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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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오락 실낱같은 희망이건만[편집]

1[편집]

밤에만 벌어지는 전쟁이 나흘 동안 계속되다가 중국군은 그만 퇴각해 버리고 말았다 영민이가 부상을 . 당하고 야마모도 부대장이 전사를 한 그날 밤의 전투가 제일 심한 셈이다. 그리고는 거지반 총소리만의 전쟁으로서 수류탄을 던질만큼 접근해 오지도 않았다. 五[오]만 명이니 , 七[칠]만 명이니 하는 병력의 수효도 생각하면 오보가 아니면 허위의 보도였을 것이다. 일본 병 五十[오십]명과 그 밖에 경찰대, 보안대 등을 합하여 겨우 二 [이]백여 명에서 더 지나지 못하는 준앙성이 제 아무리 견고하다손 치더라도 五[오]만, 七[칠]만의 병력을 가지고 공격하지 못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싱겁기 짝이 없는 전쟁이다.

하남작전의 호전을 따라 회양성의 잔류부대도 본부대의 뒤를 이어서 서안(西安)으로 이동한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으나 무연한 평야에 보리가 한 자 이상이나 자라도 대대로부터는 이동의 통지는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떤 날 오후, 영문안 위병소에 어떤 젊은 여인이 한 사람 찾아 왔다. 누렇게 뜬 얼굴과 푸릿푸릿하게 죽은 얼굴만 보아 오던 위병 하나가 정신이 펄떡 들어 눈 앞에 선 여인을 얼빠진 사람처럼 쳐다보며 묻기도 전에

「어떻게 찾아 왔읍니까?」

지방인에게 대하여 이처럼 정중한 말씨를 그들은 좀처럼 쓸 줄 몰랐다.

「저, 혹시 이 부대에 학도병들이 섞여 있지 않습니까?」

「학도병―아, 조선인 학도병 말이겠지요?」

「예, 용산부대에서 온 학도병이 몇 명, 이 회양부대에 배속되었다는 말을 듣고……」

「있읍니다. 이름이 뭣입니까?」

「저, 백 영민이라는 사람인데요.」

「아, 하꾸ㆍ에이ㆍ민(백영민)?―」

영민이와 같은 반인 이 위병은 시로군의 이름을 얼른 알아 보았다.

「예, 있읍니다.」

「아, 그, 그러셔요……」

위병의 입으로부터 무심중 흘러 나온 그 한 마디, 백 영민이라는 학도병이 이 부대에 있다는 그 명백한 대답은 분명 그 여인의 오로지 단 하나의 희망을 충족시키는 위대한 한 마디인 동시에 삶의 보람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하늘의 계시인 듯하였다.

「그러서요? 분명히 여기 있읍니까?」

「있읍니다. 그러나……」

그러나 위병은 영민의 중상을 말하기 전에 먼저 여인의 신분을 물어 보았다.

「본인과 어떤 관계가 있읍니까?」

「네 저, 저……바루 제 동생입니다.」

「그러십니까.」

위병은 잠깐 동정의 얼굴을 짓고 있다가

「그러나 백군은 이번 전투에 명예의 부상을 받았읍니다.」

「옛, 부상을 받았다구요?……」

여인은 얼굴 빛이 해말쑥하니 핏기를 잃기 시작하였다.

「이리 좀 들어 와 앉은시지요.」

그대로 내버려 두면 쓰러질 것 같아서 위병은 얼른 걸상 하나를 내 놓으며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여인은 가볍게 사양을 하고 나서

「많이 다쳤나요?」

온 정신을 거기다 집중하면서 여인은 조용히 물었다.

「다리에 파편을 맞고……또 눈과 귀가 약간……」

「눈이라고요?……귀라고요?……」

여인의 두 눈동자가 고양이의 그것처럼 확대되는 순간을 위병은 분명히 보았다.

2[편집]

점령군의 흑막의 인물 고지마ㆍ도라오를 살해한 중대 범인인 장 일수는 군경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동료 한 사람을 시켜 용산부대 소속인 백 영민의 행적을 더듬게 하였다. 그러나 상구에서 헤어지고 탁성에서 갈라지고 한 영민의 행적은 그리 쉽사리 찾아 내가가 힘들었다. 그래서 상구로, 탁성으로 해서 간신히 영민의 소속 부대가 회양이라는 것을 더듬어 가지고 운옥은 오늘 아침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동안 약 한 달 동안의 날자가 허비되었다.

「그러나 부상병들은 닷새 전에 탁성 야전병원으로 옮아 갔읍니다.」

「탁성이라고요?……」

운옥이가 탁성 연대본부에 들려서 영민의 배속부대를 더듬고 있는 것이 바로 한 주일 전 일이 아닌가. 탁성서 회앙까지 운옥은 도보로 왔다.

「아, 그러고 생각하니, 여기 오는 도중에서 부상병을 실은 추럭 한 대를 만났읍니다.」

「아, 그러면 그 차일 것입니다.」

아아, 바로 그 추럭에 그이가 타고 있었구나! 보이지 않는 무슨 운명의 손이 자기와 영민의 사이를 멀리하기 위하여 한사코 노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명에는 관계 없을까요?」

「글쎄 올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수류탄에 맞아서 부대장은 전사를 하고 백군은 정신을 잃은 것만은 사실인데…… 아, 좀 더 상세한 것을 아실려거든 임시 붕대소로 되어 있던 회춘병원 원장을 만나 보십시요.」

그러면서 젊은 위병은 회춘병원(回春病院)의 소재지를 친절히 알으켜 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선까지 오셨읍니까?」

「그저……그저 한번 면회를 할려구요.」

「헤에……면회를 하실려구 여기까지?……」

위병은 눈이 둥그래 졌다.

영문을 나선 운옥은 알으켜 준대로 길을 더듬어 이윽고 회춘병원을 찾았다.

황해도 어떤 고을 공의로 있던 사나이가 만주로, 북지로 떠돌아 먹다가 마침내 일선에까지 굴러온 四十[사십]객이다. 컴컴한 중국서 가옥 한모퉁이에 소위 진찰실이랍시고 책상 두개 걸상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운옥은 인사를 하고 나서 영민의 병세를 물었다.

「예, 나는 월래 냇과가 전문이지만 지금은 그저 닥치는 대로 해 넘기지요. 넙적다리에 들어 백힌 파편만은 끄내 응급치료를 해 놓았지만요. 눈과 귀는 소위 전문적인 수술이 필요하기에 손을 대지 못했읍니다.」

「다리에 뼈는 상하지 않았읍니까?」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읍니다. 소위 맹관파편창(盲管破片創)으로서 三 [삼]주일 내지 五[오]주일이면 전치가 되는 것이니까 과히 염려하실 건 없겠지요.」

원장은 진찰 카―드를 들여다 보면서 설명하였다.

「눈은 몹시 다쳤읍니까?」

역시 수류탄의 파편이 「 들어 갔읍니다. 수술을 하고 그 파편을 끄내야만 되는데 여기는 수술 도구가 없어서요.」

「앞을 영 보지 못하는 몸이 되지나 않을까요?」

「글쎄 올시다. 잘은 모르지만 뭐 괜찮겠지요.」

「귀도 통 듣지를 못하는가요?」

「폭풍에 고막이 못 쓰게 되어서 당분간은 잘 듣지 못하지만 고막천공(鼓膜穿孔) 만이라면 과히 걱정 될 것이 없을것 같은데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하고, 운옥이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을 때 원장은 운옥의 단정한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환자의 누님 되시는 분이라고 그리셨지요?」

「아, 아니, 네……」

운옥은 약간 당황한 대답을 하였다. 그때 원장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고 있읍니다. 당신이 유경씨라는 분인 줄을 나는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읍니다.」

「네?…… 유경이라고요?」

너무나 뜻하지 않은 물음에 대한 운옥은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편집]

원장은 역시 빙글빙글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나는 당신의 명예를 훼상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실은 부상 당시 환자는 다량의 출혈과 극심한 충동으로 말미암아 깊은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읍니다. 그동안, 환자는 잠고대처럼 유경이라는 이름을 수없이 불렀읍니다. 수술대 위에 올라서도 환자는 어머니를 찾으며 유경이라는 사람을 꼭 만나게 해 달라고 신신 부탁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것은 정말 눈물겨운 광경이었어요. 무슨 말 못할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 아까 당신을 첫 눈에 보았을 때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아, 이분이 바로 그 유경이라는 여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특별한 관계가 없는 몸이라면 이런 최일선까지 찾아 올 리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운옥은 그저 얼빠진 사람처럼

「유경이라고요?―」

하는 물음을 정신없이 되풀이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예, 분명히 유경이라는 이름이었읍니다.」

원장은 자기의 직감이 들어 맞이 않을까 보아 걱정이나 하는 사람처럼 운옥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어디선가 한두 번 들은 상 싶은 이름이 아닌가.

「유경이, 유경이?―」

운옥은 거의 아픔에 가까우리 만큼 혹심한 타격을 마음에 받으며 온 정신을 가다듬어 어지러운 기억의 과거장(過去帳)에서 유경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무한히 애를 쓰는 것이다.

「유경이라고요?」

「예, 분명히……」

그러나 운옥의 기억은 좀처럼 튀어 나오지가 않는다.

「당신이 유경씨가 아닙니까?」

「아니요.」

운옥은 쓸쓸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럼 역시 누님 되시는 분이군요.」

「예―」

「아, 그렇습니까. 난 꼭 그런 줄만 알고……하여튼 유경이라는 분을 가급적 속히 환자와 만나게 하여 주는 것이 환자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 줄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많은 영향을 줄것 같습니다. 아, 역시 누님이었군요.」

「………」

거기에는 대답을 않고 운옥은 얼마 동안을 머엉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나 난듯이

「저어, 그 밖에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른 적은 없었나요.」

하였다.

거의 끊어져 가려는 최후의 한 줄기 희망이 운옥으로 하여금 그러한 질문을 토하게 하였다.

운옥은 온 정신을 모아 원장의 입술의 움직임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을 때

「아, 참 우녹이라는 이름도 한두 번 찾는 것 같았읍니다. 우 녹이―그렇습니다. 분명히 우녹이라구 그랬읍니다.」

무심중 흘러나온 원장의 한 마디였다. 그 순간, 운옥은

「아, 아, 그, 그러셔요?―」

하는 한 마디와 함께 지남철에 끌리는 쇠붙이와도 같이 운옥의 상반신이 의사의 얼굴 앞으로 휙 끌리어 가면서

「아, 그것은 우녹이가, 우녹이가 아니구 운옥이……」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아, 그렇습니다. 운옥이겠지요. 그 운옥이가 무척 불쌍한 사람이라구― 그런 말을 분명히 들었지요.」

「그러셔요?」

운옥은 다시금 침착해 졌다.

「당신이 그럼 바루 그 운옥씹니까?」

「아, 아니요. 저는, 저는 홍 금순이라는 이름입니다.」

백씨 성을 가진 환자의 누님이 홍씨 성을 가질 리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의사는 그 이상 더 물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운옥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기서 탁성까지 가는 무슨 자동차 편 같은건 없을까요?」

「없읍니다. 혹시 군의 트럭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편승이 무척 어려울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요.」

운옥은 회춘병원을 나섰다.

4[편집]

불쌍한 도라지가 도승 법월(法月)을 그리듯이 그처럼도 애절하게 영민의 성장과 변모를 단 한번만이라도 눈 앞에 가까이 보고 싶은 운옥이었건만, 정녕 그러한 허 운옥이었건만 지나간 날의 천일관에서도 운옥은 자기의 모습을 영민의 앞에 내놓지를 않았으며 지나간 날의 경성역에서도 운옥은 자기의 몸을 돌 기둥 뒤에 숨겨 놓았었다. 그리고 그러한 운옥이가 오늘 날, 영민의 뒤를 따라 일선으로 오기는 왔지만 영민의 눈 앞에 자기의 모습을 선뜻 내놓을 용기가 과연 있는지 없는지, 운옥 자신도 그것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은 영민이가 본의 아닌 싸움터로 끌리어 나가 생사의 경지를 허덕이고 있을 그 시간에 자기만이 어찌 안일한 삶을 차지할 수가 있을 것인가?―하는 그것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북경서 장 일수의 그 펄떡펄떡 뛰노는 적극적인 정열을 숨 가쁘게 체험하는 순간, 운옥은 지나간 날의 자기의 삶이 너무나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소극적이었던 것을 발견하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이를 부여잡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좌악좌악 울어 보았으면……」

이것이 북경서부터 골똘히 품고 온 허 운옥의 적극적인 목적이며 유일한 희망이었다 말은 한 마디도 . 필요가 없을것 같았다. 말로서 영민의 애정을 차지하게 될, 그러한 위대한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운옥은 안다. 영민의 그 성장한 몸을 와락 부여잡고 一[일]년이고 二[이]년이고 울고 울다가 그대로 도라지처럼 배리배리 말라 죽어 버렸으면 운옥은 제일 행복한 것이다. 영민의 몸에 그 어떤 불행이 있기 전에 운옥은 꼭 한번 그것을 해 보고 싶어서 싸움터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이 과연 수월하게 실행이 될런지?― 영민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그러한 불우한 몸이 되지 않고 튼튼한 체구로서 병영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들 운옥의 이러한 결심이 지나간 날의 그것처럼 모래 위의 다락과도 같이 힘없이 허물어 졌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민이가 그러한 참혹한 부상을 받고 병상에 쓰러진 오늘 날, 운옥은 시 바삐 영민의 옆으로 가야만 했다. 운옥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늘의 명령인 동시에 돌아 가신 아버지의 뜻이기도 하였다.

「그이가 소경이 되었다!」

그 한 마디가 운옥의 뼈를 저리게 하였다.

발이 땅에 붙지가 않는다. 허벙지벙 회춘병원을 나섰을 때

「아, 유경이란 그이가 아냐?……」

운옥은 마침내 유경이란 이름의 기억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김 준혁 박사의 애인이 아니가.

지나간 날, 운옥이가 청량리 밖 장 일수의 출장 간호로 가 있다가 파출부를 해고 하겠다는 바람에 광화문 병원으로 잠깐 돌아 왔던 일이 있었다. 그때 동료 경숙이의 입으로부터 준혁의 실연의 상대자가 바로 맹장염으로 입원을 했던 오 창윤씨의 따님인 유경이라는 말을 들은 운옥이었다.

「그러나 그 유경일까?…… 같은 이름을 가진 딴 사람이 아닐까?……」

운옥의 머릿속이 주마등처럼 핑핑 돌아 갔다.

「그럴지두 몰라. 그이두 동경 무슨 여자대학에 다닌다구 했으니까.」

만일 그렇다면 준혁의 정열을 체험한 운옥으로서는 실로 기구한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핑글핑글 돌아 가는 인생들의 그 너무도 좁다란 경험 세계(經驗世界)가 가소롭기도 하였다.

어쨌든 운옥은 과거 五[오]년 동안의 유랑생활에서는 아직 가져 보지 못한 행복감을 전신에 느끼는 것이다.

「그이가…… 그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지 않는가! 불쌍한 운옥이란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지 않는가!」

그렇다 그 순간에 있어서의 . 운옥이의 전신을 불태운 것은 오로지 그 한마디 뿐이었다. 과거의 온갖 고난의 생활이 태양 앞에 이슬처럼 슬어지는 순간이다. 운옥이 앞에는 유경이가 무제가 아니었다. 다만 한 마디, 영민의 입으로부터 잠꼬대처럼 흘러 나왔다는

「불쌍한 운옥!」

이라는 한 마디가 있을 따름이다.

「그이의 옆으로! 그이의 옆으로!」

운옥이의 마음은 하늘을 달리는 천마인 양 서둘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