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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사회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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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사회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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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은 불교를 배척하고 주자학(朱子學)을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채용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집권층은 인간사회의 모든 질서를 상하관계로 체계화하여 신분(身分)·지위(地位)와 부귀(富貴)·빈천(貧賤)의 고정화를 정당시하고, 고대 유교에서 볼 수 있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실질적으로 부정하며 실정적(實定的) 질서에 대한 변혁이 아니라 그 영원성을 보증하며 인륜(人倫)을 자연적·우주적 원리 위에 구성해서 이론화하는 주자의 사상을 그들 지배층의 지배자적 이데올로기로서 채용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주자학은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이며 중국 민족만이 인간이며 기타 민족은 이적(夷狄)이라는 중화(中華)사상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만큼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채용한 조선왕조 지배층은 당연히 모화(慕華)사상으로 무장하여 그들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같은 관계로 유교의 이른바 종법제도(宗法制度)가 특히 강조되어 가부장적 질서가 보다 중요시되었던 것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의 농민은 지주(地主)·전호(佃戶)·자작(自作)·빈민(貧民)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양반층은 토지소유에 있어서 상민(常民)이나 천민(노비)들보다도 우월한 처지에 있었으므로 주자학적인 지배의 질서는 양반층의 이해를 구체적으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양반층은 또한 그들의 독점적인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서 주자학적인 원칙에 입각하여 그들 내부에서조차도 태종 때부터는 서얼차대(庶孼差待)를 하였고 또 조선초부터 재가자손(再嫁子孫)에 대해서 차대를 강화하여 타 계층과의 구별을 고집하는 입장을 철저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신분적인 구별과 아울러 이들로부터의 군역 파악을 위하여 호패법(號牌法-태종·세종 때)을 강화하는 한편, 봉작상속(封爵相續)이나 제주(祭主)도 종법제도에 입각, 적장자를 우대하는 원칙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관행으로는 재산의 상속에 있어서도 자녀들이 함께 균등히 분배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결혼관계에 있어서도 모계적인 유풍이 많이 남아 있어서 여성우위의 경향이 농후하였던 것이다. 또한 제사에 있어서도 적장자 단독으로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주자학적인 윤리관에서 볼 때에는 크게 규범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관행을 일조에 뜯어 고칠 수는 없는 일이었으며 지배층 내부에서조차도 주자학적인 규범이 제대로 시행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주자학적인 지배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지배계급 내부에 있어서조차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일반 서민의 경우에 있어서는 주자학적인 사상체계보다는 전통적인 사상체계 즉 무격(巫覡)이나 불교가 보다 일반적인 현상으로 존중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세인(世人)들이 모두 사재(私財)를 들여 승사(僧舍)를 돕고 가산(家産)을 기울여 불반(佛飯)을 공양하는데 유식자(有識者:儒敎)도 또한 면하지 못하고 있는 터이다." (<雲院雜錄>). 일반인들은 주로 불교의 평등사상에서 그들의 현실적인 핍박과 고통에 대한 위안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며 특히 교종(敎宗)의 교설적인 귀족적 분위기에서 보다도 선종(禪宗)의 불립문자, 견성오도(不立文字 見性悟道)의 평민적이며 자유로운 분위기에 친근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지배계층 내부에서조차도 주자학적인 사상체계가 표피를 이루고 전통적인 사상체계가 이 표피 속에 포함되어 존재하는 사상의 이중구조를 이루는 경향으로 발전치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김시습(金時習)에게서 그 특징적인 면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는 유교적인 인정(仁政)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민생을 중시하고 인민을 가렴주구로부터 구제하고 생산활동을 장려하여 주어진 삶을 잘 누리도록 하려는 양심적인 민본애민(民本愛民)의 입장에 서다 보니 당시의 집권자들과는 자연히 그 사상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당시 일반 서민층에게서 지지를 받는 불교(佛敎)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운원잡록(雲院雜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유생층들도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을 표방하나 이면으로는 불교에 잡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불교가 일반 서민층에게서 뿌리깊은 기반을 가지고 있고 지배계층 내부에서조차도 이에 동조하는 경향이 조선 전기의 사회현실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주자학의 하부침투를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였다. 중앙의 상균관·4학(四學) 및 지방의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주자학의 보급에 힘쓰는 한편 과거제도로 주자학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지방관아에서 시행되는 것이었으므로 지방의 중소지주층의 자제가 다수 응시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생원시는 경학을 중심으로, 진사시는 문학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특히 경학을 중시하는 생원시의 비중이 높았으므로 주자학의 보급이 진척될 수가 있었다. 봉건 정부에서는 또한 <주자대전(朱子大典)> <성리대전(性理大典)> <사서구결(四書口訣)>(세조 때) <역학계몽(易學啓蒙)> <근사록(近思錄)>

등의 주자학의 핵심되는 경전을 편찬 보급하였으며 이의 반포가 널리 행하여졌던 만큼 그 영향은 과유(科儒)들에게는 결정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윤리도덕 및 의례에 관계되는 책들도 널리 반포되었으니<국조오례의(國朝五禮義)>(세종 때) <삼강행실(三綱行實)> <효행록(孝行錄)> <주자가례(朱子家禮)>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은 그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중에서도 지방사회에서 유가도덕의 5륜(五輪)을 실천하는 <향음주례>의 영향은 가장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이같은 집중적인 봉건정부의 시책으로 중종(16세기) 이후로는 지방사회에 서원(書院)과 서당(書堂)이 설립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은 주자학적인 유가의 도덕규범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확고히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경향은 한편으로 조선왕조의 해체라는 현상과도 궤도를 같이 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태종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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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思想

조선 제3대왕 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은 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방면에 특이한 개혁 몇 가지를 단행하였으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왕자(王子)의 난(亂)을 두 번이나 겪고 왕이 된 그는 왕족의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병권(兵權)을 일원화하였다. (2) 불교 탄압을 강화하여 242개의 사찰 이외의 것은 모두 폐쇄하고 이에 소속된 토지 및 노비를 몰수하니 사원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3) 비기, 도참 등을 금하고, 유교를 장려하였다. (4) 호패법(號牌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인력(人力)을 확보하고, 호포(戶布)를 폐지,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저화(楮貨) 발행으로 경제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5) 적서(嫡庶)의 문제로 시련을 겪었던 그는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을 제정하여 서얼차별과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확정짓고, 재가부녀(再嫁婦女)의 자손을 관직에 임용치 못하게 함으로써 한국의 가족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6) 궐문에 북을 달아 원한 있는 자로 하여금 호소케 하는 신문고(申聞鼓)제도를 실시하였다.

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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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約 조선시대에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의 덕화(德化) 및 상호협조 등을 위하여 만든 규약. 이것은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주자가 정비한 것으로 여말 정주학자들이

우리나라에 소개했다. 태조 7년(1398) 왕이 친히 제정한 향헌(鄕憲) 41조가 그의 고향 풍패(豊沛)에서 실시된 것이 처음이다. 그후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가 <여씨향약>을 보급시켰고, 이황(李滉)은 이를 우리나라 풍습과 민정에 맞도록 전면개편한 <예안향약(禮安鄕約)>을 만들었으며, 이이(李珥)가 선조 4년(1571)에 <서원향향(西原鄕約)>, 6년 후에 <해주향약(海州鄕約)> <해주1향약속(海州一鄕約束)>을 제정 실시하니 전국적으로 보급 실시되었다. 이 향약의 이념은 ① 덕업상권(德業相勸) ② 과실상규(過失相規) ③ 예속상교(禮俗相交) ④ 환난상휼(患難相恤)에 있어 유교적 도덕을 선양하고, 지방 자치 정신을 북돋우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