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
벌서 사년전 가을 일이다. 그ᄯᅢ도 가을 날세이고 여행하기 조흔 계절이엿다.
석초형이 시골서 오라고 하엿고 가면 백제 고도인 부여 구경을 식혀준다는 것이엿다. 그래서 먼저 서천으로 가서 석초집에서 이삼일을 지난 후 부여로 가게 되엿다.
첫날 박물관을 보고 숙사로 도라와서 그 집의 명물인 이어(鯉魚) 요리를 식히고 술을 덥혀으니 석초가 황국을 ᄯᅡ다가 술잔에 ᄯᅴ워주며 남ᄶᅩᆨ으로 잇는 창문을 열고 달빗을 마저 드리는 것이 안인가? 어느 사이 술잔이 오거니 가거니 하는 판에 두 사람이 모다 거나하게 취하게 되자 거리로 나와 무엇인가 하는 요정을 차저서 밤깁허 도라올 ᄯᅢ는 술이 짓게 취하엿든 것이다.
그 다음날 백마강을 ᄯᅡ라 올나 낙화암을 보고 고란사를 왓슬 ᄯᅢ 샘물을 마시게 되엿고 그 절 중은 고란 잎파리를 ᄯᅡ서 물잔에 ᄯᅴ워주며 고란에 대하야 전설을 얘기하는 것이엿다.
의자왕이 고란사 샘물을 궁녀들에게 ᄯᅥ오라 명령하면 궁녀들은 왕에게 보담 더 총애를 밧기 위하야 일 분 동안이라도 ᄲᅡᆯ이 ᄯᅥ오는 것이고 시간이 거리에 비하야 너무 ᄲᅡᆯ느면 왕은 궁녀들을 의심하는 것이엿다. 그래서 반드시 고란사의 석벽 속에서 새여 나오는 물을 ᄯᅥ오게 하고는 그물에 고란 입파리를 ᄯᅴ워 오라 명령하섯다는 것이다.
그ᄯᅢ 나는 그 고란과 왕과 궁녀와 사이에 얼클인 로─만스를 생각하느라고 그만 고란의 식물학적 지식을 고구할 겨를도 업시 부여를 ᄯᅥ나고 말엇스나 그 뒤에도 항상 나의 회상 속에는 낙화암보다도 자온대보다도 평제탑보다도 삼천궁녀보다도 이러한 모든 흥망성쇠를 ᄯᅥ나서 바위틈에 한 입파리식 소사 나서는 아름다운 궁녀들의 고흔 손에 입사히 ᄯᅳᆺ겨지고 남은 고란의 조으는 듯 ᄭᅮᆷᄭᅮ는 듯한 푸른 입파리는 좀처럼 내 머리에서 살어지지 안엇든 것이다.
금년 여름 경주 옥룡암에서 도라 와서는 그만 절로 가지 안코 우이동 가는 중로에 소유리라고 하는 동리가 잇는데 그곳에 나의 위택이 우거하게 되야 새로 지은 집도 ᄭᅢᄭᅳᆺ하려니와 공기가 맑고 정양하기 알맛다고 외숙모가 간절히 권하심에 감사도 하지만 ᄯᅢ로는 외숙ᄭᅦ 한시(漢詩)에 대한 경위도 듯고 하면 요양에도 정신적인 양식이 되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솔곳하엿다.
처음 이 마을에 나와 잇슬 ᄯᅢ는 다소 숙조한 늣김이 업는 바도 아니엿스나 연래에는 건강의 관계로 될 수 잇스면 술과 게집과 회합을 피하고 보매 자연생활이 전과 갓치 화려하고 임리(淋漓)하지는 못하여도 그 반면에 고담하고 청정하야 전날의 생활을 극채화(極彩畵)라고 한다면 오날의 생활은 수묵화라고나 할가?
생활이 이러케 정적(靜的)으로 되고 보니 자연에 깃드는 마음이 자라고 저절로 천석(泉石)을 지나보지 아케 되매 기화요초(奇花瑤草)가 모다 헛되히 바랄 것이 업스나 그래도 「나─르」와 가티 산중일기를 쓸 바 업고 「소─로─」처름 삼림의 철학을 설파하지도 못함은 나의 관찰이 그들에 비하야 거리가 다른 것을 모르는 바도 안이연만 아즉도 자연에 ᄲᅣᆷ을 비빌 정도로 친하여지지 못함은 역사의 관계가 더 큰 것도 갓다. 다시 말하면 공간적인 것보다는 시간적인 것이 보담 더 나에게 중요한 것만 갓다.
그러나 내가 잇는 집 동편에는 석벽 속에서 새여 나는 샘물이 잇고 그 물맛이 ᄯᅩ 청렬(淸洌)하지 아는가? 그ᄲᅮᆫ만 아니라 그물을 마시면 소화가 잘 되는 것은 ᄯᅩ 무슨 ᄭᅡ닭인지 과학적으로 그 성분을 분석하지 아으면 모를 것이나 나의 생각 갓해서는 분석이니 무엇이니 할 것 업시 그대로 ᄯᅩ 몃천년이고 두고 신비롭게 지낫스면 하여 보기도 하지만은 그보다도 나로 하여금 이곳에 마음을 부치게 하는 것은 이 샘물 우에 석벽 사이에 고란이 난다는 사실이다.
백제 의자왕이 고란사에만 난다는 이 고란을 한 입식 물 항아리에 ᄯᅡ 너허 오게 한 것은 다른 곳 물을 마시지 아켓다는 의도 외에도 다른 한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잇다. 의자왕이 위병이 잇섯다는 것도 헛된 추측만은 아이라는 것은 한약방의 당재라는 것은 중국서 조선에 올 ᄯᅢ에 백제에 먼저 왓다는 사실이 「도서번합(圖書樊合)」에 기록되여 잇는데 고란이 중국서 한약의 당재로 백제에 이식되여 온 것인지는 알 수 업스나 엇지 되엿든지 이곳에 고란이 난다는 것은 식물 분포학적인 흥미를 ᄯᅥ나서 고란이 위장병에 조타는 사실을 나는 ᄯᅩ 한번 들엇다.
그것은 내가 이곳에 와서 아즉 몃 날이 되지 못한 여름날 오후이엿다. 이곳은 말하자면 시내와 갓치 인가가 연결하야 사는 것도 아니고 그 우에 신개지(新開地)가 되여서 차저오는 빈객도 별로 드물고 나 자신을 차저오는 사람은 업슬 ᄲᅮᆫ만 아니라 편지도 보내는 사람이 드문 형편인지라 대하는 사람도 일정한 것인데 내 외숙을 방문하는 노시인 멧 분이 잇서 그 샘물가 반석 우에 자리를 펴고 시회을 열거나 시담에 해를 보내는 ᄯᅢ도 잇섯는데 그ᄯᅢ 창경궁 전작(典爵)인 홍취암 선생이 이곳의 고란을 보고 이것은 속명이 일엽초인데 위장병에 특효가 잇는 것이라고 한 말을 종합해 본다면 내 아즉 본초강목을 상고해 볼 기회는 업섯스나 고란은 일엽초이고 일엽초가 고란인 바에야 백제 의자왕의 궁중생활이 주지육림이엿는지는 몰나도 적어도 일국의 왕자로서 화사한 생활에 ᄯᅢᄯᅢ로 조마(調馬)운동이나 수렵 이외에는 구중궁궐 안에 가만히 안즈신 귀한 몸이시라 소화가 불량하실 ᄯᅢ도 잇슬 것이라 우연인지 필연인지 고란 입파리를 물 항아리에 ᄯᅡ 너허 오게 하신 것은 다만 궁녀들과 심심파적을 하기 위한 가여운 작란만으로 해석할 수는 업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이 샘물에 몇 차례나 고란 입파리를 ᄯᅡ 너허서 마서도 보고 백제 마즈막 임금님의 심경! 그 당일의 비극의 왕자로서의 데리케─트한 운명의 왕자를 대신하야 몃 번이나 비분도 하여 보앗스나 나 자신은 위만은 너무 건강하고 강철도 녹을 만하야 심리적인 것보다는 차라리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ᄯᅢ 연극이란 진실로 어려운 것이려니와 참다운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럼으로 나는 요즈음 의자왕이기를 그만두고 그 샘물을 ᄯᅥ다가 차를 ᄯᅡ러 먹어도 보려니 하엿스나 이런 시절이라 차인들 전일갓치 맛나는 것을 어들 수 잇서야 말이지 그런데 얼마 전 정말 중국산의 채리향차(菜莉香茶)가 조금 생겨서 다러서 맛을 보앗더니 그것은 이십년 전 북경 생활에서 맛보든 그 맛이 그냥 남어 잇지 아는가? 우리가 다갓흔 감각기관이면서도 눈이나 귀나 피부는 어릴 ᄯᅢ에 감각하든 그것보다 연치가 차차 노성하여지면 그에 ᄯᅡ라 변천이 생기건만 미각만이 변함 업슴은 무슨 ᄭᅡ닭일가?
그것은 강남의 생활에서 어든 잇지 못할 기억이 일시에 이 채리화의 향내를 통하야 그시에 재생되는 것이 안일런지. 나는 지금 가을에도 단풍 들지 안은 고란 입파리를 바라보며 채리화차를 마시면서 강남의 봄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