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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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극 〈가상범인〉[편집]

그날 밤, 해왕좌(海王座) 제47회 공연 프로그램 가운데 서울 장안의 인기를 물밀 듯이 끌어낸 탐정극 『가상범인』의 제1막과 제2막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의혹에 찬 무서움과 폭풍우와 같은 흥분을 전신에 느꼈던 것이다.

만일 해왕좌의 좌장(座長)을 살해한 범인이 그의 부인이 아니라고 하면 대관절 누구일까? 원작자가 상상하는 것과 같이 이 극 가운데의 범인이 과연 현실 사건의 진정한 범인일까? 더구나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 사건과 극 중의 사건을 판단하기 어렵게 하는 것은 원작자인 탐정소설가 유불란(劉不亂) 씨 자신이 이 탐정극에 출연하고 있는 것이요, 또 그 외의 출연 배우들도 태반이 해왕좌의 좌장 박영민(朴永敏) 씨가 살해를 당한 그 날 밤 좌장댁에 와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가상범인』이라는 3막으로 되어 있는 탐정극은 단순한 극이 아니고 현실 문제인 박영민 살해사건을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사회의 공정한 판단을 얻고저 하는 것이었다.

이 연극에서 아마추어 탐정 역을 하고 있는 유불란은 벌써 제2막에서 어떠한 무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무서운 공상을 제3막에서 실험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가상범인』의 총막(總幕)을 관객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얼마나 기다렸던가......?

탐정극 『가상범인』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중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탐정극 『가상범인』 제3막

원작/연출: 유불란(劉不亂)

배역

• 해왕좌 좌장 박영민(朴永敏, 40) ...... 홍(洪)

• 좌장 부인 해왕좌 배우 이몽란(李夢蘭, 24) ...... 양(楊)

• 해왕좌 배우 나용귀(羅龍鬼, 29) ...... 나용귀

• 해왕좌 배우 진대성(陣大成, 28) ...... 진대성

• 해왕좌 배우 김영애(金英愛, 22) ...... 김영애

• 탐정소설가 유불란(劉不亂) ...... 유불란

• 그 외 박영민 댁의 식모 두 사람, 경관 너댓 명


탐정극 『가상범인』은 좌장의 친구요 탐정 소설계의 명성인 유불란 씨가 저번 세상을 놀라게 한 본 해왕좌의 좌장 박영민 씨 살해사건을 취재하여 친히 원작한 것이다. 작자는 이 사건에 대하여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경찰 당국이 보는 바와 같이 좌장의 부인인 화형(花形) 배우 이몽란을 범인으로 인정하는가? 아니다! 작자 유불란 씨는 이 탐정극에 있어서 부인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범인은 대체 누구냐? 작자는 본 해왕좌 배우 가운데 범인이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아아 유불란 씨에게 살인범이라는 무서운 혐의를 받아가면서 범인이라고 지적된 그 배우는 용감히도 이 『가상범인』이라는 연극에 출연하기를 약속하였다

만천하의 제군이여! 제군은 이렇게도 무섭고 재미있고 치가 떨리는 연극을 본 경험이 있는가? 작자는 지금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이 연극에 임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살인 당시의 광경을 그대로 제군 앞에 보이기 위하여 작자 자신이 무대 위에 서서 진정한 범인을 옥중으로 보내는 동시에 무죄한 이몽란을 철창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는 때문이다. 작자는 지금 극 중의 범인과 무대 위에서 몸서리치는 암투를 시험하고자 한다. 그리고 좌장과 이몽란 및 경관과 식모로 분장하는 이외의 배우 제군은 전부가, 유불란 씨 자신까지도, 박영민 씨 살해 당시에 현장에 와 있던 사람들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단순한 극이 아니고 연극의 결과 여하에 따라서는 경찰 당국의 의견을 좌우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이다. 제군은 반드시 탐정소설가 유불란 씨의 날카로운 두뇌에 박수할 것이며 괴기극계(怪奇劇界)의 귀재(鬼才) 나용귀의 이상한 매력에 도취할 것이다!

해왕좌 올림


관중은 『가상범인』의 제1막과 제2막에서 세상에 전해오는 박영민 살해사건의 외양과 아울러 유불란이 이 사건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의혹을 가슴에 깊이 품고 드디어 하나의 교묘한 가상을 안출하여,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시험하여보고자 한다는 데까지를 알 수가 있었다.

필자는 극히 간단히 제1막과 제2막의 내용을 독자 제군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제1막 제1장[편집]

박영민 댁의 이 층. 넓은 두 간 방. 밤 9시쯤. 박영민(홍 배우가 분장), 그의 아내 몽란(양 배우가 분장), 유불란, 나용귀, 진대성, 김영애의 여섯 명이 만찬 후의 잡담을 주고받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해왕좌가 요즘 휴연(休演) 중임을 알 수가 있다. 그때까지 몽란을 중심으로 꽃이 피었던 그들의 담화가 점점 어여쁜 김영애에게로 옮아가기를 시작하였다. 그때 좌장 박영민이가 얼굴을 영애에게로 돌리면서 농담인지 참말인지

“영애 군의 눈동자는 참 예뻐. 누구를 또 녹이려고. 하하하하...... 그러니 보배지 보배야. 우리 해왕좌의 유일한 보배란 말이야. 어쩌면 그리 예쁠까! 하여튼 영애 군! 그 귀여운 눈동자로 경성 시민 40만을 춘삼월에 눈 녹듯이 슬슬 녹여놓으란 말이야. 보수는 얼마든지 낼 테니까......”

그때 영애 옆에 앉아 있던 몽란이가 얼굴을 좌장 앞에 삐쭉 내놓으면서

“여보, 내 눈은 어떠우?”

하고 질투에 못 견디겠다는 듯이, 그러나 사실은 농담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응, 너 말이냐? 글쎄, 굶주린 수캐면 혹 모르거니와!”

하고 하하하며 웃었다. 그러나 몽란은 남편의 점잖지 못한 대답에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더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린다.

“노하신 모양이로군!”

좌장은 그리 중얼거리며 몽란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주인을 잃은 좌석은 맥이 풀려 흐지부지해지고 말었다. 게다가 나용귀까지 화장실에 간다고 내려가 버린 후에는 일층 더하였다. 몽란을 노하게 한 것은 좌장이 아니라 영애의 정다운 눈동자라고 희롱을 건네고 받고 하는 중 약 5분이나 지났을까 말까, 별안간 ‘탕!’ 하고 한 방의 총소리가 아래층에서 요란히 들려온다. 세 사람은 마치 감전한 사람 모양으로 고개를 벌떡 들었다.

그 순간 좌장과 몽란의 언쟁하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온다.

“몽란이! 몽란이! 그러면 나를 죽일 테냐?”

“죽이구말구! 죽이구말구! 사람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그때 또다시 총소리가 ‘탕!’ 하고 방을 울렸다. 세 사람은 큰일이

났다고 부르짖으며 부리나케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제1막 제2장[편집]

아래층 박영민의 서재. 오른편이 뜰에 접하고, 꼭 닫힌 유리창에 물빛 커튼이 늘여 있다. 정면은 하얀 담벽. 그 오른편에 테이블. 테이블 위에 수십 권의 서적이 쌓여 있다. 그 옆에 금붕어 그릇이 놓여 있고 두 마리의 금붕어가 총소리에 놀란 듯이 분주스럽게 헤엄치고 있고 금붕어 그릇 바로 위에는 직경 한 자나 되는 둥그런 거울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달력이 걸려 있는데 십일월 이십삼일이란 숫자를 관중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 바로 위에 시계가 걸려 있고 숫자판의 유리는 온전하나 그 밑의 유리는 조각조각 깨어져서 추가 점점 기운을 잃어 마침내 정지 상태로 변하였다. 그 시각이 꼭 9시 34분이다.

무대 왼편이 복도에 달린 문인데 그 옆에 책상이 놓여 있고 책상 맨 밑 서랍이 반쯤 열려있다. 피에 젖은 박영민의 시체가 테이블 앞에 쓰러져 있고 그 옆에 놓인 한 자루의 권총이 전등불에 번쩍인다.

그때 바깥 마루를 뛰어오는 사람들의 발자취 소리와 아울러 기운차게 문이 열린다.

“좌장이 죽었다!”

“뭐, 죽었어?”

“에이그머니나!”

“저런, 저런!”

이와 같은 아우성 소리와 함께 유불란, 진대성, 김영애, 식모 두 사람, 이몽란, 나용귀, 이러한 순서로 뛰어들어온다.

놀란 그들의 얼굴, 얼굴, 얼굴들!

어떤 사람은 어쩔 줄 모르고 부들부들 떨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좌장의 시체를 만져도 보고 안아도 보고, 또는 경찰에 전화를 걸려고 긴급히 달려나간다. 이리하여 무대 위에는 일대 혼잡을 일으켰으나, 결국 탐정소설가인 유불란의 말대로 피스톨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기로 하였다.

일순간, 무거운 침묵에 싸여 있던 사람들의 무서운 시선이 이몽란의 창백한 얼굴 위에 비 오듯이 쏟아지기를 시작하였다. 몽란은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사람 모양으로, 자기의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는 미치광이와 같은 표정으로 사람들의 그 무서운 시선에 묵묵히 반문하는 것과 같이 보였다. 한번은 차디찬 남편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한번은 자기에게 쏠린 수많은 눈동자를 쳐다보고, 그러다가는 마침내 그 아름다운 두 눈썹을 약간 올리면서, 애소하는 듯이 유불란을 멍하고 바라본다.

유불란은 잠자코 있다. 그러나 몽란에게 때때로 던지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 가운데는 말할 수 없는 애처로움과 끝없이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 서리어 있는 것과 같이 보였다. 몽란과 같이 순정하고 명민한 여성으로서 어찌 사람을 죽일 수가 있었던가? 그러나 인제 방금 2층에서 들은 몽란의 목소리를 어찌하랴? 아니다. 아니다! 나는 지금 허황한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두 눈은 마치 그렇게 부르짖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두어 번 머리를 흔들었다.

필자는 지금, 이러한 광경을 여기서 상세히 묘사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므로 연극 시간 약 5분 후에 —사실은 1시간 이상 걸렸다— 달려온 경찰 당국의 검증(檢證) 결과를 극히 간단히 알기 쉽게 정돈하고자 한다.


첫째로 총알은 두 방 다 같은 피스톨에서 발사되었다. 첫발은 목표가 어그러져 담벽에 걸렸던 시계 아래쪽 유리문을 깨고 추에 맞아서 그것을 정지시켰다. 그래서 시계는 9시 34분에서 멎어버렸다. 두 번째 발은 노린 목표를 어그러뜨리지 않고 박영민의 왼편 가슴에 명중하여 드디어 치명상을 이루었다.
둘째로 피스톨은 피해자 박영민이가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던 것인데 문 안에 놓인 책상 맨 밑 서랍에 들어 있던 것이다. 피스톨에는 아무 사람의 지문(指紋)도 보이지 않고 서랍 손쥐개에도 지문이 없다. 모두 무슨 헝겊으로 지문을 연멸(煙滅)시킨 것이다.
셋째로 유불란, 진대성, 김영애 이 세 사람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확실히 좌장과 부인이 싸우는 소리에 틀림이 없습니다. 언쟁의 내용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도 두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잘못 들은 것은 아니나 그러나 부인이 왜 좌장을 죽였는가를 우리들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설사 2층에서 좌장이 좀 지나친 농담을 부인께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좌장을 살해할 만한 동기가 되겠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서재를 향하여 아래층 복도를 달려올 때 반대편에서 식모 두 사람과 부인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으며 화장실에 통하는 좁은 마루로부터 나용귀 군이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넷째로 식모 두 사람도 그것이 틀림없는 좌장과 부인의 음성이라고 단언한다.
다섯째로 나용귀의 진술. “나도 두 분의 음성을 똑똑히 들었소이다. 나는 좌장의 뒤를 따라 화장실에 내려간 후 소변을 보고는 뒤뜰에 나아가 잠시 동안 바람을 쏘이면서 좌장이 부인께 준 모욕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말씀입니까? 나는 부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이몽란의 진술. “저는 뭐가 뭐인지 전연 알 수 없어요. 참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저는 안방에 내려와서 —침방과 서재 사이에는 부엌과 넓은 두 칸 대청이 끼어 있다— 저도 여성이요, 배우인 이상 얼굴에 대한 자존심이 있어요. 주인이 함부로 던진 모욕의 말을 얼마나 원망했을까요! 그래 분한 마음을 참아가면서 이불을 폭 쓰고 있노라니까, 바로 서재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주인과 어떤 여자의 언쟁 소리가 들려요. 여러분은 그것이 나의 음성이라고 증명하지만 안방에 있던 내가 어찌...... 네, 저는 주인을 그리 사랑하지 않어요. 그리고 나용귀 씨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유불란 씨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당국에서 조사한 간단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몽란은 경찰의 손에 붙들리어 갔다.


제2막 제1장[편집]

탐정소설가 유불란의 서재. 수백 권의 서적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유불란은 마도로스파이프를 입에 물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방 안을 왔다 갔다 한다. 넓고도 흰 이마에는 수심이 가득 찬 깊은 주름이 서너 줄기 박혀 있다. 양손을 양복바지 주머니에다 찔러 넣고 유불란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결단코 몽란은 영민을 죽인 범인이 아니다. 몽란! 몽란! 당신은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범인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몽란은 사람을 죽일 그런 악독한 여자는 아니다. 나는 몽란을 사랑한다. 그리고 몽란을 끝없이 믿는다. 몽란! 나는 반드시 당신을 그 컴컴한 옥창으로부터 구해낼 터이다. 그리고 진정한 범인을... 당신을 괴롭게 하는 그 무서운 악마를 대신으로 옥창에 쫓아버릴 테다.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암흑에서 신음하고 있는 몽란!”

유불란은 우뚝 서서 창밖을 내다본다.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휙 돌아서면서

“그렇다. 악마는 그놈이다. 박영민을 죽인 범인은 그놈이다. 애매한 몽란!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미묘한 인스피레이션이다. 그러나, 그러나 증거가 없다. 그놈이 죽였다는 증거가 어데 있느냐?”

유불란은 초조한 듯이 방안을 휘 둘러보면서

“하여간 그놈을 범인이라고 가정하면 어떠한 방법으로 좌장을 죽였을까? ......물론 좌장을 죽일 동기는 충분히 있다. 그놈은 몽란을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좌장은 생전 그놈을 뱀과 같이 싫어하고 악마와 같이 미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몽란에게까지 배척을 당하였다. 그렇다! 범인은 그놈이다. 그놈이다. 그놈, 그놈—— 아, 그렇다! 알었다! 알었다! 나의 인스피레이션이 틀림이 없었다!”

기쁨이 날뛰는 유불란은 미칠 듯이 고함을 치며

“그렇다! 그놈은 해왕좌가 만천하에 자랑하는 유명한 배우다. 의성가능자(擬聲可能者)!, 그놈이 의성가능자가 아닌 사실을 누가 아는고? 그놈은 명배우다. 사람의 음성을 그대로 흉내 내는 성대를 가진 자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그는 명배우다!”

희색이 만면한 유불란의 얼굴.

“그러나 가만있자. 그것은 나 혼자의 허황한 공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놈이 자백하지 않는 이상, 범인은 나의 공상을 비웃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나? 그러면 어찌하나? ......나의 직감! 나는 나의 직감을 믿는다. 그렇다! 희곡(戱曲)을 쓰자! 그래서 그 각 본대로 그놈에게 무대 위에서 시켜보자! 과연 나의 생각대로 그놈이 좌장을 살해한 범인이라면 그는 이 극(劇)에 출연할 것을 승낙할 터인가? 하여간 써보아야 알 것이다.”

유불란은 부리나케 테이블로 뛰어간다. 서랍에서 원고지를 꺼내어 앞에 펴놓고는 흥분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두 눈을 감는다.


제2막 제2장[편집]

이틀 후, 역시 유불란의 서재.

유불란은 의자에 걸터앉아 그의 가상범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유불란! 나는 군이 보내준 원고 『가상범인』이라는 각본을 읽어보았다. 군이여! 나는 그 원고를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 군의 정신을 의심하노라. 군의 정신은 평시의 온전한 그것이 아니고 망상에 붙잡힌 정신병자의 흐릿흐릿한 그것인 줄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군의 끝없이 날고 있는 무서운 공상을 존경하는 한편에 그 각본을 읽고 나서 나 자신이 취하지 않으면 안 될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군의 흥분한 그 무서운 필치는 내 가슴속에 불덩어리와 같은 충동과 반항심을 드디어 심어 주고야 말었다. 그러나 군이 흥분하면 할수록 그와는 정반대로 침착하여가는 나의 심리 상태를 군은 상상할 수 있을까?

군의 가슴은 지금 몽란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몽란을 옥창으로부터 구해낼 일심으로 말미암아 금방 터지려는 화산과도 같이 뜨거운 듯싶다. 그러나 나는 군과 더불어 흥분해 드릴 여유를 가지지 못함을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유불란! 군은 군이 창작한 『가상범인』이라는 극 가운데서 박영민의 살해자를 나라고 불렀다. 내가 좌장을 죽였다고 군은 분명히 썼다. 내가 의성가능자라고 군은 생각하고 있다. 나는 군이 조선 탐정소설계에서 둘도 없는 유일무이한 가장 명성 있는 탐정소설가인 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아! 나는 과거에 있어서 군의 탐정소설을 그 얼마나 탐독하였던가! 조선은 막론하고 세계의 표준에 비하여서 추호도 손색이 없는 군의 탐정소설! 그러나 그것도 모두 과거의 일이다. 군은 일생을 단지 탐정소설가로서 보내야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군의 공상은 소설이라는 범위에서 떠나 버렸다. 군의 걷잡을 수 없는 공상의 날개는 현실에 있어서까지 명탐정의 명성을 탐내고 있다. 나는 그것을 탐정소설가 유불란을 위하여 섭섭히 생각한다.

유불란 군! 군은 너무나 무서운 투쟁을 나에게 던져놓았다. 나는 지금 노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를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몽란을 사랑하는 군의 열렬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분하지도 않다. 나 역시 군에게 지지 않을 만한 정도의 사랑을 몽란에게 바치고 있는 때문이다. 참으로 사랑이란 무서운 물건이다. 그러나 결국 이 『가상범인』이라는 연극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범인이 나타나서 몽란이가 무죄 방면이 된다면 그 얼마나 기쁜 소식이랴!

그러나 유불란 군! 군은 모름지기 자기를 반성해봄이 좋을 것 같다. 군만이 몽란을 사랑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군만을 몽란이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군은 어리석은 자의 하나일 것이다. 과연, 군이 일찍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나의 용모가 괴인(怪人)과 같이 흉악하고 짐승과 같이 더러움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 역시 짐승이 아니고 하나의 사람이다. 소경을 보고 소경이라고 불러보라. 소경의 얼굴에서 평화의 빛이 사라진다. 이리하여 군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멸시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것을 서슴지 않고 받으리라. 그러면 군의 붓끝의 인형이 되어 스테이지에 서기를 굳게굳게 맹세한다.

• 재신 ─ 지금 또 군의 두 번째 편지를 받었다. 괜찮다! 사실 전부를 세상에 폭로하라. 군과 나의 사적 관계까지도 하나도 빼놓지 말고 그 『가상범인』이라는 극 가운데 넣어놓아라.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마저도 필요하다면 극에 넣어라. 사회의 공평한 판단을 얻기 위하여......’


유불란은 편지를 구겨 쥐고 벌떡 일어났다.

“싸움은 시작되었다!”

막이 천천히 내린다.


관객들은 탐정극 『가상범인』의 제1막과 제2막에서 이상과 같은 사실을 안 것이다. 원작자 유불란은 자기가 이 연극을 만들어내기까지의 자세한 경로까지도 극 가운데 넣었기 때문에 유불란과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배우와의 사적 관계까지도 청천백일 아래 폭로되고야 말었다. 사람을 사랑함이 이 어찌 무서운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손바닥에 땀을 쥐어가면서 『가상범인』의 제3막이 열리기를 얼마나 고대하였던가! 『가상범인』은 드디어 하나의 현실이 되고야 말었다. 사람들의 가슴은 실로 무시무시한 의심과 호기심에 가득 찼다.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좌장을 죽였을까? 그것도 알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탐정소설적인 흥미보다도 탐정소설가 유불란과 그가 범인이라고 인정하는 이 해왕좌 배우와의 치가 떨리는 암투, 너무나 노골적인 연애 투쟁의 무서운 결과가 더 알고 싶었다. 애인 몽란을 위하여 이 『가상범인』을 창작해내고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여 그 자신이 이 극에 출연한 유불란의 폭풍우와 같은 열정! 또 한편 친구로부터 살인범이라는 무서운 혐의를 받아가면서 용감히도 무대에 선 그 배우의 불타는 마음! 아까 가상범인으로부터 온 편지에 의하건대 유불란이 상상하고 있는 그 범인은 짐승과 같이 추한 얼굴을 가졌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출연 배우 가운데 괴인과 같이 추한 얼굴을 가진 자는 괴기극의 명배우라고 세상이 칭찬하는 나용귀다. 과연 그가 좌장을 살해한 진정한 범인이라면 그는 남아있는 제3막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리고 그는 유불란의 생각과 같이 사실 사람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낼 수가 있을까......?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극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연극에 박진성(迫進性)을 주기 위하여 작자가 만들어낸 장난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 연극을 어떻게 판단하여야만 될는지를 몰랐다. 연극인가 사실인가를 짐작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의혹에 찬 시선은 때때로 경관석으로 흘러가기를 마지않았다. 맨 뒤 빨간 전등이 켜 있는 경관석에는 임경부와 백검사 외에 두세 사람의 경찰관이 앉아 있다. 임경부와 백검사 이 둘은 좌장 살해 당시에 현장을 임검(臨檢)한 사람들이다.

마침내 그때 『가상범인』의 제3막이 천천히 열리기를 시작하였다. 극장 안에는 마치 폭풍이 지나간 바로 뒤와도 같이 사람들의 삼키다 남은 숨소리만이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의 심장은 쉴 새 없이 두근거리고 그들의 부릅뜬 눈동자는 소낙비같이 일시에 무대로 쏠려졌다.

무대면은 제1막의 제2장과 꼭 같은 장면, 다시 말하면 좌장 박영민의 서재였다. 태반은 제1막 제2장과 다시 틀림이 없으나, 그러나 세밀히 무대를 관찰하여보면 전 장면과 다른 점이 네 가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문 안에 놓여 있는 책상 서랍이 꼭 닫혀있다.

둘째로 정면 벽에 걸린 시계가 9시 30분을 가리키며 가고 있다. (전번 장면에서는 9시 34분에서 멎어 있었다) 추도 잘 움직이고 유리문도 온전하다.

셋째로 무대 위에 놓여 있던 권총이 보이지 않는다.

넷째로 의자에 걸터앉은 박영민이가 테이블을 향하여 양손으로 턱을 받치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하니 담벽을 바라보고 있다. 몽란을 노하게 한 것이 좀 섭섭하다는 듯이......

극장 안은 죽은 듯이 조용하고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시계는 지금 운명의 시각 9시 34분을 향하여 1초 1초 걸어가고 있다. 9시 34분, 이 시각에 무대 위에 뛰어들어 박영민을 피스톨로 죽일 자는 대체 누구일까?

시계의 바늘은 지금 9시 30분에서 34분을 향하여 걸어간다. 실로 이 4분간의 팬터마임이야말로 굉장한 무대 효과를 관중에게 던져주었다. 3분만 지나면 유불란과 범인 사이에는 몸서리치는 애욕의 쟁투가 일어날 것이며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9시 31분! 침묵에 싸인 스테이지 위에는 운명의 신의 죽음의 선고를 받은 해왕좌 좌장 박영민이가 여전히 턱을 두 손 위에 받쳐놓고 등을 문으로 향하고 앉아 있다. 사랑하는 몽란을 그만 성내게 한 것을 후회하는 듯이 하얀 담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9시 32분! 시계의 추는 영원무궁한 세월의 한 점 한 점을 무심히 그리고 극히 의무적으로 걷고 있다.

9시 33분! 극장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무대 위에서 숨 쉬고 있는 박영민의 생명의 줄기도 나머지 1분 후에는 영구히 끊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박영민은 그 나머지 1분의 생명을 끝없이 향락하려는 듯이 긴 한숨을 어깨 위로 보이고 있다. 그때......

그 순간이었다. 오른편 문이 덜컥 하고 열리자 마치 나는 새와도 같이 뛰어드는 괴상한 사나이가 하나 책상 서랍에서 피스톨을 꺼내자마자 불의의 침입자에 놀라 돌아보는 박영민의 가슴을 겨누고 ‘탕!’ 하고 한 방을 발사한다. 그것이 너무도 빠른 솜씨이므로 관중은 그 침입자가 누구인지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다음 순간, 무럭무럭 올라가는 흰 연기 가운데 귀신과 같이 우뚝 서 있는 그 사나이가 해왕좌의 명배우 나용귀인 줄 알고 난 관중은 온몸에 오싹하고 달려드는 몸서리를 안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아! 나용귀의 노기가 만만한 그 얼굴을 보라! 사자와도 같이 성이 난 그의 괴상한 얼굴! 그것은 결코 배우로서의 거짓의 노기가 아니고 그의 골수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진정한 격분인 듯이도 보였다. 그것이 만일 하나의 연극이라면 너무도 참된 연극이었으며, 그것이 만일 하나의 사실이라면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믿어야 하나 믿지를 않아야 하나?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며, 믿지를 않으려야 믿지 않을 수 없는 연극이었다.

또 한편으로 박영민은, 아니 박영민으로 분장한 홍(洪)이라는 배우는 얼굴을 무섭게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나려다가 못 일어나는 모양으로 마치 성모마리아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양으로 두 손으로 앞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인형과 같이 무대 위에 넘어졌었다. 넘어지면서 하는 그의 최후의 부르짖음이 왜 그리도 가늘고 또 길었던가?

“으, 으, 응!” 하고 천길만길이나 되는 지옥에서 우러나오는 생귀신의 그것과 같이 들리어 온다. 참말인가, 거짓인가? 참말과도 같고 거짓과도 같은 이 너무나 심각한 장면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는지를 사람들은 몰랐다. 그들의 미음은 콩알같이 작아지고 그들의 전신은 키질하듯 떨리었다. 곧은 목을 돌리어서 뒤를 돌아보고도 싶었으나 거기서는 무슨 알지 못할 두려운 기적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공포에 싸인 극장 안의 공기는 무거운 납덩어리와 같이 사람들의 가슴을 누르고 있다.

그때다! 사람들은 “흑” 하고 숨을 삼키었다.

“몽란이 몽란이! 그러면 나를 죽일 테냐?”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제각기 떠들면서 일시에 일어났다.

“아아”! 그것은 사실 믿지 못할 이상한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나용귀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대신에, 그리고 또 박영민으로 분장한 홍 배우의 목소리를 듣는 대신에 지금은 벌써 죽어버린 해왕좌 좌장 박영민, 그 사람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관객들은 박영민의 음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박영민이가, 죽었던 박영민이가 다시 죽음으로부터 소생하여 이 극장 안에서, 혹은 무대 뒤 보이지 않는 어느 한 편에서 그렇게 부르짖는 것과 같이 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웅성웅성하며 떠들기를 시작하였다.

“앉어라! 앉어!”

자기도 서 있다는 것을 잊은 듯이 사람들은 서로 이렇게 부르짖는다.

일편, 관중보다 더 일층 놀란 것은, 극장 맨 뒤 경관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다. 더구나 임경부와 백검사는 이 살인사건을 처음부터 담당한 만큼, 나용귀 입에서 굴러 나온 기적적인 음성은 그들에게 크나큰 쇼크를 주었다. 임경부는 벌떡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옆에 앉은 백검사의 팔뚝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마치 미친 사람 모양으로.

“이상한 일이다! 무서운 기적이다!”

“가만있자, 가만있자!”

“얼굴을 보오! 저 나용귀의 악마와 같은 얼굴을 보오!”

“조용히, 조용히!”

백검사는 정신없이 덤비는 임경부를 엄숙한 목소리로 억제하며 눈 한번 깜박 안 하고 무대 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다.

“죽이구말구! 죽이구말구! 사람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무대 위에서는 야수와 같이 살기를 품은 나용귀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그 목소리, 그것은 이몽란으로 분장을 한 양(楊)이라는 배우의 목소리가 아니고 해왕좌의 스타 이몽란, 그 사람의 목소리에 틀림이 없었다. 호기심이라든가 의혹이라든가 그런 것은 벌써 넘어가 버리고 사람들은 그저 양쪽 손을 불끈 쥐고 무릎을 떨고 있을 따름이다.

또 그것만도 아니었다. 자기의 범죄를 수천만 관중 앞에서 스스로 폭로한 나용귀는 되고 싶은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관중을 향하여 피스톨을 발사하지나 않을까?...... 그리고 또 지금 나용귀 손에 들려 있는 그 피스톨은 관중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과연 장난감의 피스톨에 지나지 못할까?...... 그리고 또 박영민으로 차리고 나온 홍이라는 배우는 지금 무대 위에 쓰러져 있다. 공탄일까, 실탄일까? 누가 공탄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가 있는고? 실탄이라면, 그것이 실탄이라면 홍이란 배우는 영원히 죽어버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아까 홍이란 배우가 쓰러지는 모양을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그것은 너무나 진실한 쓰러짐이 아니었던가? 부릅뜬 두 눈, 생의 애착을 끊지 못해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던 그의 모양, 그의 웅크려 쥔 가슴으로부터 흐르고 있던 붉은 핏줄기, 지옥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듯이 들리던 “으, 으, 응” 하고 길게 빼던 그의 목소리. 이와 같은 사실을 상상해보매, 사람들은 온몸에서 오싹하는 소리를 마치 귀로 듣는 것같이 무서웠다. 그 붉은 핏줄기는 단지 일종의 물감밖에는 안 되었던가? 독수리의 발톱과도 같이 허공을 꽉 쥐고 있는 양손......

‘타앙!’

그러고 그때, 한 방의 총소리가 또다시 극장을 울렸다. 정면 흰 담에 걸려 있는 시계의 아래 유리문이 보여지는 듯이 깨어지며 추가 술에 취한 그네와 같이 규칙 없이 사방으로 왔다 갔다 한다.

“실탄이다! 실탄이다!”

사람들은 추호도 의심치 않고 그것이 실탄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연극의 트릭인지도 모를 바다. 누군가 등 뒤에서 고무총 같은 것을 발사했는지도 모른다. 9시 34분, 그때가 바로 운명의 시각 9시 34분이었다.

나용귀는 그때, 빠른 솜씨로 피스톨에 묻은 자기의 지문을 손수건으로 씻고, 또 책상 서랍 손쥐개도 주의해 씻은 후 관중을 향하여 한 번 조소하는 듯이 보기 흉한 웃음을 던져놓고 문으로 나가버렸다.

이리하여 탐정소설가 유불란의 원작인 탐정극 『가상범인』은 최후의 막을 닫아버렸다. 필자는 이 최후의 장면을 좀 세세히 묘사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긴 지면을 허비하였으나 그것은 사실 일순간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두 방의 총소리에 대한 경찰 당국의 의견과 거기에 대한 탐정작가 유불란의 의견은 서로 충돌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경찰에서는 제2탄이 박영민을 쏘았다고 생각하는데, 유불란은 제1탄이 박영민을 죽이고 제2탄이 시계를 깨뜨렸다고 상상한다. 실로 정반대의 의견이었다. 첫째 발이 헛맞아서 시계를 상하게 하고 둘째 발로 비로소 박영민을 죽이었다고 생각하게 한 것이 즉 범인의 트릭, 장난이라고 유불란은 해석하고 있다.

거듭 말하면 첫 방으로 박영민을 죽인 범인은 이몽란과 박영민이가 언쟁하는 양을 한 다음에 둘째 방을 발사하여 놓았다고 유불란은 생각한다. 그러면 박영민을 죽인 것은 첫째 발인가, 둘째 발인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 단 두 사람밖에는 없을 것이다. 죽은 박영민과 죽인 범인과......

연극은 끝났으나 극장 안은 돌아갈 줄을 모르는 듯이 떠들고 있는 관중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빼곡 찼다.

여기는 해왕좌 무대 뒤.

인제 방금 무대에서 돌아온 나용귀를 중심으로 임경부, 백검사, 유불란 들에게 둘러싸인 테이블 위에는 서양 사람의 그것과 같이 털이 부르르 난 나용귀의 양손이 중풍 환자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다. 땀에 젖은 이마에선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가고 살기를 띤 두 눈동자는 불덩어리가 뛰어나올 듯이 붉다. 그 붉은 두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묵묵히 앉아 있는 나용귀, 그 나용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임경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 형, 참 놀랐는데요! 당신에게 그러한 기특한 음성이 들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소. 나는 유불란 씨한테 연극의 내용을 들었을 때, 그 너무나 소설가적인 공상을 비웃었지만......”

하고 임경부는 나용귀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보았다. 그 표정 속에 나타나는 미묘한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려는 듯이.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이 나용귀는 정신병자와 같이 표정 없는 얼굴로 천장을 멍하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백검사도 안타까운 듯이,

“사실, 당신의 그 진실성 있는 연극에 나도 적지 않은 놀라움을 가졌소. 그리고 당신은 좌장과 부인으로 분장한 홍 배우와 양 배우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연극으로서 당연한 일이건만, 당신은 어찌 좌장과 부인 그 사람들의 음성을 흉내 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오. 무슨 알지 못할 이유가 있을 줄로 나는 생각하는데......”

그때 나용귀는 역시 아무 말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무서운 눈동자를 천천히 유불란에게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원망과 노기와 그리고 뜨거운 불덩어리를 가득히 실은 악마와 같은 그 두 눈초리를 유불란은 차마 정면으로 대할 수 없는 듯이 약간 머리를 숙이며

“나 군, 나는 탐정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의 공상을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군은 나의 공상을 충심으로 실험하여 보여주었다. 그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때 잠자코 있던 나용귀의 고함치는 목소리가 벽력 같이 떨어졌다.

“떠들지 마라!”

그것은 천 근의 무게와 만 폭의 미움을 실은 한마디였다.

“과연 군은 오늘 밤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다. 군이 지금 보는 바와 같이 나는 경찰의 무서운 혐의를 받고 있다. 아니 천만 명 관중이 나를 살인범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군은 탐정소설가라는 것보다 명탐정이라는 명예 있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군은 완전히 사회에서 나를 장사해버리고 말었다. 군은 만족할 것이다. 기쁠 것이다!”

나용귀의 부르짖는 음성은 점점 높아가고 그의 추하고도 무서운 얼굴에는 팔뚝 같은 핏대 줄이 일어섰다. 차차 높아가는 숨결, 불끈 쥐인 두 주먹......

한참 동안 성난 사자 모양으로 앉아 있던 나용귀는 그때 훌쩍 일어나면서

“그러나 유불란! 군이 아까 보고 있던 바와 같이 오늘 밤의 연극을 나는 충실히 실행하였다. 군의 인형이 되어 나는 무대 위에서 군이 원하는 대로 춤추고 부르짖고 또 사람을 죽이는 흉내까지 내었다. 해왕좌 좌장인 박영민을 살해한 범인이 마치 나 자신이라는 듯이...... 군이 원하고 있던 목소리는 그들로 분장한 배우들의 그것이 아니고 그들 박영민과 이몽란 그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군의 요구에 응하였다. 그리고 나는 성공하였다. 관객들은 놀라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은 어쩔 줄을 몰라서 일시에 좌석에서 일어났다. 그만큼 나의 의성은 완전하였다. 그러나 유불란! 그것이 대체 어쨌다는 말이냐? 『가상범인』이라는 이 연극으로 말미암아 군은 진정한 범인을 찾는 동시에 몽란을 감옥으로부터 구해낸다고 단언하였다. 나는 군의 그 굳센 단언을 믿고 연극을 충실히 실행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내일 밤도 또 충실한 태도로 무대 위에 설 터이다. 나는 그것을 군과 아울러 경찰관 앞에서 맹세한다.”

나용귀는 그리고 모자와 오─바를 어깨에다 걸치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임경부는 나용귀의 뒷모양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백검사를 향하여

“그대로 내버려 두어요?”

하고 묻는다. 그러고는 안심이 안 된다는 듯이 자주자주 창밖을 내다보면서 나용귀의 그림자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글쎄요.”

백검사도 잠깐 생각하다가

“하룻밤 더 연극을 시켜보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만일 오늘 밤이라도 나용귀가 도망을 하면......”

“도망은 안 하지요. 왜 그러냐 하면 만일 그가 박영민을 죽인 진정한 범인이라고 가정하면, 그는 오늘 밤과 같은 그런 연극을 한 이상 결코 도망하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도망하겠다는 그러한 두려움을 가졌달 것 같으면, 또 결코 오늘 밤과 같은 연극은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임경부는 아직 주저하고 있다. 백검사는 말을 이어

“그리고 또 우리는 어떠한 증거가 있기에 그를 구인할 수가 있는가? 우리에게는 아무 증거도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한 증거를 쥘 때까지 그를 방임해 두는 것이 나는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가 좌장을 죽인 범인이라면 말이지요.”

그때 묵묵히 앉아 있던 유불란이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그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면 당신들은 어떤 증거가 있어서 몽란을 구인하였습니까? 이몽란과 나용귀는 똑같은 조건하에서 똑같은 혐의를 받아야만 될 것이지요. 만일 나용귀가 아무 증거도 남기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할 작정이요? 영구히 구인하지 않을 작정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공평치 못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나용귀는 확실히 좌장을 죽인 범인에 틀림이 없습니다. 만일 오늘 밤 나용귀를 놓친다면 그 실책은 당연히 당신들에게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일반사회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요. 그러나 너무 일을 조급히 하면 실수가 많습니다. 나용귀를 지금 구인해서 그가 절대로 자기의 범죄를 자백하지 않는 날에는 어떻게 합니까? 어제도 말한 바와 같이 나용귀는 절대로 도망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느니만치 하루 더 그를 자유로 놓아주어서 어떠한 증거든지 쥐는 것이 상책이지요. 그리고 또 이몽란 이가 범인이라고 결정된 것도 아니니까. 하여튼 이몽란에 대한 혐의는 당신이 창작한 연극 때문에 많이 완화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좀 더 형세를 보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하는데요.”

탐정극 『가상범인』은 시민의 폭풍우와 같은 환영 아래서 며칠을 두고 상연하였다. 그러나 임경부와 백검사는 하등 유력한 증거를 잡지 못하였다. 시내의 각 신문은 『가상범인』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차고 유불란과 나용귀와의 애욕의 투쟁은 저널리스트의 다시없는 미끼였다. 언제까지 나용귀는 세상의 무서운 혐의를 받아가면서 그 불길한 연극을 계속할 터인가? 유불란의 공상의 가치밖에 더 없었던가? 괴기극의 명배우 나용귀가 매일 밤과 같이 관중에 던져주는 그 의미 있는 듯한 비웃음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마치 세상을 비웃으며 경찰을 장난감과도 같이 가지고 노는 악마의 미소가 아닐까? 경찰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째 나용귀를 체포하지 않는가 하고 당국을 비난하는 자 있으며 천재적 명배우 나용귀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다.

이리하여 『가상범인』은 매일과 같이 만원의 성황을 이루고 서울 장안을 마치 끓는 물과 같이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연극을 시작한 지 넷째 날 밤, 해왕좌 무대 위에는 이상한 일이 한 가지 일어났다.

그것은 『가상범인』의 제3막이 바로 끝나려 할 때였다.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무대를 바라보고, 경관석에 있는 백검사와 임경부는 돌로 만든 부처님처럼 묵묵히 앉아 있던 그때......

나용귀가 악귀와 같은 면상으로 무대에 뛰어들어 박영민을 첫째 발로 쏜 후 전과 같으면 그가 박영민의 목소리로

“몽란이! 몽란! 그러면 나를 죽일 테냐?”

하고 말할 것인데, 어쨌는지 그는 그 자신의 목소리로 대본에 없는 말을 극히 감격한 모양으로 토하였다. 그것은 사실 하나의 연극이 아니고, 나용귀의 창자를 베어내는 듯한 슬프고도 애처로운 사랑의 하소연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듯한 사랑의 고백. 누가 그 순간 그를 미워하였으며 그를 악마라고 불렀으랴!

“몽란! 몽란! 용서해! 나를 용서해주어. 나는 너를 괴롭게 한 악마! 나는 너를 철창에 신음하게 한 마귀! 자기가 한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는 왜 철창으로 보내었던가! 몽란! 나는 너를 얼마나 사모하였으며 얼마나 너를 따랐던가? 그러나 너를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나의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또 너를 얼마나 미워하였던가? 몽란! 거짓말이라도 좋아. 거짓말이라도 나는 단 한 마디 사랑의 말을 네게서 듣고 싶었다. 그러나, 아아, 그러나 너는 항상 그 싸늘하고도 섬뜩한 모욕의 눈초리로 내 추한 얼굴을 노려 보았다. 몽란! 그럴 때마다 나의 불타는 가슴속에는 에이 그만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이 구름 덩이와 같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날 밤 나를 뱀과 같이도 싫어하던 좌장이 너에게 야비한 모욕의 말을 주었다. 찬스! 그러나 나는 왜 정정당당히 좌장을 죽이고, 또 너를 죽일 것을 생각지 못하였던고! 어리석은 이 마음을 몽란! 불쌍히 생각해다고!”

비 오듯이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눈물, 나용귀는 정신없는 사람 모양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관중을 향하여 휙 돌아서면서

“여러분! 빨리 돌아가 주오. 나는 이 이상 더 이 연극을 계속할 수 없소. 내가 죽였소. 내가 좌장을 죽인 범인이오. 이 이상 여러분은 나에게서 무엇을 요구하는가. 속히 돌아가지 않으면 이 피스톨을 발사할 테다!”

나용귀는 피스톨을 관중에게로 향하여 위협하기를 시작하였다.

“와아!” 하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일어섰다.

무대로 달려가는 경찰관.

극장 안은 일순간에 참담한 수라장을 이루었다. 나용귀는 경관에게 붙들려 가면서 미친 사람처럼 무엇이라고 고함치기를 마지않았다.

이리하여 탐정극 『가상범인』은 전대미문의 몸서리치는 에필로그와 함께 영원히 최후의 막을 내려버렸던 것이다.


운명의 기로[편집]

겨울날치고는 비교적 따뜻한 편이나 그래도 때때로 몰려오는 차가운 바람은 살을 베어낼 것같이 쏙쏙 찌른다. 저물기 쉬운 겨울 해는 서편 하늘 밑 된바람 가운데서 우물우물 춤추는 것같이 보였다. 회색빛 지붕 위에 저녁노을이 곱게 깔리고 세모(歲暮)가 가까운 거리 거리에는 ‘대매출’의 붉은 깃발이 펄렁거리고 있다.

여기는 사람 하나도 없는 00식당의 옥상——

아까부터 유불란과 이몽란은 차디찬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 멀리 발밑의 혼잡을 내려다보고 있다.

“몽란이!”

유불란은 갸릇한 몽란의 프로필을 엿보면서

“몽란이!”

하고 한 번 더 힘 있게 불러보았다.

몽란은 머리를 약간 들며

“왜 그러셔요. 선생님?”

긴 눈썹 아래 숨어있는 마치 흑진주와도 같은 까만 눈동자를 유불란에게로 옮기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인젠 그만두고 이름을 불러주어.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

“그래도 선생님은 선생님이지 뭐요?”

“몽란이!”

“네?”

“몽란이!”

“왜 그러셔요?”

“7년 전 겨울......”

“7년 전 겨울?”

“대동강 위에서......”

“대동강 위에서!”

두 사람의 손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기를 싫어하는 듯이 엉키었다.

“선생님! 용서하세요. 철없던 저를......”

몽란은 옛날을 추억하려는 듯이 두 눈을 슬그머니 감었다. 얼음 진 대동강...... 까마귀 떼같이 몰려다니는 스케─트...... 자줏빛 스웨터에 남빛 치마를 입은 자기의 모양...... 그 자기를 한 팔에다 꼭 끼고 스케─트를 가르쳐주던 유불란...... 그러다가 그만 둘은 얼음에 쓰러져 버렸다.

“다치었어요?”

“으, 응!”

“아프셔요?”

“으, 응!”

그러나 어째선지 몽란은 일어나기가 너무나 싫어서 재킷 입은 유불란의 가슴 속에다 머리를 부비면서 실컷 실컷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첫사랑, 잘 때면 반드시 몽란은 유불란을 생각하고 유불란은 몽란을 꿈꾸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후 몽란과 유불란은 서로서로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유불란은 일본으로 유학하고 몽란은 서울로 올라오고......

‘배우가 되리라.’

그것이 몽란의 반생을 지배한 큰 꿈이었다.

그때 마침 서울에 박영민을 단장으로 둔 해왕좌가 창립되자 몽란은 만사를 불고하고 이 극장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극장 안의 공기는 첫사랑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몽란의 순정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거의 매일과 같이 배달되는 유불란의 애서를 받아들고 이몽란은 얼마나 울었으며 자기를 비웃었던가! 몽란은 벌써 처녀가 아니고 박영민의 애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몽란은 그만 방바닥에 쓰러지며 명예욕을 만족시키려고 자기의 순정을 잃어버린 허수아비를 눈앞에 그려보았다.

그러나......

“불란 씨는 아직 세상을 모른다!”

몽란은 이렇게 자기를 변명해보았다. 그리고 그 변명은 몽란에게 한 줄기의 광명을 던져준 것 같았다.

“세상은 모다 이렇다!”

몽란의 인생관은 이리하여 누구든 지가 걸어가고 있는, 그리고 걷기 쉬운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5년 후. 그러나 유불란을 다시 만난 이몽란은 ‘삶’의 거짓을 하소연하면서 참된 길을 걸어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해왕좌 좌장 살해사건은 바로 그러는 가운데서 일어났던 것이다.

“몽란이 추워?”

“네, 추워요.”

“그럼 내려갈까?”

둘이는 외투의 깃을 세우면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몽란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유불란은 끝없이 행복을 등에 느끼면서

“야, 오늘은 술을 한잔 먹고 싶다! 그리고 흠뻑 취하고 싶다!”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럼 잡수세요.”

몽란은 반만큼 웃으면서 말하였다.

“몽란이, 술 먹을 줄 알우?”

“선생님이 권하신다면......”

“그럼......”

하고 보이를 불러서 위스키와 칵테일을 청한 후 자기는 위스키를 마시고 몽란에게는 칵테일을 권하면서

“브라보!”

하고 유리잔을 반만큼 올렸다. 몽란도 그에 응하는 듯이 잔을 들며

“브라보!”

하고 불렀다.

“소설가의 공상이라고 비웃음 받은 『가상범인』은 성공했다. 아마 나용귀는 가책의 마음을 금치 못하여 종시 자백하고야 말었다. 그는 지금 몽란 대신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브라보!”

유불란은 또 한 번 술잔을 높이 들었다. 한 잔 두 잔 술잔을 거듭하여가매, 혈맥은 점점 높아가고 가슴속에 들어 있는 그의 심장은 고무풍선과 같이 훨훨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듯하였다. 몽롱한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가 행복스럽고 찬란하게 보였다.

“몽란이! 나는 한번 취하도록 실컷 술을 먹어볼 테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그리고 저의 행복도 겸하여 위해서...... 선생님, 그렇지 않어요?”

“그렇구말구! 아니, 우선 몽란의 행복을 위해서...... 아니,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호호!”

“하하!”

“그런데 선생님, 정말로 나용귀가 좌장을 죽였을까요?”

몽란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어 그렇게 물었다. 유불란은 그 물음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번쩍 크게 뜨며

“그러면 몽란은 나용귀가 죽였다고 생각지 않는 모양이로군!”

하고 대단히 섭섭히 생각하였다.

“아니요, 선생님! 선생님이 창작한 연극이 하도 신통하기에 말씀이지요. 선생님은 본래부터 그이가 사람의 말을 잘 흉내 내는 것을 아시었어요?”

칵테일 한 잔에 몽란의 어여쁜 얼굴은 더욱 윤채를 띠어가고 높다랗고 탐탁한 코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유불란은 가장 귀여운 듯이 혀끝으로 맛보아가면서

“알 리가 있나? 모두 나의 창작이지. 나의 상상이지.”

“그러면 어째, 나용귀는 자기의 범죄를 관중에게 자백하는 것과 같은 그런 연극을 하였을까요? 자기가 사람의 음성을 흉내 낼 줄 안다는 것을 자백하지 않았어요? 그런 것을 보면......”

하고 나용귀 범인설을 마음속 한편 구석에서 부인하는 듯한 몽란의 태도를 유불란은 적지 않은 실망을 가지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나용귀가 맨 나중에 자백한 것만은 사실이니까, 자기가 범인이 아닌 데도 그렇게 자백한다고는 도저히......”

그 순간, 유불란의 몸은 오싹하고 떨렸다. 자기가 범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백한다! 그런 나용귀일까? 그렇다면, 만일 그렇다면 다른 것이 아니라 그는 몽란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것에 틀림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아는 듯한 몽란의 태도!

“선생님, 왜 그런지 자꾸만 그이가 가없이 생각되어요. 그이가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선생님, 그이가 사실 죽였을까요?”

술잔을 든 유불란의 손목은 가늘게 떨기 시작하였다. 사랑의 승리자,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느꼈던 유불란은 또다시 절망의 못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몽란, 몽란! 너는 왜 내 앞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가! 그런 말을 어찌할 수가 있는가? 만일 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하고 있다면......

유불란은 아무 대답 없이 묵묵히 앉아 있다. 몽란은

“선생님, 왜 말씀을 안 하세요?”

하고 머리를 가웃하고 유불란을 들여다보았다.

“몽란이! 왜 그런 말을 물어? 나용귀가 만일 좌장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면 몽란은 누가 죽였다고 생각해? 응? 누가 죽인 것 같애?”

유불란은 음성을 약간 높이어 그렇게 물었다.

“그날 밤, 좌장이 죽는 날 밤, 나는 2층에서 틀림없는 몽란의 음성을 들었어. 아니, 나만 혼자 들은 것이 아니라, 진대성도 듣고 김영애도 들었어. 그것이 만일 나용귀의 거짓 음성이 아니라면 누구가 좌장을 죽였을 것 같애? 몽란이! 몽란! 대답을 해야지. 왜 대답을 못 해. 응? 몽란이!”

유불란은 그러면 네가 죽였다는 말이지 하고 묻고 싶었으나 차마 그런 잔혹한 물음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몽란은 한참 동안 머리를 약간 숙이고 잠자코 있더니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난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용귀를 범인이라고 생각하기가 싫어?”

유불란의 말소리는 점점 흥분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몽란은 역시 아무 대답이 없이 테이블클로스(tablecloth)만 손끝으로 꼭꼭 찌르고 있더니 갑자기 머리를 들면서

“선생님!”

하고 극히 감격된 어조로 불렀다.

“선생님은 왜 그러세요? 저는 지금 선생님 이외에는 아무도 사모하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 데도 믿을 곳 없는 저를 선생님은 괴롭게 하시지 마세요. 제가 끝없이 싫어하던 나용귀랄지라도 그이가 저를 그렇게도 사랑하고 있었다면, 저 역시 일개 마음 약한 여성, 어찌 조금이야 가여운 생각이 안 나겠어요...... 그러나 선생님! 그것과 이것과는 다르지 않아요? 가여워하는 생각과 사모하는 생각! 저는 선생님을 사모하오나 결코 가없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와 반대로 저는......”

몽란의 말끝은 그만 끊어져 버리고 그 뒤를 이어 한줄기의 눈물이 수루루 하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오뚝한 코 밑을 지나서 칵테일에 떠 있는 앵두 알과 같이 빨간 입술 위에 멎으면서 떨어질까 말까를 주저하는 듯이 숨 쉴 때마다 하느적하느적 흔들리고 있다.

유불란은 그 눈물의 참됨을 비로소 깨달은 것같이 주기(酒氣)에 흥분한 마음을 뉘우치고 가다듬어 가면서

“몽란! 좀 지나친 말을 용서해요!”

하고 술잔을 또 거듭하였다.

이윽고 몽란과 유불란은 식당을 나왔다.

우편국 앞 컴컴한 넓은 마당에는 모진 바람이 휙휙 불어오고 맞은편 쪽 삿포로 비루(맥주)의 네온 라이트가 눈보라 속에서 번쩍거리고 있다.

몽란은 얼굴을 목도리 속에다 파묻으면서

“그럼 선생님 곧 댁으로 돌아가세요. 네, 무척 취하셨는데......”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려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나는 걸어갈 테야. 몽란이나 타구 가.”

“아이, 이 추위에요?”

“한잔 마시고 걷는 재미가 그럴듯하거든.”

그때, 마치 그들이 타기를 기다리는 듯이 한 대의 택시가 그들 앞으로 스름스름 지나간다. 유불란은 손을 들어 차를 멈춘 후

“안국동.”

하고 몽란의 갈 길을 가르쳐주었다.

코밑까지 목도리를 두른 운전수는 돌부처처럼 앉아 있더니 추운 듯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며 문을 열어주었다. 유불란은 몽란을 택시에 태우면서

“요오, 운전수. 곰방 와ᅡ! 어째 한 잔 못하신 모양이로군.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앉었는 것을 보니...... 못 마셔서야 할 수 있나? 이 추위에...... 자아!”

하고 유불란은 유쾌한 듯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1원짜리를 두 장 끄내어 운전수에게

“요놈은 택시 값, 또 요놈은 막걸리 값.”

하고 하하하하 웃는다.

운전수는 받기가 어색하다는 듯이 잠시 주저하다가

“고맙습니다. 나리 참......”

하고 머리를 굽실거리면서 받았다.

“몽란! 그럼 잘 가. 자! 응?”

유불란은 그러면서 몽란의 손을 한 번 꼭 잡아주었다. 몽란은 자동차에 다리를 올려놓았다가 다시 내려서면서 가는 목소리로

“선생님, 영원히 저를 버리지 마세요, 네?”

하고 떨어지기 싫은 듯이 잠깐 유불란의 팔목에 매달렸다가 다시 차에 오르면서

“정말 곧 댁으로 돌아가세요, 네?”

암! 곧 돌아가구말구. 그런데 운전수 양반, 잘 모셔다드려야만 되우. 이분은 나의 가장 귀중한 존재, 하늘 아래 땅 위에 다시없는 사랑스러운 존재니까. 알겠지, 운전수! 그만했으면 잘 알겠지?”

그리고 유불란은 재미있다는 듯이 운전수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알구말굽쇼, 이몽란 씨...... 해왕좌의 하나밖에 없는 스타...... 그리고 좌장 박영민 씨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분...... 이렇게 유명하신 분을 못 알아볼 리가 있겠습니까?”

운전수는 캡과 목도리 사이에 반월형으로 나타난 얼굴에 웃음기를 띠면서 그렇게 대답하였다. 유불란은

“호오......!”

하고 감탄하며

“이거 참, 뜻밖의 친구로구려!”

“그리고 그렇게 감탄함을 마지않는 선생님은 탐정극 『가상범인』을 몸소 원작하시고 몸소 무대 위에 섰던 분, 유명한 탐정소설가 유불란 선생!”

“호오! 참, 이것이야말로 뜻밖의 뜻밖이로군! 유불란 선생이 이렇게 유명하게 되었을 줄은...... 하하하하, 하여튼 악수나 한번 하고 헤어지지.”

운전수도 쾌활스럽게 웃으면서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저도 『가상범인』이라는 연극을 보았지마는, 선생님은 바로 나용귀가 좌장을 죽이는 현장을 목격하신 것 같겠지요. 어찌 그렇게 신통한지, 참......”

“암! 신통하구말구.”

“그래, 흑 선생님이 그 살인현장을 보시지나 않었나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겠지요?”

그때 유불란은 “호오!” 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가 바로 그 현장을 보고,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이 창작한 것같이 『가상범인』을 만들어놓았다! 그렇다는 말이지 운전수 양반?”

운전수는 잠깐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그렇지요. 그러한 의심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선생님의 연극을 보고 난 사람으로서는......”

하고 그는 캡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을 들어 창밖에 서 있는 유불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하고 유불란은 그날 밤 자기는 진대성, 김영애 두 사람과 함께 2층에 있었으니 현장을 보려야 볼 수가 없었단 변명을 하려고 하였으나 그만

“에이, 구찮어!”

하고 차 떠나기를 재촉하였다. 엔진 소리와 아울러 자동차는 컴컴한 조선은행 앞을 한 바퀴 삥 돌아서 종로를 향하여 달려간다. 반만큼 웃는 몽란의 얼굴을 남겨놓고......

몽란과 작별한 유불란은 텅 빈 듯한 가슴 속에서 인제 방금 남겨놓고 간 몽란의 웃는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것은 바로 해왕좌 『가상범인』이 최후의 막을 내린 후 약 두 주일이 지난 어떤 눈보라 치는 날 밤이었다.

유불란은 그때 자기가 유숙(留宿)하고 있는 ‘장충단 아파트’를 향하여 진고개[본정(本町)] 거리를 거쳐서 걸어갈 예정으로 허텅거리는 다리를 한 걸음 두 걸음 옮겨놓기를 시작하였다. 그렇게도 번화하던 진고개 거리도 사람의 발자취가 점점 드물어가고 때때로 끄는 왜나막신 소리가 휙휙 부는 밤바람 가운데서 따르락따르락 들려온다.

유불란은 외투 주머니에 넣은 두 주먹 안에서 몽란의 어여쁘고도 풍부한 몸뚱이를 굳세게 포옹해보면서

“몽란은 내 것이다! 몽란은 다시 내 것이 되었다!”

하고 불러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몽란에 대한 연정이 불덩어리 같이 일어나서 잠시 헤어진 몽란을——내일 또다시 만날 몽란을 알지 못할 누구에게 영원히 뺏긴 것같이도 생각되었다.

“만일 몽란이가 또다시 나를 차버린다면, 7년 전 그때와 같이 나를 또 배반한다면......”

그것은 생각만 하여도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7년 전의 유불란은 아직 어렸다. 따라서 그의 연정은 채 타지 못한 장작과 같이 바람이 불다 멎으면 스스로 꺼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불란은 그렇지 못했다. 탈대로 타고 필 대로 핀 그의 가슴, 그리고 아직 개가 되지 못한 그의 정열......

“연애 테러리즘!”

그는 그때 그러한 조어(造語)를 스스로 지어서 불러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연애에 있어서의 테러리즘을 야만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觀念)의 이상...... 책상 위에서 생각하던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못한다. 인생은 관념이 아니고 행동의 연속이다. 사랑은 아깝지 않게 자기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아깝지 않게 빼앗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야만일지 모르나 진실한 사랑의 자태에 틀림이 없다.”

유불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갈지자걸음으로 허둥지둥 걸어갔다. 왼편 쪽 악기점에서는 ‘잊으시면 싫어요’가 이상한 매력을 가득히 싣고 거리로 흘러나온다.

“에이!”

하고 유불란은 구두 끝으로 돌을 한 번 툭 차면서 중얼거렸다.

“인생을 굵게! 그리고 짧게!”

또 한 걸음 걸어가서는 변사 목소리로

“드디어 돈 호세는 카르멘을 죽였다! 보라! 돈 호세는 사랑의 용사였다! 카르멘! 카르멘! 요부 카르멘! 내게서 혼을 빨아내고 피를 짜낸 요부 카르멘! 받아라! 받아라! 내 칼을 받아라! 내 총을 받아라!”

그러고는 “후후훗” 하고 한번 웃은 후

“아아! 황금과도 같이 찬란하고 꽃과도 같이 어여쁜 호세의 말로요! 죽여라! 죽여라! 나를 배반하는 몽란을 죽여라! 하하하하, 핫핫핫핫.”

술기운에 잔뜩 마비된 유불란의 정신은 걷잡을 수 없는 탐미의 세계로, 끝없는 로맨티시즘의 세계로 깊이깊이 들어가기를 시작하였다.

그때 유불란의 발머리는 누가 부르는 듯이 책방 선영각(鮮映閣)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별로 책을 사려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으나 대산 같이 쌓아놓은 서적을 이것저것 뒤적거리는 것이 그의 버릇이며 또한 취미였다.

유불란은 한참 동안 이리저리 당기면서 이 책 저 책 뒤적뒤적하여 보았으나 별달리 신통한 책은 보이지 않아 그만 밖으로 나갈까 하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였다.

유불란은 자기 오른편에 써늘한 찬바람과 함께 들어온 괴상한 남자를 하나 발견하였다. 중절모를 푹 내려쓰고 커다란 마스크로 입을 가린 남자를......

유불란이 그 남자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중절모를 남달리 깊이 내려썼다는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왜 그러냐 하면 유불란 자신도 중절모를 푹 내려쓰고 입에는 역시 커다란 마스크를 대었던 때문이다. 아니, 오동짓달(애동지) 추운 때라 서점 안에서 책을 보고 있는 손님들은 태반이 다 대동소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유불란이가 견딜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결코 그의 복면 때문은 아니었다.

그 남자는 잠깐 동안 서적이 가득하니 끼어 있는 선반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더니 장갑 낀 손을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어 그 앞에 나란히 끼어 있는 전집들을 한 책 빼내었다.

“하하! 탐정소설에 취미를 가진 분이로군!”

하고 유불란은 자기가 탐정소설가인 만큼 일종의 호기심과 친밀한 정의(情義)를 마음에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 탐정소설의 대가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황금가면』이라는 무서운 탐정소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유불란의 호기심의 전부를 끌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그 남자는 사람들이 보통 하는 것과 같이 서문, 혹은 목차 같은 것도 보지 않고 단 한 번에 어떤 페이지를 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가 펴놓았던 페이지를 한 자도 읽어보지 않고 다시 책을 접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책을 제자리에다 다시 꽂아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때 유불란의 몽롱한 시야에 인 박인 광경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그 남자가 책을 접을 때 무슨 쪽지 같은 종잇조각을 페이지 속에 끼워놓는 광경이다. 한 자도 읽지 않고 쪽지를 끼워놓는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사실 이상한 일이었다. 더구나 『황금가면』이라는 제목에서 발생하는 가장 그로테스크한 매력에 끌리어서 술 취한 탐정소설가 유불란은 드디어 『황금가면』을 선반에서 빼보았다. 빼보고 유불란은 한참 동안 정신없이 책을 들여다보았다. 유불란의 두 눈썹은 점점 모아져 가고 그의 두 눈은 불타는 듯이 열이 올랐다.

“알 수 없다!”

하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과연 거기에는 한 조각의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 개의 쪽지로서의 사명 이외의 어떤 비밀을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안 유불란은 이상한 호기심에 마음이 찌릿찌릿함을 전신에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화학방정식 같은 것인데 부호(符號)와 숫자가 서로 연속되어 있는 어떤 암문(暗文) 기호였다. 적어도 탐정소설가인 유불란은 이 암문 기호가 어데서 나온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해독할 줄을 그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전 세계의 탐정소설의 원조인 에드거 앨런 포의 재미있는 소설 『The gold bug(황금충黃金虫)』에 나오는 유명한 암호문이다.

예를 들면 78+5※(164?)7j+12※3+8j9 (357※), 이와 같이 수학의 공식과도 같은 암호문이다.

그 소설의 내용을 유불란은 잘 안다. 그것은, 옛날 ‘키드’라는 해적이 자기가 탈취한 금은 보배를 아메리카 캐롤라이나주의 어떤 곳에다가 매장한 후, 그 매장한 곳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앞에 예시한 바와 같은 암호문을 남겨놓았다. 후세에 이르러 ‘윌리엄 리그랜드’란 사나이가 이 암호문을 손에 넣어 그것을 해독한 결과, 수많은 금은 보배를 발굴할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암호에 나오는 숫자라든가 부호라든가는 모두 영어의 알파벳을 대용하면 된다. 다시 말하면 3은 G, 5는 A, ※은 N, ?는 U를 대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일이 외우지 못하는 유불란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유불란은 초조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그 암호문이 끼워져 있는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이 에도가와 란포의 『황금가면』이라는 소설을 극히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동경을 중심으로 매일과 같이 국보(國寶)가 도난을 당하는 한편 무서운 살인사건이 연발된다. 그 살인마는 황금색의 가면을 쓰고 역시 황금색으로 된 가장으로 전신을 둘러쌌다. 그 부처와 같이 표정 없는 황금가면의 커다란 입에서는 실과 같은 빛줄기가 가늘게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다. 그때 공포에 싸인 동경 시민을 구하고 저 나타난 명탐정 아케치(明智)로 말미암아 드디어 『황금가면』의 정체가 폭로되었다. 그것은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불란서 대사(大使), 또 다시 말하면 그 불란서의 탐정소설가 모리스 르블랑이 그의 탐정소설 활약시키고 있는 일세의 의도(義盜) 아르센 뤼팽인 것이 판명되었다는 실로 현실을 떠난 공상적 작품이다. 마치 불란서의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그의 소설 속에다 영국의 탐정작가 코난 도일이 창작해낸 명탐정 셜록 홈스를 등장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유불란은 그 페이지를 몇 줄 읽어보았으나 별달리 신통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때 유불란은 한 가지의 조그마한 발견을 하였다. 그것은 암호문 맨 끝에 한문자로 ‘일(─)’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이 서양식 암호문에 이 동양 글자 일(─)‘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 순간 번갯불같이 머리에 떠오르는 한 개의 가상(假想)이 있었다.

‘만일 이 종잇조각이 암호로 된 통신이라고 가정하면 반드시 이 통신을 받으러 오는 어떤 상대자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은가?’

유불란은 『황금가면』을 다시 선반에다 끼워놓고 무슨 큰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제2의 복면의 남자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상점 안은 아직도 손님으로 가득 찼다. 유불란은 뛰노는 가슴속을 억제해가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은 아직도 눈보라다.

‘언제나 올까, 언제나 올까?’

하고 그는 기다리기를 마지않았다. 그의 틀림없는 가상은 탐정극 『가상범인』으로 하여금 나용귀를 감옥으로 보내었다.

그의 명성은 단지 일개 공상적인 탐정작가라는 것보다도 지금은 명탐정이라는 이름이 더욱 높았다. 그는 자기의 가상을 다른 누구보다도 일층 더 굳세게 믿었다.

10시 30분!

과연 그때 이상한 신사가 하나 창밖에 나타났다.

그는 회색 캡을 푹 눌러 쓰고 역시 커다란 마스크를 입에다 대었다. 그것만 아니라 그는 또 검은 안경까지 썼다. 키가 훨씬 크고 외투의 깃을 세운 그는 얼핏 보면 마치 서양 사람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괴상한 신사는 잠깐 동안 문밖에서 상점 안을 엿보더니 드디어 유리창을 드르르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잠시간 책 선반을 두록두록 돌아보다가 아니나 다를까 유불란이가 서 있는 옆으로 사람을 헤치면서 들어온다.

유불란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눌러가며 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이 괴상한 신사의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관찰하였다. 그때 신사는 역시 선반에서 『황금가면』을 빼냈다. 그러고는 쪽지가 끼워져 있는 페이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그는 그 암호문을 이해하였다는 듯이 약간 머리를 끄떡거린다. 다음에 그는 그 종잇조각에다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연필로 한 자 기록하여놓고는 황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불란은 다시 책을 빼보았다. 암호문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맨 나중 ‘일(─)’자 아래 ‘이(二)’ 자 더 쓰여 있었다. 그가 둘째 번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살인유희(殺人遊戱)[편집]

유불란은 책을 다시 끼워놓고 서점을 뛰어나왔다.

검은 안경을 낀 괴상한 신사는 눈보라 치는 거리를 미쓰꼬시(三越) 백화점 초입으로 향하여 달아나는 듯이 걸어간다.

유불란도 모자를 깊이 내려쓰고 목도리로 코와 턱을 가리면서 이 이상한 신사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유불란은 알코올에 마취된 정신을 스스로 가다듬어 앞에 가는 신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가지각색으로 생각해 보았다. 영어로 된 ‘포─’의 암호문을 그리도 쉽게 해독할 수가 있는 그들, 암호로 아니면 통신할 수가 없는 그들의 비밀성, 어떠한 목적으로, 그리고 어떠한 곳으로?

하여튼 유불란은 유쾌하기가 짝이 없었다. 마치 탐정소설과도 같이 흥미 있는 탐정 놀이가 아닌가. 사실 그때의 유불란으로 말하면, 일개 탐정소설가라는 것보다도 하나의 명탐정이라는 의식이 더 한층 굳세었다. 동서양을 물론하고 유명한 탐정소설에 나오는 명탐정의 이름이다. 음으로 마음으로 머리에 떠올랐다.

‘듀팽’─‘호-ㅁ쓰’─‘루콕’—‘커니말’—‘피-타•껀쓰’—‘아께지’─‘노리미즈’─‘뿌라운’─‘엘레리•키—ㅇ’......

그때 우편국 앞 넓은 마당에 나선 괴신사는 잠깐 동안 사방을 휘 마침 동대문 가는 전차가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나는 듯이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마침내 신사는 동대문행 전차를 잡아탔다. 유불란도 모르는 척하고 뒤로 따라 탔다. 전차는 경성역에서 실은 듯한 손님들로 가득 찼었다.

유불란은 혁대에 매달리면서 서너 사람 건너서 서 있는 괴신사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는 때때로 신사의 시선과 마주칠 적도 있었으나 신사는 묵묵히 팔뚝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창밖에 흐르는 네온사인을 멍하고 바라본다.

그러는 중 전차가 벌써 종점 동대문 정류장에 도착하자 괴신사는 또다시 청량리 가는 전차를 바꿔 탄 고로 유불란도 역시 뒤를 따라 탔다. 전차는 한참 동안 키질하듯이 달리다가 마침내 대학 예과 앞에서 멎어버렸다.

신사는 잠시 주저하는 듯이 사면을 돌아보더니 회중전등을 외투에서 꺼내 들고 예과 교사 서편 쪽으로 난 신작로를 북쪽으로 향하여 걷기를 시작하였다.

“하하! 내가 미치지를 않었나?”

유불란은 정신 잃은 사람 모양으로 반짝거리는 회중전등을 목표로 한참 동안 신사의 뒤를 따라가다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또 한 번

“내가 미쳤나 보군!”

하고 외투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넓적다리를 한 번 꼬집어보았다.

그러나 추위로 말미암아 그의 감각은 대단히 둔하여졌다. 그는 한 번 더 힘껏 쥐어뜯어 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픈 것 같은 생각만이지 그다지 아픈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꿈이로군!”

그는 그러한 실험을 꿈속에서 여러 번 하여 보았던 것이다.

“아프면 현실, 안 아프면 꿈!”

유불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놈─나를 누군 줄 알고......? 명탐정이다. 셜록 홈스다! 에헴!”

꿈속에 있는 듯한 유불란의 감정은 아까 마신 강렬한 술기운에 흥분될 대로 흥분되고 몽롱한 그의 눈에는 호기심을 걷잡을 수 없이 돋워주는 괴신사의 회중전등이 마치 독갑이 불같이 반짝이고 있다.

“따라라─악한의 그림자를 놓치지 말고 따라라─이놈, 네 뒤를 명탐정이 따라간다!”

유불란은 아까 잠깐 느꼈던 무서움을 걷어차 버리고 그 이상한 사나이의 뒷그림자를 어데까지나 따라갔다.

사방은 먹물이 흐르는 듯이 감감하고 눈 뜰 새도 없이 몰려오는 눈보라는 더욱더욱 심하여간다.

유불란은 졸리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면서 걸었다, 아니, 태반은 졸면서 걸었던 것이다.

임업시험장(林業試驗場)을 졸면서 지난 유불란은 어데가 어데인지를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길은 점점 좁아가고 험하여갔다. 언덕을 넘고 솔밭을 지났다. 돌을 차고 넘어졌다.

나무 그루를 밟고 쓰러졌다. 도랑에 빠져서는 헤매었다. 눈 위에 쓰러져서 한참 동안 잔 것도 같다. 경성시가의 전등불이 멀리 뒤에서 꿈결같이 반짝거리고 있던 것도 인제는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 버렸다. 정신과 육체가 피곤할 대로 피곤해진 유불란이었다.

이리하여 대체 얼마나 걸었는지, 그때 괴상한 사나이의 회중전등 불빛이 우뚝 멎었다. 유불란은 숨결을 죽여가면서 실같이 비치는 전등의 뒤를 따라 바라보았다. 거기는 천공을 뚫을 듯이 솟아 있는 커다란 나무가 하나 서 있다.

그 나무 옆에는 역시 커다란 집 한 채가 마치 무슨 폐성(廢城)과 같이 서 있는 것을 유불란은 꿈결같이 쳐다보았다.

그 순간, 괴상한 사나이는 그 커다란 나무 아래를 거쳐서 돌담에 몸을 의지한 후 담뱃불을 붙이려고 두어 번 성냥을 켰다. 그러나 성냥은 곧 바람에 꺼져버리고 말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사는 겨우 담뱃불을 붙여서 서너 번 공중에다 둥그런 원을 그렸다.

그러고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유불란은 자기 뒤에 사람이 가까이 오는 발자취 소리를 듣고, 가만히 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발자취는 빨간 담뱃불과 함께 유불란의 옆을 지나갔다. 그러고는 역시 담뱃불로 원을 세 번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냐! 나도 들어가 보자!”

무시무시한 마음을 억제해가면서 유불란은 돌담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떠한 종류의 단체인지는 알 수 없으나마 너희들의 비밀을 폭로시키고야 만다! 나도 담뱃불을 붙이리라!”

유불란은 모자를 한 번 더 푹 내려쓰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완전히 가리었다.

포켓에서 담배를 한 개 꺼내어 불을 붙인 후 그는 용기를 내어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들의 암호가 되어 있는 불꽃 원을 허공에 서너 번 둥그렇게 그렸다. 원을 그리자마자 대문은 안으로부터 스스로 열리었다.

“이 추운 밤중, 오시기에 얼마나 고생을 하시었습니까. 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대문이 열리자마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유불란은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 유불란은 속으로 ‘오냐, 너희들 잘 속는다!’ 하고 픽 웃었다.

“자, 여기 이 가장이 있으니 이것을 입으십시오. 그 넓은 뜰을 지나면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컴컴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마는 그것은 커다란 포대(包裝)와 같은 가장(假裝)이다. 유불란은 모자를 벗고 그것을 머리에서부터 푹 내려썼다. 가장은 발끝까지——마치 커다란 망토와 같이 치렁치렁 늘어진다.

이리하여 가장으로 전신을 싼 유불란은 잡초가 무성한 뜰을 지나 대청 앞으로 걸어갔다. 구두를 신은 채로 대청에 올라서니 거기도 또 안내인이 서 있다가

“모자를 맡겨주십시오.”

하고 유불란의 손에서 모자를 받아 든 후, 컴컴한 복도를 한참 걸어가다가 문틈으로 불빛이 한 줄기 새어 나오는 어떤 방 앞까지 오더니

“자, 이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하고 문을 열어준다.

그때 무의식적으로 한 발을 방 안으로 들여놓은 유불란은 “흑!” 하고 숨을 마시었다. 하마터면 그는 “악!” 하고 소리를 칠 뻔하였던 것이다.

촛불이 펄럭거리는 촛대 옆에는 전신을 시커멓게 가장으로 둘러싼 두 사람이 서 있더니, 새로이 들어오는 유불란을 바라보고 말 없이─그러나 대단히 은근히 허리를 굽혔다.

그때 비로소 유불란은 자기의 전신을 휘둘러보았다. 자기의 가장도 그들의 것과 같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시커멓다.

가슴에는 ‘오’라는 번호가 하얀 글자로 적혀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의 가슴에도 각각 ‘삼’ ‘사’라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유불란은 그들이 권하는 대로 허리를 한 번 굽혀 답례를 한 후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 십여 간이나 되는 넓은 방은 온돌이 아니고 전부가 마루를 깔었는데 마루도 여러 해 묵은 듯이 컴컴하고 썩었다. 방 안에는 아무 가구도 보이지 않고 다만 한 개의 테이블과 S 개의 의자가 놓였을 뿐이었다. 그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는 가지각색의 양주병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고 그 밑에 놓여 있는 역시 조그만 화로에는 장작불이 이글이글 피고 있다.

“뷔인 집 같다!”

유불란은 한 번 사방을 삥 휘 둘러보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이 빈집에서 대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이 이상한 공기, 눈만 반짝반짝하고 묵묵히 앉아 있는 괴상한 사람들, 그리고 자기들끼리도 서로 얼굴을 감추고자 복면과 가장으로 몸을 두른 그들, 이 눈보라 치는 밤중, 이 험악한 산중에서 열지 않으면 안 될 비밀의 회의, 포의 암호문도 쉽게 이해할 수가 있는 그들. 어떤 일이 일어날까?”

유불란도 그들과 같이 묵묵히 앉아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은 점점 떨려가고 마음은 차차 무시무시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여야만 될까? 그들의 회칙(會則)을 하나도 모르는 나! 그리고, 그리고...... 앗!”

그 순간 유불란의 눈앞은 지옥과 같이 캄캄해지고 공포에 싸인 그의 전신은 체질하듯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이 일을 어찌하나? 이 일을 어찌하나?”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눈을 번쩍 들어 앞에 앉은 두 괴인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유불란의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역시 잠자코 앉아서 촛불만 멍하니 바라본다.

“아아! 어리석은 나! 이 회합(會合)에는 반드시 정원(定員)이 있을 것이다. 정원보다 회원이 한 사람 더 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면——? 이와 같이 엄중하고 이와 같이 비밀성을 띤 회합!”

유불란의 눈에는 ‘죽엄’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니 나타났다.

“위험은 절박했다!”

뛰노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유불란은 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무한히 애를 썼다. 그러나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밑 없는 못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위험을 깨달았다.

“그렇다! 도망하자! 인제라도 도망하자!”

유불란은 황급히 방안을 돌아보았다. 어데로 도망갈까, 어떻게 도망할까. 뜰에 면한 들창에는 검은 커튼이 둘려있다. 서편과 동편은 담벽이다. 출입구는 단지 아까 유불란이가 들어온 북쪽 문 하나밖에 없다.

유불란은 문득 시계를 꺼내 보았다. 12시 20분

“도망할래면 인제 하여야 한다. 그렇다. 들창을 깨치고 뜰로 뛰어나가자!”

유불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자마자 절망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때 문이 덜컥 하고 열리면서 복면한 사람 셋이 방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유불란은 다시 펄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었다.

복면한 사람은 유불란까지 전부 합해서 여섯이었다. 그때 가슴에 ‘일’이란 마크를 붙인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정각인 12시는 벌써 20분이나 넘었습니다. 이 이상 더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본 회장은 생각합니다. 두 분의 결원을 낸 것은 대단히 유감이지만—— 자, 여러분 마음껏 술을 잡수어 주십시오. 변변치는 않으나마——

유불란은 실로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강렬한 양주를 사양치 않고 마셨다. 점점 깨어가던 술기운이 다시 온몸으로 핑 돌기 시작하였다. 다섯 사람의 괴인들의 그림자가 마치 풀 스피드의 다이아 모양으로 핑글핑글 돌고 있다. 유불란은 술잔을 권하는 대로 거듭하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에헴! 나를 누군 줄 알고. 나를 몰라보면 안 된다. 적어도 세계적 명탐정 유불란 선생이야! 결석한 사람이 둘씩이나 있다고? 에헴! 사실을 알고 보면 셋이란 말이야. 너희 같은 놈한테 나의 정체가 발로(發露) 되어서야 될 말인가. 아아! 참 유쾌하다! 상쾌하다! 뭐? 그렇게 재미있는 유희가 있어? 이것은 양손에 떡이로구나. 꿩 먹고 알까지 먹으면 어떻다고? 자아, 회장님! 뭘 그리 지지하게 그 터우? 빨리 해? 빨리해 보아요!’

그때 ‘일’ 자를 붙인 회장은 술잔을 테이블 위에 놓은 다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밤에는 가장 재미있고 가장 무서운 장난을 하나 하기로 합시다. 그것은 우리의 자극증진회(刺戟增進會)가 열린 이후로는 아직 해보지 못한 유희요, 또 이후로도 다시 맛보지 못할 최고의 장난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가장 두렵고 가장 흥미 있고, 그리고 가장 그로테스크한 장난입니다. 생각건대, 우리들——사람의 힘으로 할 만한 최상의 유희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아무런 흥미도 가지지 못한 우리들, 황금도 싫고 연애도 싫고 명예도 싫고 지위도 싫은 우리들이 찾을 최후의 길——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최후의 유희를 오늘 밤 여러분 앞에 보여드리겠습니다. 밤도 인제는 깊었으니 지금부터 살인유희를 하겠습니다.”

회장은 가장 엄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후 나란히 앉은 회원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대체 누구가 누구를 죽이는고? 사실로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인가?

유불란은 자기의 두 귀를 의심하였다. 그리고 술에서 깨어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건전한 의식을 가져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머리를 흔들어보고 옆구리를 꼬집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효과도 없는 애씀에서 지나지 못했다. 그의 정신은 점점 더 마비되어갈 따름이었다.

이리하여 가지런히 앉아 있던 복면한 회원들은 웅성웅성하기를 마지않았으나,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못하였다.

다음에는 무서움에 찬 무거운 침묵이 자극에 굶주린 그들의 주위를 싸고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마귀의 초상과도 같은 검은 그림자가 담벽 위에서 우물우물 춤춘다.

밖에는 아직 눈보라다.

“살인유희!”

회장 ‘일’호의 굵다란 목소리가 그들 머리 위에서 다시 떨어졌다.

유불란은 가만히 숨결을 죽이고 머리를 숙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누구가 누구를 죽이겠는가 하는 것인데——”

회장의 쏘는 듯한 무서운 눈초리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점검하기를 시작하였다. 그 눈초리가 그들 머리 위에 쏠릴 때마다 그들은 “흑”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들은 그 눈초리를 정면으로는 받을 수가 없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회장의 마시가 다음 사람에게로 옮아갈 때면 그들은 “후!” 하고 긴 한숨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운명 앞에 너무나 순순하였다. 누구 한 사람 회장의 눈초리에 반항하는 자는 없었다. 아니, 그들은 도리어 그 피에 굶주린 잔혹한 시선을 기대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것만 아니다. 그 시선에 반항하는 것은 즉시로 생명의 위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죽을 사람은 벌써 정해 놓았습니다.”

유불란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회장의 눈초리와 그의 눈초리가 허공에서 한참 동안이나 무섭게 부딪쳤다.

그러나 유불란은 곧 머리를 숙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항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시바삐 이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꿈이다, 꿈이다! 나는 지금 무서운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꿈이 아니면 이렇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지 않은가. 기쁨의 꼭대기에서 절망의 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꿈, 그런 꿈을 나는 많이 보았다. 아아, 하느님이 계시다면 하느님이여! 한시바삐 저를 이 악몽에서 깨게 하여주십시오! 저를 구하여주십시오!”

그때 ‘일’자 마크를 붙인 회장은

“그러니 이 유희에 있어서 누구가 죽이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고 여섯 장의 카드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물론 이 다시없는 귀중한 경험을 우리들은 공평히 분배해야만 되겠지만, 그러나 보시는 바와 같이 죽을 자가 단지 한 사람밖에는 없으니까, 죽이는 사람도 한 사람으로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불행히 이 추첨에 빠지신 분들은 대단히 유감입니다만, 싸움을 옆에서 구경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일 사람이 과연 죽이고 죽을 사람이 과연 죽겠느냐? 혹은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맺을 것이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예상할 수 없는 일이올시다. 그런데 여기 이와 같은 여섯 장의 카드가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다섯 장에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이 한 장에다 ‘행운(幸運)’이라는 글자를 써놓았는데, 이 행운의 카드를 잡으신 분이 죽이는 역할(役割)을 하여주십시오. 이와 같이 카드를 뒤집어 놓겠습니다.”

하고 회장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카드를 한참 동안 이리저리 섞어놓았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한 번 휘 둘러본다. 여섯 장의 카드는 마치 자기네들이 짐 지고 있는 무서운 사명을 아는 것과도 같이, 또한 모르는 것과도 같이 펄럭펄럭하는 촛불 밑에서 번쩍거리고 있다.

——‘행운’의 카드는 어데 있는고?

자극에 굶주린 괴인들은 그 운명의 카드를 희망하는 듯이, 혹은 희망치 않는 듯이 물끄러미 여섯 장의 카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자아, 어느 분이든지 마음대로 쥐십시오.”

하고 회장은 명령하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는 아무의 손도 뻗지를 않는다.

“내가 먼저 쥐는 것은 혹시 공평치 못하다는 평을 들을는지 모르니까 자아, 사양치 말고 쥐어주시오.”

그때 ‘삼’이란 마크를 붙인 자의 손이 천천히 테이블로 뻗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잡았다. 다음에는 ‘육’호가, 그 다음에는 ‘이’호가, 또 다음에는 ‘사’호가——

“자아, ‘오’호께서 먼저 쥐십시오!”

회장은 유불란에게 은근히 권하였다.

그러나 유불란은 두 장밖에 남지 않은 살인의 카드를 묵묵히 내려다볼 뿐이다. 그 카드 위에는 자기의 건전한 의식이 불꽃처럼 뛰노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 한편 꿈인 것도 같았다.

——꿈이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깨나자, 빨리 깨나자!

“빨리 쥐십시오!”

이렇게 회장이 다시 권하였을 때 중풍 환자의 그것과 같이 떨리는 유불란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위로 뻗어가서 오른편 카드를 덤뻑 잡았다.

“그러면 이것은 내가——”

하고 맨 나중 장을 들어본 회장은

“틀렸다!”

하고 고함치면서 하얀 카드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다음 ‘육’호가 던진 카드, 그것도 하얀 것이었다. ‘사’호, ‘삼’호, ‘이’호 모두가 다 백지의 카드였다. 그들은 던지면서 어쩐지 “후후” 하고 긴 한숨을 쉰다.

“오”호 만세, 만세, 만세! 이런 소리를 유불란은 멀고 먼 꿈나라에서 듣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수많은 축배가 그의 몽롱한 눈앞에 어주렁어주렁 떠올랐다.

이리하여 사면에서 부어주는 축배를 마실 대로 마시고 난 유불란은 완전히 현실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꿈나라 사람이 되고 말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란 것이 없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자기에게 축배를 건네는 복면한 사람들을 얼마나 그는 재미있게 생각하였던가! ‘오’호 만세를 불러주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만 관중의 찬양 속에서 맹우(猛牛)와 쌈 싸우고 있는 용감한 투우사의 환영을 문득 그는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그렇다! 나는 서반아의 투우사다!”

그는 그렇게 자기를 착각(錯覺)하였다. 다음에는 아까 봉장 거리를 걸을 때 잠깐 생각해 보았던 카르멘과 호세의 이야기가 연상되자, 그는 또 한 편 자기를 호세라고도 생각하였다. 사랑의 호세와 힘의 투우사(鬪牛士)——이 두 인격(人格)을 아울러 자기의 몸에 체화(體化)시켰다고 착각하였다.

“돈 호세여! 귀를 기울이어 저 박수 소리를 들어보라! 구름같이 모여든 서반아의 신사 숙녀는, 지금 너를 위하여 찬양함을 마지않고 갈채함을 끊지 않는다.”

유불란은 마루 위에 쓰러지면서 눈을 감았다.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르는 환영의 날개는 드디어 그를 열정의 나라 서반아로 끌고 갔다.

“호세여! 머리를 들어 관중을 쳐다보라. 어여쁜 아가씨의 새파란 눈동자가 너를 보고 웃고 있다. 그 눈동자가 던지는 추파를 사양치 말고 받아라! 오오, 열리었다. 행복의 문은 지금 너를 위해서 열리었다. 들어가라 ─ 서슴지 말고 그 문으로 들어가라! 서반아의 미녀, 집시 ─ 카르멘이 너 오기를 기다린다.”

괴인들은 유불란의 이 재미있는 환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때 회장은 두 자루의 단도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유불란은 그런 줄도 모르고 역시 마루 위에 누워서 “카르멘! 왜 그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어? 보라. 남풍이 실어오는 향기로운 꽃 냄새, 오렌지는 마치 우리들의 심장과 같이 빨갛게 익었다. 저─게 보이는 것은 대서양의 물결, 이편에 보이는 것은 지중해가 아닌가! 바람을 한 아름 안고 흰 돛대가 지나간다. 푸른 물결에 희롱하는 갈매기 떼——아아, 평화에 가득 찬 서반아여! 너는 영원히 카르멘을 위해 서 있거라!”

꿈속의 영웅 유불란은 그때 수만의 군병이 무연한 벌판에서 총과 칼을 들고 단병접전(短兵接戰)하는 광경을 보았다.

“카르멘, 저것을 보라! 서반아에 전쟁이 일어났다. 혁명군은 드디어 수부(首府) 마드리드를 포위했다. 아, 총소리가 들린다. 대포 소리가 들린다. 보라! 마드리드는 불의 바다다!——카르멘, 카르멘, 피난 가지! 우리 조선으로 피난 가지! 조선은 어여쁜 동산, 사랑의 에덴이다. 뭐 안 가겠다?......?”

“음, 알었다! 나에게서 사라지려는 너의 마음을 나는 알았다....... 루카스, 루카스. 카르멘, 요부 카르멘! 너의 눈동자는 벌써 루카스를 사랑하기 시작하였다. 너의 마음은 벌써 나에게서 사라졌다. 카르멘, 나의 끓는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빨아먹은 카르멘! 너는 요부다! 어여쁜 가면을 쓴 악마다! ......아아 지금도 들려온다. 지나간 그때 네가 나에게 준 사랑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카르멘, 카르멘! 그것이 모두 허위의 맹세였던가? 에이! 그러면 받아라, 내 칼을 받아라!”

유불란은 벌떡 일어났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아악!” 하고 방안을 울리었다. 회장이 가슴에 ‘칠’이라는 마크를 붙인 복면한 여자를 붙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유불란은 꿈결같이 쳐다보다가

“카르멘이다. 저것이 카르멘에 틀림이 없다!”

하고 마음속에 부르짖으면서 테이블 위의 단도를 덤뻑 잡고 일어섰다.

불빛에 번쩍거리는 두 자루의 칼을 들고 유불란은 마치 몽유병자와 같이 카르멘 앞으로 나아갔다. 카르멘 ‘칠’호는 또 한 번 “악!” 하고 소리를 치며 회장의 팔을 뿌리치고 한편 구석으로 뛰어갔다. 유불란은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따라가면서 유불란은

“카르멘! 이 원한이 가득 찬칼을 받아라! 연애는 유희가 아니라는 것을 너에게 보여줄 터이다. 사랑과 미움이 엉키고 엉킨 이 칼날로——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나는 돈 호세가 아니다. 나는 조선의 탐정소설가 유불란이다. 이와 같이 복면을 했으니까 너는 나를 호세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야. 그러나 카르멘! 하여튼 나는 너를 죽여야만 하겠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유불란이가 아니고 서반아에 살고 있는 돈 호세니까. 돈 호세는 카르멘이란 요부에게 조롱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다. 돈 호세가 지금 카르멘을 죽이러 간다!”

그는 이와 같이 모순된 생각을 가지면서 ‘칠’호를 향하여 걸어갔다. 그는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그때 공포에 쌓인 눈을 부릅뜨고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칠’호는 벙어리 모양으로 “악!” 소리를 치면서, 나란히 앉아서 이 무섭고도 잔인한 살인유희를 구경하고 있는 괴인들 앞으로 달아났다. 그러고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기를 애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무슨 권위 있는 재판관 모양으로 묵묵히 ‘칠’호를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유불란은 그때 한 자루의 단도를 ‘칠’호 앞에 던져주었다.

‘칠’호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던져준 단도를 바라보았다. 점점 넓어지는 그의 눈째우!

‘칠’호는 드디어 유불란의 몸에 매어 달리며 머리를 푹 숙였다. 벙어리처럼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유불란의 허리와 다리를 힘껏 안아도 보고 가만히 쓸어도 보고 하면서 흑흑 느껴 울 뿐이다. 비록 말은 없으나 그러나 천만 번의 말보다 더 힘 있고도 가엾은 애걸이다.

원한에 엉키었던 유불란의 흥분된 마음은 점점 풀려가기를 시작하였다. 유불란은 자기 몸에 매어 달리며 살겠다고 애원하는 그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그의 머리를 정답게 어루만져주었다. 만져 주면서

“여성의 눈물에는 알지 못할 큰 힘이 숨어 있고나.”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카르멘! 나는 차마 너를 죽이지 못하겠다. 비록 네가 이 세계를 멸망시킨 악마라 할지라도!”

그러나 그다음 순간

“아니다! 여성의 눈물에는 거짓이 있다. 속지 마라. 너는 그 거짓의 눈물에 속아서는 아니 된다. 카르멘은 단지 자기의 생명이——그리고 자기의 생명만이 아까울 뿐이다. 어리석은 나, 나는 카르멘을 죽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유불란은 마침내 ‘칠’호를 마루 위에 뿌리치며 잠자코 단도를 손가락질하였다. ‘칠’호의 눈이 단도 위에 멎었을 때, 그는 이미 생의 애착을 포기한 듯이 칼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칼을 견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 한 걸음 물러서고 두 걸음, 두 걸음 물러서고 세 걸음—— 그러나 방에는 담벽이 있었다. 담을 옆으로 걸어서 또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때다! 들창이 바람에 요란스레 덜컹거리며 문틈으로 쏘는 듯이 들어오는 싸늘한 눈보라가 유불란의 얼굴을 스치었다. 유불란은 칼을 높이 든 채 서너 번 눈을 껌벅거려 보았다.

“아! 꿈이 아니고 생시로구나!”

한참 동안 꿈속에서 살고 있던 유불란의 정신이 펄떡 들었다. 유불란은 방 안을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그는 “엣!” 하고 숨을 들이켰다. 회장의 손에는 자기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권총이 쥐어져 있다.

그 순간, 단도를 든 유불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칠’호의 가슴 위로 내려왔다.

“아악!” 하고 길게 뽑는 ‘칠’호의 최후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 이튿날 아침——

어젯밤에 불던 모진 눈보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유리창 밖 마루 위에는 따뜻한 햇볕이 가득히 찼다.

임경부는 잠옷을 입은 채 서재 의자에 걸터앉으며 유리창을 넘어 들어오는 한 줄기의 햇발을 정다운 듯이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문득 고개를 들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아 평화스러운 자연! 어데 죄악이 있으며 범죄가 있느냐! 엄숙한 듯하면서도 한편, 그 부드러운 손으로 우리들을 어루만져주는 자연. 아아, 자연에 굶주린 나!”

40에 고개를 어느덧 넘어선 그는 그의 반생을 인생과 싸우며 지났다. 아니, 인생이 자아내는 모든 죄악과 쌈 싸우면서 걸어왔다. 얼마나 그는 평화를 그리워하였던고!

그러나 그때 그의 자연을 그리워하는 시선이 문득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한 장의 사진을 잡았을 때

“아차! 하마터면——”

하고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직업적 본능이 쏜살같이 발동하기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귀중한 사진!”

하고 경부는 한 장의 카비네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마음은 시퍼런 칼날을 밟는 듯이 선뜻하였다. 그것은 실로 충실한 경찰관이 항상 느끼는 무서운 번민이었던 것이다.

“나 자신이 무서운 살인범이 될 뻔했구나!”

양민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관의 직무요, 죄 없는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그이들의 책임이다. 이 책임과 직무를 충실히 실행하겠다는데 임경부의 경찰관이 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양민을 보호했는고?”

더구나 해왕좌 살인사건과 같이 복잡한 사건에 손을 대일 때마다 그는 과오가 없기를 신 앞에 기도하였다.

“그러나 나 역시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실패를 이렇게 변명하여본 일도 있다. 임경부는 사진을 품에 안을 듯이 부여잡으며

“11월 23일, 오후 9시 34분 이 시각에 나용귀는 좌장을 죽였노라고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거짓 자백이다. 적어도 나용귀는 좌장을 죽인 범인이 아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가여운 나용귀! 조금만 더 기다리라. 나는 너를 구해낼 터이다.”

이렇게 부르짖는 임경부의 얼굴에는 더할 수 없는 희열이 만만했다.

“그러면 좌장을 죽인 자는 누구일까? 몽란이다. 몽란이가 역시 좌장을 죽인 진정한 범인이다. 속아서는 아니 된다. 몽란을 끝없이 사랑하는 유불란, 그리고 몽란을 구해내고자 창작한 탐정극 『가상범인』에 속아서는 아니 된다!”

임경부는 그때 몽란과 유불란에 대한 미움이 마음을 찌르는 듯함을 깨달았다.

“유불란은 몽란이가 범인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용귀가 의성가능자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임경부는 무서운 책임감을 가슴에 품고 한시바삐 서대문 형무소로 나용귀를 찾아가서 그가 한 자백이 거짓이란 것을 자백시키려고 생각하였다.

그때 책상 위의 전화가 요란하게 방안을 울렸다. 경부는 수화기를 들며

“네! 그렇습니다. 임경부요. 뭐——? 밀고장(密告狀)——? 살인이 났다는 밀고장이 왔다? 어젯밤! 어디서? 청량리 뒷산——뭐? 빈 절간에서?”

“음—— 음—— 그러면 지금 곧 갈 터이니 서(署)에는 들르지 않고 곧 현장으로 가마!”

임경부는 분주스레 잠옷을 정복으로 갈아입고 조반도 먹을 새 없이 뛰어나갔다.

임경부는 자동차를 불화살같이 몰며 청량리로 향하였다. 대학 예과 옆을 왼편으로 커브한 자동차는 곧장 임업시험장을 바라보고 달려간다. 그러나 임업시험장을 조금 지난 자동차는 거기서 더 갈 수가 없었다. 임경부는 차에서 내리어 험악한 산비탈 길을 눈 위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쓰러지면서 올라갔다. 길은 좁고도 미끄러웠다.

한참 동안이나 솔밭 새로 꾸불꾸불 기어가는 길은 드디어 임경부를 살인 현장인 빈 절간으로 끌고 갔다. 거기는 벌써 백검사 이하 수 명의 경찰관이 현장을 둘러싸고 서 있는 것을 임경부는 보았다.

임경부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리저리 방안을 조사하고 있던 백검사는

“놀라지 마시오.”

하고 외투 주머니에서 밀고장을 꺼내어 임경부 앞에 내놓았다.

경부는 잠자코 받아들면서 읽기를 시작하였다.


경찰관 제씨께 올리는 네, 이 밀고장은 이 밀고장으로 말미암아 결과되는 이해관계가 소생에게는 손톱만치도 없다는 것을 먼저 경찰 당국 여러분에게 여쭈는 바올시다. 만일 경찰 당국이 소생의 말을 신용치 않고 소생을 찾으려는 데서 당국의 힘의 태반을 허비한달 것 같으면, 그것은 이 사건의 결과로 보아서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란 것을 미리부터 말해두는 바올시다.

단지 소생이 정정당당히 이 살인사건을 고발하지 않고 이와 같이 서면으로 밀고하는 이유는 하등의 이해관계가 없는 소생이 이 살인사건에 공연히 끌리어 들기를 원치 않는 데서 나옴에 틀림이 없소이다.

오늘 아침 다섯 시 반경 해서 소생은 손님을 태우고 (소생의 직업은 운전수올시다) 청량리까지 갔다 오는 도중, 바로 대학 예과 옆 신작로로 얼핏 보면 마치 미친 사람과 같이 허덕거리면서 걸어오는 괴상한 남자를 하나 보았습니다. 이 추운 겨울 아침에 머리에는 모자도 쓰지 않고 외투와 양복을 풀어헤치고 먼 산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걸어왔었습니다.

걸어오면서 그는 자동차를 타겠다는 듯이 양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소생이 놀라움을 마지않은 것은 그의 양손이 붉은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생은 놀라면서도 문을 열고 그 남자를 안으로 모셨소이다. 어데까지 가겠느냐고 하는 소생의 물음에 대하여 그 사나이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마치 잠꼬대하듯이 두어 번 ‘장충단 아파트’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생은 차를 운전하면서 백미러에 비치는 그의 거동을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소생은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소이다. 몹시도 창백한 그의 얼굴에는 마치 살인자와 같은 밑힘 없는 웃음 ─ 공포와 자책이 서로 교착하여 있는 듯한 바보의 웃음이 가득 찼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생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백미러를 통하여 우연히 부딪칠 때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도 다음 순간에는 정신병자와 같이 공연히 소생을 쳐다보며 뻘쭉뻘쭉 웃기를 시작하나이다. 웃다가는 그만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여보, 운전수! 당신은 사람을 죽여본 일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 소생은 또 한번 놀라면서, 그것이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인제 방금 청량리 뒷산 빈 절에서 사람을 하나 죽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소생은 잘 판단할 수가 없으나,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당국에 보고함이 충실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소생은 이와 같이 서면으로 경찰 당국에 밀고하는 바올시다.

임경부가 서면에서 눈을 떼자마자 백검사는 기다리고 있던 듯이 입을 열었다.

“피해자는 해왕좌의 이몽란!”

“뭐, 뭐요?”

임경부는 시체 옆으로 뛰어갔다.

“몽란이다! 틀림없는 몽란이다!”

이 벽력같은 사실에 임경부는 잠시 동안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몽란은 연두색 저고리와 수박색 치마가 피에 젖어서 꺼멓게 변하였다. 쩍 벌린 그의 입에는 마치 무슨 재갈을 씌웠던 것같이 퍼릿퍼릿한 흔적이 양쪽 볼에 남아있었다.

경찰의(警察醫)는 한참 동안 시체를 뒤적뒤적하다가 허리를 펴며

“재갈을 물리웠든 흔적이 이와 같이 보이고 죽은 지가 벌써 여덟 시간은 넘었습니다. 아마 오늘 아침 1시에서부터 3시 사이에——”

하고 임경부를 쳐다보았다.

“물론 타살이 틀림없소. 단도도 보이지 않고, 또 여기 이와 같은 남자의 모자가 하나 있는데─”

하고 백검사는 그때 한 개의 중절모를 경부에게 보이었다.

모자에 상점에서 넣어준 듯한 ‘B,Y’라는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

“임경부, ‘B, Y’라는 이니셜이 누구라고 생각하시우?”

하고 백검사는 의미 있는 듯한 시선을 임경부에게 던졌다.

“음! 장충단 아파트에 사는 유불란! 유불란의 모자에 틀림이 없소.”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이 임경부는 두어 번 머리를 흔들면서

“유불란! 유불란! 몽란을 구해내고자 『가상범인』을 창작한 유불란! 그리고 그를 구해낸 유불란! 그가 죽였다. 그가 몽란을 죽였다?”

지금까지 좌장을 죽인 범인을 몽란이라고 생각해오던 임경부는 생각이 쫙 막혔다.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편집]

그동안 백검사는 방안을 이리저리 조사해보았다. 그러나 별달리 증거가 될 만한 발견은 못 하였다. 방 안에는 몽란의 피 묻은 시체와 그가 벗어놓은 외투와 그리고 유불란의 모자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품도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에 놓여 있던 테이블도 보이지 않고 의자와 화로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마루에는 몽란과 유불란의 발자국인 듯한 구두 흔적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었다.

이리하여 몽란의 시체를 경찰서 시체실로 옮기기로 하고 임경부와 백검사는 산을 내려왔다. 구름과 같이 쌓이고 또 쌓인 의혹과 놀라움을 한 아름 가슴에 품고——

“백검사께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우?”

그러나 백검사는 아무 대답이 없다. 임경부는 다시 말을 이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해왕좌의 좌장인 박영민을 죽인 자는 적어도 나용귀는 아니라고——”

임경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백검사는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뭐요? 나용귀가 좌장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어떤 이유로?”

“물론,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적어도 나용귀가 한 자백은 거짓 자백입니다. 이몽란을 옥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한 거짓 자백——”

“그렇지요. 그렇게 생각해야만 될 증거가 있습니다. 나는 재작일 우연히 몽란의 집을 방문했었는데, 몽란은 외출하고 없어서 나는 문득 좌장의 서재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나는 거기서 우연히 한 장의 건판(乾板)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구운 것이 이 사진이오.”

임경부는 사진을 내보이면서

“하여튼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밀고 나는 곧 서대문 형무소로 가서 나용귀를 만나 보아야겠으니 백검사께서는 경관을 데리고 즉시로 유불란을 체포하여 주십시오. 그가 어젯밤 이몽란과 이 절에 왔던 것만은 사실이니까.”

이리하여 백검사와 임경부는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는 서용(署用) 자동차를 타고 동대문을 향하여 달려간다.

백검사와 경관 두 사람을 장충단 아파트로 보낸 임경부는 그 길로 곧 서대문 형무소로 찾아갔다.

컴컴한 감방 한구석에 수척한 얼굴로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용귀는 간수의 뒤를 따라 긴 복도를 거쳐서 면회실로 들어갔다. 뜻하지 않았던 임경부의 미소를 띤 얼굴이 저편 의자 위에 보이었다.

임경부는 웃는 낯으로 나용귀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자, 앉으시오. 그리고 내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대답해야만 되오.”

하고 수염이 부스스한 나용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 무슨 말씀이라도 물으시오 대답하겠습니다.”

나용귀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다 나란히 얹어놓았다.

“첫째로 당신은 유불란이가 창작한 『가상범인』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고 말했지만, 다시 말하면 첫 방으로 박영민을 죽인 후 둘째 방으로 시계의 추를 쏘았노라고 자백하였지만, 어떤 이유로 당신은 둘째 방으로 굳이 시계의 추를 쏘았소? 생각건대, 무슨 이유가 있었을 줄로 아는데——”

“별달리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올시다. 몽란이가 죽인 것같이 하노라고 첫발로 박영민을 쏜 후, 몽란과 영민의 목소리로 언쟁하는 연극을 한 다음에 나는 일순간 둘째 발을 어데다가 쏠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그리고 아무런 데다 쏘아도 관계는 없겠지마는 아무 목표도 없이 막연히 흰 담벽에다 쏜다는 것이 왜 그런지 하도 무의미하게 생각된 것입니다. 게다가 똑딱똑딱하고 들려오는 초침 소리가 ‘오냐, 아무도 보지 않는 것같이 너는 생각하지만 너의 무서운 범죄를 나는 이와 같이 모다 내려다보고 있다!’ 하는 것 같이 들리기로 그만 그 추를 쏘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올시다.”

나용귀는 이상하다는 낯으로 임경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절대로 그 말에 틀림이 없다는 말이지?”

“절대로 거짓은 여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고 임경부는 잠깐 동안 나용귀를 뚫어질 듯이 바라본 후

“당신은 무죄요! 당신은 박영민 살해사건에 대하여 아무런 죄도 없소!”

임경부의 무거운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 나용귀는 펄떡 놀라면서

“뭐? 내가, 내가 어째 무죄란 말씀입니까?”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치고는

“천만에요! 내가 박영민을 죽였다고 자백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죽였소이다. 내가 박영민을 살해한 범인입니다.”

나용귀의 변명하는 소리를 임경부는 귓등으로 들으면서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서너 번 툭툭 쳤다.

“나 씨, 당신이 거짓 자백으로 경찰 당국의 눈을 속인 죄는 물론 면할 바 못 되나 이몽란을 한량없이 사랑하는 당신의 정성에는 귀신이라도 감복하지 않을 수가 없소. 자기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밀기를 일삼는 이 야속한 세상에서——사랑의 힘이란 그와 같이 힘 있고 굳세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깨달은 것 같소.─ 그러나 법률은 죄인의 대신을 용서치 않으오. 당신은 『가상범인』에 출연하겠다는 것을 승인한 그때부터 벌써 애인 이몽란을 위하여 일신을 희생하겠다고 각오했던 것이오. 게다가 당신은 훌륭한 의성술(擬聲術)을 가지고 있었으니만큼 유불란이가 이몽란을 구하고자 만들어낸 『가상범인』이란 연극을 그대로 실행하여 자기가 범인이란 것을 객관화시키었던 것이오.”

임경부는 거기서 말을 끊고 정신없는 사람과 같이 물끄러미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나용귀를 애처로운 듯이 내려다보며, 애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하는 연애지상주의자의 끓는 정열을 새삼스러이 부러워하면서 한번 빙그레 마음속으로 웃은 다음에 또다시 말을 이었다.

“——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째 피해자 박영민으로 분장한 홍이란 배우의 음성을 흉내 내지 않고 벌써 죽어버린 박영민 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냈는가? 또는 이몽란 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냈는가? 그것은 자기의 위험을 돌보지 않는,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가 바로 진정한 범인이란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한 것에 틀림이 없는 것이오. 그리고 그래도 사람들이 신용치 않는 것을 본 당신은 드디어 스스로 자기가 범인이란 것을 관중에 호소하였소. 그리하여 당신은 어데까지나 『가상범인』이란 연극에다 자신을 맞추어 보려고 애를 썼으나,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수포에 돌아가 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시오. 이 한 장의 사진은 적어도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하여주고 있소. 당신이 암만 자기가 범인이라고 고백하여도 이 사진은 당신을 위하여 한 개의 알리바이(現場不在證明)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오.”

“알리바이?——”

하고 나용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한 장의 카비네를 들여다보았다.

“이 사진은 재작일 박영민의 집에서 발견한 건판에서 구운 것인데, 건판은 피해자 박영민의 소유인 사진기 속에 들어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진이 대체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인제 당신은 좌장이 살해를 당한 시일과 시각을 한 번 더 생각하여 보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쏜 총알이 시계를 깨뜨려놓은 시각을 생각해 보오. 11월 23일 오후 9시 34분에서 시계는 멎어 있었소. 이 시각을 잘 기억하여 두고 내 말을 들어보시오.”

임경부는 잠깐 말을 멈추어서 산란한 머리를 정돈시킨 후

“그런데 나는 먼저 알기 쉽게 결론부터 말해두고자 하오. 당신은 아까 시계 소리가 똑딱똑딱하기에 그만 쏘아버렸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오. 당신은 유불란 씨와 같이 그때 시계가 가고 있었는지 멎어 있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때 당신은 시계를 본 일이 없으니까. 다시 말하면 당신은 맨 처음에 진술한 바와 같이 화장실에 가 있었으니까.——시계라는 것은 본래 진행하고 있는 것이 원칙이니만큼 유불란 씨와 같이 당신도 그때 좌장의 서재에 걸려 있는 시계가 아무런 고장도 없이 똑딱똑딱 가고 있던 걸로만 생각하고 꿈에도 그 시계가 멎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멎어 있는 시계를 보고 똑딱똑딱 하고 있다고 말한 당신의 자백은 거짓 자백이오. 유불란 씨도 몰랐었지요. 그 유불란 씨가 공상으로 그려낸 『가상범인』에다 오직 자기를 맞추어 보려고 한 당신의 자백이 진실할 리가 만무하지요. 그러면 인제 시계가 그때 멎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여보겠소.”

그리고 임경부는 사진을 나용귀 앞으로 밀어놓으면서

“이 사진은 분명히 좌장이 생전에 찍었던 것인데 보는 바와 같이 좌장의 서재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흰 담벽 위에 걸려 있는 이 시계가 지금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가. 9시 34분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걸려 있는 화신백화점의 마크가 박혀 있는 일력(日曆)을 보면, 그것이 11월 23일이란 것을 알아볼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되우? 좌장이 이 사진을 촬영한 것이 11월 23일 9시 34분——알겠소? 당신이 총알로 시계를 멈추어놓았다고 생각하는 그 시각도 11월 23일 9시 34분입니다. 단지 어그러지는 것은 하나는 오후라는 것이 분명한데 하나는 ‘오후’인가, ‘오전’인가 분명치 않을 뿐이오. 이 우연한 일치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우? 만일 좌장이 시계 진행 중에 이 사진을 박았다고 가정하면 오후 9시 34분에는 벌써 시체가 되어버린 좌장이니만치 도저히 촬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니, 그날 오전 9시 34분에 박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오. 그러나 그날 오전 9시 34분에는 좌장이 부인과 함께 외출한 사실이 판명되어 있습니다.”

임경부는 신경을 일일이 가다듬어 가면서 다시 설명을 계속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됩니다. 좌장은 23일에는 오전에도 오후에도 절대로 9시 34분에는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이오. 그러나 이 사진에 박혀 있는 시계는 9시 34분을 가리키고 있으니만큼, 이 시계는 촬영할 때에 적어도 정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 틀림이 없소.”

“그러면 내가 총알로 쏘기 전부터 이 시계는 9시 34분에 멎어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당신이 피스톨로 이 시계를 쏜, 아니 쏘았다고 생각하는 시각이 바로 9시 34분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멎은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고......”

경부는 어서 자백하라는 듯이 나용귀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용귀는 경부의 명석한 두뇌에 감복하는 듯이 머리를 그만 숙이고야 말었다.

“알겠소? 보통 시의 시계의 기능(機能)을 상상하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유불란 씨의 탐정극 『가상범인』의 무대 면과 현실문제인 박영민 살해 현장의 그것과는 이상과 같은 중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가상범인』의 무대장치를 전부 승인하고 똑딱똑딱하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이상, 당신의 자백은 결국 거짓이란 사실이 증명됩니다. 당신도 유불란과 같이 시계는 항상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오. 아무리 당신이 죽였다고 전 세계에 향하여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인 이 객관적 알리바이는 그것을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잠자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용귀의 창백한 얼굴에는 점점 비분의 빛이 떠오르며 무릎 위에 올려놓은 해골과 같은 양손이 부들부들 떨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돌연 고개를 들며

“나는 나는 이대로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몽란을 육체적으로 사랑하겠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이 컴컴한 옥중에서 다만 사랑하는 사람의 환영을 가슴에 품고 일생을 지나는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행복이겠습니까! 경부께서는 몽란을 다시 이 컴컴하고도 쓸쓸한 감옥에다 넣으려고 나를 찾아온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몽란을 다시 옥중으로 보내지 마십시오! 몽란은 나의 생명보다도 더 중한 사람......”

하고 나용귀는 테이블 위에 그만 쓰러지고야 말었다.

“잘 알겠소, 그러나 이제는 그러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소.”

“그것은 그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이몽란은 죽어버리고 말았소.”

“뭐, 뭐요? 몽란이가, 몽란이가 죽었다는 말씀입니까......?”

“어젯밤 청량리 뒷산 빈 절간에서 살해를 당하였소.”

“살해를 당했다......? ”

“아직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으나 가해자는 유불란......”

하고 임경부는 말끝을 그만 끊었다.

“유불란? 그놈이, 그놈이 몽란을 죽였다고요?”

“죽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살인현장에 그의 모자가 남아 있었으니까─”

나용귀는 정신병자와 같이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고 있더니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린 애처럼 흑흑 느끼기 시작했다.

“몽란이가 죽었다니. 거짓말이지요, 거짓말이지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어디 있어요?”

그때 간수 한 사람이 들어오며 백검사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말을 전하였다.

한참 동안 전화를 받고 난 임경부는 하도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이며 분주스러운 발걸음으로 전옥실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전옥(典獄)(감옥)의 승낙을 받고 임경부는 나용귀를 데리고 ◦◦경찰서로 자동차를 몰면서 달려갔다.


의외의 결말[편집]

여기는 ◦◦경찰서의 신문실(訊問室).

유불란은 지금 임경부, 백검사, 나용귀, 그 외 여러 경찰관 앞에서 어젯밤에 자기가 당한 악몽과 같은 괴상한 이야기를 세세히 말한 후 한 번 긴 한숨을 “후” 하고 쉬었다.

“그러나 나는 그 복면한 여자가, 가슴에다 ‘칠’호를 붙인 그 가장한 여자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몽란일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 이와 같이 잔인하고 비참한 일이 또 어데 있으리요? 나는, 나는 이 손으로 몽란을 죽였습니다. 그는 그때 아무 말도 없이─누가 그에게 재갈을 물렸을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나의 허리와 다리를 쓸어 만져보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가 바로 몽란이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나의 자유의사로 죽인 것이 아니고 무서운 권총의 협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서운 꿈속을 헤매면서 행여나 그것이 단지 꿈에 지나지 않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리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일장의 악몽이 아니고 현실이었습니다!”

유불란은 아직도 꿈속의 사람과 같이 사방을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자기를 둘러싸고 묵묵히 앉아 있는 경찰관들의 긴장한 얼굴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치 성난 사자와 같이 노기가 분분한 나용귀의 얼굴, 테이블 위에다 한 장의 사진을 꺼내어놓고 확대경으로 뒤적뒤적 살펴보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백검사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픽 하고 한 번 비웃으면서 말을 꺼내는 임경부의 얼굴을 보았다.

“유불란 씨, 탐정소설과 같은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인제는 어떻겠습니까? 당신의 두뇌가 우리들보다 얼마나 탁월한지는 모르겠소만, 당신은 결국 일개 공상가에서 더 지나지 못합니다. 당신의 명성을 가장 높인 탐정극 『가상범인』까지도 알고 보면 탐정소설가의 공상이지요. 당신의 덕택으로 하마터면 범인을 옥창으로부터 구해내고 도리어 무죄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낼 뻔했습니다. 그리고 인제 또 탐정소설과 같이도 괴상한 이야기를 해서 우리들을 꾀이겠다는 말씀이오? 하, 하, 하핫...... 걸작인데요. 탐정소설가 유불란 씨는 단지 우리 조선만이 자랑할 바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드물게 보는 위대한 작가요, 훌륭한 공상가라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임경부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또 한 번 하하 하고 웃었다.

“뭐요? 그러면 박영민을 죽인 자가 역시 몽란이란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어데 있소?”

유불란은 두 눈을 번쩍 뜨며 테이블 저편에 앉아 있는 나용귀를 쳐다보았다. 나용귀는 터져 나올 듯한 격분을 참는 듯이 가장 엄숙한 어조로

“유불란 군, 자세한 사정은 이직 모르나 군은 너무도 잔혹한 짓을 했다. 자기의 애인만을 죽였다면 또한 모르거니와 군은 나의 애인까지도 죽여버리고 말었다!”

하고 미움이 가득 찬 눈초리를 불란에게 던졌다. 유불란은 어쩔 줄을 모르는 듯이

“나 군, 그것은 군의 오해다! 나는 사실 나의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을 만큼 무척 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피스톨로 협박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임경부를 향하여

“현장에는 사람들의 구두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구두의 흔적이——”

“탐정소설가 유불란 씨는 살인현장에 구두 흔적을 남겨둘 그러한 삼류작가는 아니겠지요.”

“의자가 여섯과 테이블이 하나, 그리고 화로도 한 개 있을 것이오.”

“거짓말은 그만둡시다. 빈 절에 테이블이 왜 있으며 의자가 왜 있어요?”

“길거리에도 사람들의 구두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불란 씨, 연극은 그만두는 것이 어떻소? 일부러 눈보라 치는 밤을 선택한 것은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하고 경부는 또 한 번 픽 웃었다.

유불란은 하는 수 없이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계획적으로 몽란을 죽였다는 말씀입니다그려?”

“물론!”

유불란은 눈이 아찔아찔해지며 앞이 갑자기 감감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그 복면한 사나이들은 어떠한 무리기에 자기를 이와 같이 무서운 모함에다 몰아넣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들 악마의 손에 어리석게도 빠지고 만 자기를 원망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변명할 수 있는 데까지는 변명해보자——

“그러나 만일 내가 계획적으로 그러한 짓을 했다고 가정하면 나는 왜 자동차 같은 것을 타서 이와 같이 자기의 범죄를 폭로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단 말이오? 그것은 계획적 범죄와는 너무도 모순되지를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자동차 같은 것을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이니셜이 박혀 있는 모자를 살인현장에 남겨놓고 오니만큼 살인 후의 정신 상태가 산란했다고라도 설명할까요? 대학 예과 앞에서 당신을 태운 운전수는 당신을 미친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붓끝으론 천만 명을 죽여보았다 하드래도 소설가도 결국은 사람이니까. 소설 속에서 공상적으로 죽이는 것과는 좀 다를걸요.”

“그런 그런 어리석은 이야기가 어데 있겠소? 그래도 나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한 명의 소설가요, 당신은 동서양을 통하여서 탐정작가의 현실적 살인행위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탐정작가, 그들은 결코 사람을 죽일 만한 인종이 못 되는 것이오. 그들은 다만 공상할 뿐입니다. 그들은 겁이 있고 마음이 약하고 그리고 가장 선량한 인종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다소간의 범죄성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할 바가 없거니와 그 범죄성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사람과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 것입니다. 마치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실제적인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견디지 못하여서 전향하는 것과 같이——”

“흥! 혹은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와 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당신은 그와 반대의 행위를 감히 실행했는지 누가 알겠소?”

“뭐, 반대의 행위?”

“그렇지요. 당신은 세상 사람이 잘 쓰고 있는 ‘아모러면’이란 말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모러면 탐정작가가 실제로 사람을 죽일까’——어떻습니까?”

유불란은 지금 천길만길이나 되는 밑 없는 늪 속으로 삐지어 들어가는 자기의 운명을 바라보고 몸서리를 쳤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이 무서운 모함에서 구해낼 수가 있을까? 자기를 이와 같은 모함에다 쓸어 넣은 것은 누구일까. 악마, 악마하고 그는 한없이 부르짖었다.

“유불란 씨, 당신은 어데까지든지 협박을 받아서 꿈결에 몽란을 죽였다고 말하지마는, 내 말을 좀 자세히 들어보시오. 좌장을 죽인 범인이 몽란이라는 것을 당신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소. 그러나 당신은 몽란을 사랑한다. 당신은 자기가 갖고 있는 훌륭한 상상력에 채찍질하여 『가상범인』이라는 연극을 창작하였다. 그리고 연극은 성공했다. 나용귀 씨는 드디어 거짓의 자백을 하였으니까.”

“어째, 거짓 자백이란 말이오?”

임경부는 아까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용귀에게 한 것과 같은 설명을 세세히 한 다음에

“이제 말한 바와 같이 결국 당신은 그때 박영민의 서재에 걸려 있던 시계가 고장으로 말미암아 멎어 있었던 사실을 몰랐던 것이오. 멎어 있는 시계에서 똑딱똑딱 하는 소리가 날리는 만무하니까.”

유불란은 이론이 정연한 임경부의 설명에 대하여 무어라고 변명할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그러면 결국 박영민을 죽인 것이 몽란이라 합시다. 그러나 나는 왜 몽란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오? 무슨 동기로——”

“흥, 당신이 몽란을 죽인 동기를 내 입으로 말해보라는 말이지요.”

하고 임경부는 잠깐 동안 유불란과 나용귀를 절반씩 쳐다본 후

“몽란은 혹은 당신을 더 사랑했을지도 모르나 아니, 몽란 자신도——나 씨의 면전에서 실례입니다만, 나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었지만, 그러나 그 후 몽란의 마음은 점점 변해지기를 시작하였던 것이오. 그는 자기를 구하려고 『가상범인』을 창작한 당신의 노력과 역시 자기를 구하려고 거짓 자백을 하여서 대신 옥중으로 들어간 나 씨의 노력을 냉정한 머리로 비교하여보았을 것이오. 여성에게 있어서 외형미 같은 것은 사랑의 최대조건은 아닙니다. 그들이 사랑하고 동경하는 적은 무엇보다도 남자들의 친절이오. 몽란은 번민하기를 마지않았을 것이오. 몽란은 자기가 범인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동시에 결코 나 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의 마음은 당신에게서 떠나기 시작하여 드디어 나 씨께로 옮아가고야 말았습니다. 질투로 가득한 당신의 심정─”

그때 유불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미친 것과 같이 부르짖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몽란은 어젯밤 열 시까지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 미쓰꼬시(三越)(백화점) 앞에서 서로 헤어질 때까지 그는 나의 입술에다 키스를 하였다. 나는 몽란을 사랑한다. 나는 몽란을 끝없이 믿는다. 누구보다도 믿는다. 그것은 다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靈)의 속삭임이다. 비록 객관적으로 시계의 추가 멎어 있었단들, 나용귀가 박영민을 살해한 범인이 아니란들, 좌장을 죽인 범인은 결코 몽란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나는 신 앞에 그것을 맹세한다. 몽란이가 나용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어떠한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몽란은 결코 나용귀를 사랑하지 않았다. 몽란은 나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다만 나만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나용귀를 사랑하였다고? 저런 악마 같은 자식을 누가 사모해? 저 자식이 범인이다. 악마 같은 얼굴을 가진 나용귀가 바로 박영민을 살해한 무서운 범인이다! 저 자식이......”

“뭐, 어째?”

폭탄과 같은 나용귀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리었다. 노기가 가득 찬 그의 가슴은 드디어 폭발하고야 말었다. 테이블 위로 날아가는 그의 주먹——

“나용귀, 너는 아직 화를 낼 권리가 없다!”

벼락같이 쏟아지는 백검사의 목소리가 또다시 뒤를 이었다. 백검사에게 팔목을 붙잡힌 나용귀의 주먹이 테이블 위에서 공연히 우쭐거리고 있다.

“어째 그러십니까?”

나용귀의 괴인과 같이 추악한 얼굴에는 일순간 파도와 같은 의혹의 그림자가 픽 돌았다.

“손을 내리어라! 그리고 거기 앉어!”

백검사의 수상한 태도에 나용귀만이 아니고 거기 앉았던 여러 경찰관들도 놀라움을 마지않았다. 그때까지 임경부의 취조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확대경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뒤적뒤적하고 있던 백검사는 무슨 이유로 나용귀에게 대하여 그러한 태도를 취하였는고? 사람들은 의심과 호기심을 한 아름 품고 백검사를 쳐다보았다.

백검사는 붙잡고 있던 나용귀의 팔목을 하도 더럽다는 듯이 뿌리치면서

“세상에 너 같은 악인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하고 놀라는 나용귀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자기가 악마라는 것을 스스로 승인할 테지?”

나용귀는 성을 불뚝 내면서

“당신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이 독단적으로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적의를 품은 낯으로 대답하였다.

“그래 독단이 아니라는 것을 네게 다 말해볼 테다.”

하고 백검사는 그의 무서운 두 눈으로 나용귀를 한 번 노려보니 나용귀도 역시 가장 침착한 태도로 반항의 눈초리로 백검사에게 대들었다.

“그러면 말씀해보시오. 당신은 인제 나보고 악마라고 불렀다. 내가 악마라는 것을 당신의 입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한에는 나는 반드시 오늘 밤의 모욕을 갚을 테니까!”

“음! 잘 말했나—— 그러면 먼저 결론부터 말해보자. 너는 해왕좌의 좌장 박영민을 살해한 범인이다. 방법은 유불란 씨의 탐정극 『가상범인』과 꼭 같다. 동기는 네가 몽란에게 사랑을 받아보려다 거절당한 것. 좌장이 너를 독사와도 같이 싫어하고 미워한 것이다.”

그때 나용귀는 픽 하고 비웃으면서

“당신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와 같은 동기에서 해왕좌의 좌장 박영민을 죽였다고 처음부터 나는 정직하게 자백하지를 않았습니까? 그것은 임경부가 사진이 어떠니, 시계가 멎어 있었으니 어떠니 하면서 나에게 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한 것이 아닙니까?”

“응! 확실히 너는 우리들보다는 지혜가 한층 더 앞섰다. 그러나 결국 너는 패부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네가 네 손으로 너의 무덤을 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이제부터 설명해보마.”

백검사는 잠깐 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음과 같은 기다란 설명을 시작하였다.

“너는 유불란 씨로부터 그가 창작한 『가상범인』이라는 연극에 출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너는 그의 상상력이 얼마나 정확하였는지를 알았을 것이며, 따라서 너의 놀라움은 진실로 컸을 것이다. 유불란 씨는 타는 불덩어리와 같은 정열을 가슴에 품고 너무도 노골적으로 네게다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너 역시 유불란 씨에 지지 않을 만큼 대담한 사나이였었다. 그리하여 너는 무대에 서기를 승낙하였던 것이다. 연극의 순서를 따라서 너는 제1탄으로 박영민을 쏘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박영민으로 분장한 배우를 쏘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으나, 그러나 너는 거기서 뜻하지 않은 실패를 하였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너는 의성술을 가지고 있느니만큼 피해자 박영민으로 분장한 홍이란 배우의 목소리를 흉내 냈으면 그만이었을 것인데, 그러나 너는 너무도 충실한 예술가였다.

연극을 하고 있는 동안 너는 너 자신도 저항할 수 없는 예술적 박진성을 전신에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또 한편 폭로적 흥미까지 느낀 너는 되는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에서 연극인지 사실인지를 분별할 수 없을 만큼 너의 정신을 열중하였다.

살인의 혐의라든가 또한 무서운 형벌이라든가, 그러한 속세에서 벗어난 너는 연극에 너무나 충실하였다. 그리하여 너도 모르게 너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그것은 좌장 그 사람의 음성이었으며 몽란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러한 나의 의견을 너는 진심으로 부인할 용기가 있는가?”

그리고 백검사는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나용귀를 바라보았다.

나용귀는 한참 동안 잠자코 있더니 백검사의 실명을 별달리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렇습니다. 사실 나는 맨 처음부터 자백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결론과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물론 중대한 관계가 있다. 그날 밤 무대에서 돌아온 너는 자기의 실책을 얼마나 후회하였던가? 그러나 당국이 너를 체포할 아무 증거도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연극을 계속하는 가운데 자자한 사회의 비난과 무서운 유불란 씨의 눈동자가 점점 두려워졌다. 드디어 너는 교묘한 트릭을 남겨놓고 거짓 자백이란 연극을 하였던 것이다.”

“뭐, 연극이라고요?”

나용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였다.

놀라움에 마지않는 나용귀를 한 번 빗겨 본 후 백검사는 담배를 한 개 붙여 물고 말을 이었다.

“그다지 놀라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한 거짓 자백이란 한 막의 연극에는 또 한 가지 중대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표현기교(表現技巧)가 바로 그것이다. 자기의 일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표현——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불란 씨에게 흘러가고 있던 몽란의 사랑을 네게로 돌려놓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실패되고야 말았다.”

“어째 그렇습니까? 그것은 모순된 이론입니다. 내가 자백을 하여서 몽란이가 무죄 방면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몽란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응,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자기에게 누명을 씌우려던 너를 몽란은 물론 마음껏 미워할 테다. 그러나 몽란이가 너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네게는 더욱 좋다.”

“그게 대관절 무슨 말씀이오? 너무 명론이 되어서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소.”

“모를 리가 어데 있어? 몽란이가 너를 저주하고 너를 미워할 수가 있는 것은 네가 살인죄로 옥창에서 신음하고 있는 동안뿐이다. 네가 결국 무죄 방면이 되어 깨끗한 몸으로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생각 못 해? 자기에게 살인죄를 씌웠다고 원망하던 몽란은 도리어 네게 대하여 동정의 마음을 금치 못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몽란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대신에 네가 진정한 범인이란 것은 알지 못하였던 때문이다. 물론, 자기는 박영민을 죽인 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를 범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자기를 대신하여 감옥에 들어갔던 사나이를, 그리고 그것도 결국은 수포에 돌아가고 법률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다시 이 세상에 나오게 된 사나이를 몽란은 결코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미리부터 나는 무죄 방면이 될 줄 알고 자백을 하였다는 말입니다그려?”

그때 백검사는 미움에 찬 시선을 던지며

“뻔뻔한 질문은 그만두어! 대체 이 사진을 누구가 박었다는 말이냐?”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며 사진을 움켜쥔 백검사의 주먹이 테이블을 ‘쾅’하고 쳤다.

나용귀는 뜻밖이라는 듯이 놀라며

“하하! 내가 박었다고 말씀하는 것같이 들립니다그려?”

하고 빙글빙글 웃는다.

“물론!——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말미암아 너는 임경부를 속였다. 이 사진은 유불란 씨의 탐정극 『가상범인』을 그대로 승인하고 자백한 네게 객관적 알리바이를 충분히 제공하였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말미암아 이익을 보는 자가 대체 누구냐? 너다! 임경부는 이 사진을 보고 너를 옥창에서부터 구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 사진은 임경부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판이하다. 이것은 박영민 씨가 생전에 박은 것이 아니고 그가 살해를 당한 후 며칠 있다가 박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네가 무대 위에서 드라마틱한 자백을 하기 전날 네 손으로 박은 것이다. 알겠으면 순순히 항복을 하는 것이 어떠냐?”

백검사의 얼굴에는 더할 수 없는 승리의 빛이 떠돌기를 시작하였다. 임경부와 유불란 그 외 여러 경찰관도 뜻하지 않았던 백검사의 설명에 한편으로는 놀라며, 또 한편으로는 기뻐함을 마지않았다.

“항복이구 머이구 임경부가 아까 이 사진을 가지고 와서 시계가 멎어 있었으니 나의 자백이 거짓이라고, 그리고 나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임경부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한 것이 즉 너 자신이란 말이다. 이 사진을 보아라. 너의 간계를 내가 설명할 테니.”

하고 백검사는 나용귀보다도 임경부에게 설명하겠다는 듯이 사진을 테이블 한복판에 당기어놓았다.

“자, 이 사진을 보라.”

하고 백검사는 설명을 계속하였다.

“이 사진을 보면 시계 밑에 걸려 있는 화신백화점의 마크가 붙은 일력이 십일월 이십삼일 ─ 다시 말하면 좌장이 살해를 당한 날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사진을 촬영한 날이 십일월 이십삼일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화신백화점의 상표가 붙어 있는 일력이 경성 시내에 단지 한 개밖에 없다면 모르거니와 적어도......”

백검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용귀가 초조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그것과 꼭 같은 다른 일력을 걸어놓고 11월 23일을 펼쳐놓은 후 사진을 박았다는 말씀입니다그려?”

“암, 그렇구말구! 그러나 너 역시 귀신이 아닌 하나의 사람이었다. 이 렌즈로 자세히 사진을 살펴보라.”

하고 확대경을 나용귀에게 던진 후

“자세히 보면 테이블 위에 금붕어 그릇이 놓여 있는 것을 너는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금붕어 그릇에는 두 마리의 금붕어가 떠 있을 것이다. 한 마리는 전신이 새빨갛고, 또 한 마리는 흰점이 박히어서 얼룩얼룩하다. 너는 좌장이 살아 있을 때부터 책상 위에 놓인 이 금붕어 그릇에 두 마리의 금붕어가 들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 마리가 다 전신이 새빨간 금붕어였다. 두 마리 가운데 한 놈이 죽어버리고 흰 점이 박힌 얼룩얼룩한 농을 대신으로 사다 넣은 것은 좌장이 살해를 당한 이후의 일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네가 무대 위에서 흉측한 거짓 자백을 한 바로 이틀 전이다.”

그때 나용귀는 낯빛이 갑자기 변하면서

“뭐요?”

하고 고함을 치고 한 번 더 렌즈를 사진 위에 갖다 대었다.

“너는 트릭 사진을 찍을 적에 시계와 일력(日曆)에만 주의를 하노라고 금붕어 그릇 가운데 그와 같은 중대한 변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나용귀는 천천히 머리를 들며 자신이 만만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그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이 사진은 확실히 좌장이 살해를 당한 후 박은 것에 틀림이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이 사진을 박은 자가 바로 나 자신이란 것은 무슨 증거로 단언하십니까?”

그 말에 백검사는 만면에 넘칠 듯한 미소를 띠면서

“사실 네가 좌장의 서재에 숨어 들어가서 이 사진을 박는 것을 본──”

하고 백검사는 잠깐 나용귀의 악마와 같은 추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제 자기의 입에서 떨어질 한마디의 말로 말미암아 자신이 만만한 나용귀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는지, 그것이 볼만하다는 듯이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러나──어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네가 사진을 찍고 있는 모양을 본 사람이 하나 있다는 말이다.”

“누구입니까?”

“너 자신이다!”

“나 자신?”

“그렇다! 너 자신이 보고 있었다. 모르겠으면 렌즈를 가까이 대고 자세히 보라. 너의 악마와 같은 얼굴이 담벽에 걸린 거울 속에 박혀 있을 것이다!”

“뭐, 뭐요?”

하고 부르짖으며 나용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으면서 손에 들었던 렌즈를 또 한 번 눈에 대었다. 놀란 것은 다만 나용귀뿐만 아니라, 임경부와 유불란도 일시에 일어서며 테이블을 둘러쌌다. 백검사는 다시 말을 이으며

“네가 만들어놓았던 교묘한 알리바이는 이 우연한 현상으로 말미암아 그만 깨지고야 말었다.”

그러나 나용귀는 아무 말도 없이 정신을 잃은 사람과 같이 히쭉히쭉 웃기를 시작하였다.

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전화의 종소리가 요란히 방안을 울리었다.

백검사는 빠른 솜씨로 수화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가장 긴장한 낯빛으로 귀를 기울이며 가늘게 들려오는 전화 소리를 엿들어보려고 애를 쓴다.

“아, 박 군인가? 응응, 그래서...... 뭐? 잡았다? 음! 뭐? ◦◦ 복수단의 잔당? 아, 그런가...... 나용귀도 ◦◦ 복수단의 일원? 음─ 이상하다고 나도 생각은 했지만...... 두 주일 이내로...... 그런가! 하여튼 급히 돌아오게!”

한참 동안이나 전화를 받고 난 백검사는 가장 흥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시작하였다.

“나는 오늘 아침 경찰 당국에 밀고장을 보낸 운전수를 괴상히 생각하여 시내에 있는 자동차 운전수를 전부 조사하여보라고 김 순사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지금 걸린 전화에 의하면 서대문 ◦◦ 자동차 부에서 박병국이라는 괴상한 운전수를 한 명 붙들었다는데, 필적이 밀고장의 그것과 대개 흡사하므로 즉시로 엄중히 취조한 결과 어젯밤 조선은행 앞에서 몽란을 태웠다는 운전수, 그리고 오늘 아침 청량리에서 유불란 씨를 태우고 온 운전수인 것을 자백하였습니다.”

백검사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 그러나 그들이 10년 전 00 복수단(복향단復響團)의 잔당이라고야 꿈엔들 생각하였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 복수단이라는 단체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복수를 서로서로 협력하여서 수행합니다. 갑은 을을 위해서 복수를 합니다. 그러니만큼 표면적으로 복수의 동기가 암만 농후하다 하더라도 제각각 본인은 형벌을 피할 만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용귀가 ◦◦ 복수단에 가입한 것은 그가 해왕좌 무대 위에서 자백한 바로 전날입니다. 두 주일 이내로 자기가 무죄 방면이 못 되는 날에는 이몽란을 죽여달라고, 그리고 유불란 씨! 당신의 손으로 몽란을 죽이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살인 혐의를 씌우려고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때 격노의 가득 찬 불란의 얼굴과 빙글빙글 조소하고 있는 마귀와 같은 나용귀의 얼굴이 무서운 힘으로 테이블 위에서 서로이 엉키었다.

그 순간 불란의 몸뚱이가

“악마!”

하고 고함치는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나용귀를 향하야 날아갔다.

“악마 악마 악마!”

미친 사람과 같이 부르짖으며 덤비는 불란의 모양을 멍하고 바라보고 있는 나용귀의 입에서는 멀거니 바보와 같은 무시무시한 웃음소리가 하도 유쾌함에 흘러나리기를 시작하였다.

“하하하하 어리석은 자식! 하하하, 하........... 자기 손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계집을 죽이고 하하하하. 불란, 만족하겠지. 그만했으면 만족할 테지! 어리석은 자식! 하하하하......”

“악마!”

하고 불란이가 달려들려고 한 그 순간

“이 악독한 놈!”

하고 임경부가 주먹을 들은 그 순간이었다.

들창을 열자마자, 마치 나는 새와도 같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날아나가는 나용귀의 몸뚱이——.

“앗!”

하고 사람들이 고함을 쳤을 때에는 나용귀의 몸뚱이는 벌써 4층 꼭대기에서 차디찬 페이브먼트(포장도로) 위에 떨어졌을 때였다. 사람들은 창밖을 나려다 보았다. 희미하게 비치는 전등 밑에서 사람들은 비참한 나용귀의 최후를 보았다.

밤은 점점 깊어간다. 묵묵히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귀밑에는 나용귀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남어 있는 듯하였다. 백검사와 임경부는 “휘” 하고 긴 한숨을 지었다. 불란은 눈을 감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나용귀에 대한 미움도 없고 동정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애욕’이라는 관념만이 구름 덩이 같이 떠오를 뿐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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