

(오늘밤에는 흘리지 말자)

하던 눈물을, 뜨거운 눈물을 서 너 방울이나 버선 등에 떨 어뜨렸다.

사진을 붙인 벽에서 병식이가 「영원의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서, 그의 유언대로 오늘밤의 신랑신부의 장래를 진정 으로 축복해 주는 듯 두 사람은 다시금 그 사진이 신문에 나던 당시의 추억으로 가슴이 꽉 찼다. 그때에 활동하던 생 각과 병식의 지휘로 청량리에서 둘이 처음 만나던 때를 돌 아다 보았다.

모든 지난 일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되풀이하였다.

『사람의 일이란 참말 알 수 없어요. 그때 청량리 전차 끝 에서 처음 만나던 우리가 이렇게 될줄이야 누가 알었겠어 요? 그런데 병식오빠는……』

하고 계숙은 목이 메어서 말을 잇지 못하며 수영의 어깨에 다 눈물을 비빈다.

수영은 계숙의 허리를 껴안으며,

『눈물을 거둡시다! 우리가 흘릴 눈물은 병식군이 도맡어 서 흘리다 갔으니까요.』

하고 계숙의 손을 잡아앉혔다. 수영은 다가앉아 계숙의 손 을 더 힘껏 쥐며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하고 딴전하듯 묻는다.

『무슨 날은 무슨 날이야요. 우리 둘의 결혼날이죠.』

『그럼 오늘버텀 우리 약속 한 가지를 단단히 합시다.』

『약속은 새삼스럽게 무슨 약속이야요?』

『첫째 우리의 눈으로 눈물을 흘려선 안돼요. 우리 둘이 병식군의 뒤를 따러가는 날까지 우리의 지금 형편과, 장래 에 대해서 결단코 비관을 하지 말잔 말씀이예요. 우리가 한 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고 낙심을 하는 날은 우리가 정말 결 단이 나는 날이예요. 다시 소생할 수 없이 멸망의 함정으로 빠지고 말 뿐이예요!』

『나두 그런 생각을 하고요, 오늘도 몇 번이나 울음을 참 었어요. 나라고 왜 설움이 없겠어요? 그렇지만, 인젠 수영씨 한 분만 믿고 무슨 일이든지 어떠한 고생이든지 같이 할테 야요!』

눈물에 어리었던 계숙의 눈은 새로운 결심에 빛났다. 수영 은 계숙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안으며

『나두 계숙씨를 믿지요. 믿길래 한몸뚱이가 되려는게지요.

그렇지만 놀라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들어있는 집과, 대대 로 해먹던 조경호의 집 논밭을 말끔 내놨에요.』

『왜요? 언제버텀요?』

계숙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랐다. 수영은 조경호의 집 에서 편지가 왔다는 것과 제가 먼저 이제까지의 생활의 근 거가 되는 것 전부를 포기했다는 것을 들려주었다.

『그게 다 나 때문이야요. 난 이 집 식구를 뵈일 낯이 없 어요.』

계숙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다시 울상이 된다.

『아니예요. 그건 가당치 않은 생각이지요. 도리어 당신 때 문에 내가 새로운 용기를 얻었에요.』

하고는 아직도 헝겊을 처맨 팔뚝을 걷더니 주먹을 쥐어 내 밀며,

『자 이 팔을 눌러보세요. 이 팔에 힘껏 매달리세요. 우리 의 밑천은 다만 한가지 건강과 투쟁하려는 불타는 의식뿐이 예요! 젊은 부부가 튼튼한 몸으로 씩씩하게 새로운 희망을 붙잡고 나가면, 싸와만 나가면 무서울게 없지요 겁날게 없 지요!』

하고 수영은 저력있는 목소리를 높이며 계숙을 힘껏 안았 다. 가슴이 오그라질 듯이 두팔로 끌어 안았다. 군혹이 달리 듯 불뚝 내솟는 팔의 근육!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굿세인 포옹! 그리고 퍼붓듯하는 뜨거운 키쓰! 계숙이도 흥분이 되 어 연감처럼 발갛게 익은 얼굴을 수영의 넓다란 가슴에 파 묻었다.

…앞마당에서 첫닭이 울었다. 홰를 치며 선잠을 깬 목소리 로 꼬끼요 하고 울었다.

신방의 촛불은 꺼졌다. 바닷가 조그만 농촌에 깃을 들였던 봄밤은 고요히 밝으려한다.

十八[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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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이틀 동안은 비가 왔다. 정다운 사람의 발자국 소리 라 할까? 누에가 뽕잎을 써는 소리라 할까? 가지가지의 연 연한 잎새가 한둘바람에 너울거리는 신록 위에, 보슬보슬 봄비가 내려 밀밭 보리밭과 푸성귀밭을 촉촉이 추겼다. 일 전에 씨를 뿌린 원두밭에는 외호박의 싹이 뾰죽뾰죽 돋아났 다. 그 조그만 싹들은 쓰다듬어 주고 싶도록 귀여웠다.

비가 개고 구름이 거친 뒤에, 수영의 내외는 호미를 들고 집 뒤 보리밭으로 올라갔다. 계숙은 정미소 여직공처럼 수 건을 쓰고 행주치마를 두르고 짚신을 신었다.

단비를 빨아들인 보리는 며칠 동안에 두어 치나 더 자랐 다. 한 열흘만 기다리면 강아지 꼬리같은 이삭이 팰 것 같 다.

신선한 아침바람에 보리보다 훨씬 먼저 자란 밀밭은 동해 바다처럼 새파란 물결이 인다. 그러나 바람만 자면 사래 긴 보리밭은 온통 초록색 돗자리를 펼쳐논 듯, 그 위를 사월의 태양이 뒹굴은다.

젊은 부부는 보리밭을 한 고랑씩 맡아가지고 김을 매며 나 간다. 수영은 계숙에게 호미질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이렇게 두둑하게끔 북을 돋아 줘야 하우.』

하면서 왼손으로 흙을 파울려보인다. 불에 데인 바른 팔로 는 아직도 호미질을 할 수 없었다. 계숙이가,

『왼손으로 거북해서 어떡허서요?』 하면

『팔 하나라도 놀려둬서야 되겠수.』

하고 수영은 잠시도 손을 쉬지 않는다. 밭두덕에 다부룩하 게 핀 무꽃 위로 알룩알룩한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계숙은,

『아이 곱기도 해라.』

하고 그 나비를 잡으려는 듯 나비를 쫓아 공중으로 시선을 달리는 것을 보고 수영은,

『한눈을 팔면 일이 더디지 않우? 오늘 안으로 이 밭을 다 매야 할텐데…』 하고 계숙의 어깨를 탁 친다.

『아유! 이 넓은 밭을 단 둘이서 어떻게 다 맨담.』

하고 계숙은 혀를 내두른다. 며칠 동안에 수영은 「이랬세 요」 「저랬세요」 하던 존대가 변해서 「이랬수」 「저랬 수」 하게 되고, 계숙이도 단 둘이 있을 때는,

『우리 이렇게 해 응.』

하고 응석하듯 반말 비슷이 하게 되었다.

수영이도 팔을 쉬고 소매로 구슬땀을 씻으며 구름 한점없 이 새파란 하늘을 자못 상쾌한 듯이 쳐다본다.

『자 노래나 하나 부르구료. 유쾌한 곡조로…』

『내가 노래를 할 줄 아나요.』

하고 계숙은 사양을 하다가(누가 듣지나 않나) 하고 뒤를 돌아다 본 뒤에,

『그럼 우리 둘이 같이 해요 네?』

하고는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한 뒤에 나직이 목청을 가다 듬었다.

청청한 잎들아
어여쁜 꽃들아
화창한 시절을 노래하자
우리는 젊고요
봄날은 길어도
이 밭을 다매면 저물겠네

이 노래는 학생시대에 부르던 곡조에다가 말만 새로 지어 서 부른 것이다. 계숙의 머리 위에서는 종달새 한 마리가 공중에가 끄나불에 매어달린 것처럼 제 자리에서 날으며,

『비이비, 비비리 배배, 비이비리 배배!』

하면서 계숙의 노래에 반주를 한다. 계숙은 그 종달새를 쳐다보느라고 또 호미든 손을 쉰다. 수영이가,

『글쎄 한눈을 팔아선 안되우.』

하는 소리에 놀라듯 계숙은 다시 호미를 놀린다.

『자 이 한 줄기밖에 아니 남은게 우리의 생명선(生命線)이 요. 이 생명선을 붙잡읍시다. 놓치지 맙시다!』

하고 수영은 계숙을 돌려다보며 격려(激勵)한다.

매어 나가도 매어 나가도 보리밭 사래는 길었다. 끝날줄 몰랐다.

一九三三年五月二七日午後六時三八分

唐津鄕第에서 脫稿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