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사상〔槪說〕
우리 한민족이 지금까지 생각해 온 사상의 역사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다. 신화·전설의 시대를 젖혀 놓고 확실한 기록이 전한 것만 보아도 2,500년 내지 3,000년의 역사가 있어 왔음을 자부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긴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사상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그 사상 속에 다른 민족에게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고 이 분야에 상당한 관심이 집중되어 온 지는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단계에서는 우리는 막상 한국인만이 생각한 고유 사상의 항목을 자신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국 사상에는 고유한 것이 없으니 외래 사상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안 될 말이다. 이들 양자택일적인 극단론은 모두 사상(思想)이라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즉 '사상'이란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낸 모든 것'이요, 그것은 역시 생각 혹은 사고(思考)에 의하여 산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활동은 혼자서 공상을 하거나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대상(對象) 내지 환경(環境)과의 부단한 접촉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요, 그러한 사상만이 또한 힘있는 것이다. 물론 사상의 핵심은 철학적 사유(哲學的 思惟)이지만, 사상 자체가 단순하게 그것만으로 추상(抽象)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상이란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의 결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전반에 걸쳐 서로 접촉하고 관계하는 데서 풍부한 내용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상은 그 시대나 지역에 따라 질적인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형성 과정이나 성격에 있어서는 역시 모든 사상에 공통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고대이든 현대이든 인간의 사상에는 일관된 보편성이 있으므로 거기에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원칙과 한계가 있는 법이다. 우리가 사상의 진리성을 문제삼고 서로 비교 대조하면서 핵심을 추구해 들어가는 것도 모두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상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므로 완전히 고유한 사상이나 완전한 외래 사상이란 모두 불가능하다. 사상이라면 어느 것이나 거기에는 특수성의 차이에 따른 변화와 특성이 있고, 어떤 외래 사상이라도 일단 어떤 사회에 들어오면 그 사회의 특수성에 영향받아 변용(變容)과 동화(同化)를 겪게 마련이다. 사상이 이와 같이 보편과 특수의 양면을 지닌 복합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국 사상의 고유성 문제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즉 비교적 독창성이 풍부하여 인류 문화에 크게 기여한 인도의 사상, 중국의 사상, 희랍의 사상 같은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지만 한국의 사상에도 역시 어디엔가는 독창적인 생명력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사상을 그 요소와 계보에 따라 분석해 놓고 보면 대개는 무력한 사유물의 집합이 되고 만다.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래 사상도입 이전에 이미 하늘(天)을 숭시하고, 조상을 숭배하며, 신(神)에 기도하는 원시 종교를 갖고 있었으며,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의 원시 사상에서 출발하였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발전하기도 전에 너무도 빨리 훨씬 우세한 외국 사상에 접함으로써 우리의 독창성이 시련을 겪게 되었다. 즉, 불교·유교·도교 등의 고등종교와 동양적인 봉건사회에서 형성된 봉건사상이 밀려들어옴으로써 고유한 사상 기반이 크게 위축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부터 시작된 선진사상의 유입(流入)은 그것이 토착사상을 물리치고 완전히 한국의 중심 사상으로 정착되는 데 거의 3∼4백년이나 걸렸다. 7세기경에는 이미 토착 사상을 흡수하여 새로운 차원의 종합적인 한국 사상이 형성되었고, 통일시라 시대의 한국인들은 사상사상(思想史上)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특히 가장 심오한 이론과 실천론으로 고대사상의 핵심인 불교의 경우 고승대덕(大德)이 속출했고,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전개시켜 당시 어느 나라에 못지 않은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이것은 다시 바다를 건너 미개한 일본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점차 정비되기 시작한 유교적인 봉건 제도 속에서 충성과 단합을 전제로 한 근왕사상(勤王思想), 가족제도를 기초로 한 예절(禮節)이 굳혀지더니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정주학(程朱學)의 도입으로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즉 불교가 원효(元曉)·의상(義湘)·의천(義天) 등을 통하여 민족사상 정립에 큰 기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신적인 음양도참사상(陰陽圖讖思想)과의 혼합, 귀족화한 승단사회(僧團社會)의 말폐로 인하여 비판받고 쇠미해진 대신, 동양적인 봉건사회의 이념으로서 정형화(定型化)된 유교 특히 정주학이 한국 사상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비종교적인 합리성과 현실성을 심어준 반면 봉건사회를 화석화(化石化)하여 사상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중기에 서화담(徐花潭)·이퇴계(李退溪)·이율곡(李栗谷)·정다산(丁茶山) 등의 석학(碩學)이 배출되어 이기론(理氣論)과 실학(實學) 운동에 현저한 성과를 거둔 것은 기억할 만한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서 형식주의적인 예론(禮論)과 공리공돈(空理空論)으로 전락한 성리학을 비판하고 주체적인 자기 파악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한 실학이 일어났음은 오랫동안 외래 사상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 온 우리 민족의 진지한 자기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우리에게는 깊은 반성과 자각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서세동점의 추세 속에서 서양의 이질적인 외래 사상의 홍수가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근대 과학과 자유주의의 엄호를 받은 서양 사상은 정주학뿐만 아니라 새로 일어나기 시작한 실학이나 잔명을 보전해 온 불교에까지 심한 충격을 주었다. 전에 없던 국난(國難)과 때를 같이 한 동양적인 것, 전통적인 것의 이러한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국난을 극복하려는 민족주의와 독립 정신이 크게 고양되고, 새 사상에 영향받아 근대적인 자각이 적잖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새 사상을 소화하고 옛 사상을 보전하는 일에 분망할 뿐이다. 이 단계에서 다시 한 번 새로운 차원의 한국 사상이 꽃 피었으면 하는 기대는 크지만 실현을 보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좀더 독창적이고 생명력 있는 한국 사상을 일으키려면 우리 민족 모두가 '우리것'에 대한 긍지와 신념을 좀더 확고히 하고, 추종적이거나 배타적이 아닌 주체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를 적극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만 이웃 나라를 일깨우고 세계를 포용하는 독창적인 한국 사상이 빛을 보게 될 것이다. <金 東 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