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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목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몇 점이요?」

「스물 다섯.」

「요번에야」

힘맺힌 장대 끝에서 튀어난 골프알은 쏜살같이 둔덕을 넘 어서 오목한 솥 안에 뛰어들기는 하였으나 지나친 탄력으로 하여 볼 동안에 다시 솥을 튀어나와 언덕 아래로 굴러떨이 지고 말았다.

「두 점하니스물 일곱.」

골프알이 코오스의 테두리를 벗어났으므로 말미암아 두 점 을 더한 것이다.

명호는 거듭되는 실수에 혀를 차고 알을 다시 집어다가 제 자리에 놓고 손수건을 내서 이마의 땀을 씻는다. 부드러운 미소 속에 떠오르는 지친 빛을 볼 때 영옥은 너무도 오래 끌어가는 그의 실수에 민망한 생각조차 들었다.

베이비 골프는 역시 마지막 코오스가 제일 지리해서 단 두 사람만의 결전이면서도 벌써 한 시간을 훨씬 넘었다. 코오 스는 쉬운 데서부터 점차 까다로와져서 열째 코오스가 가장 난관이었다. 당초부터 명호에게 유리하던 승산이 별안간 뒤 집혀진 것은 참으로 이 열째 코오스에서였다. 그렇다고 영 옥의 재주가 더 익숙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명호에게 끌 려오자 오늘이 처음이었다. 온전히 그 순간순간의 손의 수 요, 재치여서 처음인 영옥이면서도 익숙한 명호와 거의 같 은 점수로 진행되어 온 것이 마지막 코오스에 들어와서는 도리어 그보다 한 수 앞서 의외의 승패의 결단을 짓게 된 것이었다.

한번 이지러지기 시작한 명호의 수는 빗나가게만 되어 실 수를 거듭하는 동안에 좀체 바른 호흡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솥안 구멍속에 빠져버려야 할 골프알은 번번이 솥을 튀 어나와 언덕을 굴러내려왔다. 알은 알로서 손은 손으로서 피차에 고집을 피우는 셈이었다. 그 코오스 끝나기를 기다 리노라고 울레줄레 옆에 와 선 다른 패들 속에서 명호는 결 연한 표정을 지니고 알을 노리며 장대를 흔들었다.

거의 십분이나 더 지나 스무 점 이상을 거듭하고서야 겨우 판은 끝났다. 지루하던 판에 알이 솥 안으로 굴러 사려졌을 때 영옥은 모르는 결에 박수를 하였다. 명호는 겸연한 낯 에 빙그레 웃으며 오래된 그 자리를 떠나가 경기에 열중하 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코오스 밖 벤취에 걸어앉아 허공을 스쳐 오는 바람을 맞았다. 그곳은 백화점의 오층 위 옥상 정원이어서 도회의 상층을 흐르는 바람이 난간의 기슭 을 스치고는 나무 아래로 흘러들었다. 먼 하늘에 거뿐하게 떠있는 신문사의 경기구도 시원하게 보인다. 다섯층 아래 거리가 불에 얹은 남비 속같이 무덥고 답답한데 비겨 그곳 은 다섯층만큼 하늘에 가까운 천국인 셈이었다. 시원하고 즐겁고 한가들 하였다.

「졌소이다.」

쪽지에 적히운 점수를 속으로 계산하고 나서 명호는 반드 시 실망의 어조가 아니요 차라리 명랑하고 유쾌한 목소리로 영옥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오십 점이나.」

「부러 저주셨지요?」

영옥은 미안한 어조였다.

「그럴 리 있나요. 승부라는 것은 언제든지 본능적으로 최 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연히 이긴 게지요.」

「첫솜씨로는 대단히 훌륭하셨읍니다. 목적하시는 음악의 길도 그렇게 수월하게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술에도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골프와 음악과꼬올 로 통하는 길은 일반일까요. 장구한 세월의 기초의 노력이 없이 무엇이 되겠어요?」

「음악의 길도 천차만층이겠지만 유행가수의 길쯤이야 골 프의 요령과 다를 게 없겠지요.」

「그럴까요.」

영옥의 목표는 손쉬운 유행가수로서의 성공에 있었다. 미 국 출신의 고명한 성악가인 명호의 말을 영옥은 믿고 싶었다.

유행가수의 길쯤이야 골프의 요령과 다를 게 없다고.

「골프에 이긴 듯이 재치있고 묘리있게 목표만 향하고 나 가시오.」

지도는 얼마든지 아끼지 않겠다는 뜻이 말 속에 은연중 포 함되어 있는 듯하여서 영옥은 기쁘면서도 한편 그를 알게 된 당초부터 느껴오는 일종의 무거운 감정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무슨 까닭에 그는 그만큼의 지위로서 초면의 영옥 의 지도를 그렇게 선선하게 맡았던가 하는 의문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그만한 호의와 친절에 값갈만한 무슨 턱과 소 질이 자기에게 있는가 하고 영옥은 생각한 까닭이었다.

「어떻든 유쾌한 승패였소이다.」

명호는 하루의 행락을 마음으로 유쾌히 여기는 듯이 옷소 매에 팔을 넣으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영옥도 자태를 수습 하고 약간 피곤한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골프의 행락은 그 것으로서 끝났으나 앞날의 행사는 결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골프의 승패의 결과는 파를 끌어서 스스로 다음 의 행동을 작정하였다.

「진 때에는 진만큼의 턱이 있는 법이지요.」

명호의 거의 선언에 가까운 말이 들렸을 때에 두 사람은 마침 층계를 걸어내려와 삼층 어귀에 서 있었다. 그 한 구 석에는 악기부가 있었다.

「드려야 할 선물이 있는데」

악기부에 가서 별로 오래 따질 것도 없이 점원에게 분부하 여 고급품 포오터블 축음기 한 대를 골라서 고이 싸도록 이 를 때까지 영옥은 다만 얼떨떨하여서 거의 거동을 눈부시게 바라볼 뿐이었다.

「숙소가 어디신가요?」

점원이 별안간 묻는 바람에 영옥은 하는 수 없이 쪽지 위 에 숙소를 적이 않을 수 없었다. 물건을 배달해 주자는 뜻 이었다. 집이 초라해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로 아무 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숙소를 공교로운 서슬에 그 자리에서 그만 명호에게 알리게 된 것을 속으로 괴롭게 여겼다.

「성악 공부에는 역시 손쉬운 것으로 축음기가 필요하니까요.」

필요한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속으로 은근히 원하고 도 있기는 있었으나 그렇게 수월하게 생길 줄은 짐작하지 못하였다. 너무도 과분의 선물을 미안히 여기노라니 문득 골프에서부터 시작된 오늘의 출발이 결국 이 결과를 위한 그의 성산이 아니었던가 하고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벌써 그 과당한 선물을 받을까 말까 망설일 여유조차 없었다. 점 원과의 매매의 교섭은 간단하게도 끝난 뒤였다.

그 길로 지하층 식당에 내려가 다시 오찬의 대접을 받게 되었을 때까지 영옥의 마음속은 그날의 반성으로 채워졌다.

어차피 속세에 출마하여 적으나마 목표의 야심을 가진 이상 홀로 고결하고 상망하게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요 때로는 텁텁하게 휩쓸리기도 하고 웬만한 정도의 타협이라면 용납 해 들이자고 일종의 속세의 철학으로 배짱을 작정은 한 바 였으나 그러나 오늘의 선물은 아무리 해도 과분하고 부당한 것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현재의 자기의 형편을 가 늠본 것이라면 오히려 견딜 수 있는 것이나 마음속까지 뽑 히운 것이라면 부끄럽고 괴로운 노릇이라고 생각되었다.

서울 올라온 것부터가 불과 달포였다. 한번 접질린 생애를 가지고 새삼스럽게 새 출발을 하기에는 고향이 좁다고 생각 한 까닭에 평양을 등지게 된 것이었다. 기구한 생애는 결혼 에서 시작되었다. 딸의 뜻을 휘어서 어머니는 어떤 성심 아 래에서 결혼을 강제하였으나 그 어머니조차도 결코 행복되 지 못한 것은 결혼한 지 석 달만에 남편이 우연히 세상을 떠났음이다. 결혼 석 달이라는 것은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 어서 어느모로 보든지 불행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편의 거만의 재산에는 손가락 하나 댈 것 없이 영옥은 한 몸을 희생만 당한 채 그러나 개운한 마음으로 친가로 돌아와 버 렸다.

어머니는 못마땅하나마, 이제는 더 딸의 마음을 휘일 수 없었다. 희생을 당하였을지언정 영옥에게는 차라리 생애의 한 기회가 되었다. 본격적인 음악의 길은 철늦은 이제 감히 엄두를 못낸다 하더라도 백 걸음을 사양하여 고른 유행가수 의 길, 그것이 그의 오래전부터 희망하여 오던 길이었다. 그 만의 희망의 길이 아니라 어머니의 행복의 길도 의미하였으 니 성공의 날, 그는 그것으로서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생각 하였다.

몇 달 동안을 망설이다가 굳은 결심을 하고 드디어 낯설은 곳에 배수의 진을 치게 된 것이다. 신문사의 동무 애란을 의지하고 올라온 것이었으나 결국은 외로운 가시길이었다.

애란의 소개로 음악비평가 민수를 알고 민수의 인도로 성악 가 명호를 사귀게 되었다. 명호의 지도로 새삼스럽게 성악 의 근본지식인 호흡법, 발성법, 시창법(視唱法)을 연습해 온 지 몇주일이 되었다. 명호는 믿음직하고 성실한 지도자였다.

그의 말은 별반 거역할 것이 없었으나 오늘의 선물만은 아 무리 생각해도 과만하였던 것이다.

정식의 긴 코오스 동안 영옥은 더 많이 침묵을 지키게 되 었다.

과실을 먹고 차를 마실 때에 난데없는 한 패가 별안간 등 뒤로부터 몰려 들어와서 영옥을 놀라게 하였다. 민수와 낯 모를 남자와의 세 사람이었다. 명호와 단 둘만의 그 자리를 민수에게 보인 것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못되었다. 민수는 위인이 데설데설하고 시원스럽기는 하였으나 그 반면에 경 한 데가 있어서 애란이 처음에 소개할 때에도 특별히 주의 하라고 은근히 귀띔하여 준 인물이었다. 첫째 그의 굵은 알 의 누런 안경이 비위에 거슬렸고 터놓고 선전하는 그의 독 신주의라는 것이 수상하였다.

「소개를 할까요?」

바로 옆 식탁에 자리를 자복 나서 민수는 영옥의 편을 보 았다.

「방송국 문예부의 남구씨. 강남회사 전속가수 박인실씨.」

남녀를 소개한 후 영옥을 마저 그편에 소개하겠다고 벼르 던 남구와 인실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인사의 고개를 숙였다. 이들이 모두 그 방면의 유명한 사람들이며 앞으로 기어 이 길을 같이 하지 않으면 안될 인물들임을 깨닫고 영옥은 일종의 감회와 흥분을 느꼈다.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마치 구면인 듯이 남구는 말을 걸었다.

「명호씨의 지도아래서 공부하시니 어련하실까요.」

「농담은 쉬엄쉬엄 하십시다.」

영옥을 대신하여 명호가 한 마디 갚았다.

「대단히 사무적이어서 미안합니다만 인사드리자 곧 부탁 이 있는 데요.」

남구가 말을 내자 민수가 꾀바르게 그 앞을 채었다.

「실상 내가 먼저 말씀 전하려고 하던 것인데 알맞은 기화 가 없어서오는 달쯤에 신인의 밤의 방송을 연다는 것입니다.」

뒤를 이어 남구가 자세히 설명하였다.

「일종의 앙데팡당이어서 말하자면 방송의 기회 없는 신인 들에게 한 기회를 던져서 출세의 길을 주자는 것입니다. 성 악이나 기악이나 각각장기를 가지고 모여 재주껏 해서 세상 사람의 판단을 받자는 것이지요. 실력의 인정을 받으면 라 디오의 가수로 출세할 수도 있겠고. 혹은 레코드회사에 채 용될 수도 있겠고. 특별히 전선 중계여서 방송국으로서는 대단한 용단이고 신인들에게는 둘 없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영옥씨께서도 한몫 끼어주신다면 국으로서는 영광이겠 다고 민수씨와 의논했던 터인데 의향이 어떠실는지요.」

미처 생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민수가 뒤를 받았다.

「외람한 것 같으나 의향여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술의 세상에는 실력을 충분히 가졌다고 하더라도 항상 기회라는 것이 중요하여서 알맞은 기회를 놓치면 세상에 나설 시기를 영영 잃어버리는 수조차 있는 것이니까요. 이번 기회같은 것은 응당 붙들어야 할 것인데 주저 여부가 있습니까.」

신인의 밤! 너무도 현란한 미끼요 유혹이었다. 영옥은 전신 이 상기되어서 얼떨떨할 뿐이었다. 사실 그것을 놓치고는 다른 기회가 그다지 흔할 것 같지도 않았다. 꿀같이 단 말 은 기쁨과 함께 초조를 가져왔다.

「그러나 실력이 있어야지요.」

하면서 명호를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겸손의 말씀이겠지요.」

민수는 어디까지든지 우겨든다.

「충분히 연습을 해서 나가 보시는 것도 한 수겠지요.」

명호의 한 마디가 영옥에게는 묵직한 선언같이 믿음직하게 들렸다. 다만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그 말이 주는 흥분을 새기고 있었다.

「승낙하였지요. 크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남구는 중대한 교섭이나 마친 듯이 대견한 표정을 띠었다.

「죄없는 유행가수만 늘어간다. 그러지 않아도 수가 많아 서 먹고 살기 어려운데 레코드쟁이 음악가 나부랭이가 제멋 대로 자꾸 맨들어 내노니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고. 팔자 없 는 유행가수가 되었더니 꼴사나워 살 수 있나.」

인실의 암팡진 하소연이 좌중을 보기좋게 휘젓고 찔렀다.

이선진의 무례한 말씨를 영옥은 딴은 그럴 법도 하다고 생 각하고 그 게정꾼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예측하지 않았던 다른 한 폭의 현실이 별안간 눈앞을 가리우게 되면 서 영옥에게는 그것이 또한 반성의 재료가 되는 것이었다.

좌석이 식어진 것을 기회로 명호가 자리를 일어서자 영옥 도 따라서 일어났다. 문간에까지 이르렀을 때에 민수가 와 서 긴한 듯이 영옥에게 은근히 귀띔하였다.

「신인의 밤이 있기 전에 늘 말하던 윤주, 강남레코드회사 문예부장을 만나두는 것이 유리할 것 같으니 그쯤 생각하고 기회를 엿보아두시오. 이건 한마디 충고요.」

영옥은 황망한 마음에 영문을 모르고 우두커니 듣고만 있 었다.

명호와 헤어진 후 저녁때는 되어서 숙소에 돌아왔을 때에 영옥은 말할 수 없는 피곤을 느꼈다. 몸도 피곤하였거니와 마음도 무척 피곤하였다.

노파가 반갑게 말을 걸며 배달된 짐을 내보였다. 명호의 선물 축음기였다.

축음기신인의 밤유행가수의 회견그날의 자극은 너무도 컸다. 마음 갈피갈피 복잡하고 흥분되고 산란하였다.

어차피 돌릴 수 없는 선물이니 하고 풀어서 간직하였던 몇 장의 레코드를 걸었다. 일상 좋아하는 센티스테반의 <뱃노 래>의 멜로디가 고요하게 흘렀다. 이어 오펜바하의 <아름다 운 밤>과 슈베르트의 <세레나아데>를 듣고 있는 동안에 설 레던 마음도 차차 가라 앉았다. 그러나 그 대신 고요한 가 운데서 외로운 정회가 불현듯이 솟아올랐다. 화려하고 복 잡하던 하루의 생활은 간 곳 없고 쓸쓸한 그림자만이 마음 속에 어리워서 서글픈 심회가 가슴을 씹었다.

영옥은 거의 바른 정신없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갈아입 지도 않은 그 옷 그대로 집을 뛰어나와 다시 거리로 발을 돌렸다.

(있을까?)

마음이 적적할 때마다 그는 순도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고집쟁이 순도에게로 그같이 마음이 쏠리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한 간방 구석에서 소설가가 되겠다고 밤이나 낮 이나 들어 엎드려 궁싯거리는 양은 유행가수가 되려고 애쓰 는 자기 자신의 꼴보다도 몇곱절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면 서도 마음은 높고 교만하여서 그 무서운 고집과 자신은 휠 래야 휠 수 없었다. 웬일인지 그 고집이 영옥의 마음을 끌 었다. 고향이 같은 탓보다도 그리울 것 없는 고향의 가정을 배반하고 떠나 무엇을 즐겨 하필 소설가가 되겠다고 객지의 가난한 방구석에서 고생하고 있는 그 꼴이 알 수 없이 마음 을 울렸다. 한 고향같은 객지라고 영옥은 그를 적지 아니 믿었으나 영옥의 목적에 대하여서는 처음부터 반대여서 그 를 거들떠 볼 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영옥의 마음은 더한층 간절히 그에게로 기울어졌다.

어두운 방속에서 부엉이 같이 눈만 빛내고 책상을 노리고 있던 순도는 영옥의 목소리를 듣고도 들어오란 말도 없이 됩데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밖으로 나왔다. 어색한 침묵을 지킨 채 두 사람은 골목을 나와 가까운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늘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마음이 울적해서 정신없이 찾아왔어요.」

연못가 벤취에 이르렀을 때에 영옥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유행가수는 되어서 무엇한단 말요.」

생판 딴소리로 순도는 우겨대기 시작하였다. 영옥은 어이 가 없었다.

「실례의 말이 아니예요?」

「허영같이 해로운 것은 없소. 뭇 사내들과 얼려서 무시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꼴처럼 보기 사나운 것이 또 어디 있 소?」

「반드시 허영일까요?」

영옥은 설명의 도리가 없어서 안타까왔다.

「장차 그것을 수단으로 먹고 살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 나요?」

「공장으로 들어가시오.」

모진 한마디가 영옥의 마음을 후려치는 듯도 하였다. 영옥 은 가슴이 무거워서 한참이나 할 말을 몰랐다.

「말이 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생활 수단으로 가수의 길을 골랐다면 아예 길을 잘못 들었소.」

「잇속없는 소설가 되려는 것이나 가수가 되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단 말예요?」

영옥은 겨우 반박의 말을 찾았다.

「소설과 유행가를 같이 본다면 더 할 말이 없소.」

「가수 되려는 것을 허영이라고 하시면 실리지도 못하는 소설을 쓰노라고 허구한 날 궁싯거리는 것은 대체 무언가 요?」

순도는 벤취를 일어나서 연못가로 한 걸은 나섰다.

「하기는 피차에 그 무엇에 홀리웠나부오. 마치 귀신에게 나 홀리우듯이.」

연못에 던진 돌이 풍덩하고 파문을 일으키자 고기떼가 돌 위에 솟아올랐다. 우거진 나뭇가지에서는 새가 날았다.

「유행가에는 가까운 기회나 있지요.」

연옥도 따라 일어서서 못가로 해서 순도의 뒤를 따랐다.

「실상은 거기 대해서 조금 이야기 드리려고 했는데요.」

나무 그늘 속으로 사라지는 순도의 꽁무니를 영옥은 바싹 좇았다.

「라디오의 신인의 밤이 있다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했어요.」

「내가 아우. 고명한 선생들이 많은데 거기 졸대로 하지.」

뿌루퉁한 그 꼴이 반드시 즐겁게만 생각되지 않는 것은 순 도의 그 말이 영옥을 위한 질투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참 으로 무관심하고 냉정한 태도에서 나온 것인 까닭이었다.

「그렇게 쌀쌀만 하시니 한 고향의 우정이라는 것도 없나 요?」

「예술에 우정이 무슨 아랑곳이요. 예술의 길은 피차에 다 제만의 외롭고 쓸쓸한 길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한 마디의 충고라는 것도 없어요?」

「소설이 유행가에게다 무슨 충고를 한단 말요.」

생각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전신을 던지고 찬바람 도는 그 자리를 한 장의 웃음의 장면으로 변하고 맺힌 심회 를 풀어 보고도 싶었으나 한결같은 그의 태도에는 한 곳도 붙들 데가 없었다.

「끝끝내.」

「내 뒤를 더 따라 오지 마시오.」

「피차에 길이 다르니까.」

순도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늘 속 길을 멋대로 걸었다.

영옥은 홧김에 손이 쥐이는 얕은 나뭇가지를 훑어 나뭇잎 을 되구말구 입에 품었다. 눈물이 빠지지 고였다. 하기는 나 뭇잎이 쓴 까닭이었는지도 모르나.

창립된 후 처음으로 당해오는 공연이라 명호가 거느리고 나가는 음악협회에서는 날마다 회원들이 회관에 모여서 준 비연습에 분주하였다. 전에 그 무슨 회관으로 쓰이던 툇물 림일 듯도 한 두간으로 된 넓은 방에 밤만 되면 이십명이 넘는 남녀회원이 모여들어 각각 맡은 곡조를 익히기에 이슥 할 때까지 떠들썩하였다. 음악협회라고는 하여도 기악보다 는 성악들이 위주여서 독창 사중창 혼성합창이 연주의 주목 이었다. 높고 얕게 조화된 합창소리가 화관 안에서 설빀다 가라앉았다 아름답게 울렸다.

영옥이 그날밤 회관을 찾은 것은 명호의 간곡한 청을 저버 릴 수 없었던 까닭이었으나 옆방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밤>

의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모르는 결에 가벼운 흥 분 속에 잠겨지며 오기를 잘했다고 거듭 느꼈다. 흥분되는 음악적 분위기외롭게 혼잣길을 걸어가는 영옥에게는 그것이 귀한 것이었다. 걸어가는 길에 의혹과 초조만을 느끼던 그 에게 그날밤의 흥분은 확실히 용기를 주고 결심을 새롭혀 주기에 족하였던 것이다. <오펜바하{의 그 고요한 노래가 눈물이 솟아날 지경으로 아름다웠다. 영옥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 곡조의 연습이 끝났을 때 긴장이 풀린 회원들의 수선거 리는 소리가 나며 지휘를 마친 명호가 곁방으로 들어와서 땀을 훔치며 연주의 효과를 묻는 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피 아노 있는 교의에 와서 주저앉았다. 영옥이 수고의 말을 미 처 보낼 여유조차 없이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명호는 금시에 자리를 일어서 영옥의 앞으로 가까이 오더니 얼굴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몸을 굽히며 영옥의 두 손을 잡는다.

무서우리만큼 가까운 불같이 빛나는 그의 눈은 확실히 그 무엇을 구하는 듯이도 보였으나 사람이 피곤할 때에는 그러 려니만 생각하며 영옥은 몸을 피하면서 자리를 냉큼 일어섰다. 그것을 기회로 명호는 영옥의 손을 잡은 채 일순간의 감정을 감추려는 듯이도 날렵하게 회원들 있는 옆방으로 끌 고 들어갔다. 영문을 몰라 두근거리는 판에 초면인 수많은 남녀에게 밑도 끝도 없이 일장의 소개를 하는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놀러오신 동호자 임영옥씨. 앞으론 우리 협회에도 드셔서 회원의 한 사람으로 힘쓰실 분. 여러분의 애호와 사랑이 날로 깊어가길 바랍니다.」

아무 예고도 없었던 다따가의 소개에 영옥은 얼굴을 붉히 면서도 하는 수 없이 몸을 굽혔다.

「오늘밤 일부러 와주신 수고를 회원을 대표해서 감사드립 니다.」

명호는 이번에는 영옥을 향하여 맞서 허리를 굽히면서 미 소를 띠었다.

뭇 시선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무줏거리고 있는 가운데 에서 남자 회원들의 눈살은 유난스럽게도 귀치 않은 것이었다.

「회원이 부족해서 불편을 느끼던 차에 실력 있는 분이 뒤 를 이어 참가해 주시니 명호로서는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됩 니다.」

실력이라는 말도 영옥으로서는 고맙지 않은 것이었으나 회 원되기를 승낙한 적도 아직 없는 것을 마치 벌써 회원인 듯 이들 들추슬러대는 것이 괴로웠다.

「여회원 모다들이는 덴 권선생은 펄펄 나셔. 어디서 찾아 오는지 인물만 골라오시니 솜씨가 놀랍단 말야.」

한 사람의 남자회원이 아마도 농을 겸하여서인지 명호와 영옥을 번갈아 보면서 괘사를 피우니 여자회원 한 사람이 뒤를 받아 명호를 조롱하는 듯 맞장구를 쳤다.

「여회원에게 지나쳐 한눈을 파시다 옥주씨에게 야단날라 구 그러시지. 약혼시대같이 몸가지기 여러운 게 없다는데 가제나 옥주씨 편이 좀 세신 터에바로 말이지 제가 만약 옥 주씨라면 선생의 거동을 그냥 보고만 있진 않겠어요……」

「농이 지난 모양이요.」

명호의 한 마디가 그의 입을 막아버렸으니 망정이지 버려 만 두면 무슨 말이 나올는지도 헤아릴 수 없는 경망한 여회 원의 어세였다.

영옥은 불쾌하였다. 경솔한 여회원의 태도도 이해하기 어 려운 것이었으나 그의 말이 여러 사람에게 줄 인상도 진저 리나는 것이며 그 말의 내용과만약 내용대로라면 명호의 태 도도 불쾌하고 싫은 것이었다.

명호가 여학교 교사이자 피아니스트인 옥주와 약혼의 사이 라는 것은 금시초문은 아니었으나 이제 막상 터놓고 그 사 실을 들었을 때에는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명호의 지 나쳐 친절한 태도는 여회원의 말마따나 한눈을 파는 셈인가. 그렇다면 그 또한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장막 속에 은 근히 가리워졌던 얼크러진 속을 들여다본 것도 같아서 영옥 은 한결같이 불쾌한 심사를 금할 수 없었다. 어느결에 어느 회원이 숨어들어 치는 것인지 이웃방에서는 별안간 피아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무슨 광상곡인가 어지러운 곡 조는 돌연히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면서 수선스럽고 빠르게 울렸다. 마치 자기의 산만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낸것도 같 아서 영옥은 별안간의 그 곡조에 몸이 쏠려짐을 느꼈다.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울리건만 영옥이 돌연히 피아노의 정 서에서 떨어지게 된 것은 회원의 한 사람의 외치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든 까닭이었다.

「옥주씨. 옥주씨가 오셨어요.」

나갔던 회원이 외치며 들어오는 뒤로 옥주가 따라 들어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나타난 옥주는 제 소리를 듣 고 들어온 범인 셈이었다. 방안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하는 그를 초면인 영옥은 복잡한 심정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빈틈없이 반들반들하고 팽팽한데다가 안경까지 쓴 그 얼굴을 영옥은 다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명호도 옥주의 앞에서는 온전히 기맥이 없어서 그의 눈짓 을 받자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한마 디 말도 없이 둘만이 옆방으로 들어갔다. 필연코 그 무슨 의론이 있으려니는 짐작하면서도 영옥은 그 거동이 도무지 맛같지 않았다.

「그게 양식인지 무엔지는 모르겠으나 사나운 꼴 작작 보 이구 얼른 결혼해버리지 그래.」

회원들의 눈에까지 날제는 아마도 두 사람의 거동은 보기 어려운 것인 모양이었다.

「집이 돼야 결혼하지. 결혼하자 곧 든다는데 지금 짓는 문화주택이 꼭 구천원이 먹는데 선생이 삼천원, 나머지 곱 절을 옥주가 당한다나. 그러니 터세도 꼭 곱절을 쓸 모양이야.」

「세야 쓰건 말건 구천원짜리 문화주택이면 좋지 머냐. 피 아노는 이미 있는 것 갖다 놀 테구.」

장황한 소문도 귀에 거슬리는 것이었고 도무지가 불쾌한 것 뿐이어서 영옥은 명호가 눈앞에 없음을 차라리 기회로 조금 퉁명스럽게 회관을 나와버렸다.

서글퍼지며 외로운 생각이 등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도 하였다. 명호들의 세상은 결국 그에게는 너무도 먼 것이었 고 세상에는 혼자 걸어나가야 할 외줄기 지름길만이 있는 것이 쓸쓸하게 내다보였다. 그날밤 회관을 찾은 것이 뉘우 쳐도 졌다.

이튿날 명호가 찾아온 것은 영옥에게는 의외라면 의외였다. 아침도 일찌기 집도 수월하게 찾아서 뜰안에 들어선 것 을 바라보니 명호였다.

「왜 오셌어요?」

어리석은 질문이나 영옥으로서는 중대한 문책이었다.

「어젯밤엔 실례가 많았으나그러나 왜 모르는 결에 말도 없이 오세요?」

「무슨 낯짝을 들고 더 있으란 말예요?」

협착한 방안에 맞아들이기도 괴로워서 영옥은 옷을 쉽게 갈아입고 명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다따가 소개는 왜 하시구 회원이라구는 왜 추스르세요.

승낙한 적도 없었는데.」

「그게 노여우셌나요……워낙 소소리패들이라 입들이 수다 스러워서 짖어들대다가 불쾌하게 해드린 모양인데 앞으론 충분히 주의시킬 테니 과히 허물마세요.」

「안예요. 선생의 태도 그것부터가 불쾌하단 말예요.」

하고 뒤미처 호되게 반박하고도 싶었고 구천원의 문화주택 과 피아노의 생활과는 저는 인연이 너무도 멀어요 하고 윽 박아대고도 싶었으나 다시 생각하면 모두가 쓸데없는 말 같 아서 영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한 비꼬움이 웬일인 지 일종의 질투에서 나오는 것 같고 명호들에게 대하여서 질투를 느낄 아무것도 없음을 차게 반성은 하면서도 모순된 자기의 심정을 제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선생들의 처지와 제 처지와는 거리가 너무도 멀어요. 선생의 현재 처지로는 제게 지나친 후의와 친절을 보이 시지 말아야 해요. 이미 작정된 행복의 길을 살리세야 하잖 아요.」

「그런 그런 쓸데없는……」

「안예요, 그렇구 말구요. 어젯밤 회원의 말마따나 지금 한 눈을 파시는 건 선생으로선 금물이 안예요?」

「그건 오 오해요. 한눈을 파느니 무어니 그런 말로 표시 할 감정이 아닌데.」

흥분된 서슬에 손을 와서 덤석 잡는다. 그 무슨 간절한 감 정을 하소연하려는 것도 같다.

「어떻 너무 가깝게 하시진 마세요.」

잡히운 손을 징긋이 빼면서 영옥은 순간 부질없고 끝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애정 위에 애정을 구하고 사 랑위에 또 사랑을 바라서 그칠 줄 모르는 마음사내의 마음 이란 그렇게도 무한한 것일까. 철없이 꾀없이 허둥허둥 쫓 아오는 명호의 손에서 냉정한 마음으로 몸을 막고 빼쳐야 할 것이 도리어 자기편임을 생각하고 영옥은 냉정한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이 왜 하필 남자편보다도 여자편이어야 하나를 슬퍼하였다.

「제발 앞으론 지나친 후의는 끊어주세요.」

「영옥씨 영옥씨……」

여전히 외치면서 쫓아오는 명호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영옥은 앞만을 곧게 내다보면서 들은 체 만 체 혼잣길을 재 게 걸었다.

이제는 벌써 외가닥의 나갈 길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외줄 길에 대한 열정이 불현듯이 곧게 솟아올랐다. 그 열정은 물론 명호와의 사이에 실망과 환멸을 느끼게 되므로 인한 서글픔과 고독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나 그러므로 마치 외줄기의 천사와도 같이 날카롭고 곧은 것이었다.

명호에게서 뿌리치고 온 그 길로 영옥은 거리에 들어와 단 골 찻집에 들렀다. 거기에서 민수를 만난 것은 더없는 기쁨 이었다. 물론 그가 이미 그곳에 있을 줄을 뻔히 짐작하고 온 것이었으면서도 우연히 만나게 된 것 같아서 대담스럽게 기뻤던 것이다. 조금 찹찹스런 그 독신주의자를 그때까지 꺼려온 영옥이언만 그 당장에서는 그는 벌써 자기를 구해줄 주인공과 같이도 반갑게 보였다. 지금에는 벌써 붙들고 솟 아오를 생명의 줄은 그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탁자에 마주앉자마자 다짜고짜로 첫마디의 사정이었다.

「라디오 방송 신인의 밤에 나가보기로 결심했어요.」

불현듯이 열정이 복돋은 외줄의 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 이던 것이다. 마음속에 싸두 었던 중요한 한 마디를 말해버 렸을 때 영옥은 무거운 짐을 풀어버린 듯이도 개운하였다.

민수는 그 한 마디에 생기를 얻는 듯이 누런 안경을 번쩍이 며 영옥보다도 오히려 이상의 기쁨을 보이는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외다. 그러기를 바라왔고 또 응당 그래야죠. 아시다시피 그런 알맞은 기회는 다시 없고 나가 시기만 한다면 어떻게든지 성공하시도록 뒤에서 일을 꾸며 놓을 작정이었으니까요.」

장황한 설교를 듣고만 있으면 항상 한이 없는 것이기에 영 옥은 급히 앞을 서둘렀다.

「방송국에다 속히 출연 가입 수속을 마쳐놔야 할텐데요.」

「암 하구 말고요. 속할수록 좋을 테니까.」

민수는 마시던 찻잔을 놓고 마치 소년같이 민첩하게 자리 는 일어섰다.

「남구군에게 전화를 걸죠.」

그 자리로 구석편 전화실로 들어갔다.

가게의 차인꾼같이도 고분고분히 분부대로 움직이는 민수 의 자수의 태도가 비굴한 것일까. 그보다도 자기 자신의 태 도가 더한층 비굴한 것이 아닌가.영옥의 심사는 이미 일을 시작해 놓은 그 당장에 있어서도 오히려 갈피갈피 복잡하였다.

전화실을 나온 민수는 벙글벙글 웃으며,

「일이 잘 돼 들어가기는 하는데.」

다시 자리에 앉지 않고 탁자 위의 담배 책자 등속을 주머 니 속에 수습하면서,

「자리를 뜹시다. 오늘 아침 노는 차례라나요,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지요. 거기서 이야기도 하시고 타협도 하시고 ……」

영옥은 굳이 거역하지 않고 자리를 일어서 함께 찻집을 나 왔다. 이제는 벌써 범의 새끼를 잡으려면 범의 굴까지라도 사양하고 싶지 않은 처지였다. 민수와 나란히 서서 거리를 걷는 것이 스스럽지도 않았다.

「녀석 요새 번민이 심한 모양인데.」

담배를 붙여물며 혼잣말이라기에는 좀 크게 중얼거렸다.

「누가요?」

「남구 말예요.」

연기를 내뿜더니,

「아마도 아시겠지만 성악도 하고 피아노도 좀 공부한 유 명한 보패라고 있지 않습니까. 남구와 약혼의 사이었던 것 이 요새 완전히 갈라진 모양이예요. 남구가 사람 잘못 골랐죠. 허영밖에는 없는 여자와 무슨 결혼이 온전히 되겠습니까. 여배우로 행세하기가 평생의 원이라더니 남구도 모르게 어떤 놈팽이와 동경으로 달아났다나봐요. 금시에 결혼할 것 같이 말하더니별 것 아니죠. 남구가 속았죠. 한 가지 재미있 는 사실은 그 놈팽이가 삼천원짜리 백급반지를 보패에게 선 사했다나요. 그 선사에 흘리웠는지도 모르죠.」

보패의 이름은 영옥도 들은 적이 있기는 하나 민수가 그 길에서 왜 하필 그런 소식을 전하는가가 영옥에게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한 조각의 거리의 고십을 전화는 셈일까. 그 렇지 않으면 그 무슨 뜻을 주자는 것일까.

「별 뜻 없죠. 다만 남구가 요새 번민이 심하다는 것을 말 하려는 것뿐이죠. 상처가 대단히 큰 모양인데 마음 보낼 곳 없어 더 한층 쓸쓸한 눈친데요.」

「민수씨에겐 그만한 얘기 한 토막쯤 없나요.」

「없죠 없죠. 품행방정한 청교도인 줄 모르시나요?」

질색을 하고 펄쩍 뛰면서 잡아떼는 것이 영옥에게는 도리 어 우습게 보였다.

삘딩 지하층 그릴에서 남구를 기다려서 세 사람이 식사를 하면서 출연에 대한 타협은 비교적 수월하게 끝났다.

남구는 영옥의 일신에 관한 것을 몇가지 적고 연주할 곡목 을 작성하였다. 영옥이 늘 좋아하고 또 장기인 슈베르트의

<세레나아데>와 브라암스의 <들장미>의 두 곡목이 선택되 었다. 피아노 반주자의 선택은 남구에게 맡기고 그에게서 몇가지의 주의를 들은 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방송이 있기 전 며칠을 기약하고 먼저 시험연주회가 있다 는 것이었다. 그 테스트를 통과하여야 방송에 출연할 수 있 다는 것이나 그만한 실력과 자신은 이미 준비된 뒤이라 영 옥은 방송의 날이 은근히 기다려질 뿐이었다.

「성공하시면 한턱 있어야 합니다.」

남구의 말을 영옥이 대답하기 전에 민수가 가로채어서,

「여부 있겠나. 자네는 자네로서 난 나로써 배후의 원조나 단단히 하세그려.」

식사도 거반 끝났을 때 민수는 차를 저으면서 남구를 찬찬 히 바라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 요새 번민이 과한 모양이야. 얼굴 이 못됐을젠.」

「머 무슨 말을 했단 말인가.」

남구는 별안간 정신이 번쩍 띄이는지 들었던 식도를 놓으 면서 민수를 바로 건너보았다.

「자네 파혼한 얘기 말일세」

「파 파혼한 얘기를 누 누구와 했단 말인가.」

「영옥씨와」

「미 미쳤나 이 사람.」

남구는 금시에 빚을 뻔하며 눈썹이 험해졌다.

「쓸데없이 실없는 소리는 왜 하나.」

「못할 말 무엇인가. 그렇게 허물 되나.」

할 말 따로 있고 말할 처지 다로 있지, 남의 속 일을 그렇 게 함부로 지껄인단 말인가?」

남구의 노염은 예측이상으로 튼 것이었다. 무슨 까닭의 노 염인지 영옥 자신도 그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리 말을 들은 상대자가 자기기로서니 한 구절의 로 맨스의 실패담이 그렇게도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일까. 말을 들은 책임상 영옥의 처지는 딱하고 곤란하였다.

「자네는 자네만 유독 청교도인 척 자처하나 자네 속사정 을 지금 영옥씨 앞에서 얘기한대도 다네 탄하지 않겠나? 인 실과의 얘기, 연희와의 곡절……」

「딴은 그럴 법도 하네. 그만두게. 자, 빌 테니.」

이번에는 민수가 뜨끔하면서 정색을 하였다가 금시에 빚을 풀며 웃음으로 그 자리를 얼버무리려고 하였다.

「윤주와 친한 인실을 가로채인 건 자네가 아닌가.」

민수는 기급을 할 듯이 일어나서 남구에게 손을 모으고 빌 었다.

「제발 살려주게. 그만두게」

「자네가 버린 백화점 연회가 지금 어떤 난경에 있는지를 자네 생각이나 해봤나. 그래두 청교돈가. 못된 청교도. 음흉 한 똔팡……」

민수는 저린 상처를 다치운 듯이도 쩔쩔매면서 하는 수 없 이 남구의 뒤로 돌아가 않고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뜻하지 않은 그 한 토막의 우스꽝스런 희극을 눈앞에 보면 서 영옥은 어안이 벙벙하여 해석의 도리를 몰랐다.

무슨 까닭에 친한 동무인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안달을 하 고 법석을 하는지가 도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의 그 만한 정도의 내막을 들었대야 영옥 자신으로서는 아무 감동 도 자극도 받지 않았고 두 사람에게 대한 인상도 처음과 별 반 다른 것이 없는 것을 수 사람은 헛되이 자기 한 사람을 둘러싸고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결과임을 생각할 때 어리석은 두 사람의 꼴들을 겉으로는 웃으면서 대하나 속으로는 우울하기 짝없었다.

「녀석 말을 그대로 다 믿지는 마십시요.」

입을 풀리운 남구는 마지막 결론이듯이 여옥을 바라보며 민수를 손가락질하였다.

영옥은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피우면서 일부러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음은 한없이 우울하고 답답하였으나 다만 하나 눈앞에 닥쳐오는 목표의 길만을 바라보고 그 큰 것을 위하여서는 역시 그만한 우울의 감정쯤은 억지로라도 희생 해 버리고 말살해 버리려고 생각하였다.

모처럼의 오찬의 뒷맛이 이지러져 버린 것을 아깝게 여기 며 영옥은 식은 차를 단모금 에 마셔 버렸다.

시험연주가 있은 지 며칠 안되어 방송연주의 날이 왔으나 이미 몇차례의 시험으로 배짱을 든든히 다진 후였만 영옥은 그날 유독히 설레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시험연주 때에 벌써 충분한 실력을 보였고 그것이 단지 발라맞춤이든 무엇 이든 간에 관계자들의 지나친 칭찬의 소리를 들어왔건만 막 상 목적의 날을 당하였을 때, 그날은 그날로서의 불안과 초 조가 있었던 것이다.

자기에만 유독히 과한 대접이라고 생각하면서 방송국에서 온 자동차에 남구들과 같이 올라 거리를 달릴 때에 가슴과 머리속에 금시에 그 무엇이 가득 차지며 애써 마음을 가라 앉히려고 할수록 육신은 더한층 굳어 갔다.

자랑스러운 것보다도 근심스러운 것이 앞서며 영광의 자리 가 아니라 도리어 수난의 자리로 끌려가는 듯한 생각이 들 며 차의 요동과 창밖에 흐르는 거리의 풍경의 심상한 한 폭 이 유난스럽게도 순간순간의 마음을 잡는 것이었다. 한 자 리에 앉은 남구와 민수의 격려의 말은 도리어 뜻없이 한편 귀로 흘러버렸다.

다 각각 이런 마음으로 모여 들었을 신인들로 하여 방송국 의 응접실은 방송의 시간을 앞두고 수선거리고 설빀다. 안 타까운 꿈들은 가슴에 품고 닥쳐올 운명의 고패를 바라들 보며 어두운 초조의 빛이 얼굴들을 한 빛으로 칠하였다. 즐 거운 듯이 이야기를 하고 웃고들 할 때 그것은 모두 억지로 꾸민 표정이요 거짓 자세에 지나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남 자들 속에 섞인 몇사람의 여자별수없이 영옥과 비슷한 길을 걷는 처지가 아닐까. 재주조차 팔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느 낌이 그 안타까운 분위기 속에 그 어디인지 들여다보였다.

설레는 속을 떠나 영옥은 휴게실 소파에서 피아노 반주자 와 몇가지의 곡목에 대한 주의를 타협하고 있었다. 타협이 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착한 태도를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어느덧 방송이 시작되어 응접실 확성기에서는 노래가 흐르 기 시작하였다. 방안의 공기도 가라앉은 듯한 고요한 속에 서 누구인지 신인의 목소리가 제법 유창하게 들려옴이 영옥 에게는 일종 신기한 느낌조차 주었다. 가슴이 한층 달떠가 는 속에서 악보에 적힌 노래의 마디를 외우려고 애쓰는 동 안에 확성기에서 흐르는 연주의 인물도 몇차례나 갈렸건만 얼마나의 시간이 지났는지 흥분된 마음에 꿈결같이만 생각 되는 판에 문득 눈앞에 남구의 자태를 발견하고 영옥은 암 시나 받은 듯이 제물에 자리를 일어섰다. 연주의 차례가 온 것이었다. 반주자와 함께 또렷한 정신없이 복도를 걸어가 방송실에 들어가는 걸음걸이조차 약간 떨리는 듯하였다.

「정성껏믿습니다.」

한마디 귀띔하고는 이어서 방송소개를 하는 남구의 말소리 가 먼 바닷속에서 오는 것과도 같이 아련하게 들렷다. 눈앞 의 마이크로폰이 꿈속의 괴물같이 이쪽을 노리고 있는 것을 볼 때 전신이 화끈 달며 머리끝이 솟았다. 그 괴물 앞에 수 많은 사람이명호가 옥주가 민수가 남구가 애란이 인실이 그 외 수천 혹은 수만의 낯모를 사람이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 이 생각되자 몸은 불덩이같이 달았다.

피아노 소리가 떨어지자 또 한 사람 문득 마지막으로 마이 크로폰 앞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순도였다. 공원에서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않은 순도가 그 순간 거리의 어느 구석에 묻혀 있을까가 돌연히 생각나며 그가 부르려는 노래 가 결국 모두 단 한 사람 순도에게 바치려고 한 것임을 새 삼스럽게 깨닫자 그의 그림자가 금시에 눈앞에 활짝 다가오 는 듯도 하여 상기된 몸에다 마음의 열성까지를 부어 영옥 은 사람의 노래의 첫마디를 대담하게 불러냈다. 첫마디가 떨어지자 생각은 생각을 잇고 곡조는 곡조를 낳아 노래는 줄줄이 흘렀다.

순도는 그때 거리의 찻집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우연이 아니라 실상인즉 그날밤의 신인의 밤 방송의 예정을 알아듣고 그렇다고 영옥에게 펴보일 수도 없는 은밀한 마음 으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놓고 맞은편 벽에서 흘러오는 라디오의 소리에 정신을 쏠리고 영 옥의 차례를 조릿조릿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원에서 영옥의 태도를 나무래고 유행가와 소설의 구별을 엄격하게 판단하고 서글프게 헤어진 후 다시 영옥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면서도 실상 그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복잡한 순도의 마음이었다. 유행가를 비웃고 소설의 값을 한층 치하하였건만 아직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하고 있는 순도의 심경이었다.

소설을 생각할수록 소설을 쓰게 되지는 않았다. 참된 소설 은 마음속에 있을 수 있는 것같이만 생각되었고 참된 괴롬 은 가슴속 깊이 묻어 두어야만 옳을 것같이 생각되었고, 참 된 괴롬은 가슴속 깊이 묻어 두어야만 옳을 것같이 생각되 었다. 한번 입 밖에 나오면 글자로 나타나면 그것은 벌써 괴롬이 아니요 소설도 아니요 김빠진 허수아비일 듯이만 생 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소설은 모두 마 음속에 고여 있을 때만이 참된 것이요 한번 소설로 나타나 면 거짓말인 것이다. 차라리 붓을 꺾어 버릴지언정 거짓말 을 써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곳에 그가 소설을 못쓰는 이유 가 있었다.

그러나 한 자도 쓰지는 못하고 허구한 날 궁싯거리고만 있 는 괴롬은 더한층 큰 것이었다. 쓰다가는 꾸기고 쓰다가는 버리고하여 휴지된 원고지만이 책상 앞에 늘어갔다. 화를 내고는 거리에 나와 한 잔 차에 분풀이를 하고 하는 요사이 의 그였다. 안타까운 심정에 영옥의 생각만이 늘어갔다. 냉 정하게 비웃기는 하였으나 소설 못쓰는 자기가 유행가를 부 르려는 영옥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이 생각되었다. 쌀쌀하 게 그를 떨쳐버린 것이 마음에 저리게 뉘우쳐졌다. 부질없 이 냉정하게 군 것은 결국 완고한 고집에서 나온 것이었으 나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영옥에게 대한 질투가 아니었던 가를 짐작할 때, 마음속에 숨어있는 것이 결국 그에게 대한 사랑이었던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날밤은 이러한 마음의 고패를 겪은 후이라 연옥의 자태 를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애달픈 마음으로 라디오 앞에 자 리를 잡았던 것이다. 찻잔에서 김이 피어오르듯 마음속에서 는 잡을 수 없는 애수가 피어 올랐다. 한 사람의 노래가 끝 나고 영옥의 소개의 말소리가 들려올 때 순도는 모르는 결 에 허리를 세우고 정신을 차렸다. 반사적으로 라디오를 우 러러보고는 시선을 탁자 위로 떨어뜨렸을 때 슈베르트의 사 랑의 노래가 고요히 흐르기 시작하였다. 바로 귀밑에서 부 르는 듯도 한 영옥의 목소리를 연연한 노래의 구절구절을 그 모두가 자기 한 사람에게 보내진 것으로 생각하면서 순 도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듣고 있는 동안에 피가 수물거리고 얼굴이 빛나갔다.

내 노래 사붓이
밤새도록 그대에게 구하노라.
고요한 숲을 내려와
임이여 내게 옵소사고.
그대도 떨리는 가슴으로
임이여 내 노래 들으소서.
내 떨면서 기다리니
오소서 내게 사랑 주소서……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마쳤을 때 영옥은 눈물이 핑 돌며 피아노 앞에 그대로 스러질 듯도 하였다. 마이크로폰 앞에 그때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던 순도가 금시에 먼 곳으로 쏜 살같이 달아난듯한 착각이 눈을 후려갈겼던 까닭이다.

반주자가 일어나서 그를 붙드는 동안 남구가 달려오고 민 수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하여 다음 순간에는 칭찬의 소리 가 그의 귀를 덮을 지경이었다.

「대성공이오.」

「오늘밤 으뜸의 성적이오.」

「방송국 총출동으로 함빡들 취하였었소.」

방송실을 나가 응접실에 이르렀을 때 신인들과 등대하고 있던 국원들 속에 영옥은 둘려싸였다. 수다스런 말소리에 마음이 현혹할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하고 얼굴이 달았다.

성공 여부를 자기로 알 수는 없었으며 결국 성적보다는 사 람들이 요란히 떠드는 속에 성공이라는 것이 있음을 깨달을 때 그 수선스런 자리를 속히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반가운 손님이 두 분 있는데감격해서 기다리고 있는.」

민수가 전하는 말소리에 영옥은 문득 귀가 띄이며 반가운 손님이라니행여나 순도가 아닐가 하는 순간의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더 물을 여가도 없이 그를 따라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눈앞에서 실망의 빛을 보일 수도 없어 웃음을 띄우기는 하 였으나 기쁘던 마음은 금시에 움츠러드는 듯도 하였다. 부 인란 기자로 있는 한 고향 동무 애란과 또 한 사람 모를 사 나이었다.

「뛰어오니까 벌써 방송이 시작됐더구나. 오늘밤같이 감격 한 때도 적었다. 그만하면 큰 성공이지.」

애란이 속임없이 던져 주는 칭찬의 말이 다른 사람들의 그 것보다도 한층 기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 순도의 한 마디를 듣는다면 얼마나 기쁠까를 생각할수록에 마음 한편 으로는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다.

「늘 말씀드린 강남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윤주씨.」

민수의 소개를 따라 맞은편에 앉았던 사나이는 허리를 엉 거주춤 일으키고 말을 이었다.

「이런 기회에 뵙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잘름하고 비대한 그 사나이가 소문에 익은 윤주임을 듣고 영옥은 덩달아 허리를 굽히고 애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지러운 마음속을 정리도 못한 채 딴 사람을 차례차례로 만나기가 본의는 아니었으나 현재 놓여있는 처지상 하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새삼스럽게 마음을 먹었다.

「오늘밤 노래는 재미있게 들었을 뿐 아니라 침착한 천분 에 실상은 놀라고 있읍니다.」

윤주의 말을 민수가 괴덕스럽게 채어서,

「내말이 헛말이 아니지요? 칭찬은 천천히 하시구 어서 사 무부터 시작하시지.」

윤주도 본색을 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무엇보다도 먼저 늘 상담이 앞서는 데」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민수씨에게서 들어서 희망하시는 바를 대강 짐작해서 말 씀인데 이번 기회에 우리 회사에 나와 주실 의향은 없으신지. 전속가수로 승낙만 하신다면 계속해서 작품은 얼마든지 맨들 작정이고」

다따가의 청이 영옥에게는 웬일인지 거짓말같이만 생각되 어 대답하기조차 얼얼하였다.

「승낙여부가 있나요. 물론 좋으시겠지요.」

민수의 말을 이어 애란조차 추서드는 것이다.

「하룻밤 동안에 출세의 길을 잡었구나. 기회로 생각하고 해보렴.」

한번 목표를 정하기는 한 영옥이언만 갈피갈피 복잡한 심 정을 가진 그로서 그 자리에서 선뜻 단마디의 대답을 할 수 는 없었다.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들이기에는 마음이 산란하였고 무엇보다도 말이 너무도 수 월하고 조건이 너무도 좋았다. 영옥은 우선 겸양의 말을 한 마디 보냈을 뿐이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지요.」

방송이 끝난 후 신인을 망라한 피로연이 있었다. 그 자리 에서도 영옥은 국원들에게서 남달리 혀끝에 걸리는 값싼 칭 찬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으로부터 즐길 수는 없었다. 우울 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날밤의 연속으로 다음날 하는 수 없이 민수에게 끌려 그 의 아파아트를 찾게 되었을 때, 우울은 절정에 달하였다. 독 식주의자의 방을 찾기가 어색하고 싫었으나 연주 비평에 관 한 타협이 있다고 하여 거의 끌리다시피 되었다.

북쪽으로 창이 난 어두운 방에 침대가 놓이고 어지러운 품 이 애란이 처음 소개할 때 에 하던 말이 생각나며 영옥은 두려운 느낌만이 솟았다.

별반 긴한 타협도 아니건만 이번 그가 쓸 원고에 대한 몇 가지의 의논이 끝났을 때 민수는 어조를 변하였다.

「왜 그렇게 잠자코만 계십니까. 좀더 적극적으로 절 이용 하려고 하시지 못합니까? 실상은 전 그것을 원하는데」

정신을 차리라는 듯이 별안간 와서 어깨를 흔드는 것이다.

잠간 침묵을 지켰다가 어조는 다시 변하였다.

「사내가 여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할 때에는 늘 뻔한 속 같지만」

「무슨 말씀이세요.」

「……남녀가 처음 만날 때의 인상이란 대개 거의 결정적 인 것인데 영옥씨를 처음 뵈올 때의 인상도 역시 그런 것이 었었지요…… 저같이 사생활이 복잡하고 불행한 사람은 아 마도 드물 거예요. 그 한 가지 예가 아시다시피 연희일전 남구군이 지껄인 그 연희의 일건인데 세상에서는 저 혼자만 이 비난의 목표가 되어 있으나 그런 경우 애정문제에 있어 서 대체 옳고 그른편이 있을까요? 옳고 그르다느니보다는 일종의 건질 수 없는 숙명이 있을 뿐이지요. 이 숙명에서부 터 시작되는 비극이 옛날부터 얼마나 많습니까?……저같이 불행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밤에 혼자 고요히 자리에 누우 면 세상에는 꼭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어둡고 바람 부는 지구 꼭대기에 나 혼자만이 우뚝 서 있는 듯도 한 쓸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요. 금방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져버 리고도 싶은 그런 외로운 마음, 공부도 음악도 다 귀찮아지 는 마음, 그 저 그 자리에서 살며시 없어지고 싶은 마 음……」

「……」

「……영옥씨는 늘 즐겁고 유쾌하고 희망만이 있습니까?

쓸쓸한 때는 없습니까?…… 문득 가슴이 쓰라려지고 모르는 곁에 눈물이 징긋이 고여지고어린애같이 몸부림쳐보고 싶은 그런 쓸쓸한 때 없습니까?…… 허구한 날 무엇을 생각하시 며, 댁에 계실 때 무엇을 하시는지가 알고 싶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저도 실상은 모르겠어요.」

민수의 표정은 전에 없이 부드럽고 그의 태도는 애잔하였다. 듣고 보니 결국 마음의 하소연이었으나 하소연을 할 때 의 사람의 마음이란 예외없이 다 아름다운 것이다. 그의 말 속에는 반드시 거짓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절실한 실감에서 나온, 듣는 가슴에 울려오는 말임 에는 틀림없었다. 애란이 말한 민수의 인금과는 또 다른 그 의 일면에 접한 듯도 한 느낌조차 생겼다. 그러나 물론 그 의 하소연은 영옥으로서는 귀로 들을 것이지 마음으로 들을 것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발음이 한 구절 한 구절 즐겁게 귀를 간지를 뿐이었다.

「제 청이 그다지 불측한 것 같지는 않은데 영옥씨는 어떻 게」

「사람을 잘못 고르셨어요.저로서는 들을 취지가 못되는걸요.」

「오해는 하시지 않으시는지.」

「오해가 아니라근본문제로요.」

「……근본문제라면애정 말씀이지요? 즉 제가 영옥씨에게 느낀 인상과는 반대인상을 제게 느끼셨단 말이지요아픈 곳 을 쏘으셨읍니다. 상당히 대담하세요.」

민수는 저으기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대담해서가 아니라.」

「알만 합니다.순도 말씀이지요. 순도는 저도 압니다만 순 직한 청년이지요. 비록 소설은 못 써도 누구보다도 무서운 소설가라고 할 수 있구요. 고집쟁이구 변통이 없구그러나 믿음직한 사람. 순도와 겨루면 저도 한 수 꺽이우겠는걸요.」

「그런 줄 아신다면 아까 같은 말씀 더 마시지요.」

민수는 무안한 듯이 한참이나 말을 잊었었으나 무엇을 생 각하였는지 다시 자리를 일어나서 이번에는 영옥에게로 가 까이 왔다.

「아무리 그러기로서니 말을 그렇게 문덕문덕 막 하세 요…….영옥씨의 마음이 순도에게로 기운 것을 번연히 알면 서도 사내의 마음이란 그렇게 수월하게 벗겨지는 것이 아니 니까요저를 아무리 따보셔도 제 마음은 떨어지지 않는걸요.

원래 끈끈한 것이 사내의 마음인지는 몰라도.」

몸이 가까이 오면서 영옥은 목덜미에 더운 숨결을 느꼈다.

황겁결에 벌떡 일어나려 할 때 그의 몸은 완전히 민수의 품 안에 있었다.

「오늘만 뵈올 것이 아닌데 왜 이리 무례한 짓을 하세요.」

몸을 잡아나꾸고 몇걸음 떠났으나 민수는 즉시 와서 팔을 붙들었다.

「아무리 노여하셔도 전 저대로 제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는 못 견디겠어요. 특별히 저를 원망하실 것이 없는 것은 사내의 마음이란 한번 벗겨만 보면 다 일반인 걸요. 순도에 게서 기어코 영옥씨를 뺏어보고야 말걸요.」

어쩌는 수 없이 몸은 다시 그의 팔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부치는 힘에 영옥은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부끄러운 마 음에 그러지도 못하고 몸을 요동할 뿐이었다. 우러러보던 민수였만 그 순간 한 마리의 짐승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분이 머리끝까지 치받치며 전신이 화끈 달았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수록에 굳세이게 붙들릴 뿐이었다. 손에 장기가 있다면 그 자리로 그를 해하고도 싶은 심정이었다.

짜장 고함이라도 치려고 하던 순간 그 겸연한 장면에 별안 간 공교롭게도 방문이 열린 것은 영옥에게는 다행인지 불행 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열어젖힌 문으로 나타나자 순간 놀 라는 표정을 지은 것은 영옥에게는 모를 한 사람의 여인이 었다.

민수는 기급을 할 듯이 물러서며 상기된 눈으로 그 돌연한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영옥이 이지러진 몸을 수습하면서 영 문을 몰라 한편에 서 있는 동안에 민수와 여인은 한참이나 앙칼진 눈으로 서로 바라만 보고 있더니 이윽고 여인의 입 에서는 불이라도 불 듯이 모진 어세가 쏟아져 나왔다.

「어떤 순둥이를 끌어들이고 또 이짓야. 그 놈의 버릇 언 제나 고치누, 악마같으니.」

민수도 펄펄 뛸 듯이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원수로 허구한 날 나타나 이 발광인지 모르겠네.」

「발광? 누가 발광이야. 사람을 요모양을 맨들어 놓고도 누굴 발광이래. 하루를 살아도 아내겠지. 신신히 일보고 있 는 사람을 꼬여내다간 짓밟아 망쳐 놓고, 자식까지 버리게 하고도 그래도 부족해서 허구한 날 이꼴이야? 악마가 아니 고 무엇인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는 분김에 손에 닥치는 대로 책상 위 것을 집어 민수의 면상에 던지는 것이었다. 마개 열린 잉크 병이었다. 쏟아져서 그의 얼굴과 옷자락에 한바탕 엉키고도 오히려 똑똑 떨어졌다. 비록 바라보기 어려운 꼴이었다.

「오늘은 어떤 이리 있든지 결단을 내고야 말걸.」

「미쳤구나.」

민수의 짧은 한 마디를 여인은 그대로 푹 씌워엎으며,

「미치고 말고 마지막 판에 헤아릴 것이 무엇인데. 자 어 떻게 해줄 테야? 죽이든지 살리든지살자고두 하잖는다. 눈 앞에서 시원하게 죽어 버리면 그만일께니, 누가 죽음을 두 려워 할가.」

문득 치마 틈에서 집어낸 것이 조그만 약병인 것을 보고 영옥은 무서운 생각에 뜨끔하면서 모르는 곁에 몸을 쏠렸다. 발악을 들으면서 눈치로 헤아려보니 수척한 그 여인이 바로 언제인가 남구가 지껄인 연희백화점에 있다가 민수에 게 발견되고 그와 지낸지 해를 못 넘어 버림을 받았다는 연 희임을 알았다. 두 사람 사이의 자세한 곡절은 물론 알 바 없었으나 그 살기를 띤 어지러운 여인의 꼴이 영옥에게는 가엾다느니보다도 두렵게만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약병을 집어낸 것을 보았을 때에는 벌서 그 자 리에 더 서 있을 수 없으리만치 몸이 떨리고 마음이 수선거 렸다. 책상위에 놓인 핸드빽을 찾아 쥐는 손도 유난스럽게 는 떨렸다.

「같이 먹기 싫으면 나 혼자라도 먹을 테야. 사내라는 건 비겁하구 야비하구……」

연희의 고함소리에 영옥은 더 참을 수 없어 그만 열려진 문밖으로 쏜살같이 나와버렸다.

앞으로 몇시간 동안에 방안의 비극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 하면 소름이 돋고 머리끝이 으쓱해 지는 것이었다.

벌써 민수 개인에 대한 판단의 힘조차 없어지고 한결같이 두려운 생각만이 들어 하필 그날 그 시간에 민수를 찾게 된 것을 아무리 뉘우쳐도 한이 없었다.

지낸 날부터 계속하여 오는 우울한 생각이 한껏 절정에 이 른 것이었다.

목표의 가수의 길이 새삼스럽게 가시덤불같이 험하게 내다 보였다.

신인 방송의 밤이 지난 지 일주일이 넘었으나 윤주는 그날 밤의 영옥의 인상을 잊을 수 없었다. 혼자 있을 때의 그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도 영옥의 자태였고 친구와 지낼 때의 그의 입을 스치는 화제도 자연 영옥의 위로 향하여 갔다.

남달리 몸이 육중하고 허울이 위대한 육척장정의 거한이언 만 가정에 있어서의 지위는 그 반대로 초라하고 가엾어서 거센 아내의 앞에서는 소리를 잊는 쥐 행세를 하게 되었다.

세상의 비극은 항상 비뚤어진 대조에서 오는 것이어서 윤 주의 처지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내와 그와의 지 위와 대조는 처음부터 거의 숙명적이어서 억지로 꾸며낸 노 력으로서는죽 애써 아내를 달래본다든가 혹은 억지로 위엄 을 보이려고 한다든가 하는 후천적 노력으로서는 도저히 건 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정적 불행이 그의 마음을 밖으로 향하게 하였는지 혹은 그의 마음이 너무도 허랑하고 정이 많은 까닭에 도리어 가정적 불행이 늘어가는지는 알 바 없으나 어떻든 그의 밖에서의 생활은 어지간히 어지러운 것이었다. 수많은 예기와의 거래는 고사하고라도 가까이 인 실과의 관계도 아직 부자연스런 인연을 그대로 끌어가는 중 이며 그러면서도 이제 또다시 영옥의 출현에 한눈을 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결국 가정의 불행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남구는 이날의 윤주의 하소연을 닫게 들으며 맞장구까지를 치게 되었다.

빠아의 오후는 고요하며 두 사람의 음성만이 꺼릴 것 없이 자유롭게 흘렀다.

「대강 이만저만한 줄 알았지 그렇게 뛰어난 줄야 짐작이 나 했겠소. 더 말할 것 없이 장안의 일색이구료.」

「웬만하게 야단들이지 그렇지 않으면야 그렇게까지 법석 을 하나요?」

「명호, 민수……또 구요? 남구씨도 한몫 끼었죠 아마.」

「그다지 명예롭지도 않습니다만 헛물들을 켜면서생각하면 우습지요들.」

「땅 위 일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니오? 우스울 것도 불명 예될것도 없지. 자리만 있다면 나도 한 구석 비집고 들겠소. 서로들 싸우고 겨루고 떠보고 하다들이기고 지는 것이지. 그 격식이 짐승사회와 같다고 반드시 부끄러울 것은 없잖우.」

「문제는 저편 뜻에 달렸는데 가장 중요한 편의 의사는 접어놓고 이편에서들만 법석을 해야 헛일이란 말이지요.」

술들이 웬만치 돈 까닭에 말들이 허랑하여 갔으나, 남구는 취중에서도 한편 맑은 정신으로 반성할 때에 애매한 한 사 람의 의젓한 인격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뭇 머슴들이 멋대 로 의논하고 작정하고 난도질하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사내 인 까닭으로의 그러한 특권이 용납되어야 옳을까, 되지 않 아야 옳을까 하는 의혹이 늘 마음속에 뱅돌면서 윤주의 술 과 말을 받음이 도무지 꿈속의 일같이만 생각되었다.

「그의 맘이 그렇게도 굳은가?」

「수월한 줄 알았나요?」

「아무리 굳어도 이편 정성만 지극하다면야.」

「어디 최대한도의 정성을 보여 보시지요. 휘어드나 어쩌나.」

「될 법하오? 한몫 대서 보게.」

윤주는 바짝 마음이 당기는지 그 육중한 몸을 앞으로 쏠리 고 남구의 눈을 떠보려는 듯이 노리며 술잔을 들었다. 그 야단스런 꼴이 남구에게는 어리석게도 보이고 한편 두렵게 도 보였다.

「그이만 얻을 수 있다면 난 현재의 모든 것을 버려도 좋 겠소.지위도 사람도 집안도 모든 것 다.」

민수는 아파아트에서의 그 변이 있은 후로는 다시 영옥과 도 만날 수 없는 처지에 인 실과 가까이 지내는 날이 별안 간 많아졌다. 연희의 절박한 자살 극의 한 막이 있었건만 어떻게 두루뭉수려 해결을 지었는지 적어도 인실과 거리를 걸을 때의 민수의 거동에는 그런 복잡한 기억의 자취는 티 끌만큼도 보이지 않음이 신기하였다. 뱀장어같이 미끄러워 손아 귀에 휘어잡을 수 없는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느결엔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빠지는그것이 그의 살아가는 태도 인지도 모른다. 그런 태도로 사랑과 사랑 사이를 능란하게 헤엄쳐 건너는 것이 그의 일생일는지도 모른다. 인실과 만 날 때에는 늘 천연스럽고 그 천연스런 속에서 놀랍게도 애 정을 익혀가는 것이었다.

인실은 인실로서 또한 정이 많아서 윤주와의 오래된 애정 의 거래가 있으면서도 민수와의 사랑은 또 그것으로서 충분 히 천연스러운 것이었다. 일종의 사랑의 「카멜레온」이라 고 할까. 윤주를 대할 때에는 윤주의 빛으로 민수를 대할 때에는 민수의 빛으로 경우를 따라서 각각 몸에 맞는 빛으 로 몸을 채색하고 장식하는 것이 인실의 놀라운 천재였다.

민수의 생활에 연희와의 파탄이 있은 후로는 더욱 그와 밀 접하게 되어 윤주의 눈앞을 거리낄 것이 없었고 고삐 놓인 말의 자유를 그는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윤주 편에도 인 실의 행동에 참견할 아무 힘도 없었고 감정적 요구도 굳이 느끼지는 않았다. 가령 서로 한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에도 피차의 행동은 극히 자유로와서 거역을 하든 한눈을 파든 피차의 임의였다.

민수와 인실의 동행은 요사에어 들어 별안간 잦아진 것이다.

그날도 두 사람은 늘 하는 버릇으로 거리를 휘돌아 찻집을 모조리 들춘 끝에 술까지 구하게 되었다. 민수의 그 드러내 논 자포자기적 태도는 물론 영옥과의 실패에서 온 것이기는 하나 그렇게 부질없이 거리를 휘돌아치는 꼴이란 별수없이 한사람의 무위의 거리의 청년의 표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 았다. 두 사람이 들어간 빠아가 공교롭게도 윤주와 남구가 앉아있는 바로 그 곳이라고 하여도 민수와 인실은 조금도 뜨끔할 것이 없으리만치 마음들이 유하여졌고 윤주 또한 심 드렁한 태도로 두 사람을 천연스럽게 맞이하였다.

「시위운동인가? 낮부터 이렇게 무장들을 하고 돌아다니게.」

오히려 이 정도의 농을 거는 윤주였다.

「만나고 보니 정말 시위행동같이 됐으나 용서하시오. 숨 어서 농간을 부리는 것보다는 도리어 내놓고 무장하는 편이 속임은 없으니.」

농은 농으로 이렇게 넌지시 받게 된 것이 민수의 요사이의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용서니 무엇이니민수 쯤이 그런 촌스러운 소리를 할 줄 은 몰랐소. 나 역 피차의 그 만쯤의 도덕을 이해하지 못할 내가 아닌데.」

「도덕악덕이지 도덕이야?」

인실이 따끔하게 쏘아 붙일 때에 그를 곁눈으로 비스듬히 가로 보며,

「인실에게서 도덕의 항의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싱글싱글 우시는 윤주.

「어떻든 잘 만났소. 지금 막 영옥씨 얘기를 하고 있던 판 에 민수씨야 영옥씨에 관해서야 횅하실 테니 이야기두 더 듣구 도움두 받을 테구」

윤주는 새삼스럽게 남구를 곁눈질하고 다음으로 민수를 바 라보았다.

「내 앞에서까지 뻔질뻔질하게 그런 소리를 할 젠 상당히 대담해졌는데.」

인실은 여자로서 자기 앞에서의 다른 여자의 화제를 못마 땅하게 여기는 눈치였으나 윤주에게는 벌써 인실과 영옥은 같은 처지의 여자는 아니었다. 그의 앞을 꺼릴 것 없이 얼 마든지 말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서 도리어 인실의 마음을 찔러 보고도 싶은 충동까지 없었다.

「영옥에게 관해서 횅하다구요?글쎄요, 잘 안다면 알고 모 른다면 모르고그는 벌써 내 뜻밖에 사람, 내 힘밖에 사람이 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민수의 가슴 한 구석에는 영옥과의 쓴 한 장면의 기억이 새로 솟아나와 그를 불유쾌하게 비웃는 것이 사실이었다.

「영옥난 되려 그를 미워할는지도 모르죠.」

「그렇다면그런 다행은 없소. 그를 미워하고 그가 뜻밖에 사람이라면 내겐 더 큰 기쁨이 없겠소.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이 터놓고 말하면 민수씨였었소. 민수씨가 참으로 영옥을 미워한다면 그때엔 날 도와주어도 좋잖겠소? 참으로 미워한 다면어떻소? 대답해 보시오.」

윤주의 한마디 한마디는 동여하는 민수의 마음을 마치 마 술같이 한 고리 한 고리 잡아나꾸어 목적의 함정에 빠치기 에 족한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이 부채질하는 바람에 짜장 활활 불붙어서 뜻이 있는지 없는지 나중에는 흥분된 구절을 뱉게 되었다.

「미워하구 말구요, 내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것 이 영옥이오. 제일 경멸하고 싶은 것이 영옥이오.」

처음부터 잠자코 있던 남구는 민수의 뜨거운 그 한마디에 서 말 뒤의 그 무슨 곡절을 민첩하게 짐작하고 불쾌한 시선 을 동무에게서 옮기면서 딴전을 보았다. 두 사나이의 회화 가 도무지 마음에 거슬리는 불측한 것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이요.」

윤주는 기운을 얻은 듯이 호기롭게 술을 마시고 잔을 민수 에게 권하면서.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꺼릴 것이 있겠소? 우리 피차 친 구로서 한 개의 약속을 가지는 것이 어떻소. 이미 민수씨의 마음을 들었고 내 맘이 또 얼마나 간절한가를 아신다면 그 다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무슨 조약이든 맺읍시다.」

「이미 인실을 차지하신 터이니 대신으로 영옥을 사양하시 란 말이오.」

「좋구 말구요, 얼마든지.」

「남구씨와도 말했지만 난 지금 모든 것을 희생하여도 좋소. 가령 내 지위민수씨의 힘으로 뜻을 이룬다면 난 현재의 지위를 그대로 드릴 작정이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옆에는 사람이 없는 듯이들뻔질뻔질하구 아니꼬아서 못 듣겠네.」

인실은 사실 더 견딜 수 없어 날카롭게 외치고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앞 탁자로 가버렸다. 남구야말로 처음부터 불 쾌한 생각을 참기 어려워 자리를 뜨려던 차에 인실의 거동 에 암시나 받은 듯이 같이 자리를 일어나 돌연 그와 동석이 되었다.

「사내녀석들같이 주제넘고 불측한 동물들이 있을까. 여자 를 마치 물건인 양 중간에 세우고 제멋대로들 거래를 하려 는어느 세상이 되면 그 버릇이 고쳐질까.」

남구도 인실이 말하는 그리 한 사람의 사내이기는 하나 그 자리에서는 도리어 인실의 말에 절대의 동감을 느끼게 되리 만치 두 사람의 동무의 꼴들이 비록 취중이라고는 하여도 불쾌한 것이었다.

「문예부장의 자리와 사랑과교환조건이 그다지 삐뚤지는 않죠.」

「힘껏 해보리다.」

두 사나이의 배포는 어지간히들 유들유들하여서 아마도 조 약의 마지막 다짐인 듯이 악수를 한 후 술잔을 나누는 것이 옆눈으로 보였다.

윤주의 태도는 잠시 묻지 말고 확실히 그때까지 영옥을 사 모하여 오던 민수의 그 경망한 태도가 남구에게는 수수께끼 였다. 그 무슨 변이 있었다고 하고 거기에 대한 복수의 심 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인격에 관한 일 인만큼 경솔하고 비루한 그의 행사를 동무로서 슬퍼하였다.

그 자리로 일어나서 정신이 번쩍 들게 그 두 사람에게 톡톡 히 주먹다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그것도 못하는 자기 자신 을 더한층 슬퍼하였다. 그러나 그 원한을 약간이라도 풀어 준 것이 있다면 인실의 별안간의 의분에 넘치는 짤막한 거 동이었다.

「야비한 짐승들.」

민수와 윤주의 악수가 끝나고 막 술잔들을 쳐들었을 때에 인실은 더 견딜 수 없어 한마디 짧게 외치며 들었던 자기의 잔을 두 사나이에게로 다따가 내던진 것이다. 문득 들었던 잔들을 떨어뜨리고 이쪽을 노릴 때에 인실은 뒤이어 술병을 던졌다. 민수는 안경을 잃어버리고 윤주의 낯에는 술이 번 지르르 흘렀다. 어안이 벙벙하여 한 마디의 말도 없을 때 인실은 갈퀴진 한마디를 날카롭게 던졌다.

「안된 것들 같으니. 세상의 착한 사람을 위해서 그 자리 로 혀를 물고 꼬꾸라져도 싸겠다.」

그 꼴들을 더 보기 어려워 남구는 눈을 징긋이 감으며 자 리를 벌떡 일어섰다.

사랑의 기쁨은 굴복을 할 때보다 굴복을 받을 때가 크다.

비록 한 장의 엽서였만 영옥이 그렇게까지 기뻐한 것은 순 도가 은근히 굴복해온 까닭 이다. 피차에 고집스런 마음으 로 어느 편이 꺽이워 드나 하고 기다리던 판에 기어코 순도 편에서 먼저 말을 걸어온 까닭이다. 문 밖 고요한 교외에서 하루를 이야기하고 지내자는 간단한 사연이 영옥을 날 듯이 기쁘게 하였다. 날을 두고 달을 두고 괴어온 수심이 한꺼번 에 개이는 듯도 하였다.

이튿날 영옥은 원족을 떠나는 아이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 약속한 교외를 찾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벌판, 언 덕, 초목들이 모두 마음을 뛰놀게 하는 것들 뿐이었다.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면 흰 구름을 잡아타고 금시에 날 듯도 싶 었다.

순도를 만난 것은 언덕을 넘은 풀밭에서였으나 일껏 사람 을 불러내놓고도 막상 만나서는 인사 한마디 걸지 않았다.

영옥은 마음 같아서는 오래간만에 만난 터에 순도에게 몸을 쏠리고 실컷 응이래도 부리고 싶었으나 말이 없는 이상 그 럴 수도 없이 그의 곁에 묵묵히 앉은 채 그의 입이 떨어지 기만을 기다렸다.

마음을 뛰놀게 하던 초목도 하늘도 구름도 사랑의 말이 없 는 속에서는 다시 의미없는 것으로 변하였다. 은근한 사랑 에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말의 실마리를 얻기가 부끄러 운 탓일까. 먼저 휘어 들기가 싫은 탓일까. 세상에 문학청년 이라는 것은 대체 무슨 턱에 무엇을 믿고 그렇게도 교만하 고 고집스러울까 의미없이 풀을 쥐어 뜯으면서 영옥은 순도의 마음속을 이 모저모로 헤아려보았다. 누가 어디 먼저 말을 걸게 되나 보 자 하고 은근히 마음속으로 으르고 있는 듯도 한 무거운 침 묵이 두 사람사이에 가로 막혔다. 무론 비록 말은 없다 하 더라도 순도와 같이 있는 시간이 영옥에게는 가령 명호나 민수나 남구나 그 어떤 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보다도 행복 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그만큼 침묵은 한결 안타까운 것이었다. 먼 바다의 기선같이도 굼뜬 한 조각의 흰 구름이 맞은 편 언덕 위 백양나무 사이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도 두 사 람은 그 구름을 우러러볼 뿐, 벙어리 같이 잠잠하였다.

「어느 때까지나 잠자코만 계시구실례라고 생각지 않으세 요?」

구름에서 암시나 얻은 듯 영옥은 이윽고 몸을 일으키면서 한마디 게정을 부렸다.

「할 말이 퍽도 많은 듯하더니 막상 만나고 보니」

순도도 덩달아 일어서면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지도 알고 싶고」

지향없이 발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앞에는 또 다른 언덕이 가리워 있었다. 두 사람은 풀밭을 걸어내려 좁은 언덕길을 더듬어 올랐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내 길도 옳게 못잡는 형편에 다른 사람 몫까지 알 수 야 있소?」

「기껏 그렇게 대답하실 것을 당초에 말은 왜 내세요.」

영옥은 샐룩해지면서 발끝으로 대중없이 풀잎을 찼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단 말요.」

속에는 가득히 품으면서도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순도도 할 바를 모르고 실상은 마음을 죄일 뿐 이었다. 길바닥의 돌맹이를 집어 뜻없이 언덕 위로 팔매를 던지는 것이 화풀이도 되고 심심풀이도 되었다. 돌은 언덕 을 휘엿이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그 너머로 떨어지곤 하였 다 순도는 어린아이와 같이도 몇 번이고 돌을 집어서는 언 덕 너머를 겨누었다.

「위험해요그 넘에 집이 있어요.」

보다 못해 영옥이 순도의 팔을 나꾸었다.

「빈 집인 걸상관 있나요?」

「아무리 빈 집이래도 돌을 던지면 꾸중을 듣잖아요?」

「누구에게?」

「서양마마에게요.」

어느덧 언덕 너머 지붕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언덕을 오르 는 동안에 산허리 선 외채의 양옥이 드러났다. 회사엔지 다 니는 외국사람 부부가 들었다가 조그만 가정적 갈등으로 해 서 아내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남편 혼자 빈 집에 살기도 멋 쩍어서 어딘지로 옮겨 버린 후 완전히 비인 지가 거의 반년 에 가깝다는그런 곡절있는 집이었다. 거리의 풍편으로 들은 그런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두 사람은 언덕을 내려 빈 집 후원께로 가까이 갔다. 창안으로는 휘장이 가리워져 있고 짐승소리 한 마디 없는 감감한 속에서 후원의 나무와 풀만이 철망 안에 우거질 대로 우거져있는 것이 그 무슨 이 야기 속의 집과도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두 사람에게 주었다. 벽으로 얼크러져 올라간 담장이 그늘에는 그 무슨 이야 기의 나머지가 서리워 있는 듯도 해서 그것이 알 수 없이 마음을 당겼다. 보지 못한 외국사람 두 양주는 담장이넝쿨 속 벽 안에서 어떤 살림을 하였을까. 두 사람이 갈라진 이 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왕 빈 집이니 기웃거려 볼까요?」

문득 호기심을 느끼면서 영옥이 제의하엿다.

「돌을 던지면 꾸중을 들어두 기웃거리면 꾸중 듣지 않 나?」

순도가 싫은 소리로 대답할 때 영옥은 그러나 벌써 철망 사이에 다리를 걸고 있었다. 몸만은 들어섰으나 철망에 걸 린 치마폭을 수습하노라고 애를 쓰건만 순도는 그것을 부축 해 줄 만큼의 재치도 보이지 않는다. 영옥이 완전히 철망에 서 손을 뗀 후에야 순도는 혼자 스스로 뒤를 이어 뜰안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불만을 품은 영옥은 한 걸음 먼저 그 자 리를 떠나 담장을 등지고 남쪽벽에 기대어 섰다.

「여자가 항상 제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수수께끼를 거는 셈이오?」

「친절이예요. 따뜻한 마음이예요아무리 사내 양반이기루 왜그리 무뚝뚝하세요. 늘.」

「내겐 원래 그런 미덕이 없나부오. 억지로 친절하게 하고 싶지 않을 젠.」

「마음에 없으니까 그렇죠.」

「그런 뜻의 따뜻한 마음이라면 난 굳이 보이고 싶지 않소. 웃음이라든지, 아첨이라든지, 재미있는 이야기라든지라 면 얼마든지 그런 것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잖우?가령 명호 나 민수나 그런 지도자들.」

「지도자들이 어쨌단 말예요?」

영옥은 짜증을 내며 몇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왜 늘 그렇게 빈정만 대세요. 그것이 사랑이예요? 사랑 이 그래야 돼요? 왜 좀더 달리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시지 못해요? 늘 윽박아만 댄다면 그것이 미움이지 사랑인가 요?」

「어떻게 표현하란 말요?이것이 내겐 기껏의 표현인데. 나 도 실상 어쨌으면 좋을는지 몰라서 그러우.」

순도는 사실 어쩔 줄을 몰라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아이 모 양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가령 내가 달아날 때 쫓아와서 왜 붙들어 주시지 못하세요. 따뜻한 말을 던져 주시지 못하세요.」

영옥도 넘치는 감정을 억잡을 수 없어서 문득 순도에게 달 려들며 전신을 쏠렸다.

「제발 더 빗나가지 마세요.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세요. 냉 정하게 구실 젠 제 마음은 저며내는 것같이 괴로워요.」

두 사람은 복받치는 감정을 못 이기고 한데 휩쓸려 그 자 리에 쓰러졌다.

순도는 영옥의 따뜻한 체온 속에서 목소리를 놓고 울고 싶 었다. 맞닿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어느 때까지나 놓고 싶 지 않았다. 늘 원하고 바라온 것이 그런 무더운 사랑의 기 쁨이었었건만 그것을 대담하게 구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 한 것이 생각하면 부끄러웠다. 대체 무엇을 가운데 두고 마 음이 지금까지 그 테두리를 한결같이 뱅돌았던지를 알 수 없다. 피차에 처음으로 주고 받는 열정에 두 사람은 꿈속에 있는 듯이 혼몽하였다. 잠시 동안 온전히 말을 잊었다. 말없 는 열정 속에서 무슨 생각이 솟아야 옳을 것인지 순도는 모 든 것을 잊어야 할 그 무더운 사랑 속에서 오히려 한 갈피 의 욕심이 솟아오름을 슬퍼하였다. 사랑의 욕심은 항상 질 투에서부터 온다.

「강남레코드에 나갈 작정이오?」

이렇게 물은 순도의 한마디는 질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 었던 것이다.

「글쎄요. 모처럼 희망했던 길을 중간에서 일부러 버릴 수 도 없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는지요.」

「윤주라는 위인이 웬일인지 비위에 안 맞는구려.생긴 품 이 음탕한 짐승 같아서 은근히 걱정돼서 하는 말이오.」

「세상의 사내란 사내는 왜 모두 그런지요. 윤주뿐이겠어 요? 민수란 양반도 점잖은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망나니예요.」

「그런 것을 날 보고 그 사람같이 하란 말요. 어쩌자는 생 각인지 속을 알 수 없구려. 내가 그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 지 않는 줄을 뻔히 아는 처지가 아니오?」

「그럼……. 나를 의심하시는 말씀이죠?」

영옥은 불쾌한 생각이 들면서 혼자 자리를 일어섰다.

「정색할 필요야 있소? 의심하지 말라는 말요.」

「얼마든지 의심해 보세요.」

영옥은 손을 번긴 듯이 화를 내며 달아나는 듯이 철망께로 내뺐다. 그 거동에 문득 순도도 노염을 품고 자리를 일어섰다.

「의심하구 말고밤낮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그 생각이오.」

「사람을 무시해두 분수가 있죠.」

영옥은 얼굴을 붉히면서 혼자 허둥허둥 다시 철망을 타넘 었다.

「사람의 속을 뉘 알꼬.」

순도의 이 한 마디가 거의 치명적이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급스럽게 서두는 영옥의 치맛자락이 철망에 걸려 보기 좋게 찢어졌다. 노염과 격동을 못이겨 영옥은 너펄거리는 치마폭을 돌아다보지도 않고 도망이나 하는 듯 쏜살같이 언 덕을 달았다.

(사람의 속을 뉘 알꼬.)

순도는 고집스럽게 한번 더 마음속으로 이것을 외쳐 보며 아무 감정도 없는 목석같이기실은 용솟음치는 뭇감정으로 가슴이 터질 듯도 하였으나영옥의 뒤모양을 우두커니 바라 만 보고 섰었다.

마음의 싸움이 왜 항상 사람을 이렇게도 괴롭히나를 생각 할 때 영옥은 숨차게 달으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에 차라리 이대로 솔곳이 사라졌으면 하고 느꼈다. 물론 우두커니는 서 있을지언정 순도도 똑같은 생각을 마음 한편에 떠올리고 있기는 일반이었다.

영옥이 명호와 옥주의 결혼식에 참례한 것은 교외에서 어 설프게 작별하게 된 순도에게 대한 일종의 심술인 셈이었다. 보라는 듯이 보내온 청첩을 받았다고는 하더라도 굳이 출석할 필요는 없었고 아니꼬운 마음에 도리어 싫은 생각도 들었으나 부러 고집을 피우려는 심사로 몸단장까지를 가뜬 하게 한 것이었다.

결혼식도 유달리 야단스럽기는 하였다. 음악협회 일동의 축하의 합창이 있었다. 성스러운 합창소리가 장내를 더한층 높게 보이고 엄숙하게 가라앉혔다. 음악 속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자태도 한층 엄연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영옥도 지난날에 꿈결 같은 속에서 몸으로 한번 겪어본 광 경이언만 떨어져서 그것을 방관할 때에는 또 다른 감상이 솟았다. 이미 헤적거려 본 육체요 헤벌어진 마음인지도 모 르건만 단지 예복으로 단장하고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웠을 뿐으로 그렇게도 엄숙하고 단정한 것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 한 쌍은 마치 주위 사람들과는 동떨어져서 세상에서 특 별히 선택된 신령스런 한 쌍과도 같이 보였다. 결혼식이란 결국 예복과 면사포로 어마어마하게 무장하고 세상 사람에 게 장엄한 인상을 주는 일종의 시위운동일는지도 모른다.

옛사람이 예식이라는 것을 꾸며냈을 때에는 으레 그런 뜻에 서 나온 것이겠지만 예복의 우상에서 벗어난 신랑과 신부의 다음날부터의 누그러진 가정생활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사 람의 하는 짓이 도대체 야단스럽고 주체스럽게만 여겨져서 영옥은 아닌 때 생각이 자꾸 비판적으로만 돌아갔다.

그러나 어떻든 의젓한 두 사람의 자태에 비길 때 그 외 사 람들은 모두 금줄을 친 테두리 밖 사람같이만 보였고, 더구 나 자기의 자태는 외모로나 마음으로나 너무도 초라한 것으 로 느껴졌다. 안경을 쓴 옥주의 야무러진 얼굴이 한층 자랑 스럽게 보이고 가슴 속에 갈피갈피의 비밀을 감추었을 명호 의 태도가 능청스럽고 점잖게 보였다. 모르는 숲속에 외롭 게 섞여서 두 사람을 바라보기가 쓸쓸하여지면서 자신의 꼴 이 새삼스럽게 내려다보이곤 하였다.

「왔었구먼.」

등뒤에서 귀익은 목소리 들린 것이 다행이었다. 애란이었다.

「왜 이런 데 숨어서」

동무의 목소리를 반갑게 여기면서 영옥은 그의 손을 붙들 었다.

「남의 틈에 숨어서 결혼식을 보는 것같이 초라한 꼴은 없 는데.」

「눈에 띄이는건 더 창피할 것 같애서.」

영옥은 픽 웃어 보였다.

「그래두 명호의 요량으론 영옥이 오늘의 주빈일 듯싶은데.」

애란도 웃음으로 대답한다.

「비꼬는 요량으로.」

「사람의 속을 뉘 알게. 저렇게 나란히 선 것을 보면 세상 에는 저 둘 밖엔 없는 것같이 정답고 평화롭게 보이지. 그 러나 알고보면 오늘 이 시간까지두 둘 사이에 옥신각신이 삐지 않었다나. 연옥이 이름도 두 사람 입에 안 올랐을 줄 아나.」

「그래서 꼴 좀 봐 달라고 청첩을 보냈단 말인가?」

「적어도 옥중의 짓 같아. 내 짐작으론생긴 걸 보지. 여간 내긴가. 그러니깐 차라리 앞에 나서 버젓하게 노려주는 것 두 대거리가 돼서 좋을 것 같애.」

「대거릴해선 무얼하누.」

영옥이 움직일 양도 하지 않고 섰는 것을 보고 애란도 그 자리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놀라운 소식 또 하나 말할까.」

장황한 주례의 말을 듣기도 지루하여서 애란은 한참이나 있다가 또 귓속말을 지껄였다.

「오늘만에 드는 결혼비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나 하나?

놀라지 말라, 일금 오천원이라. 그 대부분을 옥주편에서 댄 다나. 신랑측보다두 저 신부측의 위세들을 보지. 얼마나 장 관인가. 피로연은 호텔서, 신혼여행은 금강산으로.」

단 둘이 홋홋하게 만난 까닭인지 애란은 전에 없이 말이 많고 수다스러웠다. 영옥은 오래간만에 입이 무겁던 동무에 게서 한 사람의 까십장이를 본 듯도 하였다.

「옥주 학교 하직한 소문 들었나? 결혼 후에는 구천원짜리 문화주택에 얌전한 가정인으로 들어 앉는대. 현모양처가 또 한 분 생기는 셈이지. 양처제발 착한 아내나 되라지.」

거의 혼자만 지껄이다시피 하는 애란의 입살이 명호는 싸 두고 여자끼리인 옥주 한 사람에게로만 던져짐이 영옥으로 서는 야속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잠자코만 있기가 미안도 하였다.

「쓸데없는 말을 내가 왜 이리 야단스럽게 늘어놓는고 하 면」

애란의 말은 가려운 데까지 손이 닿았다.

「도대체 오천원이니 문화주택이니 파아노니 하는 것이 아 니꼬와서 하는 말야. 오천원을 쓰려거든 쓰고 문화주택을 지으려거든 짓지 그런 것은 가만히 잠자코나 할 일이지 무 엇이 장하다구 소문을 내구 거리의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 려고 하느냐 말이지. 옥주의 약은 계책으로 은근히 활짝 선 전을 하구 소문을 낸 눈치니 천하에 근성머리가 더럽단 말야. 뒤집어 보면 그게 우리 여성 전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 구 무어야. 모욕이 아니구 모어야. 온통 누가 부러워하구 장 해 여기나부지. 비위 사납게 천박한 것그런 눈치를 알면서 오늘두 오걸 왔나. 꼴 좀 비웃으러 왔지. 내 주장하구 인제 집꼴 되나 보지. 제일 가여운 게 명호야. 평생 판관노릇을 하구 집안에선 깔리워만 지낼 신세니.」

장황은 하였으나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였고 애란의 말속 에는 영옥 자신이 하고 싶던 말도 많았다. 명호와 옥주의 숨겨진 내막을 우연한 기회에 톡 털어본 듯도 하여서 시원 도 한 한편 가엾기도 하였다. 그러려니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막상 또렷이 듣고 보니 일종의 환멸조차 느껴졌다. 대답할 말을 몰라 짐짓 잠자코 있는 동안에 결혼식도 거의 끝나는 모양이었다.

백년해로의 계약을 마친 새 부부는 나갔던 길을 되돌아나 왔다. 양편 숲 속에서 날아드는 오색 테이프의 얼크러진 줄 이 걸어나오는 두 사람을 친친 얽고 뿌려지는 쌀이 길 위에 천하게 널려졌다. 장내가 어지럽게 수물거렸다. 내막을 털어 본 후이므로 그런지 영옥에게는 두 사람의 자태가 새삼스럽 게 찬찬히 바라보였다. 알뜰히 바라보려고 고개를 사람들 어깨 사이로 기웃거리는 동안에 수물거리는 파도에 휩쓸려 영옥의 몸도 밀리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애란의 자태조차 놓쳐버리고 어느덧 회당문이 미어지게 꾸역꾸역 나가는 숲속에 쌓여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면목 있는 얼굴도 간혹 눈에 띄이기는 하였으나, 그 복잡한 속에서 자기의 모양이 문득 민수의 눈에 띄일 줄은 몰랐다.

「어디 계신가구 찾았더니」

옆을 스치고 나선 것을 보니 뜻밖에 민수였던 것이다.

「드릴 말두 있구 한데 마침 잘 만났습니다.」

언제인가 그의 아파아트에서 그 불측한 짓이 있은 후로 처 음만나는 것이었으나 그 당장같아서는 노여운 마음에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고 눈도 저릅떠볼 것 같지 않던 것이 시간 이 흐르면 마음도 누그러지는지 그자리에서 영옥은 노염을 피울 수도 없었다.

민수의 태도부터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천연스러웠고 그 판에 영옥도 굳이 그를 꾸짖을 수는 없었다.

「우선 피로연에 같이 가셨다가」

민수는 혼자 작정으로 은근히 영옥의 나꾸어 보려는 눈치 였다.

「거길 뭣하러요. 여기 나온 것두 가장껏 정성인데.」

어느덧 마당에까지 밀려나왔었다. 넓은 마당에서는 밀렸던 파도도 해뜨러지면서 빽빽하던 사람들이 제물에 듬성듬성 헤뜨러졌다. 등대하고 섰는 여러 대의 자동차가 기우는 햇 빛을 받고 검은 속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신랑신부가 탄 뒤 로 차례차례로 가족들과 들러리들이 올라 차는 한 대씩 뒤 를 이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명호의 특청두 있구 했으니 가시죠오늘 손두 바쁘다구 해서 친한 내빈들의 뒷갈망을 제가 맡다시피 했는데요」

민수는 찻소리에 충동을 받은 듯이 조금하게 재촉한다.

「안 가요.」

「얼른 타세요.」

자동차를 가리켰으나 영옥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싫다니까요.」

「실상은 피로연보다두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요」

민수는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강남회사에서는 영옥씨의 전속 입사를 자기들끼리 임의 로 결정해 버렸다는데 늦은 인사지만 거기 대한 영옥씨 자 신의 의견도 듣고 싶고 구체적으로 취입할 레코드의 곡목도 작정해야 하겠고 테스트도 한번 해봐야겠고 해서 실상 오늘 윤주의 청으로 같이들 만나기로 했는데요. 피로연이 끝나는 대로 곧 적당한 곳에서 모이려고」

오래전부터 말썽이 많던 강남회사와의 교섭의 되풀이었으 나 진저리가 날 지경의 그 말이언만 영욱은 그래도 번번이 그것을 단번에 차버리지 못하는 처지였다. 가슴에 걸리는 감정의 체증이있으면서도 청을 받을 때 외마디에 선뜻 따버 리지 못하는 그였다. 신인 방송에 출연하였을 뿐, 그 후 아 무런 계획도 없이 지내오던 판에 일종의 불안과 초조조차 느끼게 되어 언제나 거세게 고집만을 피울 수도 없었던 것 이다. 한참이나 잠자코 대답이 없음은 은연중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셈이었다.

「오늘 기회만은 놓치지 마십시오.」

「피로연엔 아무래두 안가겠어요.」

「그럼 곧 윤주를 만나더래두」

민수는 벌써 완전히 영옥의 마음을 붙들고 민첩하게 눈치 를 나꾸었다.

「어떻든 차를 타시죠.」

찌뿌득은 하면서도 영옥은 마치 모르는 결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차 앞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10

[편집]

영옥이 싫어하는 바람에 피로연으로 이끌 수는 없었으나 윤주를 만날 것을 청탁하고 민수는 차를 어떤 빠아 앞에 세 웠다. 그것으로서 결혼식 행사에는 온전히 벗어져 난 셈이 었으나 그것이 도리어 민수의 처음부터의 작정이었지 명호 에게서 결혼식 내빈의 뒷갈망을 맡은 법도 없었고 그 이상 더 식의 행사에 참례할 의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영옥도 피로연에서 벗어져나게 된 것을 크게 다행으로 여 기며 그 바람에 민수가 권하는 대로 수월하게 빠아로 들어 갔다.

민수는 차 대신이라고 하면서 큐라소의 병을 분부하였다.

한 잔의 술이 아니라 한 병의 술이 탁자 위에 올랐다. 밑이 밭은 유리잔에 진득한 누른 술을 따라 놓고 민수는 전화를 걸러 안으로 들어갔다. 회사에 잇는 윤주를 부른다는 것이 었다.

차 대신이라는 바람에 영옥은 잔의 술을 입에 대었다가 단 바람에 한 모금 머금어 보았다. 단술과도 같아서 눅진하게 목을 눅이는 품이 만만할 듯싶어서 한잔을 완전히 켜버리는 판에 민수는 마침 윤주가 잠간 자리에 없다는 뜻을 전하면 서 전화에서 돌아왔다.

「좀 있다 다시 걸기로 하구술맛이 아니구 홍차맛쯤 밖엔 안돼죠?」

비인 영옥의 잔을 채우고 자기 몫을 단모금에 마시는 것이다. 기름한 질그릇 병에서 나오는 감빛 술을 영옥은 짜장 홍차쯤으로 짐작하면서 그 단맛에 유혹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병채로 청했으니 얼마든지 드시죠. 그까짓 차쯤.」

농을 농으로 받으면서 영옥은 술잔을 사양하지 않았다.

「언제인가 아파아트에서 실례가 많았으나 벌써 잊어주셨 겠죠.」

차차 누그러져 가는 영옥의 모양을 가늠보면서 민수는 묵 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러나 불측한 소리 같지만 과히 노여하지 마실 것은 그 만한 허물은 남자 치고는 예사란 거요. 남자된 특권이야 무 슨 특권이겠읍니까만 일종의 숙명이라고두 할까요. 아마도 지금이 거리의 사내치구 누구나 그만한 장면 겪지 않은 사 람, 그만한 허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게니요. 적어도 마음을 쪼개보면 누구나 그만한 일 저지를 위험성은 다 가 졌고결국 평생에 그런 기회가 닥쳐오나 안 오나가 문제일 뿐이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

「제 입으로 말하긴 변명 같아서 대단히 불리합니다만 알 구 보면 남자만사람이란 그런 겝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세상의 남자를 대신해서 이 비밀을 고자질한다구 내게 항의할 남자두 없겠거니와 그런 자격을 가진 사내라곤 세상 에 태어나지도 않았겠죠.」

「……」

「연희 말만 들으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고약한 사내인 샘 이지만 피차에 이해만 어그러지면 사람이란 별말이래두 다 하는 법. 날더러 말하라면 내가 그다지 고약한 사내두 아니 거니와 연희의 처지가 그렇게 불행할 것두 없구 실상은 현 재두 될 수 있는대로 정성껏 뒤를 보살펴 주는 처지인데 지 나친 발악은 쓸데없는 센티멘탈리즘일 뿐.」

술잔을 거듭하면서 민수는 싱숭생숭 말이 많았으나 단술에 맛을 들인 영욱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불쾌한 말들은 아니었다. 별반 반감도 동감도 없이 한 귀로 흘릴 정도로 심드렁 하게 듣고 있었다.

「여자를 두고 움직일 때의 사내의 마음이란 것이 원래 고 약한 것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빗나갈 때에 고약하게 나 타나는 수도 있겠죠. 결국 생각하면 항상 원인은 여자에게 있기 때문에 죄는 그편이 더 많은 것 같은데가령 세상의 악 마라는 것도……」

무엇을 생각하였던지 민수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문득 다 시 전화를 걸러 안으로 들어갔다. 노엽던 마음이 그만큼이 라도 풀리는 것은 술의 덕일까 하고 영옥은 큐라소의 잔을 신기한 것으로 노려보았다. 마음은 별 궁리 없이 단순하게 가라앉아갔다.

민수는 부리나케 전화에서 돌아오더니 부랴부랴 영옥을 재 촉하였다. 윤주는 벌써 장소를 정하고 먼저 그리로 가서 두 사람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급스럽게 서두르는 바람 에 영옥은 빠아를 나온 것이며 자동차에 오른 것이며 거나 한 정신에 도무지 꿈속 일만 같았다. 벌써 불이 들어온 거 리를 달리는 차가 하늘을 달리는 날개인 듯 유쾌하였다.

「좀 야단스런 것 같지만 오늘은 회사로서의 정식 초대라 나요. 그래서 특별히 이런 장소를 골랐다는군요.」

어두워 가는 뒷골목에서 차가 섰을 때 민수의 설명을 듣고 보니 딴은 조금 거추장스럽게 큰 요정이었다. 그런 길은 처 음인 영옥이 문간에서 얼마간 주저는 하였으나 결국은 수월 하게 들어서게 된 것은 역시 술김이었을까. 사실 만만히 보 고 잔을 거듭한 단술의 효과는 처음에는 몰랐던 것이 차차 그 효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요정에 들어섰을 때의 그의 눈총은 벌써 빠아를 나올때의 아직도 맑던 그 눈총은 아니 었다. 다리의 맥도 어딘지 없이 허전거렸다. 복잡한 복도를 꼬부라져 구석편 방에 들어갈 때까지 도무지 온전한 걸음은 아니었다. 방 가운데 도사리고 앉은 윤주를 보았을 때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나며 정신이 들었다.

「잘 오셨읍니다. 장소가 좀 어떨까도 생각했으나 과히 허 물마시구」

장소에 관한 설명을 윤주에게서까지 마저 듣게 되는 영옥 은 비로서 섬뿠한 생각이 나면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제 마음대로는 했읍니다만 입사는 이미 작정되신 게니 오늘은 축하를 위한 피로의 잔치를 저로서 드리고도 싶고 해서」

사실 영옥은 교섭의 회담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잔치의 대접을 받으러 온 셈이었다. 넓은 식탁에는 야단스럽게 진 미가 올랐다. 교섭이래야 문예부의 작곡작사로 취입할 곡목 이 작정되었다는 것과 그 연습을 하러 이차 사에 나와 달라 는 것과의 통지와 분부이지 그 이상 별 내용도 없이 즉시 만찬이 시작되었다. 극히 어렵고 까다로와야 할 일이 왜 이 리도 수월할꼬 생각하면서 영옥의 마음속은 그다지 편편한 것은 아니었다.

축배의 석 잔 술이 의외에도 전신에 활짝 피기 시작하였다. 잡담을 건네면서 고래같이 술을 켜는 두 사나이를 영옥 은 혼몽한 정신으로 바라보았다. 민수를 꾀바른 사냥꾼으로 친다면 육중한 윤주는 갈데없이 짐승이었다. 사물거리는 눈 앞에서 망아지로 보였다가 산돼지로 어리웠다 하였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실상은 얼마 안 지났겠건만 퍽도 오래된 듯이 생각되는 속에서 영옥은 문득 민수의 흐리멍덩 한 한마디를 들었다.

「취한걸바람 좀 쐬구 오리다.」

비틀비틀 나가는 민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자태가 문밖으로 사라졌을 때 영옥은 문득 정신이 들며 새삼스럽게 고요하여진 방안 공기가 몸을 선뜻 스쳐오고 웅크리고 있는 윤주의 자태가 위험한 짐승으로 느껴지며 별안간 몸서리가 치는 것이었다.

복도에 나선 민수는 문밖에 장승같이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짜장 술도 취하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거나한 속 으로 한 줄기 맑은 정신이 마치 곧은 철사같이 날카롭게 전 신을 꿰뚫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옳을꼬.)

짧은 순간의 일이었으나 이런 번개같은 생각이 머리속에 번쩍이고 있었다.

(동무의 우의가 중할까, 정조가 중할까.)

언제인가 윤주와 맺은 신사조약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예부장의 지위와 사랑과의 교환을 걸었던 약속의 일 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내들끼리의 멋대로의 작정이었으 니 윤주의 영옥에게 대한 욕망과 민수의 영옥에게 대한 노 염이 두 감정의 합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윤주로서는 야 욕이었고 민수로서는 일종의 분풀이요 복수의 심사였던 것 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불측한 농으로 시작된 거시었으나 일단 약속이 성립되었을 때에는 거기에는 스스로 사내로서 의 배짱도 서고 위선도 보여야 되게 되었다. 만수의 마음의 괴롬은 그 점에 있었던 것이다. 답답한 판에 창을 열고 어 두운 뜰을 내다보면서 무더운 얼굴에 바람을 맞다가 민수는 문득 그러고만 있을 수도 없는 듯이 결의를 하고 창 기슭을 내려섰다.

(결국 내 손가락 하나에 달린 일이다.) 방문 옆 벽 위 스위치를 눈 꾹 감고 손가락으로 누르면 그 만인 것을 안다. 방안의 불이 꺼질 것이요, 민수의 앞에 어 둠의 세상이 놓여질 것이요, 따라서 그와의 약속은 이행되 는 것이다.

등불아래에서 어둠을 기다리면서 웅크리고 앉았을 윤주의 꼴이 눈앞에 떠오른다. 짐승 같은 꼴이라니! 뒤이어 우두커 니 마주앉아 잠시 후에 올 운명도 모르고 있을 영옥의 자태 가 떠오른다. 불한당들의 계책으로 그런 줄도 모르고 지금 막 희생의 단 위에 오르려는 가여운 양! 참으로 가여운 양!

숭한 불한당들! 가여운 양!

민수는 어지러운 생각에 삼삼거리던 방문 앞을 떠나 다시 창기슭에 올라 가슴을 헤치 고 바람을 맞았다. 맞은편 창에 서 등불이 흘러 초록이 그 속에서 신선하게 빛났다. 복도에 는 어른거리는 뽀이들의 그림자가 보이고 그 어디인지 방에 서는 유흥의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고요한 속에서 시간 이 무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이 불현듯이 솟으며 민수는 초 조하게 창에서 내렸다.

(악마가 되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고개를 흔들며 복도를 거니는 발이 떨린다. 아직까지도 할 바를 모르고 방안에 우두커니 웅크리고 앉았을 윤주의 꼴이 별안간 딱하게 생각되자 견딜 수 없이 몸이 숭숭거린다. 우 의와 정조와우의가 반드시 정조보다 허름한 법은 없을 것이다. 약속은 약속이다. 한번 입밖에 내인 장부의 한 마디가 그렇게 허수하게 버려질 법은 없다. 조약이란 이행하기 위 한 것이다. 아무리 주석에서 맺은 언약이기로 헌신짝같이 내버려질 법은 없는 것이다. 행할 뿐이다. 말은 행하여야 한다.

(악마가 되려다가 미끄러진 팔동이는 악마보다 더 못난 것 이다. 어차피 악마의 심정으로 시작된 것이니 차라리 악마 가 되어 버리는 것이 편한 노릇이다. 무엇을 주저하랴.)

마음이 작정되자 민수는 더 뭉갤 필요는 없었다. 짜장 금 시에 악마로나 환생한 듯이 얼굴을 괴롭게가 아니라 무섭게 찡그리고 문밖 벽 앞으로 달려들었다. 운명의 골패쪽이 떨 어지는 순간 같이 엄숙하고 긴장된 순간이 있을까. 골패쪽 을 쥐인 악마의 손스위치를 잡은 민수의 손은 나무같이 굳 으면서 떨렸다. 항상 망설이는 동안이 길었지 떨어지는 시 간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순간골패쪽은 떨어지고 말았다.

민수는 벽에서 번개같이 손을 떼고 장승같이 굳은 몸으로 문앞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가 세상이 별안간 함정 속에 빠졌는가 하늘의 별이 떨어졌는 가……. 빙글빙글 돌던 지구덩이가 금방 문득 서 버린 듯도 한 착각이 일어나며 정신이 아찔하여졌다. 문틈으로 들여다 보이는 방안이 어두울 뿐 아니라 복도로 어둡고 세상 전체 가 암흑으로 변한 듯싶었다.

(흠, 대체 무엇을 저질렀노. 무엇이 일어났노.)

현기증으로 금시 그자리에 쓰러질 듯도 한 것을 간신히 몸 을 곧추세우고 골을 흔들어 보았다. 골이 떨어지지 않고 그 대로 붙어 있음이 신기하였으나 눈앞이 핑핑 도는 판에 그 자리에서 발을 돌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저주받은 방문 앞 에 한시도 더 머물러 있기가 괴로왔다. 거의 미칠 듯이도 수선거리는 머리를 부둥켜 안고 복도를 허둥허둥 뛰어가는 것이었다. 어디론지도 모르게 복도를 구부러져서는 대중없 이 달았다. 그 무엇에 쫓기우는 듯도 한 참혹한 그 꼴은 자 랑에 넘치는 악마의 꼴이 아니라 싸움에 짓찢기우고 달아나 는 광대의 꼴이었다.

11

[편집]

오후의 강가는 고요하였으나 그러나 또 이날같이 맑은 강 물과 찬 바람과 신선한 초목이 민수의 마음을 괴롭힌 적은 드물었다. 흔하게 흐르는 물과 강기슭을 스쳐내리는 바람에 무거운 마음을 개운하게 덜어줄 줄만 알았던 것이 도리어 효과는 반대여서 나부끼는 풀잎 하나까지도 그의 마음속을 갈피갈피 헤치고 들어 생각을 더하게 하였다.

그날밤 요정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함정에 들어온 영옥을 싸고 윤주와의 사이에 무서운 계책을 썼던 그 저주의 밤이 있은 후 며칠 동안의 낮과 밤을 민수는 무거운 번민 속에서 지내왔다. 거리에 나가기조차를 피하고 집안에서 궁싯거리 다가 견디지 못하고 뛰어나온 것이 날마다 교외의 강가였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을 맞아도 한번 저지른 마음의 짐이 좀체 덜어지지는 않았다.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 었고 다만 가벼운 입으로 비판해 보고는 수월한 것으로 여 겨 왔을 뿐이었다. 무엇이 죄이냐는 둥시대를 따라 죄의 의 식이 다르다는둥입으로 지껄이기만 할 때에는 퍽도 수월한 것이었으나 일단 실감으로 그것을 느낄 때에는 무섭고 무겁 고 드세임을 깨달았다.

죄는 죄인 것이다. 죄를 결정하는 저울과 자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요 참으로 마음인 것이다. 제 아무리 이치를 캐고 장담을 해 보았어도 결국 마음이 무섭고 무거워질 때 그것 이 바로 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마음의 무겁고 음산한 짐을 덜어 줄 사람은 다른 아무도 아니라 참으로 자기 자신 임을 깨달았다.

그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생각이 두 겹으로 마음을 눌렀다. 죄진 사람의 설레고 음산한그것이 요사이의 민수의 표 정이었다.

(그만 정도의 악마두 되어 보지 못한단 말인가.)

물론 이렇게도 생각은 해 보았다. 당초에 윤주와 계약을 맺을 때에는 제법 악마의 역할을 호돌스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현대에 있어서 악마 노릇을 함은 성인 노릇을 하는 이상의 자랑이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볼 때에는 큰 오산이었음을 알고 예측하지 못 했던 괴롬이 가위같이 육신을 누르는 것이었다. 악마 노릇 을 함은 성인 노릇을 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어려운 일이 요, 여간내기가 아니고는 감히 그 노릇을 해낼 장사가 없다 는 것을 또렷이 깨달았다. 줄을 타다가 미끄러진 광대와도 같은 희극의 인상을 악마가 되려다가 미끄러진 자신의 꼴에 서 보았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민수는 자신의 옹졸한 꼴에 비겨 윤주 의 배포 유한 태도가 장하게도 우러러보이고 밉살스럽게도 느껴졌다. 체질로나 기질로나 애초부터 맞수가 아니었는지 도 모른다. 자기와는 반대로 악마의 소질을 처음부터 갖추 어 있었던 윤주임이 틀림없는 것이 차례진 무서운 역할을 늠실하게 감당하였을 뿐이 아니라 오늘은 그 보수로서의 민 수와의 계약의 조건을 이행하려 강으로 나온다는 약속이었다.

(악마일까 영웅일까.)

어처구니가 없이 민수는 속으로 중얼거려 보면서 윤주의 위인을 알 수 없는 괴물로 생각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와 겨루다가 딴죽걸이로 보기좋게 쓰러진 자신의 꼴이 한층 가 엽게 떠오른다. 너무도 강감한 것이 괴로와 돌을 집어 올려 강물에 던져본다. 풍덩 소리가 나며 파문이 일고 강속에 길 게 뻗친 자심의 그림자가 깨뜨려진다. 파문이 사라지자 그 림자는 제 자리에 모여 들었다가 돌을 던지며 다시 흩어지 곤 한다. 돌을 수 없이 던지는 동안에 물속이 어지럽게 수 선거리다가 맑게 가라앉았을 때 민수는 문득 자기 그림자 아닌 또 하나 다른 그림자를 물속에 발견하고 뒤를 돌아보 았다. 윤주가 와 있었다. 민수는 홧김에 또한번 돌을 집어 물속의 윤주를 힘껏 깨뜨려버리고는 돌아서서 언덕 위로 뛰 어올랐다.

「자네게 할 말도 많네만.감사하다구 하면 옳을는지, 어쩌 면 옳을는지.」

윤주가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르는 것을 알고 민수는 한층 급스럽게 발을 떼었다.

「하긴 입으로만 감사하려는 것이 아니네. 조약을 조약대 로 이행해 준 자네가 신사라면 나두 사내대장부간대루 일구 이언을 하겠나? 약속은 약속대루 지키겠네.」

민수가 풀 위에 덜석 주저앉으니 윤주도 덩갈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는다.

「그 눈치 누가 모르겠나만 자네겐 아직두 감상이니 무어 니 하는 귀찮은 게 남아 있는 모양이야. 내 눈으로 보면 그 게 다 아직두 어린 탓, 그다지 괴로워 할 법은 없어.」

담배를 내서 불을 붙여물고는,

「고지식한 자네에게 비하면 난 아마 악한 중에서두 상악 한인지는 모르겠으나 감상은커녕 마음속에 손톱만큼의 심책 두 안 느끼니 대체 웬 까닭인가, 모든 것이 그저 있을 대로 있었고 될대로 된 것같이 밖엔 생각되지 않네. 그다지 야단 을 칠만한 큰일두 아무것두 아니구 넓은 세상 그 어느 구석 에서 꽃 한 송이가 깜박한 것쯤 밖엔 생각되지 않으니.」

「암, 악한이구 말구. 자네같은 위인을 알게 된 것이 내겐 일생의 불행이었네. 일대의 실책이었었네.」

민수는 입에 고인 신물이래도 뱉아 버리는 듯 어세가 급스 럽다.

「그러나 당초에 자네의 제의로부터 시작된 일이었지 내가 시킨일인가. 자네로선 그만하면 복수가 됐겠구 내가 그 복 수를 사서한 셈이니 벼르던 복수를 한 이상에 무슨 더 잔소 린가? 그날 밤의 자네의 행동을 칭찬하러 왔지, 그 우울한 꼴 보러 여기까지 나온 줄 아나?」

「딴은 악한의 배짱이 그만큼은 써야 되렷다. 악한과 씨름 을 한 댔자 펀펀이 질 뿐이지 내야 밑천이나 찾겠나.」

민수는 벌떡 자리를 일어서면서 한오큼 뜯어 쥔 풀잎을 윤 주의 면상에 던졌다.

「쓸데없이 흥분하지 말게. 아직 판이 다 끝난 것은 아니야. 내 자네에게 갚을 게 있으니 말이네. 약속한 문예부장의 자리 언제든지 그것을 자네에게 물려줄 마음의 준비가 내게 있네. 자네 원하는 때 언제든지.」

「그래두 조롱인가. 무엇이 부족해서 두구두구 사람의 맘 을 성가시게.」

소리가 절걱 나게 윤주의 볼을 쥐어박고 민수는 그래도 화 를 못이겨 돼지 목숨같은 그의 목을 팔에 걸었다.

「기어코 쌈을 하자는 셈이지. 어쨌다구 엉뚱하게 내게 화 풀이야. 그까짓 분은 강물에나 띄워버리잖구.」

팔에 목을 감기워 말소리조차 끊어지면서 한참 동안이나 꼼짝부득이던 윤주였으나 문득 차력이나 한 듯 힘을 쓰면서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민수의 몸이 꺼꾸로 곤두서며 두 몸 이 한데 휩쓸려 볼 동안에 언덕을 굴러 내려갔다.

한참 동안 모양들은 안 보이고 깔리거니 누르거니 두 몸이 한데 엉긴 채 윽박아대는 소리만이 고요한 강가에 세차게 들렸다. 유유한 강물과 나부끼는 초목들은 당초부터 순간순 간에 명멸하는 인간사에는 관심을 안 가지 듯 천연스럽게 제 몫만을 보고 있는 그 속에서 그 유유한 자연에 거역이래 도 해보려는 듯이 뛰어나게 두 사람의 기운은 세찼다. 두 몸은 떨어졌다 어울렸다 하면서 강기슭으로 밀려나갔다. 윤 주의 몸은 허울만 클 뿐 민수에게 깔리기가 일쑤였다. 목을 눌리우면서 간신히 토막토막의 말소리를 자아냈다.

「……무슨 까닭에 이 짓인지를 다 안다. 아직까지두 영옥 을 못 잊어서 그러지. 복수란 얼토당토 않은 몽상이었어. 내 게 사랑을 사양한 것이 얼마나 원통한가. 더 좀 둬두구 지 긋지긋 정성껏 사랑을 구해 볼껄. 자네 맘속 다 들여다보네.」

힘을 불끈 써서 몸을 세우고 민수를 눕히려다가 다시 됩데 깔리고야 말았다. 이제는 벌써 전신을 맞을 대로 맞아 기운 도 어지간히 쇠진하였었다. 반대로 민수는 더욱 생기가 팔 팔하여지고 기운을 더하여 갔다.

「난 왜 그리 경솔하였던지 모른다. 너같은 악마와 애초에 쓸데없는 농을 건 것이 내 잘못이었지. 죽어두 이 원한 풀 어질 성싶지 않다. 고약한 것. 어떡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설까.」

「그만 두세. 그만하면 자네가 이겼네. 내가 이긴 줄 알았 으나 결국 겉 뿐이구 정말 이긴 건 자네네. 마음으로 이겼네. 사랑에 이겼네. 나만 결국 참패네……」

손을 모으고 빌면서 발을 구른 서슬에 윤주는 간신히 몸을 빼치고 민수의 팔을 벗어났다. 민수가 쓰러져 있는 틈을 타 서 다시 더 겨를 염도 못하고 허둥허둥 언덕을 올라갔다.

민수가 몸을 일으켜 가지고 뒤를 따르려 할 때에는 벌써 도 망의 자세를 하고 쏜살같이 언덕 위를 달아나는 것이었다.

「잠간 먼 데루 갔다 오려네. 가서 생각해 보겠네. 오늘의 쌈은 이것으로 헤치세.」

「도망을 가다니 비겁한 것. 잠간만 참게, 잠간만……」

「더 따라오지 말어. 자네가 이겼달밖엔……」

살려달라고 숨이 차게 줄행랑을 놓는 윤주의 꼴을 우습저 여기면서 뒤를 쫓던 민수는 별안간 그 꼴이 가엾게 보여져 서 도중에서 걸음을 늦추어 버리고 말았다. 도망가는 참패 병의 뒤를 굳이 쫓을 것은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두 사 람 싸움에서 이긴 것은 확실히 자기편임을 느끼면서 민수는 밭은 숨을 쉬면서도 가슴을 내밀고 거리로 들어가는 교외의 길을 자랑스럽게 걸었다.

가쁘면서도 그 길로 민수는 순도를 찾았다. 내친 걸음에 그에게 대한 무거운 감정마저 정리해버리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순도의 태도는 엽렵하였고 국면은 의외에도 예측치 아니한 방향으로 흘렀다.

「자네게 할 말도 많네만」

서름서름한 사이였으나 민수는 배짱을 세우고 속을 털어 보일 작정이었다.

「왜 긴치 않게 눈앞에 어른거려. 아예 꼴두 보기 싫다.」

외마디의 퉁명스런 호통이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자네 생각 도 달라지리. 무엇하러 이렇게 구구하게 자네게까지 오겠나.

마음속이나 알아 주게.

목소리를 부드럽히며 굽혀도 보았으나 순도의 기색은 여일 하였다.

「도대체 꼴이 보기 싫어. 생쥐같이 꾀로만 살아가는 그 꼬락서니가 처음부터 보기 싫었다. 나쁜 짓들은 도맡아 놓 고 해감직한 세상에서두 가증한 동물.」

「욕받으러 온 게 아니다. 와 준 것만 고맙다구 해라.」

당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말에 민수도 화가 버럭 나서 그만 마루를 내려서려 할 때 순도의 손이 번개같이 날아오며 볼 에 불이 번쩍 났다.

「사람을 조롱하러 왔나, 이 녀석이.」

몸을 피하려 하였으나 미처 뺄 새도 없이 뒤에서 덮치는 순도의 팔에 전신을 감기워 버렸다. 싸움이로구나 하고 느 끼자 민수는 문득 강가에서 자기가 윤주에게 한 바로 그 공 격의 시늉을 이제 꺼꾸로 순도에게서 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별수없이 뱃심을 정하고는 힘을 쓰면서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순도의 몸이 곤두서며 두 몸은 한데 휩쓸려 뜰 아래 로 쓰러졌다.

「그렇게 노여워할 것이 없는 것이 뭐니뭐니 해두 자네가 제일 행복자이네. 영옥의 사랑을 완전히 차지한 건 자네뿐 이니. 우리는 결국 헛물만 켜면서 가장자리로만 빙글빙글 돌아댕긴 셈야.」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 두구.저질러 논 흠집을 어떻게 도 로 바로잡아 줄 테냐 말이다.」

순도의 팔팔한 기운은 박세고 벌써 두번째의 싸움이라 민 수는 기진한 눈치가 완연하였다. 힘이 부치는데다가 도무지 악이 나지 않고 흥이 솟지 않았다.

당초부터 싸움의 산수는 기울었던 것이다. 날아오는 주먹 을 일일이 막아내기가 귀찮고 몸 그 어느 구석이 마치 금시 에 신경이나 빠진 듯이도 둔해짐을 느꼈다.

「그만 두세. 때리려거든 얼마든지 맞기는 하겠네만 더 싸 우지 않아두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네. 자네가 이겼네. 사 랑에두 싸움에두 난 참패야……」

간신히 몸을 뺐을 때에 날쌔게 일어서면서 달려드는 순도 의 가슴을 힘차게 지르니 무르게도 쓰러져 버린다. 더 싸울 필요도 없었거니와 노곤하고 귀찮은 마음에 그 틈을 타서 민수는 대문을 나와버렸다.

「도망을 가다니, 비겁한 것.」

뒤미처 순도가 쫓아 나오는 것을 보고 민수는 천연스럽게 하려다도 귀찮은 마음에 자 연 빨라졌다.

「쫓아오지 말게. 자네가 이겼달 밖엔.」

알고 보니 쫓아오는 순도의 앞에서 자기는 어느결엔지 달 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부리나케 뛰는 동안에 숨조차 막혀 졌다. 숨차게 도망가는 자기의 꼴민수의 머리속에는 문득 강가에서 자기에게 쫓기우는 윤주의 꼴이 번개같이 떠오르 며 그 꼴이 흡사 지금의 자기의 꼴임을 느꼈다. 윤주와의 싸움에서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되었으나 이제 순도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참패를 당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가 범한 허물을 지워 주는 보상이 된다 면 또한 원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럼도 없이 정신없이 길을 달리는 것이었다.

12

[편집]

공원의 아침은 맑다.

순도와 영옥의 마음속도 연못의 물같이 고요하고 맑은 것 이었다.

영옥의 마음이 한결 개운한 것은 그 날 아침 순도가 먼저 자기를 찾아주고 공원까지 끌어내준 까닭이었다. 사랑의 고 집은 마지막까지도 끈끈스럽게 마음을 지배하는 모양이었다.

영옥에게는 그 변이 있은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에 무서운 번민의 날과 밤이 있었다. 봉욕의 순간을 생각하면 살이라 도 에우고 싶은 듯한 지옥의 괴롬이었으나, 그러나 날이 지 날수록 상처도 사라져가고 무엇보다도 순도가 그것을 허물 하지 않고 용서하여 줌이 그에게는 더 없는 구원이었던 것 이다. 어디론지 사라져버린 윤주에게 대하여서는 징계의 길 이 없었으나 짐승이 아닌 이상 제 스스로의 뉘우침에 맡겨 두기로 하였고그보다도 영옥과 순도 두 사람에게는 어느결 엔지 큰 깨달음이 생겼던 것이다. 그 깨달음 앞에 지난날의 흠쯤은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공원에서 그렇게 두 사람이 조용히 만나기는 언제인가 서 글프게 싸우고 헤어진 후 여 러 달만에 처음이었다. 몇날의 시간이 많은 마음의 변천을 가지고 와서 그때와 오늘과의 두 사람의 처지는 같은 것이 아니었고 마음과 표정 또한 퍽 도 다른 것이었다. 험한 한 고패를 지난 후의 평화로운 표 정이었다.

「생각할수록 사람이란 어리석고 앞눈이 어두운 것이 한 되는구료.」

순도는 나뭇잎을 뜯어 입술에 물면서 나무 그림자 사이로 영옥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첨부터 이날이 올 것을 알았다면 무엇을 즐겨 굳이 파란 곡절을 꾸며놓고 그 속을 괴롭게 헤매 왔단 말요. 단걸음에 순순하게 결말을 잡았더면 될 것을.」

「제 생각엔 꼭 무슨 조물주 같은 것이 있어서 사람의 길 을 심술궂게 요리조리 틀어놓고 사람의 걸어가는등 뒤에서 농간을 부리는 것만 같애요, 마치 소설가 모양으로 부질없 이 인생을 기구하게만 꾸며놓구조물주란 꼭 소설과와 마찬 가지로 심술궂은 것인 듯해요.」

「소설가소설가는 걸작인데. 그러나 나같은 소설가야 그런 꾀를 부릴 줄이나 아우. 그러게 당초부터 소설가두 아니요 그런 의미의 소설가라면 되구 싶지두 않구.」

「애매한 소설가를 걸어서말이 빗나갔어요. 용서하세요. 어 떻든 결국은 되돌아오게 되는 첫길인 것을 공연히 장황하게 빙돌다가 전신에 상처투성이를 해가지구 다 저녁때 어슬어 슬 돌아오게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군 해두 생각하 면 원통해요. 같은 값이면 첨부터 순조로웠으면 오죽 좋겠 어요.」

「조물주의 농간으로만 돌리지 말구 피차의 마음에두 비쳐 봅시다터놓고 말이지, 영옥씨가 당초부터 괜한 고집을 피우 지 않았다면 그렇게 빗이야 나갔겠소?」

어느덧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나뭇잎의 그림자가 두 사람의 얼굴과 몸에 아롱아롱 무늬를 놓으면서 지나간다.

「고집이라니요. 아니 누가 먼저 고집을 피셨어요? 생판 고집 없는 양반이.」

영옥은 거의 펄쩍 뛸 듯이 발을 멈추고는 순도를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다. 순도는 웃음을 머금으면서 부드러운 낯으 로 그의 시선을 받는다.

「그렇게 정색할 게야 있소?」

「정색하구 말구요. 고집을 누가 먼저 피웠게.」

귀엽게 짜증을 내면서 영옥은 벤취에 가서 덜석 앉는다.

「그럼 말할까.명호들에게 지도를 받느니 뭐니 하구 서두 른 것두 고집. 강남회사에 들어가느니 뭐니 하구 법석을 한 것두 고집……」

영옥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발을 톡 구르고 일어나서 순 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당초에 길을 옳게 잡아 줄 생각은 하잖구 그렇게 되도록 부러꾸민 것은 대체 누구의 고집이었어요? 누구의 고집이었 어요? 얼른 말씀하세요.」

목이 메이는 듯 잠간 숨을 돌려가지고는,

「늘 뿌루퉁하구 빼지구 쌀쌀하구 심술궂구 화만 지르구그 고집엔 그만 지쳤어요.」

「한 마디 더 하지공연한 일에 이렇게 쓸데없이 법석을 하 는 것두 고집이 아니오?」

그 말에는 영옥도 대꾸를 몰라 입을 다문 채 두 사람은 다 시 나무 그늘을 걷기 시작하였다.

「어떻든 생각하면 결국 고집의 비극이었었소. 앞으론 고 집을 버립시다.」

「제발요.」

「정말」

순도는 발을 머무르고 마치 미친 사람 모양으로 영옥의 두 어깨를 억세게 붙들었다. 타는 눈이 녹일 듯이 그를 쏜다.

「고집을 버리겠소? 그리구 내 시키는 대로만 하겠소? 내 명령대로만일절 거역 없이.」

「아무렴요. 무엇이든지 분부하세요.땅속에래두 들어가죠.」

대답도 떨어지기도 전에 순도는 열광적으로 영옥을 안으면 서 숙인 그의 얼굴을 찾았다. 바로 머리 위 나뭇가지가 새 의 짓인지 바람의 짓인지 별안간 나부끼며 두 사람의 자태 를 어른어른 싸고도는 것이 마치 그들과 농을 하자는 것과 도 같다.

「그럼 우선 오늘부터 내 분부대로 움직이시오자 먼저 하 숙으로 갑시다.」

영옥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 같이 온전히 순도의 의지대 로 발을 떼어 놓았다.

「물론 오늘 문득 작정한 것이 아니라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지만」

영옥의 하숙에 이르렀을 때에 순도는 침착한 어조로 분부 가 아니라 선언을 하는 셈이었다.」

「얼른 짐을 싸시오. 오늘루 서울을 떠납시다. 불결한 분위 기를 시원하게 떠나서 고요한 속에서 장래의 계책을 다시 세웁시다.」

듣고 싶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었던 듯이 영옥은 한 마디 거 역은 새로 눈 한번 깜박거리는 법 없이 침착하게 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그 억센 고집도 어디로 갔는지 사랑의 말을 좇 는 그의 양은 어른 말에 순종하는 어린아이의 바로 그 양이 었다.

「어디로 가느냐구 묻지 마시오. 고향으로 가든 어디로 가 든 내게 맡기구 내 뒤만 따르시오.모든 준비 벌써부터 다 해가지구 있었던 거요.」

서울, 그것이 싫증이 난 영옥에게 초라한 하숙방이 도대체 미련이 남을 것이 없었다. 마치 잠간 걸어앉았던 대합실 벤 취를 떠나는 정도의 심사로 하숙을 나왔다. 두 짝의 트렁크 가 양편 손에 들렸을 뿐인개운한 나그네의 자태였다.

순도의 숙소에 들려 짐을 꾸려 가지고 차시간을 살펴 역까 지 나온 것은 오후를 훨씬 지나서였다. 거리에서 아무도 만 나지 않은 것도 요행으로 생각되었다.

어디까지가 한정인지 목적지 모를 두 장의 차표그것이 순 도의 손에 쥐인 것을 볼 뿐,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이 영옥은 순도의 뒤를 따라 기차 속에 몸을 던졌다. 하룻동안에 차례 차례로 급스럽게 일어난 모든 거동이 꿈속 일같이만 생각되 었다. 행여나 거짓말이나 아닌가 하고 영옥은 손으로 차창 을 만져 보았다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하면서 신기한 생각 에 가슴을 떨었다.

아직 해는 길었으나 이미 준비되어 있는 침대차에 올랐던 까닭에 그다지 번잡하게 서두르지도 않고 두 사람은 수월하 게 자리에 마주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말로 속임없 이 바라던 세상이 눈앞에 닥쳐 오는 것을 느끼며 영옥은 할 수 없이 마음속이 그뜩 차지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명령만 들어 왔으니 이번엔 제가 명령할 차례 예요제 질문에 곡 대답해 주세요.」

막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을 때 영옥은 응석을 하는 어린 아이 양으로 다따가 순도의 손을 잡았다.

「절 얼마나 생각하세요.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하늘만큼, 구슬이라면 그대로 입에 삼키고 싶소.」

시원스런 이 대답을 비록 짧기는 하건만 하늘 아래에서 가 장 행복스런 말로 느끼면서 영옥은 얼굴만이 아니라 전신에 다 함빡 미소를 머금었다.

「또 한 가지 분부」

별안간 정색을 하고 눈으로 창을 가리키면서,

「창을 닫혀 주세요. 그리구 휘장을 내리구.」

그러나 그 어여쁜 분부를 좇기 전에 순도는 그저 영옥의 상기된 볼을 마치 꽈리를 주무르듯 손가락 사이에 징긋이 집어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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