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고차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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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목차]
緖 論[서론]
第一期[제일기] 檀君時節[단군시절]
第一節[제일절] 檀君[단군]의 開國[개국]
第二節[제이절] 歷代[역대]의 治績[치적]
第三節[제삼절] 國疆[국강]의 發展[발전]
第四節[제사절] 當代[당대]의 物質的[물질적] 方面[방면]
第五節[제오절] 當代[당대]의 精神的[정신적] 方面[방면]
第六節[제육절] 漢土[한토] 方面[방면]의 交涉[교섭]
第二期[제이기] 夫餘時節[부여시절]
第一節[제일절] 符婁朝[부루조]의 創業[창업]
第二節[제이절] 遼西[요서] 河北[하북]의 貉人[맥인]
第三節[제삼절] 支那[지나] 沿海[연해] 植民地[식민지]
第四節[제사절] 徐偃王[서언왕]의 大陸[대륙] 經略[경략]
第五節[제오절] 淮上聯盟[회상연맹]의 潰散[궤산]
第六節[제육절] 漢僑[한교]의 興廢[흥폐] (一[일])
第七七[제칠칠] 漢僑[한교]의 興廢[흥폐] (二[이])
第八節[제팔절] 漢僑[한교]의 興廢[흥폐] (三[삼])
第九節[제구절] 漢僑[한교]의 興廢[흥폐] (四[사])
第一○節[제일공절] 漢人[한인]의 侵入[침입]에 對[대]한 民族的[민족적] 自覺[자각]
第十一節[제십일절] 夫[부] 餘[여]
第十二節[제십이절] .[읍] 婁[루]
第十三節[제십삼절] 沃[옥] 沮[저]
第十四節[제십사절] 滅[예] 貊[맥]
第十五節[제십오절] 句驪[구려]·眞番[진번]
第十六節[제십육절] 辰國[진국]·韓國[한국]
第十七節[제십칠절] 馬[마] 韓[한]
第十八節[제십팔절] 辰[진] 韓[한]
第十九節[제십구절] 弁[변] 韓[한]
第二○節[제이공절] 예
第二一節[제이일절] 夫餘[부여]의 東北[동북] 兩分[양분]
上古[상고] 槪觀[개관]
史[사]를 易言[이언]하며 易做[이주]하랴. 하물며 不才[부재]·無學[무 학]·減識[감식]이 余[여]와 如[여]한 者[자]로오녀. 다만 반만년의 壁光 [백광]이 愈沈愈.(유침유투)하되 憂之[우지]하는 者[자]와 無[무]하며, 不 然[불연]하기를 圖[도]하는 者[도] 尤.[우선]하니 是[시] 어찌 可[가]히 放置[방치]할 者[자]랴. 於是[어시]에 聞[문]을 八域[팔역]에 求[구]하며 神[신]을 千秋[천추]에 騁[빙]하여, 行住坐臥[행주좌와]에 是究是索[시구시 색]한 지 今[금] 一[일] ○[공]餘[여] 閱年[열년]이로다. 頃[경]에 少閒[소 한]을 因[인]하여 舊箚(구차)를 略整[약정]하매 더욱 短劣[단열]함을 覺 [각]할지라, 敢[감]히 手民[수민]을 勞[노]함은 써 自劾[자핵]을 代[대]함 이로라.
丙辰[병진] 夏[하] 五月[오월]에 江戶[강호] 客次[객차]에서 書[서]하다 (此篇[차편]은 재작년 東留時[동유시]에 屬草[속초]하여 釐正[이정]을 暇 [가]치 못한 것이요, 더욱 見解[견해]의 變移[변이]한 者[자] 少[소]치 아 니하나, 百冗[백용]이 身[신]에 在[재]하여 訂修[정수] 無期[무기]하기로 爲先[위선] 印[인]에 付[부]함.)
緖[서] 論[론]
專門家[전문가]의 設[설]을 據[거]하건대, 人類[인류]의 初生[초생]은 少 [소]하여도 수십만 년 前[전]이리라 하되, 靈慧[영혜] 開[개]하고 敎化[교 화] 始[시]하기는 실로 最近[최근]의 事[사]니, 從今[종금] 五[오]천 년 전 에만 溯上[소상]할지라도 능히 大朴[대박]을 免[면]한 民邦[민방]이 五指 [오지]에 .過(재과)할 뿐이라, 埃及[애급]이 泥溢[니일] 江畔[강반], 巴比 倫[파비윤]이 裕布羅[유포라] 江畔[강반], 印度[인도]가 恒河[항하] 沿岸 [연안], 支那[지나]가 黃河[황하] 沿岸[연안], 墨西哥[묵서가]가 微濕彼[미 습피] 江岸[강안]에서 文明[문명]의 開創者[개창자]로 각기 一方[일방]에 俊彩[준채]를 星馳[성치]하던 전후에, 別[별]로 一道[일도] 妙光[묘광]이 有[유]하여 白山[백산] 黑手[흑수]의 間[간]으로서 發[발]하니, 이는 곧 大 東文明[대동문명]의 百花頭[백화두]를 作[작]한 松花强飯[송화강반]의 古朝 鮮人[고조선인]이러라.
당시 朝鮮人[조선인]의 거주하던 境域[경역]은 자못 廣大[광대]하니, 松花 江[송화강]을 中心[중심]으로 하여 北[북]으로 黑龍江[흑룡강]·興安嶺[흥 안령]에 過[과]하고, 南[남]으로 黃河[황하] 近傍[근방], 半島[반도] 一局 [일국]을 合[합]한 延.(연무) 數十萬里地[수십만리지]에, 혹 長山[장산]을 依[의]하여 宅[택]하고 혹 大水[대수]를 挾[협]하여 居[거]한 團部[단부] 無數[무수]하니, 古傳[고전]에는 三千[삼천]으로써 그 數[수]의 多[다]함을 形容[형용]하니라.
朝鮮人[조선인]의 原住地[원주지]는 今[금]에 可考[가고]하지 못할지나, 要[요]하건대 遠西[원서]로 從[종]하여 東來[동래]하고 다시 南下[남하] 四 布[사포]한 者[자]니, 그의 先驅[선구]가 此[차] .沃[풍옥]한 山河[산하] 에 萬年[만년] 安住[안주]의 基[기]를 開[개]하기는, 少[소]하여도 五[오] 천 내지 六[육]천 년을 소급할 것이요, 邦國[방국]을 建[건]하고 治制[치 제]를 立[입]하기도, 거의 四[사]천 五[오]백 년 이전에 在[재]하니, 조선 인은 실로 原始的[원시적] 居住民[거주민]의 外[외]에 最先居住[최선거 주]·最古文明[최고문명]의 민족이라 할진서.
(1) 그네의 東來[동래] 南下[남하] 본디 一時[일시] 大團[대단]의 總集全 動[총집전동]이 아니라, 時[시]의 後先[후선], 路[로]의 南北[남북], 勢 [세]의 强弱[강약], 智[지]의 巧拙[교졸] 등 多般[다반] 層等[층등]이 有 [유]하며,
(2) 또 先住[선주] 혹 旁近[방근]의 異民[이민]으로 더불어 競爭[경쟁] 角 逐[각축]하는 동안에 勝者[승자]고 得意[득의]하기도 하고 敗者[패자]로 落 魄[낙백]하기도 하며,
(3) 또 奠居[전거]한 土地[토지]의 情形[정형]을 因[인]하여 文化[문화]의 進退[진퇴]와 風氣[풍기]의 文野[문야] 스스로 同一[동일]하지 못하니, 이 렁성저렁성한 種種[종종] 差異[차이]로 인하여 部屬[부속]이 各別[각별]하 고 名稱[명칭]이 自別[자별]하더라.
然[연]이나 三[삼]천 년 전 당시까지는 「주신」이란 總名下[총명하]에 諸 多種姓[제다종성]을 括稱[괄칭]하니, 그 原義[원의]는 今[금]에 未詳[미상] 하며, 漢字[한자]로 譯[역]하매 혹 肅愼[숙신]·肅.[숙신]·稷愼[직신]· 息愼[식신]으로 作[작]하고, 혹 熊辰[웅진]·肅然[숙연]·肅謹[숙근]으로 變[변]하였으며 中間[중간]에는 혹 .[맥]이란 名字中[명자중]에 統稱[통 칭]되니, .[맥]은 본디 遼河[요하] 四近[사근]에 거주하던「주신」人[인] 一族[일족]의 稱[칭]이로되 가장 漢人[한인]에 接近[접근]하므로, 漢人[한 인]이 혹 此[차]로써 「주신」人[인]을 統稱[통칭]함이러라(「주신」人[인] 中[중]에 점차로 强大[강대]한 幾多[기다] 邦國[방국]의 名稱[명칭]이 顯著 [현저]한 후에는 「주신」의 名[명]이 다만 不咸山[불함산] 北[북] 原始的 [원시적] 別部[별부]의 一名[일명]이 될 뿐이러라).
「주신」人[인]의 一[일], 二[이] 特色[특색]을 擧[거]하건대, 曰[왈] 軀 幹[구간]의 碩大[석대]함이니 故[고]로 大人[대인]의 名[명]을 得[득]하였 으며, 曰[왈] 性情[성정]의 慤厚(각후)함이니 故[고]로 善人[선인]의 名 [명]을 得[득]하였으며, 曰[왈] 道德[도덕]의 正大[정대]함이니 故[고]로 君子[군자]의 名[명]을 得[득]하였으며, 曰[왈] 壽限[수한]의 長久[장구]함 이니 故[고]로 不死[불사]의 名[명]을 得[득]하였도다. 그러나 최대 특색은 長弓[장궁] 强.(강노)로 射藝[사예]에 長[장]함이니, 漢子[한자]에 此方人 [차방인]을 夷[이]라 함은 弓大人[궁대인]을 意[의]함이러라.
【山海經[상해경] 大荒東經[대황동경]】 東海之外[동해지외], 大荒之中有 山[대황지중유산], 名曰大言[명왈대언], 日月所出[일월소출], 有波谷山者 [유파곡산자], 有大人之國[유대인지국], 有大人之市[유대인지시], 名曰大人 之堂[명왈대인지당], 有一大人[유일대인], .其上[준기상], 張其兩耳[장기 양이].
【山海經[상해경] 大荒北經[대황북경]】 大荒之中有山[대황지중유산], 名 曰不咸[명왈불함], 有肅愼氏之國[유숙신씨지국], 有蜚蛭四翼[유비질사익], 有蟲[유충], 獸首蛇身[수수사신], 名曰琴蟲[명왈금충], 有人[유인], 名曰大 人釐姓[명왈대인이성], 黍食[서식], 有大靑蛇黃頭食塵[유대청사황두식진], 有楡山[유유산], 有.功程州之山[유곤공정주지산].
【山海經[산해경] 海外東經[해외동경]】 大人國在其北[대인국재기북](謂 [위]()丘之北也[코지북야]), 爲人大[위인대], 坐而削船[좌이삭선]……. 君 子國在其北[군자국재기북], 衣冠帶劒[의관대검], 食獸[식수], 使二文虎在傍 [사이문호재방], 其人好讓不爭[기인호양부쟁], 有薰華草[유훈화초], 朝生夕 死[조생석사]. 【郭璞讚[곽박찬]】 東方氣仁[동방기인], 國有君子[국유군 자], 薰華是食[훈화시식], 雕虎是使[조호시사], 雅好禮讓[아호예양], 禮委 論理[예위논리].
【古今注[고금주]】 君子國[군자국], 地方千里[지방천리], 多木槿花[다목 근화].
【唐玄宗[당현종]】 謂新羅[위신라], 號爲君子之國[호위군자지국].
【淮南子[회남자]】 東方有君子之國[동방유군자지국].
【說文[설문] 鳳字註[봉자주]】 鳳神鳥也[봉신조야], 天老曰鳳之像也[천로 왈봉지상야], .前鹿後[인전녹후], 蛇頸魚尾[사경어미], 龍文龜背[용문귀 배], 燕..啄[연암계탁], 五色備擧[오색비거], 出於東方君子之國[출어동방 군자지국], .翔四海之外[고상사해지외], 過崑崙[과곤륜], 飮砥柱[음지주], 濯羽弱水莫宿風穴[탁우약수막숙풍혈], 見則天下大安寧[견칙천하대안녕].
【東方朔神異經[동방삭신이경]】 東方有人焉[동방유인언], 男皆縞帶玄冠 [남개호대현관], 女皆采衣[여개채의], 恒恭坐而不相犯[항공좌이부상범], 相 譽而不相毁[상예이부상훼], 見人有患[견인유환], 投死救之[투사구지], 倉卒 見之如癡[창졸견지여치], 名曰善人[명왈선인].
【說文[설문] 夷字解[이자해]】 夷[이], 東方之人也[동방지인야], .大. 弓[종대종궁]. 【段註[단주]】 ……按天大地大人亦大[안천대지대인역대], 大象人形[대상인형], 而夷篆.大[이이전종대], 則與夏不殊[칙여하부수], 夏 者中國之人也[하자중국지인야], .弓者[종궁자], 肅愼氏[숙신씨], 貢.矢石 .之類也[공고시석노지류야].
【說文[설문] .字解[강자해]】 南方蠻...[남방만민종충], 北方狄.犬 [북방적종견], 東方...[동방맥종치], 西方羌.羊[서방강종양], 此六種也 [차육종야], 西南.人.僥.人[서남북인초요종인], 盖在.地[개재신지], 頗 有順理之性[파유순이지성], 唯東夷.大[유동이종대], 大人也[대인야], 夷俗 人[이속인], 仁者壽[인자수], 有君子不死之國[유군자불사지국], 孔子曰道不 行[공자왈도불행], 欲之九夷[욕지구이], 乘.浮於海[승부부어해], 有以也 [유이야].
【段註[단주]】 天大地大人亦大[천대지대인역대], 故大象人形[고 대상인형], .焦僥[북초요], 略有人性[약유인성], 故進之[고진지], 字.人 [자종인], 東夷欲仁[동이욕인], 故又進之[고우진지], 字.大[자종대].
【後漢書[후한서] 東夷傳[동이전]】 王制云[왕제운], 東方曰夷[동방왈이], 夷者.也[이자저야], 言仁而好生[언인이호생], 萬物.地而出[만물저지이 출], 故天性柔順[고천성유순], 易外道御[이외도어], 至有君子不死之國焉[지 유군자불사지국언].
【風俗通[풍속통]】 東方人好生[동방인호생], 萬物.觸地而山[만물저촉지 리산], 夷者.也[이자저야], 其類有九[기류유구].
【黃海[황해] 紀異[기이] 五之一[오지일](出歷世眞仙體道通鑑[출역세진선 체도통감]】 黃帝[황제], 宮於洛水上[궁어낙수상], 坐玄扈石室[좌현호석 실], 與容光等內觀[여용광등내관], 忽有大鳥[홀유대조], 啣圖置於帝前[함도 치어제전], 帝再拜受之[제재배수지], 是鳥狀如鶴[시조상여학], ……其雄曰 鳳[기웅왈봉], 其雌曰凰[기자왈황], ……黃帝曰此鳥遇亂[황제왈차조우난], 則去居九夷矣[칙거거구이의], 出於東方君子之國[출어동방군자지국], ……帝 旣得龍鳳神市時代[제기득신시시대]의 대표적 英主[영주]는 桓雄天王[환웅천 왕]이시니, 異族[이족] 同化[동화]에 가장 注力[주력]하사 南强北頑[남강북 완]이 다 化[화]에 吸[흡]하였으며, 親[친]히 그중의 一族[일족]인 神態氏 [신태씨] 婚[혼]하여 子[자]를 生[생]하시니 곧 後[후]의 壬儉[임검]이시 라. 神德[신덕]과 雄略[웅략]이 有[유]하여 國勢[국세] 더욱 振張[진장]하 매 八方[팔방]이 歸鄕[귀향]하여 共戴[공대]를 咸願[함원]하니, 이는 곧 第 一世[제일세] 檀君[단군]이시라, 大東[대동] 首出[수출]의 君邦[군방]이요 支那[지나]의 國祖[국조] 堯[요]에 先[선]하기 累百年[누백년] 전이러라. 대개 당시는 世運[세운]이 아직 古樸[고박]하므로 後世[후세]와 如[여]히 國號[국호]를 別入[별입]하지 아니하고 地名[지명]을 仍用[잉용]한 듯하니, 檀[단]은 原訓[원훈]으로 「배달」 혹 「박달」이라 하여 白山[백산] 곧 奠 都地[전도지]의 名[명]이며, 또 主上[주상]의 稱號[칭호]도 特殊[특수] 箇 別[개별]한 것이 無[무]한 듯하며, 다만 世世[세세]에 「임검」으로써 稱 [칭]하니, 임은 主[주]의 義[의]요 검은 神[신]의 義[의]로, 合[합]하면 神 聖[신성]하신 主人[주인]의 義[의]를 成[성]하는 것이라 써 當時[당시]의 祭政一致[제정일치]임을 窺見[규견]할지니라.
後人[후인]이 此[차]를 君[군]으로 譯[역]하고 또 國號[국호]를 冠[관]하 여 檀[단]으로써 幷稱[병칭]하니, 檀君[단군]의 名[명]은 실로 後人[후인] 의 稱謂[칭위]함이며, 또 一世[일세] 一人[일인]의 專名[전명]이 아니라 歷 代[역대] 임검의 總名[총명]이러라.
임검을 漢譯[한역]하여 壬儉[임검]으로 傳[전]하고 訛[와]하여 王儉[왕검] 으로 轉[전]하니라.
古傳[고전]에 太白山[태백산] 檀木下[단목하]에 神人[신인]이 下降[하강] 하매 國人[국인]이 奉立[봉립]하여 君長[군장]을 삼고 檀下[단하]에 降[강] 하였으므로 號[호]를 檀君[단군]이라 하였다 하며, 又云[우운]하되 初[초] 에 平壤[평양]에 都[도]하고 後[후] 白岳[백악]으로 徙[사]하였다 하나, 按 [안]컨대 北人[북인]의 古語[고어]에 山岳[산악] 又[우] 高處[고처]를 「達 [달]」이라 하고, 今[금] 滿洲語[만주어]에도 高山[고산]을 「哈達[합달]」 이라고 하므로, 推[추]하건대 檀[단]을 「박달」 혹 「배달」이라고 訓讀 [훈독]하여 太白山[태백산]과 語源[어원]을하여 同[동]히 함이 明[명]하며, 移都地[이도지]라는 白岳[백악]도 訓讀[훈독]하여 「백달」임으로써 古[고] 의 檀[단] 今[금]의 太白山[태백산]과 同語[동어] 異譯[이역]임을 見[견]할 지니, 要[요]하건대 檀[단]이니 白岳[백악]이니 하는 것이 總[총]히 「배 달」 혹 「박달」이라는 國名[국명]이요, 後世[후세]에 此[차] 語義[어의] 를 失[실]하여 檀木云云[단목운운], 移都云云[이도운운]의 種種[종종] 附會 設[부회설]이 生[생]한 것이요, 또 檀君[단군]을 個人[개인]으로 錯認[착 인]함도 대개 檀[단]의 國名[국명]임을 知[지]치 못함에 由[유]한 것이니 라.
太白山[태백산]에 대하여 古來[고래]로 衆見[중견]이 구구하나, 太白山[태 백산] 一端[일단]뿐 아니라 檀君[단군]의 古記[고기]는 總[총]히 天降[천 강]을 中心事實[중심사실] 삼아 解釋[해석]할지니, 〈三國遺事[삼국유사]〉 에 見[견]한 「古朝鮮[고조선]」 一文[일문]을 如是[여시]히 讀[독]하면 理 義[이의] 明白[명백]하여 爭端[쟁단]이 快解[쾌해]함을 見[견]할지라, 그 「桓國[환국]」이라 云[운]함이 天國[천국]의 譯[역]임은 下文[하문]의 「天下[천하]」 「人間[인간]」 「天符[천부]」 「天王[천왕]」 等語[등어] 의 照應[조응]으로써 煥然[환연]히 覺[각]할 것이요, 一部[일부] 學者[학 자]의 設[설]과 如[여]히 〈地藏經[지장경]〉의 事實[사실]을 假冒[가모]한 것 아님은 무론이며, 檀[단]이 곧 白岳[백악]이요 白岳[백악]이 곧 太白山 [태백산]임은 前文[전문]에 略辨[약변]하였거니와 白岳[백악] 곧 「박달」 의 原義[원의]를 探[탐]하건대 「퉁구스」 語族中[어족중]의 滿洲語[만주 어]에 天[천]을 Abka(압카)라 하고 또 他方語[타방어]에 Boa(보아)·Buka (부카)·Buga(부까)라 하나니, 「박달」의 박이 곧 「보아」 혹 「부카」와 同語源[동어원]되는 天[천]의 意[의]도 「박달」이 곧 天山[천산]을 意[의] 하는 語[어]일지요, 또 〈山海經[산해경]〉에 見[견]한 不咸山[불함산]의 不咸[불함]도 實[실]로 Buka.Buga의 譯字[역자]됨을 知[지]할지라 不咸山 [불함산]의 太白山[태백산]임은 古今[고금]에 異說[이설]이 無[무]한 바니, 檀君[단군] 初降[초강]의 太白山[태백산]이 北咸山[북함산] 곧 今[금] 白頭 山[백두산](又[우] 長白山[장백산])임은 自明[자명]의 理[이]라 할 것이라. 대저 東方[동방]에 在[재]하여 神山[신산] 靈岳[영악]으로 古今[고금]을 통 하여 가장 크게 敬畏[경외]되는 者[자]는 白頭山[백두산]이니, 〈魏書[위 서]〉에 「勿吉國南[물길국남], 有徒太山[유도태산], 魏言太白[위언태백], 有虎豹()狼[유호표태랑], 不害人[불해인], 人不得上山.汚[인불득산상수 오], 行經山者[행경산자], 皆以物盛去[개이물성거]라 함과 〈北史[북사]〉 에 靺鞨國南[말갈국남], 有從太山上[유종태산](安魏書隋書俱作徒太山通考與 此同[안위서수서구작도태산통고여차동]), 華言太皇[화언태황](安魏書作太白 與此異[안위서작태백여차이]), 俗甚敬畏之有[속심경외지], 人不得山上.汚 [인불득산상수오], 行經山者[행경산자], 以物盛去[이물성거], 上有().豹狼 [상유태비표랑], 皆不害人[개불해인], 人亦不敢殺[인역불감살]」이라 한 等 [등]처럼, 古來[고래]로 旁近民庶[방근민서]의 仰景[앙경]하는 對象[대상] 이 되는 것은 필경 遠古[원고]로부터 이렇듯한 神聖[신성]한 傳說[전설]을 有[유]한 故[고]일지요, 後[후]에 扶餘[부여]·高句麗[고구려]·渤海[발해] 와, 가깝게는 金[금].淸[청] 諸朝[제조]의 建國者[건국자]가 다 此山[차산] 으로써 發祥地[발상지]를 삼고 兼[겸]하여 天降[천강]의 奇蹟[기적]을 附設 [부설]함은, 檀君[단군] 아래 人心[인심]에 浹洽(협흡)한 傳說[전설]을 蹈 襲[도습] 利用[이용]함에 불과한 것이니, 古[고]의 太白[태백]이 今[금]의 白頭[백두]임은 於此[어차]에 較著[교저]하다 할 것이요, 山上[산상]의 大 澤[대택]을 天池[천지]라 云[운]함과 豆滿[두만].土門[토문]의 北[북]과 鴨 綠[압록].波.(파저)의 西[서]와 混同[혼동] 左右[좌우]의 地[지] 곧 白山 [백산]의 周圍[주위]에 天坪[천평]이란 名[명]이 有[유]함과 松阿.烏喇[송 아리오나] 곧 松花江[송화강]이 滿洲語[만주어]로 天河[천하]의 意[의]임 과, 吉林[길림]이 凶奴語[흉노어]의 天[천]이요 吉林烏喇[길림오나]이라 하 면 天江[천강]을 의미함임과, 松花江源[송화강원]의 大澤[대택]으로서 發 [발]하는 者[자]에 天下水[천하수]란 名[명]이 有[유]한 등, 白頭山邊[백두 산변]의 山野河川[산야하천]이 總[총]히 天[천]의 意[의]를 有[유]함도 결 코 偶爾[우이]함이 아닐지니, 白岳[백악] 곧 天山[천산]을 今[금]의 白頭 [백두] 以外[이외]에 求[구]함이 不當[부당]한 줄을 더욱 明知[명지]할지니 라.
天降[천강]의 意[의]는 解釋[해석]이 人異[인이]하려니와, 대개 上天[상 천]으로써 信仰[신앙]의 對象[대상]을 삼는 高文明[고문명]의 民族[민족]으 로 比較的[비교적] 低文明[저문명]의 異族[이족] 原住地[원주지]에 移來[이 래]한 事蹟[사적]을 神話化[신화화]한 것일지며, 또 一方[일방]으로는 그 歷史[역사]의 基點[기점]이 天山[천산] 곧 白山[백산]에서 始[시]하여 점차 로 下界[하계] 곧 松花江[송화강]의 下流方面[하류방면]으로 發展[발전]한 事實[사실]을 象徵[상징]하는 一[일] 資料[자료]가 된다 할지니라.
【三國遺事[삼국유사] 古朝鮮[고조선](王儉朝鮮[왕검조선])】 魏書云[위서 운], 乃往二千載[내왕이천재], 有檀君王儉[유단군왕검], 立都阿斯達[입도아 사달](經云[경운]), 無葉山[무엽산], 亦云白岳[역운백악], 在白州地[재백주 지], 或云在闕城東[혹운재궐성동], 今白岳宮是[금백악궁시]), 開國號朝鮮 [개국호조선], 與高同時[여고동시], 古記云[고기운], 昔有桓國[석유환국] (謂帝釋也[위제석야]), 庶子桓雄[서자환웅], 數意天下[수의천하], 貪求人世 [탐구인세], 父知子意[부지자의], 下視三危太伯[하시삼위태백], 可以弘益人 間[가이홍익인간], 乃授天符印三箇[내수천부인삼개], 遣往理之[견왕이지], 雄率徒三千[웅솔도삼천], 降於太白山頂[강어태백산정](.太伯今妙香山[즉태 백금묘향산]), 神檀樹下[신단수하], 謂之神市[위지신시], 是謂桓雄天王也 [시위환웅천왕야], 將風伯雨師雲師[장풍백우사운사],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 善惡[이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범주인간삼백육십 여사], 在世理化[재세이화], 時有一熊一虎[시유일웅일호], 同穴而居[동혈이 거], 常祈于神雄[상기우신웅], 願化爲人[원화위인], 時神遺靈艾一炷[시신유 령애일주], 蒜二十枚[산이십매], 曰爾輩食之[왈이배식지], 不見日光百日[불 견일광백일], 便得人形[편득인형], 熊虎得而食之[웅호득이식지], 忌三七日 [기삼칠일], 熊得女身[웅득여신], 虎不能忌[호불능기], 而不得人身[이불득 인신], 熊女者無與爲婚[웅여자무여위혼], 故每於檀樹下[고매어단수하], 呪 願有孕[주원유잉], 雄乃假化而婚之[웅내가화이혼지], 孕生子[잉생자], 號曰 檀君主儉[호왈단군주검], 以唐高.位五十年庚寅[이당고즉위오십년경인](唐 高.位元年戊辰[당고즉위원년무진], 則五十年丁巳[칙오십년정사], 非庚寅也 [비경인야], 疑其未實[의기미실])都平壤城[도평양성](今西京[금서경]), 始 稱朝鮮[시칭조선],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우이도어백악산아사달], 又名弓 [우명궁](一作方[일작방])忽山[홀산], 又今彌達[우금미달], 御國一千五百年 [어국일천오백년], 周虎王.位己卯[주호왕즉위기묘], 封箕子於朝鮮[봉기자 어조선], 壇君乃移於藏唐京[단군내이어장당경],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후환 은어아사달위산신], 壽一千九百八歲[수일천구백팔세].
【北塞記略[북새기략]】 自長坡至分水嶺[자장파지분수령], 地勢平夷[지세 평이], 通謂之天坪[통위지천평], 而天坪之上[이천평지상], 已見高山大嶽[이 견고산대악], 皆在膝下[개재슬하], 自分水至絶頂[자분수지절정], 又直上八 九里[우직상팔구리], 其高也旣如此[기고야기여차], 天坪之在我地者無慮數百 里[천평지재아지자무려수백리], 且豆江土門之北[차두강토문지북], 鴨綠波. 之西[압록파저지서], 混同左右之地[혼동좌우지지], 無非天坪[무비천평], 而 天坪無非白山[이천평무비백산], 其廣也又如此[기광야우여차], 往往大池散布 於天坪四面[왕왕대지산포어천평사면], 臨望燦燦若星宿之羅列[임망찬찬약성 숙지나열].
第二節[제이절] 歷代[역대]의 治績[치적]]
[편집]檀君[단군]의 治世[치세]는 一[일]천 五[오]백 년 이상을 算[산]하나니, 歷代[역대]의 數[수]를 可考[가고]치 못하나 대개 五○許代[오공허대]에 下 [하]치 아니할지라, 樸鹵淳.(박로순방)한 上世[상세]이매 宏大[굉대]한 事 變[사변]은 無[무]하였으려니와, 이렇듯 長久[장구]한 歷年[역년]에 內[내] 로 化外[화외]의 梗民[경민]도 無[무]치 아니하고 外[외]로 異方[이방]의 征伐[정벌]도 無[무]치 아니하였을 터인즉, 幾多[기다]의 英雄[영웅]이 응 당 此間[차간]에 활약하고 幾多[기다]의 파란이 응당 此中[차중]에 駭跳[해 도]하였겠지마는, 오직 國初[국초]에 西南[서남] .鹿(탁록)의 野[야]에서 漢族[한족]의 軒轅氏(헌원씨)로 더불어 震天.地[진천감지]의 大活劇[대활 극]을 演出[연출]하여, 半分[반분]은 이미 神話化[신화화]한 蚩尤(치우)一 族[일족]이 幸傳[행전]하는 以外[이외]에는 文籍[문적]이 此[차]를 傳[전] 치 아니하고 山河[산하]가 此[차]를 語[어]치 못하는도다.
政治[정치] 方面[방면]을 察[찰]하건대, 當代[당대]의 最大[최대] 政事[정 사]는 群族[군족] 統制[통제]와 野人[야인] 導化[도화]니, 第一世[제일세] 檀君[단군]의 初政[초정]은 아직 敎化[교화]에 浴[욕]하지 아니한 者[자]에 게 編髮[편발] 盖首[개수]를 命[명]하고, 宮室[궁실] 飮食[음식]을 制[제] 하고 사회 생활상 必須[필수]한 禮節[예절]을 敎[교]함이라 이는 다 同化 [동화] 進明上[진명상]의 急先務[급선무]며, 匪西岬[비서갑]의 女[여]를 娶 [취]하였음은 桓雄天王[환웅천왕]의 神熊氏[신웅씨]를 妻[처]함과 如[여]히 同化[동화]함 異族[이족]에게 和好[화호]의 意[의]를 躬示[궁시]함이며, 또 山川[산천] 整理[정리].道路[도로] 開鑿[개착].農藝[농예] 普及[보급] 등 生民奠接上[생민전접상] 要務[요무]를 시행하였더라. 嗣後[사후]의 壬儉[임 검]이 此[차] 齊民[제민].養民[양민]의 兩大[양대] 綱領[강령]으로써 世謨 [세모]를 作[작]하였을 것은 自明[자명]의 理[리]라 할지로다.
당시의 年代[연대]를 臆斷[억단]하지 못할지라, 檀朝[단조] 一[일]천 五 [오]백 년간을 三段[삼단]에 均分[균분]하여 上[상].中[중].荷葉[하엽]의 名[명]으로써 大勢[대세]를 斟酌[짐작]하겠노라.
第三節[제삼절] 國疆[국강]의 發展[발전]
[편집]當代[당대]의 疆理[강리]가 初[초]에는 處女林[처녀림] .鬱[총울]한 松花 江[송화강] 上流[상류]의 谷地[곡지]였으나, 異民[이민]의 來歸[내귀]도 世 [세]로 增[증]하고 外域[외역]의 進取[진취]도 代[대]로 加[가]하였으며, 中葉[중엽] 이후로는 四方[사방]의 발전이 더욱 ..(침침)하였더라.
江流[강류]를 順[순]하여 北進[북진]한 者[자]는 濊[예](一作蔿[일작위]) 의 名[명]을 得[득]하고, 土門[토문]의 峽[협]으로 東進[동진]한 者[자]는 沃沮[옥저]의 名[명]을 得[득]하고, 鴨綠[압록]의 谷[곡]으로 西進[서진]한 者[자]는 貊[맥](()貊[맥])의 名[명]을 得[득]하니, 種族[종족]의 本源[본 원]이 同[동]하므로 法俗[법속]이 대개 同一[동일]하였으며, 貊人[맥인]의 南下[남하]하여 半島[반도]로 入[입]한 者[자]는 .[한](후에 韓[한]이니 아울러 桓[환]의 異稱[이칭] 곧 天降[천강]을 표시하는 語[어])의 名[명]을 得[득]하고, 또 그 黃河[황하].遼河[요하]의 間[간]과 渤海[발해].黃海[황 해]의 岸[안]에 進居[진거]한 者[자]는 漢族[한족]에게 東夷[동이]의 名 [명]을 得[득]하니, 이는 대개 中葉[중엽]으로부터 末葉[말엽]에 至[지]하 는 동안의 推移[추이]러라.
東夷[동이]에 廣狹[광협] 二義[이의]가 有[유]하니, 廣用[광용]할 時[시] 엔 支那[지나] 以東[이동] 諸民族[제민족]의 總名[총명]이요, 狹用[협용]하 면 支那[지나] 內陸[내륙]에 雜居[잡거]하는 古朝鮮人[고조선인]의 稱謂[칭 위]가 되나니라.
半島[반도]로 入[입]하여 韓[한]을 成[성]한 者[자]는, 南下[남하]하는 歷 路[역로] 處處[처처]에 別部[별부]를 自建[자건]하니, 時代[시대]의 先後 [선후]는 總[총]히 可考[가고]치 못할지나, 鴨綠江上[압록강상]에 團居[단 거]한 者[자]도 有[유]하며, 亞耳山下[아이산하]에 團居[단거]한 者[자]도 有[유]하며, 大同江上[대동강상]에 團居[단거]한 者[자]도 有[유]하며, 九 月山下[구월산하]에 團居[단거]한 者[자]도 有[유]하며, 점차로 南進[남진] 하여 四方[사방]에 割據[할거]하였는데, 그 漢水[한수] 以化[이화]의 者 [자]는 末年[말년]에 至[지]하여 대개 漢民族[한민족]의 侵破[침파]를 被 [피]하여, 舊疆[구강]을 株守[주수]한 者[자]는 漢邦[한방]에 雜居[잡거]하 고 自主[자주]를 希求[희구]하는 者[자]는 東南[동남]으고 遷徙[천사]하였 더라. 平壤[평양]에서 仙人[선인]의 號[호]를 得[득]하고, 阿斯達[아사달] 에서 神人[신인]의 號[호]를 得[득]하고, 穴口[혈구]에 三郞城[삼랑성]을 築[축]한 者[자]는 다 此[차] 南下[남하]한 一支[일지]의 事[사]러라. 寧邊[영변]의 妙香山[묘향산](古名[고명] 太伯山[태백산])과 江東[강동]의 大朴山[대박산] 등이다 그 一派[일파] 一時[일시]의 遺蹟地[유적지]일지니, 그 檀君窟[단군굴]이라 함과 檀君墓[단군묘]라 함이 얼마큼 所以[소이]가 有[유]할 것이요, 반드시 架空[가공]의 設[설]이라 하여 一筆抹去[일필말 거]할 것 아니니라.
第四節[제사절] 當代[당대]의 物質的[물질적] 方面[방면]
[편집]當代[당대]의 文化[문화]를 考[고]하건대, 土地[토지]의 情形[정형]을 因 [인]하여 開化[개화]의 早晩[조만]이 大別[대별]하고, 時世[시세]의 遷易 [천이]을 隨[수]하여 文明[문명]의 程度[정도] 顯異[현이]하더라. 長江[장강] 大澤[대택]은 漁撈[어노]에 宜[의]하고, 叢樹[총수] 密林[밀 림]은 狩獵[수렵]에 宜[의]하고, 平原[평원] 沃土[옥토]는 耕作[경작]에 宜 [의]하여 생활의 資料[자료]를 所在[소재]에 易得[이득]하므로, 文明[문명] 의 發達[발달]이 자못 早速[조속]하고 松花江畔[송화강반]의 農業地方[농업 지방]이 尤然[우연]하니, 後[후]에 夫餘[부여]는 실로 此中[차중]에 建成 [건성]한 文明國[문명국]이니라.
桓族[환족]은 神市時代[신시시대]로부터 이미 農藝[농예]와 牧畜[목축]을 業[업]하였으나, 四旁[사방]의 異民[이민]은 대개 射獵[사렵]으로써 생활 수단을 作[작]하였으며, 平敞[평창]한 地[지]에는 곧 농업이 布施[포시]되 었으나 東北方[동북방] 峽地[협지]에는 地勢[지세]로 인하여 許久[허구]한 동안 射獵[사렵] 主業[주업]의 風[풍]이 改[개]치 아니하였으며, 衣服[의 복]은 從古[종고]로 皮卉[피훼]를 幷用[병용]하니, 대개 冬[동]에는 貂[초] .豹[표]의 皮[피](곧 소위 文皮[문피])와 夏[하]에는 雄常[웅상]의 布[포] 를 着用[착용]하였으며, 居處[거처]는 기후의 관계로 대개 土室[토실]을 作 [작]하니, 炎苦[염고]보다 寒苦[한고]가 甚[심]함으로 以[이]함이며, 半島 [반도] 南部[남부]에 移住[이주]한 者[자]오 당초에는 土室[토실]의 舊習 [구습]을 去[거]치 못하였으며, 西南[서남] 農業地方[농업지방]은 中葉[중 엽] 이후로 宮室[궁실]의 制[제]가 크게 發達[발달]하였으되, 東北[동북]의 山林[산림] .寒[호한]의 地[지]에는 後年[후년]까지도 半穴居[반혈거]의 風[풍]이 遺存[유존]하였으며, 上葉[상엽]에는 馴鹿[순록]으로써 運輸交通 [운수교통]의 役[역]을 供[공]케 하였으나 점차 牛馬[우마]로 代[대]하였으 며, 牧畜[목축]이 자못 성하여 猪[저].羊[양]의 數[수]가 중요한 財産[재 산]이 되더라.
第五節[제오절] 當代[당대]의 精神的[정신적] 方面[방면]
[편집]人民[인민]의 氣習[기습]은 彊勇奮義[강용분의]하며 勤勉力作[근면역작]하 며, 또 歡呼[환호] 聚樂[취락]을 好[호]하여 統言[통언]하면 沒我的[몰아 적]의 一面[일면]과 樂天的[낙천적]의 一面[일면]을 有[유]한 單純質直[단 순질직]한 人民[인민]이며, 此[차] 氣風[기풍]이 社會生活[사회생활]을 長 養[장양]하기에 適合[적합]한고로 祭祀[제사] 儀式[의식]과 音曲[음곡] 歌 舞[가무]는 上古[상고]로부터 자못 발달하였으며, 西南[서남]에 遷徙[천사] 한 者[자]도 此[차] 北方的[북방적] 특색을 영구히 保持[보지]하였더라. 未開[미개]한 部族[부족]에는 雜神[잡신]을 事[사]하는 風[풍]도 有[유]하 고, 山岳[산악] 重疊[중첩]한 地方[지방]에는 山神[산신] 崇拜[숭배]의 風 [풍]이 例有[예유]하되, 桓族[환족]과 및 그 直統[직통]을 傳[전]한 人民 [인민]은 스스로 天帝[천제]의 裔[예]임을 信[신]하므로, 自初[자초]로 拜 天[배천]의 信仰[신앙]을 有[유]하여 혹 肇國[조국]의 靈山[영산]과 혹 光 國[광국]의 偉人[위인]을 天[천]에 配[배]하여 崇奉[숭봉]하니, 실로 天帝 .是皇祖[천제즉시황조]로 拜天[배천]과 崇祖[숭조] 本一不二[본일불이]인 信仰[신앙]을 有[유]하였으며(太白山[태백산] 崇敬[숭경]의 俗[속]은 금일 에까지 변함이 없도록 根基[근기]가 深固[심고]한 것이니, 그 舊名[구명] 不咸[불함] 北語[북어]로 天[천]의 義[의]라 곧 山[산]으로 天[천]에 配 [배]함이요, 後[후]에 高句麗[고구려]에서 天祭[천제]를 東盟[동맹]이라 함 은 國祖[국조] 東明[동명]의 國語[국어]니 곧 人[인]을 天[천]에 配[배]함 이라), 祭天[제천]의 節日[절일]은 매양 擧國[거국] 聚樂[취락]의 社交的 [사교적] 性質[성질]을 帶[대]하였으며, 神市時代[신시시대]로부터 祭壇[제 단]을 반드시 深山高峰[심산고봉]에 淨造[정조]하고, 民[민]을 會[회]하여 敬拜[경배]하는 風[풍]이 有[유]하니 穴口[혈구]의 塹城檀[참성단]은 곧 南 下[남하]한 一支[일지]의 築造[축조]한 바러라.
天[천]을 하늘, 漢譯[한역]하여 桓[환]이라 함은 곧 大世界[대세계] 或 [혹] 宇宙[우주]의 義[의]니, 檀人[단인]은 대개 하늘로서 原降[원강]하여 하늘로 終歸[종귀]함을 信[신]하였으며, 人世[인세]에 降[강]하기는 救厄弘 益[구액홍익]하기 爲[위]함이라 하더라.
吉凶[길흉]을 判[판]함에는 神占[신점]이 有[유]하며 善惡[선악]을 懲[징] 함에는 刑賞[형상]이 有[유]하며, 勸農[권농]과 授時[수시]의 政[정]은 神 市時代[신시시대]로부터 매우 重視[중시]하였더라.
當代[당대]의 藝術[예술]이 심히 素樸[소박]하였음은 想見[상견]키 難[난] 치 아니하나, 陶術[도술]은 자못 夙達[숙달]하여 種種[종종]의 伎巧[기교] 를 生[생]하였으며, 文樣[문양].繪畵[회화] 혹 彫刻[조각]의 傳[전]하는 것 은 無[무]하나, 少[소]하여도 布匹皮服[포필피복].弓身矢頭[궁신시두] 등의 장식에 응당 相當[상당]한 藝術的[예술적] 情調[정조]가 表現[표현]하였을 것이며, 今[금]에 當代[당대] 美德[미덕]의 一斑[일반]을 窺伺(규사)할 者 [자]는 오직 東北[동북] 滿洲[만주]에서 발견하는 諸種[제종] 石器[석기], 더욱 石鏃[석족]의 模樣[모양]뿐일지로다.
文字[문자]의 有無[유무]는 당시에 神誌[신지]란 職[직]이 有[유]하여, 宗 敎上[종교상] 豫言[예언]과 古事[고사] 傳授[전수] 등을 掌[장]함을 古記 [고기]가 전하니, 國初[국초]부터는 아니라 할지라도 檀君時節[단군시절]에 이미 思想[사상] 傳達[전달]의 有形的[유형적] 一方法[일방법]이 有[유]함 은 사실일지요, 末葉[말엽]부터 漢土[한토]의 교통이 점차 頻數[빈수]하였 은즉, 발달 초기에 在[재]하던 漢子[한자] 諸種[제종] 機會[기회]에 稍稍 [초초] 入來[입래]하였을까 하노라. 歌唱[가창]은 「주신」人[인]의 原時的 [원시적] 嗜好[기호]인즉, 歌曲[가곡]이 심히 풍부하였음을 設想[설상]할지 니라.
古記[고기]에 當時[당시] 治理[치리]의 目[목]이 三六.餘條[삼육공여조] 임을 傳[전]하니, 規模[규모]의 備[비]함을 謂[위]함인가 하노라.
第六節[제육절] 漢土[한토] 方面[방면]의 交涉[교섭]
[편집]「주신」人[인]의 同化力[동화력]과 繁殖力[번신력]은 자못 왕성하여 千有 餘年間[천유여년간] 統攝[통섭]과 發展[발전]이 일찍 停息[정식]하지 아니 하였으며, 上古[상고]로부터 遼水[요수].黃河[황하]의 間[간]에까지 遍居 [편거]하고, 더욱 北支那[북지나] 一帶[일대]에서는 漢人[한인]이 建邦設都 [건방설도]하기 前[전]으로부터 遠近[원근]에 雜居[잡거]하니 本國[본국]에 自居[자거]하는 者[자]를 漢人[한인]이 肅愼[숙신]으로써 呼[호]하고, 漢土 [한토]에 雜居[잡거]하는 者[자]를 東北夷[동북이]라 稱[칭]하였더라. 漢土[한토]에는 距今[거금] 약 四[사]천 三[삼]백 년 前[전]에야 黃河[황 하] 沿岸[연안]에 君邦[군방]이 稍成[초성]하여 初[초]에는 賢能[현능]이 迭替[질체]하는 制度[제도]로, 다만 民望[민망]의 趨嚮[추향]을 從[종]할 뿐이요 種族[종족]의 異同[이동]을 拘[구]치 아니하니, 我國[아국] 初[초] 에 初後[초후]하여 手建[수건]한 君邦[군방]을 唐[당]의 堯[요]라하며, 東 夷[동이]의 人[인]인 虞[우]의 舜[순]이 그의 後[후]를 繼[계]하였으며, 또 그 後繼者[후계자]를 夏[하]의 禹[우]라 하니 君主[군주] 世襲[세습]의 制 [제] 此代[차대]에 始[시]하였으며, 夏禹[하우]는 疆土恢拓[강토회척]에 크 게 功業[공업]을 成[성]하였으나, 國內[국내] 四方[사방]에 異民族[이민족] 의 別部[별부] 오히려 甚多[심다]하고, 더욱 東夷[동이] 혹 東北夷[동북이] 로써 稱[칭]하는 「주신」人[인]의 植民地[식민지]는 黃河[황하]의 北[북] 과 東北[동북] 海上[해상]의 到處[도처]에 존재하고 隨[수]하여 피차 교섭 의 端[단]이 滋多[자다]하였드며, 中葉末[중엽말]에 夏[하] 亡[망]하고 殷 [은]이 代[대]하매 夷人[이인]의 세력이 더욱 寢盛[침성]하였더라.
中葉[중엽] 이후로 漢人[한인]에게 著名[저명]한 者[자]는 北陸方面[북륙 방면]에 稷愼[직신](곧 주신 本國[본국]).符婁[부루](一作[일작] 鳧臾(부 유) 즉 夫餘[부여]).濊[예].貊[맥].玄都[현도].良夷[양이].高夷[고이].. [유].發[발].孤竹[고죽] 등이요, 恒山[항산] 南北[남북]에서 漢族[한족]과 雜處[잡처]한 者[자]에는 .(예)..夷(견이).于夷(우이).方夷(방이).藍夷 (남이) 등이 有[유]하고, 東海[동해] 方面[방면]에는 靑丘[청구].周頭[주 두](이상 渤海[발해] 沿岸[연안]).島夷[도이].萊夷[내이]..夷[우이](이상 山東半島[산동반도] 及[급] 海上[해상]) 등이니, 支那人[지나인]은 九夷[구 이]의 稱[칭]으로써 數[수]의 多[다]함을 形容[형용]하였으며, 이렇듯 名號 [명호]의 殊異[수이]함은 대개 長久[장구]한 세월, 허다한 歷路[역로]에 혹 外界[외계]의 事情[사정]과 혹 異族[이족]의 混和[혼화]로 인하여 풍속과 언어에 種種[종종] 차별이 生[생]한 故[고]러라.
此等[차등] 「주신」人[인]은 다만 一民團[일민단]으로 생활하였을 뿐 아 니라, 漢族[한족]의 국가에 대하여 정치적 간섭도 少[소]하지 아니하였으 며, 대개 武勇[무용]으로써 漢人[한인]의 畏憚(외탄)하는 바 되어, 항상 厚 賄[후회]와 重禮[중예]로써 親和[친화]를 來乞[내걸]하였으며, 彼此[피차] 의 土産[토산] 交易[교역]은 自古[자고]로 자못 활발히 행하니, 我[아]의 往販物[왕판물]은 古今[고금] 없이 皮毛[피모]가 爲主[위주]요, 만일 〈尙 書[상서]〉 禹貢[우공]의 記載[기재] 진실로 三代[삼대] 以前[이전]의 事 [사]를 傳[전]하는 것이라 하면, 我[아] 海上[해상] 移住民[이주민]의 漢人 [한인]과 교역하던 物目[물목]이 다시 幾種[기종]을 加[가]하리니, 「冀州 島夷皮服[기주도이피복]」이란 것은 〈通鑑[통감]〉 前編[전편].〈書經[서 경]〉 集傳[집전] 등의 해석과 如[여]히 〈爾雅[이아]〉의 이른바 「東北方 之文皮[동북방지문피]」 곧 ..(비비)의 皮[피]요, 「揚州島夷卉服[양주도 이훼복]」은 곧 .葛苧初[치갈저초]의 屬[속]이며, 此外[차외] .珠[빈주]. 纖縞[섬호](纖[섬]은 黑經[흑경] 白緯[백위], 縞[호]는 素[소]).織貝[직 패](錦名[직명] 或云[혹운] 細布[세포]).柚橘[유귤] 등 天産[천산] 及[급] 加工品[가공품]이 有[유]하였더라.
之圖書蒼.之文[지도서창힐지문], .制文字[즉제문자], 以代結繩之政[이대 결승지정], 以作書契[이작서계]…….
按[안]하니, 以上[이상] 諸條[제조]는 春秋[춘추]·奏[주]·漢間[한간] 支那人[지나인]의 書[서]에 散見[산견]하는 者[자]니, 그 流傳[유전] 稱說 [칭설]이 반드시 久遠[구원]한 것일지라, 古代[고대] 支那人[지나인]의 此 方[차방]에 대한 觀念[관념]을 此[차]에 窺知[규지]할 것이며, 賤他自大[천 타자대]의 支那人[지나인]으로 오히려 이렇듯한 好特點[호특점]을 擧[거]함 에 注意[주의]할지니라.
上古[상고]의 생활은 극히 簡樸[간박]한 것이니, 口腹[구복]이 適充[적 충]하면 足[족]하며 居住[거주]安夷[안이]하면 足[족]한지라, 山野藪澤[산 야수택]의 財産[재산]과 射獵漁撈[사렵어로]의 技能[기능]만이면, 그이 要 求[요구] 洽滿[흡만]하며 그의 世界[세계] 照.[조호]하던 것이로다. 然 [연]이나 群族[군족]이 雜處[잡처]하고 利害[이해]가 相左[상좌]하면 충돌 이 斯[사]에 起[기]하며, 紛競[분경]이 斯[사]에 滋[자]하여 人[인]이 그 煩苦[번고]를 堪[감]치 못하기에 至[지]할지라, 統一[통일]·節制[절제]의 運動[운동]이 此間[차간]에 生[생]함은 固然[고연]의 勢[세]로다.
古史[고사]를 歷觀[역관]하건대, 이러한 경우에는 雄豪出來[웅호출래]하 여 群小[군소]를 倂合[병합]함도 一[일] 形式[형식]이요, 大衆[대중]이 會 商[회상]하여 首長[수장]을 選載[선재]함도 一[일] 形式[형식]이니, 古代 [고대] 諸國[제국]이 대개 前者[전자]로써 生起[생기]하였건마는 오직 「주 신」의 建國[건국]은 後者[후자]에 由[유]하였더라.
第一期[제일기] 檀君時節[단군시절]
[편집]第一節[제일절] 檀君[단군]의 開國[개국]
[편집]古代[고대] 國邦[국방]의 肇興地[조흥지]는 土地沃衍[토지옥연]하고 物産 [물산]이 繁滋[번자]하여, 天[천]이 其便[기편]을 假[가]하고 地[지] 其寶 [기보]를 吝[인]치 아니함으로써 必須[필수] 條件[조건]을 作[작]하나니, 「주신」人[인]은 此[차]를 太白山下[태백산하] 松花江[송화강] 上流[상류] 에 발견하여 그 長久[장구]한 역사의 搖籃[요람]을 作[작]하였더라. 從今[종금] 五[오]천 년 前後[전후]에 先祖[선조]의 天降[천강]을 信[신] 하고 天王[천왕]이라는 主上[주상]을 戴[대]한 桓[환]이란 一民族[일민족] 이 有[유]하여, 居民[거민] 崇仰[숭앙]의 標柱[표주]인 太白山下[태백산하] 에 都[도]를 奠[전]하고 神市[신시]라 稱[칭]하니, ..[진진]한 草莽裏 [초망리]에 情艶獨發[정염독발]한 白百合[백백합]과 如[여]히 朴陋椎魯[박 누추노]한 旁近[방근] 諸族[제족] 중에 在[재]하여 敎化[교화] 자못 優越 [우월]하며 産業[산업]·刑政[형정] 등 御國導民[어국도민]의 具[구] 略備 [약비]하였으며, 더욱 農牧[농목]으로써 생활 방법을 作[작]함은 射獵時代 [사렵시대]를 脫[탈]치 못한 당시의 四旁[사방] 중에 在[재]하여 특수한 色 彩[색채]를 放[방]하더라. 此期間[차기간]을 神市時節[신시시절]이라 하나 니, 年紀[년기] 綿邈[면막]하므로 事蹟[사적]이 疎佚[소일]하거니와, 德惠 [덕혜]의 漸被[점피]하는 바에 未開[미개]의 部屬[부속]이 四方[사방]으로 서 率歸[솔귀]하거늘, 歷代[역대]의 天王[천왕]이 善[선]히 綏撫[수무]하고 鍛鍊[단련]하여 힘써 文明[문명]에 同化[동화]케 하였음을 古記[고기]에 傳 [전]하니라.
神市[신시] 以前[이전]의 原居[원거]를 古傳[고전]에 桓[환]이라 書[서] 하니 桓[환]은 곧 하늘의 合譯[합역]이라, 故[고]로 主上[주상]의 名號上 [명호상]에 반드시 桓[환]을 加[가]함은 곧 天降[천강]을 表示[표시]함이요 後[후]에 解[해]로 轉[전]하니라.
第二期[제이기] 夫餘時節[부여시절]
[편집]第一節[제일절] 符婁朝[부루조]의 創業[창업]
[편집]生民[생민]이 가지록 繁滋[번자]하고 團部[단부]가 가지록 歸附[귀부]하 여, 內[내]로는 經濟的[경제적] 필요와 外[외]로는 政治的[정치적] 필요가 아무래도 松花江[송화강] 상류의 谷地[곡지]에 固着[고착]하지 못할지라, 이렇듯 歲月[세월]의 진행이 아울러 국토의 발전을 요구하는 중에, 桓民[환 민]의 祖土[조토] 저절로 遷移[천이]치 아니치 못하니, 水流[수류]를 順 [순]하여 北進[북진]함은 地勢[지세]의 固宜[고의]한 바리라. 檀君[단군] 末葉[말엽] 松花江[송화강] 중류의 四旁[사방]은 본디 地域 [지역]이 가장 平敞[평창]하고 土力[토역]이 가장 .厚[유후]하여 농업지로 가장 적합하매, 北進[북진]한 桓民[환민]이 此地[차지][今[금] 農安[농안] 近地[근지]]로써 中心[중심]을 作[작]하여 原住民[원주민]과 旁近民[방근 민]을 歸順[귀순] 혹 驅除[구제]한 후에 大東[대동]에 .有[창유]한 文明 [문명] 舊邦[구방]인 夫餘朝[부여조]를 건설하니, 桓族[환족]의 聲敎[성교] 가 이로부터 四方[사방]에 遠敷[원부]하여 濊[예]란 名稱[명칭]으로써 일찍 부터 漢土[한토]에 聞[문]하였더라.
夫餘[부여]는 一[일]에 夫婁[부루][혹 符婁[부루]]로 稱[칭]하니, 婁[루] 는 곧 城市[성시] 又[우] 國邦[국방]을 意[의]하는 「구루」에서 「ㄱ」음 이 脫略[탈략]된 것일진즉, 夫婁[부루]는 곧 夫餘城[부여성] 혹 夫餘國[부 여국]의 義[의]일 것이며, 또 夫餘[부여]는 檀[단]의 語源[어원]인 「부 가」에서 또한 「ㄱ」音[음]이 脫[탈]한 「부아」혹 「부어」의 對譯[대역] 일지니, 前朝[전조]의 檀[단]과 한가지로 天國[천국]을 意[의]함일 것이며, 總言[총언]하건대 天降[천강]을 표시하는 「박」 혹 「부」의 國號[국호] 山國[산국]일 때는 「박달」이라 하다가, 平野[평야]에 城邑[성읍]을 成 [성]한 후에는 「부굴」 혹 「부아구르」로 稱[칭]하고, 此[차] 轉[전]하여 夫餘[부여]도 되고 夫婁[부루]도 된 것일지니, 檀[단]으로부터 夫餘[부여] 로 轉稱[전칭]된 동안이 便是[편시] 山林國[산림국]이 原野國[원야국]된 來 歷[내력]을 示明[시명]하는 不文史[불문사]일니지라. 古記[고기]에 見[견] 하는 바 檀君[단군]의 子[자]라 하는 解夫婁王[해부루왕] 혹 王解夫婁[왕해 부루]는 檀君[단군]이란 것과 같이 一人[일인]의 箇名[개명]이 아니다. 夫 婁王[부루왕]이 곧 夫餘國王[부여국왕]임은 贅辨[췌변]할 바 아니요, 解 [해]란 冠稱[관칭]은 檀朝[단조]의 主上[주상]이 桓[환]의 稱[칭]을 襲[습] 함과 如[여]히 天降[천강]을 表[표]하는 尊稱[존칭]이니, 前者[전자]는 「하눌」로써 直接[직접] 表示[표시]를 用[용]함에 대하여, 後者[후자]는 「하눌」의 象徵[상징][혹 標號[표호]라 함도 可[가]함]인 「해」로써 間接 [간접] 表示[표시]를 用[용]한 것으로써 信仰[신앙]의 對象[대상]에 대한 推移[추이]를 察[찰]할지니라.
檀朝[단조]의 主力[주력]이 松花江[송화강] 中流[중류]로 北遷[북천]하는 전후에, 別[별]로 遼河[요하] 彼方[피방]으로 南進[남진]한 傍系[방계] 有 [유]하여 武威[무위]를 河北[하북] 漢人[한인]의 間[간]에 揮耀[휘요]하니, 漢史[한사]의 所謂[소위] 貊[맥][或作[혹작] .[맥]]이라 貊[맥]의 古音[고 음]은 「박」이니 곧 檀[단]의 譯字[역자]라, 그 故國[고국]의 名[명]을 仍 襲[잉습]하였음을 見[견]할지니라. 貊[맥]은 一[일]에 .[맥]으로 作[작]하 고 또 貊耳[맥이]로 作[작]하니, 貊耳[맥이]의 古讀[고독]은 「바구루」인 즉 貊耳[맥이]는 실로 夫婁[부루]와 貊[맥]을 分別[분별]하여 記載[기재]하 였은즉, 同族[동족]이로되 異國[이국]임이 明[명]하니, 當初[당초]에는 何 如[하여]하였든지 대개 檀[단]의 一源[일원]이 分派[분파]하여 北[북]한 者 [자]는 夫婁[부루]가 되고, 南[남]한 者[자]는 貊耳[맥이]가 되어 對立[대 립]의 勢[세]를 成[성]한 줄로 認[인]할지니라.
다만, 夫婁[부루]는 國本[국본]이 일찍 立[립]하고 外患[외환]이 甚[심] 치 아니하여 一處[일처]에 久住[구주]하면서 계속적 발전을 遂[수]하였거 늘, 貊[맥]은 西[서]으로 胡戎[호융]의 寇略[구략]과 南[남]으로 漢人[한 인]의 핍박을 受[수]함으로 民國[민국]의 基業[기업]이 오래까지 動移[동 이]함을 면치 못하여 國勢[국세] 民力[민력]이 훨씬 長養[장양] 發揮[발휘] 함을 得[득]치 못하니, 이 까닭에 夫餘[부여]는 일찍부터 오래까지 富庶[부 서]·文明[문명]한 大國[대국]으로 存立[존립]하였거늘, 貊[맥]은 武勇[무 용]하되 貧困[빈곤]하여 오래오래 준엄한 試鍊[시련] 중에 在[재]치 아니치 못하였더라.
夫餘[부여]의 子[자]가 漢史[한사]에 見[견]하기는 〈漢書[한서]〉地理志 [지리지] 燕地[연지]의 條[조]에 「上谷至遼東[상곡지요동], 地廣民稀[지광 민희], 北隙烏凡夫餘[북극오범부여], 同賈眞番之利[동가진번지리]」라 한 것으로 始하나, 〈逸周書〉에 「符婁[부루]」로 見[견]한 것과 〈山海經[산 해경]〉에 「不與[불여]」로 出[출]한 것이 분명히 夫餘[부여]의 異譯[이 역]인즉, 夫餘[부여]의 名[명]이 줄잡아도 春秋[춘추] 以來[이래]의 漢土人 [한토인]이게 聞[문]하였음을 知[지]할지며, 〈山海經[산해경]〉에 「大荒 北[대황북], 有胡不與之國[유호불여지국], 烈姓黍食[열성서식]」이라 함과, 〈孟子[맹자]〉에 「貊[맥], 五穀不生[오곡불생], 唯黍食之[유서식지]」라 한 句語[구어]로써 그 國情[국정]도 相當[상당]히 漏聞[누문]되었음을 知 [지]할지니라.[夫餘[부여]와 貊[맥]은 種族[종족]과 法俗[법속]과 生活狀態 [생활상태]가 同一[동일]하므로, 漢土人[한토인]의 記錄[기록]에는 혹 一名 [일명] 兩稱[양칭]도 되고 혹 兩名[양명] 一稱[일칭]도 됨.]
또 其後[기후]에는 〈後漢書[후한서]〉 東夷傳[동이전]에 風夷[풍이]로 見[견]하고, 皇侃[황간]의 〈論語義疏[논어의소]〉에 鳧更[부경][更[경]은 臾[유]의 誤[오]]으로 見[견]하고, 〈風俗通[풍속통]〉과 〈爾雅疎[이아 소]〉의 一本[일본]에 鳧臾[부유]로 見[견]한 것이 다 夫餘[부여]의 異譯 [이역]이니, 夫餘[부여]의 名[명]이 「바구루」의 脫略[탈략]된 것임. 곧 그 「바」의 後[후]와 「우」의 先[선]에 「굴」 一音[일음]이 脫[탈]한 것 인 逕路[경로]를 鳧臾[부유]에서 見[견]할 것이며, 箕子[기자]의 名[명] 胥 餘[서여]를 혹 須臾[수유]로 作[작]함을 見[견]하여 臾餘[유여] 古[고]에 相通[상통]함을 知[지]할지니, 要[요]하건대 〈逸周書〉 중의 符婁[부루]는 「바구루」漢稱[한칭]의 最古形[최고형]일지며, 符婁[부루]에서 「ㄹ」音 [음]이 脫[탈]하매 鳧臾[부유]를 作[작]하고 臾餘[유여] 通[통]하매 夫餘 [부여]로 轉[전]하였는데, 此[차]를 〈漢書[한서]〉以來[이래]의 正史[정 사] 採用[채용]하매 夫餘[부여]드디어 常名[상명]을 作[작]한 것일지니라. 만일 夫婁[부루] 一語[일어]만을 別離[별리]하여 按[안]하면 又一[우일] 假定說[가정설]을 立[입]할 수 있나니, 대저 夫婁[부루]는 增殖[증식] 繁滋 [번자]의 義[의]와 開拓[개척] 發展[발전]의 義[의]와 光明[광명]의 義[의] 와 羅列[나열]의 義[의]와 群聚[군취]의 義[의]를 有[유]한 語[어]니, 山林 國[산림국]인 檀[단]이 原野國[원야국]된 來歷[내력]을 示現[시현]하기에 가장 適合[적합]한 名稱[명칭]이요, 自是[자시] 以來[이래]로 都邑[도읍]· 城市[성시]의 義[의]로 轉用[전용]하게 되어 三韓[삼한]에 在[재]하면 「卑 離[비리]」로 見[견]하고, 百濟[백제]에 在[재]하면 「負兒[부아]」「夫里 [부리]」로 見[견]하고, 新羅[신라]에 在[재]하면 「伐[벌]」「弗[불]」 「火[화]」로 見[견]하는 것도 總[총]히 此語[차어]의 異譯[이역]이며, 城 邑[성읍]을 義[의]하는 蒙古語[몽고어]의 Balgha, 터어키語[어]의 Balikh 등도 此語[차어]로 더불어 語源的[어원적] 關係[관계]가 有[유]한 것일지 며, 또 百濟[백제]가 都[도]를 泗.[사비]에 移[이]하였을 時[시]에 國號 [국호]를 南夫餘[남부여]라고 稱[칭]하였는데, 〈三國遺事[삼국유사]〉注 [주]에 「其地名所夫里[기지명소부리], 泗.今之古省津也[사비금지고성진 야], 所夫里者扶餘之別名也[소부리자부여지별명야]」라 한 것은 此[차]의 有力[유력]한 證明[증명]이라 할지니라.
要[요]하건대 夫婁[부루]에 대하여는 上文[상문]과 및 此段[차단]과 如 [여]히 兩樣[양양]의 見解[견해]를 立[입]할 수 있고, 또 兩者[양자] 다 有 力[유력]한 根據[근거]있어 可[가]히 偏斷[편단]치 못할지라 다시 細究[세 구]에 附[부]할 것이로다.
또 〈三國志[삼국지]〉 夫餘傳[부여전] 中[중]의 「國有古城[국유고성], 名濊城[명예성], 蓋本濊貊之地[개본예맥지지], 而夫餘王其中[이부여왕기 중]」이란 節[절]은 古來[고래]로 聚訟[취송]이 紛紛[분분]한 者[자]이어니 와, 按[안]하니 夫餘[부여]는 夫婁[부루], 濊[예]의 促音[촉음]인 듯하니, 夫婁[부루]가 國號[국호]요 濊[예]가 種族[종족]의 稱[칭]일 것은 同一[동 일]한 韓[한]에 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 등이 有[유]하고, 貊 [맥]에 小水貊[소수맥]·梁貊[양맥] 등이 有[유]한 類[류]일지며, 濊[예] 餘[여]로 轉[전]하여 夫餘[부여]의 名[명]이 始立[시립]한 것일지니라[韓氏 鎭書[한씨진서]는 曰[왈]하되, 濊或作.或作.或作穢[예혹작예혹작예혹작 예] 三國志及晉書[삼국지급진서], 皆謂夫餘本急讀爲濊[개위부여본급독위 예], 緩讀爲夫餘[완독위부여], 其實一也[기실일야]라 함].
대저 夫餘[부여]와 貊[맥]은 이른바 東夷[동이]의 地[지]에 幷立[병립]한 兩大國[양대국]이요, 國基[국기]의 固[고]함은 夫餘[부여] 오히려 數等[수 등] 以上[이상]에 在[재]하였거늘, 〈管子[관자]〉에 「桓公北至於孤竹[환 공북지어고죽], 山戎[산융], 濊貊[예맥]」이라 하고, 〈史記[사기]〉匈奴傳 [흉노전]에 「左方王[좌방왕], 將居東方[장거동방], 直上谷以住者[직상곡이 주자], 東接濊貊[동접예맥], 朝鮮[조선]」이라 한 것처럼, 漢土[한토]의 古 記[고기] 반드시 貊[맥]을 擧[거]하되 하나도 夫餘[부여]에 及[급]하지 아 니함은 一大[일대] 怪事[괴사]라 할 것이로되, .[번]하여 思[사]하건대, 貊[맥]을 云[운]하매 반드시 濊[예]를 伴[반]함이 影[영]이 形[형]을 隨 [수]하듯 하거늘, 濊[예]는 自來[자래]로 定域[정역]이 無[무]하니 濊[예] 의 夫餘[부여]됨이 較著[교저]하다 할지로다[茶山[다산] 丁氏[정씨]의 「濊 貊者[예맥자], 本北狄之種[본북적지종]」이라 함과 「濊者地名也[예자지명 야], 貊者種類也[맥자종류야]」라 함과 「前漢之時[전한지시], 北夫餘王解 夫婁[북부여왕해부루] 東徙江陵[동사강릉]」이라 하여, 濊貊[예맥]과 朝鮮 史[조선사]의 關涉[관섭]을 아무쪼록 微弱[미약]하게 함은 實地[실지]에 舛 錯[천착]됨이 多[다]하다 할지니라].
다만, 〈逸周書[일주서]〉王會[왕회]에 「穢人[예인]」과 「符婁[부루]란 兩名[양명]이 一篇[일편]에 幷出[병출]함은 夫婁[부루]·夫餘[부여]·濊 [예]의 同語[동어] 再訛設[재와설]에 對[대]하여 障碍[장애]를 成[성]하는 者[자]로되, 審思[심사]하건대 「.邊班列[선변반열]」의 中[중]에 「西面 正北方[서면정북방], 稷愼大塵[직신대진], 穢人前兒[예인전아]……, 良夷在 子[양이재자]……, 發人鹿鹿[발인녹녹]」等[등]이라 한 것은 種族[종족]의 名[명]으로 稱[칭]한 것이요, 伊尹[이윤]의 〈四方令[사방령]〉에 「臣請正 東符婁[신청정동부루], 仇州[구주], 伊慮[이려], .探[구탐]……」等[등]이 라 한 것은 다 邦國[방국] 혹 城市[성시]의 名[명]을 云[운]한 것이 明[명] 하니, 恐[공]하건대 穢人[예인]과 符婁[부루] 본디는 一域[일역]의 兩稱[양 칭]이로되 前文[전문]과 後文[후문]이 目的[목적]이 自別[자별]하므로 稱謂 [칭위] 隨[수]하여 .貳[기이]한 것일지며, 又或[우혹] 濊[예]란 族名[족 명]으로 以[이]함이 包括[포괄]되는 範圍[범위]에 廣狹[광협]의 差[차]가 有[유]하므로 因[인]한 것일까 하노라.
夫餘[부여]의 歷代[역대]는 公用[공용] 紀元[기원] 一○四八[일○사팔]년 으로부터 약 一[일]천 二[이]백 년간이니, 그 王代[왕대]는 응당 四[사]○ 許[허]를 算[산]할지나 文籍[문적]의 散亡[산망]이 此[차]를 傳[전]치 아니 하는도다. 대개 夫餘[부여]는 檀朝[단조]의 緖餘[서여]를 承[승]하여 旁近 [방근] 諸種族中[제종족중] 가장 久遠[구원]한 역사와 優越[우월]한 制度 [제도]와 高度[고도]한 敎化[교화]를 有[유]하고, 더욱 農事[농사]와 文明 [문명]이 時世[시세]와 幷進[병진]하였으므로 千有餘年間[천유여년간]에 능 히 幷等抗衡[병등항형]할 民邦[민방]이 出現[출현]하지 아니하여 엄연히 東 北[동북]의 巨人國[거인국]인 觀[관]이 有[유]하였더라.
第二節[제이절] 遼西[요서] 河北[하북]의 .人[맥인]
[편집]夫餘時代[부여시대]의 역사적 파란은 夫餘[부여] 本國[본국]에 在[재]하 지 아니하고 대개 國南[국남] 貊人[맥인]의 활동이러라. 當代[당대]의 貊人 [맥인][一作貊[일작맥]]은 太白山[태백산] 西谷[서곡]을 基點[기점]삼아 遼 水[요수] 東西[동서]에 散居[산거]하고, 今[금] 長城[장성] 內外[내외]와 北京[북경] 上下[상하]에까지 混處[혼처]하여 分布[분포] 이렇듯 普遍[보 편]하므로, 당시 支那[지나] 東北境上[동북경상] 여러 종족의 代表[대표]가 되어 九貊[구맥]의 種[종]이 有[유]하였으며, 西北[서북]에 偏[편]한 者 [자]는 胡[호]·戎[융]과 雜處[잡처]함으로써 혹 山戎[산융]과 混稱[혼칭] 되었더라.
당시 支那[지나]에는 夫餘[부여] 初葉[초엽]에 殷[은]이 망하고 周[주] 代[대]하여 洛陽[낙양]에 都[도]하니, 夏殷[하은]에 비하면 國力[국력]이 다소 伸張[신장]하였으나 그 宗國[종국]의 地方[지방]이 오히려 國都[국도] 近旁[근방] 猫貊大[묘맥대]에 불과하고, 恒山[항산]과 碣石[갈석] 以南[이 남]은 이른바 中原[중원]이라는 一幅地[일폭지]에 千八[천팔]백에 近[근]한 諸侯國[제후국]을 設[설]하여 名族[명족] 勳臣[훈신]의 各自治理[각자치리] 에 任[임]하였고, 戎[융]·狄[적]·胡[호]·.[맥] 등의 異種族[이종족]이 東北境上[동북경상]은 무론이요 旁近[방근] 域內[역내]에 處處蟠據[처처반 거]하였는데, 그중 團部數[단부수]의 最多[최다]한 者[자] .人[맥인]이러 라.
.人[맥인]은 勇悍[용한]한 天性[천성]과 교묘한 弓技[궁기]로써 늘 周室 [주실] 其他[기타]를 攻伐[공벌]하여 利益[이익]을 希求[희구]하였는데, 今 [금] 北京[북경]의 南方[남방]인 .縣[탁현] 四旁地[사방지] 곧, 당시의 燕 [연]·韓[한] 等地[등지]는 그네의 가장 威武[위무]를 宣揚[선양]한 處[처] 며, 後年[후년]에 간혹 周室[주실]이 .衛[한위]의 策[책]에 窮[궁]하면 重 幣[중폐]로써 「주신」本國[본국][곧 夫餘[부여]]을 連結[연결]하여 牽制 [견제]를 圖[도]하기도 하였더라.
漢民族[한민족]의 結合力[결합력]이 긴밀하여진 후에야 그 鋒銳[봉예]가 漸鈍[점둔]하여 一部[일부]는 北退[북퇴]하고 一部[일부]는 漢族[한족]에 同化[동화]하고, 一部[일부]는 東南[동남]으로 進下[진하]하여 高句麗[고구 려] 기타 半島[반도] 諸國[제국]의 祖先[조선]이 되니라.
第三節[제삼절] 支那[지나] 沿海[연해] 植民地[식민지]
[편집]당시 「주신」人[인]으로 支那[지나]에 세력을 발휘한 者[자]에 別[별]로 沿海[연해]地方[지방]의 幾多[기다] 植民地[식민지]가 有[유]하니, 이는 대 개 上古[상고]로부터 海陸[해륙] 兩方[양방]으로 점차 移住[이주]하여, 檀 朝[단조] 中葉[중엽]에는 이미 상당한 團部[단부]를 成[성]하고 후에 다시 幾多[기다] 沿革[연혁]을 經[경]한 것이라, 初[초]에는 遼東半島[요동반도] 로 始[시]하여 점차 南下[남하]하였는데, 夫餘[부여] 上葉[상엽]에는 이미 幾多[기다] 固着[고착]한 邦家[방가]가 山東半島[산동반도] 부근에 生成[생 성]하였더라. 蒲姑[포고][혹 薄姑[박고] 今[금] 山東省[산동성] 濟南道[제 남도] 博興縣[박흥현] 內[내]]·奄[엄][今[금] 山東省[산동성] 濟寧道[제령 도] 曲阜縣[곡부현] 內[내]]·牟[모][혹 根牟[근모], 今[금] 山東省[산동 성] 膠東道[교동도] 蓬萊縣[봉래현] 內[내]]·萊[래][今[금] 山東省[산동 성] 膠東道[교동도] 黃縣掖縣[황현액현] 等地[등지] 內[내]]·介[개][今 [금] 山東省[산동성] 膠東道[교동도] 膠縣[교현] .[즉] 膠州灣[교주만] 近 地[근지]]·.[거][今[금] 山東省[산동성] 濟寧道[제령도] .縣[거현] 內 [내]] 등은 그 중에 著名[저명]한 것이로되, 此等[차등]은 대개 國土[국토] 와 勢力[세력]이 그다지 大[대]한 것 아니며, 오직 좀 內陸[내륙]으로 入 [입]하여 淮[회]·岱[대]의 間[간]에 根據[근거]한 漢土人[한토인]의 소위 徐戎[서융]·淮夷[회이]란 것은 자못 强大[강대]한 武力[무력]을 擁[옹]하 여 殷周[은주] 천 여 년간에 자주 大活躍[대활약]을 試[시]하였다. 然[연]이나 中葉[중엽]까지는 그의 발전이 族屬的[족속적]이요, 國家的 [국가적]이 아니며, 그의 計圖[계도] 生活的[생활적]이요 政治的[정치적]이 아니며, 그의 勢力[세력]이 武勇的[무용적]이요, 文化的[문화적]이 아니라, 그러므로 그 運動[운동]이 支裂[지열]하여 統[통]이 無[무]하고 斷續[단속] 하여 常[상]이 無[무]하더니, 周[주]의 天下[천하]가 정돈하고 漢族[한족] 의 結合[결합]이 공고함을 隨[수]하여, 散漫[산만]한 東夷[동이]의 各部間 [각부간]에도 자연히 民族的[민족적] 自覺[자각]이 生[생]치 아니치 못하더 라.
第四節[제사절] 徐偃王[서언왕]의 大陸[대륙] 經略[경략]
[편집]此[차] 新機運[신기운]을 乘[승]하여 巨腕[거완]을 揮[휘]하고 偉業[위 업]을 成[성]한 人物[인물]이 淮泗[회사]의 間[간]에 國[국]한 徐[서]로서 出來[출래]하니, 厥人[궐인]이 誰[수]요 하면 周家[주가] 八[팔]백 년 史上 [사상]에 最大[최대]한 陰影[음영]을 投[투]한 偃王[언왕]이러라. 偃王[언 왕]은 生前[생전]과 死後[사후]에 다 奇蹟[기적]을 傳[전]하도록 神德[신 덕]과 異才[이재]를 具有[구유]한 人[인]이라, 隱然[은연]히 중심적 인물을 갈망하던 東夷[동이]의 諸部[제부]가 四方[사방]으로서 來歸[래귀]하여 淮 上[회상]에 一大[일대] 聯邦[연방]을 建成[건성]하니, 대개 歷代[역대] 移 住民[이주민]의 南進[남진]한 前頭[전두]와 殷末[은말]·周初[주초]로부터 漢土[한토] 內陸[내륙]을 통하여 東南[동남]으로 遷布[천포]한 .人[맥인] 의 諸部[제부]가, 今[금] 江蘇省[강소성]의 西部[서부]인 徐海道[서해도]를 중심으로 하여 偃王[언왕]의 傘下[산하]에 세력을 단결한 것이러라. 紀元[기원] 一三四五年[일삼사오년] 곧 周穆王[주목왕] 十三[십삼]년으로 부터 大軍[대군]을 策動[책동]하여 周[주]의 東疆[동강]을 정복하고 점차 西[서]으로 河上[하상]하여 彼[피]의 都城[도성]을 直衝[직충]하니, 穆王 [목왕]이 그 方熾[방치]의 세력을 抵當[저당]치 못하여 東方[동방]의 諸侯 [제후]를 割讓[할양]하는 條件[조건]으로써 城下[성하]의 盟[맹]을 結[결] 하였다.
偃王[언왕]이 西方[서방]의 大經略[대경략]을 필하고 歸[귀]하여 都[도] 를 今[금]江蘇省[강소성]의 銅山府[동산부], 舊徐州府[구서주부]의 西[서] 인 漢地[한지] 東[동]에 建[건]하고, 武[무]를 偃[언]하고 文[문]을 修[수] 하여 仁義[인의]를 多行[다행]하매, 四方[사방]이 靡然[미연]히 發動[발동] 하여 陸地[육지]로만 朝[조]하는 者[자] 三六國[삼육국]에 至[지]하니, 그 境域[경역]을 産[산]하건대 今[금] 江蘇省[강소성]의 淮揚道[회양도] 一部 [일부], 徐海道[서해도] 大部[대부], 山東省[산동성]의 濟寧道[제령도], 膠 東道中[교동도중] 沿海地[연해지], 安徽[안휘]의 淮泗道[회사도] 大部[대 부], 河南省[하남성]의 開封道[개봉도] 一部[일부]에 當[당]하여 北[북]에 는 泰山[태산]이 鎭[진]하고 南[남]에는 高郵[고우]·洪澤[홍택] 등 斷續 [단속] 無數[무수]한 湖沼[호소]가 點綴[점철]하였더라.
第五節[제오절] 淮上聯盟[회상연맹]의 潰散[궤산]
[편집]大徐[대서]는 실로 古[고]「주신」人[인]으로, 支那大陸[지나대륙]에 在 [재]하여 대규모의 經略[경략]을 행한 唯一[유일]의 王國[왕국]이니, 勢力 [세력]의 强大[강대]함과 治化[치화]의 普遍[보편]함이 당대에 比[비]할 이 無[무]하였으나, 王[왕]의 偃武政策[언무정책]이 점점 極端[극단]으로 趨 [추]하여 立國[입국]의 根本義[근본의]를 失[실]하고 仁義[인의]의 空彈[공 탄]으로써 異族[이족] 列國[열국]의 間[간]에 雄峙[웅치]하려 하매, 모처럼 甄成[견성]한 偉業[위업]이 內[내]로부터 破綻[파탄]치 아니치 못하더라. 이렁저렁 沿海[연해] 植民[식민]의 淮上同盟[회상동맹]이 스스로 潰散[궤 산]에 至[지]하고 國內[국내]의 결합이 얼마만큼 缺裂[결렬]할 時[시]에 國 南[국남]에는 .楚[형초]라는 蠻强[만강]이 점점 頭角[두각]을 露出[노출] 하여 機隙[기극]을 伺[사]하더니, 獨力[독력]으로는 국가의 自衛[자위]를 策[책]하지 못하는 周此[주차]를 이용하려 하여 徐[서]에 대한 聯盟[연맹] 을 체결하고 兩面[양면]으로서 大擧[대거]하여 來侵[내침]하였는데, 偃王 [언왕]은 爭鬪[쟁투]로써 害民[해민]함을 認[인]치 못하여 다만 鋒鏑[봉적] 을 피하기에만 力[력]하다가, 필경 國[국]을 虛[허]하고 彭城[팽성][今[금] 江蘇省[강소성] 徐州府[서주부], 項羽[항우]의 舊都[구도]의 東山下[동산 하]로 移去[이거]하니 於是[어시]에 徐國[서국]이 終焉[종언]을 告[고]하였 더라.
玆後[자후]로 漢土[한토]에 在[재]한 古[고]「주신」人[인]의 統一[통일] 한 운동은 거의 斷切[단절]하였으되, 諸部[제부]의 孤立的[고립적] 活動[활 동]은 오히려 停息[정식]이 無[무]하고 더욱 淮夷[회이]로써 稱[칭]하는 別 部[별부]는 依然[의연]히 武勇[무용]의 특성을 발휘하여 수시로 攻略[공략] 을 행하였더라. 그 銳鋒[예봉]의 가장 閃馳[섬치]하기는 기원 一[일]천 五 [오]백 년 以後[이후] 근 一世紀間[일세기간] 周[주]의 .王[여왕]으로 宣 王[선왕]에 至[지]하는 동안이니, 거의 天下[천하]를 擧[거]하여 淮人[회 인]의 橫行[횡행] 闊步地[활보지]로 作[작]하되 奈何[내하]치 못하다가, 宣 王時[선왕시]에 至[지]하여는 國力[국력]을 傾[경]하여 王[왕]이 親戰[친 전]한 결과로 겨우 그 弓馬[궁마]를 暫攘[잠양]하니, 〈詩[시]〉의 江漢篇 [강한편]·常武篇[상무편]은 대개 당시의 詩人[시인]이 국가의 脫危[탈위] 함을 讚頌[찬송]한 것이러라.
그러나 淮人[회인]의 銳氣[예기]는 오래 銷沈[소심]한 것 아니라, 未幾 [미기]에 회복하여 伊後[이후] 八[팔]백 년간에 處處[처처]의 攻略[공략]을 행하여 혹 宗周[종주]를 侵凌[침릉]하고 혹 小邦[소방]을 呑幷[탄병]하다 가, 周[주] 亡[망]하고 秦[진]이 起[기]하여 天下[천하]를 兼倂[겸병]한 후 에야 淮泗[회사] 기타의 諸[제] 團部[단부]도 또한 四方[사방]으로 散居[산 거]하여 民戶[민호]를 作[작]하였더라.
대개 漢土[한토]에 발전한 古[고]「주신」人[인]은 年歷[연력]이 久[구] 치 아님 아니요, 分布[분포]가 廣[광]치 아님 아니요 勢力[세력]이 强[강] 치 아닌 것 아니로되 다만 統一的[통일적] 단합과 組織的[조직적] 운동이 아님으로써 偃王[언왕] 一時[일시] 以外[이외]에 특수한 偉業[위업]을 성취 하지 못하였더라.
第六節[제육절] 漢僑[한교]의 興廢[흥폐](一[일])
[편집]朝鮮人[조선인]의 弓馬[궁마]가 바야흐로 淮岱[회대]의 間[간]에 馳突[치 돌]할 時[시]에, 그 반대로 漢人[한인]의 勢力[세력]이 東北[동북]으로 진 출하기 始[시]하여, 夫餘[부여]의 中葉[중엽]으로부터 遼[요]의 東西[동서] 에 漢人[한인]의 團部[단부] 稍稍[초초] 生成[생성]하니, 그 最初[최초]로 서 認[인]할 者[자]는 이른바 箕子朝鮮[기자조선]이러라.
箕子[기자]는 본디 殷[은]의 宗室[종실]이러니, 殷[은]이 亡[망]하매 周 [주]에 臣[신]함을 恥[치]하여 그 遺民[유민] 약간으로 더불어 東[동]으로 「주신」의 地[지]에 入[입]하여 僑居[교거]하더니, 漢族[한족]의 慕歸[모 귀]하는 者[자] 衆大[중대]하여 一國[일국]을 成[성]한지라, 「주신」의 地 [지]임을 因[인]하여 朝鮮[조선]으로써 號[호]하니, 音[음]을 取[취]하여 譯[역]한 것이라 朝鮮[조선]의 字[자]는 실로 此時[차시] 漢人[한인]의 僑 邦[교방]에 起[기]하였더라. 箕子[기자]는 본디 洪範[홍범]이라는 政治上 [정치상] 특수한 理想[이상]을 懷[회]하였으나, 故國[고국]에서는 필경 施 措[시조]할 기회를 得[득]하지 못하고 遼地[요지]로 東來[동래]한 후에 약 간을 실행하여 治績[치적]을 得[득]하니, 「八條之敎[팔조지교]」란 것도 그 중의 一[일]이로되 條目[조목]이 傳[전]치 아니하나니라.
당시 遼地[요지]의 大勢[대세]를 察[찰]하건대, 北[북]에는 「주신」人 [인]의 宗主國[종주국]인 夫餘[부여]가 엄존하고, 西[서]에는 伯夷叔齊[백 이숙제]의 孤竹[고죽]과 如[여]한 小國[소국]이 散在[산재]하고, 西北[서 북]으로 戎[융]·胡[호]라는 북방 민족을 控[공]하였으며, 域內[역내]는 夫 餘[부여]의 南隣[남인]으로 .人[맥인]의 原住地[원주지]러니, 箕子[기자] 의 東來[동래]가 漢人[한인]의 招集[초집]을 盛大[성대]케 하여, 드디어 . 漢[맥한] 聯立[연립]의 一國[일국]을 建[건]한 것이라.
喪國[상국]의 賤.[천종]으로 草草[초초]히 東來[동래]한 것이매, 그 勢 力[세력]의 微小[미소]하였음은 容易[용이]히 想察[상찰]할 것이요, 또 그 立國[입국]의 基點[기점]이 初[초]에 遼西[요서]로 始[시]하여 遼東[요동] 으로 漸進[점진]하였을 것은 자연의 理勢[이세]로되, 歷代[역대]의 事蹟[사 적]과 國疆[국강]의 遷易[천역]에 대하여 四○代[사○대] 八[팔]백 년간에 별로 聞[문]함이 無[무]하며, 後世[후세]에 詩[시]·書[서]·禮[예]·樂 [낙]·百工[백공]·技藝[기예]·醫[의]·巫[무]·陰陽[음양]·卜筮者流[복 서자류] 五千[오천]이 從[종]하였음을 傳[전]하는 者[자] 有[유]하나, 당시 支那[지나]의 文明[문명] 程度[정도]와 箕子[기자]의 東來[동래] 사정에 照 看[조간]하건대, 다 不可能[불가능]에 속하며, 다만 此時[차시]로 從[종]하 여 漢土[한토]의 문명이 古朝鮮[고조선] 一部地[일부지]에 急潮[급조]로서 流入[유입]하였음은 認可[인가]할지로다.
古傳[고전]을 據[거]하건대, .漢[맥한] 聯合[연합]인 箕子朝鮮[기자조 선] 建國[건국]은 夫餘[부여] 建國[건국] 後[후] 一六四[일육사]년[기원 二 一二[이일이]년]의 事[사]라 하니라.
第七節[제칠절] 漢僑[한교]의 興廢[흥폐](二[이])
[편집]箕子[기자]의 朝鮮[조선]이 鴨東[압동]으로 驟進[취진]한 年代[년대]는 今[금]에 可考[가고]치 못할지나, 대개 西方[서방] 山戎[산융]의 壓力[압 력]을 受[수]한 것이라 할진대, 戎[융]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던 支那[지나] 의 春秋時代[춘추시대]인 듯하도다.
春秋時代[춘추시대]란 것은 기원 一六一一[일육일일]년으로부터 一八五三 [일팔오삼]년까지 약 二四○[이사○]년간 支那[지나]에서 周[주]의 王室 [왕실]이 쇠미하여 諸侯[제후] 干戈[간과]를 日尋[일심]하고 兼幷[겸병]을 肆行[사행]하던 時期[시기]를 謂[위]함이니, 此時[차시] 支那[지나]의 北方 [북방]에는 戎狄[융적]의 세력이 正[정]히 강대하여 支那[지나]의 中原[중 원]에 침입 유린하던 시대인즉, 東隣[동인]의 조선에도 그 餘力[여력]이 波 及[파급]하지 아니치 못하였을지로다.
春秋時代[춘추시대]의 후로 周室[주실]이 倒壞[도괴]하기까지 약 一六○ [일육○]년간을 戰國時代[전국시대]라 稱[칭]하나니, 支那[지나] 一幅[일 폭]이 문득 弱肉强食[약육강식]의 수라장으로 化[화]하여 이른바 戰國[전 국] 七雄[칠웅]이라는 秦[진]·楚[초]·燕[연]·齊[제]·韓[한]·魏[위]· 趙[조] 七國[칠국]이 天下[천하]의 雄[웅]을 爭[쟁]하던 時期[시기]라. 此 中[차중]에 燕[연]은 .[계][今[금] 北京[북경]]에 都[도]하여 今[금] 直隸 省[직예성]의 北部[북부]를 領有[영유]하였었는데, 昭王[소왕]이라는 燕 [연]의 名主[명주] 秦開[진개]라는 賢將[현장]을 用[용]하여 北[북]으로 胡 人[호인]을 千里[천리]에 .[극]케 하고, 東[동]으로 朝鮮[조선]의 地[지] 二千里[이천리]를 侵奪[침탈]하여 滿潘汗[만반한][今[금] 鴨綠江[압록강] 上流[상류]]으로 界[계]를 爲[위]하였다 하니, 此[차] 以前[이전]의 境域 [경역]은 대개 遼西[요서]의 醫巫閭山[의무려산][今[금] 奉天省[봉천성] 北 鎭縣[북진현]] 彼方[피방]에서 燕[연]과 接界[접계]하였던 것이라, 箕氏[기 씨]의 朝鮮[조선]이 此[차]로 從[종]하여 弱少[약소]하였으며 당시의 國都 [국도]는 舊[구] 壬儉城[임검성] 즉 平壤[평양]이러라.
秦[진]이 周[주]를 伐[벌]하여 支那[지나]를 통일하기는 我[아] 기원 二 ○八八[이○팔팔]년의 事[사]니, 그 歷年[역년]은 겨우 二世[이세] 三○[삼 ○]년에 不過[불과]하나 威武[위무]의 大[대]함이 前古[전고]에 無比[무비] 하였으며, 그러나 東北[동북]의 患[환]이 國家[국가] 永久[영구]의 患[환] 임을 慮[려]하여 濊貊[예맥]·胡戎[호융] 등 異民族[이민족]의 침입하는 路 線[노선]에 一大[일대] 長城[장성]을 築造[축조]하니, 당시 長城[장성]의 위치는 대개 今[금] 支那[지나] 直隸省[직예성]의 承德[승덕]으로서 建昌 [건창]·朝陽[조양]을 歷[역]하고 醫巫閭山[의무여산]의 東邊[동변]으로서 開原[개원]에 至[지]하고, 다시 南馳[남치]하여 今[금] 鴨綠江口[압록강구] 에까지 達[달]한 것이라, 從此[종차]로 鴨水[압수] 彼方[피방]의 地[지]가 一時[일시] 漢土[한토]의 直屬地[직속지]가 되었으며, 秦[진]과 朝鮮[조선] 의 境界[경계]에 空地[공지]를 設[설]하여 事端[사단]을 滋[자]치 아니케 하니, 此[차]는 대개 箕子[기자]의 四○世孫[사○세손]이라는 否[부]와 그 子[자] 準[준]의 王[왕]한 時[시]러라.
第八節[제팔절] 漢僑[한교]의 興廢[흥폐](三[삼])
[편집]秦末[진말]·漢初[한초]는 漢土[한토]의 擾攘[요양]이 到極[도극]한 時 [시]라, 趙[조]·燕[연]·齊[제] 등 그 東北[동북]의 民[민]이 亂離[난리] 를 愁苦[수고]하여 다투어 遼東[요동]으로 出[출]하여 朝鮮[조선]으로 投 [투]하니, 王準[왕준]이 西方[서방] 秦[진]의 空地[공지]에 居[거]케 하였 더라.
당시에 漢[한]이 盧.[노관]이란 者[자]로 燕王[연왕]을 封[봉]하니, 燕 [연]은 浿水[패수] 곧 鴨綠江[압록강]으로써 朝鮮[조선]과 界[계]하였더니, 未幾[미기]에 盧.[노관]이 漢[한]을 反[반]하고 凶奴[흉노]로 入[입]하매 燕人[연인] 衛滿[위만]이란 者[자] .人[맥인]의 服[복]으로 亡命[망명]하 여 準[준]에게 來降[내항]하고, 西境[서경]에 藩屛[번병]되기를 願[원]하는 지라 西方[서방] 百里[백리]의 地[지]를 與[여]하여 居[거]케 하였더니, 滿 [만]이 일변으로는 本土人[본토인]의 小邦[소방]으로 더불어 好誼[호의]를 結[결]하고 일변으로는 亡命來[망명래]한 漢人[한인]을 단합하여 勢力[세 력]을 양성한 후에, 詭計[궤계]로써 準[준]을 驅逐[구축]하고 그 舊地[구 지]에 王[왕]하니 대개 기원 二一四○[이일사○]년의 事[사]라 이른바 衛滿 朝鮮[위만조선]이 是自稱[시자칭]하다가 因[인]하여 멸망하니, 箕氏[기씨] 의 歷年[역년]은 凡[범] 四一世[사일세] 九二九[구이구]년이라 하나니라. 此時[차시] 漢[한]의 朝家[조가]에서는 新植民國[신식민국]의 生成[생성] 을 好[호]하지 아니하였으나, 立國[입국]의 初[초]이므로 兵威[병위] 及 [급]하지 아니하는지라, 東方[동방] 諸民族[제민족]의 漢境[한경] 攻略[공 략]을 保衛[보위]함과 그 漢[한]의 國家[국가]와 交通[교통]함을 妨害[방 해]치 못하리라는 兩條件[양조건]으로써 自主[자주]를 許[허]하니, 滿[만] 이 以故[이고]로 兵威[병위]와 財物[재물]을 得[득]하여 眞番[진번]·臨屯 [임둔] 등 本土人[본토인]의 小國[소국]을 略屬[약속]하여 地方[지방] 數千 里[수천리]를 有[유]하였더라.
滿[만]이 此[차]로써 그 子[자]에게 傳[전]하고 그 孫[손] 右渠[우거]에 至[지]하여는 세력이 增長[증장]하여 舊約[구약]을 守[수]치 아니하고 東方 [동방] 諸國[제국]의 이익을 壟斷[농단]하더니, 此時[차시]의 漢[한]은 국 내가 평정하고 병력이 충실할 뿐더러 時君[시군]은 勇武[용무]로 聞[문]한 武帝[무제]라, 곧 水陸軍[수륙군]을 發[발]하여 右渠[우거]를 伐[벌]하였더 라. 兩年[양년]의 戰[전]으로써 我紀元[아기원] 二二二六[이이이육]년[漢 [한] 元封[원봉] 三[삼]년]에 드디어 征服[정복]함을 得[득]하니, 衛氏朝鮮 [위씨조선]의 歷年[역년]은 凡[범] 三世[삼세] 八七年[팔칠년]이러라. 按[안]하되 漢僑[한교]의 東來[동래]는 다만 陸路[육로]로 由[유]한 것 아니요 海路[해로]로 由[유]하는 者[자] 亦多[역다]하니, 陸[육]으로 하는 者[자]는 燕[연]·趙[조]가 中心[중심]이 되어 遼東[요동]으로 進[진]하고, 海[해]로 하는 者[자]는 齊[제]·魯[노]가 中心[중심]이 되어 浿上[패상]으 로 來[래]하였으며, 浿水[패수] 兩岸[양안]은 兩派[양파]의 溱合點[진합점] 이므로 入口[입구] 가장 繁衍[번연]하여 스스로 漢僑[한교] 勢力[세력]의 大中心[대중심]을 成[성]하니, 後年[후년]에 箕子朝鮮[기자조선]·衛滿朝鮮 [위만조선] 등의 根據[근거] 다 此地[차지]에 存[존]함이 애개 是[시]에 由 [유]함이니라.
第九節[제구절] 漢僑[한교]의 興廢[흥폐](四[사])
[편집]遼東[요동]으로 始[시]하여 鴨東[압동]으로 進[진]한 漢人[한인]의 植民 地[식민지]는 약 千年間[천년간]에 箕[기]·衛[위] 兩[양] 王朝[왕조]를 立 [입]하였으나, 漢[한] 이후에는 그 舊地[구지]에 郡縣[군현]을 置[치]하니 그 最初[최초]의 施設[시설]이 이른바 四郡[사군]이러라.
衛氏[위씨]의 舊地[구지]는 今[금] 平安[평안]·黃海[황해]의 大部[대부] 와 京畿[경기]의 北部[북부]를 有[유]함에 止[지]하였으나, 武帝[무제]는 此[차]를 服屬[복속]할 뿐 아니라 다시 鴨綠江[압록강]의 上流地[상류지]와 咸鏡[함경]·江原[강원]의 地[지]를 計劃中[계획중]에 入[입]하여, 衛氏[위 씨]의 地[지]에는 樂浪郡[낙랑군]을 置[치]하고 沃沮[옥저]의 域[역] 곧 今 [금] 咸鏡南道[함경남도]의 地[지]에는 玄.郡[현도군]을 置[치]하고, 濊 [예]의 域[역] 곧 今[금] 江原道[강원도]와 咸南[함남]의 一部地[일부지]에 는 臨屯郡[임둔군]을 置[치]하고, 貊[맥]의 域[역] 곧 今[금] 鴨綠[압록]· .佳[동가] 兩江[양강]의 流域[유역]에는 眞番郡[진번군]을 置[치]하여 半 島[반도]의 北部[북부]를 自家[자가]의 版圖[판도]에 收[수]하려 하였더라. 然[연]이나 半島[반도]의 地勢[지세]가 北方[북방]에 在[재]하여는 截然 [절연]히 東西[동서]에 分[분]하여 脈[맥] 以西[이서], 鴨江[압강]으로써 遼河[요하]에 連[연]한 지방은 漢人[한인]의 세력을 侵水[침수]하기 易[역] 하되, 脈[맥] 以東[이동]은 漢家[한가]로 더불어 險遠阻絶[험원조절]하여 攻守[공수] 도무지 不便[불편]하고, 겸하여 古來[고래]로 夫餘人[부여인]의 南下[남하]한 沃沮[옥저]·濊貊[예맥] 등의 勢力地[세력지]매 自然[자연]· 人事[인사]가 아울러 異人[이인]의 侵占[침점]을 許[허]치 아니하는지라, 이 때문에 漢武帝[한무제]의 雄圖[웅도]가 겨우 二六[이육]년 후에는 이미 반 이상이 水泡[수포]에 歸[귀]치 아니치 못하였더라.
漢[한]의 四郡[사군] 설치는 실로 本土人[본토인]에게 일대 충격이라, 諸 團部[제단부] 不期而然[불기이연]으로 거의 幷時[병시]하여 漢人[한인]의 排除[배제]를 행하니, 漢[한]이 또한 力[역]으로써 屈[굴]치 못할 줄을 覺 [각]하여 舊制[구제]를 철거하고, 다만 臨屯[임둔]·眞番[진번] 兩郡[양군] 은 名義[명의]만으로 잠시 樂浪[낙랑]·玄.[현도] 兩郡[양군]에 附屬[부 속]하였으나, 오히려 我[아]의 攻略[공략]을 堪[감]치 못하여 咸興[함흥] 근처에 置[치]하였던 玄.郡治[현도군치]를 다시 渾河[혼하] 上流[상류]의 高句麗縣[고구려현]으로 退却[퇴각]하였더라.
第一○節[제일○절] 漢人[한인]의 侵入[침입]에 對[대]한 民族的[민족적] 自覺[자각]
[편집]漢人[한인]의 遼東[요동] 發展[발전]이 組織的[조직적]이요 繼續的[계속 적]이므로, 도저히 隸人[예인]·.人[맥인]등의 散漫[산만]한 力[역]으로써 防.[방알]할 수 있지 아니한지라, 필경 漢北[한북] 嶺西[영서]의 地[지]를 擧[거]하여 數百年間[수백년간] 漢人[한인]의 식민지를 作[작]케 하였는데, 此根强[차근강]한 세력이 一方[일방]에 定着[정착]함으로 인하여 兩大[양 대] 新現象[신현상]이 당시의 南北[남북] 諸團部[제단부]에 生[생]하였더 라.
一[일]은 民族的[민족적] 自覺[자각]이니, 秦[진] 이전으로 言[언]하면 遼地[요지]는 비록 漢族[한족]의 直屬[직속]에 歸[귀]하고, 浿地[패지]에는 비록 漢族[한족]의 僑邦[교방]이 有[유]하나 地廣[지광] 民稀[민희]하고 또 拘束[구속]이 別無[별무]하므로, 더불어 雜處[잡처]하고 더불어 苦生[고생] 하면서 一邊[일변] 自家[자가]의 便否[편부] 利害[이해]대로 자유 행동을 취하기에 심한 장애를 感[감]치 아니하였으나, 漢[한] 이래로는 形勢[형세] 比前[비전] 大異[대이]하여 經濟上[경제상] 압박과 法令上[법령상] 구속이 逼切[핍절]하므로, 種族[종족]에 대한 感念[감념]이 예민하여지고 인하여 .衛[한위]를 策[책]하게 되니, 武帝[무제]의 長擧[장거] 즉시 夢幻[몽환] 에 歸[귀]함도 是[시]에 由[유]함이며 衆部[중부]를 合幷[합병]하여 國邦 [국방]을 建設[건설]하려는 機運[기운]도 또한 是[시]에 由[유]하여 .釀 [온양]되었더라.
二[이]는 國家的[국가적] 運動[운동]이니, 從此[종차] 이전에는 夫餘[부 여]와 如[여]히 純農生活[순농생활]의 久遠[구원]한 역사를 有[유]한 處 [처]를 際[제]하고는 各其[각기] 一[일] 團部[단부]를 成[성]하였을 뿐이 요, 오직 國家[국가]로서 許[허]할 조직을 見[견]치 못하겠더니, 統一[통 일] 固定[고정]한 一大[일대] 勢力[세력]이 自家[저가]의 門庭[문정]을 塡 塞[전색]하매, 國本[국본]의 轉徙[전사]가 不便[불편]함과 決裂[결렬]한 勢 力[세력]의 불리함을 感覺[감각]하여, 드디어 內歷[내역]과 生計[생계]를 與同[여동]하는 團部[단부]가 各其[각기] 일정한 疆土[강토]와 統一[통일] 한 規模[규모]로써 國邦[국방]의 형식을 具[구]하니, 長春平野[장춘평야]의 夫餘[부여] 舊國[구국]이 더욱 국가의 體制[체제]를 정비하였음은 固無論 [고무론]이어니와, 그 東[동]에는 .婁[읍루]의 國[국]이 成[성]하고 南 [남]에는 沃沮[옥저]의 南[남]에는 濊[예](혹 濊貊[예맥]), 濊[예]와 漢郡 [한군]의 南[남]에는 韓[한]이 存立[존립]하니, 이는 대개 夫餘[부여] 中葉 [중엽] 이후로부터 花葉[화엽]까지의 事[사]러라.
當代[당대]의 花葉[화엽] 곧 紀元[기원] 二[이]천 三[삼]백 년경의 槪勢[개 세]를 次第[차제]로 述[술]하겠노라.
第十一節[제십일절] 夫[부] 餘[여]
[편집]당시의 夫餘[부여]는 弱水[약수](今금의 松花江[송화강]) 南[남], 長城 [장성] 北[북]의 西[서]으로 鮮卑[선비]를 控[공]하고 東[동]으로 .婁[읍 루]를 隣[인]하여 方[방] 二千餘里[이천여리]를 有[유]한 大國[대국]이니, 진보한 농업과 활발한 무역으로써 經濟[경제]로써 威風[위풍]이 능히 隣小 [인소]를 壓[압]하니, 古記[고기]에「其國殷富[기국은부], 自先世未賞破壞 [자선세미상파괴]」(魏略[위략])라 하니라. 秦[진]의 始皇[시황]은 이른바 統一天下[통일천하]하였다는 세력으로도 夫餘[부여]의 一丸土[일환토]를 襲 取[습취]하지 못하고, 도리어 長城[장성]으로써 南下[남하]를 방지하려 하 였으며, 漢[한]의 武帝[무제]는 이른바 漢南[한남]에 王廷[왕정]이 無[무] 케 하였다는 威武[위무]로 夫餘[부여]의 一邊墻[일변장]도 動搖[동요]하지 못하고, 겨우 同族[동족]의 古僑地[고교지]를 兼幷[겸병]하였을 따름이요, 周[주]·漢[한]이다. 玉壁圭瓚[옥벽규찬]과 如[여]한 貴[귀]한 禮物[예물] 로써 交好[교호]를 結[결]하였더라.
國土[국토]의 중심은 今[금] 長春平野[장춘평야]라, 熟達[숙달]한 방법과 膏沃[고옥]한 토지가 항상 풍부한 農利[농리]를 그네에게 공급하니, 이른바 「多山陵廣澤[다산능광택], 東夷之域[동이지역], 最平敞[최평창], 地宜五穀 [지의오곡]」이란 것이라, 夫餘[부여]의 문명과 세력은 대개 此[차] 農利 [농리]의 餘.[여음]이라 할 것이러라.
庶民[서민]의 衣[의]는 白[백]을 尙[상]하여 白布大袂[백포대몌]의 袍. [포고]를 着[착]하고 革.[혁탑]을 履[이]하며, 國外[국외]에 出[출]하게 되면 繒繡錦.[증수금계]를 尙[상]하고, 大人[대인]은 狐[호]·.[리]·. (유)·百[백] 黑貂[흑초]의 .[구]를 加[가]하고 金銀[금은]으로써 帽[모] 를 飾[식]하였으며, 食飮[식음]에는 俎豆[조두]를 用[용]하였으며 또 宮室 [궁실]의 制[제] 備[비]하고 倉.[창름]의 設[설]이 有[유]하였으니, 이는 대개 문명과 생활의 정도가 이 만큼 高等[고등]함을 見[견]할 것이요, .榮 [풍영]한 國情[국정]이 人民[인민]의 性行[성행]으로 하여금 正義[정의] 謹 厚[근후]케 하여 寇.[구초]의 習[습]이 無[무]하니, 漢土[한토]에서 君子 國[군자국]·善人國[선인국]이란 것이 대개 夫餘[부여]를 指[지]할일 것이 며, 또 발달한 筋骨[근골]과 훈련된 國民性[국민성]을漢人[한인]의 書[서] 에「.大强勇[추대강용]」으로써 形喩[형유]하였더라.
公私[공사]의 禮儀[예의]가 자못 盛美[성미]하여, 衆人[중인]의 會同[회 동]에는 拜爵[배작]·洗爵[세작]의 風[풍]이 有[유]하며, 昇降[승강]에 반 드시 揖讓[읍양]하며 尊前[존전]에 出[]출하매 .手[궤수]로 地[지]를 據 [거]하고 竊語[절어]하였음은, 다 秩序[질서]의 整齊[정제]함을 證示[증시] 하는 一端[일단]이라 할 것이며, 매년 祭天節[제천절]에는 國中[국중]이 大 會[대회]하여 連日[연일] 飮食[음식]·歌舞[가무]로 歡娛[환오]를 極[극]하 니, 此[차]는 발달한 사회 생활의 一面[일면]을 窺[규]할 것이며, 喪祭[상 제]의 禮[예]를 중히 하여 營葬[영장]의 厚[후]와 停喪[정상]의 久[구]로써 榮[영을 作[작]함은 禮文[예문]이 이렇듯 煩.[번쇄]함에까지 進[진]함을 見[견]할 것이러라. 兄[형]이 死[사]하면 嫂[수]를 妻[처]하는 俗[속]이 有 [유]하니, 이는 대개 凶奴[흉노]의 俗[속]이 流入[유입]하여 一部[일부]에 행함이러라.
殺人者[살인자]는 死[사]하고 그 家人[가인]은 奴婢[노비]를 作[작]하며, 竊盜[절도]는 一[일]에 十二[십이]를 責[책]하며, 男女[남녀]의 淫[음]과 婦人[부인]의 妬[투]는 竝殺[병살]하며, 더욱 妬忌[투기]를 憎[증]하여 殺 [살]한 後[후]에 다시 尸[시]를 國南[국남] 山上[산상]에 曝[폭]하며, 牢獄 [뇌옥]의 制[제] 일찍부터 존재하였더라. 대개 綱紀[강기]의 振肅[진숙]을 重[중]히 하는 그네의 性格[성격]이 그 按.審刑[안언심형]으로 하여금 氣 分嚴峻[기분엄준]케 하였더라.
國民的[국민적] 最大[최대] 慶節[경절]은 진실로 祭天節[제천절]이니, 이 는 桓族[환족] 固有[고유]의 拜天[배천]의 法[법]과 敬先[경선]의 誠[성]이 合一[합일] 表現[표현]하는 大典[대전]이라, 夫餘[부여]에서는 迎鼓[영고] 라 하였는데 擧國[거국]이 合同[합동] 歡.[환변]함은 무론이요, 매양 此時 [차시]에 刑獄[형옥]을 斷[단]하고 囚徒[수도]를 解[해]하니, 이는 대개 天 人[천인]의 前[전]에 公判[공판]을 행하여 法[법]의 神聖[신성]과 威嚴[위 엄]을 示[시]함이며, 軍事[군사]사 有[유]하면 또한 먼저 祭[제]하더라. 祭天[제천]의 俗[속]은 혹 支那[지나]의 郊祀[교사]와 同原[동원]인 줄로 思[사]하나 그 根本義[근본의]에 在[재]하여 相左[상좌]하니, 第一[제일]은 唯天[유천]을 是拜[시배]하고 諸神[제신]으로써 配[배]치 아니함이요, 第二 [제이]는 支那[지나]에서처럼 王者[왕자] 獨行[독행]하는 것 아니라 擧國 [거국]이 與共[여공]함이요, 第三[제삼]은 國祖[국조] 혹 國土[국토] 鎭護 神[진호신]과 다못 天帝[천제]가 다 一體[일체]임을 信[신]함으로써 固有 [고유]한 信仰[신앙]임을 察[찰]할지니라.
檀朝[단조]의 占法[점법]은 其詳[기상]을 繹[역]할 길 없으되, 夫餘[부 여]에서 牛[우]를 殺[살]하고 蹄[제]가 解[해]하면 凶[흉]타 하고 蹄[제]가 合[합]하였으면 吉[길]타 하였다 하니, 重農的[중농적] 色彩[색채]를 此 [차]에도 見[견]할 것이요, 行道[행도]하매 晝夜[주야]하매 晝夜[주야] 老 幼[노유] 없이 歌吟[가음]을 好[호]하여 加音[가음]이 絶[절]치 아니하였다 하니, 그 樂天的[낙천적] 性質[성질]을 此[차]에도 徵[징]할러라.
그 國家[국가] 組織[조직]은 王[왕]의 下[하]에 馬加[마가]·牛加[우 가]·.加[저가]·狗加[구가]·太使[태사]·太使者[태사자]·使者[사자] 등 大官[대관]이 有[유]하여 國務[국무]를 .掌[앙장]하고, 諸加[제가]는 別 [별]로 四出道[사출도]를 主[주]하여 大者[대자]는 數千家[수천가]를 主 [주]하고 小者[소자]는 數百家[수백가]를 主[주]하니, 四出道[사출도]란 것 은 곧 地方[지방]의 行政區劃[행정구획]으로 軍事[군사]의 管區[관구]와 外 國[외국]의 通路[통로]를 겸한 것이요, 加[가]란 것은 大臣[대신] 혹 總督 [총독]의 義[의]며 此等[차등]은 內[내]로 治化[치화]를 各宣[각선]하고 外 [외]론 軍陣[군진]을 專擔[전담]하므로 그 尊榮[존영]이 대단하였으며, 또 邑落[읍락]의 豪民[호민] 곧 小統率者[소통솔자]에 統屬[통속]하고 豪民[호 민]은 또 諸加[제가] 곧 大統轄者[대통할자]에 管轄[관할]되고 王[왕]이 此 [차]를 都統[도통]하는 部族制[부족제]러라.
重農[중농]과 尙武[상무]는 실로 夫餘[부여]의 大國本[대국본]이라, 此 [차]를 護持[호지]함에는 여하한 희생이라도 吝惜[인석]하지 아니하니, 故 [고]로 古俗[고속]에 水旱[수한] 不調[부조]와 五穀[오곡] 不熟[불숙]의 咎 [구]를 國王[국왕]에게 歸[귀]하여 革命[혁명] 易朝[이조]의 口實[구실]을 作[작]하기도 하였다 하며, 兵器[병기]는 弓矢[궁시]·刀矛[도모]를 用[용] 하여 家家[가가]에 반드시 鎧仗[개장]이 有[유]하였으며, 敵[적]이 有[유] 하면 諸加[제가] 스스로 출전하여 決[결]코 卒伍[졸오]만을 陳頭[진두]에 立[입]하지 아니하고, 下戶[하호]는 運輸[운수]·供饋[공궤]에 분주하며 또 禦敵[어적]의 설비로는 國中[국중] 處處[처처]에 洞圓[동원]한 城柵[성책] 을 設[설]하였더라, 夫餘[부여]로 하여금 上下[상하] 千餘載[천여재]에 他 部族[타부족]의 侵凌[침릉]을 被[피]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西彊[서강]을 老哈木倫河[노합목륜하]까지 拓[척]하고 南境[남경]은 遼河下流[요하하류] 까지 달하여 許久[허구]히 傍近[방근]에 雄[웅]을 稱[칭]케 함은 대개 此 [차] 兩大政策[양대정책]의 所賜[소사]러라.
당시의 夫餘人[부여인]은 農.[농산] 이외에 又一[우일] 經濟的[경제적] 세력을 有[유]하니 曰[왈] 國.[국산] 輸出[수출]이라, 弓矢[궁시]·布木 [포목] 등도 특수한 산물로 外人[외인]의 珍愛[진애]를 受[수]치 아님 아니 로되 중요한 貿易品[무역품]은 아니며, 數量[수량]의 多[다]함으론 馬匹[마 필]과 貂.[초유] 등 皮物[피물]이 最[최]요 價値[가치]의 貴[귀]하기론 赤 玉[적옥]과 美珠[미주]가 上[상]이러라.
牧畜[목축]은 군사상·산업상에 다 긴요하므로 매우 用力[용력]도 하고, 겸하여 甘泉[감천]·肥草[비초]·平原[평원]·深林[심림] 등 要件[요건]을 畢備[필비]하므로 牛馬猪羊[우마저양] 등 諸畜[제축]이 均滋[균자]한 중, 더욱 許久[허구]한 用心[용심]이 마침내 우수한 馬種[마종]을 得[득]케 하 여 유명한 夫餘馬[부여마]로 重要[중요]한 貿易品[무역품]을 成[성]하였으 며, 赤玉[적옥]이 如何[여하]한 것임은 可考[가고]치 못할지나 周[주]·漢 時代[한시대]에는 石[석]의 美[미]한 者[자]를 總[총]이 玉[옥]이라 하였은 즉 아마 好石[호석]의 器皿什[기명십] 될 만한 것일지며, 美珠[미주]란 것 은 混同강[혼동강] 기타 吉林[길림] 等地[등지] 諸河[제하]에서 出[출]하는 東珠[동주]란 것이니, 勻圓瑩百[균원영백]하고 大[대]하기 酸棗[산조]와 如 [여]한 것이며, 貂.[초유]는 무론 吉林[길림] 諸山[제산] 중에 多.[다산] 하는 것이니, 自古[자고]로 居民[거민]의 恒業[항업]을 作[작]하도록 .額 [산액과 需要[수요]가 아울러 풍부한 것이요, 소위 「眞番之利[진번지리]」 란 것이 是[시]일지니 對漢人[대한인] 貿易上[무역상] 가장 중요한 物[물] 이라, 以上[이상] 諸品[제품]은 漢人[한인]의 第一[제일] 酷好[혹호]하는 物[물]이요 震土[진토]의 가장 多.[다산]하는 物[물]이매, 此等[차등]으로 써 今[금]에 開原[개원]·鐵嶺[철령] 등지의 互市場[호시장]에서 敏活[민 활]히 國際[국제] 貿易[무역]을 행하니, 夫餘[부여]의 殷富[은부] 此[차]에 負[부]함이 多[다]함은 무론이며, 그의 服飾[복식] 중 중요품인 繒繡錦. [증수금계]는 아마 此際[차제]에 漢人[한인]의 將來[장래]하는 교역품인 듯 하더라.
王[왕]은 葬[장]에 玉匣[옥갑]을 用[용]하니, 周[주]·漢[한] 이래로 彼 處[피처]에서 미리 玄.郡[현도군]에 留置[유치]하므로 國葬[국장]이 有 [유]하면 取用[취용]하였는데 後年[후년]까지 길이 계속하였으며, 또 국내 에는 다소의 革命[혁명]이 有[유]하되 外寇[외구]의 侵逼[침핍]을 受[수]치 아니한 고로, 周[주]·秦[진] 이래로 贈來[증래]한 禮物[예물]을 오래도록 庫中[고중]에 貯存[저존]하니, 此等[차등] 尊貴[존귀]한 待遇[대우]를 周 [주]·漢[한]에 受[수]함은 대개 彼[피]의 戎.[융맥] 牽制[견제]의 必要 [필요]에 由[유]함일지며, 〈漢書[한서]〉에 高祖[고조] 楚軍[초군]으로 더 불어 廣武[광무]에서 戰[전]할 時[시]에 梟騎[효기]로써 來助[내조]하였다 는 北.[북맥]이란 것도 아마 夫餘[부여]를 指[지]함일지니, 이렇듯한 관계 로 餘[여]·漢[한]의 間[간]에 誼好[의호] 長存[장존]한 듯하더라. 또 庫中[고중]에「濊王之印[예왕지인]을 」藏[장]하니 대개 漢國[한국]으 로서 贈來[증래]한 것일지라, 濊[예]는 夫餘國土[부여국토]의 漢名[한명]이 요 .[맥]은 夫餘民族[부여민족]의 一名[일명]이니, 濊貊人[예맥인]의 最大 [최대] 國王[국왕]이므로 濊王[예왕]이라 稱[칭]함인 듯하더라.
第十二節[제십이절] .[읍] 婁[루]
[편집]夫餘[부여]의 東北千餘里[동북천여리], 白山[백산]·黑水[흑수]의 間 [간], 長谷[장곡] 大峽[대협]의 中[중]에 大海[대해]를 濱[빈]하여 立國[입 국]한 者[자]를 .婁[읍루]라 하니 대개 震域[진역] 最古[최고]의 團部[단 부]요, 地域[지역]의 ..[험저]와 氣候[기후]의 .寒[호한]으로 문화의 발 달이 가장 落後[낙후]한 者[자]라, 今[금] 寧古搭[영고탑] 東北[동북]으로 沿海州[연해주]에 至[지]하는 間[간]에 廣.[광무] 數千里[수천리]의 地 [지]를 有[유]하였더라.
伊初[이초]의 생활은 무론 漁獵[어렵]으로 爲主[위주]하였으나 當代[당 대]에는 이미 耕種[경종]과 組織[조직]을 行[행]하여,食[식]은 五穀[오곡] 으로 以[이]하고 衣[의]하고 衣[의]는 綿布[면포]로 以[이]하며 服役[복역] 에는 牛馬[우마]가 有[유]하였으며, 氣候[기후]의 관계로 養猪[양저]의 風 [풍]이 성하여 肉[육]은 食[식]하고 皮[피]는 衣[의]하고 膏[고]는 冬[동] 에 皮膚[피부]에 厚塗[후도]하여 風寒[풍한]을 禦[어]하였으며, 또 玉制[옥 제]로 하여금 오래도록 穴居[혈거]를 면치 못하게 하여, 大家[대가]는 九梯 [구제]로써 升降[승강]하도록 深大[심대]한 者[자] 有[유]하였으며, 사회적 생활이 또한 그다지 발달하지 아니하였던지 禮儀[예의] 자못 疎漫[소만]하 여, 夏節[하절]에는 裸.[나단]하고 尺布[척포]로써 前後[전후]를 掩蔽[엄 폐]할 뿐이며 會同[회동] 飮食[음식]에 俎豆[조두]를 用[용]치 아니하였더 라.
國家[국가]의 체제는 아직 단순한 部族制[부족제]를 면치 못하여 邑落[읍 락]에 大人[대인]이 各有[각유]하여 下戶[하호]를 治理[치리]하여 攻伐[공 벌]이 非便[비편]하므로 隣國[인국]이 능히 服屬[복속]하지 못하였으며, 그 弓[궁]은 長[장]이 四尺[사척]이니 力[역]이 弩[노]와 如[여]하고, 矢[시] 는 .[호]를 用[용]하니 長[장]이 尺[척] 八寸[팔촌]이요, 鏃[족]은 靑石 [청석]으로 爲[위]하니 대개 肅愼人[숙신인]의 古制[고제]라, 그 技[기]의 精[정]함이 射[사]하매 능히 人[인]의 目[목]에 入[입]하며, 矢[시]에는 毒 [독]을 施[시]하여 人[인]이 中[중]하면 반드시 死[사]하였다 하더라. 그 國[국]의 北[북]과 西[서]에 長江[장강]이 襟帶[금대]하여 牡丹江[모 단강]·烏蘇里江[오소리강] 등 大小[대소] 幾多[기다]의 江河[강하]로 域內 [역내]를 연락하고, 南[남]에는 豆滿江[두만강] 本支流[본지류]가 有[유]하 니 經濟上[경제상] 自給力[자급력]이 부족한 그네가 山國民的[산국민적] 勇 氣[용기]와 固有[고유] 特絶[특절]한 射藝[사예]로써 이 地勢[지세]를 이용 하여, 浮寨泛屯[부채범둔]으로 出沒無常[출몰무상]히 四方[사방]에 寇.[구 초]를 행하매 隣國[인국]이 다 此[차]로써 頭痛件[두통건]을 作[작]하더라. 自來[자래]로 夫餘[부여]에 臣屬[신속]하였더니, 夫餘[부여] 租賦[조부] 를 責[책]함이 太重[태중]하므로 자주 叛意[반의]를 懷[회]하니, 夫餘[부 여] 가끔 膺懲[응징]의 師[사]를 出[출]하였더라.
名.[명산]은 赤玉[적옥]과 好貂[호초]니, 이른바 .婁貂[읍루초]는 歷代 [역대] 漢人[한인]의 珍尙[진상]하는 品[품]이라, 대개 夫餘人[부여인]을 介[개]하여 市場[시장]에 出[출]하였더라.
그 形貌[형모]는 夫餘[부여]와 同[동]하되 言語[언어]는 異[이]함이 有 [유]하며, 山林間[산림간]에 隨宜[수의] 居處[거처]할 뿐이요 城布[성포]의 設[설]이 無[무]하며, 그 당시의 信仰[신앙]에 대하여 傳[전]함이 無[무]하 되, 長白山[장백산]을 不咸山[불함산] 곧 天山[천산]으로 稱[칭]함은 당시 以前[이전]의 事[사]요, 또 그 國[국]의 위치가 正[정]히 白山[백산]의 北 [북]에 在[재]하였은즉, 他部[타부]와 此山[차산]을 介[개]하여 天[천]을 拜[배]하던 古俗[고속]은 .婁人[읍루인]의 間[간]에도 應有[응유]하였을지 라, 대개 桓族[환족] 以前[이전]의 원주민으로 후에 一方[일방]에 退去[퇴 거]한 者[자]요, 차차 농업의 利[이]를 學[학]하여 射獵[사렵] 이외의 경제 적 능력을 具有[구유]하였더라. 工藝上[공예상]으로는 弓矢[궁시] 製造[제 조]의 妙妓[묘기]가 有[유]함은 무론이요, 此外[차외]에는 衣服[의복]의 料 [료]로 麻布[마포]를 織用[직용]한 것이 전할 뿐이니, 想[상]컨대 古[고] 「雄常布[웅상포]」의 類[류]일러라.
第十三絶[제십삼절] 沃[옥] 沮[저]
[편집]豆滿江[두만강] 南[남], 狼林山脈東[낭림산맥동], 鼻百山脈[비백산맥] 北 [북](곧 咸興[함흥]·定平[정평] 以南[이남]을 際[제]한 咸鏡道[함경도])의 沿海[연해] 一區[일구]는 沃沮[옥저]로 稱[칭]하니, 곧 古[고]「주신」人 [인]의 豆滿江[두만강] 谷地[곡지]로 遷徙[천사]한 者[자]라, 그 地形[지 형]이 東北[동북]은 狹[협]하고 西南[서남]은 長[장]하니 方[방]이 可千里 [가천리]요, 北[북]은 .婁[읍루], 西北[서북]은 夫餘[부여], 南[남]은 濊 [예]로 더불어 接[접]하였더라.
古史[고사]에는 土地[토지] 肥美[비미]하고 背山向海[배산향해]하여 五穀 [오곡]에 宜[의]하다 하였으되, 이는 咸興[함흥]·永興[영흥] 등 南方[남 방]의 平野地[평야지]를 指[지]함인 듯하며, 일찍부터 농업을 事[사]하여 田種[전종]을 善[선]이 하였으며, 魚鹽[어염]의 利[이]와 貊布[맥포](今 [금]의 六鎭布[육진포], 그 餘緖[여서]인 듯)의 .[산]은 從古[종고]로 유 명하였으며, 人民[인민]은 質直强勇[질직강용]하고 矛[모]로써 步戰[보전] 함에 능하며, 當代[당대]까지는 牛馬[우마]의 養畜[양축]이 少[소]하였으 며, 嫁娶[가취]에는 민며느리하는 風[풍]이 有[유]하여 女[여]의 年[년]이 一○[일○]세에 이미 婚約[혼약]을 定[정]하여 .家[서가]로 送[송]하며, 葬禮[장례]는 家族[가족] 同槨[동곽]의 風[풍]이 有[유]하여 長[장] 一○餘 丈[일○여장]되는 大木槨[대목곽]을 造[조]하여 一頭[일두]에 戶[호]를 作 [작]하고 新死者[신사자]가 有[유]하면 假埋[가매]하였다가 皮肉[피육]이 盡[진]한즉 大槨[대곽]에 骨[골]을 聚[취]하는데, 死者[사자]의 數[수]대고 生像[생상]을 刻[각]하며 또 瓦()[와력]에 米[미]를 納[납]하여 槨戶邊[곽 호변]에 編縣[편현]하여, 기타의 음식·거처와 의복·예절은 夫餘[부여]· 高句麗[고구려]와 似[사]하고 言語[언어]도 또한 大同[대동]하더라. 大君主[대군주]의 無[무]함은 .婁[읍루]와 如[여]하고 邑落[읍락]에 世 世[세세]로 將帥[장수]가 有[유]하여 統率[통솔]하는데, 일찍 漢[한]이 衛 氏朝鮮[위씨조선]을 滅[멸]하고 四郡[사군]을 置[치]할 時[시]에 沃沮[옥 저]의 南部[남부]를 侵[침]하여 玄兎郡[현토군]을 置[치]하니, 이 刺激[자 격]이 諸[제] 長帥間[장수간]에 민족적 단합을 生[생]케 하여 一致[일치] 排擊[배격]의 勢[세]를 成[성]함으로 無何[무하]에 郡治[군치]를 撤去[철 거]치 아니치 못하게 하였으며, 名義上[명의상]으로 잠시 樂浪郡[낙랑군]에 예속하여 東部都尉[동부도위]란 것이 沃沮城[옥저성]에서 治[치]하였으나 此亦[차역] 旋罷[선파]하고, 漢[한]이 侯國[후국]을 삼았으나 실제상에는 하등 ..[기미]를 加[가]하지 못하였으며, 正[정]히 此時[차시]에 夫餘[부 여] 東北[동북] 兩朝[양조]로 分裂[분열]하매 東夫餘[동부여] 此地[차지]에 移存[이존]하였더니, 高句麗[고구려]의 興起[흥기]한 후에 곧 麗[려]에 臣 屬[신속]하였더라.
北界[북계]에는 別[별]로 北沃沮[북옥저]라 稱[칭]하고 或[혹] 그 首都 [수도]인 買溝婁[매구루]로 呼[호]하니, 대개 後年[후년] 關北[관북] 六鎭 [육진]의 地[지]라, .婁人[읍루인]이 船[선]을 乘[승]하고 來[내]하여 寇 .[구초] 無常[무상]하므로, 夏[하]에는 山谷[산곡]에 藏居[장거]하고 冬節 [동절] 船道[선도] 不通[불통]할 時[시]에만 邑落[읍락]에 下居[하거]하였 으며, 北沃沮[북옥저]에 대하여 그 南部[남부]에 南沃沮[남옥저]는 一[일] 에 東沃沮[동옥저]라 稱[칭]이 有[유]하고 또 蓋馬大山[개마대산] 곧 狼林 山脈[낭림산맥]의 東[동]이므로 南沃沮[남옥저]는 一[일]에 東沃沮[동옥저] 라 稱[칭]하였더라.
北沃沮[북옥저]의 都城[도성] 買溝婁[매구루]는 대개 今[금] 鏡城[경성] 부근이요, 南沃沮[남옥저]의 首都[수도]는 沃沮城[옥저성] 곧 今[금] 咸興 [함흥]이러라.
第十四節[제십사절] 濊[예] 貊[맥]
[편집]夫餘人[부여인]의 南下[남하]한 者[자] 朝鮮[조선](곧 漢人[한인]의 僑邦 [교방])을 置中[치중]하고 名稱[명칭]이 殊[수]하였으니, 西[서]으로 遼水 [요수] 左右[좌우]의 者[자]는 혼히 貊[맥](혹 貊[맥])으로 稱[칭]하고 東 [동]으로 大嶺[대령] 東西[동서]의 者[자]를 흔히 濊[예]라 稱[칭]하고, 혹 兩者[양자]를 다 濊貊[예맥]이라고 合稱[합칭]하였는데, 漢[한] 이후에는 貊[맥]은 鴨西[압서] 遼東人[요동인]의 專稱[전칭]이 되었더라(濊貊[예맥] 의 原始的[원시적] 稱謂[칭위]는 第一[제일]·二[이]·三節[삼절]에 參看[] 참간하다.)
당시 濊貊[예맥]의 地[지]는 沃沮[옥저] 以南[이남], 分水嶺脈[분수령맥] 以西[이서], 小白山脈[소백산맥] 以北[이북], 今[금] 江原道[강원도]의 대 부분이라, 오래 箕[기]·衛[위] 兩朝鮮[양조선]의 侵凌[침릉]을 受[수]하다 가, 漢[한]이 興[흥]하매 彭吳[팽오]란 漢賈[한가] 通路[통로]를 開[개]한 지라, 王[왕] 南閭[남려] 遼東[요동]에 詣[예]하여 內屬[내속]을 청하니, 대개 衛氏[위씨] 征服[정복]의 伏線[복선]을 設[설]함이로되 遼遠[요원]하 여 便[편]치 아니하므로 因[인]하여 罷[파]하였으며, 및 漢[한]의 衛氏[위 씨]를 멸하고 四郡[사군]을 設[설]할 時[시]에는 濊貊[예맥]의 地[지]로는 臨屯郡[임둔군]을 爲[위]하였으되, 舊民[구민]이 異國[이국]의 ..[기미] 를 力拜[역배]하므로 未久[미구]에 郡治[군치]를 철거하였으며, 樂浪[낙랑] 東部都尉[동부도위]란 것을 不而城[불이성]에 置[치]하고 臨屯[임둔] 治下 [치하]의 一部[일부]이던 嶺東[영동] 七縣[칠현]이란 것(東.[동이]·不而 [불이]·蠶台[잠태]·華麗[화려]·邪頭.[사두말]·前莫[전막]·夫租[부 조]) 등을 管轄[관할]케 하려 하였으나, 此亦[차역] 舊民[구민]의 反抗[반 항]으로 果[과]치 못하고 필경 포기하더라.
種族[종족]은 무론이어니와 言語[언어]와 法俗[법속]이 대개 夫餘[부 여]·句麗[구려]와 相類[상류]하며, 衣制[의제]는 有異[유이]하여 男女[남 여] 없이 曲領[곡령]을 着[착]하였으며, 남자는 廣[광] 數寸[수촌]되는 銀 花[은화]를 .[계]하여 써 飾[식]을 爲[위]하고 珠玉[주옥]으로써 寶[보]를 爲[위]치 아니하여, 同姓[동성]이 婚[혼]치 아니하며 忌諱[기휘]가 多[다] 하여 疾病[질병]이나 死亡[사망]에 문득 舊宅[구택]을 捐棄[연기]하고 新居 [신거]를 更造[경조]하더라.
濊[예]의 地[지]는 朝鮮[조선]의 大幹龍[대간룡](古[고] 所謂[소위] 單單 大嶺[단단대령])이 域中[역중]으로 直走[직주]하여, 金剛[금강]·五臺[오 대]·太白[태백] 등 巨岳[거악] 疊.[첩장]이 在在[재재] ..[위이]한 山 國[산국]이므로 民性[민성]과 國俗[국속]이 대개 此[차] 영향을 被[피]하였 으니, 그 民[민]의 原慤[원각]하고 廉恥[염치]가 有[유]하고 嗜慾[기욕]이 少[소]하고 請()[청개]치 아니함은 대개 ()激[()격]의 單純[단순]과 交通 [교통]의 險遠[험원]이 그네의 慾望[욕망]을 制限[제한]한 것으로 見[견]할 것이며, 俗[속]이 山川[산천]을 존중하여 山川[산천]의 部界[부계]가 各有 [각유]하여 妄相干涉[망상간섭]함을 得[득]치 못하며, 피차간 邑落[읍락]을 침범하는 者[자] 有[유]하면 罰[벌]로 生口[생구] 牛馬[우마]를 責[책]하여 責禍[채화]라 名[명]하니, 대개 縱橫..[종횡위이]한 山谷谿壑[산곡계학] 이 自然的[자연적] 區劃[구획]을 明分[명분]하기에 便[편]함으로써 生[생] 한 法制[법제]일지며, 部曲[부곡]을 各主[각주]하고 大君長[대군장]의 久無 [구무]함도 此[차]에 由[유]함일지며, 虎[호]를 祠[사]하여 山神[산신]을 代表[대표]함도 自然[자연]의 約束[약속]이라 할지며, 이미 嗜慾[기욕]이 少[소]하고 交通[교통]이 편치 아니하매 寇盜[구도] 또한 少[소]하였으며, 본디는 風俗[풍속]이 끔찍이 淳.[순방]하더니 漢人[한인]의 교통이 開[개] 한 후로 風俗[풍속]이 消薄[소박]하였더라.
.物[산물]은 山海[산해]의 利[이]를 겸하니, (?)(一作[일작] 班魚[반어] () 水牛[수우]니 皮用[피용])·.[분](大鰕[대하])·.[사](.魚[사어])· .[첩](比目魚[비목어]) 등 水.[수산]과, 豹皮[표피]·果下馬[과하마] 등 陸産[육산]과 麻布[마포]·綿紬[면주]·檀弓[단궁] 등 加工品[가공품]으로, 近[근]하게는 樂浪[낙랑]과 遠[원]하게는 遼東[요동]에 무역을 행하였더라. 地理[지리]로 因[인]하여 山嶽[산악] 崇拜[숭배]의 俗[속]이 有[유]하되 桓 族[환족] 例有[예유]의 拜天[배천]하는 신앙을 오히려 保守[보수]하여 매양 十月節[십월절]로 天[천]을 祭[제]하되 晝夜[주야] 없이 飮酒[음주] 樂舞 [낙무]하고 此[차]를 舞天[무천]이라 하더라. 무기로는 三丈[삼장] 혹 그 이상의 長矛[장모]와 檀弓[단궁]을 用[용]하였으며, 步戰[보전]에 능하였으 며 田種[전종]과 蠶桑[잠상]이 早闢[조벽]하여 氣象[기상]의 變動[변동]으 로써 年歲[연세]의 豊約[풍약]을 預知[예지]하도록 農事[농사]에 대한 지식 과 경험을 有[유]하였더라. 漢[한]이 濊貊[예맥]의 地[지]를 舊民[구민]에 게 還[환]하매 候[후]·邑君[읍군]·三老[삼노] 등 官位[관위]를 設[설]하 니 侯[후]는 곧 舊王[구왕]을 謂[위]함이러라.
第十五節[제십오절] 句麗[구려]·眞番[진번]
[편집]夫餘[부여]의 南[남] 鴨綠[압록] 谷地[곡지]로 始[시]하여 遼水[요수] 東 西[동서]에 散居[산거]한 .人[맥인]은 혹 夫餘[부여]에 服屬[복속]하고 혹 漢人[한인]과 混居[혼거]하여 所在[소재]에 各自[각자] 一團[일단]을 成 [성]하였을 뿐이요, 邦國[방국]의 體制[체제]를 有[유]치 아니한 중에 홀로 渾河[혼하] 上流[상류]에 居[거]한 者[자]는 일찍 句麗[구려]란 國[국]을 建[건]하고, .佳江[동가강] 流域[유역]에 居[거]한 者[자]는 眞番[진번]이 란 國[국]을 建[건]하여 春秋[춘추] 이래로 東方[동방]한 후에 잠시 그 . .[기미]를 를 受[수]하다가 漢[한]이 衛氏[위씨]를 멸하고 부근을 經略[경 략]하여 四郡[사군]을 설치할새, 兩國[양국]의 地[지]를 幷[병]하여 眞番郡 [진번군]이라 名[명]하고 高句麗[고구려]로 그 屬縣[속현]의 一[일]을 作 [작]하였으며, 未幾[미기]에 沃沮[옥저]의 地[지]에 地[지]에 置[치]하였던 玄[현].郡[토군]이 舊民[구민]의 舊逐[구축]을 被[피]하여 西[서]으로 철퇴하매, 眞番[진번]의 名[명]을 廢[폐]하고 玄.[현토]의 稱[칭]을 存[존]하며 郡治 [군치]를 高句麗縣[고구려현]에 置[치]하였더라.
대개 故[고] 眞番郡[진번군]은 北[북]은 夫餘[부여], 西[서]는 遼東[요 동], 東[동]은 沃沮[옥저], 南[남]은 朝鮮[조선](후에 樂浪郡[낙랑군])과 접한 鴨綠江[압록강]의 谷地[곡지]니, 山岳[산악]이 중첩하여 농경이 불리 하고 특수한 산물은 無[무]하되, 古代[고대] 東方諸國[동방제국] 揖婁[읍 루]ㆍ沃沮[옥저]ㆍ濊貊[예맥]ㆍ朝鮮[조선]의 屬[속]이 遼東[요동]으로 出 [출]하는 要衝[요충]에 處[처]하니, 교통상의 要點[요점]은 同時[동시]에 무역상의 利點[이점]이라, 古代[고대] 漢人[한인]의 소위「眞番之利[진번지 리]」란 것은 곧 眞番[진번]을 經由[경유]하는 東方韓國[동방한국]의 貿易 品[무역품]을 謂[위]함이러라.
眞番[진번]이 朝鮮[조선]의 北[북]에 在[재]하였는지 南[남]에 在[재]하였 는지 아직 明快[명쾌]한 論斷[논단]을 見[견]치 못할지라. 아직 舊說[구설] 에 依[의]하여 論[논]하고 다시 後考[후고]를 俟[사]하노라.
句麗[구려]ㆍ眞番[진번]의 舊民[구민]의 漢[한]에 屬郡[속군]됨을 厭[염] 함은 결코 濊貊[예맥]ㆍ朝鮮[조선]에 下[하]치 아니하매, 彼等[피등]의 漢 家[한가] 排擊[배격]이 잠시도 停息[정식]하지 아니하여, 郡[군]의 東半[동 반]이 어언간 貊人[맥인]의 回收[회수]한 바 되니, 이는 곧 後人[후인]의 소위 貊耳[맥이]요, 後年[후년] 高句麗國[고구려국]의 胚胎[배태]러라. 貊耳[맥이]의 地[지]는 上及[상급]함과 如[여]히, 大山深谷[대산심곡]이 多[다] 原澤[원택]이 無[무]하므로 山谷[산곡]을 隨[수]하여 部曲[부곡]을 成[성]하였으며 良田[양전]이 無[무]하여 비록 佃作[전작]을 力[력]하나 足 [족]히 口復[구복]을 實[실]하지 못하겠으므로 그 俗[속]이 食[식]을 節 [절]하며, 또 此等[차등] 經濟[경제] 上[상]의 압박이 彼等[피등]을 驅[구] 하여 凶急[흉급]의 勢[세]로서 四方[사방]에 .略[초략]케 하고 因[인]하여 武力[무력]을 充實[충실]케 하였다.
貊人[맥인]은 본디 夫餘[부여]의 別種[별종]이매 言語[언어] 諸事[제사] 대개 夫餘[부여]와 同[동]하고, 다만 外圍[외위] 自然界[자연계]의 여향을 受[수]하여하여 性氣[성기]와 衣服[의복]은 異[이]함이 有[유]하며,武力[무 력]과 貿易[무역] 居間[거간]으로 得[득]하는 富力[부력]이 그네의 생활을 자못 윤택케 하여 宮室[궁실] 侈麗[치려]하기를 好[호]하고, 官家[관가]에 .京[부경]이라는 倉庫[창고]가 有[유]하였으며 公會[공회]에는 錦繡[금수] 로 服[복]하고 金銀[금은]을 飾[식]하였으며, 民性[민성]이 歌舞[가무]를 好[호]하여 國中[국중] 邑落[읍락]에 暮夜[모야]면 男女[남녀] 群聚[군취] 하여 歌戱[가희]를 交[교]하였으며, 潔淸[결청]을 喜[희]하고 藏釀[장양]을 善[선]히 하였으며, 그 婚禮[혼례] 節次[절차]는 言語[언어] 已定[이정]하 면 女家[여가]에서 屋後[옥후]에 小屋[소옥]을 別建[별건]하여 壻屋[서옥] 이라 하나니, 壻[서] 暮[모]에 女家[여가]의 戶外[호외]에 至[지]하여 告名 [고명] .拜[궤배]하고 女[여]와 同宿[동숙]하기를 再三[재삼] 乞求[걸구] 하거든 女[여]의 부모 비로소 廳從[청종]하여 小屋中[소옥중]에 就宿[취숙] 케 하며, 錢帛[전백]을 留貯[유저]하여 他日[타일]의 獨立的[독립적] 生計 [생계]를 備[비]하였다가, 子[자]를 生[생]하여 長大[장대]한 후에야 婦 [부]를 自家[자가]로 率歸[솔귀]하며 送終[송종]의 禮[예]를 또한 愼嚴[신 엄]하게 하여 男女[남녀] 이미 嫁娶[가취]하면 벌써 壽衣[수의]를 분비하고 祭禮[제례]를 厚[후]하도록 하므로, 金銀財幣[금은재폐] 送死[송사]에 盡 [진]하고 石[석]을 積[적]하여 封墳[봉분]하고 松栢[송백]을 列植[열식]하 며, 尙武[상무]의 風[풍]이 上下[상하] 如一[여일]하여 人民[인민]이 氣力 [기력]이 有[유]하고 戰鬪[전투]에 習[습]하며 그의 무기는 弓[궁]으로 爲 主[위주]하니,貊弓[맥궁]은 古來[고래]로 유명한 好弓[호궁]이며 그 馬小 [마소]하되 登山][등산]에 능하더라.
당시의 貊耳[맥이]는 諸種[제종] 團部[단부]에 分[분]하여 一方[일방]에 各居[각거]하였으니, 句麗[구려](漢[한]의 屬懸[속현]이 됨)ㆍ沸流[비류] (一作卒本夫餘[일작졸본부여]혹 召西奴[소서노])ㆍ烏伊[오이]ㆍ.那[연나] (一作[일작] 提那[제나])ㆍ貫那[관나]ㆍ藻那[조나]ㆍ桓那[환나]ㆍ朱那[주 나] 등이 有[유]하여 沸流[비류]가가 總王[총왕]을 爲[위]하였으며 小水[소 수] 곧 .河畔[애하반]에 居[거]하는 者[자]는 漢人[한인]이 小水貊[소수 맥]이라 稱[칭]하였으며 또 梁貊[약맥]ㆍ蠶友[잠우] 등 別部[별부]가 有 [유]하였으며, 東[동]으로 沃沮[옥저]와 南[남]으로 樂浪[낙랑]의 중간에는 蓋馬[개마]ㆍ句茶[구차]ㆍ黃龍[황룡]ㆍ荇人[행인] 등 무수한 小國[소국]이 介在[개재]하였더라.
第十六節[제십육절] 辰國[진국]ㆍ韓國[한국]
[편집]漢江[한강]과 小白山脈[소백산맥] 以南[이남] 곧 樂浪[낙랑]ㆍ濊貊[예맥] 의 南[남]은 古[고]로부터 東半[동반]은 辰國[진국], 西半[서반]은 韓國[한 국]이라하고 後世[후세]에는 統[통]히 韓[한]이라 칭하니, 原始[원시]는 古 [고]「주신」人[인]의 南下[남하]한 者[자] 丸土[환토]를 自保[자보]하여 小國[소국]을 各成[각성]한 것이나, 後世[후세]에는 海陸[해륙] 兩方[양 방]으로 雜多[잡다]한 異民族[이민족]이 入居[입거]하였더라. 대개 漢水[한수]와 小白山脈[소백산맥]이 古昔[고석]에 在[재]하여는 거의 南北[남북] 橫截[횡절]의 天塹[처참]을 成[성]하여, 强族[강족] 혹 雄邦[웅 방]의 압박이 及[급]하지 아니하고, 土肥物豊[토비물풍]하여 生計[생계] 容 易[용이]한 故[고]로, 大陸方面[대륙방면]으로부터 戰亂[전란]ㆍ饑饉[기근] ㆍ苛政[가정]을 피하여 歸托[귀탁]하는 者[자] 世世[세세]로 不絶[부절]하 였으며, 또 東南西[동남서]의 三面[삼면]이 다 大海[대해]라. 咫尺[지척]을 隔[격]한 吳越荊蠻[오월형만]과 指顧[지고]에 在[재]한 態[태]ㆍ準[준]ㆍ倭 [왜]ㆍ蝦[하]의 交通[교통]이 빈번햐었음은 무론이 어니와, 節後風[절후풍] 과 赤道流[적도류]의 勢[세]를 順[순]하면 西天[서천]의 .人[정인]과 南洋 [남양]의 桶舟[통주]도 我涯角[아애각]에 來泊[내박]하였으리니, 故[고]로 海隅[해우] 浦曲[포곡]에는 遠人[원인]의 生聚[챙취]조차 無[무]치 아니한 지라, 韓土[한토]와 韓人[한인]은 실로 가장 雜多[잡다]한 種族[종족]이 가 장 煩.[번쇄]한 과정으로 夫餘人[부여인] 大根盤[대근반]에 同化[동화] 混 一[혼일]된 것이러라.
韓土[한토]의 生聚[생취]는 응당 邈遠[막원]할 것이요 또 衆多[중다]한 種 族[종족]이 서로 先後[선후]코 서로 錯綜[착종]하매, 競爭[경쟁]의 端[단] 과 勝敗[승패]의 運[운]이 심히 번다하였을 터이나 歷史的 事實[역사적 사 실]로 전하는 것이 一無[일무]하며, 當代[당대]의 末葉[말엽] 韓人[한인]의 세력이 漢北[한북]에 傳及[전급]한 時[시]로부터 名字[명자]가 비로소 文字 [문자]에 登[등]하여 辰[진]이 先[선]하고 韓[한]이 繼[속]하였는데, 韓 [한]의 名[명]으로 傳[전]할 時[시]에는 이미 三種[삼종]에 分[분]하였더 라.
韓[한]은 실로 無數[무수]한 小國[소국]의 聯邦[연방]이니, 三韓[삼한]의 合計[합계]가 凡 七八國[범 칠팔국]이라 大者[대자]는 萬餘戶[만여호]요 小 者[소자]는 數百家[수백가]씩 山海間[산해간]에 散在[산재]하여더라. 第十七節[제십칠절] 馬[마] 韓[한]西方[서방] 漢南[한남]의 京畿[경기]와 內四郡[내사군]을 除[제]한 忠淸道 [충청도]와 및 全羅道[전라도]의 全域[전역]에 聯立[연립]한 者[자]를 가론 馬韓[마한]이니 單[단]히 韓[한]으로 稱[칭]하기도 하며三[삼], 韓[한]의 中[중]에서 彊理[강리] 最大[최대]하고 세력이 最强[최강]하므로 諸韓[제 한]이 다 馬韓[마한]에 附屬[부속]하고 王[왕]은 문득 三韓[삼한]의 總王 [총왕]으로 統治[통치]의 權[권]을 執[집]한지라, 대개 馬韓[마한]이라는 「마」는 곧 「마리」(首[수])ㆍ「마루」(宗[종])ㆍ「맛」(長上[장상] 伯兄 [백형] 及[급] 上部[상부]) 등의 「마」니, 馬韓[마한]이라 함은 곧 諸韓 [제한]의 首長[수장], 혹 諸韓[제한]의 宗主家[종주가]이란 義[의]러라. 馬韓[마한] 諸國[제국] 중 그 名[명]을 著[저]한 者[자] 무릇 五四[오사] 니, 大國[대국]은 萬餘家[만여가], 小國[소국]은 千餘家[천여가], 總[총] 一[일].餘萬戶[여만호]요 諸韓[제한]의 總王[총왕]은 그중의 月支國[월지 국]에서 治[치]하였으며, 諸國[제국]에 長帥[장수]가 各有[각유]하여 大者 [대자]는 臣智[신지]라 名[명]하고 그 次[차]는 邑借[차]라 名[명]하였으 며, 各國[각국]이 地形[지형]으로써 境界[경계]를 分[분]하였을 뿐이요 城 郭[성곽]이 無[무]하며 國邑[국읍]마다 主帥[주수]가 有[유]하되 邑落[읍 락]이 雜居[잡거]하므로 절제 통일[節制 統一] 이 완전치 못하였더라. 일찍부터 種植[종식]을 行[행]하고 蠶桑[잠상]을 知[지]하고 綿[면]ㆍ布 [포]를 作[작]하였으며, 人性[인성]이 强勇[강용]하고 力作[역작]을 尙[상] 하여 公私[공사] 事役[사역]에 通日[통일] .呼力作[환호역작]하되 痛苦[통 고]치 아니하므로 健[건]타 하며, 그 생활은 簡易[간이] 純樸[순박]하여 男 女[남녀] 長幼[장유]의 間[간]과 會同酬酌[회동수작]의 際[제]에 煩.[번 쇄]한 禮節[예절]이 無[무]하며,居處[거처]는 草屋[초옥]과 土室[토실]이 병행하니, 土室[토실]은 北方[북방] 寒地[한지]의 舊俗[구속]이 遺傳[유전] 함이요 形[형]은 .[총]과 如[여]하고 戶[호]는 上[상]에 在[재]하며, 魁頭 [괴두]에 .[계]를 露[노]하며 布袍[포포]를 衣[의]하며 足[족]에는 革履 [혁이]와 草.[초교]를 幷用[병용]하며, 瓔珠[영주]로써 寶[보]를 爲[위]하 여 衣[의]에도 綴[철]하고 頭[두]에도 縣[현]하고 耳[이]에도 垂[수]하며 金銀 錦繡[금은 금수]로서 珍[진]을 爲[위]치 아니하며 人卜[인복]에 支機 [지기]를 用[용]하였으며, 裝[장]에는 棺[관]만 有[유]하고 槨[곽]이 無 [무]하며 厚裝[후장]을 尙[상]하여 牛馬[우마] 送死[송사]에 盡[진]하더 라.
五[오]월에 下種[하종]을 訖[흘]하면 天神[천신]을 祭[제]하되 群聚[군취] 歌舞[가무] 飮酒[음주]하여 晝夜[주야]에 休[휴]함이 無[무]하며, 그 舞 [무]는 수십 인이 幷起[병기] 相隨[상수]하여 節奏[절주]에 응하여 手足[수 족]으로써 長短[장단]을 取[취]하고 低昻[저앙]을 和[화]하여 一[일].월 에 農功[농공]이 畢[필]하면 또한 如是[여시]하니 이는 敬神[경신]과 重農 [중농]의 兩俗[약속]을 一致[일치]한 것이며, 國邑[국읍]마다 天君[천군]이 라는 神職[신직]을 別設[별설]하여 祭天[제천]을 主[주]케 하며, 또 神域 [신역]을 別定[별정]하여 蘇塗[소도]라 名[명]하고 大木[대목]을 入[입]하 고 鈴.[영고]를 縣[현]하더라.
北方[북방]에는 일찍부터 漢族[한족] 文明[문명]과 영향을 被[피]하여 禮 俗[예속]의 相似[상사]한 者[자] 多[다]하되 其他[기타]에는 오래도록 固有 [고유]한 風習[풍습]을 보유하였으며, 南方[남방] 近海處[근해처],南島[남 도] 漂流人[표류인]과 및 그 風習[풍습]에 染[염]한 者[자] 중에는 왕앙 文 身[문신]한 者[자]도 有[유]하며, 특수한 産物[산물]로는 梨子[이자]만한 大栗[대율]과 尾長[미장] 五尺餘[오척여] 되는 細尾鷄[세미계]가 聞[문]하 며, 또 州胡[주호]라 稱[칭]하는 漂來[표내] 異人[이인]이 西海中[서해중] 大島上[대도상]에 居[거]하니, 人形[인형]이 적이 短小[단소]하고 言語[언 어] 風習[풍습]이 同[동]치 아니하며 船[선]으로 왕래하면서 韓中[한중]에 市買[시매]하더라.
建國[건국]의 始[시]는 可考[가고]치 못하겠으며, 箕準[기준]이 韓地[한 지]에 僑居[교거]함으로부터 史上[사상]에 出來[출래]하나니, 準[준]이 衛 氏[위씨]의 功奪[공탈]을 被[피]하매 蒼黃[창황]이 左右[좌우] 宮人[궁인] 을 率[솔]하고 海露[해로]로 韓[한]의 一隅[일우]에 至[지]하여 스스로 韓 王[한왕]이라 칭하였으나 未幾[미기]에 絶滅[절멸]하였으며, 準來[준내] 以 前[이전]에 韓王[한왕]은 準來[준내] 當時[당시]와 幷[병] 以後[이후]까지 本地[본지]에 儼存[엄존]하여 準來[준래]의 영향은 자못 微弱[미약]하였으 며, 衛滿[위만]의 朝鮮[조선]과 漢[한]의 樂浪[낙랑]이 漢北[한북]에서 興 替[흥체]하되 그 流亡[유망]이 難[난]을 피하여 來托[내탁]하였을 뿐이요, 일찍 그 勢.[세염]이 韓地[한지]에 及[급]하지 아니함은 自衛[자위] 禦人 [어인]할 만한 實力[실력]이 유[유]함에 由[유]하였다 할 것이러라. 國[국]마다 長帥[장수]가 各有[각유]하되, 大者[대자]는 臣智[신지]라 하 고 그 次[차]는 邑借[읍차]라 하였으며, 馬韓[마한] 臣智[신지]는 「臣雲遣 支報[신운견지보], 安邪蹴支.[안사축지분], 臣離兒不例[신리아불예], 拘邪 秦支廉[구사진지염]」의 優呼[우호]를 加[가]하니, 대개 三韓[삼한]의 總王 [총왕]임을 表示[표시]함이러라.
按[안]컨대 臣雲[신운]은 馬韓[마한] 五四國[오사국]의 一[일]이요, 臣離 [신라] 혹 臣離兒[신리아]는 辰韓[진한] 十二國[십이국]의 一[일]인 斯盧 [사로] 혹 新盧[신로](後[후]에 新羅[신라])의 轉聲[전성]이요, 安邪[안사] ㆍ拘邪[구사]는 幷[병] 馬韓[마한] 十二國[십이국]의 一[일]이니 곧 三韓中 [삼한중]의 主要[주요]한 一國[일국]으로써 그 全體[전체]을 大表[대표]케 함이요, 홀로 弁韓[변한]이 兩國[양국]임은 그 服屬[복속]한 年代[연대] 혹 經路[경로]의 異[이]함에 由[유]함일지며, 遣支[견지]는 .吉支[건길지](王 [왕]의 稱[칭])ㆍ旱支等[한지등]의 異譯[이역]이요 報[보]는 助辭[조사] 혹 榮稱[영칭]일지며, 蹴支[축지]는 險側[험측]의 異譯[이역]이거나 혹 類語 [유어]일지니, 支[지]는 吉支[길지]ㆍ旱支[한지] 等[등]과 如[여]한 職名末 [직명말]의 例辭[예사]인즉 險側[험측]도 본디는 險側支[험측지]로서 略 [략]하여 側支[측지]가 되고 轉[전]하여 蹴支[축지]가 된 것일지요, .[분] 은 上文[상문]의 報[보]와 如[여]한 助辭[조사] 혹 榮稱[영칭]이거나 不然 [불연]이며 蹴子[축자]의 上[상]에 當入[당입]할 字[자]일지요, 不例[불예] 는 後年[후년] 新羅[신라]의 榮爵[영작]인 樊穢[번예]의 異譯[이역]이거나 百濟[백제]의 王號[왕호]인 於羅[어라]와 同語源[동어원]되는 語[어]일지 요, 秦支[진지]는 臣智[신지] 혹 그 類語[유어]의 異譯[이역]일지니 幷[병] 主上[주상]의 義[의]이며, 廉[염]은 陛下[폐하]ㆍ殿下[전하]등과 如[여]한 尊呼[존호] 혹 榮稱[영칭]일지니 今[금]「어른」과 同語原[동어원]인 어 [어]일까 하노라.
第十八節[제십팔절] 辰[진] 韓[한]
[편집]東方[동방] 馬韓[마한]의 西[서], 今[금] 小白山脈[소백산맥] 以南[이남] 의 江原道[강원도] 一部[일부]와 慶尙北道[경상북도] 全局[전국]과, 伽倻山 脈[가양산맥]으로부터 密陽[밀양]ㆍ梁山[양산]을 經[경]하여 東來[동래]로 劃[획]한 一線[일선] 以北[이북]에 聯立[연립]한 者[자]를 가론 辰韓[진한] 이니 古[고]의 辰韓[진한]이라.
古來[고래]로 嶺東方面[영동방면]으로서는 沃沮[옥저]ㆍ濊貊[예맥] 등 古 [고]「주신」人[인]이 漸下[점하]하고, 漢江上流[한강상류], 鳥領[조령]의 道[도]로서는 春秋[춘추] 列國[열국] 以來[이래] 箕衛[기위]ㆍ秦漢[진한] 등 歷代[역대]의 漢族[한족] 亡人[망인]이 竄來[찬래]하고, 西[서]으로서는 漢人[한인]이 流入[유입]하여 四來[사래]한 群族[군족]이 一區[일구]에 混 處[혼처]할새, 初[초]에는 六國[육국]에 分[분]하였으며,본디 辰[진]으로 韓[한]에 統屬[통속]된 까닭에 辰韓[진한]이라 稱[칭]하였으며, 流移[유이] 의 人[인]이므로 勢力[세력]이 薄微[박미]하여 世世[세세]로 馬韓[마한] 總 王[총왕]에게 隸[예]하여 王[왕]을 自立[자립]하지 못하며, 十二國[십이국] 以外[이외]에 諸小[제소] 別邑[별읍]이 有[유]하며 秦[진] 亡人[망인]의 別 部[별부]도 그중의 一[일]이니 소위 秦韓[진한]이 是[시]이며, 長帥[장수] 가 各有[각유]하니 大者[대자]를 臣智[신지]라 함은 馬韓[마한]과 如[여]하 고, 次[차]에 險側[험측](儉側[검측])이 有[유]하고 次[차]에 樊穢[번예] (一作[일작] 樊.[번저])가 有[유]하고, 次[차]에 殺奚[살해]가 有[유]하 고, 次[차]에 借邑[차읍]이 有[유]하더라.
土地[토지] 肥美[비미]하여 五穀[오곡]과 稱[칭]를 種[종]함에 宜[의]하 며, 蠶桑[잠상]을 曉[효]하고 .布[겸포]를 作[작]하며 牛馬[우마]를 乘駕 [승가]하며, 嫁娶[가취] 禮俗[예속]에 男女別[남녀별]이 有[유]하며 裝式 [장식]에 大鳥羽[대조우]를 用[용]하니 死者[사자] 飛揚[비양] 昇天[승천] 함을 祈[기]하는 意[의]이며 歌舞[가무]와 飮酒[음주]를 嗜[기]하며 築[축] 과 如[여]한 瑟[슬]을 彈[단]하고 音曲[음곡]이 有[유]하며 行者[행자] 相 逢[상봉]하매 住[주]하여 路[로]를 讓[양]하며, 東南[동남] 海邊[해변]에는 文身[문신]의 俗[속]이 有[유]하며 家屋[가옥]은 橫[횡]으로 木[목]을 累 [누]하여 建成[건성]하며, 言語[언어]는 馬韓[마한]과 同[동]치 아니한 地 方[지방]이 有[유]하며 兵仗[병장]은 馬韓[마한]과 同[동]하며 步戰[보전] 에 能[능]하더라.
國中[국중]에 鐵[철]을 産[산]하므로 韓[한]과 濊[예]와 倭[왜]다 取用[취 용]하고, 北方[북방] 漢[한]의 那縣[나현]에도 供給[공급]하였으며 모든 市 買[시매]에 鐵[철]로써 錢.[전초]를 작[작]하더라.
兒[아] 生[생]하매 곧 石[석]으로써 頭[두]를 壓[압]하여 .[편]하도록 하 므로 辰韓人[진한인]이다 .頭[편두]임을 古記[고기]에 傳[전]하나 如何[여 하]한 것인지 考[고]치 못할러라.
第十九節[제십구절] 弁[변] 韓[한]
[편집]辰韓[진한]의 南[남] 馬韓[마한]의 西[서], 今[금] 慶尙南道[경상남도]의 大部[대부]에 聯立[연립]한 者[자]를 가론 弁韓[변한]이요, 그 境城[경성] 이 辰韓[진한]으로 더불어 相難[상난]하고 言語[언어]ㆍ法俗[법속]까지 相 似[상사]하므로 一[일]에 弁辰[변진]이라 하며, 또한 十二國[십이국]이라 當代[당대]에는 辰韓[진하]과 共[공]히 馬韓[마한]에 隸[예]하였더라. 대개 辰韓[진한]과 弁韓[변한]의 名號[명호]가 相異[상이]함은 頭[두]의 弁子[변자](고깔 즉 駕那[가나])를 戴[대]하는 異俗[이속]이 有[유]함에 由 [유]함이니, 弁辰[변진]이란 것은 곧 弁[변]하는 辰人[진인]이라 함이요 轉 [전]하여 弁韓[변한]의 名[명]을 得[득]한 것일지라, <三國志[삼국지]> 及 [급] <後漢西[후한서]>에 「狗邪韓[구사한]」(狗邪[구사]는 駕那[가나]ㆍ駕 洛[가락]의 通言[통언])으로 稱[칭]함이 그 明證[명증]이라 이라 할 것이 요, 巾.[건책]을 好[호]함은 韓人[한인]의 通性[통성]이로되 오직 弁韓[변 한]은 尖頂者[첨정자]를 用[용]한 것이 弁辰[변진]의 名[명]을 初載[초재] 한 <魏志[위지]> 筆者[필자]의 視廳[시청]을 惹[야]하여 弁辰[변진]의 名 [명]을 用[용]하게 된 것일지요, 다만 庶民[서민]의 常服[상복]에 한자기 弁子[변자]를 用[용]한 與否[여부]는 今[금]에 可考[가고]치 못할지나 少 [소]하여도 禮裝[예장]에는 弁[변]을 用[용]함이 明[명]하니, <三國志[삼국 지]>를 據[거]하건대 百事[백사] 다 辰韓[진한]과 同[동]하되 오직 祠祭[사 제]의 禮[예]에 異施[이시]가 有[유]하다 하였나니, 그 소위 異施[이시]란 것이 神職[신직] 곧 巫君[무군]이 神事[신사]에 弁[변]을 着[착]하는 條件 [조건]도 有[유]함을 想像[상상]살 수 있음은, 巫女[무녀]의 賽神[새신]에 今[금]에도 오히려 弁[변]을 用[용]하는 遺風[유풍]이 有[유]함으로써 知 [지]할 것이요, 또 <日本書紀[일본서기]>를 據[거]하건대, 加羅[가라]의 王 子[왕자]를 有角人[유각인]으로 認[인]하였다 하니, 그 소위 角[각]이 帽 尖[모첨]을 喩[유]한 것임은 容易[용이]히 想像[상상]할 바라, 弁韓[변한] 의 名[명]이 戴弁[대변]의 俗[속]에 由[유]함은 거의 容疑[용의]치 아니할 바리라.
그 人[인]은 形[형]이 大[대]하며 衣服[의복]은 潔淸[결청]을 尙[상]하며, 髮[발]이 長[장]하며 廣幅細布[광폭세포]을 作[작]하며, 小邦[소방]으로 辰 [진]ㆍ秦[진]ㆍ倭[왜] 등 異族[이족]에 介在[개재]하므로 立國[입국]의 規 模[규모] 특히 嚴峻[엄준]하더라.
按[안]컨대, 半島[반도] 南方[남방]의 具體的[구체적] 事情이 文字[문자] 로 騰傳[등전]하기는 支那[지나]의 三國時代[삼국시대] 곧 西紀三世紀[서기 삼세기] 中葉[중엽]으로부터 始[시]한다 할 것이요, 魏[위] 魚.[어환]의 <魏略[위략]>과 晉[진]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는 그 最古[최고]한 資料[자료]로 許[허]하여도 無妨[무방]한 것이니, 대개 此[차] 兩書[양서] 의 基本[기본]은 西紀[서기] 二五.年頃[이오.년경]에 魏軍[위군]이 高句 麗[고구려]를 追擊[추격]하여 沃沮[옥저]의 地[지]에까지 入[입]하였을 時 [시]에 人[인]을 派[파]하여 採訪[채방]한 資料[자료]니, <魏志[위지]> 東 夷傳[동이전]에 所謂[소위]「周觀諸國[주관제국], 采其法俗[채기법속], 小 大區別[소대구별], 各有名號[각유명호], 可得詳記[가득상기]」란 것이 是 [시]라, 三韓[삼한]의 名稱[명칭]은 대개 當時[당시] 探檢家[탐검가]의 傳 聞[전문]과 各該[각해]의 習俗[습속]으로 써 命名[명명]한 것으로 始[시]하 였음이 明[명]하며, 韓[한]이 반드시 當時[당시]의 聯邦[연방] 總名[총명] 인지 혹 汗[한]ㆍ加[가]ㆍ旱[한]등과 如[여]한 當時[당시]의 王號[왕호]를 假借[가차]함인지 未詳[미상]하거니와, 만일 「旱[한]」이 治[치]하는 國 [국]이라 하여 同音[동음]의 古國號[고국호]를 取[취]하여 韓[한]의 字[자] 를 用[용]하였다 할진대, 馬韓[마한]은 곧 首王國[수왕국]의 義[의]요 辰韓 [진한]은 辰王國[진왕국]의 義[의]요 弁韓[변한]은 곧 弁王[변왕](弁[변]하 는 王[왕])國[국]의 義[의]일지니라.
弁韓[변한]이 곧 拘耶韓[구야한]의 譯[역]일 것은 弁辰[변진] 혹 弁韓[변 한]의 名[명]으로 傳[전]한 <漢[한]ㆍ魏[위]>에는 加羅[가라]ㆍ加倻[가야] ㆍ駕洛[가락] 等名[등명]이 聞[문] 아니하고, 또 다만 可羅[가라]로만 傳 [전]한 日本[일본]에는 弁韓[변한] 혹 弁辰[변진]의 名[명]이 聞[문]치 아 니함으로도 添證[첨증]할 것이요, <三國志[삼국지]>에 錄[록]한 弁辰[변진] 十二國中[십이국중]에 狗[구]가 有[유]함은 狗耶韓[구야한]의 首都[수도]임 으로써 홀로 實地[실지]의 稱號[칭호]를 音譯[음역]할일지니 辰韓[진한]의 新盧[신로]와 如[여]한 것일지니라.
弁韓[변한]의 弁[변]이 冠[관]의 弁[변]인 證迹[증적]을 日本史[일본사]에 도 見[견]하노니,<日本書紀[일본서기]> 垂仁紀[수인기]에 「一云御間城天皇 之世[일운어간성천황지세], 額有角人[액유각인], 乘一船[승일선],泊于越前 .飯浦[박우월전사반포], 故號其處曰角鹿[고호기처왈각녹], 問之曰何國人也 [문지왈하국인야], 對曰意富加羅國王之子[대왈의부가나국왕지자], 名都怒我 阿羅斯等[명도노아아라사등]」이라 한 것이 是[시]라, 意富加羅[의부가라] 가 日本[일본] 學者[학자]의 說[설]과 如[여]히 大伽倻[대가야]인 與否[여 부]는 姑舍[고사]하고 加羅[가라] 卽[즉] 弁韓[변한]의 一國[일국]임은 무 론이요,「額有角人[액유각인]」이라 함은 漢史[한사]의 所謂[소위]「魁頭露 .[괴두로계]」, 곧 今日[금일]의 「상투」가 아니며 斷定[단정]코 尖頂[첨 정]의 異帽[이모]를 錯認[착인] 혹 比喩[비유]함일지라. 然[연]이나 「其俗 好衣.[기속호의책]」은 諸韓[제한]의 通風[통풍]으로 認[인]할 것이요, <三國志[삼국지]>에 漢人[한인]이 北方[북방] 漢郡[한군]에 交通[교통]하던 모양을 記[기]한 文中[문중]에 「下戶[하호]라도 詣郡朝謁[예준조알]에는 皆假衣.[개가의책]이라」함을 見[견]하건대, 一國[일국]의 王子[왕자]가 外國[외국]에 出[출]하여 外人[외인]과 應酬[응수]할 時[시]에「魁頭露. [괴두로계]」로 以[이]하였을 리 萬無[만무]하고 반드시 國制[국제]의 弁 [변]을 冠[관]하였으리니, 日人[일인]이 角[각]으로 見[견]한 것은 필경 慣 視[관시]치 못하던 尖頂[첨정]의 帽[모]를 形喩[형유]함이 明[명]하다 할지 라, 此[차] 또한 足[족]히 弁韓[변한]의 弁[변]이 冠[관]의 弁[변]임의 有 力[유력]한 一傍證[일방증]을 作[작]할지니라.
또 <後漢書[후한서]> 東夷傳[동이전]에 「東夷率皆土著[동이솔개토저], 熹 飮酒歌舞[희음주가무], 或冠弁衣錦[혹관변의금]」이란 文句[문구]로써 見 [견]하건대, 冠弁[관변]과 衣錦[의금]은 이른바 東夷[동이] 全體[전체]의 風習[풍습]이 아님을 知[지]할지니, 衣錦[의금]이 夫餘[부여]ㆍ高句麗[고구 려] 등 北部[북부]의 俗[속]이요, 南部[남부]에서는 錦繡[금수]를 貴[귀]히 여기지 아니함처럼 冠弁[관변]도 一部分[일부분]에 行[행]한 地方的習俗[지 방적습속]이므로 「或[혹]」이라 한 것이라, 此[차]의 或[혹]이 弁韓[변한] 을 指[지]함일 것을 想察[상찰]키 難[난]치 아니하도다.
第二.節[제이.절] 예
[편집]此時[차시]에는 弁韓[변한]의 南海[남해]를 隔[격]하여 半島[반도]로 더불 어 자못 親密[친밀]히 交涉[교섭]한 一域[일역]이 有[유]하니 가론 「예」 요 漢人[한인]은 倭[왜]로써 稱[칭]한 者[자]라, 彼此[피차]의 境域[경역] 이 指顧[지고]의 間[간]에 在[재]하고 種族的[종족적] 關係[관계]가 固有 [고유]함으로써 交通[교통]이 빈번하였으며, 彼地[피지]에는 我人[아인]의, 我地[아지]에는 彼人[피인]의 移住[이주]한 團部[단부]조차 生成[생성]하였 으며, 地理[지리]의 形便[형편]을 因[인]하여 馬韓[마한]과는 특수한 관계 無[무]하였으되, 더욱 弁辰[변진]과는 貿易上[무역상] 交通[교통]도 자못 久遠[구원]하고 文化上[문화상] 交涉[교섭]도 자못 深大[심대]한 者[자] 存 [존] 하였으며, 또 예人[인]이 韓[한]을 介[개]하여 漢[한] 樂浪郡[낙랑군] 에도 好[호]를 通[통]하였더라.
대개 예는 弁韓[변한]에서 약 五百里[오백리] 越海地[월해지]에 在[재]하 여 細長[세장] 偃屈[언굴]한 도서[도서]로 我[아] 半島[반도]를 完全[완전] 히 包護[포호]한 者[자]니 後[후]의 耶馬臺[야마대]와 今[금]의 日本[일본] 이 是[시]라, 北[북]으론 大陸[대륙]을 戴[대]하고 南[남]으론 大洋[대양] 을 控[공]하였으매, 古來[고래]로 北陸[북륙] 南島[남도] 兩系統[양계통]의 民族[민족]이 各散[각산] 혹 一團[일단]으로 各異[각이]한 年代[년대]와 徑 路[경로]로 島內[도내]에 入居[입거]하였는데, 그 역사의 先開[선개]한 것 이 예의 西南域[서남역]인 弁韓[변한] 越岸[월안]이니,弁辰[변진]ㆍ辰韓[진 한]으로 더불어 公的[공적] 交際[교제]의 生[생]한 當代[당대] 末葉[말엽] 에는 무룻 百餘國[백여국]이 山島[산도]를 依[의]하여 國[국]을 建[건]하 니, 그중 最大[최대]한 者[자]는 무릇 三.許國[삼.허국]이 有[유]하였더 라.
我人[아인]으로 예에 至[지]한 者[자] 二系統[이계통]이 有[유]하니, 北方 [북방] .婁[읍루]ㆍ沃沮[옥저] 등이 今樺太[금화태]ㆍ北海道[북해도]로 由 [유]하여 점차 南下[남하]한 것이 一[일]이며 南方[남방] 辰[진]ㆍ弁[변] 兩韓[양한] 등이 筑紫[축자]ㆍ出雲地方[출운지방]으로 由[유]하여 점차 北 進[북진]한 것이 一[일]이라, 年代[연대]로 言[언]하면 北系[북계] 진실로 久遠[구원]하되 事蹟[사적]으로 言[언]하면 南系[남계] 도리어 多[다]하며, 兩系[양계] 統[통]히 太平洋洋岸[태평양양안]보다 日本海岸[일본해안]에 開 鴻闢萊[개홍벽래]한 業蹟[업적]이 多[다]함은 地勢[지세]의 固宜[고의]한 버러라.
當時[당시] 예에는 北[북]에 蝦夷[하이]ㆍ高志[고지]등, 南[남]에 態襲[태 습]ㆍ準人[준인] 등 .悍[광한]한 野人[야인]이 割據[할거]한 중에 後世[후 세]의 天孫族[천손족]ㆍ出雲族[출운족]으로 稱[칭]하는 優秀[우수]한 文化 [문화]를 有[유]한 種族[종족]이 西南方[서남방]에서 起[기]하여 建國[건 국]의 經略[경략]을 行[행]하니, 此[차] 兩族[양족]의 本原[본원]이 南洋 [남양]인지 北陸[북륙]인지 聚訟[취송]이 분분하되, 地勢[지세]ㆍ言語[언 어]ㆍ信仰[신앙]ㆍ遺物[유물]등으로 察[찰]하여 北原[북원]이 是[시]하다 함은 今[금]에 거의 定案[정안]을 成[성]한지라, 上世[상세]의 傳說[전설] 에 韓地[한지]를 「根國[근국]」이라 함은 此間[차간]의 消息[소식]을 傳 [전]함일지니라.
當代[댕대]의 예는 무론 傳說時代[전설시대]이매 實情[실정]을 徵[징]하기 難[난]하되 모호한 神話[신화]중에도 南韓人[남한인]의 動作[동작]한 證跡 [증적]이 자못 허다하며 그중에 가장 저명한 者[자]는 辰韓[진한]의 王子 [왕자]라는 天日槍[천일창]이러라. 대개 築紫[축자](今[금] 九州[구주]의 北部[북부])로 從[종]하여 出雲[출운](今[금] 鳥取[조취]ㆍ島根[도근] 兩縣 [양현] 等地[등지])에 至[지]하는 海岸[해안]은 上古[상고]로부터 辰韓人 [진한인]의 移住地[이주지]로 일찍부터 君長[군장]을 別立[별립]하더니, 內 外[내외]의 정세가 統一[통일]을 요구하매 드디어 本國[본국]의 王子[왕자] 를 迎來[영래]하여 總王[총왕] 爲[위]함이러라.
日本[일본] 古紀[고기](筑紫風土記[축자풍토기])를 據[거]하건대, 意呂山 [의려산] 곧 蔚山[울산]으로 從[종]하여 怡土[이토](今[금] 福岡市[복강시] 의 西方[서방])으로 至[지]하였다 하니, 怡土[이토](一作伊都[일작이도])國 [국]은 실로 筑前[축전]ㆍ但馬[단마]ㆍ播磨[파마]ㆍ淡路[담로]ㆍ近江[근강] ㆍ若狹[약협] 등 諸處[제처]에 分居[분거]한 韓人[한인] 諸國[제국]의 宗邦 [종방]이러라.
王子[왕자] 內[내]할 時[시]에 羽太玉[우태옥]ㆍ足高玉[족고옥]ㆍ.鹿玉 [제녹옥](幷[병] 寶珠[보주]의 名稱[명칭])ㆍ赤石[적석] 各一個[각일개]와 出石小刀[출석소도] 一口[일구]와 出石利.[출석리우] 一枝[일지]와 日眞鏡 [일진경] 一面[일면]과 態神離[태신리] 一具[일구] 合七物[합칠물]을 將來 [장래]하였는데, 後[후]에 神物[신물]이라하여 歷代[역대]의 崇敬[숭경]이 대단하였으며, 또 王子[왕자] 東行時[동행시] 從人[종인] 중에 陶人[도인] 이 有[유]하여 其術[기술]을 彼土[피토]에 전하였으며, 王子[왕자] 死[사] 神[신]으로 崇[숭]하니 但馬國[단마국] 出石郡[출석군] 伊豆志大社[이두지 대사] 是[시]라 今[금]에 至[지]하도록 尙存[상존]하니라.
韓人[한인]이 예地[지]에 發展[발전]하던 一邊[일변]에 예人[인]의 韓地 [한지]로 移居[이거]하는 者[자] 稍有[초유]하여 洛東江岸[낙동강안], 弁韓 [변한] 一隅地[일우지]에 약간 部曲[부곡]을 成[성]하고 韓市[한시]로 來往 [내왕]하면서 貿易[무역]을 營[영]하였더라.
第二一節[제이일절] 夫餘[부여]의 東北[동북] 兩分[양분]
[편집]漢武[한무]의 朝鮮[조선] 經略[경략]은 東方[동방] 諸民邦[제민방]에 대하 여 無前[무전]한 大衝激[대충격]이라, 群族[군족]의 團部[단부] 此[차]로 由[유]하여 確定[확정]하고 列國[열국]의 彊理[강리] 此[차]로 由[유]하여 明分[명분]한 것은 上文[상문]과 如[여]하거니와, 彼等[피등]의 自覺[자각] 과 能力[능력]이 漸進[점진]하는 대로 活力[활력]이 自然[자연]히 旁近[방 근]으로 盈溢[영일]하니, 南[남]에 在[재]하여는 蓋馬山[개마산] 東[동]의 勢力[세력]이 千年[천년] 獨尊[독존]의 夫餘王朝[부여왕조]로 하여금 國本 [국본]을 移動[이동]치 아니치 못하게 하였더라.
武力[무력]으로 强[강]함은 全體[전체]로 强[강]한 것이라, 當時[당시]에 在[재]하여 가장 威武[위무]의 充實[충일]한 貊人[맥인]의 諸部[제부] 朝鮮 [조선]ㆍ夫餘[부여]의 間[간]에 介在[개재]하여 四方[사방]에 威力[위력]을 발휘한 것은 진실로 당연한 바로되, 오히려 統一[통일]과 節制[절제]가 無 [무]하였으므로 何等[하등] 功業[공업]을 成就[성취]하지 못하더니, 周圍 [주위]의 壓迫[압박]과 歲月[세월]의 訓鍊[훈련]이 彼等[피등]으로 하여금 組織的[조직적] 企劃[기획]을 立[입]케 하고 統一的[통일적] 運動[운동]을 爲[위]케 하였더라.
最初[최초]에 現出[현출]한 者[자] 天帝[천제]의 子[자]로 球世[구세]의 任[임]을 帶[대]하였다는 解慕漱[해모수]를 頭戴[두대]한 一族[일족]이니, 太白山[태백산] 南[남] 鴨綠谷裏[압록곡이]에서 오래 部屬[부속]을 連結[연 결]하고 세력을 養蓄[양축]하다가, 羽翼[우익]이 成[성]함에 及[급]하여 進 擊[진격]의 第一矢[제일시]를 北夫餘[북부여] 王朝[왕조]로 向[향]하여 發 [발]하였더라.
古史[고사]에 傳[전]하는 바는 事端[사단]이 紛.[분운]하고 先後[선후] 錯亂[착란]하였으되, 가만히 그 理路[이로]를 推尋[추심]하건대, 解夫婁[해 부루]의 通名[통명]으로 稱[칭]하는 당시의 夫餘王[부여왕]이 年老[연로]코 子[자] 無[무]하고, 金蛙[금와]라는 .止[근지] 不識[불식]의 異姓兒[이성 아]를 收養[수양]하여 太子[태자]로 立[입]하였더니, 王[왕]이 昇遐[승하] 하매 蛙[와] 位[위]를 飼[사]하니, 慕漱[모수]는 解[해]의 榮稱[영칭]을 頂 戴[정대]하는 夫餘[부여] 王室[왕실]의 懿親[의친]으로 일찍 國南[국남]에 流浪[유량]하다가 新銳[신예]한 貊人[맥인]의 力[역]을 仗[장]하여 血統[혈 통] 卞爭[변쟁]의 名[명]으로 此次[차차]의 變[변]을 起[기]한 것이라, 戰 [전]에 先[선]하여 檄[격]을 傳[전]하되, 「天[천]이 그 子孫[자손]으로 하 여금 夫餘[부여]의 地[지]에 至[지]케 하심이니 汝[여] 마땅히 讓避[양피] 하라」 함을 見[견]할지라도 這間[저간]의 소식을 察[찰]할지로다.
金蛙[금와] 능히 適[적]하지 못하고 相[상] 阿蘭弗[아란불]의 進言[진언] 을 從[종]하여 士壤[사양]이 膏.[고유]여 五穀[오곡]에 宜[의]한 理由[이 유]로써 東海[동해]의 濱[빈] 迦葉[가엽]의 原[원]에 都[도]를 移[이]하고 國號[국호]를 東夫餘[동부여]라 칭하니, 解慕漱[해모수]의 來據[내거]한 夫 餘[부여]는 是[시]로 從[종]하여 北夫餘[북부여]의 稱[칭]이 生[생]하였더 라. 迦葉原[가엽원]에 대하여서는 自來[자래] 諸說[제설]이 분분하되 前後 [전후]의 사정과 內外[내외]의 형편으로 照看[조간]하건대, 당시 沃沮[옥 저]의 域[역] 今[금] 咸鏡道[함경도]의 地[지]임이 明[명]하니라.
按[안]하니, 東夫餘[동부여]에 對[대]하여 自來[자래]로 存否兩論[존부양 론]이 有[유]하거니와, 解慕漱[해모수]로 因[인]하여 夫餘[부여]의 王朝[왕 조] 東北[동북]으로 分裂[분열]한 것은 古記[고기]에도 明記[명기]한 것이 요, 또 好太王碑[호태왕비]에도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往討[동부 여구시추모왕속민중반불공왕토]」라 하였은즉, 東夫餘[동부여]의 起原[기 원]이 麗朝[여조] 以前[이전]에 在[재]함과 好太王[호태왕]에 至[지]하여 비로소 滅亡[멸망]함을 知[지]할지니 東夫餘[동부여] 否認說[부인설]은 다 시 贅卞[췌변]할 것 없으며, 東遷[동천] 肯認說[긍인설]에도 茶山[차산] 丁 氏[정씨]와 如[여]한 者[자]는 바로 嶺東[영동]의 濊貊[예맥]으로써 疑[의] 하고, 卒本[졸본]ㆍ鴨水[압수]ㆍ江界[강계]ㆍ渭原[위원]으로서 東[동]으로 雪寒領[설한령]을 踰[유]하여 轉輾[전전] 南徙[남사]하였으리라 하되, 解慕 漱[해모수]의 起原地[기원지]가 柳花夫人傳說[유화부인전설]로써 推[추] 南 方[남방]에 在[재]함이 明[명]한즉 侵陵[침릉]의 路[로]로 避走[피주]함은 於理[어리]에 不當[부당]하니, 想[상]컨대 東南[동남] 吉林[길림]으로 路 [로]를 取[취]하여 松花江[송화강] 上流[상류] 谷地[곡지]로써 沃沮[옥저] 의 地[지]로 入[입]하였음이 順理[순리]요, 此[차] 沃沮[옥저]의 地[지]는 <三國志[삼국지]>에 「土地肥美[토지비미], 背山向海[배산향해], 宜五穀[의 오곡], 善田種[선전종]」이라 한 것을 見[견]할지라도 그 以前[이전]으로부 터 農業地[농업지]로 著[저]함을 知[지]할지니, 此[차]를 除[제]하면 農業 國[농업국]인 夫餘人[부여인]의 遷徙地[천사지]로 東海[동해]의 濱[빈]에 다시 適土[적토]를 求[구]하지 못할 것이며, <三國志[삼국지]> 時代[시대] 에 沃沮[옥저]가 「善田種[선전종]」으로 著[저]함도 夫餘[부여]의 遷徙[천 사]로 因[인]하여 더욱 農藝[농예]의 知識[지식]을 擴充[확충]한 것으로 認 [인]할지니, 夫餘[부여]와 沃沮[옥저]가 太白山[태백산]으로써 境界[경계] 를 相接[상접]한 當時[당시]에, 敗退[패퇴]하는 夫餘[부여]가 抵抗力[저항 력]의 比較的[비교적] 薄弱[박약]하고 生活[생활] 條件[조건]의 比較的[비 교적] 類似[유사]한 沃沮[옥저]로 竄入[찬입]하였을 것이 當然[당연]타 할 것이요, 또 沃沮[옥저]는 當時[당시]에 漢[한]의 壓迫[압박]을 切感[절감] 하던 時[시]인즉 同種族[동종족]인 夫餘[부여]의 新勢力[신세력]을 歡迎[환 영]하여 異分子[이분자] 排除[배제]에 利用[이용]하였음을 設想[설상]할지 니, <三國志[삼국지]> <後漢書[후한서]> 等[등]의 「漢光武元封二年[한광무 원봉이년], 伐朝鮮[벌조선], 殺滿孫右渠[살만손우거], 分其地爲四郡[분기지 위사방] 以沃沮城爲玄.郡[이옥저성위현도균], 後爲夷貊所侵[후위이맥소 침], 徙郡句麗西北[사군구려서북]」은 此間[차간]의 消息[소식]을 傳[전]함 일지니라. 然[연]이나 步[보]를 進[진]하여 考察[고찰]하건대, 沃沮[옥저] 의 言語[언어] 法俗[법속]이 夫餘[부여]와 大同[대동]함은 무론 種族[동족] 의 同原[동원]에도 由[유]함이려니와, 年所[연소]를 久歷[구역]하되 變異 [변이]가 大無[대무]함은 實[실]로 親密[친밀]한 交涉[교섭]과 周遍[주편] 한 混化[혼화]를 經[경]하지 아니하면 不得[불득]할지니, <三國志[삼국지]> 時代[시대]에도 夫餘[부여]와 沃沮[옥저]의 法俗[법속]이 大同[대동]함은 比較的[비교적] 새로이 東夫餘[동부여]의 侵入[침입] 雜.[잡유]를 受[수] 한 所以[소이]라 할 것이요, 또 新興[신흥]한 高句麗[고구려]와 隣接[인접] 한 沃沮地[옥저지]의 戰和[전화] 兩交涉[양교섭]이 응당 繁多[번다]함을 免 [면]치 못하였으련마는, <高句麗本紀[고구려본기]>에 漢史[한사]를 移載[이 재]한 一兩條[일양조] 外[외]에 沃沮[옥저]의 名[명]이 見[견]치 아니하고, 好太王[호태왕]의 碑[비]에도 東夫餘[동부여]의 名[명]만 見[견]함은 麗人 [여인]이 沃沮[옥저]를 東夫餘[동부여] 或[혹] 單[단]히 夫餘[부여]로만 稱 [칭]한 所以[소이]인 듯하며, 漢史[한사]에는 沃沮[옥저]의 名[명]만 有 [유]하고 東夫餘[동부여]가 見[견]치 아니함은 原來[원래] 沃沮[옥저]의 稱 [칭]이 漢家屬地[한가려지]에 最近[최근]하고 漢家[한가] 交涉[교섭]이 較 多[교다]한 沃沮地[옥저지]에서 起[기]하여, 終[종]에는 蓋馬大山以東地[개 마대산이동지]의 總名[총명]을 作[작]한 것인즉, 東夫餘[동부여]의 闖入[틈 입]이 有[유]한 後[후]에도 便宜上[편의상] 혹 其他[기타]의 理由[이유]로 依然[의연]히 舊名[구명]으로 稱謂[칭위]함일지며, 夫餘[부여]의 東北[동 북] 分裂[분열]이 漢史[한사]에 明見[명견]치 아니함을 疑[의]할 수 있으 나, 소위 外夷[외이] 彼此間[피차간]의 成敗[성패]는 대개 漢人[한인]의 感 覺[감각]을 催[최]함이 少[소]하고 설혹 聞知[문지]하여도 騰錄[등록]치 아 니함이 진실로 例事[예사]며, 然[연]이나 <三國志[삼국지]>에 光武[광무] 以後[이후]의 事[사]라 하여 沃沮地方[옥저지방]에서 漢人[한인]의 勢力[세 력]이 一掃[일소]된 후에 「夷狄更相功伐[이적경상공벌]」의 句[구]가 有 [유]함은 문득 東夫餘[동부여]의 沃沮方面[옥저방면] 策動[책동] 以後[이 후]로 高句麗[고구려]의 勃興[발흥]하여 彼此[피차] 爭鬪[쟁투]한 大疲瀾 [대피란]을 一筆[일필]로 略記[약]한 것일지며, 金蛙王[금와왕]이 解慕漱 [해무수]의 夫人[부인]이던 柳花[유화]를 太白山[태백산] 南[남] 優渤水[우 발수]에서 得[득]하였다 함은 가장 明白[명백]히 慕漱[모수]의 北侵[북침] 과 金蛙[금와]의 南遷[남천]을 證示[증시]하는 것일 할지니라.
上古 槪觀[상고 개관]
文化 發達上[문화 발달상]으로 近世[근세]를 比較[비교]하면 後者[후자]의 至迅[지신]함에도 .目[당목]하려니와 前者[전자]의 太緩[태완]함에도 驚心 [경심]치 아니치 못할지니, 此[차]를 朝鮮史[조선사]에 見[견]할지라도 遊 移民[유이민]이 定住[정주]의 國[국]이 되기에 이미 千年[천년]을 要[요]하 고, 四散[사산]한 團部[단부]가 統一[통일]한 세력을 成[성]하여 國土[국 토]와 種族[종족]의 自我[자아]를 確認[확인]하기에 다시 千年[천년]을 要 [요]하였도다.
新市時節[신시시절]은 실로 朝鮮歷史[조선역사]의 胚胎[배태]요 檀君時節 [단군시절]은 그 落種[낙종]과 發芽[발아]니, 射獵生活[사렵생활]의 四圍 [사위] 중에 唯一[유일]한 農業民[농업민]으로 松花江[송화강]上流[상류]谷 地[곡지]에 원시적 국가를 制置[제치]한 桓民族[환민족]이 定住[정주]한 지 千年間[천년간]에, 內外 膨脹[내외 팽창]의 趨勢[추세]를 從[종]하여 下流 平原[하류 평원]으로 점차 轉徙[전사]하여 夫餘王朝[부여왕조]를 長春平野 [장춘평야]에 建[건]한 것은 실로 朝鮮歷史[조선역사]의 移秧[이앙]이라, 平原 沃土[평원 옥토]로 그의 民力[민력]이 長養[장양]되고 南隙 東.[남극 동하]에 그의 國土[국토] 발전하여, 白山 黑水[백산 흑수]는 尙矣[상의]라 莫論[막론]하고 遼瀋[요심]·浿帶[패대]의 間[간]이 總[총]히 節度[절도]의 部屬[부속]이 아니면 移植[이식]의 部曲[부곡]이니, 若貊[약맥],若夷[약 이], 若.婁[약읍루], 沃沮[옥저], 若眞番[약진번], 若臨屯[약임둔], 若濊 貊[약예맥], 若諸韓[약제한]이 다 그 本幹[본간] 혹 支條[지조]의 大穗[대 수] 혹 小實[소실]이라, 前後 凡 數百載間[전후 범 수백재간]에 白山 四方 [백산 사방]으로 檀裔[단예]의 嘉潁[가영]이 阡[천]을 連[연]하고 野[야]를 蔽[폐]하였도다.
豊稔[풍임]이 이미 均[균]하여 收穫[수확]이 人[인]을 待[대]할 時[시]에 民族的[민족적]自覺[자각]의 利鎌[이겸]으로써 一邊同族[일변동족]의 領域 [영역]을 服屬[복속]하고, 一邊漢人[일변한인]의 偸占[투점]을 恢還[회환] 하여 高句麗[고구려]란 倉.[창름]에 儲藏[저장]하려는 者[자]鄒牟[추모]를 牌頭[패두]삼아 鴨綠江 谷地[압록강 곡지]에 出現[출현]하니, 이는 檀君[단 군]의 東作[동작]으로부터 二千累百載[이천루백재]를 歷[역]한 夫餘朝 末 [부여조 말]의 新機運[신기운]이라, 以上[이상]二[이]천 년의 준비로써 조 선의 역사 비로소 民族的 活動[민족적 활동]과 國家的 發展[국가적 발전]을 記載[기재]하게 되었도다.
古朝鮮人[고조선인]의 民族的 自覺[민족적 자각]은 실로 夫餘朝 末年 漢人 勢力[부여조 말년 한인 세력]의 遼東 侵漸[요동 침점]에 刺激[자격]된 것이 니, 그 以前[이전]으로 言[언]할지라도 夫餘[부여]는 西[서] 戎狄[융적]을 控[공]하고 南[남]에 周秦[주진]을 隣[인]하여 異民族[이민족]의 接觸[접 촉]이야 잠시도 斷絶[단절]하지 아니하였으되 夫餘[부여] 자신의 國力[국 력]이 充實[충실]함과 戎狄[융적]의 發展 方向[발전 방향]이 대개 漢土[한 토]에 在[재]하였으므로, 西方[서방]에는 種族的 衝突[종족적 충돌]이 殆無 [태무]하였고, 南方[남방]으로 言[언]하면 漢人[한인]은 自來[자래]로 異民 族[이민족]의 包容力[포용력]이 寬闊[관활]하고 國家[국가]의 중심이 彼此 [피차]隔遠[격원]할뿐더러, 兼[겸]하여 周代[주대]까지도 國家的 結合[국가 적 결합]이 심히 薄弱[박약]하여 彼[피]의 압박을 受[수]하기는 고사하고 我[아]의 세력이 도리어 彼[피]에게 加[가]하는 형편이므로, 關係[관계]와 交涉[교섭]은 자못 친밀하였으되 민족적 자각을 喚起[환기]할 만한 하등 충 격이 無[무]하여 無意識[무의식]한 中[중] 교통이 계속하더니, 秦[진]의 始 皇[시황]이 起[기]하여 禹域[우역]을 渾一[혼일]하고 權力[권력]을 集中[집 중]함에 及[급]하여 비로소 强大[강대]한 압력을 西南[서남]에 感[감]하기 始[시]하고, 春秋末[춘추말]로부터 遼浿[요패]의 間[간]에 漢人[한인]의 세 력이 점점 固着的 性質[고착적 성질]을 帶[대]하여 오다가, 漢[한]이 代興 [대흥]하매 압력이 愈加[유가]하여 物質[물질]·精神 兩方向[정신 양방향] 으로 恐慌[공황]이 日增[일증]하니, 於是[어시]에 民族 意識[민족 의식]이 俄然[아연]히 醒起[성기]하고 더욱 南方 漢家 郡縣[남방 한가 군현]에 隣近 [인근]한 部屬[부속]이 가장 먼저 가장 鮮明[선명]히 自他[자타]의 差別[차 별]과 利害[이해]의 충돌을 인식하여, 內[내]로는 민족성이 練磨[연마]되고 外[외]로는 반발력이 발휘되었으며, 此 時勢[차 시세]로 因[인]하여 自家 [자가]의 능력을 확인한 결과로, 드디어 北[북]으로 夫餘王朝[부여 왕조]를 侵凌[침릉]하고 南[남]으로 諸小團部[제소단부]를 渾一[혼일]하려는 新勢力 [신세력]·新運動[신운동]이 부지중 醱.[발배]하고 釀熟[양숙]되었더라. 夫餘 千年[부여 천년]의 間[간]은 支那[지나]에 在[재]하여 殷·周·秦·漢 [은·주·진·한]의 際[제]니, 곧 漢民族[한민족]이 벌써부터 樸陋[박루]로 서 文明[문명]에 進[진]하여 文物 制度[문물 제도]가 燦然[찬연]히 具備[구 비]한 時節[시절]이라, 直接[직접] 間接[간접]으로 殷·周[은·주]의 文明 [문명]이 일찍부터 我地[아지]에 流入[유입]하였음은 무론이니, 夫餘[부여] 의 「殷正月祭天」과 「衣尙白」과 「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등은 要[요]하 건대 殷[은]·周[주]의 영향을 受[수]한 顯著[현저]한 一端[일단]일지니라. 初葉[초엽]에 이미 箕子[기자]와 및 殷[은]의 遺民[유민]이 遼地[요지]에 歸化[귀화]하고, 中葉[중엽] 이후로는 漢土[한토]의 逋逃 足跡[포도 족적] 이 거의 相望[상망]하여 半島[반도]의 東南端[동남단]까지 所在[소재]에 竄 入[찬입]하였으니, 彼等[피등]의 到處[도처]에 약간의 文明上[문명상]變易 [변역]이 行[행]하였을 것은 固然[고연]의 事[사]일 것이요, 더욱 夫餘[부 여]의 宗主國[종주국]과 및 半島[반도]의 諸團部[제단부]에 歸屬[귀속]한 秦漢人[진한인]의 당시 政治 制度上[정치 제도상]에 傳及[전급]한 영향은 자못 淺.[천선]치 아니함을 見[견]하노니, 夫餘[부여]의 「四加」官號[관 호](見上[견상])와 高句麗初[고구려초]의 「五部[오부]」軍制[군제](見 次 篇[견 차편])와 沃沮[옥저]와 濊[예]의 君長[군장]이 後年[후년]까지도 侯 ·邑君·三老[후·읍군·삼로]의 名[명]을 自稱[자칭]한 등이 是[시]라 할 지라, 統治機關[통치기관]의 排設[배설]과 官位[관위]의 抽象的 稱謂[추상 적 칭위]는 많이 歸化人[귀화인]의 贊助[찬조]를 受[수]한 듯하도다. 朝鮮[조선]의 稱[칭]이 무론 此 時節[차 시절]에 始[시]한 것이니, 初[초] 에는 箕子[기자]와 및 殷 遺民[은 유민]의 夫餘 南疆 僑居地[부여 남강 교 거지]를 呼[호]하는 名[명]이라든가, 次[차]에는 遼浿間 漢人[요패간 한인] 의 僑邦[교방]의 因襲的 稱號[인습적 칭호]가 되고, 因[인]하여 遼東 全區 요동 전구]의 地理的 名稱[지리적 명칭]을 成[성]한지라, 朝鮮[조선]의 稱 [칭]이 廣行[광행]한 후로 肅愼[숙신]의 舊號[구호]가 漸廢[점폐]하여 秦漢 [진한]의 際[제]에는 北[북]은 대개 夫餘[부여] 혹 北.[북맥]으로 稱[칭] 하여 .婁[읍루]를 此[차]에 屬[속]하고, 中間[중간]은 朝鮮[조선]이라 稱 [칭]하여 眞番[진번](후에 駒麗[구려])·沃沮[옥저]·.貊[간맥]·臨屯[임 둔](후에 濊貊[예맥])을 此[차]에 屬[속]하고 , 그 以南[이남]을 統[통]히 韓[한] 혹 辰[진]으로 稱[칭]하니라.
古朝鮮[고조선]의 外國 交涉[외국 교섭]이라 하면 무론 漢土[한토]와의 관 계니, 疆土[강토]의 連接[연접]과 民部[민부]의 混處[혼처]에 由[유]하는 자연적 교통은 그 由來 久遠[유래 구원]하고 事端[사단]이 煩.[번쇄]하려 니와, 禮[예]로써 聘問[빙문]하고 利[이]로써 交易[교역]한 국제적 교통은 대개 周代[주대]이래의 事[사]니, 〈尙書[상서]〉에 「(周武王[주무왕])克 商遂通道于九夷八蠻[극상수통도우구이팔만]」이라 함을 同傳本紀[동전본기] 에 「成王旣伐東夷[성왕기벌동이](謂 淮夷[위 준이])息愼來賀[식신래하], 王賜榮伯作賄息愼之命[왕사영백작회식신지명]」」이라 한등은 다 嚴正[엄 정]한 역사적 사실로 計[계]하기는 難[난]하나, 당시의 情勢[정세] 응당 兩 國[양국]의 交際[교제]를 親邇[친이]케 하였을 것은 察[찰]키 難[난]치 아 니하며, 더욱 周成王[주 성왕]이 厚禮[후예]로써 肅愼[숙신]을 賄[회]함은 (당시에 肅愼[숙신]이란 것이 古朝鮮人[고조선인]의 本土 在住者[본토 재 주자]를 稱[칭]함인 것은 前編[전편]에 已及[이급]하였거니와, 此[차]의 肅 愼[숙신]은 무론 夫餘朝[부여조]를 指[지]함일지니라), 당시 肅愼[숙신]의 國內[국내]에 逋藪[포수]를 作[작]한 勝朝[승조](殷[은])의 舊民[구민]을 牽制[견제]하자면 부득불 肅愼 朝廷[숙신 조정]의 歡情[환정]을 求[구]할 필요가 有[유]함에 由[유]함일지니라.
然[연]이나 兩地[양지]가 이 經濟的 基礎上[경제적 기초상]에 立[입]하여 恒久的[항구적]으로 交通[교통]하기는 더 其後[기후]에 春秋時代 以來[춘추 시대 이래]라, 대개 群雄[군웅]이 各據[각거]하여 干戈[간과]를 日尋[일심] 하며 激烈[격렬]한 競爭[경쟁]이 오직 實力[실력]을 是賴[시뢰]하여 富國强 兵[부구강병]이 國家[국가]의 最上 政策[최상 정책]이 되고, 隨[수]하여 商 業[상업]이 勃興[발흥]하여 利潤[이윤]이 最大[최대]한 外國 貿易[외국 무 역]이 盛行[성행]하니, 於是[어시]에 燕·趙 各民[연·조 각민]이 다투어 東方[동방]으로 利路[이로]를 開拓[개척]하여, 마침내 來王[래왕]이 踵[종] 을 接[접]하고 遠[원]의 達[달]치 아니함과 物[물]의 致[치]치 아니함이 無 [무]하기에 至[지]하였는데, 其中[기중]에도 燕[연]은 地理[지리]의 便[편] 을 因[인]하여 가장 古朝鮮[고조선]이 商利[상리]를 占[점]하였으므로, 太 史公[태사공]도 그 〈貨殖傳[화식전]〉에 「北隣烏桓夫餘東.濊貊朝鮮眞番 之利[북린오환부여동관예맥조선진번]」라 하여 그 利益圈[이익권]을 明示 [명시]하였더라.
此等[차등] 賈人[가인]의 來往[내왕]이 貿遷 以外 一般 文明上[무천 이외 일반 문명상]에도 중대한 관계의 有[유]함을 注意[주의]할지니, 土産 交易 [토산 교역]의 大償[대상]으로 受[수]하는 服飾·器具·錦繡·珍寶[복식· 기구·금수·진보]등 漢人[한인]의 加工品[가공품]이 土風[토풍]의 古樸[고 박]을 打破[타파]한 것도 다하였으려니와, 外國文物[외국문물]이 域內[역 내]에 輸入[수입]하는 동시에 內國 事情[내구 사정]이 漢土[한토]에 聞知 [문지]한 것은 조선 역사의 幸[행]이니, 今[금]에 零碎[영쇄]한 古事[고사] 〈周書[주서]〉〈竹書[죽서]〉〈山海經[산해경]〉〈國語[국어]〉등, 先秦 記錄[선진 기록]에 謄存[등존]함은 실로 此等 賈胡[차등 가호]의 齎王[재 왕]한 바일지며 또 道德上[도덕상]의 영향도 자못 重大[중대]한 者[자] 存 [존]하니, 利外 無物[이외 무물]의 賈人胡 到處[가인호 도처]에 淳風[순풍] 이 日削[일삭]하고 薄俗[박속]이 漸入[점입]하여 法禁[법금]이 寢多[침다] 하였다 함은 〈漢書[한서]〉에 記[기]함과 如[여]한지라 . 其曰[기왈] 「其 民不相盜[기민불상도], 無門戶之閉[무문호지폐], 婦人貞信不淫[부인정신불 음]……及賈人往者[급가인왕자], 夜則爲盜[야칙위도], 俗稍益薄[속초익박], 今於犯禁寢多[금어범금침다], 至六十餘條[지육십여조]」라 함은 다만 遼東 地方[요동 지방]뿐 아니라 賈人[가인]의 왕래하던 지방의 一般的 現象[일반 적 현상]일지니라.
이렇듯 上半[상반]한 利害[이해]로써 商業上 交通[상업상 교통]이 日[일] 로 頻繁[빈번]을 加[가]하는 중에 그 範圍 隨[범위 수]하여 擴大[확대]하더 니, 漢武帝時[한무제시]에는 彭吳賈[팽오가]의 手[수]에 이미 濊貊[예맥]에 까지 商路 開[상로 개]하였더라. 당시 兩地間[양지간]의 무역품은 .婁[읍 루]는 山藪[산수]의 産[산]이 爲主[위주]요, 夫餘[부여]는 田蠶[전잠]과 畜 牲[축생]이 爲主[위주]요 沃沮[옥저]는 布木[포목]이 爲主[위주]요, 濊貊 [예맥]은 魚物[어물]이 爲主[위주]요 辰韓[진한]은 鐵物[철물]이 特産[특 산]이요, 馬韓[마한]은 果種[과중]이 特産[특산]이며 그중에도 彼人[피인] 에게 珍重[진중]된 것은 第一皮物[제일피물]이니, 〈尙書[상서]〉禹貢[우 공]에「島夷皮服[도이피복]」과 〈毛詩[모시]〉에 「王錫韓侯其追其百獻其 .皮赤豹黃.[왕석한후기추기백헌기비피적표황비]」와 〈管子[관자]〉에 「發朝鮮文皮○服以僞幣[발조선문문피복이위폐」와 〈三國志[삼국지]〉에 「濊其海出斑魚皮土地饒文豹[예기해출반어피토지요문표]」와 又[우] 「夫餘 出貂.[부여출초유]」과 〈後漢書[후한서]〉에 「.婁出好貂[읍루출호초]」 등 豹貂.[표초유]의 皮物[피물]은 我[아]에게 중요한 輸出貨[수출화]인 동 시에 彼[피]에게 珍貴[진귀]한 服飾料[복식료]이며, 第二[제이]는 兵器[병 기], 더욱 弓屬[궁속]이니 「東方人大弓[동방인대궁]」과 「肅愼氏石..矢 [숙신씨석노고시]」가 支那 古來[지나 고래]의 何等 名物[하등 명물]인 것 은 姑舍是[고사시]하고, 濊[예]에서 出[출]하는 檀弓[단궁]과 小水貊[소수 맥]에서 出[출]하는 貊弓[맥궁]은 다 漢人[한인]에게 「好弓[호궁]」의 名 [명]을 得[득]하여 輸出[수출]이 盛[성]하였더라(上文[상문] 夫餘[부여]· .婁[읍루]·沃沮[옥저]·濊貊[예맥]·高句麗[고구려]·馬辰弁 三韓[마진변 삼한]의 本文[본문]을 參照[참조]하라).
支那[지나]의 東海岸[동해안] 곧 溟[명]·渤[발]·淮[회]·泗[사]의 間 [간]에 散居[산거]한 移住民[이주민]들은 天産 及人造物[천산 급인조물]로 써 內陸[내륙]의 漢人[한인]과 交易[교역]하기를 舊[구]와 如[여]히 하였으 려니와, 半島南方[반도남방]의 東韓地[동한지]에서는 새로 倭[왜]로 더불어 海[해]를 隔[격]하여 交易[교역]을 행하여 彼賈人[피가인]의 僑市[교시]가 南海 沿岸[남해 연안]에 生[생]하기에 至[지]하니, 〈三國志[삼국지]〉辰韓 傳[진한전]에「國出鐵[국출철], 韓[한]·濊[예]·倭[왜],皆從取之[개종취 지]」라 함은 그 貿易品[무역품]중 가장 중요한 것을 擧[거]한 것이요,日本 古史[일본 고사]에 韓[한]을 指[지]하여 「金銀之國[금은지국]」이라 함도 또한 鐵[철]을 取[취]함으로써 由來[유래]한 것일지며, 또 別[별]로 「寶國 [보국]」이라 稱[칭]함은 古來[고래]로 諸種物貨[제종물화]의 供給[공급]을 受[수]하였음으로써 由來[유래]함일지니라.
國際 貿易[국제 무역]은 희미하나마 이 만큼 一斑[일반]을 知得[지득]하되 國內 商販[국내 상판]은 總[총]히 不明[불명]하며, 또 외국 무역도 대개는 彼賈人[피가인]의 來求[내구]를 待[대]하는 受動的 地位[수동적 지위]에 在 [재]하였고, 自動的 出販[자동적 출판]이라 할 것은 겨우 貊[맥]과 濊[예] 가 弓[궁]으로, 辰韓[진한] 이 鐵[철]로, 기타 혹 皮物[피물]로써 隣接[인 접]한 漢家 郡縣[한가 군현]에 出賈[출가]하는 따위에 止[지]하였으며, 國 內外[국내외]를 勿論[물론]하고 무역은 대개 物物交換[물물교환]으로 以 [이]하였으므로,齊[제]의 刀布[도포]와 漢[한]의 孔方[공방]과 如[여]한 錢 .[전초]는 늦도록 造用[조용]함을 見[견]치 아니하였고, 오직 辰韓國産[진 한국산] 의 鐵[철]을 諸市賈[제시가]에 錢[전]과 如[여]히 用[용]하였을 따 름이며, 〈魏略[위략]〉에 東沃沮[동옥저]에서 嫁娶[가취]할 時[시]에 女家 [여가]에서 鐵錢[철전]을 責[책]하여 전이 畢[필]하여사 婚家[혼가]에 歸 [귀]함을 記[기]하였으니, 此[차]의 소위 鐵錢[철전]도 恐[공]하건대 孔方 [공방]의 類[류]가 아니라 布木[포목] 기타의 代用 貨幣[대용 화폐]일 것이 며, 오직 趙[조]에 近[근]한 遼東地方[요동지방]과 漢[한]의 樂浪郡 域內 [낙랑군 역내]에서는 趙[조]의 明布[명포]와 漢[한]의 銖錢[수전] 등이 發 掘[발굴]되나니, 相[상]컨대 漢人 彼此[한인 피차]는 무론이어니와 近漢 一 部地[근한 일부지]에는 戰國[전국] 이래 漢人[한인]의 錢.[전초]가 流通 [유통]된 줄로 認[인]함이 可[가]할지니라.
農業[농업]은 當代[당대]에 至[지]하여 進步[진보]도 大[대]하고 普及[보 급]이 周[주]하였으니, 北[북]은 .婁[읍루]로부터 南[남]은 韓地[한지]까 지 진실로 俄人[아인]의 居[거]한 處[처]에서는 한가지 農業[농업]이 民本 [민본]이 되어, 食料[식료]로는 五穀[오곡] 及[급] 稻[도]를 種[종]하며 衣 料[의료]로는 苧麻[저마]·蠶桑[잠상]을 행하였으며,夫餘[부여]의 牧畜[목 축]은 尙矣[상의]요, 高句麗[고구려]의 藏釀[장양]과 東沃沮[동옥저]의 貊 布[맥포],濊[예], 馬韓[마한]의 綿紬[면주]·麻布[마포], 辰韓[진한]의 . 布[겸포], 弁辰[변진]의 廣幅 佃布[광폭 전포] 등 産物[산물]이 다 農藝[농 예]의 副産[부산]이로다. 농업의 이렇듯 發達[발달]은 諸般 方面[제반 방 면]에 중대한 變象[변상]을 招致[초치]하였으니, 일찍 檀朝[단조]의 直通 [직통]을 傳[전]한 夫餘[부여]로 하여금 許久間 富榮[허구간 부영]을 獨占 [독점]케 하던 農利[농리]가 이제는 諸處諸民[제처제민]의 皆能共亨[개능공 형]하는 바 되어, 農利[농리]로 由[유]하여 得[득]하는 社會上[사회상]·生 活上[생활상]의 一般的 發達[일반적 발달]을 遂[수]하게 되매, 諸團部[제단 부]의 세력이 은연히 昻騰[앙등]하여 가던 중 外來[외래]의 刺激[자격]을 受[수]하여 .在[잠재]하던 民族性[민족성]이 喚起[환기]되고, 一邊[일변] 으로 압록강·두만강을 跨據[과거]한 新國家 運動[신국가 운동]이 起來[기 래]하여 沈滯[침체]한 北夫餘[북부여]에 대하여 淸新[청신]한 氣力[기력]을 示[시]하게 됨은 첫째 政治上[정치상]의 大變象[대변상]이라 할지라, 當代 下葉[당대 하엽]의 民族的 自覺[민족적 자각]은 대개 愛鄕心[애향심]의 發 達[발달]에 由[유]하고 愛鄕心[애향심]의 發達[발달]은 農業的 定住[농업적 정주]에 由[유]한 것인즉, 時勢[시세]와 農業[농업]의 交涉[교섭]이 如何 [여하]히 緊切[긴절]하였음을 見[견]할 것이며, 經濟的 獨立[경제적 독립] 이 國力[국력]을 振張[진장]한 것처럼 생활의 餘裕 民風[여유 민풍]을 淳化 [순화]함에 크게 有力[유력]하였으니, 夫餘人[부여인]의 「謹厚不爲寇.[근 후불위구초]」, 濊人[예인]의 「少嗜欲不請.[소기욕불청개]」, 朝鮮人[조 선인]의 「民無閉藏[민무폐장]」등이 다 農利[농리]로 由來[유래]한 道德上 [도덕상]의 佳象[가상]이요, 인민의 氣風[기풍]이 대개 質直[질직] 勇健[용 건]함도 또한 職業[직업]의 自然的 感化[자연적 감화]라 할 것이요, 寒地 [한지]의 .婁[읍루]가 寇盜[구도]를 事[사]하고 峽中[협중]의 駒驪[구려] 가 性[성]이 洶急[흉급]하다 함은 무론 外圍[외위]의 事情[사정]으로 農利 [농리]가 稀簿[희부]하였음이 主因[주인]일지니, 倫理[윤리]에 대하여도 何 物[하물]보다 중대한 영향이 有[유]하였음을 見[견]할 것이로다. 拜天[배천]의 信仰[신앙]이 진실로 祖宗[조종]의 傳習[전습]이어니와, 神 市時代[신시시대]의 古典說[고전설]에 桓雄天王[환웅천왕]이 降世[강세]하 실 時[시]에 「將風伯雨師雲師[장풍백우사운사],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이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이라 하여 그 補益[보익]의 神明[신명]을 다 農業[농업]에 緊關[긴관]이 有[유]한 自然 現象[자연 현상]에 假借[가차]함 과, 雜多[잡다]한 治理 條目[치리 조목] 중에 穀[곡]을 先擧[선거]한 등을 見[견]할지라도 그 信仰[신앙]의 本源[본원]과 實體[실체]가 農事[농사]하 고 여하히 密邇[밀이]한 관계의 有[유]함을 知[지]할 것이요, 또 地[지]는 南北[남북]이 別[별]하고 時[시]는 古今[고금]이 異[이]하되 祭天[제천]의 時期는 대개 一[일]○월 農功[농공]이 畢[필]한 時[시]에나 간혹 五[오]월 下種[하종]을 訖[흘]한 時[시]를 用[용]함을 見[견]하건데, 그 祭天[제천] 의 내용에 豊稔感謝[풍임감사]와 大有祈願[대유기원]의 兩義[양의]가 含 [함]하였음을 察[찰]한지라, 四野[사야]에 秋成[추성]하고 百穀[백곡]이 新 登[신등]한 時[시]를 臨[임]하여 春夏 勤勞[춘하 근로]의 報酬[보수]를 厚 獲[후획]한 淳民[순민]이 , 壟疇[농주]에 團會[단회]하여 歡呼[환호]와 樂 舞[악무]로써 新穀[신곡]으로 天[천]께 薦[천]하고 新釀[신양]으로 時[시] 를 樂[악]하는 當時[당시]의 拜天[배천]이 農功[농공]의 竣成[준성]과 共 [공]히 年年[년년]이 거행되고, 농업의 발달과 共[공]히 가지록 盛榮[성영] 하였음이 明[명]하니, 信仰[신앙]에 대한 농업의 관계 또한 輕小[경소]치 아니함을 見[견]할지로다.
當代[당대]의 貿易[무역]이 전수히 농업으로 인하여 촉진되었음은 무론이 어니와, 氣象[기상]에 대한 觀念 智識[관념 지식]이 자못 夙夙[숙숙]하였음 은 또 農業上[농업상]의 중요한 관계가 有[유]함에 由[유]함이 무론이요, 夫餘[부여]에서 牛蹄[우제]의 解[해] 혹 合[합]으로써 凶吉[흉길]을 占[점] 함도 농업 국민의 할 듯한 일이요, 또 當代[당대]의 音曲[음곡]과 舞樂[무 악]이 대개 田畝[전무]로써 搖籃[요람]을 作[작]하고 農閑[농한]으로써 生 育[생육]을 遂[수]한 것은, 「歡呼[환호]」와「力作[역작]」을 幷稱[병칭] 함과 國民的 大樂舞[국민적 대악무]는 대개 西成[서성] 후에 設行[설행]함 과 기타 諸種 事實[제종 사실]로써 推測[추측]할지니, 要[요]하건대 當代 [당대]의 百般 文物[백반 문물]이 總[총]히 농업을 중심으로 하여 生成[생 성]·發育[발육]·推移[추이]·變易[변역]하였음을 知[지]할지니라. 風俗上[풍속상]의 當代[당대]는 실로 一大 混亂期[일대 혼란기]라 할지니, 夫餘人[부여인]의 古風[고풍]을 向[향]하여 四方[사방]의 雜俗[잡속]이 紛 然[분연]히 集注[집주]하여 內外 新舊[내외 신구]가 雜.交和[잡유교화]하 였도다.
鬼神敎[귀신교](卽 巫習[즉 무습])는 北野[북야]로서 從[종]하여 점점 南 下[남하]한 것이니, 濊[예]의 山川及 猛獸 崇祀[산천급 맹수 숭사]와 韓地 [한지]의 巫君 同位[무군 동위]의 俗[속]이 다 此風[차풍]의 漸染[점염]으 로서 起[기]한 것이며, 夫餘[부여]의 兄死妻嫂[형사처수]는 西方 匈奴[서방 흉노의 俗[속]이 流入[유입]한 것이며, 濊[예]의 同姓不婚[동성불혼]과 辰 韓[진한]의 嫁娶以禮[가취이례] 등은 다 漢土 倫理[한토 윤리]의 感化[감 화]를 受[수]한 것이며, 韓[한]의 南方[남방]에는 南島人 文身[남도인 문 신]의 俗[속]도 行[행]하였더라.
錦繡[금수]와 冠弁[관변]으로 尊卑[존비]의 公私[공사]를 表別[표별]하는 風[풍]도 恐[공]컨대 漢人[한인]의 典禮[전례]를 效[효]함일지며, 統[통]히 器用[기용]과 服飾[복식]에는 漢風[한풍]의 영향이 多[다]함은 勢[세]의 固 然[고연]한 바며, 北[북]의 大陸部[대륙부]와 南[남]의 半島部[반도부]는 地方[지방]이 심히 隔遠[격원]하고 또 許久[허구]한 동안 비교적 優越[우 월]한 文物[문물]을 有[유]한 漢民族[한민족]이 中間[중간]에 蟠據[반거]하 였건마는, 衣食[의식]·居處[거처]·儀式[의식]·典禮[전래]의 根本的 習俗 [근본적 습속]은 일찍 動搖[동요]함이 無[무]하니, 若[약] 祖先崇拜[조선숭 배]·重嫁娶·厚葬祭[후장제]·尙武力作[상무역작]의 風[풍]은 古今[고금] 이 如一[여일]하고 南北[남북]이 合致[합치]함은 奇事[기사]라 하겠으며, 다만 純武[순무]로 國[국]을 立[입]한 夫餘[부여]·沃沮[옥저]·句麗[구려] 등에는 階級[계급]이 嚴截[엄절]하되, 南方 韓地[남방한지]는 不然[불연]하 며 上下[상하]의 別[별]과 長幼[장유]의 序[서] 다 자못 寬裕[관용]하더라. 衣制[의제]는 혹 大袂[대몌]의 袍[포]를 用[용]하고(夫餘[부여]), 혹 曲領 [곡령]의 衣[의]를 着[착]하여 地方[지방]을 隨[수]하여 有異[유이]하되, 公私[공사]의 章服[장복]이 自別[자별]하며 衣次[의차]는 布[포]와 帛[백] 과 皮[피]를 幷用[병용]하고 繡[수]와 金銀[금은]과 珠玉[주옥]으로 表飾 [표식]하되, 北方[북방]에서는 錦繡[금수]를 尙[상]하고 南方[남방]에서는 瓔珠[영주]를 重[중]하였으며,斂髮[염발]의 法[법]은 대개 編髮[편발]과 盖 首 兩種[개수 양종]이 유하니, 北方[북방]에는 오직 前者[전자]가 行[행]하 고 南方[남방]에는 後者[후자]가 비교적 盛行[성행]한듯하며, 衛滿[위만]이 燕[연]으로서 走出[주출]한 時[시]에 이미「.結蠻夷服[추결만이복]」이라 하고 三韓[삼한]이 대개「魁頭露.[괴두로개]」라하니, 我[아]「상투」의 風[풍]이 由來[유래] 久遠[구원]함을 知[지]하리로다.
夫餘末[부여말]에 丞相 阿蘭弗[승상 아란불]이 「天降[천강]」이라 하여 王[왕]에게 遷度[천도]를 권하고 王[왕]이 또한 從行[종행]한 것을 見[견] 하면, 神意[신의]를 傳[전]하는 一種 機關[일종 기관]이 有[유]하였음과 아 울러 그 勢力[세력]이 有[유]하였음을 想見[상견]할지니라.
內[내]로는 허다한 部屬[부속]이 一隅[일우]를 各占[각점]하고 外[외]로는 異民族[이민족]을 隣接[인접]한 故[고]로, 北方 諸國[북방 제국]이 대개 武 備[무비]로는 일찍부터 발달하여 若 夫餘[약 부여]는 家家[가가]에 鎧仗[개 장]이 有[유]하고 若 句麗[약 구려]는 人人[인인]이 戰鬪[전투]에 習[습]하 며, 兵器[병기]도 甲弩弓矢[갑노궁시]·刀戟矛.[도극모연]등 諸種[제종]이 具備[구비]하였으되 文藝 方面[문예 방면]은 오히려 空疎 索莫[공소 삭막] 하였으며, 다만 漢土 交通[한토 교통]의 필요상으로 朝家[조가]에는 일찍부 터 漢文[한문]을 習用[습용]한 듯하니,〈史記[사기]〉에 「眞番旁衆國欲上 書見天子[진번방중국욕상서견천자]」란 것도 또한 그 一證[일증]을 作[작] 할것이며, 그러나 달리는 政治 及生活上[정치 급생활상]에 그다지 필요가 有[유]치 아니한 듯하여, 官位·儀禮[관위·의례] 같은 것도 다 國風[국풍] 을 길이 護持[호지]하였고, 오직 漢[한]의 直屬地[직속지]에는 다소의 漢文 學[한문학]이 행한 듯하니, 이른바 朝鮮津卒 .里子 高妻麗玉[조선진졸 곽 리자 고처려옥]의 作[작]이라는 〈..引[공후인]〉은 그중의 僅餘[근여]한 일수며, 歌舞音曲[가무음곡]이 그렇듯 盛行[성행]하였건마는 소위「鄕歌[향 가]」란 것도 當代 以前[당대 이전]의 것은 一[일]도 傳[전]함이 無[무]하 니라.
文字[문자]의 有無[유무]는 依然[의연]히 의문이지마는 國制[국제]와 民度 [민도] 그 만큼 발달하였고, 漢文[한문]을 襲用[습용]치 아니하였으면 특수 한 思想 傳道[사상 전도]의 機關[기관]이 可無[가무]치 못함이 明[명]하니, 後[후]에 新羅[신라]에 행한 刻木法[각목법]이든지, 倭[왜]에 행하던 結繩 法[결승법] 같은 表記術[표기술]이라도 有[유]할 것이로되 未詳[미상]하며, 遐夷[하이]의 地[지]에 傳[전]하는 「手宮文字[수궁문자]」라는 것이 아마 當代 北部[당대 북부]에 행하던 國文[국문]인 듯하더라. 錦繡 文彩[금수 문 채]가 행하였다는 古記[고기] 이외에 藝術的 表現[예술적 표현]의 可考[가 고]가 無[무]함은 前代[전대]와 如[여]하더라.
雜多[잡다]한 種族[종족]이 混入[혼입]하는 동시에 血肉 習俗[혈육 습속] 과 共[공]히 外部 言語[외부 언어]의 流入[유입]이 甚多[심다]하였으며, 一 部[일부]를 自成[자성]한 漢人間[한인간]에는 오래도록 舊語[구어]를 保維 [보유]하였으니, 揚雄[양웅]의 〈方言[방언]〉에 전하는 朝鮮 洌水之間[조 선 열수지간]의 方言[방언]이라는 것과 〈三國志[삼국지]〉급〈後漢書[후한 서]〉의 辰韓傳[진한전] 중에 傳[전]하는 方言[방언]은 다 燕·濟·趙·秦 [연·제·조·진]의 方言[방언]이 遺傳[유전]한것이며, 兩國 官家[양국 관 가]의 通涉[통섭]에는 當代[당대]로부터 이미 驛人[역인]의 設[설]이 有 [유]하였더라.
〈一九一八年 六月 月間 靑春 十四號[일구일팔년 육월 월간 청춘 십사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