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서양의 고전극/그리스·로마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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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연극[편집]

초기 그리스 연극[편집]

初期 Greece 演劇

고대 그리스에서의 희극 및 비극 등의 기원은 기원전 2,000년에 크레타 섬이나 미케네 등을 중심으로 개화(開花)한 에게해(海) 문화의 농경제사(農耕祭祀)로 거슬러 올라간다. 봄이면 풍요를 기원하고 가을에는 결실을 감사하는 해마다의 연중행사에서 연극적인 시도가 생겨났음은 다른 모든 문화에서도 볼 수 있는 바이다. 즉, 고대의 그리스나 이탈리아에서도 자연의 영위(營爲)나 신의 배려가 자기들 인간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각지의 위정자나 농민들이 일체가 되어 제신(諸神)에게 바치는 기도·무용·설화(說話) 등이 후세에 연극을 육성시키는 모태(母胎)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리스인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가장 오랜 '오르케스타라'는 공장(工匠) 다이다로스에 의해서 아리아도네(후에 酒神 디오니소스의 아내)를 위해 크레타섬 크노소스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또한 인간의 얼굴을 본뜬 상당히 사실적인 가면(假面)은 실리만이 미케네의 왕궁 분묘에서 발굴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의 고전기(古典期) 아테네에서 완성된 희극·비극에서도 기도나 무용, 설화(說話)나 배우의 가면 사용, 또는 극장 내에서의 제단이나 극장이 자리잡은 성역(聖域) 등, 연극을 내외에서 지탱하고 있는 형식적인 여러 요소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도 매우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제사적 기원을 짐작할 수 있다.

제사에서 움튼 연극의 싹은 미케네 문명의 붕괴나 그 뒤에 엄습한 소위 암흑시대에도 여전히 생장(生長)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 후 호메로스(Homeros:고대 그리스의 敍事詩人)의 영웅 서사시가 삶에 깃들인 극적인 기복(起伏)에 표현을 주었고, 또한 각지의 서정시인들이 제사에서의 기도나 길흉의 이야기 등을 중핵(中核)으로 하여 고도로 문학적인 합창시(合唱詩)를 만들게 된 뒤부터 신이나 영웅을 본뜬 제사적인 영위도 또한 새로운 생명과 그 표현에 치중한다.

후세에 와서 비극의 발생사(發生史)를 돌아본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로부터는 1편의 비극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으며, 또한 비극은 디튀람보스(說話敍情詩)의 지휘자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이것을 바꿔 말하면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영웅 아킬레스로 하여금 집념으로 시작되고 체념으로 끝나는 비극의 내면적 구조를 분명히 하였으며, 서정시의 독창자들에서 필요한 표현형식을 개척하며, 앞으로 다가올 극작가들의 선구가 되었다고 하겠다.

초기의 극작 시도는 기원전 6세기를 통하여 코린토스, 시큐온 등 펠로폰네소스의 문화적 중심지나 남이탈리아의 시칠리아 등 각지에서 활발하였으며, 특히 아티카(Attica)의 마을 이카리아 출신의 테스피스의 이름이 아티카 비극의 시조로서 전해지고 있다. 그 활약연대는 솔론 시대(B.C. 590년경)라고도 하고, 페이시스트라투스 시대(B.C. 530년경)라고도 한다. 그리고 솔론의 시에는 후에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모랄을 형성하는 망집(妄執)과 파멸의 인과(因果)라고 일찍부터 불리고 있었다. 또한 페이시스트라투스의 시대에는 처음으로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벼랑에 극장의 초석이 깔려 있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아무튼 기원전 6세기의 연극적인 시도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중심으로 한 마을축제 여흥의 전통에 약간의 문학적·연기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으리라. 관객들이 자리잡은 좌석도 목제의 초라한 벤치로, 오래되면 부서질 염려도 있었다. 당시 여러 마을이나 주도(主都) 아테네에서 융성해진 서사시의 경연이나 여러 가지 합창시의 경연 가운데에서 대두한 비극·희극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다른 여러 장르에는 없는 휴포크리테스(俳優)의 등장이라 하겠다. 비극의 경우에는 합창대에서 천으로 만든 가면을 쓴 배우가 나타나, 이야기의 주역이 될 신이나 영웅, 미녀 또는 중대한 일을 예지(豫智)하는 사자(使者) 등의 역할을 맡으며 합창대와 대사를 주고받고는 서로 노래를 맞춰보기도 한다.

현존하는 바큐리데스의 작품 <테세우스>는 기원전 5세기 중엽의 작품으로서 테스피스 등이 연출했던 초기 극시(劇詩)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초기의 희극은 처음보다 즉흥적인 아마추어 연극의 색채가 짙었기 때문인지 배우의 수가 제한되지 않았던 모양이나 비극의 배우는 작가이기도 하고 연출가 또는 작곡가이기도 하여, 연기뿐만 아니라 독창의 기술도 갖고 있어야만 했다. 말하자면, 좌장(座長)으로서의 재능이 테스파스 등의 창시자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튼 비극배우의 출현으로 관객의 흥미가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초점을 발견한 것만은 분명하며, 또한 작가=배우의 입장에서도 이 새로운 가능성의 개발에 온갖 힘을 기울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클라이맥스를, 갈등을, 인간을 어떻게 해서 신화전설로부터 파악해 내어 재연할 수 있느냐'는 것이야말로 비극의 창시기로부터 완성기에 이르기까지의 약 1세기 간에 걸쳐 작가와 연기자가 몇 세대를 두고 직면했던 문제이다.

고전기에서의 연극과 사회[편집]

古典期-演劇-社會

처음에 말하였듯이 그리스의 연극은 그 발생에 있어서 사회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의 기원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 사회적 모태는 그 후의 연극 발달사에서 갖가지 중요한 단계에 명백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테스피스 등의 비극이나 그 무렵의 희극 발달로 당시 농민보호의 정책에 중점을 두었던 페이시스트라투스의 융합정책에 자극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다음 세대에 비극 상연이 아테네의 국가적 원조 아래 대대적으로 행하여지게 되었고, 이윽고 아이스킬로스(Aischylos) 등의 대시인들이 많이 나온 것도 기원전 508년 무렵부터 아테네의 정치적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민주정치의 기초를 닦기에 이른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인심수습을 노려 행한 문화정책의 산물이라고 해야 하겠으며, 그 후 고전기를 통한 아테네 연극은 바로 민주적 치세(治世)의 도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디오니소스(Dionysos) 신역(神域)의 아테네 국립극장에서의 상연기록은 현존하는 비문자료(碑文資料)에 의하면 기원전 501년 봄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때부터 해마다 3명의 부유한 시민이 선택되어 세 비극시인의 작품생활을 위한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으며, 기원전 486년 봄부터는 역시 5명의 시민들이 희극 상연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었다. 이 제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일부가 감축된 이외에는 거의 기원전 4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아테네에서의 희극과·비극의 상연은 또한 레나이온 극장에서도 열렸으며 여기서도 기원전 440년경부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와 거의 같은 제작제도가 민주주의 국가와 부유시민들의 협력으로 유지되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제작체제가 희극과 비극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신구(新舊) 가치의 공존과 언론의 자유를 표방하는 이 사회가 연극적 표현에서 추구한 것은 주역의 독백연기(獨白演技)가 자아내는 도취가 아니라 각각의 입장을 지킨 '주역들'의 주장이 자아내는 긴장과 해결이었다. 그리스 비극이 대시인인 아이스킬로스를 통하여 두 인간의 대화극(對話劇)으로 변용을 보인 근본적 이유를 거기에서 볼 수 있다. 이리하여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주장과 주장의 갈등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서는 다시 고차원(高次元)의 예지, 즉 신의 간섭을 기다리며 해결에 이른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 오면 두 인간이 자아낸 대립을 신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즉 제3의 배우의 등용으로써 무대 위에서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옮겨진다. 다시 말해서 소포클레스(Sophokles)에 의한 3자대화(三者對話)의 극적 완성이 그 성과인 것이다. 대화의 탄생에서 3인 대화의 완성으로 그리스 비극은 형태와 내용의 완성을 이룩하나 이 사이의 대화 기교란 놀랄만큼 정교하며, 특히 주목할 점은 치밀한 대화가 새겨내는 개개 인물의 성격 발견이라고 하겠다. 이리하여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 또는 히폴리토스 안에서도 우리는 그 인물이 아니고는 발견할 수 없는 독자적인 특성의 짜임새가 그대로 드러난 인간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이스킬로스[편집]

Aischylos (B.C. 525-B.C. 456경)

아테네 귀족으로 태어나 마라톤 회전(會戰)에 참가, 비극예술의 창조에 기본적인 형태를 부여한 80여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7편의 작품과 다수의 단편(斷片) 등이 있다. 시칠리아섬의 겔라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주요 공헌을 보면, 비극에서의 합창시의 형식이나 배열을 정비하여 극의 악곡적 구성과 극적 리듬의 통합에 성공했다는 점과, 운율적(韻律的)인 극대화(劇對話)의 기본적 격조를 낳았다는 점, 그리고 비극의 테마로서 제신(諸神)이나 기괴한 신령(神靈)에 얽힌 얘기를 즐겨 다루어, 테마에 어울리는 장대하고 화려한 연출방법을 만들어냈다는 점 등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합창대는 어떤 작품에서나, 중대한 위기나 불안에 떠는 군중으로서 극적으로 위치가 주어지고 있으며 합창가(合唱歌)는 신을 부르거나 혹은 신을 칭송한다고 하는 종래의 제사적(祭祀的)인 형태와 기능을 지니면서 동시에 극의 참가자로서의 합창대의 집단적 표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배우는 그러한 집단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그와 반대로 그 적대자(敵對者)가 되는 수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배우의 대화에서 운율형식이 일정하지 않아, 장면에 따라서는 이암보스 형식이거나 토로카이오스 형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이 작가의 실험단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극 구성의 그 자체에도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면이 은연 중에 병존한다. <페르시아인들>은 말하자면 보고극(報告劇), 즉 어느 정도 사실적(寫實的)으로 조건이 갖춰진 페르시아 왕궁이란 곳에 중대사건이 보고되고, 그 보고의 서사성(敍事性)에 극적 긴박감이 주어진다고 하는 구성과 망령극(亡靈劇), 즉 망령 출현이라는 형태로 사실성을 버리고 초시간적인 수준으로 상상력을 비약시킨다고 하는 구성이 1편 가운데에서 동시에 사용되고, 또한 마지막으로는 극이란 사건의 당사자가 패배의 슬픔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는 취향으로 끝나고 있다.

하나의 극적 사건을 몇 개의 다른 시점(視点)의 수준에서 다뤄 입체적인 깊이를 주고 각각의 시점 사이에 긴장감을 자아낸다고 하는 그리스 비극 특유의 드라마투르기는 아이스킬로스의 이와 같은 대담한 몇몇 실험이 모태가 되어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가 비극예술에 대해 품었던 원대한 포부는 3부작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드라마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시인의 의미 부여이며 또한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이상의 탐구이기도 하여, 이 시야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연속 테마에 바탕을 둔 3편의 극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구상을 훌륭히 구현시킨 <오레스테이아> 3부작 (<아가멤논>·<코에포로이>·<에우메니데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소포클레스[편집]

Sophokoles(B. C. 496-B. C. 406경)

아테네의 정치가로서도 여러 가지로 공헌이 많았는데, 특히 비극예술의 완성자로서 유명하다. 작품은 123편, 비극 경연에서의 1등 우승은 18회나 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작품이 7편이며, 그 밖에 다수의 단편(斷片)이 있다.

그가 연극에서 추구한 것은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무한무궁의 확대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에 깃들인 무한한 깊이였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세 배우를 등용시켜 동시에 대화를 갖게 함으로써 극을 진행시키는 기법을 비롯해서 소도구의 연구나 배경화(背景畵) 등을 채용했다고도 전한다.

또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극장 개축(改築)이나 관람요금의 지급 등 문화진흥정책으로 아테네의 연극 활동은 황금시대를 맞이한 것 등이라 하겠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의 특색은 장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정교치밀한 대화를 통하여 모든 인물을 대조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인간을 단순한 입장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설사 입장을 같이하는 몇 사람의 인간 사이에도 개개의 인간 안에는 제거할 수도 없고 서로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중핵적인 힘이 깃들어 있음을 객관적인 대화의 기법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 해야 할 행위에의 결의로 시작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한 영웅적 책임감으로 결정(結晶)되는 과정을 드라마라고 부른다면 ―― 그 중핵적인 힘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나타냈던 것이다.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왕>과 같은 극작이 운명극이나 성격극으로도 해석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일단은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혔던 인간이 자기의 의욕적인 성격을 일관시킴으로써 암흑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광명을 획득하는 것도 드라마의 근원을 성격 안에서 발견하고 대화의 묘로써 사건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라 하겠다.

에우리피데스[편집]

Euripides(B.C. 485-B.C.406경)

92편의 극작품을 쓰고 5회의 우승을 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작품 18편외 다수의 단편(斷片)이 있다.

인간의 고뇌에 깊은 이해와 동정을 품고 또한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악업(惡業)에 격노하며 운명이나 신의 뜻에 따르기보다 인간의 주지적(主知的) 합리성으로 이 세상의 복잡미묘함을 폭로하려는 에우리피데스는 근본적으로 '비극'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평해진다. 그러나 그런대로 아테네 연극계에서 총아(寵兒)로 등장해 멀리 그리스 세계의 곳곳에까지 그 작품이 번져나간 것은 오로지 그의 교묘한 작극술(作劇術)과 그것으로 묘사되는 극히 일반적인 인간의 비애가 강력한 설득력으로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연출기법에서는 소포클레스와 달리 별다른 신기축(新機軸)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또한 소포클레스의 정묘한 작품구조의 균형과 박진감에 비하면 에우리피데스의 여러 작품에서는 야릇한 현실성 내지는 사실성(寫實性)의 무시와 강렬한 리얼리즘이 등을 맞대고 있어 독자나 관객을 불안한 긴장으로 감싸버린다. 허구(虛構)다운 프롤로그에 역시 허구다운 신이 등장하는가 하면, 연애·질투·복수·간계·광기·비애와 같이 순수하고 인간적인 표정으로 감싸버린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있을 수 없는 장면에서 있을 수 없는 논쟁이나 비판이 사건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보는 자와 보이고 있는 자와의 사이에 의식의 벽을 만드는 듯하나, 다시 격정으로 넘쳐흐르는 사건이 그 벽을 잊게 해버린다. <메데이아>이건, <히폴리토스>이건, 또는 <엘렉트라>나 <이피게네이아> <바카이> 등의 여러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격정적인 사건과 의식의 벽이 서로 부딪치는 충돌로 들볶여, 마지막엔 고즙(苦汁)처럼 남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비애와 제신에 대한 분노이다. 이러한 작품의 상연은 작가 스스로 만든 것 이외에는 몹시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대사(臺辭)의 간명함과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후세에 많은 독자를 매혹시키고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가장 비극적인 시인'이라고까지 평하게 한 까닭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 희극[편집]

Greece喜劇

이와 같은 비극의 기술적·내용적인 전개는 한편에 있어서 다른 희극으로부터 시사를 얻은 바도 컸다. 희극의 국영조직(國營組織)은 비극의 경우보다 새로우나, 언론의 자유는 본래 희극의 본바탕이며, 비평·야유·조소를 자유분방하게 쏟아놓는 것은 자연스런 대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기교로서 발달했다. 또한 희극작가들은 고상한 체하는 비극을 그것에 어울리는 냉소의 대상으로 선택해 놓았으므로, 비극의 편에서도 직접·간접으로 희극작가들로부터 큰 자극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제로 희극작가들이 최고의 비극 전문가였음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테스모포리아의 여자들>이나 <개구리>가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후일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비극은 모두가 모방의 예술이다. 비극은 보다 위대한 인간을, 희극은 보다 비천한 인간을 각각의 모방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 두 장르의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보다 위대하다는 것과 보다 비천하다는 것을 구조적으로 검토하면, 비극에서의 위대함이란 인간을 위에서 억누르는 훨씬 강대한 힘에 대항하여 ―― 신이건 운명이건, 혹은 에우리피데스에서처럼 정체불명의 비합리성이건 ―― 사투(死鬪)를 계속하는 모습으로 그 결론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희극에서의 비천함이란 인간을 아래에서 지탱하는 강대한 힘 ―― 성욕·식욕·금전욕·명예욕·권력욕, 그 밖의 갖가지 생명욕 ――을 의지삼아 자기 분수를 모르는 소망에 애태운다는 점에 바로 비천함의 본바탕이 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이건 정치적 권력의 획득을 위해서이건, 또는 빚을 갚지 않기 위해서이건 인질(人質)을 빼앗기 위해서이건 엉터리 목적의 성취를 위해 기상천외의 수단을 부리는 인간들을 등장시킨다. 그 사이에는 시사문제나 문예·풍속에 대한 풍자도 왕성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요컨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무한히 부풀게 하는 생명력의 희화화(戱畵化)이며, 그 늠름한 힘을 웃음으로써 찬미한다는 점에 희극의 본바탕이 있다고 하겠다.

아리스토파네스[편집]

Aristophanes(B.C 454-B.C 375경)다른 고대 희극시 작가의 작품은 거의 인멸되고 인용 단편(引用斷片)이 전해질 뿐이나, 아리스토파네스만이 예외적으로 11편의 작품과 다수의 단편이 현존한다.

희극 연출의 방법은 당시의 병화(甁畵) 등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에 의하면, 참으로 외설스러운 듯한 모양으로 대사에 넘쳐흐르는 식욕·성욕·금전욕 등에 대한 번뇌에서 볼 수 있는 노골적인 표현을 그대로 시각적으로 호소하는 듯한 가면의상(假面衣裳)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점에 다른 작가와 아리스토파네스와의 사이에 큰 차가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비극과는 달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의 구성은 기발하고 풍자적인 에피소드를 대충 이어 맞춰놓은 것이 많아 극으로서의 각 부의 유기적 통일성의 결여, 나아가서는 이른바 희극적 성격의 불안전한 파악이라고 하는 결점 또한 다른 희극작가와 공통되는 점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희극작품 안에 일관된 극행동을 채택하고, 통쾌한 웃음을 섞으면서도 그 극행동에 자기의 주장을 곁들였던 것이다. <아카르나이의 사람들> <평화> <류시트트라테> 등의 작품에서 각 주인공의 수단은 참으로 엉뚱하고 기발한 것이나 각자가 평화를 획득하려는 행동을 일관함으로써 무수한 에피소드에 일단 매듭을 짓고 있다. <새>와 같은 공상극, <테스모포리아의 여자들>과 같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모호하게 하기 위한 작품, <구름>과 같이 유원(幽遠)한 교육이념과 현실과의 차질을 테마로 하는 것 등, 대체로 성실한 목적 따위는 있을턱도 없는 정황(情況) 아래 터무니없는 목적을 그럴 듯하게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매우 과장된 온갖 수단을 극에서 연출한다. 이 희극 작극술(作劇術)은 다분히 아리스토파네스의 독창성에서 그 영향을 받은 바가 많다고 하겠다. 또한 이와 같은 작극술을 자유분방하게 구사하여 그때 그때의 정치·사회·문예 등 각 문제의 본질에까지 육박, 희극의 웃음으로써 비판하고 지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연극 연구의 기원[편집]

演劇硏究-起原

높은 것을 낮은 곳으로, 낮은 것을 높은 곳으로 이끄는 두 개의 사회적인 힘의 교착(交錯)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처럼 급속한 민주화의 물결을 탄 폴리스 사회의 특색이기도 하며, 비극·희극은 그 움직임을 예민하게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반대로 그 사회적 조류가 정체(停滯)했을 때에는 연극 또한 그때까지의 활기를 현저하게 상실한다. 기원 전 404년 아테네의 항복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아테네의 연극계에서는 두드러진 시인도 나타나지 않고, 또 옛날의 부유한 시인들도 빈곤해져 연극 보호자들로서의 봉사도 곤란해졌을 뿐 아니라, 희극작가들도 시사(時事) 정치 문제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게 된다. 기원전 4세기에 들어와서도 해마다의 상연은 계속되었으나 레퍼토리로는 구시대(舊時代) 대시인의 명작 등을 부활·상연했으며, 또한 배우의 수 등도 격감한 모양으로 한때는 겨우 세 사람이 교대로 각 작품의 역할을 맡았던 상황이 상연기록에 적혀 있다. 이윽고 연극상연이 옛날보다 더욱 왕성해진 뒤에도 작품이나 작가들보다는 배우의 연기가 관객의 흥미를 끌게 된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연기하는 배우가 뼈 상자에 자기의 죽은 아들의 재를 넣어 오레스테스를 슬퍼하는 장면에서 실감나는 연기를 보였다는 점 등은 이야기의 진위(眞僞)보다도 배우 중심이었던 당시의 풍속세태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오늘날에 전해지는 에우리피데스의 시작(詩作) 가운데 배우의 대사 삽입이 자주 있었던 것도 역시 4세기경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4세기 후반의 정치가 뤼쿠르고스는 3대 비극 시인의 작품이 멋대로 개작(改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배우는 국가의 문서고(文書庫)가 보존하는 오리지널에 의존해야 함을 제정한 바 있다. 후에 이 오리지널이 알렉산드리아 학부(學府)로 넘어가 교정을 본 다음 비잔틴 시대에 몇 번인가 다시 개작과 사본을 한 뒤 그 가운데의 몇 부가 르네상스기(期)의 이탈리아까지 유포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또한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비극·희극의 역사나 그 발생·발전의 인식에 의거한 연극구조의 연구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와 그 제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몇 번인가 언급했던 아테네 국립극장 상연기록이라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편찬한 자료를 모태(母胎)로 했으며, 또한 그 자료에 의거하여 그의 <시학(詩學)>이 저술되었던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당시 수백편이나 남아 있던 비극·희극의 여러 작품을 정리하여 후세의 연극연구에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신희극[편집]

新喜劇

그러나 아테네 연극의 전통은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만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르러 마지막 창조의 빛을 발했다. 기원전 330년경부터 대두한 신희극과 그 대표적 작가 메난드로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지난날의 비극에서 거친 신화를 통해 사람을 위협한 신의 모습은 없고, 또한 외설스런 의상을 두른 아리스토파네스의 기상천외한 웃음도 없다. 그리고 시민 전체의 소리라고도 할 수 있는 합창가도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대신 시정(市井)의 일반 사람들이 갖가지 성격으로 말미암아 생활 속에서 자아내는 인간과 인간의 드라마의 예술적 표현을 보게 된다. 주로 연애가 극적 사건의 계기가 되고 기구한 운명이 사건을 진행시키는 실마리가 되어, 있는 그대로의 약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인간의 모습이 사실적이고 따뜻한 입김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섬세한 뉘앙스의 남녀는 얼핏 기원전 5세기의 희극과 비극의 웅대한 인물상에 비해 위축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렉산더 대왕 때문에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그리스 소도시의 표정을 그대로 전한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이윽고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서방 이탈리아에서 연극의 신풍을 일으킨 플라우투스나 그의 후계자 테렌티우스가 연극작품의 모범으로 삼은 것은 메난드로스를 비롯한 신희극의 여러 작품이며, 그들의 라틴어로 된 작극(作劇)의 시도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거니와 신희극의 번역과 번안(飜案)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테네 연극의 창조가 된 드라마 투르기의 기본을 고대 민주주의 폴리스의 테두리 안에서 끌어내어, 보편적인 예술표현 형식으로 서방세계에 전하는 것에 성공한 것은 폴라우투스 등의 공적인 동시에 그 모범이 되었던 메난드로스등의 공적이기도 하며, 또한 메난드로스와의 비교를 통해 그보다도 이전의 희극과 비극의 여러 작품이 널리 로마의 문인(文人)들에게 전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메난드로스[편집]

Menandros(B.C. 342-B.C. 291경)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의 극구조는 플라우투스나 테렌티우스의 번안극에서 유추(類推)되는 것에 불과했으나, 이집트 바룰의 파피루스에서 <조정재판(調停裁判)> 등 몇몇의 상당히 긴 단편(斷片)이 발견되고, 또한 최근에 와서는 <옹고집>의 완전한 책이 발견·간행됨으로써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특색이 분명해졌다. 그의 등장 이전부터 아테네에서는 구시대의 희극과 비극을 대신하여 중류의 부유시민들에게서 취재한 기아(棄兒)·연애·결혼 등의 테마에 순진스런 젊은이, 완고한 노인, 교활한 노예, 인색한 사람, 병사(兵士)들, 아름다운 고아 등 몇 가지 형태의 인간을 배열시켜 연극을 구성하는 시도가 많이 있었으나(이를 中喜劇이라고 부른다), 메난드로스는 이를 다시 고도로 세련화시켜 극중인물에 어울리는 대사를 창작함으로써 단순한 타입이 되지 않는, 개개 인물의 마음과 말의 뉘앙스를 교묘하게 포착했다. 그리고 배우의 의상도 구(舊)희극과 같은 파로스를 입은 외설스러움으로 신을 찬미하는 것과 같은 풍조는 물러가고 일반시민이 입는 긴 옷으로 바뀌었다. 또한 가면도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하여 제신(諸神)이나 영웅보다도 오히려 일반 시민의 여러 형태를 대표하기에 적합한 것이 만들어졌던 모양으로, 폴리듀크스의 <가면보(假面譜)>에 열기되어 있는 여러 가면은 메난드로스의 배우들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로마의 연극[편집]

그리스 식민지 연극의 영향[편집]

Greece 植民地演劇-影響플라우투스들이 로마 국문학을 독자적인 높이로 승화시키기 수 백년 이전부터 이탈리아 반도의 남북에서는 갖가지 소박한 초기 연극적인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아테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시칠리아의 각 도시에서 비극을 상연하고 자기 자신도 시칠리아의 겔라에서 사망했다. 그 후 다시 에우리피데스의 각 작품은 특히 환영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라쿠사의 독재자 디오니소스에 이르러서는 스스로가 비극의 창작에 열중했다고 하며,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 비극의 현저한 유행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남이탈리아 곳곳에서의 독자적인 연극활동은 주로 희극 창작과 상연에로 기울어졌다. '즐거운 비극(Hilarotragodia)'이라 불렸던 이 희극은 오래 전부터 남이탈리아에 식민(植民)한 펠로폰네소스의 주민들이 이 땅에 가져왔던 모양으로, 주로 서사시나 전설의 영웅·미녀를 황당무계한 상황에 두고, 여러 모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연기를 하게 한다는 취향의 것이다. 기원전 300년경 시라쿠사의 시인 린턴이 이를 문학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하나 작품은 완전히 없어져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시칠리아나 남이탈리아의 각지에서 사 온 항아리 등에는 장식으로서 이런 종류의 연극에 나오는 각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그래서 그 당시의 왕성한 유행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대식한(大食漢) 헤라클레스, 간계(奸計)의 오디세우스, 인간 이하로 그 품성이 저열한 제신들의 각 테마와 어느 극에서나 등장하는 기본적인 3-4개의 타입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윽고 '아테라나 극'의 이름으로 로마에 전해지는 연극의 원형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또 플라우투스가 <암피트루오>에서 사용했던 정경설정(情景設定) 등도 예로부터 이 '즐거운 비극'의 테마로서 즐겨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한편 시정(市井)의 갈등을 다룬 극도 있고,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메르카토르>, <아시나리아> 등에서 볼 수 있는 한 여자를 둘러싼 부자간의 싸움이나, <아우룰라리아>의 도둑 소동 등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정경도 묘사되고 있다.

이 소란스러운 연극은 이윽고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사람들로부터 캄파니아 지방의 오스크인 사이에 번지며 변형한다. 브코, 막스, 도세누스, 팝스의 네 가지 기본적 희극인물의 타입으로 설정되고 '아테라나 극(劇)'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보급된다.

한두 개의 병화(甁畵)에 의하면, 이에 이르러 구(舊)희극과 다분히 공통되고 있던 노골적인 희극의상은 개정되고 파로스는 없어졌으며, 노예 등 하층인물의 의상도 그때까지의 것보다 약간 긴 것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순회 배우의 일단(一團)이 보급시키는 종류의 연극으로서, 극장의 양식도 간단하게 조립할 수 있는 목조무대(木造舞臺)가 사용되고, 거리의 광장이나 혹은 기성 경기장의 오케스트라에 즉석무대가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에트루리아 연극의 영향[편집]

Etruria演劇-影響

에트루리아인(人)의 문화는 초기 로마인의 종교를 비롯하여 정신생활의 각 분야에서 큰 영향을 주었으며, 처음으로 에트루리아의 예능인들이 로마를 찾아온 것은 기원전 364년이었다. 라틴어의 히스트리오(俳優)는 에트루리아어(語)의 히스테르(댄서)에서, 그리고 페르소나(연기자 내지는 가면)는 가면을 쓴 에트루리아의 댄서 페르스에서 유래된다. 이러한 음악·춤·노래는 로마 공화국 초기의 농민들 사이에서 많이 불렸던 이른바 파스켄니시(詩) 등과 혼합되어 사투라(混合詩)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앞서 말한 남이탈리아에서의 희극이 오스크인(人)을 통해 로마에도 보급되고, 로마인의 취향을 유발시켜 로마 연극이 대두하는 직접·간접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공화제 시대의 로마연극[편집]

共和制時代-Roma演劇

로마에서의 연극창작의 움직임은 기원전 3세기 후반인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의 그리스극 번역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240년부터 207년에 걸쳐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잇따라 라틴어로 번역·상연했으며, 이와 함께 남이탈리아의 희극 테마를 개량한 2-3개의 작품도 상연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작품의 대부분은 등장인물이 그리스인이며 의상 또한 그리스풍이기 때문에 '그리스 옷차림의 연극(Fabula palliata)'이라고 불리었으나, 결국 이와 병존하여 <로몰로스> 등 로마 고유의 영웅 소설을 테마로 한 극작이 나에비우스에 의해 저술되었으며, 로마 귀족의 의상을 사용한 때문에 파불라 프라에텍스타타(Fabula Praetextata)라 불리고, 또 로마의 시민생활을 모방한 희극도 등장인물이 로마인의 토가를 착용했기 때문에 파불라토가타(Fabula Togata)라는 이름으로 구별짓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모두 상실되고 겨우 전해지는 극작품의 제명이나 인용단편, 또한 당시의 도제(陶製) 인형배우 등에서 편린(片鱗)을 엿볼 수 있음에 불과하다.

공화제 시기의 로마에서는 연극은 1년 중 일정한 국가의 축제일에 안찰관(按察官)의 감독하에 개최되었으나 차차 그 빈도가 늘어만 갔다. 가장 오래되고 성대한 '로마인의 축제', 기원전 220년부터의 '민중의 축제', 기원전 212년부터의 '아폴로 축제', 기원전 194년의 '큐베레 축제' 등 해를 거듭하면서 연극제의 수는 늘어가고, 기원전 200년경에는 1년에 10여 일밖에 연극이 상연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치세하에선 국가가 지정한 상연일이 40여 일이나 되어 있었다. 또한 그 밖의 정례·개선 등이 있을 때마다 특별 상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플라우투스[편집]

Titus Maccius Plautus (B.C. 254-B.C. 184경)

북이탈리아의 움브리아에서 태어나 배우로서 활약하는 한편 130편의 희극을 창작, 그 가운데 문학자 와로가 선정한 21편이 후세에 전해졌다. 역(役)은 메난드로스, 필레몬, 디피로스 등 신희극(新喜劇) 작가의 작품을 번안한 것이었으나, 결코 모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개안(改案)하여, 새로운 장면이나 정황(情況)을 만들어내는 재능에 있어서는 감히 따를 사람이 없었다. 남이탈리아의 희극에서 힌트를 얻어 신희극을 개작하거나 '아테라나극'의 진부한 역할에 신선한 웃음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와 같은 줄거리나 역할은 어느 정도 종래의 것에 의존하고 있으나 플라우투스가 대사에서 구사하는 라틴어는 그 자신이 자랑하고 있듯이 그의 독창이며, 오랜 라틴어 고유의 자연스런 리듬이나 액센트를 그르침이 없이 자유롭게 살리면서 강렬한 운문(韻文)을 만들어낸다. 또 그와 같은 언어의 음악이 노래가 되고 기악(器樂)과 혼합하는 곳에 극으로서의 팽창을 볼 수 있다. 그리스 극과 같은 합창대는 없어도 극의 요소마다 수많은 여러 가지 율형(律形)의 노래가 삽입되어 있어 이탈리아 고유의 음악과 언어가 매우 효과적인 구실을 한다. 플라우투스의 극작에는 메난드로스와 같은 난숙기의 섬세성은 결여되어 있으나 신희극과 남이탈리아의 희극적 요소, 그리고 옛 에트루리아를 거쳐 이탈리아의 제사(祭祀)로 융합한 음악적 요소가 작자의 창조력과 활발한 재기(才氣)로써 힘찬 희극예술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테렌티우스[편집]

Publius Terentius After(B.C. 195-B.C. 159)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노예로 로마에 왔으며 일찍부터 시재(詩在)를 인정받아 자유를 부여받았으며, 희극의 창작으로 이름을 떨쳐 기원전 166년부터 160년까지 상연된 작품 6편의 전부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는 또한 아테네의 신희극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메난드로스의 작풍(作風)에 심취, 이를 모방하여 마침내는 '반(半)메난드로스'라고 불릴 만큼 글귀의 세련, 교묘한 심리묘사, 등장인물에 똑같이 침투하고 있는 깊고 따스한 인간성의 이해 등을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줄거리의 구성에서는 약간의 개작·변화나 타작(他作)의 모티브를 전용(轉用)·융합시키는 점이 없지 않았으나, 플라우투스가 곧잘 일반 대중의 마음속에서 웃음을 파악해내는 것에 비하여, 테렌티우스의 작품은 우아하고 너무나 문예적이었으므로 일반 관객의 박수를 크게 받은 일은 비교적 드물었던 모양이다.

로마의 비극[편집]

Roma-悲劇

신희극이 착실하게 로마의 관객을 매혹시키고 있을 무렵에 아테네의 3대 비극작가의 여러 작품도 엔니우스(Ennius, B.C. 239-B.C.169), 파쿠비우스(Pac­uvius, B.C. 220-B.C. 130경), 아키우스(Accius, B.C.170-B.C.86경) 등의 손으로 라틴어로 개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극작가들의 작품은 거의 전부 없어져버려 겨우 작품의 이름과 인용에 의한 단편(斷片)만이 전해질 뿐이나 에우리피데스의 여러 작품을 모방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의 원작과 비교하면 약간의 단편에서이긴 하나 과장되고 수사적(修辭的)인 대사가 두드러지며 또한 그들이 즐겨 사용한 테마는 걸핏하면 피비린내나는 자극적인 제재(題材)가 많았던 모양이다. 뒤에 호라티우스는 비극작가 지망자들을 훈계하면서 그리스의 대시인들이 말하고자 한 바를 잘 배우고 절도와 균형이 잡힌 작품을 쓰도록 타이른 바 있으나 그 충고도 헛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번역 시구(詩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그로테스크한 과장은 당시의 조각이나 벽화에 그려진 비극가면이나 배우의 의상에서도 볼 수 있다. 거대한 눈과 입, 높다랗게 맨 머리, 그것에 어울리도록 큼직한 패드를 넣은 의상, 그리고 키를 돋보이게 한 굽이 높은 신발 등은 이 시대에 와서 최고도로 발전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의상을 걸친 배우가 그 수사적인 대사를 낭랑하게 읊을 때 얼마나 장중한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었는지 혹은 생기를 잃은 둔중한 중압감으로 시종(始終)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분명치 않으나, 로마의 관객은 이보다 오히려 가면이 없는 촌극(寸劇)이나 무용 내지는 곡예 등을 환영했던 모양이다.

그 동안에 또한 극장 그 자체의 구조도 그리스의 고전기(古典期) 내지 헬레니즘의 양식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남이탈리아의 구(舊) 그리스 식민 도시에서는 옛시대의 극장이 희극을 상연했으나 로마에서는 아직도 상설적인 극장이 없었으며, 경기장이나 거리의 광장에 가설무대를 설치하여 관객을 모으고 있었다. 이윽고 공화제 말기가 됨에 따라 그리스풍(風) 극장의 바탕 위에 로마 고유의 조건에 적합한 것을 만들어 냈다. 두세 개의 중요한 변경을 든다면 완전한 원(圓)이었던 오케스트라는 반원(半圓)이 되고,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한 건조물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후자의 무대는 그 면적이 넓어지는 한편 일찍이 합창대가 차지했던 오케스트라는 근세의 오페라 극장과 마찬가지로 귀빈석으로 변해버렸다. 무대의 배경은 실내의 벽면처럼 반주(半柱)나 그림·조각으로 장식되고, 호화로운 장식적 분위기를 지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구릉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설치하는 것이 상례였으며, 극장은 성역화(聖域化)되었으나 로마에서는 평지에 지은 콜로세움상(狀)의 것이 많고, 그 외면은 주열(柱列)이나 조각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고, 내부의 좌석도 신분이나 계급의 상하에 따라 엄연히 구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고도의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었던 극장은 로마에서는 모든 것을 구경시켜 주는 관람장이며 문예작품의 상연은 그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네카[편집]

Lucius Annaeus Seneca(B.C.5-65)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 많은 저술과 서간(書簡)이 전해지는 가운데 9편의 비극이 있으며, 이것들이 현존하는 로마 작품의 전부이다. <헤라클레스> <트로이아의 여인들> <메데이아> <히폴리토스> 등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과 <오이디푸스> <오이타의 헤라클레스>와 같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 그리고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의 라틴어극(劇)도 있으며, 그 밖의 2편도 그리스 비극의 테마를 편성하여 만들어져 있다. 모두가 극심한 수사적 과장이나 묘사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며, 그와 반대로 등장인물의 성격표현이나 심리적 일관성이 빈약하므로, 과연 극장에서의 상연을 의도해서 만들어졌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폼페이의 벽화 등에서 엿볼 수 있는 당시의 호화로운 극장의 묘사적 분위기와 합치하는 점도 있고, 혹은 세네카의 수사적 기교가 가득찬 대사 등이 그 당시의 취향에 부응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