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4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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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적막 속에서[편집]

1[편집]

인생은 끊임 없는 유전(流轉)속에서 웃고 울고 노래하고 울부짖고 인위적인 온갖 현상을 그칠 줄 모르는 무한대(無限大)의 변모(變貌)를 일으키고 있건만, 그렇듯 이 혼돈한 지구 위의 뭇 현상이 격동하는 유전과 거대한 변모를 계속하고 있건만 오로지 우주 그 자체의 운행(運行)만은 정밀한 톱니바퀴와도 같이 일분 일초의 어긋남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알 바가 없다.

우주 전실재(全實在)의, 이러한 소장(消長)과 명멸(明滅)의 운명을 생각할 때, 인간 백 영민은 깊고 깊은 우주적(宇宙的)인 적막(寂寞)을 숨 가쁘게 느끼며 거대한 공허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재성(實在性)을 망각하였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탄, 비 오듯이 쏟아지는 탄환 ─ 지구의 표면을 변모시키는, 오늘의 이 인위적인 처참한 전쟁이 지금 한창 지구상에 벌어져 있건만 영민은 그러한 모든 어지러움, 그러한 온갖 실재를 망각하고 다만 하나 우주적인 거대한 쓸쓸함과 우뚝 마주 서 있었다.

지구 위의 온갖 실재를 망각할 때, 좋건 싫건 영민은 우주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체(天體)의 존재 이유 ─ 자전(自轉)을 계속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공전(公轉)하는 지구며 또 그 지구의 둘레를 공전하는 달의 존재 이유가 대체 무엇이라는 말이냐?

「없다. 하등의 이유도 거기에는 있을 수 없다!」

우주의 존재 이유를 규명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이 커다란 우주적인 쓸쓸함 가운데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허탈된 자기 자신을 영민은 간신히 의식할 따름이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드넓은 평원을 지금 五十[오십]명의 학도병을 실은 운명의 철마(鐵馬)가 눈보라 날리는 삭풍 속에서 마치 일렬의 개미떼처럼 아물거리며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내리는지를 그들은 알 바가 없었다. 다만 그들은 봉천을 거쳐서 천진 쪽을 향하여 끌리어 가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다음 역이 저 유명한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山海關)이라는 것으로서 넉넉히 추측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민은 차장에 몸을 기대고 가도가도 그칠 줄을 모르는 황막한 흰 눈 벌판의 희미한 먼 수평선을 무서운 얼굴을 하고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 버리고 하나의 거대한 공허, 허무, 적막과 대면하여 있는 것이다.

영원히 계속되어 있는 흰 눈 속에 가다가다 하나씩 선로지기의 움 같은 조그만 집이 연선에 게딱지처럼 붙어 있곤 하였다. 그 게딱지 집 앞에는 털옷과 털 모자를 쓴 선로지기가 부처님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차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광대무변한 눈 벌판 가운데서도 삶에의 애착을 끊지 못하고 살아야 하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것같은 선로지기의 모양을 볼 때마다 영민은 완전히 망각해 버렸던 현실의 세계 속으로 다시금 한발한발 끌려 들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 이 운명의 열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도망을 해야만 하지 않느냐!」

2[편집]

서울을 떠날 때의 그 폭풍적 흥분이 다시금 영민의 침체한 정신력을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아아, 유경이, 유경이……」

어린애를 꽉 부여 안고 사람의 물결 속을 미친 듯이 헤매이던 유경의 모습이 또다시 영민의 전신을 불사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운옥이를 만나야만 한다!」

영민의 자태를 지척지간에 보면서도 감이 영민의 눈 앞에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돌 기둥 뒤에서 손수건을 찢어지도록 흔들어 대던 운옥이의 너무나 어질고도 서글픈 행동이 영민의 가슴을 다시금 쑤시기 시작하였다.

서울을 떠난 직후부터 영민은 탈주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영민의 몸뚱이를 등 뒤에서 꽉 붙잡았던 「나까노」라는 지휘관의 무서운 눈초리가 항상 영민의 신변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게는 허용되는 사소한 자유일 망정 영민에게는 통 허용되지 않았다.

가령 예를 들면, 기차가 정거장에 도착하였을 때 다른 학생에게는 「포옴」을 산책하는 자유가 있었지만 영민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기사마와 · 기겐 짐부츠다(너는 위험 인물이다!)」

서울을 떠날 때 영민을 들창에서 끌어 내린 나까노 지휘관은 흥분한 영민의 따귀를 보기 좋게 갈기면서 그런 말을 하였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변소 출입 이외에는 일체의 자유 행동을 금지한다! 와깟다까(알겠나)!」

「………」

「와까랑까(모르겠나)?」

「와까리마시다(알겠읍니다).」

영민의 유도 二[이]단의 실력은 일대일(一對一)이라면 나까노 하나 쯤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권력의 마당에 선 영민의 신세로서 어찌 일대일의 승부를 다툴 수 있으랴.

이리하여 차중에 있어서의 온갖 자유가 무참히도 박탈된 영민으로서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탈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의 사실로 변하고 말았다.

편지 한 장을 내는 것까지도 영민은 일일이 지휘관의 승락을 얻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영민에게 허용된 단 하나의 방법은 쏜살같이 내달리는 들창으로 넘어 나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이었다. 설사 생명을 거둘 수 있다손 치더라도 눈보라 치는 이 무연한 벌판에서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밤은 열 시부터 취침 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취침 시간에는 한 시간 교대로 두 사람 불침번(不寢番)이 총을 메고 찻간 앞문과 뒷문 밖에 하나씩 섰다.

만일 영민에게도 이 불침번이 허용되었더라면 그는 정거장에 도착하였을 때 어떻게서든지 탈주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 인물의 「렛텔」을 붙이운 영민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가 않았다.

영민은 심중 무척 초조하였다. 목적지에 도착만하면 탈출의 기회를 영영 놓쳐 버릴 것만 같았다.

영민은 얼굴을 들어 침울에 잠겨 있는 동료들을 한번 쪽 돌아 보았다. 그들 가운데도 영민과 같은 생각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는 학생이 꼭 있을 것만 같았으나 그것이 누구인지를 좀처럼 골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기차는 산해관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