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30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실연 선수[편집]

1[편집]

중부 태평양 방면의 니밋츠 제독과 소로몬, 뉴 ─ 기니야 방면에서 필리핀을 목표로 하는 맥아더 장군에의한 태평양 양면 작전은 실로 표리일체를 이룬 절묘한 전격작전으로서 금년 二[이]월에 시작된 마 ─ 샬 군도 공격을 비롯하여 남양의 중추를 형성하는 마리아나를 강습하여 六[육]월에는 드디어 사이판에 상륙을 하였다. 이 사이판 섬의 기습 상륙은 일본 해공군에게 일대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생명선인 내남양(內南洋)의 제해권(制海權)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태평양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어서 十[십]월에 접하자 일본 연합 함대가 사실상의 종전을 고한 역사적인 비율빈 작전이 개시되었다. 니밋츠, 맥아더의 양대 공세가 합류한 이 작전이야말로 미국측에서나 일본측에서나 다같이 국가의 흥망을 가리는 건곤일척의 승부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일본은 외부 방위선의 근본적인 총 붕괴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남방 자원의 보급이 절단되어 근대전의 완수가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十[십]월 十九[십구]일, 미군이 레이테 만(灣) 일각에 상륙하자 피비린내나는 레이테 공방전이 처참하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허 운옥이가 매화 한 분을 책상 위에 남겨놓고 표연히 김 준혁 박사의 눈앞에서 사라진지도 어언간 一[일]년 반이나 되었다.

「과거를 잊어 버리자. 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인생의 반려자이긴 하지만 인생 그 자체는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가!」

자칫하면 인생의 깊고깊은 허무와 회의 속에서 헤매이며 광명을 등진 암담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몸이되고 말았을는지도 모를 환경이었다. 그러나 건실한 의학도 김 준혁 박사는 그러한 암담한 환경 속에서 감연히 헤엄쳐 나올 굳세인 의지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는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빨리 잃어 버렸던 자기의 본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한가하면 생각이 많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선배가 권하는 대로 개업을 하는 한편 S여의전 조교수로 나가는 몸이 되었다. 그것은 준혁의 상처받은 마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치유하는 좋은 직업이었다. 향학열에 불타는 수많은 학생 앞에 서는 순간부터 준혁은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직업에 대한 순수한 기쁨을 준혁은 발견하였다. 준혁은 자기 몸이 무척 바빠 돌아가고 있을 때 삶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한 준혁의 투명(透明)한 생활면에 색채를 띤, 그 어떤 생기있는 행복 같은 것이 마침내 찾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준혁이가 이 영주(李英珠)라는 하나의 쾌활하고 현실적인 여성 가운데서 자기의 극히 견실한 애정의 불길이 불붙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유경이가 탑골동에 가 있을 무렵이었으니까 그것은 지나간 초여름의 일이었다. 오 창윤 내외분의 누차에 걸친 그 지극한 권유를 물리칠 바 없어 준혁은 마침내 대륙무역 사장의 딸 영주와 교제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교제에 있어서 준혁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였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보아서 자기와 같은 생리와 인생관의 소유자가 과연 어떠한 데서 자기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 그것을 준혁은 이 영주에게 발견한 것 같았다.

「그래요. 자기다운 행복! 그것은 일견 평범할는지는 모르나 자기다운 행복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영주는 자기 룩작에서 배를 꺼내 한 알은 준혁이에게 주고 한 알은 자기가 깨물면서 맑은 하늘을 우러렀다.

어떤 일요일 오후였다. 우이동으로 피크닉을 나온 두 사람이 점심을 먹고 과일을 깎는 참이다.

2[편집]

十[십]월 하순의 드높이 맑은 하늘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있었다. 개천을 내려다 보는 양지 쪽 잔디밭에서 우거진 단풍을 배경으로 하고 준혁과 영주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자기다운 행복! 영주씨는 참 좋은 말을 하였소.」

영주의 말이 폭 준혁이의 마음에 울려 들어 왔다.

「선생님, 정말루 그처럼 좋게 생각하세요?」

흰 운동모를 휙 벗으며 영주는 약간 노래 보이는 머리털을 흔들었다. 동굴 동굴한 얼굴에 약간 나와 보이는 이마를 영주는 가지고 있었다. 총명한 모습이다.

「정말루 좋게 생각하지요, 그럼!」

「그럼 한 마디 더 할께요.」

「더 하셔요.」

「바라서 되지 않는 일을 바라지 마세요. 그것은 에네르기 ─ 의 소모를 초래할 뿐이며 자기다운 행복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냐요?」

준혁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영주로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준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준혁은 영주가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다.

「행복이란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행복이란 항상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언젠가 유경이에게 한 준혁의 말과 똑같은 한 마디가 아닌가.

「선생님은 어떠세요?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두 그렇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먼 하늘만 쳐다 보세요?」

준혁은 웃었다.

「선생님은 선생님 눈 앞에 제 앉아있는 것 보이지 않으세요?」

그러면서 영주도 웃어 보인다.

「자기다운 행복만이 행복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자기답지 못한 행복도 세상엔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일종의 횡령(橫領)이라고 생각키워요.」

「횡령? ─」

처음 듣는 말이다. 그러나 이 처음 듣는 한 마디에서 준혁은 비로소 현실적인 행복의 정체(正體)를 본 것 같아서 영주가 더 귀여워지는 것이다.

「저는 집의 아버지로부터 아현동 오 선생님을 통하여 선생님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아주 성적이 우량하신 실연선수(失戀選手)라는 말도 듣고요.」

「하하하핫…… 실연 선수? ─」

준혁의 입으로부터 씹던 배조각이 폭발을 하였다.

「저 재미있는 말 잘 하죠?」

「아, 영주씨, 너무 웃기지 마세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잘 연구해 보았답니다.」

「나를 요?」

「그럼요! 선생님은 벌써 잊으셨지만 벌써 사오 년전 일이야요. 제가 유경이네 집에 한번 놀러 간 일이 있었어요. 그때 선생님을 보았는데 아주 유경이 하구 좋게 지내두먼요. 그래 그 다음부턴 통가지 않았어요.」

「왜요?」

「그런 건 묻는 것이 아니야요. 그런 걸 묻고 하니까 유경이가 훌쩍 날아가는 거 아냐요? 유경인 나하구 어딘가 맞는 데가 있어서 처음엔 잘 놀았지만 한편 또 무척 맞지 않는 데가 있어요. 유경인 아주 이지적인 이상주의자 지만 난 이지적인덴 같은데가 있지만 철저한 현실주의자야요.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이해해 볼려구 노력하지만 유경인 아마 별루 노력은 안 할꺼야요. 저는 선생님같은 분이 좋아요. 대범하구, 성실하구, 또 개업꺼정 했으니까 경제적 안정두 되구…… 또 무슨 좋은 점이 없을까?…… 좋은 점을 자꾸 이야기해서 선생님의 마음을 끌어야겠는데……」

영주와 만나는 도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문호(門戶)를 개방한 명랑한 성격에 준혁은 취하는 것이다.

3[편집]

준혁은 웃으면서

「인젠 그만 해 두시지요. 좋은 점이 그렇게 많았다가는 큰 일 나게요?」

「……아, 또 있어요!」

「뭔데요?」

「유경이하구두 그렇구, 또 그 누구 간호원 하구두 그렇구, 실연을 많이 해 봐서 분에 넘치는 꿈은 단념할 줄을 알았으니까, 그것두 아주 좋은 점이 구요.」

「하하하핫……」

준혁은 자꾸만 유쾌해진다. 영주와 만나면 언제든지 가을 하늘처럼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명랑해지는 어제 오늘의 김 준혁 박사였다.

「또 없을까? ─」

「인젠 아마 다 됐을 껍니다.」

「아냐요. 사람이란 좋게만 생각함 자꾸 좋은 점만 눈에 띄이는 법이야요.

─ 아, 참 또 있어요.」

「또 있어요?」

「네.」

「무업니까?」

「공연히 쓸데없는 자존심을 가지고 감정의 남발(濫發)이 없으니까 가정은 언제든지 화평할 것이구… 애들이 병이 나두 약값이 절약될꺼구…… 박사님 부인이니까 좀 뻐개두 보구……」

그러면서 영주는 준혁을 쳐다보며 방글방글 웃는다.

「영주씨!」

「네?」

준혁은 가만히 영주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영주씨를 안 후부터 내 생활에는 생기가 도는 것 같아요. 쓸데없는 먼 산만 바라보던 내 마음이 아주 가라앉아 버렸답니다. 정말루 영주씨야말로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요. 영주씨와 같이 있으면 나는 과거의 모든 것을 잊어 버릴 수 있읍니다.」

그때 영주도 한 손으로 준혁의 커다란 손등을 어루만지며

「제가 과히 싫으시지 않으세요?」

영주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싫긴……」

준혁은 한 손으로 영주의 어깨를 가만히 품어 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준혁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한 사람의 강렬한 이성을 영주에게서 감촉하였다. 이러한 강렬한 이성의 갈망을 유경이에게서도, 그리고 운옥에게서도 이처럼 절실히 느껴본 적이 없는 준혁이가 아니었던가.

유경에게 대해서는 어딘가 하나의 동생과 같은 가족적인 분위기가 애정 속에 섞여 있었고 운옥에게 대해서는 어딘가 살뜰한 이성으로서 보다도 먼저 존경과 신뢰의 마음이 앞장을 섰다.

그렇지만 오늘에 있어서의 김 준혁 박사는 하나의 순수한 애정 ─ 이라기 보다도 순수한 결혼의 대상으로서의 영주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극히 평범하고 속된 애정의 자태를 준혁은 비로소 발견한 것 같았다.

그렇다. 생각하면 영주와의 관계는 극히 평범한 그것이었다. 독특한 연애적인 환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양가에서 혼담이 있어 가지고 비로소 사귀어 본 극히 평범한 사이었지만 그러나 그 평범한 환경에서 준혁은 도리어 순수한 애욕의 자태를 본 것이다. 자기다운 행복을 희구하는 이 평범한 여성에게서 준혁은 비로소 자기의 인생관의 중심을 형성하는 자기다운 행복을 마침내 찾을 수 있었다.

영주는 준혁의 품에 홍조된 얼굴을 묻으며 가만히 말했다.

「선생님, 제가 괴히 싫지 않으심……」

준혁은 대답 대신 영주의 토실토실한 두 어깨를 꽉 자기 품안에 넣었다.

「전 유경이처럼 그리 예쁘진 못하지만……」

「영주씨, 무슨 말을……」

「정말루, 정말루 제가 싫으시지 않음…… 저와 약혼 한다는 말씀 들려 주세요.」

「영주씨와 약혼을 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한 두어 주일 잘 생각해 보시구 대답해 주세요!」

「두 주일이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이요? 내일이라두 곧 약혼식을 합시다!」

「아냐요! 잘 생각해서 하셔요! 결혼은 감정 만이 아닐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