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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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안이 서울로 이사를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만 6년 전이다.

그 전해 가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불면증을 겸하여 고생하던 나는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혼자서 서울로 올라와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 나의 가족이라는 것은 나의 아내와 아들 하나와 딸 둘(아들과 큰딸은 전처의 소생이다) 이었다. 그 가족들을 평양에 남겨두었는데, 그들 위에는 늙은 어머님이 계셨고, 아직 시집가지 않은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다.

지금껏 평양 있을 동안의 생활방식이라는 것은 어머님의 약간의 토지에서 수입되는 나락과, 미약한 나의 원고료 수입에 의지하여 지탱해왔다. 그러던 것이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병치료를 하고 있게 되매 나의 원고료 수입이 치료비에도 도리어 부족이 될 형편이라 일이 딱하게 되었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맏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맏형께 내가 서울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 어머님을 비롯하여 내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아주기를 부탁 하였다.

그해, 진실로 적적한 과세를 하였다. 잠 못 드는 긴 밤을 외로운 여사에서 새우고…… 흥분되는 일과 음식 등을 의사에게 금지당하였는지라, 이웃집 곁방 등에서 술 먹고 윷 놀고 화투하고 좋아하고 야단들 하는 신구세(新舊歲) 교환절기를 나는 자리에 누워서 눈이 꺼벅꺼벅 밤을 새우고 하였다.

길고 지리한 밤을 새운 뒤에 들창에 훤히 새벽 동이 트면 그렇게 기쁜 일이 다시 없었다. 인젠 낮이로다. 나다닐 수도 있고 사람의 얼굴을 볼 수도 있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낮이로다. 길고 지루하던 밤도 이제는 갔구나.

낮이 차차 기울어오면 인제 장차 이를 밤이 진실로 무서웠다. 이 길고 지리한 밤을 또한 천장을 바라보며 새울 생각을 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의사는 늘 잠 못 자는 것을 걱정 말라고 권고를 한다. 에디슨은 하루에 네 시간씩밖에 안 잤다. 누구는 몇 시간씩밖에 안 잤다. 고금의 온갖 예를 들어가면서 ‘잠이라는 것은 한낱 습관에 지나지 못하지 자지 않을지라도 괜찮다’는 설명을 가하여 안심을 주려 한다. 그러나 과거 30년간을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을 잔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 까다로운 인생은 의사의 그런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불면증이란 것은 괴상한 것으로서, 밤에는 정신이 똑똑한 대신 낮에는 늘 머리가 몽롱하다. 그러나 과거 30년간을 일은 낮에 하고 밤에는 잠을 잘 것 이라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나는, 머리가 몽롱한 낮에 원고를 쓰고 머리가 똑똑해진 밤에는 오지 않는 졸음을 오라고 청을 하고 있다.

불면증은 체험해본 사람이 아니고는 그 고통의 100분의 1도 상상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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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박사의 지도하에 불면증 치료 3개월, 불면증은 인제는 웬만치 완화가 되었다. 자며 깨며…… 숙수는 못하나마 과한 고통은 면하리만치 되었다.

이렇게 되매 나는 나의 가족을 서울로 불러올려서 서울에서 살기로 계획을 정하였다.

원고료 생활을 하려면 서울에서 살림하는 것이 편리하다. 표면으로는 이러 하였다. 그러나 이면으로는 델리케이트한 문제가 나의 가슴 깊이 있는 것이었다.

본시 우리는 3형제로서 내가 가운데요, 3형제의 아래로 막내로 누이가 하나 있었다.

내가 열일곱 살 적에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3형제에게는 각각 적당히 분재(分財)해주셨다. 그러나 누이의 몫은 없었다.

맏형은 장발하였는지라 따로이 살고, 나와 나의 동생과 누이를 어머님이 거느리고 사셨다. 그러는 동안 어머님이 재산을 관할하시며 재산 수입에서 생활비에 충당하고 남는 것으로 약간의 토지를 마련하였다. 물론 그것을 마련한 당시의 어머님의 심산으로서는 그것을 딸에게 주려 하였음일 것이다.

그 뒤에 우리 형제는 방탕을 하였다. 홀짝 다 없이하였다. 이렇게 되매 어머님의 마음은 다시 변하셨다. 어머님은 몇 자려 중에 나를 가장 사랑하셨다. 내가 한 푼 없이 파산을 하매 어머님은 그 약간의 토지를 나에게 주시려고 본시의 예정을 돌이켰다. 그리고 그 토지에 걸리는 입비(세비, 수리조합비, 기타 관할비) 등등을 내게 부담을 시키시고, 감독 등등도 내게 늘 명 하셨다. 본시 입이 무거우신이라, 그 땅을 장차 뉘게 주신다는 말씀은 입 밖에 낸 일이 없으나, 암시는 충분히 하시고 하였다. 언젠가 변변찮은 일로 딸과 다투신 때 같은 때에는 등기와 도장을 내게 맡기시고 집을 나가신다고까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땅을 원하지 않았다. 아버님께 풍부히 물려받았던 재산을 탕진한 몸으로서 무슨 염치에 그것을 곁눈질이라도 하랴. 그것이 거대한 재산으로서 욕심날 만한 거액이면 모르지만 그것을 가지고도‘생활을 위한 원고’를 쓰지 않고는 먹지 못할 이상에는 그만 것을 가져 무엇하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누이도 그때 스물을 지난 처녀로서 재산이란 것이 무엇인지 넉넉히 눈치를 알 처지였다. 누이의 심경도 내게는 번히 들여다보였다. 그 땅이란 본시 자기에게 올 것이었는데 오빠가, 방탕을 하여 재산을 탕진한 탓에 빼앗기는구나…… 이러한 눈치가 늘 역연히 보였다.

어렸을 적부터 내가 매우 사랑해왔고 자기도 나를 퍽 따라서, 어떠한 고집을 부리다가라도 내 말이 떨어지면 즉시로 승복하리만치 나를 따르던 누이인데, 이 눈치를 알자부터 차차 내게 반항을 하며 공연히 앙심을 품는 것이 분명하였다.

집안에는 늘 암운이 떠돌고 있었다. 어머님이 단 한 번이라도 정면으로 ‘그 땅은 장차 너 가져라’하시면 나는 단박에 거절하여 이 암운도 흩어지겠지만 말씀 안 내는 일을 먼저 내가 거절한다면 도리어 그 반대편으로 보 이기가 쉬운 일이라, 먼저 거절할 수도 없고 하여 단지 이 집안에 떠도는 암운에 홀로 혀를 차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내 처자만 서울로 이사를 하게 하여 자연 간단히 내 뜻을 나타내기로 한 것이었다.

과연 아내가 서울로 이사 오라는 내 편지를 받고 그 뜻을 어머님께 여쭈매 곁에 있던 누이가.

“옳다, 그 땅도 이젠 내 것이로다.”

고 농담조로 말하더라고, 대체 그 땅이란 어찌된 땅이냐고 아내는 서울 이사 온 뒤에 내게 물은 일이 있었다.

내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오면 평양의 어머님과 누이는 어머님의 땅의 수입과 누이의 모 유치원 보모로서의 월급으로 여유 있게 지낼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내 이 행동을 매우 좋지 않게 보신 모양이었다.

첫째로는 가장 사랑하시던 아들을 슬하에 그냥 두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그랬는데 그 아들이 자기의 처자만 서울로 끌고갔다는 점이 매우 불쾌하셨다.

둘째로는, 제아무리 서울로 이사를 간댔자 벌어먹지 못할 것으로 보셨다.

몇 달간 공연히 고생들만 하다가 도로 모두 울레줄레 평양으로 내려올 것으로 믿으셨다.

그런 위에 어머님 소유의 땅 가운데 하나는 평양부 발전에 따라서 가까운 장래에 적지 않은 금액의 것이 다시 회복하시리란 마음이 있었더니만치, 내 가 내 처자만 데리고 서울로 간다는 것을 싫어하셨다.

어차피 서울 가서 자리를 못 잡고 도로 내려오리라고 굳게 믿으셨더니만치 이삿짐이 진실로 박하였다.

아내가 자기의 친정에서 해가지고 온 물건밖에 낡은 것(원래가 대갓집이었더니만치 다른 것은 그만두고 유기그릇만 하여도 큰 뒤주로 몇 뒤주가 되었다 이라고는 내 전실) 아내의 것조차 안 주시고, 단지 빅터 유성기와 레코드와 싱거 재봉틀 하나뿐으로서, 좌우간 이사온 날 저녁밥 담아 먹을 그릇조차 없어 사다가 담아 먹었다면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내 계획이란, 어머님의 예상하신 바와 딴판이었다.

좌우간 무턱하고 집을 한 채 월부로 사기로 하였다. 집도 그만하면 정 부 끄러운 집도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차차 내 생활이 자리가 잡히는 동안 누이동생도 출가를 하게 되겠고 출가를 하게 되면 어머님의 땅도 누이에게 완전히 건너가게 될 것이고, 그때쯤이면 내 생활도 자리가 잡혀서 어머님을 모셔다가 안온한 여생을 보내시게 하겠다…… 내 생각은 이러하였다.

사실 나는 어머님과 마주 앉을 적마다 죄송하였다. 부귀를 겸전한 가운데서 나셔서 자라셔서 청년 중년 다 부 귀 중에 지내신 어머님을 나의 과도한 방탕 때문에 늙마에 고생하시게 하는 것이 늘 죄송하였다. 언제 어서 생활의 안정을 얻어서 어머님을 다시 평안히 지내시게 할까. 얼마…… 남은 수 (壽)도 그리 많지 못하실 어머님…… 어머님 생전에 다시 근심 없는 살림을 회복하여야겠다. 이것이 나의 제일 초조되는 바요 근심되는 바였다.

그런데 어머님의 생각은 또한 그와 반대였다. 저것(즉 나)이 넉넉한 데서 나서 자라서 지금 재정에 물려 쩔쩔매며 돌아가는 것이 도리어 민망하신 모양이었다. 이 중년의 아들을 간간 어린애들 몰래 즐겨하는 과일 같은 것을 사다주시는 것을 받을 때마다 도리어 칵 울고 싶었다.

10년 미만에 10여 만 원의 재산과 그 재산에서 나는 수입까지 탕진하였으 며 상당히 질탕히 놀았다. 그런지라 어떠한 고난을 겪을지라도 자작지얼로 원망할 곳이 없을 뿐더러 ‘과거에 그만큼 놀았으면……’하는 단념까지 생기는 나이려니와, 어머님이야 무슨 탓으로 늙마에 저렇듯 마음과 몸의 고생을 하실까.

늘 이 죄 많은 아들을 민망히 보시고 맛나는 음식이라도 생기면 당신은 안 잡숫고 반드시 아들에게 주시며, 부족한 주머니를 털어서 아들의 입을 즐겁게 하시며, 사람 된 의무로서 가족의 의식을 구하기 위하여 하는 당연한 노력을 애처롭게 보시는 그 어머님께 대하여 나는 황송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울로 이사를 와서 월부로 정갈한 집을 한 채 산 뒤에, 우리 가족의 생활은 그야말로 ‘긴장’한 마디로 끝이 날 종류의 것이었다. 집을 한 채 사느라고 어머님께 편지를 하였더니 어머님에게서는 그러면 여름방학 때 딸과 함께 서울로 놀러 오시마 하셨다.

우리의 산 집은 아주 새 집이었다. 이 새 집을 사람 사는 집같이 꾸미려면 상당히 손이 걸린다.

나는 시계와 같이 잠시도 쉼 없이 원고를 쓰고 아내는 끊임없이 항아리 나부랭이며 찬장, 그릇 등속을 사들이며…… 어머님이 서울 오시겠다는 여름 방학이 불과 석 달, 그동안에 집을 사람 사람 사는 집처럼 꾸미느라고 전력을 다하였다.

그 여름 약속에 의지하여 상경하실 때에 어머님은 몸소 가지고 올 수 있는 최대 한도의 짐을 가지고 오셨다. 그러나 일껏 가지고 와서 보매, 그런 것들은 벌써 다 구비되어 있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것을 가지구 왔구나.”

아아, 이 한마디가 얼마나 나를 기쁘게 하였을까. 어머님도 또한 헛노력이 된 것을 도리어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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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어머님은 사위맞이를 하셨다.

딸이 스물을 썩 넘도록 정당한 배우자를 맞지 못하여 근심하시던 그 근심도 인제는 없어졌다.

아들들도 맏아들은 평양 실업계의 거두로 뒤를 근심할 바 없고, 둘째 아들 도 서울로 올라가서 차차 살림이 펴는 모양이요, 셋째 아들도 생활은 이렁저렁 해나가는 모양이요, 단 한 가지 남았던‘딸의 처치’도 되었으매 전혀 전전해 등에 비기면 노후도 펴나가는 모양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나는 어서 이 집의 매수를 끝낸 뒤에 어머님을 모셔오고 자 잉크와 종이를 연하여 소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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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사 온 지 3년째 되는 봄이었다.

그 봄 나는 조선 원고료 생활자에게는 좀 거액이라 할 만한 600원이라는 돈을 횡액으로 잃어버렸다. 집값의 최후 잔액을 치르려던 돈이었다. 그것을 잃었는지라, 다시 반년간 더 지내지 않으면 집값을 완제할 수가 없게 되었 다.

그와 전후하여 평양 누이가 맏아들을 낳았다는 회보…… 또 그와 전후하여 놀라운 소식이 뛰어들었다.

어머님이 중풍으로 위험하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전보가 아 니라 편지로 온 것을 보매 위급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쓰던 원고가 있어서 양일간 더 써야 끝이 나겠으므로 그것을 빨리 마감하고 내려가 보려 하였는데, 뒤이어 염려 없이 되었다는 기별과 의사의 말이 ‘춘추 칠순에 가까운 분으로 그런 위험한 병에서 이렇듯 속히 회복되는 것은 희귀한 일이라’하더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래서 어머님의 병환에는 푹 안심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풍재발이라는 통지가 역시 전보가 아니요 편지로 왔다. 뒤에 상세한 전말을 알아보니 이러하였다.

누이는 그때 해산 직후의 산모라 신경이 엔간히 날카롭게 된 사람이었다.

그런 터라 어떤 날 식모가 좀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고 당장에 내쫓았다. 내쫓았으면 즉시로 대신을 구하여 들였어야 할 것인데 경향을 물론하고 문제 거리인식모난 때문에 미리 식모를 구하지 못하였다.

어머님이 부엌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40년, 50년 전 며느리 시절에 부엌에 나서 보신 뿐 부엌에서투르신 어머님이었다.

게다가 중풍에 넘어지셨다가 겨우 지금은 지팡이 짚고 변소 출입이나 하게 된 병인이었다. 그 위에 산모에게는 하루에 칠팔 회를 국을 끊여주어야 할 것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노라면 자꾸 아궁이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두나.”

이것이 뒷날 어머님의 회상담이었다.

나뭇단을 부엌에 끌어들이고 수도(대문 안에 있어서 부엌에서 꽤 멀다)에서 물을 길어들이고 하루에 칠팔 회를 부엌에 나서야 하니, 칠순 노체에 병환이 없을지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병환 재발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의 체력은 경탄을 지나쳐서 경악할 만하였다. 중풍이란 대체 초발에도 난병이거니와 재발이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고, 어떻게 생명이 유지된다 할지라도 전신불수…… 적어도 반신불수는 될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의 경악할 만한 체력은 그 모든 과정을 모두 건너뛰어 일삭쯤 뒤에는 다시 약간의 부축만 있으면 변소 출입은 가능하도록 되었다. 잘 요양만 하시면 이 병환에서는 온전히 벗어나서 천수를 다할 수 있다고 의사도 드디어 항복을 하였다.

그러나 성격이나 언행이나 온갖 방면이 돌변하였다.

여장부라 하여도 좋을 만치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시던 어머님이 심약한 분으로 변하셨다. 식모에게 물 한 그릇 떠오라는 일이 있어도 명하지를 못하고 탄원하는 형식으로 하신다. 그리고 온갖 일에 나무람이 많고 눈물을 자주 흘리시고 음식을 잡숫는 데에도 귀찮으면 수저 다 내버리고 그냥 손으로 집어 잡숫는 등 전연 다른 분같이 되었다.

“금년에는 서울을 못 오시겠구나.”

금년 여름에 집에 오시기로 되어 있더니만치 매우 섭섭하였다.

아이들이나 평양으로 보내서 병석의 할머님을 귀찮고 기쁘시게 하리라 하였다.

그 여름이 신문 저 잡지 할 것 없이 모두 돌아가면서 원고료 전차를 하여 집값의 최후 잔액을 갚았다.

인제는 이 집은 완전히 내 것으로 되었다.

인제부터는 이 전차한 문채(文債)를 갚기까지는 생활을 극도로 절약을 하여야 하게 되었다.

나는 손꼽아 기다렸다. 생활을 극도 절약에서 통상 시대로 옮기자면 이삼 개월은 걸려야 할 것이다.

그동안에는 어머님의 건강도 썩 회복될 것이다.

그사이 집값으로 뽑혀 나가던 돈이 인제는 떠오르게 되었으며, 어머님을 모셔다가 어머님 보양비로 그것을 전환시키면 될 것이다. 이삼 개월만 더 참자. 호강은 못하시나마 곤궁이야 면하게 해드릴 수 있겠지.

그 어떤 날 평양 누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일 밤 경성 도착하는 차로 어머님을 모시고 상경합니다.’ 이런 뜻의 편지였다.

반갑기는 반가웠으나 너무도 의외의 일이라 깜짝 놀랐다.

변소 출입까지도 부축하는 사람이 없이는 못하시던 어머님의 서울까지 어떻게 오시며 무엇하러 오시나. 좀 더 안정하여야 할 것이어늘…….

게다가 또한 당황하였다.

어머님께는 생활이 곤란하다는 점을 절대로 보이기 싫었다. 그런데 지금 (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원고료 전차를 하였는지라 자그마한 잡지 몇 개에서 들어오는 약소한 금전으로 생활을 극도로 절약하여 지내려는 이 판에 어머님이 올라오시면 큰 탈이다. 곤핍을 안보이자니 불가능한 일이요 보이 면 또한 더욱이나 병중이신 마음에 얼마나 걱정스러우시랴.

그 저녁 정거장에서 어머님을 뵈니 펑펑 눈물만 쏟아지려 하였다. 재작년 상경 때에는 그렇게 원기 좋게 기차에서 내리시던 어머님이 이번은 다른 사람 다 내리기를 기다려서 마지막에야, 그것도 우리 부처와 누이의 부처 네 사람의 부축을 받으시고야 내리셨다. 택시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30여 분이 걸렸다.

상경하신 이유는 간단하고 평범하였다. 나의 매부 되는 사람의 본집은 전라남도 완도였다. 취처 이래 아들까지 낳은 아직껏 본집에 가본 일이 없었 다 유치원 방학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아들과 며느리가 시부모를 뵈러 가는 길이었다. 어머님을 빈집에 혼자 둘 수가 없어서 서울까지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내외는 이튿날 저녁 완도로 향하여 떠났다.

딸과 사위가 완도를 다녀올 동안의 약 1주일간 어머님은 장 눈물이었다.

그의 어린 손주들이 무슨 심부름으로 밖에 나갈지라도 애처로워 눈물이었다. 내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종로 방면으로 가서 서너 시간만 걸려도 눈물이었다.

또한 성격이 놀랍게도 변하였다.

참외 수박 같은 것을 사다드리면 당신이 값을 내시겠다 한다. 경제에 좀 몰리는 관계상 진짓상 같은 데 반찬이 어머님께서는 좀 후하고 애들에게는 좀 박하면 또한 눈물이었다. 뜰아랫방은 쓰지 않던 방이고 건넌방(아이들이 거처하는)에는 빈대가 많고 하여 큰방을 비워드리고 우리는 대청에서 잤더니 밤새도록 당신이 대청으로 나갈 터이니 우리들을 들어오라고 하시다 못 하여 이튿날은 저녁이 끝나자마자 그 부자유한 몸으로 당신 이부자리를 어느 틈에 내다가 대청에 펴놓으신다. 변소에라도 가실 적에 부축해드리려면 미안해하는 기색이 분명하였다.

그 어느 날, 갑자기 당신 주머니에서 돈 5원을 꺼내주시며 한약으로 지금 당신 병환에 맞는 약을 지어다 달라신다. 이것은 과연 나의 실책이었다.

평양에서 올라오실 때에도 아무 약도 없기에 이 병환은 그저 안정 일로밖에는 없나보다쯤으로 여겨두었던 것이었다. 병환 중에 계신 어머님께 약 채근을 받는다는 것은 자식 된 도리에 희한한 일일 것이다. 나는 어머님이 내 신 5원을 도로 드리고 한방 의사를 알 만한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하 여 박모 씨를 알아내어 톡톡히 비싼 약을 지어왔다.

그 약을 잡수어보았지만 어지럼증만 더하지 차도가 없다고 하시면서도 달 여드리는 것이라 잡숫기는 잡수었으나 평양 내려가서는 다시 안 잡수신 모양이었다.

이 병 저 병 겹치는 중에 또 조그마한 부스럼 하나가 목 뒤에 생겼다. 가렵다고 긁으시더니 그것이 저녁에는 벌겋게 되었다. 그래서 고약을 붙여드렸으나 가렵다고 연방 떼버리고 그냥 긁으시는 바람에 이튿날은 더 범위가 넓어지며 뜬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약만 잘 붙이면 도로 삭을 종류의 것이라. 이튿날은 나의 아들을 할머니 뒤에 지키게 하여 떼버리면 다시 붙여드리고 떼버리면 또다시 붙여 드리고…… 이러한 역할을 하게 하였다.

부스럼이 난 지 사흘 만에 완도 갔던 내외가 왔다. 와서 그 밤을 우리 집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어머님을 모시고 평양으로 내려갔다.

일행이 평양으로 내려간 뒤에 나도 무슨 볼일이 있어서 삼사 일간 어디 갔었다.

돌아와보매 아직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대문이 열려 있고 집안에는 아 이들만이 있고 아내는 나를 찾으러 어젯밤 나갔다가 밤 깊어 돌아오고 방금 또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없는 동안에 평양에서 편지 한 장과 전보 두 장이 와 있었다.

먼저 전보부터 보았다. 첫 전보는 그저께 친 것으로 어머님을 대수술을 하니 즉시 오라는 것이요 둘째 전보는 어제친 것으로 왜 안 오느냐,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편지는‘평양 내려와서 목 뒤의 종처를 수술하셨다는데 수술한 자리가 성 가시고 붕대를 풀고 심지를 뽑고 하여 잘못하다가는 큰 탈이 생길 듯 싶다’는 뜻이었다.

정신이 아득하였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순서를 따질 수가 없었다. 가치 시간표를 보니 7시 반에 떠나는 북행이 있었다. 기차는 있기는 하고 아직 5시 반에 지나지 못하니 시간은 넉넉하다.

주머니에는 꼭 기차삯뿐 점심 사먹을 돈도 없었다. 좌우간 정거장으로 나간다고 아이들한테 말해두고 ‘포수클로랄’이라는 강렬한 최면제 한 병을 갖고 그 달음으로 정거장으로 나갔다. 먼저 정거장에 나간다 한들 기차가 먼저 가 줄 리 없건만.

마치 우리 안의 사자와 같이 정거장에서도 잠시를 앉지도 못하였다. 다른 때 기차를 탈 때에는 생각해보지도 않던 일 ─ 지금 이 정거장 안에서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무리 중에 친척의 위독 혹은 사망 전보를 받고 황황히 달려가려니. 태반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기차 안에서는 강렬한 최면제를 먹고 차장에게 평양에서 깨워주기를 부탁 하고 내내 자면서 갔다. 깨면 마음이 지향할 바를 몰라서…….

평양에서 내려서 병원으로 달려가보매 아직 떠나지 않았다.

후두부의 가죽을 죄 뜯어내고 지금 저 붕대 아래는 두개골이 노출되어 있다 한다. 머리와 목 전체를 붕대로 싼 거대한 육체가 답답한 듯이 한 초도 쉬지 않고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몸을 뒤채는 것이었다.

저렇듯 뒤채는 것이 되려 피곤하시지 않을까. 그러나 피곤을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잠든 때 이외에는 저렇듯 몸을 한 초도 쉬지 않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뒤채신다 한다. 침대에서 떨어지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침대의 한쪽은 담벽에 붙여놓고 이쪽으로는 침대 하나를 더 놓았다.

나는 내가 온 것을 알리기 위하여 어머님의 눈이 향하기 가장 편한 쪽에 가 서서 어머님을 찾았다. 어머님은 나를 보셨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맞은편에 무엇이 보이니 그냥 눈을 그리로 붓고 있는 따름이었다. 표정에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로부터 10여 일, 나는 죽음과 고투하시는 어머님을 지켰다. 불면증이라는 특수한 신체 조직을 가지고 있는 나는 병인을 지키기에는 가장 적당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며칠째 되는 날인지, 하도 보기에 민망하였던지 누이가 자기 남편과 한밤을 지킬 터이니 집에 가서 하루 편히 자라고 한다. 그래서 밤들어 누이의 집에 가서 한밤을 자고 이튿날 새벽에 병원으로 가서 누이 내외를 돌려보냈더니 내가 평양으로 내려온 지 여러 날 만에 처음으로 듣는 어머님의 의사 표시가 있었다.

즉 나더러 밤을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 해도 모르고 자고, 서늘해 무엇을 쓰고 싶으나 아무리 불러도 깨지를 않아 하룻밤을 매우 곤란히 지내셨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부터 밤을 남에게 맡겨보지를 않았다.

밤에는 자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정성이 있단들 생리적으로 오는 졸음을 어이하랴. 나 같은 불구자가 아닌 이상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 반드시 다시 일어나지 못하실 어머님을 지키면서, 여기서 때때로 ‘인생’이라는 것의 전면을 보곤 하였다.

일찍이 효도를 해보지 못한 나는 여기서 이 침대에서 다시 생명 있는 신체로는 내리실 길이 없는 어머님께 나의 최초요 최후의 효도를 하였다. 그러 면서 아아, 이것을 어머님이 알아주실까. 이런 쓸데없는 기대를 해보고 하 였다. 그럴 때마다 직후로 몰려 나오는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신다 하면 무얼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생이었다.

아시면 무얼 하느냐. 아시면 도리어 이전 평상시와 같이 민망히 생각하실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기쁘다 생각하시면 무얼 하느냐.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여도 최후에 남는 것은 역시 ‘죽음’이라는 것이다. 어머님이 최후의 봉양을 기꺼이 생각하셔서 지부에 가셔서 나를 부귀하게 해주시리라고 이 간병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님 자신에게 대하여서는 아무 통양 도 없는 바였다. 하루저녁에 얼마씩이라는 돈만 주면 나보다 손익고 나보다 더 충실히 간병할 전문 간병자가 얼마든 있지 않은가.

이 나의 간병이란 것을 정확히 숫자적으로 해석하자면, 첫째로는 전문 간 병인보다 서투른지라 손이 도리어 어머님을 불편하게 하였을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요, 둘째로는 일껏 회복되어가던 나의 건강을 다시 꺾어놓은 데 지나지 못하고, 셋째로는 형으로 하여금 전문 간병인을 두었더라면 지불했어야 할 수당금을 경제하게 하였으며, 넷째로는 전문 간병인의 돈벌이 방해를 한 것…… 이런 것 등등에 지나지 못한다.

다만 내 마음이 행하고 싶은 일을 행한 따름으로서, 어머님이 청한 바도 아니요 희망한 바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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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통 병원의 불친절하고 무지한 것은 조선에서 다 아는 바다.

당시의 어머님의 몸에는 여러 가지의 병이 한꺼번에 밀려 있었다. 제일 급 한 것이 이번 수술한 후두부 봉창이요, 그다음으로 급한 것이 중풍이요, 그 다음으로 중한 것이 당뇨병이었다.

당뇨병에 쓰는 인슐린이라는 주사약은 보통 건강체의 사람에게도 주사를 놓고는 즉시 포도당으로 중화를 시키지 않으면 심장마비가 일기 쉽다. 다른 중한 병을 겸한 환자에게는 좀체 놓기 힘든 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원에서는 어머님의 몸에 당뇨병이 있는 것을 발견해가지고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그러나 어머님의 놀라운 체력은 이 제1회의 인슐린까지 이겨서, 일단 사선을 넘어섰다가 다시 소생하셨다. 그러나 이튿날(내가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입에 따라 넣어드리는 포도당액의 마지막 숟갈을 채 못 삼키시고 마지막 숨을 쉬셨다.

한때는 이 무지한 치료 방식에 대하여 친척들 사이에 말썽도 많았으나, 그것 역시 지나고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혹은 그 때문에 이삼 일간 더 생명이 단축이 되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만약 어머님이 이삼 일간 더 살아 계셨다 하면 무엇 할까. 이삼 일간 더 사셨다면 이삼 일간 더 고통을 겪으실 뿐이었다.

양미간을 늘 커다랗게 찌푸리고 계시던 어머님에게 최후의 호흡과 함께 그 주름살이 없어졌다. 어머님이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나는 당직 의사를 불 러서 모르핀 주사를 놓게 하였다. 모르핀 주사가 혹은 몸에 해로울지는 모르나, 어차피 이 침상에서 다시 산 사람으로 내리시지 못할 이상에는 단 몇 시간이라도 고통을 모르고 지내시면 그 이상 더한 일이 어디 있으랴.

어머님 떠나신지만 3년반…… 지금은 아마 뼈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겠지 그때 수일간 더 살아. 계셨거나 말았거나, 오늘에는 그것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단지 내 마음에 그냥 죄송히 남아 있는 생각은 부귀 중에서 생장하시고 늙으신 어머님을 늙마에 내 탓으로 수년간 빈곤을 맛보시게 하였고, 그러고도 이 못난 아들을 도리어 생각하시고 측은히 여기시던 어머님께 푹 안심을 드리기 전에 어머님을 잃은 점이다. 효도를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온 바도 아니요 효성이 없으면 미물과 같다는 위협 때문에 생긴 마음도 아니다.

안심을 하신 뒤에 세상을 떠나셨다 하여도 역시 마찬가지요 더욱 불안을 느끼시면서 떠나셨다 하여도 또한 마찬가지로서 일단 떠난 뒤에는 그저 다 ‘허무’로 끝막음할 것이니 나의‘생각’은 어머님이 살아 계신 때거나 떠나신 뒤거나 단지 내 욕심 채우기를 위함이지, 어머님을 위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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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을 땅에 묻은 뒤에 나는 다시 무덤을 찾아본 일이 없었다. 살아 계신 어머니이니 내가 범한 죄를 씻고자 성심성의 안심을 드리고자 한 것이지, 떠나신 뒤에 빈 무덤을 찾아 무엇하랴.

불효한 자식이라고 세상이 욕을 할지라도, 그 칭호를 잠잠히 받을밖에는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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