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중국의 사상/중국의 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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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상사는 그 주요한 조류의 변천에 따라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 단계의 시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① 백가쟁명시기(百家爭鳴時期, 기원전 550∼전110년경) 8백년의 주대(周代) 봉건국가가 무너지고 진시황(秦始皇)·한무제(漢武帝)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 체제를 확립하는 시기이다. 이 기간에 소위 도가자류(道家者流)·유가자류(儒家者流)·음양가자류(陰陽家者流)·묵가자류(墨家者流)·법가자류(法家者流)·명가자류(名家者流)·종횡가자 류(縱橫家者流)·농가자류(農家者流)·병가자류(兵家者流)·소설가자류(小說家者流)·잡가자류(雜家者流) 등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당시 군주들의 부국강병(富國强兵), 회맹정벌(會盟征伐)의 정치적 요구에 영합하여 각자 자기의 학설·주장을 내세우고 남의 학설·주장을 비판·공격하여 자신의 성가를 높이거나 혹은 자기의 특출한 장기·기술을 발휘하여 등용됨으로써 부귀와 공명을 얻으려 한 것이 이른바 '백가쟁명'이 지니는 의의이다. 그러나 이 11개 유파(流派)의 구별은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의 저자가 그 당시 중앙정부의 서고에 수장(收藏)되었던 서적들을 분류하기 위해서 지은 구별이요, 반드시 엄격한 의미의 사상사적 분류라고 볼 수는 없다. 사상사적 입장에서 보면 종횡가·병가·농가·소설가·잡가 등은 모두 사상사적인 학파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제외되어야 한다. 나머지 유·도·묵·음양·명·법(儒·道·墨·陰陽·名·法) 등 6가(六家)만이 서로 독자적 사상학설을 가지고 대립 항쟁하였던 학파들이다. 이 여섯 학파의 발생은 중국민족의 독창적 지혜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중국철학의 터전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공자·맹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가와, 노자·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가와, 묵적(墨翟)을 중심으로 하는 묵가는 서로 현격히 다른 특색을 가진다. 도가는 '허무자연(虛無自然)'의 천도(天道)사상과 '유약겸하·소요자적(柔弱謙下·逍遙自適)'의 인생태도로써, 유가는 '인의 도덕(仁義道德)'의 인도주의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합리적 인생태도로써, 묵가는 천지·명귀(天地·明鬼)의 종교관념과 겸애비공(兼愛非功)의 반전사상(反戰思想)으로써 각각 그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② 문헌경학시기(文獻經學時期, 기원전 약 110∼ 후 220년)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로부터 후한말에 걸치는 시기이다. 백가쟁명하던 선진의 제자사상이 한무제(漢武帝) 대(代)에 이르러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에 따라 공씨(孔氏)를 추존하고 백가(百家)를 출억(黜抑)함으로부터 유가만이 독존(獨尊)의 지위를 차지하여 유'학'(學)은 유'교'(敎)로서 국시가 되어 모든 문물·제도·윤리·도덕이 유가의 경전(經典)인 시(詩)·서(書)·역(易)·예(禮)·악(樂)·춘추(春秋)와 논어(論語)에 근거하여 창작되었다. 국가에서는 교화를 목적으로 경학박사제도를 두고 유교경전을 전문적으로 연구·교수하였다. 교수용으로 사용할 텍스트가 진시황 때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정책 때문에 산실·착간된 것이 많아서 이 유학박사들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은 경전(經典)의 자구(字句) 교정(校正), 해석과 동시에 장절(章節)의 편차(編次)·보일(補逸), 내용의 교감(校勘)·정리 등 작업이었다. 이리하여 양한(兩漢)에 걸쳐 4백년 간에 학자들은 그 전문분야에 있어서 금문학파(今文學派)·고문학파의 논쟁까지 생겨났지만 이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란 주로 유교경전에 대한 문헌해석 작업에 불과한 것이요, 경전의 사상내용에 대해서는 새로운 발전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문헌경학시기(文獻經學時期)라고 부르기로 한다. ③ 노장학(현학) 주조시기(老莊學(衒學)主潮時期, 서기 220∼404년) 3국(三國)·위(魏)·진(晉)을 거쳐 동진(東晋) 말엽에 이르는 약 2백년 간의 시기이다. 한대의 훈고·장구(章句)의 경학과, 참위(讖緯)·상수(象數)·재이(災異)의 미신에 대한 반동으로서 하안(何晏)·왕필(王弼)·향수(向秀)·곽상(郭象) 등의 노장사상에 근거한 경전해석이 나오고 <도덕경(道德經)>과 장자에 대한 새로운 주석이 나오면서 노자와 장자는 다시 시대의 각광을 받게 되었고, 인생관·세계관은 유학적인 것으로부터 노장학적인 것으로 바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허무·자연, 염정·무위, 소요자적(逍遙自適)과 함께 현실에 대한 부정·도피의 인생태도가 사상적 주류를 이루어 드디어 예속(禮俗)·명교(名敎)를 타파하는 죽림칠현(竹林七賢)과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悠然見南山)'하는 도연명(陶淵明) 같은 인물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④ 불교주류시기(佛敎主流時期, 서기 405∼819년) 동진(東晋) 말엽부터 남북조·수대를 거쳐 당말엽까지 이르는 약 4백년에 걸치는 시기이다. 마침 서기 405년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진왕 요흥(秦王姚興)의 국사가 되던 해요, 819년은 당헌종(唐憲宗)이 불골(佛骨)을 영입하는 것을 한유(韓愈)가 상소하여 불교배척론을 처음 주장한 해이므로 이것을 불교 성쇠(盛衰)의 기간으로 잡아보았다. 불교가 중국에 도입되기는 훨씬 오래 전으로 후한(後漢) 애제(哀帝)대라고 보는 설까지 있다. 그러므로 구마라습 이전에도 서역승들이 와서 전교사업(傳敎事業)·역경사업을 일으킨 일이 있어서 동진(東晋)의 지둔(支遁), 전진(前秦)의 도안(道安)·혜원(慧遠) 등이 이미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비교하여 노장의 술어로 불교사상을 해석한 일이 있고, 축법호(竺法護)는 밀교경전(密敎經典)을 번역한 일도 있기는 하나 나습(羅什)이 전진(前秦)의 서울 장안(長安)에서 8백여 고승들을 데리고 불경번역을 대규모로 일으키면서부터 불교의 전파는 극성기(極盛期)에 들어섰다. 그후 남북조·수·당에 걸쳐 불교는 계속 발전하여 드디어 13개 종파의 성립을 보게 되었으니 즉 6조시대(六朝時代)의 성실(成實)·삼론(三論)·열반(涅槃)·지론(地論)·정토(淨土)·선(禪)·섭론(攝論)·구사(俱舍)·천태(天台)의 9종(九宗)과 당대에 새로 창립된 율종(律宗)·법상종(法相宗)·화엄종(華嚴宗)·진언종(眞言宗)의 4종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지론은 화엄종에, 섭론은 법상종에 병입(倂入)되었으므로 실재로는 11개 종파이다. 단 불교 중에서도 가장 중국화된 불교인 선종만은 특별한 발달을 보여 오조(五祖) 이하로는 혜능(慧能)의 남종(南宗)과 신수(神秀)의 북종(北宗)으로 분파되더니 남종은 다시 임제(臨濟)·운문(雲門)·조동(曹洞)·위앙·법안(法眼)의 5종(五宗)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선종은 이론을 반대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이므로 '불립문자(不立文字)·직지본심(直指本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그 특색으로 삼는다. ⑤ 이학(신유학)시기(理學(新儒學)時期, 서기 820∼1644년) 이것은 당말(唐末)로부터 5대·북송(北宋)·남송(南宋)·원(元)을 거쳐 명말(明末)까지 이르는 약 8백년의 기간이다. 이때에는 위진(魏晋)·남북조·수(隋)·당(唐) 약 7백년 동안 노·불(老·佛)의 세력하에서 침체·혼미·부진상태에 빠졌던 유학사상이 그동안 노·불의 사상이론을 흡수·소화하여 새로운 유학의 이론체계를 수립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노·불에 대한 반격으로 전향하여 마침내 노장·불교의 세력을 압도하고 유교의 정통적 지위를 도로 찾아 유교사상의 새로운 발전을 이룩한 것이므로 이를 신유학 혹은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시대라고 철학사에서는 부른다. 그러나 이학(理學)도 그 발전에 따라서 분파가 생겼으니 성즉리(性卽理), 거경궁리(居經窮理)설을 주장하는 정주학파(程朱學派)와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설을 주장하는 육왕학파(陸王學派)가 그것이다. 이학(理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주염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소강절(昭康節), 주회암(朱晦庵), 육상산(陸象山), 왕양명(王陽明)이요, 이학의 특색으로서는 성선설(性善說)에 근거한 인간정신의 내적 수련으로서 내세우는 '알인욕·존천리(存天理)'의 실천이다. ⑥ 실학·고증학시기(實學考證學時期, 서기 1645∼1911년) 명말(明末)에서 청말(淸末)에 이르는 기간이다. 만주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명말유일(明末遺逸)들은 학문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면서 망국의 죄를 이학의 공리·공론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짙었다. 이리하여 실사구시를 모토로 내세우는 실학파가 생기게 되었다. 실학파는 송명성리학(宋明性理學)의 주정적(主靜的) 심성존양(心性存養)의 공부를 노불의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공격하고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행동을 강조하는 동시에 경전 해석에 있어서도 송유(宋儒)들의 의리의 사변에만 치중하는 해석을 부정하고 사실의 증거를 찾아내는 고증적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또 서양의 과학사상을 받아들이기에 힘썼으며, 종래의 경서(經書)·자서(子書)의 차별관념을 타파하고 학문정신에 자유를 터놓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염약거, 고염무(顧炎武), 안원(顔元), 대동원(戴東原), 완원(阮元), 손이양, 왕염손(王念孫), 왕선겸(王先謙), 유월 등을 흔히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