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기술·통신/한국의 과학기술/현대 이전의 과학기술/조선전기의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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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과학기술[편집]

朝鮮前期-科學技術

조선전기의 과학기술은 한국사상(韓國史上)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황금기였다. 태종(太宗)대의 과학문화 정책을 이어받은 세종(世宗)대에는 이례적(異例的)으로 이론과 실천이 조화되어 학자·정치가·기술자들이 협력하여 과학기술의 통일성을 이룰 수 있었고, 민중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과학기술이 기여하였던 시대였다. 많은 유능한 인재를 찾아 정부의 적극 후원하에 공동연구케 하니, 1402년 태종대의 금속활자 인쇄나 세종대에 이룩된 많은 과학적 거작(巨作)은 이러한 노력의 소산(所産)이었다. 특히 중국 과학기술의 의존에서 탈피하여 자립(自立)하려는 자주적 움직임은 이전에도 때때로 대두되었지만 세종대를 전후한 조선 초에 더욱 두드러졌다.

세종대에 자주적 역법(曆法)의 확립을 계기로 시작된 천문관측의상(天文觀測儀象)의 대규모적 제작은 천문학과 기상학을 고도로 발전시켰고, 그러한 기운은 농업·지리학·의학 및 물리학적 기술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또 수많은 과학기술서가 저술되었는데, 그것들은 새로이 개량된 능률적인 활판인쇄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조선시대에 출판된 저명한 과학서적의 반이나 되는 분량이 조선 초기의 1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것은 그들의 자립적 과학기술 개발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과 성과도 15세기 말 이후의 정책적 빈곤과 곧이어 거듭된 두 차례에 걸친 외적(外敵)의 침략으로 좌절되고 말았으며 다시 부흥되기까지 수세기가 소요되었다.

조선전기의 천문학[편집]

朝鮮前期-天文學

조선의 천문학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서운관(書雲觀)을 두고 천체관측과 기상관측기계의 제작과 시설의 정비, 관측 제도의 완비와 자주적 역법체계(曆法體系)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세종 15년(1433)에는 천문관측 의상(儀象)인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또한 간의대(簡儀臺)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천문학 발전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이어서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고 자주적 역법(曆法)의 확립을 위하여 역서(曆書)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간행하니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러나 우주의 본질과 체계에 관한 이론은 중국 고대의 혼천설(渾天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편집]

天象列次分野之圖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는 즉위해서부터 하늘의 뜻에 의하여 세워진 새 왕조의 왕자(王者)로서의 권위의 표상으로 새로운 천문도(天文圖)를 갖기를 염원하였다. 그 염원은 권근(權近), 유방택(柳方澤), 권중화(權仲和) 등 11명의 천문학자들의 수년 간의 노력 끝에 성취되었다. 그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의 천문도 석본(石本)이다. 당시 고려에 의하여 계승된 고구려 천문도의 인본(印本)도 매우 희귀해졌는데, 태조(太祖)가 즉위한 지 얼마 후 그 인본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 태조는 매우 진귀하게 여겨 그것을 중각(重刻)하게 하였으나, 서운관(書雲觀)에서는 그 연대(年代)가 오래되어 성도(星度)에 오차가 생겼으므로 새로운 관측에 따라 오차를 교정하여 새 천문도를 작성하기로 하고, 새로 중성기(中星記) 한편을 편찬하여 그에 따라 성도(星圖)를 석각(石刻)하여 완성한 것이다. 창경궁에 현존하는 이 천문도의 석본은 가로 122.8cm, 세로 200.9cm의 흑휘석(黑輝石)에 새겨진 것인데,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성도는 원형(圓形)의 중심에 북극(北極)이 있고, 그 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관측지(觀測地)의 출지도(出地度)에 따른 소원(小圓)과 더 큰 적도(赤道) 및 황도권(黃道圈)이 그려져 있다. 원(圓)의 주위에는 28수(宿)의 명칭과 적도수도(赤度宿度)가 기록되어 있고, 각 수(宿)의 거성(距星)과 북극과를 연결하는 선(線)에 의하여 개개의 별의 입수도(入宿度)가 목산(目算)으로도 매우 정밀하게 읽어갈 수 있게 그려져 있다. 관측기사(觀測記事)에는 28수(宿) 거극분도(去極分度), 24기(氣)의 혼효(昏曉)에 자오선(子午線)을 지나는 별에 대한 천상기사(天象記事), 12국분야(國分野) 및 성수분도(星宿分度), 일수(日宿)와 월수기사(月宿記事), 논천설(論天說), 천문도작성경과, 작성자들의 관직과 성명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새로운 성도의 작성을 시도하지 않고 4세기나 6세기경에 관측된 고구려 성도의 세차(歲差)에 의한 중성(中星)의 오차만을 새로 관측하여 교정한 것은 그것이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별을 망라한 것이어서 성좌의 새로운 관측에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의대[편집]

簡儀臺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왕립(王立)중앙천문기상대로서 서운관(書雲觀)을 두었고 그 관측시설로 간의대를 설립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서운관이 경복궁과 북부 광화방(廣化坊)의 두 곳에 있었다. 세종 14년(1432)부터 만들기 시작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설치하기 위해서 세종 15년(1433)에는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높이 31척(약 6.3m), 길이 47척(약 9.7m), 깊이 32척(약 6.6m)의 석조 노대(石造露臺)를 쌓고 석난간(石欄干)을 둘러 간의대를 설립하였다. 그것은 대간의(大簡儀)를 설치하여 시험관측을 거쳐 세종 16년(1434)에 준공되었다. 이 대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규표(圭表)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부설되었고, 대(臺)의 서쪽에는 동표(銅表)의 높이 40척(약 8m 24cm)의 거대한 규표가 세워졌다. 청석(靑石)으로 된 규면(圭面)에는 장(丈), 촌(寸), 분(分)의 눈금을 새겨 일중(日中)에서의 동표(銅表)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여 24절기를 확정하였다. 이 천문대는 원(元)의 곽수경(郭守敬)이 세운 거대한 관성대(觀星臺)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것이었고, 세종 20년(1438) 봄부터는 매일밤 5명씩의 서운관 관리가 입직(入直)하여 계속적인 관측에 임하게 되었다. 이 대천문대는 세종대에 창설된 이후 여러번 개수(改修)되면서 조선의 왕립 중앙천문대로서 동양 최대 규모와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추었고 그것은 외국 사신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나라 천문학사상 가장 훌륭한 시설을 자랑하던 대간의대는 임진왜란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된 채 다시는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혼천의[편집]

渾天儀

혼천의는 혼의(渾儀) 또는 선기옥형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측각기(測角器)로,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었던 혼천설에 기초를 두고 제작된 중국적 특징과 전통을 지닌 우수한 천문의기(天文儀器)이다. 중국에서 기원전 2세기경에 제작된 이후 우리나라에 언제쯤 전래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대체로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혼천의류의 측각기가 천문 관측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시대에도 그것이 제작되었으리라 믿고 있다. 하지만 혼천의 제작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처음으로 찾을 수 있다. 세종 15년(1433) 6월에 대제학 정초(鄭招)를 비롯하여 박연(朴堧), 김진(金鎭) 등이 만든 혼천의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8월에도 정초, 이천, 정인지(鄭麟趾), 김빈 등에 의하여 혼천의가 완성됐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 혼천의는 세종대 이후 조선 천문학의 가장 기본적 천문의기가 되었다.

간의[편집]

簡儀

간의는 혼천의를 간소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중국 천문학에서와 같이 조선의 천문학에서도 흔히 적도(赤道)에 관한 위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혼천의인 육합의(六合儀), 삼진의(三辰儀), 사유의(四游儀) 중에서 적도환(赤道環)과 백각환(百刻環), 사유형(四游衡)만을 따로 떼어서 간의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혼천의가 천체의 위치를 실제로 관측하기 위한 관측용 측각기(測角器)로 사용되지만 조선에서는 혼천의를 실내에 두어 천문시계로서의 목적을 위하여 쓰였으므로,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데는 간의가 주로 사용되었다. 세종 19년(1437)에 완성된 간의의 제도는 <원사(元史)>에 나타난 곽수경법(郭守敬法)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다.

일성정시의[편집]

日星定時儀

이것은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는 주야시계(晝夜時計)로서, 지름 2척의 동제(銅製) 의기(儀器)이다. 그 구조는 적도(赤道)와 평행한 원반(圓盤)에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의 3환(三環)을 차례로 설치한 것이다. 이 의기는 사실상 간의에서 적도환과 백각환을 따로 떼어 더 간략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곽수경이 만든 성구와 정시의(定時儀)를 연결하면 이것이 될 것이다.

목륜[편집]

目輪

중종(中宗) 20년(1525) 10월 이순(李純)은 중국에서 들어온 <혁상신서(革象新書)>에서 목륜이라는 관측기를 보고 그것을 본따서 만들었다. 지름 33.9cm의 놋쇠 원반(圓盤)의 앞뒷면에 황도남북(黃道南北)의 항성(恒星)들이 각각 정밀하게 새겨졌고, 원주(圓周)에 따라 주천도(周天度)가 있고 회전하는 규형(窺衡)이 달려 있다. 이것은 중세 아라비아의 애스트럴레이브(astrolabe)의 조선제(朝鮮製)라 할 수 있겠다.

조선전기의 해시계[편집]

朝鮮前期-日晷

해시계 제작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세종대에 제작된 해시계는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와 규표(圭表)의 5종류로 정초(鄭招), 장영실(蔣英實), 김빈, 이천, 김돈(金墩) 등이 세종 19년(1437) 4월에 완성한 일련의 천문의기(天文儀器) 중의 일부이다. 이 해시계들은 원(元)대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천문의기의 영향과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앙부일구[편집]

仰釜日晷

앙부일구는 <원사(元史)> 천문지(天文志) 앙의조(仰儀條)의 곽수경법(法)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그것은 반구형(半球形)의 대접과 같은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앙부일구란 이름이 붙었다. 시반(時盤)은 동지(冬至)에서 하지(夏至)에 이르는 24절기(節氣)를 13선(線)의 위선(緯線)으로 나타내서 절기(節氣)를 알게 하였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時刻線, 子午線)을 그었으며 시표(時標)는 북극을 향하여 비스듬히 세워졌다. 세종은 처음 앙부일구를 우매한 민중을 위한 공중시계로 삼기 위하여 시신(時神)을 그려 넣은 것을 만들어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남가(南街)에 각각 석대(石臺)를 쌓아 그 위에 설치하게 하였다. 이 시계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다는 데서 그 의의가 크다. 이 해시계들은 임진왜란에 의하여 유실되어 일단 자취를 감추었다가 현종(顯宗)-숙종(肅宗, 17세기 후반)대에 다시 만들어졌다. 세종대의 공중용과는 조금 다르지만 공중에 설치하기 위하여 흑칠동제(黑漆銅製)에 은사로써 선(線)과 문자를 새겨 넣고 4개의 용주(龍柱)로 다리를 세운 우아한 모습의 해시계로 재현되었다.

이러한 앙부일구는 그 후 몇 가지 종류가 제작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영정대(英正代)에 현숙종대(顯肅宗代)의 것과 거의 같게 우아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 아름답게 조각된 석대에 고정시켰다. 이들의 특색은 전자는 '한양북극고(漢陽北極高) 37도20분', 후자는 '북극고 37도39분15초(秒)'라고 제작 당시에 쓰이던 서울의 북극고도를 명시하였다는 점이다. 이 밖에 지방관청이나 고관(高官)들이 사적(私的)으로 설치하였던 것이 있고 성냥갑만한 크기의 휴대용 앙부일구가 있었다. 이렇게 앙부일구는 원대(元代) 곽수경에 의하여 처음으로 제작된 후 중국에서는 다시 제작되지 않았지만, 그 전통은 조선에 의하여 잘 계승 보존되어 조선식 공예 기법이 가미되면서 보편화하였다.

현주일구와 천평일구[편집]

懸珠日晷-天平日晷

휴대용 해시계의 이름들이다. 시표(時標)와 시반(時盤)이 수직되게 하기 위하여 기둥에 추(錘)를 매달아 십자(十字)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지남침(指南針)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細線)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게 하였다. 천평일구는 현주일구에서 현주장치를 빼고 수평을 위한 원지(圓池)를 하나 더 두었다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보이는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남일구[편집]

定南日晷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현주·천평일구의 특징과 간구(簡晷)의 특징을 함께 지닌 우수한 것이었다. 부(趺)에는 원지(圓池)와 수거(水渠)가 있어 정확한 수평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었고 동서로 운전되는 사유환(四游環)에는 북으로부터 16°에서 167°에 이르는 반주천도(半周天度)가 새겨졌으며, 전환(全環) 규형(窺衡)이 남북으로 오르내리고, 지평환(地平環) 아래에 지자출입 시각(至自出入時刻)에 준하여 반환(半環)이 수평으로 가로놓였다. 규형을 써서 매일의 태양거극분도(太陽去極分度)에 맞추어 방공(方孔)에 의하여 투입(透入)되는 해그림자를 반환(半環)에 새겨진 눈금으로 보면 자연히 남(南)이 정해지고 함께 시각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최초의 표준시계[편집]

最初-標準時計

조선이 도성을 한양(漢陽)으로 옮긴 후 새로운 표준시계의 설치가 요청되어 태조(太祖) 7년(1398)에는 물시계인 경루(更漏)가 서울의 중심지에 설치되었다. 새로운 물시계와 함께 종루(鐘樓)가 세워지고 새로 만든 대종(大鐘)을 걸어서 도성의 표준시간을 알리는 데 썼다. 그래서 종루와 물시계가 있는 거리를 종로(鐘路)라 불렀다.

경루[편집]

更漏 조선에 의하여 제작된 최초의 물시계(漏刻)이다. 이것은 여말(麗末)에 사용되던 것과 같은 형식인 부루(浮漏)였을 것이며 1316년 원대(元代)에 광둥(廣東)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두자성(杜子盛)과 세운행(洗運行) 물시계와 같은 유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파루당종법(罷漏撞鐘法)은 초경(初更)에는 28수(宿)의 수(數)에 따라 28회 울렸고 5경(更)에는 33천(天)에 따라 33회 울렸는데 전자를 인정(人定, 인경)이라 하여 성문(城門)을 닫았고 후자를 파루(罷漏, 바래)라 하여 성문을 열었다. 세종 6년(1424) 5월에는 경복궁(景福宮)에 동제(銅製)의 누각(漏刻, 更點-器)을 중국의 체제를 참고하여 주조(鑄造)하였다.

옥루[편집]

玉漏

천상시계(天象時計)이며 자동물시계의 하나. 장영실(蔣英實)이 세종(世宗) 20년(1438) 1월에 완성하여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고 김돈(金墩)의 흠경각기(欽敬閣記)에 기록하였다. "흠경각 안에 호지(糊紙)로 높이 7척 가량의 산을 만들고 옥루의 기륜(機輪)을 설치하여 물을 떨어뜨려 회전케 하였다. 금(金)으로 크기가 탄환(彈丸)만한 태양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오운(五雲)이 에워싸고 산허리 위로 지나간다. 태양은 1일 1주(周)하며 태양의 모형 아래에는 옥녀(玉女) 4인이 있는데 손에 금방울을 들고 구름을 타고 4방에 서 있다가 인시(寅時), 묘시(卯時), 진시(辰時)의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있는 옥녀가 금방울을 흔들어 시각을 알린다……."

옥루는 소송(蘇頌)의 천문시계에서 보이는 워터휠(water wheel)을 기륜(機輪)으로 한 동력(動力)에, 13세기 전후한 중세 아라비아 물시계들의 하나의 유형과도 같았던 인형에 의한 시보장치(時報裝置)를 조선화(朝鮮化)하여 가미(加味)하였고, 거기다가 태양의 모형을 덧붙여서 천상시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영실의 옥루는 명종 초에 경복궁 실화(失火)로 불타 없어졌다가, 명종 8년(1553)에 박민헌(朴民南犬), 박영(朴詠) 등이 다시 만들기 시작하여 다음해 8월에 완성하였다.

자격루[편집]

自擊漏

자동(自動)물시계의 하나. 세종(世宗)은 자동시보장치(自動時報裝置)가 붙은 물시계를 제작하기 위하여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로 있던 장영실(蔣英實)을 특별히 등용하고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의 관직을 주어 천문학자 김빈과 함께 그 일에 주력(注力)케 하였다. 2년 여의 노력 끝에 세종 16년(1434) 7월에 자격루라고 불린 자동물시계를 완성하여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하고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의 새로운 표준시계로 등장하였다. 자격루는 1091년 송(宋)의 소송(蘇頌)이 제작했던 거대한 천문시계와 아라비아 물시계의 자동시보장치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김돈(金墩)의 보루각기(報漏閣記)와 김빈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자격루는 파수대(播水臺) 4개와 수수대(受水臺) 2개 등 12개의 전(箭)과 자동시보장치로 이루어졌는데, 수수대의 길이 1척2촌, 지름 1척8촌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자격루의 제작은 조선에 있어서 물시계를 기계시계로 발전케 하는 과정으로서 물리학과 그 기술적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자격루는 여러번 수리되면서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때 타버리고, 중종 31년(1536)에 만든 자격루는 지금도 덕수궁에 그 누기(漏器)만이 보존되고 있다.

조선전기의 역법[편집]

朝鮮前期-曆法

조선은 고려에 이어 대통력(大統曆)을 썼지만 일월교식(日月交蝕) 및 5성(星)의 행도(行度)는 곽수경(郭守敬)의 수시력(授時曆) 시행 이후 그 산술(算術)을 알지 못하여 세종대까지의 우리나라 역서(曆書)에는 일월교식 및 5성의 두 부분을 빼놓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은 그것을 추보(追補)하여 보완케 하였고, 세종 15년(1433) 정인지(鄭麟趾), 정초(鄭招), 김담(金淡), 이순지(李純之) 등의 학자들에게, 그간 연경(燕京)을 표준으로 추산한 역서를 교정하지 않고 사용한 데서 온 착오를 해소하기 위해서, 역서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찬하도록 하였다.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어, 이 때부터 대통력은 '중국력'이라 하였고 <칠정산내편>은 본국력(本國曆)이라 했으니 우리나라는 오랫동안의 중국역법 의존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 역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리하여 연산군 10년(1504) 12월에는 처음으로 한글로 된 역서의 간행을 계획하여 번역을 하게 할 정도로 역서의 보급이 일반화되어 갔다. 그러나 성종(成宗) 대 이후 차츰 침체하기 시작한 조선의 천문학과 수학은 선조(宣祖) 대에 임진왜란의 극심한 전화(戰火)를 치르고 난 후 더욱 급격히 침체화하여 독자적 역법의 계산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조선의 천체관측[편집]

朝鮮-天體觀測

조선의 전후기를 통한 일식관측기사(日蝕觀測記事)를 <증보문헌비고(增補文南犬備考)> 상위고(象緯考)에서 종합하여 보면, 태조대 2회, 정종대 1회, 태종대 3회, 세종대 11회, …… 고종대 19회 등 총계 190회에 달한다. <이조실록(李朝實錄)>에 기록된 일월식 기사에 의하면, 당시 관측규정은 <서운관지(書雲觀志)>의 일월식관측 규정대로 식(蝕)의 시각(時刻)과 시간, 방향, 정도 등을 관측하고 도시(圖示)하였다.

조선의 전후기를 통한 혜성관측기록(彗星觀測記錄)은 객성(客星) 24회, 혜패 79회로 모두 103회에 달한다. 이 밖에도 수백회에 달하는 태양의 흑점(黑點), 유성(流星), 성운(星隕) 및 성운우(星隕雨) 등의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기상학의 성격[편집]

朝鮮氣象學-性格

근대적 과학으로서의 기상학은 조선 초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강우량(降雨量)의 과학적 측정법(測定法)을 발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강우량이 넉넉지 못하고 우기(雨期)가 편재(偏在)하는 자연적 조건은 조선의 기상학을 농업기상학으로 출발하게 하였으며 농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강우량과 우박, 서리, 안개 등의 관측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정확한 수량적 측정에 주력하였을 뿐 이론적이고 원리적인 학문적 문제의 추구는 천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시되었다. 따라서 기온의 변화와 강우의 예측과 같은 경우는 농가점후법(農家占候法)으로서의 경험적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사실은 조석이론(潮汐理論)의 전개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달무리와 햇무리와 같은 기상학적 현상을 지상(地上)의 길흉사(吉凶事)의 발생과 연결시키는 점술적(占術的) 사고가 시종 지배적이었을 뿐 그 기상학적 원인의 추구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측우기와 수표의 발명[편집]

測雨器-水標-發明

조선 초기의 강우량 측정법은 비가 땅 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도 처음에는 정기적(定期的)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고 농경기나 한발(旱魃)이 계속될 때에만 토성(土性)의 조습(燥濕) 정도를 알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영(令)을 내려 조사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측정법은 땅이 말랐을 때와 젖어 있을 때에 따라서 땅 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아 그것을 헤아리기가 어려우므로 보다 과학적인 측정법이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세종(世宗) 23년(1441) 8월에 세계에서 최초로 원통형(圓筒形) 철제우량계(鐵製雨量計)가 발명되었다. 이는 길이 2척(尺, 41.2cm), 지름 8촌(16.5cm)으로 된 철기(鐵器)로 대(臺)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그 깊이를 재서 측정하게 되어 있다. 강우량은 또한 하천수위(河川水位)의 측정에 의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세종대의 과학자들은 우량계인 측우기와 함께 하천수위의 측정기구로 척(尺), 촌(寸), 분(分)을 새긴 수표(水標)를 만들어 서울의 중심부를 흐르는 청계천 마전교(馬前橋, 水標橋자리) 서쪽에 하나를 세우고, 한강변 바위에도 세웠다.

강우량 측정제도의 확립[편집]

降雨量測定制度-確立

세종(世宗) 24년(1442) 5월, 전년(前年)에 발명하였던 강우량 측정기를 개량하여 측우기(測雨器)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개량된 측우기는 길이 1척 5촌, 직경 7촌으로 하여 주척(周尺)을 쓰고,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그 위에 측우기를 놓고 비가 그쳤을 때마다 본관 관원(本館官員)이 강우상황을 직접 관찰하여 주척으로써 수심(水深)을 측정하고, 아울러 강우 및 우청일시(雨晴日時)와 수심의 척(尺), 촌(寸), 분(分)수를 기록하여 즉시 계문(啓聞)하고 치부(置簿)케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각 도(道), 군(郡), 현(縣)의 객사정(客舍庭)에 측우기를 두고 수령(守令)이 직접 강우량을 촌본(寸本)까지 측정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이렇게 개량 완성된 이 제도는 강우량 측정법에 있어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근대적이고도 과학적 방법이었다. 이 측정방법을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강우량 측정법과 비교할 때 자(尺)를 따로 씀으로 인한 부피의 증가에서 생기는 오차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점이 없다. 당시의 강우량 측정은 수심뿐 아니라, 그 정도에 따라서 미우(微雨), 세우(細雨), 소우(小雨), 하우(下雨), 쇄우(灑雨), 취우(驟雨), 대우(大雨), 폭우 등의 8단계로 분류하는 근대적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세종 24년에 완성된 이 제도는 성종(成宗)대까지는 거의 그대로 실시된 것 같으나 그 후 점차로 침체된 듯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영조(英祖)대에 이르러 이 제도는 재출발하게 되었다.

풍속과 풍향의 관측[편집]

風速-風向-觀測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그의 저서 <금양잡록(衿陽雜錄)>에서 농가(農家)의 환(患)으로 수한(水旱) 다음으로 풍해(風害)가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나라는 지세(地勢)로 보아 바다를 지나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여 운우(雲雨)를 만들고 산을 거쳐 오는 바람은 차서 농작물을 손상시켜, 풍해중에선 동풍(東風)에 의한 것이 많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기후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을 이론적으로 잘 설명한 것으로 농업기상의 선구적 이론의 하나라고 하겠다. 바람의 경향을 중시하던 조선의 기상학자들은 그것을 위하여 풍기죽(風旗竹), 즉 풍향계(風向計)를 설치하였다. 풍향(風向)의 관측(觀測)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세종 때부터는 풍기죽을 풍기대에 꽂아 놓고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써 풍향을 관측하였다. 풍기대는 영조(英祖) 46년(1770)에 석대(石臺)로 개량되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각각 설치되었고 그 유물이 현존하고 있어, 그러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말하여 준다.

풍향은 방향으로 측정되어 24향(向)으로써 표시되었다. 또 풍속(風速)은 그 강약에 따라 몇 단계로 구분되었는데 아마도 강우량의 경우처럼 8단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나무가 뽑힐 정도의 바람은 대풍(大風)이라 불렀고, 나무가 뽑히고 기와(瓦)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은 가장 강한 것으로 폭풍이라하고 대풍과 폭풍은 풍이(風異)로 특히 기록되었다. 이러한 풍이의 관측기록은 신라에 24회, 고구려에 4회, 백제에 4회로 합계 32회였고, 고려에는 359년 간에 135회에 달하는 관측기록이 있으나 조선에는 태종(太宗) 12년(1412)에서 영조(英祖) 15년(1739)에 이르기까지 불과 21회에 불과하다. 고려 때에 비하여 철저한 관측을 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전기의 도량형[편집]

朝鮮前期-度量衡

고려 말의 사회 경제적 혼란은

도량형제도의 문란을 가져와 조선 태조(太祖) 초에도 주척(周尺)의 길이조차 확실치 않았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허주(許稠)의 노력으로 태조 2년(1393)에 척도(尺度) 교정(校正)에 의하여 주척을 일단 정비하니 그 길이는 황종척(黃鍾尺)의 0.6척에 해당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것도 전국적으로 완전히 통일되지 못하여 몇 번의 교정 끝에 세종(世宗) 28년(1446) 9월에 12율(律)의 기본음(基本音)인 황종률(黃鍾律)을 낼 수 있는 정확한 황종관(黃鍾管)을 만들고 그 길이를 기준으로 영조척(營造尺)을 만들어 그에 따라 황종척(黃鍾尺), 예기척(禮器尺)·주척(周尺)·포백척(布帛尺) 등을 동으로써 주조하여 각 지방관청에 보내서 표준척으로 삼게 하였다. 또 새로 만든 영조척으로써 곡두근합(斛斗斤合) 즉 양(量)의 체제를 경정(更正)하였다. 그리고 형(衡) 즉 무게의 기준도 황종관에 물을 채워 그 중량(重量)을 표준으로 하였으니, 결국 세종대에 완전히 기틀이 잡힌 도량형의 제도는 황종관을 표준기로 삼았다고 규정할 수 있다. 예종 1년에 완성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해 도량형제도는 더욱 공고히 법제화되었다.

조선전기의 수차[편집]

朝鮮前期-水車

수차(水車)는 그 용도(用途)에 따라서 정곡(精穀), 제분용(製粉用)의 물레방아의 동력(動力)으로서, 그리고 관개(灌漑), 수리용(水利用)의 물레바퀴로서 각각 이름을 달리해서 불렸다. 맷돌로 쓰일 때에는 수년, 수애, 수마(水磨), 수롱 등으로 불리었고, 방아로 쓰일 때에는 수대 또는 기대라고 불리었다. 양수기(揚水機)로서의 수차도 가장 대표적인 용골차(龍骨車)를 번차 혹은 그 회전동력에 따라 답차(踏車)라 불렀다. 양수기로서의 수차는 용골차 이외에도 통차(筒車)가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는 서울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연자방아(水輾)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정부양곡을 정곡하기 위하여 세운 상당히 큰 규모였다. 그 연자방아는 수전(水輾)이라고 기록되었으나 그림에서 보는 기대나 연이수마(連二水磨)와 같은 톱니바퀴에 의한 동력 전달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수직축(垂直軸)의 수차는 볼 수 없고 횡축(橫軸)의 수차가 일반화되었다. 연자방아, 연자매, 물방아를 소재로 한 시가(詩歌)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많이 불리게 된 것은 그때에는 정곡 및 제분용 수차가 농촌에서 일반화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양수기로서의 수차는 전통적인 용골차 이외에도 세종대(世宗代)에 만든 통차를 정부의 노력으로 보급하였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농민들이 가난 때문에 수차를 만들 만한 여유가 없었고, 우리나라의 지세(地勢)와 자연조건(自然條件)에서 볼 때 대체로 천수(天水)로써 만족할 수 있는 때가 많았고, 가뭄이 심할 때에는 수차를 돌릴 만한 물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쓸모가 별로 없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양수기가 필요할 때에는 아무런 부담 없이 쉽게 쓸 수 있는 두레나 용두레가 노력이 많이 들고 원시적이긴 했지만 더욱 쓸모 있는 것이었다.

용골차(번차)[편집]

龍骨車

양수기(揚水機)로서의 수차(水車)의 하나. 고려말 이래로 수차라면 일반적으로 용골차, 즉 번차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국에서 한대(漢代 170년경)에 발명되어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계승되어, 조선 초기에서부터 약간의 발전이 있었다. 용골차는 하천이나 저수지와 같이 물이 있는 곳에서 물을 대야 할 곳까지 나무통(桶)을 걸어 건네고, 한편 용골판(龍骨板)이라고 부르는 네모난 판을 이은 순환연쇄(循環連鎖, endless chain)를 만들어서 그것을 나무통 속에 꿰어 빙빙 돌려 그 회전에 의하여 용골판이 물을 끌어 올리도록 만든 것이다. 회전동력(回轉動力)으로는 수전(手轉), 족답(足踏), 축력(畜力), 수전(水轉) 등이 사용되었는데, 조선 초기까지는 주로 족답의 번차가 많이 쓰였다.

통차[편집]

筒車

양수기(揚水機)로서의 수차(水車)의 하나. 일명 왜수차(倭水車). 세종(世宗) 11년(1429) 12월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갔던 박서생(朴瑞生)이 제출한 보고서는 조선의 수차제조에 큰 자극을 주었다. 그가 일본에서 보고 온 수차는 수세(水勢)를 이용하여 자전(自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급류(急流)에 가설하면 자전하지만 만수(漫水)에 가설하면 자전하지 않아서 밟아야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왜수차는 종래의 족답식(足踏式)보다 훨씬 효율적이어서 자격수차(自激水車)로 불리었고, 세종은 모형을 만들어 각도에 보내 수차를 많이 만들게 하였다. 이 때부터 전국적으로 보급하기에 힘쓴 이 자격수차를 통차라 하였다. 이때부터 종래의 수차를 중국에서 배워 왔다 하여 당수차(唐水車)라 하고 통차를 일본에서 배워 왔다 하여 왜수차라고도 하였다. 통차는 세종 말까지 여러 가지 방법을 다하여 크게 권장하였으나, 정부의 노력에 비하여 농민들에게는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전기의 화포주조기술[편집]

朝鮮前期-火砲鑄造技術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수립되면서 고려 말에 성행했던 각종 화기(火器)와 화약(火藥)의 제조는 이성계(李成桂)의 권력 집중을 위한 방편으로서의 소극정책으로 불꽃놀이(火戱)와 최무선(崔茂宣) 부자(父子)의 개인적 노력으로 겨우 그 명맥이 유지될 정도로 정체되었다. 화약은 정월(正月) 설놀이의 하나였던 불꽃놀이를 위해서 제조되고 소비되었으며, 화포(火砲)는 녹슬어 갔다.

태조(太祖)는 화기의 제조에 소극적이었지만 태종(太宗)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태종 1년(1401)에 최해산(崔海山)을 등용함으로써 조선 화기발달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태종의 적극적인 관심은 태조 초에 한때 잠잠한 듯하던 왜구(倭寇)가 다시 창궐하기 시작된 데서 자극을 받은 것이며, 또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태종 9년(1409) 1월에는 철령전(鐵翎箭) 수십개씩을 장탄(藏彈)한 동통(銅▩)을 소차(小車)에 싣고 달리면서 화약으로써 발사하는 일종의 장갑차인 화차(火車)를 개발하였고, 화산기의 제조와 그 발사시험을 거의 매년 거듭하여 드디어는 석탄자(石彈子)와 같은 탄환(彈丸)의 발사시험에 성공하였다. 태종 13년(1413)경에 명(明)의 난파선(難破船)에서 얻은 완구(碗口)를 본따서 대중소의 세 가지 완구 20문을 최해산이 제조함으로써 완전히 기틀이 잡혔다.

세종대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서북변경의 개척이 적극화하자 화기의 수요가 증대되었고, 따라서 화약의 생산량도 급속히 증대되었다. 당시 지방에서의 연생산량은 3,000근에 달했는데 화약의 연소비량은 약 8,000근이었으므로 중앙에서의 생산량은 5,000근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방에서의 생산을 더욱 확대하지 못한 것은 염초(焰硝) 공납으로 화약비술(火藥秘術)이 보급되면 혹시 왜인(倭人)에게 전습될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안지방에서는 그 생산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포의 주조 및 화약제조 기술이 향상되면서 세종 중기부터는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경향이 대두되었다. 완구는 개량되고 화통명(火▩名)도 변경되어 중국식 화통과 구별케 했으며 발화(發火)라고 하는 새로운 화기가 만들어졌고, 통신용포(通信用砲)인 신포(信砲), 휴대에 간편한 소화포가 만들어졌다. 화포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대총통(大銃筒)에서부터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이라 부르고, 명(明) 초의 소총통의 형식에 속하는 휴대용 화기를 승자총통(勝字銃筒)이라 이름지었다. 세종 15년(1433)에는 1발(發)에 4전(箭)까지 발사할 수 있는 화포전(火砲箭)이 발명되어 야인 정벌의 실전에 사용되어 크게 유효하였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화기가 제조되고 그 양(量)도 격증하게 되자 동(銅)의 공급량 부족 때문에 고민하게 되어, 일본으로부터 동을 수입하고 사원(寺院)의 종(鍾)까지 녹여서 충당하였으며, 동광(銅鑛)의 개발에 더욱 힘쓰는 한편, 철제(鐵制)화포를 만들려 하였으나, 수철(水鐵, 무쇠)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이 없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철제 화포를 주조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고 그것은 세종 26년(1444)에 이르러서야 당시 금속학의 권위자였던 이천의 노력으로 국경 변방의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 철제기술을 바탕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문종(文宗) 1년(1451)에는 문종의 창안으로 신형 화차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차 위에 가자(架子)를 만들어 그 안에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 또는 사전총통(四箭銃筒) 5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질러 차례로 쏘게 한 것이다. 태종대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화차는 실전(實戰)에서 사용된 것 같지 않으나, 문종의 화차는 임진왜란 때 변이중(邊以中)에 의하여 실전에서 크게 활용되었다. 조선전기의 화기제조는 그 발달과정에서 볼 때 사실상 문종대에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는 한두 가지 새로운 화기가 눈에 뜨이기는 하나, 화기발달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의 조선기술[편집]

朝鮮-造船技術

조선의 조선기술은 한 마디로 전선(戰船)의 건조로 특징지을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선 초기의 군선(軍船)에는 대맹선(大猛船), 중맹선(中猛船), 소맹선(小猛船)의 3종류가 있었다. 대맹선은 수군(水軍) 80명이 타고, 중맹선에는 60명, 소맹선에는 30명이 탔다. 이 밖에 무군(無軍) 대·중·소맹선이라는 예비선(豫備船) 내지는 비전투용 함선(艦船)이 있었다. 이러한 전선들의 조선기술은 고려의 조선기술과 남송(南宋)의 원양항해선의 전통을 계승하여 주로 해전용(海戰用) 선박으로 개량된 조선식 선박이었다. 조선식 선형(船型)의 특징은 대체로 길이에 비하여 폭이 넓다는 것이며 따라서 선체가 길쭉하지 못하고 가운데가 너무 부른(膨) 것이 결점이며, 또한 선재(船材)의 판(板)이 너무 두꺼워서 둔중(鈍重)하고 속력이 느렸다. 그것은 조선의 선박이 원양항해용이 아니라 연해용(沿海用) 및 해양 방어용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견고함을 위주로 건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조선에서는 배의 속력을 빠르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병선(兵船)에 대한 것이지 상선(商船)이나 어선(漁船)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태종(太宗)대에는 특히 조선 형식의 장점을 도입하려는 일본선박의 움직임이 대두되었고 세종(世宗) 12년(1430)에는 여러 외국 선박에서와 같이 철정(鐵釘)을 써서, 생목(生木)으로 급조(急造)하여 목정(釘)을 씀으로써 일어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일본 조선형식에 따라 배를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15년(1433)에는 유구선장(流球船匠)이 철정을 써서 만든 배(철의 소요량 3,352근)와 사수색(司水色)에서 하체(下體)는 철정과 목정을 반씩 쓰고 상장(上粧)은 모두 철정을 써서 만든 배(철 소요량 1,800근과 1,900근) 3척을 진수시켜 16년(1434)에 한강(漢江)에서 그 장단점을 비교하여 개량에 참고로 했고, 세종 27년(1445)에는 귀화왜인(歸化倭人)에게 호군직(護軍職)을 주어 배를 만들게 하여 시험한 결과 공비(工費)가 2배나 들고 판(板)이 얇아서 파선하기 쉽다는 이유로 시행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조선은 여전히 생목을 써서 목정과 철정을 섞은 배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생목을 쓰는 대신 철정을 안쓰고 목정을 많이 쓰는 것으로 배의 중량을 줄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선의 쾌속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 없어 세조(世祖)대에도 성종(成宗)대에도 그러한 속도 시험은 계속되었다. 조선에서 이와 같이 일본선에 대한 쾌속을 따르려고 애썼으면서도 끝내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주요인은 조선비용과 시일이 거의 2배나 든다는 데 있었다.

윤선[편집]

輪船 윤선은 명종(明宗) 5년(1550) 2월에 건조되었다. 중국에서 8세기 이전에 나타난 윤선은 발로 밟아서 수차(水車)를 돌려 움직이는 동력선(動力船)이다. 서구에서는 1543년에 비로소 실용되었던 패들 휠 보트(paddle wheel boat)가 우리나라에서는 명종 8년(1553) 9월에 진수되어 시험되었다. 그것은 안현(安玹)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대학연의 보유(大學衍義補遺)>의 윤선제(輪船制)를 연구하고 김순고(金舜皐)에게 설계와 건조를 맡겼던 것이다. 진수, 시험항해에 성공하자 안현은 그것을 조운(漕運)에 사용하도록 청하였다. 윤선은 그 후 순조(純祖) 때에도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인 전라우수사 이민수(李民秀)에 의하여 좌우 각 2륜(輪)이 있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장정(壯丁) 4명이 4륜을 밟도록 하였고 키를 돌리지 않고도 방향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고 조류와 관계없이 바다에서 운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윤선은 실용화되지 않았다.

조선의 전선과 거북선[편집]

朝鮮-戰船-龜船

조선의 전선의 발달은 해적선(海賊船)과의 적극적인 해전으로 그 전법(戰法)을 바꾼 때부터 시작되었다. 11세기 초에 고려가 만든 과선(戈船)은 여진(女眞) 해적과의 싸움 속에서 건조된 우수한 충파해전용(衝破海戰用) 전선이었고 그러한 충파전법(衝破戰法)은 왜구의 특기적 전술인 육박접전(肉迫接戰)을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것이었다. 왜구의 그러한 육박전법을 보다 효과적으로 방어하려면 또 하나의 대책인 '적이 아군의 전선에 뛰어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러한 두 가지 방어책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생기지 않을 수 없었던 전선의 형식은 개판(盖板)을 씌운 새로운 고려과선이었다. 그것이 바로 태종(太宗) 13년(1413) 2월에 진수된 거북선(龜船)이다. 거북선이 그러한 전술적 목적에 의하여 건조되었다는 사실은 태종 15년(1415) 7월에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의 병비(兵備)에 관한 상소문(上疏文)에 잘 표현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귀선(龜船)의 전법은, 많은 적선 안으로 돌격하여 충돌하여도 적(敵)이 해칠 수 없으니 참으로 결전(決戰)의 양책(良策)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영(令)을 내려 견고하고 교묘히 만들게 하여 전승지구(戰勝之具)로서 비치(備置)케 하소서"라고 하였다.

거북선은 이렇게 처음부터 적의 전선들 속에 돌격하는 돌격선으로 건조되었다. 그러나 거북선은 세종(世宗)대 이후 왜구의 격감으로 전략적으로 쓸모가 적어지고, 세조(世祖)대에 병조선(兵漕船)이 건조되면서 거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선조(宣祖)대에 일본의 침공설(侵攻說)이 일부에서 대두되면서, 선조 24년(1591)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로 임명된 이순신(李舜臣)은 전선(戰船)의 건조와 수리에 특히 힘쓰게 되었다. 마침 그의 부하장사에 역대(歷代)의 조선기술(造船技術)에 조예가 깊은 나대용(羅大用)이 있어 왜구의 전술에 조예가 깊었던 이순신과 협력하게 되었다. 이들이 왜군의 육박해전술(肉迫海戰術)을 능히 격파할 수 있는 전선은 태종대에 왜구 요격용(邀擊用)으로 건조되었던 거북선(龜船)이 가장 훌륭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리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추론(推論)이라고 생각된다.

거북선의 조선양식[편집]

龜船-造船樣式

아직까지 거북선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그것이 철갑선(鐵甲船)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특히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도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거북선을 그린 그림들은 드물지 않게 남아 있으나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수(卷首) 도설(圖說)에 있는 두 귀선도(龜船圖)이다. 이 두 그림을 자세히 보면 통제영귀선의 개판(盖板)은 저판(底板)과 꼭같이 목판(木板)을 이어붙인 것으로 그려져 있고 칼송곳은 그려져 있지 않고, 도설(圖說)에도 그러한 말은 없다. 그런데 전라좌수영 귀선의 개판은 거북무늬를 그렸고 도설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李舜臣) 등의 기록에는 칼송곳을 꽂고 십자세로(十字細路)를 내놓았다고 했으니, 위의 개판에 대한 설명은 거북선(龜船)의 체제와 더불어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통제영귀선은 태종대의 체제에 따라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수척의 거북선으로, 개판은 목판으로 덮고 그 밖에는 아무런 장치도 하지 않았고, 그후 이순신, 나대용은 그것을 개량하여 개판에 칼송곳을 꽂아서 적이 발조차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다시 개량되어(이순신 전사 후에 되었을지도 모른다) 화공(火攻)에 대비하여 개판은 성문(城門)을 철판(鐵板)으로 씌운 것같이 칼송곳 대신 철판을 씌우고 거북무늬의 6각형 모양으로 못을 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귀선의 개판에는 적이 올라올 때에 사살(射殺)하기 위하여 총구(銃口)가 있으나, 이순신·나대용의 거북선에는 칼송곳을 꽂았으므로 총구의 필요성이 없었음인지 총구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아무튼 우리가 현재까지의 연구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거북선은 중장갑(重裝甲), 다포장주의(多砲裝主義)의 근대 전함의 체제와 상통하는 견고한 전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연해 해전용 전선으로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한국과학기술사상 손꼽을 만한 발명의 하나였음에는 틀림 없다.

조선전기의 성곽 축조기술[편집]

朝鮮前期-城郭築造技術우리나라의 성곽은 고대로부터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평지성(平地城)은 중국의 영향으로 쌓기 시작하였다. 조선 초까지는 토축(土築)과 석축(石築)기술에 실질적인 발달이 없었고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이 혼합 축조되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보면 태조 5년(1396)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축조공사에 대한 기사가 보이는데, 높고 험한 곳에는 석성을 쌓고 평산(平山)에는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이 석성의 축조법은 자연석을 조잡하게 다듬어서 석회(石灰)를 쓰지 않고 그대로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틈새를 소석(小石)으로 메운 것으로 삼국시대 이래의 옛방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것은 대석(大石)을 땅 속에 박아서 기초를 만들고 약 15°내외의 경사로 석축(石築)하였다. 이러한 축조방법은 옛부터 민가의 돌담을 쌓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곽의 축조기술은 세종 때에 이르러 크게 향상되어 근대적 양식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세종 3년(1421)부터 시작된 도성의 수축공사(修築工事)에서 종래의 토성은 완전히 석성으로 개축되어 토성과 석성의 혼합양식에서 석성 일색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성벽 내외의 양측 통로를 넓이 15척(尺)으로 하여 순시(巡視)케 하였다는 것 등의 형식상의 발전뿐 아니라 공사에 사용된 물자(物資)에는 철(鐵)이 106,199근(斤), 석회(石灰)가 9,610석(石)이나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기술상의 향상을 엿보게 하는 증거의 하나이다. 이 성곽은 태조 때의 축조법과는 달리 모두 깨끗이 다듬은 50×20cm 내외의 화강석(花崗石)으로 잘 쌓아 올렸는데, 6m 높이의 아래 부분 약 1/3은 비교적 대석을 써서 안정을 꾀하였고, 석회를 사용하여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성곽의 경사는 태조의 경우와 같이 약 15°내외였고 두께는 기초가 약 4m, 위가 1.2m로, 자연석을 써서 내벽을 쌓았다.

풍수지리학[편집]

風水地理學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기틀이 잡히고 고려 태조의 정치이념 속에서 완전히 자라난 우리나라의 풍수지리학은 혼란했던 전란기를 거듭하는 동안 민간신앙과 연결되어 미신적인 것으로 변형되어 갔으며, 조선 태조 때의 여러 중신(重臣) 학자들에게도 고려가 망한 이유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이미 쇠진(衰盡)하였다는 풍수설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태조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의 지리학적 활동의 시작은 새 왕조의 도성(都城)을 결정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태조 3년(1394) 2월에는 <동국역대제현비록(東國歷代諸賢秘錄)> 일명 <지리비록촬요(地理秘錄撮要)>를 편찬하여 완성하였다. 이 책은 고려 서운관(書雲觀) 소장의 풍수지리서들과 이른바 <비록(秘錄)> 등을 조사연구한 것인데 새 토성의 후보지를 결정하기 위한 논의(論議)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음양지리학(陰陽地理學)을 위한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이 설치되었다. 이 전문기구는 고려의 산천신보도감(山川神補都監)이 실천적인 것인 데 반하여 이론적인 연구를 위하여 세워진 특수기구였다. 이렇게 절정에 달한 듯하던 풍수지리학의 발전은 태종(太宗)의 즉위와 더불어 그의 정치이념이 유교주의를 견지한 왕권확립과 과학정신에서 출발함으로써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