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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도참사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통일신라시대의 도참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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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생활의 필요성과 종족보전의 자위상(自衛上) 공포·호기(好奇)·애호·투쟁 등의 본능이 있다. 이러한 본능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원시인에 있어서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그들에게 경이적이 아닌 것이 없고 또 병사·질고 등에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또 원시인의 신비에 대한 감각도 현대인보다는 훨씬 민감하여 희노애락의 표현이 강렬하였을 것이다. 최초엔 애니미즘(Animism)의 사상이 없는 민족이 없고 따라서 신에도 여러 종류의 무수한 신의 개념이 따르게 되며, 선신(善神)은 길복(吉福)을 주고 악신(惡神)은 흉화(凶禍)를 내리는 것으로

믿었다. 이로 인해 주술(呪術)·무축(巫祝)·마술·점(占)·의약 등이 발생하고 예술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터부(Taboo), 오라클(Oracle)이나 토큰(Token)이니 하는 형식도 생성하였을 것이다. 특히 흥미를 느끼는 역사적 사실은 상고시대에는 종족의 정치를 맡은 족장 혹은 추장이 영능자(靈能者)의 칭호를 받아 신에게 봉공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겸한 점에서 신의 계시를 대언할 뿐 아니라 민중을 대신하여 신에게 기원하고 또는 악령을 구축하는 일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도참사상(圖讖思想)은 이런 데서 기원된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이것의 신봉과 조작(造作) 내지 유행은 동양 특히 중국 및 한국 역사상에 한층 많이 발견되는 사상이다. 더욱이 그 정치·사회사의 이면(裏面)에 있어 때때로 밀접한 교섭을 가졌던 것이다. 종래 이런 유의 사상은 종종 신비적 언설(言說)에 의하여 인심을 충동 혹은 지배하여 여러 가지의 공능(功能)을 행사한 만치 실제 생활에 끼친 영향은 실로 적지 않았다. 한 왕조가 일어나고 망하는 소위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큰 변동기에는 물론이요, 기타 시국이 불안한 때도 이런 종류의 사상은 반드시 머리를 들고 활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운동(개혁), 민중운동(갱생)의 지도자 자신이 이를 이용 혹은 조작하여 자기 편에 유리하도록 민중을 기만하고 구사했다.

민중은 이에 맹신·맹종하여 얼마나 많은 성패득실의 자취를 역사상 남겨 놓았는지 모르겠다. 이 소론의 목적은 도참사상이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어떠한 여건하에 어떤 내용을 가지고 발현되었으며 또 그것이 실제 어떤 작용을 나타냈던가를 고찰함에 있다. 그런데 우리 동방에서 유행하던 도참은 천문·지리·신불(神佛)·도교(道敎)·역운(曆運)의 음양5행사상 등과 결합하여 그것을 소재(素材)로 함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풍수지리와의 관련성이 더 깊었다.

도참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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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讖-正義

그러면 도참이란 무엇인가. 그 개념부터 먼저 규명할 필요가 있다. 도참은 즉 도(圖)와 참(讖)과의 연층으로서 간단하게 도(圖)라고도 하고 참(讖)이라고도 한다. '도'는 본래 지도(map)라는 뜻인데 거기서 사인(sign)·시그널(signal)·심볼(symbol)·토큰(token)·표징의 뜻으로 변한 것이고, '참(讖)'은 言+籤인 데 籤의 뜻은 가늘다는 뜻(부추, 정구지풀)으로서, 여기에 '言'자를 가하면 미어(微語) 또는 은어(隱語)라는 뜻 즉 은미어, 신비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도참은 그 내용·형식의 여하를 불문하고 장래에 일어날 사실 특히 인간생활의 길흉·화복이라든가 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범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진 도참의 중요 조건은 무엇보다도 장래 일어날 사실에 대한 예고, 암시에 있으므로 그 내용형식이라든가 또 현출의 신비성과 같은 것은 제2차적이라 볼 수 있다. 더욱이 중국에서 기원한 도참은 중국문자에 의해서 표현된 은어가 많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해석하는 데 곤란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도참서를 흔히 비기(秘記), 밀기(密記) 혹은 비결(秘訣)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류의 중국식 도참이 언제 기원해서 우리나라에 어느 때에 전래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중국 도참의 기원은 역시 원시시대에 구할 수 있겠지만, 중국문자가 발명된 이후에 그것이 발달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중국 고대전설에 황하수에서 도(圖)가,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오고, 또 신룡(神龍)이 나오고 봉조(鳳鳥)가 이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 중에 하도(河圖)는 복희씨 시대에, 낙서(洛書)는 하우씨(夏禹氏) 시대에 나왔다고 하나 그것은 믿지 못할 말이고 오랜 전설에 그러한 유의 도참사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논어>에 공자(孔子)가 하수(河水)에서 도(圖)가 나오지 않고 봉조가 이르지 않으니 이제는 할 수 없구나 한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성왕(聖王)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탄식한 것이라 보겠다.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도참은 정치·사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중국 역대의 역성혁명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널리 유포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왕망(王莽)의 찬위, 광무(光武)의 중흥을 비롯하여 그후 황건(黃巾)·백련(白蓮) 등 비밀결사 운동은 다 이런 사상으로 채색되었다. 이런 중국식의 도참이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유행되기 시작했는가 하는 기원은 자세치 않으나 삼국시대 말경에 이미 고구려의 비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백제가 망할 무렵에 구배(龜背)에 '백재동월륜(百濟同月輪, 滿月), 신라여월신(新羅如月新, 新月)'이라는 글귀가 나타났다는 기재가 있다―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흥한다는 뜻임― 이 내용은 마치 신라말의 문호 최치원이 고려의 흥기(興起)를 예언하여 '곡령청송(鵠嶺靑松, 高麗興)>이요 계림황엽(鷄林黃葉, 新羅亡)'이라고 하였다 함과 같거니와 이런 전설은 실제에 있었다고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 도참사상이 유행하였던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도참사상과 밀접한 풍수(風水)지리 사상이 통일신라 중기에 중국에서 도입, 유행한 것은 실제 그 시대 왕릉의 지세로 보아 또는 문헌으로 보아 확실하거니와 특히 신라말에 있어서는 도선(道詵)과 같은 유명한 지리도참가까지 나왔다. 도선이 즉 도참 형식에 의하여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 지리순역설(地理順逆說) 내지 사탑(寺塔) 비보설(裨補說)을 말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도선은 최치원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속성은 김(金)씨로 말년에 백계산(광양) 옥룡사에 거주하여 72세로 입적했는데, 그의 도참설은 즉 지리에는 왕처(旺處)·순처(順處)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처(衰處)·역처(逆處)를 인공적으로 혹은 불력(佛力-사탑)으로 비보·진압할 것을 주장하여 수 종의 도참서(書)를 남겼다. 그 참서는 그의 사후 세상에 유전하여 인심을 현혹케 한 점이 많았으니 고려 태조와 같은 영걸의 군주도 시대의 산아(産兒)인 만큼 그 설을 신봉하여 자손을 경계하는 10훈요(十訓要) 중에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가려서 사원을 세워야 하며, 사탑을 남조(濫造)하여 지덕(地德)을 손상시키지 말라는 조항을 남겼다. 비보사탑설은 이같이 사원의 남조를 제한케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후세에 이르러는 도리어 이를 악이용하여 사찰 남조의 풍을 그대로 진전케 하고 말았다. 아래에서도 말할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도선의 이름을 붙인 여러 종류의 비기(秘記)가 유행하였는데 이는 도선 자신의 소저(所著)라기보다 후세인의 가탁(假託)으로 보아야 하겠다.

고구려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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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秘記

고구려의 망국(亡國)을 예언한 비기. 668년(고구려 보장왕 27년) 당의 고종(高宗)이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켜 요동으로 진격시키고 있을 때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고종에게 이번 싸움에는 반드시 이겨 고구려를 멸망시키리라고 내세운 근거 중의 하나로 고구려비기를 들었으니 그 내용은 "900년이 안 되어 80대장(大將)이 이(고구려)를 멸망시킨다"는 것이었다. 가언충은 이 비기를 풀기를 그해가 고구려가 한(漢)으로부터 완전 독립한지 900년 되는 해이고, 당군 대총관(大總管)인 이세적(李世勣)의 나이가 그해 80세이니 틀림없다고 하였다.

탈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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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解王

재위 57∼80, 성은 석(昔)씨, 일명 토해(吐解). 신라 제4대왕. 신라 초기의 전설적인 군왕으로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지리에 밝았다고 한다. 즉 양산(楊山)밑 호공(瓠公)의 집터가 길지(吉地)임을 알고 거짓꾀를 꾸며 탈취하니 이곳이 뒤에 월성(月城)으로 되었다 한다. 중국의 풍수지리설을 알았는지는 불명이나 우리나라 지상술(地相術)에 나오는 첫 인물이다.

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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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官

하늘의 변이(變異)로써 인간의 길흉을 점치던 관원. 원시종교가 유행하던 고대에는 주로 점성술(占星術)을 맡아 우대를 받았으나 고려 이후에는 기술직(技術職)으로 천대를 받았다. 고구려에서는 일자(日者)라고 하였고 백제와 신라에서는 일관이라 불렀으며 특히 백제는 일관부(日官府)라는 관청까지 두었다고 한다. 이것도 처음에는 우리나라 토착종교에 기초를 둔 것이었지만 중국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중국의 음양도참설 또는 풍수지리설을 활용하는 전문직으로 되었을 것이다.

백제망국 참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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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亡國讖言

백제 의자왕(義慈王) 20년에 왕도 부여성(扶餘城)에서 있었던 망국을 예언한 참문(讖文). 백제가 망한 해에 망국의 흉조를 여러번 나타났는데 그중에도 6월에는 한 귀신이 궁중으로 들어와서 '백제는 망한다'고 크게 부르짖고는 땅속으로 들어가 왕이 땅을 파보게 하니 깊이 석 자쯤 들어가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그 등에 글이 써 있되 "백제는 둥근달 같고 신라는 초생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고 하여 왕이 무당에게 그 뜻을 물으니 그는 "둥근달은 곧 이지러질 것이요, 초생달은 점점 차게 된다"고 대답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거꾸로 풀어서 "둥근달은 왕성하고 초생달은 쇠미하니 이는 백제가 성하고 신라가 망한다"는 뜻이라고 하여 왕을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망국을 예언한 최초의 참언으로 이미 당시에 거북이 등의 갑골문을 해독하는 점복술이 있었고, 이를 해석하는 전문가가 있었으며, 그 해석이 민심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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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巖

8세기의 인물. 신라의 점복가이면서 병술가(兵術家). 당나라에 유학하여 음양학(陰陽學)을 연구하고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저술하여 점복술과 은형술(隱形術)에 신경지를 열었다. 귀국후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를 거쳐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패강두상(浿江頭上)이 되어 농민에게 6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쳤다. 혜공왕 15년(779)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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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詵 (827∼898)

신라 말의 불승. 성은 김(金), 영암(靈巖) 출신. 우리나라 음양도참사상의 대표자로 알려진 인물. 일설에 당나라에서 무열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을 배워와서 효공왕으로부터 요공국사(了空國師)의 시호를 받았고, 굴속과 움막에서 수도생활로 일관하다가 희양(曦陽)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서 입적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발달한 음양도참사상이나 풍수지리설을 토대로 하여 <도선비기(道詵秘記)>를 지었으며 산천(山川)·도성(都城)·왕조(王朝)의 운수를 예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후세 음양가의 위설(僞說)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는 비기(秘記)로 고려조의 건국을 예언한 공적으로 고려 현종, 인종 대에 왕사, 국사로 추증되었고, 조선조에까지 국민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라망국 참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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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亡國讖言

신라 말년에 신라의 망국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각종 참언. 하나는 최치원(崔致遠)의 문장이라고 전하는 "계림(鷄林-신라의 별칭)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고려의 도읍지 송악을 가리킴)은 청송(靑松)이다"라는 문구로, 고려개국에 참가한 최치원 문인들의 위작(僞作)이 아닌가 한다. 다른 하나는 신라 망국과 궁예(弓裔)의 비운, 왕건의 행운을 예언한 왕창근경문(王昌瑾鏡文)인 바 궁예의 신하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이 해독하였으나 궁예를 두려워하여 적당히 꾸며 대답하였다고 한다.

왕창근 경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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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昌瑾鏡文讖

신라 경명왕 2년(918)에 중국 상인 왕창근이 태봉(泰封)의 왕성인 철원(鐵圓) 장터에서 산 거울속에 적힌 참문(讖文)으로 신라의 멸망과 태봉의 붕괴,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것. 거울면에 적힌 글의 내용은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리시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으리라. 사년(巳年)중에 두 용이 나타나 하나는 몸을 청목(靑木)속에 감추고, 하나는 모양을 흑금동(黑金東)에 나타냈다"였다. 왕창근이 이 거울을 궁예왕에게 바치니 궁예는 글잘하는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해석케 하였다. 송함홍 등이 글을 풀어 서로 말하기를 "궁예왕이 철원에서 일어나서 곧 멸망할 것이요, 시중(侍中) 왕건(王建)이 먼저 신라를 얻고 뒤에 압록(鴨綠)을 취하여 거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의 포악 난잡함이 두려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당하게 꾸며대었다고 한다.

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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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元

고려의 건국설화 속에 나오는 신라의 풍수가(風水家). 왕건의 선조인 강충(康忠)에게 부소산(扶蘇山)의 형세를 일러 "군치(郡治)를 산남(山南)에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산의 암석을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三韓)을 통합하는 사람이 나리라"하였다. 강충이 이 말을 따라 군명을 송악(松岳)이라 하고 스스로 상사찬(上沙粲)이 되었다고 한다.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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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誌

고대의 전설적인 도참가. 한국의 왕조변혁을 예언한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의 찬자(撰者)로 단군시대의 사람이며 세상에서 신지선인(神誌仙人)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의 구변도국설은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되어 이른바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참설을 낳아 이씨 등장 때마다 이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비사(秘詞)는 후세의 위작인 듯 싶고, 그 자신 아마도 신라말기에 출현한 술사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