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불량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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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丙周)는 오늘 밤에도 사람의 물결에 휩싸여 창경원 문 안으로 들어섰다. 비 개인 뒤의 창경원 안은 깨끗하였다. 먼지를 먹으러 오는지, 꽃구경을 오는지 까닭을 알 수 없을 만큼 번잡하던 창경원 안의 사람도 깨끗하여 보였다. 속취(俗趣)와 진애에 젖고 물들었던 꽃과 불은 오늘 저녁만은 꽃다웠고 불다웠다. 병주는 지는 꽃잎이 서늘한 바람에 약간 휘날리는 꽃 밑으로 식물원 편을 향하고 천천히 걸었다.

구경꾼은 여전히 많았다. 그러나 대개는 새 얼굴이었다. 그는 야앵(夜櫻)이 열린 뒤로 일주일을 두고 하룻밤도 빠지는 일 없이 저녁밥만 먹으면 발이 이곳으로 저절로 놓였다. 이것이 그에게는 이 며칠 동안의 값 헐한 향락이었다. 쓸쓸한 집에 들어 있어서 쓸데없는 궁리만 하는 것보다, 이곳으로 와서 꽃구경, 불구경,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 그에게는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었다. 어떠한 밤이면 자기 집을 나서면서도 자기를 웃었으나, 가는 발을 멈추어 다른 곳으로 돌이킬 만한 아무 유혹도 그는 마음에 가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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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는 연못가에 밤마다 앉는 벤치 곁으로 갔다. 다행히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연못가엔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물 가운데의 일루미네이션으로 꾸민 탑을 어둠을 통하여 바라보고 섰다. 마치 무지개가 물 위에서 곤두박질 치는 것도 같고, 댄스하는 것도 같다. 병주의 머릿속에도 무지개가 섰다.

그 무지개를 사라지게 할 아무런 빛도 아직 발견치 못한 끄는 눈을 사면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저녁마다 호기심을 갖게 한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병주가 쓸쓸한 집에 있지 못하고 이곳으로 오는 이유가 꽃, 불, 사람, 그밖에 또 하나 있었다. 이 이유는 그 스스로 자기를 속임이나 아닌가 의심할 만큼 어둠 속에 깊이 갈무리해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연못가 벤치에 걸터만 앉으면, 그의 저녁마다 이곳에 오는 이유가 물속의 일루미네이션 탑처럼 분명하고 황홀하게 그의 가슴을 괴고 올라왔다.

젊은 사람들이 다정하게 벤치 앞으로 지나기만 해도 완연히 그 곁에서

“오늘 저녁에도 거기 앉으셨군요.”

하고, 웃음 반 조롱 반 섞인 고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병주는 야앵의 첫날 이 벤치에 앉아서 순영(順英)이가 그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순영이도 병주를 보고는 머리를 숙여 묵례하고, 바로 앞으로 지났다 순영의 뒤에는 . 청년 신사 하나가 따라섰다. 그 두 남녀는 동행인 것을 병주는 바로 알았다.

“어디 가십니까?”

하고 따라 일어서고도 싶었지마는, 같이 가는 사내를 끌며 역시 묵례로 대 답하고 돌아선 두 남녀의 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이튿날 밤이었다. 병주의 우연히 앉은 곳이 그 전날 밤 순영이가 앞으 로 지나가는 그 벤치였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잠깐 다리를 쉴 때이다.

순영이가 또 그 앞으로 지나갔다.

“오늘 저녁에도 또 오셨어요?”

하고, 순영이는 쌍긋 웃었다.

그러나 순영이를 따르는 남자는 전날 밤 그 남자가 아니었다. 전날 밤의 남자보다는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였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종로 근방에서 장사하는 사람 비슷하였다. 이때부터 병주의 순영에 대한 호 기심은 한층 더 올랐다.

“괴상한 여자도 많구나.”

하는 자기 귀에만 들리는 말이 순영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 셋째 날 밤이다. 병주는 이번에는 일부러 이 벤치에 앉아서 오늘 밤에 도 순영이가 오지 않나 하고 그가 지나기를 기다려보았다. 순영이는 또 그 앞으로 지났다.

“또 거기 앉으셨군요.”

하는 말을 웃음과 같이 내던지고 사람 총중(叢中)으로 숨어버렸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른 사람은 첫날, 둘째 날의 그 남자들이 아니요, 이번에 는 조선옷을 입은 오입쟁이 타입의 말쑥한 젊은이였다.

이와 같이 병주는 엿새 되는 밤까지 이 벤치에서 순영이를 만났고, 만날 때마다 그 여자를 따르는 남자가 달라졌다. 그리하여 야앵이 있는 동안에 병주가 이곳에 와서 순영이와 그 뒤따른 남자를 보내고 이상히 여기는 것이 그에게는 한 가지의 일과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병주는

“오늘 밤이 야앵의 마지막인데, 저 여자가 어떠한 녀석을 이번에는 달고 오나?”

하고, 여시(餘時) 앉았던 그 벤치에서 그들을 기다려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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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영이가 벤치 앞으로 지날 시간이 벌써 지났다. 그러나 순영이는 웬일인 지 보이지 않았다. 병주는 일과의 하나를 거저 넘긴 것같이 섭섭한 생각이 났다 이상스럽게도 오늘 . 밤에는 창경원 안 고자리 끓듯 움직이는 많은 사 람 중에서 아는 사람은 하나도 만나지 못한 것이 그를 더욱 쓸쓸하게 하였 다. 병주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어 발 앞으로 연못을 향하여 걸을 때에,

“김 선생!”

하는 소리가 바로 귀 곁에서 딱총처럼 폭발하였다. 그는 깜짝 놀라 머리를 돌이켰다. 거기에는 순영의 웃는 얼굴이 진달래꽃을 배경 삼고 나타났다.

“웬일입니까?”

하고, 병주는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웬일이셔요?”

하고, 순영이는 반문한다. 그리고는 방긋 웃는다.

“같이 오신 분은?”

병주는 이렇게 물으며 순영의 뒤와 옆을 살폈다.

“오늘은 혼자예요…….”

“혼자라니 말이 되나요?”

“말 안 될 것이 무어야요?”

“대관절 웬 셈이시오? 밤바다 창경원 야앵은 혼자 맡아 보시니…….”

병주는 마음을 놓은 듯 순영의 앞으로 가까이 섰다.

“대관절 선생님은 웬일이세요? 밤마다 연못가 벤치를 가시기리かしきり를 하시니…….”

순영이는 야앵을 가득 담은 눈을 병주의 발등에다 쏟았다.

“혼자 오면 심심찮으시우?”

병주는 조금 빈정대었다. 빈정대는 말이 순영에게는 한 기회가 되었다.

“오늘 밤에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요?”

하고, 순영이는 연못 가운데의 일루미네이션 탑을 바라본다.

“그러면 오늘은 내 차례란 말인가요?”

병주는 웃었다.

“병주 님은 입버릇이 나빠요……. 저리로 가시지요.”

하고, 순영이는 병주의 손목을 끌듯이 손을 앞으로 내놓는다.

아무리 밤이기로서니 순영의 끄는 손에 끌려가기는 너무나 창피한 생각이 나서, 병주는 자진하여 앞을 서서 연못가를 떠나 화창포(花菖浦) 밖 언덕 조용한 길로 들어섰다.

“선생님! 왜 저녁마다 그 벤치 위에서 녹으세요?”

“녹다니?”

“아주 얼빠진 사람같이 그렇게 앉으셨어요?”

“얼이 빠지다니?”

“누구를 기다리시느라고 정신을 놓고 앉으셨어요?”

“기다리는 게 다 뭐요?”

“그러면 왜 그렇게 날마다 거기에만 앉으셨어요?”

병주는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뱃속을 내다보인 것 같았다. 아무리 호기심 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이유이었든지 간, 그 자리에서 사람을 기다린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당신의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앉았던 것이다.’ 말 하기도 창피하였다.

“우연히 내가 앉았을 때마다 당신들이 그리로 지나간 게지요…….”

하고, 병주는 웃어버렸다.

“참 우연한 일도 퍽 많아요. 어쩌면 그렇게 거의 일주일 동안을 두고 그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었어요. 오늘 저녁에 조금만 시간이 틀렸다면 그 우 연을 놓칠 뻔했지요.”

“오늘 저녁도 우연입니까?”

하고, 병주는 짐짓 물었다.

“아이구! 참 내 말이 헛나왔어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지요……. 저…… 김 선생은 거기에서 우연히 저를 만나셨지만, 저는 김 선생이 꼭 그 자리에 계실 줄 알고 왔다고 그러면 말이 되지요.”

“괜한 말씀을 자꾸 하시는구려!”

“선생님! 그 자리를 떠나서 이렇게 다니셔도 괜찮으세요?”

“괜찮지 어때요?”

“실망할 사람이 있지나 않아요? 만일 그렇다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그리고 저는 두 분의 좋은 동무가 되어드릴 터이니까! 걱정 마시구요.”

병주는 듣기가 거북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말씀은 그만두시오.”

하고, 앞만 보고 발을 천천히 떼었다.

병주는 같이 걸으면서도 그 뱃속에는 웃음과 의심이 가득 찼다.

병주가 순영이와 서로 면대하게 된 지는 벌써 이 년 전이다. 어느 음악회가 끝난 뒤의 다과회 석상에서였다. 순영이가 시내 어느 음악학교를 마치고 나서 처음으로 출연하게 된 날 밤이었다. 병주는 주최자 측으로 이 악사들을 접대하게 되어 인사말 외에 별로 순영이와 이야기를 길게 나눌 겨를도 없었지마는, 참으로 순진한 여성 예술가로 장래가 믿음직하다고 순영에게 대하여 다소간 촉망하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뒤 일 년이 못 되어 그 여자는 어떠한 색마 재산가의 애첩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였지만, 순영이가 악단에 도무지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세상에 내놓을 면목을 그가 잃어버린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병주는 가석(可惜)한 일이라고만 여겼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삼 개월 전에 순영이를 일본 활동사진관에서 우연히 또 만나게 되었다. 그때에 순영이는 어떤 남자와 동행이 된 모양이었다. 자리가 마침 이웃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앉게 된 관계로 말을 서로 나눌 경우가 많았다. 곁에 있는 데리고 온 남자의 존재를 아주 잊어버린 것같이 틈만 있으면 순영이는 말을 걸었다. 활동사진의 스토리가 부자연하다는 둥, 배우의 표정이 너무나 교묘하다는 둥, 자기도 활동사진 배우가 되어보겠다는 둥, 조선의 지금 영화는 하나도 볼 것이 없다는 둥, 여러 가지로 말을 하였다.

병주도 그 말에 응하여 그 자리의 말 재료 될 만한 것이면 말을 내기도 하 였고, 대답도 하였다.

첫 사진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에 순영이는 같이 온 남자에게 병주를 소개하여주었다. 여자를 중심으로 두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으나, 물론 그 동안에 무엇을 한 것 같은 것은 좌석이 좌석인 만큼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끝을 엉터리 잡아 그동안 들어오던 소문과 종합하여 그가 어떠한 생활을 하여왔고, 현재 어떠한 생활을 하는 중인지 그것을 대강 추측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음악회에서 보던 그때와는 같지 않았지만, 어느 구석에서인지 아직도 얼마만큼 천진스러운 것이 남아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때 그의 생활이 그 순진을 눌러두기에 너무나 무력한 것을 병주는 짐작하였다. 역시 애석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사진이 끝나고 일어섰을 때에,

“다시 스테이지에 나설 기회가 없겠습니까?”

하고, 병주는 물었다.

“인제는 다 틀렸어요. 저 같은 여자가 스테이지에 나서면 무엇을 합니까? 순결한 악단을 더럽힐 뿐이지요.”

하고, 순영이는 고독에 넘치는 웃음을 보일 뿐이었었다.

순영이를 그렇게 우연히 만난 뒤로는 그의 소식도 듣지 못하다가, 창경원 야앵을 기회로 그가 병주의 벤치 앞을 지나게 되어 다시금 모든 의문과 호기심을 일으킨 것이었다.

병주는 활동사진관에서 만난 그때보다 천양(天壤)의 차이가 있는 오늘의 순영의 행동을 보고는 그를 경멸히 보는 생각도 났지만, 한편에는 평일에 그 여자에 대하여 어떠한 기대에 가까운 마음을 가졌던 만큼 환멸의 비애를 아니 느낄 수도 없었다.

만나서 말하기는 이번이 세 번째이었다. 그러면서도 백년지기나 다름없이, 또는 서로 그리던 사랑 동지처럼 질투 비슷한 말로 놀려대는 심리를 생각하면, 그런 것은 상식만으로는 도저히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주일이나 두고 그 여자에게다 호기심을 두고 연못 앞 벤치에서 벼른 것이 물론 자기 의 실수라면 실수라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에 우연이 되었든 필연이 되었든, 이렇게 만난 이상 자기의 뱃속을 순영에게 뽑힌 그 대가로 지옥이 되었든 천당이 되었든, 오늘 밤만은 그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 의리의 당연한 일이라고 단념 아니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자기의 며칠을 두고 원하던 바이었다.

“순영 씨!”

병주는 아무 말 없이 한참 걷다가 불렀다.

“네…….”

순영의 대답은 매우 기다렸던 것같이 반가웠다.

“더 구경하시겠습니까?”

병주는 순영에게 관계되는 여러 가지 소문, 또는 이 새에 그이 지내는 것, 그동안 어떻게 지낸 것 같은 모든 것을 일일이 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났다. 그리하여 창경원을 나서서 어느 다른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나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을 내면서 그 묻고 싶은 마음을 웃었다. 오늘 저녁에 그 여자에게서 어떠한 유혹을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구경할 것이야 무엇 있나요?”

순영이도 벌써 병주의 눈치를 차렸다.

“그러면 그만두고 조용한 데나 가서 차나 먹지요.”

하고, 병주는 앞을 서서 사람 많은 꽃 밑 길로 나섰다. 순영이도 아무 말없이 뒤를 다라섰다. 병주는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운 생각이 나서 머리를 숙이고 벚나무 밑 컴컴한 곳으로 걸었다. 순영이는 벌써 짐작하고 시치미를 떼며 사람 틈에서 곁눈으로 거리를 지켜가며 빨리 출구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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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와 순영이는 출구에서 다시 만났다. 순영이는 벙긋 웃는다. 병주에게 는 이 웃음이 연극의 첫 막을 무사히 잘 마쳤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병주도 따라 웃었다.

창경원을 나서기는 나섰으나 어디로 정향(定向)은 없었다.

“문밖 절로나 가볼까요?”

다시 창경원 정문 쪽으로 내려오면서 병주가 말을 내었다. 오래 조용히 이야기하는 절이 좋을 것같이 생각된 까닭이었다.

“이렇게 늦은데, 절은요?”

“그러면 청화원(靑花苑)으로 가볼까요?”

“거기도 안 되었어요.”

“그러면 어디로?”

“진고개 근방으로 산보나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그들은 손을 기다리는 택시의 행렬 사이를 지나 전차 정류장까지 왔다. 돌아가는 관람객으로 전차 속이 몹시 번잡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본정 종점까지 걷기로 하였다. 가는 길에도 두 사람 사이에 별로 이야기가 없었다. 황금정 네거리까지 왔을 때이다.

“선생님! 저에게 무슨 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지요?”

순영이가 묻는다.

이것은 무슨 예방선(豫防線)을 펴려는 전제인 줄 병주는 벌써 짐작하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이 여자가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다시 내놓는 것이 얼마만큼 불쾌한 생각이 났다.

“왜 별안간 그런 말을 다져 물으십니까?”

“선생님같이 붓을 가지고 벌어 잡수시는 분들에게는 무슨 말이든지 여쭙기가 좀 거북해요. 어떠한 경우, 어떠한 때에,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하고, 순영이는 지금 내놓은 말을 취소할 만한 정도의 아양 섞인 웃음을 내보인다.

병주는 이 말 듣기가 매우 불유쾌하였다.

“붓으로 빌어먹은 사람이라 해서 말 못 듣고, 이야기 못할 것이야 무어 있겠습니까?”

“노하셨어요? 내 그 말을 취소하지요. 문필 사업에 종사하는 용사들이라고 여쭙지요.”

하고, 순영은 소리를 내어 웃으며 병주의 곁으로 다정히 붙어 선다.

병주는 여우에게 흘린 듯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사람이었다. 매력이 물 흐르는 듯한 어여쁜 여성이었다. 여성 중에도 전날에 장래 를 촉망하던 음악가의 알(卵)이었다. 일주일을 두고 자기의 호기심을 바짝 끌던 순영이었다. 만일 사람만 없으면,

“요 악마야!”

하고 콧잔등이가 톡 , 불거지도록 두 뺨을 두 손으로 눌러주고 싶었다. 순영에게 우롱당할 차례가 자기에게 온 것이 분명하였다.

“오늘은 선생님 차례예요.”

하던 말이 다시 귀밑에서 살아났다.

“요까짓 것이 나를…….”

하는 자존심이 깨뜨려진 소리가 울릴 때에, 병주의 순영에 대한 마음은 정복욕으로 변하였다.

“용사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문필 노동자, 이름 좋은 거지……. 모두 그 런 게야…….”

하고 병주는 속에 바늘을 품은 웃음을 웃었다.

“선생님! 참으로 성내셨군요. 제가 말한 뜻을 오해하셨군요. 선생님이 제 말을 그렇게 몰라주시면 어떻게 돼요, 섭섭해요.”

“노하기는요?”

병주는 나오는 감정을 눌렀다.

그럭저럭 등불이 휘황한 본정통으로 들어섰다. 양편 쇼윈도를 번갈아 보면 서 천천히 걸어서 본정 이정목(二町目)까지 왔다. 병주의 호기심이 정복욕으로 변하던 순간부터 순영의 과거나 현재의 어떠한 것을 듣겠다하는 흥미가 얼마만큼은 떠났다.

그들은 다 같이 다리가 피곤하였다. 다리도 쉴 겸 이야기도 좀 할 겸, 어느 끽다점(喫茶店)으로 들어갔다.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흥미가 병주에게서 깨어진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여러 외국 손이 테이블마다 가득하여 그들 모르는 조선말이지만 병주의 입에서는 잘 나오지 않았다. 순영이만이 비교적 여러 말을 하였다.

병주는 그대로 여기서 갈리는 것이 섭섭하지만, 하는 수 없이 회계를 마치 고 다시 한길로 나섰다.

“선생님! 제 집 모르시지요?”

순영이는 병주를 따라서며 묻는다.

“네, 모릅니다.”

“제 집은 바로 황금정 삼정목(三町目)이니까 잠깐 들러 가시지요.”

“들어가도 관계치 않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어멈 하나뿐이에요.”

“그러면 혼자 사십니까?”

병주는 짐짓 물었다.

“혼자 사는 것이 제일 편하더군요.”

“자유스럽고…… 말썽 부리는 이 없고…….”

“편하다는 것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석한단 말씀이오?”

“선생님의 지금 말씀한 뜻을 잘 알아요. 사내들은 모두 생각이…….”

“생각이 어쨌단 말이오?”

“그것은 나중에 말하지요.”

병주는 갈수록 순영의 태도가 이상한 생각이 났다. 존경하는지, 우롱하는 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아무 말 없이 잠깐 걸었다.

순영이는 병주를 세워놓고 과자전(菓子廛), 과일전으로 돌아다니며 한 보 통이 물건을 안고 나왔다.

“너무 지체해서 미안합니다.”

하고, 또 웃는다. 이 웃음에는 아니 녹을 수 없었다. 역시 웃는 얼굴이 저 절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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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영이는 유리 쟁반을 내놓고, 사 가지고 온 과일을 벗겨 담았다. 병주는 순영의 눈을 피해가며 둘러보았다. 볼만한 문방사우는 없으나, 남아 있는 것이 한 개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순영의 옛날 생활을 말하였다. 아무 말 없이 과일 벗기는 순영이는 어디로 보든지 숙녀였다. 그러나 이방에는 뭇 사내의 발길이 날마다 새로 갈아드는 것이라 생각하매, 병주는 가시방석 위에 앉은 듯하였다. 유리그릇에 소담스럽게 벗겨 담은 과일에서는 식욕을 돋울 만한 향취가 나왔다. 그리고 그 위로는 순영의 향기로운 숨소리가 통하였다.

“변변치 못하지만 좀 잡수세요.”

하고, 순영이는 또 방긋 웃는다.

병주는 아무 말 없이 작은 삼지창에 사과를 한 쪽 꿰어 들었다.

“모두 우연한 일이지요. 제 집에 이렇게 오실 줄은 뜻도 못했어요. 퍽 반가워요.”

하고, 순영이는 배를 한 쪽 들어 입에 넣는다.

그의 이빨은 배보다 더 희었다. 병주의 가슴의 고동은 갈수록 높았다. 여러 가지로 말도 있음 직하더니, 단둘이 이렇게 앉아보니 아무 말도 아니 나오고 말았다.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인제는 순영이 편이 도리어 역습을 한다.

“요전 언젠가 일본 활동사진관에서 만나고, 이번이 처음이지요?”

병주는 웃으면서 말을 내었다.

“네 그런가 , 봐요……. 그런데 저, 선생님! 제가 청할 말씀이 있으니 꼭 들어주세요. 저의 지나간 일만은 제발 물어주시지 마세요, 네?”

순영의 눈은 전등불에 반짝거렸다.

“왜요?”

병주는 이상하여 물은 것이었다.

“지난 일은 제발 물어주지 마세요. 저 같은 사람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 래도 없고, 현재가 있을 뿐이에요. 지나간 일을 알아서 무엇을 하시려고 그 러셔요.”

순영이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한다.

“과거와 미래가 없을 수가 있나요?”

순영이의 말뜻을 병주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기 무렴(無廉)에 지쳐 서 물었던 것이다.

“저는요. 과거를 잊어버리느라고 어떻게 애썼는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미래를 생각지 않느라고 어떻게 욕보는지 알 수 없어도, 아직도 목숨이 붙 어 있는 것은 그것을 믿고 생각하는 까닭이에요. 장래를 어찌하려느냐, 예 전에 어떻게 지냈느냐, 그런 말은 물어주지 마세요. 이런 말을 묻다가 여러 남자들은 저에게서 한 과거가 되고 말았어요.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너무 물으시면 그 사람 가운데에 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에요. 지금 겪은 일, 지내는 일을 이야기나 하셔요. 저는 선생님 뵈온 것이 어떻게 반가운지 알 수 없어요. 보시는 바와 같이 저의 지내는 것은 이렇게 자유스러워요. 이러하다가 내일 죽게 될 것을 알아 무얼 합니까? 기뻐할 일이 있으면 지난 일이 나 오는 일을 걱정할 것 없이 기뻐하는 것이 제게 유익한 일이에요. 그런 것을 기뻐 못하는 그것만큼 손실이에요.”

순영이는 연설투로 한참 지껄였다.

병주는 무서운 생각이 났다. 자기 자신은 도리어 지난 일이나 오늘 일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일이 없었다. 과거를 현재에 이용하고, 현재를 미루어 장 래를 꿈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영의 말과 같이 그렇게 담박하게 지난 일과 오는 일을 잊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악마같이 보였다. 그 러나 오죽하면 저러할 것인가 한 막연한 동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장래와 과거를 아니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지요. 필경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너무나 아프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몹시도 무서우 니까 스스로 그 마음을 마취시키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별안간 토론하는 것 같은 것이 우스운 생각이 났지마는, 비록 순영의 일시 적 허튼 수작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듣기를 병주의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혹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당신네가 보통 생각하는 여자와 저와는 다른 것을 아셔야 합니다. 첫째, 저희들은요, 행동으로 과거나 미래를 부인하니까요. 오늘 가령 백 원이란 돈이 생기지 않아요? 병들 때나 다른 아쉬운 때를 미리 걱정하고 저금을 하지는 않아요. 있으면 있는 대로 그대로 쓴답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그 사람의 마음이 장차 어떻게 변할까 미리 겁을 집어먹고 그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려다가 현재의 기쁨조차 잃어버리고 마는,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는답니다. 그리고 저 남자는 옛날에 다른 여자와 사랑을 한 사람이니까, 현재에는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지 않아요. 현재에 사랑할 마음만 있으면 어떠한 경우에 있든지 사랑하고야 마는 성미예요. 지금 선생님을 이렇게 모시고 온 것이 옛날의 알던 친분도 아니에요. 장래에 무엇을 선생께 의뢰하고 힘입자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지금에 반가운 생각이 나니까 그런 것이에요.”

첩첩이 나오는 말을 병주는 입이 벌린 채 그대로 들었다. 무엇이라고 대답 하여야 좋을는지 몰라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순영은 대답을 구한다.

“나는 암만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걸요. 과거나 미래를 안중에 두지 않는 모든 행위는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만일 그러하다면 충동적 생활을 하는 동물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병주의 내던지듯 한 말이 순영의 비위를 거슬렸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도 스스로 우스운 생각이 났다.

“당신같이 평안 무사하게 이 세상에서 자라난 도련님들은 과거도 생각하 고 미래도 걱정하겠지만, 우리와 같이 한 번 몹쓸 역경에 들었던 이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답니다.”

하고, 순영은 허허 하고 사내 웃음을 웃는다.

병주는 갈수록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여자인 것을 알았다. 그 반면에는 호기심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언쟁하는 사람같이 병주는 얼마쯤 상기가 되 었다. 두 뺨이 후듯한 것을 느끼었다.

“그러니까요. 현재 저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요. 또한 부러워하지도 않아요. 저는 자유예요. 지금 이와 같이 따뜻한 방에서 싫지 않은 남자와 같이 앉아서 재미있게 나의 뱃속을 말하는 것이 좀 기쁩니까? 예수꾼의 말로 하면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에요. 좀 좋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순영의 얼굴에는 열정이 타올랐다. 그의 눈에서는 서치라이트같이 푸른빛이 병주의 얼굴을 쏘아 왔다. 병주는 머리가 휑하게 비애감을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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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순영의 집을 나와서 영락정(永樂町)에서 전차를 기다릴 때는 벌써 열두 시가 가까웠다. 여우에게 홀렸던 것이 란 회한 비슷한 생각이 휑 비인 그의 머릿속에서 저 혼자 곤두박질을 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신이 매력으로 뭉쳐 된 듯한 순영의 모든 것이 그의 마음을 힘 있게 끌고 있는 것을 느꼈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순간순간에 산 다는 무서운 여성에게 과거를 잊어버리지도 못하고 미래 걱정을 놓지도 못 하는 자기가 붙들린 것은 분명히 불길한 운명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도 병주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다만 현재가 있을 뿐.”이란 순영의 말에 몹시도 유혹을 느끼었다.

병주는 그 이튿날에도 순영을 만났고, 사흘 되던 날에도 만났다. 순영이는 자기가 한 말같이 전날의 만났던 것을 생각지 않는 것같이 만나는 그 순간 순간을 행락(行樂)하였다. 병주는 현재가 기쁠수록 장래가 두려웠다. 두려움과 기쁨의 타력(惰力)에 그는 끌려가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러나 아니 만나고는 지낼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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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되는 밤이다. 병주는 순영이를 찾아 그의 집으로 갔다. 자기와 만난 이후로 닷새 동안에 순영이는 별로 바깥출입도 없었다. 병주의 소리가 문간에서 들리면 그는 마루로 나와서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 밤에는 밖으로 나와 맞아들이지 않는다.

“순영 씨!”

하고, 마루 끝에서 불렀다.

아무 대답도 없다. 병주의 부르는 소리에 건넌방에서 안잠자기가 문을 열고 고개만 내밀며,

“낮에 나가서 안 들어오셨어요.”

한다.

병주는 그대로 돌아설까 방에 들어가서 기다려볼까 잠깐 동안 망설이다가,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예전 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담배를 피워가며 한참 앉아서 기다렸다. 그러나 순영이는 삼십 분을 지나도 오지 않고, 한 시간을 지나도 오지 않았다.

병주는 여러 가지로 의심이 생겼다. 자기는 벌써 과거의 사람이 된 것이라 하였다. 순영이는 분명히 현재를 행락하는 중이라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은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빨리 왔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번 며칠의 꿈과 같이 보낸 일을 자기의 마음에서 칠판에 쓰인 백묵 글씨 닦아버리듯 닦아버릴 수는 도저히 없었다. 이러한 의심이 날수록 병주의 가슴에서 모든 기억이 새로워졌다.

그는 기다리다가 못하여 순영의 집을 나섰다. 길을 걸으면서도 순영의 잊어버린 과거의 한 사람 노릇 할 것을 생각하였다. 어쩐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는 마음을 어떻게 결정할 수 없었다. 머리를 숙이고 한참 동안 길로 헤매다가 S극장으로 들어섰다. 방금 사진 영사 중이라 장내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병주는 순영이가 혹 오지 않았을까 하고 부인석을 자세히 살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사진이 끝나고 불이 켜졌다. 병주는 모자를 앞으로 눌러쓰고 부인석을 살폈다. 남자석을 마주 바라보는 편에 순영이가 제비처럼 앉았다. 병주는 반가웠다. 순영이가 고개를 돌려 이곳을 살피다가 병주를 재치 있게 보고 방긋 웃는다. 그 웃음은 너는 아직 ‘과거’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같이 보였다. 병주는 마음이 얼마만큼 놓였다. 그러나 순영의 시선이 어디로 가는 것만은 힘껏 지켰다. 별로 가는 곳이 없었다. 병주는 안심하였다.

종이 울리더니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타이틀이 번쩍거렸다. 병주는 다시 한 번 순영 있는 곳을 보았다. 웬일인지 순영이가 앉았던 자리에서 객석 뒤로 돌아 밖으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병주도 따라 일어서서 관람석 뒤로 돌아 나왔다. 함께 그만 보고 돌아가자는 것으로 짐작한 까닭이었다.

병주는 여자석의 출구에 서서 순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순영이 나오는 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병주는 갑갑하여 차츰차츰 여자석 뒤편 낭하(廊下)로 들어섰다. 벌써 나올 순영이가 아니 나온 이유를 병주는 발견하였다.

순영이는 낭하에서 위아래가 말쑥한 양복장이 청년과 수작이 한참 무르녹았다. 순영이는 자기를 바라볼 때보다 더 매력 있는 웃음 머금은 눈으로 남자를 치어다보고 섰다. 남자는 머리를 돌리고 순영이를 굽어다 보면서 구역이 날 듯한 달콤한 목소리로 설법을 하는 모양이다. 병주는 화끈한 얼굴을 번개같이 돌리고 연극장 밖으로 나왔다. 암만해도 순영의 오늘 밤 태도가 심상치 않을 것을 직각한 까닭이었다.

‘필경 과거가 될 차례가 나에게 오고야 말았나 보다.’

하고, 그는 수줍은 웃음을 홀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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