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5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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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지를 버린 어여쁜 투어[편집]

1[편집]

눈이 폭폭 쏟아지는 밤거리를 전차는 우렁차게 달리다가 종로에서 멎었다.

열 시가 가까운 종로 네거리다.

캄캄한 밤 하늘을 온통 덮어 버린 눈송이다. 그 햇솜 같은 소담한 눈송이가 희미한 가로등을 배경으로 일찌기 동경「다까라즈카」의, 화려한 무대 장치에서 보던 것처럼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경은 그러한 낭만적인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는 하나의 관객이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무대 위에서 울고 눈물짓는 구슬픈 운명의 주인공임을 분명히 느끼면서 전차를 내렸다.

「어머니가 정말로 종각 앞에서 기다리고 계실까? ─」

신문 광고에는 분명히 그렇게 씌어 있었으나 한 걸음 한 걸음 종로에 가까워짐을 따라 어쩐지 유경에게는 그것이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무슨 신기로운 어린애들의 동화와도 같았다.

캄캄한 바다 어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해변가 바위에 홀로 앉아서 영영 돌아올 줄 모르는 아들을 기다리며 눈물 짓는 어부의 늙은 어머니를 유경은 머리에 그려 보는 것이다.

목도리를 펼쳐 등에 업은 어린애의 머리를 푹 덮으며 유경은 머리카락이 흩어저 내린 초췌한 얼굴로 인기척이 드믄 맞은 편 종각 앞을 후딱 바라다 보았다. 바라다 보다가 유경은 저도 모르게

「아 ─」

하고 가늘게 외쳤다.

「어머니다! 분명히 어머니다!」

그렇다. 식모 옆에 오뚜기처럼 서서 오고 가는 사람의 얼굴을 일일히 들여다 보고 있는 어머니의 아아 그 너무나 반가운 어머니의 측은한 모습이 눈에 싸인 가로등 밑에 어렴풋이 바라다 보이지 않는가.

「어머니이잇 ─」

유경은 미친 사람처럼 전차 길을 뛰어 건느면서 하늘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내어 외쳤다.

어머니에게 대한 그 절박한 애정, 어머니에게 대한 그 너무나 송구한 고마움이 유경의 그 뾰족하고 모난 날카로운 성품을 여지없이 문질러버리는 귀중한 순간이었다.

「어머니이잇 ─」

유경이가 그렇게 또 한 번 외치면서 전차 길을 완전히 건너섰을 때는 이미 어머니와 식모가 두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무어라고 알아 들을 수 없는 계사니 같은 고함을 치면서 유경이를 향하여 맞받아 달려 오고 있을 때었다.

「유, 유경이다!……분명히 유경이다!……」

「아까씨가……아까씨가……」

손을 내저으며 허벙지벙 달려 오던 어머니와 식모가 왈칵 달려 들어 유경을 끌어 안고 ─

「어머니잇!」

「유, 유경아! 분명히 유경이로구나!」

「아가씨! 앗, 애기가…… 애기가……」

어머니는 유경의 목을 껴안았고 식모는 등에 업힌 어린애를 껴안았다.

「어, 머, 니 ─」

유경은 어머니의 품 속에 머리를 박고 무섭게 울어 댔다.

「오, 오냐……내, 내 딸…… 오, 오냐…… 내, 내 딸……」

어머니의 혓바닥은 그 이상의 긴 이야기를 형성하지 못하고 자꾸 굳어만졌다.

「오, 오냐…… 내 딸, 용허다! 오, 오냐…… 내 딸, 용허다!」

「어머니!」

「글세 용허다니까, 용허다니까 ─」

「아가씨, 빨리 애기를 내려 놓으세요!」

「옳지, 옳지! 애기를…… 애기를……」

식모가 유경의 등에서 애기를 받아 제 등에 업는 것을 그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만 보면서 어머니는 그저

「옳지, 옳지!」

소리만 연방 냈다.

길 가던 사람들은 하나 둘 발걸음을 멈추었고 눈은 소리없이 자꾸만 내렸다.

2[편집]

자동차가 아현동에 도착했을 때 오 창윤은 신발도 걸칠 여유가 없어 현관 밖으로 뛰쳐 나오면서

「유경아 ─」

고함을 쳤다.

「아버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차를 내리는 딸의 모습이 말이 아니다.

「여보, 사내야요, 사내!」

눈물 속에서도 어머니의 그 한 마디는 무척 명랑했다.

「으음, 사내!」

이윽고 오 창윤 내외는 꾀죄죄하니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딸을 끌고 밀고 하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지분 냄새 하나 풍기지 않는 초췌한 얼굴에 머리카락이 되는 대로 흩어져 내리고 오굴쪼굴한 구겨진 철아닌 겹옷 주제가 초라스럽기 그지없다. 눈물 겨웁기 한이 없다.

「유경아, 네가 글쎄……」

어머니는 유경의 그 남루한 모습과 초췌한 얼굴이 한량 없이 가엾어서 가슴이 쑤시는듯이 아파 온다.

반 년 전의 그 발랄하던 딸의 자태는 다 어디로 갔는고?…… 까칠한 얼굴에 핏기라고는 한 점도 없다. 반 년 동안의 그 비바람 불던 혹심한 세고(世苦)는 유경의 모습에서 처녀의 긍지를 사정없이 박탈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업드려 져서 얼마 동안를 느껴 울던 유경이가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 조용히 머리를 들었다.

「어멈, 애기 이리 주어요.」

유경은 몸 매무새를 단정히 가지며 식모의 등에서 금동이를 받았다. 비스듬히 몸을 돌려 아버지를 비끼면서 유경은 저고리 섶을 들치고 금동이에게 젖꼭지를 물렸다.

「아이, 어쩜, 눈 코 입이 번쭉번쭉 잘두 생겼네요!」

식모는 그러면서 어린애의 무심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냉큼 부엌으로 나가버렸다.

「이름이 뭣이지? ─」

어머니는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씻으며 어린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어머니!」

유경은 어머니의 물음에는 대답을 않고 어머니를 불렀다.

「오냐, 오냐.」

「사흘 동안이나 어머니는 한길 가에서 ……」

일단 멎었던 눈물이 호물호물 젖꼭지를 빨아 대는 금동이의 하얗고 무심한 볼 위에 쭈루루 떨어진다.

사흘이구 「 열흘이구, 네가 이처럼 돌아 온 것만이 기쁘지!」

「유경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유경을 불렀다.

「네 ─」

「기쁘다! 아버지는 기쁘다!」

「…………」

「반 년 동안의 너의 성장(成長)이 눈물나게 기쁘고나! 과히 큰 일을 저질지 않구 이처럼 돌아와 준 것만이 이 아비는 그저 기쁘기만 하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용서가 뭐냐? 네가 벌써 어미 노릇을 하는 것이 신기하도록 반갑구나!

여보.」

오 창윤은 아내를 불렀다.

「네? ─」

「슬퍼서 울어 본 적은 없지만……」

오 창윤은 눈을 껌뻑거리며

「기뻐두 눈물이 나는구려. 그럼 편히 쉬어라. 쉬면서 네 어머니 하구 막혔던 이야기나 싫건 해 보아라.」

사랑방으로 오 창윤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