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를 떠나며
국회를 떠나며.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내 최대 재벌 그룹 회장의 지시로 그룹 부회장과 유력 일간지 회장 등이 주요 대선후보, 정치인, 검찰 고위인사들에게 불법으로 뇌물을 전달하는 모의를 하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이 담은 녹취록이 8년 후인 2005년 공개되었습니다.
이른바 안기부 X파일 사건입니다.
당시 법무부장관은 이 사건을 건국 이래 최대의 정, 경, 검, 언 유착사건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주요 관련자인 주미한국대사와 법무부차관이 즉시 사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준 사람, 뇌물을 받은 사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를 보도한 기자 두 사람과 국회 법사위 회의에서 떡값 검사 실명을 거론하며 검찰수사를 촉구한 국회의원 한 사람이 기소되었습니다. 다시 8년이 지나 오늘 대법원은 이 사건으로 저에게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의 죄목으로 유죄를 확정하였습니다. 뇌물을 줄 것을 지시한 재벌그룹회장, 뇌물수수를 모의한 간부들, 뇌물을 전달한 사람, 뇌물을 받은 떡값검사들이 모두 억울한 피해자이고, 이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저는 의원직을 상실할 만한 죄를 저지른 가해자라는 판결입니다.
폐암환자를 수술한다더니 암 걸린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와 무엇이 다릅니까?
국내 최대의 재벌회장이 대선후보에게 거액의 불법정치자금을 건낸 사건이 '공공의 비상한 관심사' 가 아니라는 대법원의 해괴망칙한 판단을 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국민 누구나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1인 미디어 시대에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하면 면책특권이 적용되고,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면 의원직 박탈이라는 시대착오적 궤변으로 대법원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지금 한국의 사법부의 정의가 있는가? 양심이 있는가? 사법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저는 오늘 대법원의 판결로 10개월만에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다시 광야에 서게 되었습니다.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도 뜨거운 지지로 당선시켜주신 노원구 상계동 유권자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권력의 비리와 맞서 이 땅에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대법원 판결은 최종심이 아닙니다. 국민의 심판, 역사의 판결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오늘 대법원은 저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지만 국민의 심판대 앞에선 대법원이 뇌물을 주고받은 자들과 함께 피고석에 서게 될 것입니다.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오늘의 사법부에 정의가 바로 설 때 한국의 민주주의도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오늘 국회를 떠납니다. 다시 국민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2013.2.14
-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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