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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인도의 사상/인도의 근대사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인도의 근대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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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度-近代思想

인도에는 근대적 사고(思考)가 성립하지 않았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검토해 보면 역시 근대적 사고의 특징이 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라마난다의 카스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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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nanda Caste 否認

비시누교 제파(諸派)는 힌두 사회의 하층계급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고 있었으나, 그대로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마난다 (1400 ?∼1470 ?)는 그 라마누자파(派)의 수행자이었는데, 특히 신(神)에 대한 신애(信愛)에 의한 해탈에의 길을 강조하면서 그 제도를 부인하였다. 그는 (1) 비시누신의 숭배자에게는 카스트의 구별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단호히 주장하여 누구든지 교단(敎團)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2) 그와 또 그의 교단에서는 속어(俗語)를 사용하였다. (3) 그는 당시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던 목동(牧童) 크리슈나와 애인 라다에 대한 숭배 대신에 청순(淸純)하고 정절(貞節)을 지킨 라마 왕자와 시타비(妃)의 숭배를 도입하였다.

카비르의 종교 합리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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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ir-宗敎合理化論

카비르(1440∼1518)는 라마난다에 감화되어 라마 숭배를 계승하면서도 회교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일체의 개아(個我)는 동일한 근본 원인으로부터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카스트나 종족의 구별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현실의 사회적·세속적 생활은 긍정되어야 할 것이며, 생명은 신의 신성한 은총(恩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회교의 영향을 받아서 우상 숭배를 부정하였을 뿐 아니라 제 종교간의 구별도 소멸시켜 버렸다. 그에 의하면 신은 알리라고 불려지거나 라마라고 불려지거나 구애될 것 없다. 인도교나 회교의 의례(儀禮)나 외적 제약을 다같이 혐오하였다. <푸라나 성전(聖典)>이나 <코란>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며, 고행(苦行)도 목욕(沐浴)도 제사(祭祀)도 순례(巡禮)도 의의(意義)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람이 아집(我執)을 버린 곳에 신이 나타난다고 말하였다.

발라바파의 세속적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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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labha派-世俗的敎團

발라바(1479∼1531)는 순수일원론(純粹一元論)의 입장에 서서 <브라흐마 수트라>를 주해(註解)하였다. 그에 의하면 모든 개아(個我)는 브라만에서 나온 것이지만 양자는 본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원인으로서의 브라만도, 결과로서의 현상 세계도, 다함께 순수 청정한 것이며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현실 세계를 긍정하는 주장이 출현하여 힌두교(敎)가 세속화되었다. 발라바는 신의 명에 의하여 결혼하였는데 이 파의 승려(僧侶)는 결혼하였으며, 그 지위는 세습되었다. 이 교단의 신도는 특히 상인이 많다. 승려들은 순례하면서 멀리 떨어진 각지의 상업 단체 사이의 연락을 하여 상업상의 이익과 신앙의 공덕(功德)을 융합시키고 있다.

차이타냐의 열정적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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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tanya-熱情的宗敎

차이타냐(Chaitanya 본명은 비스봄브하라 미스라 Visvombhara Misra 1485∼1553)는 벵골 지방에서, 새로 크리슈나와 그의 애인 라다 숭배의 종교운동을 일으켰다. 열광, 흥분하여 찬탄가(讚嘆歌)를 부르며 다니는 <고창순행(高唱巡行)>의 행사를 창시하여 사랑(푸레만)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 철학적 입장은 불가사의(不可思議), 불일불이설(不一不異說)이라고 일컫는다. 최고신(最高神)과 개아(個我)와의 관계는 사려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마라타 지방의 신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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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tha 地方-信愛運動

마라타 지방에서는 비시누신에 대한 신애(信愛)를 강조하는 세속적 종교의 운동이 일어났다. 남데브(Namdev 14세기 전반)는 카스트의 구별을 부인했으므로, 파리아(불가촉천민, 不可觸賤民)까지도 그의 신도 속에 가담하였다. 그는 우상숭배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또 투카람(Tu Karam, 1608∼49)은 제왕의 초청에도 불응하고 조그만 점주(店主)로 세상을 마쳤지만, 세상을 버리고 은자(隱者)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신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토로한 그의 시는 마라타에서 널리 애송되고 있으며, 그는 마라타의 셰익스피어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 람다스(Ramdas, 1608∼81)는 영웅 시바지의 중요한 정치고문으로서 신비주의를 정치와 결합시켰다. 세인(世人)의 애호를 설파하며, 이상적인 제왕(帝王)은 잠시도 쉬지 않고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고전 민중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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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民衆化運動

이 시대의 주요한 움직임은 산스크리트로 쓰여진 인도의 고전을 민중이 사용하는 속어로 번역 증보하여 민중에게 정신적 지표가 될 수 있는 형태로 고친 것이다. 마라타 지방에서는 즈냐네스바라(Jnanesvara)가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해설(一萬頌으로 됨)을 저작하였는데, 그후 즐겨 읊어지고 있다. 툴시다스(Tulsidas, 1532∼1624)는 <라마야나>에 근본하여 동(東) 힌두어(語)로 <라마의 행위의 호수>(1585 ?)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시에서 라마신(神)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토로하여, 만인은 형제라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북방 인도인에 있어서는 거의 성서(聖書)와 같은 교화적 의의를 갖고 있다. 또 캄바르(Kambar)는 <라마야나>를 타밀어(語)로 번역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영웅 라마의 모습을 남방의 흑색(黑色) 드라비다인(人)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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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kh敎

시크교는 힌두교와 회교와의 양 요소를 결합한 개혁적 종교이다. 그 개조(開祖) 나나크(Nanak 1469∼1538)는 카비르의 사상을 받은 동시에 이슬람 신비주의(수피즘)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나나크는 유일신(唯一神)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며 우상숭배를 금지하였다. 또 고행(苦行)을 제지하고, 카스트를 부인하여 어떠한 카스트일지라도 함께 음식물을 먹을 것을 권하였다. 음식물에 관한 금기를 없애고, 술·마약·담배를 금하며 신도에게는 세속의 보통 직업에 종사하여 타인에게 봉사할 것을 권유하였고, 종교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특수한 습속으로서 털(毛)을 깎는 것을 금하며 터번을 감고, 팬티·회검(懷劍)·환(環)·빗을 몸에 지니도록 정하였다. 나나크를 초대로 하여 열 사람의 구루(師)가 순차로 교단(敎團)을 통리(統理)하였는데, 제6대 하르 고빈드(Har Gogind, 1606∼45 統理) 이후 회교 왕후와 항쟁하여 구루가 처형되는 등의 사건 때문에 교단을 군사단체로 편성하여 왕권과 항쟁하였는데, 1849년에 영국이 병합하였다. 현재 시크교도는 진취(進取)의 기상(氣象)이 풍부하며, 중노동을 감내하고, 기계 조작에 특히 빼어난 소질을 보이고 있다.

종교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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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改革運動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대에는 서양 사상의 자극을 받아 인도의 종교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는 운동이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 선구자는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 1772∼1833)이다. 그는 1828년에 <브라만 협회>를 설립했다. 그는 유일한 브라만만을 숭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카스트의 구별을 부인하였다. 또 과부 재혼을 인정하였으며, 영국 총독을 움직여서 과부 분사(寡婦焚死,사티)의 습속을 금지시켰다. 그 회원에는 지식인이 많았고, 또한 그리스도교화한 사람도 나타났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것은 아리야협회였다. 이것은 요가 수행자이었던 다야난다 사라스바티(Dayananda Sarasvati, 1824∼1883)가 1875년에 창립한 것이다. 그는 당시의 힌두교의 타락을 통격(通擊)함과 동시에 '베다로 돌아가라'고 절규하였다. 우상숭배를 배척하고 신의 화신(化身)의 관념을 부정하였으며, 영장순례(靈場巡禮)나 조상숭배를 쓸데없는 미신이라 비난하는 한편 부인의 지위의 향상에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운동은 인도인의 국민 감정에 호소하는 바가 많아 1921년에는 46만 명의 회원을 가졌고, 많은 정치가와 유력한 사람들이 가입하였다. 교육과 사회사업 면에서도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현대 인도의 가장 큰 교단으로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라마크리슈나 미션이다.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6∼1886)는 벵골의 바라문가(家)에서 출생하여 칼리 여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신비적 영감(靈感)이 대단히 풍부함과 동시에 근대의 합리적인 사고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여러 가지 종교의 실천 생활을 체험하여 신과의 합일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종교는 다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다만 동일한 구극진리(究極眞理)이지만 상이한 국면을 보이고 있는 데 불과하다. 교리나 교의(敎義)에 집착하는 것은 굶주린 사람에게 돌을 주는 것과 같다. 사람들에게는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라마크리슈나는 학문이 깊지 못하고 그 감화도 국지적인데 불과하였으나 이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한 것은 비베카난다(Vivek nanda 1863∼1902)의 노력에 힘입었다. 그는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종교회의'에 출석하여 모든 종교는 어느것이나 절대의 진리를 밝히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구미제국(諸國)에서도 포교하였고 인도에 귀환,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을 사회활동 위에 실현하기 위하여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설립하였다. "인간은 신의 모양이기 때문에 인간에 봉사하는 활동은 신에 대한 숭배 자체인 것이다"고 하는 라마크리슈나의 사상을 전개하면서 봉사행위가 종교적 수행(修行)이라고 풀이하였다. 교육·출판·요양·후생·구호의 모든 사업에 있어서 탁월한 활동을 보였으며, 그 지부(支部)는 세계 여러 나라에 있다. 라마크리슈나 밋션은 이 밖에 같은 종류의 교단의 모범형(型)이 되어 있다. 라마나(1879∼1951)도 남인도에 수도원을 조직하여 그 감화(感化)를 크게 준 사람이었다. 어떠한 종교도 받아들이려고 하는 점에서는 같은 경향을 갖는 신지협회(神智協會)는 불라바키 부인(夫人)과 올코트 대령(大領)에 의하여 인도에 도입되었는데, 인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문명에 대한 자각을 되찾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근년에는 불교 부흥운동도 일어나고 있는데, 실론인(人)인 담마팔라가 1891년에 창립한 대보리회(大菩提會)가 중심이 되고 있으며 카스트 폐지 운동과 결부되고 있다. 신도의 수효는 적으나, 일반 인도인은 불교(佛敎)가 힌두교의 한 분파(分派)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도 정부가 불교의 큰 행사를 공식으로 후원하고 있다.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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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handas Karamchand Gandi (1869∼1948)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존앙(尊仰)된다. 1914년 이래 국민회의파의 지도자로서 흉도의 탄환에 쓰러질 때까지 인도 민족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간디는 세상의 다른 혁명가와 동일 유형(類型)의 사람이 아니었다. 수차에 걸친 투옥에 굴하지 않고 인도의 독립과 불가촉천민(佛家觸賤民)의 폐지에 평생을 바쳤다. 그가 주창한 운동은 '진리의 파지(把特)'라고 하는데 폭력을 부정함으로써 '비폭력'의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평화적인 수단을 수행하면서 영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영국 제품의 불매운동(不買運動)을 실행하는 동시에 농촌에서의 유휴노동력을 이용하여 가내공업을 일으켜 민족자본의 축적을 꾀하였다. 종교를 정치에 구현한 점에 그의 사상사적인 독자적 의의가 인정된다. 그는 인도인이 신봉하는 모든 종교를 존중하고 있었다.

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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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bindranath Tagore(1861∼1941)

인도의 시인·사상가. 그에 의하면 신은 창조 작용에 있어서 자기를 현현(顯現)하였다. 현상(現象) 세계의 모순과 혼돈의 속을 통찰한다면 신의 창조활동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찾아 볼 수 있다. 절대자는 비인격적인 브라만이더라도, 우리들은 그것을 최고의 인격으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한정한 것을 한정시키는 것은 인격이다. 그는 샨티니케탄에 독자적인 학풍(學風)이 있는 대학을 창시하였다.

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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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waharlal Nehru(1889∼1964)

인도의 독립 및 근대국가에의 형성 발전에 가장 공적이 컸던 지도자. 독립 후 최초의 수상. 그는 간디의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인도의 전통적인 관용과 인내의 정신에 입각하여 독립국가로서의 발전에 노력하였으며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세속적 생활 속에서 건설적 활동을 중하게 여기고,특정한 종교를 표방하는 일은 없었다. 국제적으로는 평화의 이상을 높이 게양하여, 중립비동맹(中立非同盟)의 입장을 견지하는 등 세계의 지도자로서도 무게가 있었다.

인도의 현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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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哲學者

인도의 정신적 전통 을 현대에 살린다는 점에서 가장 지도적인 철인은 오로빈도 교슈(Aurobindo Ghosh 1872∼1950)이었다. 반영 운동(反英運動)의 지사로서 활동하다가 투옥된 일도 있으나, 뒤에는 풍디세리에 은거(隱居)하여 수도원을 건설하였고 많은 저서를 냈다. 그는 행위적 실천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요가의 목적은 절대자의 힘을 모아서 그것을 지상에 신의 왕국 건설에 사용하는 일이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는 특별한 사람들의 양성을 목표로 일하였다. 서양의 철학사상이 이입되자 그것에 자극받아 인도 철학을 반성하는 경향이 나오게 되었다. 인도의 철학사상을 철학자 일반의 관심하에 가져오게 했다는 점에서 가장 공적이 큰 것은 라다크리슈난(Savepalli Radhakrishnan, 1888∼1975)이다. 그는 서양 철학과의 대비에 있어서 인도 철학을 개명(開明)하는 일에 노력하여 과거의 문화유산을 계승하면서 '미래의 세대(世代)로 하여금 세계시민답게 훈련하는'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바가반 다스(Bhagavan Das)는 실재(實在)의 형식은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표현으로서 가장 잘 표시된다고 하면서, 나와 이것과의 긴장 관계를 가능력(샹티)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