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머리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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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쓰기를 위해서 시를 써 본 적이 없읍니다. 더구나 시인이 되려는 생각도 해 보지 아니하였읍니다. 다만 닫다가 미칠 듯이 파도치는 정열에 마음이 부대끼면 죄수가 손톱 끝으로 감방의 벽을 긁어 낙서하듯 한 것이 그럭저럭 근 백 수2나 되기에 한 곳에 묶어 보다가 이 보잘것없는 시가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가에 관한 이론이나 예투의 겸사는 늘어놓지 않습니다마는 막상 책상 머리에 어중이떠중이 모인 것들을 쓰다듬어 보자니 이목이 반듯한 놈은 거의 한 수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병신 자식이기 때문에 차마 버리기 어렵고 솔직한 내 마음의 결정3인지라 지구4에게 하소연이나 해 보고 싶은 서글픈 충동으로 누더기를 기워서 조각보를 만들어 본 것입니다.

30이면 선다는데 나는 아직 배밀이도 하지 못합니다. 부질없는 번뇌로, 마음의 방황으로 머리 둘 곳을 모르다가 고개를 쳐드니 어느덧 내 몸이 30의 마루터기 위에 섰읍니다. 걸어온 길바닥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나이만 들었으니 하염없게 생명이 좀 썰린 생각을 할 때마다 몸서리를 치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체법 걸음발을 타게 되는 날까지 내 정감의 파동은 이따위 변변치 못한 기록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리라고 스스로 믿고 기다립니다.

1932년 9월 가배절 이틑날
당진 향제에서 심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