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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성채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 즉 애완용 가축처럼 귀여움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무서운 처지ㅡ특별히 쓸 것이 없는 흐린 날씨와 같은 일기ㅡ긴 일기다.


버려도 상관없다. 주저할 것 없다. 주저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줄곧 꼴보기 싫다. 그들은 하나 같이 그를 '의리없는 놈'으로 몰아 세운다. 그리고 교활하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정도로일까.

'그런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쳐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그것도 정말일까.

모두를 미워하는 것과 개과천선하는 일이 양립될 수 있는 일일까.


아니다. 개과한다는 것은 바로 교활해 간다는 것의 다른 뜻이다.

그래서 그는 순수하게 미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때는 민족마저 의심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번쩍임도 여유도 없는 빈상스런 전통일까 하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가족을 미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는 또 민족을 얼마나 미워했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대중'의 근사치였나 보다.


사람들을 미워하고ㅡ반대로 민족을 그리워하라, 동경하라고 말하고자 한다.

커다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덩어리의 그늘 속에 불행을 되씹으며 웅크리고 있는 그는 민족에게서 신비한 개화를 기대하며 그는 <레브라>와 같은 화려한 산화납으로 그린 불화(佛畵)를 꿈꾼다.


새털처럼 따뜻하고 또한 사향처럼 향기짙다.

그리고 또 배양균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성장함에 따라 여러가지 이상한 피를, 피의 냄새를 그는 그의 기억의 이면에 간직하고 있다.


열화 같은 성깔 푸른 핏줄이 그의 수척한 몸뚱이의 쇠약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어느날 손도끼를 들고ㅡ그 아닌 그가 마을 입구에서부터 살육을 시작한다.

모조리 인간이란 인간은 다 죽여버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 죽여버렸다.

가족들은 살려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에잇 못난 것들ㅡ)

그러나 죽은 그들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피살을 아직도 믿지 않았다(백치여, 노예여).


창들이 늘어서 있다. 아무데서나 메탄가스와 오존이 함부로 들락거린다.

무엇으로 호흡을 하고 있는지 증거가 없는 가축들의 상판이 감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누구와도 친밀하게 지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언제나 구부정하게 어물거리고 있다.


들어가볼까? 문을 찾아야지.

목소리를 들으면 식별할 수 있다. 피는 피를 부르는 철칙을ㅡ

그는 찬찬히 명찰을 살피며 걸어갔다. 비슷한 글자들이 그들의 이름이 뭔지 알아볼 수 없게 한다.

그중에서 간신히 그 자신의 이름을 찾아내자 이번에는 그가 주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연유로 해서 성(城)이었다.

아직도 그것은 굳게 봉쇄된 이름뿐인 성이었다. 그들은 결코 서로 자신의 직책과, 혈액형을 바꾸지 않는다.


해가 지면 그들은 먼 곳을 살피는 일 조차 그만두고 그저 깊숙이 농성하여 낮은 목소리로 음모를 꾸민다.


멸망할 것을, 악취가 날 것을, 두통이 나야 할 것을, 죄 많을 것을, 구토할 것을, 졸도할 것을.


등불은 꺼졌다. 꺼진 것 같으나 단지 빛을 약하게 해 둔 것 뿐이다. 곤충도 오지 않는다. 쥐들은 곧잘 먼지 이는 뒷골목에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가축을 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먹이와 혼동할 수 있는 고추를 심었다. 고추는 고등동물ㅡ예를 들면 소, 개, 닭의 섬유 세포에 향일성으로 작용하여 쓰러져가면서도 발효했다.


성은 재채기가 날 만큼 불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창들의 세월은 길고 짧고 깊고 얕고 가지각색이다.


시계 같은 것도 엉터리다. 성은 움직이고 있다. 못쓰게 된 전자처럼.

아무도 그 몸뚱이에 달라붙은 때자국을 지울 수는 없다.

스스로 부패에 몸을 맡긴다.


그는 온도계처럼 이러한 부패의 세월이 집행되는 요소요소를 그러한 문을 통해 들락거리는 것이다.

들락거리면서 변모해 가는 것이다.


나와서 토하고 쏟아내고, 들어가서 토하고 쏟아내고. 나날이 그는 아주 작은 활자를 잘못 찍어 놓은 것처럼 걸음새가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것이 간단하게 끝나버릴 아리송한 새벽이 올 때까지만이다.


(1935.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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