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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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들[편집]

1[편집]

이튿날 아침 , 영민은 조그만 트렁크 하나를 들고 집을 떠났다.

집을 떠날 때 영민은 사랑 문 밖에서

「아버지, 안녕히 계십이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백 초시는 대답이 없다.

백 초시는 그때 목침을 베고 벽을 향하여 눈을 질끈 감고 누워 있었다.

영민은 하는 수 없이 따라 나선 어머니와 함께 발걸음을 돌려 서너 발자국 걸어 나왔을 때다.

「학비는 어떻걸 작정인고?」

목소리에는 아직도 노기가 분분하였으나 묻는 말의 내용이 영민에게는 눈물 겹게 고마웠다.

그래서 영민은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심노를 덜어 드릴 셈으로 쾌활하게 대답을 하였다.

「원 아버지두! 사내 대장부가 무슨 걱정이있겠읍니까?」

「음 ──」

하고 한 번 신음을 하고 나서

「맨 주먹으로 세상에 나갈 때는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면 우선 힘이 갑절이나 더 나구, 또 배두 덜 고프니라.」

반생을 희생하여 맨 주먹으로 집을 이룬 백 초시의 귀중한 인생철학의 한 구절이다.

「아버지, 잘 알았읍니다! 조금도 염려 마십시요. 영민의 뼈는 인젠 굵을 대로 굵었읍니다.」

「음, 어서 가거라.」

「안녕히 계십시요.」

어머니는 태극령 고개까지 따라 나오면서

「그래두 너 학교를 마칠래면 一[일]년이나 남았는데…」

「글쎄 어머니, 염려 마시래두.」

「그래두 돈 한 푼 없이 네가 어떻게……」

그러면서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글썽 하며 한 푼 두 푼 모아 두었던 돈 三 [삼]백 원을 허리춤에서 꺼내 아들의 양복 주머니에다 쓸어 넣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뼈만 남은 여윈 어깨를 두 손으로 따사롭게 어루만져 보았다.

「아이 어머니, 살이 쪽 빠지셨네!」

언덕 길을 태극령으로 올라가면서 한 손으로는 트렁크를 들고 한 손으로는 어깨 동무를 하듯이 어머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늙으믄 살이 빠지지. 살이 찔까?」

영민은 마음이 아팠다. 자기 하나를 기르노라고 이처럼 살이 쪽 빠진 어머니, 불면 날아갈 것같은 이 수척한 어머니 ── 어머니의 피와 어머니의 살과 그리고 어머니의 어여쁨을 몽땅 뺏어 먹고 이만큼 자란 자기 자신이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욕심쟁이와도 같았다. 아니,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는 무서운 흡혈귀(吸血鬼)와도 같았다.

「얘, 그 가방 일 내라.」

어머니는 아들의 손에서 트렁크를 뺏어 들려고 한다. 언덕 길을 올라 가기에도 숨이 가쁘신 어머니가 어이하면 이처럼도 아들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애를 쓰시는고?……

「어머니, 정말 이 트렁크 들어 주시겠어요?」

「어서 일 내라. 동경꺼정 가려면 사흘이나 걸린다는데 벌써부터 몸이 피곤하믄 어떻거니?」

영민의 눈자욱에 눈물이 핑 돈다.

「자아, 그럼 어머니, 이 트렁크 좀 들어 주세요!」

어머니는 트렁크를 들었다. 트렁크를 들고 언덕 길을 가쁘게 올라 가신다.

「어머니 무겁지 않으세요?」

「무겁긴 뭐가 무거워?」

열 한 관이 될락말락한 어머니의 체력에는 확실히 무거운 짐이었다.

「자아, 어머니, 이번엔 제가 어머니를 업어 드리겠읍니다.」

하면서 영민은 한 발자국 선뜻 어머니 앞으로 나서면서 쭈구리고 앉았다.

「아이구 망칙 해라! 애두 참……」

어머니는 길을 비켰다.

「어머니, 어서 업히세요.」

「얘가……」

「어머니, 어머니는 들구 싶으신 트렁크를 들으셨으니까 저도 업어 드리고 싶은 어머니를 업어 드리겠읍니다.」

2[편집]

자꾸만 싫다고 자꾸만 길을 비키는 어머니를 영민은 종시 업구야 말았다.

「얘, 남이 보믄 흉을 보지 않겠니?」

「흉을 보면 어떱니까?」

「그래두……」

「보구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보래지요.」

영민은 어머니를 업고 눈길을 태극령 고개로 올라 간다.

어머니는 부끄러우면서도 한편 무척 기쁘다. 영민을 낳은지가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이처럼 자라서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이처럼도 쉽사리, 이처럼 도 가쁜가쁜히 업을 줄이야!

「얘, 인젠 됐다.」

「………」

「얘, 인젠 내리자.」

「………」

그러나 영민은 대답이 없다. 대답이 없이 황소처럼 묵묵히 언덕 길을 올라간다.

가볍다. 너무도 가볍다. 어머니의 몸이 이렇게도 가벼울 줄은 정말 몰랐다. 이렇게 가벼운 몸으로서 열 일곱 관이 넘는 아들의 짐을 덜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신고?

그것은 도저이 과학적으로는 계산해 내지 못할 하나의 영원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인 동시에 또한 뭇 어머니가 가질 수 있는 영원한 진리(眞理)이기도 하였다.

「어머니, 왜 이렇게 가벼워 졌어요?」

「나이가 많으니까 가벼워 지지.」

「무엇 때눈에 어머니는 나이를 많이 잡수셨어요?」

「내가 어서 나이를 먹어야 네가 크는 걸 보지 않겠니?」

「………」

영민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또 얼마동안 묵묵히 올라 가다가

「그럼 어머닌, 저 때문에 살아 계시나요?」

「그럼 내가 누구를 믿고 산다는 말이냐?」

「………」

영민은 또 말이 막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 하나 때문에 살아 계신다?……그 나 하나가 오늘날 거룩하신 그 분들의 사랑을 배반하고 나 혼자의 욕망을 추궁하여 마지않는, 아아, 하나의 잔인한 「에고이스트」가 되려는고?……

「유경이가 뭐냐?…… 이 거룩한, 이 위대한 사랑 앞에 오 유경이가 대체 무엇을 주장하려는가?…… 유경이여, 입을 벌려 말을 하라!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제공하려는고?……그대는 내 인생에 대체 무엇을 <풀러스>하려는고?……」

태극령 고개 위까지 영민은 올라 왔다. 도라지탑 앞에서 어머니는

「얘, 어서 내리자. 누가 보믄 사흘 동안은 웃을라.」

「한 달 동안이라도 웃으래면 되지 않어요?」

영민은 어머니를 내려 놓았다.

「어찌나 가벼운지, 어머니를 업고 동경 까지라두 갈것 같아요.」

「동경꺼정?……참 널 따라 동경꺼정 가 보고두 싶다. 네가 글쎄 한 푼두 없는 몸이 어떻게……」

「또 어머니는 걱정이시지! 동경엔 고학생이 많답니다. 신문두 팔구, 구두 두 고치구, 노동두 하구……」

「글쎄 네가 노동을 어떻게 하구……구두를 어떻게 고친다는 말이냐?」

「글쎄 어머니는 아버지나 잘 모셔 주세요.」

「집 걱정은 말구……몸 조심 해야 한다. 아버진들 네가 미워서 그러시겠니? 삼룡이 녀석이 우리 땅을 사겠다구……남 보다 一[일]원씩을 더 주고라도 기어코 우리 땅을 시겠다구 덤비니까 그러시는거지.」

3[편집]

삼룡이라는 말에 영민은 이내 분이를 생각한다. 준길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집을 나간 운옥을 생각한다.

「바로 이 도라지탑 앞에서 운옥이가 준길이 녀석을 장두칼로 찔렀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아들의 양복 바지에 묻은 눈을 털어 준다.

「날이 밝기가 바쁘게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준길이가 주재소 순사들을 다리고 와서 운옥일 내노라구……그래서 아버지가 붙들리어 가서 보름 동안이나 무서운 매를 맞구……」

벌써 여러 번째 듣는 어머니의 되풀이 말씀이다.

「그 애두 지금은 어디를 가 있는지……三[삼]년 전까지는 평양 무슨 여관에서 식모살이를 하더라는 소문두 들리긴 했지만 그후엔 아무 소식두 들리지 않으니……뭐 죽기야 했겠니만 여북한 고생이겠니」

「편지 같은 것이 온 적은 한 번두 없었나요?」

편질 했다가는 큰일 「 나게? 그 후부터 우리 집에 오는 편지는 주재소에서 꼭꼭 떼 본다는데……」

「………」

영민은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암담한 마음으로

「어머니, 인젠 들어 가세요.」

「오냐 ── 그런데 네게 편지를 한 그 서울 색시는 이름이 뭐이지?」

영민은 약간 웃는 얼굴로 어머니를 빤히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대답을 하였다.

「유경이 ── 오 유경이라구 부른답니다.」

「유경이? ──」

「네.」

「그래 그 색시면 네 맘에 똑 맞느냐?」

「어머니두……」

영민은 부끄러워 약간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의 그 살뜰하신 물음이 무척 기쁘다.

「하기야 네 맘에만 맞으믄 되지. 우리야 뭘 아느냐?」

「아버지께서는 경박한 여자라구 하시지만,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랍니다.」

「바누질두 잘 한다드냐?」

「에?……」

하고 영민은 놀라다가

「아, 저 바……바느질 말씀이세요? 네, 아주…… 아주 잘 한다드군요.」

하고 영민은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대답을 하였다.

「오오, 그래? 그렇게 학교를 많이 댕긴 색시가 바누질을 잘 한다믄 얌전할테지.」

「그럼요!」

아들은 웃으면서 대답을 하였다.

「올에 스물 하나래지?」

「예.」

「생일은?……」

「에?……」

영민은 또 말이 막혔다.

「생일이 언제래드냐?」

「아, 생일은……생일은 모르는데요.」

원 「 , 애두……생일을 모르면 어떻게 궁합을 본다는 말이냐?」

「궁합이라고요?」

영민은 또 한번 놀라며

「어머니, 요 다음엔 꼭 생일을 알아 올께요. 아마 생일두 꼭 궁합에 맞을 생일일 꺼야요.」

「아이두 참……그거야 봐 봐야 알지.」

「자아, 어머니, 이젠 들어 가세요.」

「네가 먼저 어서 떠나려므나.」

「아니요. 제가 여기서 어머니 내려 가시는 걸 보구 떠날테야요.」

「아니다. 내가 여기서 네가 떠나는 걸 보구 갈테다.」

「아이 어머니두!」

「아이 참 애두!」

종시 아들이 졌다. 아니, 어머니에게 져 드렸다.

태극령 고개를 다 내려와서 뒷탑골 동리 밖까지 다달았을 때도 어머니의 조그만 그림자는 도라지탑 옆에 꽁꽁 얼어 붙은 듯이 고대로 서 계셨다.

「하늘이여, 내 귀여운 아들 영민이의 앞날에 불행이 없도록!」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공손히 하늘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